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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남북정상회담에 바란다

    며칠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원들이 공연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면서 아쉬운 포옹과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며 50여년 깊은 남북분단의 상처가 세대를 초월한 우리 민족의 아픔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통일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기대 속에 역사적인 6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분단사상 최초로 개최되는 이번정상회담은 남북 정상의 만남 자체로도 큰 성공이며 진전이고,남북한 당사자가 자주적 합의로 한반도 문제해결의 주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는 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또한 이로써 남북한 관계 개선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고 한반도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위한 변화의 물결로 이어지는 동북아 평화정착의 실마리를 마련한 데 그 의의가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측은 정권유지에 유리한 실리적인 성과를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첫째,남북 정상간의 직접적인 대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 최고지도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정치적 위상과리더십을 공고히 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둘째,북한이 남북관계 정상화에 협조함으로써 미국·일본을 비롯한 우리 우방들과 쉽게 수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북한 외교의 폭을 넓히고 국제적 지위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다.셋째,양측의 경제협력을 통해 상호무역 및 경제합작의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북한이 당면한 경제난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4강의이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정책공조를 토대로 반세기 동안 쌓여온 한반도분쟁의 문제들을 신중하게 접근,논의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에 의하면 정상회담 의제는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과 민족의 화해와 단합,교류와 협력,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로 되어 있다.이처럼 광범위하고포괄적인 의제를 비롯해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경제협력 및 대북지원,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문제 등 현안에 있어서 남북한은 서로 다른 견해와 해석의 차이를 보일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안에 대해 기본원칙과 정책적 일관성을 지키며 회담을 추진해야 한다. 첫째,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 북측으로부터 실천성 있는 합의를 최소한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남북정상회담으로 이산가족 교류가 민간 차원을 넘어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사안 해결의 시급성을 고려하여 이를 효과적으로 제도화,활성화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둘째,이번 회담이 일회적인 행사에 그치지 않도록 분야별·수준별 실무회담을 정례화하여구체적인 성과를 이어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셋째,남북기본합의서이행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통로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통일문화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오랜 세월 단절되어온 남북간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며 폐쇄적인 북한을 현실적·점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를기대한다.남북관계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는 뜻깊은 남북정상회담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21세기 통일한국의 실현와 한민족공동체의 화합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기회임을 강조하고 싶다.또한 확고한 의지는 있되 강한 힘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협상의 기술이 정상회담의 역사적 평가를 좌우할 것이다.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모색을 위한 남북정상회담에서남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함께 세계와 미래를 바라보며 새 천년 평화공존의 시대를 창조하는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李慶淑 숙명여대 총장
  • 남북정상회담 D-24/ 실무절차 합의서 내용·의미

    남북한은 실무절차 합의서 타결로 정상회담 개최 절차의 큰 틀을 마무리지었다.합의서에는 정상회담의 의제부터 대표단 구성,왕래절차 등 행사진행을위한 기본적인 내용을 명문화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간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준비는 이로써 또 한 관문을 넘어서게 됐다.분단 55년만의 첫 정상회담의 진행일정이 가시화됐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남측은 31일 판문점을 통해 평양 현지에 선발대를 보내 현장을 점검하고 의전·경호,통신·보도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상황에 들어가게 된다. 남북간의 위성 통신망의 구성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항공로 이용도 94년 정상회담 추진때의 절차합의서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도다.남북한은 다음달 2일북측이 보내온 체류일정을 접수하면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일정과 회담 준비사항을 조정해 나간다. ■의제/ 지난 4월8일 정상회담 합의서 내용을 기초로 한반도 현안에 대한 포괄적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 정신 등이 명기됐다.민족의 화해·단합,교류·협력,평화·통일을 위해협의한다는 포괄적인 표현에도 의견을 모았다.두 정상은 냉전해체·평화정착등 한반도 현안 전반에 대해 제한없는 논의를 할 수 있게 됐다. ■주요 일정/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두차례 이상의 상봉 및회담을 명문화해 일부의 의혹을 해소했다.일각에서는 북측이 김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간에는 ‘상봉’만 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회담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보도 문제/ 5차 접촉에서도 논란끝에 기자단 수는 92년 고위급회담 수준인50명 수준으로 합의했다.생중계를 위한 구체적인 문제는 실무진들의 방북을통해 협의해 나간다.SNG반입여부도 평양의 실무단 협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정부 당국자들은 “정상회담 관련 주요행사를 우리인원과 장비로 직접 촬영·제작한뒤 북측의 협조로 위성을 통해 서울에 전송하는 것은 남북방송협력차원에서도 신기원을 여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평가/ 정부의 한 당국자는 “실무합의서 타결은 한반도문제의 당사자해결원칙을 확인하고 냉전종식·평화정착의 출발점”이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또 앞으로 정상회담은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상호이해와 신뢰의 폭을 넓히는계기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석우기자 swlee@
  • 南北정상회담 실무협의 타결

    남북한은 18일 6월 평양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절차합의서를 최종 타결지었다. 양측은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 5차 준비접촉을 갖고마지막까지 이견을 보이던 우리측 취재기자수를 50명으로 한다는 데 의견을모은 뒤 15개항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고 두 지도자간의 회담임을 명확히 했다.또 “상봉과 회담은 최소한 2∼3회 하며 필요에 따라 더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합의서는 수행원 130명,취재기자 50명 등 대표단을 180명으로 하고 2박3일동안의 체류일정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또 왕래는 항공로 및 육로로 하고항공로를 이용할 경우 남측 비행기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명기했다. 의제는 “7·4남북공동성명에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민족의 화해·단합,교류와 협력,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합의서 타결에 따라 의전·경호,통신·보도 등 세부절차 협의를위해 남측실무전문가로 구성된 선발대 30명이 오는 31일쯤 방북,현장을 점검하고 구체적인 논의를 벌인다. TV 생방송도 원칙적으로 합의했다.합의서에 “북측은 남측에 실황중계가 가능하도록 필요 설비와 인원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며 TV영상 송출을 위한 전송로 및 위성중계를 위한 편의를 제공한다”고 명기했다.양측은 또 김 대통령의 방북기간중 이미 가설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회선과 함께 예비통신으로 위성통신망을 이용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분단사상 최초로 남북간 위성통신망이 구성돼 운용되고 우리측 인원과 장비로 직접 주요 행사를 촬영·제작해 실황중계하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남측 수석대표인 양영식(梁榮植) 통일부 차관은 합의서 타결직후 종결발언문에서 “55년 만의 두 정상의 첫 만남은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간 화해·협력의 길을 열어나가는 데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령성 북측 수석대표도 쌍방은 합의서를 성실히 이행,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판문점공동취재단·이석우기자 swlee@
  • 남북정상회담 앞으로 한달/ 金대통령 준비 1개월·구상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다음달 12∼14일 열릴 남북정상회담을 한달 앞둔 11일 관계부처가 작성한 자료들을 검토하며 차분히 하루를 보냈다.지난주말지방 휴양시설인 청남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현대 북한의 지도자(金日成,金正日)’ 등 관련책자와 각종 관련자료들을 읽어본 뒤 2차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박준영(朴晙瑩) 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은 관저에서 쉬시면서 차분하고담담한 마음으로 회담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김대통령은 특히 지난 9일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과의 만찬회동과 10일 전문가들의 의견수렴을 끝으로 범국민적 지지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고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착수해야 할 시점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한·미·일 3국간의 공조와 오는 29일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총리와의 한·일정상회담 등을 통해 주변 4강의 외교적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장관은 중국,반기문(潘基文) 외교부차관은미국을 각각 방문해 정상회담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김대통령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박대변인은 “한·미·일간의 공조는 정상회담 합의 전이나 합의 후에도 빈틈없이 이뤄지고 있다”며 “충분한 의견교환이 이뤄져 있다”고 강조했다. 또 “중국·러시아와도 외교채널을 통해 대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 임하는 김대통령의 기본시각은 남북대화의 지속과 연속성에 있다. 황원탁(黃源卓) 외교안보수석도 “김대통령은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평화정착의 초석을 놓겠다는 의지”라고 전했다.이번 정상회담에서 큰 성과를 기대하는 것보다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와 공동번영의 기틀을 다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얘기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을 실무접촉에서 못박지 않고 단독정상회담에서 김대통령이 직접 거론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승현기자 yangbak@. *준비접촉 현황·전망.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준비업무가 경호·통신 등 세부 실무사항의 논의단계로 사실상 넘어갔다. 남북한이 8일 4차 준비접촉에 이어 9·11일의 판문점 직통전화를 통해 준비절차의 전반적인 사항을 사실상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북측은 11일 판문점의 전화통지문을 통해 북측의 합의서 문안을 보내왔다. 지난 9일 남측이 보낸 수정제의를 검토한 뒤 보낸 것이다.기자단 숫자를 제외하면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간의 합의서나 다름없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북측이 보내온 문안과 관련,“기자단 규모를 제외하곤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고 밝혔다.따라서 기자단 숫자만 절충되면 합의서타결이 이뤄지게 된다. 그러나 한편 합의서 타결 없이 곧바로 세부 실무절차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남측이 기자단 수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기자단 수는 회담 개최 직전 결정되더라도 회담개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개최 전까지 양측의 줄다리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쟁점이 됐던 의제문제는 지난 4월8일 베이징(北京) 남북 정상회담 합의서기본정신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수준에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즉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과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화라는 내용을 넣는 선에서 합의됐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9일 합의서의 공식타결 없이 그 다음과정인 경호·통신 등을논의하는 세부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늦어도 다음주쯤에는 합의서 타결이 없더라도 세부절차를 진행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합의서의 공식타결 또는 미타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은한마디로 절차에 대한 틀이 정리됐음을 뜻한다. 그러나 앞으로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논의할 의제가 어떻게 구체화될지도관심거리다. 이석우기자 swlee@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5)브란트 슈토프 회담

    *70년 동·서독 정상회담. “직접 회담을 통해 양쪽의 심각한 견해차를 확인했다.에르푸르트는 시작일뿐이며 2차회담을 갖는 것 이상의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접경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진 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서독으로 돌아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던진 첫마디다.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에 대한 환상없이 침착하게 긴장을 제거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겠다며 ‘거짓된 희망’을 경고했다. 1945년 종전이후 25년만에 열린 정상회담은 긴장완화를 위한 대외적 여건변화를 동서독이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969년은 2차대전 종전후지속돼온 동서간 냉전구조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난 해였다.미국과 소련간전략무기감축조약(SALT I) 협상이 시작됐고 나토도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상호균형감군협정을 제안했다.3월 동서화해를 추구해왔던 하이네만의 서독 대통령 취임,4월 서독의 ‘동독 국가승인’ 방침이 발표됐다.10월 ‘동방정책’을 제창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민당 연립정부가 출범했다.브란트 총리는취임연설에서 “서독 정부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은 고려될 수 없지만독일에는 두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둘은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을뿐”이라고 밝혔다. ‘두개의 독일 인정 발언’은 동독을 소련의 위성국가로,‘비합법적’국가로 간주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 단절까지 불사하는 ‘할슈타인원칙’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야당은 즉각 반(反)통일노선,분단고착화,심지어 ‘매국행위’라며 비난했다.반면 동독은 두달 뒤인 12월 서독에 무력사용·위협 포기,외교관계 수립 등을 요구,정상회담의 계기를 마련했다. 브란트는 동독이 국제법상 승인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직접 동독총리를 만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70년 1월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 앞으로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전달했다.슈토프도 이에 즉각 합의했다.양측은 곧바로 실무접촉에 들어갔고 4차례의 실무접촉과정에서의제가 아닌 회담장소가 최대의 난제로 떠올랐다.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가길 원했고 동독은 서독 정상의 베를린 장벽통과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결국 제3의 장소인 동독의 에르푸르트로합의했다. 3월19일 브란트가 탄 기차가 에르푸르트 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동독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숙소인 ‘에르푸르트 호프 호텔’까지 몰려와 환호하는 군중앞에 나서 이들을 진정시키던 브란트의 모습을 지켜보는수행원들 눈엔 눈물이 고였다. 회담장 밖의 분위기와는 달리 회담장안은 냉랭했다.동독은 군비감축, 유엔동시가입,국제법상 동등한 관계수립 등 7개항을 요구했다.서독은 동·서독은서로 외국이 아니며 양측의 선린우호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다등 6개항을 제시했다.양쪽은 각자의 입장만 확인한 뒤 5월21일 서독의 카셀에서 2차회담을 재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만 발표하고 헤어졌다.두달뒤 카셀 2차회담도 양쪽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차때처럼공동성명도 발표하지 못했다.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쪽은 공존의 필요성을 공감했다.실무접촉은 계속 돼 기본조약이 체결된 72년 12월21일까지 70여차례나 열렸다.73년 9월 유엔동시가입,74년 3월 상호대표부개설로 이어졌다.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10월 통일때까지 양독은 9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조금씩 가까워짐으로써 변화를 촉발한다’는 브란트의 접근이 결실을 맺었다. 김균미기자 kmkim@. .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 인류평화·공존 철학속에 동방정책을 싹틔운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옛 동서독인을 막론하고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1913년 12월18일 북부 독일의 소도시 뤼베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소비조합여점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사회당원인 외할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성장한 그는 17세때 독일사회민주당 당원이 돼 반나치 청년운동에 가담했다. 히틀러 집권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노르웨이로 망명,종전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49년 연방의회 베를린 시의원으로 독일 정계에 입문한 뒤 15년만인 64년 당수로 선출된다.69년 자민당과 제휴,전후 최초의 사민당 정권을 창출하고 총리에 올라 ‘동방정책’을 밀고 나갔다.동서독 정상회담 개최등 공로로 71년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보좌관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면서 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87년 사민당 당수직 사임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그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의장직을 6회 연임하면서 국제정의 실현과 인권신장에 앞장섰다.92년 10월8일 운명했다. *슈토프 당시 동독총리. 빌리 브란트의 상대였던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는 1989년 거세게 전개됐던반정부 시위에 밀려 사임할 때까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치하의 마지막 총리로 일했다. 1914년 7월9일 베를린 출생인 그는 벽돌공과 기술자,건축설계사 등으로 일했다.그는 동독의 내무·국방장관 등을 비롯해 공산당과 행정부에서 요직을두루 역임했다.70년 1차 정상회담직후 브란트 서독 총리로부터 ‘확고하고경직된 견해를 가진 정치가로 다루기 매우 어려운 회담 상대’로 불리웠다. 89년 10월18일 호네커 실각으로 함께 사임했다.사임하고 이틀 뒤 여행규제가 풀리면서 동독인들의 대탈출극이 벌어졌다.독일이 통일된지 1년만인 91년 60년대 베를린 장벽과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됐다.92년 이와 관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됐다. 독일 정부는 99년 4월19일 그의 사망소식을 발표했다.사망 원인은 공표되지 않았다. 김균미기자
  • 클린턴 특별성명 “첫 남북정상회담 환영”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성명을 발표,남북한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하고 축하한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조 록하트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오는 6월 처음으로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발표를 환영한다”고 말하고 “남북한간 직접 대화는 미국이 오랫동안 지지해온 것이며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이날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하고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제임스 루빈 국무부 대변인은 “주한미군의위상변화와 관련된 논의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 남북 정상회담/ 金대통령의 구상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1일 국무회의에서 베를린선언 4개항의 실천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합의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회담의 주 의제와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남북간 화해와 협력,경협,특사교환,이산가족 상봉이라는 4개항이 실현된다면 한반도는 급속히 냉전구도 해체의 분위기로 접어들게 된다. 김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정상회담 합의를 ‘민족적 경사’로 표현했다.그러면서 “개인적으로 감개무량해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이제 김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장정에 들어갔다. 특히 실무진이 건의한 의제 외에 정상간의 합의라는 ‘이니셔티브’를 놓치지 않고 있다.한 핵심참모 역시 “30여년 동안 온갖 고초 속에서 일관되게걸어온 통일관이 실현되는 중앙에 서 있다는 것을 잘아는 김대통령이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불문가지”라고 말해 정상회담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짐작케 했다. 취임 이후 전개한 김대통령의 4강외교는 남북간 화해·협력시대의 도래에대비해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을 우군화(友軍化)한 측면도 없지 않다.그만큼주도면밀한 준비를 마친 상황이다. 특히 지난 94년 카터 전미대통령의 중재로 성사됐던 남북정상회담 개최합의와는 달리 자주적으로 회담에 합의한 대목에 고무된 듯하다.이날 국무회의에서도 “우리 민족문제를 우리끼리”라고 유독 이 대목을 강조했다. 이렇게 볼 때 김대통령은 전 국민의 지지를 정상회담의 힘으로 삼으려는 것같다.총선이 끝난 뒤 전직대통령은 물론 여야 등 정치권과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만나 의견을 들으려는 데서도 이같은 의지를 읽을 수 있다.특히 국민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의견을 구하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어쨌든 남북문제 해결의 최대 방안은 정상회담이라고 여겨온 김대통령으로서는 국민적 기대 만큼이나 전방위적인 교류·협력을 일궈내야 하는 부담도안고 있다.무엇보다 정상회담은 그가 구상해온 ‘3단계 통일방안’의 첫 단계인 교류와 협력의 ‘남북연합 단계’로 가는 첫 코스다. 그런 점에서 정상회담은 3단계 통일방안의 실현여부를 가늠할 ‘데뷔무대’라고도 할 수 있다. 양승현기자 yangbak@. *주목받는 'DJ통일관'. 남북정상회담 개최발표를 계기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통일관에 관심이쏠리고 있다.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은 햇볕정책의 시험대이자 김대통령 통일관의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무대이기도 하다. 김대통령이 남북문제를 본격 언급한 것은 지난 71년 대선 때이다.김대통령은 당시 야당 대선후보로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 ‘남북간의 평화 교류 등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과 점진적인 평화통일’을 처음으로 제창했다. 그 뒤 72년 이를 토대로 이른바 ‘3단계 통일방안’을 최초로 제시했다. 동시에 남북한 기자교류,체육·문화 분야의 교류를 비롯,사회 각 분야의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평화통일을 실현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닉슨 독트린,브란트 서독수상의 동방정책과 같은 탈냉전의 국제조류와 달리 남과 북의 상황은 왜곡된 반공이데올로기와 혁명전쟁을 위한 ‘4대군사노선’으로 첨예한 대치를 이뤘다.당연히 김대통령의 통일방안은 정권의정치적 탄압수단으로 활용돼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도 김대통령의 통일방안은 우리 정치의 변화와 더불어 체계화되고 발전을 거듭한다.70년대의 통일관이 초기 구상단계로 싹을 틔운 시기라면,80년대는 발전기로 현실성을 불어넣기 위한 제도적 접근을 모색한 단계로볼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 동시 UN가입 등이 실현되면서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이제시됐다.1단계는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국가(남북한)의 협력관계를 제도화해 형식적 통합을 이룩하는 ‘남북연합’이며,2단계는 내정은 남북이 각각분담하고 외교는 연방정부가 담당하는 ‘연방단계’이다.마지막 3단계는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중앙집권제 또는 세분화된 연방제의 완전통일단계이다. 정부의 햇볕정책은 김대통령의 이러한 통일관에서 나온 정책적 산물이다.7·4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른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려면 북한당국과 대화를 재개해야 한다는 게 김대통령의 생각이었다.그 고리가 햇볕정책이었고,김대통령 스스로가 대화 주자로 나선 것이다. 양승현기자
  • [오늘의 눈] 16대 총선 익명성과 투명성

    16대 총선은 투명성과 익명성의 선거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전기(轉機)로기록될 만하다. 개정 선거법에 따른 후보자의 개인 신상정보 공개는 ‘유리알 후보’라는신조어(新造語)를 유행시킬 정도로 총선 정국에 파장을 일으켰다.공직선거출마자에게 도덕성과 청렴성은 더이상 ‘덕목’이 아니라 ‘기본’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퍼지기 시작했다. 국내 인터넷 인구 1,300만명 시대의 사이버 공간도 상당한 위력을 선보였다.후보자와 유권자가 인터넷상의 익명성을 이용해 쌍방통행식 의사소통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후보자의 투명성과 사이버 시대의 익명성은 확성기와 악수세례 등 거리유세에 익숙한 정치권과 유권자에게 ‘작은 충격’이었다.특히 그동안 정치현장에 직접 나서길 꺼린 20·30대 유권자는 익명성이 보장된 사이버 공간에서각종 총선 관련 사이트를 드나들며 잠재적인 정치욕구를 토해 냈다.이는 시민단체의 낙선운동과 맞물려 후보간 당락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러나 현상과 여건의 변화가 선거문화의 본질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금권시비와 흑색선전,상호비방 등 구태의연한 불법·부정선거운동이 어김없이 재연됐다. 오히려 후보 신상공개와 사이버 공간을 혼탁선거의 소재로 악용하는 사례가잇따랐다. 유세장과 정당간 성명전에서 검증되지 않은 개인 신상자료가 무차별 공세의 도마에 올랐고,특정 후보쪽 선거운동원이 무방비 상태의 사이버공간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흠결없는 인물에게 입법부를 맡긴다는 개정 선거법의 취지가 무색해지고,정보혁명 시대의 선거운동이 전근대적인 선거행태에 밀려 빛이 바랜 셈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점만 해도 의미있는 성과다.하지만 과거 선거때 처럼 ‘환경 변화보다 정치주체의 자각이 앞서야 한다’는 정도의 한가한 인식으로는 16대 국회 역시 여론의 정치개혁 욕구에부응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지난 2월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후보자 정보공개나 사이버 선거운동의 문제점을 예상하지 못했다면,총선 직후에라도 정치권은 관련 규정을 손질해야 한다.모처럼 싹튼 새로운선거문화가 정치권의 무신경과 당리당략적 사고로 왜곡·변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찬구 정치팀기자]ckpark@
  • [타이완 51년만의 정권교체]

    *현지표정. 타이완(臺灣) 총통선거 막바지까지도 계속 됐던 타이완에 대한 중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휴일인 19일 양안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양측군부는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은채 팽팽한 긴장을 이어갔다. □타이완 해협 중국 군부는 총통 선거후 타이완의 독립 움직임 가능성에 대비,고도의 경계태세에 들어갔다고 홍콩의 중국계 신문 문회보(文匯報)가 18일 보도.이 신문은 군 소식통을 인용,독립지지 후보가 총통에 선출되면 타이완이 ‘시끄러워질’ 가능성을 중국이 배제하지 않고 있다면서 인민해방군이군사행동으로 막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타이완 군도 17일 전군에 내린 최고경계태세를 당초 19일 오전 해제할 예정이었으나 무기한 연장키로 결정. 이같은 긴장감 속에 일부 주민들은 식료품을 사재기 하는가 하면 부유층에선 타이완 탈출을 위한 항공권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타이완 언론들은보도. □중국 달래기 천수이볜(陳水扁) 당선자는 투표전 “총통에 당선된다 해도독립을 선언하거나 헌법에 ‘2국론’을 집어넣지는 않을 것”이라며 중국 달래기에 나섰다.이는 또 타이완의 장래를 결정짓는 국민투표 가능성을 배제했다.천 당선자는 “타이완인들은 독립을 위한 투표를 할 기본적 권리를 갖고있으나 반드시 이 권리를 행사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 □정계개편 31만표차로 낙선한 무소속 쑹추위(宋楚瑜) 후보는 18일 총통선거출마를 위해 탈당했던 국민당에 복귀하지 않고 신당 창당을 선언. 국민당 당원 1,000여명은 이날 저녁 총통 관저에서 2㎞ 떨어진 국민당 본부에 집결,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당 분열과 이로 인한 선거패배에 책임이있다고 비난하면서 총재직 사임을 요구. 전문가들은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당개편과 국민당 인사의 민진당,쑹의 신당참여 등으로 대대적 정계개편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 □당선자 진영 천 당선자는 19일 아침 민주화운동 지도자 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등 당선자로서의 첫 일정을 시작. 앞서 천 당선자 진영의 대변인 비 킴 치아오는 “타이완 국민들이 말문을열었고 우리의 꿈이 실현됐다”고 기뻐했다.타이완 독립지지운동을 벌이던반체제 인사들이 86년 창당한 민진당은 15년만에 여당으로 변신하는데 성공. 타이베이(臺北) 김규환특파원 khkim@. *각국 반응. 타이완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당선된데 대해 세계는 중국을 의식, 조심스러운 환영을 나타내며 한결같이 중국-타이완간 긴장이 고조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대화를 촉구 말했다. □중국 거듭된 무력위협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천 후보가 당선된데 대해 충격을 받은 듯 비교적 조용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반응을 보였다. 18일밤 당-정부 공동명의로 발표된 성명은 “타이완의 지도자 선거와 그 결과가 타이완이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천 당선자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양안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지 지켜볼 것이다”고 밝혔다.이 성명은 이어 “평화통일은 ‘하나의 중국’ 원칙이 전제조건으로 천 당선자가 이를 인정한다면 기꺼이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그러나 어떤 형식이든 타이완의 독립은 결코허용되지 않을 것이다”고 밝혀 천 당선자와 민진당에게 경고를 보냈다.이같은성명 내용은 종전과 같은 무력 위협은 가하지 않아 천 당선자와의 대화 가능성은 남겨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콩 중국사회과학원의 양안관계 전문가인 리지아콴 연구원은 천 당선자가5월 총통에 취임한 뒤 양안 간에 ‘대결과 긴장’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경고했다. □미국 천 후보가 당선된 것은 타이완 민주주의의 저력과 활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중국이 주장해온 ‘하나의 중국’ 정책을 계속 지지할것이라고 다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8일 “천 후보의 승리를 축하한다”면서 “이번 선거는 타이완 민주주의의 힘과 활력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선거로 타이완과 중국 양측이 서로 접촉해 대화를 통해 이견을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고 본다”고 밝힌 뒤 “미국은 양측의 대화를 강력히 지지하며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번영을 촉진할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중국과 타이완이 직접대화를 통해 긴장을해소할 것을 기대하는 한편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퇴임 후 일본 방문 계획으로 일본이 중-타이완 긴장관계에 말려들 것을 우려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는 19일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1972년의 공동성명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중국정책에는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타이완과 관련,일본은 중국과 타이완간에 조속히 대화가 재개돼양자간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언론들은 19일 민진당의 천 후보가 당선돼 50여년만에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기사를 일제히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동남아 싱가포르 동아시아 연구소의 중국-타이완관계 전문가인 쳉용니안연구원은 천 후보의 당선으로 양안간 긴장이 고조돼 동남아시아 정국이 불안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베이징·워싱턴·도쿄·싱가포르 외신 종합
  • [뉴 밀레니엄의 전개] ‘남북통일’ 각국 언론사 시각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새로운 세기 세계 평화를 향한 관건이자 필수명제다.새 세기에도 한반도는 지척으로 다가올 통일과업 앞에서 남과 북이,그리고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축을 벌여나가는 격전장이 될 것이다.북한의 개혁개방,남북통일이라는대단원의 막은 새 세기 어느쯤에 이뤄질 것인가.새 세기 한반도 주변에서 펼쳐질 기상도를 워싱턴의 대한매일 특파원과 서울에 나와있는 각국 주요 언론사 특파원의 시각을 통해 집중 진단해본다. ◆미국 시각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의 대 한반도정책은 동북아시아지역의 안정과평화유지라는 대명제에 따라 이뤄진다. 최근 북한과 이뤄진 일련의 완화조치들은 이 커다란 대의명제 하에서 조직되고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월의 대북경제제재 완화조치와 올해초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북미고위급회담 등은 한반도지역의 안보와 평화유지라는 명제를 가장 극명하게보여주는 정책실행의 단면이다. 단기적으로 핵의혹을 해소하고 계속되던 미사일 발사실험의 유예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당면한 미사일·핵확산금지에 더 초점을 둬 한국의 한반도 통일이라는 최종목표와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기도한다. 어쨌든 그동안 북한의 핵의혹과 미사일발사 위협 등이 간헐적이나마 꾸준히이어진 미국과 북한과의 협상에서 다소 해소되거나 정지된 것은 새해 한반도지역의 전망을 긍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미국은 99년 한해동안 계속된 설득끝에 결국 북한이 대화의 장에 임할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다.최근 북한은 외무성 성명에서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클린턴 행정부와는 대화를 연기할 수 밖에 없다”고 했지만 북한의 대화의지는 강렬했다는 것이 미국의 평가이다.국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북한이 이번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북한의 미국과의 대화는 체제를 위협하는 계속된 극심한 식량난 해소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노린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북한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지난 수년동안과 같은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대화의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당분간 북한은 미국과는 물론 경제적·외교적 실익을 노린 한국과의 직접적인 대화 역시 비록 형태는 달리할지라도 속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구체적으로는 북미 고위급회담이 새해 첫 북미관계의 하이라이트로 떠오를것이다.북한측에서 아직 고위급회담을 위한 대화 준비가 덜 됐다는 분석이있지만 어쨌든 북미회담은 미국이 북한을 국제사회에 이끌어내고 체제의 완만한 변화를 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인 북미수교의 첫단추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고위회담을 반드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성과는 어느 선까지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낳게 하고 있다. [hay@] ◆중국 시각 20세기 지난(至難)했던 한반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금세기로 넘어왔다.그러나 21세기를 맞아 한반도 정세에 고무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크게 보아4가지다. 첫째,북한과 미국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북한의 경제제재를 완화한데 대해,북한측이 미국과양측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북·미 고위급 회담에 동의하고 미사일 발사실험을 중단하기로 하는 등 적극 호응하고 있다. 둘째,긴장완화를 통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국·미국·북한·중국간의 ‘4자회담’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지금까지 6차례에걸친 회담의 성과로 볼때 4개국은 협상 시스템을 계속 가동할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북한·일본관계도 해빙 조짐이 무르익고 있다는 대목이다.지난해 12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한 일본 초당파의원단이평양을 방문,북한측과 7년동안 중단됐던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수교협상을 벌이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이와 함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도 최근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를 해제하겠다고 화답했다.북·일 관계정상화 회담의 개최는 얼어붙었던 양국관계가 서서히 풀릴 가능성을 예고하고있다. 넷째,남북 민간교류와 경제합작 사업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이다.금강산관광,현대그룹의 공업단지 조성,남북 농구대회,남북 가수공연,남북교역의 증가 등은 남·북한 민간 및 합작교류의 성과를 의미한다.이는 앞으로 남북한 관계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적 토대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취약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99년 6월 남북한간의 서해교전이 잘 설명해준다.한반도는 동북아의 잠재적 화약고로 남아 있다.수십년간 적대시하면서 대치해온 데다 계속된 상호간의 제재 및 통제정책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어렵게 하고 위기를초래할 수 있는 복병이다. [가오하오룽(高浩榮) 중국 신화통신 서울특파원] ◆러시아 시각 한반도는 종말을 고한 20세기 중 가장 극적인 일들이 많았던,끊임없이 정치적 대립과 격동을 경험했던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러시아는 한반도와 역사적 지리적으로 인접한 탓에 지난 수백년 동안 한반도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에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21세기와 새 천년의 시작은 양국간 국교정상화 10주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지난 10년동안 서울과 모스크바는 상호관계에서서로 다른 경험을 해왔다.그러나 대체적으로 한·러관계라는 기관차는 현재가속도를 얻고 있으며 ‘친밀한 우호관계’라는 이름의 역(驛)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양국간의 정치관계에서 특히 중요했던 대목은 지난해 옐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간 정상회담을 꼽을 수 있다.이는 97년 12월과 98년 8월의 한국과 러시아 경제위기 이후 다소 냉랭했던 관계를 정상화시켰다. 또한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예브게니 셀레즈뇨프 국가두마(하원) 의장의 방한 등 다른 공식적 접촉도 있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보브린 아이스 발레단의 성공적 내한공연과 타간카극단의 공연 ‘아프간’에 대해 언급하고싶다.이 비극의 내용은 관객의 마음에 매우 가까이 다가간듯하다. 새해는 양국 지도층의 방문 뿐아니라 무역,경제,과학 및 기술협력 회의 등 많은 교류계획이 있다.한국 음악애호가들이 올해도 볼쇼이 오페라의 공연을 즐기기를희망한다.양국관계 10주년 기념 한·러포럼 계획도 있다. 한·러우호협회 의장인 비탈리 이그나텐코 이타르 타스통신 사장과 후원단체들이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중인 양국관계 역사를 포괄하는 외교문서,공예품과 귀중품,19세기 양국 조정의 전통의상 등을 보여주는 전시회의 서울 개최를 추진중이다.이는 러시아 박물관 소장 한국 문화재를 볼 수 있는 소중한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볼때 한반도를 둘러싼 새해 정세는 원만한 양국협력 하에 전개될 것으로 전망한다. [블라디미르 쿠다호프 러시아 이타르 타스 서울지국장] ◆일본 시각 올해 한반도 정세를 푸는 키워드는 ‘대화’다.북한내부에서 대화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어 한반도에 곧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큰 흐름을 볼 때 대립이나 긴장을 초래하는 요소는 적고 북한 및 주변국을 둘러싼 토론의 장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이런 흐름을 구체적 성과로 연결시키는 일이 가능한지가 초점이 될 것이다. 우선 북한과 미국을 살펴보자.지난해 9월 베를린에서 열린 북·미회담에서북한 고위관리의 방미에 대해 합의했다.방문시기,논의내용은 명확하지 않지만 방문이 실현된다면 미국의 대북(對北) 경제제재도 한층 완화돼 국교정상화까지 내다본 대화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지난달초 일본의 초당파 의원단이 북한을 방문하고 올해안에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하는데 합의했다.일본도 예상치 못했던 큰 진전이었으며 얼어붙었던 양국이 관계개선을 향해 적극적인 의사를 나타낸 것은 의미가 있다. 물론 98년 8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북·일관계가 급속히 차가워진 것처럼 양국이 다시 어색해질 가능성도 적지않다.일본인 납치 의혹이나 미사일 발사의 전면중지 등의 조건을 일본측에서 제기하면 북한은 식민지배때의 보상금 등을 내걸어 대화는 간단히 중단될 것이다. 단지 북한은 최근 경제재건에 중점을 두고 있어 일본으로부터 식량지원이나 경제협력에 매력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고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국교정상화교섭은 예상외로 빨리 진전할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남북한의 대화는 지난해 6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차관급회담이 결렬된 이후 끊긴 상태다. 총선이 있는 올해도 당분간 북한과의 대화는 어려울 것이다.6월의 차관급협의에서도 한국정부가 먼저 비료를 보내는 대폭적인 양보를 하면서도 회담을 일방적으로 거부당하는 등 북한측 외교전략에 휘말려 국민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기 때문이다.현시점에서 대화를 재개한다면 야당측에게 절호의 공격요인을 제공할 따름이다. 그러나 좋은 요인도 있다.남북간 경제분야의 교류가 진행되는 일이다.대화재개의 토대가 될 것이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담 직후 인 지난해 9월18일 임기중에 반드시 한반도 냉전구도를 종식시킨다고 강한 결의를 표명했다.이런 의미에서 4월 총선이 끝난뒤 다시 한번대화재개의 태동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고미 요지(五味洋治) 일본 도쿄신문 서울특파원
  • [기고] 페리보고서를 읽는 방법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유산으로 ‘핵과 미사일’을 남겨줬다. 그 목적은 북한의 체제를 보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김일성은 핵과 미사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가르쳐 주지 못했다. 페리보고서의 원천은 김일성이 생존했던 시기인 1993년 6월 첫 북·미회담협상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93년 뉴욕회담은 1.핵무기 선제공격에 대한보장 2.한반도의 안전,주권 상호존중 및 내정불간섭 3.한반도의 평화통일보장 등이었다.한마디로 집약하면 탈냉전 이후 북한의 체제보장을 미국에 요구한 것이다.아마도 1974년 3월의 허담(許談) 안(案) 혹은 대미평화안 이래 김일성의 대미접근과 야심적인 미국과의 화해정책 유언인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지난 서해해전이라는 사태에서 보듯이 김정일의 권력체계에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이의 중요성은 과연 김정일이 김일성이남겨놓은 힘의 공백을 메워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지금 부분적으로발표된 이른바 페리보고서의 항목들을 과연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한다. 페리보고서를 읽는 방법의 기준은 한반도의 현상유지가 이 보고서를 통하여얼마나 어느 수준의 변경과 수정이 초래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북한이 냉전체제 해체의 골간인 ‘하나의 조선’ 정책기치를 과연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귀착한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김정일의 것이 아닌 김일성이 남겨놓은 핵과 미사일이라는국가논리는 결국 ‘전조선의 공산화’가 노동당의 당면목적이라는 하나의 조선 정책에서 기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페리보고서를 읽는 방법의 기준은 1.주한미군이라는 억지력 2.미국이 적국법을 풀 때에 한미동맹에 어느 수준의 영향을줄 것인가 3.실제상 북한의 대남군사정책과 함께 아직도 북한을 무법국가로구분한 현실적인 대남공작이라는 엄청난 남한사회 개입 4.남북대화에 직접적인 가속화할 요인이 있는지 등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한국전쟁 이래 무장평화를 기초로 하는 평화공존이 싫든 좋든 합의로 유지돼 왔다.또 이는 1972년 7·4공동성명서의정치원리였다.그러면 이 원리를 대신할 냉전종식이라는 남북합의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남북한간의 평화공존은 역시 남북한의 대내정치의안정이라는 지렛대에 의존해 왔으나 북한의 김정일 체제가 과연 수정이든 대안이든 실력적으로 대내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페리보고서는 탈냉전 이후 미국의 세계정치라는 관점에서 대 북한 핵과 미사일 정책에 접근하고 있다.남북한 모두가 미국의 세계정책이 한반도의 현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데 관심을 집중해야 하리라 본다. 특히 보고서에 포함된 대로 미국과 북한이 ‘비적성화’정책이라는 관점에서 수교할 경우 한미방위조약의 가상적국(제3조 공통의 위협)조항이 탈락할때에 남한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보다 긴 안목에서의 눈을 갖고 이보고서를 볼 일이라고 본다. 바야흐로 얄타체제 이래 한반도의 ‘현상유지(status quo)’에 수정이 가해지려 하고 있다.그 시발이 페리보고서다. 남한은 한국전쟁 이래 서구민주주의 진영에 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가치편에 굳게 서왔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유리한 입장에 선 것만은 확실하다. 미국은 온 힘을 다하여 대북한 핵과 미사일 정책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문제인 한반도 문제를 불구경하듯이 소홀히 해서는안된다.우리도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李 基 鐸 연세대교수·국제정치학]
  • [사설] 북의 보복성 조치 안될 말

    북한은 16일 대남전위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성명을 통해 남한 인사들의 평양방문과 접촉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이러한 조평통 대변인 성명내용은 서해교전 이후 첫 공식발표에 담긴 보복성 조치라는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또 앞으로 이에 따른 파장에 귀추가 주목된다.북한은 이번 성명에서 금강산관광과 베이징(北京) 남북차관급회담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 해서 금강산 관광사업과 남북차관급회담이 중단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북관계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되는 바적지 않다.무엇보다 북한의 이같은 보복성 조치는 어불성설이며 즉각 철회돼야 한다.이번 서해상의 군사 교전사태는 북한이 먼저 도발한 정전협정위반사건이다.교전과정에서 북한의 피해가 더 컸기 때문에 그들의 자존심이 훼손된 것도 사실이다.그렇다고 해도 그 책임을 남쪽에 전가시키고 보복을 공언하는 것은 전말을 호도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물론 북한이 이같은 보복성 조치를 취한 것은나름대로의 속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무엇보다남북현안인 베이징 차관급회담에서의 협상력을 높이고 회담목적인 이산가족문제의 성과를 흐리려는 저의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피해보상까지 요구함으로써 서해교전사태에 대한 책임을 남쪽에 전가하고 북한에 쏟아지는 대외비난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함께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그리고 경제난,식량난 등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는상황에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켜 내부결속을 다지려는 정치성 조치로도 볼수 있다. 남한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부추기고 사회혼란을 조성해서 대북 포용정책을무력화시키는 등의 다목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은 이번 서해교전사태를 통해 대내위기를 극복하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국면을 조성하겠다는 의도를 지닌 것이 분명하다.또 한반도 긴장국면을 대미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하겠다는 전략이 있음도 간파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의 전술적 의도가 분명한 만큼 보복성 조치는 부당하며 즉각 철회돼야 한다.그리고 모든 현안들을 남북대화로 풀어가는 냉철하고 합리적인자세로 나와야 한다.금강산관광사업 7개월만에 1억5,000만달러라는 거액이북한에 돌아갔고,남북 차관급회담 성사를 전제로 한 20만t 이상의 대북 비료지원은 북한에 엄청난 이익이 되고 있다.그래서 남북대화는 북한의 생존을위한 선택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북한은 이번 서해교전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의 천명은 물론 남북대화를 통한 화해·협력에 적극 동참해주기를 촉구한다.
  • [제2공화국과 張勉](21)對日외교 전략

    장면(張勉)정부가 넘겨받은 해묵은 숙제 가운데 하나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이다.앞서 집권한 이승만(李承晩)은 국시인 ‘반공’ 못잖게 ‘배일(排日)’을 강조했고 국민감정도 일본에는 아직 적대적이었다. 이승만정권 때 한·일회담은 모두 4차례 열렸다.1951년 10월20일 도쿄에서1차회담을 가진 것을 비롯해 53년 4월과 10월 2·3차 회담이 이어졌다.그러나 3차회담에서 일본대표 구보타(久保田)가 “일본의 지배는 한국측에도 유익했다”는 망언을 해 결렬된다.이후 4년여 동안 중단됐다가 58년 4월 4차회담에 들어가지만 일본이 59년 2월 재일교포 북송을 시작하는 바람에 다시 흐지부지된다. 이같은 상태에서 장면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장 총리는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양국 회담을재개하고 ▲재일교포에의 경제적 지원,교육지도를 강화하며 ▲교포 자본을국내에 도입하는 길을 열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이어 정일형(鄭一亨)외무장관은 “외교관계 정상화에 필요하다면 총리 또는 외무장관 회담을열 수 있다”고 공표했다. 일본도 즉시 반응을 보였다.장면내각이 출범한 지 열흘 남짓한 60년 9월6일 고사카(小坂)외무장관 일행을 친선사절단으로 파견했다.일본 고위 관리가정식으로 한국땅을 밟기는 일제가 쫓겨간 뒤 처음이었다. 고사카가 방한한 날 오후 양국 외무장관은 회담을 가져 하루빨리 한·일회담을 열기로 합의한다.고사카 일행은 불과 22시간 머물고 돌아갔지만 양국정부가 ‘선린우호’ 방침을 서로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시기에 한·일회담이 주요 이슈로 떠오른 까닭은 한국·일본 그리고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일본은 55∼56년역사상 최고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뒤 상품 및 자본의 해외진출을 노릴 때였다. 미국도 60년 1월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일본에 동북아 반공망 구축에 한몫을 맡기려 했으므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줄곧 유도했다.이승만정권 때인60년 3월 허터 미 국무장관은 양유찬(梁裕燦)주미대사를 만나 한·일관계에우려를 표명하는 등 직접 관계개선을 촉구할 정도였다. 장면정부도양국 국교정상화가 꼭 필요했다.‘경제 제일주의’를 추진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일본과 국교를 맺어 식민통치에 따른 청구권을 해결하고 국교 수립 이후로 미룬 민간자본 유치도 실현해야 했다.남북이 대치한 상태에서 등 뒤에 있는 일본을 자유우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양국은 외무장관 회담에서 결정한 5차 회의의 예비회담을 60년 10월25일 도쿄에서 시작했다.한국측 수석대표는 1차회담에도 참석한 유진오(兪鎭午)전고려대총장이 맡았고 엄요섭(嚴堯燮)주일공사,유창순(劉彰順)한국은행부총재 등이 대표단에 동참했다. 한국은 청구권문제에 초점을 맞춰 ‘청구권 8개 항목’을 내놓았다.하지만일본은 장면정부를 애태우려는 듯 개막 다음날 ‘교포 북송’문제를 핑계로북한과 별도의 회담을 시작했다.12월19일에는 이케다(池田)총리가 “한국에정부가 둘 있다는 인식 아래 한·일회담에 임한다”고 국회에서 공표했다. 일본이 ‘북한카드’를 갖고 지연작전을 쓴 탓에 회담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일본은 ‘장면정부는 아직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회담진행을 의도적으로 늦춘 면도 있다. 61년 초 일본이 경제사절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하자 장면정부는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다.그러나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다.정부·여당 연석회의가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에라도 일본의 민간차관과 재일교포 재산의 반입을 허용한다’고 결정한 1월22일 밖에서는 ‘반일투쟁위원회’(위원장 劉錫鉉)가 결성된다. 김병로(金炳魯) 변영태(卞榮泰) 등 60여명이 참여한 이 위원회는 “국교수립 전에 경제교류를 하는 것과 일본 경제사절단의 내한을 반대한다”면서 실력저지를 선언한다.신민당(민주당 구파)도 다음날 “장면정부의 대일 외교에 반대하는 범국민운동도 불사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한다.환영위원회는 취소되고 일본 경제사절단의 내한도 무산됐다. 4월26일 정일형 외무장관이 위싱턴에서 러스크 미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는 양국에 이익일 뿐아니라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공동성명을 발표한다.이어 5월6일 일본에서 노다(野田)를 단장으로 하고 외무부 아시아국장이 수행한 일본 의원단이 방한한다. 사절단이 일본으로 돌아가 정계·사회에 “장면정부는 매우 안정돼 있다”고 보고하고 다닐 무렵 ‘5·16쿠데타’가 발생한다. 박정희(朴正熙)정권은 4년 후인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한다. 주 관심사인 청구권 금액은 ‘무상 3억,정부차관 2억,민간차관 3억달러’로결정났다.64년의 ‘6·3사태’라는 치열한 국민 저항을 억누르고 얻은 결과였다.박정권의 논리 또한 ‘경제건설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면 국교정상화가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장면정부에서 일한 인사들 누구나가 아쉬워하는 대목이 청구권문제다.장면정부는 한·일회담 성공을 눈앞에 두었고 그때 타결됐더라면 최소한 청구권금액만큼은 훨씬 늘어났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박정희의 한·일회담 강행을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한 정일형의 회고록 중 한 부분이다. “외무장관 당시 우리가 12억달러를 요구하고 일본이 8억달러를 주장해 타결을 못보았는데,이제 3억달러에 낙착됐다.이 하나만으로도 박정권이 얼마나 한·일회담을 졸속·저자세로 진행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장면정부는 한·일 국교를 이뤄 청구권을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국토건설사업을 완수하려고 했다.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동시에 이루었을지도 모른다.이러한 가정을무시하더라도 장면정부가 최소한 ‘6·3사태’와 같은 폭압을 국민에게 저지르지 않았음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이용원 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9)-요동치는 軍(上)

    1960년 8월27일 민의원에서 총리 취임후 첫 시정연설에 나선 장면(張勉)은긴급과제 6가지에 관한 정부 방침을 역설했다.마지막 항목에서 장총리는 “경제건설과의 균형상 과중한 국방비를 줄이고자 감군(減軍)을 하겠으며 이에 대비해 중장비를 도입하는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고 밝혔다.이어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일부에서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다짐했다. 장총리가 제시한 군 관련 정책의 큰 줄기는 ‘감군’과 ‘개혁’이었다.또그가 지적한 군의 문제점들은 국민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들이었다.이승만(李承晩)정권 아래서 군은 정치에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별도기사 참조].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군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분야에 관한 것 못잖게 높았다. 4월혁명 공간에서 국민과 군의 만남은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4월19일 이승만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진주했지만,경찰과는 달리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송요찬(宋堯讚)계엄사령관은 계엄군에게 “민가에 들어가지 말고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말 것,어떤 일이 있어도 총을 쏘지 말며 발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계엄군인 15사단의 조재미(趙在美)사단장은 19일 고려대를 찾아가 강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대 연행하지 않겠다”는약속을 해 해산시키기도 했다. 60년 4월 중립을 지킨 군의 엄정한 자세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일이었다.가령 군이 유혈진압에 나섰다면 그 비극적 결말은 상상하기에도 두려울 정도였을 테고,계엄사태를 빙자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섰더라도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초연한 듯이 보였다.다만 장총리의 연설에서 지적받은 자체 문제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일어났다.그것이 바로 정군(整軍)운동이다. 허정(許政)과도정부 시절인 5월2일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소장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낸다.“군의 최고 명령자로서 ‘3·15부정선거’에책임을 지고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5월8일에는 김종필(金鍾泌)중령 등 육사 8기생인 중령 8명이 김중령 집에서모였다.이들은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장성들의 책임 추궁 ▲부정축재한 장성 처단 ▲무능·파렴치한 지휘관제거 ▲파벌 요인 제거와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군 처우개선 등을 목표로 정했다. 이들은 연판장을 돌려 군내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즉시 발각돼 김종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옥창호(玉昌鎬) 석창희(石昌熙)등 5명이구속됐다.그러나 여론 악화를 우려한 송요찬은 이들을 바로 석방하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역시 정군대상으로 꼽히는 최영희(崔榮喜)중장이 임명됐다. 장면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방장관은 현석호(玄錫虎),정무차관은 박병배(朴炳培)의원(무소속)이 각각 맡았다.장·차관 모두 군이나 국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다만 현석호에게 육사 2기생인 현석주(玄錫朱)라는 동생이 있어 그를 통해 군 내부사정을 알아보는 정도였다.장면은 국방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공보비서관인 고 송원영(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장총리는 나이가 지긋한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힌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그러나 국방부의 모든 일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 같다.미군에서 작전권을 가진 이상 국방장관 자리는 한계가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는 최경록(崔慶祿)중장을 앉혔다.최중장은 이승만정권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은,몇 안되는 고위장성 가운데 하나였다.최영희는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장면정부 출범후 영관급 장교들의 정군운동이 다시 떠올랐다.9월10일 김종필 김형욱 등 중령 11명이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해 전군을 상대로 정군을 단행할 것을 청원했다.현장관도 필요한 정화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이틀뒤 국방장관이 현석호에서 민주당 구파인 권중돈(權仲敦)으로 바뀐 뒤 권장관은 정화조치의 첫 단계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다. 9월20일 엉뚱한 곳에서 정군운동에 불똥이 튀었다.최영희 합참의장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정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한국군 고위장성들이 최근의 사태에큰 불안과 초조를 느끼니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요지였다. 파머의 성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최경록 육참총장이 즉각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9월24일에는 육사 7·9·10기 대표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파머를 불러들여 자리를 보존하려고 했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의 결과로 김종필·석정선(石正善) 두 중령이 61년 2월 예편당한다.배후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군본부작전국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후 정군운동은 사라지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쿠데타 음모로 돌아선다. 이용원기자ywyi@李承晩정권하의 軍실태 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동안 군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군은 육군·해군을 합해 5만 병력 규모였다.‘6·25’발발직전에 10만명을 넘어섰고 1954년에는 65만명에 이른다.이후 다소 줄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통칭 ‘60만 대군’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이 시대는 군이 정치적인 사건에 자주 동원되고 그 영향으로 분파(分派)가 극심해지는 등 정치에 오염된 기간이기도 했다. 창군(創軍)이후 60년대 초까지 한국군 상층부를 이룬 장성과 고급장교들은출신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뉜다.광복군 또는 중국 정규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 장교·하사관 ▲일본이 창설한 만주군 ▲공산통치를 피해 내려온 이북피난민 출신 들이다. 육군의 전신으로 46년 창설된 조선경비대에서는 광복군의 유동열(柳東悅)송호성(宋虎聲)장군이 초대,2대 사령관을 맡는다.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광복군·중국군 출신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이승만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참모총장(49년 폐지됨)에 일본군 출신 이응준(李應俊) 채병덕(蔡秉德)을 각각 임명한다.일군 출신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 초기 국군이 기틀을 잡는 데 나름대로기여한다. 그러나 일군 출신들도 52년이면 ‘실권’에서 멀어진다.‘발췌 개헌’때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2개 전투사단을 부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거부당한 일이 계기가 됐다.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만만치 않은’일군 출신들을 배제한 이승만은 후임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만주군 출신들을 선택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정일권(丁一權)과 백선엽(白善燁)이다.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하려고 관동군 보조병력으로 창설한 만군은 그 위상이 독특했다.정규전 훈련보다는 독립군이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반란진압 전술을 주로 배웠다.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그업무도 상당히 정치적이었다.그래서 흔히 “만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은 군내(軍內) 분파주의와 음모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정일권과 백선엽을 교대로 중용하며 충성경쟁을 부추긴다.정일권이 51년 34살에 국군 최초로 중장에 오르지만 대장 계급장은 그보다 3살 아래인 백선엽이 53년 먼저 단다.육군참모총장도 정일권(50년)-백선엽(52년)-정일권(54년)-백선엽(57년)으로 왔다갔다한다.두 사람의 선두다툼은 군부 내에 함경도파(정일권)와 평안도파(백선엽)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 된다. 군부내 파벌을 조장해 충성경쟁을 시킨 것 말고도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군을 정치에 악용한다.대통령·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투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헌병총사령부(사령관 元容德)와 특무대(대장 金昌龍)를 시켜 군 내부를 감시하는 한편 이들을 정적 제거에도 동원했다.‘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도 군비에서 조달했다.군은 당시 국가예산의 40%이상을 썼고 매년미국으로부터 4억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받고 있었다.군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쓰는 행태는 필연적으로 군 내부에 부패를 불러왔다.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복(私腹)을 채우고 위로는 상납하는 구조가 심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군은 자유당·관료층에 버금가는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정군(整軍)운동을 불러왔다. 이용원기자ywyi@
  •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첫 공판­정치권 반응

    ◎여 “재판 지켜보자” 야 당혹·충격·초조/국민회의­“법정에서 진위 밝혀질것”/자민련­이 총재의 직접 해명 촉구/한나라­성명 발표 등 진화에 진력 韓成基씨의 법정진술이 전해진 30일 국민회의는 공식 논평을 자제하면서 “재판 결과를 지켜보자”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鄭東泳 대변인은 비공식 논평을 통해 “법정에서 韓成基씨 진술의 진위여부가 밝혀질 것”이라며 “우리 당은 재판 진행과정을 예의주시하겠다”며 짤막한 반응이 전부였다. 한나라당 지도부의 개입여부 등 총풍사건의 실체가 법정에서 밝혀지게 돼있는 만큼 굳이 한나라당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당의 한 관계자는 “경제청문회와 예산안 처리를 놓고 정국이 꼬이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경국정색으로 급전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그러나 薛勳 기조위원장은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에 대해 한나라당이 부인해왔던 것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며 “한나라당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자민련은 강력한 톤으로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의 직접 해명을 촉구했다.金昌榮 부대변인은 “韓씨의 법정진술은 당시 李후보의 북풍개입 혐의를 시사하는 중대발언으로,누구도 자의적 법정진술의 신빙성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李총재가 직접 자신의 개입의혹을 해명하고 검찰은 북풍공작의 전모를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金부대변인은 이어 “한나라당측 ‘북풍(北風)’공작의 핵심인 韓씨의 말은 대단히 구체적이며 李후보의 실제(實弟)인 會晟씨와의 통화기록 등 물증도 확보된 상태”라며 “韓씨의 문건을 수행비서나 운전기사가 묵살하고 李후보에게 전달하지 않을 입장이 못된다는 것은 세살짜리 어린이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총풍사건 고문조작 의혹’에 휘말렸던 안기부는 이날 공식논평을 내지 않은 채 “재판 결과를 지켜보겠다”며 입을 다물었다.안기부의 한 관계자는 “아직 재판 초기상황인데 우리가 진행 과정 하나하나에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전제,“그러나 우리가 고문을 통해 총풍사건을 조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번 재판을 통해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한나라당은 30일 열린 ‘총풍(銃風)사건’ 첫 공판에서 韓成基 피고인이 북한측 인사와 만난 내용을 李會昌 총재에게 서면보고하고,李총재의 동생인 會晟씨와도 통화했다는 진술내용이 전해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진술내용을 뒤집는 것이어서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당은 부랴부랴 성명을 내는 등 진화에 안간힘을 썼다. 具凡會 부대변인은 이날 오후 긴급 성명을 내고 “韓씨의 진술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허무맹랑한 날조된 진술”이라면서 “우리는 韓씨가 안기부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그같은 진술을 했다는 의구심과 추측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안기부의 고문협박에 못이겨 허위진술했다고 주장한 韓씨가 갑자기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무언가 뒷거래가 있을 것이라고 또다른 의혹을 제기했다.일부 당직자들은 韓씨를 ‘도대체 못믿을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여권의 李會昌­會晟 형제 죽이기가 다시 시작된 것 같다고 불안감을 떨구지 못하고 있다.지난 번 金大中 대통령과 李총재의 청와대 총재회담에서 총풍사건은 검찰수사를 지켜본다고 해 잠자코 있었더니,결과가 이것이냐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한 방 맞았다는 얘기도 이곳 저곳에서 튀어 나왔다. 具부대변인은 이와 함께 “會晟씨는 韓씨가 베이징에 있었다는 지난해 12월10일부터 12일사이 그가 베이징에 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며,韓씨와는 북한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나눈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韓씨가 법정진술을 통해 ‘특단협상카드 정보보고’ 문건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李총재의 당시 수행비서 金右錫씨도 “문건은 커녕 韓씨를 만난 사실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이와 관련,한나라당 관계자도 당시 유세차량에 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돼 있었고,경호원들이 삼엄하게 후보를 경호해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사(韓成基씨 지칭)가 金비서에게 접근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 李 후보에 銃風 서면보고

    ◎“訪中전후 두차례”… 韓成基 피고인 첫 공판서 진술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韓成基 피고인(39·전 포스데이터 고문)이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중국 베이징에 가기 직전과 갔다온 직후 각각 한차례씩 한나라당 李會昌 대통령후보에게 이 사건 관련 사항을 서면으로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韓피고인이 베이징에서 李후보의 동생인 會晟씨(52·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에게 두차례 전화를 건 물증도 확보됐다. 이같은 사실은 30일 오후 2시 서울지법 형사합의26부(재판장 金澤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사건의 첫공판에서 밝혀졌다. 재판은 韓피고인에 이어 吳靜恩(46·전 청와대 행정관)·張錫重(48·대호차이나 대표) 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직접신문의 순으로 진행됐다. 權寧海 피고인(전 안기부장)에 대한 신문은 權피고인의 건강 때문에 연기됐다. 韓피고인은 검찰의 직접신문에서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전인 지난해 12월9일 ‘특단카드 협상정보 보고서’를 작성한 뒤 항공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덕천사거리에서 유세를 마친 李후보측 수행비서에게 건넸다”고 진술했다. 이어 “베이징에서 귀국한 직후인 12월15일 ‘존경하옵는 李후보님께’라는 편지를 써 서울 종로구 구기동 李후보의 자택앞에서 운전사에게 건네줬다”고 말했다. 韓피고인은 그러나 “직접 전달하지 않아 李후보가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받았는지 여부는 모른다”고 주장했다. 韓피고인의 출국전 보고서에는 ‘북한 통일선전부 고위 관계자를 만나 옥수수박사 金順權 교수 방북건을 이용,북한측에 모든 카드를 제시할 것이며 12월15일∼17일 사이에 행동을 개시토록 한다’는 내용이,편지에는 ‘북한 고위층이 황해도 출신인 李후보의 당선을 바라고 있으나 북한 고위층이 말한 내용을 서면에 모두 기재할 수 없어 유감’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검찰은 지난 21일 안기부로부터 넘겨받은 韓피고인의 컴퓨터 저장파일을 분석한 결과,이같은 보고서 내용 등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2차 공판은 오는 19일 오전 10시에 속개된다. ◎검찰 “李會晟씨 곧 재소환” 서울지검공안1부(洪景植 부장검사)는 30일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에 깊이 관련된 의혹을 사고 있는 李會晟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52)을 금명간 재소환,조사하기로 했다. ◎“사실무근” 한나라당 성명 具凡會 한나라당부대변인은 30일 성명을 내고 “韓씨의 진술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허무맹랑한 날조된 진술”이라고 주장했다.
  • 美 공화 의원들 성추문 도미노/모두 클린턴 비판자

    ◎“백악관의 음모다” FBI에 수사 요구/블루멘탈 보좌관 배후 지목… “믿을만한 증거 있다” 요즘 미국 정가에서는 정치인들의 추문 폭로전이 한창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이 파문을 일으키며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된 게 첫단추가 되었다. 공화당은 17일 하원 법사위원회 헨리 하이드 위원장의 간통사건이 폭로되자 루이 프리 연방수사국(FBI) 국장에게 서한을 보내 즉각 수사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서한은 “의원들에 대한 조직적인 중상과 협박운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믿을만한 증거가 있다”면서 백악관의 시드니 블루멘탈 보좌관을 직접 거명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는 하원 법사위원장의 성추문이 폭로되자 백악관이 배후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고 본 것이다. 성추문 파문이 확산되면서 클린턴 비판에 앞장서온 댄 버튼 하원 정부개혁 감시위원장이 혼외정사로 자식까지 낳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공화당의 여성의원인 헬렌 체노웨스도 지난주 한 기혼남과 오랫동안 불륜관계를 가져온 사실이 들통나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민주당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사임을 맨먼저 요구했던 폴 맥헤일 의원은 남의 공적을 가로채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투서로 곤욕을 치러야 하기도 했다. 비리가 뒤늦게 들춰진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클린턴 비판자들이다보니 의혹의 눈길은 그대로 백악관으로 향했다. 백악관은 물론 펄쩍 뛰었다. 배후로 지목받은 블루멘탈 보좌관은 성명을 발표하고 “나는 그런 것을 공개하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관측통들은 비록 추문 폭로전에 백악관이 개입하지는 않았더라도 클린턴 대통령을 탄핵위기로 몰고 있는 공화당과 우익의 공세에 대한 견제세력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4월에는 캘리포니아 민주당원 봅 멀홀랜드가 “만약 클린턴에 대한 탄핵절차가 강행될 경우 공화당 의원이나 배우자들의 사생활 비리를 계속 폭로,수개월내에 하원 법사위원회는 의결정족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던 터라 의구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 민주열사 열전:1­2/張俊河 선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체제 맞서 ‘불굴의 투쟁’/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항일운동/해방후 ‘사상계’ 창간 반독재투쟁 선도/朴正熙정권 끝내 부정… 의문의 추락사 “오늘의 헌법(유신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이에 우리 국민은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1973년 12월23일 상오 10시 서울 YMCA회관 회의실.통일당 張俊河 최고위원이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수십명의 보도진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咸錫憲·白樂濬·金壽煥·白基玩·桂勳梯·兪鎭午씨 등 각계 지도급 인사 3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이었던 것이다.이 일로 張俊河 선생은 白基玩씨와 더불어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다.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張俊河 선생.그는 정부수립 이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골짜기에서 불귀의 객이 될때까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5·16쿠데타 때까지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무기로,그 이후에는 직접 몸을 던져 독재와 싸웠다.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78)은 張俊河 선생을 ‘애국자·혁명가·인격자이며 권모술수와 배금주의를 배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서러워했다. ‘사상계’를 빼놓고는 그의 반독재투쟁사를 말하기 어렵다.그의 손아래 동서로 사상계에서 편집부장을 지낸 劉庚煥씨(61·전 문화일보 논설실장)는 “張俊河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신앙에 가까운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사상계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오히려 반독재 정론지로써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란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58년 12월 자유당 정권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개악시켜 통과시킨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張俊河 선생은 61년 7월호에 실린 咸錫憲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목의 글로 중앙정보부장 앞에 불려가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빨리 민정이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또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밀수왕초’,‘매혈자’등으로 몰아부치고 국가원수모독죄 등으로 구속된다.이러한 투쟁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반유신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의 반독재투쟁에 대해 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65)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로 몰아가려는 반통일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했다.劉庚煥씨는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 반공주의자였다.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朴正熙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또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쿠데타는 후세에 좋지 않다는 신념으로 朴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회고했다. 張俊河 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가 광복군 대위 시절 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피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피빛으로.◎張俊河와 朴正熙/광복군대위­일본군중위 출신부터 달라/남로당관련 등 박정희 약점 과감히 들춰 5·16 쿠데타 이후 張俊河 선생이 숨질 때까지 ‘張俊河는 朴正熙의 천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그만큼 앞뒤 안가리고 朴대통령에게 모멸감을 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1966년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하자 재벌밀수규탄대회에 초청된 그는 朴대통령에게 ‘밀수왕초’란 이름을 선물했고,3개월간 옥고를 겪는다.6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그해 4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朴대통령에게 ‘매혈자’란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한 말이었다.이로 인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나 오히려 6월 총선에서 옥중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또 “朴正熙는 과거 남로당 조직책으로 조직원 동료를 팔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로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물” 등 朴대통령의 최대 약점들을 과감하게 들추어냈다. 張俊河 선생의 이런 행태에 대해 평전 ‘재야의 빛 장준하’를 썼던 朴敬洙씨(68)는 “張俊河 선생의 朴正熙관은 애초부터 멸시와 경멸이었던 것 같다. 상대가 일본군 중위일때 그는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였다는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朴正熙의 갖은 폭력을 겪으면서도 분노에 앞서 그 인격 자체를 대단치 않게 본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개헌을 위한 백만인 청원운동으로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던 張俊河 선생은 출감하자 75년 1월 朴대통령에게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고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유족들의 생활/결벽중에 가까운 청빈으로 가족들 큰 고통/문상객도 자기먹을 쌀 가져올 정도로 궁핍 “월급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17살때 시집왔다는 張俊河 선생의 미망인 金熙淑 여사(71)의 말이다.사상계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張俊河 선생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남은 것은 20만원짜리 월세방과 쌀 한 됫박뿐이었다고 전해진다.한 문상객이 미망인의 손을 붙들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거냐”며울자 망연자실해 있던 金여사는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라고 남의 얘기 하듯 했다고 한다. 白基玩씨는 “문상올 사람들에게 자기 먹을 쌀을 가져오라고 연락을 했었다”며 “당시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전셋집을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이렇게 지나칠 만큼의 청빈에 대한 그의 결벽증은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 밖에 없었다.사상계에 대한 탄압으로 항상 빚에 쪼들렸던 것도 이유가 됐다. 3남2녀중 장·차남인 호권·호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세 아들중 호준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한신대를 나와 목사로 있다.딸들은 이대를 졸업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 각각 살고 있다. ◎비극의 수수께끼/추락사한 유해 겨드랑이 피멍자국/17m 벼랑에서 떨어진 안경은 말짱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張俊河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張俊河 선생이 숨져 누워있던약사봉 골짜기의 이 표석문의 ‘멋 훗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당시 검찰의 ‘추락사’발표는 실로 의혹투성이였다.그때 徐燉洋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張俊河 선생은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그는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金龍煥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徐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그리고 그날 낮 金龍煥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이때문에 당시 ‘재야대통령’이라고 불리던 張선생의 사인을 서둘러 추락사로 발표한 의혹을 샀다. “집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를 보니 겨드랑이 밑 양쪽 팔에 피멍이 있었어요. 엉덩이와 팔 두군데 주사기로 찔린 듯한 자국도 있었고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사체가 너무 깨끗했습니다.순간 양쪽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갔다고 직감했지요” 서울 상봉동 셋집에서 장례 대소사를 떠맡았던 劉庚煥씨의 증언이다.또 金龍煥씨가 말한 하산코스가 등산장비 없이는 도저히 내려오기 어려운 벼랑이어서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張俊河 선생이 갖고 있던 커피보온병과 끼고 있던 안경이 17m 높이의 벼랑에서 돌밭으로 떨어져 말짱했다는 불가사의한 의혹 등도 나왔다. 劉庚煥씨는 또“소나무가 휘어진 자국이라며 金龍煥이 말한 부분에 동그랗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칼로 벗겨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연보 ▲1918 평북 의주에서 아버지 張錫仁 목사와 어머니 金京文 여사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1932년 평양 숭실중 입학 ▲1940년 일본신학교 입학 ▲1944년 1월 金熙淑 여사와 결혼,20일 후 학도병으로 입대 ▲1944년 7월 일본군 탈출,중국군 가담 ▲1945년 1월 중국 중경의 광복군에 편입 ▲1945년 11월 金九 선생과 함께 입국,비서로 활동 ▲1948년 한신대 졸업 ▲1953년 월간 ‘사상계’ 발행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 상 수상 ▲1971년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시절을 담은 저서 ‘돌베개’ 출간 ▲1972년 7·4 공동성명 지지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수많은 의혹을 남긴채 숨짐
  • 야당세력의 형성(대한민국 50년:8)

    ◎48년 8월 한민당 “이승만정권에 투쟁” 선포/조각 배분 푸대접 받자 초대총리 지명 인준 부결/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대 ‘보수야당’ 성격 고착 이승만정권에 대응한 야당세력의 출현은 바로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다. 한민당은 미군정기인 45년 9월16일 좌우대립속에서 지주세력 등 우익측 인사들로 결성된 보수반공연합체 정당으로 출발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추대하고,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모토로 내걸었다. 한민당은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나 김구 등 임정세력들과의 노선차이로 결별했다. ○건국까지는 손발 맞춰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손발을 맞춰 건국까지 이끈다.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약결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승만은 그들의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대신 한민당은 이정권에서 권력을 주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이승만은정약결혼속에서도 내심 ‘친일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민당과 계속 제휴하는 것은 자신의 노선까지도 손상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바로 조각작업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드러냈다. 먼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내세운 당위원장 김성수안을 거부하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던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국회인준을 요구했다. 이에 한민당도 기다렸다는듯 즉각 인준을 부결시켰으며,결국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인준받은 이승만은 김도연에게 재무장관 자리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한민당의 조각참여를 제한했다. 한민당은 이 사건을 ‘이승만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자연스럽게 야당의 길로 전향했다.한민당의 이승만에 대한 불만은 48년 8월8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성명은 ‘…본당원으로서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극히 빈약하다.본당은 신정부에 대해 시시비비주의로써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라고 주장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한민당은 본격 야당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세력 등을 규합,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민당은 창당 3년4개월만인 49년 1월26일 자연해체하게 되고 49년 2월10일에는 민국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국당은 이어 정부12개부처의 각료중 7명이나 차지해 세를 불려나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밖에 없다고 여겨 이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은 50년 1월 79명의 서명으로 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50년 3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끝났다. ○49년 2월 민국당 창당 하지만 민국당은 동조자를 확보해 계속 이정권에 도전하는 공세를 펴나갔다.민국당 신익희의 국회의장직 진출로 민국당이 반 이승만세력을 한창 규합해 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활동도 중단되고 정쟁은 사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승만측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굳건했다.전쟁중에도 민국당이 차지한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거를 치르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 청·장년들을 강제징집·수용해놓고 간부들은 돈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겪으며 정부불신임이 팽배해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이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 잡아들인 ‘부산정치파동’으로 연결돼 반정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문헌들에서 한민당은 흔히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또한 이승만의 독재적인 행정부 권력에 맞서는 의회 특권의 수호자로 묘사돼있다. 그러나 한민당은 사실상 토지와 지방권력등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군림했으며 재원의 분배와 부의 통제를 둘러싸고 중앙 행정권력과 투쟁을 벌일 뿐이었다. ○6·25중에도 개헌 추진 미 중앙정보국(CIA)은 당시 한국 국회를 대한민국 내의 ‘민주주의 정신의 터전’이고 흔히 입법부에서의 논의가 정부관리들과 가열된 공방을 야기시켰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이 국회가 ‘서구의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집행부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만의)‘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해서도 국가관료의 고위지도부에 계속 참여했다.49년초 도지사,시장,군수등의 명단은 45∼46년 지방관리들의 명단과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민당이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면서도 이승만정권의 정책에는 동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의 보수주의적 반공노선에 동조함으로써 혁신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 6·25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의원내각제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CIA가 5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경쟁’은 ‘보수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했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수많은 당명의 교체속에서도 현재까지 한국 야당의 명맥을 이어준 ‘뿌리’로 치부되고 있다.그러나 첫 야당이 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댐으로써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야 한민당 관료기구 주도”/49년 미 관리 작성 ‘남한정세 조사’ 보고서 확인 이승만정권시기 관료기구에서 한민당의 주도성과 한계는 1949년 3월 미국관리 맥도널과 로지엘이 직접 대한민국 전역을 여행하며 작성한 ‘남한 정세의 조사’라는 보고서와 미국무부 문서 등 당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 정세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각 지역의 도지사·시장·군수 등은 1945∼46년 미군정기 지방관리와 거의 일치함을 보여준다.한민당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면서도 관료기구를 주도했던 것이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역시 ‘산업가 및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따라서 이승만정권과 이들 야당세력 사이에는 ‘권력을 향한 경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었으며 ‘내부 파벌투쟁 또한 강력해 하찮은 자극에도 당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야당은권위주의적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체질적 요소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미 공문서 기록관리청(NARA) 국무부 일반문서중 50년총선관련자료(Developments concerning the 1950 general election)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당의 정강은 유교체제탓인지 정부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표현돼있다.게다가 당시 이는 정강자체는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져 부실한 정당정치를 알 수 있다.이들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권력투쟁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민국당과 대한국민당 양대정당 사이의 주요한 이슈는 민국당이 행정부에 반대하고 국민당은 지지한다는 차이,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국민당 당수 윤치영도 주한미대사관 관리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당과 민국당의 위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민국당은 자유주의를 공언했으나 산업가,지주 등의 지지를 등에 업어 보수정당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전환기 북 위협대응 공조 확인/한미안보협의회의 결과

    ◎‘동두천’ 반환­KF16기 사고 합동조사 합의/미,유엔사­북 장성급회담 개설 협조 요청 9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는 올 1년동안 있었던 양국간의 군사안보 협의를 총결산하는 연례적 행사지만 ‘전환기’적 시기에 개최되어 공고한 양국 동맹관계와 긴밀한 대북공조가 재확인되었단는데 큰 의의가 있다. 북한이 계속되고 있는 경제,식량난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증강 및 대남도발 책동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일 방위협력 지침 개정,북한 김정일의 권력승계,미·중 정상회담,4자회담 본회담 개최,한국 대통령선거 등으로 한반도 및 주변 국제정세에 적지 않은 변화 가능성이 예상되기 때문에 전환기적 의미가 강하다고 한국측은 보고 있다.이때 양국 국방장관이 직접 만나 북한의 위협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공조체제를 확고히 하였다는데 커다란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 다음 구체적 사안이 합의및 논의된 점을 이번 회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첫째,동두천 미군훈련장 6백6만평의 반환이 최종 타결되었다.이 토지반환은 주한미군에게 전용으로 공여된 토지의 14.5%에 해당되며 특히 이번 반환은 한국측의 꾸준한 노력과 협상력에 의해 성취되었다는데 의미가 크다. 둘째,훈련비행중 2대가 추락한 KF-16기의 사고원인 규명과 관련,김동진 국방장관이 미측에 사고 재발방지 대책수립에 도움이 되도록 미국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강력히 요청했다. 셋째,북한의 군사정전위 묵살과 미북간 장성급회담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 한·미 양측이 북한에 제의하기로 한 유엔사·북한군 간의 장성급회담안에 관한 양측의 입장을 심도있게 조율한 점.이제까지 미측은 위기관리 차원의 대화창구 필요성에 포커스를 맞췄고 한국측은 정전협정 기본틀의 유지를 최우선 원칙으로 강조해왔다. 넷째,북한의 위협이 소멸하거나 통일이 이룩된 이후에도 양국 국가이익과 지역안보를 위해 한·미 안보동맹 관계는 계속 유지,발전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같이한 점.양국 안보관계의 미래지향적 측면을 부각시킨 것으로 주한미군의 역할과 관련해 주목되는 공동성명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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