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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대동서(大同書)(강유위 지음, 이성애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중국의 이상사회론을 제시한 청대 최고의 정치사상서. 전제군주제의 청나라에서 근대국가인 중화민국으로 거듭나는 거대한 변혁기를 통과한 강유위의 사상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 강유위는 1898년 청나라 덕종, 즉 광서제에 의해 변법자강책이 받아들여지자 국회를 열고 헌법을 만드는 등 일대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강유위의 개혁정책은 국민들과의 유대를 맺는 데 실패하고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세력에 밀려 백일천하로 끝났다.3만원.●거짓말에 관한 작은 역사(마리아 베테티니 지음, 장충섭 옮김, 가람기획 펴냄)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종 거짓말을 칭송했다. 플라톤은 거짓말하는 기술을 가리켜 “영리한 사람들의 능력”이라고 했다. 플라톤은 정직하면서 순진한 사람보다 거짓말을 하면서 영리한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 에라스무스는 진실성을 바보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했고, 마키아벨리는 거짓말을 군주의 통치기술로 평가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사람들이 거짓말을 위해 사용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1만원.●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한영우 지음, 열화당·효형출판 펴냄) 우리는 흔히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을 꼽지만 정작 국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장소는 동궐(東闕), 즉 창덕궁과 창경궁이다. 경복궁이 정궁이긴 했지만,‘왕자의 난’이 일어난 비극의 무대였기에 후대 왕들은 그곳을 기피했다. 북쪽의 백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에 노출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과 창경궁은 깊은 숲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후원이 있어 왕족의 집으로 한층 사랑받았다. 역사의 빛과 어둠을 아울러 간직하고 있는 동궐 기행서.1만 8000원.●측천무후(도야마 군지 지음, 박정임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이자 당(唐)을 대신해 자신의 제국인 주(周)를 창건한 여성, 미소년들을 남자 후궁으로 거느린 믿기지 않는 정력의 소유자,1300년간 악녀로 낙인찍혔지만 근세 들어 여걸로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이러한 측천무후는 사후에 당 고종의 황후로 취급됐을 뿐 주나라 황제였다는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녀가 번영의 제국을 건설한 ‘측천황제’임을 분명히 한다. 유교적인 남성 역사가들이 측천의 주나라를 역사에서 삭제했다고 주장.9900원.●심판대의 다윈:지적 설계 논쟁(필립 존슨 지음, 이승엽 등 옮김, 까치 펴냄)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은 복잡다단한 우주와 생명체를 진화론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만큼 어떤 지적 존재가 개입돼 있다는 이론.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진화론의 대안이론이라 할 지적 설계론은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자연선택과 대진화는 증거에 의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자연주의 철학에 근거한 형이상학적 논리라고 비판한다. 다윈주의에 대한 최고의 비평서로 꼽히는 책.1만 5000원.
  • [종교·문화재플러스] 29일부터 ‘추사글씨 귀향전’

    과천시와 경기문화재단은 29일부터 11월7일까지 과천시민회관 전시실에서 추사 김정희 연구의 선구자인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쓰카시(1879∼1948)의 아들이 지난 2월 기증한 추사 자료의 첫 전시회 ‘추사글씨 귀향전’을 개최한다.‘두 아우에게’ 등 추사 친필 26건과 청나라 학자들과 주고받은 글·그림 등 100여점이 전시된다.(02)500-1343
  • [이용원 칼럼] 중국 正史에 고구려는 외국이었다

    [이용원 칼럼] 중국 正史에 고구려는 외국이었다

    중국이 2년 전의 ‘약속’을 깨고 동북공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사실이 최근 밝혀져 국내 여론이 또다시 들끓고 있다. 한·중 양국은 2004년 8월24일 외교부 차관급 인사를 대표로 해 ‘5대 양해 사항’을 구두 합의한 바 있다.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간 주요 현안으로 대두된 사실을 중국 정부가 유념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정치문제화를 방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확인된 것처럼 중국은 동북공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내세우는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사 가운데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의 역사는 중국의 변방사이며, 중국이 한때나마 통치한 지역은 한강 이북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내포한 ‘음모’는 명확하다. 만주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 땅이니 넘보지 말라는 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현재 북한 영역인 한강 이북 지역에 대해서도 연고권을 내세우겠다는 뜻이다. 중국 측의 이같은 주장에 대응하느라 국내 학계는 갖가지 이론을 들이대며 반박하지만, 그 헛된 논리를 깨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국이 자랑하는 역대 사서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부여·발해 등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외국임을 인정한 사실이 정확히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한 이래 역사 기록을 대단히 중시해왔다. 그래서 기존 왕조가 망해 새 왕조가 들어서면 국가사업으로서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했다. 예컨대 유비·조조·손권이 다투던 삼국시대가 진(晉)의 통일로 막을 내리면 진나라에서 ‘삼국지(三國志)’를 편찬하는 식이다. 그 결과 ‘사기(史記)’에서 ‘명사(明史)’에 이르는 25사(史)가 현재 정사(正史)로 남아 있다(청나라 역사인 ‘청사고(淸史稿)’를 더해 26사라고도 한다). 이25사 가운데 처음 고구려를 다룬 사서는 ‘후한서’로,‘동이열전’에 부여·한(삼한)·왜(일본) 등과 나란히 올려놓았다. 그 기록은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으며, 남쪽으로 조선 및 예맥과 접하고 동쪽으로 옥저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해 있다.’라고 시작한다. 중국 땅 요동을 기점으로 거리를 산출한 ‘딴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마지막 정사인 ‘원사’에도 ‘열전 외이(外夷)’편에 일본·유구(오키나와)등과 함께 나온다. 고구려는 25사 중에서 17가지 사서에 기록돼 있는데, 모두 ‘동이’ ‘이역’ ‘외국’ ‘외기’ ‘외이’ 등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 한결같이 중국 본토가 아닌 주변국, 즉 외국이라는 의미이다. 고구려와 동시대를 산 중국인에서 그 후예에 이르는 2000년 세월 가까이 중국인에게 고구려는 당연히 외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중국인들이 새삼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라고 우기는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역사 연구에 금과옥조로 여기는 25사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이 ‘동이’ ‘외국’ 등으로 분류한 나라들의 역사 또한 자국사의 일부라고 강변한다면 이는 더욱 못난 짓이 된다. 그 논리대로라면, 고구려와 늘 함께 등장하는 일본에 대해서도 중국의 변방이라고 주장해야 일관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에 우리가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분개할 필요는 없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스스로 우리 역사를 알고 사랑하려는 노력이다.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시짱박물관 곳곳 ‘서남공정’ 흔적

    시짱박물관 곳곳 ‘서남공정’ 흔적

    “역사는 우리를 맞으며 달려오고, 우리는 역사를 향해 달려간다(歷史迎我們走來 我們向歷史走去).” 라싸 시내 시짱 박물관의 머리말(前言)은 ‘역사가 현실을 위해 복무(服務)하는’ 중국식 역사 해석의 전형을 드러내고 있다. 박물관은 역사와 유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설명에 주력하는 인상이 짙다. 전시실 앞에 내걸린 서문(序文)의 상당수는 ‘중앙과 지방정부간의 관계는’이라고 시작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 특산품 옥(玉)에 대해 “중화민족은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옥(玉)을 숭상해 왔다. 원(元)·명(明)·청(淸)나라 시기 티베트와 조국(祖國) 내지(內地)의 관계가 발전 단계에 진입, 티베트는 많은 양의 옥을 조공으로 바쳤다.” 도자기 전시실에는 “티베트가 옥을 조공으로 바친 데 대해 중앙 정부는 도자기 제품을 하사했다.”고 표현했다. 이미 8세기에 의학사전을 펴낼 만큼 발달한 티베트 의학에 대해서는 “중국 의학의 보고(寶庫)로서 진주처럼 빛나는 2000년 역사의 티베트 의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박물관 개괄은 “원·명·청나라와 중화민국의 중앙 정부가 하사한 것과 시짱 지방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티베트족 유물 등 4만여점이 보관돼 있다.”고 적고 있다.“중공중앙(中共中央)과 국무원, 자치구 인민정부의 정확한 영도 아래 티베트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이뤄냈다.”는 대목도 나온다. 통일국가 형성 이후 양자의 역사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7세기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룬 송첸감포 왕에게 당(唐) 태종(太宗)이 문성공주를 시집보낸 사실을 소개한 뒤,“정치 관계의 발전에 따라 경제·문화 교류가 강화됐고 이로써 통일국가 형성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내용의 서남공정 관련 자료와 연구 결과는 ‘시짱자치구 당안관(案館·문서보관국)’에 집대성돼 있다. 중국의 원·명·청나라가 시짱에 관리를 파견했다거나 달라이라마를 승인했다는 등의 문서와 인장 등도 포함돼 있다. 당안관의 기록 진열실 입구의 서문에는 “시짱은 중국의 불가분한 영토의 일부이며 이를 주제로 한 귀중한 자료들이 이곳에 보관돼 있다.”고 적혀 있다. jj@seoul.co.kr
  • [씨줄날줄] ‘淸나라 시조’/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중국이 고구려사는 물론 고조선·발해의 역사까지도 자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음모를 봉쇄하려면, 우리가 오히려 중국 금(金)·청(淸)나라의 역사를 한국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며칠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라는 세미나에서다. 우리 민족의 범위를 넓게 보아 금·청은 물론 원(元)·요(遼)나라 역사도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 주장은 진즉부터 있어 왔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주장이 그동안에는 재야사학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주류 학계 일각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금·청을 한국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 금나라 황실의 뿌리가 신라 왕족에서 나왔으며, 그 뿌리의식은 금을 이은 청나라까지 지속됐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송사’ ‘금사’ ‘만주원류고’등 중국 사서 일부에는 금 태조 아골타의 8대조가 신라 왕족 김함보(또는 김준)라거나,‘국호를 신라왕의 성씨에 따라 금(金)으로 지었다.’라는 대목들이 나온다. 이와 함께 청나라 황실의 성(姓)인 ‘애신각라(愛新覺羅)’를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라고 해석해 그들 스스로 신라의 후손임을 자부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금·청은 신라계가 만주에 세운 또 다른 국가이므로 금·청의 역사는 곧 한국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학설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찮다. 김함보에 관한 기록이 너무 단편적인 데다 사서마다 차이가 있어 그가 신라인인지, 고려인인지 또 왕족 출신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우선 지적된다. 아울러 ‘애신각라’에 대해서도, 만주어 아이신(황금)과 자오뤄(겨레)를 합한 단어를 한자 음을 빌려 표기한 것일 뿐 신라 사랑과는 하등 관련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금·청의 황실이 가령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 한들 금·청의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반대론자들은 결론짓는다. 금·청의 역사를 한민족사에 편입하자는 주장은 듣기에 좋을지 몰라도 스스로 함정을 품고 있다. 정교한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고구려사를 제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어거지나 다를 바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말을 꺼낸 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반했어요, 원자바오”

    더 타임스, 로이터, 헬싱키타임스 등 서방 언론이 중국의 ‘독서광’ 총리에게 반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6일 동서고금의 고전을 인용하며 정치 철학을 설파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엘리트 정치인의 진면목을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서방 기자들과의 만남은 원 총리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기 전날 중국 중난하이에서 이뤄졌다. 북핵과 이란핵, 위안화, 지적재산권 등국제 정치와 경제를 넘나드는 외신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원 총리는 시종 물 흐르듯 막힘없는 달변을 과시했다. 외신들은 그가 중국 정치와 경제, 사회발전, 유럽과의 관계 등에 대해 풍부한 학식을 바탕으로 ‘명강의’를 했다고 평가했다. 원 총리의 해박한 지식은 더 타임스 기자의 질문에서 절정을 이뤘다.“어젯밤 읽은 책이 무엇이며 잠을 못이루게 하는 고민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원 총리는 “내가 좋아하는 국내외 작품을 인용해 대답하고 싶다.”고 고전을 소개했다. “반마지기 땅도 가지지 못했지만 마음속에는 천하를 걱정한다(身無半苗,心優天下)”는 청나라 재상 주어중탕의 시구를, 독일의 근대 관념론의 선구자 임마누엘 칸트도 인용했다.“늘 존경과 경외심을 갖게 하는 유일한 두 대상은 별이 빛나는 전 하늘과 내 맘속의 도덕률’이라는 ‘실천이성비판’ 문구에서 벅찬 감동을 표현했다. 원 총리는 “관저에 누워 바람 소리만 들려와도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듣는다.”는 시구를 읊다가 눈물까지 글썽였다. 군데군데 떨어진 헌운동화를 신고 수년째 지방 시찰에 나선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 ‘평민 총리’의 모습을 유감없이 서방에 보여준 것이다. 그는 “세상을 보여주는 건 재물이 아닌 1만권의 책”이라며 간간히 독서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시종 일관 자상한 언변으로 기자들을 대했던 원 총리는 “경제발전에 비해 민주화가 느리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서양식 민주주의는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다.”고 냉정하게 반응했다다.국내외에서 늘 인자한 이미지를 보여주던 그도 중국의 체제 모순에 대한 서방의 비판적 견해는 영 거슬렸나보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인천이 원조] (17) 시외전화·전보

    [인천이 원조] (17) 시외전화·전보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개통된 것은 1898년 서울 덕수궁이었다. 당시 전화는 다리풍(釐風), 덕률풍(德律風)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영어 텔레폰(telephone)을 음역한 것이다. 전화는 점점 그 영역을 넓혀 1903년 2월17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일반 시외전화가 개통되는데, 대한천일은행 서울본점과 인천지점 사이의 통화였다. 초기 가입자는 5명이었는데 모두 공적인 성격이 강한 단체였다. 시외전화 통화료는 분당 50전이었다. 그리고 전화가 걸려오면 당사자를 불러야 했는데 호출대상자의 집을 거리로 계산해서 1리에 2전씩 받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이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전화 가설권을 일본에 빼앗긴 청나라는 고종에게 대비의 능에 전화를 가설해 문상토록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말하자면 전화문상이라는 건데, 고종이 서거한 후 순종도 전화문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능참봉이 전화기를 봉분 앞에 대면 왕과 신하들이 전화기에 대고 곡을 하는 식이었다. 이는 고종의 죽음이 부각돼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전보는 전화보다 앞서는데, 1885년 9월 서울과 인천 제물포 사이에 첫 전보가 떴고,1894년에는 정식으로 전보사가 설치됐다. 하지만 초기에는 통신두절이 빈번했고 정확성과 신속성 역시 많이 떨어졌다. 전보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많았다.“전보를 통해 전염병이 나돌고, 가뭄이 든다.” “청나라 군인들이 전보내용을 바꾼다.”는 식이었다. 1900년대 전보는 국문, 한문, 영문, 해외전보 등 4종류가 있었고 요금은 국문 1자당 4전, 영문 1자당 10전이었다. 일제는 1940년대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학교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토록 했는데,1941년에는 한글 전보마저 폐지시켰다. 한글 전보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야 부활됐다. 무선통신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광제호’와 인천 월미도에 있던 무선전신소 사이에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처럼 최초의 전보, 시외전화, 무선통신이 이뤄진 인천 송도신도시에 IT클러스터와 미디어밸리가 들어서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이 원조] (17) 시외전화·전보

    [인천이 원조] (17) 시외전화·전보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개통된 것은 1898년 서울 덕수궁이었다. 당시 전화는 다리풍(釐風), 덕률풍(德律風) 등으로 불렸는데, 이는 영어 텔레폰(telephone)을 음역한 것이다. 전화는 점점 그 영역을 넓혀 1903년 2월17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일반 시외전화가 개통되는데, 대한천일은행 서울본점과 인천지점 사이의 통화였다. 초기 가입자는 5명이었는데 모두 공적인 성격이 강한 단체였다. 시외전화 통화료는 분당 50전이었다. 그리고 전화가 걸려오면 당사자를 불러야 했는데 호출대상자의 집을 거리로 계산해서 1리에 2전씩 받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이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전화 가설권을 일본에 빼앗긴 청나라는 고종에게 대비의 능에 전화를 가설해 문상토록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말하자면 전화문상이라는 건데, 고종이 서거한 후 순종도 전화문상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능참봉이 전화기를 봉분 앞에 대면 왕과 신하들이 전화기에 대고 곡을 하는 식이었다. 이는 고종의 죽음이 부각돼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전보는 전화보다 앞서는데, 1885년 9월 서울과 인천 제물포 사이에 첫 전보가 떴고,1894년에는 정식으로 전보사가 설치됐다. 하지만 초기에는 통신두절이 빈번했고 정확성과 신속성 역시 많이 떨어졌다. 전보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많았다.“전보를 통해 전염병이 나돌고, 가뭄이 든다.” “청나라 군인들이 전보내용을 바꾼다.”는 식이었다. 1900년대 전보는 국문, 한문, 영문, 해외전보 등 4종류가 있었고 요금은 국문 1자당 4전, 영문 1자당 10전이었다. 일제는 1940년대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학교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토록 했는데,1941년에는 한글 전보마저 폐지시켰다. 한글 전보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야 부활됐다. 무선통신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광제호’와 인천 월미도에 있던 무선전신소 사이에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처럼 최초의 전보, 시외전화, 무선통신이 이뤄진 인천 송도신도시에 IT클러스터와 미디어밸리가 들어서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용산 국가공원 2045년 완공”

    “용산 국가공원 2045년 완공”

    정부는 24일 오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앞 광장에서 오는 2008년 반환될 용산 미군기지를 국가가 주도해 세계적인 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선포식을 가졌다.<서울신문 8월18일자 1면 보도> 총리 산하 ‘용산 민족공원 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식’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3부 요인 및 각계 대표, 외교 사절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예고대로 불참했다. 서울시는 이날 성명을 내고 ‘완전 공원화’를 관철하기 위해 대체입법과 헌법소원, 권한쟁의심판 청구 등 모든 대응방안을 강구할 방침이라고 밝혀 공원화 범위를 둘러싼 서울시와 정부간의 갈등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선포식은 124년전 임오군란을 빌미로 청나라 군대가 용산 미군기지 터에 주둔했던 날인 8월24일에 맞춰 열렸다. 용산기지 공원화는 역사성과 대규모 녹지공간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국가가 건설·관리하는 ‘국가공원화’ 사업으로 광복 100주년이 되는 2045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축사에서 공원화 사업과 관련,“서둘러 완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면서 “용산공원은 지금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들에게도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서울시와의 이견에 대해 “서울 시민 중에는 이 사업을 서울시가 시민의 뜻에 맞게 추진하기를 원하는 분도 많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이 사업은 국가적 의미가 매우 크고, 그 결과도 국가적인 것”이라며 서울시의 요구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건립 추진위는 다음달 30일까지 ‘공원 명칭 및 아이디어 국민 공모전’을 실시한다. 한편 서울시는 성명에서 “용산기지터 전체를 온전한 공원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뜻을 무시한 행사”라면서 “정부는 공원화 대상부지 전체 면적과 경계를 명문화하자는 시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홍기 조현석기자 hkpark@seoul.co.kr
  • 감사원 확인… 궁중인장 훼손 심각

    감사원 확인… 궁중인장 훼손 심각

    정부가 나라의 상징인 국새(國璽)를 새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정작 조선시대에 쓰여진 국새는 모조리 잃어버리는 등 문화재 관리가 한심한 수준인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국새는 조선시대 국가적 행사를 치르는데 필수적이었던 상징적 유물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감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조선시대 국새가 몇 과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사원은 지난해 11∼12월 문화재청 등 10과 기관에서 ‘문화재 지정·관리실태’를 감사한 결과를 24일 발표했다. 감사 결과 조선시대에 제작·사용된 국새는 왕권승계 및 외교문서에 사용한 옥새(玉璽) 13과와 일반 공문서에 쓴 26과 등 모두 39과였다. 하지만 왕권승계 등에 쓰인 옥새는 조선왕조가 처음 만든 ‘조선국왕지인’을 포함해 모두 분실됐고, 일반 공문서용 21과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71년 각 고궁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인장을 정리해 발간한 ‘고궁인존’에는 실려 있으나,1985년에 재발행한 ‘국릉소장유물목록’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분실을 넘어, 누군가가 고의로 빼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국가적 행사를 위해 제작된 인장인 어보(御寶)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316과를 보관하고 있으나, 녹슬고 깨지는 등 온전한 상태로 보존처리된 것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나마 갖고 있는 왕실 인장도 방치다다시피한 수준이다. 문화재청은 왕실 인장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나 검토는 물론,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기초적인 작업조차 소홀히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조사에 참여한 감사관은 “모든 어보에 유성매직으로 관리번호를 써놓는 등 관리상태가 기가 막힌 수준”이라면서 “보관장소도 온도나 습기 조절이 안 되는 건물”이라고 전했다. 문화재청은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조사 권한이 없다는 한계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관리하고 있는 귀중본 1만여권은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박물관 전시품에 사실과 다른 설명을 붙여 관람객들에게 그릇된 정보를 제공해온 사례도 여럿 확인됐다.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은 관우를 기념하는 ‘북묘비’를 야외에 전시하면서 명나라 장수 진린의 기념비로, 서울대 규장각은 조선 헌종이 수집한 인장들을 모아 찍어 만든 책인 ‘보소당인존’을 청나라 옹방강의 인보로 각각 잘못 설명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법조문보다 면적 대타협 급선무

    용산미군기지 이전부지 공원화를 놓고 정부와 서울시의 갈등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서울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번주 중 용산기지를 국가공원(민족·역사공원)으로 선포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의 선포식 불참은 물론 대체입법의 추진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울시와 합의 없는 용산공원 추진을 막겠다는 태세다. 양측의 갈등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으면서 이제는 타협점을 찾으라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머리를 맞대라 국민들은 국가적·민족적 의미뿐 아니라 수도 서울의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를 놓고 두 기관의 양보 없는 대립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실제로 용산은 지난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이후 112년여 만에 우리에게 반환된다. 그만큼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의미가 깊다. 그 의미는 서울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용산을 어떤 형태의 공원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수도 서울의 미래 청사진과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양측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도 정부와 서울시가 대타협의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용산 미군기지는 오는 2009년 평택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 일정을 기준으로 입지 선정에서부터 이주 등의 일정이 짜여져 있다. 양측이 다투면 법 통과도 쉽지 않을뿐더러 통과 이후에도 갈등이 지속돼 추진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최상철 명예교수는 “정부가 민족의 애환과 역사가 담긴 용산공원 일대를 이전비용 조달을 이유로 누더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면서 “서울시도 공원화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이전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등의 가시적인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법은 다음, 원칙부터 합의하라 현재 정부와 서울시의 공방은 용산민족역사공원 조성에 관한 특별법(용산특별법) 조문 때문인 것처럼 비쳐지고 있지만 핵심은 공원면적을 얼마로 하느냐다. 미군이 머물던 주요구역 전부를 공원으로 하느냐 아니면 일부를 개발하느냐는 것이다. 서울시는 메인포스트(2만 4000평)와 사우스포스트(5만 7000평) 등 81만평 전부를 공원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도 81만평을 공원 부지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불가’ 입장은 아니다.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용산특별법 14조에 있는 공원구역을 용도변경할 수 있는 조항이다. 서울시는 이전경비가 부족하면 이 땅마저 개발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조항을 삭제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법조문 공방이다. 만약 지난달 하순 용산특별법 입법예고에 앞서 서울시와 논의를 통해 공원구역 등의 면적을 확정했더라면 이런 갈등은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법은 용산미군기지 일대를 공원구역·복합개발구역·주변구역으로 나누면서도 면적 등은 확정하지 않았다. 내부 용역결과는 있지만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은 제시하지 않은 상태다. 특별법 제정에 앞서 서울시와의 원만한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을 우려해 정부가 법을 먼저 추진한 면도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면적 등에 대한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사설] ‘용산 국가공원’ 조성 환영하지만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를 국가 차원의 공원으로 개발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오는 24일 ‘국가공원 비전 선포식’을 갖기로 했다. 반환기지 80여만평을 모두 공원화한다는 기본 방침도 제시됐다. 국가공원화 방침은 과거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주둔했던 이곳을 온전히 돌려받는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정부의 방침을 환영한다. 하지만 공원 및 주변지역이 난개발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건설교통부가 입법예고한 용산공원 특별법안 때문이다. 건교부장관에게 용도지역·지구 변경권을 부여한 입법예고안 규정이 공원 안에 난개발을 끌어들일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서울시와 논란을 빚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정부는 “서울시의 기우”라고 말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입법예고안을 바꾸면 될 것”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양측이 구체적인 개발계획의 상호 제시 없이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채 의구심만 키우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번째로 공원 주변 지역의 난개발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나 서울시가 미군기지 이전 비용 마련을 이유로 주변 지역을 고층으로 조밀하게 개발한다면 용산공원은 아파트 벽으로 가려진 한강처럼 시민의 접근과 이용이 어렵게 될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주변 지역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서도 머리를 맞대고 긴밀한 협의를 해 나가야 한다. 선포식에 앞서 22일에는 건교부장관과 서울시장이 만나 입장차를 조율한다. 미군기지 이전비용 마련에 얽매이지 말고 국가백년대계를 설계하는 자세로, 구체적인 계획을 상호 제시하고 조율함으로써 역사성을 살린 공원 조성이 되도록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
  • [토요일 아침에] 지도자는 길 안내자일 뿐/현고 스님 조계종 전총무원장 대행

    지난 1일 속초항을 출발해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비록 공해지만 북한 앞바다를 지나 삼국의 역사가 교차한 연해주를 밟은 심정은 미묘했다. 연해주는 한민족의 치열한 삶의 역사가 깃든 땅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서부터 구한말 안중근 의사와 이상설 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으로서도 수천㎞가 접경돼 있고, 전조(청나라)의 국토였던 땅이다. 그럼에도 베이징조약(1860년) 이후 자신들이 써온 역사를 들추는 것은 물론 자유로운 왕래마저 감시받는 억울한 땅이기도 하다. 우리 세계청년봉사단(Copion) 임원진이 연해주를 방문한 것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들의 연해주 귀환과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로 내몰린 고려인들이 3대에 걸쳐 피와 땀으로 개척하고 정착한 땅을 뒤로 하고 다시 연해주로 되돌아온다는 소식에, 그들이 대체 누구인지 보고 싶었다. 서구화에 짓눌린 우리의 원형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고려인들의 귀환 발길은 더뎠고 정착노력도 활발하지 못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표본이라 할 전체주의 공산국가에서 살아온 고려인들이 10여년의 짧은 자본주의 경험을 통해 이미 민족사상보다는 개인, 가치보다는 돈을 중시하며, 개인의 행복을 위해 치열한 선택을 하는 것을 봤다.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게 한 70년의 세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10여년의 짧은 자본주의 경험이 벌써 그렇게 변화시켰다니….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민족이라는 깃발 아래 눈물 흘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는 식민시대의 헌신적인 민족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추상하고 미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성직자인 나 자신의 내부에도 민족주의에 대한 동경이 숨쉬고 있어 개인의 안전과 행복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는 국가주의의 시선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연장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도발과 항전을 정당화하는 집단의식이 되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처럼 분쟁을 장기화시켜 수많은 동족이 살상되는데도 멈추지 못하게 되는 동일한 의식구조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출가 35년을 다하도록 내 안에 아직 씻지 못한 극단과 전제의 무서운 업을 느꼈다. ‘나와 우리는 모든 국민 자신이 잘 조어(調御)되는 자기 확립과 자기 형성의 길을 갈 때 궁극의 자유와 안정이 있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내 안에서 자유와 안정을 찾는 데 가일층 노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가장 불교적인 국가 형태가 모든 사람이 말 그대로 평등해 계급도 없고, 통솔자도 없고, 통솔되는 자도 없고, 대통령과 지도자마저 그 속의 한 일원에 지나지 않은 상태라고 할 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큰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전체 속의 개인보다 개인을 위한 전체를 이룩해가는 조화로운 노력을 구상하는 계기가 됐다. 민족과 개인의 행복, 전체와 개인의 행복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조정돼야 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뒤척거리다 텔레비전을 통해 들려온 대통령의 8·15 경축사 “민주주의 원리와 핵심은 상대주의와 관용입니다.”라는 언급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 상대주의의 근원은 불교의 연기관이며, 존재에 대한 연기적 사고만이 대통령이 짧은 경축 연설문에서 12번이나 언급한 ‘평화’를 담보할 근본사상이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역할을 정리한다. 이를 본받아 우리 지도자도 구제자(메시아)라고 말하지 말고, 모든 국민의 ‘좋은 벗(善友)’이 되고 대통령이 좋은 길 안내자가 되는 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날개를 접고, 절대주의자의 극단적 선택은 발 붙일 곳을 잃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다. 현고 스님 조계종 전총무원장 대행
  • 용산기지 ‘국가공원’ 선포

    용산기지 ‘국가공원’ 선포

    노무현 대통령은 미군이 떠나는 용산기지를 ‘민족공원’, 이른바 ‘국가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비전을 다음주 중 공식 선포할 예정이다. 노 대통령은 특히 용산기지의 국가공원화에 따른 역사적 의미와 함께 민족주체성 회복 의지를 천명할 방침인 것으로 17일 알려졌다. 노 대통령의 비전 선포는 ‘용산 민족·역사공원 특별법안’에 대한 입법예고까지 끝낸 상황에서 이뤄지는 만큼 국가공원을 건립하기 위한 상징적인 시발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용산 민족·역사공원의 국가공원화는 현행 자연환경의 보존에 역점을 둔 환경부 산하의 국립공원과는 달리 국가 주도로 건설교통부가 개발, 국민들에게 역사와 문화의 쉼터로 되돌려주는 첫 사례이자 새로운 모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용산 미군기지의 이전과 전시 작전통제권의 환수 등과 맞물려 국가공원화 선포는 뜻 깊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용산기지의 활용은 민족사적 의미가 있다.(지난 8일 시·도지사 토론회)”,“용산의 미군반환부지를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국가주도의 민족역사공원으로 조성하겠다.(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고 밝혀왔다. 노 대통령은 또 “지난 한 세기 동안 청나라와 일본, 미군의 군대가 번갈아 주둔해 왔던 곳(지난해 10월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이라며 역사성에 무게를 두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선언을 앞두고 추병직 건교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오는 22일 회동을 갖고 ‘용산 민족·역사공원 특별법안’과 관련, 개발 범위 등을 둘러싼 이견에 대해 최종 조율할 방침이다. 용산 미군기지의 공원계획은 지난 1988년 8월 한·미 양국이 군사시설 이전 원칙에 따라 92년 용산가족공원을 조성키로 한 데 이어 93년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협상이 중단됐다가 2004년 7월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에 합의함에 따라 실질적인 추진에 들어갔다. 용산 민족·역사공원 건립추진위는 군 시설을 공원화한 캐나다의 다운스 뷰 파크, 미국의 크리스 필드와 센트럴 파크, 프랑스의 라빌레트 공원 등 세계 유명공원을 비교, 검토하고 있다. 박홍기 최광숙기자 hkpark@seoul.co.kr ●국가공원이란 국가가 조성·관리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이름. 본 명칭은 용산민족·역사공원이다.1894년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미군부대에 이르기까지 112년간 외국군대가 주둔하던 땅이 우리 민족의 품에 돌아온다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관리는 ‘용산민족·역사공원 특별법’의 입법주체인 건설교통부가 맡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국가가 관리한다는 점에서는 국립공원과 같다. 다만, 공원조성 취지를 살려 입장료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씨줄날줄] 오데르-나이세/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압록강과 두만강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정서의 대상이다. 한민족 발흥의 초창기인 고조선·고구려 시대에는 ‘민족의 젖줄’이었고, 만주에서 일어난 청나라가 중국 땅을 다스리던 근현세에는 외부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했다. 그래서 1938년에 나온 대중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이 여태껏 한국인 애창곡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가 압록강·두만강에서 느끼는 감정을 독일인들은 오데르-나이세강에서 실감할 것이다. 오데르강은 체코의 오데르 산맥에서 발원해 북쪽의 발틱해로 흐르는 길이 850여㎞의 큰 강이고, 나이세강은 수데텐 산맥에서 시작해 북서쪽으로 달리다 오데르강에 합류하는 강이다. 이 오데르-나이세강이 현재 독일과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국경선이다. 독일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오데르-나이세강의 동쪽 10만 3000㎢(남한 면적 9만 9000㎢)는 독일 영토였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게르만의 대이동’전에 그들의 조상이 이 지역에 살았다고 믿었기에, 그곳은 민족 발상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의 통치권은 그러나 1945년 7∼8월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폴란드 임시정부에 넘어갔다. 대전 중에 폴란드 접경지대를 상당 부분 점령한 소련이 그 대체 영토로 이 땅을 폴란드에 넘긴 것이다. 미국·영국은 격렬히 반대했지만 결국 ‘잠정적’이라는 조건 아래 소련측 요구에 동의했다. 독일인들에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폴란드 정부가 그 지역에 사는 독일인들을 본토로 강제 ‘이송’하면서 쓴 방식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어, 최대 200만명에 이르는 독일인이 ‘이송’ 도중 사망했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독일인으로서 오데르-나이세 동쪽 땅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은 1990년 7월 정식으로 확정됐다. 통일을 앞둔 서독 정부가 폴란드의 점유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과, 그에 따른 손실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이처럼 영토 상실마저 받아들였다. 그런데 반성은커녕 아직도 독도를 제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국민의식은 언제쯤 깨어날 것인가.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23세 요절 헌종은 ‘전각’ 애호가

    23세 요절 헌종은 ‘전각’ 애호가

    조선시대 임금들이 서책이나 회화, 편지봉투 등에 찍었던 개인 인장(도장) 250여점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새·어보 등 공적인 도장과 달리 임금 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등이 담겨 있어 조선시대 학문·예술세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개관 1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조선왕실의 인장’을 15일부터 10월8일까지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특별전에는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재위 1834∼49년)이 직접 사용했거나 수집한 인장 150여점을 비롯, 정조·순종·고종·흥선대원군 등이 사용했던 인장 100여점 등 총 250여점이 전시된다. 인장은 초기에는 주로 사용자의 이름이나 호, 직위를 새겨 신분과 신용을 나타냈으나 중국 송·원대에 이르러 교훈적인 문구나 좋은 시 등을 인용, 개인 취향을 반영하는 예술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또 돌·금속·나무·흙 등을 이용, 색채와 조형적 장점을 살리면서 전서를 글씨로 새겨 전각으로 불렸으며, 시(詩)·서(書)·화(畵)가 집약된 종합예술로 발전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23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헌종의 방대한 인장 컬렉션이다. 문예에 뛰어났던 헌종이 700점이 넘는 인장을 날인, 펴낸 인보(서책)인 ‘보소당인존’에서 확인된 다양한 글귀·모양의 인장 150여점이 공개됐다. 이 가운데에는 헌종이 정약용·김정희·강세황·신위·권돈인·조희룡 등 당대를 대표한 문인 석학들과 학문·예술적으로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수집한 인장이 포함돼 있으며, 문팽·옹방강·오숭량 등 청나라 문인들의 인장도 볼 수 있다. 소재구 관장은 “헌종이 문인들과 교감하고 청나라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문화군주로서의 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10여점에 이르는 김정희 인장을 수집한 것은, 헌종이 금석학적 측면에서 추사 일파와 긴밀히 교류할 만큼 학문적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또 헌종이 서화 감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장소인 창덕궁 낙선재와 보소당 등 궁궐 전각의 이름을 새긴 인장을 통해 왕의 풍류를 뽐내기도 한다. 이와 함께 1725년 발간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 5022책에 모두 찍혀 있는 정조의 ‘극(極)’ 날인과, 크기가 서로 다른 5개 인장을 포개 1개 도장에 넣은 이하응(흥선대원군)의 ‘투인’ 인장 등도 전시된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중국판 ‘상도’ 차오즈융 첫선

    청나라 거상 차오즈융(喬致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거상 차오즈융’이 한국에 소개된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차오즈융이라는 인물은 중국 산시성 출신으로 착실하게 재산을 불려 마침내 베이징과 상하이 등 전국 200여곳에 점포를 거느리면서 청나라 정부가 정한 토지제도마저 위태롭게 할 정도로 재산을 모았던 거상이다.그러나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아니었다. 이 집안의 신조는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면 사람을 얻을 수 없다. 먼저 반드시 자신을 구하라. 재물을 아끼지 말고 인연을 아끼고 소중히 해야 복이 온다.”는 것이다. 산시성 출신 장사꾼들을 일컫는 ‘진상(晉商)’ 가운데 최고의 인물로 꼽힌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거상 차오즈융’은 2001∼2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MBC드라마 ‘상도’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도 상도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이 드라마도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지난 2∼3월 CCTV를 통해 중국에 방영될 당시 전국 기준 시청률 17.33%, 베이징 기준 시청률 33%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중국에는 성 단위의 방송사들도 워낙 많아 전국 시청률이 10%를 채 넘기 어렵다.한국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성장으로 인한 불균형에 대한 불만이 넘쳐나던 중국에서도 ‘차오즈융’이 보여준 ‘도덕’과 ‘의리’가 크게 환영받았다는 해석이다. 차오즈융 가문의 계승자로부터 직접 고증을 받아 역사적 사실성도 한껏 높였다. 청나라 옹정제와 한무제를 다룬 역사드라마를 내놨던 후메이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1급배우로 꼽히는 천젠빈·장친친·마이리 등이 주요 배역에 출연한다.9일부터 매주 수·목·금요일에 하루 세번씩(10시·16시·23시) 방영된다.모두 45편으로 구성된 드라마 ‘거상 차오즈융’은 중화TV가 수입했다. 중화TV 강인자 대표이사는 “중국의 상인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다 한류에 대한 반감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수입했다.”면서 “단순히 재미만 있는 드라마와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Book Review] 19세기 조선 전업작가 홍길주의 투명한 일상記

    ‘말없이 지내면서 책을 뽑아들고 베개를 베고 있자니 졸음을 물리칠 방법이 없는 것이 괴로웠다. 문득 벌떡 일어나 붓을 들고 공책에다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현묘한 이치를 깨달을 것도 없고 사물을 널리 상고하여 살펴본 것도 없다.∼하인이 장독 뚜껑을 덮기에나 꼭 알맞지 싶다. 잠시 기록하여 남겨두고 ‘수여방필’이란 제목을 붙인다. 을미년(1835년) 10월 하순. 베개를 벤 채 책을 읽고, 졸음을 쫓고자 무언가 끄적거리는 모습이 18세기 사대부가의 사랑방 풍경이란 게 참 생경하다. 서안 앞에 정좌하고 끊임없이 책을 읽는 ‘선비의 전형’ 대신 입신양명의 욕심을 접은 한량의 모습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이 글의 주인공은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1786∼1841)다. 한때 과거를 준비했으나, 출세의 꿈을 접고 독서와 글쓰기를 벗삼았던 선비다. 그는 한가로움을 소견하기 위해 생각나는 것들을 그때그때 적기 시작했고, 이를 ‘수여방필’‘수여연필’‘수여난필’이란 제목으로 정리했다. 홍길주의 아들 홍우건은 부친의 또 다른 글을 정리해 ‘수여난필속’을 정리했다. 고전을 발굴해 이를 현대적 사유의 틀에 맞춰 재생산해 내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닌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이처럼 흥미로운 인물을 놓칠 리 없다. 정 교수는 대학원 제자들과 매주 토요일 모여 홍길주의 네 문집을 완역했고, 이를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창고’(정민 등 옮김, 돌베개 펴냄)란 책으로 묶었다. 역자가 보기에 홍길주는 천재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그에 대한 논문이 적지 않게 제출되었지만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천재문인의 진면목을 이번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 한다. ‘방필(放筆)’은 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붓을 내달린 비망록이란 뜻. 이를 부연한 게 ‘연필(演筆)’이고,‘난필(瀾筆)’은 그 나머지 넘쳐흐른 것을 수습했다는 뜻이다. 책은 19세기 지식인의 내면을 아주 밝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소한 일상사에서부터 그때그때 스쳐지나간 생각의 궤적,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의 구체적인 관심사들을 경쾌한 필치로 스케치하듯 그려내고 있다. 특히 개별 사물의 이치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건져 이를 다양한 일상의 의미로 확산하는 글쓰기가 돋보인다. ‘추위를 막는 옷으로는 면포만 한 것이 없다. 값비싼 비단은 보기에만 아름다울 뿐이다.∼아름다운 문장이나 화려한 문체는 실용에는 합당함이 없다. 재주와 덕은 풍족하여 정치에 베풀 수 있어야 한다.∼천하에서 기이한 보배라고 일컫는 사람이라 해서 진실로 모두 일을 맡길 만한 그릇은 아니다.’(때에 맞는 문장) 옷과 그릇, 문사와 재덕을 비유하며 겉보기에 화려하고 번드르르한 것이 실제로는 쓸모가 없다는 결론을 재치있게 이끌어내고 있다. 책은 19세기 전반 조선의 학계와 문단 흐름을 파악하는 데 긴요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연암 박지원 이후 활기를 띠던 문단은 정조의 문체반정 이후 표면적으로는 정체 보수 국면을 보인다. 하지만 홍길주는 연암의 개성적이고 발랄한 문체와 사고를 선호했으며, 이는 다음과 같은 그의 글 속에 숨김 없이 드러나 있다. ‘나는 청나라 사람 중 정림과 고염무의 시를 좋아한다.∼문장은 당연히 위희와 왕완을 거벽으로 삼는다.∼만약 우리나라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서 태어나게 했다면 마땅히 깃발과 북채를 잡고 이들과 나란히 섰을 것이니….’ 이밖에도 직접 겪은 부모 형제의 언행과 당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견해, 소비문화와 관련된 보고, 여가활동의 표방과 실천,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 등 예전 문헌에선 볼 수 없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19세기 조선의 일상을 거대 담론이 아닌 미시적 관점으로 써내려간 천재 선비의 지적 사유와 재치가 돋보이는 책이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책꽂이]

    ●유림 4·5권(최인호 지음, 열림원 펴냄) 2500년 동양사상의 원류를 집대성한 대하소설로 지난해 1부(전 3권) 출간에 이어 2부가 나왔다.4권은 유교의 아성(亞聖) 맹자를 중심으로 순자, 묵자, 양자 등 백화제방을 다뤘고,5권은 해동공자로 불리는 이율곡의 생애를 뒤쫓는다. 집필 중인 마지막 6권은 유교의 완성자인 퇴계에 관한 이야기다. 각권 6500원. ●귀신의 시대(손홍규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1년 ‘작가세계’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저자의 첫 장편소설.1인칭 서술자인 소년의 구술을 통해 노령산맥 자락 농촌마을에 얽힌 사람들과 귀신들의 개인사가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펼쳐진다. 삶과 죽음, 신과 귀신, 욕망과 금기 등을 아우르는 저자의 독특한 상상력이 빛난다.9800원. ●창궁의 묘성(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창해 펴냄) ‘철도원’‘파이란’의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가 12년간 집필한 역사소설.19세기 중국 청나라 말기를 무대로 운명에 순응하는 남자와 운명을 개척하는 남자의 엇갈린 인생행로를 보여준다. 서태후, 원세개 등 실제 인물들을 등장시켜 생생한 현실감을 살렸다. 전 4권, 각권 9000원. ●스키피오의 꿈(이언 피어스 지음,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펴냄) 로마제국 갈리아의 귀족, 중세의 시인,20세기 프랑스 고전학자 등 문명과 야만이 대립하던 시대를 살아낸 세 사람의 비극적 운명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다.‘핑커포스트,1663’으로 역사 추리소설의 새 장을 연 저자의 방대한 스케일과 심오한 사상이 독서열을 자극한다.1만 2900원. ●마커(로빈 쿡 지음, 김청환 옮김, 열림원 펴냄) 거대 의료기업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청년의 시신이 검시소로 이송된다. 법의학자 로리는 시신을 부검하지만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환자의 사망이 계속되자 로리는 연쇄살인의 의혹을 품는데…. 의학 추리소설의 거장 로빈 쿡의 스물다섯번째 시리즈. 전 2권, 각권 1만원.
  • [인천이 원조] (15) 근대식 염전

    [인천이 원조] (15) 근대식 염전

    1970년대와 1980년 서울의 대학가에서 ‘인천 당구’는 ‘짠물’로 유명했다. 거의 ‘공포 분위기’였다. 불과 100점대의 당구 실력만 돼도 고난도 기술인 ‘맛세이’를 마구 찍어대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인천에서 온 학생들의 당구는 대체로 ‘짜다’고 인식됐고, 경원시하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또 인천 사람들을 ‘짠물’로 불렀다. 하지만 ‘인천 짠물’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당구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인색해서도 아니며 인천이 소금의 원산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천일염(天日鹽·햇볕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은 전통적으로 품질이 좋았지만 소규모 생산이었다. 그런데 1885년 이후에 청나라에서 막대한 양의 값싼 소금이 수입되자 우리나라 소금 생산업자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이에 자극을 받은 우리 정부는 1907년 인천 주안에 최초의 근대식 염전을 만들었는데, 현 부평구 십정동 서울제강 정문 부근이었다. 처음에는 1정보(3000평) 가량의 천일염전을 시험적으로 축조했다. 이곳에는 지금 대형 공단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바닷가였다. 동시에 지금 인천의 중심가인 주안역 뒤쪽에는 소금 생산과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사는 주택들이 자리잡았다. 그해 9월에는 조정에서 관리들이 염전을 시찰하는 등 관심을 보였는데, 시험 결과 부산에 있는 재래식 염전보다 경제성이 훨씬 뛰어났다. 주안염전은 2단계에 걸쳐 규모가 확장됐다.1기(1908∼1911년)에 26만평,2기(1917∼1918년)에는 37만평을 각각 늘렸다. 또 1921년에는 남동염전 90만평이,1925년에는 군자염전 172만평이 만들어져 전체 면적이 325만평에 달했다. 이들 염전에서는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되는 연간 15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군자와 남동에서 생산된 소금은 바닷길을 통해 인천으로 실어나르고 주안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주안역전창고로 옮겨져 판매했다. 게다가 천일염을 정제해 새하얀 고운 소금으로 만드는 재염(再鹽)공장이 인천에 집중돼 거의 전국의 수요를 충당했다. 그래서 인천의 특산물 하면 언제나 소금이 첫머리를 장식했다. 최초의 재염공장은 1908년 인천항에 설립된 ‘인천제염소’다. 이 회사는 설립 초기에 소금을 굽는 솥이 하나밖에 없어 하루 생산량이 2500근에 불과했으나 수요가 늘면서 번창을 거듭해 한국인 97명과 일본인 11명을 고용하는 대규모 공장이 됐다.1910년에는 재염공장이 6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을 잃자 소금의 유통도 일제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상인들의 유통망을 와해시키기 위해 천일염 제조 허가제를 실시했고, 전매국을 두어 도매·소매 행위까지 통제했다.1942년에는 한술 더떠 전매령을 실시해 소금에 관한 이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1960년대 들어서는 각종 가공소금이 등장하고 중국산 소금의 유입과 해안선 개발 등으로 염전이 줄어들면서 인천 소금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지금은 단 한줌의 소금도 생산되지 않아 주안염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나 ‘우리나라 최대 천일염 산지’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천 사람들은 이제 듣기 좋지 않았던 ‘짠물’이라는 말을 들을 이유도 없어졌다. 그러나 인천 남동구에 자리잡은 수도권해양생태공원에 가면 염전에 대한 향수를 느껴볼 수 있다. 이곳에는 채염작업을 재현해 놓은 체험용 염전이 있어 소금생산 과정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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