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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 제1회 서울디자인대상 오늘 시상

    [사고] 제1회 서울디자인대상 오늘 시상

    서울신문이 주최하고 산업자원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이 후원하는 제1회 ‘서울디자인 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인 산자부 장관상에 현대자동차의 그랜저가 선정됐다. 서울디자인대상 심사위원회(위원장 김철수 국민대 공업디자인과 교수)는 26일 대상 1점을 포함한 42점의 수상작을 발표했다. 서울디자인대상은 기업의 디자인 개발을 촉진시키고,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됐다. 심사 및 선정은 제품디자인과 시각디자인 등 2개 부문으로 나눠 진행됐다. 대상을 받은 그랜저는 외형을 역동적이고 볼륨감있게 처리해 대형 세단의 아름다움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우수상(한국디자인진흥원장상, 서울신문사장상)으로는 제품디자인 부문의 경우 ▲레인콤의 ‘Iriver-U10’ ▲웅진코웨이의 룰루 비데 BA06 ▲행남자기의 7첩 반상기세트인 ‘경복궁 아래’ ▲STC의 타임리스 등 4점이 뽑혔다. 시각디자인 부문에서는 ▲하나로텔레콤의 CI ▲CJ의 올리브유 드레싱 ▲브릿지위드의 알파벳카드 ▲이수건설의 브라운스톤 BI 등 4점에 최우수상이 돌아갔다. 시상식은 27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태평로1가 서울신문사 1층 서울갤러리에서 채수삼 서울신문사장, 조환익 산자부 차관, 정태근 서울시 정무부시장, 전준헌 한국디자인진흥원 기획본부장, 수상기업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자유부인에서 0호부인 시대로

    자유부인에서 0호부인 시대로

      아내는 아니다.「세컨드」는 더욱 아니다. 애인이라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깊고 첩(妾)이란 단어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관계, 이름하여 0호부인. 2호나 1호보다 훨씬 상위대접을 받는 이 0호부인이 최근 국산영화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다. 남녀평등이「프리·섹스」시대를 초래하고 그런 사회현상이 재빨리「스크린」에 담겨지는 때문일까? 아내도 아니고 첩도 아닌 위치에서 사랑의 권리를 주장하며 56년도의「히트」작「자유부인」은 서재 속의 꽁생원 같은 대학교수 남편에게 불만을 품고 바깥바람을 쐰다. 그녀가 뛰어든 세계는 10년간 밀려온「아메리카니즘」이 범람하는 허영의 세계. 남편과 가정이 생활의 전부였던 자유부인은 그 새로운 세계에서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재미를 느끼고 모험을 즐긴다. 남편의 제자와「키스」도 하고 사기꾼형의 사업가와「랑데부」도 한다. 춤바람에 휩쓸린 자유부인은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의 권능까지 침해, 교수에겐 양심의 상징 같은 학생의 성적표를 살짝 고쳐놓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부인이 피운 바람은 어디까지나 동인(動因)이 바깥에 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게 아니고 세상 추세에 그대로 말려들 뿐이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때 쯤은 이미 비극 속에 떨어진 이 자유부인을 관객은 내심 동정하면서도 박수를 했다. 이 사회풍자극이 당시 성공한 이유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현재, 여성의 위치는 달라졌다. 여자의 바람기, 불륜의 남녀 관계는「스크린」속에서 상당히 합리화하고 있다. 지난해 37만의 관객동원으로 방화사에 기록된『미워도 다시 한번』(정소영 감독)에서 이를 보자. 문희는 처자 있는 남성 신영균을 사랑하고 아이까지 얻는다. 그러나 그는 과거 사회가 생산했던 첩은 아니다. 선량하고 사랑할 권리를 주장하는 하나의 여성이다. 남성의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권리를 누리려는 여인, 이 2호부인의 비극에 관객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룬 것이다. 현대관객은 이 2호 또는 0호부인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것일까? 0호부인의 본격적 등장으로 볼 수 있는『당신』(전병순 원작『또 하나의 고독』·이성구 감독)에서 그 위치를 보자. 주인공 수진은 지성, 교양, 미모를 갖춘 여성이다. 그는 끈질기게 구혼하는 남자를 외면하고 처자 있는 중년남성을 사랑한다. 실질적인 부부관계나 다름없는 생활을 5년간이나 계속하면서 결코 남자측의 도움을 안받는다. 이점에서 첩과는 다르다. 그들의 정사는 매주 토요일 여자의「아파트」에서 이뤄지고 피차 그들만의 비밀보전에 안간힘을 쓴다. 결혼해서 남자에게 예속되기보다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 여자가 결혼해서 남자에게 예속된다는 종속관계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고 1대1의 자유로운 사랑을 누린다는, 이런 관계는 어쩌면 현대여성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남녀관계일까? 원작자 전병순씨는「사르트르」와「보봐르」의 관계에 이를 설명한다.『결혼이란 것으로 사랑을 구속하는 관계는 비판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사르트르」「보봐르」의 관계를『가장 차원 높은 결합양식』이라고 말하는 전씨는『현재 존속하고 있는 결혼양식이 남녀결합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영화에서는 오히려 0호부인이 관중들의 동정을 사기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경제적으로 독신여성의 자립이 가능해진 시대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섹스」의 평등권 주장일까? 남성이 2호, 3호로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사이 여성도 그대로 있지만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사회문제로 증가하고 있는 여성의 탈선, 불륜한 성관계가 이를 증명한다. 그중에서 타산적이고 지적인 현대여성이 자기대로의 애정자세를 가지고 자각된 경지에서 처할 수 있는 위치가 말하자면「0호부인」(성대교수 강신항씨 말)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남녀 3각관계의 비극은 국산「멜로드라마」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그것도 한 남성을 둘러싼 두 여인의 관계가 공식적인 설정이다. 축첩제도가 가능하던 시대에 악녀로 등장하던 2호는 현대에 와서 반대로 동정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사랑에 오히려 갈채를 보내는 관객심리 때문이다. (시나리오작가 이은성씨 말) 남자의 가정을 파탄시키는 일 없이「당신」이라 부르는 사이 그런데 2호보다, 1호보다도 한 차원 위인 0호부인의 위치는? 영화『당신』속의 주인공 수진의 독백에서 이를 들어보자. 『나는 그의 무엇일까, 부인? 아니다.「세컨드」? 천만에, 나는 결코 그에게 매여 있지 않다. 그에게 부담을 줄 때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인? 풋사랑이나 하는 설익은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야. 나는 오직 그의「당신」일 뿐이야 - 』 재미있는 것은 부부관계를『결혼이란 굴레에 얽매여 억지로 웃고 사는 생활』로 생각하는 주인공이 호칭은, 부부관계의 호칭인「당신」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호칭」으로나마 부부간의 친밀감을 유지하자는「콤플렉스」의 소산을 아닐지? 국문하자 강신항씨는 이에 대해『평상부부의「당신」칭호는 너무 평범하고 흔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당신」「여보」일 수 없는 사이에서는 이 호칭이 가장 친근한「뉘앙스」를 주게 마련』이란 것. 「스크린」이 사회의 한 단면을 그리는 것이라면 현대사회는 어쩌면 0호부인시대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녀, 아내를 가진 남성이 자신의 가정을 지키면서 또 다른 사랑을 즐기려는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0호부인은 가장 이상(?)적인 이성이 될 것 같다. 이런 관계에서는 최소한「자유부인」의 비극은 없을 테니까. 작가 전병순씨는『또 하나의 고독』이 실존인물을「모델」로 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도『그 주인공이 실존인물이 아니냐?』는 질문을 수많은 남녀에게서 받았다는 것. 가정파탄을 일으키고 가정법원에 제기되는「자유부인」과는 달리 사회표면에 노출되지 않는 게 0호부인의 특징이다. 사회 이면엔 보다 많은 0호부인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확대경을 손에 쥔 손이 창백하리만큼 새하얗다. 곱상한 얼굴, 미인형이다. 서울 서대문구 한구석의 담뱃갑만한 골상소(骨相所) 내실. 젊은 여류역학자는 골상도 수상도 아닌, 바로 족상(足相)에 심취해 있다.『구정 원단(元旦)엔 족상을 봅시다』신종 족상소의 열띤 개점사(開店辭) - . 대학나온 젊고 예쁜 미망인이 냄새나는 발도 주무르며 『발은 나무에 있어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몸을 받치고 또 걸어다닐 수 있도록 버팀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죠. 골상(骨相)과 수상(手相)에 못지 않게 발의 형태는 그 삶의 운명을 점치는 하나의 예시적, 영감적 존재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임경산(林景山)(여·35) 족상가는 열을 올린다. 미모 - 서른 다섯의 젊은 미망인. 대학 출신에다 전직이 여학교 교사라는 좀 별난 이력서가 이 여자「관상장이」를 감싸고 있다. 전문이 골상과 수상인데 이번에 업종을 하나 더 추가, 족상업을 차렸다. 서대문에서 아현동으로 이르는 큰 길목, 옛「코리어·호텔」옆 후미진 자리에 자리잡은 임경산 골상소. 손님이 많다. 양말을 벗고 알몸뚱이(?)가 된 발을 내맡긴다. 확대경이 발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나면 미녀 족상가는 이윽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발의 경도(硬度), 두께, 전체 모양 등을 샅샅이 검열하는 것이다. 『수상이나 족상은 허망한 미신이 아닙니다. 확고한 통계적 학문이에요. 파란만장한 인생항로에 있어 시기의 성쇠라든지, 직업의 적부, 또는 선천적 능력의 대소 같은 게 없을 수 없잖아요? 여기에 태국,「프랑스」, 독일, 일본 같은 데서 오히려 성행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족상을「통계적 학문」에다 얽어 맨다. 수상이 초·중·말의 유년법(流年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반해 족상은 영구불멸의「대활(大活)」이 제1의. 수상이「가변(可變)」이라면 족상은「불변(不變)」인데 그 기저(基底)가 있다고 했다. 임경산씨가 역학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부터였다. 향리인 충북의 D시에 사숙하던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자신의 운명이 스님의 예언과 너무나 일치되어 버린데 감명, 재혼 대신 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이제는 사주·골상·수상에다 족상까지 섭렵하여 명실공히 역학계의「명인좌(名人座)」에 올랐다고 자부할 정도. 발바닥에 털 있으면 귀인상이요 사마귀 있으면 큰 무사감 사람의 발엔 방향(芳香)이 있다. 특히 도시 남성의 그것은 말할 수없이 썩은 향내를 종횡무진 풍기고 있다. 그 냄새나는 발에 내밀히 감춰져 있는 운명과 신비의 의미를 발굴해내는 작업이 족상이란 이름의 역술(易術). 옛날 중국의 안녹산(安祿山)은 두 발바닥에 사마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작고한 국군 창설의 유공자인 K장군 발바닥에도 큰 사마귀가 있었다. 족상에서 사마귀는 무장(武將)운. 발바닥에 털이 나면 대귀(大貴)상인데 중국 한문제(漢文帝)가 그랬다. 족상에서 옛 중국의 실존인물들이 예거되는 것을 보니 그것의 역사는 수상과 함께 꽤 오래된 모양. 임경산씨는 69년을「족상보는 해」로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골상과 수상만이 일반에 광범히 뿌리박고 있었는데 골상은 기실 족상이 뒤따라야 진면목이라는 것. 『발금은 거짓이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운명과 성질을 무언중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족상이야 말로 진실의 학문이지요』 족상은 보통 족형(足形)과 족문(足紋)으로 이루어진다. 수상이 생명, 두뇌, 감정, 운명, 태양, 재운, 건강, 방종, 인기, 수경(手頸), 총애, 피로, 장해, 화성(火星), 영향, 희망, 원조, 금성(金星), 자녀, 직감 등 21선의 수장(手掌)선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비하면 족상은 그「폼」이 간단한 셈. 발은 방정하게 생기고 두터우며 길고 보드라운 것이 길상(吉相)이다. 무늬가 글자 모양으로 된 것, 사마귀가 있는 것, 빛깔이 윤택한 것 등은 모두 좋은 상이며 반대로 짧고 작은 것, 얇거나 거친 것, 단단한 것, 무늬가 없는 것 등이 천상(賤相)으로 평가되고 있다. 『옛날 이태백은 발바닥에 거북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무늬나 비단무늬 같은 것은 다 길상이지요. 탐스러운 꽃무늬도 좋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골상소 개업 10년 만에 족상소를 개설한 이「여류」의「족상관」은 자신과 신념으로 싸여 있다. 자신의 족상은 백발백중이라고 기염. 입시「시즌」과 구정을 맞아 임경산 골상소는 그야말로 초만원, 족상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금년은 천대만 받던 발이 햇빛을 보게 되는「족권신장의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발의 두께 4치 넘으면 거부(巨富)상이요 발가락이 길면 어진 사람 ◇ 족형의 판단 ① 발의 두께가 네 치(4寸)를 넘으면 거부의 격이다. ② 발가락이 가늘고 길면 충량하고 어질다. ③ 발가락이 고르고 단정한 것은 호걸이며 현인의 상. ④ 남자가 오리다리 같으면 평생 어리석고 천하며 여자가 오리다리이면 남의 첩이나 종노릇을 한다. ⑤ 발이 커도 얇거나 발바닥이 평평한 것은 비천하다. ⑥ 귀인의 발은 작아도 두텁고 비천한 사람의 발은 커도 얇다. ⑦ 발바닥 아래로 거북이 들어갈만하면 부귀를 얻는다. ◇ 족문의 판단 ① 발바닥에 꽃무늬가 있으면 재산을 많이 모은다. ② 발바닥에 거북무늬나 비단에 수놓은 무늬 같은 것이 있으면 다 좋은 상이다. ③ 열 발가락이 모두 둥근 무늬면 성격이 야비하다. ④ 발바닥에 무늬가 많으면 크게 자손이 번창한다. 무늬가 전혀 없으면 가난하다. ⑤ 발바닥의 십자(十字)문, 금(禽)문, 인형(人形)문, 도형(刀形)문은 모두 고관대부의 격이다. ⑥ 열 발가락에 모두 무늬가 없으면 파재(破財)가 많다. ⑦ 발가락 여덟 개에 소라무늬가 있는 것은 부귀할 격이다. 그러나 열 발가락이 모두 소라무늬면 오히려 성품이 야비할 상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포기했던 남성 복원할 수 있습니다

    포기했던 남성 복원할 수 있습니다

      대학병원 비뇨기과는 고장난 비뇨기들의「메카」다. 수줍음 속에 하루에도 수백 명의「고장난 행렬」이 이 의학의 비경(秘境)을 순례한다. 비뇨기과는「생식기과」를 애써 좀 점잖게 표현한 것. 질환이 많기론 생식기 분야가 다른 병과보다 더하다. 남성 불임증과 정관복원수술이 우리 임상의학계에서 하나의「이슈」로 등장한 것은 불과 4, 5년 전부터의 일. 잃어버린「남성」을 찾는「인간복원공사」의「해머」소리는 따라서 수술실 속의「메스」소리일 수도 있다. 불임증 환자는 여자쪽이 더 많고, 정관수술 받기는 30만 명 우리나라 불임부부는 전체 가임부부의 10%. 이중 60%가 여자쪽에, 40%가 남자쪽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 최근의 통계로 밝혀졌다. 임신하는 데는 보통 ①생식가능연령의 부부여야 하고 ②부부 동서기간이 정상임신 분만성립에 충분해야 하며 ③임신 가능한 성행위가 반복되어야 하고 ④임신 중에 중절수술 같은 것을 하지 않아야 하는 등의 몇 가지 의학적 조건이 따른다. 이런 조건하에서 만 3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산치 못하면 비로소 그 부부는 불임부부로 규정되는 것이다. 62년부터 가족계획사업이 활기를 띤 이래 지금까지 약 30만 명의 남성이 정관절제수술을 받았다.「불임환자」를 자원하는 현대판 내시족이 미국에서는 연간 4만 5천명, 인도에서는 180만 명으로 불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들이 보다 더 절박한 이유로「남성복권(復權)」을 원할 경우 시행되는 수술이「바소바소스토미」라는 이름의 정관문합(吻合)술. 바로 남성복원공사의 큰 역사(役事)다. 정관수술했으나 사정 달라져, 기능복원 원하는 사람도 □ 정관복원수술 남자의 생식기는 두 개의 큰 공장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는 고환이라는 공장이며 여기서는 정자와 남성「호르몬」이 생산된다. 다른 하나는 부성기라는 공장이며 여기서는 정자의 젖이 되는 정액이 생산된다. 남성「호르몬」은 혈관을 통해 온 몸에 순환되어 남성으로서의 특성을 유지케 하며 정자는 정관이라는 수송로를 통해 창고에 운반되었다가 때가 오면 생명의 생산공장인 여성 생식기에 사정된다. 이와 같이 고환이라는 공장에서 정자가 만들어지는 데는 약 2개월이 걸리고 창고까지 수송되는 데는 자기 크기의 10만 배나 되는 7m의 거리를 20일 전후 걸려 운반되며 창고에서 생명 생산공장에 사정되는 데는 약 10초가 걸린다. 이때 이 세 가지의 통로를 전부 차단하면 거세(去勢)술이 되고 정자의 수송로인 정관만을 차단하면 남자 불임술인 정관절제술이 되는 것이다. 정관절제술을 받은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최근엔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자의 통로를 다시 이어달라는 사람들이 대학병원 비뇨기과로 몰려들고 있다. 서울대병원서 복원수술 받은 사람, 5명은 다시 아들딸 낳아 즉 ①자녀의 사망 등으로 아기가 다시 필요하게 되었을 때 ②심경의 변화로 자녀가 현재 이상 더 필요하게 되었을 때 ③경제적 사정의 호전 또는 주위 환경의 변화가 왔을 때 ④재혼했을 때 ⑤정신적 장애가 심할 때, 보통 의사들은 정관복원수술을 감행한다. 지금까지 서울대학병원에서 실시한 정관문합수술은 모두 52례(例). 이중 정자가 출현한 성례는 36례로 밝혀졌으며, 5례가 자녀를 다시 출산하는 행운을 누렸다.「남성복권」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관문합수술은 지난 64년 서울대학병원 비뇨기과에서 실시되었다. 최초의 수술자인 최수명(가명·42)씨는 1남 2녀를 거느린 가장. 가족계획의 수단으로 정관절제를 했는데 외아들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면밀한 사전 검사를 거친 뒤 복원수술을 실시, 이듬해에 남자 아이를 분만했다. 국수올 만큼 가는 절단된 정관을 다시 잇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여기에 소모되는 재료들은 우리나라에서 쉽게 얻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난점이 있다. 남자불임증 환자도 늘어가는 경향, 11년 동안 10배 이상으로 정관복원수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요즘은 절제수술을 할 때 미리 복원에 편리하도록 처리하는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 각종 사고사(死)가 늘어남에 따라 복원수술을 해야 할「케이스」는 점차로 많아지고 있으며 그 성공률도 거의 세계수준만큼 높아져가고 있다고 서울의대 비뇨기과 교실에서는 밝히고 있다. ◇ 남성불임증 남성불임증 환자는 1955년의 경우 전체 비뇨기과 외래환자 중에서 1.72%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연차적으로 증가추세를 보여 60년엔 3.7%, 65년엔 18%로 늘었으며 66년엔 22%를 나타내어 55년에 비해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남자불임증 환자의 증가경향은 일반적으로 남자불임증에 대한 사회적 계몽, 사회적 인습에서 탈피하려는 남성측의 자각, 경제적 생활수준의 향상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체 불임부부의 40%나 되는 남자불임증의 원인은 - 첫째, 정자형성기능에 장애가 생겨서 오는 조정(造精)기능장애. 둘째, 정자수송로에 폐색이 있어 생기는 수정(輸精)기능장애. 셋째, 정액성분에 이상이 있는 활정(活精)기능장애. 넷째, 사정기능에 장애가 있어 생기는 사정기능장애 등으로 대변된다. 가장 많은 것이 조정기능장애이며 원인불명도 전체의 30%나 되고 있다. 정액검사별로는 무정자증이 47.15%, 정자 감소증이 35.26%이며 정상 및 기타가 16.81%로 나타나고 있다. 요즘 갑자기 남성 불임증이 격증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각종 성병 후유증으로 오는 것과 직업, 기호품 과잉섭취에서 오는 것 등이 있다. 용접공·벤진·납(鉛)다루는 사람에 출산기능 잃는 사람 많아 고열 하에서 전기 용접이나 기타의 일을 오래하는 사람, 유기물질,「벤진」,「톨루엔」, 납 등을 취급하는 직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고환기능의 파괴로 불임증에 걸리거나 유산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밖에 남자불임증을 유발하는 기호품으로는 - ▲ 담배 =「니코틴」은 배아상피에 파괴를 가져오고 정자의 운동성을 약화시킨다. 동물실험에서는「니코틴」의 투여로 임신율이 2분의 1로 낮아졌다. 사람에서도 하루에 20개비 이상의 담배는 임신에 해롭다. 준가임남자 188명 중 76명이 과도한 끽연을 하고 있었음이 보고되었다. ▲ 코피 = 하루에 20잔 이상의「코피」를 마시면 전립선 기타 정로(精路)에 자극을 주고 긴장, 과로를 일으켜서 임신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알코올 =「알코올」만성중독은 다른 종류의 중독 때와 같이 세정(細精)관에 퇴행성 변화를 일으키고 흔히 음위(陰萎)가 된다. 이와는 반대로 적당량의 음주는 최음제가 되고 때로 조루증이나 냉감증 부인의 치료목적에서도 효과를 본다. 근래 의학계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남성불임증 가운데 면역성 불임증이란 게 있다. 부부가 비정상 성교인 음경흡철증으로 남자의 정액을 빨아먹음으로써 부인이「알레르기」가 생기고 불임이 된 예, 성교결과 질이나 자궁 등의 성기 점막에서 정액 성분이 흡수되어 항체가 생긴 결과 불임이 된 예 등이 보고되고 있다. 최경만(가명·54)씨는 전통사회에서 자란 소위 양반집 자손. 20세 때 결혼한 부인에게 애가 없었다. 그로부터 얻은 첩이 모두 다섯 명, 하나같이 이들도 임신을 못했다. 50이 넘어서야 자신에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학병원 비뇨기과를 찾았다. 정액검사 결과 정자 감소증으로 판명되었다. 불임증 극복엔 집에서 노력할 일도, 배란기 등 택해 조절해야 남자불임증의 치료는 원인불명이 30%나 된다는 점에서 어려운 때가 많다. 보통 일반요법, 내분비요법, 조사(照射)요법, 외과요법 및 인공수정 등으로 나뉘는데 어느 것이나 면밀한 검사와 인내로써 치료에 임해야 성공률이 높다. 일반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치료법으로는 - ▲ 방사조절 = 임신능력이 낮은 남자는 5일 이상 금욕했다가 부인의 배란기를 찾아서 24시간 이내에 2회 이상 집중 성교한다. 가급적 부부의 극치감을 일치시키는 게 좋다. ▲ 성교체위 = 성교가 끝나고 음경을 발거(拔去)하기 전에 부인은 양다리를 가슴쪽으로 구부려 정액이 후질궁륭부(後膣穹窿部)에 괴어 유실되지 않도록 하고 20분간은 기침, 대소(大笑), 재채기 등을 하지 않는다. ▲ 수욕(水浴) = 온도자극 및 기계적 자극을 일으킬 목적으로 각종 좌욕, 세척을 온수 혹은 냉수로 하여 성 중추나 성기에 자극을 가한다. ▲ 최음제 = 발기중추를 자극하고 성기의 충혈 및 그의 흥분을 도모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서울대학병원의 경우 월 평균 30건의 남성불임증 환자가 찾아오고 있는데 이들은 진보된 현대의학의 혜택으로 놀랄만한 성과를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관복원수술도 한층 호전된 외과기술의 덕분으로 그 성공률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자료제공 = 이희영(李熙永)교수(서울의대 비뇨기과) [ 선데이서울 69년 2/9 제2권 제6호 통권 제20호 ]
  • 약탈…총격…‘또 다른 戰場’

    |워싱턴·뉴올리언스 이도운특파원 외신|치안 부재와 생필품 부족.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시 이재민들의 고통이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지 사흘이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고 있다. 구호와 대피 계획이 늦어지자 굶주림과 기다림에 지친 이재민들 사이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심지어 환자 호송 차량에 총격이 가해졌다. ●시가전 방불케 하는 뉴올리언스 1일(현지시간) 오전 구호에 나선 군 헬기를 향해 누군가 총을 쏴 후송 작전이 잠시 중단됐다가 중무장한 군·경의 호위 아래 재개됐다. 또 툴레인 병원에서는 응급환자를 수송하던 험비 차량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환자들을 소개하고 있던 채러티 병원도 총격을 받아 소개 활동을 중단했다. 구호에 투입된 한 경찰관은 다리에 총상을 입어 구호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또 2일 새벽에는 이재민들이 경찰을 향해 빨리 구조하러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기를 난사하기도 했다. CNN은 쇼핑몰이 불타는 거리에서 무장경찰과 총기를 든 시민이 어슬렁거리는 “시가전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상점 주인들은 총을 들고 직접 방어에 나서는가 하면 10대들에 의한 성폭행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방화 추정 화학공장 폭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마에 화마까지 겹쳤다. 약탈자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화학공장 폭발은 수중도시를 또 한번 강타했다. 출동한 소방관들은 워낙 불길이 거세 그냥 타게 놔두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NBC는 “화학공장에서 난 것은 분명하며 누가 불을 질렀는지 정확치 않다.”고 전했다. 시내 컨벤션센터에 대피 중인 이재민 1만 5000∼2만여명은 구호 손길을 기다리면서 곳곳에 시신과 쓰레기, 인분이 널려 있는 끔찍한 환경에 노출돼 있다. 레이 내긴 뉴올리언스 시장은 “컨벤션센터는 먹을거리가 고갈됐고 비위생적이며 안전하지도 못하다.”며 조속한 지원을 호소했다. 컨벤션센터 주변에는 휠체어에 앉은 채 숨진 노인 등 적어도 7명의 시신이 방치돼 있다. 이재민 대니얼 에드워즈(47)는 “개도 저렇게 다루지는 않는다.”면서 “다른 나라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면서 국민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길거리도 각종 쓰레기와 배설물로 가득차 악취가 진동하고 주민들은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도와 주세요.”를 연발한다. 사회·윤리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재산과 사회질서를 존중하는 시민의식이 극한 상황에서는 급속히 무너져 내린다고 지적했다. 슈퍼돔에 임시 대피해 있던 이재민 2만 5000명은 버스를 나눠타고 텍사스주 휴스턴의 애스트로돔에 속속 도착하고 있으며 다른 2만 5000명은 샌안토니오 등지로 분산 수용될 예정이다. 뉴올리언스 공항에는 야전 병원이 설치되고 있다. ●민간단체 구호금 9000만달러 답지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약탈자들을 겨냥,“절대 관용은 없을 것”이라고 엄중 경고하고 시민들에게 휘발유 사재기에 나서지 말 것을 거듭 당부했다. 주방위군은 매일 1400명씩 수해 현장에 도착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캐슬린 블랑코 루이지애나 주지사는 “뉴올리언스에 투입된 300명 규모의 아칸소주 방위군에 난동자를 사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면서 “수일 내에 1만 2000명의 주방위군이 배치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라크전에 투입돼 있는 루이지애나주 방위군 철수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재민 돕기 모금도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 적십자사와 구세군 등 민간 차원에서 9000만달러가 모였으며 9일 ‘수해지원의 날’을 기해 자선방송도 대대적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첩보위성도 구호 및 복구 작업에 동원되고 있다. 국립지구우주첩보국은 허리케인 이전과 이후 영상을 연방재난관리청에 제공해 유실된 도로 등 인프라 피해를 알려준다. dawn@seoul.co.kr
  • 당일치기 가을 개성관광

    당일치기 가을 개성관광

    고려 500년 도읍지였던 개성은 그리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까탈스럽고 번거로운 CIQ(출입관리시설) 검문을 거쳐야 하고, 때로는 이미 짜여진 일정에 따라 북측의 통제를 받으며 여행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만큼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여행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여정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분단 55년 만에 문을 연 개성 관광길. 금강산에 이어 두번째 북한 관광길이지만 느낌은 사뭇 다르다. 마치 꿈을 꾸는 듯 손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개성 시민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다소 낡아 보이는 아파트 베란다는 화분으로 한껏 멋을 냈고, 그 사이로 시민들이 어디론가 발길을 재촉한다.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 교복 입은 아이들, 한복을 입고 유모차를 끌고가는 여인들…. 풍경 하나하나가 코끝을 찡하게 한다. 사진촬영을 통제해 가슴에만 담아온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개성. 하루로는 진정 아쉬움이 컸던 개성 당일관광으로 안내한다. 개성 글 사진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이것은 조심하세요 개성 관광은 북측 지역 내에서 이뤄지는 만큼 지켜야 할 주의사항들이 적지 않다. 어길 경우 위반금을 물어야 하며, 심할 경우 북측에 억류돼 조사를 받아야 한다. 금강산 관광과 마찬가지로 버스로 이동할 때와 북측 CIQ 및 군사시설에 대한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다. 북측의 정치, 경제, 사상 등 서로 자극할 수 있는 대화는 자제하고, 검문 절차가 까다로운 만큼 소지물품을 간편하게 하는 것이 좋다. 신분확인을 위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하고, 개성관광증은 남과 북이 합의한 개성출입 여권 및 비자와 같은 역할을 하므로 낙서를 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 휴대품에는 제한 규정이 있는데 ▲10배율 이상의 쌍안경 및 망원경 ▲초점거리가 160㎜ 이상인 카메라 렌즈나 이를 탑재한 카메라 ▲광학 24배줌 이상 캠코더 ▲휴대전화(PDA포함) 등 통신기기 ▲휴대용 TV와 라디오,MP3, 기타 남측 신문 및 인쇄물 등 관광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물품 등을 휴대해서는 안 된다. 휴대전화는 안내 직원에게 맡긴 뒤 남측 귀환시 반환받을 수 있다. 관광 중에 통용되는 화폐는 미국 달러이며, 기념품은 1인당 300달러까지만 면세가 적용된다. 북측 의약품과 뱀술, 영정술, 우황청심환과 북한 사상 관련 각종 출판물은 남측 반입이 되지 않는다. 북측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북한군들은 남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손총질’이라 해서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 아울러 관광지 내에서는 되도록 흡연을 삼가고, 관광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정해진 경계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 개성 37mile 당일치기 여행 벽은 무너지고… ‘개성 시내의 모습은 어떨까. 선죽교, 박연폭포의 경치가 아름답다던데’ 설렘 속에 시범관광단을 실은 버스가 서울 경복궁을 출발했다. 개성까지의 거리는 약 50㎞. 승용차로 달리면 1시간 남짓한 거리다. 개성은 38선 이남에 있는 북한 땅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남한에 속했던 지역이다. 자유로를 따라 달리던 버스가 속도를 줄인 곳은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통일대교. 민족의 통일 염원을 담은 다리지만 차량 통제를 위해 겹겹이 막아놓은 바리케이드가 먼저 분단 현실을 실감케 한다. ‘남북왕래차량외 진입금지’라고 쓰인 표지판이 가로막힌 도라산역 남측 CIQ(출입관리시설). 버스에서 내려 CIQ에서 간단한 짐검사와 법무부 출입국 신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출경수속을 마쳤다. 출경 수속은 일찍 끝났지만 정해진 시간에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8시 정각에 버스가 다시 남측 CIQ를 출발했다. 군사분계선 주변은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어 평온해 보였지만 도로를 제외한 주변 모두가 지뢰밭이라고 한다. 도로는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철길이 나란히 달린다. 오른쪽 창밖으로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로 널리 알려진 낡은 열차가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북한땅. 군사분계선 북측지역으로 넘어가자 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버스를 응시하는 북한 군인의 모습에 마른 침이 절로 넘어간다. 군복을 차려입은 인민군 장교가 버스에 올라 눈으로 인원체크를 하는 것으로 북측 CIQ 입경 수속이 시작됐다. 버스 앞에서 눈으로 인원을 세는 사이 버스에는 잠시 적막감이 흐른다. 그 시선은 마치 이곳부터는 ‘북한’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했다. 이어 인민군 장교가 ‘개성 관광증’에 찍힌 일련 번호에 따라 호명하는 순으로 버스에서 내린 뒤 몸검사와 짐검사가 시작됐다. 인민군과 세관, 개성총국에서 함께 관리하는 CIQ에서는 가방을 열어 일일이 모든 것을 체크한다.CIQ 멀리 평화롭게 보이는 기정동 마을이 한적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카메라는 몇 ㎜입네까?”라며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준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리 위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여행의 재미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CIQ 뒤편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평양 아리랑 총회사 소속 직원들이 술과 기념품을 판매한다. 판매원 김윤화(21)씨는 “시내에 들어가면 술 한병에 여기보다 다섯달라(5달러) 이상 비싸요.”라며 권한다. 실제 개성인삼주가 이곳에서는 8달러지만 박연폭포 앞에서는 14달러를 줘야 한다. 1시간이면 달려올 거리를 3시간 만에 버스가 개성 시내로 향한다. 버스에는 20대 후반의 문광철(관광총회사 소속)씨와 조성(개성시 소속)씨 등 2명의 안내원이 동승했다. 이동중에 시내나 북한 주민 등의 사진 촬영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일행 중 한명이 “시내 사진 한장 찍어도 될까요.”라고 묻자 문씨는 “그러면 아주 불쾌한 관광이 됩네다.”라며 농담으로 응수한다. 개성으로 가는 길은 정비가 끝나지 않아 덜컹거린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 드디어 개성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중심가에는 20층은 족히 돼 보이는 아파트가 종종 눈에 들어온다. 건물은 낡았지만 베란다는 갖가지 화분들로 한껏 멋을 내고 있다. 주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제갈길을 재촉했다. 아파트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지만 멀리 아파트 창문으로는 빠꼼히 버스 행렬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내를 걸어보고픈 충동이 밀려 왔다. 언젠가는 마음놓고 걸어볼 날이 오겠지…. 버스는 고려 박물관(고려 성균관)에 도착했다.992년 창설된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후신으로 1308년 성균관으로 개칭됐으며, 조선시대 설립된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 성균관으로 불린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1610년 재건한 것으로 입구에 있는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 준다. 박물관은 4개의 전시관과 야외전시관이 있는데 고려청자와 금속활자 등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유물과 현화사 7층탑, 현화사비 흥국사 석탑 등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입구에는 북측 화가들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고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안내원들의 맛깔스러운 설명이 이어진다.“고려 유물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많이 약탈했습네다. 이제 북·남이 힘을 합쳐 다시 찾아와야지요.” 송도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는 이옥한(40) 해설원은 유물 설명중 ‘개성 깍쟁이’의 유래에 대해 “‘깍쟁이’라는 말은 ‘가게 쟁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셈이 밝아서 그런 게 아니라 상업이 번창해 가게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려 박물관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선죽교에 도착했다.919년 고려 태조가 개성내 하천축조의 일환으로 건립한 돌다리지만 고려 충신 정몽주가 피살당한 곳으로 더 유명하다. 다리의 길이는 6.67m, 너비는 2.54m. 원래는 난간이 없었으나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둘러 보호하고 옆에다 돌다리도 하나 더 놓았다. 개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로 화려함은 없지만 정갈한 느낌이다. 안내원 한명이 다리 한편에 있는 옅은 붉은색 얼룩을 가리켰다. 그는 “이게 정몽주 선생의 피”라며 “그래서 선지교였던 이곳이 선죽교라 불리게 됐다.”는 재미있는 설명을 곁들였다. 선죽교 옆에는 정몽주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이 여러개 서 있다. 당초 일정이 개성민속여관에서 정몽주 생가인 ‘숭양서원’으로 바뀌었다. 개성민속여관은 조선시대 전통가옥을 여관으로 꾸민 것으로 현재 외국인 관광객들이 묵고 있어 관람이 어렵다는 것. 중국과 일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서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7월11일 붉은기, 선죽동, 제2인민반’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북측 안내원에게 “학교 간판이냐.”고 묻자 “번지인데 이 집은 특별한 날을 기리기 위해 날짜를 적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몽주 영정 등이 모셔져 있는 사원에서는 개성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사원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사원 앞에 있는 간이 상점에 들르자 북한 음료가 눈에 띈다. 코카콜라와 비슷한 검은색 음료는 ‘코코아 탄산단물’이며, 환타와 같은 음료는 ‘모란봉 레몬 탄산 단물’이란다. 가격은 1달러. 냉장고에서 꺼낸 코코아 탄산단물은 달착지근한 맛이 그런대로 갈증을 풀어준다. 숭양서원을 나와 개성백화점, 김일성 동상 등을 지나 개성 남대문 로터리를 돌아 다시 선죽교 인근에 있는 자남산 여관에 마련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또다른 식사 장소로는 통일관과 영통식당, 민속여관내 식당 등이 있다.2층 식당에서는 한상 가득 개성식 식사가 차려져 나왔다. 반찬으로는 개성 약밥과 떡합석, 삼색나물, 닭고기 장과, 돼지고기 편찜, 오이소박이 등이 맛깔스럽게 차려졌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은 ‘우메기’. 종업원 김영실씨는 “찹쌀 70%에 멥쌀 30%로 만들었는데 기름에 튀긴 뒤 떡 위에 우묵우묵 칼자국을 내서 ‘우메기’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김치는 왜 안 나오느냐고 묻자 “개성은 보쌈김치가 유명한데 그건 겨울에 오셔야 합네다.”라고 덧붙인다. 식사는 대부분의 식당들이 비슷하지만 11첩 반상기와 단고기(개고기) 정식 등이 나오기도 한다. 개성에서 북쪽으로 26㎞ 떨어진 박연폭포로 가는 길은 제주도 오름을 연상시킬 만큼 널찍한 초원이 반긴다. 개성∼평양간 고속도로 주변은 나무가 많지 않은 구릉들로, 푸른 초원이 덮여 있어 절로 감탄을 쏟아내게 한다. 1992년 김일성 80회 생일에 완공된 이 고속도로는 북한 최초의 아스팔트 4차선 도로다. 평양까지는 160㎞로 승용차로 1시간30분 걸린다고 한다. 도로 주변에서는 옥수수 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농부들이 노란 옥수수를 수확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감시원이 있어) 멋진 경치를 눈으로만 담아와야 했다. 200m 남짓한 숲길을 오르자 박연폭포가 거대한 물줄기를 쏟아 붓는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이 북쪽 계곡을 따라 흐르다 못을 만들고 그 아래 37m 높이의 폭포를 이루고 있다. 폭포 위에는 박연이라는 연못이 있고, 폭포 아래 직경 40m의 고모담이란 바위 연못이 있다. 박연폭포는 화강암벽의 순수 자연폭포로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더불어 한반도의 ‘3대 폭포’로 꼽힌다. 웅장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수와 함께 인근 소나무, 화강암벽이 자연스레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폭포수 아래 동쪽 언덕에는 법사정이라는 정자가, 서쪽에는 용바위라는 둥근 바위가 각각 절묘한 미색을 자랑한다. 자남산 여관 서점에서 산 ‘개성관광안내 책자’에 따르면 ‘옛날 퉁소를 잘부는 박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곳 물가에서 퉁소를 부는 그에게 끌리어 물 밖에 나온 용왕의 딸이 박진사를 물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같이 살았다고 하여 ‘박연’이라고 한다. 그 아래 고모담은 박진사의 어미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안고 통곡하다가 물에 떨어져 ‘어미담’ 또는 ‘고모담’이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박연폭포 위 대흥산성에 오르면 위에서 박연폭포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올라가는 길은 흙길이지만 진흙과 모래가 섞여 있는 마사토로 질지 않다. 1시간 남짓 박연폭포를 돌아본 뒤 짧은 개성 관광이 마무리됐다. 버스에 오르라는 안내원들의 재촉에 “여행이 수박 겉핥기 식이다. 너무 짧다.”며 곳곳에서는 아쉬움 섞인 푸념들이 들려 왔다. 박연폭포에서 내려가는 길은 구름 한점 없이 푸르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왔다. 반세기 만에 찾은 남측 손님들의 아쉬움을 아는지 하늘에서는 간간이 빗줄기가 쏟아졌다. ■ 꼭보자 베스트3 개성은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인 고려의 500년 도읍지였던 만큼 고려 건국시조인 왕건왕릉과 고려 31대 공민왕릉, 고려민속박물관, 선죽교, 영통사 등 고려 유적지가 주류를 이룬다. - 왕건왕릉(북한 사적 제53호) 개성에서 북서쪽으로 6㎞ 떨어진 해선리의 만수산 자락에 있는 왕건왕릉과 신혜왕후 무덤은 왕건의 뜻에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졌다. 왕릉은 1994년 새롭게 단장됐다. 3단 축조의 웅장한 무덤과 그 앞에 문무관의 석인상, 호랑이와 양을 비롯한 석조군상으로 위용을 자랑하며 능문과 제당도 갖춰져 있다. 무덤안을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으며, 능앞에 넓은 공원이 조성돼 있다. 최근 왕릉에서 청동의 왕건조각상이 출토돼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등신대의 인물조각상으로 연구가치가 높다. - 공민왕릉(북한 국보급문화재 제39호) 개성에서 서쪽으로 9.8㎞ 떨어진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 문선봉 아래에 있는 무덤은 쌍분으로 왼편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현릉이고, 오른편이 부인 노국공주의 정릉이다. 이 무덤은 남한에서 주로 보는 왕릉과 달리 3개의 층단으로 구성돼 있는 점이 특이하다. 봉분의 높이는 6.5m. 각 봉분에는 12각의 병풍석을 돌리고 12지신상과 연꽃무늬로 섬세하게 조각했다. 공민왕은 1365년 왕비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애통한 나머지 9년 동안 자신이 직접 주관, 방대한 조영사업을 벌였다. 이 왕릉에는 고려시대 수학, 천문, 지리, 건축, 예술 등 총체적인 역량이 집대성돼 있다. - 영통사(북한 보물급 문화재 35~38호) 1027년(현종 18년) 창건되었다.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이 있어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해 분향하였으며, 인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이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도 이곳에서 교관을 배웠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언제 폐사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문화재로는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36호인 영통사대각국사비, 제37호인 영통사 당간지주, 제35호인 영통사동삼층석탑, 제38호인 영통사서삼층석탑, 국보급문화재 제37호인 영통사오층탑이 있고 보광원, 중각원 등이 있다. ■ 3가지 코스 중 고르세요 개성관광은 ‘고려반’‘박연반’‘왕릉반’ 등 3개의 코스로 구성돼 있으며, 이 가운데 1개 코스를 택하게 돼 있다. 고려반은 오전 개성시내관광(고려박물관, 선죽교, 개성민속여관), 오후 박연폭포를 참관하는 코스이며, 박연반은 오전 박연폭포, 오후 개성시내 관광을 하는 것. 왕릉반은 공민왕릉과 왕건릉을 참관한 뒤 오후에 개성시내관광을 하는 것이다. 관광은 대략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쯤 모두 끝나게 되며, 돌아오는 길에 개성공단 시범단지를 견학한다. 관광 중 세부적인 해설은 북측의 전문 해설원들이 맡게 되며, 점심식사는 개성시내에 있는 자남산호텔식당이나 영통식당, 통일관, 민속여관내 민속식당 등에서 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아산에 따르면 본 관광 시기와 요금은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았다.3차례 실시된 시범관광의 경우 관광요금 17만 4000원과 식대 2만 1000원을 포함해 19만 5000원인데 본 관광 요금이 이보다는 높지 않을 것이라는 게 현대아산측의 설명이다. 개성관광에 대한 문의 및 예약은 현대아산 (02) 3669-3000.
  • 건강강좌·체험 이벤트 ‘풍성’

    건강강좌·체험 이벤트 ‘풍성’

    ‘한의학의 모든 것을 보여드립니다.’ 한의학 국제박람회가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됐다.28일까지 계속되는 박람회는 한의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자리에 모았다.‘한의학과의 만남, 미래의 희망’을 주제로 한 박람회는 난치·불치병을 정복할 수 있는 미래의학으로서의 한의학 위상과 비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경희대가 주최하고 보건복지부와 식약청, 대한한의사협회 등이 후원하는 박람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국제학술세미나와 질환별 건강강좌. 이날 경희의료원이 양한방 협진 임상의학세미나를 가진 데 이어 26일에는 ‘근거중심의학으로서의 한의학’ 세미나,27일에는 난치병 한방치료법,28일에는 노화예방의학회가 각각 열려 그동안의 연구 및 임상 성과를 발표하게 된다. 또 행사 기간 중 매일 실시되는 질환별 한방건강강좌에는 국내 내로라하는 한의사들이 나서 아토피 월경통 당뇨 심장병 비염 불임 중풍 비만 등의 질환에 대한 임상치료 소견과 관리 및 치료법을 소개한다. 행사 기간에는 각종 의료기기와 장비, 한방화장품, 보건·바이오제품, 약재·약초들이 전시되며, 한방식 진맥과 다양한 현장체험 이벤트도 마련된다. 관람객들이 직접 떠서 만든 전통한지에 차로 마실 수 있는 약재를 포장해 갈 수 있는 ‘한 첩의 사랑’ 행사도 흥미롭다. 박람회 조직위원회 김병묵(경희대 총장) 위원장은 “이 박람회가 한의학의 전문성과 과학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대체의학을 넘어 미래의학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Q여사에게 물어보셔요 (14)

      사연 : 엄마에게 드릴 선물 동생과 뜻이 맞지 않아요 우리 엄마는 학교 선생님입니다. 저는 국민학교 3학년. 제 동생은 1학년이에요. 둘이서 1년간 돼지저금통에 모은 돈이 9백원인데 엄마에게「크리스마스」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엄마는 양말이 매일같이 줄이 간다고 속상해 합니다. 양말을 사드릴까 합니다. 그런데 동생은 예쁜「브로치」를 사겠대요. 어제는 그래서 싸웠습니다. Q여사님,「브로치」가 좋겠어요? 양말이 좋겠어요? <서울 청량리 영아> 의견 : 의좋게 둘 다 사세요 꼬마 아가씨, 9백원이라면 양말 두 켤레(3백원)와 예쁜「브로치」한 개를 살 수 있답니다. 싸우지 말고 동생과 영아양이 사고 싶은 걸 다 사서 함께 싸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Q> 사연 : 달마다「귀찮은 일」고민 17세의 고교 1년생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흘 전 여자는 누구나 매달 당하는 귀찮은 생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고백했더니 한약 7첩만 먹으면 이런 일이 생전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약을 먹으면 몸에 다른 영향은 없는지 걱정이 되는군요. <전북 이리에서 화> 의견 : 어리석은 짓 마셔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은 아예 마세요. 여자에게 그런 일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이제는 당당한 어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한약은 몸에 몹시 해로울 거에요. 당연히 있어야 할 몸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니 이로울 리가 있습니까? 이런 일은 얼른 엄마나 언니에게 의논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엄마 언니도『우리 화가 벌써 그렇게 컸나?』하고 기뻐하면서 보살펴 주실 거에요. <Q> [ 선데이서울 68년 12/22 제1권 제14호 ]
  • [클릭 이슈] 강남인근 미니신도시 건설 찬반

    미니 신도시 개발, 과연 필요한가. 원혜영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이 지난 26일 서울 강남 인근에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소규모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자 많은 전문가들이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개발 실익이 없는 급조된 인기정책이라는 주장과 중장기적으로 개발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맞선다. ●효과 미미, 개발 난제 첩첩 우선 미니 신도시 개발로 과연 강남 문제를 대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국민주택단지는 60% 이상이 국민임대주택 용지로 공급된다. 나머지 분양 아파트도 평형별로 골고루 들어선다. 강남을 대체하는 신도시라면 적어도 중대형 위주의 아파트 단지라야 한다. 미니 신도시라면 국민주택단지와 같은 방식으로 개발하는 것으로 중대형 아파트 몇 동을 짓는 데 그치고 만다. 즉 무늬만 강남 대체 신도시이지 실속은 국민주택단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 개발하는 특정 미니 신도시에 중대형 아파트 비중을 늘려준다는 것도 어렵다. 다른 국민주택단지와 형평성 때문이다. 만약 특정 지역에만 중대형 아파트 비중을 늘리면 다른 지구 개발은 올스톱되고 만다. 신도시를 조성할 만한 후보지가 있느냐도 따져볼 문제다. 신도시 추가 개발 때마다 단골로 나오는 서울공항터는 최적의 입지를 지녔다. 하지만 군사적 이유라면 몰라도 신도시 조성 차원에서 공항이전 얘기를 꺼낼 수 없는 땅이다. 나머지는 그린벨트 땅이거나 상수원보호구역 등으로 묶인 곳이다. 후보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청계산 자락은 경기도가 오래 전부터 대규모 신도시 개발을 주장하고 있는 터라 미니 신도시 개발에 ‘태클’이 만만치 않을 것이 뻔하다. 설령 동의를 한다고 해도 환경단체의 반발 등을 고려할 때 택지조성에서 아파트 건립까지는 일러야 6∼7년, 넘게는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강남(고급 중대형)아파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강남 재건축 아파트 규제를 풀고 초고층 아파트 건축을 허용하는 것이 중대형 아파트 공급의 지름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김태호 부동산랜드 사장은 “강남 아파트 대기 수요자는 모두 중대형 아파트를 원하고 있다.”면서 “중대형 아파트 수요·공급이 원활하면 시장도 안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정간 충분한 협의를 거쳤느냐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설익은 대책으로 보고 있다.8월 대책에 포함될지 여부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건설교통부는 밝혔다. 건교부 관계자도 “장기적으로 꾸준한 공급 확대 차원에서 검토해볼 만한 사안으로 논의는 했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나온 것은 아니다.”고 말해 충분히 협의를 거치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그래도 개발해야 한다 추가 신도시 개발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영진 내집마련정보사 사장은 “강남 재건축 규제 완화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강북 개발만으로 강남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서 “수급 불균형에 의한 시장불안이 예상되기 때문에 대체 신도시 건설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고종완 RE멤버스 사장도 같은 생각이다.“개발이익환수 장치가 갖춰진 상태라서 강남권 재건축을 고밀도로 개발하면 좋겠지만, 당장 어렵다면 신도시 개발도 함께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길섶에서] 김삿갓 북한방랑기/심재억 문화부 차장

    동네를 채우고도 남아 들판까지 울려 퍼지던 마을스피커. 그 스피커의 ‘뚜뚜뚜∼땡’하는 시보(時報)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의 냉전의식을 자극한 것은 정오 5분전에 방송되는 ‘김삿갓 북한 방랑기’였다. 성우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낯익은 목소리가 향토예비군가나 새마을노래와 겹쳐지면 들일하던 사람들 허리를 폈다.“자, 때됐다. 밥 먹고 하자.” 사시(巳時) 무렵 숨을 거둔 수라 할머니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스피커에서는 예의 김삿갓이 북한을 들먹였다. 외아들 일찍 잃고 두 손녀 키우느라 애면글면 손바닥 닳도록 땅을 일구던 노파의 죽음에 가슴 쓰린 사람들이 한마디씩을 보탰다.“우라질, 생때 거튼 사람 약 한첩 못 쓰고 죽는 판에 뭐? 북한 동포가 어째?” 그날 저녁 상갓집에서는 스피커를 관리하는 이장과 열받은 장정 몇이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그런 불편함도 이내 한 안쓰러운 죽음에 묻히고 말았다. 마당 가운데 모깃불 연기 매캐한 상갓집에서 상주 없는 상을 치러야 했던 그 날 이후, 내게 김삿갓은 하나의 우울한 시그널이었다.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 36번국도-국토를 가로지른다

    36번국도-국토를 가로지른다

    국토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아직 없다. 그래서 충남 보령∼경북 울진을 잇는 36번 국도에는 멋과 맛이 남아있다. 시발점은 보령, 점점이 박힌 섬과 아스라한 낙조에 누구에게나 고향같은 푸근한 곳이다. 숨가쁘게 내달린 36번 국도가 내륙의 바다 충주호에서 긴장을 푼다. 푸른 하늘을 담은 충주호를 따라 단애절벽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연이어 36번 국도는 국토의 등뼈 백두대간으로 내달린다. 클라이맥스는 봉화. 인간의 발길에 의해 유린되지 않은 자연의 순수를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석천계곡,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계곡과 바위를 굽이치며 휘돌아 백두대간을 넘은 36번 국도는 울진 불영계곡을 따라 동해로 곧장 치닫는다.289㎞ 대장정은 환호성을 내지르다, 자연의 경외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결국엔 겸허한 인간의 자세까지 가르친다. ■ 초록이 넘실대는 보령·충주 ●대천해수욕장과 다보도 무더운 한여름이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대천해수욕장이 기다린다. 서해안에서 백사장 길이(3.5㎞)가 가장 길다. 특히 조개껍데기 가루가 모래와 섞인 패각해수욕장이 자랑거리다. 석양이면 백사장이 반짝반짝 빛난다. 해수욕장앞 4㎞쯤에 있는 무인도인 다보도는 바다낚시터로 이름난 돌섬. 유람선이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대천해수욕장에는 생선회와 꽃게탕, 홍합구이 등으로 유명한 충남수족관(041-933-8077)과 부산횟집(041-933-9898) 등이 있다. ●성주사지와 보령냉풍욕장 성주산은 석불과 최치원, 신도비와 성주사지, 백운사, 휴양림, 활공장 등 보고 즐길 거리가 많다. 한낮에도 깜깜할 정도로 울창한 산림과 맑고 깨끗한 화방골, 삼연동계곡 등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창건돼 신라시대에는 9대 선문 가운데 하나로 번창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지금은 석탑, 석등, 돌계단 등만이 옛날을 말해준다. 인근의 보령냉풍장(041-934-8154)은 폐광을 이용한 것으로 한여름에도 섭씨 영상 12도의 찬바람이 불어나와 땀방울을 식혀준다. ●칠갑산과 한치고개 보령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쉬엄쉬엄 한 시간가량 나오면 칠갑산이다.‘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칠갑산자연휴양림(041-943-4510)은 맑은 공기와 울창한 숲이 자랑이다. 휴양림에서 7㎞ 남짓 떨어져 있는 냉천계곡은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발을 담그면 채 5분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시원하다. 청양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한치고개는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주통로였다. 꾸불꾸불한 옛길을 따라가는 드라이브코스로 그만이다. 산책하기에도 좋다. 정상에는 구한말 의병장 만암 최익현선생과 콩밭 매는 아낙네 상이 있다. 별미로 칠갑산장(041-942-3298)에서 멧돼지 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다. ●충주호 남한의 중심부에서 굽이치는 산줄기를 따라 나라의 강줄기 맥이 모인 곳이다. 백두대간의 장엄한 산자락과 유유한 물줄기가 잠시 긴장을 놓는 곳이다. 충주호는 청명한 하늘을 담고 푸른 산을 닮아 더없이 푸르다. 낙조 하면 서해를 떠올리지만 충주호 유람선에서 맞는 일몰도 그만이다. 하늘에 맞닿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고 강물을 고스란히 붉게 물들이다가 슬며시 사라지는 해를 품는다. 대형 유람선을 타고 뱃길을 따라가면 옥순봉, 구담봉, 만학천봉, 제비봉 등 호수를 둘러싼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충주호는 충주, 제천, 단양을 연결한다. 면적은 97㎢. 국내에서 담수 면적이 가장 넓다. 댐 나루터에서 운행하는 쾌속관광선을 이용해 단양권을 관람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충주호의 수상관광을 즐기는 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충주호유람선(043-851-5771) ●단양팔경 단양군 남쪽에 위치한 상·중·하선암을 비롯해 사인암 등 8곳의 절경이 영동의 관동팔경과 쌍벽을 이룬다. 으뜸은 한폭의 동양화와 같은 도담삼봉.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다. 단양에서 북쪽으로 12㎞지점에서 남한강 수면을 뚫고 솟은 세 봉우리.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도담삼봉에서 자신의 호를 본떠 삼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삼봉 중에서 가운데 봉이 남편봉이고 그 옆에 다정한 작은 봉이 첩봉, 좀 떨어진 곳에 딸들을 품에 안고 돌아앉듯 자리한 봉이 처봉이란다. 남편이 딸만 낳은 아내를 내쫓고 첩과 다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라는 옛날이야기도 전한다. 단양관광협회(043-423-5044,421-7114). ●탄금대 신라 진흥왕 때 가야에서 망명한 악성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충주에서 서북쪽의 3㎞에 있으며 달천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격전을 벌였던 곳. 탄금대의 12대는 당시 계속된 전투로 뜨거워진 활의 열기를 식히고자 12번이나 오르내렸다는 바위들이다.30∼40분 발품을 팔면 모두 둘러볼 수 있다. ■ 절로 넘어가는 봉화·울진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36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 봉화읍에서 조금만 빠져가면 석천계곡이다. 울창한 소나무 원시림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맑고 시원하다. 기암괴석으로 자연경관은 수려하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산에서 부는 솔바람소리에 잡념이 확 씻기는 듯하다. 계곡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옆에서는 봉화의 춘양목(금강송)으로 조선 중종때 문신 청암 권동보(1518∼1592)가 지은 석천정자가 계곡과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석천계곡을 들어서면 바로 나오는 절벽 바위에 신선이 사는 곳 이란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석천계곡에서 나와 36번 국도를 따라 울진방향으로 2㎞정도 가다보면 왼쪽에 단아한 한옥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풍수지리상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 즉 ‘금계포란’이라 하여 닭실마을(酉谷里)로 불린다. 닭실마을의 압권은 청암정. 충재가 도학연구에 몰두했던 곳으로 특이하게도 머리가 동쪽으로 향한 거북 형상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청암정을 지어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울었단다. 지나던 스님이 “거북 등딱지 위에 불을 피우면 거북이 죽는다.”며 “거북에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뒤 아궁이를 모두 막고, 둘레에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퇴계 이황의 글도 남아있다. 닭실마을엔 이외에도 유적지와 박물관도 있다. 개인 박물관인 까닭에 잠긴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때 집안에 전해오던 각종 자료들을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몰래 묻어 보관해왔던 것들이다. 박물관과 청암정 등을 들어가는 입장료는 없다. 닭실마을에는 식당은 없다. 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는 전통방식대로 만드는 한과를 살 수 있다. 여름철엔 한과가 쉬 눅눅해져 만들지 않는 게 아쉬움이다. 봉화문화원(054-673-2350) ●청량사와 청량산 봉화에 갔다면 들를 만한 곳으로 청량산을 들 수 있다. 봉화읍에서 40분 정도 걸린다.918번 국도를 따라 가는 드라이브 코스도 그만이다. 논길을 가다가 운곡천을 따라간다. 운곡천이 깨끗해 수달이 사는 수달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계곡이 낙동강과 만나는 곳은 천애절벽의 장관이 파노라마친다. 청량산은 12개 봉우리들이 있다. 정상에서 거대하게 솟아오른 암봉으로 수려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일명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청량산 일주 산행은 4시간 정도. 청량사 일주문을 지나자 나오는 청량폭포가 시원하기 그지없다. 청량산도립공원(054-679-6321) 봉화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인 재래종 검은 돼지로 만드는 돼지구이. 봉성면 가는 초입에는 돼지구이를 하는 집이 20여집 몰려있다. 이 가운데 원조는 아니지만 현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 상봉숯불회관(054-672-9783)이다. 숯불구이(180g·5000원)는 돼지고기에 소금만 뿌리고 솔잎을 얹혀 찌듯이 구워냈다. 기름기가 쪽 빠지고 솔향이 은근히 배였다. 텃밭에서 기른 야채에다 돼지구이를 싸 먹으면 정말 일미다. 매콤한 맛을 원한다면 양념구이(6000원)도 괜찮다. 이외에도 봉성숯불식당(054-672-9130)도 유명하다. 불고기가 조금 곁들여 나온다. ●불영계곡과 불영사 36번 국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불영계곡이 아찔하다. 올려다 보면 천애 같은 절벽과 그 위에 곧게 뻗은 소나무가 위태위태해 보인다.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물은 너무 차서 발이 금방 시려진다. 더위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불영계곡이 끝날 즈음이면 불영사(054-783-5004)가 나온다.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고찰이다. 대웅전 앞 연못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불영사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뒤로는 오밀조밀한 경관이 펼쳐져 있다. ●소수서원과 부석사 봉화를 조금 못미친 영주시 풍기에서 시간이 있다면 유·불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소수서원과 부석사가 있다. 울창한 숲속의 소수서원(054-633-2608)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이곳 출신 유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입장료는 어른은 3000원, 어린이는 1000원. 주차료는 없다. 소수서원에서 10분 남짓이면 부석사(054-633-3464)에 닿는다. 풍기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우리나라 전통 건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사찰.‘부석’이란 돌이 떠 있다는 뜻으로 무량수전 뒤편에 실제로 땅과 약간 떨어져 있는 바위인 뜬돌 즉 부석이 있다. 글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 단원 김홍도 미공개화첩 경매

    단원 김홍도의 미공개 화첩이 오는 7월6일 평창동 서울옥션하우스에서 경매된다. 이 화첩은 단원이 60세 전후의 말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10폭의 수묵 담채화를 담고 있다.기존에 알려진 단원의 말년작 대부분이 산수·화조화인데 비해 이 화첩에는 인물 위주의 풍속화가 다수 포함돼 눈길을 끈다.석가모니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수보리가 참선하는 가운데 포말이 이는 물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수보리구경’,‘달마의 면벽좌선 모습을 그린 ‘구년면벽좌선’, 웃통을 벗고 부채를 든 남자가 잡은 물고기를 응시하는 장면을 포착한 ‘계색도’, 호방하고 원숙한 필치가 돋보이는 ‘지팡이를 든 두 맹인’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일본의 개인 소장자가 경매에 내놓은 이 화첩은 37.8×33.8c㎝ 크기로 10억원부터 경매가 시작된다. 지난해 12월 열린 서울옥션경매에서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10억 9000만원에 팔린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의 기록을 경신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이번 경매에는 단원의 화첩 외에 겸재 정선의 ‘해산정’과 연담 김명국의 4폭짜리 ‘인물산수도화첩’ 등 모두 170여점이 출품된다.출품작들은 경매에 앞서 7월 1∼6일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전시된다.(02)395-0333.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남학생과 가장 많이 상담한 여교수

    남학생과 가장 많이 상담한 여교수

    남몰래 털어놓는 비밀은「성의 고민」이 으뜸 <말하는 이> 정희경(鄭喜卿)씨 : 성균관대학교 여학생처장 「기대」의 중압감 때문에 30%가「노이로제」증세 - 그 동안 맡으셨던 상담 실례는 대략 몇 건쯤 되나요? 『2백건은 훨씬 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학생처장이란 행정직에 있어 심한「케이스」만을 다루고 있지만 일선 상담역을 맡았을 때도 하루에 3명 이상을 만난 때도 있었고 주(週)평균 10명은 만났으니까요』 - 상담해 오는 남녀학생의 차이는? 『남학생이 훨씬 적극적으로 상담을 청해 옵니다. 여학생은 거의 상담을 원하지 않고 있는 듯해요』 -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문젯거리는 대개 어떤 것일까요? 『학교에 따라서 또는 환경에 따라서 문제가 사뭇 달라집니다. 세칭 1류교 학생들은 주위에서 거는 기대의 중압감 때문에 거의 30%의 학생이「노이로제」증상이고 심한 경우는 발작마저도 일으키더군요. 또 중압감 때문에 능력 있는 학생들이 열등감에 빠져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반대로 2류대학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못했다, 가고 싶은데 못갔다는 등으로 우울감, 열등감에 빠져「콤플렉스」를 느끼는 경우 등 문젯거리가 다양합니다』 춘화(春畵)필름 훔쳐보고 사창(私娼) 출입한 고관아들 - 그들이 남몰래 털어놓는 비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상담 실례를 들어주셨으면. 『상담 실례는 들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경우 하나만 들어 보겠습니다. 1류대학 1류학과에 다니는 고관의 아들이었어요. 자살소동을 몇 번 일으켰던 학생인데 찾아왔더군요. 아버지가 첩을 두었어요. 따라서 가정불화가 잦은 집에서 자랐고 부모들과의 거리감을 느끼며 자라난 학생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어른들이 보는 춘화「필름」을 훔쳐보게 된 후부터 심한 자위행위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창녀에게 붙들려가서 첫 성 경험을 가졌답니다. 그 뒤부터 창녀집 만성출입자가 되고…. 갈 때는 정신없이 가지만 돌아올 때는 심한 죄의식으로 머리가 썩어가는 것 같고 자책감 때문에 자살소동을 부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에 의욕을 잃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학생을 1년 반쯤 상담, 정신과 의사와 협력하여 치료한 일이 있습니다』 대학가의 두통거리는 의외로 이런 성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80% 이상(밝히지 말기를 부탁)으로 추산되는 남학생이 성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 불행히도 대상이 애인이나 부인이 아니고 창녀에 의한「강제」로 시작되기에 이들은 더욱 괴로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나 이론에서는 기성세대보다 무척 보수적인 요즘 젊은이들은 실제로는 무척 개방적이며 무방비상태라는 이야기. 「성적(性的)긴장」풀어주는 「프로그램」만들어야 - 젊은이의 남녀관계에서 오는 문젯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들은 가장 혈기가 왕성한 층이기 때문에 성적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줘야 합니다. 요즘 YWCA나 YMCA에서 하는 민속춤, 사교춤 등의 모임이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밖에도 명작에 나오는 연애 얘기를 읽음으로써 또 적당한 운동으로써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성은 무척 상징적인 것이므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엔 불신·부정적 졸업 때까지 이름 몰라 - 그들의 교수와의 관계는 어떤지요. 『교수들이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무서워 하기 때문에 교수에 대해선 무척 부정적이고 또 불신합니다. 대학 4년 동안 교수와 학구적인 면이나 인격적으로 면담한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졸업할 때까지 교수의 이름도 모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학점이나 결석일수를 교수와 흥정하는 외에는 거의 만나기도 싫어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 교우관계는? 『고교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교육을 전혀 못 받았기 때문에 친구간에 또는 사회생활 하는 방법이 외국에 비해 무척 졸렬합니다』 반항원인 95%가 가정 기숙사제도 꼭 필요해 - 학생들의 문제 중 근본적인 원인이 가정이나 부모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내가 만난 학생의 95% 이상이 반항의 원인이 가정이나 부모의 문제였습니다. 가정은 외적인 조건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관계가 조밀해서 지나치게 어린애 취급을 받기 때문에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못합니다. 또는 하숙을 하는 데서 오는 문제, 자취, 친척집에서의 기거 등 가족관계나 주택문제가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기숙사 제도가 꼭 필요합니다. 자기집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니까요』 - 결혼관은? 『남자들은 말로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학생은 의존심 강한 게 병 꿈은 좋은 차·예쁜 아내·집 그러나 상담 실례를 보면 그렇지도 않아 외부적인 조건들을 많이 따진다는 것. 조건 자체는 결혼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게 정교수의「어드바이스」. 여학생에게는『의존심이 강하다』는 게 가장 큰 병이다. 『상대방 남자가 싫어져 그만두는 경우도 찔찔거리고 우는 바보 같은 짓을 예사로 한다』는 것. 여대생쯤이면 자기 나름의 삶이 있을 텐데 좋은 남편감을 고르는 게 더 큰 관심거리고 고르는 것도 부에 치중하는 경향이라는 것. 처음부터 가정을 지키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다른 것(취직·유학) 등을 해 보다 안되면 결혼한다는-. 4, 5년 전만 해도 심각한 문제였던 전망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나 고민은 차차 적어지는 것 같은 경향이란다. 자기만 똑똑하면 취직을 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적어도 애인이나 부부간에는 서로 나쁜 점을 고친다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있는 그대로 장점만을 취해서 살아야-』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의 태도는 선도의 힘만 있다면 긍정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염려할 것은 못 되는 것. - 젊은이들의 꿈은 어떻게 변해 왔나요? 『전에는 허황하기는 했어도 국가적이고 세계적이었던 꿈이 개체화하는 현실에 알맞도록 변해가고 있습니다. 서구식으로「좋은 차·예쁜 아내·좋은 집」이 최상의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열등감 위장한 겉 꾸밈 양면적인 성격을 띤 젊음 - 여대생의 허영은? 『여자들은 어려서부터 심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옵니다. 그것이 마음 속 깊이 숨어있어 그 열등감을 위장하기 위해 겉 꾸밈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무랄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느껴집니다』 기성세대보다 오히려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가치관을 가진 요즘의 젊은이들은 실제 행동에서는 반대로 전위적으로 나타나 양면적인 성격을 띠우고 있는 게 현대 한국의 대학생들이라는 결론이다. [ 선데이서울 68년 10/27 제1권 제6호 ]
  • 옛 노래 속의 낭만 연인/ 이민홍 편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간의 사랑만큼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있을까?그래서 서구에선 고대로부터 신화와 문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사랑이었다. 이미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의 신은 풍요의 신인 아버지와 빈곤의 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도 또 만나고 싶은 것은 어머니의 빈곤의식을 닮았고, 만남의 장소를 화려하고 근사한 곳으로 택하고자 하는 속성은 아버지의 풍요로움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신화적 해석이 그럴 듯하다. 하지만 유가이념이 지배한 동아시아에서 상류층 사람들은 내심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도 이를 말하거나 글로 표현하는데 인색했다. 도덕군자로 알려진 저명한 선인들 대부분이 열렬한 애정행각을 벌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건만, 이들이 남긴 ‘사랑의 시’는 가뭄에 콩나듯 희귀하다. 삼국시대의 향가나 고려조의 몇몇 가곡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랑노래는 아니다. 대부분은 남녀간의 애정에 의탁해 왕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내 님이 그리워 우는 것은 산 두견새와 비슷하다.”는 피맺힌 노랫말을 남긴 ‘정과정’,“이 몸 생기실 때 님을 쫓아 생겼으니, 천생연분이 하늘 모를 일이런가.”의 ‘사미인곡’을 애절한 사랑노래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이같은 이치에 있다. 그러나 작자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만횡청류(漫橫淸流), 이른 바 사설시조엔 애정과 애욕이 넘쳐 흐른다. 조선시대 풍류와 사랑의 ‘진정한 주인’이랄 수 있는 명기들의 사랑노래는 애틋하고 진솔해 지금 읽어도 그 절절함이 가슴을 적신다. 또 일부 지식인들도 솟구쳐 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시로 남겼다.‘낭만연인·浪漫戀人’(이민홍 편역, 국일미디어 펴냄)은 이처럼 우리 선조들이 남녀간 애정을 꾸밈없이 읊은 한시 108수를 뽑아 해설을 붙인 것이다. 편역자의 표현대로라면 ‘조선시대의 3년간 나눌 애정을 3일 동안에 탕진할 수 있는 요즘, 애틋한 중세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한 수 한 수 뽑아 해설을 붙인 책이다. 책은 사랑이 싹트기 전부터 시작해 이별과 죽음 이후의 감정까지, 마치 사랑의 일대기를 그리듯 9개의 테마속에시를 담았다. 이성에 대한 설렘, 불꽃 같은 사랑, 이별, 그리움, 외로움, 꿈속의 사랑과 기다림, 체념, 다음 생의 사랑 등등. “열 다섯 아리따운 아가씨(十五越溪女)/부끄러워 이별의 말도 못하고(羞人無語別)/중문까지 닫아걸고 들어가서는(歸來掩重門)/배꽃 사이 달 보며 눈물 흘리네.(泣向梨花月)” 이성에 대한 설렘과 부끄러움이 잘 드러난 이 시는 임제(1549∼1587)의 ‘규원’(閨怨)이라는 한시. 열 다섯이면 요즘 중학교 2학년. 시대가 바뀌어 사내아이보다 더 기운이 넘쳐 악을 쓰며 뛰어다니기도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고 말도 잘 못하는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편자는 기대를 가져 본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 남곤(1471∼1527)의 첩이었던 조운. 첩이었던 것이 못내 한스러웠는지 그녀는 “…초가집 한 칸이면 당신과 누울 수 있으니/가을바람 밝은 달과 오래도록 삽시다.”라며 사랑의 도피를 애원한다. 조선 영조 때 평양의 명기로 소문났던 계월은 누구를 그리 떠나보내기 괴로웠는지 “대동강 강가에서 정든 님 보내는데/천가지 버들로도 잡아매지 못하네….”(送人)라고 으며 애를 끓이고 있다. 파격의 지식인답게 다산 정약용도 ‘꿈속의 아내에게’(如夢令寄內)란 사랑시를 남겼다.“…언제나 침실에서 아름다운 인연 맺을까나/그리워 말자 그리워 말자/서글피 꿈속에서 본 그 얼굴을.”시국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오랜 귀양살이를 하던 그는 언제나 보고 싶은 아내랑 한 방에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괴로워하고, 결국은 “그리워하지 말자.”며 체념을 드러낸다. 근엄과 격식의 사회에서도 ‘꿀과 설탕’같은 사랑이 흘렀고, 많지 않은 한시를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9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정감록’ 때문에 민중이 울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이용해 자기 한 몸의 안락과 치부(致富)를 꾀하는 못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감록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배층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다.‘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삼은 것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당수 민중이 정감록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기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백백교(白白敎)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일제시대 백백교 사건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대표적인 사례다.1937년 백백교 간부 150여명이 집단살인사건으로 검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 결과 핵심 간부 18명이 최소한 신도 314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도 129명이나 되는 교인을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백백교는 교단 이름부터 ‘정감록’을 빌렸다. 정감록에 보면 말세에 사람이 다 죽은 뒤 “사람의 종자를 양백(兩白)에서 구한다.”고 했다.‘양백’은 곧 백백(白白)으로 풀이된다. 백백교에서는 이 구절을 끌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오직 백백교도뿐이라고 내세웠다. 또 한 가지. 정감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라도운봉두류산(全羅道雲峰頭流山) 성인출어함양림중(聖人出於咸陽林中)”이란 대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전라도 운봉에 두류산 즉, 지리산이요, 성인은 함양 땅 수풀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백백교에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앞부분은 “전(全)씨가 도(道)를 열(라)고 운(運)을 만(逢)난다.”고 보았다. 뒷부분은 성인이 출현하기로 예정된 ‘함양림’이란 장소를 백백교가 창시된 함(咸)경도 운림(林)면 마양(陽)리로 풀이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정말 기발한 해석이었다.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춘향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백교 식의 정감록 해석을 환영했다. 그들은 도리어 기상천외한 해석에서 비결의 힘과 매력을 발견했다. 그만큼 순리대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백백’이란 “한 가지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만들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구호를 요약한 것이기도 했다.‘흰 것’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바위가 희어진다.”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흰 바위란 전통적으로 미륵을 상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가지 흰 것”은 정씨 진인이 출현할 시기이자 미륵부처나 다름없는 백백교의 교주를 가리켰다. 요컨대, 새 종교 백백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선동적 믿음이 구호에 담겨 있었다. 백백교의 남자 신도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을 줄곧 외워댔다. 그러면 무병장수하고 말세에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세에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고 했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본래 기독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본고장 서양은 불로 망한다고 보았다. 동쪽은 서쪽의 반대라 물에 약하다고 풀이했다. 중요한 점은 백백교를 믿는 사람만이 무사히 살아 남는다는 주장이었다. 교단 측은 신도들에게 일단 한국의 53개 성지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 말세의 심판이 닥치면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라 했다. 금강산엔 ‘피수궁’(물의 재난을 피하는 궁궐)이 있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백백교의 교주 대원님이 하강해 신도들을 이상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백백교의 이상향은 동해의 섬이었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 3000리나 되는 영주란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엔 봉황과 기린이 살고 불로초도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백백교 신도는 누구나 그리로 인도된다. 그러나 만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려보고 싶은 이라면 계룡산으로 안내된다. 백백교의 수장인 대원님이 새 세상의 왕이 되어 교단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신도들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다. 교단에 재산을 많이 헌납한 사람은 당연히 큰 벼슬을 받게 된다. 이런 감언이설로 백백교 지도층은 세상 삶에 지친 민중을 유혹했다. 백백교를 세운 이는 가난한 농부 전정운(全廷雲)이었다. 본래 동학교도였던 그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서 백도교(白道敎)란 간판을 걸었다. 얼마 뒤 그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교명을 백백교로 바꿨다. 그는 1904년 6월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한국을 휩쓸어 말세가 된다면서 이상향에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백백교에 입교하라고 선동했다. 물론 전정운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럼에도,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는 등 세상은 무척 어수선해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백백교의 거짓 예언을 뿌리치지 못했다. 교주 전정운이 늙어 죽자 아들 전해룡이 뒤를 이었다. 전해룡은 1923년 경기도 가평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교당을 지었다.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그는 평소 단식을 잘했다.20일 동안 단식한 뒤에도 평소와 같은 기력을 과시해 신도들 사이에 신비감을 조장했다.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허다한 고등 사기수법의 하나였다. 전해룡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아직 미혼인 여성이 있으면 성적 노예로 삼아 착취했다. 유부녀라 해도 용모가 아름다우면 마음껏 유린했다. 전해룡은 변태성욕자가 분명해 자기의 정사(情事) 장면을 숱한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했다. 그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도가 있으면 이상향에 보낸다며 산으로 끌고 가 남몰래 살해했다.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벽력사(霹靂使)라는 명칭으로 부를 만큼 백백교 지도층은 집단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살인극은 무려 14년간 지속됐다. 만일 교주 전해룡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교단을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경우는 물론 간부나 첩이라도 태도가 변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살해되었다. 또한 신도들은 재산을 전액 헌금하게 돼 있었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 엄청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백백교는 무사했다. 교단 간부들이 해마다 거액을 상납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은 눈을 감아준 것이었다. 그러다 1937년 우연한 일로 백백교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된다. 백백교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컸다. 소설가 박태원은 ‘금은탑(金銀塔)’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설화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기 한국의 민중은 정치에 실의하고 생활에 궁핍했다. 근대 한국 민중의 불안한 사회심리를 이용해 우후죽순 격으로 뻗어난 것이 바로 백백교 따위의 악질적인 사이비 종교단체였다.1930년 6월 현재 정체불명의 그런 사이비 단체가 55개, 신도 수는 10여만명을 헤아렸다(동아일보 1930년 6월16일자 사설).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암울한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이었다. ●정감록을 이용한 재물 뺏기 ‘정감록’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식민지 시기 사회 전반에 꽤 널리 퍼진 병리현상이었다.1930년께 김창하라는 사람은 ‘천병만마’(千兵萬馬·무수한 군대)를 격퇴할 해인(海印)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판매하다가 검거됐다. 비슷한 무렵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에 살던 경호창과 최성기는 태백산 기슭의 벽촌을 돌아다니면서 곧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보천교도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입교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입교 시에는 소정의 돈을 납입하게 돼 있었다. 경호창 등은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중앙일보 1932년 3월16일자). 이런 일은 식민지 사회에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많았다.1826년(순조 26) 충청도 청주에서 정상채라는 사람이 붙들려 처벌을 받았다. 그는 여러 고장을 들락거리며 나이와 이름을 멋대로 속였다고 했다. 도술을 부린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환묘문(幻妙門)’과 같은 도술 책을 친구에게 주어 타인의 물건을 빼앗게 했다. 마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하며 진짜 난리는 얼마 뒤에 일어난다며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면서 정상채는 진인이 이미 섬에 와 있다고 황당한 말을 꾸미는 한편 진인의 당에 가입하려면 이름을 직접 서명하라고 사람들을 졸라댔다.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에 군복을 지어 입힌다며 군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을 그가 착복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채의 동료 박형서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주된 죄목은 남의 재물을 속여서 빼앗고 ‘흉언(凶言)’ 즉 거짓 소문과 예언을 지어내 인심을 소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전쟁이 박두했다는 둥, 해도(海島)에 진인이 있다는 둥 거짓 예언을 퍼뜨리며 자기가 살길을 아노라 했다(실록·순조 26년 10월27일 을해). 비슷한 예는 정말 많았다. 박형서나 정상채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은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변호인들은 왕조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면서 ‘범인들’이야말로 실은 ‘혁명아’였다고 강변하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군자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소비한 사람들이 과연 혁명아일지 의문이다. 그들이 말한 진인은 결국 환상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금품을 건네준 사람들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홍경래의 난 그런데 어떤 경우엔 도무지 이것이 ‘혹세무민’인지, 사기행각인지 또는 진정한 의미로 민중의 투쟁이었는지를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결코 백백교와 동렬에 놓일 성질은 아니지만 경계 짓기의 어려움을 확인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을 예로 들어 보겠다. 결코 홍경래 난을 매도하려는 뜻은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한다. 홍경래 난은 1811년(순조 11) 12월18일 시작됐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을 받고 곧 정주성에 갇혀 버렸다. 정주성 싸움은 이듬해 4월19일까지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결국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간 싸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란군 측은 여러 차례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엔 정감록이 예언한 정진인(鄭眞人)도 언급됐다. 서북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세도정권의 가렴주구는 악행이라는 등 그 시대 서북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정감록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이 어린 국왕과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을 건질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성인은 나서부터 비범하신데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라 직접 손을 대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다.” 정감록이 예언한 새 왕조의 창건자가 이미 홍경래의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로써 반란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문을 짓게 한 홍경래 자신은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능통해 전국을 유람했다고도 전한다. 홍경래 일당은 정감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정감록과 해도 진인에 대해 더욱더 이야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 난은 무려 10년 동안 사전에 준비됐다고 했다. 조직적인 반란이었던 셈이다. 풍수 전문가 홍경래를 비롯해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유랑지식인 또는 몰락 양반들이 반란군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이희저의 가산 다복동의 사저를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각지의 부자들과 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산에 광산을 열어 빈농과 유이민 등을 모아 훗날 군사로 동원했다. 이 당시는 청나라와 국경무역이 활발했을 때라 평안도 출신 가운데는 이희저의 경우처럼 대상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에 맞춰 평안도엔 유기(鍮器) 등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광산 개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홍경래 일파는 이런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이 기회에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홍경래를 지지한 계층은 민중이라기보다는 평안도 각지의 부호들이었다. 좌수와 별감을 비롯한 향임(鄕任·행정보조집단)과 별장(別將)과 천총 등 무임(武任·군사 및 치안담당자)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홍경래를 후원했다. 민중의 지지는 정주성을 지킬 때 엿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유랑지식인이었던 홍경래나 자칭 제갈공명이라 불렀던 우군칙은 반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부터 갖은 방법으로 부자인 이희저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저는 반란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책임지게 됐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평안도 유지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 난은 일부 유랑지식인과 상층부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 등은 서북지방의 숙원이던 지역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그 점에 있어 해당지역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평안도의 부호들이 반군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점으로 보아 실상은 평안도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반란이었다. 실제로도 격문을 분석해 보면 소농과 빈농 등 하층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만일 이 점을 확대 해석한다면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배층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 등이 자주 거론한 ‘정진인의 출현’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홍경래 난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혹세무민’이었다. 왕조의 입장은 그렇다 해도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한때 홍경래 일파를 적극 지지했던 평안도의 부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사물은 하나지만 해석은 구구하다.’라 했던 어느 역사가의 주장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홍경래의 난은 복잡했다 해두자. 어쨌거나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때로 정감록은 민중에게 고난과 아픔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이 점을 인식한 듯 근세의 종교지도자 소태산은 이렇게 말했다.“근래의 인심을 보면 사술(邪術)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니라. 그러나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이러한 무리는 발 붙일 곳을 얻지 못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주인없는 뼈와 살의 수수께끼

    야간열차「백」살인사건은 어디로? 엉뚱하게도 살아있는 얼굴들이 죽음의 주인공으로 오르내리기 몇 차례. 한 달이 넘도록 풀리지 않은 사건. 추리소설 속에서만 보아온 괴이한「스토리」가 진짜에서 시작되어 소설처럼 남게 되었다. 뭇 수사관들이 만져 보고 도려내고 한 주인 없는 뼈와 살. 한국 땅에서 태어나 자란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데 어째서 한 달이 넘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을까? 오랜 경험의 수사관들도 범죄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혀를 차고 있다. 죽은 자가 누군지 알아야 죽인 자를 찾을 텐데 노련한 수사관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하여 무려 한 달 동안을 전국적으로 퍼져 뒤져도 여인의 신원은 알 도리가 없다. 집 나간 딸을 찾을 욕심으로 이 사건을 역이용한 서울 성동구 박용기(朴龍起)(42)씨의 멋진 연극(?)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한국 경찰 이야기며, 덕분에「뉴스」의 초점을 한 몸에 지니고 8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온 박모(18)양이 다시 외유생활(?)의 진미를 잊지 못해 경기도 파주 미군 부대촌으로 돌아간 이야기, 불장난 연애경력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 매까지 맞고 살인자의 누명까지 썼던 20세의 유모군이 명예회복을 해 달라는 색다른 고소사건까지 얽혀 사건은 더욱 복잡하게 확대되었지만 사건의 결말은 언제 내려질 지 암담하기만 하다. 부유층의 가정(家庭)속 범죄? 자가용 가진「고민」신사(紳士) 지난 9월 16일 새벽 5시 35분 서울발~부산행 야간열차에 실려 부산진역에 도착되었던 시체는 이미 썩어서 문드러져 있었고 보자기와「백」으로 겹겹이 싸여져 소화물처럼 뒹굴고 있었던 것. 속옷바람으로 거의 알몸처럼 죽어 있는 젊은 여인의 나이를 28세 전후로 추정, 일단 치정살인으로 보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사관들은 수사의 초점을 거의 국부에다 치중시켜 국부, 음모감정만도 수십 차례, 나중에는 국부를 송두리째 도려내어 서울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까지 운반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것. 처음엔 미군용「백」과 손톱의「매니큐어」등을 근거로 혹시 양부인이 아닌가 추리도 해보았지만 나체에 걸쳐진 속옷 등이 모두 국산품이라는 점 때문에 수사각도를 변경했던 것. 아무튼 치정이 얽힌 살인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어떤 부류의 여성인지조차 현재까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내세우고 있는 가장 유력한 추리는 부유층에 속하는 가정내의 범죄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당초에 내세운 접대부 혹은 직업여성 또는 외부활동을 하는 여자일 경우, 실종신고가 없을 수 없고 창녀나 양공주일 것 같으면 같은 동료들이 모를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경찰은 철저한 비밀이 지켜질 수 있는 가정, 시체보따리를 용이하게 열차에까지 실을 수 있는 자동차 소유자, 완고한 본부인이 있고 사회적인 명예가 있는 사람으로서 식모 또는 첩에 대한 불륜을 해결하지 못해 고민해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사를 펴고 있다. 이유는 사체를 오랫동안 보관했다는 점과 사체가 비교적 낮은 부류의 생활을 한 것 같지 않고 철도원 또는 역직원 소화물계 직원들의 눈에도 띄지 않을 만큼 사체 운반을 감쪽같이 했다는 사실, 사체포장을 오랜 준비 끝에 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사랑과 미움이 완전범죄의 살인까지로 비약, 밤의 완행열차에 실려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한 여인의 인생이었다.  <공하종(孔河棕) 기자> [ 선데이서울 68년 10/20 제1권 제5호 ]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친자확인 확산… 위기의 중국 가정

    중국에서 성(性) 도덕의 위기가 가정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친자확인 검사’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친자확인은 개혁·개방 이후 성문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혼전 성행위와 미혼모 출산, 혼외 정사가 증가했고 결국 배우자 정조에 대한 의혹이 확산되는 까닭이다. 지난 1998년 중국 최초로 설립된 광저우(廣州) 중산(中山)대학 법률의학검증센터는 지난해 의뢰인이 1300여명으로 초기보다 20배 이상 늘어났다고 인터넷 신문인 첸룽왕(千龍網)이 최근 보도했다. 베이징(北京) 화대사법검증센터(華大檢定中心)가 발표한 최근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친자 확인을 요청한 600여건 가운데 15%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이 센터의 루후이링(陸惠玲) 연구원은 “친자확인 요구의 90% 이상은 배우자의 정절을 의심하며 자신의 아이가 맞는지를 가려 달라는 주문”이라면서 심각한 중국의 가정위기 현상을 우려했다. 친자로 확인될 경우 의뢰자의 4분의 3 이상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의혹을 풀고 애정을 되찾지만,25% 정도는 배우자의 정절에 대한 의혹을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 끝내 파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친자검증 제도가 결혼제도를 위협하는 ‘첩(二·얼나이) ‘애인(情人·칭런)’ 확산을 막는 견제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의뢰자들은 보통 부유층 남자들이 대다수로 부양 의무와 재산 승계 문제가 주요인이다. 일부 농민 의뢰인의 경우 오랫동안 외지에서 떠돌다 귀향해서 부인을 의심하는 경우다. 비용은 보통 3000위안(약 39만원) 안팎으로 신분증과 호구증명만 있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2주일 정도면 결과가 나온다. 중국에서 확산 중인 친자확인은 ‘부부간의 상호 충성’을 과학적으로 확인해야 가정이 유지될 만큼 개혁·개방 이후 불어닥친 중국의 성도덕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oilman@seoul.co.kr
  • [박동섭 가족클리닉 행복만들기] 혼인외 출생자라도 똑같이 상속

    저는 오빠 2명이 있고, 저의 어머니는 호적상 어머니가 아니고, 호적상 어머니는 따로 있었습니다. 저는 자라나면서 여러가지 사회적인 냉대와 질시를 받아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법률상 차별대우가 있습니까. -김진영(가명)- 법률상 차별대우는 2008년부터 완전히 사라집니다. 아직은 호주승계의 서열에서만, 혼인 중 출생자보다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3월 민법이 개정·공포됐습니다. 그 동안 논란이 되던 호주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다만, 호적법 등 준비를 위하여 2007년 12월31일까지는 호주가 그대로 존속하게 됩니다. 그러면 혼인 외의 출생자와 혼인 중 출생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혼인 외의 출생자는 종래 서자·사생아·비적출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려왔으나, 지금은 혼인외 출생자라고 부릅니다. 혼인 외의 자녀를 낳은 부모는 혼인신고를 하지 아니한 남녀이므로 그 관계는 사실혼, 무효혼, 첩관계, 사통(私通) 등 여러가지입니다. 그래서 호적부상 출생신고를 할 수 없어 생모의 호적부에 아이의 출생신고를 합니다. 출생신고는 생모의 성과 본을 따라서 신고하고, 생부(生父)의 성을 알면 그것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성춘향과 이몽룡이 혼인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의 출생신고는 성춘향의 호적부에 이길동이라고 신고할 수 있습니다.(아버지 난은 공란으로 기재). 혼인 외의 출생자와 생모 사이의 친자관계는 생모의 출산 사실로 당연히 발생하지만, 생부와 사이는 생부가 자신의 호적부에 인지(認知)신고나 출생신고를 하여야 비로소 발생합니다. 그 때부터 생부와 자식 사이에 친권, 부양의 권리와 의무, 상속권 등이 발생합니다. 생모가 그 동안 자식을 혼자 출산, 양육하여 왔다면 생부는 자식의 출산 시로 소급하여 과거양육비도 분담하여야 합니다. 혼인 중 출생자의 경우는 그 부모가 공동친권자로서 그들을 부양할 의무가 있으나, 혼인외 출생자의 친권과 부양의무는 1차로 생모에게 있고, 생부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그러한 권리의무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무정한 아버지를 상대로는 인지청구를 할 수 있습니다. 재산상속을 받을 경우 친생자와 혼인 외의 출생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들 2명, 혼인 외의 딸 1명을 두고 재산 3억원을 남겼다고 가정한다면, 그 자녀들은 혼인 외의 딸을 포함하여 3명이 각자 1억원씩 상속합니다.1978년까지는 남녀차별의 원칙이 있어서 여자는 남자 상속분의 절반만 상속하고 특히 시집간 여자는 남자 상속분의 25%만 상속하게 했는데 이는 이른바 출가외인(出嫁外人)의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부터는 출가외인도 친정의 남동생과 꼭 같은 비율로 상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산상속에서는 남녀평등, 적서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진 셈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정당한 혼인을 보호하지 않고, 불륜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지만 태어난 자녀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현행법상 유일한 차별 규정인 호주승계 순위를 보면, 혼인 중 출생자가 우선하여 호주승계를 하고, 혼인 중 출생자에 남자가 없고 여자뿐인 경우에는 혼인 외의 출생아들이 먼저 호주가 됩니다. 가계 계승을 중시하는 호주제도에서 남자우선·남존여비의 대표적인 규정이 바로 이 호주승계입니다. 가령, 홍길동이 성춘향과 사실혼 관계에서 1990년 첫아들 홍일식을 낳았고,1995년 성춘향 아닌 장희빈과 혼인하여 2000년경 둘째아들 홍이식을,2003년 딸 홍일희를 낳았고, 홍길동이 사망하였다면, 그 경우 호주승계는 홍이식(둘째), 홍일식(첫째), 홍일희(딸)의 순서입니다. 이는 적자우선, 서자차별 때문입니다. 끝으로 부모와 자식관계를 단절하는 방법도 좀 다릅니다. 혼인신고 후 200일 후, 혼인종료일부터 300일 내의 출생자는 혼인 중 출생자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런 자녀를 “나의 자식이 아니다.”고 부인하려면 친생부인의 소송을 제기하거나 혼인 외의 출생자에 대해서는 친자관계 부존재 확인의 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예언서는 예언가의 이름을 빌려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 때의 ‘신지’, 후삼국의 ‘도선’, 조선의 ‘남사고’와 ‘이토정’은 유명한 예언가였다. 그들의 이름을 딴 ‘신지비사’‘도선비기’‘남사고비결’‘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예언서였다. 대부분 내용은 위작으로 보이지만 신지비사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감록’은 어떠한가? ‘영조실록’에 보면 ‘정감의 참서’라고 돼 있어 예언가 정감이 쓴 책으로 보아야 옳다. 아닌 게 아니라 현전하는 정감록을 읽어 보아도 예언가 정감이 중요하다. 정감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만약 가공 인물이라면 하필 왜 정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정감비기’ 또는 ‘정감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인가? 역사상 최초로 문제가 됐던 정감록은 어떻게 생긴 책이었을까? 나는 정감록이 정감록인 까닭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다. 이번 호에서 검토될 사항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정감록의 기원을 밝히려는 나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실존 인물 정감이 정감록의 저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17세기 초반에 정감(鄭鑑)이란 관리가 있긴 했다. 그는 흔히 소과(小科)라 불리는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됐다. 실록엔 형조 정랑(正郞)이란 중견관리로 나와 있다. 관리로서 제법 성공한 편이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해 8년(1616) 5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헌부는 정감의 치부를 샅샅이 들춰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도 말썽을 일으켜 처벌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독직(瀆職) 행위였다. 고위층의 청탁 유무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린다 했다. 사헌부의 주장대로 정감은 부도덕한 부패 관리의 전형이었을까? 강경한 사헌부의 처벌 요구와는 달리 국왕이 정감에게 내린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광해군은 정감의 벼슬을 바꾸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불법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고발이 한낱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 중벌이 가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정감을 애써 두둔할 생각이 내겐 없다. 내 관심은 17세기 전반 형조정랑을 지낸 정감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의 참서’와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 관계도 없었다. 형조정랑 정감은 생전에든 사후에든 단 한번도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1782년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사건 피의자 박서집의 진술이 참조된다. 그는 정감록의 유래에 대해 “그것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왕조 때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이런 진술을 취조관들도 문제삼지 않았다. 요컨대 정감록의 저자 정감은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씨가 조선왕조의 대안? 가공 인물 정감이 하필 정(鄭)씨인 이유는 무엇인가? 250개나 되는 한국의 많은 성씨들 가운데서 굳이 ‘정’을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조선 왕조가 출범한 14세기 말부터 정감록이 출현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 왕조적인 인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정몽주(鄭夢周)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고려 말의 대표적 유신(儒臣)이었다. 충의(忠義)를 다하기 위해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됐다. 흥미롭게도 ‘정감록’에 보면 정감이 정몽주를 후손이라 부르고 있다. 둘째, 정도전(鄭道傳)도 거론해야 옳다. 그는 조선 개국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제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현대 역사학자들 중에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도전은 정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갈등에 관련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셋째, 정여립(鄭汝立)이 있다. 재능과 학식이 탁월했던 그는 선조 연간에 불붙기 시작한 당쟁에 휘말려 국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향리에서 세월을 보내던 정여립은 끝내 반역자로 낙인 찍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도주하던 끝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감록을 지었다고 보기도 하고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애달파하기도 했다. 이밖에 영조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鄭希亮)이 주목된다.1728년 그는 이인좌 등과 함께 남부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거창에서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희량이 아직 살아 있고 머지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민중의 기림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알다시피 역사상 반왕조적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와 김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정씨는 민중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다. 정여립과 정희량의 일생은 특히나 비극적이었고 신비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은 그들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더욱더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안으로 삼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민중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성진인’에서 ‘정감’까지 16세기 말 정여립이 죽고 나서부터였다. 다음은 정씨 왕조가 들어설 차례란 생각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생각이 차츰 영글어 17세기엔 이른바 ‘정성진인(鄭姓眞人)’이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정씨 성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 출현해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낼 거란 믿음이었다.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 18세기 전반 정희량이 붙들려 죽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정성진인설’을 적극적으로 사방에 유포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희량은 현실에선 실패했다. 그럼에도 민중의 뇌리엔 ‘이씨 왕조를 대체할 이는 정씨뿐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18세기에 등장한 정감록은 민중의 그런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으로 봐야 한다.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감(鑑)이란 이름의 뜻은? 좀더 생각해 보면 정감록에 예언가의 이름을 ‘감(鑑)’이라 설정한 이유도 무척 궁금하다. 그것을 일부 이본엔 ‘감(堪)’이라고도 했다. 예언가의 이름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따져 보고 싶다. 가공 인물을 대단한 예언가로 부각시키려 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될 점은 이름에 담긴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라야 예언서의 독자들 그리고 민중을 설득해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감(鑑)’ 또는 ‘감(堪)’이란 글자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감(堪)’은 감여(堪輿) 즉 풍수지리를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감’은 천도(天道),‘여’는 지도(地道)라고도 한다. 감이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본인이 풍수가 또는 예언가임을 이미 천명한 셈이 된다. 현전하는 정감록은 풍수지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堪)’은 책의 성격에 적합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본 정감록의 대부분은 ‘감(鑑)’을 주인공으로 정해 두고 있다.‘거울 감(鑑)’자엔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런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선 거울이란 사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거울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주목돼 왔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다뉴세문경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제사장들이 소유했던 특수한 물건이었다. 주술을 비롯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거울의 마술적 속성은 여전하다. 무당들은 누구나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명도를 이용해 집을 나간 사람을 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도 점친다. 무당들은 명도 거울이 신(神)의 영력(靈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바로 그 거울이 있어서 인간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울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데 동원된 적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낡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예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은(殷)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주(周)나라 왕은 바로 앞선 시기에 존재한 은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란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란 것이다. 이 경우 거울이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정감록의 주인공 정감 역시 역사의 교훈을 알려준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데 있었다. 정감록은 거울이란 이름을 가진 정감을 저자로 내세워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리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거울의 신비한 힘에 의존한 정감록은 결코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예언서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록(錄)’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예언서 따지고 보면 예언서 ‘정감록’의 제목이 ‘록(錄)’자로 끝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이게 웬 말인가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역대 예언서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발견된 예언서 중에 ‘록’자로 제목이 끝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언서들은 그 제목이 무슨 무슨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이라 돼 있었다.‘기’와 ‘사’는 한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예언서는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짐작은 실제로 예언서를 검토해본 결과와 일치한다. 한시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운문(韻文) 형태의 예언서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훈’자를 예언서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해동고현유훈(海東古賢遺訓)’이 대표적인 예다. 이 ‘유훈’도 문장의 표현 방식은 역시 운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은 그 제목부터 새롭다.‘록’은 ‘실록’을 연상시킨다. 수사의 멋과 맛을 중시하는 과거의 예언서와 달리 앞으로 일어날 사실을 묵묵히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태도와 정신이 엿보인다. 예언서 정감록은 서술양식도 과거의 운문에서 벗어나 산문(散文)이 되었다. 한문학을 대표하는 시문(詩文)을 버리고 역사책의 전형인 편년체(編年體)를 택하거나 유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체를 선택했다. 정감록은 기왕의 예언서와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18세기의 정감록은 한글본이었다! 정조 6년(1783) 1월에 발생한 정감록 사건의 연루자 안필복은 자기가 읽은 정감록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가 집에 소장했던 정감록은 책자의 길이가 52∼62㎝, 두께는 4㎝,200장 정도 분량이었다. 정감록은 형태와 크기에 있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느 한적(韓籍)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정감록이 백지에 한글(諺文)로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필사본이었다. 안필복의 진술이 있기 한 해 전에도 정감록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의자 박서집은 정감록에 대해 “저는 어렸을 때 단지 한글로 된 ‘정감록’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출생 연도를 감안하면, 그가 정감록을 읽은 시기는 1740∼50년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1739년 최초로 조정의 관심을 끌었던 정감록은 박서집이 읽은 한글본 정감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한 ‘정감록’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정감록이 본래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20세기에 와서 정감록을 집대성한 여러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감록이라 하면 한문으로 된 ‘감결(鑑訣)’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0세기 초 ‘비난정감록진본(非難鄭鑑錄眞本)’을 편찬한 현병주는 ‘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본장의 기록문자가 즉 정감록의 원본이다. 본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 사회를 통하여 오백년간의 시선이 집주(集注)하던 정감록의 편명이 성립된 것이다.” 그 뒤의 다른 연구에서도 정감록이라면 으레 한문본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이 한문본은 18세기의 한글본 정감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이것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장래의 과제다. ●새 예언서의 출현은 조선후기 사회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정감록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이상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시기엔 내면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사적인 글쓰기가 유행하게 돼 정감록과 같은 편년체 또는 대화체 서술이 일반화된 것이다. 책이 흔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종이 생산량도 늘어났고 소비도 활발해 정감록과 같은 필사본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상층 지식인들 사이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분위기가 유행했다. 정감록을 향유한 하층 지식인과 민중들도 사실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담론에 그 나름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감비결’이나 ‘정감비기’가 아니라 하필 ‘정감록’이 된 데는 다 그만한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이 한글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더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감록과 더불어 새 시대의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家家好好 가족여행 가평에 가볼까

    家家好好 가족여행 가평에 가볼까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부모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어 본 것인 언제인가요. 참 무심한 자식이지요. 당당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작아졌다는 느낌이 들면서 ‘한 번 모시고 여행이라도 가야하는데‘라고 몇 번을 되뇌곤 했지요. 하지만 떠나기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우리 부부, 아이까지 3대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꼭 멀어야 여행일까요. 서울에서 2시간 거리의 가평으로 말입니다.“참 좋다, 정말 좋다!”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뵈면서 제 마음은 죄송하다못해 쓰라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아이에게 조부모님과의 여행이란 더할 수 없는 선물을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떠나는 여행이라 가깝지만 운치있는 가평 쪽으로 여행지를 잡았다. 근처에 북한강과 수목원이 있어 가족나들이로 좋다는 것도 이점이다. 출발은 일찍, 아침 7시로 잡았다. 경기도 마석일대는 차량정체로 유명한 곳인 만큼 출근시간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곤하게 자는 아이를 안고 자동차로 옮기자 다섯살배기 아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어, 할아버지 할머니!!”얼굴을 비비며 반가워하는 손자의 재롱에 아버지도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다. “아침 먹고 성주가 제일 좋아하는 아자(아이스크림의 준말)사 줄게.”할아버지의 제안에 아이는 “아∼싸 뵤오. 다섯 개 사주세요.”라고 한 손을 펴며 환호성을 질렀다. 제일 먼저 아침고요수목원으로 향했다. 수목원 입구가 좁아 차가 몰리기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꼼짝 못하기 때문이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새순을 보면서 벌써 고부간에도 이야기꽃이 피었다.“정말 봄이네요, 어머니.”“그래, 참 아름답다!” ●울긋불긋 꽃대궐 아침고요수목원(031-584-6702)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중 하나다. 청평검문소에서 좌회전해 37번 국도를 타고 달렸다. 꼬불꼬불 거의 차 한대 정도 다닐 수 있는 도로를 30분쯤 달려 도착했다.10시다. 서둘러 왔는데 주차장은 복잡했다. 어른 6000원. ‘울긋불긋 꽃대궐∼’노래가 절로 나왔다. 목련과 벚꽃나무 밑에는 쌓여있던 하얀 꽃잎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형형색색 이름 모를 야생화와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다. 잘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공기 좋다∼”“저 봐라, 저 수줍게 피어있는 꽃!”아버지 어머니는 시인의 감성을 표현하셨다. 신명이 나 달음박질하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아이더러 천천히 가라고 소리치는 아내의 목소리에도 행복이 담겼다. 돌다리를 건너 분재정원과 매화정원을 지나 청국화, 유리오프스 사이를 거닐며 봄날의 흥취에 젖었다. 수목원의 들꽃향기(584-7282)에서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예쁜 식용꽃이 있는 비빔밥(6000원)과 청국장(7000원)을 먹었다. 벌써 오후 1시가 넘었다. 수목원을 빠져 나오는 길에 차들이 꽉 밀려있다.“역시 빨리 다녀가길 잘했다!”오랜만에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환한 웃음이 묻어나는 수목원에서 빠져 나오는 길에 취옹예술관(585-8649)에 들렀다. 전시실과 야외조각 등이 있는 이곳은 무료. 전시관에서 한국화전을 감상하고 정자에 올랐다. 갑자기 아이의 개다리춤 공연에 온가족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아궁이에 톱밥을 깔고 장작을 쌓은 후 라이터로 불을 댕겼다. 이번에는 풍로를 돌린다. 풍로에서 바람이 나오며 불길이 거세지자 아이가 “앗 뜨거.”라고 소리친다. 이젠 오후 3시, 숙소로 가자. 취옹예술관에서 나와 신청평대교를 건너 북한강을 끼고 달렸다.30분쯤 달렸을까. 청평타워라는 건물이 나오고 왼쪽에 화야산펜션(585-5841)이라는 간판을 따라 500m 들어가자 그림 같은 집이 나온다. 하룻밤에 10만원. ●가족의 사랑이 묻어나는 보금자리 유럽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하얀 기둥과 뾰족지붕이 인상적인 펜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거실을 보자 아이가 “아빠 우리 여기서 다섯 밤 자고 가자, 알았지.”라고 말한다.‘만족’의 아이식 표현이다. 부모님도 흡족하신 눈치다. 어느새 아이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를 따라 올라가 보니 다락방이었다. 어른 3∼4명이 누워도 될 만한 공간이 있는 이곳은 주방 위쪽 지붕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햇빛이 거실까지 그대로 들어온다. 펜션에 있는 바비큐 그릴에 불을 피워 삼겹살을 굽고 주인 아주머니가 준 상추, 깻잎과 신 김치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었다. “고기는 내가 굽지.”하며 집게를 드는 아버지. 며느리가 상추쌈을 싸서 시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렸다. 꿀맛 같은 저녁을 먹고 부모님은 화야산으로 산책 가시고, 아이와 아내는 책을 보며 저녁을 맞는다. 밤하늘 가득 쏟아질 듯한 별들을 보며 아들이 불쑥 말했다.“아빠, 나는 외나로도가 될 거야. 그래서 별에 갈거야.”갈 때 아빠도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후 외나로도가 뭐냐고 아내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선 발사기지가 만들어지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는 우주선 조종사가 된다는 의미로 외나로도가 된다고 한다. 이튿날 오전 11시쯤 펜션을 나왔다. ●칭기즈칸의 정기를 느끼며 수동면쪽에 있는 몽골문화촌(590-2739)으로 향했다. 입장료 1000원. 몽골 전통가옥인 ‘겔’ 10동이 곳곳에 설치돼 있어 사뭇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 중 입구에서 곧장 올라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큰 겔에는 칭기즈칸을 비롯한 몽골의 역대지도자들의 인물사진과 몽골의상 등 생활용품이 전시돼 있다. 해지는 방향으로 돌면서 깡통을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후르드’에서 소원을 빌어본다.‘부모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건너뛰기도 아쉽고 해서 간단하게 몽골문화촌에 있는 전통음식점(592-0749)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다양한 메뉴가 눈길을 끈다. 물만두, 군만두(9000원)부터 볶음국수, 물국수(7000원), 당나귀 고기 전골(3만원) 등 이다.‘당나귀 고기 한첩 먹는 것이 보약 한첩 먹은 것과 같다.’는 문구를 보고 전골과 양고기, 쇠고기에 다진 야채를 소로 한 군만두를 시켰다.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셨다. 할아버지가 맛있게 드시자 손자도 고기타령을 했다. 커다란 군만두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을 했다. 당나귀 고기는 부드럽고 씹는 맛이 쇠고기 같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 막혀 힘은 좀 들었지만 3대가 떠난 여행,‘자주 이런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기약없는 약속을 하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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