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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급 고분 20개… 고고학 상당 수준(북한 문화실상:8·끝)

    ◎문화재/1호는 평양 대동문… 선죽교도 포함/황초령 진흥왕순수비는 함흥 보간/금관·도자기는 “계급사회 유물”… 문화재 지정안해 북한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가 펴낸 「현대조선말사전」에는 「문화재」를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유산들」이라고 적고 있다. 남한의 문화재개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문화재라는 포괄적인 용어보다는 「물질문화유물」과 「역사유적」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물질문화유물이란 우리의 동산문화재에 해당하며 역사유적은 건조물과 역사적 기념물을 총칭한다. 현재 북한에는 50건의 유물과 유적이 「국보급」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밖에 53건이 「보물급」,73건이 「사적」,18건이 「명승지」,4백99건이 「천연기념물」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천연기념물에는 동·식물뿐만 아니라 철원 원도와 선천 나비섬,통천 앞섬의 바다새 보호구 등 지리부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북한의 국보급 유물·유적은 크게 고분유와 불교유물·유적유·건조물유로 나눌 수있다. 이 가운데 고분유는 국보급으로 지정된 50건 가운데 20건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북한은 해방직후인 1949년의 안악1∼3호분을 비롯해 80녀대까지 선사시대의 유적과 고구려고분을 다수 발굴해 고고학부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이 이처럼 고분발굴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주체사상」이 등장하기 이전 다양한 고분의 발굴이 소위 「유물사관적 사회발전 5단계 법칙」을 적용하는데 유용하다고 판단되었던데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북쪽이 한민족사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에따라 북한의 국보급은 제1호인 평양 대동문과 제2호인 보통문을 제외하면 제20호까지가 고분으로 되어 있는 등 모두 20개의 고분이 국보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의외로 모두 18건의 불교관계 유적이 국보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급 불교유적으로는 묘향산 보현사와 봉산 성불사 개성의 불일사와 통영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밖에 건조물유에는 개성 선죽교와 경성 남문,종성 수강루가 포함되어 있으며 국보급 제48호인 2개의 진흥왕순수비는 황초령비가 함흥 역사박물관에,마운령비가 함흥 본궁 본관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보물급 제1호는 조선 숙종때인 1716년 만들어진 평양종으로 대동문 문루에 걸려있다. 북한이 지정한 문화재의 특징은 금관이나 도자기등 소위 「물질문화유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이것은 「물질문화유물」이 과거 계급사회에서 특정계층의 전유물로 사치품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체제의 이상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예품에 관한한 북한에서 출토된 유물이 질적이나 양적으로 모두 남측에 크게 뒤진다는 것도 공예품이 지정문화재가 되지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북한에는 소위 「김일성 교시유적」이라하여 학술적 연구나 보존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최우선적인 유적이 지정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남한의 경복궁과 첨성대,다보탑과 석가탑,석굴암,황룡사 9층탑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북한의 문화재정책은 북한헌법이 규정한대로 『인민적이고 혁명적인 문화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복고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주의현실에 맞게 계승 발전시킨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사회주의 이념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문화재가 그동안 구태여 억지로 파괴하지 않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져 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 북녘 사람들,“담쌓고 살순 없디요”(평양 92년2월:상)

    ◎김인철특파원 「화해의 길목」을 다녀오다/“체제수호·시장개방 함꼐”… 「북한식」 시도/작년 기자에 봉변주던 시민들 신중해져 곳곳에 나붙은 선전구호의 붉은 색과 가까이 다가서면 우중충한 빛이 확연한 도시 평양.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한 그 도시에도 이미 변화의 물결은 흐르고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제한된 틀속에서,엄격히 계산된 속도로 진행되는 「북한식」이었고 위로부터의 개혁과 개방이었다.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 취재진이 지난18일부터 21일까지 3박4일동안 체험한 평양은 2,4차회담때 그러했듯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마주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사람들도 결코 우연히 만난 일반주민일 수 없었으며 그 수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난해 10월 4차회담때 남측 대표단에게 막무가내로 봉변을 안겼던 평양은 92년 2월 매우 신중했으며 「선별된」사람들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대부분 오늘의 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21일 상오 백화원초대소 2층 복도.서울행을 위해 방을 나서던 기자는 앳띤 모습이 눈길을 끌었던 북측 안내원에게 북한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불쑥 물었다. 조선학생위소속 연구원으로 평양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국제관계 박사학위논문을 준비중이라는 30세의 이 안내원은 기다렸다는 듯 『5년전만해도 남과 북이 이렇게 오갈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느냐』며 『남북이 현재 「양보할 수 없는 이유」때문에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나 결국은 급속히 빠른 속도로 화해와 협력을 이뤄나갈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 환경이 바뀐 이상 북한도 일본은 물론 미국과도 관계개선을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상오 10시쯤 기자는 평양을 떠나 개성으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국제관계대학 법과교수라는 이모씨(48)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현 사회는 열린 사회이다.여러 민족간 교류와 협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되고 확대되어가고 있다.「원쑤」로 지목해왔던 미국이나 일본에 대해 자라나는 3세대들은 말만 들었지 체험을 못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무작정 담을 쌓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다소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동서독 통일후 동독의 주요 공직에 있다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그들도 통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며 『비록 개인적으로 안정된 생활이 파괴된다해도 후대들을 위한 통일에 반대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렇듯 92년 2월에 만나본 북측 사람들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해,그리고 동구사회주의의 몰락과 미국을 축으로 재편되고 있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당과 수령」이 현실인정 정책노선으로 전환을 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그들은 남북관계에서 사상과 제도보다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일뿐이다.우리들의 성씨의 근본을 따지면 모두가 한뿌리다」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한당국이 인민들의 보다 잘사는 행복을 진정으로 보장하려면 폐쇄적 자립주의 경제노선을 탈피해야 한다』는 방문객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원쑤들」이 자신들의 삶을 무시하면서 평양시내를 활보하게 될지도 모르는 미구의 모습에 불안해하며 자신들의 「당과 수령」이 합리적인 「속도조절」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듯했다.때문에 인구 1백20여만의 한적한 평양에서 눈에 띄는 광경일수 밖에 없는 남측 대표단의 긴 차량행렬에 애써 무심한 듯 고개를 숙이고 걸거나 어쩌다 얼굴이 마주치면 이내 못본듯 외면했다. 20일 상오 중앙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2∼3층에 모두 4천여점의 진품과 모조품 약간을 전시하고 있다는 전시실을 돌아보다 경주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첨성대의 모형품이 전시된 것을 보고,강사겸 안내원인 김옥선(여·32)동무에게 역사유물은 남과 북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주요한 문화자산이라며 남북간 역사유물교환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녀는 『좋은 거면 빨리 앞당길수록 좋다고 생각한다』고 시원스레 대답한뒤 「아차」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질문의 뜻이 교류를 우선하자는 것인가 본데 그에 앞서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왜 임수향·문익환목사를 석방하지않느냐.리인모노인을 빨리 북으로 돌려보내라』는 등 역공세를 취했다.그녀가 보인 반응은 회담장앞 거리에서,인민대학습당에서,옥류관과 청류관에서 만났던 평범한 북한주민들의 일면 수긍,일면 반격의 태도와 대동소이했다. 이렇듯 평양에서 개성으로 오는 열차 창밖에 펼쳐져있던 텅빈 북녁의 들은 기대와 경계심에 떨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 소년ㆍ소녀가장 “자립만세”/뽀빠이 이상용씨 「강화여름캠프」 성황

    ◎전국서 43명 모여 자긍심 고취/“이젠 자심감 갖고 살아갈래요” 방학이 되어도 남들처럼 피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소년소녀가장과 결손가정의 어린이들이 「여름방학캠프」에서 모처럼 시름을 잊고 활짝 웃었다. 11일 하오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강화청소년심신수련장」. 뽀빠이 이상용씨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어린이보호회가 10일부터 3박4일의 일정으로 이곳에 문을 연 「뽀빠이캠프」에 들어온 43명의 남녀어린이들은 불볕더위에 아랑곳없이 구슬땀을 흘리며 힘을 모아 진흙벽돌로 모형첨성대를 쌓고 있었다. 『언니ㆍ오빠들과 힘을 합쳐 모형을 만들다 보니 협동심도 배우고 즐거웠습니다』 3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 천애고아가 된 강미영양(12ㆍ마산S국교 5년)은 진흙벽돌이 하나씩 쌓히면서 첨성대가 완성되자 신기하기만 한듯 박수를 그치지 않았다. 지난83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모범어린이를 대상으로 시작,매년 무료로 실시돼온 이 캠프는 올해에는 특히 좌절하기 쉽고 자칫 빗나가기 일쑤인 이들 불우어린이들에게 자신감과자긍심을 심어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회장은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당장의 물질적인 도움도 필요하겠지만 자기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잠재력을 개발시켜줘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이 부모가 없는 어린이가장인 이들은 특히 핸드볼국가대표선수였던 김명순씨(28)가 찾아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얘기하자 두손을 힘껏 쥐며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전남 신안군에서 뱃길을 타고 온 김현주양(16ㆍ신안B중3년)은 『부모님이 안계셔 괜히 기가 죽곤 했는데 언니의 고생담을 듣고보니 나도 누구 못지 않게 훌륭하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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