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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의 야경 이곳에서 즐겨라

    7월의 야경 이곳에서 즐겨라

    경기 광주의 남한산성이 국내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로써 한국은 남북한을 통틀어 13개, 중국 동북 지역까지 포함할 경우 모두 14개의 세계유산을 갖게 됐다. 낮에 웅장했던 남한산성은 밤에 경관조명을 받아 한층 화려한 풍경을 선사한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야경 여행지로 남한산성을 꼽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관광공사가 선정한 7월의 야경 여행지들을 함께 소개한다. 남한산성은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 역할을 한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인조는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47일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기도 했다. 남한산성은 경기 광주·하남·성남시 등에 접해 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은 서문 지역이다. 서문 성곽 아래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서울 강남 일대와 경기 하남시 등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야경 감상은 성곽 위쪽이 한결 운치 있다. 서문까지 길이 잘 닦여 가족이 산책하듯 야경을 즐길 수 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한양도성도 매력 만점 10여년 복원 과정을 거쳐 문을 연 행궁(사적 제 480호)은 남한산성의 새로운 상징이다. 행궁은 임금이 도성 밖에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곳이다. 조선 인조 때 만들어진 이후 숙종과 영조, 정조 등이 능행 길에 남한산성에서 머물렀다. 남한산성 행궁은 국내 여러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췄다. 이는 남한산성이 유사시에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행궁 안에는 정문이자 ‘한강 남쪽 제일의 누각’이란 뜻의 한남루와 내·외행전, 이위정 등이 복원돼 있다. 행전에서는 무료 해설이 진행된다. 주말엔 아이들을 위한 책 만들기, 부채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행전을 둘러봤으면 남한산성 낮 투어에 나설 차례다. 야간에는 일부 유적에만 조명이 들어오기 때문에, 야경 감상 전에 산성을 둘러보는 게 낫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의 험한 자연 지형을 따라 조성됐다. 둘레 11.76㎞ 성곽 주변에 200여개 문화재가 산재돼 있다. 산성 탐방 코스 가운데 일반인은 물론 가족 나들이객도 접근하기 수월한 코스는 북문~서문~수어장대~남문 구간이다. 성곽 안팎을 넘나들며 성곽 둘레길을 걸어볼 수도 있다. 성문 밖으로 나서면 솔숲이다. 솔향 가득한 곳에서 쉬어가기 맞춤하다. 코스의 반환점은 저 유명한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다. 남한산성의 핵심 건물로, 현재 남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장소다. 이름 그대로 장수가 머물며 휘하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 내에 모두 5곳의 수어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겨우 한 곳만 남아 있다. 아울러 군사를 훈련하기 위해 건립한 연무관, 병자호란 때 항복을 끝까지 반대한 삼학사를 기리는 현절사 등의 유적과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흔적이 담긴 만해기념관 등도 묶어 돌아보는 게 좋겠다. ●대구 앞산 야경·대전 문화의 거리도 강추 수어장대와 서문까지 빠르게 오르려면 숭렬전, 국청사를 거치는 숲길 코스가 낫다. 숭렬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2호)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 축조 당시 책임자인 이서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다만 이 단축 코스는 야간에 길을 잃을 우려가 있으니 해가 진 뒤에는 산행을 삼가야 한다. 남한산성은 밤에도 멋들어지다. 한낮에 성곽을 채우던 산행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면 그제야 산성은 고요를 되찾는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탐방 코스 역시 주말 낮이면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해가 내려앉을 때쯤이면 한적한 공간으로 변신한다. 최고의 야경 감상 포인트는 서문 성곽 위다. 옛 도읍이던 서울의 건물과 한강 변에 불이 하나씩 켜지고 옅은 어둠에서 벗어난 도시가 은은한 조명으로 뒤덮인다. 청량산을 거슬러 오른 바람은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남한산성도립공원 (031)743-6610. 산성 주변에 야경 투어의 여운을 즐길 만한 공간도 많다. 무기 제작을 관장하던 침괘정과 행궁 초입 종루 인근에는 허기를 달랠 식당과 차 마시며 쉴 수 있는 카페들이 늘어서 있다. 산성 남문 초입엔 닭죽마을이 조성돼 있다. 동문 방향으로는 시래기붕어찜을 맛볼 수 있는 집들이 있다. 관광공사는 남한산성과 함께 ▲도보로 즐기는 신라의 여름밤, 경주역사유적지구 야경 (경북 경주) ▲600년 전 한양도성을 따라 600년 후 서울 도심을 바라보다 (서울특별시) ▲마치 야간 비행에 나선 비행사가 된 기분, 대구 앞산 야경 (대구광역시)▲도시·섬·항구가 어우러진 바다의 야경,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경남 창원) ▲불빛으로 피어나는 삶의 근기, 목포의 야경 (전남 목포) ▲밤의 열기 가득한 도시의 야경, 대전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 (대전광역시) ▲통합 청주시의 저녁 풍경 전망대, 수암골 전망대 (충북 청주) 등을 7월에 가볼 만한 야경 여행지로 선정, 추천했다.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참을 수 없는 기록의 가벼움/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참을 수 없는 기록의 가벼움/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출판 담당으로 많은 책을 접하게 되면서 기록물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정민 교수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 펴냄)을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제대로 된 기록이 훗날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해 줬기 때문이었다. 책은 정 교수가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초빙을 받아 1년간 머물면서 그곳 도서관에서 발견한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의 소장 자료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며 써내려간 18세기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들의 문화·학술 교류사다. 쉽게 왕래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만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교류는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졌고 서찰과 문집을 통해 소중하게 가꾼 결과 나라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서는 아름다운 지적 커뮤니티를 이뤘다. 200년 전 꽃핀 한·청 지식인의 우정을 오늘의 학자가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들이 주고받은 서찰과 문집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대의 세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기록물은 대체 불가능성과 고유성을 지닌다. 우리가 문자로 기록을 남기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된다. 아무리 단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지라도 후대의 사람들은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글 한 자 쓰는 것에 대한 책임이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사업을 창설하고 세계의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활용하기 위해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선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최근 역사적 기록물과 관련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원본성이 크게 훼손된 채 반복 출판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범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국독립을 위한 의거를 계획하던 1928년 봄 무렵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집필하기 시작해 상권을 완성했다. 이어 1942년 중경임시정부 청사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 ‘두 아들에게 아비의 경력이라도 알게 할 목적으로’ 하권을 완성했다. 해방 후 귀국과정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구술기록한 부분에 ‘나의 소원’을 덧붙여 1947년 국사원에서 출간한 것이 백범일지의 효시다. 문제는 처음 출간 당시 춘원 이광수가 원고의 교열을 보면서 긴박했던 독립운동 현장에서 기록한 원본의 생생함이 많이 희석되고, 백범 특유의 문체가 깔끔하게 다듬어지는 등 백범의 냄새가 거의 지워진 것이다. 심지어 친필본에서 선조가 안동 김씨 김자점의 방계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국사원본에서는 이를 ‘안동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라고 시작부터 왜곡했다. 국사원본이 백범 선생의 서문을 받아 수록했고, 발간승인을 얻은 유일본이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백범일지 판본은 80여종이 존재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열화당 출판사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백범일지의 친필 원본을 토대로 복간 작업을 하고 있다니 기대가 크다. 26일은 백범 선생이 경교장에서 숨을 거둔 지 65주기가 되는 날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힘주어 외치며 조국을 위해 몸을 사른 선생의 뜻을 바르게 알고, 가슴깊이 간직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lotus@seoul.co.kr
  • [문화마당] 북학과 숭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문화마당] 북학과 숭미/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조선 후기 인물들 가운데 현실 비판과 개혁안을 매우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라면 박제가(1750~1805)를 빼놓을 수 없다. 중등학교 교과서에서는 그를 박지원(1737~1805)과 함께 북학파의 대표주자로 치켜세우면서 그가 제기한 갖가지 개혁방안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한다. 특히 그가 강조한 상공업 진흥책이 1960년대부터 30년가량 진행된 산업화 시기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박제가는 마치 근대의 혜안을 지닌 인물로 이미지화됐다. 그러나 박제가만큼 외국 문물을 흠모하고 조선의 후진성을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드러낸 이도 드물다. 박제가의 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주제마다 먼저 청나라의 상황을 크게 칭송하고 나서 조선의 현실을 대비해 비난한 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내용과 어투를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청나라에 대해서는 칭송 일변도이고 조선에는 비난 일색이다. 심지어 조선의 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 불편하니 아예 문자(한문)뿐 아니라 말도 중국을 따르자는 글을 읽노라면, 박제가가 혹시 조선은 부끄러워하면서 중국을 맹종한 ‘중국마니아’는 아니었을까 의심이 솟구친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박제가에게 돌을 던지기는커녕 그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두 나라의 사정을 비교한 그의 글이 매우 사실적일 뿐 아니라, 그 대안도 상당히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관찰한 청나라 상황은 북경을 오가며 우연히 접한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박지원과 함께 밤을 새워 고민하고 탐구한 내용을 연행 길에 직접 확인하고 경험한 것이기에, 그런 사실성과 구체성을 갖출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태어나 자란 조선사회의 풍요를 바라는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글의 행간에서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좀 심하다 싶은 그의 비판이나 비난일지라도,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의 진정성이 어느덧 읽는 이의 온몸을 휘감아 돈다. 그는 ‘조선을 위해’ 청나라를 배우자고 외친 것이다. 요즘 국무총리 후보자가 이전에 행한 거의 망언 수준의 강연 내용이 공개되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논란이 불거지자 총리 후보자 측에서는 문제가 된 동영상 전체를 보고 평가해 달라며 일종의 정공법을 구사했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 강연 중의 발언들이 정말로 망언이라는 점이 더 확실해지고, 단순히 남의 글을 인용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확신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같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우리는 아예 애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떠나버린 애인에 대한 애증이나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애증이 바로 그런 예다. 조선이 근대의 문턱에서 좌초해 몰락한 것은 사실이므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조선에 대한 애(愛)와 증(憎)이 뒤섞인 속마음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런데 총리 후보자의 강연에는 애가 없고 증만 있다. 진지한 고민에 따른 현실 진단과 개혁안은 없고, 미국과 일본 덕분, 심지어 신(神) 덕분이라는 ‘덕분사관’뿐이다. 그러니 건설적인 학(學)은 없고 종교적 맹신 수준의 숭(崇)만 넘친다. 말이 필요 없는 수준 이하요, 후안무치다. 아마도 ‘증병’(憎病) 말기증상인가 보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감자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감자

    감자는 세계적으로 벼, 밀, 옥수수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재배된다. 아메리카나 유럽에서는 주식으로 이용된다. 2012년 기준으로 연간 재배면적은 약 1800만ha에 생산량은 3억 3000만t에 이른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서는 감자가 식량뿐 아니라 돈이 되는 환금작물이어서 더 가치가 높다. 우리나라에는 1824년 북간도를 통해 처음 도입됐다. 감자는 대부분 삶거나 쪄서 먹고 있다. 국산 감자를 가공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감자칩, 감자떡, 감자탕용 등에 불과하다. 전분, 프렌치프라이, 군감자용 등은 대부분 수입해서 먹고 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페루와 볼리비아 경계에 있는 티티카카호 근처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기원전 400년경 감자를 재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 페루인들은 감자를 ‘빠빠’(Papa)라고 부르는데, 어머니신(Pachamama)으로부터 유래된 ‘감자여신’(Papamama)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다산숭배에 대한 의식과 식량으로서 감자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유럽으로 감자를 처음 도입한 것은 1570년경이다. 미국에는 영국과 버뮤다를 거쳐 17세기 초에 도입됐다. 유럽인들은 감자를 처음 보았을 때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물이라는 이유로 악마의 선물, 만병의 원인이라고 여기고 사료나 죄수의 식사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척박한 독일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에 주목했다. 감자를 강제로 심게 해 기근을 극복하고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프랑스의 파르망티에는 프러시아에서 포로생활 중에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루이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를 설득해 프랑스에서 감자를 대중화시켰다. 괴테는 감자를 “신이 내린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감자는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됐다. 조선말 실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24년이다. 북간도를 통해 개마고원으로 산삼을 캐러 다니던 청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 1832년 영국 상선 로드암허스트호에 의해 충청도 해안으로 전래됐다는 설도 있어 감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감자는 즉시 식량작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 쌀을 세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감자 재배를 그다지 장려하지 않았음에도 1879년에 강원도와 한성부에서 널리 퍼질 정도였다. 감자는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에서 잘 자란다. 특히 재배 중 필요로 하는 물이 벼농사의 37% 수준이어서 물이 부족한 준사막지대, 고산지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알래스카, 그린란드와 같이 추운 곳이나 아프리카의 우간다, 케냐, 에티오피아 등 열대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또 1㏊당 벼 4.7t, 보리 2.4t, 옥수수 9t을 생산할 수 있는데 비해 개발도상국에서도 감자는 10~15t을 생산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당 평균 25t을 생산한다. 감자는 재배기간도 짧다. 벼가 5개월, 콩·옥수수·고구마 등이 4개월인데 비해 감자는 3개월 정도면 수확할 수 있다. 밭이 빌 때 다른 작물들도 재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감자는 땅에서 캐서 별다른 가공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게 밀이나 옥수수와는 다른 장점이다. 감자는 다양한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는 거의 완전한 식품이다. 거의 모든 필수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다. 특히 감자에 들어있는 비타민 B1은 쌀의 2∼3배, 비타민 B2와 B3는 쌀의 3배에 이른다. 또 비타민 C는 사과의 6배를 함유하고 있다. 채소류의 비타민 C 함량도 높긴 하지만 열로 가공하면 대부분이 파괴된다. 반면 감자의 비타민 C는 가열을 해도 전분입자들이 막을 형성해 손실이 많지 않다. 감자에 특히 많이 들어있는 성분이 칼륨(K)이다. 중간 크기의 감자 1개를 껍질째 먹을 경우 720mg을 섭취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칼륨함유식품인 바나나(400mg)보다 많은 양이다. 칼륨은 고혈압 개선에 효과가 있다. 감자의 이런 영양적 특성에 주목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우주선 내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BLSS(Bio-regenerative Life Support System)를 개발하고 있다. 이미 1988년 수경재배를 이용한 우주 식량으로서 감자의 가능성을 시험한 적도 있다. 예전에는 속이 희거나 담황색인 감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붉은색, 자주색, 줄무늬 등도 개발됐다. 자주색이나 붉은색을 나타내는 성분은 항산화 기능성 물질로 잘 알려진 안토시아닌이다. 컬러감자는 항암작용을 하고 통풍을 개선하는 데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겉은 담황색이고 속은 흰색인 감자가 인기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나 중국에서는 노랑색을 황제의 색으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어서 속이 노란색일수록 인기가 있다. 속이 노란 감자의 색소 구성성분은 카로티노이드다. 감자의 카로티노이드 중에는 루테인, 제아잔틴 등 망막의 구성성분으로 시력 감퇴나 실명의 위험을 낮추는 성분이 들어있다. 특히, 루테인은 동물 실험에서 단시간 내에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효과를 보였다.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센터 이학박사 조지홍 문의 kdlrudwn@seoul.co.kr
  • [특파원 칼럼] 서태후의 비취 목걸이/주현진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서태후의 비취 목걸이/주현진 베이징 특파원

    “목걸이 하나가 최소 300억원! ” 8일 열리는 홍콩 소더비 춘계 경매에 사치의 대명사인 청(淸)나라 서태후(西太后)의 비취 목걸이가 시작가 300억원(2억 2300만 홍콩달러)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목걸이의 이름은 ‘제국녹비취조주’(帝國翡翠朝珠). 녹색 비취로 만든 청 제국의 예복 목걸이란 의미다. 서태후는 108개의 비취 구슬을 꿰어 이 목걸이를 만들어 착용하다가 황제인 광서제(光緖帝)에게 하사했다. 광서제는 이를 가장 아끼던 애첩인 진비(珍妃)에 선물했다. 그러나 광서제와 진비의 운명은 목걸이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 운동인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주도하다가 폐위됐다. 진비는 이런 광서제를 따랐다가 우물에 처박혀 죽임을 당했다. 이 목걸이가 천문학적 가격으로 새 주인을 찾는 것은 서태후의 애장품인데다 이 같은 사연까지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목걸이가 300억원을 호가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베이징의 대형 백화점에 가 보면 수억원대가 아니라 수십억원짜리 비취 액세서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최고 명품 보석으로 거래되지만 중국에선 비취를 더 높게 평가한다. 중국인의 유별난 비취 사랑은 유서가 깊다. 비취는 명(明)·청(淸) 시대 때 미얀마가 조공(朝貢)으로 바치면서 들어왔다. 중국 황실은 다이아몬드나 루비보다 비취를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특히 서태후가 비취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비취로 만든 반지·목걸이 외에 배추 모양을 정교하게 본뜬 국보급 공예품 등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인의 비취 사랑 덕분에 주요 산지인 미얀마와 인접한 중국 윈난(雲南)성에는 미얀마 비취를 가공해 내륙으로 보내는 보석상만 수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취가 악귀를 쫓는 기운이 있다고 전해지면서 중국에선 돈 있는 남자들도 비취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이제 세계 보석 시장도 비취에 눈독을 들이는 분위기다. 지난 4월 열린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청나라 말기에 제작된 비취 목걸이가 280억원(2억 14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 비취 구슬 27개가 어우러진 이 목걸이의 새 주인은 다름 아닌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까르띠에’였다. 세계적 보석상들도 두툼해진 중국인의 돈 지갑을 노리고 비취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비취 구슬 108개로 만들어진 서태후의 비취 목걸이가 1100억원 이상에 낙찰될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비취를 가장 좋은 보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중국인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떻게 비취를 아끼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무 상관없다”고 말한다. 13억 중국인만 비취를 좋아해도 비취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좋아하면 그것이 곧 세계의 기준이 된다고 믿는 ‘대국 스타일’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익숙지 않은 규칙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생경한 미국의 슈퍼볼(미식축구 결승전) 경기가 세계 최고의 광고료를 자랑하는 스포츠 축제가 된 것처럼, 어느새 중국인들이 좋아하면 세계가 어떤 이유에서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jhj@seoul.co.kr
  • ‘사치의 대명사’ 서태후 비취 목걸이 경매에

    ‘사치의 대명사’ 서태후 비취 목걸이 경매에

    사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청나라 서태후(西太后)의 비취 목걸이가 오는 8일 열리는 홍콩 소더비 춘계 경매에서 2억 2300만 홍콩달러(약 300억원)에 나올 예정이라고 홍콩 명보(明報)가 4일 보도했다. ‘제왕(帝王) 비취 조주(朝珠·예복 목걸이)’라는 이름의 이 장신구는 108개 비취 구슬을 이어 만든 것으로 청나라 궁중 예복을 입을 때 착용하는 목걸이다. 서태후가 광서제(光緖帝)에 하사했고, 광서제가 다시 애첩인 진비(珍妃)에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광서제는 개혁운동인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주도하다 서태후에게 유폐됐고, 진비도 이런 광서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우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이들의 사연이 담긴 이 비운의 목걸이는 광서제의 서예 스승인 펑수(彭述)의 일가가 보관해오다 이번에 경매에 나왔다고 신문은 전했다. 목걸이를 경매에 내놓은 싼시탕(三希堂) 측은 “27개 비취 구슬로 만들어진 청나라 말기의 조주가 지난 4월 소더비 경매에서 약 2억 1000만 홍콩달러(약 280억원)에 낙찰됐다”면서 “이로 미뤄 볼 때 108개 비취 구슬로 만들어진 이 제품은 최소 8억 홍콩달러(약 1100억원)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청나라 문인이 달아준 비평에… 박제가는 감격했네

    청나라 문인이 달아준 비평에… 박제가는 감격했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정민 지음/문학동네/720쪽/3만 8000원 지난해 2월 27일 낮 12시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세미나실에서 한문학자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조촐한 연구발표회를 가졌다. 그가 방문교수로 와서 지난 6개월간 발굴한 ‘하버드 옌칭도서관의 후지쓰카 컬렉션’에 대해서였다. 제임스 청 옌칭도서관장과 사서 등 도서관 관계자들과 한국학, 일본학, 중국학 연구자 등 세미나실에 모인 사람들 중 후지쓰카가 누군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는 훗날 국보 180호가 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소장하다 태평양전쟁 끝 무렵 서예가 소전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 없이 넘겨줬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청(淸)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에 전해졌는지, 두 나라의 학자들이 어떻게 교유했는지를 연구하는 데 푹 빠져 평생 엄청난 양의 서적을 중국과 조선에서 수집한 인물이다. 나고야 대학의 전신인 제8고등학교 교수를 거쳐 베이징 파견 연구학자,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그는 특히 추사에 매료돼 18~19세기 한·중 지식인의 교류와 관련된 자료는 고서부터 메모, 그림까지 무엇이든 수중에 넣었다. 1940년 정년을 맞은 그는 수집한 사료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가 모으거나 베껴 쓴 책들의 일부가 우여곡절을 거쳐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까지 흘러들어 갔다. 60여년간 옌칭도서관 선본실 서가에 잠들어 있던 이 책들은 2012년 8월 방문학자로 옌칭연구소를 찾은 정 교수에 의해 빛을 본 것이다. 이날 발표는 “중국에 대해 연구하다 조선에 빠진 일본인 학자가 소장하고 연구했던 책들이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오게 된 경위와 그 자료의 가치를 한국인 학자가 미국에서 설명하는 다국적 주제였다”고 정 교수는 요약한다. 신간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정 교수가 열정적 자료 탐구와 남다른 지식 생산력으로 시공을 넘나들며 지식의 바다에서 길어 낸 한·중 지식인의 교류사다. 문학동네가 펴내는 ‘우리 시대의 명강의’ 6번째 책으로, 정 교수가 지난해 3~12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매주 연재한 글 40편을 모았다. ‘문예공화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 각국 인문학자들이 라틴어를 매개로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서로 소통하던 지적 공동체를 일컫는다. 물리적 국경을 초월한 상상 속의 문예공화국 안에서 글이 오가며 토론하는 가운데 지식인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싹텄고, 이는 실질적인 계몽주의의 토대가 됐다. 18세기 청나라와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통 문어(文語)인 한문을 사용해 필담으로 시와 학문을 나누고 우정을 다지며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형성했다. 동심원을 그리듯 점점 깊어지고 넓어진 지식 네트워크의 시초는 북학(北學)의 기틀을 다진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 그는 숙부 홍억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행사(燕行使)가 되어 1765년 베이징에 갔다가 향시를 보러 온 절강의 선비인 엄성, 육비, 반정균 등과 우연히 만나 사귀며 천애지기를 맺는다. 정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후지쓰카가 자신의 전용원고지에 베껴 쓴 엄성의 ‘철교전집’과 엄성·육비·반정균의 향시 답안지를 따로 모아 묶은 ‘절강향시주권’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조선과 청조 지식인의 교류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홍대용이 막을 열고 박제가가 발전시킨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은 당시 양국 간 정치적 위계와 무관하게 평등한 지식 네트워크의 모습으로 지속적으로 확장했음을 후지쓰카가 수집한 필사본 ‘한객건연집’ 등 사료들은 증명하고 있다. 1776년 11월 연행길에 오른 유금(柳琴,1741~1788)은 연암 그룹의 문우인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의 시를 모은 ‘건연집’(巾衍集) 을 가지고 ‘월동황화집’이라는 시집을 쓴 청 조정의 관리 이조원을 찾아가 서문과 비평을 부탁했다. 이조원은 우연히도 홍대용이 오래전 우정을 맺은 반정균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조원·반정균 두 사람은 조선문인 네 사람의 시집에 ‘한객건연집’이라는 제목을 달아주고 각 시에 정성껏 비평을 달아주었다. 청색, 적색 글씨로 우아하고 정중하게 쓰인 비평을 받아든 박제가 등은 감격을 금치 못한다. 상대방의 지적 역량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만남이 만남을, 우정이 우정을 낳는 과정을 그들의 후학인 정 교수는 방대한 지식과 치밀한 자료 탐색,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한 장면씩 되살려낸다. 옌칭도서관을 뒤져 후지쓰카 컬렉션을 하나둘씩 찾아내고,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해가면서 어떤 때는 “좋아 펄쩍펄쩍 뛰며 연구실을 뱅뱅 돌았다”는 정 교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공자가 논어 첫머리에서 말했던 학문의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중국서 고급가구 수요 증가로 ‘희귀 나무’ 절멸 위기

    중국서 고급가구 수요 증가로 ‘희귀 나무’ 절멸 위기

    중국 고급가구 시장의 급성장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불법 벌목이 기승을 부리면서 일부 수목은 절명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12일 영국 기반의 한 국제환경단체가 경고했다. 중국에서는 부유층의 증가로 부(富)를 상징하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화려한 엔틱 가구를 표방한 고급 가구들의 매출이 급증, 그 중에서도 이른바 ‘홍목’으로 만든 가구 수요의 증가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타이 등 메콩강 유역국가의 샤미즈 로즈우드가 절멸 위기에 놓였다고 비정부기구(NGO)인 국제환경조사기구(EIA)가 밝혔다.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으로 수출된 희귀 나무는 2000년 이후 24억 달러(약 2조 4600억원)에 이르는 데 불법 벌목으로 메콩강 유역 산림이 벌거숭이가 되고 있다고 전해졌다. 이 기구의 환경운동가인 페이스 도허티는 “특히 타이의 상황은 환경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수년 이내에 샤미즈 로즈우드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 벌목은 생각 외로 조직적이고 심각하다. 지난해 캄보디아 벌목꾼 69명이 불법으로 타이 국경을 넘다가 타이군에 사살된 바 있다. EIA는 샤미즈 로즈우드 통나무 등 목재의 무역을 금지하는 국제법 강화를 요구하는 동시에 중국에도 가구업계의 규제를 강화해 수요를 억제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진=EIA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위구르족 초강경 저항 예고… 시진핑 反테러 행보 시험대

    위구르족 초강경 저항 예고… 시진핑 反테러 행보 시험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반테러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를 시찰한 때에 맞춰 신장 중심부에서 폭발 테러 사건이 발생해 중국 전역에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시 주석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분리·독립을 외치는 위구르인들의 테러 활동을 겨냥한 것인 만큼 이번 사건은 이들이 당국을 향해 더욱 강경한 저항을 예고하는 ‘경고성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시 주석의 반테러 행보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중심 도시인 우루무치(烏魯木齊) 남기차역에서 지난달 30일 오후 7시 10분 발생한 테러 사건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자살 폭탄 테러로 드러났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1일 보도했다. 당국은 “용의자인 써디얼딩사우티(色地爾丁沙吾堤·39) 등 2명은 오랜 기간 극단적인 종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번 사건에 참여했던 것”이라면서 “두 사람은 사건 현장에서 모두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날 발생한 폭탄 테러로 용의자 2명 등 3명이 사망하고 79명이 다쳤다. 사망자 1명은 무고한 행인이었다. 당국은 당시 테러범이 기차역 출구로 나오는 승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른 뒤 미리 준비한 폭탄을 터뜨렸다고 밝혔다. 범인이 위구르인으로 나타난 데다 당국이 사건을 ‘종교적 극단주의자’에 의한 테러로 규정해 사실상 위구르 분리·독립운동 세력을 ‘배후’로 지목한 만큼 향후 위구르인들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한층 심화될 전망이다. 앞서 시 주석은 지난달 27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카스(喀什), 수푸(疏附), 우루무치 등 테러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취임 뒤 첫 신장 시찰에 나섰다. 특히 군경부대를 잇달아 방문해 테러 세력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문하는 등 반테러 의지를 내세우는 데 집중했다. 시 주석은 테러 발생 당일 오전까지도 사건이 터진 우루무치에서 지역 모범 일꾼 28명을 접견하는 일정을 소화한 뒤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반테러를 외친 시 주석의 코앞에서 발생한 테러는 위구르 분리·독립 세력의 저항 의지가 얼마나 강경한지를 보여 준 것이라고 분석된다. 당국은 시 주석의 방문에 맞춰 자치구 전역에 군용 헬기와 탱크를 동원하고 주요 대로를 봉쇄하는 등 최고 경계 태세를 갖췄음에도 테러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장 테러가 변경 마을 일대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행정도시인 우루무치로 옮겨 갔고, 자치구 주변 도시는 물론 베이징으로까지 북상하는 등 날로 대담해지고 있다며 향후 테러 사건이 더욱 빈발할 것이란 우려를 내놓고 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위구르족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아 ‘중국의 화약고’로 통한다. 청나라 때 중국에 편입된 뒤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한때 독립을 시도했으나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신장위구르자치구로 남았다. 2200만 인구 가운데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1000여만명이 위구르족이다. 이들은 한족의 대량 이주와 민족 동화정책, 경제권 장악 등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면서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시위와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망명 위구르인 단체인 세계위구르회의의 딜사트 라시트 대변인은 사건 직후 성명에서 “시 주석이 이번 방문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개선할 건설적인 제안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면서 “폭발 사건은 억압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 성패 무엇이 갈랐나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 성패 무엇이 갈랐나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신명호 지음/역사의 아침/544쪽/2만원 19세기 중반 역사적 전환기에 조선과 일본은 모두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그 극복 과정과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선의 고종은 근대화에 실패한 군주가 됐지만 일본의 메이지는 근대화를 성취한 군주로 떠올랐다. 저자는 이렇게 된 원인을 고종의 개인적 능력에 한정하지 않고 ‘전환기’라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망했다. 고종이 즉위하던 19세기 중반 동북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붕괴되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가 투영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었다. 1863년에 만 11세의 나이로 왕이 된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을 거쳐 1874년 봄 친정에 나섰다. 그러나 고종도 친정 초기에는 흥선대원군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청나라가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에 굴복한 이유를 ‘힘의 부족’이 아니라 ‘내부 배신’에서 찾은 것이다. 또 청의 이홍장(李鴻章)이 1879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과 수호 조약을 맺는다면 단지 일본만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도 아울러 막아낼 수 있다’는 내용의 밀서를 보낸 데 대해 고종은 ‘우리나라는 옛 법을 지켜 편안히 거처하며 나라 안이나 다스렸지 외교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는 당장은 서양 각국과 통상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뒤늦게나마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고 새 시대를 준비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지도력의 한계와 청, 일본 등 주변국들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생부인 흥선대원군은 하야한 뒤에도 권력에 집착해 고종과 권력 투쟁을 지속했고, 위정척사파라 불린 보수 유림과 중앙 관료들도 개화 정책에 반대했다. 메이지는 1867년 만 16세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했다. 같은 해 에도 막부의 쇼군이 메이지에게 정치권력을 헌상한 대정봉환(大政奉還), 이듬해에는 메이지 유신 등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메이지는 전환기의 혼란을 이겨내고 성공했지만 그의 역할은 한정적이었다. 혼란을 극복한 주역은 사실상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 같은 웅번(雄藩)이었다. 메이지는 이들 웅번이 성취해 낸 성과에 편승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메이지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한·일 간에는 오늘날에도 역사 인식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싸운 위인인가, 아니면 테러리스트인가. 한국인이라면 안중근 의사를 민족의 상처와 아픔을 대변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위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동양 평화의 파괴자로 본다. 우리의 주권을 강탈한 원수이자 동양 평화를 깨뜨린 흉악범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인들은 동양 평화의 수호자로 여긴다. 한국과 일본 간에 보호 조약이 체결된 을사년(1905년)은 우리에게 크나큰 상처이자 아픔이다. 그런 을사년이 일본인들에게는 동양 평화가 확립된 해로 인식된다. 러일 전쟁의 승리로 동양에 평화가 왔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 우리의 인식과 상반되는 인식과 주장이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그런 인식과 주장이 가져왔던 참혹한 결과들을 살펴보는 책이기도 하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지구촌 책세상] 청나라 궁중암투… 中 공직사회 장수 비법 본다

    [지구촌 책세상] 청나라 궁중암투… 中 공직사회 장수 비법 본다

    중국에서 ‘관장(官場·관가)소설’로 불리는 정치소설은 대표적인 인기 장르다. 시대와 상관없이 공직사회의 음모와 암투를 주요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특정 역사나 실존 인물 중심으로 쓰였더라도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과는 다른 독립 분야로 분류된다. 정치소설로 히트 친 작가들이 중국 부자 작가 순위에 대거 이름을 올릴 만큼 중국 출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대청상국’(大淸相國)은 지난해 7월 출간돼 4월 현재까지 당당망(當當網) 등 인터넷 서점에서 꾸준히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베스트셀러다. ‘국화(??) 메이츠(梅次)의 이야기’, ‘창황’(蒼黃) 등 정치소설로 유명한 공무원 출신 작가 왕위에원(王躍文)의 작품이다. 50년간 강희(康熙)제를 보필한 장수 상국(조선시대 영의정격) 진정경(陳廷敬)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당시 그와 함께 시대를 풍미한 유명 대신들 사이의 암투와 그들의 명멸 과정을 그렸다. 과거를 보러 간 주인공 진정경이 우연히 조정의 입시 비리 행각을 목격한 뒤 동료 시험생을 죽인 살인자로 누명을 쓰는 이야기로 시작해 긴장감 넘치는 사건들이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작가는 진정경을 주목한 이유에 대해 그가 강희제 시절 선종(善終)을 거둔 유일한 대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강희제의 친정(親政) 선포에 반발해 군사반란을 일으킨 섭정대신 오배(熬拜)를 비롯해 색액도(索額圖), 명주(明珠), 고사기(高士其) 등 주요 대신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귀향·유배되는 비운의 결말로 공직 인생을 마감한 것과 대조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청상국은 공직 사회에서 장수하는 비법을 소개하는 책으로도 통한다. 시진핑(習近平) 정부의 반부패 운동을 주도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왕치산(王岐山) 서기가 공무원들에게 필독 도서로 추천했다. 그러나 책이 인기를 끄는 것은 청나라 조정 대신들 사이의 암투를 소재로 했지만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현 정가의 부패상과 권력 다툼을 현실감 넘치게 담아냈기 때문이란 평이 지배적이다. 중국에선 정치인들의 정보가 베일에 가려져 있고, 공무원 사회와 민간 간 괴리가 크다. 정치 분야에 대한 중국인들의 갈증과 알고 싶은 욕구가 정치소설 베스트셀러를 양산하는 ‘중국 특색’의 출판 현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국 출판업계 한 관계자는 “정치소설의 인기가 높을수록 국민의 알 권리와 참여권 등 기본권을 보장하는 ‘투명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높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집 바닥 굴러 다니던 ‘中 붓통’ 알고보니 4억 짜리

    집 바닥 굴러 다니던 ‘中 붓통’ 알고보니 4억 짜리

    40년 이상이나 거실 문을 괴던 용도로 쓰던 물건이 알고보니 수억 원짜리 가치라면? 최근 영국 하트퍼드셔의 한 가정집에서 오랜 시간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던 물건이 고 예술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예술품 전문가는 이 물건의 가치를 무려 4억원 이상이라고 감정했다. 이같은 사실은 고 예술품 감정가 리처드 해리슨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 그는 최근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하트퍼드셔에 사는 한 부부의 자택으로 초대를 받았다. 이유는 새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예술품들의 감정을 원했던 것. 부부의 소개로 집에 보관된 여러 예술품들을 둘러보던 해리슨은 뜻밖에도 거실문을 괴는 용도로 쓰던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을 발견했다. 한눈에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 여긴 해리스. 곧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이 물건이 붓통으로 약 300여년 전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감정했다. 해리스는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22cm 높이의 붓통” 이라면서 “마치 3차원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조각돼 있다” 며 감탄했다. 이어 “거실을 굴러다닌 것 치고는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면서 “이달 말 경매에 나올 예정으로 25만 파운드(4억 3000만원)에 낙찰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집 바닥 굴러 다니던 ‘붓통’ 알고보니 4억 짜리

    집 바닥 굴러 다니던 ‘붓통’ 알고보니 4억 짜리

    40년 이상이나 거실 문을 괴던 용도로 쓰던 물건이 알고보니 수억 원짜리 가치라면? 최근 영국 하트퍼드셔의 한 가정집에서 오랜 시간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던 물건이 고 예술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예술품 전문가는 이 물건의 가치를 무려 4억원 이상이라고 감정했다. 이같은 사실은 고 예술품 감정가 리처드 해리슨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 그는 최근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하트퍼드셔에 사는 한 부부의 자택으로 초대를 받았다. 이유는 새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예술품들의 감정을 원했던 것. 부부의 소개로 집에 보관된 여러 예술품들을 둘러보던 해리슨은 뜻밖에도 거실문을 괴는 용도로 쓰던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을 발견했다. 한눈에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 여긴 해리스. 곧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이 물건이 붓통으로 약 300여년 전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감정했다. 해리스는 “나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22cm 높이의 붓통” 이라면서 “마치 3차원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조각돼 있다” 며 감탄했다. 이어 “거실을 굴러다닌 것 치고는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면서 “이달 말 경매에 나올 예정으로 25만 파운드(4억 3000만원)에 낙찰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희귀 술잔’ 한 개 380억 원 낙찰…역대 최고가 경신

    ‘희귀 술잔’ 한 개 380억 원 낙찰…역대 최고가 경신

    술잔 한 개의 가격이 무려 380억 원? 중국 명 시대의 희귀 술잔이 경매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하며 고가에 낙찰됐다. 홍콩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 등장한 이 술잔은 500여 년 전인 명나라 성화제(成化帝·재위 1464∼1487)때 만들어진 것으로, 지름 8㎝의 작은 크기다. 술잔에는 희뿌연 바탕에 수탉과 암탉, 병아리 등이 그려져 있어 일명 ‘닭 술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3마리 닭은 황제와 황후, 신하와 백성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측되며, 전문가들은 이 술잔의 외형 및 그림 등이 명나라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니콜라 초 소더비 아시아 담당 부회장은 이를 두고 “중국 예술의 ‘성배’”라고까지 극찬하면서 “중국 도자기 역사상 이보다 더 전설적인 물건은 없었다”고 단언했다. 특히 이 술잔은 전 세계에 19점 정도밖에 남지 않은 ‘희귀 아이템’으로 알려져 수집가들의 눈길이 더욱 쏠렸다. 더할 수 없을 만큼의 극찬을 받은 이 희귀 술잔은 몇 번의 ‘격전’ 끝에 2억 8100만 홍콩달러, 우리 돈으로 약 380억원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상하이 출신의 백만장자인 류이첸(劉益謙·50)으로, 금융재벌이자 미술관 2곳을 소유한 ‘예술품 재벌’로도 유명하다. 한편 경매에 나온 중국 도자기 중 ‘닭 술잔’ 이전까지 가장 비싸게 팔린 것은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만들어진 호리병이다. 이것은 2010년 경매에서 2억 5266만 홍콩달러, 우리 돈으로 약 342억 원에 낙찰됐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나른한 봄, 기운 돋우는 조기

    [김준의 바다 맛 기행] 나른한 봄, 기운 돋우는 조기

    제주 추자도 남쪽에서 겨우살이를 한 조기들이 흑산도 근해를 거쳐 갯골을 따라 칠산바다에 이른 것은 청명일이다. 전남 영광 법성포가 내려다보이는 구수산에는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붉게 피어올랐다. 목냉기 술집 초막에는 분 냄새를 풍기며 아가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제 본격적인 조기잡이 철이다. 연평도 위도 대리마을 원당에서, 태안 황도리 당집에서 기 내림으로 받은 깃발을 이물에 꽂고 칠산바다로 향했다. 50여년 전 칠산바다의 조기잡이는 이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참조기·보구치 등 우리나라 연해에 10여종 서식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한다. 종류가 자그마치 180여 종에 이르며 우리나라 연해에서는 참조기, 보구치, 수조기, 부세 등 10여 종이 서식한다. 이 중 굴비를 만드는 참조기는 몸이 두툼하고 길이가 짧으며, 몸통 가운데 옆줄이 선명하다. 또 배는 황금색이며 꼬리는 부채꼴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나주목 영광군’편은 “석수어(石首魚)는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 여름 사이에 여러 곳의 어선이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그 세금을 받아서 국용에 이바지한다”라고 적고 있다. ‘석수어’는 조기를, 파시평은 칠산바다를 이른다. 일제강점기에는 칠산탄, 고군산군도, 녹도, 연평도, 용호도 등에 조기어장이 형성됐다. 춘삼월에 서해로 북상하기 시작한 조기는 칠산바다를 지나 오뉴월이면 해주와 진남포 앞까지 올라갔다. 조기가 지나는 길목의 섬이나 어촌마을의 후미진 해안의 모래밭에는 초막을 짓고 술과 웃음으로 뱃사람을 유혹하는 아가씨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흑산도 예리, 법성포 목냉기, 위도 치도리, 연평도 등의 선창에 희미하게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를 두고 조기파시라 했다. 조기잡이가 활발했던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어촌마을에는 임경업 장군을 마을신으로 모신 곳이 많다. 조선 인조 때 청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임 장군은 연평도 물골에 가시가 있는 엄나무를 꽂아 조기를 잡아 병사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고 한다. 그 뒤 연평도 등 황해도 일대에서는 임 장군을 ‘조기잡이 신’이라 부르며 마을신으로 모셨다. 임 장군이 최초로 조기를 잡았다고 전하는 곳이 연평도 당섬과 모니섬 사이의 안목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선 10여명의 주민들이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고 있다. 조기잡이 배가 바람에 의존하는 풍선배에서 동력선으로 바뀌면서 서해안 전역이 하나의 조기잡이 어장권으로 바뀌었다. 연평도 등 황해도에서 활동하던 무녀의 세력권도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확대됐다. 황해도의 조기잡이 어업기술과 어로문화 또한 자연스레 서해로 전파됐다. 임 장군이 충청도 일대의 마을신으로 모셔진 것이나 황해도의 ‘배치기소리’가 서해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3월 중순 조기는 알 배고 통통 ‘으뜸’ 조기는 청명과 입하 사이인 음력 삼월 중순 곡우에 잡힌 것을 으뜸으로 여겼다. 이때 잡힌 조기는 알이 배고 통통해 ‘곡우사리조기’ 혹은 ‘오사리조기’라고 했다. 영광에선 곡우사리에 잡은 조기 중 가장 크고 실한 조기를 조상과 집안을 지켜주는 성주에게 올린다. 이를 두고 ‘조구심리’라고 한다. 조구는 조기의 전라도 말이다. 조구심리를 하기 전까지 산 사람은 조기를 먹을 수 없었다. 이때 잡은 조기로 만들 굴비를 ‘오가재비’라 불렀다. 칠산바다 가운데 있는 송이도라는 섬에서 조기를 잡았던 한 노인은 철쭉이 필 무렵 참조기떼가 몰려오면 바다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대통을 넣어 소리를 듣고 길목에 그물을 치면 조기가 그물에 하얗게 들어 그물이 둥둥 떴다고 했다. 외지 사람들이 아무리 큰 배를 가지고 와도 바닷속을 훤하게 들여다보는 섬주민들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서해 간척사업 후 칠산바다 조기 사라져 부안 계화도에서 만난 한 노인은 봄이면 조기들이 갯골에 몰려와 줍기만 해도 한 동이가 됐다고 했다. 그 많던 조기들이 계화도 간척 이후 사라졌다. 천수만과 영산강, 금강 일대의 갯벌로 향한 물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조기가 칠산바다에서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가거도나 추자도 심지어 동중국에서 월동하는 조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제대로 크지 않는 조기가 알이 밴 채로 잡힌다. 더 자라지 못하고 종족 보전을 위해 산란을 해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동해를 대표했던 명태가 사라졌듯 서해를 대표하는 조기도 사라졌다. 조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하나의 문화라 할 만큼 소리, 굿, 어업, 산업 등에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글 사진 전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joonkim@jeri.re.kr ■ 어떻게 먹을까 볕·해풍에 말리면 굴비 냉장시키면 ‘간조기’ 고추장·보리와도 찰떡 조기는 기운을 돋우는 생선이라 해서 조기(助氣)라고 했다. 산모나 환자는 조기죽, 조기미역국으로 허한 몸을 추스렸다. 또 제사나 잔치에서 상의 맨 윗자리를 차지한 것도 조기였다. 특히 조기젓은 궁중에서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할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조기를 볕과 해풍에 말린 게 굴비다. 가공과정은 염장과 건조로 나뉜다. 칠산바다에서 곡우사리 때 잡은 조기와 천일염을 번갈아 가면서 쌓은 뒤 가마니로 덮었다. 이를 ‘섶간’이라 한다. 그렇게 며칠을 두면 조기의 내장까지 소금이 배어든다. 이때 꺼내 찬물에 헹궈서 열 마리씩 엮어 걸대에 두세 달씩 말렸다. 법성포에는 건조굴비 외에도 독 속에 오가재비와 겉보리를 넣어 만든 통보리굴비, 쌀고추장에 통째 박아 두었다 찢어 먹는 고추장굴비도 있다. 보리가 조기를 건조시키면서 기름기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 옛 건조굴비는 딱딱했지만 요즘엔 꾸덕꾸덕하게 냉장 보관하는 ‘간조기’로 바뀌었다.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 입맛에 맞춘 것.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사라지면서 가거도, 추자도 일대에서 잡은 조기로 굴비를 만든다. 심지어 원양어선들이 잡아오는 조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 [정병석 경제산책] 송나라의 번영과 규제 혁파

    [정병석 경제산책] 송나라의 번영과 규제 혁파

    중국의 오랜 역사를 통해 가장 창조적이면서 최고의 번영을 이룬 시대는 송나라, 특히 북송 150년간으로 알려져 있다. 송나라는 기술혁신, 경제성장, 관료 지배구조 등에서 당시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 위대한 ‘창조적 시대’를 구현했다는 것이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청명상하도’는 송의 수도 개봉의 번영과 활기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전 세계 관람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원작 청명상하도는 송의 장택단이 1120년쯤 두루마리 형태로 그린 풍속화인데 상하이 엑스포를 맞이해 이를 토대로 초대형 디지털 영상물로 제작한 것이다. 중국 역사를 50년 이상 연구한 하버드대 페어뱅크 교수는 유작인 ‘신중국사’에서 송이 가장 창조적이면서도 최전성기를 이룬 배경을 여러 각도에서 제시했다. 전란에 황폐해진 농지의 개간, 양쯔강 이남의 개발, 수리사업, 품종개량과 인구의 증가에 따라 농업생산이 증가하면서 경제가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수도인 개봉까지 연결된 운하와 강 등 수로(3만 마일 길이)를 통한 물류유통시스템이 원활하게 가동돼 국내 상공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20세기 사학 명저의 하나로 발간된 ‘중국통사’에서는 송나라 초기부터 이뤄진 대대적 규제혁파와 행정기관의 권력분산을 강조하고 있다. 송 건국 당시 시행되던 농업 관련 규제들이 국민들의 활동을 얼마나 촘촘하게 족쇄를 채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포구마다 통행세를 부과하고 과수원, 양어장, 물레방앗간을 운영하는데도 세금, 오리사육, 조개 채취, 땔감 채취, 논에 물대는 일 등에도 온갖 명목의 잡세를 부과했다고 한다. 송 건국자 조광윤은 농업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이런 잡세를 철폐한다. 2대 황제도 강 연안 지역에서 곡식을 운송하는 선박으로부터 걷던 세금을 폐지한다. 3대 황제는 농기구에 부과하던 세금도 폐지한다. 이러한 규제혁파로 농민의 부담이 줄고 경제활동이 자유로워지자 생산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를 강조하는 것은 역대 황제의 치적으로 역사서에 기록될 만큼 규제철폐는 중요한 정치적 결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송의 개봉은 당의 수도였던 장안보다 훨씬 규제가 없는 도시였다고 한다. 장안에서는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역과 영업시간에 제한이 있었는데 개봉에서는 이런 규제를 대폭 완화한다. 그래서 장안이 밤만 되면 활동이 정지된 캄캄한 세상이었던 데 비해 개봉은 밤새도록 사람들이 붐비는 인구 100만명을 헤아리는 세계 최대도시로 변모했다. 청명상하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활기차고 풍부한 물자유통, 오락 등은 개봉의 이런 모습을 반영한다. 개봉에는 수십 개의 극장이 있었고 여기서 각종 잡극, 만담, 연극 등을 시현했는데 어떤 극장은 수천 명을 수용할 만큼 컸다고 한다. 이런 규제완화가 송을 중국 역사상 가장 창조적이면서 번영한 나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송을 뒤이은 명이나 청나라는 규제가 심한 매우 엄격한 사회였다. 명의 초대 황제 주원장은 송·원이 망한 것은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가혹한 처벌제도를 신설하고 관리를 감시·감독하는 금의위(비밀 정보사찰기구), 도찰원(감찰기구) 등의 전담기구를 설치한다. 구체적 범법 사례 1만여개를 모은 사례집을 인쇄해 각 가정에 보급하고 각급 학교에서 이를 필수적으로 교육하게 지도한다. 관리와 민간에게까지 이렇게 엄격하게 법 규제를 강제한 법 만능의 통치와 해외무역을 금지한 결과는 송나라에서 창조적으로 번영했던 경제활동의 위축이었다. 지금 정부는 규제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암덩어리’라는 인식하에 모든 역량을 모아 이를 혁파하겠다는 야무진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역대 정부도 대개 강한 의욕을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규제개혁위원회에서 규제문제를 끝장 토론해서 결판낸다고 하니 다시 기대해 볼만하다. 한양대 경제학부 석좌교수
  • ‘웨어러블’ 기원은 중국? 300년 전 ‘주판 반지’ 공개

    ‘웨어러블’ 기원은 중국? 300년 전 ‘주판 반지’ 공개

    올해 세계 IT 업계의 최고 화두는 단연 ‘웨어러블’(wearable·입는 컴퓨터)이다. 구글과 애플, 삼성과 LG등 세계 유수 업체들이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출시하거나 OS를 공개하는 등 시장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웨어러블’도 ‘중국이 기원’이라고 주장할 법한 재미있는 ‘기기’가 소개됐다. 최근 IT매체 기즈모도가 보도한 화제의 기기는 청나라 시기(1644-1911년)에 만들어진 초소형 주판 반지다. 약 300년 전 만들어진 이 주판 반지는 1.2cm 길이에 폭은 0.7cm에 불과하다. 단순히 모양만 주판 반지는 아니다. 실제로 주판알이 움직여 계산이 가능할 만큼 정교하게 제작돼 웨어러블의 시초라고 부를 법 하다. 중국문화망에 따르면 이 주판 반지는 약 3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과거 누구의 소유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중국문화망 측은 웹사이트에 “이 주판 반지는 너무 작아 핀같은 도구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면서 “청나라 시대 부유한 여성들이 자신의 머리핀을 이용해 이 주판 반지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세계 최초의 웨어러블?…청나라 시대 ‘주판 반지’

    세계 최초의 웨어러블?…청나라 시대 ‘주판 반지’

    올해 세계 IT 업계의 최고 화두는 단연 ‘웨어러블’(wearable·입는 컴퓨터)이다. 구글과 애플, 삼성과 LG등 세계 유수 업체들이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출시하거나 OS를 공개하는 등 시장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웨어러블’도 ‘중국이 기원’이라고 주장할 법한 재미있는 ‘기기’가 소개됐다. 최근 IT매체 기즈모도가 보도한 화제의 기기는 청나라 시기(1644-1911년)에 만들어진 초소형 주판 반지다. 약 300년 전 만들어진 이 주판 반지는 1.2cm 길이에 폭은 0.7cm에 불과하다. 단순히 모양만 주판 반지는 아니다. 실제로 주판알이 움직여 계산이 가능할 만큼 정교하게 제작돼 웨어러블의 시초라고 부를 법 하다. 중국문화망에 따르면 이 주판 반지는 약 3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과거 누구의 소유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중국문화망 측은 웹사이트에 “이 주판 반지는 너무 작아 핀같은 도구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면서 “청나라 시대 부유한 여성들이 자신의 머리핀을 이용해 이 주판 반지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씨줄날줄] 퍼스트 무버의 조건/문소영 논설위원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경제 발전의 핵심적 가치는 ‘캐치업(catch-up·선진국 따라잡기)’이었다. 1980년 때까지 주로 일본 따라잡기였다. 법률제정부터 기업의 조직과 철학, 인재양성까지 모두 베껴오다시피 했다. 이런 기업들을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발 빠른 추격자)’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기업이 삼성과 포스코였다. 패스트 팔로워는 세계적인 선두기업이 시장에 내놓은 상품 중에서 대박이 난 상품들을 모방해서 더 싼 가격으로 승부를 본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패스트 팔로워는 고부가가치를 낳는 창조적인 제품보다 원가절감 등을 통한 저가의 상품으로 시장을 넓히는 박리다매에 힘쓰게 된다. 기술개발비가 천문학적인 상품을 내놓는다고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것이 아니니, 따라잡기 전략은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등에 올라타기만 한다면 힘을 들이지 않고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박리다매 방식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절대적 가치는 이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개발시대의 각종 규제를 타파해 창조적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도 선도자였던 때가 있었다.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고, 청나라 것으로 알려진 적도 있지만 세종이 만든 측우기 역시 서양보다 200년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세계 최초를 만들어놓고 더 많이 활용되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몇 가지가 부족했다. 상상력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창조적인 학습능력도 없었다. 연암 박지원이 지적했듯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못했다. 외부문물을 수용하는 포용력과 감수성도 부족했다. 또 백면서생이 관료가 돼 지시하면 현장을 잘 아는 농부와 장인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따라야 했다. 최근 영상물심의위원회의 영화 포스터 심의가 논란이다. 외국 여자 배우의 가슴골이나 남녀의 키스 장면이 포함된 포스터들을 ‘유해성 있음’으로 판단한 탓에 영화사에서 수정작업을 한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도 아니고, TV 연예프로에 ‘하의상실’ 여배우들이 즐비한 나라에서 하품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가수가 된 싸이의 ‘라잇나우’가 한때 여성부로부터 청소년유해물로 지정됐던 것을 기억하라. 문화분야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인간의 정신과 감각을 억압하는 1970년대 구닥다리식 엄숙주의 규제에서 벗어나 표현의 자유를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낙찰예상가 400억원 호가…희귀 중국 그릇 홍콩서 경매

    낙찰예상가 400억원 호가…희귀 중국 그릇 홍콩서 경매

    우리 돈으로 4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명대 자기가 다음달 홍콩 경매에 출품되는 것으로 알려져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등 외신에 따르면 소더비 아시아가 오는 4월 8일 홍콩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경매에 중국 명나라 왕조(1368~1644) 시대에 만들어진 매우 희귀한 자기가 2억~3억홍콩달러(약 274억~412억원) 사이에 낙찰될 것이라고 밝혔다.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과 수탉의 모습이 그려져 이른바 ‘치킨 컵’으로 불리는 이 자기는 스위스의 한 개인수집가가 소유했던 것으로 원래 그는 지난 2000년에 팔려고 했었지만 올해로 아흔이 넘긴 나이에 경매에 내놨다고 소더비 측은 설명했다. 지름 8cm 정도 되는 이 자기는 중국 명나라 8대 황제인 성화제(1465-1487) 때 만들어진 것으로, 명대(1368-1644)와 청대(1644-1911)에 복원된 것으로 전해졌다. 니콜라스 차우 소더비 아시아 부회장은 “이 상징적인 ‘치킨 컵’의 경매를 맡게 돼 큰 영광”이라면서 “이 자기는 당시에도 보물로 여겨졌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출품되는 자기가 애초 낙찰가보다 높은 가격에 낙찰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10년 11월 영국 런던 경매에서는 청나라 건륭제 시대 분채도자기가 예상가격의 40배인 5160만파운드(895억원)로 중국 예술품 사상 최고 가격에 낙찰돼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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