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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희대제’ 쓴 中 소설가 얼웨허 별세

    ‘강희대제’ 쓴 中 소설가 얼웨허 별세

    중국에 대한 교과서로 불리는 ‘강희대제’, ‘옹정황제’, ‘건륭황제’ 등 제왕삼부곡을 쓴 중국 소설가 얼웨허(二月河)가 지난 15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73세.중국 신화통신은 얼웨허가 6개월 전부터 뇌전색으로 베이징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오던 중 이날 새벽 심장기능 부전으로 병세가 악화돼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본명이 링제팡(凌解放)인 얼웨허는 1945년 11월 산시성 시양에서 태어났고 1967년 늦깎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0년간 군인으로 복무했다. 전역 후 허난성 난양시 한 구의 선전부 과장 등으로 일했고, 1995년에는 중국 문학예술계연합회 난양시 부주석으로 뽑혔으며 수차례 중국 공산당 전국인민대표회의 대표를 맡았다. 얼웨허는 비교적 늦은 40세 때부터 문학 창작을 시작했는데 중국 청나라 전성기였던 4대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 시기 134년간을 다룬 대하소설 제왕삼부곡으로 국내외에서 유명해졌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황제가 된 것처럼… 中 자금성 카페 관광객 ‘북적’

    [특파원 생생리포트] 황제가 된 것처럼… 中 자금성 카페 관광객 ‘북적’

    중국인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중국 관광지는 고궁박물관이라 불리는 자금성이다. 지난 1일 자금성 관광을 마치고 나오는 후문 옆에 커피를 주로 파는 코너 타워 카페(古宮角樓)가 문을 열었다. 중국을 상징하는 자금성에 생긴 카페는 개장하자마자 베이징 최고의 명소로 떠올랐다. 커피를 주문한 대학생 장뤼는 “자금성 바로 옆에서 커피를 한잔하다 보면 이곳에서 일어났던 옛날 일이 자연스레 생각난다”고 말했다. 코너 타워 카페의 라테아트도 특별하다. 커피 위의 우유 거품에 ‘如朕親臨’(황제가 친히 임하도다)과 같은 글씨를 새겨 넣어 마치 황제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듯한 기분을 낳는다. 코너 타워 카페의 커피 값은 아메리카노 작은 잔이 27위안(약 4500원)으로 스타벅스(25위안)보다 조금 비싸고 스타벅스를 맹렬히 추격 중인 중국산 루이싱커피(21위안)보다도 가격이 높다. 한꺼번에 40명의 손님을 접대할 수 있으며 30여 가지의 음료를 22~45위안의 가격대에 내놓는다. 가게 내부에서도 자금성에 마련된 카페인 만큼 최고를 추구하는 자부심이 엿보인다. 내부 장식은 창살 무늬를 살려 고전적인 분위기를 냈고, 직원들은 주문한 음료를 직접 가져다줄 정도로 베이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친절한 서비스를 선보인다. 실내 장식은 자금성 안에서 진행되는 전시회에 따라 조금씩 바뀔 예정이다. 사서 가져가는 커피 잔은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황제를 의미하는 황금색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인기 있는 음료는 ‘강희제가 가장 좋아한 초콜릿’이란 이름의 35위안짜리 초콜릿 음료다. 하지만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는 실제로 초콜릿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에 따르면 강희제는 이탈리아 선교사가 올린 초콜릿이 너무 쓴맛이라 서양의 명약으로 생각해 약효가 있는지 물었다. 왕안리우 인민대 연구원은 “자금성은 중국 최고의 문화 자산인 만큼 창의적인 문화 상품을 많이 개발했다”고 소개했다. 고궁박물관이 최근 기념품으로 내놓은 자수가 새겨진 고급 비단 잠옷은 732만 위안(약 12억원)의 기금을 모을 만큼 중국인의 자금성과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르다. 이 잠옷이 원래 목표로 한 모금액은 5만 위안 정도였다. 자금성 입구에는 코너 타워란 이름의 식당이 곧 열 예정이며, 관광 도중 인터넷으로 주문한 기념품을 코너 타워 카페 옆에서 찾을 수 있는 서비스도 시작된다. 중국의 심장은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서양의 문화를 빌려 세련되게 변신 중이다. 글 사진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건축물은 시간과 공간을 담는 그릇입니다. 건축물을 둘러본다는 것은 그 안에 쌓인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헤아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천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의 건물에는 개항 후부터 지금까지 130여년의 시공간이 담겨 있습니다. 모르고 보면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과 서양의 르네상스식 건물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1883년 개항 당시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 했던 열강들의 세력 다툼과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이 읽힙니다. 적산가옥이 늘어선 거리를 거닐자 오늘과 당시의 시간이 겹쳐집니다. 세월에 빛바랜 건물에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또 다른 기억이 덧씌워지는 중인 현재를 마주합니다.뚜우우우. 뱃고동이 울린다. 배에서 치파오를 입은 중국 상인이 내린다. 부두에는 쌀가마니를 발밑에 내려놓은 나가사키 상인들이 모여 있다. 1883년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하자 한적하던 어촌에 외국의 신문물이 쏟아진다. 외국인 전용 거주지, 바다 건너온 물건을 파는 가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역회사와 호텔이 들어선다. 일본은 조선 수탈을 위한 방편으로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등을 세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일대는 인천의 개항기를 간직한 건축물로 가득하다. 거리 전체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 볼 수 있는 역사문화공간인 셈이다. 인천역 부근의 인천아트플랫폼부터 신포국제시장 인근의 답동성당까지 찬찬히 걸으면 반나절도 걸리는 거리지만 핵심 장소는 일본풍 거리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개항기 역사가 오롯이 담긴 거리의 건물은 오늘날 박물관, 아트플랫폼, 카페로 변모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개항기 인천의 모습을 겹쳐 보다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여행의 출발점은 인천아트플랫폼이다. 세월이 깃든 건물과 아티스트의 예술적 기운이 만난 공간이다. 인천시는 1888년에 지어진 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를 비롯해 개항기와 1930~40년대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국내와 일본의 물류 운송을 담당하던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은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 해방 후에 지어 최근까지 대한통운 창고였던 건물은 공연장, 1940년대 문인과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금마차다방은 생활문화센터로 재단장했다. 전시장, 공연장, 창작 스튜디오 등 총 13개 동이라 규모가 상당하니 홈페이지에서 관심 있는 전시를 확인하고 가는 편이 좋다. 인천아트플랫폼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과거의 시공간이 펼쳐진다. ‘혼마치도리’라고 불리던 은행 거리다. 길가에 일본 제1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등 이국적인 석조 건축물이 나란하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을 개항기에 멀끔한 외국 건축물이 들어섰으니 조선인이 느끼는 웅장함은 지금의 수십 배였으리라. 인천개항박물관은 당시 일본 제1국립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였다. 은행의 설립 목적은 조선 수탈이었다. 은행은 조선에서 나는 금괴와 사금을 사들였고 인천항에 들어오는 무역 상인에게 해관세를 받는 업무도 병행했다. 개항기 인천을 갈무리하는 박물관으로 문을 연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20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우편제도 등 개항 후 인천으로 들어온 다양한 근대문물을 전시한다. 건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크다. 좌우대칭을 이룬 르네상스식 석조건물 내부는 붉은 벨벳 커튼, 아치형 창문, 샹들리에 조명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개항장 일대의 건물 모형을 한데 모았다. 이곳의 전신은 일본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 일본이 조선 쌀을 싼값에 사서 되파는 일을 했던 나가사키 상인들을 지원하고자 설립한 금융기관이었다. 일본, 청나라 등 각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조계지 건물부터 지금은 소실된 건물, 개항장 거리에 현존하는 건물까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계단으로 나뉜 일본 조계지와 차이나타운 은행 거리의 이국적인 분위기는 일본식 목조주택이 늘어선 거리, 일본풍 거리로 이어진다. 인천 중구청 앞은 개항기 일본인이 거주하던 일본 조계지였다. 가옥은 점포가 딸린 2층 목조주택과 나가야식(일본식 다가구주택) 1층 목조주택이 대부분이다. 목재 골조, 반듯한 직사각형 창, 검은 기와의 어울림은 언뜻 봐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거리에는 조계지 시절에 지어진 건물과 최근에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 뒤섞여 130여 년 전의 아픔을 말없이 전해준다. 건물의 역사성은 유지하되 쓰임새는 달리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일도 한창이다. 개항기 하역회사 사무실이던 건물은 2011년,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거쳐 카페 ‘팟알’로 문을 열었다. 목조 골격을 살린 카페 내부는 낮잠이 들 만큼 아늑하다. 팟알 바로 옆의 관동갤러리 역시 목조가옥의 외관을 유지한 채 갤러리가 됐다. ‘1883년 일본이 조계지를 만들자 1년 후 청나라는 반대편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한다.’ 이 역사적 사실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일본풍 거리와 차이나타운이 맞닿은 지점에 자리한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청국과 일본 조계지의 경계가 되는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은 중국식 건물, 오른쪽은 일본식 건물이다. 계단 양쪽 석등도 모양이 다르다. 30여개 계단 끝자락에는 중국 칭다오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서 있다. 뒤를 돌면 차이나타운의 오색찬란함과 일본풍 거리의 차분함이 한눈에 담기고 저 너머 인천항이 펼쳐진다.●배다리 헌책방 골목 읽혔으나 누군가에게 다시 읽히길 기다리는 책을 우리는 ‘헌책’이라고 부른다.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빛바랜 책이 모인 거리다. 헌책방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 절판된 책을 찾아 헤매는 이, 오래된 책의 종이 냄새에 파묻히고 싶은 이를 품어 주는 골목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배다리에 헌책방 골목이 들어선 것은 한국전쟁 후. 남루한 마을에 책을 쌓은 리어카가 모이고 책이 주는 지혜에 목마른 이들이 몰려들며 헌책방이 하나둘 생겨났다. 한때 헌책방이 40여곳까지 늘며 서울의 청계천, 부산의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벨서점, 한미서점, 삼성서림 등 다섯 곳만이 남아 배다리를 지킨다. 45년 전 6.6㎡(두 평) 남짓 쪽방에서 시작한 아벨서점은 오늘날 헌책방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내년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주인은 찾는 책이 없어 헛걸음하는 손님이 없도록 ‘어느 책방이 문을 닫는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면 한달음에 달려가 책을 사들였다. 그렇게 모은 것이 4만여권, 창고에는 그의 세 배가 넘는 책이 쌓여 있다. 도서 검색대 대신 책장마다 ‘프랑스 문학’, ‘여행’ 등의 견출지가 붙어 있고 비범한 기억력의 주인이 책을 찾아준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시 낭송회는 어느덧 100회를 넘겼다. 최근에는 인천 출신의 이설야 시인이 시를 읊었다. ‘살아 있는 글들이 살아 있는 가슴에.’ 아벨서점 간판 옆에 붙은 글귀다.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며 살아 있는 글과 정신을 호흡하는 곳,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다.●동심 한 조각을 되찾다, 송월동 동화마을 동화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진 어른이 됐다. 꿈속에서 피터 팬과 같은 편이 돼 후크 선장을 물리치던 때도 있었는데. 차이나타운의 북쪽 끝과 맞닿은 송월동 동화마을은 고마운 공간이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동화 속 주인공들을 되살려 냈으니 말이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세계 명작 동화를 테마로 조성됐다. 입구의 아치형 조형물을 지나면 도로시 길, 빨간 모자 길, 전래동화 길 등 열한 가지 테마의 골목이 발길을 붙잡는다.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이 담벼락에 들어가 있는가 하면 벤치에 피터 팬이 앉아 있고 계단은 색색의 무지개다리다. 사람들은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으며 동화 속 공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개항 후 독일인이 주로 거주하며 부촌이던 송월동은 1970년대 젊은이들이 인천 주변 도시와 서울로 빠져나가며 노인만 남게 됐다. 낙후된 마을은 2013년 중구청의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통해 동화마을로 되살아났고 인천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알록달록한 동화 세상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주민들의 생활상과 동화 속 장면이 뒤얽힌 면면이다. 가스계량기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의 몸통이고, 전봇대는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다. 가스 사용량을 재는 생활은 현실이고 동화는 비현실이다.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되는 순간은 동화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 준다. 전봇대에서 하룻밤 새 하늘까지 자라던 콩나무를 상상할 때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팍팍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2) →가는 길: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인고속도로와 인천대로를 지난다. 경인고속도로 신월IC 통과 후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17㎞가량 이동한다. 인천항사거리에서 제2외곽고속도로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수인사거리에서 중구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인중로와 제물량로218번길을 지나 신포로23번길을 따라가면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의 시작점, 인천아트플랫폼이다. →맛집:인천의 맛을 이야기할 때 짜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식 짜장면은 1883년 인천 개항 후 중국인들이 인천 부두 근로자에게 국수에 볶은 춘장을 비벼 먹는 음식을 팔며 시작됐다. 붉은 간판과 홍등이 수놓은 거리, 차이나타운의 만다복(773-3838)은 하얀 짜장으로 유명하다. 취향대로 고기장과 육수를 넣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동인천 삼치거리에는 삼치와 막걸리를 파는 생선구이 집 10여개가 모여 있다. 인천집(764-6401)은 삼치구이와 조림을 반반씩 맛볼 수 있는 ‘반반 삼치’가 대표 메뉴다. 쌀밥에 겨울이 제철인 삼치 한 점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잘 곳:인천중구청 뒷길에 자리한 호텔아띠(772-5233)는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 등과 가까워 인천의 대표 여행지를 둘러보기 수월하다. 베니키아 월미도 더 블리스 호텔(764-9000)은 월미 문화의 거리에 자리한 호텔이다. 비즈니스센터와 세미나룸이 있어 출장 시 묵기 편리하며 객실에서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한눈에 내다보인다.
  • “조선 최고 문인, 추사의 예술혼 가득한 과천시 추사박물관으로”

    “조선 최고의 문인, 추사의 예술혼이 가득한 과천시 추사박물관으로” 경기도 과천시 추사박물관은 겨울방학을 맞아 초등학생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추사 인장의 비밀을 찾아라’를 운영한다고 13일 밝혔다. 추사의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조선시대 문화를 알아보는 역사·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추사 인장의 비밀을 찾아라’, ‘미션 클리어 추사 김정희’, ‘추사와 함께 옛 모자이야기’ 등 주요 프로그램을 내년 1월 3일부터 20일까지 진행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추사체로 상징되는 조선말 글씨의 명인이다. 청나라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학자이기도 하다. 김정희의 삶과 예술, 대표작에 대해 함께 배우는 ‘추사 인장의 비밀을 찾아라’는 초등학생을 동반한 가족단위를 대상으로 한 교육으로 토, 일요일에 운영된다. 추사 김정희의 호(號)를 통해 조선시대 문인문화를 알아보고, 인장과 족자를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김정희의 호는 추사를 비롯 보담재, 완당, 노과, 시암, 예당, 농장인, 천축고선생 등 시절과 그때의 심정에 따라 붙인 명호가 무려 343개에 이른다. 청나라 석학인 옹방강의 호 담계와 그의 서재 이름인 보소재를 본따 보담재라 했다. 또 청나라 학자, 서예가인 완완의 완자를 따서 완당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복식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추사와 함께 옛 모자 이야기’는 초등학교 1~3학년을 대상으로 시청각 교육과 전시실 관람, 체험활동이 통합교육 형태로 진행된다. 붓글씨를 직접 써보고, 관모를 만들어 보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추사박물관 탐험대’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과천 속 문화재를 동시에 이해하고 역사를 보는 시각을 키우는 역사문화교육이다.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진행된다. 추사 관련 유물뿐만 아니라 과천의 문화재를 알아보고 역사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오는 14일부터 추사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이번 겨울방학 체험교육프로그램 수강생을 선착순으로 모집한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말빛 발견] 아라사, 러시아, 로씨야/이경우 어문팀장

    [말빛 발견] 아라사, 러시아, 로씨야/이경우 어문팀장

    해방 전 우리에게 ‘러시아’는 ‘아라사’(俄羅斯)이기도 했다. 한자음으로 부른 것이다. 달리 ‘아국’(俄國)이라고도 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 것도 이 이름들에서 비롯한다. ‘아관’은 곧 ‘아라사(아국) 공사관’을 줄인 말이었다. 예전에는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특별히 ‘파천’이라고 했다.‘러시아’는 ‘노서아’(露西亞)로도 불렸다. 여기서 ‘노국’(露國)도 나왔다. ‘아라사’가 중국식이라면, ‘노서아’는 일본식이다. 조선 효종 때 청나라 요청으로 러시아를 친 일이 있다. ‘나선정벌’(羅禪征伐)이다. 이때 ‘러시아’는 ‘나선’이었다. 국어도 근대화의 길을 걷고 어문 규정이 정비되면서 ‘러시아’가 표준이 됐다. ‘스페인’, ‘헝가리’, ‘멕시코’ 같은 국명처럼 영어식 이름이다. 북녘에서는 ‘러시아’를 ‘로씨야’라고 한다. 러시아어에 가깝다. 북녘의 외래어는 러시아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와 ‘로씨야’로 나뉜 것도 냉전과 분단의 상처다.
  • 도난당한 조선시대 승탑 부재·석조 불상 되찾았다

    도난당한 조선시대 승탑 부재·석조 불상 되찾았다

    도난당한 조선시대 불교 문화재인 울산 신흥사 승탑 부재와 경남 창원 상천리 석조여래좌상을 되찾았다. 문화재청은 2000년 10월 사라진 신흥사 승탑 부재와 2013년 1월 상천리 절터에서 도난당한 불상을 27일 오전 회수했다고 밝혔다. 두 문화재는 개인 자택 등지에서 은닉되고 있다가 이번에 적발됐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두 유물을 불법으로 취득한 뒤 보관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지속적으로 수사해 문화재를 회수했다.신흥사 승탑 부재는 사각형 돌로, 겉면에 ‘康熙四十辛□愚堂大師□□巳三月日’(강희사십신□우당대사□□사삼월일)이라는 한자가 새겨져있다. 청나라 강희제 제위 40년인 1701년에 조성된 승탑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승탑 부재에는 연꽃을 돋을새김한 부분이 있는데 울산 신흥사의 승탑석재와 동일하다. 이 부재는 현재 비지정문화재이나, 조선 후기 울산·경남 지역의 승탑과 비교 검토가 이루어진다면 당시 석조물의 양식을 규명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석조여래좌상은 후대에 불두(佛頭·부처의 머리)를 붙인 불상이다. 양쪽 어깨를 모두 덮는 옷을 입고 가부좌를 했으며 둔중한 체구에 결가부좌한 양발이 모두 드러나 있다. 옷을 잡은 손가락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 지방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불상을 창원대박물관에 이관했고, 승탑 부재는 울산시·신흥사와 논의해 인계할 방침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마지막 황제’ 베르톨루치 스크린 뒤로 사라지다

    ‘마지막 황제’ 베르톨루치 스크린 뒤로 사라지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마지막 황제’ 등으로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26일(현지시간) 로마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77세.1941년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에서 유명한 시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로마 라사피엔차 대학교를 중퇴한 뒤 아버지의 친구였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본격 입문했다. 베르톨루치 감독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은 1972년 개봉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다. 허무주의가 짙게 배어 있는 이 작품은 베르톨루치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것으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맹목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담아 논란과 화제를 동시에 모았다. 이 영화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2007년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가 강간 장면을 합의 없이 찍었다고 밝히며 다시 한번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의 운명을 그린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로 1988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9개 주요 부문을 휩쓴 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유일한 이탈리아 감독이기도 하다. 2007년에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베니스영화제 특별인상인 명예 황금사자상, 2011년에는 칸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지병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는 “20세기 중반 스크린을 수놓은 마지막 영화 거장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논평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돌체앤가바나 사태로 본 중국 사업 위해 알아야 할 10가지

    돌체앤가바나 사태로 본 중국 사업 위해 알아야 할 10가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돌체앤가바나가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담은 광고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허스트 잡지의 중국 대표로 일한 레나 양은 26일 관영 글로벌타임즈를 통해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사업하는 데 필요한 10가지 아이디어를 조언했다. 전 세계 명품 시장의 36%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의 비중은 4년 안에 42%로 늘어 세계 최대가 될 전망이다. 양은 돌체앤가바나 사태가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중국인의 감정에 대한 무시로 인해 빚어졌다고 분석했다.1. 중국의 긴 역사를 존중하고 열린 자세를 가져라. 중국은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으며 책이나 뉴스를 통해 얻는 중국에 대한 지식은 클리셰와 같이 진부하다. 돌체앤가바나의 비디오에서 여성 모델은 이탈리아 음식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중국인이 아니라면 이 비디오는 그저 농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젓가락은 문화의 일부이며 가족, 우정, 사랑을 상징한다. 2015년 중국 중앙(CC)TV가 설을 맞아 제작한 영상은 젓가락이 중국 문화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지 잘 보여준다. 만약 브랜드가 중국 문화와 관련된 광고를 하고 싶다면 중국 현지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2.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세를 가져라.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현지 규칙을 존중하는 수밖에 없다. 중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기업은 중국 전문가를 고용해서 혹시 실수가 없는지 항상 확인한다. 3. 여론을 살펴라. 중국은 거대한 국가로 어떤 일이든 큰 결과를 낳는다. 시장이 클수록 사업의 위기도 크기 마련이다. 여론을 살피는 것은 고객을 관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4. 중국 젊은이들은 예측 불가능하다. 1985년 이후에 태어난 중국의 젊은 세대는 해외 여행을 많이 하며 세계 뉴스와 경향에 민감하다. ‘빠링허우’라 불리는 중국 젊은이들은 샤넬, 구치, 루이뷔통, 디오르를 좋아하며 어떤 상표에 대해서도 편견이 없다. 만약 당신이 올바르게 사업을 하면 중국 젊은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환영하겠지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당신의 브랜드를 버릴 것이다. 5. 중국의 언어로 대화하라. 해외 브랜드가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중국인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소통 방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에게서 나온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현지 전문가와 먼저 상담하라. 6. 위기가 일어나면 즉각 대응하라. 중국은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어 있어 뉴스가 생각보다 빨리 퍼진다. 돌체앤가바나 사태만 해도 몇 시간 만에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를 통해 수백만 명이 사건을 공유했다.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몇 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인터넷 위기에 대응하는 법을 모든 직원에게 교육하라. 7. 고객을 평등하게 대하라. 중국인들은 예민하고 자존심도 세다. 서방 국가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중국 청나라가 전 세계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20세기 초반 중국은 외세로부터 핍박받았기 때문에 서방에 대한 믿음이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을 공평하게 대우하고 속이지 마라. 8. 중국을 존중하면 보상받을 것이다. 고대 중국 속담에 ‘1인치를 존경하면 1피트를 돌려준다’란 말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 말을 3000년 이상 교육받았다. 중국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보이는 브랜드는 세계 최대 기회의 시장인 중국에서 반드시 보상받는다. 9. 전략 전문가를 고용하라. 홍보 전문가와 홍보 대행사를 고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국에서 위기를 헤쳐나가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하려면 전략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 좋다. 10.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다. 문제가 발생하면 빨리 진정한 사과를 하는 것이 좋다. 중국 속담에는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란 말이 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 권위 회복하려던 ‘조선의 주자’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 권위 회복하려던 ‘조선의 주자’

    “우리나라는 작고 힘이 약하여 비록 큰일을 할 수는 없으나 항상 ‘억울함과 애통함을 품은 채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을 그대들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천지가 만물을 낸 것이나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올곧음(直)’일 뿐이었고, 공자와 맹자 이래로 전해온 것도 오직 올곧음뿐이었다. 주자가 임종시에 문인들에게 고했던 말씀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제군들은 기억하도록 하라.” -윤봉구가 지은 송시열 묘지(墓誌)송시열이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훈계한 내용이다.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주자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 그 가르침은 바로 타협하지 않는 ‘올곧음’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의 일생의 좌우명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위기의 시대에 어젠다를 제시하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은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병자호란 때 나라의 치욕을 목도한 이후 송시열은 벼슬할 생각을 접고 산림에 은거해 학문에 몰두했다가 효종 때에 올린 ‘기축봉사’와 ‘정유봉사’를 통해 이후 나라가 지향해야 할 청사진을 제시했다. 우암은 여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학문적 성과를 드러낸다. 그 내용은 세제를 바로잡고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할 것, 궁궐과 신하들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 궁중의 사치를 금하고 검약을 실천할 것, 내수사를 혁파할 것, 왕이 학문에 힘쓸 것, 속오군이나 대동법 등 정책을 일관성 있게 시행할 것, 공자-주자로 이어지는 학통을 확립할 것, 북벌을 위해 내정을 개혁할 것 등이다. 구체적인 정책뿐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국가의 기강을 다시 세우고자 북벌을 제시하고 주자학을 이념화해 사상을 단속함으로써 기존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때보다 지배층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전 국토가 유린당한 사태는 왜란 때보다 덜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항복했다는 치욕과 정신적 지주인 명나라의 멸망으로 사대부 층에서는 기존의 가치와 권위가 흔들리는 혼돈을 겪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엇을 제안해야 할 것인가. 주자를 깊이 연구해왔던 송시열은 오랑캐의 위협 하에 있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주자가 처했던 남송시대와 유사하다고 봤다. 그리하여 대외적인 문제뿐 아니라 국내 정치, 학문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주자의 권위와 의리를 내세워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적을 물리치려면 내치부터 닦아야 ‘송시열’ 하면 ‘북벌론’을 떠올린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땅에 떨어진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중화를 존숭하고 이적을 물리쳐야 한다(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명분을 시대의 사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론에 관해서는 ‘현실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을 많이 한다. 한편으로 ‘효종은 진심이었으나 송시열은 명분만 동조했을 뿐 실제 결행 의지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송자대전’을 보면 송시열의 처지에서 북벌은 언제나 내치의 수행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정사를 잘 수행하여 이적을 물리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공자가 ‘춘추’를 지어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천하 후세에 밝히셨으니, 혈기를 지닌 자라면 중국을 존숭해야 하고 이적을 추악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중략)…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오랑캐는 군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라고 마음을 굳게 정하여 원한을 잊지 말고 원통함을 품고서 공손한 언사 속에 분노를 더욱 깊이 감추고 예물을 바치는 중에 와신상담하는 마음을 더욱 절실히 가지십시오.” -‘기축봉사’ 효종: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이오, 경이 전에 말하기를 ‘병력을 기르는 일과 백성을 기르는 길은 반드시 서로 방해가 된다’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서로 방해가 되지 않겠소? 송시열: 그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주자의 말씀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재력에 관계되는 것을 일절 함부로 쓰지 말고 모두 군수(軍需)로 돌리면 군수가 점차 넉넉해질 것입니다. 효종: 주자의 말씀은 과연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이오? 송시열: 옛 성인의 말씀에는 간혹 시대와 형편이 달라 시행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주자의 말씀은 시대와 형편이 지금과 매우 가깝고 또 주자가 만났던 시대상도 오늘날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신은 그 말씀을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대설화’ 명나라를 존숭한다는 것은 단지 사대의 의리나 임진왜란 때 구원해준 의리 때문만이 아니다. 명나라는 중화라는 문명의 상징, 정주학이라는 도학의 근원지로 사대부층에는 정신적으로도 부모의 나라였다. 따라서 북벌론은 당시의 급격한 상실감을 메우고 자존심을 부지해주기 위한 하나의 치유책으로 일정한 역할이 있었다고 보인다. 즉 송시열에게 북벌은 실행 가능성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흩어진 민심을 단속하고 내치를 다지며 국가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동력이었다. #주자를 믿고 이단을 물리치라 송시열: 윤휴의 죄 중에는 무슨 일이 가장 큰가? 권상하: 역모죄가 가장 큽니다. 송시열: 그대의 궁리공부(窮理工夫)가 깊지 못하구나. 권상하: 그렇다면 주자를 모욕한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송시열: 그렇다. 사람치고 성현을 모욕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느냐? -권상하가 기록한 어록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이 조선을 이끌어줄 대안이라 여겼다. 그 자신도 주자학에 조예가 깊어 수십 권의 관련 저서를 남겼다. 이러한 주자학에 대한 신념과 타협을 모르는 강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주자와 대치되는 학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비판과 배척을 가했다. 청나라의 현실적 패권을 인정하고자 했던 허적은 역모로 숙청됐다. 경전에 대해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하고 우암의 예설에 반론을 제기했던 윤휴에게는 ‘사문난적’의 이름이 더해졌다. 역모보다 주자를 모욕하는 것이 더 큰 죄라고 여겼기 때문에 역적의 누명은 후에 신원되더라도 사문난적이란 오명은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역적을 편드는 무리가 역적보다 더 나쁘다는 논리로 윤선거나 윤증과 불화하여 서인 내에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당파에 따라 극명하게 다르다.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의 송시열 졸기에서는 “송시열이 윤휴와 윤증을 배척할 때에 비록 송시열을 존중하는 자라도 혹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그 끝에 가서는 마침내 모두 송시열의 말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라고 했다. 그러나 소론이 편찬한 ‘숙종보궐실록’의 송시열 졸기에서는 “한마디 말이 회덕(懷德·송시열)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견과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도 곧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라며 그 실상을 보여준다. 숙종 때 당파 간 교체가 있었지만, 영조 이후로 노론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송시열은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받고 ‘대로(大老)’라 불린다. 그리고 그의 노선은 이후 200여년간 노론의 의리가 되었다. 김성애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송자대전’은 왕명으로 편찬·간행… 성에 ‘子’ 붙인 제명 전무후무 문집은 숙종 43년(1717년)과 정조 11년(1787년), 1927년 모두 세 차례 간행됐다. 숙종 때는 활자본으로, 정조 때는 목판본으로 간행됐다. 두 번 모두 국가의 지원 하에 왕명으로 편찬하고 간행했다. 특히 정조 때 236권 102책이란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간행한 ‘송자대전(宋子大全)’은 성에 ‘자(子)’를 붙인 제명부터 유례없는 전무후무한 것이다. 문집의 제목은 대개 저자의 호나 시호, 관직명을 붙여 ‘00문집’, ‘00유고’ 등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다. 예컨대 숙종 때 발간한 ‘우암선생문집’이 그렇다. ‘우암선생’과 ‘송자’라는 명칭은 우암의 공식적인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후 우암의 저서와 행적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작업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습유, 속습유, 부록 등을 모두 합치면 261권 113책이란 거질이 된다. 원문은 현재 한국고전종합DB에서 서비스한다. 또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80년대 ‘송자대전’ 주요 작품을 뽑아 번역해 ‘국역송자대전’을 출간했는데, 현재 완역 중이다.
  • 광주시, 삼학사 충절 기리는 ‘현절사 제향’ 거행

    광주시, 삼학사 충절 기리는 ‘현절사 제향’ 거행

    경기 광주시는 22일 남한산성 내 현절사에서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 홍익한·윤집·오달제 선생과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 정온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현절사 제향’을 거행했다. 제향식에는 현절사 도유사를 비롯해 신동헌 광주시장·유림·시민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제향행사 초헌관으로 신동헌 시장, 아헌관에는 박현철 시의회 의장, 종헌관은 이창희 광주문화원장이 맡아 제를 올렸으며 전국 각지에서 위패를 모신 분들의 후손이 참석해 선조의 넋을 기리며 애국애족 의식을 높이는 시간을 함께 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현절사는 숙종 14년(1688년)에 광주유수 이세백이 건립했으며 현절사 제향은 2008년 광주시 무형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된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 청 태종의 12만 대군에 포위됐을 때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패전 후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위패와 함께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정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제향은 춘계 음력 3월 중정일과 추계 음력 9월 중정일에 올리고 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과천 추사박물관, 추사서화파 특별기획전 오는 6일 개최

    경기도 과천 추사박물관은 ‘추사서화파’를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오는 6일부터 12월 2일까지 두달간 열린다. 이번 특별전시회는 추사박물관이 강진군 다산기념관, 남양주시립박물관과 공동 기획했다. 추사서화파란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의 학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친구와 제자에서부터 사숙(私淑)한 후학을 이른다. 이번 전시회는 추사서화파를 집중 조명해 추사의 서화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에는 추사가 30세 전후에 그린 ‘묵란’ 그림에 자하 신위가 화제를 쓴 작품과 추사서첩을 포함한 총 40여점의 전시유물을 선보인다. 추사체로 상징되는 김정희는 조선시대 말 글씨 명인이다. 청나라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학자다.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글씨와 그림의 일치를 주장했으나 글씨나 그림이나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했다. 한편 오는 6일부터 나흘간 추사주간을 기념해 ‘추사향(香) 흐드러지는 과천愛(애)’라는 슬로건 아래 각종 공연, 체험활동 등의 다채로운 행사도 진행된다. 첫날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퀴즈 대회 ‘도전, 추사 골든벨’이 박물관 야외마당에서 열린다. 8일부터 이틀간 추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큐레이터와의 대화’가 진행된다. 동아리 밴드 공연과 버스킹 등의 부대행사도 예정돼 있다. 김동석 과천 추사박물관장은 “이번 추사박물관 특별기획전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中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삼학사비, 복제비마저 잡목에 묻힌다

    中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삼학사비, 복제비마저 잡목에 묻힌다

    우리 민족 최대 치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삼배구고두’(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로 불리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남한산성 항복이다. 이때 침략국 청나라에 항복하거나 청과 화의를 맺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가 처형된 세 신하 오달제·홍익한·윤집이 있었다. 이들의 충절 및 절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삼학사비’가 선양 외곽 한 창고와 풀숲에 방치돼 잊혀 가고 있다. 역사를 망각하면 미래가 없다고 한다. 선양에 방치된 삼학사비를 지난 22일 찾아봤다.●요녕발해대학 설립자 천문갑 학장 숨져 폐교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난 택시는 덜컹거리며 10분여 인적이 끊긴 선양시 허핑구 경진로 재개발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폭 6m 철문이 나타났다. 그 너머로 예쁘장한 5층짜리 건물이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질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조선족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중국 내 유일한 ‘요녕발해대학’ 본관이다. 설립자인 천문갑(조선족 과학자) 학장이 2009년 지병으로 숨지면서 문을 닫았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50대 후반 남성이 본관 안으로 안내했다. 쇠사슬로 잠금장치를 한 낡은 여닫이 쌍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 양쪽 가득 종이 상자가 쌓여 있다. 왼쪽은 매점이다. 상자를 치워 가며 복도 끝 오른쪽 방문 앞에 이르자, 비로소 ‘전시실’이란 푯말이 보였다. ●발견된 비신은 요녕발해대학 전시실에 보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면 가득 사진과 설명문이 붙어 있다. 그 한가운데 비스듬히 깨져 나간 육중한 비석이 붉은 테이블보 위 유리관 안에 누워 있다. 삼학사비다. ‘비두’라 불리는 머리 부분은 중국 문화대혁명기(1966~1976년) 때 훈허강변에 버려진 뒤 발견되지 않고 있고, 몸체 격인 ‘비신’만 발견돼 보관 중이다. 13년 전 사비를 털어 이 전시실을 꾸민 김용규(60) 전 요녕발해대학후원회 비서실장이 전등을 켜고 삼학사비 앞에 서서 한참을 묵념했다. 착잡한 그의 표정에서 삼학사가 느꼈을 망국의 설움이 보이는 듯했다.건물 밖으로 나와 왼쪽 풀숲을 더듬거리며 들어가 보니 거대한 비석이 나타났다. 높이 390㎝, 가로 83㎝, 두께 26㎝의 삼학사비 복제비이다. 2005년 허창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계룡건설 도움으로 2개의 복제비를 만들었다. 1기는 그해 6월 국내로 옮겨져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 세웠으며 다른 1기는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농가의 주춧돌로 사용될 뻔했던 원비(비신)는 앞서 봤던 요녕발해대학 내 전시실 유리관 안에 보관하고 있다. 복제비가 세워진 곳은 13년 전 깔끔했던 공원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카시아 등 잡목과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잡초로 뒤덮여 있다. 정문 경비원이나 학교 관리원이 한 시간이면 정리정돈할 수 있을텐데 안타깝다. 대학 설립자 유가족들이 삼학사와 삼학사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태종은 1636년 조선을 침략해 2개월 만에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철군할 때 약 60만명의 우리 백성을 포로 또는 노예로 끌고 갔다. 당시 조선 인구는 200만명 내외로 추정된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 항복하거나 화친을 반대한 오달제·홍익한·윤집 등 신하 셋(삼학사)도 선양으로 끌려갔다. 신하가 되라며 고문하고 회유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형했다. 청태종은 그러나 삼학사의 굳은 충절과 절개에 감동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비와 사당을 세워 매년 제를 지내 삼학사의 넋을 위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한’은 조선을 의미하고 ‘산두’는 삼학사의 정신이 태산처럼 크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없이 빛난다는 뜻이다. 청태종이 세운 비는 세월이 흘러 청이 멸망하면서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33년 오달제 선생 후손 등에 의해 머리 부분이 발견돼 1935년 10월 항일운동의 한 방법으로 다시 중건됐다. 이후 모택동 집권 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다시 파괴돼 선양을 가로지르는 훈허강에 버려진 것으로 전해진다.●3년치 급여 털어 비신 구입… 재중건 뜻 못이뤄 한동안 잊혔던 비는 1990년 비신 부분이 중국 농민에 의해 발견됐다. 중국인이 밭갈이하다 발견한 바위를 주춧돌로 사용하려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고 문밖에 내놨다. 중국 에서는 글이 새겨진 돌은 집 안에 두지 않는다. 길을 지나던 조선족 교원이 비문을 보고 중국 당국에 보관해 달라고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삼학사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거절됐다. 다행히 당시 랴오닝대학 교수이자, 중국 조선족과학자협회 천문갑 부이사장이 3년치 급여를 들여 구입해 보관해 오다 1992년 요녕발해대학을 설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천 학장은 선양 일대 동포 유지들을 모아 삼학사비 재중건 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변 도움으로 복제비 2개만 만드는 데 그쳤다. 김 전 비서실장은 “순국열사들의 행적을 찾고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책무”라며 안타까워했다. 글 사진 선양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1

    “고종 빼돌려 을사늑약 체결 막아라” 11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작가가 실제로 조선에 와서 베델 등을 취재해 쓴 이 소설에는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최근에야 알려진 극비 내용도 담겨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11회>   나는 어둠을 뚫고 상하이에 도착했을 전보 메시지를 떠올렸다. 소녀가 보낸 3개의 단어(“초상화 성공. 만세!”)가 저쪽에 전달됐을 것이고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직접 보고 싶어졌다. 상하이에 있는 러시아 외교의 달인(러시아 극동총독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로 추정)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이 낡은 나라(청나라)에 몰래 묻어둔 보트를 출발시키라는 요청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옌타이의 어느 항구로 또 한 번 전보를 보내 발해만에 정박해 있던 배에게 돛을 올려 빠르고 비밀스럽게 서울로 가 조선의 황제를 데려오라고 명령할 것이다. ‘국제정치’라는 이 민첩하고 정교한 기계를 제대로 움직이고자 ‘외교’라는 이름의 엔진 속의 톱니 바퀴와 피스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 차가운 밤하늘 속 별빛을 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나의 머리는 저 멀리 30㎞쯤 떨어진 어둠의 도시(서울)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빛나는 금발 머리와 보랏빛 눈을 가진 한 여성이 약탈자(일제)의 계략에 맞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다음날 나는 제물포에서 첫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돌아왔다. 세관 문제에 대해 일본 탁지부 고문(메가다 다네타로)과 회의를 하려고 궁으로 갔다. 연로한 조선 황제(고종)의 고문관인 메가타 역시 국제정치라는 기계를 돌리고자 톱니의 나사를 조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었다. 회의 시작을 기다리며 나는 내가 조선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복궁 뜰을 걸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근정전과 법궁을 보며 이 궁의 모습이 지금의 조선 왕조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이 왕궁이 어떤 이유로 이 찬란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됐을까를 곰곰 생각해봤다.그 때였다. 시베리아 전나무 그늘에 놓인 왕실 도서관(집옥재) 발코니에 앉아 있었는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였다. 그리고 명쾌하고 리듬과 운율이 잘 맞아들어가는 그녀의 말솜씨에 곁들여 무겁고 둔탁한 악센트를 구사하는 남성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였다. 그들은 내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던 도서관 발코니 바로 아래 멈춰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졸지에 남의 말을 엿듣는 사람이 돼 버렸다. “아니요. 하기와라님” 소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렇게 세심한 관심을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당신이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다 들었으니까요.” ”잠깐만요. 마담“ 하기와라가 성급히 소녀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이상하고 음흉한 음색이 느껴졌다. ”잠깐만요...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통...모르겠습니다.“ ”아...네...그러시겠죠.“ 소녀가 일부러 상심한 척 그를 애태우려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떤 여자라도 당신이 자신을 매력적으로 느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죠. 여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가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여자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죠.” 소녀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기운이 있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있는 하기와라의 심장 박동수를 높이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하기와라님, 당신도 늘 내 뒤를 따라 다녔고 단 한가지 이유로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잖아요...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이 사실을 부정하실 수 없으실 거에요.”“그게...그 이유는...그 이유는 당신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나는...나는 당신을...” 하기와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그만하세요!” 짧은 말 속에 어떤 명령과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소녀의 눈에서 불꽃이 번득였다. “하기와라씨, 당신은 내가 스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바른대로 말씀하세요!” 이 일본인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당황해서인지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울먹이고 있었다. “절대로...절대로...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어떻게 그런 일이...말도 안됩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12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금요칼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금요칼럼] 실사구시의 정신으로/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지의 일에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기원전 2세기 전한(前漢) 하간헌왕 때 일이었다. 그 정신에 가장 충실한 것은 훈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유교 경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글자 하나하나의 음과 뜻을 정확히 연구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경전 해석이 형이상학에 치우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했다.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실사(實事)가 잊혔다. 그 의미를 재발견한 것은 11세기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이었다. 주희는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주장할 정도였다. 그랬건만은 성리학이 주류 학문이 되자 학자들은 또 형이상학에 매몰됐다. 다시 수백 년이 지난 청나라 때 일군의 신지식인들이 등장했다. 고증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과 괴리된 성리학을 비판하고, 재차 실사구시를 학문적 목표로 제시했다. 한국에서도 실사구시의 진가에 주목한 선비들이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그런 흐름을 대표하는 대학자요, 독창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17세기 이후 축적된 실학파의 전통을 이었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으로 이어진 실학을 완성했다. 김정희는 ‘실사구시설’이라는 논문을 지어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의 새 길을 천명했다(완당전집, 제1권). 논문에서 그는 성리학자들을 비판의 도마에 올렸다. 그들은 현실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었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으나, 그들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만 일삼아 일상의 사소한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다. 성리학자들은 허황된 이론을 이리저리 끌어다 자신들의 무능을 위장했다. 진리란 초월적이고, 오묘하며, 높디높아,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이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통치 이념은 공리공담이 되고 말았다. 지배층의 지적 환상과 정치사회적 무능을 김정희는 짧고 강한 몇 마디로 질타했다. “마땅히 사실에 의거해 올바른 진리를 찾아야 한다. 헛된 말을 지어내어 거짓 속에 몸을 숨기지 마라.” 학문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실’ 곧 공자와 맹자 같은 유교의 성인이 이룩한 진리의 전당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김정희는 그렇게 보았다. 따라서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는 거창한 담론은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는 것. 김정희의 확고한 신념은 그러했다. 진리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형이하학의 세계에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하루하루 실천되는 덕목인 것이다. 김정희를 포함한 조선의 실학자들, 그리고 청나라의 고증학자들은 모두 그런 생각이었다. 따지고 보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이기심을 버리고 공익을 중시하자고 했다.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평화적인 방법이 우선이랬다. 한마디로 모두 착하게 살자고 했다. 그런데 이른바 대학자라는 사람들이 일을 망쳤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빙자하며 복잡하게 꾸며 댔다. 태극은 무엇이며 태허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김정희의 해법은 간단했다. 지식인은 잡다한 여러 학설에 현혹될 이유가 없다. 그저 마음을 평안히 하여 널리 배우고 착실히 실천하면 된다. 만약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주장도 공허한 것이다. 옳은 말이다. 김정희의 깨침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해결책은 뜻밖에도 매우 간단명료할 수 있다. 색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사물을 볼 수만 있으면 말이다.
  • 동물 이어 나무까지…중국이 좋아해서 씨가 마르는 ‘자단나무’

    동물 이어 나무까지…중국이 좋아해서 씨가 마르는 ‘자단나무’

    중국이 좋아하면 씨가 마른다는 말이 있다. 산해진미부터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것들 탓에 희생되는 동물 상당수가 멸종위기에 놓여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범위가 나무에까지 다다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18일 보도에 다르면 최근 중국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것이 바로 자단나무로 만든 가구다. 자단나무는 중국을 비롯해 대만과 인도 남부, 중남미 등 아열대에 분포하는 상록나무로, 40m까지 성장하며 붉은색의 매우 단단한 목질을 가지고 있다. 단단함 때문에 가공이 어려운 편이지만, 나뭇결의 아름다움 때문에 가구나 악기 제작 시에 가치가 매우 높은 목재로 평가된다. 재단할 때 나는 장미향 때문에 ‘로즈우드’(rose wood)라 불리기도 한다. SCMP에 따르면 최근 중국 부유층 사이에서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가구 제작용으로 사용됐던 자단나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문제는 수요가 지나치게 급증하다 보니, 자단나무가 몇몇 동물처럼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자단나무의 수명이 수 백 년에 달하며 1㎝ 성장하는데 몇 년이 걸리는 만큼 매우 천천히 자라는 나무인데, 가구 제조사들이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다 자라지 않은 나무를 잘라 내거나 아예 불법으로 나무를 베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중국의 일부 목재업자들은 중국 내 자단나무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자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 눈을 돌렸다. 중국 외 기타 국가들에 서식하는 자단나무도 위험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비정부기구(NGO)인 환경조사국(EIA)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거래되는 자단나무 목재의 40~50%는 서아프리카에서 수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 4월 AP통신에 따르면 고급 가구용 수요가 엄청난 중국이 사들인 자단나무가 2005년부터 2014년 사이 2000% 증가했다. 자연 보호 관계자들은 AP에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밀반입이라고 비판했다. 이미 인도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자단나무 종을 보호수종으로 지정하고 UN도 자단나무의 멸종을 막기 위해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중국에는 불법 벌목을 중단할 적합한 법적 규제 장치가 없다고 환경보호단체들은 주장했다. 사진=123rf.com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베이징에서 멈춰 선 강명구 마라토너가 쓴 ‘을밀대의 결의’

    베이징에서 멈춰 선 강명구 마라토너가 쓴 ‘을밀대의 결의’

    그는 1년을 힘들게 달려온 힘겨움을 내려놓고 중국 베이징에서 숨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평화통일 기원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을 이어가고 있는 강명구(62)씨가 8일 베이징에 도착해 10일 오전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15편-을밀대의 결의’를 보내왔다. 15개국 1만 3000㎞를 쉼없이 달려온 그는 다음달 초 북한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단둥에 도착해 북한 땅에 들어서는 벅찬 감격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남과 북이 공식적으로 그의 통과를 허용하겠다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지만 그는 평양에서 한바탕 축제를 벌인 다음 판문점을 통과해 경기 파주에서 광화문까지 달리는 완주를 꿈꾸고 있다. 아니 확신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 1만 3000㎞를 거침 없이 달려온 그가 허베이성에 들어선 뒤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원고를 인용부호 붙여 따지 않고 전문 그대로 맛보게 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라 여겨 옮긴다. 명백한 오류나 동어 반복을 손질하는 등 최소한 적게 개입하며 필자의 뜻을 온전히 전달하고자 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어쩌면 오래달리기가 이 병들어가는 나약한 사회를 바꿀 최선의 해결책인지도 모른다.?사람들은 허겁지겁 바쁘게 사는 것 같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고 건강 불안증에 빠져 의료비나 건강보충제, 비타민제에 들어가는 비용은 가히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갈 지경이다. 사람들이 모두 오래달리기와 손을 잡으면 더 활기차고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고 그러면 국가는 메말라가는 국민건강보험 기금이 남아 돌기 시작하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만약 국가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할 때마다 완주 메달과 함께 장려금 100만원씩 지불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고 가장 행복지수가 높으며 생산성이 향상되고 창의력이 높아지며 단숨에 일등 국가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게임기 앞에서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도 오래 달리기와 손을 잡는 순간 활력이 넘치는 일상과 신선한 미래를 보장받을 것이다. 달릴 때 자존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상승한다. 사람이 사는 게 그렇듯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할 때이다. 주위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것은 내가 돈이나 명예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남다른 정신이 존재하고 놀라운 기질이 있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꾸준히 노력하는 중에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발생할 때가 아주 많다. 나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태항산맥을 넘어 허베이성(河北省)으로 들어선다. 황허(河)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붙여졌다. 베이징과 톈진을 품고 있는 허베이성은 중국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두루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성도인 스자좡(石家莊)을 비롯하여 바오딩(保定),청더(承德) 등 유서 깊은 도시들이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협곡 중 하나인 태항산대협곡과 만리장성의 동쪽 끝 요새인 산해관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와 조나라 땅이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의 본거지이며,?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는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고 이때부터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때문에 중국에서도 역사 유적이 많기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청더 피서 별장, 장성, 청동능과 청서능도 모두 이곳에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허베이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周) 왕실에 타협하지 않은 채 의리와 명분, 절개를 지키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따먹으며 연명하다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허베이성의 약칭은 지(冀)로 기주에서 유래했다. 낯이 익을 것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사람이 각자 28세, 29세, 24세에 맺은 영원한 약속, 도원결의가 아닐까 한다. 사내아이들이라면 술 배울 나이에 친구들끼리 술 한 잔 마시며 이 도원의 결의를 흉내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지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오딩 시가 있다.?이곳이 유비와 장비의 고향 탁현이고 이곳에서 도원결의를 맺는다. 허베이는 조자룡의 고향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이 천하를 어지럽힐 때 유비와 관우, 장비가 허름한 주막에서 만나 무너져가는 황실의 부흥을 위해 의기가 투합했고 천하의 대사를 논의했다. 이보다 더 멋지고 낭만적이면서도 결의에 찬 도원결의를 이번 가을 남북정상회담에서 꿈꾼다. 남북정상이 다시 손을 맞잡고 이름도 대박인 평양시 대박산 능선에 올라 우리 민족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단군릉에 참배하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을밀대로 가 우리 민족의 평화는 우리끼리 지키자는 결연한 ‘을밀대의 결의’를 맺고 자주적으로 우리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명장면이 연출되기를 바란다.
  • 가을 달빛 머금은 고궁의 속살

    가을 달빛 머금은 고궁의 속살

    산책의 계절이 돌아왔다. 서울 도심에서 여유를 즐기며 사색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고궁은 어떨까. 따사로운 햇빛 혹은 은은한 달빛 아래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제격이다. 가을까지만 한시적으로 개방하는 궁궐 내 특별한 장소를 엿보는 즐거움도 누려 보자.조선시대 대부분의 관청은 궁 밖에 있었지만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하던 관원들의 업무 공간은 특별히 궁궐 안에 세워졌다. ‘궁궐 안 관아’라는 뜻의 창덕궁 궐내각사가 바로 그곳이다. 홍문관, 약방, 규장각 등 조선시대 각 관청의 역할과 기능,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전문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궐내각사를 둘러보는 특별관람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 궐내각사는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훼손됐다. 이번 프로그램은 2004년 복원된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 권역이 대상이다. 오는 10월 말까지 당일 현장에서 1회당 20명을 선착순으로 접수한다. 창덕궁의 정전(正殿)이자 국보 제225호인 인정전의 내부를 관람할 수도 있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높은 천장을 받들고 있는 중층 목조 구조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 중앙에 두 마리의 봉황 목조각을 달아 으뜸 공간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살렸다. 해설사의 인솔 아래 그동안 밖에서만 볼 수 있었던 내부 시설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10월까지 매주 목~토요일 1일 4회 운영한다. 조선 후기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창덕궁 희정당은 오는 11월부터 두 달간 개방할 예정이다.경복궁의 백미로 꼽히는 경회루의 건축 미학을 가까이에서 느껴 보는 것도 좋겠다. 연못 안에 조성된 2층 목조건물인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행사에 사용하던 건물이다. 10월까지 특별관람 형식으로 일반에 개방된다. 1회당 최대 관람 인원은 70명으로 제한된다. 2016년 ‘궁궐 속 작은 도서관’으로 일반에 개방한 집옥재는 오는 10월 31일까지 개방한다. 고종의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청나라풍이 가미돼 경복궁 건물 중에서도 이국적인 건물로 꼽힌다. ‘궁궐의 부엌’인 소주방 중 다과를 만들던 생물방에서는 약차 및 병과 시식을 유료로 체험할 수 있는 행사가 진행된다. 오는 11월 30일까지 오전 10시~오후 5시에 운영된다. 선선한 가을밤 고궁에서 특별한 추억을 쌓고 싶다면 경복궁과 창경궁 야간 특별관람을 권한다. 오는 16~29일, 10월 21일~11월 3일 오후 7시부터 9시 30분까지 이용할 수 있다. 경복궁 수정전에서는 오후 8시에 전통 가락을 담은 국악 실내악 공연이 진행된다. 9월 야간 관람 예매는 오는 7일 오후 2시, 10월 야간 관람 예매는 오는 10월 12일 오후 2시부터 옥션티켓(ticket.auction.co.kr)과 인터파크티켓(ticket.interpark.com)에서 할 수 있다. 두 궁의 야간 특별관람 예매를 하지 못했다면 상시 야간 관람이 가능한 덕수궁을 이용하면 된다. 오후 8시까지 입장해서 오후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황제 납치 프로젝트5] 고종 만나러 덕수궁에 들어간 소녀

    [황제 납치 프로젝트5] 고종 만나러 덕수궁에 들어간 소녀

    서울신문은 일제 침략 당시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소재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이고,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 소설에는 베델뿐 아니라 ‘고종의 밀사’로 잘 알려진 호머 허버트(1863~1949), 노골적 친일 행보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슨(1851-1908),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충신 민영환(1861~1905) 등 역사적 인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최근에야 국내외에 알려진 고종의 연해주 망명 시도 등 극비 내용도 담겨 있어 학계에 관심을 모읍니다. 서울신문은 이 소설 가운데 하나인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12월 출간, 원제 : The cat and the king, 부제 : Billy and Bethell)를 번역해 연재 형태로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5회>소녀는 서울에 온 지 이틀만에 황제가 있는 덕수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티븐슨(더럼 화이트 스티븐슨)이 그녀가 왕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덕분이었다. 사실 스티븐슨 입장에서는 그녀의 미인계에 넘어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정부를 감시하러 온 일본 고문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다. 매우 영민했고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국제정세의 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도쿄의 내각은 오랫동안 진흙탕 속에 빠진 서울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열강의 외교놀음을 파악하고자 그에게 거액을 쏟아부었다. 만약 소녀에게 워싱턴 거물이 보내온 서신이 없었다면 스티븐슨은 그녀의 미모 말고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소녀가 가져 온 소개장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워싱턴과 연이 닿은 것에 흥분해 소녀의 입궁을 도왔다. 소녀는 10월의 어느 맑은 날 아침 왕을 알현하려 궁에 도착했다. 내가 어떻게 소녀를 따라 궁에 들어갔냐고? 원래 난 조선의 황제와 신하들을 만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대한제국 세관을 맡은 ‘골든엄브렐라’(소설 속 가상의 대한제국 세관 관리조직)의 책임자였으니까. 그때 나에게는 “열려라 참깨”와 같은 마법으로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편집자주: 실제 이 시기 대한제국은 회계 업무가 가능한 세관원 출신 외국인을 대거 스카우트해 업무를 맡겼습니다. 1883년 우리나라 첫 공식 세관인 인천해관은 조선인이 아닌 10여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청나라 해관을 모델로 해외 경력자들이 조선으로 들어왔고 조선인도 영어시험을 거쳐 채용됐습니다. 당시 세관은 기상관측과 검역, 항만·등대 관리, 도로 측량, 우편사업 등 정부 업무를 대거 수행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궁에서 우리를 데리러 관용 마차가 왔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소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해 본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임이에요.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해요. 엄청난 모험을 할 수 있게 돼서죠.”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며칠 전에 한 일본인이 당신 가방을 뒤지려고 호텔로 숨어들었잖아요. 그 사람은 서울의 있는 일제의 거대한 스파이 조직의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해요. 그들이 작심하고 덤빈다면...“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바보들...일본인들은 정말 서툴러요. 이 작은 갈색피부 친구들은 솜씨가 그닥 뛰어나지 않더라고요. 프랑스나 러시아의 예의 바른 비밀 요원들은 사람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죠. 트렁크를 뒤지고도 보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아요. 하지만 이들은 어떤가요? 어설프게 강도를 보냈다가 결국 지난번 사달이 났어요.” 소녀는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서울의 황폐하고 구불구불한 거리를 지나 마침내 궁에 다다랐다. 세미라미스(아시리아의 전설상 여왕으로 고대도시 바빌론의 창건자로 전해짐) 공중정원을 연상시키는 청동 장식물(덕수궁 석조전 앞 분수로 추정)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를 상하이로 훔쳐갈 임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과 목소리, 대담무쌍한 배짱에 매혹됐다. 지금 하려는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녀의 유혹에 말려 들어갔다. 나는 그녀에게 반쯤 넋을 빼앗겼다. 그녀의 미인계에 나도 빠졌다. 파리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시험하려 칼을 빼든 삼총사의 달타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대신들이 자리한 법궁에서 우리는 하기와라(훗날 2대 조선총독이 되는 하기와라 슈이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작고 왜소했지만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는 전지전능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는 고종의 궁에서 가장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황제보다 더욱 환하게 웃곤 했다. 마치 이 궁의 진짜 주인은 조선 황제가 아니라 하기와라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내뿜으면 왕을 비롯한 궁궐의 모든 이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가 명령만 내려면 이들은 언제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했다. 황제(고종)는 조상신보다 하기와라의 날카로운 이빨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더 무서워했다.우리는 왕을 만나기 전 겸열자인 하기와라에게 먼저 인사하려고 대기실로 갔다. 고양이가 넘나들 것 같은 문턱이 있는 이곳은 보라색과 파란색이 고풍스럽게 대조를 이뤄 무척 아름다웠다. 나는 하기와라에게 소녀를 소개했다. 소녀가 유혹에 가득 찬 눈길로 그에게 끼를 부렸다. ”오, 하기와라씨! 상하이 영사관에 있는 당신의 친구 미토노가 ‘서울에 가면 당신을 꼭 만나라’고 여러번 말했어요.“ 소녀의 벨벳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는 고양이의 털처럼 나른했다. “그는 당신이 덕수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고 알려줬어요. 결코 여성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는 엄격한 분이시라는 것도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면 아주 특별한 여자가 돼야 한다고도...” “아, 그렇습니까?” 하기와라는 너무도 큰 기쁨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게 왠 횡재냐’는 반응이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험하고 무서운 궁궐에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약한 초상화가인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으실거죠?” “그럼요. 물론입죠” 하기와라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얼굴이 금세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소녀는 이자도 어렵지 않게 미인계로 낚을 수 있었다. 6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열심히 독립운동했던 유일한 왕손… 아버지 의친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색다른 인터뷰] 열심히 독립운동했던 유일한 왕손… 아버지 의친왕은 재평가돼야 한다

    “어머니인 의친왕비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의 마지막은 늘 비극으로 끝났다. 대한제국 왕실의 비운은 당연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신 게 아흔이 다 돼서야 받아들여져요. 아버지 의친왕의 잘잘못을 역사가 정확하게 평가했으면 합니다. 그게 제 마지막 바람이에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녀’ 이해경(88) 여사는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이 같은 소회를 밝혔다. 이 여사는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조선왕조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떤 연유에서 이 같은 생각을 떠올릴까 궁금했다. 이 여사는 고종 황제의 친손녀다. 아버지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순종 다음 서열이었으나 일제의 견제 등으로 동생인 영친왕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겼다. 동생인 영친왕이 철저하게 일본식 교육을 받은 것과 달리 의친왕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독립운동가와의 접촉이 잦았으며,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기도했다가 만주에서 일제에 발각돼 송환되기도 했다. 의친왕은 일제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하며 항일정신을 사수한 왕족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8·15 독립 이후 이승만 정부가 망국(亡國)의 책임을 물으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었다.이 여사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미래를 바로 세우려 했던 고종 황제나 의친왕과 비슷한 고민을 문재인 대통령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면서 “생각한 대로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결과’는 ‘운명’이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친왕의 13남 9녀 중 다섯째 딸이다. 세 살 때 생모와의 이별,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사동궁(의친왕부·義親王府) 생활, 그리고 8·15 광복, 이어진 6·25 전쟁, 1956년 가혹한 현실을 피하고자 선택했던 도미(渡美) 등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 여정을 보냈다. 특히 그는 순탄치 않은 노년을 보낸 아버지 의친왕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듯했다. 이 여사는 “아버지가 매일 술에 빠져서 살았다는 일제에 의한 역사적 오류가 아직도 그대로”라면서 “항일정신이 강했던 아버지는 일제의 핍박과 삼엄한 감시가 본격화되면서 매일 술집에 다니는 척해야 했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의친왕이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이토 히로부미가 대통(大統) 계승을 권유했지만 한마디로 거절했고, 1919년 중국 상해(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유일한 ‘왕손’”이라면서 “의친왕의 열정과 행동은 반드시 재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을 떠난 지 62년, 26살의 꿈도 많고 한도 많았던 앳된 여인에서 이제 미수(米壽)를 넘긴 ‘호호 할머니’로 변한 조선의 마지막 왕녀인 그와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일제 치하에서 의친왕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사동궁을 찾았다. 그때마다 노래와 춤으로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린 기억이 있다. 특히 길러주신 의친왕비(이하 지밀 어머니)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궁 밖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대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말을 옮길 수 있어서 조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역사 문헌 등을 보면 퍼즐처럼 맞춰지는 일들이 있다. 어렸을 때 갑자기 일본 경찰들이 집 주변에 늘었다든지, 해방 직후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사동궁을 찾았던 일 등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의친왕의 독립운동 행적은 어떻게 아는가. -미 컬럼비아대학 한국학과 사서로 27년간 일하면서 많은 한국 역사책과 자료를 접했다. 거기서 아버지의 흔적을 많이 찾았다. 또 유학 오신 한국 학자들이 나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와 자료가 있는 미 도서관 등을 알려줬다. 미국에서 한국의 근대사를 공부했다. →여자로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있었을 텐데. -맞다. 어렸을 때는 상당히 컸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역사 자료 등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심정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 어쩌면 미국 생활이 아버지와 나를 연결해 준 것 같다.→누구나 인생에 굴곡이 있겠지만 특히 더 했던 것 같다. -한때는 드라마처럼 ‘궁’에서 호강하며 살았다. 어렸을 때 시녀들이 ‘공주마마’라고 부르며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줬다. 하지만 8·15 독립 이후에 ‘왕족’이 ‘망국의 원흉’으로 인식되면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친북 인사로 몰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 온 지 62년이 지났다. 한국을 몇 번 찾지 않았다고 알려졌는데. -맞다. 사실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당시 왕족이라는 굴레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사회에 대한 반감 등 때문에 한국에서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왔다. 정말 안 가려다 생모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9년 만인 1975년 한국을 다시 찾았다. →1950년 중반에 미국 유학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왕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닌가. -당시 망국(亡國)의 책임을 물어 왕족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지밀 어머니 등 가족들이 먹을 쌀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지밀 어머니가 나의 혼수품으로 주신 비단을 팔아서 연명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8군의 도서관에서 일할 때 친하게 지냈던 데이비드 스트릿맨이라는 군인의 아버지가 도와줘서 미 유학이 가능했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 -비행기 값을 마련하고자 지밀 어머니가 사 주신 야마하 피아노를 팔았다. 비행기 표를 사고 남은 돈 80달러를 가지고 무작정 미국으로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했던 것 같다. 다행히 텍사스의 메리 하딘 베일러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모두가 반대했던 미국행이라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한국과 연락도 끊었다. 사실 도움을 요청할 곳도, 도와줄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과 방학에는 식당과 백화점, 보육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먹고살기 어려웠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아무도 내가 조선의 왕녀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어도 누가 쳐다보지 않았다. →의친왕비가 자신의 호적에 이 여사만 올리는 등 총애를 받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생모, 낳아 주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3살 때 헤어진 생모를 10년 후인 13살 때 화신상회(현 종로 제일은행 본점 자리)에서 만났다. 그 이후로 또 거의 본 적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잠시 같이 지냈다. 생모는 박금덕 여사다. 그는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올 정도로 정·재계의 마당발로 소문난 여성이었다. 의친왕이 한눈에 반할 정도의 미모에 당찼던 것 같다. 내가 궁 생활을 힘들어 했던 것이 자유분방하고 당찬 생모의 성격을 닮아서인 듯하다. →일부에서 ‘공주’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건 분명히 잘못이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고종 임금님이 황제가 되고, 왕자인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이 의친왕, 영친왕 등으로 봉작됐다. 그러니까 나는 왕자의 딸이지, 왕의 딸이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마지막 공주’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내 밑으로 여동생들은 궁 생활을 하지 않았고, 위로 언니들은 돌아가셨다. 그래서 ‘마지막 왕녀’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인연을 못 만나서 그런 것 같다. 물론 결혼할까 고민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다 기회를 놓쳤다. 복잡했던 우리 가정사를 보면서 행복한 가정을 꿈꿨는데, 막상 선택의 순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내가 힘이 미약하고 나서는 것을 싫어해 숨어 있었지만, 일제에 의해 왜곡·날조된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 일에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나도 미력이나마 돕고 싶다. 글 사진 뉴욕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이해경 여사는 누구 -1930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다섯 번째 딸로 출생. -1933년 생모인 박순덕씨 곁을 떠나 ‘궁’으로 거처 옮김. -1946년 경기여고 졸업 -1950년 이화여대 음악과 졸업 -1953년 미8군 사령부 도서관 사서 근무 -1956년 미국으로 유학 -1959년 미국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대 졸업(성악 전공) -1969년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 사서 취직 -1996년 컬럼비아대 동양학도서관 한국학과장 정년퇴직 -현재 뉴욕의 컬럼비아대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음.
  • [금요칼럼] 가짜뉴스와 정치 선동/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가짜뉴스와 정치 선동/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국가 권력과 직결되는 의도적 거짓 정보부터 특정인을 겨냥한 악의적 험담에 이르기까지, 가짜뉴스(교묘한 왜곡 보도)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전광석화처럼 퍼지며 범람한다. 악의도 없고 특별한 피해도 야기하지 않는 가짜뉴스라면 만우절의 장난 정도로 봐 준다지만, 작금의 가짜뉴스는 건전한 사회적 신뢰를 파괴하고 서로 증오하게 하는 암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그렇다고 가짜뉴스가 인터넷 시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비일비재하다. 특히 국가 권력 관련 가짜뉴스는 대개 정치 선동과 불가분의 짝을 이루어 작용하곤 했다. 64년 네로황제는 로마 대화재로 민심이 흉흉하자, 기독교인의 방화 때문이라는 가짜뉴스를 유포시켜 위기를 돌파했다.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도 혐오심리를 이용한 가짜뉴스의 유포가 결정적 계기였다. 권력 유지를 위한 가짜뉴스의 정치 선동은 조선 시대에도 빈번했다. 한 예로,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들 수 있다. ‘북벌운동’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으로, 병자호란 때(1637년) 삼전도에서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하자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이런 내용 자체가 가짜뉴스였다. 당시 조선의 피폐한 국력을 고려할 때, 조선의 청나라 공격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은 이는 국왕부터 삼척동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국왕과 지배 양반층은 “원수를 갚자”는 정치 선동을 통해 민심을 규합하고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철저히 대내용 정치 선전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허약한 국력으로 볼 때, 이승만 정권이 휴전 후에조차 계속 외친 북진통일론도 그 의도는 북벌론과 매한가지였다. 1680년대에 청나라의 천하제패가 확실해지면서 국내용 북벌론조차 시의성을 상실하자, 그 바통을 이어 18세기를 풍미한 새 가짜뉴스는 ‘영고탑회귀설’(寧古塔回歸說)이었다. 청나라가 지금은 비록 강성해 보이지만 오랑캐의 나라가 100년을 넘기기는 어려우니, 저들이 중원에서 패배하면 자기들 본거지인 만주의 영고탑(닝구타)으로 쫓겨서 돌아올 텐데, 그 도중에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를 경유하면서 우리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북변 방어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회귀설이다. 얼핏 들으면 꽤 그럴 듯하지만, 이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의도적으로 호도했을 뿐 아니라, 청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주관적 희망 사항 내지는 종교 수준의 맹신에 기초한 공포심 조장에 다름 아니었다. 주로 서인과 노론 세력이 이런 설(썰)을 유포시켰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북변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권력의 장기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반공, 멸공, 적화통일, 남침, 주적 등의 구호가 20세기 후반 냉전시대에는 국민 사이에 잘 먹혔다. 오히려 당시로서는 가짜뉴스가 아니라 절실한 현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21세기 지금도 여의도에서 저런 구호를 대놓고 외친다면, 그것은 차라리 현대판 ‘영고탑회귀설’이라 할 수 있다. 모처럼 다시 맞은 남북화해 평화구축 분위기를 비난하면서, 여전히 북한을 겨냥한 안보 불안을 극구 강조하는 가짜뉴스의 횡행은 조선 후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언론을 보아도, 국민의 불안 심리를 극대화하려는 가짜뉴스가 창일한다. 다양한 경제 지표의 자의적 침소봉대, 국민연금 관련 의도적 불안감 조장, 해외 원전 수주 관련 고의적 왜곡 보도, 전기요금 관련 악의적 헤드라인 등은 모두 객관적 사실과 합리적 해석을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기본을 스스로 저버린 행위다. 사실을 합리적으로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민답게’ 늘 깨어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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