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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책꽂이]

    ●출동! 시간구조대(류가미 지음, 삼성출판사 펴냄) 동아시아 문명 발상지인 황하에서 문명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이같은 가정에서 출발, 역사를 뒤바꾸려는 시간테러단과 이를 지키려는 시간구조대간의 대결 형식을 빌려 인류역사를 재현해낸 역사 판타지.1권은 황하의 홍수를 막아 하나라의 첫번째 왕이 된 우임금 이야기,2권은 크레타 왕궁에 있는 미로 속에서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테세우스 왕자를 구해내는 이야기다. 각권 9500원. ●십장생을 찾아서(최향랑 지음, 창비 펴냄) 십장생은 도교의 신선사상에 토대를 둔 것으로, 장수의 상징인 열가지 자연물을 가리킨다. 해, 소나무, 학, 사슴, 불로초(영지버섯), 바위, 물, 거북, 산, 구름. 때론 곧고 푸른 대나무와 신선의 땅에서 난다고 하는 복숭아가 포함되기도 한다. 십(十)은 상하좌우 모든 것이 갖춰진 완벽함을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쓴 십장생 이야기.1만원. ●맛있는 들풀(마루야마 나오토시 지음, 김창원 옮김, 진선아이 펴냄) 어린 잎을 따서 고명으로 쓰는 초피나무, 껍질을 벗겨 나물로 먹는 섬조릿대, 어린순을 무쳐 먹는 독활, 어린잎을 튀겨 먹는 호장근…. 봄이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리는 들풀은 잡초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소중한 먹거리다.60여종의 들풀을 세밀화로 소개한 생태교육 도감.7500원. ●그림으로 보는 세계 생활사(앤 밀라드 등 지음, 홍순철 옮김, 창해 펴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빵 몇조각을 약간 구운 다음, 다시 물을 섞어 체로 걸러 맥주를 만들었다. 바이킹은 어떻게 살았을까. 선원이며 전사이자 탐험가였던 바이킹은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해적이었지만 훗날 아이슬란드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다.‘사가’라 불리는 서사시는 용감한 바이킹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인류의 첫 문명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세계사 그림책.2만 4000원. ●박쥐(팅 모리스 지음, 이충호 옮김, 베틀북 펴냄) 박쥐의 종류는 950종 이상.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과 남극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산다. 보통 박쥐의 속도는 시속 10㎞. 그러나 박쥐 중에서 가장 빨리 나는 붉은박쥐는 시속 60㎞ 이상으로 날 수 있다. 박쥐는 종류마다 소리를 내는 곳이 다르다. 관박쥐는 코로, 갈색박쥐는 입으로 초음파를 낸다. 어린이 스스로 자연을 탐구하고 관찰할 수 있도록 꾸민 그림책.8500원. ●임경업전(하상만 옮김, 청솔 펴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군담소설. 우리나라 고전은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본(異本)이 많다.‘임경업전’의 이본은 36가지나 된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당시 호국(청나라)이 가장 두려워한 조선의 장수. 볼모로 잡혀간 세자와 대군을 구하기 위해 몰래 호국에 들어간 임경업은 독보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임경업은 역적 김자점의 음모로 죽고 만다.8000원.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누르하치,그리고 만주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누르하치,그리고 만주 Ⅰ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와 민중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학계의 병자호란 연구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 하기 어렵다. 그같은 상황은 병자호란뿐만이 아니라 조·청관계나 만주와 관련된 연구 전반에서 그러하다. 왜 그럴까. 호란 자체가 ‘가슴 아픈 역사’인데다 이후의 조·청관계가 그다지 달가운 연구 주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병자호란, 조·청관계, 만주사 연구는 일본인 학자들이 일찍부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이미 1930년대에 병자호란과 조·청관계 관련 연구들을 내놓았다. 만주사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더 오래되었다. 그들이 이렇게 병자호란, 조·청관계, 만주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선사가(滿鮮史家)들의 역사인식 일본인 연구자들이 병자호란과 만주 관련연구를 중시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94년 청일전쟁,1904년 러일전쟁에 잇따라 승리하면서 한반도와 만주에 진출하고,1931년 괴뢰국가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에 나섰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인 연구자들은 일제(日帝)의 한반도와 만주 침략을 옹호하고, 그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두 지역에 대한 역사지리(歷史地理) 연구에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도출해낸 것이 바로 만선사관(滿鮮史觀)이라는 역사인식 체계였다. 만선사가(滿鮮史家)들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정치·사회적 변동은 만주를 둘러싼 정세변화에서 촉발되었다고 설명한다. 한반도에는 대륙 만주로부터 정치·군사적 압력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한반도는 그 압박 때문에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 조선 국왕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끓었던 병자호란이야말로 그같은 인식 체계를 설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례로 거론된다. 만선사가들은 이어 대륙의 압박에 신음하는 한반도를 ‘구원해 준 은인’으로 일본을 부각시킨다.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는 193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륙에서 한반도로 밀려오던 외력(外力)이 분쇄되었고 조선은 해방되었다.’고 했다. 그에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 일대 과업’이었던 셈이다. 만선사관은 이렇게 한국사를 ‘만주역사의 부속물’로 치부해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정했다.1910년 조선을 강제로 합병하여 ‘일본 영토’로 만든 이후,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를 한묶음으로 취급했던 만선사관이 던지는 메시지는보다 분명해진다. 만주도 이제 ‘일본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만주 체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자 만선사가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 대표자는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였다. 니가타(新潟) 출신인 이나바는 스물세살이던 1900년 봄, 청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베이징에서 생활하면서 중국사를 공부하고, 현지의 상황과 분위기를 익히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나바의 중국행을 격려했던 기시타(岸田吟香)라는 인물이 이나바에게 건넸던 말이다. 기시타가 이나바에게 중국행의 목적을 물었을 때, 이나바는 ‘정해진 것은 없고 지나(支那)를 알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기시타는 ‘우리가 지나로 건너가는 것은 대륙을 떼어 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해 이나바를 놀라게 만들었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 조야(朝野)에서는 이렇게 ‘대륙 진출’을 당연시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풍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청을 ‘중국’이 아니라 ‘지나’로 부르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었다. 일본의 우익 가운데는 지금도 ‘지나’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중국에 대한 멸칭(蔑稱)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이 쇠퇴해가는 모습을 목도했던 일본 지식인들은,‘성인군자국(聖人君子國)’의 의미가 담긴 ‘중국’이라는 호칭 대신 ‘지나’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 이나바는 자신의 저술에서 만주족의 ‘청국(淸國)’과 한족의 ‘지나’를 엄격히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이나바는 이처럼 한반도와 중국으로의 침략 열기가 고조되고 있던 분위기 속에서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1900년부터 1902년까지 베이징 유학을 마친 뒤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육군 통역으로 지원한다. 이나바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건너갔던 후비대(後備隊)에 소속되어 봉황성(鳳凰城), 선양(瀋陽), 푸순(撫順) 등 전장을 전전했다. 바로 과거 청나라의 핵심 거점이자 병자호란 이후 조·청관계가 전개되던 현장이었다. 1905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이나바는 푸순 교외의 허투알라를 비롯한 청나라 초기의 발상지들을 직접 답사한다. 이나바는 좁고 보잘 것 없는 허투알라에서 출발한 누르하치와 그 후손들이 만주를 차지하고 끝내는 중원 전체를 집어삼킨 역사를 회고하면서 경이감을 느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만주를 차지하기 위한 침략전쟁에 동참했던 그의 역사연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이미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이나바와 만철 역사지리조사실(滿鐵歷史地理調査室) 1906년 종군을 마치고 귀국한 이나바는 스승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따라 조선과 만주를 여행하고, 선양의 고궁(故宮)으로 들어가 청조의 사료를 탐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이어 1908년 만철(滿鐵)에 설치된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에 들어간다. 만철은 1906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동청철도(東淸鐵道)를 기초로 세워진 일본의 국책회사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델로 삼은 만철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많은 자본금을 지녔던 회사이다. 만주, 내몽골 등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육성했던 ‘침략의 첨병’이었다. 초대 만철 총재였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조선, 만주, 몽골 등을 지배하는 철학으로써 이른바 ‘문장적(文裝的) 무비(武備)’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식민지 지배는 단순히 무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교육, 위생, 학술 등 문사(文事)를 활용해야 하고, 그를 통해 식민지인들이 일본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되면 어떤 경우라도 타국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역사지리조사실은 바로 그 ‘문사’를 닦기 위한 핵심이었다. 만철은 학자나 연구원들이 조선, 만주, 몽골, 중국 등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보고서를 간행하도록 지원했다.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라는 정기 간행물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나바는 1908년부터 7년 동안 바로 여기서 만선사관의 기반을 닦는다. 그는 당시 ‘만주역사지리(滿洲歷史地理)’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문록경장(文祿慶長)의 역(役)’ 등의 저술들을 간행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 당시의 연구를 토대로 후일 ‘청조전사(淸朝全史)’ ‘만주발달사(滿洲發達史)’ 등의 저서를 내놓게 된다. ‘침략 대상지역의 연구’라는 뚜렷한 목표와 전폭적인 지원 아래서 뛰어난 성과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조사실에서 나온 논저 가운데에는 지금도 한반도와 만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노작들이 적지 않다. 만철 역사지리조사실의 설립 의도는 불순하고, 만선사관은 분명 식민사관(植民史觀)이었다. 그것은 비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문학 연구의 기반이 우리보다 튼실하고, 한국과 중국 등 ‘타자’를 연구하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는 일본을 돌아보는 마음은 편치만은 않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상림 숲과 따뜻한 밥상으로의 초대

    상림 숲과 따뜻한 밥상으로의 초대

    글·사진 정일근 시인 지리산 자락. 경남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 제가 좋아하는 상림(上林)이란 숲이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154호. 숲의 면적은 6만 평이 넘습니다. 이 숲은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 때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숲입니다.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 897) 때 고운 최치원이 함양읍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숲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예전에는 숲이 지금보다 넓어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렀으나 홍수로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사라짐에 따라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림 숲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로는 갈참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류와 개서어나무류가 주로 있습니다. 숲에 가면 나무들이 모두 이름표를 달고 있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93년 조사에서 116종류의 식물이 조사되었으며, 현재 2만여 그루의 크고, 오래된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함양 상림은 사람이 직접 조성한 숲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가치를 가진 숲입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숲 인근에 연꽃밭을 만들어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제가 상림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숲의 그 많은 나무들이 모두 활엽수라는 것입니다. 봄에는 모두 함께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낙엽이 물들고 겨울이면 완벽하게 나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찾아가도 상림은 한 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상록수림의 숲은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상림 숲은 살아 숨 쉬는 변화가 순간순간 장엄하게 연출되는 숲입니다. 상림에는 또 맑은 물이 많습니다. 상림의 서쪽으로 지리산이 내려 보내주는 위천이 흐르고 숲 속에도 길고 긴 맑은 물길이 나 있습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은 동적인 숲을 정적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단지 연밭까지 만들어져 숲과 물이 상생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올 가을 상림에 다녀왔습니다. 상림의 낙엽은 ‘낙엽귀근’(落葉歸根)을 그대로 실천합니다. 모두 뿌리로 돌아가는 낙엽들이 몇 년을 두고 그대로 쌓여 숲 속에는 ‘낙엽바다’가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술보다도 좋은 오랜 친구들과 함께 상림 숲을 걸으며 즐거웠습니다. 맨발공원에서 맨발로 걸어보고 숲 속에 만들어진 나무벤치에 앉아 아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우린 같은 것을 함께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인가는 지인들과 와인 몇 병을 들고 상림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기분도 참 좋았습니다. 낙엽바다에 몸을 던지고 천천히 와인에 취해 가는 동안 술에 약한 제가 취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낙엽이 붉게 물드는 속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추에 상림에 가신다면 당신도 들어갈 때의 단풍과 나올 때의 단풍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상림 주변의 정겨운 시골마을도 좋은 구경거리입니다. 그 입구에 물레방아가 있고 아직도 빨래터가 있는 마을입니다. 함양은 물레방아의 고장입니다. 실학자 박지원이 1792년 함양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보고 온 물레방아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물레방아가 생겨났고 함양은 물레방아의 원조 고장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함양군은 가을이면 상림 주변에서 물레방아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상림의 마을을 둘러보다 오랜만에 천련자 나무를 보았습니다. ‘여자’라고도 하는 나무입니다. 노란 황금색의 천련자 열매도 달려 있었습니다. 유자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신기해하는 일행들에게 주인아주머니가 열매를 몇 개 따서 선물해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상림에서 여자를 선물 받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상림을 둘러보는 데 몇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그래서 숲을 빠져나오면 누구나 출출해집니다. 숲과 나무가 차려주는 참 좋은 밥상을 선물 받았는데도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은 먹어야 사는 사람이니까 할 수밖에 없는 고민입니다. 숲을 나와 국도의 오른쪽 마천 방향 달려가다 보니 맞배지붕의 기와집이 맛있게 지어진 밥집을 만날 것입니다. 함양군에서 장수식당 1호점으로 지정한 밥집인데 주메뉴는 ‘콩잎곰국’과 ‘죽염청국장’입니다. 그 밥집은 죽염을 만들었던 인산 선생의 집안과 인연이 있어 요리와 밑반찬을 죽염으로만 간을 하는데 죽염청국장은 청국장에 죽염의 맛을 더했는데 짜지도 않고 그냥 먹기도 편한 별미입니다. 콩잎곰국은 저도 음식이 나올 때까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기대를 하고 기다렸는데 사골을 고와서 어린 콩잎들을 따서 말렸다가 함께 넣어 끓인 곰국이 나왔습니다. 역시 죽염으로 간을 해서 먹는데 그 맛이 얼마나 담백한지! 제가 먹어 본 곰국 중에서 가장 담백한 맛이었습니다. 그건 상림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건강한 맛이었습니다. 숲이 뿜어주는 그 깊은 산소 같은 맛이어서 당신도 오랜 만에 입맛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고의 밥상은 상림 숲에 있습니다. 당신이 때로 삶에 지칠 때 상림 숲으로 오셔서 숲이 차려주는 성찬을 밥상으로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월간 <삶과꿈> 2006.12 구독문의:02-319-3791
  • 석촌동 삼전도비 훼손

    서울 송파경찰서는 7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가 훼손됐다는 송파구청의 수사 의뢰서를 받아 조사에 나섰다고 밝혔다. 훼손된 삼전도비에는 붉은 페인트로 앞면에 ‘철 370’, 뒷면에 ‘거 병자’라고 씌어 있었으며 둔기 등을 때려 망가진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2일 밤 순찰 때 아무 이상이 없다가 5일 오전 9시30분쯤 페인트 칠이 발견됐다는 비 관리사무소측의 진술에 따라 훼손 행위가 지난 주말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목격자를 찾고 있다. 삼전도비는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당한 굴욕사를 담은 비석으로 서울시는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 1983년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일고 있는 반 중국 감정 때문에 사건이 발생했는지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금밭’ 쇼트트랙+α · · ·동계AG 28일 개막

    ‘숙적 일본 제친다.’ 40억 아시아인의 겨울 스포츠 제전인 제6회 창춘 동계아시안게임이 28일 개막,8일간의 열전에 들어간다.26개국,810여명의 참가 선수들은 빙상(쇼트트랙 스피드 피겨)과 스키(알파인 크로스컨트리 스노보드 프리스타일), 컬링, 아이스하키, 바이애슬론 등에서 모두 47개의 금메달을 놓고 격전을 치른다. 26일 입촌식을 가진 한국선수단의 목표는 금메달 10개.1999년 용평 대회 이후 2대회 연속 지켜온 종합 2위를 수성해야 한다. 개최국 중국은 4년 전 아오모리 대회 때 일본과 한국에 밀려 3위로 추락한 수모를 되갚기 위해 200여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꾸렸다. 한국은 금밭인 쇼트트랙을 앞세워 일본을 뿌리친다는 다짐이다. 쇼트트랙 외에도 토리노 동계유니버시아드와 세계스프린트선수권에서 각각 세계 정상급 기량을 입증한 이강석(한국체대)과 이상화(한국체대 입학 예정), 이규혁(서울시청)이 금 소식을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강석과 이규혁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한솥밥 경쟁을 벌여야 한다. 또 스키 알파인의 강민혁(용평리조트)과 오재은(국민대)도 금빛 역주를 꿈꾼다. 아오모리 대회 결승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한 남자 컬링도 2연패로 종합 2위 사수에 힘을 보탤 각오다. ‘영원한 맞수’ 일본은 중국이 권토중래를 다짐한 만큼, 종합 1위 대신 한국과의 2위 경쟁에 주력하는 인상이다. 금메달 목표는 10∼15개.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세계기록(34초30) 보유자인 가토 조지와 피겨스타 수구리 후미에 등을 간판으로 내세운다. 아오모리에서 ‘노골드’였던 북한 역시 99명의 선수를 대거 출전시켜 자존심 회복에 나서지만 항공편을 포기하고 열차로 창춘까지 이동하는 등 경제난이 심각함을 드러냈다.●개막식은 동북공정의 일환 한편 28일 밤 9시(현지시간 오후 8시) 시작될 개막식과 식전 행사가 창바이산(백두산의 중국 이름)을 주제로 할 것으로 알려져 국내 스포츠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전망이다.2002년부터 5년간 ‘동북공정’이란 미명 아래 고구려나 발해 역사를 중국에 편입시키려 노력해온 중국은 백두산을 부각시켜 공정 마무리를 안팎에 알릴 계획이다.●창춘은 어떤 곳중국 지린(吉林)성 성도인 창춘은 자동차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의 자동차 생산량은 대륙 전체의 5분의1을 차지한다.곡창지대로도 이름난 이곳은 ‘영화의 도시’,‘삼림의 도시’란 별명도 있다.‘마지막 황제’로 낯익은 청나라 푸이가 머물렀던 만주국 수도로서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중국인의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여름 최고기온은 섭씨 40도에 육박하며, 겨울엔 영하 37도까지 떨어진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 여진족과 만주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 여진족과 만주Ⅱ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장차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대격변의 첫걸음을 내디딘 해는 1583년이었다. 이 해부터 시작해 1626년 사망할 때까지 누르하치의 일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여진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단계에서 출발해 나중에는 직접 명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누르하치는 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는가? 그리고 명은 왜 누르하치가 댕겼던 불씨에 휘말려 끝내 자신의 온몸을 태우고 말았는가? ●명, 건주·해서·야인 여진을 주무르다 명나라 시절 만주의 여진족은 거주지역에 따라 크게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 여진으로 구분되었다. 누르하치를 배출한 건주여진은 주로 요동에 가까운 조선의 압록강 너머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일찍부터 농경에 종사했다. 해서여진은 과거 금을 세웠던 아구다의 직계로서 오늘날 하얼빈 부근과 송화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다. 야인여진은 송화강 북방, 흑룡강 남쪽에 거주했다. 명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진 데다 주로 수렵에 종사했기 때문에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되었다. 여진족 내부에서 아구다와 같은 패자가 출현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명나라는 정치적 통제 이외에도 경제적 통제 수단을 교묘히 활용했다. 당시까지 여진족들은 곡물을 비롯해 소금, 포목, 철제 농기구 등 생필품을 자급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산물인 말(馬), 모피, 인삼, 진주 등을 주고 명나라 상인들로부터 생필품을 구입했다. 명 조정은 상인들끼리 교역하는 장소를 엄격히 제한했을 뿐 아니라, 명나라 황제 명의의 칙서(勅書:교역허가증)를 소지한 여진족 유력자에 한해서만 교역을 허가했다. 명이 정한 규칙을 위반하거나, 명의 권위에 도전하려 할 경우 칙서는 가차없이 회수되었고 교역은 금지되었다. 생필품 공급이라는 ‘목줄’을 틀어쥠으로써 여진족들을 길들이려는, 명의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하지만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수단이었다. 그같은 명의 지배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 건주여진 출신의 왕고(王)였다. 누르하치의 외조부로 알려진 왕고는 1574년, 부족의 병력을 이끌고 랴오양과 선양을 공격했다. 명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신에게 교역을 금지시킨 데 따른 반감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하지만 3000여명에 불과했던 왕고의 병력은 6만명에 이르는 명의 진압군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왕고는 겨우 탈출해 해서여진의 하다부(哈達部)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하다부는 왕고를 포박하여 명군 사령관 이성량(李成梁)에게 넘겼고, 왕고는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돼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값으로 얻은 기반 이성량이 왕고를 진압할 무렵,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覺昌安)와 부친 타쿠시(塔克世)는 이성량의 편에 서서 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타쿠시는 장인인 왕고를 진압하는 명군의 작전에 협조했고, 그 대가로 명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했다. 1583년, 더 참혹한 비극이 일어났다. 자신의 부친을 죽게 만들었던 하다부와 명군에 대해 원한을 품었던 왕고의 아들 아타이(阿台)가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아타이는 하다부와 대립했던 해서여진의 예헤부(葉赫部) 등을 끌어들여 하다부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성량이 걸림돌이었다. 이성량은 교창가와 타쿠시, 누르하치까지 이끌고 아타이가 쫓겨 들어간 고륵채(古勒寨)성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성이 거의 함락될 무렵, 교창가와 타쿠시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아타이의 아내가 교창가의 손녀(누르하치의 백부의 딸, 누르하치의 사촌)였기 때문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타이는 항복을 거부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고,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이윽고 명군은 성안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는데, 교창가 부자도 그 와중에 적으로 오인되어 피살되었다. 눈앞에서 조부와 부친이 피살되는 장면을 목도했던 누르하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명은 이제 그에게 ‘만세불공의 원수’가 되었다. 누르하치가 훗날 명에 선전포고하면서 일곱 가지 원한(七大恨)을 내세웠는데, 그 가운데 명군에 의한 부조(父祖)의 피살을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쨌든 난감해진 것은 이성량과 명 조정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피살이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누르하치에게 칙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으로 주었다. 동시에 그에게 타쿠시가 명으로부터 받았던 도독(都督) 직함을 물려주었다. 이윽고 1583년 5월, 누르하치는 부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 대상은 명이 아니라, 명에게 협조적이었던 주변의 건주여진 부족이었다. 당시 스물다섯의 약관에 불과했던 누르하치에게 명은 아직 상대하기가 몹시 버거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명으로부터 받은 칙서 30통은 군사활동에 필요한 자금줄이 되었다. 칙서를 많이 가진 누르하치에게로 명 상인들과 무역을 원하는 여진의 인삼, 모피, 진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인삼, 모피, 진주의 유통로를 장악했으며 무역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는 이제 군사 지휘관인 동시에 확실한 기반을 지닌 거상(巨商)이기도 했다. 1589년, 누르하치는 마침내 건주여진 부족 전체를 통일했다. 누르하치에게서 ‘아구다’의 재림(再臨) 조짐을 간파한 이성량은 경악했다. 그는 명 조정에 건의하여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그를 명의 관직체계 속으로 끌어들여 견제하기 위한 응급수단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채수(債帥)’ 이성량 이성량(1526∼1618)은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다. 그의 조상은 본래 조선 출신으로, 명나라 초기에 요동으로 건너가 철령(鐵嶺)에 정착했다. 뒤에 군공을 세워 철령위 지휘첨사(指揮僉使)가 되었고 40세 이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1570년부터 1591년까지 만주에서 여진과 몽골 세력을 견제하는 명의 최고 군사책임자를 역임했다. 승패가 무상하고, 그에 따른 상벌이 엄격할 수밖에 없는 무장의 세계에서 무려 22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는 이성량을 ‘채수(債帥)’라고 부른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조정의 고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그들의 비호 아래 자리를 유지하는 장수를 말한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와 결탁하여 만주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모피와 진주를 밑천으로 명 조정의 중신들을 구워삶았다. 그 결과 그의 패전은 ‘없었던 일’이 되고, 시원찮은 승전은 ‘대첩(大捷)’으로 둔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이여백(李如柏)은 누르하치 동생의 딸을 첩으로 맞이했다. 요동에서는 ‘오랑캐 추장의 사위가 요동을 지킨다.’는 비아냥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권력과 부를 한손에 거머쥔 이성량이 누르하치를 제대로 견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장기집권’으로 타락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부패한 명 조정의 중신들이 있었으며, 다시 그 뒤에는 태만하고 무능한 만력(萬曆) 황제가 있었다. 이같은 배경에서 1583년은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성량의 군대가 좀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누르하치의 부조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고, 누르하치가 복수심에 불타 명과의 전쟁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궁극에는 조선도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며, 명·청 교체와 같은 대격변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지만 누르하치와 이성량의 행보를 보면 문득 ‘나비효과’라는 용어가 떠오른다.‘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한달 후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물리학의 비유 말이다. 사소해 보이는 인간의 행동 하나가 엄청난 파국으로 이어졌던 역사의 거울 앞에서 문득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이용원 칼럼] 만주인가 동북3성인가

    [이용원 칼럼] 만주인가 동북3성인가

    사흘 뒤면 중국 지린성 창춘시에서 제6회 동계 아시안게임이 막을 올린다. 우리 국민은 TV뉴스 등으로 다양한 개막행사 소식을 접하면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시안게임의 주제가인 ‘야저우즈싱(亞洲之星)’이 백두산을 테마로 한 노래인 데다, 개막 공연도 백두산을 소재로 인간과 자연·체육·문화를 융합해 표현하는 작품이라고 주최 측이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에서 만나는 백두산은 더 이상 한민족의 영산이 아니다. 중국의 산인 창바이산(長白山·장백산)이다. 중국이 ‘백두산 공정’을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과 관련해서는 주제가·개막공연 말고도 지난해 9월 백두산 천지에서 아시안게임 성화에 불을 댕겼다. 또 중국이 자체 기술로 처음 개발한 고속열차 이름을 ‘창바이산호’로 지어 최근 시험운행을 했다. 백두산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는가 하면, 지난 22일 개막한 ‘창바이산 국제 눈문화 관광절’도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이 모두가 중국 내에서, 또 국제사회에서 창바이산이 중국 것임을 각인하려는 의도이다. 백두산 영유권은 현재 북한과 중국이 절반씩 갖고 있다. 그런데 북한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백두산 공정’에 침묵하는 사이 중국은 야금야금 백두산 전체를 창바이산으로 둔갑시키려 한다. 이미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고구려·발해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역사 침략’을 벌인 데 이어 이제는 백두산까지 몽땅 집어삼키려는 ‘지리적 침탈’에 나선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역사지리 상으로 만주 소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까닭은 만주라는 지역이 그만큼 동북아시아에서 차지하는 경제·안보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만주의 중요성은 민족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일찍이 강조한 바 있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의 전신) 주필 시절인 1908년 7월25일자에 게재한 논설 ‘한국과 만주’에서 “한국과 一衣帶水(일의대수)를 격하여 한국의 영욕화복을 불러오는 땅이 한 곳 있으니 곧 만주”라고 밝혔다. 이어 단군이 만주 일대를 개척한 이래 고구려·발해까지 한민족의 무대였다가 그 맥이 끊긴 사실을 개탄했다. 그는 “한민족이 만주를 得(득)하면 한민족이 강성하며, 타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민족이 劣退(열퇴)한 것이 4000년 변하지 않는 이치”라고 결론지었다. 만주는 현재 중국 땅이다. 따라서 중국이 자국 영토에서 벌이는 일을 우리가 어찌해 볼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 할 것이다. 다만 기억할 것은 만주가 누천년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기준대로’ 만주를 의식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중국측 기준을 무조건 따르는 예가 적지 않은데 그 하나가 ‘동북3성’이라는 명칭이다. 중국은 현재 만주를 행정 체계에 따라 동북3성이라 부른다. 곧 지린·랴오닝·헤이룽장 등 3개 성이 동북쪽에 있다고 해서 부르는 표현이다. 반면 만주란 명칭은,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운 뒤 스스로 지은 민족의 이름이어서 그 역사가 400년에 가깝다. 따라서 국내 일각에서 만주 대신 동북3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백두산을 ‘창바이산’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주인가, 동북3성인가. 우리가 민족의 옛땅을 잊지 않으려면 어떤 이름을 택해야 할지는 불 보듯 분명하다.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조선명가 안동김씨/김병기 지음

    우리는 안동 김씨를 흔히 하나의 가문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시조가 다른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 두개의 가문으로 나뉜다. 구안동 김씨는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이 시조인 반면, 신안동 김씨는 고려 태조의 삼태사(三太師) 가운데 한명인 김선평을 그 시조로 한다. 세도정치로 이름을 떨친 안동 김씨는 신안동 김씨다. 신안동 김씨는 조선말 순조 이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 자리를 독차지하며 권력을 좌지우지했다.23대 순조비 순원왕후,24대 헌종비 효현왕후,25대 철종비 철인왕후 등 세명의 왕후를 연이어 배출해 왕실의 외척으로도 세도를 부렸다. 안동 김씨는 과연 세도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권문세족에 불과한가. ‘조선명가 안동김씨’(김병기 지음, 김영사 펴냄)는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안동 김씨가 우리 역사의 어둠이자 동시에 빛이었음을 강조한다. 조선 정치의 최정점에 선 신안동 김씨는 왕을 막후에서 조종하며 조선의 역사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신안동 김씨의 가문사는 곧 조선의 정치사였다.‘조선은 김씨의 나라이지 이씨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안동 김씨는 비극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수항으로부터 김창집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 4대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시대를 이끌어간, 자타가 인정하는 명문가였다. 안동 김씨는 조선왕조 사상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집안의 하나이며, 나라의 위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절과 절의의 본가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2상(二尙)이라 불리며 안동 김씨의 위상을 높였다. 책은 구한말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야기 등 독립을 위해 힘쓴 안동 김씨들의 사례도 소개한다. 안동 김씨야말로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데 앞장선 가문이라는 것이다. 배천 김씨로 독립운동가의 후예인 저자(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는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명문가가 적지 않지만 문중사(門中史)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며 “이는 문중사학이 가문의 영광에만 집착, 문중 인물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9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남긴 병자호란의 발발은 16세기 후반∼17세기 중반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이른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여파가 조선으로 밀어닥친 결과였다. 명청교체의 주역은 여진족(女眞族)이었다. 그들은 병자호란 7년 뒤인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병자호란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먼저 여진족과 누르하치의 성장과정을 살펴본다. ●여진족, 만주, 그리고 한국사 여진은 상고 시기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던 퉁구스 계통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발상지이자 활동무대는 우리가 보통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이었다. 만주란 과연 어떤 곳인가? 많은 한국인들은 만주 하면 먼저 고구려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벌판이기도 하다. 해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을 찾고, 백두산 천지(天池)에 오른다. 한국인들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그리고 천지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고구려의 영광’을 추억한다. 한국인들에게 이렇듯 각별한 의미를 지닌 만주는 지난 1000년 동안 그야말로 풍운의 땅이었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만주는 한국인들과는 멀어졌다. 이후 19세기까지 만주에서는 거란, 여진, 몽골, 한족, 그리고 다시 여진족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1945년 이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격전이 벌어진 뒤, 만주는 중국 땅이 되었다. 만주에서 일어나 대제국 청을 세운 여진족은 오늘날의 중국에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었다. 청나라가 차지했던 광대한 땅이 고스란히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계승된 것이다. 명나라 시절, 한족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이자 ‘금수(禽獸)’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청은 1644년 명을 접수한 이래 영토를 확장하여 신장(新疆), 티베트, 내몽골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청나라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영토는 과거 명나라 시절보다 거의 40% 가까이 불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할 무렵, 여진족의 인구는 대략 50만, 한족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후 여진족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자, 동시에 여진족과 청조 지배층의 정치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만주에서는 700만 정도의 여진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고유의 말과 문자를 말하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상 한족에게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은 비록 병자호란에서 청에 항복했지만 한(韓)민족은 여전히 살아남아 독자적인 국가와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지하에서 이같은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병자호란은 비록 치욕의 역사였지만, 중국의 무시무시한 동화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부심만은 우리의 ‘엄청난 자산’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글을 이어간다. ●아구다(阿骨打)의 추억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신빈(新賓)에 있는 만족(滿族) 자치현(自治縣)에 가면 허투아라(赫圖阿拉)라는 성이 남아 있다. 이곳은 바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장차 청 제국을 건국하는 기반이 되었던 흥경노성(興京老城)의 옛터이다. 왕궁이 있었던 곳의 면적은 기껏해야 우리나라 시골의 여느 초등학교 넓이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과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집무했던 한왕전(汗王殿)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왕성(王城)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허투아라성의 모습은 16세기 후반까지 중화제국 명의 지배를 받으며 만주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의 초라한 상황을 상징한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먼 조상들은 결코 초라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한 이후 여진족들은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만주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거란족은 요(遼)를 세워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만주와 화북일대를 차지하는 제국이 되어 남쪽의 송(宋)과 각축을 벌였다. 1115년 그런 와중에 여진족 내부에서는 아구다(阿骨打)라는 영걸이 나타났다. 그는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금(金)이라고 했다. 훗날 누르하치도 나라 이름을 한때 대금(大金)이라 지칭했는데, 사람들은 보통 후자를 아구다가 세웠던 금과 구별하여 후금(後金)이라고 부른다. 아구다의 금은 이후 더욱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시키고 1127년엔 한족 왕조 송을 양자강 남쪽으로 밀어냈다. 송의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은 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남송(南宋)은 금에 세폐를 바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한족들에게는 굴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금은 비록 1234년 몽골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후 한족들에게 아구다와 금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368년 중원에는 다시 한족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중원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베이징을 버리고, 북으로 도주하여 고비사막 방면까지 쫓겨갔다. 명은 다시 만주 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하라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거의 백년 만에 중원을 되찾아 한족들의 자존심을 회복한 명의 여진정책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여진족을 통제하되 그들을 너무 강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섬세하게’ 길들이는 것이었다. 명은 흩어져 있는 여진족들 사이에서 과거 아구다와 같은 패자(覇者)가 출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여진족이 다시 커다란 세력으로 뭉치게 될 것이고 송나라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진족들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명은 북으로 도망간 몽골의 원나라(보통 北元이라 부름)를 여진족을 이용하여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명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고려한 셈이다. 그러려면 여진족이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명의 여진정책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명은 고심 끝에 14세기 후반부터 만주의 여진족들을 분할지배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명은 랴오허(遼河)를 기준으로 서쪽, 즉 오늘날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구를 설치,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했다. 그리고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산하이관(山海關) 부근부터 관전(寬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변장(邊牆)이라 불리는 담을 쌓았다. 여진족들은 이 담을 넘어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랴오허 동쪽, 오늘날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구를 두어 여진족을 통치했다. 그 아래에는 위소(衛所)라는 기관을 두어 여진족 출신을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위소의 우두머리를 임명할 때나, 여진족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명의 지휘부가 개입했다. 여진족의 자치를 허용하되, 여진족 유력자들을 명의 행정체계에 포섭하여 통제하는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다. 건국 직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명의 여진정책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은 명 내부의 정치가 그런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력제(萬曆帝)의 정치적 태만과 무능, 그에 더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명 외부의 격변까지 맞물리면서 여진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위항시인들이 주관하는 백일장인 백전(白戰)에 수백명이나 참석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수경이나 장혼이 한양 인왕산에서 커다란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항시인 이경민이 편찬한 위항인들의 전기집 ‘희조질사(熙朝 事)’의 천수경편에 의하면 “한달에 60전을 내게 하니…(줄임)배우는 아이가 많게는 3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제자 가운데)나은 자가 못한 자를 가르쳤다.”고 했으니, 조를 나누어 가르칠 정도로 체계를 갖춘 기업형 서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혼의 서당에도 아들과 손자 또래의 제자들이 모여 글을 배웠다. ●교정 보고 책 만드는 일로 반평생을 보낸 장혼 장혼(張混·1759∼1828)의 아버지 장우벽(張友壁)은 날마다 인왕산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그가 노래 부르는 곳을 가대(歌臺)라고 불렀다. 장우벽 자신은 글을 웬만큼 알았지만, 총명한 아들 장혼을 서당에 보내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도 쓸 데가 없는데다, 오히려 중인 신분의 한계를 탄식하며 처절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혼의 어머니 곽씨가 집에서 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 가난한 집안 살림은 장혼이 도왔다. 여섯살 때에 개에 물려 오른쪽 다리를 절었지만,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도맡아 했다.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가 1790년에 옛 홍문관 터에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고 여러가지 책들을 인쇄하여 반포하려고 하자, 오재순이 장혼을 사준(司準)에 추천하였다. 교정 보는 일을 맡은 사준은 정9품 잡직이었는데, 기술직 중인들이 맡는 말단 벼슬이었다. 그는 “원고와 다른 글자를 살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솜씨가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 같았다. 규장각의 여러 고관들 가운데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그에게 일을 맡겼다.”고 한다. 책 한권을 다 만들면 의례 품계를 올려주는 법인데, 그는 번번이 받지 않고 사양하였다. “적은 봉급은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받지만, 영예로운 승진은 제가 욕심내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유를 밝혀, 정조가 봉급을 더 많이 주었다. 모친상을 당한 3년을 빼고는 1816년까지 줄곧 사준으로 일하며, 사서삼경을 비롯해 ‘이충무공전서’ ‘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책들을 간행하였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장혼이 교정을 보았다. 장혼이 교정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나자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그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금속활자를 만들려면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 민간에서는 대개 목판으로 인쇄했는데, 재산이 넉넉하고 인쇄할 책이 많은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활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기 문중의 책을 다 찍은 다음에는 그 활자를 남에게 빌려주며 돈을 받기 때문에 처음에 많은 자본을 들이면 어느 정도 상업성도 있었다. 돈암(敦岩)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누이가 순조의 생모 수빈 김씨였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지극한 총애를 입어 호조판서에 오르고 훈련도감을 맡았다. 그는 가통을 세우기 위해 5대 이하의 유고를 모아 ‘반남박씨 오세유고(潘南朴氏五世遺稿)’를 편집했으며,1816년에 정교한 금속활자를 직접 만들어 세고와 함께 아버지의 문집 ‘금석집(錦石集)’을 인쇄하였다. 청나라 취진판(聚珍版) 전사(全史,二十一史)의 글자를 자본으로 인서체(印書體) 동활자 20만자를 주조한 것이다. 박종경이 개인적으로 만든 활자를 전사자(全史字), 또는 그의 호를 따서 돈암인서체활자(敦岩印書體活字)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주변에 빌려줘 여러 종류의 책이 만들어졌다. 박종경의 활자로 인쇄한 초기 십여종의 책은 대부분 장혼이 교정하였다. ●목활자 만들어 서당 교재를 인쇄 인왕산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장혼은 ‘천자문’ 말고도 여러가지 교과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자기 서당에 찾아오는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직접 찾아와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좋은 교과서가 필요했다. 중국의 역사와 인물 위주로 만들어진 ‘천자문’이 좋지 않은 교과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이미 비판해, 나름대로 대안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다. 장혼이 처음 만든 교과서는 ‘아희원람(兒戱原覽)’이다.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 보아야 할 내용을 가려뽑은 책이다. 정리자체 철활자를 빌려 1803년에 인쇄하였다. 그런데 남의 활자를 빌려오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했다. 그래서 인쇄 전문가였던 장혼은 스스로 필서체(筆書體) 목활자를 만들었다. 웬만한 책을 만들려면 금속활자를 10만개 넘게 주조해야 했는데, 장혼의 재산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나무로 활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윤병태 교수(전 충남대문헌정보·작고)는 이 목활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폭 12mm 내외, 높이 8mm 내외의 비교적 폭이 넓은 납작한 평면을 가진 활자로 보인다. 그 자체(字體)는 필서체로 되어 있으며, 다른 관주활자(官鑄活字)에 비해 약간 작은 아름다운 글씨체로 보인다. 활자의 자본(字本)을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보이지 않으나, 김두종은 초예(草隸)에 능한 장혼의 의장(意匠)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장혼이 처음 목활자로 인쇄한 교과서는 ‘몽유편(蒙喩篇)’과 ‘근취편(近取篇)’ ‘당률집영(唐律集英)’ 세권이다. 모두 “경오활인(庚午活印)”이라는 인기(印記)가 있다. 경오는 1810년이니 그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목활자는 금속활자보다 빨리 닳아서 찍을수록 글씨가 뭉툭해지는 단점이 있는데,1810년에 인쇄된 책들은 글자체가 비교적 정교하다. 장혼이 만든 목활자는 크기가 작지만 만든 솜씨가 정교하면서도 글자 모양이 예뻐서, 이 활자로 찍은 책들은 금속활자본과 달리 부드러운 맛이 있다. 장혼이 직접 짓거나 편집한 책은 위항시인 333명의 시 723수를 천수경과 함께 편집한 ‘풍요속선(風謠續選)’에서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요약한 ‘동사촬요(東史撮要)’까지 24종이다. 그는 자신의 책만 인쇄한 것이 아니라 1816∼1818년 위항시인들의 책 5종을 자신의 목활자로 인쇄해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최성환이 이 활자를 인수해서 장혼의 제자나 후배 문집 5종을 인쇄했다. 그의 문집인 14권 분량의 ‘이이엄집(而已集)’은 끝내 간행되지 못해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그가 편집 인쇄한 책들을 통해 위항문화가 널리 퍼졌으며, 그의 서당 제자들이 금서사(錦西社)와 비연시사(斐然詩社)로 인왕산 시사의 대를 이었다. ■ 아희원람이란 ‘아희원람(兒戱原覽)’은 고금의 사문(事文) 가운데 아이들이 찾아보아야 할 내용을 열가지 주제로 가려뽑은 책이다. 1803년에 제작된 본에는 동국(東國)·수휘(數彙)·보유(補遺)가 더 실렸다. 몽유편(蒙喩篇)은 낱글자로 배웠던 천자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어휘집이다. 상권에는 신형(身形)·연기(年紀)·칭호(稱號)·위분(位分)·명물(名物)의 기본어휘 1049개에 동의어나 유사어가 붙어 있다. 우리말 어휘도 383개나 실렸다. 하권은 인명록인데 덕행(德行)부터 이단(異端)까지 일곱 부류 1 441명의 이름을 실었다. 근취편(近取篇)도 어휘집인데 13장까지는 네글자로 된 속담과 고사숙어 1046개, 그 다음에는 세글자로 된 고사숙어 98개, 그 다음에는 두글자로 된 숙어 192개를 실었다. 아희원람은 윤병태 교수가 확인한 판본만도 7종이나 될 정도로 자주 인쇄돼 널리 읽혔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늘어나는 귀화자] 시험문제와 오답들

    “제주도 명산으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갖고 있는 산은?” 귀화 신청자들이 가장 어려워한 질문이다. 신청자들은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 가 본 적이 있거나 귀에 익은 산 이름을 댔다. 최정용(37)씨는 면접에서도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은 설악산”이라고 우겼다. 면접관이 짐짓 “제주도는 가봤어요?”라고 유도하자, 최씨는 “제일 남쪽에 있잖아요. 아!”라며 무릎을 탁 쳤다. 이 문제를 틀린 김려화(23·여)씨는 “시험을 보고 나서 어머니가 ‘한번 구경 오세요’라는 뜻으로 산 높이가 1950m’라고 설명해 줬다.”면서 “올해는 제주도 한라산을 가보고, 다음에는 고향 옌볜에서 가깝지만 못가 본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며 웃었다. 출제자 입장에서는 점수를 주기 위해 낸 문제도 우리말에 서툰 귀화 신청자들에게는 함정이 된다. 이번 시험에서는 동물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쓰는 문제가 그랬다.‘닭’과 ‘돼지’가 정답이었지만,‘달’,‘되지’ 등 맞춤법을 틀린 답들이 눈에 띄었다.‘기린’을 묻는 질문에는 영어로 기린을 말하는 ‘지라프(giraffe)’를 잘못 써 ‘지라퐈’라고 쓰거나,‘반말’‘긴 목 사슴’ 등의 오답이 나왔다. 신임 유엔사무총장을 묻는 문제에서도 ‘반기문’이 아닌 ‘노무현’‘한명숙’을 고르는 신청자들이 많았다. 면접관이 틀린 부분을 지적하며 “한명숙씨가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자 “1945년 이전 사람인가요.”라고 되묻는 신청자도 있었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수험생도 많다. 파키스탄인 야곱 에메드(39)씨는 부사어 빈칸 채우기에서 실수를 했다. ‘월급을 한달에 ( ) 받습니까.’‘그 회사는 일년에 ( ) 휴가를 줍니까.’라는 예시문을 주고 괄호 안에 들어갈 말 ‘얼마나-며칠이나’를 찾는 객관식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야곱씨는 보기를 선택하지 않고 괄호 안에 각각 ‘백오십만원’,‘십일 정도’라고 적어 넣어 오답 처리됐다. 동포이지만 이국에서 자란 신청자들에게 우리 역사와 사회는 낯설기만 하다.“만주를 차지해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땅을 가졌던 국가”를 묻는 주관식 문제에서 신청자 한명은 ‘고조선 또는 고구려’라고 답란을 채웠다. 면접관도 답지를 보고 “아주 틀린 답은 아니네요.”라며 미소짓고는 그 자리에서 두 고대 국가의 차이를 설명해줬다. 같은 질문에 ‘청나라’‘북한’‘동북3성’이라고 답한 신청자들도 있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 추사 김정희, 중인들과 만나다

    시곗바늘을 조선 후기,200여년 전으로 돌려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 새롭게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전문기술자 신분인 중인(中人), 즉 위항인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현재의 골목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양의 창덕궁을 중심으로 옥인동, 통의동, 누하동 등의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언저리에는 궁중 기술자들이 살았다. 이들은 60여개의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특히 이들은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한 신지식인들이었다. 조선 후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실용주의적 역할이 지대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그 발자취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화를 재발견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연세대 허경진 교수의 눈을 통해 연중기획으로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본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누구 못지않게 19세기초 중인들과 교류를 가진 양반 선각자였다. 그는 중인들의 모임터인 송석원의 글씨를 써주는가 하면 조수삼·이상적·오경석과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한양 인왕산의 서당 훈장 천수경(千壽慶·1758∼1818)은 집안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다. 옥류천(玉流泉) 위 소나무와 바위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호를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고 했다. 아들 다섯의 이름은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이다. 첫째 소나무와 둘째 바위는 자기 집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고, 셋째는 아들 셋이면 넉넉하다는 뜻에서 ‘삼족’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들 하나가 더 생기자 너무 많다는 뜻으로 ‘과(過)’라 했는데, 하나가 더 생기자 “이게 웬 일이냐.”는 뜻으로 ‘하(何)’라고 했다. 창덕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고, 그 오른쪽 인왕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 같은 중인, 경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지대가 높고 외져서 집값이 쌌기 때문에, 가난한 서리들이 관청과 가까운 인왕산쪽으로 올라와 살게 된 것이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누각골(지금의 누상동)과 옥류동(지금이 옥인동)에서 각기 흘러내리다가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에서 만났다. 깊은 산속에서 옥같이 맑게 흐르는 이 시냇물을 옥계(玉溪)라고 했다. 인왕산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들이 옥계 언저리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1786년 7월16일 옥계 청풍정사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달 밝은 밤 솔숲에 흩어져 앉아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다가, 정기적으로 모여 시를 지으며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13명이 모여 이날 지은 글들을 모은 ‘옥계사(玉溪社)’ 수계첩에 ‘차서(次序)’가 실려 있어 구성원의 이름과 나이를 알 수 있다. 장혼은 발문에서 “장기나 바둑으로 사귀는 것은 하루를 가지 못하고, 술과 여색으로 사귀는 것은 한 달을 가지 못하며,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는 것도 한 해를 넘지 못한다.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문학으로 사귀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고, 그때마다 제목을 정해 시를 지었다. 주로 정월 대보름, 삼짇날, 초파일, 단오, 유두(6월보름), 칠석, 중양절(9월9일), 오일(午日), 동지, 섣달그믐에 모였다. 또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돈을 모아 축하해 주기도 했다.1791년 6월 보름날에도 옥계에 모여 시를 지었는데, 달밤에 술 마시며 시 짓는 모습을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림으로 그렸다. 솔숲 큰 바위에 ‘松石園’이라 쓴 곳이 바로 이들의 모임터인데, 이날은 풍악 없이 조촐하게 모였다. 제시(題詩)는 여든을 바라보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이 썼는데, 옥계사 동인이 아니라 선배격인 백사(白社) 동인으로 격려한 것이다. ●당대 문인들 송석원서 교류하다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 관장) 서리였던 마성린은 살림이 넉넉했기에 위항(委巷) 시인들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평생 인왕산 일대를 떠나지 못하고 몇차례 집을 옮겨가며 살았다. 그는 늘그막에 ‘평생우락총록(平生憂樂總錄)’이라는 자서전을 지었다. 제목 그대로 기쁘고 슬픈 한평생이다. 그의 집에 수많은 시인 화가 음악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으며, 이제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시첩에 와서 그림에 글씨를 써주며 격려했다. ‘송석원시사’가 장안의 화제가 되자, 문인들이 이 모임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해마다 봄가을이 되면 남북이 모여 큰 백일장을 열었는데, 남쪽의 제목은 북쪽의 운(韻)을 쓰고, 북쪽의 제목은 남쪽의 운을 썼다. 날이 저물어 시가 다 들어오면 소의 허리에 찰 정도가 됐다. 그 시축을 스님이 지고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찾아가 품평받았다. 장원으로 뽑힌 글은 사람들이 베껴 가면서 외웠다. 무기를 가지지 않고 흰 종이로 싸우는 것이라서 백전(白戰)이라고 했는데, 순라꾼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던 사람을 붙잡아도 “백전에 간다.”고 하면 놓아 주었다. 송석원시사가 커지자, 천수경이 60세 되던 해에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송석원시사가 결성되던 해에 태어났는데, 어느새 그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름이 났던 것이다. 추사의 집은 충남 예산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이 잘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인왕산 건너편의 통의동에 주로 살았다. 수령 600년의 통의동 백송(白松)이 10여년 전에 수명을 다해 쓰러졌는데, 이 나무가 바로 추사의 집 정원수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지자, 영조가 통의동에 큰 저택을 하사했다. 너무 큰 집이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고 불렸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는데,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마저 세상을 떠나 큰 집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추사 32세에 송석원을 쓰다 송석원시사의 부탁을 받은 추사는 예서체의 큰 글자로 ‘松石園’을 쓰고, 그 옆에 잔 글씨로 ‘정축(丁丑) 청화(淸和) 소봉래서(小蓬萊書)’라고 간기를 쓴 뒤에 낙관했다. 정축년은 1817년이니, 추사의 나이 32세. 청화는 음력 4월(또는 2월)이고, 소봉래는 추사의 또 다른 아호이다. 예산 고향집 뒷산을 소봉래라 했는데, 청나라에 다녀온 뒤부터 호를 자주 바꾸는 습관이 생겼다. 1809년 10월에 호조참판으로 있던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24세 되던 추사도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따라나섰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사신뿐만 아니라 상인·학자·승려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했지만, 조선초부터는 국경을 폐쇄하고 사신만 오가게 했다. 합법적으로 가볼 기회는 사신, 또는 사신의 수행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사신들은 자기의 자제를 개인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서 견문을 넓혀 주었는데, 이를 자제군관이라고 했다. 추사의 스승 박제가가 자제군관으로 가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보고 돌아와, 추사에게 반드시 청나라를 구경하라고 당부했다. 청나라의 문인 학자들에게는 이미 추사를 한껏 자랑해 놓았다. 추사는 연경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阮元)을 만나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추사는 이때부터 상황에 따라 당호와 아호를 새로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난 것이 더 큰 행운이었다. 그의 서재 석묵서루에는 희귀본 금석문과 진적(眞蹟) 8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추사는 조선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진본들을 맘껏 보았고, 모각본까지 선물받았다. ●청 문물 경험후 서체 달라져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그의 글씨가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추사의 글씨가 바뀐 과정을 논하면서, 청나라에 다녀온 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청나라에 다녀온 뒤)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그의 글씨를 열심히 본받았다.(그래서 이 무렵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꺼운데다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씨가 바로 ‘松石園’ 석 자이다. 장중하면서도 아름답다. 박제가의 제자였던 추사는 신분의 벽을 넘어서 송석원시사의 조수삼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 제자, 조희룡이나 전기 같은 중인 화가들을 길러냈다. 위항시인의 시가 순수하다는 성령론(性靈論)이나 ‘인재설(人才說)’도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나왔다. 송석원은 위항시인들의 모임터로도 이름났지만 김수항(안동 김씨), 민규호(여흥 민씨), 윤덕영(해평 윤씨) 등의 권력가들이 서로 집을 넘겨주며 살았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은 이 일대가 고급 주택가로 바뀌었지만, 시멘트 벽속에 ‘松石園’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고, 복개된 길 밑으로는 옥계가 흐르고 있다. 인왕산 재개발을 앞두고, 이 일대의 문화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허경진 연세대 교수 > ■ 중인이란 중인(中人)이란 신분계급으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사이를 말한다. 중인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좁은 의미로는 주로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譯官)·의관(醫官)·율관(律官)·산관(算官)·화원(畵員) 등 기술관원을 총칭했다. 이들은 잡과(雜科) 시험에 합격, 선발된 기술관원이거나 잡학 취재(取才)를 거쳐서 뽑혔다. 넓은 의미로는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庶孼), 중앙의 서리(胥吏)와 지방의 향리(鄕吏), 토관(土官)·군교·교생·경아전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 비하여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신분과 직업은 세습됐다.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일반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의해 관직 승진에도 제한이 가해졌다. 또 이들은 지방 양반의 명단인 향안(鄕案)에 등록되지 못했고, 향교(鄕校)에서도 양반의 아래에 앉아야 하는 등 천시를 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이나 행정경험을 통해 양반 못지 않는 능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오늘날의 통역관에 해당되는 역관(譯官)들은 17세기부터 청(淸)나라와의 무역이 왕성해짐에 따라 자주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교섭해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자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지식과 특수한 문서양식, 그리고 독특한 시문(詩文)인 위항문학(委巷文學)을 발전시켰으며 외세에 의한 변동기에 민감한 정세판단으로 전통문화의 해체와 근대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필자 허경진은 ▲1952년 목포 출생 ▲70년 제물포고 졸업 ▲74년 연세대 국문학 학사 ▲84년 연세대 박사 ▲84년∼93년 목원대 교수 ▲93∼2001년 미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연구교수(한국한시) ▲01년∼현재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우리 옛시(80년), 허균의 시화(82년), 평민열전(89년), 다산 정약용 산문집(94년), 연암 박지원 산문집(94년), 매천야록 매월당집(95년), 선조독살 전말기(95년), 조선위항문학사(97년), 허균평전(02년), 악인열전(05년) 등 다수.
  • 추사의 학문·예술·삶 한눈에

    우리가 아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시서화·유불선·문사철을 관통하는 인물로 조선 후기 문화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새로운 국제적 조류를 적극 수용하고, 우리 것과 결합시켜 자기화해냄으로써 19세기 세계서예사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한 위인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추사를 중국 청조문화의 수입업자이자, 한국서예사의 단절자라고 보기도 한다.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해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27일 개막된 ‘한국서예사특별전-추사문자반야(秋史文字般若)’는 이런 비판적 시각을 낳은 서예가로서 단편이 아니라 추사가 쌓은 학예세계의 전모를 밝히는 자리이다. 특별 코너에서는 ‘이헌서예관 소장 추사명품’과 멱남서당 소장 ‘추사가의 한글’전도 동시에 열리고 있다. 세 전시회를 결합하여 추사체가 그의 학문과 예술, 삶과 그 시대의 분위기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태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추사 연구는 토대가 될 추사체의 형성·변화·완성의 실체적 과정을 기준작 중심으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서예와 시문학, 경학, 불교학, 그림 등 연구의 개별 성과를 추사예술의 학문이라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추사서예를 동아시아라는 세계사적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비교 조명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주최측의 문제의식이다. 이번 전시회는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선문대 박물관이 소장한 추사의 자화상을 비롯해 ‘문자반야’,‘문자보리(文字菩提)’,‘사서루(賜書樓)’,‘만휴(卍休)’ 등 큰 글씨와 행서 병풍, 여러 가지 서체를 섞은 파체서(破體書)인 ‘가정유예첩(家庭遊藝帖)’과 서예비평인 ‘완당제산곡신품첩(阮堂題山谷神品帖)’ 등 분야별 대표작 100여점이 출품됐다. 여기에 박제가가 손가락으로 쓴 지두화(指頭畵) ‘한거독서(閑居讀書)’, 정약용의 초서병풍 ‘사언고시’, 초의선사의 ‘문자반야’ 시첩 등 주변인물의 작품 50여점, 옹방강의 ‘애련설도(愛蓮說圖)’와 ‘세한도 발문’ 등 청나라 문인과의 교유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 50여점, 증조할아버지 김한신, 아버지 김노경 등 집안 작품 50여점이 나왔다. 전시회는 내년 2월25일까지 열린다. 이 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 큐레이터가 작품을 설명하는 갤러리토크가 있고,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는 ‘추사학예강화’가 열린다. 매주 월요일 휴관.(02)580-1284.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盧대통령 “高총리 기용 실패한 인사”

    盧대통령 “高총리 기용 실패한 인사”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참여정부의 초대 총리를 지낸 대권 주자인 고건 전 총리의 기용에 대해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라고 밝혔다. 또 “고건 총리가 다리가 되어서 그 (사회지도층) 쪽하고 나하고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랬는데 오히려 저하고 저희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되는 그런 체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고 총리를 통해 보수와 진보의 가교 역할을 기대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는 설명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통 상임위원회에서 고 전 총리를 겨냥,“하여튼 실패한 인사다.”라고 밝혀, 정국에 적잖은 파장을 미치고 있다. 회의에는 관계자 350여명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의 포용 인사는 제가 김근태씨나 정동영씨를 내각에 기용한 그 정도하고 비슷한 수준인데, 저는 비슷하게 하고도 인사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사니까 힘들다.”면서 “링컨 흉내 좀 낼려고 해 봤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재미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2002년 대선 당시 당내 경선주자로 이른바 ‘정적’이었던 열린우리당 김 의장과 정 전 의장을 입각시킨 배경인 셈이다. 노 대통령은 정치 상황과 낮은 지지율을 의식한 듯 “달라질 것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터질 때는 터지더라도 다르게 할 건 다르게 하겠다.”면서 “그게 단임 정신이다.”라고 역설했다. 나아가 “저는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싸잡아가기로 했다.”면서 국정 운영에 변화를 꾀하지 않을 뜻임을 내비쳤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한 반대 주장과 관련,“자기 군대(의) 작전통제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놓고 ‘나 국방 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그런 것이냐.”면서 “작통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내고,(이것은) 자기들(의) 직무유기 아니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더욱이 “(전직 국방장관들을 향해) 모든 것이 노무현 하는 것(을) 반대하면 다 정의라는 것 아닌가.”라고 전제한 뒤 “흔들어라 이거지요. 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노 대통령을 지칭). 예, 그렇게 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노무현 대통령 민주평통 상임위원회의 연설 전문 1년에 한 번 이렇게 함께 보는 아주 소중한 기회인 것 같습니다.세 분 건의말씀도 잘 들었습니다.내용이 참 좋습니다.우선 수준이 전문가 수준입니다.말하자면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정책 보조를 받거나 또는 내각을 통해서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사람들의,그 전문가들의 수준에 조금도 못지 않는 아주 전문적 수준의 것이 들어 있습니다.그러나 한편으로 뜨끔한 데가 있습니다.대통령으로서 가슴이 뜨끔한 데가 있지요.전체 내용에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비판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그런데도 뜨끔합니다. 첫 번째 뜨끔한 이유는,세 분 위원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아주 구체적인 특별한 내용 이외에는 정책 기조가 똑같은 방향에 서 있는데,왜 같은 말씀을 또 반복하실까,이런 의문이 하나 생기고요. 두 번째는 건의 중에 원칙이라든지 신뢰라든지,또는 일관성,국민적 합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이 말씀이라는 것은 이 점에 있어서 우려가 있다 하는 것을 표명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잘 알아들었습니다.제가 구구하게 변명 드리거나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그런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제가 뜨끔했다라고 하는 첫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모든 정책이 우리가 지향한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 아닙니다.그래서 그리로 가려고 하지만 막히는 수도 있고 또 부득이 돌아가야 되는 수도 있고 지체되는 수도 있습니다.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조금 변명할랍니다.변명하기 전에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저도 요즘 제 아내하고 한 이틀에 한 번씩 말다툼을 합니다.저더러 아내가 자꾸 신문 보래요.저도 신문을 직접 보기도 하고,또 신문을 요약 분석한 보고를 따로 보고받기도 하는데,신문 보고 나가서 참모들하고 대화를 하면 자꾸 엇나간다.결국 나중에 맞추어보면 제가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대통령이 긴장하더라도 정보가 입력이 되는데,이것은 몇 날 몇 시,어느 자리에서 누구에게 들은 얘기이고,이건 몇 날 몇 시에 어느 보고서에서 본 얘기고,이것은 어느 신문에서 본 얘기고,이게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정보라는 것은 접수되면서 일정하게 그럴 듯하다 싶어서 반응이 딱 일어나면 그냥 자기의 기억으로 입력되어 버리는 것이지요.입력되어 버리고 그런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그 인식을 가지고 있다가 그 일을 책임지고 있는 참모하고 만나서 얘기해 보면 이게 말이 앞뒤가 안 맞습니다.우리 안보실 참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여러 차례 그런 것을 반복하고 한 다음에는 요즘은 좀 늦더라도 좋으니까 좀 기다립니다.안보실의 보고를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신문이나 이런 것은 구문으로 다시 참고삼아 정리하는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됐을 때 제 판단이 오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그러면 주는 것만 받아먹고 시민들의 폭넓은 다양한 정보는 차단되는 것 아니냐 그런 우려가 있습니다.그래서 신문,방송,인터넷,이 모든 정보를 정부가 전부 다 실시간 전부 정리를 합니다.정리를 해서 그 중에서 정부의 정책에 관련된 기사로서 그 말이 맞다,사실도 맞고 때로는 의견이 맞고,그럴 때에는 그것을 전부 정리를 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한 다음에 잘못된 것은 전부 고칩니다.이것은 언제까지 시행령을 고치겠다,이것은 언제까지 법을 고쳐야 되니까 입법 조치를 취하겠다,이것은 예산 조치하겠다,이것은 우리가 그냥 처분으로서 알아서 하겠다,전부 보고서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쓰면 그것을 우리 정책실에서,국무조정실에서 1차적으로 체크하고 정책실에서도 체크하고,국정홍보실에서는 기사의 건수를 전부 체크해서 주간 보고를 저한테 하게 되어 있습니다.요즘은 제가 너무 바빠서 비서실장이 한 번 더 챙겨보고 월간 보고로 하게 해달라고 좀 줄였습니다.시스템이 안착됐기 때문이지요. 틀린 보도면 어떻게 하냐,대강 어름한 것은 그냥 넘어가고,좀 심하고 명백한 것은 반드시 정정보도를 청구합니다.정정 요청하고,듣지 않으면 정정 보도 신청을 냅니다.신청해서 안 되면 소송까지 가서 청구까지 합니다.물론 정정보도도 있고 반론도 있고 합니다.그 다음에 항의도 있고요.항의 정도로 하고 끝내는 것 있고,그다음에 절반 맞고 절반이 한 쪽이 엉성해서 오해가 생길 소지가 있는 것은 해명을 달아줍니다.이 활동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결과를 제가 전부 수렴해 가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대통령이 정보 흘려버린다,그렇게는 아닙니다.그리고 개인이 혼자 이 신문 저 신문 뒤적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완벽하지요. 그래서 이제 신문기자들이 글을 쓸 때 굉장히 조심합니다.사실을 확인하는 습관이 점차점차 붙어갑니다.함부로 쓰지 않습니다.대신에 괘씸하거든요.옛날에 공무원들은 안 그랬는데,요즘 공무원들은 또박또박 말대꾸를 한단 말입니다.옛날의 장관님들은 기사가 뭐가 나갔든 간에 장관이 ‘편지 잘 받았네.언제 술이나 한잔하지.’ 이렇게,설사 술 안 사더라도.인사를 이렇게 하고 넘어가는데,요즘은 장관은 안 나오고 과장,국장,사무관 이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당신 기사를 그거 정확하지 않소,또박또박 따지게 괘씸하게 됐단 말이지요.어쩌겠습니까? 철저히 파는 거지요.정말 먼지 나는 것 없나? 잘못된 것 없나? 철저하게 파지요.별수 있습니까? 공무원들 정신 바짝 차려야지요.대통령이 일일이 다니면서 감사원장한테 감사 좀 잘하라고 장관 보고 내부 감사 잘하라고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요.기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철저히 챙겨주니까요.그렇습니다.괜찮은 시스템 아닙니까? 수없이 있는데,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것입니다.제가 제일하고 싶었던 것이 원칙입니다.그런데 지금 국민들한테 원칙 없는 정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슬픕니다.그러나 어쩔 수 있습니까? 슬프다 말하고 또 노여워하면 그것도 문제가 되고 그렇지요. 제가 좀 그렇습니다.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어디 가서 항상 강연할 때 절대로 빠트리지 않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신뢰입니다.민주주의 못 해도 신뢰가 있으면 사회가 유지되고,민주주의 해도 신뢰가 무너지면 사회가 유지될 수가 없다.그러므로 신뢰를 나는 우리 사회적 가치의 최상의 위치에 있는 가치로 본다,항상 그렇게 얘기를 하고 다녔습니다.그런데 정책 신뢰성이 계속 문제가 되니까 이 또한 제가 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관성,이건 같은 것이지요.일관성과 신뢰라는 것은 사실은 비슷하게 맞붙어있는 것이지요.생명이지요.국민적 합의 뭐 이런 등등 다 이런 것인데,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소위 원칙들이,제가 가장 존중하고 꼭 실현하고 싶었던 참여정부의 최대의 목표가 지금 이렇게 지적받고 흔들리고 있습니다.좀 더 노력하겠습니다.아니면 좀 더 다른 데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이건 뭐 숙제입니다.저는 결코 승복하지 않습니다.승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도 없습니다. 건의 주신 부분에 대해 사실 다 좋은 말씀입니다.잘못됐다는 얘기는 아니고 말씀이 나온 김에,나온 계기에 한번 얘기 해보자.원칙이라는 것 말이지요.상호주의,거기에 대칭되는 원칙은 뭘까요? 일방주의 아니겠습니까? 문법상 그렇습니다.그런데 참여정부의,상호주의에 대응하는 참여정부의 정책은 실용주의입니다.왜냐하면 상호주의라는 것은 형식적이고 경직된 원칙이 될 수 있습니다.남북관계를 해나가는 데 조건이 다르고 서로의 처치가 너무 다른데,생각도 다르고 다른데,상호주의 해서,어떤 분이 말씀하는 것처럼 니가 한 대 때리면 나도 한 대 때리고,이게 상호주의 아니겠어? 간단하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만 남북관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하고자 하는 목표,평화,신뢰,이런 목적에 맞느냐,맞지 않느냐를 놓고 그때그때 우리가 판단해야지,그냥 상호주의라는 원칙에 묶어두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결코 일방주의적 퍼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목표를 놓고 신뢰를 확보하고,결국은 남북간에 대화로서 보다 큰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냐,그래서 실용주의,상호주의에 대응하는 정책 개념은 실용주의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대북 송금 사건의 수사의 법률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저는 명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시한 적도 없습니다.이것이 많은 논란되고 있습니다만,남북 간에 대화와 교류에 있어서 국민들이 요구하는 것이 투명성이기 때문에 저는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추세가 투명성에 대한 강력한 요구,비록 통치 행위라 할지라도 투명성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고 합법성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어서 제가 이 점은 참여정부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해서 수용했습니다. 사실은 남북관계 형성에 있어서 초법적인 통치 행위가 성립할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그러나 단 하나 그것은 국민들이 수용해 줄 때만 최고 통치권자의 초법적인 통치 행위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마당이면 어려운 것 아니냐,그 당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그 당시 저의 선택이었다.이것도 하나의 원칙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지금 이제 그동안에 몇 번 작은 일들은 있었습니다.원칙을 가지고,북한에서 대화를 중단했을 때 한국도 중단해 버리고 일방적 통보가 왔을 때 내가 거절하라고 명령하고 했습니다.한 번은 거절했는데,우리 통일부라는 데가 그렇습니다.통일부가 어쩌든지 일이 되게 하려는 부이기 때문에,명시적으로 지시를 해도 아 이건 좀 다릅니다.하고 해석을 조금 달리해 가지고 어지간하면 대화를 끊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저는 그 점을 크게 문책하지 않았습니다.문책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대북 지원이 중단되어 있습니다.이것은 원칙이기도 하고,원칙이라기보다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지금 대북 지원을 끊고 있는 것은 인도주의 원칙 또 무슨 상호주의 원칙,이런 원칙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겠다,그 판단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동시행동원칙이나 정부,민간 분리 원칙,다 동의합니다.동의하고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또 미국 정부와 의회를 설득해야 된다는 정 민 위원님,비핵 공영,이런 이름을 쓰진 않지만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좀 공포해 가지고 좋은 이름을 한번 우리도 차용,이대로 차용하든지 한번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그 다음에 냉전 구조 해체와 평화 체제 구축이라는 큰 틀의 합의를 북핵 문제 해결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9.19 공동선언에 보면 바로 이 문제가 다 같이 들어 있습니다.평화 체제에 관한,평화체제협상에 관한 조항도 들어 있고,또 동북아 다자 안보 체제까지 언급되어 있습니다.그래서 9.19 공동선언을 그것이 지금 그냥 저렇게 표류하고 있으니까 아무 가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동북아 다자 안보 체제라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한국이 북핵 문제 해결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때 9.19성명이 나왔다.그 뒤에 미국이 한발 물러서고,물러섰다기보다 BDA 문제가 딱 걸렸는데,참 저도 해석하기 어렵습니다.중국에서 9.19 성명을 서명하고 있는데,그 2,3일 전에 미국 재무부에서는 이미 방코델타아시아에 대한 계좌 동결 조치를 해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보기에는 국무부가 미처 몰랐던 것 아닌가,북경에서 모르는 상태에서 그 하루 이틀 전에 제재는 나와 버렸고,나온 것을 풀지 못하고 여기까지 와 버린 것 아닌가 이렇게 볼 수도 있고,또 나쁘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이렇게 볼 수도 있고,어떻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또 한편 보면 재무부하고 국무부 사이에 이 점에 관해서 원칙에 관한 해석이 많이 달라서 정치적 유연성을 좀 발휘할 수 있는 것 아니냐,재무부는 법대로 가자 이런 것처럼 추측이 됩니다만,잘 알 수가 없다.여러 가지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제 좀 9 19 선언이 그냥 탄생하자마자 땅에 묻혀버렸지만,또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올라오면서 바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평화구축 나아가서는 동북아시아의 다자안보체제,또는 평화체제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그 방향으로 가겠다. 그다음에 우리 신뢰 말씀도 주시고,일관성 말씀,합의,말씀 다 주셔서 그렇다.이렇게 노력을 하겠다.대북 정책 협의체제,소위 각계각층의 대표적 지도자들 또는 원로들 하는데,제일 어려운 것이 이분들 모아놓으면 서로 통화가 안 됩니다.말을 다르게 쓰고 있거든요.우리가 좌우대립을 너무 심하게 겪었고 전쟁까지 치르고 독재라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식민지,좌우대결,군사 독재,이것 하는 동안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게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개념이 달라서요.참 좋은 얘기인데,이것을 못하고 있는 거지요. 제가 이것 한번 해 보자고 맨 처음에 고건 총리를 기용했었지요.그래서 고건 총리가 다리가 되어서 그 쪽하고 나하고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랬는데,오히려 저하고 저희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되는 그런 체제에 있는 것이지요.중간에 선 사람이 양쪽을 끌어당기질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는 그런 결과가 되기도 하고요,하여튼 실패한 인사다.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지요. 링컨 대통령의 포용 인사가 제가 김근태씨나 정동영씨를 내각에 기용한 그 정도하고 비슷한 수준이다.링컨 대통령 책에 오래 오래 남고 남들이 연설할 때마다 그 분 포용인사 했다고 인용했는데,저는 비슷하게 하고도 인사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사니까 (일동 웃음 ) 힘들다.링컨 흉내 좀 내려고 해 봤는데 ,잘 그게 잘 안 되네요.재미가 별로 없다. 하여튼 그렇게 말씀드리고요.시간이 좀 괜찮냐? 좀 더 말씀을 드릴까요? 우리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거든요.우리 정부 또는 우리나라에서 이 사안은 통일외교안보정책 사안입니다.큰 틀에 있어서 안보의 영역에 포섭되는 일이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안보 문제와 하여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표리관계가 있는 것이지요.우리가 통일을 왜 해야 되냐,더 잘 살기 위해서 더 사람답기 위해서 이런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만,보다 더 절실한 것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첫 번째이고 ,일단 평화가 확보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고,그 다음에 그를 통해서 우리가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면 더 좋은 것이고요. 한 핏줄을 같이 하고,말을 같이 쓰고,문화를 함께하는 사람이 하나로 함께 통합되어서 사는 것이 보다 사람답게 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통일해야 되는 것이지요.그런데 그래서 평화다.평화라는 것이 안보의 핵심 개념이거든요. 왜 안보가 뭐냐,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안보의 목적이고 평화도 안보의 목적 아닙니까? 그러나 고유의 의미에서 우리가 안보라고 얘기할 때는 평화,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적 활동이지요.전쟁에게 이기는 것보다는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지요.그렇지 않겠나? 그래서 평화를 지향하는 안보,이걸 좀 확실하게 했으면 좋겠다.전쟁에서 이기는 안보,그것보다는 그렇게 평화를 지향하는 안보라는 개념을 확실히 하면 좋겠고요. 어떻게 할거냐,대화를 지향하는 안보를 해야 된다.안보를 위해서 끊임없이 대결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대결,안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상대를 경계하게 되는 것이지요.그래서 상대를 경계하는데 거기에 적대적 감정이 들어가고 불신이 들어가고 또,그렇지요.적대감 감정과 불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안보가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인지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느냐,적이 공격했을 때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나는 털끝도 안 다치고,아니면 거의 껍질이나 약간 벗겨지고 찰과상 정도 입거나 타박상 정도 입고 완전히 제압하는 수준,그러면 확실하지요.안보를 위한 대비가 확실하지요. 그다음에 이제 적어도 저쪽이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격을 해서 이길 수 없다,싸움을 해서 이길 수 없고 따라서 점령할 수 없고,따라서 지배할 수도 없다,이 단계를 한번 생각해 보자.이겨도 점령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 점령해도 지배하지 못하면 전쟁을 일으킨 보람이 어디에 있겠냐? 그러면 그 가능성이 없으면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전쟁 시작 안 할 거다,그래서 이기지 못할 수준이면 되지 않겠느냐,한 대 때릴려고 하다가 한 대 반을 맞을 형편이면,붙었는데 팔 하나 부러트렸는데,자기 팔은 두 개 부러져버렸다,이 정도면 제정신 가진 사람이면 안 하지 않겠느냐,목적을 어디까지,목적을 어디에 둘 거냐,힘의 비교를 어느 정도에 둘 거냐,그 다음에 그런 것을 판단해 보고 정신없는 짓 안할 것이다.그러면 상대를 평가해 본다 이거지요. 상대가 제정신이 멀쩡한 사람인지,아니면 완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사람인지,아니면 영 머리가 아주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해 봐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전제,이 전제를 할 때 그래서 이 전제가 부도덕한 사람이고 약간 맛이 간 사람이고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이제 비정상인 사람으로 되는 거지요.그래서 제가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 패널들이 저한테 ‘노 후보,김정일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예’ 하면 그날로 박살나는 거거든요.아니오 해도 곤란하고,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이 한국 유일의 정치 풍토,정치 문화 아닌가,그 사람도 판단력은 있겠지요.어떤 기준의 판단력,민주주의 사회 기준의 사고력과 분석력을 가지고 있는 판단력이냐,공산주의 또는 주체사상이라고 하는 그 체제에 거기에 맞는 수준의 그것을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수준에서는 적어도 판단력이 있지 않겠느냐,쉽게 말해서 사람이 저 죽을 짓 하겠냐,이런 것이지요. 궁지에 몰리면,완전히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이런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저 죽을 짓까지 무릅쓸 만큼 돌아버린거냐,아니면 이상한 사람이냐,이것까지 우리는 합의를 못 이루고 있는 거거든요. 우리 한국사회가 그 정도 합의가 안 되는 겁니다.저 사람 제정신 맞아,어떤 사람은 설마 제정신이겠지,어떤 사람은 걔 완전 돌았어,이런 거거든요. 그래서 멀쩡할걸,이러면 그날로 박살이 나는 겁니다.대한민국이 이런 나라거든요.이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안전을 점검하는 것입니다.그런 것이지요? 어느 정도의 전쟁을 예방한다고 할 때,났을 때는 안 다쳐야 하는데 어쨌든 전쟁에 이기더라도 많은 상처를 입지 않습니까? 많은 손실을 입으니까,그러니까 안 나게 해야 하는데,안 나게 하는 그 억지력의 판단 기준이 정상적인 사람을 기준으로 할 거냐,돌아버린 사람을 기준으로 할거냐,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 한국이 얼마만큼 심각하게 싸우고 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신문에 나오고 있는 여러 가지의 무슨 어찌 보면 만화 비슷한 얘기들이 사실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말하자면 제정신 가진 사람이면 지금 한국을 향해서 북에서 한국을,한국에게 도발적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적절하게 관리해 나가면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인데,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저희더러 사상 검증을 하는 거지요.장관 지명해 가지고 국회 청문회 내보내놓으면 6.25가 남침이오 북침이오 묻거든요.제가 한국전쟁 6.25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할 만한 사고력을 가진 대통령이라는 전제가 붙지 않느냐? 참 억울하거든요.저는 제정신입니다. 이래서 어렵다.모든 것을 전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힘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대화로서 해야 되는 것인데요,이 대화의 전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된다.나아가서 존중해야 됩니다.상대방의 의견이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된다.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됩니다.이런 것을 이른바 철학적으로 상대주의라는 것 아니겠느냐? 관용이라는 말이 한마디로,관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요.관용,이것이 대화의 전제지요.대화를 통해서 남북문제를 풀어가고 전쟁,주먹질,주먹을 꺼내기 전에 말로 먼저 좀 하고 이것이 대화를 통한 안보 아니겠냐? 그래서 남북간 대화하려고 하는데 인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이거지요.또 우리 국내에서도 대화를 좀 할려고 하니까 인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가치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척사위정론이라고 하는 사상 체계를 가지고 서학 한다고 수백명씩 잡아 죽이고,마침내 1866년경에는 8천명을 잡아 죽였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렇습니다.선비정신 같이 좋은 것은 우리가 이어받아야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 사상에 이와 같은 위험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돌이켜봐야 된다.성찰해 봐야 된다.성찰해 보고 그것이 끊임없이 사람을 반대편을 죽이는 문화를 만들어 왔거든요. 그래서 사문난적이라고 하고 척사위정,이 두말로 표현되는,철저히 타도해 버리는 문명,문화 이것을 가지고 왔는데,그것을 우리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에 우리 안보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습니다.조용하게 안보하면 되는데,정부가 안보,안보하고 나팔을 계속 불어야 안심이 되는 국민의식,인식,이것 정말 참 힘들다.북한이 미사일을 쐈어요.쐈는데,강원도 북쪽 어디에서 저 함경북도 앞바다 어느 쪽으로 미사일을 쐈는데,한국으로 그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않은가? 다 알고 있는 일이지 않은가? 정치적 정세,안보적 정세가 장기적으로 총체적으로 서서히 변화해 가는 것이지,그날 큰일 나는 것 아니거든요,그날 전쟁 나는 것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 가지고 국민 여러분! 미사일을 쐈습니다.라면 사십시오,( 일동 웃음 ) 방독면 챙기십시오.이것 해야 하느냐? 새벽에 비상을 걸어야 합니까? 아침에 보고를 받았다.보고받고,긴급히 안보상임회의를 소집하자고 했는데,하지마라,하지 맙시다.하지 맙시다,국민들을 놀라게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11시에 한번 모이자.관계장관 간담회로 하자.간담회 했다.간담회로 하나 상임위원회로 하나 새벽 5시에 모이나 저녁 11시에 모이나 그 일 처리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결과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예측하는 단계에서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 왜 북 치고,장구치고 국민한테 겁주지 않았냐며,나를 얼마나 구박을 주는지요.조용히 합시다.우리나라 안보 그렇게 북치고,장구치고 요란 떨지 않아도 충분히 한국의 안전을 지켜 낼만한 국력이 있고 군사력이 있다. 저도 와서 국방비 올렸지 않았느냐? 저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군비 축소해서 복지에 써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저는 군비 축소 안했다.올렸다.그것은 한국의 군사력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대북 군사력만이 완전한 것이 아니다,한국의 군사력이 약해서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당해내지 못할 형편,한반도의 힘의 공백 상태가 생겼을 때 한반도가 임진왜란,청일전쟁,러일전쟁,그렇게 다 전쟁터로 변했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도록 외국 군대가 우리나라에 와서 전쟁놀이 못하게 할 정도의 국방력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중국과 일본,미국,이 사이에 중첩적인 잠재적 적대 관계가 동북아시아의 다자안보 체제라든지 또는 동북아시아 공동체라는 이와 같은 새로운 구상을 통해서 전환되기 전까지는 한국은 상호주의의 국방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그렇지 않느냐? 그래서 군 국방비를 제가 결코 줄이지 못한다,줄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이제 대북 정책 가지고 국민들을 그렇게 밤낮없이 불안스럽게 할 이유는 없다,그렇게 하지 않아도 안보 괜찮다.그러나 저는 지금 이렇게 얘기하고 여러분들께서 이 자리에서 박수를 쳐주셨습니다만,여론조사하실 때는 전부 곱표 치셨을 거다.여론조사 결과 보니까요,네편 내편할 것 없이 전부 잘못했다고 다 곱표 쳐놨는데,정말 정치라는 것이 어렵구나,양심껏 소신껏 뭐 하라 해 쌌는데,양심껏 소신껏 하면 판판이 깨지는 게 정치구나,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러나 이대로 계속갈 수 없다,달라진 것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터질 때는 터지더라도 다르게 할 건 다르게 하겠다,그게 단임 정신 아니겠느냐? 그렇다. 내가 고향 친구들 만나기 제일 미안하다.고향친구,학교 동창들은 저 대통령 만들려고 다니면서 친구들한테 표 찍으라고 했는데,지금 몰려 가지고 지금 박살이 나고 있으니까,이 친구는 어디 술자리가서 괴롭기 짝이 없지요.그런 애로사항은 있습니다만,그 사람들 체면보다 더 큰 게 저는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싸잡아가기로 했습니다.원론적으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실례를 들어서 말하겠다. 이라크 파병 왜했냐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지요.또 미국하고 왜 껄끄러워졌냐,저는 껄끄러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맨처음 대통령 당선됐을 때 북핵문제를 놓고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설이 마구 난무했습니다.미국 신문에 우리 한국 신문에.책임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안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문에 난무하면 그게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거다.그래서 무력공격 안 된다.얘기했다. 그랬더니 어,그러면 미국하고 일 생기지,우리나라의 안보와 안보 논리를 주도해 왔던 사람들이 큰일났다 이겁니다.노무현이가 미국하고 관계를 탈내겠다.그렇다.그러나 그 이전에 어떻든 전쟁은 안 된다 했다.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고요. 왜 그렇게 했냐,우리나라에 여러분이 지금 그런대로 쓸 만한 사람인지 내 스스로가 쓸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옛날 사귀던 친구보고 우리 집에 놀러오라 해 가지고 놀러오면 내가 아직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겁니다.돈 좀 꿔 달라해 가지고 돈 빌려 주면 그거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돈 안 빌려 주면 아 내가 요새 한 물 가는 구나 이렇게 생각해야지요. 한국이 괜찮은 나라라면 여행하는 사람이 많이 오게 되어 있고,괜찮은 나라라면 돈 빌려주는 사람이 있게 되어 있고 투자하는 사람이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대통령 당선됐을 때 투자가 끊어질 거다,돈 빌리러 갔더니 가산금리를 더 내라 한다,이 말은 한국에 돈 빌려 주기 싫다는 것과 같은 거거든요,국가가 돈 빌릴 수 없는 국가가 되면 그때부터 위기로 갑니다. 돈 빌려 달라 해 가지고 안 빌려주면 그때부터 철저히 단속하고 재빨리 신용을 회복하지 못하면 바로 97년 외환위기 같은 사태로 굴러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은 바뀌었고 미국을 한 번도 안 가 본 대통령이고,그런데 전쟁은 난다하고 이런 저런 상황이었다.제가 안팎 곱사등이 됐지요.북핵문제를 가지고 전쟁은 없다 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있거나 없거나 간에 미국하고 관계가 돈독해야 하는 것이지요,제일 처음 묻는 게 그겁디다.전쟁하냐,돈빌려 주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전쟁하냐,그다음에 북한이 붕괴하냐,절대 그런 일없다고 딱 얘기해 놓고 나니까 미국하고 잘 지낼거냐,이렇게 물었습니다. 별 수 있습니까? 미국하고 잘 지낸다는 것 별로 말로 잘 지낸다 괜찮다 하고 또 큰일났다고 하는 두 사람들이 있지요,미국에서 큰일났다 사람들은 노무현 길들이기 프로그램에 들어 있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천지도 없이 겁 없는 대통령이 된 모양인데,맛 좀 보여야지 이래 가지고 ,그래서 한 미관계가 나빠진다,나빠진다 계속 신호보내가지고 노무현 기 좀 꺾어라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이 그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해야 되는 것이 전쟁 없다고,하나는 미국하고 괜찮다는 것이지요.가장 확실한 증명이 이라크 파병 아니냐? 그것은 개인 노무현과 미국과의 관계가 아니라 대한민국과 미국과의 우호 관계가 동맹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냐 안하냐는 그런 바로메타였기 때문에 이라크 파병을 했습니다.1만명 보내자는 사람 있었어요.오천명 보내자는 사람도 있었고,전투병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또 우리나라에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그 전쟁의 명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또 많은 분들이 있어서 그래서 비전투 3천명,장사로 치면 장사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한·미동맹이라고 하는 그 목표를 한 미동맹의 안전성 그것에 대한 국제적 신뢰라고 하는 그 목표,그런 것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달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장사 아니겠냐? 2사단 후방 배치,미국이 얘기를 해요.우리나라에서 일부에서 안 된다.인계철선을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하냐,그런데 정부 안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분이 있어서 그 말 하지 마시오,미2사단 뒤로 물리시오.물리기로 했습니다.그래서 이제 시비가 많이 붙었어요.한 쪽에는 안보가 불안하다는 것이고,미2사단 물리고 나면 이제 북한이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지요.미국이 자동 개입이 안 되니까 안 도와줄 지 모른다는 것이고,한쪽에서는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이 전방에 있는 2사단에 즉각 보복할텐데,2사단을 빼고 있으니까 이제 보복할 데가 없어졌으니까 미국이 북한을 때리기 위한 사전준비 작업 아니냐,그래서 2사단 후방배치에 대해서 떨떠름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지요,반미주의자들이 있어요.그런데 옮겨야지오.여기에 원칙이 들어가는 것이다. 한국군이 방위력이 얼마만큼 크냐,정직하게 하자,언제 역전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대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때 실질적으로 역전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까? 이제는 국방력이고 경제력 때문에 그게 85년이라고 잡아보자.85년에 역전됐으면 지금 20년이 지났다.우리가 북한의 국방비에 몇 배인지 숫자를 외우지 못하겠는데,여러 배를 쓰고 있습니다.두 자리 수 아닙니까? 열배도 훨씬 넘네요.열배도 훨씬 넘는데,이게 한해 두해도 아니고 근 20년간 이런 차이가 있는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그래도 지금까지 한국의 국방력이 북한보다 약하다면 70년대 어떻게 견디어왔으며,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 먹었느냐 ,옛날에 국방장관들 나와서 떠드는데 그 사람들 직무유기한 것 아니에요.그 많은 돈을 쓰고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직무유기 한거지요? 정직하게 보는 관점에서 국방력을 비교하면 이제 2사단 뒤로 나와도 괜찮다.공짜 비슷한 건데,기왕에 있는 건데,그냥 쓰지,인계철선으로 놔두지 시끄럽게 옮기냐,그렇지요.저도 그렇다.시끄럽게 안하고 넘어가면 좋은데,제가 왜 그걸 옮기냐,옮기는데 동의했냐,심리적 의존 관계,의존상태를 벗어놔야 한다.국민들이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고 하는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국방이 되는 것이지,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지가랑이 매달려 가지고,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냐? 이렇게 해서 되겠냐? 인계철선이란 말자체가 염치가 없지 않냐? 남의 나라 군대를 가지고 왜 우리안보를 가지고 인계철선으로 써야 하냐? 피를 흘려도 우리가 흘려야지요.그런 각오로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무슨 경제적인 일이나 또 그밖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미국이 호주머니 손 넣고 그러면 우리 군대 뺍니다.이렇게 나올 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하고 당당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하든지 예 빼십시오 하든지 말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난 나가요 하면 다 까무러지는 판인데,대통령 혼자서 어떻게 미국하고 대등한 대결을 할 수 있겠냐?(일동 박수) 완전하게 대등한 외교는 할 수 없다.미국은 초강대국이다.그런 헛소리는 하면 안 되고 미국의 힘에 상응하는 미국의 세계의 영향력이 상응하는 대우를 해 줘야 합니다.동네 힘 센 사람이 돈 많은 사람들이 길 이렇게 고치자,둑 고치자 산에 나무 심자,하면 어지간한 사람 따라가는 거죠.미국이 주도 하는 질서 이것을 거역할 수 없다.그러나 최소한 자주 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유지해야 될 것 아니겠냐? 때때로 한번 씩 배짱이라도 내볼 수 있어야 될 것 아니냐? 근데 2사단 빠지면 다 죽게 생긴 나라에서 다 죽는다고 국민들이 와들와들 사시나무처럼 떠는 나라에서 무슨 대통령이,외교부장관이 미국의 공무원들하고 만나서 대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냐? 심리적인 이 의존관계를 해소해야 된다,그래서 뺐다.좀 있으니까 이제 숫자도 좀 더 줄이자 감축하자,하시오.비공개로 논의하자,공개로 합시다.그러면 연기합시다.그래서 1년 연기해서 감축 논의했습니다.그런데 나중에 결국 감축얘기가 미국 쪽에서 먼저 나왔잖아요? 당신들 자기들이 연기하자 해 놓고 왜 뒤로 그러냐고,그랬더니 또 보니까 우리 쪽에서 연기하자 했다고 옥신각신하는데,수사를 못해봤다.하여튼 그냥 감군 좀 해도 괜찮다. 용산기지 왜 이전하냐,그 땅 비싼 땅입니다.쉽게 얘기해서 엄청 비싼 땅인데,지금 5조 5천억원 정도 들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거기에서 플러스,마이너스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땅 돈 주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5조 5천억원에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게 미군 부대가 아니고 다른 쓸데없는 잡종지로 누가 있는데 개인이 절대 수용도 안 된다.안 판다하고 버티면 감정해 가지고 돈 주고 살 것 아닙니까? 감정해 가지고 돈 주고 살 것 아닙니까? 감정해 가지고 돈 주고 사면 5조 5천억 나온단 말이지요.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좋은 금싸라기 땅에 미군이 딱 버티고 앉아 가지고 지하철도 못 내고 도로도 못 내고,거기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문화시설이나 상업시설 근사한 자리인데,왜 못하냐 이거지요.투자를 해야지요.돈 없어서 안했습니다.김영삼,노태우 대통령이 합의해 놨는데,김영삼 대통령도 돈이 없어서 안 해 버리고,IMF 나서 국민의 정부는 못하고 우리는 한고비 넘어갔으니까 그것도 1년에 내는 것도 아니고 10년씩 걸쳐서 점진적으로 해 가지고 땅 사는 건데,사야지요. 이거면 누가 시비하는 것 없는 것 같습니다만,이것 때문에 평택에서 어떻게 시끄러운지,국민들이 노무현 정부는 왜 이렇게 시끄럽노 하지만,예,할 일은 해야 되지 않겠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자주 국가의 상징,자주국가의 상징에 상당한 손상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아무리 우방이라 할지라도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청나라군대가 주둔했던 그 자리에 하필이면 그리 꼭 있어야 되겠느냐,옛날에 우리나라 독립협회가 모화관이 있던 자리를 헐어버리고 독립문을 세운 것은 그것이 현실적이든 아니든 간에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역사적 행위 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그야말로 역사적 동물 아닙니까? 용산기지,작통권,명분은 그렇습니다.명분은 자주국가 당연한 이치이지요. 이게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 작전 통제할 만한 실력이 없냐,대한민국 군대들 지금까지 뭐 했노,나도 군대 갔다왔고 예비군 훈련까지 다 받았는데,심심하면 사람한테 세금 내라 하고,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그 위의 사람들은 뭐했어,작전통제권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 통제도 한 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놓고 나 국방 장관이오,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깁니까? 그래서 작통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내고,자기들이 직무유기 아닙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수치스런 일들을 하고,작통권 돌려받으면 우리 한국군들 잘해요,경제도 잘하고 문화도 잘하고 영화도 잘하고 한국 사람들이 외국 나가보니까 못하는 게 없는데,전화기도 잘 만들고,자도 잘 만들고,배도 잘 만들고 못하는게 없는데 왜 작전통제권만 못한다는 겁니까? 실제로요,남북 간에도 외교가 있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외교가 있는데,북한의 유사시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지만 전쟁도 유사시도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전쟁과 유사시를 항상 우리는 전제하고 준비하고 있는데,중국도 그렇게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군이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을 때 북한과 우리가 대화하는 관계 중국과 우리가 대화할 때 외교상의 대화를 할 때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를 놓고 대화를 할 때 그래도 한국이 말발이 좀 있지 않습니까? 작전통제권도 없는 사람이 민간 시설에 폭격 할 것인지 아닌지 그것도 마음대로 결정 못하지 어느 시설에 폭격 할 것인지 그것도 지마음대로 결정 못하는 나라가 그판에 가 가지고 중국한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북한한테 무슨 할 말이 있어요.이것은 외교상의 실리에 매우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유사시가 없을 거니까 그런 걱정 할 것 뭐 있노,그럴바에야 작통권이니 있기는 왜 있어야 돼요? 여기까지 몰라서 딴소리하는 건지 알고도 딴소리하는 건지 모르지만 나는 그분들이 외교안보의 기본원칙,기본원리조차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명색이 국방부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북한문제,북한의 유사시에 한 중간의 긴밀한 관계가 생긴다는 사실을 모를리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알면서 알았다면 왜 작통권 환수를 지금까지도 할 엄두도 안내고 가만있었을까,불가사의한 일입니다.모든 것이 노무현 하는 것 반대하면 다 정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흔들어라 이거지요,흔들어라.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예,그렇게 됐습니다. 전략적 유연성 이 문제의 핵심은 그렇습니다.우리가 이것을 동의하고 안하고 현실적으로 무슨 문제이든 외교적인 문제입니다.중국과의 관계에서 동북아시아의 유사시에 주한미군이 여기에 있더라도 중국 당신들에 대해서 동북아시아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적대적 행위 이런 것에 신중히 하겠다,전략적 유연성은 합의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그때 가서 미리 다 정해 놓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한국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이렇게 되어 있습니다.그러면 동의하는 것은 된다.이런 것입니다.그것이 제일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정해 놔봤자 그때 상황이 어떻게 될지 것인데,그때 우리 한국 국민들이 합의하고 동의하면 OK하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고,안 된다하면 못하는 거 그게 가장 좋은 것 아닙니까? 지금 어떻게 정해 놓습니까? 이 문제 가지고 부시 대통령 만나서 토론도 하고 많이 했습니다.다 정리됐습니다.국방개혁의 철학이 있습니다.국방개혁,노태우 대통령때부터 거론되고 김영삼 대통령때도 들먹거리고 국민의 정부에서도 계획까지 짰다가 무산되어 버린 국방개혁,이제 겨우 법이 통과됐습니다.지시해 놓으니까 안 만들어 와요.누가 개혁 좋아하겠습니까? 자기 조직 살 깎는 일인데,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다 만들 수도 없고,결국 국방부,군에서 다 만들어 가지고 국민들 앞에 발표했습니다. 국방개혁 2020,돈 특별이 더 드는 것 없습니다.50만으로 줄입니다.왜 인력을 줄이고 더 줄여야 됩니다.인력을 더 줄일 수 있습니다.왜 인력을 줄이고 무기를 늘리냐,북한 하고만 싸우려면 지상전이 많을 수도 있으니까 떼가 많아야지요.떼거리가 많은 게 제일 좋은 거지요.그러나 우리 안보를 전방위 안보로 생각한다면 떼로 안 된다,사람 밥 먹이고 옷 입히고 막사 짖고 사람한테 들어가는 것 다 아끼고 아주 성능 좋은 무기를 개발해야 된다 그런 것 아닙니까? 국방개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지요. 우리 아이들 요새 아이들도 많이 안 낳는데,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놓을 것 아닙니까? 우리 모든 사회 제도를 장가 일찍 가고,시집 일찍 가는,결혼 일찍 가는 제도로 전부 바꿔 줘야 합니다.결혼 빨리 하기 제도,직장에 빨리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이런 제도로 바꿔 주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다 지체가 되거든요.지금 그 계획세우고 있습니다.장가 빨리 보내는 정책,이런 제도 개발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 군 장성들 임명을 하고 차를 한잔하는 자리에서 여보시오,노무현 대통령 되고 난 뒤에 대한민국 군대가 나빠진 게 뭐 있으면 얘기해 보시오,있어도 말 하겠습니까? 설마.말하겠지만 여러분이 대신 한번 얘기를 해 주세요. 대한민국 군대,노무현 대통령이 더 나쁘게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인사,군 인사를 몇 번씩이나 장성인사를 몇 번씩이나 했는데,신문에 한 줄도 쓸 것이 없어요.요새 신문 기자들 힘들어요,쓸 것이 없어서,그렇지 않습니까? 비행기를 1조 4천억원짜리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인가 그것을 사는데 상대방 계약 당사자를 선택,채택 했습니다.1조 4천억 자리 방산 계약을 했는데도,부패니 뒷거래니 한마디도 없지 않습니까? 어때요 군안에서 자살사고 총기사고 많이 났습니다.앞으로 고쳐 가야겠지요.아주 노력해서 빨리 고치겠습니다.문화라는 것은 하루이틀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지금 군인사 군수조달,군내 예산 집행의 투명성,이런 것들은 대폭 달라졌습니다.병영생활 문화도 아주 빠르게 개혁되고 있습니다.지금 민자 유치해 가지고 막사 전부 다 지어서 고치고 해서 군인들 하고 전역 군인들 취업 좀 평등권 문제 걸리기 때문에 애로가 있지만 전역군인들 취업하는 것 대책을 세워줘야 군 구조를 개혁할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어떻든 국방부 문민화 이 부분은 민간인 국방장관을 임명하는 문제는 좀 뒤로 미루었습니다.한꺼번에 다 그렇게 해 놓으면 어지러워서 안 될 것 같아서 옛날에 우리 F15기 새로 사가지고 성능 좋다고 막 올라갔다가 확 내려갔다가 중력 차이가 너무 빠르게 나니까 그만 정신을 잃어버려 가지고 바다 밑으로 비행기가 들어가 버렸지 않습니까? 사회개혁도 제가 하는 게 좀 빠른가 봐요,전부 어지럽다고 그래요.그래서 국방부 문민화까지 한꺼번에 해치우면 바다밑에 들어간다면 곤란할 것 같아서 문민화는 다음에 합시다 장관 임명하는 것만 하면 되는 거니까.그런데 중차대한 개혁을 해야 되는 시기에 군인들한테 대해서 대통령이 군인들한테 신뢰를 주고 자발적으로 스스로 해 보시오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문민화로 뒤로 미루고 군 개혁 확실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잘 될 것입니다.안보 문제 잘 될 것이고 ,그다음에 나머지 여러 가지들이 있는데,여러분 말씀 들어 보시건대,그렇습니다. 노무현이 잘 한다 못한다 말 많고 이것은 왜 이랬냐 그거 다 시어머니가 앉아서 며느리 밥상 차려오는데 잔소리 하려면 잔소리 할거리가 없겠어요? 그만 대강 봐서 그렇게 멍청한 것 같지는 않지요? 대강 대강 짚어야 될 것은 대개 짚고 있는 갑니다.그렇지요? 제말 들어 보니까 그러면 되지요.개인적으로 누구 봐줄 일도 없고 뒷돈 챙길 일도 없고 할 일이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국가 잘되게 원칙대로 그것 말고는 할,다른 할 일도 없고 할 방법도 없고 영 멍청하지 않으면 기왕에 뽑아놨는데,국방,외교,안보,통일 이것 저한테 다 이렇게 맡겨줘라 이렇게 여러분 말 좀 한번 해 주십시오. 맡겨놔라…고만…내가 전에 만나봤는데,그거 영 바보 아니더라.대개 들어봤는데 앞뒤 챙길 것은 재고 챙기는 것 같더라,좀 맡겨봐라.부탁합니다.
  • 儒林(759)-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 (16)

    儒林(759)-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 (16)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6) 해정을 지나자 주필정(駐亭)이 나타났다. 주필정은 공자무덤 동남쪽에 있는 건물로서 송나라의 진종(眞宗)과 청나라의 강희(康熙), 건륭(乾隆)황제가 친히 왕림하여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머물렀던 삼좌(座)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건물. 마침 알이 굵어진 눈발들이 그대로 내려쌓여 삽시간에 공자의 무덤 앞은 눈부신 설경으로 변하여 있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몰려들어 공자의 무덤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의 무덤. 무덤 앞에는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었고, 공자무덤의 바로 앞 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자의 무덤 동쪽에는 공자의 아들인 공리(孔鯉)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공자와 더불어 아들인 이, 그리고 손자인 급 3대의 무덤이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형태 때문에 3대의 무덤을 휴자포손(携子抱孫), 즉 ‘아들을 거느리고 손자를 품었다.’라고 표현되고 있었다. 공자의 아들 공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공자의 아내 올관 씨가 공리를 임신했을 때, 노나라의 임금이 내려준 잉어를 먹고 태어났다고 해서 ‘잉어(鯉魚)’라는 의미의 ‘이(鯉)’자를 넣어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공자의 자가 백어(伯魚)인데, 이는 ‘우두머리 물고기’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아들 공리는 탁월한 사람은 아닌 듯 보여진다. 공자 자신도 수많은 제자를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의 아들인 공리에게는 별다른 가르침을 펴지 않은 것을 보면 공리는 평범하고 범상한 아들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사실은 논어의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참고하면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공문의 제자 진항(陳亢)이 공리에게 물었다. 진항은 공리가 스승의 아들이니, 혹시 자신들이 듣지 못하였던 특별한 가르침을 사사로이 펼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항은 공리에게 ‘그대는 아버지로부터 남다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가.’하고 묻는다. 이때 공리는 대답하였다. “아무것도 없다. 하루는 뜨락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치고 있었더니, 아버지께서 갑자기 ‘너는 시(詩)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내가 ‘아직 못 배웠습니다.’하고 아뢰었더니 ‘시를 배우지 못했으면 남과 더불어 사물을 형용하여 말할 수 없느니라.(不學詩,無以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물러나와 시를 공부하였다. 그 후 어느 날 또 뜨락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자 다시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너는 예(禮)를 배웠느냐.’ 이에 나는 ‘아직 못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예를 배우지 못했으면 남과 더불어 똑바로 설 수 없느니라.(不學禮無以立)”
  • 儒林(755)-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2)

    儒林(755)-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2)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2) 그러나 청나라의 강희(康熙) 연간에 이 나무는 벼락을 맞고 타죽어 버렸으므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비석과 정자를 세운 것이었다.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외교활동이 뛰어나 살아 생전에 스승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자공. 스승 공자로부터도 ‘자공은 천명대로만 살지 않고 재산을 불렸고, 그의 예측은 거의 적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뛰어난 정치가이자 재산가였던 자공은 그러나 이러한 외교활동으로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으로 자공은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무덤 곁에서 여막을 치고 묘를 지켰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도성 북쪽 사수가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을 입었다. 또 3년간의 심상을 끝내고서도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제자들은 그대로 머물기도 하였다. 자공은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6년이 지난 후에야 물러났다. 제자들이나 노나라 사람으로서 집을 공자의 무덤 곁으로 옮긴 것이 100여가가 되어 이곳을 공리(孔里)라고 불렀다.”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공자는 육경을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쉬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를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부르는 것은 이처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갈고 닦아 알게 된 사람(好古敏以求之者)’으로서 ‘옛것을 잘 습득하여 새로운 것을 알아낸 진리(溫故而知新)’를 책으로 펴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쳐 마침내 전 인류의 스승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지금도 남아있는 행단(杏壇) 근처에서 끊임없이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가지고 가르쳤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의 숫자는 3000명으로 추정되며, 육예(六藝)에 능통했던 제자들만 해도 72명이나 되었다고 사마천은 증언하고 있다. 물론 공자는 평생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자가 집중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은 68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부터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네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즉 문(文:학문을 배워 인륜도덕의 이치를 밝힘), 행(行:자신의 행실을 닦음), 충(忠:자기의 마음을 다함), 신(信:언어가 신실하여 행동과 일치함)이다. 공자는 인격적으로 분석해볼 때 다음의 네 가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사의(私意)가 없었고, 기필코 무엇을 이루겠다는 의욕도 없었으며,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자아를 버려 손쉽게 남을 따르려 하는 점도 없었다. 공자가 특히 삼간 점이 있었는데, 제(齊:제사를 드리기 앞에 근신하는 일), 전쟁, 질병이 그것이다. 공자는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이(利)를 말하기도 했으며, 그러나 이를 말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천명(天命)과 인(仁)을 더불어서 말했다.…”
  • 강빈/박정애 지음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해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했다. 세자가 없을 때는 시강원의 장계를 가져다가 임의로 써넣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했으니 부인의 도리와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세자가 병이 있는 데도 잠자리를 같이 할 정도로 음란했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 소리로 발악할 정도로 불순하고 거셌다.” 조선시대 인조와 효종대의 실록이 전하는 소현세자빈 강씨, 즉 강빈의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가 박정애(36·강원대 스토리텔링학과 교수)는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진실의 얼굴은 네모졌다가도 둥그레지는 법”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강빈을 여필종부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선구자적인 여인으로 끌어올린다. 최근 펴낸 역사소설 ‘강빈’(도서출판 예담)에는 작가의 이런 ‘여성주의적’ 역사관이 그대로 녹아 있다. 강빈(1611∼1646)은 열다섯 살에 ‘한번 들면 영결’이라는 구중궁궐의 왕실 여인이 된다. 하지만 병자호란의 패배로 남편 소현세자, 시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심양에서 9년 동안 인질생활을 한다. 그러나 강빈은 힘든 볼모생활에 굴하지 않고 소현세자를 도와 서양 문물을 도입하고, 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대규모 영농과 국제무역에서 큰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대가는 가혹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과 짜고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인조의 의심으로 귀국 두달만에 독살 당하고,1년뒤 강빈도 조씨 저주사건 주모자이자 임금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죄목으로 서른여섯의 나이에 사사당하고 만다. 왕실 여인들은 흔히 지아비의 사랑을 얻기 위해 질투와 음모를 일삼거나, 당쟁에 휘둘리는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실록이 전하는 강빈의 모습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런 중세적이고 남성적인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작가가 그리는 강빈은 꿈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아낌없이 불사른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이다.1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744)-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

    儒林(744)-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 잔뜩 회색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있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마침내 푸득푸득 털갈이하는 짐승에서 털이 뜯겨져나가듯 싸락눈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어제부터 공묘(孔廟)와 공부(孔府)를 순회하여 마지막 코스인 공림(孔林)에 이르렀으므로 나는 적잖이 지쳐있었다. 공묘는 곡부성 안에 있는 공자의 묘당(廟堂). 공자가 작고한 1년 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가 살던 집 3칸을 개축하여 사당으로 만들고 세시봉사(歲時奉祀)케 한 것이 공묘의 시작인데, 청나라 때인 1730년에 개축된 공묘는 대성전(大成殿)으로 불릴 만큼 공자사당의 총본산이었다. 흰 돌로 된 이중계단 위에 노란 유리기와를 이은 이중 팔작지붕은 중국에서도 북경의 태화전(太和殿)과 태안(泰安)의 천황전(天殿)을 비롯한 3대 건물로 손꼽힐 만큼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성전의 중앙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편액과 함께 그 안에 공자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양편에는 사배(四配)라 하여 안회, 증삼, 자사, 맹자의 조상과 십이철이라 불리는 민손, 염옹, 단목사를 비롯하여 송나라의 주희에 이르기까지의 조상이 배열되어 있어 역대유가에서 전해오는 선현들이 모셔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공부(孔府)는 공자 후대의 장자와 장손들이 살고 있던 공씨 가문의 사저. 공자가 죽은 후 2000년 이상 이곳에서 살고 있던 공씨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습봉택(襲封宅)이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공씨의 후예는 77대 손인 공덕성(孔德成). 타이완으로 망명하기까지 이곳에서 살던 공자의 마지막 종손이었다. 그러나 인구 61만명의 곡부는 대부분 공씨의 성을 가진 공자의 후예로, 오늘날 이들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술인 공부가주(孔府家酒)를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있다.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묘와 공부, 그리고 공림은 오직 공자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중국의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의 수입으로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그뿐인가, 대성전 중앙에 걸려있는 문자 그대로 세계의 3대 성인이었던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의 학문보다는 공자의 이름을 딴 술을 만들어 중국 최고의 명주를 만들어 파는 공자 후예들의 상술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곡부 제일의 문화유산은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공림(孔林). 공림이 곡부에 남아있는 공묘, 공부, 안묘(顔廟), 주공묘(周公廟), 소호릉(少昊陵) 등의 많은 문화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그곳에 공자의 무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묘를 비롯하여 공부와 공자의 고택들은 모두 둘레 5.5㎞의 고성 안에 산재하고 있었지만 공림은 도성 북문에서 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공림은 공자와 77대 후손에 이를 때까지의 후손들이 묻혀있는 가족묘지로 도성 외곽지대에 자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책꽂이]

    ●케임브리지 교수들에게 듣는 인생철학 51강(허우슈선 지음, 양성희 옮김, 황소자리 펴냄) 1209년에 설립된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교정에는 유서가 깊은 세개의 아치형 문이 있다.‘겸손의 문’ ‘미덕의 문’ ‘영예의 문’. 이 문들 위에 새겨진 겸손(Humilitatis)과 미덕(Virtutis), 영예(Hornoris)는 800년을 두고 내려온 케임브리지의 교육이념이다. 베이징 스유(石油)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케임브리지대 교수들의 강의노트 속에서 추려낸 내용들을 사랑과 증오의 철학, 미추의 철학, 빈부의 철학, 지혜와 용기의 철학 등 10개의 철학적 테마로 정리했다.1만원.●제왕과 재상(리정 지음, 이은희 옮김, 미래의 창 펴냄) 권력에 대한 야심이 남달랐던 청나라의 권신 오배는 순치제의 신임을 얻어 보정대신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스스로의 공로에 도취돼 교만에 빠진 오배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강희제(순치제의 셋째아들)를 우습게 보다 어린 황제의 야무진 습격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권력은 공유할 수 없는 법. 책은 제왕과 권신이 연출하는 격동의 드라마를 보여 준다.“군주를 모실 때는 호랑이와 함께 있는 듯하라.”는 메시지가 담겼다.1만 3000원.●카네기 평전(레이몬드 라몬 브라운 지음, 김동미 옮김, 작은씨앗 펴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세기의 부호 앤드루 카네기. 그의 삶을 되돌아 보면 역설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카네기는 교회에 수천대의 오르간을 기부했지만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또 강철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강철의 제조방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카네기의 조국 사랑은 유별났다.“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것은 신의 은총이다. 내 삶에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현명한 스코틀랜드! 이 작은 악마는 고집은 세도 늘 옳은 선택을 한다.” 철강왕 카네기의 삶과 사랑을 다룬 평전.2만 5000원.●마리 앙투아네트(안토니아 프레이저 지음, 정영문·이미애 옮김, 현대문학 펴냄) 38세의 나이에 참수된 프랑스의 마지막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과연 빵을 달라는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할 정도로 세상물정 모르고 몰인정한 권력의 화신이었던가. 전기작가인 저자는 앙투아네트의 정치적인 여정을 통해 그와 관련된 잔인한 신화를 벗겨 낸다. 앙투아네트는 사형대에 올라가면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아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여자, 여리고 순수한 여성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왕립 고문서보관실 자료를 처음으로 이용해 쓴 평전.1만 9800원.●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이재성 지음, 들녘 펴냄)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을 이루는 문장 하나하나를 제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생각을 담는 가장 작은 그릇인 문장을 어떻게 제대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문장에 대한 규칙, 즉 통사론과 단어와 소리에 대한 규칙, 형태론과 음운론을 다룬다.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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