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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스트셀러] 애니 인기에… 日만화 ‘귀멸의 칼날’ 완결판 출간 즉시 1위

    [베스트셀러] 애니 인기에… 日만화 ‘귀멸의 칼날’ 완결판 출간 즉시 1위

    172만 관객을 동원한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의 인기를 반영하듯 서점가에서도 일본의 인기 만화 시리즈인 ‘귀멸의 칼날 23’이 출간하자마자 1위에 올랐다. 이 책은 해당 시리즈의 완결판이다. 23일 교보문고가 발표한 4월 셋째 주 온·오프라인 종합 베스트셀러 집계 순위에 따르면 ‘귀멸의 칼날 23’의 판매 비중은 여성(68.1%)이 남성(31.9%)보다 높았다. 주 구매층은 20대 여성(28.4%)과 10대 여성(15.8%)이었다. ‘귀멸의 칼날’은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된 시대극 판타지 장르의 일본 만화다. 다이쇼 시대, 숯을 파는 마음씨 착한 소년이 도깨비에게 가족이 몰살당한 후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극 중 욱일기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는 2017년 9월 단행본이 첫 출간 돼 지난 21일 완결판이 공개될 정도로 인기를 끄는 작품으로 알려졌다. 교보문고는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개봉 이후 더욱 주목을 받아 시리즈 전체가 인기몰이했다고 분석했다. 2014년 ‘미생’ 이후 오랜만에 만화 분야가 종합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아쿠타미 게게의 ‘주술회전 14’는 출간과 함께 5위를 기록했고, 오다 에이치로의 ‘원피스 98’은 전주보다 15계단 하락하긴 했지만 28위를 기록하는 등 일본 만화가 눈에 띈다. 이밖에 나태주 시인이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그가 쓰거나 엮은 시집들의 순위도 올랐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83계단 상승해 15위를 기록했고, 시 분야 베스트셀러 20위 이내로 보면 9종의 시집이 이름을 올랐다. ●교보문고 4월 셋째 주 베스트셀러 순위 1. 귀멸의 칼날 23 (고토게 코요하루·학산문화사) 2. 질서 너머 (조던 피터슨·웅진지식하우스) 3.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팩토리나인) 4.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등 7명·문학동네) 5. 주술회전 14 (아쿠타미 게게·서울문화사) 6. 주린이가 가장 알고 싶은 최다질문 TOP 77 (염승환·메이트북스) 7. 흔한남매 7 (흔한남매·아이세움) 8.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16 (설민석·아이휴먼) 9.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 (로버트 기요사키·민음인) 10. 마지막 몰입: 나를 넘어서는 힘 (짐 퀵·비즈니스북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오세훈 “박원순 성추행 피해자에 사과 당연…일상 복귀가 공정 사회” [이슈픽]

    오세훈 “박원순 성추행 피해자에 사과 당연…일상 복귀가 공정 사회” [이슈픽]

    “열흘 전 만났는데 계속 눈물 흘리며감정 주체 못하는 피해자 보니 가슴 아팠다”“한 여성 사건 아닌 모든 아들·딸 일일지 몰라”吳, 지난 20일 브리핑서 피해자에 공식 사과吳 “피해자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부서 근무”오세훈, 박원순 장례 행정책임자 좌천 인사오세훈 서울시장이 22일 고(故)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에게 “서울시 책임자로서 서울시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사과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책무”라면서 “진정한,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고 깨닫고 실천했을 뿐”이라며 거듭 사과했다. 오 시장은 지난 20일 서울시에서 브리핑을 통해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고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박 전 시장의 장례를 주도하고 ‘피해호소인’을 명명한 담당 간부를 좌천시켰다고 밝혔다. 吳 “피해자 업무 복귀가 제 책무” 오 시장은 이날 DDP 서울온 스튜디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유튜브 생중계 시청자로부터 댓글로 ‘왜 사과를 했는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오 시장은 “열흘 전쯤 피해자분을 만났는데 그때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못 들었다’는 말씀을 하셔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면서 “만나는 동안 계속해서 눈물, 콧물 흘려가며 감정 주체를 못 하시는 피해자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분이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업무에 복귀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제 책무라고 생각했고, 이제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시장은 “이는 한 여성이 겪은 사건이 아닌, 대한민국 모든 아들·딸의 일일지도 모른다”면서 “이런 일을 겪고도 일상에 복귀해서 직장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이 우리가 만들고 싶은 공정과 상생의 성숙한 사회”라고 강조했다. 그는 당선이 확정된 지난 8일 새벽 소감을 밝히며 “피해자가 오늘부터 업무에 복귀하도록 잘 챙기겠다”고 말했었다. 이후 피해자, 피해자 가족, 변호인단 등과 직접 면담했다.박원순 피해자 “진정한 사과, 눈물 났다”오세훈 “성추행 발각시 즉각 퇴출”“2차 가해 가해지면 관용 없을 것” 피해자 “지금까지 내가 받은 사과는 SNS입장문·기자 질문에 코멘트 형식 사과” 지난 20일에는 브리핑을 열어 “전임 시장 재직 시절 있었던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대해 서울시를 대표하는 현직 서울시장으로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공식으로 사과했다. 오 시장은 그러면서 앞으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할 경우 ‘원스트라이크아웃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 시장은 서울시에서 성희롱·성추행 사례 등이 발생하면 전보 발령 등 ‘땜질식’으로 대응해 근절되지 않았다며 “(성비위 확인 시 즉각 퇴출을 의미하는) ‘원스트라이크아웃제’를 즉시 도입할 것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희롱·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해 2차 피해가 가해질 경우에도 한치의 관용조차 없을 것임을 약속드린다”고 강조했다. 특히 오 시장은 박 전 시장 성추행 피해자가 조만간 업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본인이 가장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부서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큰 틀에서의 원칙은 지켜질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는 오 시장의 공식 사과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람의 진정한 사과”라면서 “제 입장을 헤아려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고 변호인단을 통해 말했다. 피해자는 “지금까지 내가 받았던 사과는 SNS에 올린 입장문이거나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코멘트 형식의 사과였다”며 브리핑을 통해 공식으로 사과한 오 시장의 방식을 높게 평가했다. 피해자는 “제가 돌아갈 곳의 수장께서 지나온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살펴주심에 감사하다”면서 “서울시청이 좀 더 일하기 좋은 일터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제게 보여주신 공감과 위로, 강한 의지로 앞으로 서울시를 지혜롭게 이끌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오세훈, 박원순 장례식 행정책임자 문책“서울시, ‘피해 호소 직원’ 2차 가해에설상가상 박원순 서울시장葬이라니” 피해자, 기자회견서 박원순에 “이러지 말라 소리 지르고 싶었다” 오 시장은 서울시에서 있었던 공식 사과 현장에서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당시 인사와 장례식 문제 등과 관련해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인사 명령 조치도 단행했다”고 덧붙였다. 오 시장은 “사건 발생 즉시 제대로 된 즉각적인 대처는 물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대해서도 서울시의 대처는 매우 부족했다”면서 “설상가상으로 전임 시장의 장례를 서울시 기관장으로 치렀다”고 질타했다. 지난해 7월 피해자는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대독한 서신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한 사과 없이 극단적 선택을 한 박 전 시장에 대해 “용기를 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다”고 밝혔다. 이어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다”며 힘들었던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죽음, 두 글자는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시간에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였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면서 “그러나 5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게 한다”고 썼다. ‘박원순 서울특별시장(葬) 반대 청원’이틀 만에 53만명 동의 이는 당시 박 전 시장이 성범죄로 고소를 당했음에도 서울특별시장(葬)으로 5일장의 장례식과 함께 시민분향소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염두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박원순씨 장례를 5일장, 서울특별시장(葬)으로 하는 것 반대합니다’란 제목으로 청원이 올라온 지 이틀 만에 53만명 넘게 청원했다.오 시장이나 서울시가 관련 책임자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해당 인사는 전날 상수도사업본부장으로 발령 난 김태균 행정국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청 요직 중 하나로 꼽히는 행정국장에서 외부 사업본부장으로 발령 난 것은 사실상 좌천성 인사로 해석됐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고소 이후 여러 행정 절차가 피해자에게 계속 상처를 주게 된 상황을 문책한 것이다. 특히 서울시는 지난해 7월 15일 이 사건 관련 공식 입장을 발표하면서 피해 접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피해를 호소하는 직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에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저지른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다. 시는 또 박 전 시장 장례식을 기관장으로 치르고 서울광장에 시민 분향소를 설치했다. 김 국장은 당시 실무를 총괄한 만큼, 오 시장 취임 후 문책 인사의 첫 번째 대상이 된 셈이다. 앞서 김 국장은 지난해 4월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성폭력 사건이 있었을 때도 가해 직원에 대한 인사 조치와 징계, 피해자 보호 등 필요한 절차를 신속하고 엄정하게 진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법원 “박원순, 여직원에 성희롱 문자”인권위 “박원순 성적언동, 성희롱에 해당” 지난 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는 내용의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인권위 판단에 앞서 법원에서도 박 전 시장의 여직원 성추행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조성필)는 1월 준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 정모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날 재판부는 피해자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박 전 시장이 자신의 비서로 일하던 피해자에게 성적인 문자와 속옷 사진을 보냈고, ‘냄새를 맡고 싶다’ ‘몸매가 좋다’ ‘사진을 보내달라’ 는 등 문자를 보낸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또 박 전 시장이 피해자가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도 ‘남자에 대해 모른다’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갈 수 있다’ ‘섹스를 알려주겠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로 봤다. 앞서 피해자측 법률대리인었던 김재련 변호사는 지난해 7월 기자회견 당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둘이 셀카를 찍자’며 피해자에게 신체를 밀착하거나, 무릎에 나 있는 멍을 보고 ‘호’해주겠다며 무릎에 자신의 입술을 접촉했다”고 설명했다. 또 “집무실 안 내실이나 침실로 피해자를 불러 ‘안아달라’고 신체적 접촉을 하고,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해 지속적으로 음란한 문자나 속옷만 입은 사진을 전송해 피해자를 성적으로 괴롭혀왔다”고 일부 공개했다. 박 전 시장은 지난해 7월 피해자로부터 강제추행 등 혐의로 고소됐으나 이튿날 실종된 뒤 서울 북악산 인근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오지의 일상이 詩였소… 동상면 사람들 꿈 담아낸 ‘동상이몽’

    오지의 일상이 詩였소… 동상면 사람들 꿈 담아낸 ‘동상이몽’

    영감 산자락에 묻은 지 수년 지나/백 살에 초승달 허리 이마 주름 뒤덮는데/왜 어찌 날 안 데려가요이, 제발 후딱 데려가소, 영감/ 올해 101세인 전북 완주군 동상면 주민 백성례 할머니가 일찍 떠나간 남편을 그리며 쓴 ‘영감 땡감’이라는 시는 주민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산세가 험해 전국 8대 오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완주군 동상면 주민들의 고된 삶과 구구절절한 사연이 한 권의 시집으로 탄생했다. 완주군은 7일 국내 처음으로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시로 승화시킨 ‘주민채록 시집’인 ‘동상이몽: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동상이몽’은 동상면의 두 가지 꿈을 뜻한다. 첫 번째 꿈은 동상 100년 역사 찾기, 두 번째 꿈은 동상주민의 예술가 만들기다. 270쪽의 이 시집은 ‘호랭이 물어가네’, ‘다시 호미를 들다’ 등 6부로 구성됐다. 다섯 살배기 박채언 어린이부터 100세 어르신까지 말문을 연 이 시집은 주민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만들어 낸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시집이 나오기까지 공무원 시인 박병윤 동상면장의 노력이 컸다. 박 면장은 동네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시로 승화시켰다. 코로나19로 주민들이 외지인과 만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를 감안해 직접 나섰다. 완주군 소양면에 귀촌한 윤흥길(79) 작가도 편집을 돕고 서평을 써 시집의 품격을 높였다. 6개월 강행군으로 탈진해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진 박 면장은 “가슴속 깊이 맺힌 어르신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어느 시보다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면서 “시집의 주인공은 바로 동상면 주민”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박성일 완주군수도 “시를 읽는 동안 아픔들이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울먹였다”며 “이제 동상면은 시인의 마을이 됐고 주민 모두가 살아온 삶이 시꽃으로 피어나 그 꽃향기가 오래도록 퍼져 나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14일 동상면 학동마을 여산재에서 열린다. 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홍시 먹고 톡톡 뱉은 사연 ‘시’가 됐다

    홍시 먹고 톡톡 뱉은 사연 ‘시’가 됐다

    영감 산자락에 묻은 지 수년 지나/백 살에 초승달 허리 이마 주름 뒤덮는데/왜 어찌 날 안 데려가요이, 제발 후딱 데려가소, 영감/ 올해 101세인 전북 완주군 동상면 주민 백성례 할머니가 일찍 떠나간 남편을 그리며 지은 ‘영감 땡감’이라는 제목의 시는 주민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산세가 험해 전국 8대 오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전북 완주군 동상면 주민들의 고된 삶과 구구절절한 사연이 한 권의 시집으로 탄생했다.전북 완주군이 국내 최초로 주민들의 이야기를 시로 승화시킨 ‘주민채록 시집’은 ‘동상이몽: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 ‘동상이몽’은 동상면의 두 가지 꿈을 뜻한다. 첫번째 꿈은 동상 100년 역사 찾기, 두번째 꿈은 동상주민 예술가 만들기다. 270쪽의 이 시집은 ‘호랭이 물어가네’, ‘다시 호미를 들다’ 등 6부로 구성됐다. 다섯 살배기 박채언 어린이부터 100세 어르신까지 말문을 연 이 시집은 주민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만들어낸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시집이 나오기까지 공무원 시인 박병윤 동상면장의 노력이 컸다. 박 면장은 동네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시로 승화시켰다. 작가나 출판사에 용역을 줄 경우 비용도 많이 들어가고 코로나19로 주민들이 외지인과 만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를 감안해 직접 나섰다.그는 6개월 동안 틈틈히 발품을 팔아 전국 최초 구술채록 시집을 완성했다. 완주군 소양면에 귀촌한 소설가 윤흥길(79) 작가도 편집을 돕고 서평을 써 시집의 품격을 높였다. 강행군으로 탈진해 두번이나 병원 신세를 진 박 면장은 “가슴 속 깊이 맺힌 어르신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어느 시 보다 깊은 감동으로 다가 왔다”면서 “시집의 주인공은 바로 동상면 주민이다”며 환하게 웃었다. 박성일 완주군수는 “시를 읽는 동안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세대에 겪어야 했던 아픔들이 글에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울먹였다”며 “이제 동상면은 시인의 마을이 됐고 주민 모두가 살아온 삶이 시꽃으로 피어나 그 꽃향기가 오래도록 퍼져나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동상면은 시집에 그려진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고종시 마실길’에 ‘주민 시 감상길’을 만들고 100세 어르신 등 다섯 가정에는 시인의 집, 이야기가 있는 시골테마 사업, 시인의 마을 아카데미 사업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오는 14일에는 동상면 학동마을 여산재에서 출판회도 갖는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인터뷰] 이어령 “내 모든 것 글로 남기고 떠날 것...죽음은 끝 아냐”

    [인터뷰] 이어령 “내 모든 것 글로 남기고 떠날 것...죽음은 끝 아냐”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불안한 것이죠. 하지만 ‘어제 내가 세상을 떠났으면 오늘 내가 하는 것을 못하게 됐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죽음을 앞둔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겁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몰랐던 것을 배우는 존재거든요.” ‘한국 지성사의 산증인’ 이어령(87) 전 문화부 장관은 끝자락까지 지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본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라면서 “건강이 다할 때까지 머릿속에 들어간 모든 것을 마지막 한 자까지 글로 남기고 떠나려 한다”는 말엔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서 책임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 전 장관은 서울신문을 포함한 언론사 논설위원과 문학 평론가, 대학 교수 등을 두루 거쳤고 행정가로서도 활약했다. 2017년 암 선고를 받은 뒤 치료를 마다한 채 마지막 기력까지 다해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9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딸 고 이민아 목사를 추모하는 에세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 개정판을 출간했다. 외부와의 접촉을 자제하는 이 전 장관은 22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엔 민아 생전에 서로 못다 한 말들이 남아 이 책을 썼다”면서 “민아의 10주기가 가까워지면서 그가 남긴 사랑의 자취를 돌아보며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과 슬픔을 참았던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는 의미에서 책을 다시 냈다”고 밝혔다. 이어 “나 자신도 딸의 10주기인 내년까지 살 수 있을지 불투명해 출간 일정을 (9주기로) 앞당겼다”고 덧붙였다.이 전 장관의 딸 고 이민아 목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검사와 변호사로 일했다. 첫 아이를 먼저 세상에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은 뒤 기독교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위암 판정을 받고 영면에 든 때가 2012년 3월이다. 책은 이 과정을 따라가는 각각의 단편 에세이와 편지를 엮어 동시대 부모 마음을 애틋하게 대변한다. 굿나잇 키스를 기대하며 서재 앞을 서성이던 딸을 안아주지 못한 일은 고스란히 저자의 아픔으로 남았고, 저자는 “네가 태어난 순간 나도 아버지가 됐다”고 고백한다. 이 전 장관은 2015년 4월에 낸 책의 초판 서문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이에게 바친다”고 썼다. 이번 개정판 서문은 깊은 슬픔을 달래지 못한 그때에서 벗어나 감내하고 기꺼이 표출하는 느낌이랄까. “네가 돌아왔구나. 널 잃고 황량했던 내 가슴에 꽃으로 새로 돌아왔구나. 민아야 이제 눈치 볼 것 없이 엉엉 울어도 된다.” 그는 “슬픔보다 새로 발견한 죽음의 문제, 그리고 그동안 오랫동안 생각했던 딸과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자 했다”며 “단순히 딸을 잃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개인의 체험이 집단의 보편적 체험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썼다”고 했다. 초판에 실렸으나 이번 개정판에서 빠지게 된 시들은 저자가 새로 쓴 시들과 함께 내년에 시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이 전 장관은 “딸이 ‘시험이 싫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인터뷰한 것을 뒤늦게 알고 가슴이 아팠다”고 떠올렸다. “아이가 외로웠는데 물질적 환경이 나아지면 행복을 줄 것으로 생각했지. 죽음을 앞뒀을 때 죽음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겁니다.” 이 전 장관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개인을 비행기로 보면 가족은 사회로 나가고 들어오는 일종의 활주로와 같아요. 긴 활주로는 떠날 때도 돌아올 때도 속도를 늦춰줄 때까지 받아주는 너그러움이 있는 거죠.” 그러다 이 사회의 큰어른으로서 “최근 저출산 고령화로 가족이 붕괴하는 상황을 보고 있다”는 걱정도 덧댔다. 무신론자였던 이 전 장관은 독실한 신자 민아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는 “종교를 믿는 순간 가정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고 용서하게 된다”면서 “기독교에선 사랑보다 용서가 더 큰데, 증오와 갈등으로 뒤덮인 지금은 온 사회가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않다”고 우려했다. 그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우리가 어려울 때 신이 왔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은 오는 게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라며 “신이 있느냐를 묻기 전에 내가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남을 용서할 수 있다면 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한국 현대사에서 문화적으로 전환점이 됐던 순간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 2016년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꼽았다. 그는 “AI 혁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에 ‘알파고의 추억’이라는 책을 집필 중”이라고 근황을 전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야만적이고 위험한 이집트 페미니스트 엘사다위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야만적이고 위험한 이집트 페미니스트 엘사다위

    “사람들이 날 보고 야만적이고 위험한 여자라고 말해요. 난 진실을 말하거든. 그리고 진실이란 야만적이고 위험하거든.” 이집트의 페미니스트 나왈 엘사다위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21일(현지시간) 노환 때문에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영국 BBC가 이집트 언론을 인용해 전했다. 고인의 페이스북은 “나왈 엘사디위, 안녕”이라고만 밝혔다. 의사이며 페미니스트이며 작가였다. 소설, 에세이, 자서전에 자신의 주장을 담았고 수다에 열정적으로 끼어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솔직했고 여성의 정치적, 성적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지칠 줄 모르고 헌신했다. 위험 수위를 넘나든 발언 때문에 논란도 일으켰고 살해 위협에다 수감된 일도 적지 않았다. 친구이며 통역이던 옴니아 아민은 지난해 BBC 인터뷰를 통해 “타고난 싸움꾼”이라면서 “그녀와 같은 사람은 보기 드물다”고 했다. 1931년 카이로 외곽 마을에서 아홉 자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그는 13세에 첫 소설을 낼 정도로 조숙했다. 아버지는 여유롭지 않은 정부 관리였고, 어머니는 부자 집안 출신이었다. 가족은 10세의 그를 시집 보내려 했는데 어머니에게 대들어 단념시켰다. 아버지는 그에게 교육받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날 할머니가 “사내 하나는 적어도 딸아이 열다섯 만큼의 가치가 있어. 딸들은 쓸모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돌아봤다. 아민 박사는 “그는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입밖에 냈다.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6세 때 여성 할례하는 곳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세세하게 적어 고발했다. 그의 책 ‘이브의 숨겨진 얼굴’을 보면 할례를 받으며 욕실 바닥에 딩굴며 괴로워하는데 옆에서 어머니가 지켜보는 장면이 나온다. 해서 그는 평생에 걸쳐 할례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이집트에서 할례가 금지된 것은 2008년이었는데 그는 끔찍한 일이 그렇게 오래 지속된 점을 개탄했다. 1955년 카이로대학 의대를 졸업한 뒤 정신과 전문의가 됐다. 이집트 정부 공중보건 책임자에 임명됐지만 1972년 넌픽션 ‘여인들과 성’을 출간하자 경질됐다. 몇년 전에 창간했던 잡지 ‘헬스’도 1973년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목소리를 높였고 집필을 이어갔다. 1975년 감옥에서 만난 여자 사형수들을 소재로 한 소설 ‘우먼 앳 포인트 제로’를 발간했다. 2년 뒤 내놓은 ‘이브의 숨겨진 얼굴’은 마을 의사로 일하며 목격한 성 유린이나 명예살인, 성매매 실태를 고발했다. 남자들은 광분했는데 비평가들은 아랍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는, 어처구니없는 비평을 해댔다. 1981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에 반대하는 인사 명단에 포함돼 3개월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화장실 휴지에 눈썹펜으로 적어 회고록 원고를 만들었다. 눈썹펜은 성매매를 하다 수감된 이들이 밀반입한 것들이었다. 아민은 “그는 진실을 말한다면 규칙이나 규제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다트가 암살되자 풀려났는데 검열과 출판 금지는 풀리지 않았다.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거나 법정에 불려가는 일이 몇년 이어지자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종교, 식민주의, 서구의 위선을 까발리고 무슬림 베일(가리개)을 반대하고 화장과 몸매를 드러내는 옷을 입자고 해 동료 페미니스트들과도 불화를 겪었다. 제이납 바다위 BBC 앵커가 2018년 만나 세상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진 것 같다고 떠보자 엘사다위는 “아니, 난 더 직설적이어야 해. 더 공격적이어야 해. 왜냐하면 세상이 더 공격적이게 되거든. 해서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해. 난 화가 났기 때문에 더 크게 얘기해야 해”라고 말했다.그의 책은 4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돼 국제적인 명성도 누렸다. 런던에서 출판 에이전시로 일한 카디자 세사이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정치관에 동조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지요. 하지만 날 가장 고무시키는 것은 그녀의 저작, 그녀가 이룬 것들과 여성을 위해 할 수 있었던 일들”이라면서 “특히나 아프리카 여성이나 유색인종이라면 그의 활동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여러 대학의 명예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타임이 선정한 ‘올해 100명의 여성’에 들었고 커버 스토리로 다뤄졌다. 하지만 고인은 한 가지 이루지 못한 일이 있다고 했다. 아민 박사는 “정작 조국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못 받아 그것이 유일한 꿈이자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6년 일시 귀국했으나 논란이 뜨거웠다. 2004년 대선에 출마했고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에 저항한 ‘아랍의 봄’ 봉기 때 카이로 타히르 광장에 서기도 했다. 세사이는 세대를 넘어 젊은이들이 고인을 롤모델로 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서도 “엘사다위는 누군가의 영웅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스스로의 영웅이 되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예술의 경계 지우다 문학에 미술 입히다

    예술의 경계 지우다 문학에 미술 입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야심적 행사가 열리고 있다. 봄날 햇살 가득한 오후 참으로 오랜만에 덕수궁을 찾았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지인인 윤효 시인과 동행했는데, 윤 관장은 김인혜 학예연구실 근대미술팀장과 함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김 팀장의 꼼꼼하고도 친절한 설명을 통해 이번 전시의 내용과 함께 1930년대를 전후로 한 한국 예술사의 빛나는 장면들을 충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꽤 익숙한 문인들 사이로 가끔씩 돋을새김되는 생소한 이름의 화가들이 퍽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문학사와 미술사는 그렇게 한 몸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경계를 허무는 예술, 동행자로서의 미술관 전시장 첫 코스는 이상(李箱)이 차린 ‘제비다방’ 분위기를 담았다. 제비다방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이상의 ‘자화상’(1928)이 걸려 있었다는 증언은 있으니, 이 공간은 그런대로 90여년 전 경성거리를 탐사하는 기분을 밝혀 주었다. 전시 기획 가운데 단연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1930년대 전후 잡지들이 문인과 화가를 결합시켜 만들어낸 ‘화문’(畵文) 장르였다. 가령 ‘여성’ 1938년 3월호에 백석의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발표됐는데, 그의 절친인 화가 정현웅이 그림을 함께 그려 넣어 이 작품은 아름다운 채색 시화로 남은 것이다. 이들 말고도 이상과 구본웅, 김기림과 이여성, 이태준과 김용준, 김광균과 최재덕, 구상과 이중섭 등 문학과 미술이 주고받은 ‘이인행각’(二人行脚)은 우리에게 풍요롭고 아득한 시간의 힘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렇게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은 수많은 파생적 아우라(Aura)를 만들어 간다. 서로 분야가 다른 예술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 내는 이러한 접점은 우리를 그 안으로 초대해 숱한 이야기를 건네 온다. 문학을 품은 미술, 미술이 녹아든 문학이 협업해 이루어 낸 이러한 융합의 차원이야말로 그야말로 윤 관장의 생애를 빼닮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화두는 언제나 ‘시화일률’(詩一律)이었다.“문인과 화가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예술적 동반자로 살아왔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그런 풍경이 보편적이었지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 문인과 화가가 동석하는 일은 드물어졌고, 좋게 말해 전문화라지만 통섭과 융합의 관점에서 보자면 빈곤해진 형국이라고 윤 관장은 말한다. “우리나라의 장르 결벽증도 이러한 융합 지향의 움직임을 다소 방해하는 것 같고요.” 윤 관장은 1982년 미술평론가로 등단해 40여년 동안 우리 미술 현장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 왔다. 서양미술사가 주류인 우리 미술계에서 그동안 소외됐던 동아시아미술이나 제3세계 미술에도 관심을 갖고 그것의 실체를 추적했다. 나아가 그는 미술이 단순한 감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실체 안에서 ‘생활미술’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재작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으면서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어 대중들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4관 체제다. 과천, 덕수궁, 서울, 청주 각각의 특성화 작업을 통해 효율적 운영을 하고 있다. 그는 “미술관을 한마디로 은유하면 친구이자 동행자”라고 했다. “관람객의 눈높이와 취향이 워낙 다양하니까 이제는 쌍방 소통이 필요하다”고도 부연했다. 미술관 규모가 커지고 각각 특성화하면서 미술인들의 역할과 국민들의 기대가 함께 커졌다고 한다. “전문가들에게는 예술적 담론을 만들어 내는 모체가 되고, 일반 관객들에게는 문화적 취향을 충족해 새로운 경험을 가능케 하는 미술관이 되게끔 하는 것이죠.” 윤 관장은 무엇보다 한국 미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연구 기능을 강조한다. 전시 기능 위주에서 연구하고 교육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수립하는 미술관을 생각하니 정말 ‘윤범모 브랜드’를 보는 듯하다. “우리 미술을 중심에 두는 주체적 자존심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시작의 스승으로서의 독서와 여행 윤 관장은 시집을 다섯 권 펴낸 시인이다. 미국 뉴욕에 잠시 체류하던 1980년대에 그는 첫 시집 ‘불법체류자’(1988)를 상재했다. 등단이라는 절차가 생략된 채였다. 그 시집은 후기에서 밝혔듯이 “불법이라, 정처를 찾지 못하고 언제까지 방황해야 할 것인가. 언제 합법적 공간에서 여유 있는 체류가 가능할까” 하는 젊은 날의 고백을 담은 성장 기록이었다. 이 시집은 모국의 역사, 이를테면 우리가 분단 시대를 겪고 민주화 운동을 치르면서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 역사철학적 고민을 담고 있다. 그곳에서 느낀 백인문화도 비판적으로 담아내면서 ‘시인 윤범모’가 노래해 갈 시적 의제(agenda)를 오래전부터 만들고 있었다. 미술에서 우리 것을 강조했듯이, 시에서도 우리의 역사와 숨결을 가득 불러온 것이다. 시인은 미대생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결같은 답변을 한다. “좋은 그림은 좋은 시와 마찬가지 원리를 품고 있죠. 독만권서(讀萬券書) 행만리로(行萬里路)!” 책을 많이 읽고 먼 곳을 여행하라는 말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이 말을 지침 삼아 실천하려고 애썼고, 독서와 여행은 한때의 직업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책과 여행이 시작(詩作)의 스승인 셈이다. “미대생들에게 세계문학전집 100권 읽기를 숙제로 내줍니다. 인문학적 배경이 부실하면 그만큼 그림 바탕이 허술해지죠.”그는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다가 불교 미술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석굴암’이 역시 이 땅 최고의 걸작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석굴암 관련 문헌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객관적 논증은 어렵지만 그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석굴암을 알아가게 됐고 어느새 그 발견 과정을 시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 비로소 시를 천천히 공부할 시간을 가졌고 2008년에 등단 절차를 치렀다. 이어 시집들을 균질적이고 지속적으로 펴내면서 시인으로의 길에도 매진하고 있다. ‘노을 씨, 안녕!’(2009), ‘멀고 먼 해우소’(2011), ‘토함산 석굴암’(2015), ‘바람 미술관’(2020)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는 “가슴에 내리꽂히는/ 하늘의 죽비 소리”(‘노을 씨, 안녕!’ 속 ‘천둥소리’)로, “소나기 죽비를 불러 모아/ 절마당을 가득 채우고”(‘멀고 먼 해우소’ 속 ‘달빛 소나기’) 있는 달빛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석굴암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복원한 토함산 석굴암은 우리로 하여금 석굴암에 대한 경모와 감동의 서사를 경험하게끔 해 주는 장편 연작 시집이다. 이 시집에 대해 시인은 “석굴암의 가치가 국제무대에서 재인식되는 계기에 조그만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후기’)고 썼다.●동량 만들어 일가를 이루어가는 ‘시인 윤범모’ 미술학도로서 시를 써 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시는 왜 쓰는가 하고 항상 묻지요. 왜 이런 끌탕을 자초하는가. 시인은 스스로 천형(天刑)을 안아 들이는 존재 같아요. 좋은 시는 좋은 삶과 직결될 것이니 얼마나 어려운 경지입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 발표한 작품에서 그는 “집 한 채 세우는 데는 천지가 도와야 합니다/ 동량(棟樑) 만들어 일가(一家)를 이루는데 쉬워서야 되겠습니까”(‘시와 소금’ 2021년 봄호 중 ‘늙은 목수의 이야기’)라고 노래했다. 동량을 만들어 일가를 이루어 가는 어려운 도정을 두고 윤효 시인은 “세상의 이치를 한꺼번에 잡아 일필휘지하는 필력”이라고 의견을 주었다. 그렇게 시인은 시를 통해 “캄캄한 밤/ 염치불구하고 박차는 문/ 멀고 먼 해우소 가는 길에/ 드디어 터지는 오도송(悟道頌)”(‘멀고 먼 해우소’)을 얻어 갔다. 그에게 시는 형상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상 있는 시였던 셈이다. 시와 그림은 한 몸이고 한마음이라는 엄정한 사실이 체현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릇을 만들던 사기장(沙器匠)은 물레를 버리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불상을 깎던 불모(佛母)는 만년에 자신이 만든 불상은 가짜라고 깨부수었다는 이야기. 나는 무애행(無碍行)에서 한 소식을 얻고자 희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풍류까지 곁들여 있다면 비단 위의 꽃일 테고요.” 윤범모 시인은 자신의 예술관을 이렇게 피력한다. 불가적 깨우침과 치열한 삶의 탐구가 결속한 그의 시가 무애행으로 펼쳐질 것을 예감케 해 준 순간이었다. 덕수궁관 관람객이 대개 장년층일 거라는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날아갔다. 젊은층이 단연 많았기 때문이다. “원래 덕수궁은 중년 이상이 주된 층이었는데, 저도 놀랐죠. 새로운 변화로 매우 좋은 일입니다. 외국인들이 ‘다이내믹 코리아’를 미술관에서 느낀다고 합니다.” 오래전 이상은 그의 유작 ‘실화’(失花)에서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썼다. 지금도 윤 관장은 ‘우리 것’이 중심에 서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꿈꾸면서 자신만의 비밀을 키워 가고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베레모에 파이프 문 ‘명동백작’ 럭비선수… 詩는 건강한 정신이었다

    베레모에 파이프 문 ‘명동백작’ 럭비선수… 詩는 건강한 정신이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조병화, ‘꿈의 귀향’ 전문)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 옆에 지은 묘막 ‘편운재’에서 막내아들이 지은 시의 전문이다. 조각구름마저 쉬어 가는 곳이라는 뜻의 편운재는 아들의 효심이 지은 그리운 구름의 집이자 어머니의 숨결이 시가 된 시의 집이다. 아들은 그곳에서 어머니가 작고하신 나이와 같은 수의 시 81편을 짓는다. 모두 어머니를 위한, 어머니에 의한, 어머니만을 그린 시다.편운재의 현관 옆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 있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어머니가 계신 곳을 짚어 보고자 하는 시인의 뜻이다. 어머니에 관해서라면 생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 시인 조병화다. 그는 1921년 5월 2일 경기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서 5남 2녀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미동공립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와 화학, 수학을 공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사로 재직했고, 서울고등학교와 경희대에서도 근무했다. 그 후 자리를 옮긴 인하대에서 정년퇴임을 하며 길었던 교직 생활을 마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열중함과 동시에 창작 활동도 왕성히 했다. 1945년에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출간을 시작으로 53권의 시집과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화집 5권 등을 합하여 총 16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그가 다룬 시편들의 소재보다 그가 다루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는 세간의 농담은 이 저서들의 방대함에서 시작된 것일 터. 시인의 다양한 시편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로 뻗어 나갔다. 그 덕분에 그의 제자들은 그를 “가장 많은 시집을 냈으며, 세계문학행사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시인이었고, 문학상도 가장 많이 받은’ 작가로 기억했다. ‘가장’이 여러 번 붙는 시인은 그 시작 활동의 우수성과 공헌을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을 받기에 이른다. 금관문화훈장의 기념비는 그의 고향 난실리에 세워졌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후배 문인들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기 위해 1991년부터 편운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기 시작했다. 시인이 작고한 후에는 그의 가족들이 안성시의 후원을 받아 현재까지도 문학상 운영을 지속하고 있다. 왕성한 창작과 사회공헌활동, 은퇴 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강 등으로 바삐 지내던 시인은 절필 선언을 한 지 6개월 만에 영면에 들었다. 시인이 절필을 선언하고 타계하기 직전까지의 여백이 유독 짧게 느껴지는 것은 생전에 그가 했던 여러 활동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김수영·박인환… 그리운 명동백작들 지금의 서울 명동은 코로나19로 인해 비어 가는 가게가 속출하는 거리가 됐지만 한때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으면 가장 먼저 발걸음을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6·25전쟁이 있기 전의 명동은 예술인들의 거리이기도 했다. 명동 개발의 붐이 일기 전인 1960년대까지도 명동은 낭만과 꿈, 우울과 병증, 창작에 대한 열의와 애환, 작가들의 우정과 반목이 얼기설기 엮여 있던 곳이었다. 명동은 가히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조병화 시인 역시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여기서 김수영, 박인환, 이봉구, 김환기 등과 함께 ‘명동백작’으로 불릴 만큼 명동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그 시간 덕분이었을까. 6·25전쟁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김수영 시인이 조병화 시인에게 엽서를 보내 자신의 생사를 알렸다. ‘나 이곳에 있다. 포로수용소이지만 무섭지 않은 곳이다. 한번 찾아와 다오.’ 부산에서 이 엽서를 받은 조병화 시인은 그 길로 박인환 시인과 거제 포로수용소에 찾아가 김수영 시인을 만나고 돌아온다. 그리고 명동의 문우들에게 ‘김수영이 살아 있다’고 일러 줬다. 박인환, 김수영 시인과 막역한 우정을 나누다가 두 벗을 차례로 먼저 떠나보내며 그들의 장례에 조시(弔詩)를 써서 애도했다. 명동백작의 시대는 조병화 시인이 가장 늦게까지 이생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2021년인 올해는 조병화 시인과 김수영 시인이 백 세를 맞이하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더불어 김종삼 시인까지도. 한 인물이 나고 자라고 돌아간 시계만을 이야기하는 100년이 아니라 한 세계가 한 세기를 거뜬히 이겨 낸 100년이다. 시인의 힘은, 시의 생명력은 이토록 길다. 그들이 있어 한국문학의 지형도가 다양하고 풍성한 100년이었다. 우리가 미처 다 볼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100년도 그들의 시편들이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리라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돌아본 문인 서재 중 유일한 럭비공과 유니폼 시인은 검은색 베레모와 파이프, 럭비공과 수많은 저서로 독자들에게 각인돼 있다. 시인의 베레모와 파이프, 명동의 나날들까지는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지만 럭비라니. 시인은 경성사범학교 시절부터 럭비를 시작해 럭비 선수로 활동했으며, 부임하는 학교마다 럭비부를 창설해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신체에서 나오는 건강한 정신이 학생들과 선생을 이어 주는 끈이 되기도 하며 또 시를 쓰는 정신에 활력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그가 럭비 선수로 활동했던 이력은 조병화문학관 한편에 오롯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 뜬금없이 럭비라니, 하는 물음에 대한 유쾌한 답은 그가 입고 뛰던 유니폼과 트로피들 앞에서 찾을 수 있게 해 뒀다. 여러 문학관을 찾아가 봤지만 문인의 서재에 럭비공들이 즐비한 곳은 단연코 이 자리밖에 없을 터다.●구름의 집 ‘편운재’·개구리 소리 듣는 ‘청와헌’ 교직에서 은퇴한 시인은 난실리로 돌아와 편운재 옆에 개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청와헌’(聽蛙軒)을 짓고 기거하며 여러 문인의 사랑방지기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기거하며 시와 예술에 대해 논했던 곳. 젊었을 적의 명동의 시간이 고스란히 재현된 곳이 바로 난실리다. 시인은 편운재와 청와헌에서 숨 쉬는 것처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문학관에 유독 문인에 대한 자료와 사진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이 작고한 뒤에 문학관의 전시실에 놓인 유품들이 그의 꼼꼼한 정리벽을 말해 주고 있다. 사소한 메모와 창작 노트들, 자필 원고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림과 서예 작품에 찍던 낙관, 즐겨 마시던 술병, 애용하던 찻잔과 커피 그라인더, 베레모와 펜던트, 만년필과 몽블랑 잉크, 펜던트와 시계, 세계 각국에서 모아 온 기념품들로 장식한 페치카, 스케치북과 카메라와 럭비부 시절의 운동용품 등이 전시돼 있다. 편운재 현관에는 “살은 죽으면 썩는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생에 대한 성실성과 근면을 유독 엄격하게 훈육했던 어머니의 음성을 벽에 새기며 시인은 어떤 마음을 다지고자 했던 것일까. 그 가르침 덕분에, 어머니를 종교처럼 믿고 의지했던 까닭에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또 성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한 사람의 생애에는 희로애락애오욕이 있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 세계와 활동에도 활발한 세계 속에 묻힌 고뇌와 오욕이 있었을 거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세계를 읽고 재해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또한 그의 활동을 되짚어 보며 평가를 내리는 것 역시도 후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만큼 한국문학에서 그의 자리가 크다는 방증이다. 시인의 100년이 고스란히 저장된 난실리 전체가 문화특구가 된 것 역시 시와 시인의 깊이와 크기를 톺아볼 수 있는 증거다. 편운재와 청와헌, 조병화문학관이 있는 난실리는 봄이 유독 예쁜 고장이라고 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조병화 시인의 터에 다가오는 봄에는 꼭 한번 들러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곳에서 100세가 된 노시인이 넌지시 건네는 투명한 술잔에 문장을 가득 채워 오시기를 바라며.소설가 이은선
  • 詩랑 동백이랑, 붉게 물들어볼까

    詩랑 동백이랑, 붉게 물들어볼까

    어디에선가 시 한 편을 접했다. 제목은 ‘숙희이야기’. 이른바 ‘라떼 시절’에 경북 포항의 구룡포에서 벌어진 애사가 담긴 시다. 한데 시에선 여태 알던 구룡포와 다른,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기가 났다. 시를 쓴 이는 권선희 시인. 쉰여섯 생애 가운데 장성한 이후 20년 세월을 구룡포에서 살아온 이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구룡포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룬 시집이 벌써 두 권째다. ‘구룡포로 간다’(2007)가 앞서고 ‘꽃마차는 울며 간다’(2017)가 뒤를 이었다. 지난해 펴낸 산문집 ‘숨과 숨 사이 해녀가 산다’까지 포함하면 세 권째다. 어느 곳엔들 저마다의 속사정이 없을까만, 이 마을엔 대체 무슨 사연이 이리 많은 건가. 주민이라야 7000명을 헤아리는 동네에서 말이다.“구룡포발 대구행 아성여객 차장이었을 때 숙희는 한 마리 비둘기였다지요 빨간 명찰 말년 병장 숙박계 날려쓰던 겨울 밤 싸나이 팔뚝에 머리 파묻고 처음 날개를 벌렸다지요 헐거운 여인숙 그 방을 두고 머리채 질질 반장 손에 끌려간 새벽은 세찬 바람으로 오래 울었다지요 태광호도 중심 잔뜩 부풀어 돌아오는데 아무튼 포장치고 회 뜨는 쉰 살 숙희 세꼬시 썰리듯 살아도 첫차처럼 올라탔던 싸나이는 여적 내려오지 않는다지요 명치끝에 아예 눌러 붙었다지요” 시 ‘숙희이야기’의 전문이다. 초봄의 갯마을로 발걸음하게 만든 시. 실제 아성여객에 근무하던 차장(안내양)의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권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시들이 대부분 이랬다. 구룡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시가 됐다. 어찌어찌 권 시인과 연락이 닿았다. 그에게 귀동냥이라도 해서 새로운 느낌의 구룡포를 만날 요량이었다. 사실 여행자에게 동해 바다는 늘 낭만과 포용의 공간이어야 했다. 삶이 무료해질 때마다 그 바다 앞에 나를 세우려는 이들이 모험과 충전을 위해 찾는 무대였다. 하지만 낭만 너머에는 누군가의 고단한 삶이 있다. 권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구룡포’는 그런 다양한 생의 시간이 머무는 공간이다. 시인은 구룡포 여정의 들머리로 선소(船所)를 권했다. 선소는 배를 만들거나 수리, 해체하는 곳이다. 배의 일생이 시작되고 끝을 맺는 자리란 뜻이다. 문제는 선소의 분위기가 여행자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 예전과 다르다고는 해도 선소는 여전히 걸걸한 사내들이 많은 일터다. 자칫 사진을 찍다 으르딱딱대는 선주와 마주칠 수도 있다. 될 수 있으면 눈으로만 살피며 빠르게 지나길 권한다. 선소 위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용의 대가리’ 용두산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언덕에 서면 구룡포항 일대를 얼추 굽어볼 수 있다. 구룡포항엔 위판장이 세 곳이다. 항구는 하나지만 위판되는 어종에 따라 구역이 나뉜다. 주민들은 이를 ‘판장’이라 부른다. 선소가 있는 남쪽부터 트롤선, 대게를 포함한 잡어선, 그리고 활어선(주로 오징어잡이배) 판장이다. 선소에서 잡어선 판장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구룡포 읍내다. ‘매월여인숙’부터 찾는다. 시 ‘숙희이야기’의 배경이었던 곳. 읍내 구룡포노인무료급식소 바로 옆에 있는데도 찾기가 쉽지 않다. 햇볕 한 줌 겨우 드는 골목을 지나야 나온다. 예전엔 이 일대에서 명자깨나 날리던 숙소였다고 한다. 지금은 ‘여인숙’은 사라지고 낡은 건물만 남았다.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여인숙(‘매월여인숙’)은 이제 기억 속에 박제되고 만 거다. 읍내 고래고기 음식점에 전시된 고래 생식기처럼 말이다. 마을 골목골목엔 이 같은 사연들이 수없이 흐른다. 손 없는 집에 들어가 자식을 여섯이나 낳은 첩과 그 첩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받아낸 뒤 부산으로 가 광주리 장사로 먹여 살린 본부인 이야기(‘누가 더 불쌍한가’), 술추렴하다 “시발 문디 지랄 같은 기마 화딱 디비 엎어 뿔고 에이 시벌컥벌컥벌컥벌컥컥 컥”대던 사내 이야기(‘돌림노래’), “새끼 내삐리고 소식 는 둘째 놈” 탓에 “고래 새끼만도 몬한 내 손주 놈 가여버”하던 할아버지의 이야기(‘사램이 고래만 같으믄’)들이 항구 뒤편 골목에 가득 채워진다. “산 사람 덕분에 죽을 수 없는 개”(‘목포집 덩실이’)와 뭇 사내들에게 해체되던 고래(‘끝내주는 것’) 등 동물과 자연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강원 춘천 출신의 시인이 채록한 사투리들이 토속적 정취의 시어가 되어 주는 건 물론이다. 사실 구룡포 하면 TV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벌써 두 해 전에 끝난 드라마인데도, 촬영지를 둘러보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하다. ‘동백꽃 필 무렵’이 주로 촬영된 곳은 일본인 가옥거리(근대문화역사거리)다. 옛 다이토 여관이었던 동백(공효진 분)의 가게 ‘까멜리아’ 등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일본인 가옥거리가 해안가 평지에 있다면, 한국인들이 살던 집들은 그 뒤의 비알에 있다. 일본인 거리가 방구석 1열, 한국인 거주지는 방구석 3열쯤 되려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살았던 우리나라 해안 도시 어디나 비슷한 모양새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 비알에도 사연들은 빼곡하다. 우선 사라진 것부터. 권 시인에 따르면 비알에서 가장 먼저 없어진 건 용왕당이다.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고 옮겨간 것이다. 바다에 기대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공간이었을 텐데, 그 사연이 씁쓸하다.예전 용왕당은 드라마 속 ‘동백이네 집’ 옆에 있었다. 일제 때는 일본 사찰이 이 자리를 차지했고,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가톨릭 공소로 쓰였다. 현재 텃밭 가운데에 성모 마리아상이 어색하게 서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용왕당을 허문 이들은 인근 충혼탑 뒤에 크고 번듯한 용왕당을 새로 지었다. 그 탓에 조상 대대로 전해지던 기억의 공간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충혼탑 주변으로 볼거리가 많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포스터 사진이 촬영됐던 계단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동백이네집’, 과메기문학관, 아라예술촌 등에도 관심 두는 이들이 많다. 단층 폐가 위에 희망을 담아 세운 조형물 블루 프린트, 동백꽃담 등 거리 예술 작품들도 볼만하다.구만리도 찾았다. “청보리 수런대며 익어가는” 그 마을에 가면 “그렁그렁 차오르던 봄”(이상 ‘다시, 구만리’)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키 낮은 집들만 있던 시절엔 아마 청보리밭 끝이 바다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푸른 보리밭이 파란 바다로 풍덩 자맥질하는 모습이었겠지. 밭과 바다의 경계 어름에선 아마 아지랭이도 스멀스멀 피어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와 더불어 푸르렀을 청보리밭의 정취는 이제 찾기 어렵다. 키 높은 건물, 얼기설기 난 차도에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구만리 마을 초입, 공군부대 쪽에 있는 보리밭이 그나마 넓고 상쾌하다. 구만리에서 ‘호랑이 꼬리’를 넘어가면 풍경이 휙 바뀐다. 가수 최백호의 친구가 살았다던 영일만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위로 ‘철의 도시’ 포항이 신기루처럼 떠 있다. 여기부터는 다른 공간, 다른 세계다. 글 사진 포항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한강·김영하·김혜순… 세계 휩쓴 韓문학 뒤 살뜰한 ‘Mr.번역씨’

    한강·김영하·김혜순… 세계 휩쓴 韓문학 뒤 살뜰한 ‘Mr.번역씨’

    지난해 국내 작가가 해외 주요 문학상을 받은 사례는 6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순문학뿐 아니라 장르소설, 만화 등도 해외 수상작 반열에 포함되는 등 한국 문학의 분야와 주제가 폭넓어졌고, 번역지원도 체계화된 덕분으로 풀이된다. 2000년대 들어 지난해까지 외국에서 유명 문학상을 받은 국내 작가는 총 17명이고, 이 가운데 소설가 한강과 김영하, 시인 김혜순이 3개씩 수상했다.22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번역원이 공식 집계한 2003년 이후 국내 작가들 품에 안긴 해외 문학상은 25개다. 지난해 김영하 작가는 추리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독일추리문학상 국제부문과 독일 독립출판사 문학상을 수상했고, 손원평 작가의 청소년 성장 소설 ‘아몬드’는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김영하 작가는 2018년에도 같은 작품으로 일본번역대상을 받았다. 김금숙 작가는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다룬 그래픽노블 ‘풀’로 지난해 ‘만화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미국 하비상 최우수 국제도서 부문상을, 김이듬 시인은 시집 ‘히스테리아’를 통해 미국 전미 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각각 안았다.국내에서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강 작가는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로 2016년 영국 맨부커상 국제 부문과 2018년 스페인 산 클레멘테 문학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트라우마를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상을 받았다. 2012년 시집 ‘당신의 첫’으로 미국 루시엔 스토릭 번역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은 2019년에도 시집 ‘죽음의 자서전’으로 같은 상과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황석영, 편혜영, 김탁환, 신경숙, 오정희, 이혜경, 고은, 김애란, 박민규, 반디, 이정명 작가 등이 해외 수상의 주인공이 됐다.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문학이 전통적 소재였던 전쟁·분단·혁명과 같은 거시적 차원의 주제, 리얼리즘 문학을 고수하다 최근 10여년간 인간 내면의 트라우마 등 세계적 보편성을 띤 주제로 점차 이월되면서 서구인들의 시선에 한국 문학이 들어오게 됐다”고 평가했다.국내 문학 작품이 작품성을 인정받기 위해선 번역이 중요하다. 한국 문학의 약진은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출범한 지 20년 만에 한국어 문학이 서구 언어로 번역되는 체계가 정착했음을 의미한다. 2003년 이후 해외 문학상 수상작 21개 가운데 12개가 번역원에서, 5개는 대산문화재단에서 번역 지원을 했다. 번역원 관계자는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도 지난해 영국 가디언, 더타임스 등에 소개되는 등 한강 작가 이외에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며 “해외 출판사들이 번역원에 한국 문학 번역을 지원해 줄 것을 신청하는 건수도 2014년에는 십여건이었지만, 이제 연간 백여건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노벨문학상은 한 작품이 아닌 작가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수상 가능성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한강과 같은 작가들이 꾸준히 좋은 활동을 이어 가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강·김영하·김혜순…세계 휩쓴 ‘K문학’ 3파전 뒤엔…

    한강·김영하·김혜순…세계 휩쓴 ‘K문학’ 3파전 뒤엔…

    지난해 국내 작가가 해외 주요 문학상을 받은 사례는 6건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순문학뿐 아니라 장르소설, 만화 등도 해외 수상작 반열에 포함되는 등 한국 문학의 분야와 주제가 폭넓어졌고, 번역지원도 체계화된 덕분으로 풀이된다. 2000년대 들어 지난해까지 외국에서 유명 문학상을 받은 국내 작가는 총 17명이고, 이 가운데 소설가 한강과 김영하, 시인 김혜순이 3개씩 수상했다.22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번역원이 공식 집계한 2003년 이후 국내 작가들 품에 안긴 해외 문학상은 25개다. 지난해 김영하 작가는 추리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독일추리문학상 국제부문과 독일 독립출판사 문학상을 수상했고, 손원평 작가의 청소년 성장 소설 ‘아몬드’는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김영하 작가는 2018년에도 같은 작품으로 일본번역대상을 받았다. 김금숙 작가는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다룬 그래픽노블 ‘풀’로 지난해 ‘만화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미국 하비상 최우수 국제도서 부문상을, 김이듬 시인은 시집 ‘히스테리아’를 통해 미국 전미 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각각 안았다.국내에서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강 작가는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로 2016년 영국 맨부커상 국제 부문과 2018년 스페인 산 클레멘테 문학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트라우마를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상을 받았다. 2012년 시집 ‘당신의 첫’으로 미국 루시엔 스토릭 번역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은 2019년에도 시집 ‘죽음의 자서전’으로 같은 상과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황석영, 편혜영, 김탁환, 신경숙, 오정희, 이혜경, 고은, 김애란, 박민규, 반디, 이정명 작가 등이 해외 수상의 주인공이 됐다.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문학이 전통적 소재였던 전쟁·분단·혁명과 같은 거시적 차원의 주제, 리얼리즘 문학을 고수하다 최근 10여년간 인간 내면의 트라우마 등 세계적 보편성을 띤 주제로 점차 이월되면서 서구인들의 시선에 한국 문학이 들어오게 됐다”고 평가했다. 국내 문학 작품이 작품성을 인정받기 위해선 번역이 중요하다. 한국 문학의 약진은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출범한 지 20년 만에 한국어 문학이 서구 언어로 번역되는 체계가 정착했음을 의미한다. 2003년 이후 해외 문학상 수상작 21개 가운데 12개가 번역원에서, 5개는 대산문화재단에서 번역 지원을 했다. 번역원 관계자는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도 지난해 영국 가디언, 더타임스 등에 소개되는 등 한강 작가 이외에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며 “해외 출판사들이 번역원에 한국 문학 번역을 지원해 줄 것을 신청하는 건수도 2014년에는 십여건이었지만, 이제 연간 백여건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노벨문학상은 한 작품이 아닌 작가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수상 가능성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한강과 같은 작가들이 꾸준히 좋은 활동을 이어 가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박원순 롤모델’ 우상호 “그만하시죠”에 안철수 “정신 나간 후보”(종합)

    ‘박원순 롤모델’ 우상호 “그만하시죠”에 안철수 “정신 나간 후보”(종합)

    안철수 “與, 우상호 즉각 사퇴 시켜야”국힘 “정상인 발언 넘어선 2차 가해”“박원순 지지자 규합해 성범죄 없는듯 현혹”다급한 우상호 “유가족 위로한 것이고박원순 인생 전체가 롤모델은 아냐” 해명김근식 “말장난 마라, 성추행도 혁신 망발”피해자 “유족에 공감은 가슴 짓누르는 폭력”여직원 성추행 사건이 불거진 직후 극단적 선택을 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롤모델이자 동지’라고 말했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에 대해 야당이 즉각 사퇴를 촉구하며 나섰다. 야권 단일화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는 “정신 나간 후보”라며 민주당에 우 예비후보를 사퇴시켜야 한다고 압박했다. 국민의힘도 우 예비후보가 ‘맹목적 박원순 지지자’들에게 호소해 마치 성추행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시민들을 현혹한다며 사퇴를 촉구했다. 안철수 “성범죄로 시장선거 치르는데피의자를 롤모델? 뻔뻔하게 후보라니” 안철수 후보는 1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지금 여당이 할 일은 전임 두 시장의 성범죄로 치러지는 보궐선거에 뻔뻔하게 후보를 내려는 짓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범죄 피의자 시장이 자신의 롤모델이라는 정신 나간 후보를 즉각 사퇴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여당의 자격도 없고 공당의 지위도 어울리지 않는 정치 모리배 집단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홍종기 국민의힘 부대변인도 이날 오후 논평을 통해 “우상호 예비후보의 박원순 ‘롤모델’ 발언을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아무리 당내 극성 지지층에게 어필하고 싶어도 정상인이라면 넘을 수 없는 금단의 선을 넘은 것”이라고 직격했다. 홍 부대변인은 “우상호 후보의 발언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규정하면서 “더 심각한 문제는 우상호 후보의 발언은 법원도 인정한 박원순 전 시장의 성폭력 범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 예비후보의 발언이 “박원순 전 시장의 맹목적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성폭력 범죄가 없었던 것처럼 시민들을 현혹한다”면서 “민주당이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즉시 우상호 후보의 발언을 사과하고 그를 후보에서 사퇴시켜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우상호 “이제 그만해…박원순 인생 전체가 롤모델이라 한 건 아냐” “박원순 시장 유가족이 무슨 죄냐”“유가족 위로 자체에 상처받지 말라” ‘박원순 롤모델’ 논란이 커지자 우 예비후보는 “박 시장이 잘한 정책은 계승하고 잘못한 정책이나 부족한 것은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이분의 인생 전체가 내 롤모델이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우 예비후보는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관련 질문이 이어지자 이렇게 말하 며 “박 시장이 적어도 혁신가로 살았던 만큼 내가 본받겠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시민운동 혁신들을 했던 것들, 시장이 된 뒤에 했던 몇 가지 혁신적인 정책들, 이런 것들을 내가 배워야 되겠다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우 예비후보는 “피해자도 위로해 드리고 유가족도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면서 “유가족을 위로한 것, 그 자체를 가지고 너무 상처받지 않으시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우 예비후보는 “박원순 시장 유가족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며 2차 가해 논란 역시 피해자는 물론이고 박 전 시장 유가족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그만 하시죠”라며 자신의 뜻과 다르게 해석되고, 논란이 이어지는 일에 대해 불편함을 보였다. 우 예비후보는 피해자에 대해 “많은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는 공감을 갖고 있다”면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재발 대책을 만들고, 피해자가 정상적으로 생활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정말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밝혔다.김근식 “유가족 위해? 변명 가증스러워”“친문 환심 사기 위한 정치적 계산” 이에 대해 국민의힘 송파병 당협위원장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우 예비후보를 향해 “유가족 위로 차원이었을 뿐이라는 우 후보의 변명이 더 가증스럽다”면서 “말꼬리만으로 말장난하지 마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우 예비후보가 박 전 시장을 ‘혁신의 롤모델’로 언급하며 인생 전체의 롤모델이 아닌 점을 강조한 데 대해 “성추행 비위가 최근의 기억으로 남은 사람을 혁신의 롤모델이라고 한 것 자체가, 성추행도 혁신으로 간주하는 망발이자 2차 가해”라면서 “잘못을 했으면 깔끔하게 사과하면 될 일이지, 어설픈 변명으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건 ‘2차’ 거짓말이 된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고 큰소리치지 않았느냐. 박원순을 통째로 존경하고 따르겠다는 의지가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당내 경선을 겨냥해서 친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깨끗이 사과와 용서를 구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우상호 “박원순, 롤모델이자 동지…내가 박원순이란 마음가짐으로 계승” “내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내 동지”朴부인 편지글 소개 “얼마나 힘드셨나”“강난희 여사, 힘내시길 간절히 바라” 우 예비후보는 지난 10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박원순 시장은 제게 혁신의 롤모델”이라면서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서울시 정책을 펼쳐가겠다”고 강조했다. 우 예비후보는 당시 “언론에 보도된 강난희 여사님의 손 편지글을 보았다”면서 강 여사의 편지 중 “박원순은 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나의 동지”라는 대목을 소개한 뒤 “이를 악물고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힘드셨을까”라고 적었다. 그는 박 전 시장에 대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논하던 동지였다”면서 “박원순 시장의 정책을 계승하고 그의 꿈을 발전시키는 일, 제가 앞장서겠다”고 계승 의지를 분명히 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생을 스스로 등진 박 전 시장의 후임을 뽑는 선거에서 이와 별개로 박 전 시장의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그러면서 우 예비후보는 오는 11일 박 전 시장의 67번째 생일이라고 언급하면서 “비록 고인과 함께 할 수 없지만 강난희 여사와 유가족이 힘을 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박원순 부인 강난희 “진실 안 밝혀져”“내 남편 박원순 그럴 사람 아냐” 최근 SNS에는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가 작성한 손편지글이 유포됐다. 해당 편지글에는 “‘박기사’의 입장문에는 ‘성희롱 판결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기사는 박 전 시장 지지단체인 ‘박원순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줄임말을 의미한다. 지난달 25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는 내용의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하자 박기사 측은 “인권위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피해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강씨는 편지에서 “나의 남편 박원순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면서 “저와 우리 가족은 박원순의 도덕성을 믿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강씨는 또 “어떻게 해야 그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며 행동할 것”이라고 적었다. 민경국 전 서울시 인사기획비서관 등이 이 편지를 공유했다.피해자 “공무원이 시장 속옷 정리하고시장 가족 명절음식 사는 걸 계승할건가” “우상호 덕분에 가슴 뜯으며 명절 맞아”2차 가해 논란…피해자 측 “정치적 의도 유감” 이에 대해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 변호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판단돼 유감스럽다”고 밝혔고 온오프라인에서는 강씨가 성폭력 피해자를 향해 ‘2차 가해’를 가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A씨는 지난 11일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단체를 통한 입장문을 통해 “전 시장의 정책을 계승한다고 하셨는데, 공무원이 시장의 속옷을 정리하게 하고, 시장 가족들이 먹을 명절 음식을 사는 일들도 정책으로 계승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A씨는 이어 우 예비후보가 박 전 시장의 유족을 위로한 데 대해 “유족에 대한 의원님의 공감이 피해자인 저와 제 가족에게는 가슴을 짓누르는 폭력”이라면서 “이 글 덕분에 피해자인 저와 제 가족은 다시금 가슴을 뜯으며 명절을 맞이하게 됐다”고 비통해했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구두 논평에서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할 민주당에서 당헌·당규까지 고쳐가며 기어이 후보를 낸 것도 모자라, (우 후보는) 서울시를 수치스럽게 만든 박 전 시장과 끝까지 같이 하겠다고 한다”면서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비판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서울시장 예비후보도 “참으로 잔인한 정치꾼”이라며 “적어도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라면 박원순 찬양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체가 2차 가해”라고 지적했다.법원 “박원순, 여직원에 성희롱 문자”“냄새 맡고 싶다” “섹× 알려주겠다” 인권위 “박원순 성적언동, 성희롱에 해당” 인권위 판단에 앞서 법원에서도 박 전 시장의 여직원 성추행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조성필)는 지난달 14일 준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 정모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날 재판부는 피해자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박 전 시장이 자신의 비서로 일하던 피해자에게 성적인 문자와 속옷 사진을 보냈고, ‘냄새를 맡고 싶다’ ‘몸매가 좋다’ ‘사진을 보내달라’ 는 등 문자를 보낸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또 박 전 시장이 피해자가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도 ‘남자에 대해 모른다’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갈 수 있다’ ‘섹스를 알려주겠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로 봤다. 박 전 시장은 지난해 7월 피해자 A씨로부터 강제추행 등 혐의로 고소됐으나 이튿날 실종된 뒤 서울 북악산 인근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한편 이날 저녁 우 예비후보는 서울시장 경선 경쟁자인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MBC가 주최하는 첫 TV토론회에서 격돌한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억울한 우상호 “이제 그만해…박원순 인생 전체가 롤모델이라 한 건 아냐” [이슈픽]

    억울한 우상호 “이제 그만해…박원순 인생 전체가 롤모델이라 한 건 아냐” [이슈픽]

    “피해자도 위로해드리고유가족도 위로해드리고 싶었다”“박원순 민주주의·인권 배우겠다는 수준”朴부인, 최근 손편지로 ‘박원순 무죄’ 항변피해자 “유족에 공감은 가슴 짓누르는 폭력”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로 나선 우상호 민주당 의원이 여직원 성추행 사건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자신의 ‘롤 모델이자 영원한 동지’라고 표현해 2차 가해 논란을 빚은 것에 대해 “이제 그만하시죠”라면서 “이분 인생 전체가 내 롤모델이다, 이렇게 돼 있지는 않다”고 불쾌감을 표출했다. 우 의원은 “피해자도 위로해 드리고 유가족도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박원순 시장 유가족이 무슨 죄냐”“유가족 위로 자체에 상처받지 말라” “피해자 상처와 아픔에 공감” 우 의원은 1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관련 질문이 이어지자 “유가족을 위로한 것, 그 자체를 가지고 너무 상처받지 않으시기 바란다”며 피해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우 의원은 “박원순 시장 유가족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며 2차 가해 논란 역시 피해자는 물론이고 박 전 시장 유가족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그만 하시죠”라며 자신의 뜻과 다르게 해석되고, 논란이 이어지는 일에 대해 불편함을 보였다. 우 의원은 자신이 ‘박원순은 나의 롤 모델’이라고 한 것에 대해선 “박 시장이 잘한 정책은 계승하고 잘못한 정책이나 부족한 것은 보완하겠다, 그 연장선에 있는 얘기였다”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시민운동을 했던 것 등 몇 가지 혁신정책들, 이런 것들을 내가 배워야 되겠다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설명했다. 우 의원은 피해자에 대해 “많은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는 공감을 갖고 있다”면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재발 대책을 만들고, 피해자가 정상적으로 생활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정말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밝혔다.우상호 “박원순, 롤모델이자 동지…내가 박원순이란 마음가짐으로 계승” “내 목숨 다하는 순간까지 내 동지”朴부인 편지글 소개 “얼마나 힘드셨나” 우 의원은 지난 10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박원순 시장은 제게 혁신의 롤모델”이라면서 “박원순이 우상호고, 우상호가 박원순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서울시 정책을 펼쳐가겠다”고 강조했다. 우 후보는 당시 “언론에 보도된 강난희 여사님의 손 편지글을 보았다”면서 강 여사의 편지 중 “박원순은 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나의 동지”라는 대목을 소개한 뒤 “이를 악물고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힘드셨을까”라고 적었다. 그는 박 전 시장에 대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논하던 동지였다”면서 “박원순 시장의 정책을 계승하고 그의 꿈을 발전시키는 일, 제가 앞장서겠다”고 계승 의지를 분명히 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생을 스스로 등진 박 전 시장의 후임을 뽑는 선거에서 이와 별개로 박 전 시장의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우상호, 11일 박원순 생일 언급한 뒤“강난희 여사, 힘내시길 간절히 바라” 그러면서 우 후보는 오는 11일 박 전 시장의 67번째 생일이라고 언급하면서 “비록 고인과 함께 할 수 없지만 강난희 여사와 유가족이 힘을 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최근 SNS에는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가 작성한 손편지글이 유포됐다. 해당 편지글에는 “‘박기사’의 입장문에는 ‘성희롱 판결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기사는 박 전 시장 지지단체인 ‘박원순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줄임말을 의미한다. 지난달 25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인권위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는 내용의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하자 박기사 측은 “인권위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피해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는 입장을 밝혔었다.박원순 부인 강난희 “진실 안 밝혀져”“내 남편 박원순 그럴 사람 아냐” 2차 가해 논란…피해자 측 “정치적 의도 유감” 그러나 강씨는 편지에서 “나의 남편 박원순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면서 “저와 우리 가족은 박원순의 도덕성을 믿고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강씨는 또 “어떻게 해야 그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며 행동할 것”이라고 적었다. 민경국 전 서울시 인사기획비서관 등이 이 편지를 공유했다. 이에 대해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 변호를 맡은 김재련 변호사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판단돼 유감스럽다”고 밝혔고 온오프라인에서는 강씨가 성폭력 피해자를 향해 ‘2차 가해’를 가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피해자 “공무원이 시장 속옷 정리하고시장 가족 명절음식 사는 걸 계승할건가” “우상호 덕분에 가슴 뜯으며 명절 맞아”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A씨는 지난 11일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단체를 통한 입장문을 통해 “전 시장의 정책을 계승한다고 하셨는데, 공무원이 시장의 속옷을 정리하게 하고, 시장 가족들이 먹을 명절 음식을 사는 일들도 정책으로 계승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A씨는 이어 우 후보가 박 전 시장의 유족을 위로한 데 대해 “유족에 대한 의원님의 공감이 피해자인 저와 제 가족에게는 가슴을 짓누르는 폭력”이라면서 “이 글 덕분에 피해자인 저와 제 가족은 다시금 가슴을 뜯으며 명절을 맞이하게 됐다”고 비통해했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구두 논평에서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할 민주당에서 당헌·당규까지 고쳐가며 기어이 후보를 낸 것도 모자라, (우 후보는) 서울시를 수치스럽게 만든 박 전 시장과 끝까지 같이 하겠다고 한다”면서 “이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비판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서울시장 예비후보도 “참으로 잔인한 정치꾼”이라며 “적어도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라면 박원순 찬양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체가 2차 가해”라고 지적했다.법원 “박원순, 여직원에 성희롱 문자”“냄새 맡고 싶다” “섹× 알려주겠다” 인권위 “박원순 성적언동, 성희롱에 해당” 인권위 판단에 앞서 법원에서도 박 전 시장의 여직원 성추행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조성필)는 지난달 14일 준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 정모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날 재판부는 피해자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에 대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박 전 시장이 자신의 비서로 일하던 피해자에게 성적인 문자와 속옷 사진을 보냈고, ‘냄새를 맡고 싶다’ ‘몸매가 좋다’ ‘사진을 보내달라’ 는 등 문자를 보낸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또 박 전 시장이 피해자가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도 ‘남자에 대해 모른다’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갈 수 있다’ ‘섹스를 알려주겠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사실로 봤다. 박 전 시장은 지난해 7월 피해자 A씨로부터 강제추행 등 혐의로 고소됐으나 이튿날 실종된 뒤 서울 북악산 인근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박영선 vs 우상호 오늘 첫 TV토론 대결 한편 이날 저녁 우 의원은 서울시장 경선 경쟁자인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MBC가 주최하는 첫 TV토론회에서 격돌한다. 박영선 후보는 자신의 ‘21분 콤팩트 도시’ 구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도시개발 정책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우상호 후보는 여권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지지율에서 앞서는 박 후보의 공약 허점을 파고드는 데에 주력할 전망이다. 이들은 오는 17일 연합뉴스TV, 25일 KBS까지 3차례에 걸쳐 TV 토론을 할 예정이다. 22일(BBS)과 24일(CBS)에는 라디오 토론도 한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아마존 떠나 우주로… 세기의 갑부 ‘미친 짓’ 계속된다

    아마존 떠나 우주로… 세기의 갑부 ‘미친 짓’ 계속된다

    분기매출 1000억 달러 첫 달성과 발표 집 차고서 시작해 세계 최대 업체 일궈 “우린 미친 일 함께 해와… 은퇴 아니다”우주탐사 등 매진… 후임엔 앤디 제시집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해 30년도 채 안 돼 ‘제국’을 일군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57) 최고경영자(CEO)가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겠다는 밝혔다. 1995년 소박한 온라인 책방으로 출발한 아마존이 지난해 4분기 사상 처음으로 1000억 달러 매출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2일(현지시간) 그는 “새로운 상품과 아마존 초기의 창의성을 추구하는 데 집중하겠다”며 오는 3분기부터 CEO 자리를 자신의 그림자로 불리며 아마존 웹 서비스를 이끌어 온 앤디 제시(53)에게 넘긴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아마존 이사회 의장을 맡으며 우주탐사회사인 블루오리진과 언론사인 워싱턴포스트 운영, 자선사업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계획이다. 베이조스의 경영 2선 퇴진은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오러클과 같은 빅테크 기업을 일군 일련의 창업가들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다. 늦은 만큼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에 진출했고, 더 많은 부를 쌓았다. 지난해 7월 현재 베이조스의 순자산은 1716억 달러(약 206조원)로, 지난해 테슬라 주식 급등으로 일론 머스크에게 권좌를 내주기 전까지 2017년 이후 줄곧 세계 부호 1위였다. 베이조스는 이날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27년 전 오직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오늘 우리는 130만명의 직원을 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우리는 정말 미친 일들을 함께 했다”고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그가 언급한 27년 전은 근무하던 헤지펀드 회사서 만나 결혼한 매킨지 스콧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 시애틀로 이주, 오직 인터넷의 가능성만 보고 부모의 은퇴자금인 30만 달러를 투자받아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1994년을 말한다. 쇼핑몰 이름을 ‘카다브라’로 지었다가 잘못하면 발음이 ‘시체’를 뜻하는 속어처럼 들린다는 지적에 ‘아마존’으로 바꿀 만큼 시작은 어수룩하고 미미했다. 그러나 베이조스는 실패해도 끊임없이 도전해 3년 만에 아마존 주식을 상장했고, 기성 업계와의 접점을 찾아 신기술에 빠르게 투자하며 성공 곡선을 그려 냈다. 아마존은 반즈앤드노블스 같은 대형서점과 저작권 분쟁을 벌이다 상거래에서 ‘다품종(롱테일) 전략의 힘’을 터득했고, 대형할인점 코스트코를 찾아가 원가절감법을 배웠다. 1998년 실리콘밸리 기업인 정글리에 1억 7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실패의 쓴맛을 보긴 했지만, 그 거래에서 구글 창업자들을 소개받아 이후 급등한 구글 주식을 초기에 보유하는 식의 행운도 거머쥐었다. 2019년 위자료가 362억 달러(약 43조원)에 달하는 ‘세기의 이혼’을 했지만, 이듬해 코로나19 여파로 아마존 주가가 급등해 위자료보다 더 많이 자산가치가 상승하는 일도 있었다. 베이조스의 이번 결정은 ‘은퇴’가 아니라고 아마존은 설명했다. 베이조스는 편지에서 “놀라운 발명이 있으면 그 새로운 게 정상이 되고, 그때 (신기함을 잊은) 사람들의 하품이 발명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면서 “계속 발명하고, 처음 아이디어가 미친 것처럼 보여도 절망하지 마라”고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베이조스 역시 ‘사람들의 하품’을 찾는 여정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여든셋 시인의 ‘창조적 긴장’ 그래서 웃을 수 있다 한국문학은

    여든셋 시인의 ‘창조적 긴장’ 그래서 웃을 수 있다 한국문학은

    며칠 몰아쳤던 한파가 그치고 제법 포근해진 겨울날, 서울 사당동의 한 음식점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1938년생, 올해 여든셋이다.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64년 동안의 시력(詩歷)을 균질하게 쌓아 온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서 선생은 언제나 시단에 새로운 충격과 미학적 지평을 일관되게 부여해 온 ‘젊은 시인’이다. 이제는 노경의 삶을 은은하게 이루어 가면서 그만의 언어적 연금술을 균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쌓아 가고 있다.“벌써 그렇게 됐네요. 아마 서정시를 60년 이상 써 온 실례는 저 말고는 참 드물 거예요.” 한국 시사(詩史)에서, 아니 세계적으로도 그것은 선생이 거의 유일한 케이스일 것이다.그동안 선생이 취해 온 방법론적 긴장과 심미적 꿈은 ‘20세기 후반 한국의 시사’(김주연)라는 평가를 가져왔다. 이때 우리는 선생의 시를 빼고 1960년대 이후 한국 시를 설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만큼 선생은 한국 시의 여러 차원들 가령 전통과 현대, 개인과 공동체, 내면과 외계, 삶과 죽음, 침잠과 융기 같은 모든 운동적 대립점들을 자신만의 웅숭깊은 사유와 방법으로 섬세하게 탐구해 온 것이다.●실존적 고독과 거듭남의 세계 황동규의 시는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읽은 바로 그의 초기 시는 내면이라는 상상적 공간에서 피어올라 왔다.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편지’라는 작품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만의 서정적 실감을 담은 수많은 명편들이 그를 한국 시단의 전혀 새로운 시인으로 출발하게끔 해 주었다. 선생은 1970년대 즈음에는 현실을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실존적 고독과 삶의 비극성을 일관되게 들려주었다. ‘태평가’와 ‘열하일기’를 지나 ‘삼남에 내리는 눈’의 세계는 이러한 차원을 명징하게 들려준 성취였다. 낭만적 초월과 내밀한 기억으로의 잠입을 통해 현실에 접근해 간 문학사 초유의 사건일 것이다. “초기에 강렬한 영향을 주었던 미당은 어느새 극복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나는 현실의 소리에 정열적으로 귀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선불교를 만나게 됐고 극(劇)서정시를 생각하면서 현실과 내면의 통합을 통한 거듭남의 세계를 설계해 보았지요.” 황동규 선생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극서정시’라는 그만의 기율을 실천해 왔다.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넘어 극서정시의 실험과 여행 모티프의 강렬한 방법론적 확장을 꾸준히 실현해 간 것이다. 극서정시는 시 안에서 극적 요소를 구조적으로 제시한 것인데, 일상을 벗어나 삶의 충동을 깨달음의 경지까지 이끌고 가는 세계가 그 안에 충일하게 녹아 있다. “극서정시는 극시와는 달라요. 우리 시의 전통이 처음과 끝의 정황이 같은데 저는 조그만 ‘거듭남’을 통해 시인과 독자가 짊어지고 가는 삶의 짐을 별빛 무게만큼이라도 덜어 주자고 생각한 것이지요.” 서정시에 극성을 결합하고 깨달음의 서사를 장착한 ‘극서정시’는 형식과 내용 모두를 새롭게 개진하려는 재충전 욕구에 바탕을 둔 미학적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선생은 ‘겨울밤 0시 5분’과 ‘사는 기쁨’에 이르는 제2의 절정을 구가한다. 더욱 심혈을 기울인 서정과 인식의 세계로 진입해 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선생의 시를 ‘예술가로서의 실존적 고독’과 ‘근원적 통찰을 통한 거듭남’의 세계로 집약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번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가 위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불빛의 온기·조도로, 점점 단순해지는 지혜로 작년에 나온 ‘오늘 하루만이라도’는 그의 열일곱 번째 시집이다.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선생의 끊이지 않는 창조적 긴장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시집 처음에 실린 ‘불빛 한 점’에서 선생은 ‘시’가 한때 눈부시게 앞길을 밝혀 준 ‘횃불’이었지만 이제는 안개로 출항 못하는 조그만 배의 ‘불빛’으로 몸을 바꾸었으며,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를 밝히고 세상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의 연쇄가 ‘시인 황동규’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고 고백한다. “세월이 흐르듯 삶의 모양새가 변하면 시인도 변해야지요. 다만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저 최선을 다해야지요.” 그러고 보니 선생의 시는 여전히 ‘불빛’이라는 온기와 조도(照度)를 동시에 갖춘 충일한 세계도 다가온다.그러다가 선생은 자신에게 많은 것이 사라지고 없다고 단호하게 써 간다. “군더더기가 없다.”(‘화양계곡의 아침’), “적막 같은 건 없다.”(‘나의 마지막 가을’), “더 이상 산속이 없다.”(‘홍천 구룡령 길’), “아무리 찾아봐도 그 건물이 없다.”(‘한밤중에 깨어’), “없다. 말끔히 걷힌 늦가을 안개처럼 없다.”(‘날 테면 날아보게’), “이곳엔 외딴집이 없다는 것,/ 홀로 사는 사람도 없다는 것,(‘새로 만난 오솔길’) 등을 곳곳에 적어 놓았다. 이렇게 ‘군더더기·적막·산속·건물·안개·외딴집·사람’의 한결같은 부재는 삶의 소진과 죽음으로의 열림을 예비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는 삶과 죽음의 역동적 교차가 자신의 인생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번 시집에서는 더욱 경험적 실감을 견지하면서 “좀 단순해지자.”(‘산 것의 노래’)는 지혜로 수렴되어간 것이 아닐까 한다. 선생은 “과거의 나에게 문학은 험한 산지였고, 지금은 막막한 들판, 미래는 노을 한 자락이 묻은 채 저무는 바다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문학적 예감은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갔지만 스스로 베토벤의 음악을 두고 “계속 물리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곡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물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그만의 시를 남겨 준 것이다. 평론가 하응백은 이러한 세계를 두고 “한국문학은 황동규의 시가 있어 행복했다. 82세의 나이에 낸 시집으로 이런 수준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건 전 세계적으로도 황동규 시인이 거의 유일하다.”라고 썼다. 특별히 선생은 여행을 즐겨했는데, 순간순간 마주치는 삶의 사물의 신비를 그때마다 느꼈다고 한다. 2018년 7월 임자도로 갔을 때 경험을 “언젠가 이 세상 두고 나갈 때/ 최근에 불새가 불 속에서 불씨를 쪼듯/ 잊지 못할 민어회 맛 한번 진하게 쪼은 신안군 임자도를/ 모르는 척 놔두고 갈 순 없겠지.”(‘선운사 동백’)라고 새겨 놓기도 했다. “여건이 어려웠지만 최근에 강화도 한번 다녀왔어요. 참 좋더군요. 여행을 속 시원히 못해 많이 아쉽지요.”●노경의 삶, 영원한 예술인으로 이번 시집에는 자연인으로서 육신의 쇠잔을 고백하는 장면이 많아졌다. 그것은 “안과/황반변성/보청기/임플란트/혈압약” 등으로 이어져 간다. 물론 이는 “죽음이 없다면/세상의 모든 꽃들이 가화가 되는”(‘죽음아 너 어딨어?’) 진실을 알게끔 해 준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불빛’으로의 이행 과정을 수납하는 순간을 보여 주는 사례일 텐데 이러한 존재론적 고투는 선생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의지로 한없이 이어져 간다. “노년에 처하고 보니 이길까보다는 어떻게 견딜까를 생각합니다. 지금 순간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가운데 좋은 일을 할 때 보상을 바라지 말라, 좋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선생은 자신의 시가 긴장이 떨어지면 그날로 끝내는 것이라고 몇 번을 강조한다. “이번 시집은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에서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라고 썼는데 그게 바로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그 역할이 끝나면 시인으로서의 생애도 마감하는 거지요.” 나아가 선생은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우연을 사랑하게 되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원이 타원의 특수한 형태이듯 필연도 우연의 특수 형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불교나 스피노자나 니체나 결국 우연을 사랑하자는 화두가 아니겠습니까?”라는 견해를 들려주었다. 파스칼은 명상록에서 영생이 설사 없더라도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면 손해 볼 것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선생은 “우연을 사랑하다 보면 영생이 비록 있더라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 사는 맛을 제대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멋진 의미론적 반전이요, 자유로운 예술인으로서의 자기 발견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번 시집에 실린 ‘오늘은 날이 갰다’라는 작품에서 선생은 “그래 웃자./ 오늘은 날이 갰고 우린 만났다./ 어쩌다 저세상 가서도 서로 연락이 닿으면/ 오늘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뜬 날 만나자”라고 썼다. 꼭 60년 전 펴낸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에서 그때 활짝 갰던 어느 날이 다시 “오늘처럼 비늘구름 환하게 뜬 날”이 되어 ‘시인 황동규’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 점에서 그의 대표작은 아직 쓰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시간 대화가 짧게 느껴졌다. 일일이 세목을 다 쓰지 못해 아쉽다. 선생이 들려준 것은 시인으로서의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시’에 대한 스스로의 비전을 담은 것이었기 때문에 내게는 여전한 현재형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선생은 자유롭고 지성적인 영원한 예술인이고 한국문학에 찾아온 드문 행복이었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책꽂이]

    [책꽂이]

    권력 쟁탈 3000년(조너선 홀스래그 지음, 오윤성 옮김, 북트리거 펴냄) 철기 시대부터 현대에 걸친 3000년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조명하고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을 탐색한다. 저자는 ‘상업과 무역은 정말 국제평화를 증진할까’, ‘민주주의와 참여가 전쟁을 예방할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632쪽. 3만 7000원.홀로 선 자들의 역사(김동완 지음, 글항아리 펴냄) 우리 조상들이 전국 곳곳에 지은 누정(樓亭) 35곳을 역사와 함께 이야기한다. 안동 고산정부터 청송 찬경루까지 누정은 조선시대 시문학의 정수가 모인 곳이자, 철학·풍수·건축·지리를 담은 ‘인문학 사전’이다. 400쪽. 1만 9800원.7개 코드로 읽는 유럽 도시(윤혜준 지음, 아날로그 펴냄) 기원전 5세기 아테네부터 2020년 밀라노 두오모 성당까지 유럽 도시의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본다. 영문학자인 저자는 돌·물·피·돈·불·발·꿈 등 7개 코드를 따라 유럽 도시 역사 속 49개의 결정적 장면들을 독자들에게 풀어놓는다. 아름다운 사진과 과거 역사 흔적을 추적할 단서가 담긴 도판이 돋보인다. 348쪽. 1만 7000원.창의성의 기원(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하버드대 교수인 저자가 인간 창의성의 기원과 미래, 그 잠재력을 억누르는 게 무엇인지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창의성을 계발하고 확장하려면 인문학과 과학이 섞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 창의성에 대한 기존의 인문학적 연구는 작은 공기 방울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272쪽. 1만 9500원.배리어 열도의 기원(김가경 지음, 도서출판 강 펴냄) 소설가 김가경의 두 번째 소설집으로 ‘유린 이야기’, ‘다소 기이한 입장의 C’, ‘배리어 열도의 기원’ 등을 담았다. 의약품 재료인 오줌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여성을 다룬 유린 이야기처럼 이번 소설집에는 ‘불청객’들이 등장한다. 소외된 타자들이 선사하는 팽팽한 긴장과 복잡한 심경들로 가득하다. 232쪽. 1만 4000원.보리 익을 무렵(김향기 지음, 하나로 선 사상과 문학사) 김향기 시조 시인의 첫 번째 시집으로 옛 농촌, 보리 익을 무렵의 향토 정서를 보여 주기 화법으로 표출했다. 낮고 평온하면서도 소박한 인생론을 담았다. 감칠맛 나는 순우리말을 발굴해 잠재적 본질을 일깨운 점이 돋보인다. 124쪽. 1만원.
  • 다니엘 바렌보임, 5월 국내 첫 피아노 리사이틀

    다니엘 바렌보임, 5월 국내 첫 피아노 리사이틀

    현대 음악의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오는 5월 국내 첫 피아노 리사이틀을 갖는다. 1984년 파리 오케스트라와 2011년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내한했던 바렌보임이 국내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여는 건 처음이다. 공연기획사 해프닝피플에 따르면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낸 관객들에게 평화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5월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중국·일본 투어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리사이틀에선 지난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조용히 넘긴 아쉬움을 더해 자신의 장기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할 예정이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만질 수 없음을 만지는 언어:촉각의 소노그래피/전승민

    문학의 칼 칼날과 포옹할 수 있을까? 한강에게 언어는 세계와 자신을 가르는 칼이다. 언어는 전체 의미 중에서 표현 가능한 부분만을 잘라 기표에 담으므로 진실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왜곡된다. 그래서 문학 하는 이들에게 언어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고통이다. 문학의 괴로움은 그것이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비-진실해지는 이 운명에서 비롯한다. 현실의 경험을 기표로 쪼개어 재조합하는 언어로는 그 어떤 실재에도 완벽히 다다를 수 없다. 현실을 조각내지 않는 언어는 과연 가능할까? 한강의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2011)은 진실을 조각내는 언어의 칼금과 대결하며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포착하려 한다. 그것은 현실을 분절하는 한계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을 가장 훼손하지 않는 순수한 상태의 언어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언어가 언어이기를 포기할 때 획득되기에 순수를 추구할수록 더욱 비-순수해지는 역설 속에 있다. 그 ‘순수’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에게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어떤 인과나 합리적 추론으로 증명되는 참인 명제가 아니라 오직 몸으로 살아낼 때만 느끼는 힘의 압력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남자와 여자는 이 거대한 진실을 유한한 인간의 몸뚱이로 견디는 사람들이다. 남자의 진실은 영원한 실명, 여자의 진실은 계속되는 실어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실과 고통은 보상이나 처벌의 체계에서 비롯하지 않으며 당위나 인과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각자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 영원히 실패한다. 예정된 실패의 운명 속에서 ‘희랍어 시간’이 길어 올리는 물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삶을 이해하기 위해 끝없이 발버둥치는가이다. 이 궁극의 물음에 대해 소설은 질문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파괴하는 재귀적인 답을 제시한다. 삶이 인간에게 들이미는 통각은 소거되어야 할 병증이 아니라 그가 살아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생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은 인물의 아픔에 관한 원인을 굴착하기보다 그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통과한다. 서사는 플롯의 인과와 시간의 합리적 흐름에 복무하지 않고 다만 고통의 양태와 통각을 소슬히 응시하기 위해 흐른다. 그래서 ‘희랍어 시간’에서의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고 소설의 언어 역시 일반의 언어로부터 탈구되어 있다. 요컨대 한강은 인간과 문학이 삶에 대해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 그러나 ‘왜’로 시작할 수밖에 없으므로 언제나 오류일 수밖에 없는 어떤 질문과 대결한다.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105쪽) 신성의 잠재태로서의 고통 ‘희랍어 시간’의 시간은 환(環)으로 흐른다.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26쪽) 소설에서 읊어지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첫 번째 장은 ‘1’에서 시작해 21번째 장까지 진행된 후 마지막 장에서 ‘0’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1에서 0을 향해 구부러지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삶이 전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전사(前史)는 작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2013)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1) 남자와 여자는 ‘해부극장’ 연작에 나오는 백골의 전생이며, 백골의 고통은 곧 여자가 느끼는 통증이다. 그것은 말의 소리가 신체의 발음 기관을 경유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갈 때 발생하는 비릿하고 붉은 통각이다.2)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희랍어 시간’·165쪽) 여자의 고통이 언어가 파열될 때 발생한다면 남자의 고통은 반대로 무언가가 덩어리로 뭉개질 때 발생한다. 완전히 실명하게 되리라 진단받은 마흔을 목전에 두고, 그는 마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처럼 16년간의 독일 생활을 접고 모국으로 돌아온다. 사물과 풍경의 날카로운 경계는 그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는 실명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다. 남자의 삶 역시 독일과 한국에서 보낸 시간으로 분절되어 있으므로(“그때 내 인생은 거의 정확히 절반씩 두 언어, 두 문화로 쪼개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40쪽) ‘희랍어 시간’은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는 고통 그 배면의 시간이다. 여자는 두 번째로 찾아온 실어 증상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강의를 신청하고, 남자는 자신을 둘로 쪼개는 힘을 피해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 (…)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119쪽)과 같은 희랍어 속으로 숨어든다. 이 공통의 시간 너머에 있는 그들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백골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아픔은 단지 붉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성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파야만 하는 것이다. 까닭 없이 고통받는 인간은 신을 찾아 헤맨다.3) 소설의 1인칭 화자는 마지막 장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의 고해는 세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발송되는 편지는 독일에서 살던 시절 사랑했던 여자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다. 그녀는 청각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장애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녀를 욕망한다.(“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라고.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거라고.” 47쪽) 그는 “백치처럼 순진하게”(47쪽) 그녀에게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말을 해 보라고 요청한다. 남자는 그녀의 청각장애를 자신의 예정된 실명과 동등하게 고려하지 못한다. 그녀의 독순술이 그의 ‘결핍’을 보충하는 자질이 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누군가의 언어 행위는 그의 자발적 선택과 의지에 의한 것이지 다른 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언어는 강요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가 그녀에게 품는 모든 욕망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정당화되고 그것이 그녀에게도 좋은 것이라 ‘백치처럼’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는 사과하는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세계를 두 눈으로 또렷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왜곡되지 않은 상(像)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부 사물을 보는 눈과 인간의 고통을 보는 눈은 다르다. 한편으로, 인간이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은 그 또한 다른 인간으로부터 상처받을 수 있음을 내포한다. 두 번째 편지의 수신인은 여동생 란이다. 그는 여동생에게, 앞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될 그의 운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똑같은 병을 앓았던 아버지였음을 말한다. 그의 시력 상실은 부계 유전질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어스름이 정말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지”(82쪽)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자신과 똑같은 아들을 끝까지 멀리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에 결국 실패하면서 삶으로부터의 자기 소외 속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어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빛 속으로 한 발짝도 걸어 나가지 못했던 셈이다. 이제, 앞서 소설이 던진 유일한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 도착한다. 인간이 부서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영혼 안에 어리석고 나쁜 것과 함께 어떤 좋음 또한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통을 감각하고 수용하는 능력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새’는 그것의 체현물이며(“그의 얼굴 속에 새 같은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따스한 감각이 그녀에게 즉각적인 고통을 일깨운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147쪽) 개별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다.(“새 같은 무엇인가가 문득 육체를 떠났고, 그 육체는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었다.” 145쪽) 말하자면 새는 인간이 생의 통각에 반응하는 마음의 일부로서 육체와 정신을 이어 준다. 새를 통해 인간은 육체의 통증을 실존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뒤에서 논의되겠지만, 인간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새’로 인해 자기 파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를 두고 인간이 각자 품고 있는 어떤 신성(神性)의 잠재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유한자로서의 운명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적이지 않은’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드는 그 무엇은 분명 신성하다. 요컨대 인간은 선험적인 신성을 배태하므로 고통받는다. 여자는 특히 이 신성의 언어적 측면이 육화된 존재다. 문자가 소리로 변할 때 언어가 겪는 분절의 고통을 그녀는 자기 몸의 통증으로 겪는다. 심장과 혀를 경유하여 귀로 도달하는 모든 파열하는 소리는 여자에게 폭력이다. 그래서 실어증은 파괴하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응이다. 침묵은 그녀를 에워싸고 보호한다. 실어의 원인은 심리치료사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55쪽)다. 여자는 언어의 신성 그 자체이지만 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녀 역시 구원을 바란다. 어머니가 뱃속의 그녀를 지우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실 속 무언가의 실존이 얼마나 연약하고 위태로운 우연에 기대고 있는지 아는 그녀는, 그래서 무언가의 존재를 위협하거나 변형시키는 힘에 대해 온몸으로 대항한다. 그녀에게 폭력은, 어떤 존재를 그것의 고유한 자리로부터 박탈시키는 모든 종류의 유형력이다. 목소리 역시 그러하다. 음성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다른 존재들을 밀어낸다.(“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51쪽) 여자에게 말은 육체적인 고통이다. 그러므로 실어는 존재들을 지켜내기 위해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는 사랑의 행위-신의 사랑이다. 그녀는 말하지 않는 대신 언어를 시선으로 번역한다.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104쪽)라는 대학원생의 물음은 반쯤 정답을 향해 있다. 타인의 고통을 무참히 다룬 죄를 고해하고 받은 상처를 토로하던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남자가 찾던 신의 모습은 여자의 몸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과연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신과 인간의 소노그래피 그녀가 희랍어로 힘겹게 써 내려가는 시는 마치 예수가 부활하기 전 무덤 속에서 썼으리라 짐작되는 것이다. 한 여자가 땅에 누워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 흙. (64쪽) 차가운 무덤 속에 묻힌 신의 눈에는 흙이 있고, 입과 목은 차가운 눈으로 막혀 있다. 그녀는, 신은 말할 수 없다. 무덤 안은 남자와 여자가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다. 카타콤베 묘지에 갔던 남자의 기억이 떠오른다. 여러분, 왜 관 속에 유골이 없을까요? (…) 박물관에 가져다놓은 거 아니에요? (…) 누군가가 훔쳐갔나요? (…) 다아 여기 있습니다. (…)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면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153쪽) 백골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남자는 자신이 곧 그 백골이라는 것을 안다.(“수천 구의 육체들이 뼈까지 깨끗이 삭아버린 거대한 무덤 속에, 그토록 따뜻한 몸을 가진 우리가 모여 있었다는 게.” 155쪽) 그는 구토감을 느낀다. 온몸에 묻은 죽음의 흙냄새와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여자에게 고해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이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마치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가 정원지기인 줄로만 알고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느냐 묻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다.(요한복음 20:15) 그는 앞으로 펼쳐질 영원한 어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신에게 거듭 질문한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내 말, 거기서 듣고 있나요?(161쪽) 두 사람의 과거로 구부러졌다 돌아오곤 하던 현재는, 남자와 여자가 ‘어둠’ 속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는 배타적인 둘만의 시간, 즉 17장부터 21장까지의 시간 동안 직선으로 그러나 더 천천히 흐른다. 건물 안으로 날아온 새를 구하려던 남자는 발을 헛디뎌 안경을 깨뜨리고 강의실로 돌아가지 못한다. 밖으로 나온 여자가 남자의 소리를 듣고 그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밖으로 나간다. 빈자리들이 이상한 통각을 띠고 그녀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시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160쪽) 남자의 시간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는 점점 흐릿해지는 자신의 시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39쪽) 두 사람의 대화는 남자의 빈자리가 발생시키는 시간의 진동을 여자가 감지하면서 시작된다. 이 시간의 감각은 파동의 형태로 전달된다. 남자는 여자의 구두 소리를 듣고 난간을 주먹으로 두드려 자신이 있음을 알린다.(“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이 진동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133쪽) 여자가 ‘들은’ 것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아니라 그녀의 몸 전체, 피부 세포에 닿아 그것들을 흔드는 진동이다. 그들의 대화는 시신경에 의한 시선도, 청신경에 의한 소리를 통해서도 아닌 바로 이 촉각의 소노그래피(sonography)를 통해 이루어진다.4) 시인이 존재들에게 엑스선을 투과시켜 백골들의 영상을 얻어낸다면(“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해부극장 2’)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는 소노그래피를 통해 육체의 말랑한 조직들, 피부나 혀, 심장에서 반향된 영상을 보여 준다. 엑스선은 말랑한 것들을 찍을 수 없고 초음파는 뼈를 투과할 수 없다. 통증은 말랑하고 붉은 것의 감각이다. 뼈에는 통각 세포가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뼈가 육신을 가졌을 적의 고통의 서사다. 소노그래피의 언어는 존재 자체가 내뿜는 파동이므로 소리로 쪼개지지 않는 언어다. 이것 역시 몸으로부터 유래하지만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55쪽) 가는 목소리가 갖는 폭력성은 없다. 여자가 말 대신 택한 시선의 언어 역시 그런 점에서 비육체적이다.(“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55쪽) 이때 접촉의 감각은 시각이나 청각이 배제된 상태의 대리보충, 즉 실제 피부의 감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5) 소노그래피의 촉각은 오감의 유무와 관계없이 존재가 뿜어내는 살아 있음의 파동, 즉 여자가 말한 ‘시간’의 감각이다. 한강은 특유의 독특한 문체로 두 인물 사이에 반향되는 소노그래피를 형상화한다. ‘희랍어 시간’에는 큰따옴표나 작은따옴표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자유간접화법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자유간접화법은 문장 안에서 형식적 서술자와 서술 내용이 담는 의식의 주인을 불일치시키며 서술자보다 인물을 부조한다. 그러나 한강의 문장에서 3인칭 화자는 남자와 여자의 의식 이면으로 유보되지 않는다. 따옴표 없이 곧장 전해지는 말은 인물의 목소리를 3인칭 서술자와 동일한 층위에 위치시키며 그들 간의 위계를 무너뜨린다. 모든 소리는 세계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자기 안으로 시를 틈입시킨다. 인용부호에 의해 절단되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말뭉치(corpus)를 만들어 내는 서술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3인칭 서술자 각각의 인격을 부각한다. 목소리들이 어우러지는 한 공간-소설 안에서 인물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시가 되고 그들의 모든 말은 행과 연의 형식으로 배열된다. ‘희랍어 시간’은 세 인격의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소리 풍경(soundscape)이다.6)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 그늘진 그의 얼굴을, 그녀는 지금 온 힘을 다해 건너다보고 있다.(169쪽) 촉각의 소노그래피가 만드는 소리 풍경 안에서 듣는 일은 곧 보는 일이며, 보는 일은 곧 듣는 일, 존재의 파동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진동은 소리가 글자로 박제되는 것과 달리 발생하고 감각되는 즉시 사라진다.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소노그래피는 존재를 파열시키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다만 투명하게 통과한다. 모든 인물의 말이 인용부호 없이 제시되지만 특히 여자의 목소리는 서사 세계 안에서도 음성화되지 않는 가장 시적인 목소리다. 여자의 문장들은 기울어지면서 남자의 목소리와 구분된다.7) 19장 ‘어둠 속의 대화’ 후반부에는 이렇게 목소리가 뒤섞이면서 두 사람의 파동이 중첩되는 대목이 있다.8) 서사 표층에서 실제로 발화되는 음성은 남자의 목소리뿐이므로 소노그래피가 아니라 일반적인 감각으로 읽어낼 경우, 소설은 오직 남자의 독백으로만 가득 찬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의 대화는 각자가 소환하는 기억의 단위들로 교환되며 소리가 아닌 언어, 파동의 접면들이 교차하며 이루어진다.(“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핏자국 위에 핏자국이 덧씌워진다.” 155쪽) 언어의 칼금을 막아내기 위해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소설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서로 겹치며 일으키는 간섭을 현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 독한 취기 같은 피로가 그녀의 의식을 둔하게 만든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꿈인 것처럼, 아주 먼 곳에서부터 토막토막 끊긴 채 울려온다.(166쪽) 여자의 파동은 남자에게로 전해진다.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려 애쓴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려 애쓴다.(167쪽) 여기서 남자의 응답은 여자의 파동과 똑같은 기울임체로 발화된다. 두 존재가 고막을 통해 소리를 교환하지 않고도, 살을 맞대지 않고도 그 무엇보다 깊은 층위에서 교감하는 장면이다.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과거로 여러 통의 편지를 쓰던 인간은 신의 고통 안에서 그와 함께 현재적으로 공명한다. 이 장면에서 남자의 목소리는 여자의 그것으로 중첩되며 같은 기울임체로 서술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남자의 그것으로, 다시 말해 기울어진 목소리가 평평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여자는 신성의 체현자이기 때문이다.(“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78쪽) 구원의 빛이 침묵의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온다. 나를 만지지 마라 이제, 소설의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이 제시된다. 인간의 혼이 파괴되지 않는 이유는 고통을 감각하는 신성이 서로에게 중간태인 동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대 희랍어에는 수동태와 능동태가 아닌 제3의 태, 중간태가 있다.(18쪽) 중간태는 어떤 행위가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게 했던 행위가 다시 주체로 돌아오는 이 재귀적 운동은 소노그래피의 언어가 보이는 양태다. 소노그래피의 방식은 그 자체로 중간태적 추론이다. 그는 대상에게로 뻗어 나간 자기 파동의 반향을 소노그램으로 읽어 낸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원인을 축자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는 일이다. 아무리 유사한 경험을 하더라도 고통은 결코 동일한 정도로 감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아버지는 남자와 같은 유전질환으로 인해 시력을 이미 잃은 사람,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동일한 조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주파수를 오롯이 피부로 느끼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의 삶을 추체험하는 일이다. 가령, 남자가 곧 실명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자기 눈에 갖다 대며 “이건 소파고 이건 책장이야. (…) 이렇게 걸어도 안 넘어질 수 있어.”(146쪽)라며 일부러 왔다 갔다 하던 여동생처럼 말이다. 동생은 오빠를 놀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닥칠 ‘어둠’이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을 거라는”(147쪽) 위로를 보낸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고통은 내가 영영 닿을 수 없는 점근선의 영역이다. 반면 마지막 고해, 요아힘과의 이야기는 남자 역시 언어의 육체성이 자아내는 폭력을 경험했음을 들려준다. 그 폭력은 곧 타인의 고통을 주체의 자기동일성 안으로 포획하여 해석해 버리는 일이다. 요아힘은 남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욕망을 타인과 자신의 고통 안에서 어떻게 겹쳐 두어야 하는지 모르므로 남자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그는 고통의 완전한 극복과 단절을 믿는다. 시한부 선고의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10쪽) 말하는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꼭 같은 경험을 몸의 기록으로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어둠과 죽음의 병실을 물리친 그에게 생의 감각은 생동하는 육체의 폭발적인 감각, 물컹하고 뜨거운 것이다. 요아힘은 여자에게는 고통이었던 육체적인 것과의 접촉을 갈망한다. 남자가 어둠을 품은 이라면 요아힘은 빛의 질서를 품은 이다. 남자가 비논리와 모순을 껴안는 문학을 사랑한다면 요아힘은 사고를 명징하게 자르는 철학을 사랑한다. 고통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났다고 믿는 이의 강한 확신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누구보다도 눈을 멀게 만든다. 자신이라면 완전한 어둠이 다가올 그때를 위해 점자를 배워 두겠다는 철학자의 명랑한 조언은 남자의 신앙인 소멸의 이데아를 산산조각 낸다. 다시 한번, ‘백치처럼’ 순진한 이 조언은 남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요아힘에게 그것은 단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118쪽)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눈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118쪽) 빛이 소멸한 세계에서 앞으로의 생을 계속해야 하는 남자에게 요아힘의 논증, 어둠 속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반박은 그의 마지막 희망을 꺼트린다.(“네 말을 들은 순간, 덧없는 전 세계가 빛을 잃었지.” 118쪽) 그래서, 점자를 통해 남자와 진정으로 닿기를 바라던 요아힘의 욕망은 언어의 폭력적인 육체성과 실상 같은 것이다. 남자는 요아힘으로부터 깨닫는다. 자신이 독일에서 여자에게 던진 사랑의 말, 너는 나의 목소리가 필요할 테니 같이 살게 될 것이라는 그 고백이 폭력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받은 상처로부터 타인에게 준 상처를 깨달은 마리아는 이제 눈앞에 현전한 예수ㅡ언어의 육신을 본다. 신과 인간의 목소리는 구별되지 않고 한데 뒤섞인다. 남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의 파편들,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희랍어 시간의 여자 그 자체다. 그녀의 이름은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100쪽)이다. 고통받는 두 인간의 신성은 한데 섞이고 소노그래피는 중첩된다. 말할 수 없는 이와 볼 수 없는 이의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해는 공통원소 없는 그 존재들의 배면에서 투명한 파동을 통해 전해진다. 파동은 한 곳으로 수렴하지 않고 서로의 몸 안을 투과하며 지나간다. 이제, 신은 요아힘과는 다른 ‘접촉’의 방식으로 남자를 구원하고 눈으로 목이 막혔던 그녀 역시 그 구원으로 인해 부활한다. 따로따로 제시되던 목소리는 한 연으로 묶이면서 말을 주고받는 직접적인 대화의 국면에 도달한다. 1인칭 단수 화자들은 ‘우리’를 직감한다.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167쪽) 구원은 끝없이 멀어지는 존재가 내 안으로 들이닥쳐옴을 느낄 때 일어난다.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는 말을 남기며 떠나간다.(요한복음 20:17) 멀어지는 자신을 붙잡지 말라는 이 말은 타자를 주체의 자기동일성 안으로 납치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타자를 몇 번이고 무한히 떠나보냄으로써 그의 존재를 부조하라는 율법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부축해 그의 집까지 데리고 온 여자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손바닥에 쓴다. 그녀가 그에게 최초로 대답한 말은 떠난다는 말이다.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171쪽)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이 접촉은 소설이 시종일관 지양해 온 폭력적인 접촉과 다르다. ‘어둠 속 대화’의 절정 이후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그러나 두 몸의 접촉 이후 다만 ‘모른다’는 진실의 무자비한 범람만이 남자를 압도한다.(“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183쪽) 그가 그녀를 안자마자 뒤이어 열네 번의 ‘모른다’가 연속해서 등장한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출 때까지도 둘의 접촉은 항구적인 비접촉이 되는 것이다. 강력하게 현전하는 단 하나의 진실은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184쪽)나는 ‘시간’이다. 마리아는 이제 떠남 속에서 빛이 아닌 어둠을 본다. 이때의 ‘봄’은 시각과 무관하게 생의 파동을 온몸으로 수용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적을 의미하지 않는다.9) 그것은 죽음 안에서 떠나가는 생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구원은 영생이 아니라 떠나감의 현전 안에서 일어난다. 보르헤스가 말한 시간-존재를 태우는 불(122쪽)이 여자와 남자를 통과하고 나면 새는 날아가고 백골만이 남는다. 개별 존재의 신성이 육신 속에서 체현된 것이 새라면 죽음 이후부터 그 신성은 뼈들이다. 플라톤이 말했듯 진실에 대한 앎은 전생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상기할 뿐이다. 전생의 기억은 시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바다 아래의 숲에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빛도 소리도 그곳에는 없었지요. (…) 마침내 당신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낼 때까지, 입술 사이로 둥글고 가냘픈 물거품이 새어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 누워 있었어요.(185~186쪽, 21장 ‘심해의 숲’) ‘심해의 숲’의 다른 이름은 ‘해부극장 3’으로 부활 이후 무덤가에 나란히 누운 여자와 남자의 그림이다.10) 죽었던 신과 고통받는 인간이 함께 나란히 누울 수 있다면, 인간의 신성은 더는 논증이 불필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인간의 혼이 파괴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의 신성과 달리 인간의 신성은 죽음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고통을 내려다보는 일이 아니라 다만 죽음 안에서 옆에 누운 다른 이의 뼈를 쓰다듬는 일이다.11) 구원을 바라던 신은 부활하여 드디어 입술을 연다. 시종일관 남자의 목소리를 사용하던 1인칭 화자는 마지막 장 ‘0’에서 오직 한 번 여자의 목소리로 발화한다. 현전하는 이 말씀, 로고스는 음성도 문자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도 파괴하고 밀어내지 않는 언어, 촉각으로 전해지는 파동의 말씀이다. 남자와 여자는, 우리는, 그리고 인간은 영원히 어긋나는 방식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결국, 구원의 반증은 ‘우리’라는 단어다. 그래서 소설은 ‘0’의 끝에서 다시 ‘1’로 돌아간다. 신은 말한다. 에모스, 에메테로스. 나의, 우리들의.(10쪽) 역설의 구원 한강의 문학에서 시간은 정말로 환(環)처럼 흐른다. 그러므로 ‘희랍어 시간’이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읽은 이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는 눈사람이다.(‘작별’12)) 언 몸이 진눈깨비로 흩날리며 조금씩 사라지는 중이다. 눈사람은 남자가 갈망하던 소멸의 이데아의 현현이면서 새와 백골의 중간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많은 것을 안다. 그는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몸 안의 심장을 얼리는 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150쪽)다고 확신한다. 아이와 애인과 가족과 작별하며 그가 마주하는 최후의 질문은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150쪽)이다. 이는 ‘희랍어 시간’이 던지는 질문과 같은 물음이다.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13)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 최후까지 남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눈(雪)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소멸하는 것처럼 한강의 인물들은 사랑할수록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나 바로 그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서로의 “진동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투명한 접지”(‘작별’, 133쪽)가 된다. 나와 당신은 같아질 수 없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나를 떠나는 중이므로 나는 당신과 연결된다. 눈사람은 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실체는 다만 촉각의 소노그래피뿐이며 그것은 “변함없이 진동하며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걸쳐져 있”(134쪽)음을 안다. 그리고 이 파동을 타고 전해지는 “무색무취인 데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어서 거의 인간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134쪽)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사랑은 강렬한 접촉이 아니라 다만 끝없이 멀어지는 ‘사이’에서 전해진다. 언어는 이때 비로소 완전한 순수에 도달한다. 의미는 분할되거나 상실되지 않는다. 따옴표로 분절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행과 연을 만들면서 소설 속에 시를 쓴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죽음 안에서 삶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 ‘작별’과 ‘희랍어 시간’의 마지막 장면이 모두 두 존재의 입맞춤으로 끝나는 것은 붉은 혀와 입술이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일 테다. 우리는 서로를 만지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진실을 감각한다. 나의 파동이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살이 아니라 다만 당신의 뼈, 시간의 불에 타고 남은 마지막 눈의 결정이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기에 당신은 나를 구원한다. --------------------------------------------------------------------------------------------- 1) 시집의 해설을 쓴 비평가 역시 한강의 시들은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의 화자들을 ‘희랍어 시간’ 속 남자와 여자로 잠시 연결하며, ‘희랍어’를 “순수한 언어의 능력에 집중하는 소설”이라 평한 바 있다. 조연정, 해설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42~143쪽. 2)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라고/ 견디며 말한다” 한강, ‘해부극장 2’, 한강, 위의 책. 3)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한강, 위의 글. 4) 소노그래피는 초음파를 이용해 시각 영상을 재현하는 기술이다. 5) 양현진은 실명과 실어가 몸짓, 촉각에 의한 소통에 주목하게 한다고 본다. 그러나 피부의 직접적인 접촉과 몸짓만을 대화로 보는 것은 국소적인 독해다. 소설에서 시각과 청각이 배제될 때 도드라지는 것은 시간, 즉 파동의 흐름이다. 양현진, ‘한강 소설의 촉각적 세계 인식과 소통의 감수성’, ‘한국문학이론과비평’, 70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2016. 6) 사운드스케이프는 여러 가지 소리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듣는 영상’으로 단지 소리가 만드는 공간적 환경 그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지각하는 청취자의 지각 속에서 그려지는 풍경이다. 7) 한강은 대상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기울임체를 사용한다. 시집에 수록된 ‘해부극장 2’의 백골과 ‘조용한 날들 2’에 등장하는 달팽이의 목소리가 그렇게 나타난다. “(건드리지 말아요) (…)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8) 서로 다른 두 개의 물질이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파동은 동일한 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두 파동이 동일한 지점에서 교차할 때 일으키는 상호작용을 파동의 중첩 현상이라 한다. 9)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믿는 게 아니라, 죽음 앞에서 꿋꿋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장뤼크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37쪽. 10) 한강의 시 ‘해부극장’ 연작은 두 편뿐이지만 소설의 ‘심해의 숲’은 남자가 쓰는 또 한 편의 시다. 11) 낭시는 예수의 부활을 수직 변화로 이해하지만 소설이 말하는 인간의 신성은 수평적이다.“이 ‘자세’가 (…) ‘부활’을, 다시 말해 ‘들어올림’이라는 사태를 만든다. (…) 무덤의 수평성과 직각을 이루는 수직성으로서의 들림 혹은 일으켜 세움인 것이다.” 장뤼크 낭시, 위의 글. 12) 한강, ‘문학과 사회’, 2017년 겨울호, 문학과지성사. 13) 한강, ‘회상’, ‘서랍에’, 문학과지성사, 2013.
  • 한강·최승자 등 여성시인 4인 시집, 새 디자인으로 재출간

    한강·최승자 등 여성시인 4인 시집, 새 디자인으로 재출간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을 비롯해 여성 시인 4명의 시집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출간됐다. 문학과지성사는 ‘시인선 디자인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최승자·허수경·한강·이제니 시인의 시집 1편씩을 주목받는 여성 북디자이너 김동신, 신해옥, 나윤영, 신인아의 디자인을 입혀 새롭게 출간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에 선보이는 시집은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1981), 고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1992년),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 이제니 시인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이다. 이근혜 문학과지성사 주간은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폭넓게 사랑받은 여성 시인들을 선별했다”면서 “표지만 바꾼게 아니라 모바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종이책의 질감을 맛보고 책 읽은 재미를 더하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인의 첫 시집인 ‘이 시대의 사랑’은 유신과 군사독재의 억압 속에서, 정통적인 수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뜨거운 비극적 정열을 뿜어올린다. 이 시대가 부서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사랑과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언어적 결단이다. 격동의 1980년대를 청춘의 이름으로 관통해온 이들에게 시인 최승자는 처절한 분노로, 치명적인 중독으로, 그리고 가슴 먹먹한 이름으로 자리한다.●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2018년 작고한 고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은 세간의 비참과 내면의 허기를 노래해온 시집이다. 일말의 포즈 없이 진정성을 향한 열망으로 씌어진 시편들은 하나같이 버림받다, 아프다, 무너지다 같은 절망적 어사들로 짜여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 또한 드러낸다. 시를 읽은 일은 삶의 지속이 곧 상처를 증식시키는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이를 기꺼이 수용하며 나아가는 시적 고행을 조심스레 뒤따라보는 과정이 된다.●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주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이 당선돼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던 작가가 등단 20년 차를 맞은 2013년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중 60편을 추려 묶어낸 시집이다. 부서지는 육체의 통각을 올올이 감각하면서도 쓰고 사는 존재로서 열정에 불을 지피는 시적 화자의 거대한 생명력은 읽는 이에게 무한한 영감과 용기를 북돋는다.●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이제니 시인은 “어제의 여백을 돌아본다. 상실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흔적들, 오래 품고 있던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은 시에서 문장들 사이사이 문득 끼어드는 어떤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그 목소리들은 한 개인의 목소리이자 그 개인이 지금껏 겪어온 모든 사람, 헤쳐온 삶의 자취이기도 하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20세기 美시인들의 노래, 21세기 우리를 위로하네

    20세기 美시인들의 노래, 21세기 우리를 위로하네

    치열하게, 혹은 경이롭게 생을 노래한 20세기 미국 대표 시인들의 시집이 연이어 출간됐다. 앤 섹스턴(1928~1974)의 ‘밤엔 더 용감하지’(민음사)와 메리 올리버(1935~2019)의 ‘천 개의 아침’(마음산책)이다. ●앤 섹스턴, 용감함 뒤 숨은 불안 표현 앤 섹스턴은 실비아 플래스 등과 더불어 ‘고백시파’에 속하고, 에이드리언 리치처럼 여성의 이야기를 대범하게 그린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기 시인이면서 보스턴대에서 정교수로 문학을 가르친 성공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을 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백인 남녀가 결혼해 아이 둘을 기르는 가정을 의미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지배적이던 1950년대 미국에서, 섹스턴은 보수적인 어머니상에 순응하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자유로운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옷을 완전히 벗어던지지도 못했다. 그는 여기서 오는 죄책감, 자괴감 사이에서 오는 분열을 ‘밤엔 더 용감하지’에 실린 68편의 시를 통해 맹렬히 고백했다. ‘나는 홀린 마녀, 밖으로 싸돌아다녔지./ 검은 대기에 출몰하고, 밤엔 더 용감하지.’(23쪽·시 ‘그런 여자 과(科)’ 일부) 책을 번역한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는 “그녀의 작품을 소개하는 건, 시인의 용감함과 그 용감함 뒤에 드리운 불안을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메리 올리버, 생사의 다층적 고찰 ‘천 개의 아침’은 한국에 첫 출간되는 메리 올리버의 시집이다. 광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예찬,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과 감사를 담은 36편의 시가 실려 있다. 특히나 올리버의 노년에 출간된 이 시집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다층적인 고찰이 두드러진다. 나이 들어가면서, 반려견 퍼시와 같이 교감하던 대상들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죽음의 이미지는 점차 긍정으로 나아갔다. 그가 끊임없이 시 안에 사랑하는 대상을 등장시켜 회상하며 새로운 추억을 덧입혔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던 생전의 바람 그대로, 올리버의 시편들에서는 생명력이 꿈틀댄다. 가령 이런 식이다. ‘춤을 추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 규칙을 깨는 게 가끔은/ 규칙을 확장하는 거지.// 규칙이 없을 때도 가끔 있어.’(43쪽·시 ‘세 가지를 기억해둬’) 김연수 작가는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메리 올리버의 시는, 내가 그대로 따라 추고 싶은 춤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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