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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엽기적인 그녀’ 오연서, 주원 첫 만남에 트림+구토 ‘엽기적 악연 시작’

    ‘엽기적인 그녀’ 오연서, 주원 첫 만남에 트림+구토 ‘엽기적 악연 시작’

    ‘엽기적인 그녀’ 주원과 오연서가 엽기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29일 첫 방송된 SBS 새 월화드라마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견우(주원 분)와 혜명공주(오연서 분)가 악연으로 첫 만남을 가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10년 전, 정기준(정웅인 분)은 “중전이 조정을 사사로이 어지럽힌다”며 모함을 해 한씨(이경화 분)를 폐비로 만들었다. 어린 혜명공주(오연서 분)는 모친의 폐위에 맨발로 달려나와 오열하며, 어미와 생 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폐비 한씨는 휘종(손창민 분)의 아들을 남겼다. 휘종은 이 아이를 원자(최로운 분)로 임명하고, 정기준에게 “향후 100년간 폐비의 일을 언급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정기준의 처족이자 그와 한 패인 박씨(윤세아 분)는 한씨가 폐위되자 새 중전에 추대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견우는 청나라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축하연 날 밤, 견우는 우연히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질 뻔한 혜명공주를 보고는 구해줬다. 하지만 혜명공주는 감사의 인사 대신 견우에게 트림을 하고 사라져 그를 황당케 했다. 혜명공주가 떨어트린 반지를 줍고 다시 길을 가던 견우는 거리에서 가마꾼들과 실갱이를 벌이는 혜명공주와 다시 마주쳤다. 견우는 또 한번 위험에 처한 혜명공주를 구해줬지만, 이번에도 혜명공주는 견우의 도포에 구토를 하며 실수를 했다. 이후 견우는 술에 취한 혜명공주를 여각에 데려다 줬지만, 혜명공주는 견우를 “변태색정광”이라고 오해하며 주먹을 날렸다. 견우는 혜명공주를 겁탈한 사람으로 몰려 옥사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굴욕까지 당했다. 한편 ‘엽기적인 그녀’는 명석한 두뇌와 따스한 가슴을 지닌 조선 최고의 매력남 견우와 엽기적이고도 발랄한 혜명공주의 요절복통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 사극. 매주 월,화요일 밤 10시 방송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해외에서 온 편지] 가슴은 한국, 시야는 세계로… 국제학교의 백년대계

    [해외에서 온 편지] 가슴은 한국, 시야는 세계로… 국제학교의 백년대계

    나는 14년차 교사로, ‘날국쌤’(날라리 국어쌤의 준말)으로 불린다. 열정적이고 뜬금없고 끊임없는 도전을 하는 내게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난 이 별명이 참 좋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한 열정이 일상 속에서 무뎌져갈 때 나를 채찍질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2015년 날국쌤의 열정은 중국의 선양이란 낯선 곳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선양한국국제학교는 2006년 개교해 유치원생부터, 초·중·고등학생까지 200여명의 한국 학생을 교육하는 기관이다. 교육부에서 파견된 교사와 교직원 60여명이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한다. 한국의 교육과정에 따라 한국 아이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처음 선양에 왔을 때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한국 학교의 위상과 역할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지식 전달의 장이며 사회화 기능을 담당하는 곳, 이런 학교로서의 기능을 넘어 그 이상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 학생들을 만나보니 내가 사는 중국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올바른 기준을 갖추고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양은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 중심 지역이다. 우리나라 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선양한국국제학교에서 나의 첫 내디딤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로 시작됐다. 2014년부터 선양한국국제학교는 매년 전교생이 한 주간 주제 학습 기행을 계획해 고구려 유적지, 하얼빈 역, 뤼순 감옥, 대성학교, 윤동주 생가, 단둥 철교 등 우리 역사의 ‘희로애락’이 깃든 장소를 다니며 우리의 뿌리를 찾고 있다. 부모님을 따라 어쩔 수 없이 타지에서 생활해야 하는 한국인이지만, 이런 뿌리 찾기를 통해 학생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낀다. 또 TV에서만 보던 곳을 직접 방문했다는 데 대한 뿌듯함, 그리고 그런 자랑스러움을 적극적으로 말하게 된다.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게 ‘가정법’이라 한다. 학교에서는 “옛날에는 이곳이 고구려 땅이었는데 만약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더라면…” 식으로 억지로 정체성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이지만 미래형이다. 역사를 통해 앞으로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게 바로 역사 교육이다. 역사와 국어 수업을 접목하면서 대구에서 몇 년 동안 추진했던 ‘진로 탐색을 위한 책 쓰기’ 프로젝트를 선양에 있는 학생들과 함께 했다. 학생들이 직접 주제를 잡고 책을 쓰는 프로젝트 수업이다. 이를 통해 2015·2016년 2년 연속 외국의 한국 학교에서 유일하게 교육부 주관 ‘학생 저자 책 축제’에 책을 출품할 기회를 얻게 됐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아이들이 꿈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학생은 책을 만들면서 작가로서의 꿈을, 어떤 학생은 모델로서의 꿈을 찾았다. 프로젝트 수업 하나로 올 9월에는 학생들을 데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 여정을 따라 여행을 할 계획이다. 박지원이 청나라의 발전한 모습을 보고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조선의 현재를 느끼며 발전한 조선을 꿈꾸었듯, 세간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모아 허생전, 호질 등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듯, 우리 또한 압록강을 건너 단둥에서 시작된 중국에서의 첫 발걸음을 하려 한다. 단순히 과거에 얽매여 그곳을 한번 밟아본다는 의미가 아닌 수백 년 전 박지원이 그랬듯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사소한 것에 깃든 의미를 파악하고 토론하며 글로벌 인재로서 활동할 우리 학생들을 기대해본다.
  • ‘엽기녀’ 주원♥오연서, 구토 1초 전..엽기적인 행각 ‘누가?’

    ‘엽기녀’ 주원♥오연서, 구토 1초 전..엽기적인 행각 ‘누가?’

    SBS 새 월화드라마 ‘엽기적인 그녀’(극본 윤효제/연출 오진석/제작 래몽래인,화이브라더스,신씨네)가 두 사람의 아주 특별한 순간을 공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는 ‘엽기적인 그녀’ 첫 회 방송의 일부로서 구토 1초 전인 혜명공주(오연서 분)와 그런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의 견우(주원 분)가 대비되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황. 두 사람을 포함해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지고 있다. 무엇보다 극 중 월담과 만취를 일삼는 혜명공주가 무슨 연유로 청나라 유학생 견우에게 이 같은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고 있는지, 과연 두 사람은 이후 어떤 관계로 얽히게 될지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특히 이는 원작에서도 화제가 됐던 익숙한 장면으로 사극 속에서 친숙하면서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유쾌함과 공감을 안겼던 대표적인 장면이었기에 이번엔 드라마에 녹아들어 어떤 모습으로 탄생하게 될지 관심이 쏠린다. 또한 이를 계기로 견우와 그녀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 서로 티격태격 다투며 특별한 케미를 쌓아갈 예정으로 첫 방송에 대한 기대감을 배가시킨다. 첫 방송을 일주일 앞둔 ‘엽기적인 그녀’는 명석한 두뇌와 따뜻함을 가진 조선 최고의 매력남 견우와 엽기적이면서 발랄한 그녀, 혜명공주의 알콩달콩 사랑을 다룬 로맨스 사극 드라마. 묵직한 궁중의 암투를 배경으로 조선시대 두 청춘남녀의 매력적인 연애 스토리가 유쾌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전개된다. 한편, 주원과 오연서의 심상치 않은 인연으로 방송을 더욱 기다려지게 만들고 있는 SBS 새 월화드라마 ‘엽기적인 그녀’는 오는 5월 29일(월) 밤 10시 ‘귓속말’ 후속으로 첫 방송된다. 100% 사전제작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륙사관, 반도사관

    [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륙사관, 반도사관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성재 이시영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라는 점이다. 백암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고, 석주 이상룡은 임시정부가 1925년 정치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 뒤 초대 총리인 국무령을 지냈고, 성재 이시영은 초대 법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이들에 단재 신채호를 더하면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역사학자’라는 점이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 등을 저술했고, 석주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의 국사 교재를 썼다. 성재 이시영은 중국학자 황염배(黃炎培?1878∼1965)가 ‘조선’(朝鮮)을 저술하면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이 연구한 자료로 한국을 비하하자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로 이를 논박했다. 황염배가 중국이 제2의 조선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조선’을 저술했지만 왜곡된 내용이 많자 역사서를 저술해 이를 반박한 것이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네 분의 독립운동가가 역사학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내면의 논리가 한국사에 대한 이해와 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감시만어’에는 무원 김교헌의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김교헌은 고종 때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박은식·이상룡·이시영·신채호·김교헌의 공통점이 또 있는데 모두 대륙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반도사관의 틀에 맞춰 한국사를 왜곡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일관되게 대륙사를 주창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고대사에 대해 저술했는데, 한결같이 현재의 한국 사학계 주류에서 잊혔거나 지워졌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들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고대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한국 고대사에 집착했던 것이 현재의 침략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한국 고대사는 곧 현대사이자 독립운동사”라는 확신 속에서 고대사를 연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중요 쟁점의 하나가 고대 한(漢)나라의 식민지라는 한사군의 위치였다. 조선총독부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철저한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이를 반박했다. 조선총독부는 ‘대동강 유역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조선반도사’)라고 주장했다. 즉 기자조선 자리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는 것인데, 아직도 한국 고대사학계 다수는 이 설을 추종한다. 반면 백암 박은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지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에서 “영평부(永平府)는 기자조선의 경계”라고 서술했다.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蘆龍)현 지역인 청나라 영평부가 기자조선 자리라는 것이다. 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역대 지리지를 참고해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영평부’ 조에서 “영평부 북쪽 40리에 조선성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라고 했다. 낙랑군 조선현이 영평부 경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1911년 백암 박은식이 “영평부는 기씨 조선의 경계”라고 말한 것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낙랑군 조선현은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에 있었다. 사실이 이런데도 아직도 반도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국 고대사학계 일부가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우기니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한 것이다. 낙랑군이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계속 쏟아지는 반면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이 대륙사관을 주창한 것은 중국 고대 사료에 대한 객관적 해석의 결과다. 중국은 국가 주석까지 나설 정도로 역사 강역 문제를 국시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가의 존속 문제로 확대될지 모른다. 역사를 빼앗긴 민족이 훗날 강토까지 빼앗긴 것은 역사에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다산이 그 ‘다산’이냐구요? 선조의 깊은 뜻만 있다면 명품!

    이 다산이 그 ‘다산’이냐구요? 선조의 깊은 뜻만 있다면 명품!

    이 다산이 그 ‘다산’(茶山)일까. 지난해 가을 무렵 한국고전번역원에 한지에 쓰인 짤막한 간찰(편지) 내용을 번역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초서(草書)로 쓰인 내용을 탈초(脫草·초서체를 정자체로 바꾸는 작업)했더니 비로소 해석이 가능해졌다. ‘너의 편지를 보고 또 네 스승의 글을 받아 보니/이 봄날에 모두 별고 없다는 것을 알겠다/기쁘고 위로하는 마음 헤아리기 어렵다/내 병은 늘 그렇다. 역시 갖추지 못한다’●‘다산’ 인장 편지엔 짧지만 짧지 않는 父情 담겨 병들어 타지에 있는 아비가 아들의 편지와 아들 스승이 쓴 글을 받아 본 모양이다. 편지 맨 끝의 ‘갖추지 못한다’는 조선 시대의 ‘이만 줄인다’는 표현이다. 편지 끝에는 ‘다산’(茶山)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하지만 이 편지의 주인공이 다산 정약용(1762~1836)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의뢰자가 소장 중인 간찰의 진품 여부는 판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성두(55) 한문고전 자문서비스 연구원은 “짧은 답장이라고 아버지의 사랑이 결코 짧지는 않을 것이고, 글자 한 자 한 자가 천근의 무게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한국고전번역연구원이 2008년부터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제공해 온 한문고전 해석 서비스가 10년을 맞았다. 지난 4월 말 현재까지 해석 의뢰 건수는 1만 3000건을 돌파했다. 의뢰작 대부분은 초서로 쓰여 그 뜻을 알기 어려운 족자와 병풍, 편액, 간찰, 각종 기문 내용 등이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보’나 중국인으로부터 선물받은 작품도 있고, 문중이나 박물관이 소장 중인 작품도 있다. 작품 중 판독 난도가 꽤 높은 경우에는 번역원에서 초서 해제를 조언하는 한학자 학산(學山) 노상복(82) 선생이 직접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의뢰작 1만여건… 퇴계 이황 친필 한시 발견도 지난 10년 동안 새로 발굴된 귀중한 사료도 적지 않다. 2011년에는 퇴계 이황(1501~1570)의 친필 한시 작품이 발견됐고, 지난해에는 고당 조만식(1883~1950) 선생이 당나라 왕유의 6언 연작시 ‘전원락’을 쓴 친필 글의 해석이 의뢰됐다. 2015년에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의뢰인이 요청한 작품은 조선 중기 영의정을 다섯 차례나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1547~1634)의 친필로 드러났다. 노 연구원은 ‘박씨부이유인행략’이라는 제목의 열 폭 병풍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함양의 박종수에게 시집간 이씨 부인의 일생을 남동생이 한자로 쓴 병풍인데, 그 내용 중 ‘지난 경인년에 큰 난리’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1950년 6·25전쟁을 가리킨 표현으로, 을축년(1985)에 쓴 글이었다. 노 연구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둔 시점까지도 한문으로 글을 짓고, 그 글씨로 병풍을 만드는 문화가 존재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 놀라웠다”고 말했다. 정확한 내막을 알기 어려운 유물도 있다. 한 사설 박물관이 다산 정약용이 쓰던 벼루라며 그 밑바닥에 쓰인 한시의 해석을 요청했다. 뜻을 풀고 보니 그 시는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 경술 10월 22일자 기사에 중국 건륭제가 내린 선물 목록과 함께 적힌 한시인 것으로 드러났다. 노 연구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시가 어떤 연유로 다산이 쓴 시로 둔갑한 것인지, 정말 다산이 소장한 벼루인지 아닌지 여전히 궁금하다”며 “진위를 가리지는 않지만 집이나 문중에 있는 옛 유묵과 그림, 간찰 등은 선조들이 쓴 의미를 알 때 비로소 감동을 느끼고 자신만의 명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런웨이 조선] 먹지 않고 피부에 양보한 천연 재료, 검은 머리·물광 피부… K뷰티 원조

    [런웨이 조선] 먹지 않고 피부에 양보한 천연 재료, 검은 머리·물광 피부… K뷰티 원조

    아름다움의 기준은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계층을 불문하고 맑고 깨끗한 피부를 선호하지 않았던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운 피부가 미의 기준이라는 전제 아래, 화장으로 어떤 점을 강조할 것인가는 다른 얘기이다.중국이나 일본은 색조 화장을 선호했다. 중국은 얼굴에서 화장으로 어디를 강조했느냐에 따라 시대를 구분할 정도다. 당나라 말기에는 짙은 눈썹에 이마 사이에는 화전을 그리고, 볼 양옆에 사홍(斜紅)과 보조개에 해당하는 면엽(面靨)을 그려 넣어 더욱 짙고 화려한 화장을 했다. 이후 송나라에서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며 이마, 콧등, 턱을 하얗게 칠하는 새로운 화장법이 등장했다. 일종의 하이라이트 효과로 얼굴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중국 여성의 얼굴을 작아 보이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을 방증한다.일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일본 여성은 얼굴의 이목구비를 드러내어 입체적으로 하기보다는 빨간색, 흰색, 검정색의 세 가지 색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 얼굴과 몸을 은폐하고자 했다. 얼굴과 목, 등까지는 백분으로 하얗게 덮어 가리고, 입술과 뺨, 손톱에는 빨간색을 칠해서 덮었다. 치아는 검정 칠을 해서 치흑(齒黑)을 만들고, 눈썹은 밀어 이마를 변형시켰다. 이는 일본 여성의 화장법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조선 여성은 어떻게 화장을 했을까. 조선 여성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색조는 약하게 하는 대신 피부 관리에 온 힘을 쏟았다.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은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길고 풍성한 머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검은 머리와 대조를 이루는 백옥 같은 피부로 머리 스타일과 조화롭게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백옥 같은 피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맑고 깨끗한 것은 물론 물광, 즉 윤기가 필수적이다. 조선 여성은 중국이나 일본 여성처럼 덧칠하는 화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피부 미용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정성을 쏟았다. 피부 관리는 당연히 깨끗한 세안에서 시작한다. 이때 사용된 것이 녹두와 팥 등을 갈아 만든 조두다. 조두는 곡식의 껍질을 벗긴 후 곱게 갈아 체에 쳐내 만든 가루비누다. 물로 얼굴을 적신 후 손바닥에 조두를 묻혀 문지르면 때가 빠지고 살결이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이 가루비누는 날비린내가 났다.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해 조선 여성은 향을 넣어 고급 향비누를 만들었다. 깨끗이 세안을 하고 난 다음, 액체 상태의 미안수를 바른다. 얼굴을 부드럽게 하는 동시에 화장이 잘 받게 하는 기초 케어다. 미안수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원료로 재료의 성질을 십분 활용하여 만들었다. 미안수를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박이다. 가을에 박을 거두고 난 다음 뿌리에서 가까운 쪽의 줄기를 잘라 병에 꽂아 놓는다. 미끈미끈한 즙이 나오는데 이것을 바르면 피부에 자연스런 윤기가 흐르며 보습 효과가 좋았다. 오이 역시 쉽게 구할 수 있는 원료다. 흔하다 보니 미안수를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게 개발했다. 오이 속을 삶아 씨를 걸러낸 후 그 즙을 사용하기도 하고, 삶을 때 발생하는 증기 자체를 미안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간단하게는 오이를 썬 다음 즙을 짜서 그대로 바르기도 했다. 또 유자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유자와 물, 술을 같은 양으로 넣고 푹 끓여 삼베로 걸러내면 겨울철에도 매끈한 피부로 관리할 수 있는 미안수를 만들 수 있으며, 유자를 껍질째 정종에 담가 1개월 정도 두면 고농축 ‘유자 로션’을 만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수박, 토마토, 당귀, 창포, 복숭아 잎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의 재료들이 미안수로 이용되었다. 조선 여성이야말로 ‘먹지 않고, 피부에 양보’하는 생활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미안수로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고 나면 다음에는 면지를 바른다. 면지는 얼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종의 세럼이나 영양크림에 해당한다. ‘규합총서’에는 계란을 술에 담가 밀봉하여 약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얼굴에 바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얼굴이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윤기가 나 마치 옥같이 되었다’는 조선판 사용 후기가 기록되어 있다. 실제 계란 노른자에 있는 레시틴 성분은 피부를 촉촉하게 가꾸어 줄 뿐 아니라 잔주름을 없애 주며, 흰자는 세정력이 있어 피지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다. ‘윤기’에 대한 조선 여인의 관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들깨, 살구씨, 목화씨, 쌀, 보리에서 추출한 기름도 사용하였다. 기름은 새살을 돋아나게 해 주근깨와 여드름 치료에 효과가 있거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여 촉촉한 피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모두 자연에서 얻은 순수한 화장품이다. 화려하고 진한 화장보다 피부 관리에 정성을 다했던 물광 피부의 원조, 조선의 여성들은 이미 천연 원료와 자연주의 콘셉트로 ‘K 뷰티’를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영웅 대신 역적으로… 조선의 치욕 짊어진 ‘용기 있는 文人’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영웅 대신 역적으로… 조선의 치욕 짊어진 ‘용기 있는 文人’

    ‘용담(龍潭)과 구담(龜潭) 사이에 너럭바위가 있고, 그 위에 큰 바위가 둘러 있다. 바위에는 놀러온 사람들이 새겨 놓은 이름이 매우 많다. 내가 농담 삼아 “다녀간 사람들이 다투어 이름을 파면 기암괴석이 종국에는 온전한 모습을 보전하지 못할 것 아닌가” 하니 스님들이 합장하며 “가르침을 들었으니 어찌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웃었다.’백헌 이경석(1595~1671)이 효종 2년(1651) 금강산을 여행하고 남긴 ‘풍악록’(楓嶽錄)의 한 대목이다.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쓴 바로 그 이경석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니 명승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제명(題名)을 주변에서 부추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자연의 조화를 훼손해서야 되겠느냐’는 말로 손사래를 친다. 굳이 자신을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 인생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8년 동안 볼모 노릇을 했던 효종은 즉위 원년(1650)부터 북벌(北伐)을 계획한다. 그런데 김자점 일당이 청나라에 밀고함에 따라 진상조사단이라 할 수 있는 사문사(査問使)가 왔다. 영의정 이경석은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의주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다. 이듬해 백헌은 ‘영원히 벼슬에 등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영불서용)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명나라 선박이 평안도 선천에 정박한 사실에 청나라에 알려진 인조 20년(1642)에도 그랬다. ‘청을 섬기는 척하면서 명과 내통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백헌은 극구 “명나라 잠상(潛商)이 몰래 정박한 것으로 조선 조정과는 무관하다”고 설득했다. 이경석은 결국 만주 봉황성에 구금됐고, 8개월이 지나서야 ‘벼슬 불가’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경석의 금강산 길은 일종의 위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토록 금강산을 꿈속에 그려보다 세속에서 헛되이 늙기만 했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돌에 새긴 글’로 훗날 잇달아 고초를 겪은 이경석이 금강산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않은 것은 잘한 일 같다. 삼전도비는 지금 서울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공원의 서쪽 호숫가에 자리잡고 있다. 잠실역사거리에서 가까우니 아는 사람은 찾아가기 편하다. 그런데 초행길에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면 골탕을 먹을 수도 있다. 비석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것은 2010년이다. 하지만 기자가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은 남쪽 석촌동 주택가의 옛 삼전도어린이공원으로 안내했다. 흔히 삼전도비라 부르지만 비석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고 새겨져 있다. 삼전도는 잠실의 나루터였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내려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의 의식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치욕스러운 역사의 흔적이지만 우리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우여곡절도 많았다. 조선은 고종 32년(1895) 삼전도비를 땅에 묻는다. 갑오개혁 이듬해로 청일전쟁의 와중이다.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본이 대한제국 병탄 이후 1913년 다시 땅 위에 꺼내 놓는다. 의도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을 1957년 당시 문교부가 주도해 땅에 묻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때 사적으로 지정했다. 이것을 1983년 옛 삼전도어린이공원으로 옮겼다. 2007년 붉은 페인트로 비석을 훼손한 사건으로 우리가 이 비석에 갖는 복잡한 심경의 일단이 드러났다. 병자호란과 삼전도비는 당연히 ‘조선왕조의 치욕’을 상징하지만, 당대부터 ‘이경석의 치욕’을 상징하는 양 이미지 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흥미롭다. 비변사는 당시 비문(碑文)을 지을 인물로 네 사람을 천거했는데, 인조의 간곡한 당부에 “글을 배운 것이 한스럽다”며 결단을 내린 것은 이경석이다. 그런 백헌은 두고두고 “오랑캐에 아부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산 자(者)”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경석에게 ‘비문의 저주’는 삼전도비에 그치지 않았다. 신도비 파문은 그 이상이었다. 백헌은 현종 12년(1761) 세상을 떠났지만, 서계 박세당이 신도비 비문을 쓴 것은 숙종 28년(1702)이다. 당대 명필인 이광사의 글씨로 비석이 세워진 것은 영조 30년(1754)이니 그 사이 우여곡절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이경석의 무덤은 삼전도비에서 20㎞ 남짓 떨어진 판교신도시 너머 청계산 자락에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넘어가는 옛길을 따라가다 보면 표지판이 나타난다. 들머리에는 두 기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왼쪽의 옛 비석에서는 글자를 찾을 수 없다. 300년이 가깝다고 하지만 비문이 조금도 남김없이 깎여 나갈 세월은 아니다. 현종실록에 실린 백헌의 졸기(卒記)는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래 관리에게 겸손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나랏일을 근심하고 공무를 받드는 마음이 늙도록 해이해지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 하찮게 평가되기도 하였다’고 했다. 사관(史官)의 평가 역시 후하다고 할 수는 없다.반면 박세당의 신도비 비문은 이경석의 넋을 위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서계는 이경석을 봉황과 군자에 비유한 반면, 삼전도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백헌을 비난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올빼미, 불선자(不善者)로 규정했다. 송시열의 문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이들은 서계가 지은 ‘사변록’을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흉서(凶書)로 규정했다. 다르지 않은 처지의 백헌 신도비 비문 역시 서계의 복권(復權)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경석 신도비는 건립 이후 오래지 않아 각자(刻字)가 갈려 나가고 땅에 묻힌 것 같다. 이후 오랫동안 우암을 추종하는 세력이 집권했으니 후손들도 손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검은 회색의 무자비(無字碑) 왼쪽에는 오늘날 두 기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게 된 내력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후손들이 1975년 새로운 몸돌(碑身·비신)에 비문을 새기고 흩어진 받침돌(臺石·대석)과 삿갓 모양 지붕돌(蓋石·개석)을 합쳐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1979년에는 땅에 묻혀 있던 몸돌을 파내 옛 신도비를 재건했고, 받침돌과 머릿돌도 다시 만들어 옛 신도비 오른쪽에 새로운 신도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항전의 현장인 남한산성과 치욕의 증거인 삼전도비, 삼전도비문에서 불행이 비롯된 이경석 신도비는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세 곳을 한데 묶으면 볼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훌륭한 역사기행 코스가 될 수 있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창궐’ 현빈, 출연 확정…‘공조’ 김성훈 감독 의기투합

    ‘창궐’ 현빈, 출연 확정…‘공조’ 김성훈 감독 의기투합

    액션 블록버스터 ‘창궐’이 배우 현빈을 주인공으로 확정, 올 하반기 촬영에 들어간다. 올 초, 신선한 설정과 캐릭터들의 유쾌한 재미로 780만 명을 동원한 ‘공조’ 김성훈 감독이 차기작 ‘창궐’로 돌아온다. 주인공 ‘이청’ 역에 현빈을 캐스팅하며 또 한 번의 흥행홈런을 예고하고 있다. 영화 ‘창궐’은 밤에만 활동하는 ‘야귀(夜鬼)’의 창궐을 막고, 조선을 구하기 위한 이청(현빈)의 사투를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소재를 바탕으로 역대급 스케일의 액션을 스크린에 펼쳐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빈이 맡은 ‘이청’은 왕 이조의 아들로 주색잡기에 능한 조선 최고 무공의 소유자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그는 왕위 계승을 앞둔 형, 세자 이영의 부름을 받아 십 수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밤에만 활동하는 정체불명의 ‘야귀(夜鬼)’가 창궐한 나라를 마주하게 된다. ‘공조’에서 타격감과 속도감 넘치는 일명 ‘휴지액션’과 카체이싱 등 고난이도의 액션을 선보이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현빈은 ‘창궐’을 통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강렬한 액션과 능글맞으면서도 매력적인 면모까지 다양하게 선보이며 관객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김성훈 감독은 “‘창궐’은 조선시대 궁궐을 배경으로 한 신개념 액션 블록버스터로, ‘야귀(夜鬼)’라는 크리처를 통해 독창적인 비주얼과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 오락 영화를 선보일 것”이라며 연출방향을 밝혔다. ‘창궐’은 김성훈 감독과 현빈의 의기투합은 물론 ‘부산행’‘판도라’에 이어 블록버스터 장르에서 매번 새로운 시도로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NEW의 만남으로 더욱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상업영화 최초 ‘좀비 소재’로 2016년 유일한 천만영화 기록을 세운 ‘부산행’, 국내최초 ‘원전 폭발’을 담아 460만 관객을 동원한 ‘판도라’로 재난 블록버스터의 흥행을 이끌어낸 NEW와 현빈 그리고 김성훈 감독이 펼쳐낼 시너지에 큰 관심이 모이고 있다. 신선한 소재로 역대급 스케일의 액션을 스크린에 담아낼 ‘창궐’은 주요 배역 캐스팅을 마무리하는 대로 올 하반기 크랭크인 예정이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과연 적절한 비유인가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과연 적절한 비유인가

    비유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을 말한다. 자신을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빗댐으로써 처지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유배인들 가운데도 그렇다. 숙종 때 제주 유배인 김춘택은 자신을 ‘지렁이’(?蚓)에 비유했다. 유배 생활이 길었던 김춘택은 땅속에 갇혀 세상에 고개를 내밀 수 없는 지렁이가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흙이 비옥해지려면 반드시 지렁이가 필요하다. 지렁이 덕분에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렁이가 귀여운 동물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이 없다면 아마도 세상은 황폐해졌을 것이다. 김춘택도 마찬가지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 활동으로 정적은 물론 자기네 세력으로부터도 외면을 받아 유배되기는 했지만 김춘택은 글씨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워낙 뛰어나 그 명성이 높았다. 제주에서도 많은 시와 ‘사미인곡’ 같은 작품을 남겼는데 만일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 유배문학은 결코 풍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해군, 인조, 효종에 이르는 동안 온갖 역적질을 마다하지 않았고 끝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했다가 광양에 유배된 김자점을 사람들은 사갈(蛇蝎)에 비유했다. 알다시피 사갈이란 뱀과 전갈을 함께 이르는 말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비유한다. 오죽했으면 김자점을 두고 그랬겠는가. 그는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해 효종과 정적들을 제거하고 다른 왕족을 내세워 권력을 잡고자 했지만 결국은 반역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따르면 본보기로 김자점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서 항아리에 나눠 담아 조선 팔도에 하나씩 보냈다고 한다. 왜 사갈이라고 비유했는지 알 만도 하다. 사람의 처지를 동물에만 비유한 것은 아니었다. 제주 유배인 추사 김정희는 자신을 빈화(?花)에 비유했다. 빈화란 ‘부평초’라고 물 위에 떠 있는 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뜻한다. 추사는 길고 긴 제주도 유배가 끝나자마자 함경도 북청에서 또 유배 생활을 했으니 자신을 그렇게 비유할 만도 했다. 우리 근대사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돌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즐겨 불렀던 유행가 중에는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이라는 고복수의 ‘타향살이’처럼 부평초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들이야말로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흑산도 하늘길’에서 흑산도 유배인 정약전을 승률조개에 비유했다. 정약전은 그가 집필한 ‘현산어보’에서 파랑새가 그 승률조개 안에서 살고 있었고 어느 날 보니 그 파랑새가 날아가 버렸다는 신비스런 이야기를 했다. 한승원 선생은 그 조개껍데기에 갇힌 파랑새가 다름 아닌 흑산도에 갇힌 정약전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비유의 목적은 우리에게 현상과 사물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열어 준다. 적절하거나 그렇지 못한 비유에 대해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상과 사물을 되돌아보게 한다. 최근 선거 정국에서 ‘향단이’와 ‘방자’에 대한 비유로 서로를 인신공격하고 있다. 과연 이 비유가 적절한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 [서울광장] 사드 보복 한·중 망각과 착각/김성곤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사드 보복 한·중 망각과 착각/김성곤 편집국 부국장

    과거 중국은 통치와 외교 영역을 셋으로 나눴다. 본토와 몽골, 서장 등 직할지, 조선, 베트남, 버마, 태국, 라오스, 류구, 필리핀 등 조공국이 그것이었다. 이런 조공 체제는 수·당 시대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해 명·청 시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조공은 조공국이 가져간 물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오는 흑자 교역이었다. 실제로 명나라 시대에는 이런 흑자가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명나라가 조선에 3년에 한 번 조공을 하는 ‘3년일공’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핑계를 대며 1년에 3~4회나 조공을 하고 답례품을 받아 오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청나라 때에는 흑자가 아니라 적자가 많았다.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이 많아 가져간 것 대비 받아 온 ‘회사’가 10분의1에도 미치지 못해 교역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났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로 인해 나라 재정에 구김이 갈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런 조공제도는 18세기 들어 서구 열강이 아시아로 몰려오면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청나라는 이들에게 조공 관계를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세 차례의 전쟁을 통해 난징조약(1842년), 톈진조약(1858년), 베이징조약(1860년) 등을 통해 거꾸로 서구 열강의 ‘조약 시스템’에 편입하고 만다. 북핵에 대비한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중국의 전방위 보복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이런 중국을 두고 ‘조공 국가 접근법’을 채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드 문제를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과거 조공 국가 시스템으로 비판적 접근을 한 그의 분석법이 놀랍기도 하고, 새삼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국은 지금도 원조와 교역을 주변국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활용하곤 한다. 사드 문제 이전에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로 일본을, 최근엔 티베트 달라이 라마 문제로 몽골을 압박했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국내 산업계 전반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이 절반 수준으로 줄고, 4만 안팎의 중국 진출 기업들도 빈사 상태다. IBK경제연구소는 중국의 경제 보복이 본격화되면 우리 경제의 손실 규모가 150억 달러(약 17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중국 의존도가 심해진 결과다. 2004년 현대경제연구원은 1980년 한·중 간 교역 규모가 4000만 달러로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1%였으나, 2003년에는 579억 달러로 15.5%로 늘어나고, 우리나라의 해외 투자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7%로 증가했다며 중국에 대한 과도한 집중을 경계했다. 정부도 이를 완화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했지만, 중국으로부터 발생하는 무역 흑자 등에 도취(?)돼 중장기 대책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우려되는 것은 이런 시련을 겪고도 한·중 관계가 호전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과거로 돌아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대중 특수에 젖어 과거를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국인들은 다시 명동과 제주도 등 한국을 찾을 것이다. 한·중 관계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냉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17조원은 아니지만, 수조원의 수업료를 내고, 얻은 교훈이 사장될까 두렵다. 재삼 이번 사드 보복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국가로 성장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역사에 비추어 봤을 때 중국은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국제적인 관례 등은 무시하고 언제든 표변할 수 있는 나라다. 안타깝지만, G2로 성장한 중국이 한국 등 주변국을 과거 조공 시스템으로 묶어 둘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도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다. sunggone@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긴장 속 요충지’ 임진강이 들려주는 남북 연결史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긴장 속 요충지’ 임진강이 들려주는 남북 연결史

    경기 북동부의 연천은 오늘날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한적한 농촌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개경이 멀지 않은 수도권이었다. 서울에서 접근한다면 자유로나 통일로에서 37번 국도로 갈아타는 것이 빠르다. 문산에서 연천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두지교차로가 나오고, 최근 완공된 장남교로 임진강을 건너면 연천군 장남면이다.여기서 자동차로 5분 남짓 북쪽으로 달리면 자작리 삼거리가 나오는데, 밤색 문화재 안내판이 앞을 가로막는다. 왼쪽으로 가면 고구려 군사 요새인 호로고루와 일제강점기까지도 내륙의 항구로 기능한 고랑포,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무덤이 있다.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의 침투로도 멀지 않다. 오른쪽으로는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고구려의 당포성과 은대리성, 그리고 조선시대 유적인 숭의전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 안내판만으로도 연천이 구석기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임진강 중류에 해당하는 일대는 호로하(瓠蘆河)나 호로탄(瓠蘆灘), 혹은 표하(瓢河)로도 불렸다. 호로고루(古壘)는 호로하의 옛 성이라는 뜻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최하류다.오늘날 서울에서 개성이나 평양을 육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자유로일 것이다. 한강 북쪽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다 파주 통일전망대에서 다시 임진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유로는 임진각을 지나 통일대교에서 임진강을 건넌다. 통일대교는 1998년 개통됐다. 이전에는 통일로가 남북 교류의 간선도로였다. 좁고 구불구불했던 옛길을 정비하고 확장해 통일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1972년이다. 이제는 남북한을 잇는 통로라면 누구나 자유로나 통일로를 떠올린다. 그러나 임진각 주변 임진강 하류가 남북 교통로로 떠오른 것은 20세기 이후다. 1906년 용산에서 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놓이면서 임진강철교도 세워진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임진강철교는 1943년 경의선이 복선화되면서 하나가 더 건설됐다. 상류 쪽의 하행선 철교는 6·25전쟁 당시 폭파됐고, 남아 있는 철교는 상행선이었다.조선시대 한반도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는 임진나루길이었다. 서울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을 나서 홍제원, 구파발, 벽제관을 지나 혜음령을 넘고 분수원, 파주향교를 지나 임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임진나루는 임진강철교나 통일대교보다 상류이니 강폭도 그만큼 좁다. 임진나루는 화석정이 있는 율곡 이이의 고향 율곡리가 지척이다. 임진나루길은 청나라 수도 연경을 오가는 사행길로도 쓰였던 만큼 연행로라고도 불렸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경부고속도로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길이 남북 간선도로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인 듯하다. 짐작처럼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랜 중부지역의 남북 통로는 호로하 일대였다. 장남교 남쪽은 지금 파주시 적성면이다. 장남에 호로고루가 있다면 적성에는 신라 칠중성이 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적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와 남북으로 대치하던 전략적 요충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당나라 유인궤가 병사를 이끌고 호로하를 끊은 뒤 신라 칠중성을 공격했다는 기록도 전한다.그런 만큼 한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옛길 여행은 호로고루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호로고루는 서쪽으로 흘러 나가는 임진강의 북동쪽에서 소하천이 흘러들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삼각형 대지를 최대한 활용해 지었다. 세 면 가운데 두 면이 하천인 만큼 동북쪽 한면에만 성을 쌓았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호로고루에 올라 임진강을 내려다보면 일대의 군사적 가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임진강은 호로고루 앞에서 급격하게 수심이 얕아진다. 갈수기에는 군데군데 모래벌판이 드러난 물줄기 사이로 얼마든지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신라의 칠중성은 호로고루에서 동남쪽 강 너머로 바라보인다. 오늘날의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삼국시대 양안에 주둔한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긴장은 엄청났을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은 호로고루에서 북쪽으로 1㎞ 남짓 떨어져 있다. 경순왕은 고려의 세력이 커지자 왕건에게 투항해 수도 송악에 머물며 경주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경순왕이 경종 3년(978) 세상을 떠난 뒤 신라계 주민들은 당연히 경주에 장사 지낼 것을 원했지만, 고려왕조는 사회불안 요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송악을 떠난 장례 행렬은 임진강을 건너지 못했다. 역사가 돌고 돈다는 것은 경순왕릉에서 임진강 상류로 15㎞쯤 떨어진 숭의전에서 실감할 수 있다. 숭의전은 조선왕조가 고려의 태조·현종·문종·원종과 복지겸·신숭겸·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정몽주 등 16공신을 제사 지내고자 지은 사당이다. 임진강이 발아래 펼쳐진 숭의전의 입지는 절묘하다. 송악의 동쪽으로 고려의 수도권인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존재가 제대로 부각되기는 쉽지 않은 오지다. 다시 하류로 내려온다. 호로하는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소련제 T34 탱크를 몰고 임진강을 건넌 곳이기도 하다. 북한군의 주력 탱크부대는 도하한 뒤 적성을 거쳐 감악산을 넘었다. 이어 오늘날의 의정부를 지나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에 입성했다. 이 루트는 과거 임진나루길이 개척된 이후에도 여전히 남북 통로로 기능했다. 배를 타야 하는 임진나루길이 사람의 통행로였다면, 말이나 수레는 호로하를 건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선시대에도 적성현의 중심은 칠중성 일대였다. 칠중성 아래에는 지금도 적성향교가 남아 있다. 이 일대는 땅 이름부터 구읍리(舊邑里)다. 예전에는 이곳이 읍치(邑治)였다는 뜻이다. 현재의 적성 시가지는 2~3㎞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감악산 넘어 조선시대 양주 관아(官衙)의 위치 또한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조금 생뚱맞다. 새로운 양주시청은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 평화로 옆에 세워졌지만, 국도에서 벗어난 조선시대 옛 관아지 주변은 한적하기만 하다. 지금 옛 관아지는 복원에 앞서 발굴조사가 한창 이뤄지고 있다. 그럴수록 양주 관아지와 양주향교 사이 별산대놀이마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주에는 별산대놀이와 소놀이굿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양주농악과 상여와 회다지소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적지 않은 연희자와 많은 관객이 필요한 놀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활발하게 물산이 오가는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북쪽에서 임진강을 건너 내려온 물산은 양주에서 다시 지금의 의정부를 거친 뒤 중랑천을 따라 남하해 서울 광나루(廣津·광진)에서 한강을 건넜다. 임진나루길은 최근 고양시와 파주시가 힘을 합쳐 의주대로라는 이름으로 탐방로를 조성했다. 호로하길도 같은 노력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의정부시, 양주시, 파주시, 연천군이 힘을 합치면 된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기고] 노기 마레스케와 안중근/서상문 고려대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기고] 노기 마레스케와 안중근/서상문 고려대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노기 마레스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쟁 영웅. 러일전쟁에서 육군 중위인 두 아들을 잃고도 비통함을 내색하지 않은 외강내강형. 국가 중대사에는 늘 “노기 장군을 부르라”고 한 명치 일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백작. 일왕 출상 직후 10년 연하 아내와의 동반 할복으로 63세의 생을 마감한, 일본인들에게 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하지만 노기는 전근대형 군인의 한계를 넘지 못한 고루한 황국주의자의 표상일 뿐이다. 그가 강조한 인간의 도는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편협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 왕족 자제들에게 “인간이 도에 벗어난 짓을 하고도 수치를 모르는 자는 금수만도 못하다”고 가르쳤지만, 그가 말한 ‘도’란 일본인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승전의 대가와 군의 사기진작을 명분으로 전쟁범죄도 당연히 여겼다. 자의적으로 날조한 ‘구미위협론’과 국수주의를 넘지 못한 근대형 군인의 한계였다. 세기 전 전쟁에서는 전쟁범죄가 횡행했다. 1860년 청나라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자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3일간 무제한 약탈, 강간, 방화 등 온갖 범죄를 자행하도록 허용한 영불연합군이 비근한 예다. 청일전쟁 시 일본군도 뤼순 점령 후 4일간에 걸쳐 최소 2만여명을 학살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당시 한 일본군 병사가 가족에게 “적지에서의 노획은 이긴 자의 자유”라고 써 보낸 편지는 이를 방증한다. 일본군 병사들의 노략질에 중국이 항의하자 노기는 “그대들은 자신의 영토도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막대한 경비를 들이고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그대들의 국토를 대신 수복시켰다. 저 하찮은 여성과 재물을 우리 군대에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야만성을 감추지 않았다. 전쟁범죄가 공공연한 시대였다고 하지만 지휘관이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 인륜, 도덕과 군인으로서의 품위, 명예와 군기를 생명처럼 중요시한 군인도 많았다. 같은 시기 우리에겐 안중근이 있었다. 그는 근대형 군인의 한계를 넘어선 시공 초월적 군인상의 남상(濫觴)이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 주기도 했고, 동양 평화를 파괴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시에도 이토만 가슴과 복부에 정확하게 3발을 조준 사격했을 뿐 수행비서 3명에게는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오른팔과 오른발만 맞히었다. 하얼빈역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은 일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지향한 것이다. 노기와 달리 안중근이 한국인과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들로부터도 숭고한 사상가와 의사로 숭앙받는 이유다. 일본인들 중엔 안중근을 신으로 모시는 이들도 있다. 그의 웅혼한 사상과 순결한 영혼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런 안중근에게 일본 극우파는 ‘테러리스트’로 ‘역사 테러’를 가해 왔다.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 개정에 필요한 맹목적 애국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황국주의자 노기를 군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안중근 순국일(3월 26일)을 앞두고 일본은 당장 정치적 오브제로 악용하는 협량함에서 벗어나 노기를 군신 자리에서 내려놓고 세계주의와 인류보편사상을 실천한 안 의사를 평화 사상가로 받들어야 할 것이다.
  • 경복궁 별빛야행, 7일부터 예매…임금 저녁 수라 먹고, 경회루서 야경

    경복궁 별빛야행, 7일부터 예매…임금 저녁 수라 먹고, 경회루서 야경

    오는 20일부터 경복궁에서 일반 시민들이 조선 임금이 즐기던 저녁 수라를 먹고, 경회루에서 인왕산 야경을 즐길 수 있다. 문화재청은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지난해 9월 시범사업으로 첫선을 보인 궁궐 활용 프로그램 ‘경복궁 별빛야행’을 20일부터 4월 14일까지 운영한다고 2일 밝혔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궁궐 부엌인 소주방에서 국악을 들으며 임금 수라를 먹는 저녁식사로 코스가 시작된다. 메뉴는 왕과 왕비의 일상식인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4단 유기그릇에 담아낸 ‘도슭수라상’이다. ‘도슭’은 도시락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다. 후궁과 궁녀가 거처했다는 집경당과 함화당, 연못 위에 떠 있는 육각형 정자인 향원정, 청나라풍으로 지어진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를 둘러본다. 이들 전각은 원래 밤에는 공개되지 않지만, 경복궁 별빛야행 기간에만 특별 개방된다. 경복궁 별빛야행의 백미는 고요한 경회루 2층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꼽힌다. 밤하늘 아래 펼쳐진 인왕산과 연못을 볼 수 있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1일 2회(오후 6시 30분, 오후 7시 40분 각각 시작) 진행되며, 회당 정원은 60명이다. 참가비는 5만원이다. 예매는 7일 오후 2시부터 옥션(http://ticket.acution.co.kr)에서 1인당 최대 4매까지 할 수 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바티칸과 수교를 원하는 중국의 노림수는?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바티칸과 수교를 원하는 중국의 노림수는?

     중국과 바티칸간 관계정상화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중국과 바티간이 중국내 주교 임명문제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데다 중국 고위 당국자가 바티칸에서 열린 장기매매 반대를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등 중국과 바티간 수교의 최종 서명이 임박한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천주교 홍콩교구장인 요한 통혼(湯漢) 추기경은 가톨릭 매체 선데이이그재미너에 게재된 기고문을 통해 중국 정부가 교황의 거부권과 교황이 중국내 주교 후보를 결정하는데 최고, 최종의 권위를 가진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지난 10일 보도했다. 통 추기경은 최종 합의가 이뤄지면 공산당 통제 아래 주교 서품을 단행해 온 중국 천주교애국회(天主敎愛國會)가 자체적으로 주교 지명과 서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과 바티칸이 중국 내 주교 임명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합의점에 도달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이에 앞서 7~8일 황제푸(黃潔夫) 중국장기기증이식위원회 주석은 바티칸에서 열린 ‘반(反) 장기매매 글로벌 서밋’에 참석했다. 의사 출신의 황 주석은 중국 위생부 부부장(차관급)을 역임한 뒤 현재 중국 최고의 정책자문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을 맡고 있다. 황 주석은 유엔과 유럽연합(EU), 세계보건기구(WHO), 각 종교계 대표, 각국 장기이식협회 회장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중국의 장기기증 및 이식관리 체계를 소개했다.  바티칸이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 나서는 것은 무엇보다 교세 확장과 관련이 있다. 바티칸은 전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더욱 폭넓게 포교 기회를 얻는 덕분이다. 아시아 지역은 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지만 가톨릭 신자는 12%에 불과한 만큼 유럽과 미국에서 감소하는 신자 수를 메울 수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바티칸은 교세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13억 인구의 ‘거대 시장’ 중국에서 포교한다면 교세 확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바티칸은 전 홍콩 교구장인 요셉 젠 추기경 등 일부 추기경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과 단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 입장으로서는 바티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노림수’가 있다. 일각에서는 종교 자유가 확대될 경우 자칫하면 체제에 위협이 된다며 바티칸과의 관계개선에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바티칸과의 관계개선이 종교 자유와 인권 탄압 등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잠재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밀어붙이고 있다. 나아가 바티칸과의 수교는 대만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물론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의 독립노선에도 제동을 걸 수 있다. 여기에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만 카드’를 사용하는 것을 차단하는 수단도 될 수 있는 등 부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바티칸은 그동안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가톨릭은 1840년 아편전쟁의 발발로 시작된 서양 열강의 침략과 함께 중국 대륙에 사실상 첫발을 들여놨다. 바티칸은 1911년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辛亥)혁명 이후 1942년 중화민국(대만)과 수교했다. 하지만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건국되면서 바티칸은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됐다. 바티칸이 1951년 대만 정부를 인정하면서 타이베이로 건너가 대사관을 설치하자, 중국 정부는 곧바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워 바티칸과 단교를 선언한 것이다.  중국에서 가톨릭이 불법화되면서 중국내 가톨릭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1957년 ‘천주교애국회’라는 관제(官製)단체를 조직했다. 이에 따라 중국 가톨릭 신자는 공식적으로 천주교애국회 성당에서만 미사를 볼 수 있다. 지난해말 열린 중국천주교 9차 전국대표대회 보고에 따르면 천주교 애국회 주석 팡싱야요(房興耀) 주교를 비롯해 주교는 65명, 신부는 3100명, 수녀는 5800명, 성당은 6000여 곳에 이른다. 공식 등록된 신자는 600만명을 넘었으며, 지하교회 신자를 포함하면 1000만 명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가운데 2013년 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이자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면서 중국과 바티칸관계에 청신호가 켜졌다. 교황은 취임하자마자 중국 전문가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을 바티칸 외교수장인 국무원장으로 임명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의지를 강력히 표명한 것이다. 이후 2014년 1월 로마에서 양측이 첫 회동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2015년 10월, 2016년 1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관계개선 문제를 논의했다. 특히 지난해에만 네차례의 접촉을 통해 ‘사제서품권’을 집중 조율해왔다. 그 결과 양측은 천주교애국회와 지하교회가 모두 참여하는 ‘중국 주교단’이 추천권을 행사하고, 교황이 최종 임명권을 갖도록 하는 방안으로 의견을 모았다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교황은 중국 주교단이 추천한 후보들 가운데 주교를 선택해 서품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중국 주교단이 추천권만 갖고, 교황이 최종 임명권을 갖는 이 방식은 ‘베트남 모델’을 본뜬 것이다. 이 모델은 베트남 정부가 바티칸에 제출하는 주교 후보자 명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고 바티칸 결정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방식이다. 최종적으로는 교황이 주교를 임명한다. 바티칸이 베트남과 아직 수교하지 않았지만 2011년 레오폴도 지렐리 대주교를 베트남 주재 비상주 대표로 임명하는 등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지렐리 대주교는 1975년 베트남이 공산 통일된 뒤 처음으로 임명된 교황의 외교사절이다. 왕이웨이 (王義?) 중국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중국과 바티칸이 최대 걸림돌인 주교 임명과 관련해 베트남 방식을 채용하기로 합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바티칸이 인정한 주교가 사상 처음으로 중국 천주교 교단의 지도부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27~29일 베이징에서 열린 천주교 9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선빈(沈斌) 주교 등 주교 17명이 천주교애국회와 천주교 주교단 부주석으로 선임됐다. 제1부주석으로 선임된 선 주교 등 3명은 바티칸과 중국 정부가 공동으로 추인한 주교이다. 장쑤(江蘇)성 하이먼(海門) 교구를 맡고 있는 선 주교는 2010년 주교 서품 당시 교황의 임명에 이어 중국 정부의 승인도 받았다. 선 주교는 바티칸과 중국과의 수교 협상에서 메신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선 주교의 부주석단 편입은 수교 협상을 벌이는 중국과 바티칸이 주교 서품 방식에 이어 교단 지도부 구성을 놓고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년과는 달리 중국 주교들에 대해 전국대회 불참을 요구하지 않는 등 화답했다.  중국 천주교 교단의 총회라고 할 수 있는 전국대표회의는 5년마다 열도록 돼 있지만, 9차 대회는 중국과 바티칸의 협상 진척 상황을 감안해 1년 늦췄다. 왕줘안(王作安) 중국 국가종교사무국장은 “중국은 바티칸과 관련 원칙에 근거해 건설적 대화를 할 용의가 있으며, 차이점을 없애고 공통인식을 확대하며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종교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왕 국장이 관련 원칙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요구 사항은 바티칸이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라는 것으로 관측된다. 바티칸이 대만과 외교 관계를 끊을 경우 대만의 수교국 수는 20개국으로 쪼그라든다. 특히 파라과이와 도미니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이 바티칸의 결정에 영향을 받아 대만과 단교할 가능성도 높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게이 힐, 후커 힐, 이슬람 언덕을 아시나요?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게이 힐, 후커 힐, 이슬람 언덕을 아시나요?

    “그런데 이태원이라니 . 그녀가 그 짓밟히고 썩은 거리에서 바다 건너 먼 아메리카를 그리워하고 있는게 나 때문이라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에 나오는 이태원은 짓밟히고 썩은 거리로 묘사된다. 여자 주인공인 ‘윤주’가 마지막으로 흘러들어가 전전하던 1970년대의 이태원 거리는 남자 주인공 ‘형빈’에게 지독히도 불쾌하고 지저분한 거리로 각인된 곳이었다. 당시 용산과 이태원을 둘러싸고 있던 미군 철조망 건너편 도로는 뉴욕의 할렘보다 더 어두운 곳이었다. 새벽마다, 밤마다 미군 헌병들이 권총차고 몰려다니던 치외법권 지역과도 같은 곳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러나 이태원 거리가 변하였다. 변해도 너무 변해서 예전 불쾌한 거리의 기억은 이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너머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단연코 지금의 이태원은 서울 최고의 핫 플레이스이자 젊은 청춘들의 멋진 데이트 장소로 탈바꿈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태원의 이미지는 아마도 세대마다 다를 성 싶다. 1970년대에 젊음을 누렸던 지금의 6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이태원은 여전히 생소한 락음악에 미군들 들썩이던, 기지촌 담벼락 어두운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1980, 90년대 젊은 한 시절을 보낸 40대 이상에게는 이 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태원은 쇼핑, 큰옷, 큰 가방, 짝퉁, 이민 준비와 유학원, 외국인 전용 클럽에 드나드는 이방인들의 세계였다. 그러다 2000년도를 지난 지금의 청춘에게 이태원은 또다른 모습이다. 아프리카부터 유럽과 그리스를 돌아 미국, 중남미 음식과 음악까지 한 곳에 어우러지는 거대한 세계촌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렇듯 이 거리는 우사단길로, 경리단길을 지나면서 꼼데가르송 거리까지 무한 확장 중이다. 이태원은 이제 '거리가 아닌 문화'가 되고 있다. 우선 이태원 명칭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이름 역시 예사롭지 않다. 사실 어느 것이 정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다들 나름의 설득력은 있다. 우선 이 지역이 배나무(梨·이)가 많은 곳이었고, 조선의 여행객을 위한 숙소인 역원(驛院)이 있는 곳이어서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리었다는 말이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원치 않게 왜인(倭人)의 씨앗을 받게 된 조선의 여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 뜻으로 다를 이(異), 태반 태(胎)를 조합하여 이태원(異胎圓)이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던 간에 이태원이라는 땅은 한강 다리 건너기 전의 요충지이자, 사통팔달 물산(物産)과 사람이 모여 들던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부대의 주둔지가 이 곳에 만들어지고 난 후, 온갖 외세들은 이태원에 자신들의 터를 박아두기에 여념이 없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만들어졌으며, 1950년대에는 미군기지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외국공관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부평에 있던 미 121 후송병원이 옮겨오면서 지금의 이태원 거리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거쳐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그때부터 이태원은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대표적인 외국 문화가 깃드는 곳으로 인식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태원 지역 관광은 크게 해밀튼 호텔을 중심으로 총 4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우선 해밀튼 호텔 뒤편 이태원로 27가길 주변에는 세계의 다양한 맛을 체험할 수 있는 맛집과 클럽, 바(Bar)들이 많다. ‘고블앤고’, ‘마이타이차이나’, ‘레뒤플라’, ‘마이첼시’, ‘모글’, ‘코파카바나’, ‘샘 롸이언’ 등 유명한 가게들이 많아서 젊은 데이트 족들이 항상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태원 역에서 한강진 역까지 이르는 이태원로 대로변에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이 거리에는 다양한 맛집도 많지만 패션,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많아 최근에 각광을 받는 거리다. 이 곳에는 ‘리움미술관’, ‘현대카드 스토리지’, ‘꼼데가르송’, ‘제일기획’ 건물이 눈에 띈다. 또 다른 이태원 지역으로는 해밀튼 호텔 길건너 맞은 편 쇼핑 지역이다. 흔히 이태원 쇼핑 지역으로 불리는 곳으로 이 곳에 이태원 시장이 있다. 큰 옷, 큰 가방부터 시작해서 이태원퀴논길에는 다양한 편집숍들이 즐비하여 패셔니스타들에게는 필수 방문 코스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태원의 가장 후미진 곳이자, 가장 이태원다운(?) 거리가 있다. 흔히 이태원 소방서길이라고 불리는 우사단로다. 지금은 이태원의 윗동네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이슬람거리로 올라가기 전에 왼편에 두 개의 골목길이 있는 데, 이 곳이 ‘진짜’ 이태원의 역사를 안고 있는 길이다. 첫 번째 골목이 ‘후커 힐’이라고 불리는 우사단로 14길, 바로 언덕길이다. 도로바닥에 진입금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진 곳으로 ‘클럽 지온’을 끼고 돌면 양편 거리에 ‘치어스’, ‘알마즈’ 등의 간판을 내건 작은 술집들이 많다. 바로 이 거리가 그 옛날 미군을 대상으로 특수한(?) 영업을 하던 ‘청소년 통행 금지구역’ 이다. 이런 술집들도 이태원의 명맥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드문드문 그때의 기지촌 내음 물씬하게 네온싸인 간판 밝히며 배경으로 남아 있다. 두번째 골목은 지금도 ‘이반 언덕’, ‘게이 힐’이라고 부르는 우사단로 12길이다. 1995년에 이태원 지역에 ‘터널’이라는 게이바가 생긴 이래, ‘파슈’, ‘트랜스’, ‘지니’, ‘와이낫’ 등의 성소수자들의 위한 장소가 꾸준히 만들어졌고, 지금도 주말 저녁에 20, 30대의 성소수자들의 유흥 공간으로 늘상 북적이는 곳이다. 그 다음 골목이 바로 이슬람 언덕이라고 불리는 우사단로 10길이다. 이 길에는 이슬람사원을 비롯하여 케밥, 이슬람 서적 및 의류, 각종 중동 사막 내음새 물씬 풍기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이외에도 해밀튼 호텔 맞은 편 보광로에는 100여개에 이르는 앤틱 중고 가구 거리라든지, 아프리카 문화가 모여 있는 이화시장 등이 있어 이태원이라는 지역을 더욱 더 다채롭게 만들고 있다. 이태원은 언제든지 방문해도 어딘가 이질적이면서 묘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흔히들 퓨전의 끝판왕 거리라는 이태원.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문화들이 이태원이라는 거리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이태원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꼭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될 만큼 특징적인 지역이다. 저녁 10시를 전후로 이태원은 낮과는 전혀 다른 밝지만 어두운 밤의 세상이 열린다. 주의!! 2. 누구와 함께? -20, 30대의 피끓는 청춘들. 3. 가는 방법은?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이 제일 편하다. 4. 감탄하는 점은? -낮과 밤이 정말 다르다는 사실. 다채로운 외국 문화와 음식점들이 많아 볼거리가 많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이태원 거리의 명성은 예전부터 유명하다. 특히 세계 각국의 퓨전 음식들과 특징적인 클럽들. 6. 꼭 봐야할 거리는? -해밀턴 호텔 뒷 골목들, 이화시장, 이슬람 언덕 주변, 세계 각국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각종 맛집들. 참고로 TV에 소개된 맛집만 120군데가 넘는다.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반나절 이상의 시간은 걸린다. 8.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itaewon.or.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쟁기념관, 경리단길, 리움미술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이태원의 낮과 밤은 완전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가기를. 말 그대로 밤길 조심! 최근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현대 미국의 기원 1, 2(토머스 휴즈 지음, 김명진 옮김, 나남 펴냄) 2014년 타계한 미국의 저명한 기술사가인 휴즈의 역작 ‘미국의 창세기’를 우리말로 옮긴 첫 저작이다. 저자는 지난 100여년간 미국 기술사의 흐름을 서술하며, 그 변화들이 당대 유럽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다. 교과서적 할애보다는 주요 역사적 사건을 깊이 있게 다루는 서술 방식으로 그의 핵심 개념인 ‘기술 시스템’의 진화 과정을 선별 배치했다. 현대 미국 사회를 형성한 주된 힘의 발생과 성장, 착근을 설명한다. 1권에서는 에디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등 독립 발명가들의 급진적 발명이 보수적 시스템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2권에서는 20세기 초 전성기를 맞은 미국의 ‘제2차 산업혁명’ 과정과 거대 기술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표출한다. 각권 416~440쪽. 각 2만 5000원.헤어(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MID 펴냄) 인생의 30년을 ‘털’만 연구하며 200편 이상의 논문을 쓴 저자가 쓴 털에 얽힌 미시사다. 저자는 털을 인류 역사의 숨은 동반자로, 호모사피엔스의 뇌용량이 늘어나는 진화적 변화에 도움을 준 존재로 기술한다. 현대사회에서도 털은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눈에 띄는 포장물이다. 중세 유럽의 화려한 머리 스타일이나 청나라 시대의 변발, 1970년대 히피들의 장발 등 머리카락은 부를 과시하거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등자신이 증명하고자 하는 가치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 이발소였다고 고백한다. 280쪽. 1만 5000원.
  • [서울광장] 불확실성의 시대, 우리의 플랜B는/황성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불확실성의 시대, 우리의 플랜B는/황성기 논설위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을 뒤집으려는 중국의 쩨쩨하고도 무례한 조치, 부산 소녀상 설치 직후 일본 총리의 도를 넘어선 발언으로 2017년을 열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예고했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럭비공 외교도 시작됐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트럼프의 밀월로 상징되는 미·러, 쿠릴 4개 섬과 경제협력을 지렛대로 접근하는 러·일을 보자면, 주변 4강의 세력 재편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겹친 트럼프발 불확실성의 시대를 실감한다. 대통령 선거의 표심(票心)을 잡으려는 대선 주자들의 동분서주 속에 좌표를 잃을 것 같은 한국 외교가 아슬아슬하다. 특히 사드 배치와 위안부 합의가 그렇다. 사드에 대해서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안희정 충남지사가 결정 유지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모호한 상태, 그밖의 주자들은 재검토나 결정 철회를 주장한다. 2015년 12월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를 비롯해 재협상하자는 입장이 대다수이다. 좋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예비 후보들이 국민의 뜻을 수렴한 결과라고 하자. 철회도 파기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드 배치 철회와 위안부 합의 파기 이후의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플랜B, 플랜C를 얘기하는 대선 주자들이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드는 한국과 주한 미군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 속에 추진되고 있다. 미국으로선 동북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견제하려는 전략적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공들여 온 한국에 사드 하나로 배신당했다고 중국은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화장품에 이어 양변기 수입 금지, 방공식별구역 침범 등의 보복과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에 굴복해 사드 배치를 철회했다고 치자. 주한 미군 철수까지 거론했던 트럼프가 “박근혜와 오바마 때 이뤄진 이야기이니 다시 얘기해 봅시다”라고 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중국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이상의 본때를 보일 것이다. 주한 미군 감축·철수를 비롯해 핵우산을 걷어내고 한·미 동맹이 일궈 놓은 군사협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 금융과 무역 같은 경제 제재에 관해서도 중국을 훨씬 뛰어넘은 세계 최강의 카드를 미국은 쥐고 있다. 약점을 잡힌 한국은 중국이 말하는 대로 끌려다녀야 하는 운명이 될 게 뻔하다. 위안부 합의를 파기했다고 하자. 일본이 재협상에 응할까.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스와프 협상 중단에 이어 지난해 12월 불발로 끝난 어업 협상의 중단도 일본이 내밀 카드의 하나다. 1998년 같은 일본의 어업 협정 파기에도 대비해야 한다. 우리 무역의 10%를 차지하는 경제 교류에도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정부 동향에 민감한 게 일본의 민간이고 기업이다. 일본 가전이 삼성전자의 부품에 의존하고 있다지만, 제3국으로의 수입 대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본인 관광객도 줄어들 것이고, 한·일 경색으로 몇 년간 숨죽이고 살아온 80만 재일교포에게 혐한(嫌韓)의 물결이 한층 거세게 덮칠 것이다. 북핵 공조는 언감생심,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배치 철회, 합의 파기를 하겠다면 회복 불능의 파국을 각오하자. 일본과 관계를 끊고, 한·미 동맹에 종식을 고하고 국제사회의 웃음거리를 감당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4년 ‘문세광 사건’ 때 단교 카드를 내밀어 일본을 굴복시켰던 사례는 있다. 그때는 일본과의 국력 차가 몇십 분의 일에 불과했던 비대칭의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구한말 때와 상황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이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는 ‘야만의 시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하지만 역사의 냉혹한 반복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을 버리고, 중국과 손잡는 일을 생각해 본 한국인이 많지 않겠지만, 지금의 중국은 청나라 말기 조선을 능멸했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처럼 푸틴에게 고개를 숙여야 할지 모른다. ‘박근혜는 미워도, 박근혜 외교는 미워하지 말자’가 아니다. 국가 간 약속을 뒤집을 때는 상대가 용인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파트 계약을 파기하면 위약금으로 몇 배를 물어 주는데, 외교는 위약금으로 끝낼 부동산 거래와는 다르다. 대선 주자가 철회, 파기를 얘기하려면 외교의 플랜B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marry04@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역관상언등록연구(이현주 지음, 글항아리 펴냄) 조선 인조 15년(1637)부터 숙종 18년(1692) 사이에 역관(譯官)들이 작성한 문서와 지방 수령이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인 ‘역관상언등록’(譯官上言謄錄)의 첫 완역본. ‘상언’은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일을 뜻한다. 17세기 역관의 인사 이동과 처우 개선 문제,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청나라를 세우면서 명나라를 압박하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이 권력을 세습하고 있었다. 저자는 책이 제작됐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역관의 세계를 소개한 뒤 문서 65건을 빠짐없이 번역했다. 468쪽. 2만 5000원. ●우리는 아이들을 믿는다(리처드 벡 지음, 유혜인 옮김, 나눔의집 펴냄) ‘맥마틴 유치원 아동학대 사건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미국 현대사의 기상천외한 사건으로 꼽히는 아동학대를 다뤘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아동학대 사건의 방대한 기록을 조사하고, 핵심 인물 수십 명을 인터뷰함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아동학대 사건은 그 자체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언론과 수사기관 모두 ‘악마 찾기’에 몰두한다. 그러다 보니 아동학대 자체가 진실과 상관없는 집단 패닉을 낳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게 저자의 인식이다. 개별 사건 측면을 넘어 문화적 측면까지 저자는 분석해 낸다. 452쪽. 1만 7000원. ●농촌(마이클 우즈 지음, 박경철·허남혁 옮김, 따비 펴냄) 우리는 흔히 농촌을 어촌, 산촌과 함께 분류되는 지역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촌이나 산촌에 사는 사람 역시 대부분 어업이나 임업 등을 농사와 병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촌은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이 책은 다양한 기능과 상반되는 이미지가 교차하는 농촌을 9개의 주제로 다룬다. 영국 농촌지리학자인 저자는 지리학과 사회학에서의 농촌 연구를 개괄하고 경제적 공간, 자본주의 농촌 변화, 소비 공간으로서의 농촌을 탐색한다. 농촌이 생산 공간일 뿐 아니라 관광과 레저의 소비 공간으로 글로벌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자연과 문화유산 등의 가치도 재평가되는 등 학제적 통찰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400쪽. 2만 2000원.
  • 탄핵심판 첫 변론 9분 만에 끝나

    탄핵심판 첫 변론 9분 만에 끝나

    朴대통령 불출석… 내일 2차 변론 박근혜 대통령의 운명을 가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변론이 3일 시작됐다. ‘비선 실세’ 최순실(61·구속 기소)씨의 국정 농단과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비위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가 속도를 높이는 가운데 진행되는 헌재의 탄핵심판 심리는 그 결과에 따라 박 대통령의 직위와 향후 정치일정을 결정지을 뿐 아니라 대통령 통치 행위의 범위와 책무 그리고 위법행위에 대한 사법적 단죄에 있어서 헌법적 판단과 기준을 제시하게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막대하다. 박한철 헌재소장은 이날 대심판정에서 펼쳐진 1차 심리에서 심판의 원칙으로 ‘지극히 공정함’이라는 뜻의 ‘대공지정’(大公至正)을 들었다. 18세기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건륭제의 말이다. 박 소장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의결되면서 우리 헌법이 상정하고 있는 기본적 통치구조에 심각한 공동을 초래하는 위기 상황임을 잘 인식하고 있다”며 “대공지정의 자세로 엄격하고 공정하게 최선을 다해 심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재판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조속히 혼란의 터널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국정 혼란과 이에 따른 국민들의 우려를 감안, 주 1~2회씩 변론을 진행하는 등 최대한 신속하게 탄핵심판 심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청구인인 국회 탄핵소추위원회와 피청구인 박 대통령 측 대리인들이 증거 및 증인 채택 등을 놓고 첨예한 공방을 예고하고 있어 심리가 순항할지는 미지수다. 이날 1차 심리는 박 대통령이 불참함에 따라 9분여 만에 종료됐다. 헌재는 5일 2차 심리를 열어 청와대 안봉근·이재만 전 비서관과 윤전추·이영선 행정관에 대한 증인신문을 벌인다. 헌재는 2차 심리에도 박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을 경우 헌재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없이 향후 재판을 이어 갈 방침이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핵까지 온 마당에 양측은 심판절차가 조속히 끝나도록 협조를 해야 한다. 이 사안은 공정성 못지않게 신속성도 중요하다”며 “헌재가 탄핵심판에 나섰지만 헌재 자체의 존재 이유도 심판대에 오른 셈이고, 재판관들도 이를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청나라 건륭제 옥새 경매…무려 260억원 낙찰

    중국 청나라 때 옥새가 경매가 나와 무려 260억원에 낙찰됐다. 최근 프랑스 경매업체 드로우는 18세기 건륭(乾隆) 황제의 옥새가 경매에 나와 예상가의 20배를 뛰어넘는 2100만 유로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정말 '옥새들고 나르샤'하고 싶은 이 옥새는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황제 중 한 명인 건륭제의 것이다. 지난 1735년 부터 1795년까지 재위한 건륭제는 정치는 물론 경제, 문화적으로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번 경매에 나온 손바닥 만한 이 옥새는 붉은색과 흰색의 옥으로 제작됐으며 황실을 상징하는 용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건륭제는 재임당시 총 1700개 정도의 옥새를 만들었으며 이중 700개는 사라졌고 나머지는 현재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옥새가 경매에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 옥새는 19세기 프랑스 해군 군의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후 그의 가족에게 가보로 내려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조상이 그의 후손들에게 막대한 부를 남긴 셈이다. 드로우 측은 "경매가 열리자마자 현장 참가자와 온라인 입찰자들 사이에 뜨거운 경쟁이 붙어 순식간에 가격이 치솟았다"면서 "최종 낙찰자는 익명의 중국인 입찰자"라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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