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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3) 마음과 의식의 차이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3) 마음과 의식의 차이

    우리는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생각이 마음이고, 의식은 분명하게 주제화하는 자의식이나 도덕적 논리적 자각의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여긴다. 그 말이 대체로 옳다. 마음과 의식의 차이를 비교함은 사전적 의미의 개념을 하나 정리해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적 문명에 대한 비전을 숙고해 보는 깊은 뜻을 지녔다고 하겠다. 프랑스의 20세기 무신론적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확실한 의식의 철학자다. 그는 사물의 존재양식과 의식의 존재양식을 철저히 구별하여, 사물의 존재양식은 의식없이 멍청한 상태에서 자기와 자기자신 사이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자기동일적 존재로서의 즉자(卽自)존재(being in itself)이고, 인간의 의식은 자기와 자기자신 사이에 늘 거리를 두고 반성하고 자기자신을 부정하면서 자기자신의 어제를 극복하려 애쓰고 있는 대자(對自)존재(being for itself)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매일 자기자신을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그런 투명한 의식의 존재로서 자기만족의 게걸스러운 존재방식을 거부하는 무한자유의 존재라고 인간의 의식을 높이 평가했다. 사르트르에게 명증한 자의식의 포기는 인간의 죽음과 같다. 의식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달리 자연스런 마음의 뜻을 가장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밝힌 사유는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이라고 보는 데는 별 이의가 없겠다. 불교의 유식학에 의하면 일체가 다 마음이고, 다 마음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집, 산, 구름, 자동차, 사람 등이 다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렇다. 이것을 유식학의 용어로 만법유식(萬法唯識·모든 것은 마음이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음)이라 부른다. 마음은 바깥으로 지향하는 탈자(脫自·자기를 벗어남)운동이고, 이 탈자운동으로 마음이 자기의 수준과 차원만큼 바깥에 그림을 무의식적으로 그린다. 이 그림이 바깥 경계로서의 집, 산, 구름, 자동차, 사람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집, 산 등의 개념이 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일까? 아니다. 저것들도 사람 마음의 욕망 수준이나 차원만큼 제각기 다르게 그려진다. 어떤 이는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또 다른 이는 집을 낭만적 스위트 홈으로 여길 수도 있다. 산도 마찬가지다. 산을 자연의 온상으로 여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산을 이익을 위한 경제개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모든 것들은 마음의 욕망의 대상인데, 그 대상은 마음의 욕망이 그린 사이버에 불과하다. 유식학은 마음이 곧 식(識·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알아차리는 마음은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무의식적으로 탈자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다. 탈자운동은 내가 결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탈자적인 운동을 이미 하고 있기에 무의식적이라고 한다. 눈이 색을 보면서 그냥 알아차리고, 귀가 소리를 들으면서 그냥 알아차리는 것은 눈과 귀가 각각 보고 들으려는 욕망의 운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더구나 눈과 귀는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들으려 하는 무의식적 기호를 지닌다. 보고 들으려는 욕망이 사람마다 다르면, 색과 소리를 알아차리는 마음의 각도가 달라진다. 이런 자연적 마음의 알아차림과 욕망은 의식수준의 결심과 다르다. 도덕의식은 인간이 도덕적 양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각하려는 결의와 함께 가고, 과학적 의식은 인간의 의식이 대상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명석하고 판명한 판단능력을 요구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제의식은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한 문제파악 능력을 상정하고 있다. 이처럼 의식은 자의식의 자각을 촉구하면서 도덕적 과학적 대상에 대한 주관의 가치우위를 염두에 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cogito·코기토)는 철학이 의식 철학의 정상이다. 이 ‘코기토’의 출현으로 의식이 철학의 역사에 뚜렷이 부상하여 객체에 대한 의식의 주체가 세상에 도덕과 과학을 낳는 진원지로 여기게 했다. 그래서 서양철학이 대체로 의식 철학이 되었다.18~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의식과 주체가 철학의 영역에 솟아난 것을 콜럼버스의 신대륙의 발견에 비유했을 정도다. 이 말은 서양 철학사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철학이 의식의 철학을 낳았고, 의식의 철학은 주체의 철학을 키웠고, 이 주체의 철학은 인간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서양의 근대 400여년은 이 의식의 철학사였고, 의식의 철학사는 의식의 사회도덕적 자각과 과학적 눈으로 세상을 소유론적으로 지배하려는 강렬한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단적으로 의식의 철학은 세상을 자아의 보편적 의식으로 지배하려는 소유론의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사회도덕적 의식의 이상주의도 경제기술적 의식의 현실주의에 못지않은 소유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앞글(1.2.7.8.9회)에서 여러 번 지적했다. 불교의 유식학에서도 의식이 취급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신대륙의 발견처럼 자랑스런 성과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번뇌와 고통을 안겨다 주는 진원지로 여겨진다. 유식학에서 의식을 제육식(第六識)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의식이 오감(五感)의 지각인 안·이·비·설·신식(眼·耳·鼻·舌·身識=前五識)의 데이터를 나의 의식으로 통합하는 통각(統覺)의 기능을 수행하는 여섯 번째 마음의 알아차리기라는 뜻이다. 의식이 자기 홀로 공상처럼 생각하는 일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의식은 오감이 작용하지 않으면 쉰다. 신체의 오감이 작동하기에 그 오감의 지각을 늘 나의 생각으로 모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의식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늘 ‘나의 의식’이다. 동물도 감각이 있기에 동물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따라서 마음의 욕망인 탈자운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동물도 각자 마음의 차원만큼 살아가기 위하여 알아차리는 본능적 욕망을 지닌다. 아마도 식물도 생존하기 위하여 알아차리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왜냐하면 식물도 공격이 오면 그 공격을 알아차리고 자기 방어의 기제를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식물은 마음을 지녔지만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동식물은 ‘나의 의식’이란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다. 왜 인간만이 ‘나의 의식’이란 생각을 할까?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동물이고, 또 사회생활은 언어생활에 다름 아니고, 그 언어생활을 통하여 인간은 지능에 의한 소유론적 욕망을 성취시켜 나간다. 사회생활이 없으면, 즉 언어생활이 없으면 인간은 인간이 안 된다.17세기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II세는 갓 태어난 아기가 독일어를 전혀 듣지 않으면, 인류의 원초적인 언어인 신의 말인 히브리어를 말할 것이라고 공상했다. 병원에서 그는 간호원들에게 유아들이 독일어를 전혀 듣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유아들은 신의 말인 히브리어를 말하기는커녕 얼마 후 다 죽었다고 한다. 언어생활은 사회생활의 길이고, 이 길은 인간의 길이다. 그리고 이 길에 지능이 동반된다. 지능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경쟁은 소유욕에서 발단한다. 인간의 언어생활은 동물의 생물학적 욕망의 마음을 사회학적 욕망의 마음으로 바꾼 것의 대가다. 생물학적 욕망의 마음은 자기생존을 위하여 타 생명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끝나지만, 인간의 사회학적 욕망의 마음은 타 생명을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타 생명을 사회적으로 지배하기를 욕망한다. 여기서 나와 타자의 사이에 투쟁이 일어난다. 서양의 의식철학에서 아무리 도덕의식이나 과학의식을 강조해도 그 의식은 다 사회적 지배의지의 투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의 유식학은 의식이 마음의 평화와 지혜를 어둡게 하는 번뇌와 고통의 원천이라고 본다. 사회생활에서 언어생활은 이미 인간의 무의식적 마음에 깊은 골을 새겨놓은 것과 같으므로, 유식학에서 이 언어생활이 잉태한 자의식은 아상(我相) 아만(我慢) 아애(我愛)를 형성하여 자아중심적 무의식인 제7식 말나식을 형성했다고 말한다. 이 말나식은 이미 의식과 오감의 지각을 다 자기중심적 편견과 색깔로 채색하게 하는 진원지와 같다. 그래서 의식수준의 도덕적 결의가 무의식인 말나식의 이기주의를 전혀 바꿔놓을 수 없다. 모든 이성주의와 이상주의의 헛수고를 우리가 여러 번 앞글(11.12.16.17회)에서 지적했다. 원효 대사는 의식수준의 번뇌를 ‘기(起)번뇌’라고 부르고, 무의식 수준의 번뇌를 ‘주지(住地)번뇌’라고 그의 ‘이장의’에서 기술했다. 그의 비유를 옮기면 기번뇌는 풀과 같고, 주지번뇌는 풀을 자라게 하는 땅과 같아서 풀뿌리를 쉽게 뽑아도 다시 땅에서 풀이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지번뇌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길이 무엇일까? 오감과 의식이 쉬면, 제7식인 말나식도 고요해지고, 말나식이 진정되어 평온해지면 제8식인 아뢰야식도 맑아지면서 여래장인 불성(佛性=神性)이 피어 오른다는 것이다. 아뢰야식이 사실상 마음의 궁극적 본질이다. 죽으면 딴 마음은 다 소멸하는데, 이것만은 불생불멸한다. 여기에 부처님(하느님)의 종자와 번뇌에 찬 중생의 종자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본래 마음의 본질이 부처님(하느님)인데, 번뇌의 때가 사회생활(언어생활)의 와중에 끼어서 인간이 타인과 괴리되고 우주의 모든 동식물들과도 단절된 고립된 생활을 괴롭게 영위한다. 고립된 생활을 벗어나고자 타자를 욕망하지만, 소유론적 욕망만 하니까 서로 싸운다. 의식철학은 소유욕을 더욱 부채질하나, 마음의 철학은 우주의 만물로 향하는 존재론적 욕망의 길을 가르쳐 준다. 우주의 만물도 다 인간처럼 마음이다. 우주는 한마음(一心)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의식의 무게를 제거하면 우주의 동식물과 다 한 마음의 공명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광물까지도 잠자는 마음이라고 느껴야 하리라. 의식철학이 의식과 사물을 나눈다. 그러나 마음의 철학은 의식과 사물이 둘이 아니고, 한마음의 동기(同氣)라고 여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책꽂이]

    ●나폴레옹의 시대(앨리스테어 혼 지음, 한은경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세계지배를 꿈꾸며 유럽제국과 60회나 되는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 그에 관한 책은 60만 권이 넘는다. 이 책에선 ‘문화지도자’로서의 나폴레옹에 초점을 맞춘다. 나폴레옹은 아들 로마왕을 위해 샤이오 궁을 세우고 외국과의 전투에서 약탈한 보물로 루브르 박물관을 장식했으며, 리볼리가라는 새로운 거리를 만들었다. 엄청난 돈을 들여 파리의 운하를 건설했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전을 경축하기 위해 개선문(루이 필립 시대에 완공)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통치 25년간을 세련되고 화려한 필치로 정리.8000원.●중세산책(만프레트 라이츠 지음, 이현정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 서양의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중세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 다채로움으로 가득한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과도기에 나타나는 수많은 모순들로 점철된 중세시대의 일상사를 다룬다. 중세인의 일상과 정서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중세시대의 상징물 성을 중심으로 살폈다.1만 9800원.●성서의 풍속(허영엽 지음, 이유 펴냄) 그리스도교와 물고기는 어떤 관계일까. 초대교회 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받아 지하 공동묘지에 숨어 지냈다. 이때 자기 신분을 다른 신자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가 바로 물고기 표시였다.‘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의 그리스어 앞글자를 따서 순서대로 모으면 ‘익투스’가 되는데, 이는 물고기라는 뜻의 그리스어와 일치한다. 저자(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실장)는 성서 속 역사, 지리, 풍습, 생활습관 등을 풍부한 예화를 곁들어 들려준다.1만원.●茶人기행(정찬주 지음, 열림원 펴냄) 사림파의 종조(宗祖) 김종직은 백성을 위해 차밭을 조성했다. 함양군수 시절 나라에서 거두는 다세(茶稅)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관영 차밭을 일군 것. 그에게 차밭은 목민관으로서 애민(愛民)을 실천하고자 하는 도학정신의 구현이었던 셈이다. 윤선도, 보조국사, 원효대사, 최치원, 사명대사, 경봉선사, 이색, 이규보, 이광수, 이이, 허균 등 우리 역사 속 다인 50명의 이야기를 다룬 산문집.1만 3000원.●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정동호 등 지음, 책세상 펴냄)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리라. 백 년만 기다려보자.” 철학자 니체가 잠언처럼 던진 말이다. 니체의 매혹적인 잠언과 비극적 최후는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했지만,‘힘에의 의지’라는 그의 철학적 개념은 파시즘에 이용돼 ‘괴물을 낳은 철학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국내 니체 연구자들이 모여 니체의 삶과 사상, 유고 논쟁,1920년대 한국에 처음 소개된 니체 철학의 현재적 의미 등을 살폈다.2만 5000원.●지구를 치료하는 법(데니스 메도즈 등 지음, 북스토리 펴냄) 1950년대 보르네오섬에 말라리아가 유행하자 세계보건기구에서는 DDT를 뿌렸다. 그러자 모기는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지만 그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해지고 마을 사람들이 집단으로 불면증에 걸리고 뱀들이 죽어갔다. 또 일본에서는 매립지가 부족해지자 소각로를 만들었다가 심각한 다이옥신 대책을 새워야 했다. 이렇듯 지구상의 요소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 때문에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시스템 사고가 중요하다. 환경고전 ‘성장의 한계’ 해설서.1만원.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2) 평등에 관한 명상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2) 평등에 관한 명상

    평등도 자유(21회 글)처럼 근대사상의 핵심 주제다. 무엇보다 먼저 평등의 요구는 불평등한 현실이 참을 수 없기에 일어난 것이다. 불평등한 현실은 사회의 생존경쟁이 불공정한 게임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회생활이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에게 아주 불리한 조건들을 갖고 출발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신분계급에 의한 불평등, 학벌에 의한 불평등, 종족에 의한 불평등, 성별에 의한 불평등, 직업에 의한 불평등 등이다. 이런 불평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 쉽게 알 수 있다. 근대적인 평등의 요구는 저런 중세적 불평등을 부정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불평등 부정의 사상은 인간사회에서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비정신의 반영이겠다. 어떤 이들은 불평등 부정의 정신을 불의에 대하여 분노한 사회정의의 요구로 읽기도 한다. 나는 불평등 부정의 정신이 정의의 요구보다 오히려 자비의 정신에 더 가깝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불의에 대한 분노의 정신으로서의 정의감은 어딘지 화가 나 있어서 정의란 이름으로 나온 불의에 대한 증오가 새로운 불평등을 복수심에서 낳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평등 부정의 정신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억울함을 느끼는 자들이 받는 마음의 고통을 풀어주는 자비의 정신으로 여긴다. 이 불평등이 왜 사회적으로 생겼을까?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불평등의 억울함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고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밝혔다. 루소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대칭적으로 읽으면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선량했으나, 사회상태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말하자면 ‘생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 철학의 출발점이다. 생각하는 인간은 지능을 가진 동물이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생물학적 본능으로 단순 생존을 추구해 나갔는데, 인간의 지능이 동물적 본능의 역할을 대행함으로써 인간은 생물학적 본능의 자연상태를 떠나 사회학적 지능의 사회상태로 이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악은 이 사회상태에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악은 사회상태를 가져온 지능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능이 인간 사이에 우열을 낳게 하고, 이익을 더 많이 낳는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고, 사유 재산을 더 많이 확보하면서 불평등한 지배체제를 굳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도처에 지능의 차이로 인간이 스스로 족쇄에 갇혀 사는 불평등과 부자유의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루소의 이런 철학은 20세기 프랑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에 영향을 미쳤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연상태에서의 상호교환의 거래였던 토테미즘이 타 집단에 대한 자기집단의 지능 우위가 입증되면서 토테미즘이 순식간 카스트제도로 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루소가 말한 감각적 본능과 자연적 균형으로 살 수 있었던 인간의 자연상태나,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토테미즘적 완전교환의 상태는 다 유가적 요순 사회와 유사하고, 또 마르크스가 본 원시공산사회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저런 원시공동체는 인간에게 사회적 지능이 등장한 이래로 상실된 낙원과 같다. 낙원의 상실은 사회적 지능의 등장이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다. 구약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금단의 열매도 지능이 인간에게 생겨서 낙원을 잃게 된 인간의 현실을 알려주는 탁월한 신화로 보아야겠다. 지능은 문명의 편리함을 상징하는 경제기술을 발명했으나, 지배종속의 차별을 낳았고, 의기양양한 승자와 앙앙불락한 패자의 사이에 헤겔과 마르크스가 본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결과에까지 이르게 했다. 루소와 마르크스 같은 근대 철학자들의 한결같은 염원은 지능으로 낙원을 상실한 인간의 사회생활이 어떻게 하면 자연상태의 원시적 순수성으로 재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회주의의 실습을 통해 공산주의 부활을 꿈꾼 마르크스의 온갖 헛수고를 여기서 다루지 않더라도, 루소의 저서인 ‘사회계약론’도 저런 의도와 같은 맥락에 속한다. 그의 정치사상은 사회생활에서도 자연상태의 부활이 가능한 길을 터놓기 위한 도덕적 정치의 이념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루소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이상적 도덕성의 요구가 실질적으로 선의 도덕성만 구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예견하지 못한 불선(不善)의 짙은 어둠을 동반하게 되었다. 현대생활은 그 어둠을 경험하고 있다. 자유사회의 이상은 본의 아니게 이기주의의 보호막으로 이용되는 측면이 생겼고, 평등사회의 이상은 불평등의 억울함을 씻어주기보다 오히려 대등적 평등주의의 가치관을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대등적 평등주의 가치관은 소유론적 평등주의의 가치관과 같다고 하겠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그의 저서 ‘인간적인 것을 거역하는 인간들’에서 잘 지적했듯이, 대등적 평등주의의 가치관에는 ‘나는 너와 같다.’는 의식이 강렬하게 깃들어 있다.‘너는 나의 형제다.’라는 형제애를 나타내는 말과 달리 ‘나는 너와 같다.’라는 대등의식은 소유적 불평등에 참을 수 없는 질투와 시샘을 느끼는 심리를 진하게 풍긴다. 대등적 평등주의는 불평등을 부정하는 자비정신과는 다르다. 대등적 평등주의는 강한 자아의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으로 으쓱대고 싶은 자아의 심리와 자기보다 능력이 나은 타자에 대한 증오와 질투의 심리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런 사회는 오직 소유의 다과만을 비교한다.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적 평등의 관계로 복원시키고자 한 루소의 정치사상은 오히려 근대사회에서 소유적 대등주의로 미끄러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불평등을 부정하고자 하는 루소의 정신은 오히려 사회 전체를 대등심리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대등주의가 오히려 사회전체에 원한(怨恨)의 심리를 더 자극하게 되리라는 것을 기원전 동양의 순자(荀子)는 미리 통찰하고 있었다. 순자는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사회질서의 유지와 전쟁방지와 경제복지생활과 다소 사치스러운 문화생활의 향유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낳기 위하여 사회기능을 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념을 순자는 유가의 경전인 ‘서경(書經)’에서 빌렸다. 그 말이 ‘유제비제’(維齊非齊·큰 평등은 동등하지 않게 함)다. 그는 사회가 소유론적 욕망의 대등한 요구로 나아가면 그만큼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가 대두하리라 믿고, 사회를 차이의 예법으로 구분할 것을 주장했다. 이 순자의 사상은 맹자의 공상적 덕치주의와 달리 대단히 유효하고 실질적인 데가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앞에서 거론한 불평등을 부정하는 정신과 잘 맞지 않는 점도 생길 수 있다. 즉 ‘유제비제’가 대등주의의 혼란을 막을 수 있으나, 불평등의 억울함을 씻어주는 데 매우 인색할 수 있다. 순자가 말한 차이의 제도화가 자칫 차별의 불평등을 촉진시킬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은 불평등 부정의 정신을 이으면서 대등적 평등주의에 빠지지 않고, 또 차별적 불평등으로 고착되지 않는 제3의 길을 찾는 데 있다. 루소가 의도하지 않았던 대등적 평등주의나 순자의 ‘유제비제’의 이념이 다 겨냥하고 있는 것은 소유론적 평등관이나 소유론적 차등관이다. 대등한 물질적 소유의 주장이든, 대등한 소유가 오히려 사회질서를 붕괴하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든, 좌우간에 저 두 주장은 다 소유론적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인간이 소유론적 평등을 주장하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대등론으로 미끄러지고, 인간이 소유론적 차등을 주장하면 그것이 계급적 차별론으로 흘러들어가기 십상이다. 우리의 주장은 평등론이 결코 소유론적으로 정착되어서는 안 되고, 존재론적으로 이해되고 생활화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평등론은 첫째로 불평등 부정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고, 둘째로 루소가 생각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상태를 자연상태로 복원시키려는 원력을 함의하고 있어야 한다. 불평등 부정의 정신은 대등한 평등주의의 이념과 다르다. 불평등 부정의 정신은 억울함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자비의 정신이지, 결코 대등한 소유의식의 당돌한 요구가 아니다. 존재론적 평등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자연의 만물이 지니는 존재양식인 ‘상관적 차이’(pertinent difference)로서 바라보는 사고방식에서 가능하다. 상관적 차이는 자연의 만물이 서로 다르기에 상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말한다. 자연의 만물은 자기동일성을 지닌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아래서 자기 존재를 발생시키는 의타기적(依他起的·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기는)인 존재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새는 벌레들과의 상관적 차이에서, 벌레들은 풀들과의 상관적 차이에서 존재하는 의타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타자들이 없다면 자기의 존재도 실존하지 못한다. 이런 상관적 차이가 바로 존재론적 평등의 존재양식에 해당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독립적인 자기동일적 존재가 아니라, 서울신문에 ‘철학산책’의 연재물을 쓰는 의타기적 존재다. 서울신문이 없다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실존하지 않는다. 나는 서울신문을 통하여 내 생각을 발표하기에 서울신문이 고마운 존재고, 서울신문도 나의 현전으로 조금은 영향을 받았겠다. 이것이 의타기적인 존재방식이다. 기업의 자본가는 자본과 경영의 측면을 상징하고, 노동자는 기술과 노동의 측면을 대변한다. 또 우리는 기업의 제품을 사는 소비자다. 자본가와 노동자와 소비자는 다 기업의 존재를 평등하게 유지시켜 주는 의타기적 존재양식을 띤다. 이 셋의 관계에서 일방이 없으면 타방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타기적인 차이의 상관성이다. 대등주의나 차별주의는 다 자연의 길이 아니다. 자연의 길에 인간의 미래적 희망이 있다. 평등은 인간의 자존심 대결을 정당화시키는 대등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에 서로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는 자연적 존재방식을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1) 자유에 대한 명상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1) 자유에 대한 명상

    자유는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진다. 자유는 공기와 물과 불처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기본적 요소와 같다. 공기와 물과 불이 있어도 자유가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으면 인간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독립선언문 전문에 씌어 있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천부(天賦)의 권리’라는 말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저 셋은 인간 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기본 요소로서 동의어와 같다. 인간은 태어나면 저절로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고, 정신적으로 자유스러워야 하고, 그래서 그 바탕 위에서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것도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억압이 있기에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 내 몸과 마음이 억압을 느끼지 않으면 자유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맑은 공기가 희박하면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자유는 추상적 관념과 이념의 문제가 아니고, 살을 통해 느끼는 구체적 마음의 총체적 부자유와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수 없다.‘나는 총체적으로 자유스러운가?’ 이 이상한 질문 앞에서 북한과 같은 절대독재체제 하에서의 생활을 제외하면, 우리는 단박에 OX식의 답변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것은 자유의 의미가 노예적인 억압의 질곡을 벗어나는 소유론적 해방을 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의 걸림을 던져버리는 존재론적 해방도 포함되기 때문이겠다. 소유론적이든 존재론적이든, 자유는 20세기 가톨릭 실존철학자인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처럼 ‘내가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제어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근대 서양의 자유론은 이 소유론적 의미의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 소유론적 자유론이 심리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화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것은 보통 다 알고 있다. 소유론적 자유론은 단적으로 사회전체의 안녕질서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몸과 의식의 자유로운 운동을 억압하는 문명을 천부의 불가양도적 권리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사상과 제도를 말한다. 이런 자유주의적 사상의 원류는 17세기 프랑스 데카르트의 의식철학으로부터겠다. 데카르트로부터 의식의 개념이 공식적으로 서양사에 등장하게 되었고, 그 의식은 곧 ‘내가 생각한다.’(cogito)는 자의식과 주체의 개념을 서양 정신문화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계기를 이루었다. 자의식의 주체를 능가하는 진리의 성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사상에서 천부의 권리가 되었다. 주체의 의식은 독립적으로 사유하는 데에 있다.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 주체적 사유고, 이것은 남의 간섭을 받거나 강요받지 않는 상태에서 명증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해당한다. 단적으로 자유는 독립적 의식의 주체적 사유와 간섭과 강요를 받지 않는 명증한 의식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 의식이 바로 개인의식이다. 자유주의의 철학은 결국 개인주의로 진행된다.‘cogito’의 주체의식이 17세기 영국의 로크 철학으로 이행하면서 경험적 관념들의 자유로운 사고이동으로 더 구체화되었다. 로크는 인간의 의식에 데카르트가 말한 선천적 관념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있다면 미개인이나 문명인이 다 같은 자유의 의식을 향유해야 하는데, 미개인은 문명인이 생각하는 자유의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의식은 백지, 즉 ‘대패로 민 널빤지’(tabula rasa)와 같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자유주의는 철두철미 의식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의식의 주체는 개인인데, 대체로 대륙의 합리론은 그 개인을 불변의 실체로 여기고, 영국의 경험론은 어떤 관념들의 심리적 집합을 가능케 하는 경향으로 개인을 생각한다. 근대의 자유민주주의는 이 영국의 경험론자인 로크 철학에서 그 기원을 잡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로 자유는 몸을 가진 의식의 자유스런 생각들(ideas)의 움직임을 보증해 주는 데 있다. 생각의 자유스런 개진이 막힌 사회는 숨통이 막힌 사회가 생명을 앗아가듯이 썩은 사회로 변하면서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한다. 생각들의 활발한 개진이 사회적으로 동적인 사회를 구성케 하여 발전의 원동력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둘째로 생각의 주체적 표현과 이동의 자유가 보증되는 사회라도 경험적으로 나의 생각이 꼭 절대적으로 옳다는 명증한 결론이 보증되지 않으므로 결국 다원적으로 관용(tolerance)이 용인되는 사회가 최선의 자유사회라는 것이다.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집회결사와 표현의 자유, 종교신앙의 자유 등등이 이런 자유론의 실천방안들이다. 다시 한번 더 묻는다.“나는 자유스러운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답변은 ‘나는 더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본질은 단적으로 자유의 소유론적 쟁취와 유관한 뜻으로 읽힌다. 부자유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결핍된 심신의 자유로운 운동을 소유해 나가는 과정이 자유주의의 전개양상일 것이다. 배고픈 상태로부터 자유를 사회적으로 향유한 상태로의 이전이 근대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이다. 자유사회로 가기 위한 길은 배고픔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배고픔은 자유사회의 적이다. 그 배고픔은 경제적인 궁핍과 자유 실천방안들의 사회적 부재를 말한다.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업적은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배고픔의 부자유를 사회적으로 추방시킨 덕이겠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스러운가? 우리는 더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소유에 의한 자유에서부터 다시 더 해방된 자유의 존재이기를 원한다. 경제적 사회적 부자유의 배고픔을 추방시킨 소유의 자유를 넘어 다시 존재론적인 자유의 요구를 실현하고자 원한다. 이 존재론적 자유의 요구는 마르셀이 그의 저서 ‘인간의 존엄성’에서 암시한 것처럼, 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포로가 되어 가고, 자기 이익과 자기 감정과 자기 편견의 굴레에 갇혀 살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을 자기중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는 습기의 짐을 벗어버리려는 요구와 같이 간다. 존재론적 요구는 단적으로 마음이 자기의식으로 무장되지 않고 자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존재이기를 바라는 요구를 말한다. 이 가톨릭 철학자는 불교적 사유와 아주 유사하게 말한다. 소유의식에서 해방된 존재론적 자유의 사상을 보통 사회과학자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사변적인 철학의 영역으로 치부해서 그러는 것 같다. 그런데 자유주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아직도 가화(假花)와 같은 사회주의에로 기울고 있는 사회과학자들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대처방안도 못될 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도 자유주의에 못지 않는 소유의식의 철학인데, 집단적 소유의식의 강령이 사회를 도덕화한다는 허구 아래 개인적 사고의 신선함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집단적 도덕의 캐너피(canopy)로 혁명한다고 사회를 덮어씌운다. 거기서 생명과 자유는 배고픔 속에서 질식한다. 더구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보다 자의식이 더 강하다. 자유주의의 자의식은 이기적 자의식이기에 약간의 죄의식을 품고 있으나, 사회주의의 자의식은 도덕적인 정의감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자기이념의 감옥 속에 더 갇혀 폐쇄적 확신 속에 산다. 우리는 더 자유로워야 한다. 소유론적 자유에서 존재론적 자유에로 우리는 마음을 회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다 의식의 철학이므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마음의 법을 알지 못한다. 마음은 의식과 다르다. 이것을 다음에 말하겠다. 중국 선불교의 삼대종사인 승찬(僧璨)대사의 ‘신심명’에서 마음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마음은 통연히 명백해질 것이라고 언명했다. 애증(愛憎)의 감정적 판단을 내려놓으면, 마음은 존재론적 자유 자체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대사는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은 마음의 병이 된다고 하고, 인연을 쫓지도 말고, 공인(空忍·세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필경공의 입장에 안주함)에도 머물지 말라고 설법한다. 참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가르친다. 존재론적 자유의 이념에 너무 젖으면, 그것이 다시 집착의 오랏줄이 되어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한다는 역설을 승찬 대사는 말한다. 존재론적 자유는 인간이 세상에서 택일의 가치관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세상만사는 다 양면성이 있기에 선을 택해도 선만 오지 않고 악도 불청객으로 따라 온다는 것을 승찬 대사는 가르친다. 그래서 선악도 다 잊고 무심의 초탈경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은 스스로 자기자신의 포로로 갇혀 사는 것을 초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선악과 호오에 의한 감정적 택일을 하는 한에서, 인간은 자의식을 갖게 되고, 그런 한에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존재론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원효(元曉)대사는 이런 초탈의 자유를 이중부정으로 표시했다. 즉 비선비악(非善非惡·선도 아니고 악도 아님)의 경지를 말한다. 이런 이중부정의 경지를 아직도 사회과학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지가 진실로 인간세상을 의식의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차원임을 깨닫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좋은 세상은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배고프지 않고, 소유의 탐욕에 집착하지도 않는 마음의 도래에서 가능하다. 승찬 대사가 말한 무심의 초탈적 자유는 마르셀이 그의 저서 ‘거부(拒否)에서 기구(祈求)에로’에서 언급한 ‘우리의 자유는 우리자신이다.’라는 말과 함께 이해되어야 하리라. 이제 자유는 우리가 소유하는 속성이 아니라, 우리자신이 자유가 되어야 하는 자기 제어임을 마르셀이 언명한 것이겠다. 소유론적 자유는 아만(我慢)의 아집(我執)과 참을 찾았다는 법집(法執)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의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초탈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비트겐슈타인 선집/이영철 옮김

    잠언에 가까울 만큼 극도로 간결한 문장, 청빈하고 고독한 생애, 철학사상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창적인 사유…. 생전에 출간된 단 한 권의 책 ‘논리-철학 논고’로 20세기 철학의 지형도를 바꾼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의 철학 저작들이 7권의 선집(책세상 펴냄)으로 선보인다. 그동안 그의 주요 저서들이 간헐적으로 번역되긴 했지만 선집 형태로 기획돼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선집 일곱 권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와 후기 철학세계를 대표하는 제1권 ‘논리-철학 논고’와 제4권 ‘철학적 탐구’가 먼저 나왔다. 역자는 부산대 철학과 이영철 교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한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1999년 시사주간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100명에 철학자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특히 20세기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형성과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논리-철학 논고’가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며 언어의 궁극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책이라면 ‘철학적 탐구’는 그런 언어관을 수정, 언어의 일상적 사용과 실천에 의해 언어를 파악할 수 있음을 강조한 책이다. 확실성에 대하여’‘문화와 가치’‘소품집’‘청색 책·갈색 책’‘쪽지’등 나머지 5권은 8월까지 완간될 예정이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책꽂이]

    ●1% 변화가 100% 삶을 바꾼다(임임택 지음, 푸른솔 펴냄) 실명과 난치병인 베체트병(일종의 만성 염증성 질환)을 극복하고 컴퓨터 미디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의 인생 스토리. 미8군 전속 최연소 기타리스트 출신인 저자는 점자악보로 2200여 곡을 외워 ‘걸어다니는 악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희망은 절대 먼저 등을 돌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저자는 좌절 대신 도전을 택해 오케스트라 편곡자로, 기업연수 전문강사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9800원.●잃어버린 신발 열켤레(윤학 지음, 흰물결 펴냄) 1997년 폐간 위기에 처한 월간 ‘가톨릭다이제스트’를 재창간, 사랑받는 잡지로 일궈낸 저자(로펌 흰물결 대표변호사)의 작은 행복 이야기.‘그 젊은 보좌신부의 십자가’‘종교가 별 거 있다냐’등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내적 성찰이 담긴 글들이 실렸다.1만 2000원.●청소년을 위한 서양수학사(고상숙·고호경 지음, 두리미디어 펴냄)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전쟁에 참가해 막사 침대에 누워 명상에 잠겨 있다가 유리창에 기어다니는 파리 한 마리를 보고 ‘좌표 평면’을 발명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항상 아침 늦게 일어난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버릇이 생겼고, 이런 아침명상이 그의 철학과 수학의 바탕이 됐다. 수학자들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을 소개.1만 5000원.●퓨처 싱크(에디 와이너 등 지음, 안진환 옮김, 해냄 펴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9·11테러에 대한 논평에서,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부족했던 탓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며 미국의 정보기관을 비판했다. 미국 정부는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효과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 책은 트렌드뿐 아니라 역트렌드(countertrend)까지 파악할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1만 6000원. ●책임감 중독(로저 마틴 지음, 정철민 옮김,21세기북스 펴냄) 동유럽 속담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칠 순 없다.”는 말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책임감 바이러스’를 일으키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결국 실패하고 만다. 경영학자인 저자는 책임감 강한 사람이 조직의 도전정신을 없애고 팀원을 무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혼자 책임을 떠맡게 될수록 협력해야 할 동료와 부하직원이 책임을 회피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1만 3000원.●나는 왜 이런 게 궁금할까(마르틴 보레 등 엮음, 한윤진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 물고기는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까. 대부분의 어류는 몸통 측면에 옆줄이 있다. 옆줄에는 감각기관의 솜털이 모여 있는데 이것을 통해 음파와 물의 흐름, 진동 등을 느낀다. 오징어는 특수한 색소를 사용, 피부 색과 무늬를 변형시켜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새우와 게는 벙어리나 마찬가지. 그들은 소리를 간접적으로만 만들어낼 수 있다. 집게발을 사용해 공기방울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터뜨리는 방식으로 소리를 낸다. 교과서 밖 과학상식 100가지를 실었다.1만 3000원.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0) 한국철학과 그 교육의 필요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20) 한국철학과 그 교육의 필요성

    지난주의 글(19회) 말미에 나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철학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번뇌가 보리를 찾는다는 불가의 말처럼, 현실의 어려움이 철학의 길을 가게 한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철학과 보리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초등학교부터 철학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한국인이 마음의 풍토병을 깊이 앓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철학은 의술도 아닌데 마음의 풍토병을 고칠 수 있나? 이 병은 약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병은 한국인의 마음의 역사가 공동운명처럼 남긴 흠결이고 습기를 말한다. 그 역사는 국사학자들이 말하는 연대기적인 역사기술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이 표출한 구체적 욕망들이 공동의 무의식적 성향을 형성한 것을 말한다. 지난주에 다루어진 열광의식과 추상의 정신도 한국적 풍토병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앞사람들이 쌓은 업적과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다 무시하고 허물어 버리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정치에서도 앞 정권이 해놓은 것은 다 부정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려 한다.‘제2의 건국’ 등과 같이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일소하고 새롭게 건국하자고 역설한다. 개인적으로 학자들이 선대의 덕을 안 보고 혼자 자수성가한 것처럼 떠드는 경향이 있다. 자수성가의 위험성은 독불장군(獨不將軍)의 태도와 같다. 한국인들은 독불장군의 행세를 하는 일반적 풍토병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혼자서는 장군이 안 되는데, 혼자서 장군이라고 하며 크게 떠들지만 힘이 없다. 해외에서도 어떤 장사로 재미를 보면 다 같이 그 장사를 하는 바람에 결국 모두 망하게 된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렇게 돈을 벌게 하고 나는 다른 방식으로 길을 찾지 않는다. 또 해외 한인들의 약점을 잡아 가장 괴롭히는 것이 같은 동포라는 말을 나는 들었다. 한국인들이 적수공권의 찌든 가난에서 출발하여 지금 세계 11대 무역국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기 나라에 대한 긍지를 못 갖고 틈만 나면 해외 선진국으로 이민 가고픈 마음을, 그것도 중산층 이상에서 내는가? 한국은 세계사에서 드물게 종합적으로 성공한 나라다. 과거를 뭉개는 풍토병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절실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속물주의자들은 자기 개인의 이기적 출세밖엔 관심이 없고, 급진주의자들은 단박에 완벽한 사회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해서 우리가 쌓은 업적은 눈에 안 보인다. 세상에 한꺼번에 다 달성되는 사회가 어디에 있는가? 왜 한국인들은 정이 많으면서 모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불친절한가? 마치 예절이 없는 것처럼. 애국심은 있으나 애국의 구체적 방법을 모르는 것 같고, 인정은 풍부하나 다른 이들을 구체적으로 친절하게 배려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끼리 서로 흑백심리로 이전투구를 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와 대처할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없다고 못하겠다. 마음의 병은 마음이 알아야 고쳐진다. 마음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온다. 무명은 무지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 마음의 병을 모르고 날뛴다. 각자가 자기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어리석은 마음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복음(23:34)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하는 짓이 얼마나 탐욕과 화의 독성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스타일이 너무 자연스러우므로 자기 체취를 모르듯이 자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처럼 무명이 가장 커다란 마음의 병이다. 자기를 모르는 무명은 자기의 성격에 대하여 거리두기를 하지 않는다. 의식의 모든 활동은 이 성격의 무의식적 스타일을 통하여 표출되기에 인간은 자기의 성격이 지닌 흠결과 습기를 모른다. 이것이 무의식적 업장이다. 그 업장은 같은 역사적 환경에서 산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형성된 공동습기와 같으므로 이것을 하이데거는 공동운명(destiny)이라고 불렀다. 각자는 다 개성을 띠고 있지만, 한국인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의 창문과 그 틀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판단하므로 그 공통 성격은 한국인의 의식 활동을 제약시키는 집단무의식의 구조와 다르지 않다. 이것을 불교에서 공동업(共同業)이라 부른다. 이 공동업은 한국인의 의식활동을 움직이게 하는 습기의 경향과 같고 저장된 심적 기질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공동업의 장애를 반성해서 씻어내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기획과 구상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상누각의 공사에 불과하겠다. 한국철학은 한국인의 공동업의 무명을 깊이 자성케 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공동업이 풍토병이 되어 우리를 부자유스럽고 불행케 한다. 그것이 한국인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어떤 색깔로 채색한다. 그 동안 나는 철학자로서 책을 통해 익힌 철학이론과 한국인으로서 삶에서 느낀 경험과의 어긋남으로 철학적 초점 불일치를 겪어 왔었다. 이론으로 익힌 철학일반의 논리적 보편성과 한국적 삶의 경험이 말하는 실존적 특수성과의 괴리로 늘 자신 없이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나는 방황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때로는 주자학의 용어대로 종본이언(從本而言=본질에 따라 말하기)으로 철학의 보편적 본질을 우선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종사이언(從事而言=사실을 먼저 생각해서 말하기)으로 한국적 사실의 인식을 먼저 사유의 중심으로 잡기도 했다. 그러나 종사이언으로 철학을 전개하면, 나는 어딘지 모르게 보편적 철학의 엄청난 권위의 무게에 눌려 목소리가 자신 없이 기어 들어가는 형국을 안 느낄 수 없었다. 나의 대학시절 은사인 박종홍(朴鍾鴻)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철학은 한국인의 행복을 구가케 하는 길을 보여주는 정신의 작업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내가 한국인의 행복을 구가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적 길닦기에 몰입하면 할수록, 나는 나의 몰입이 보편적 이론의 승화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늘 유치한 감상주의적 주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인생의 후반부에서 나는 극적인 전환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서양 해체철학의 도움으로 불교와 노장사상의 철학적 진수를 알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늘 이론적으로만 타당하다고 여겼던 율곡의 이통기국(理通氣局=보편적 理는 氣의 작용으로 특화됨)의 사상(13회 글)을 이제 내가 나의 진리로 계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불교와 노장사상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마음의 철학을 이통기국화(理通氣局化)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옛날처럼 철학적 진리의 논리적 보편성과 주어진 한국적 사실로부터 철학하기와의 사이에 어떤 괴리도 느끼지 않는다. 철학은 결국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길을 닦아가는 것이고, 그 마음의 병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어떤 차이도 없고 결국 시공적 인연의 차이에서 생긴 다양한 마음의 병들이 실존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 마음의 무의식적인 공동운명의 무명을 자각케 하는 ‘길닦기’(opening-way)와 같다는 것이다.‘길닦기’는 하이데거 후기철학의 용어로서, 그것은 고향인 존재의 본성이 사는 마을로 되돌아가는 마음의 길을 닦는 것을 뜻한다. 심적인 습기로 응어리진 병은 가장 급선무로 무명의 자각과 함께 본성에의 길로 나아가는 ‘길닦기’에서 치료가 시작된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마음의 무의식적 병은 그 병을 자각하는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병은 사람들의 마음이 미혹해서 생긴 환상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악몽이 우리를 괴롭히듯이 환상이라 하여 힘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 환상의 자각은 남이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 뼈저리게 부자유와 불행의 공동질곡을 참회하면서 일어나는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성의 길닦기로 우리가 회심하게 된다. 공동업은 즉 한국인의 마음의 공동습관과 같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역사 속에서 인연 따라 지은 반복적인 마음의 경향이므로, 그것을 지우는 것은 그 업을 깊이 인식하면서 참회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불교의 유식학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고요히 우리를 깊이 반조(返照)하게 하는 철학교육이 급선무다. 무엇이 철학이고, 어떻게 철학교육을? 동서고금의 제 철학이론의 진열이 철학인가? 철학은 어떤 특정한 정치이념의 주입이 결단코 아니다. 이것은 인간을 어떤 특정한 가치관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제 철학이론의 진열이 자료로는 좋으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살(13회 글)이 느끼는 실존적 아픔을 풀어주지 않는 이론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국사학은 있었지만, 한국사에서 한국인이 반복적으로 느낀 마음의 현재완료적 업을 진솔하게 말해 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우리의 숙업(宿業)을 위선적 가식없이 구체적 사실로서 솔직히 숙고해 보려고 하지 않고, 명분상 추상적 가치관의 캐치 프레이즈로서 정치권력을 등장시킨다. 그래서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한바탕 한(恨)의 칼바람이 일어난다. 이것이 다 공동업의 멍에가 되어서 우리를 짓누른다. 한의 칼바람 앞에서 피고가 되지 않으려고 정치투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안 가린다. 한국철학은 먼저 반복되는 한국인의 공동업을 깨뜨리도록 마음의 자각과 ‘길닦기’를 하는 학문이고, 그 교육은 마음에서 참회와 ‘길닦기’를 실행하는 데에 있겠다. 그러기 위하여 역사적 무명의 자각과 그 자각이 마음에 깊이 새겨지도록 마음의 격정을 다스리는 평정의 지혜를 초등생부터 점진적으로 내면화시켜 나가는 데 있겠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역사적 운명에 대한 자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편년체적인 역사학(Historie)과 역사적인 공동운명의 자각으로서의 역사학(Geschichte)을 엄밀히 구별했다. 한국철학도 한국인의 공동운명의 업이 우리를 억누르는 질곡이 아니라, 우리를 향상시키는 비약의 근거로 작용케 하는 ‘길닦기’가 되어야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심경호 지음

    “근래에 편지를 보내주셨는데도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그대가 서신을 보내는 것도 마음이요, 내가 답장을 하지 않은 것도 마음이니, 마음에 어찌 둘이 있겠습니까.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뜻이 이에서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근황을 알린 간찰(簡札)의 한 대목이다. 일상의 여유와 서정,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간찰은 본래 죽간과 목찰에 작성한 글이란 뜻이지만, 종이나 비단에 적은 편지도 모두 간찰로 불린다. 서한(書翰), 간독(簡牘), 간서(簡書), 독서(牘書), 서신(書信), 서찰(書札), 고서(高書), 귀찰(貴札), 방서(芳書), 옥찰(玉札), 존함(尊函), 혜서(惠書)등 편지를 가리키는 말들은 매우 많다. ‘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심경호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는 옛 선비들의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이규보, 정몽주, 김시습, 이황, 이이, 허균,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 24명의 간찰이 담겨 있다. 중국 송나라의 철학자 정호는 “서찰은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깝다.”고 했다. 조선조 선비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팔려 소중한 자기의 본심을 잃음)라 해 서예나 그림 등에 빠지는 것을 극력 피했지만 간찰만은 예외로 했다. 자신의 글씨와 문장을 한껏 펼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책에서는 벗에게 보내는 간찰만을 골라 실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명길이 장유에게 국사를 함께 논하자고 권한 간찰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발굴ㆍ소개되는 것이어서 관심을 모은다.1만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책꽂이]

    ●차 한 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강판권 지음, 지호 펴냄) 늘 푸른 키 작은 나무인 차나무는 특이하게도 비옥한 땅이 아닌 척박한 땅, 즉 자갈땅에서 가장 잘 자란다. 또한 햇볕을 좋아하면서도 반드시 그늘을 필요로 해 인삼밭처럼 햇볕을 가려주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이에는 예로부터 오동나무를 이용했다. 오동나무는 세상에서 잎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차나무와 오동나무는 찰떡궁합이다. 차나무의 꽃잎은 다섯 장. 흰빛을 띤 다섯 장의 꽃잎은 고(苦), 감(甘), 산(酸), 신(辛), 삽(澁) 등의 맛을 지닌다. 차나무를 통해 수천년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창의적으로 읽어낸 솜씨가 돋보이는 책.1만8000원. ●피타고라스가 보여주는 조화로운 세계(이광연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피타고라스에 관해선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행한 ‘동물과 대화하기’와 같은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사모스인들의 구전 속에선 아폴론의 아들로 신격화되기도 했다. 그리스 철학자 이암블리코스의 저작 ‘피타고라스 학파의 생활에 관하여’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유학하고 돌아 와 이탈리아 남부 타렌툼에서 ‘케노비테스’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지식을 전수하며 살았다고 한다.‘수’를 통해 피타고라스가 진정으로 무엇을 추구하고자 했는가를 살핀다.9000원. ●중국 근대화를 이끈 걸출한 인물들(이병주 엮음, 지식산업사 펴냄) 양무운동의 선구자이자 아편전쟁의 영웅인 임칙서에서부터 중국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에 이르기까지 중국 근대화 과정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삶을 고찰. 청말 근대화의 지도자 이홍장, 변법유신 사상가 캉유웨이,5·4운동의 기수이자 중국공산당 창당의 주역인 진독수,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창도자 이대교, 남경 국민정부의 영수 장개석, 군국주의사상가 장병린, 여성해방과 반만(反滿)혁명운동의 열사 추근, 중화민국 창설자 쑨원, 쑨원의 부인이자 민주사회주의자였던 쑹칭링, 중국 무정부주의의 선구자 오치휘,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자 마오쩌둥 등이 주인공이다.3만원. ●바보예찬(에라스무스 지음, 문경자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16세기의 볼테르’로 평가받는 네덜란드 출신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선구자 에라스무스를 유럽의 스타작가로 만든 문제작. 총 6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화자인 ‘바보’가 등장해 세상에 불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열거하고 고대 그리스ㆍ로마문학과 철학의 고전, 성서를 인용해가며 자신의 공을 자랑하는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친구 토머스 모어에게 헌정한 책.1만원.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9)열광의식과 대중시대의 정신적 위험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9)열광의식과 대중시대의 정신적 위험성

    오늘은 좀 특이한 주제를 갖고 철학적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자. 나는 20대에 20세기 프랑스 가톨릭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지금도 그의 사상이 나의 철학적 사색의 한복판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는 나에게 ‘열광의식’(fanaticism)과 ‘추상의 정신’(spirit of abstraction)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열광의식과 추상의 정신은 집단형성이 쉽게 이루어지는 정치적 종교적 활동에서 잘 나타난다. 열광의식은 정치적 종교적 의식으로 뭉친 집단이 자기 집단세력의 지배강화를 목적으로 증오의 적을 클로즈업시키는 단 하나의 추상적 목적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피끓는 격정적 광기를 말한다.‘추상의 정신’은 격정적 광기로 상대방을 추상적이고 적대적 구호로 몰아붙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런 열광의식은 청소년이 어떤 연예인이 좋아서 열광하고 환호하는 의식과는 좀 다르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에는 미워해야 할 적이 없겠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정치적 종교적 열광의식만큼 독기는 없겠으나, 좋아하는 연예인을 열광적으로 우상화하는 그 순간에 이른바 팬들은 그 우상에 넋을 빼앗긴다. 그와 함께 팬들은 자기의 본성을 잃고, 환영과 같은 허깨비가 그들의 주인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현대의 거대 상업주의 문화가 가장 선호하는 ‘흉내내기’(simulacrum)의 모습이다. 정치적 종교적 열광의식과 추상의 정신의 배후에는 반드시 어떤 권력의지와 진리의지의 숨은 음모가 깃들어 있다. 열광의식은 단순한 권력의지가 대중을 쉽게 격발시키기 어려우므로 늘 진리의지를 앞세워 권력의지가 진리를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불가피한 현상임을 믿게 한다. 그러나 그 진리의지는 아주 단순 소박한 구호에 불과하다. 대중은 복잡한 이론과 철학을 싫어한다. 대중은 깊이 사유하기를 원치 않는다. 대중은 간단하고 소박한 OX만을 바랄 뿐이다. 대중의 열광의식은 피끓는 추상적 격정의 구호에 집착되어 있어서 군중심리의 최면에 쉽게 걸린다. 그 최면에 걸리면 적은 구체적 얼굴을 지니지 않고, 다만 정답과 오답을 지닌 추상에 불과하다. 적을 제거하는 것은 오답을 지우는 것이지, 구체적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추상의 정신은 죄의식 없이 그토록 피끓는 격정의 선동을 할 수 있다. 마르셀이 그의 저서 ‘인간적인 것을 거슬리는 인간들’에서 밝힌 ‘열광의식’과 ‘추상의 정신’을 간추려 정리해 본다. 1)열광분자들은 결코 스스로가 열광분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정의 때문에 억압받고 모략중상당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2)열광분자들은 대개 종교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래서 열광적 정치의식은 바로 세속적 종교적 색채를 띠고 활동한다. 정치적 열광분자는 종교적 맹신자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3)개인적인 열광분자는 무의미하다. 열광분자는 서로서로 세력을 형성하기 위하여 뭉치려 한다. 그래서 열광적 군중이 된다. 군중 수가 많을수록 개인들은 익명으로 군중 속에 증발하고 오직 익명의 대중이 집단세력이 되어 사회를 지배한다.20세기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가장 강력한 사회의 지배자가 된 대중은 똑똑하면서도 바보 같다. 현대의 대중은 과거의 대중과 달라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니 똑똑하고, 그 많은 정보가 대중의 익명 속에서 대중을 쥐어흔드는 한 목소리에 감추어져 남 따라 말하고 행동하니 바보스럽다는 것이다. 또 그는 그런 대중이 자기가 가장 옳다고 여겨 더 고급적인 다른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자만심의 덩어리와 같다고 보았다. 4)열광분자는 대중에게 한가하게 생각하고 사색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미 한가롭게 생각하고 사색하는 사람은 대중이 안 된다. 마음의 여유는 열광분자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열광분자는 대중을 늘 흥분시키거나 흥분시킬 구실을 찾는다. 흥분한 마음은 쉽게 열광적 추상의 정신에 잡아먹힌다. 5)열광분자는 인간의 의식을 가급적 단순하게 만든다. 인간의 감정을 단순한 흑백논리로 무장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가급적 소박한 OX식 이분법으로 분류한다. 자기들의 선을 선양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불행이 저 악들의 무리 때문이라고 공격한다. 감추어진 원한의 감정을 찾아 거기에 불을 지른다. 마르셀은 말한다. 만약에 어떤 이가 철학이나 그 비슷한 사상의 이름으로 대중을 흥분시키고 현실을 단순 선악의 감상주의로 양분하여 색칠하면서 엉큼한 권력의지를 선전적인 진리의지 속에 감추고 있다면, 그는 철학자이기를 포기하고 이데올로기의 제조자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미 2400여년 전에 아첨과 철학은 같이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권력에 붙어 개인의 사리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부가 아니다. 대중의 권력에 장단을 맞춰 인기를 노리는 것도 아부다. 마르셀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현대 대중의 권력화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사상에 동조한다. 현대의 대중은 진부하고 단순 소박한 자기들의 주장을 너무 당돌하게 주장하는 안하무인의 태도와 고집불통의 자만심을 갖고 있다고 위의 두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거기다가 현대철학의 거인, 독일의 하이데거도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세상사람’(the men in the street)의 존재론적 타락성을 심도있게 분석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상사람’은 그럭저럭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속적 평안과 안전과 속물적인 보호막의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 ‘세상사람’의 평균성과 획일성의 수압에 못 견디어 거기에서 멍하게 헤매다가 결국 싫은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세상사람의 존재론적 타락을 그는 ‘대중성’(publicness)이라고 규정했다. 각자는 ‘세상사람’이라는 ‘대중성’속에 살면서 자신을 널리 알리고, 이름과 인기를 얻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려고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 ‘대중성’을 우상화하고 가치판단의 공식적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한다. 하이데거는 이 ‘대중성’을 세상사람의 타락한 비본래적 존재방식이라고 여겼다.20세기를 살았던 저 세 철학자들은 다 대중의 무서운 폭력적 힘과 편견과 오만을 읽었고, 그것이 현대생활의 공식적 표준으로 둔갑하고 있는 상업성을 보았다. 한국도 이미 대중시대의 권력을 맞고 있다.‘추상의 정신’으로 열광화한 정치종교적 세력들도 있고, 인기의 대중성을 성공의 공식적 기준으로 여겨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게끔 하는 상업성도 거세게 불고 있다. 정치도 대중의 지지도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자연성이라는 필연법이 최고의 법이다. 어느 것도 자연에서 이 법을 어기고 생존할 수 없다. 자연의 필연법처럼, 사회생활에서는 여론이 늘 최고의 법전으로 작용하여 왔었다. 지금의 민주시대에만 여론이 최고의 법전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옛날의 왕정시대나 과두정치시대에도 왕들이나 귀족들이 다 백성의 여론을 무시하고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백성의 여론을 무시한 독재정치는 기괴해서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자연의 필연법은 항구불변이나, 인간의 여론은 변덕스럽고 시시각각 변한다. 여기에 여론에 대한 철학적 인식의 부정견(不定見)이 있다. 더구나 지금의 여론은 과거와 달리 대중시대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열광적 ‘추상의 정신’으로 사람들을 흥분시켜 피끓게 하는, 즉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과잉민주주의’(hyperdemocracy)가 생기기도 한다.‘과잉민주주의’는 대중이 법을 따르지 않고, 직접적인 집단행동을 통해서 물리적 압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열망과 욕망을 집행하려는 기도를 말한다. 또 상업주의적 인기조종으로 거품의 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다. 인기가 ‘대중성’의 표준이 되어서 오로지 인기만이 성공과 지배의 정당성을 만든다. 대중시대의 여론이 이처럼 과잉민주주의나 상업민주주의의 위험성을 동반하여도, 사회를 운영하는 경영의 법이 여론을 떠나서 정당화되는 다른 길이 불가능하겠다. 여기서 나는 저 세 철학자들의 반(反)대중론에 깊이 동조하면서도, 과연 사회경영에 필요한 대안이 여론이외에 다른 방식이 가능한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대중시대에 대중을 직접적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처럼, 대중은 이미 기고만장 잘난 척해서 자기들을 가르치는 어떤 권위도 수용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학자들이나 언론인들이 흔히 ‘국민의 뜻’이라든가,‘국민이 원치 않는다.’라고 언설하는 것은 기실 자기의 뜻이 국민대중의 뜻이라고 위장하면서, 동시에 대중의 뜻에 아부하려는 심리를 반영한다. 그런 사탕발림에 대중들은 국민의 익명 속에서 만족해한다. 격정적 과잉민주주의나 변덕이 죽 끓듯 부침하는 인기위주의 상업민주주의에로 여론이 오도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긴요한 문제는 국민 개개인의 마음이 스스로 깊어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개개인의 마음이 깊어지기 위하여 마음은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교육훈련을 받아야 한다. 가장 먼저 종교지도자가 오로지 신자 수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열광하는 자세에서부터 신자들이 마음의 본성을 찾도록 마음을 고요히 진정시키는 길을 인도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TV와 방송에서 합창음악의 효과를 살려야 한다. 한국처럼 십인십색의 마음으로 갈라진 나라에 합창의 화음이 우리를 안으로 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철학교육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시행되어야 한다. 따따부따 시시콜콜 영양가 없이 따지는 잘난 체하는 철학논술보다 오히려 마음을 깊이 사색게 하고 세상을 통찰케 하는 종합예술로서의 철학의 지혜가 필요하겠다. 깔깔 웃고 울부짖고 악 쓰는 그림보다, 생각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TV 연속극에서 입시생을 빼고 독서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발언대] 일본은 독일사례서 배워야/조윤수 외교부 기획심의관·전 베를린 총영사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평생 살았다는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 프로이센 공화국의 대관식이 거행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러시아령이 돼 현재 칼리닌그라드로 불린다. 또 폴란드 바웬사가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그단스크. 옛 지명은 단치히였다. 독일제국 중심지역인 서프로이센의 주도(州都)였으나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에 할양됐다. 독일이 1·2차 세계 대전 후 국제사회의 엄중한 조치를 수용, 주변국에 할양된 영토들이다. 현재 독일의 영토는 1·2차 대전 패전으로 13%와 24%가 각각 줄었다.1871년 비스마르크 재상 주도로 독일제국이 탄생한 때의 3분의2에 불과하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자. 프랑스인은 신뢰하는 국가로 독일을 들고 있다. 폴란드도 독일의 국제기구 진출에 발 벗고 나서고 있고, 이스라엘은 유럽국가 중 독일과 가장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진정한 행동이 있었다. 브란트 총리는 1970년 12월 폴란드 유대인 수용소 기념비 앞에서 독일의 과거를 사죄하려면 무엇인가 특별히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수백만명의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을 말로 다할 수 없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또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2차 대전 후 포츠담 협정에서 잠정 경계선으로 설정된 오데르나이세 강을 독일과 폴란드의 경계선으로 인정하는 바르샤바 조약을 1970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상당한 정도의 독일 영토를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국내의 반대, 특히 실향민의 반대가 높았다. 하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반대를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독일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지도자들은 확신하고 있다. 브란트 총리의 이러한 조치가 없었다면 통일은 물론 현재와 같이 유럽통합의 중추역할도, 무엇보다 신뢰받는 유럽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독일 정부는 독일제국의 근간이었던 프로이센의 영토까지도 포기하면서 사죄했다. 또 독일 지도자들은 2차 대전에 참전한 장병들이 국가방위 업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남용으로 전쟁에 동원돼 희생된 자로 보면서 나치의 만행을 되새기고 있다. 역사교과서 공동제작, 추모비 건립, 피해자에 대한 정부배상 등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일본은 어떤가. 강점한 한국의 영토를 자국의 영토라고 강변하면서 일부 지도자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과거문제에 애써 눈감으려 하고 있다. 이와 관련, 독일 슈뢰더 전 총리는 “용기를 갖고 자신의 과거를 명백히 직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친구를 얻을 수 있으며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독일·프랑스 간 신뢰관계가 독일의 과거사 인정에서 시작됐음을 언급한 것이다. 일본 정부 및 지도자들의 진지한 행동을 다시 기대한다. 과거사에 대한 직시가 궁극적으로 일본의 국익과 일치함을 강조하고 싶다. 조윤수 외교부 기획심의관·전 베를린 총영사
  • [코드로 읽는책] 메타피지컬 클럽/루이스 메넌드 지음

    미국의 남북전쟁은 남부에서 노예제를 쓸어버렸지만 그와 함께 북부가 쌓아온 지적 문화의 뿌리 또한 뽑혀나갔다. 미국이 그 문명을 대체할 문화를 개발하고, 사상들을 찾아내고, 사고방식을 확립하는 데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메타피지컬 클럽’(루이스 메넌드 지음, 정주연 옮김, 민음사 펴냄)은 그 힘겨운 지적 여정의 기록이다. 미국인들이 마침내 찾아낸 새로운 사상,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단 하나의 사상’, 그것은 바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실용주의)이다. 프래그머티즘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인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바꿔놓은 지극히 미국적인 철학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능률주의·연방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뉴욕시립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오늘날 프래그머티즘이라 불리게 된 미국의 정신이 선조들의 강렬한 삶의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형성돼 왔는가를 생생히 그려낸다. 책은 19세기 미국 지성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네 거인의 발자취를 좇는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진보적인 연방대법관이었던 ‘위대한 반대자’ 올리버 웬들 홈스,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자 젊은 시절 홈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기호학의 창시자 찰스 샌더스 퍼스. 이들은 1872년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비공식 토론 모임을 가졌고, 그것을 ‘메타피지컬 클럽(Metaphysical Club)’이라 불렀다. 고작 9개월 정도 지속된 모임이었지만, 이 클럽에서 바로 프래그머티즘의 단초가 마련됐다.‘형이상학적’이란 뜻이 담긴 ‘메타피지컬 클럽’에서 실용주의 정신이 태동한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 이들 세 사람의 저작과 훗날 퍼스의 제자이자 제임스의 친구, 홈스의 팬이었던 교육학자 존 듀이의 연구에 힘입어 프래그머티즘은 비로소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됐다. 프래그머티즘은 관념적인 진리 추구에 몰두해온 유럽철학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한편 인간 이성의 상대성과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런 만큼 사상과 신념을 신성의 제단에서 세속의 세계로 끌어내렸다는 평가가 따른다. 유럽의 철학자들은 종종 프래그머티즘을 철학의 체계도 갖추지 못한 ‘보잘것 없는 사상’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싹튼 프래그머티즘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미국의 법과 교육, 사회, 나아가 예술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 지성 네 명에 대한 종합 전기인 동시에 남북전쟁 이후 100여년에 걸친 ‘현대 미국’ 탄생의 역사다.2만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마셜 맥루언-미디어 시대의 예언자/필립 마샨드 지음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3명을 꼽으라면 마릴린 먼로와 비틀스, 그리고 마셜 맥루언이 있다. ‘마셜 맥루언-미디어 시대의 예언자’(필립 마샨드 지음, 권희정 옮김, 소피아 펴냄)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미디어의 권위자 마셜 맥루언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이다. 저자는 육체는 그대로 있지만 정신은 세계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전자 테크놀로지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이미 반세기 전부터 디지털 혁명을 예언한 맥루언의 일생을 들여다본다. 맥루언은 전자 테크놀러지가 인간의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의 패턴을 어떻게 바꾸고 재형성할 것인가를 예측하고 자세히 그려보였다. 맥루언은 ‘육체 없는 인간’‘글로벌 빌리지’‘미디어는 메시지다.’‘미디어는 인간의 확대이며 연장이고, 또한 인간을 수정하는 것이다.’‘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시각적 공간과 청각적 공간’ 등 수많은 함축적인 말로 그 시대의 예언자가 됐고,1980년 눈을 감을 때까지 디지털 혁명의 진행을 바라보며 미디어 생태환경을 이해하고 통제한 창조적인 미디어 철학자였다.1960년대 초 ‘구텐베르크 은하’‘미디어의 이해’ 등을 발표, 학계와 사상계, 미디어로부터 주목받으며 독창성을 널리 알렸다. 맥루언 당대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의 일기와 저술, 언행들을 샅샅이 살펴 그의 삶과 사상을 솔직하게 재구성한 책.1만 8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8)무(無)의 의미와 마음의 혁명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8)무(無)의 의미와 마음의 혁명

    오늘은 철학사상에서 무(無)가 어떤 뜻을 지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동양의 불교와 노장사상에서 그 무를 매우 귀하게 여기는데, 전통 서양사상의 주류에서 정반대로 그 무를 별로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 왔다. 서양의 전통사상에서 무는 제조적 기술적 사고의 출발점으로서만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지식과 기술을 쌓아서 물건을 제조해 나가는데 임의적 출발의 가정으로서 제로(zero)점을 상상한다. 이것이 서양철학이 무를 이해하는 기본적 태도였다. 실제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제조적 기술적 사고를 싫어한 베르그송마저 그런 생각을 견지했다. 무는 지식과 기술의 축적이 없는 결핍의 상태와 같다. 전통적 서양의 신학은 정신주의적이라서 기술적 제조의 사고를 멀리한 것 같지만, 기실 신의 창조론도 인간의 제조적 생산론과 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신이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이 제조적 기술을 무로부터 쌓아 나간다는 축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서양 신학은 서양 기술제조철학의 모태에 해당한다고 지적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겠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한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은 당당하게 기술철학을 공개적으로 세상에 선포한 사건에 해당한다. 기술적 무지와 경제적 빈곤의 탈피가 경제기술주의의 이념이다. 그런데 그 당당한 이념은 몇 가지의 철학적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인간과 인간의 자아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만물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과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극단적으로 자아를 위해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다는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빚는다. 인간중심주의와 이기주의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안 된다. 비록 서양철학이 인간을 이기적인 심리에서 보기보다 논리적 보편적 인간관에서 선양하려고 애썼지만, 보편적 자아는 심리적 자아의 이기심을 살짝 가리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이 이것을 잘 꿰뚫어 보았다. 경제적 제조적 사고가 필연적으로 낳는 이기심의 소유욕을 제지하기 위하여 서양사상은 또 다른 차원의 도덕적 제조적 사고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사회주의적 마르크시즘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사회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이념으로 이기주의를 척결하려는 사회적 제조론에 다름 아니다. 무를 철저히 배제한 사상이다. 무는 세상의 실천적 혁명의지를 둔화시키는 허무적 도피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사상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다 무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 오해했다. 그 동안 서양의 전통철학은 경제적이든 도덕적이든 제조적 기술의 철학을 일구어 왔었다. 제조적 기술(경제적/도덕적)의 철학은 결국 인간의식이 진리를 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에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러나 서양 전통적 철학사상의 적자인 자본주의가 경제기술적 풍요와 편리를 가져 왔으나 탐욕의 병을 낳았다. 사회주의가 그것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에 맞지 않는 당위의 법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성향은 이익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존재방식은 좋은 것을 찾지, 옳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래서 자연의 존재방식을 욕망이라고 우리가 불렀다(1·16회 글). 인간도 무의식적으로 자연이므로 자연적 성향을 거슬리는 것을 인간이 수용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도덕제조론을 인간이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익의 선이 없기 때문이다. 옳음의 선만 주장했지 좋음의 선을 보여 주지 못했다. 이익은 옳음이 아니고 좋음의 편에 서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제조론은 소유론적 탐욕의 병을 뿌린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무의식에는 본능이 좋아하는 소유론적 이익과 본성이 좋아하는 존재론적 이익이 있다고 앞에서 수차 거론되었다(1·15·16·17회 글). 소유론적 이익은 이기배타적이고, 존재론적 이익은 자리이타적이다. 존재론적 이익을 통하여 경제와 도덕을 다 생겨나게 하는 제삼의 길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본성(자성=불성=신성)의 무의식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나는 앞에서 여러 번 강조했다. 마음이 무를 익혀서 무의 마음을 활용하는 것이 제삼의 길이겠다. 미국의 동물인류학자인 홀이 그의 ‘감춰진 차원’에서 언급한 것은 여기서 매우 긴요한 자료가 된다. 무의 빈 공간이 거의 없이 빽빽하게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비정상적 변태적 성행위를 자행하고 서로 싸우면서 약한 자들을 왕따시키고, 약한 자들은 자살하거나 밤에 몰래 도망가는 이상한 짓들을 자행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죽은 동물들이 먹거리가 부족해서 그런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시체들을 해부해 보니까 영양상태가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무의 빈 공간이 부족하면, 동물들도 심리적 이상행위를 자행하고 집단생활의 붕괴조짐이 야기된다는 보고다. 무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로 하여금 심리의 평정을 유지케 하여 여유를 누리게 하는 안 보이는 구조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무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인위적인 작동은 없으나 자연적 작용은 있음)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인간의 사회생활도 동물의 군서생활처럼 여유를 느끼게 하는 무의 빈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생활이 너무 촘촘해서 서로 부딪칠 것 같은 생활분위기는 인간들의 마음을 서로 공격적으로 변화시켜 강한 소유욕으로 남을 제거시키거나 지배하려는 탐욕의 도가니로 변하게 한다. 더구나 한국처럼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나라들에 속하는 경우에 무의 생활공간이 필수적이다. 비어 있음을 생활 안에서 찾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여백의 공간을 생활세계에 창조하는 것은 한국인의 마음을 공격적 소유의 탐욕에서 존재론적인 이타적 사유를 생활 속에 배어들게 하는데 중요한 몫을 한다 하겠다. 기술의 철학이 소유론으로 미끄러지게 하지 않게끔 방지하는 길에서도 무의 공간적 활용에 못지않게 마음의 무를 익히고 닦는 무의 정신교육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공공의 교육에서 당위적 의무만 강조하는 도덕교육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무를 닮는 마음의 교육은 마음을 고요히 진정시키는 참선과 명상을 생활화해야 한다. 무의 비어 있음이 주는 고요와 평정과 너그러움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야 한다. 지금과 같은 기술과 자본의 시대에 어떻게 이것들을 적대시하는 반(反)기술과 반(反)자본의 시대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는가? 그런 철학은 또 하나의 공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할 뿐이겠다. 그러나 경제기술의 이익을 존중하되 사람들의 마음이 소유적 탐욕에 빠지지 않고, 존재론적 이익으로 남들에게 복락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정신문화를 가꾸어야 하겠다. 그렇게만 되면 경제적 행위는 바로 도덕적 행위와 다르지 않게 된다. 또 재래의 제조적 경제기술처럼 자연에 주리를 틀고 심문하여 어떤 정보를 자연으로부터 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허공이 뭇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생명의 비를 저장하여 보시하면 중생들이 제 각기의 근기에 따라 자량(資糧)을 얻어간다고 말한 7세기 신라 의상(義湘) 대사의 ‘화엄법계도’의 구절처럼 ‘일반경제’(general economy)의 실현을 위한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 일반경제는 20세기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바타이유가 남긴 사상인데, 그것은 제한적인 몇 사람들만의 이기심을 채우는 재래의 ‘제한경제’(restricted economy) 대신에 아낌없이 주는 태양의 기(氣)가 모든 생명을 살리듯이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넉넉하게 가꾸겠다는 경제기술사상의 대 전환을 가리킨다. 그것은 당위의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본성이 좋아서 하는 자발적 기호다. 남의 것을 장악하는 이기적 이익에서부터 스스로 자기가 꽃피운 열매를 남들에게 즐겁게 주는 자리적 이익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하는 마음의 혁명 이외에 무슨 희망이 인류에게 또 있을 수 있나? 마음의 혁명은 기업가가 곧 자선가가 되는 길이다. 한 사회가 다 기업가의 덕택으로 가난의 고통을 벗어나 모두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되니 여유가 생겨 정신문화도 상승하고 가난한 나라들을 도와주고 그래서 세계가 한국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한국인의 높은 품격과 함께 한국상품들을 선호하게 되면, 결국 부자가 되는 길은 탐욕에서가 아니라, 보시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기업가가 자선가가 되는 길은 오직 마음의 활용에 달렸다(11회 글). 불가의 말에 돈은 관세음보살이기도 하고 마군이기도 하다고 한다. 마음의 활용에 따라 갈라진다는 것이겠다. 기업가는 돈버는 재주를 선천적으로 타고나 그 길을 간 사람이다. 돈을 모았다는 것은 자리의 열매다. 그 열매를 이타적으로 쓰면, 그것이 자선가의 길이 아닌가? 본능의 탐욕을 본성의 원력으로 바꾸면 그렇게 된다. 그러기 위하여 마음이 무를 닮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빈 허공은 모든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그대로 다 포괄하면서 존재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자연의 필연법이다. 이 법을 어기면 재앙을 받는다. 흔히 천벌이라 부른다. 그래서 중국의 3대 조사인 6세기 승찬(僧璨)대사가 ‘신심명’에서 “유(有)가 곧 무(無)요, 무가 곧 유”라고 말했다. 유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인색하지 않는 무의 것이고, 무한히 관대한 무는 유를 통해 안 보이는 자신을 보도록 암시한다. 그러나 무는 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간다. 무로부터 와서 무로 되돌아간다. 유는 무가 잠시 자신을 만물의 형상으로 위탁한 것에 해당하겠다. 부자들이 돈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지 않고, 무가 ‘일반경제’를 시행하도록 빌려준 것이라고 여기는 데서 마음의 혁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혁명은 강제적 당위가 아니라, 마음의 본성이 원하는 자발적 기호이어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기업은 만인의 도움을 받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하나님을 의심하면 신앙이 싹튼다

    하느님에 대한 존재증명은 불가능하다. 온 세상을 정밀하게 조종하는 ‘시계공’으로서의 하느님은 증명할 수 없다. 물론 신도들에게는 경칠 소리다. 하느님이 어디 사람의 짧은 머리로 이해될 수나 있는 분이던가.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아무도 모를 뿐 아니라 짐작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죄다 사기꾼이 된다. 그런데 이걸 설마 ‘신앙’이라 부를 텐가. 이보다 더한 하느님 모독은 없다. 영국의 종교철학자 돈 큐피트가 쓴 ‘떠나보낸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저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온전한 뜻이라면, 그건 아무 의미없는 세상이라 본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선과 악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충분히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고 권한다. 실제 철학적 논리학적 논증 문제는 심도깊게 다룬다. 그 뒤 하느님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게 아니라 ‘영성’(christianity)을 가지게 된 것이라 부른다.‘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짙다. 교회가 저지르는 “지성의 희생, 자의식의 상실, 유아기적 의존성, 영혼을 타락시키는 자기기만”은 믿으라고만 말하는 보수주의 신앙이 초래하는 결과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영국에서도 1980년 출간 이래 20여년간 금서취급을 받았다. 협성대 이세형 교수가 번역했다.1만 2000원.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송두율칼럼] 돈의 철학

    [송두율칼럼] 돈의 철학

    37년만에 귀국했다가 뜻하지 않게 서울구치소에서 맞았던 설날 아침, 방안 스피커를 통해서 “부자 되세요.”,“돈 많이 버세요.”라고 하는 여성 아나운서의 명랑한 목소리의 새해인사가 흘러나왔다. 새해 덕담으로 그런 내용의 인사가 상당히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재물 불리기’나 ‘돈벌 욕심’ 정도로 이야기되었더라면 곧 알아들을 수 있었을 단어인 ‘재테크’니 ‘부자마인드’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인류가 돈을 교환과 지불, 그리고 가치저장수단으로 사용한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에 대해서처럼 많은 이야기가 있는 대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말의 돈의 어원이 “돌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 독일에도 “돈은 물보다 더 빨리 흐르고 공기보다 더 가볍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니 흐름이 돈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결국 돈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이 상품이 되며 그 돈을 사용하는 인간도 그 흐름에서 영영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인간 생활에 필요해서 생긴 돈이 마침내 인간을 지배하게 된 자기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해보려는 종교의 가르침도 있었고, 정치적 이론과 실천도 있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성경 속의 가르침이나, 착취와 비인간화의 상징인 화폐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프롤레타리아 현물경제’를 도입했던 러시아의 ‘전시공산주의(1918∼21년)’의 실험도 각각 그러한 예에 속한다. “나는 어렸을 적에 돈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이제 늙어서 알게 되었다.”라고 술회한 오스카 와일드(O Wilde)의 솔직한 고백은 바로 돈이 가치를 잃어버릴 때만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통념을 비판하고 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돈은 애초부터 돈으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인간은 그가 죽는다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생물체이면서 동시에 유산(遺産)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이후에도 돈을 계속 관장(管掌)하려는 비밀스러운 상상력을 가진 존재다.”라는 볼테르의 지적처럼 삶에 있어서 절대적 가치로 전제된 돈은 죽음까지도 극복하려는 엄청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돈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모든 가치의 가능성을 모든 가능성의 가치”로 만드는 절대적 수단에 있다고 파악한 독일의 철학자 지멜(G Simmel·1858∼1918)은 그의 방대한 저서 ‘돈의 철학’ 속에서 우리는 삶의 수단이어야 할 돈이 삶의 목적이 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나, 이 수단을 우리 삶의 심미적(審美的)인 질을 적극적으로 고양시키는 전제로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돈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 없이는 많은 것이 불가능하다. 단 돈은 어디까지나 고상한 인격과 품위를 지키는 수단이 되어야지 천박스러운 삶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주장하면서, 돈이 만들어내는 평준화 속에서 개인의 흔들리지 않는 높은 인격의 질(質)을 변호하고 있다. “우리 모두 부자마인드를 키워 부자 되어봐요.”라는 말이 ‘돈의 철학’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리는 현실 속에서 ‘돈의 철학’이 ‘삶의 철학’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부정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돈을 벌고, 쌓아놓은 돈을 죽음의 문턱을 뒤로하고서도 계속 관리하고 싶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완전히 억제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원 사이에 ‘돈의 철학’과 ‘삶의 철학’을 최대한 서로 근접시키는 사회적 약속은 가능하다. 그러한 가능성을 그저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집단적 보복심리에 의거한 발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이른바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를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단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돈의 철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셰익스피어, 여왕의 사생아?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사생아라는 충격적인 주장이 나왔다. 25일 런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미국 극작가 폴 스트라이츠가 저서 ‘옥스퍼드-엘리자베스 1세의 아들’이라는 책에서 이같은 주장을 내놓았다고 일간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이 21일 보도했다. 스트라이츠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 영국과 결혼한 처녀 여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엘리자베스 1세가 사실은 사생아를 몇명 낳았고,1548년 비밀리에 낳은 첫번째 사생아가 바로 셰익스피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아기를 낳은 후 귀족인 16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비어 부부에게 맡겼으며, 이 아기는 17대 옥스퍼드 백작 에드워드 드 비어라는 이름으로 양육됐다는 것이다. 이런 인연 탓에 그는 14세부터 궁정에서 자랐으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셰익스피어도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햄릿과 소네트에 이런 내용들을 반영했다고 스트라이츠는 말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 문학 천재인 셰익스피어가 시골뜨기 워웍셔 출신 청년이었을 리 없다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위, 옥스퍼드 백작 등이 진짜 셰익스피어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이론을 지지하던 스트라이츠는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였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10대의 엘리자베스가 야심만만한 궁정 신하 토머스 세이모어 경과 로맨스를 가졌으며, 임신과 출산 때문에 한동안 기록에서 사라졌다고 스트라이츠는 추정했다. 현재 전기 작가들은 세이모어 경이 옷을 벗은 채 엘리자베스의 방을 찾아 음란한 행동을 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인 결실이 있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엘리자베스가 몸이 아파 계모 캐더린의 집에 머물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1548년 후에도 엘리자베스를 검진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고 스트라이츠는 반박했다. 그는 “처녀 여왕은 튜더 왕조의 선전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6) 마음과 무의식의 중요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6) 마음과 무의식의 중요성

    이 연재를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강조되어 나왔다(1·12회 글). 이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지적인 분별력으로 생존을 추구하면서도 도덕적 의지로 좋은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일컫는다. 인간이 인간에 거는 최고의 신뢰처가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의식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이성을 지닌 의식의 존재라고 여겨 이성과 의식의 자각만 강조한 가치론과 당위적 도덕론을 우리는 이제 그만 사용해야겠다. 다 별로 효용도 없는 그럴싸한 명분만 가지고 헛농사를 짓는 셈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무의식이 정신이상자의 영역에 속한다는 무식한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실질적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요인임을 알지 못하고, 우리는 사회생활의 문제점을 의식의 이성적 판단에 맡겨 해결하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고 욕망의 존재다. 의식의 이성은 욕망의 무의식을 지우지 못한다. 의식은 빙산처럼 6분의1정도만 표면에 나와 있고, 나머지 6분의5는 무의식으로 바닷물 속에 은닉되어 있다는 항간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의식과 마음을 구별해야 한다. 의식은 자의식과 동의어로 쓰이고, 이성적 판단을 가능케 해주는 영역이다. 이성적 판단은 진리와 허위를 나누고, 선과 악을 확연히 분별하고, 경제적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이성은 의식의 선명한 명증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식은 물질적 자연처럼 자기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바보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각을 통하여 가치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자유의 진원지라고 여긴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마음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세상 만물의 존재방식을 욕망(conatus)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불교와 노장사상에서도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욕망이라고 읽었다. 욕망은 삼라만상이 다 서로 타자와의 상관성을 필연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마음을 욕망이라고 부르는데,‘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의 화엄사상은 삼라만상의 일체가 다 마음의 욕망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겠다. 그러므로 마음은 의식과 달리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심물상응(心物相應·마음과 물질이 서로 상응함)으로 생각한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다 욕망이고 마음이다. 단지 인간의 마음이 자연의 마음과 다른 점은 인간은 스스로가 욕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 유식(唯識·오직 알고 있음)이라 한다. 유식으로서의 인간 마음은 물론 의식과 오감(五感)의 지각을 포함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표피적 마음이고 마음의 핵심은 의식보다 훨씬 깊은 심층적 무의식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의식의 마음에서 자연과 인간은 서로 상응한다. 그런데 자연의 욕망은 두 가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본능의 소유적 욕망과 자연성(본성=불성=신성)의 존재론적 욕망이 그것이다. 전자는 먹이사슬의 연쇄적 관계를 말하고, 후자는 삼라만상이 다 타자로부터 존재하기에 필요한 것을 받고 자신도 타자에게 존재하기에 필요한 것을 주는 그런 거래관계를 말한다. 자연성은 심지어 죽음마저도 타자에게 주는 증여로 여겨질 만큼 인간에 의한 사고사를 제외하고 자연사한 주검이 자연 속에 여기저기 널려 있지 않게끔 한다. 자연의 마음이 인간에게 전이된 것을 우리는 무의식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자연의 욕망을 인간에게 옮겨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무의식에도 본능적 욕망과 본성적(자연성적=불성적=신성적) 욕망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무의식이 곧 자연의 욕망이지만, 하나의 큰 차이점이 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다. 인간의 언어활동은 곧 인간의 사회생활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자연의 본능은 인간에게 지능으로 전이되고, 지능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생활이 언어활동으로 표현된다. 자연적 본능은 직접적인 먹이사냥으로 생존을 유지하지만, 사회적 지능은 간접적인 우회의 길(지식/권력/돈/명예)을 소유하여 사회적인 인정을 타인들로부터 받으려는 욕망을 추구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에서 직접 타인을 먹이로 사냥할 수 없으므로, 간접적으로 타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들이 많이 추구하는 욕망을 쟁취하려고 애쓴다. 지능의 소유욕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언어생활을 통하여 욕망하는 소유욕의 밀도에 비례하여 일어난다. 지능의 소유욕은 그가 유아기부터 부모와 타인들로부터 배운 언어활동의 막에 의하여 형성된다. 유아기의 인간은 언어활동을 타인들로부터 배우므로 타인들의 욕망이 그 언어활동에 용해되어 있다. 인간의 소유욕은 타인들이 심어준 것인데, 그것이 자기의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유아기의 무의식은 타인들의 언어활동이 형성한 나무나 물결의 결과 같은 셈이다. 이것이 프로이트 계열의 정신분석학자로서 20세기 프랑스 구조주의의 거장인 라캉이 말한 ‘언어활동의 벽’을 형성한다. 따라서 내가 언어활동을 통하여 자아라는 주체를 형성하게 된 이후에 일어난 타인의 말은 나의 무의식에 새겨진 ‘언어활동의 벽’을 거의 뚫지 못한다. 내가 자아라고 부르는 주체는 사실상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소유욕의 무의식적 함정인데, 나는 언어활동에 가입함으로써 사회생활의 경쟁에서 그 소유욕의 덫에 무의식적으로 걸려든 것과 같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나는 자존심의 덩어리로 형성되면서,20세기 러시아의 언어학자 트루베츠코이의 말처럼 ‘언어의 체’를 이루고 있는 자존심이 싫어하는 말은 그 체에 걸려 나의 무의식의 욕망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인간의 소유욕적 자존심의 무의식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이상적 대화의 통로는 이성적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자존심의 벽이나 무의식적 언어의 체를 도외시하는 의식의 이상주의적 명분에 그칠 뿐이다. 한국사회에 만연된 상생적 정치론도 주자학적 명분주의의 잔재이지, 한국문화의 무의식적 소유욕의 업장이 형성한 결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소박한 감상주의의 산물이겠다. 왜 한국에서 자식에게 기업과 권력을 세습하려는(북한) 무의식이 그렇게 강렬한가? 왜 한국인은 대개 어떤 일을 미리 대비하는 지능적 생각이 부족하고, 일에 부딪치면 감정적 흥분으로 들끓는가? 한국인은 왜 상업적 계산전략에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뒤떨어지는가? 왜 한국인은 국가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생존 전략을 강구하기 위하여 일생을 허비하는가? 왜 대개 한국인은 속물주의적 과시욕이 강하며, 일단 성공하면 전문인으로 계속 노력 성취하지 못하고 타이틀만 들고 사회적 저명인사 행세하기에 바쁜가? 사회적 소유의 무의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유사해 보인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소유욕은 사회적 역사적 공동업의 상자에 한국인의 마음이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한국인의 공동업의 테두리는 한국인의 공통적 언어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겠다. 한국인의 맵고 자극적 언어활용과 욕설의 난무(한국영화에서 흉칙한 욕설이 너무 심하다), 얄팍한 선악심리와 흑백심리에 의하여 까마귀와 백로로 세상을 이등분하기, 남북한 공히 종교적 정치적 열광심리로 미친 듯이 도취하는 전투심리 등등은 다 한국인의 무의식적 공통 업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무의식적 업의 속박은 이상적 의식의 도덕이나 이성의 명증성과 의식의 자유를 구가하는 행동철학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자존심과 언어활동의 벽, 대화시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안 듣기 등은 본능을 대신한 지능의 사회생활에서 지능이 타인들을 이기기 위한 욕망이 나타낸 결과겠다.20세기 스위스의 심리학자 융이 이런 소유욕의 아상(我相)을 벗어나게 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무의식의 마음에 본능의 욕망 이외에 본성의 욕망이 있음을 밝혔다. 이 본성의 욕망은 우리가 앞에서 본 자연성의 욕망과 같다. 이 길은 불교의 불성 밝히기와 거의 유사하다. 본능(지능)의 소유욕은 사회생활의 언어활동을 통하여 자존심의 덩어리를 지키는 데 신경을 쓰지만, 융이 말한 본성의 무의식적 마음은 완전성(perfection)이 아니고 온전성(integrity)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가리킨다. 완전성은 최고를 향하여 쌓아 나가는 의미를 지니지만, 온전성은 최적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마음의 무의식적 자세를 말한다. 그 자세를 융은 ‘대립자의 무의식적 흐름’(enantiodromy)이라고 불렀다. 이 융의 사유와 유사한 노자의 사상을 우리가 이미 앞에서 읽었다(3·4회의 글).‘대립자의 무의식적 흐름’은 세상만사를 자연에서처럼 ‘선/비선(善/非善)’,‘약/비약(藥/非藥)’‘진리/비진리’처럼 서로 상관적 차이로서 읽는 방법을 말한다. 예컨대 선과 악은 서로 이원론적인 적대의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은 악을 전멸시키고 완전히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선과 비선은 그런 적대의식의 관계가 아니고, 비선은 선의 다른 면, 선도 비선의 다른 얼굴로 비친다. 이것은 투쟁적 이원성을 보다 완화된 이중성으로 읽음으로써 극단적 열광의식과 배타적 자의식을 지울 수 있는 길이다. 이미 원효도 이런 사유를 개진하였다.‘유/무’를 더 화쟁적으로 읽기 위하여 그는 ‘유/비유(무)’,‘무/비무(유)’의 이중성으로 보기를 종용했다(14회 글). 무의식의 마음이 이런 이중성으로 짜여져 있다고 여기는 본성의 사유는 자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박멸해야 할 적을 만드는 지능적 소유욕을 잠재울 수 있다. 본능의 소유욕을 지우기 위하여 의식과 이성을 거창하게 장식하지 말고, 마음의 무의식적 본성을 조용히 살리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공통업장을 도외시하고 너무 공허한 이상론만을 주장한다. 속물주의처럼 이것도 한국병 중의 하나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자유주의자와 식인종/홍윤기외 옮김

    자유주의 바람이 거세다. 뉴라이트 진영에서 자유주의를 계속 언급한 덕분이다. 하이에크식 시장지상주의적 자유주의에서부터 ‘공동체적 자유주의’(박세일 서울대 교수),‘상생적 자유주의’(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아직도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자와 식인종’(홍윤기 외 옮김·개마고원 펴냄)을 들춰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영국에서 태어나 뒤르켐·푸코 등 프랑스 사회학을 공부한 뒤 미국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저자 스티븐 룩스는 그 이력만큼이나 독특한 방식으로 자유주의를 논한다. 우리 현실과 관련해서는 후반부의 글을 먼저 보는 게 나을 듯. 자유·시장지상주의(예를 들어 전경련)로부터 환영받는 하이에크의 사회정의론에 대해 룩스 교수는 “학계 내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면서 “대체로 정치철학자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하이에크의 입장을 도전이 아니라 상도를 벗어난 정치적 입지점의 표현으로 봤다.”고 비판한다.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도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가망없는 조건 등에서 어떻게 연대의 동기·행동을 산출할 것인가라는, 오래되고 일반적인 자유주의의 딜레마에 답하기 위한 또 한번의 노력”이라 평가한다. 무엇보다 공동체주의의 가장 큰 결점은 “그 ‘공동체’가 어디 있는지 건드리지 않으며, 또 자원과 의무를 두고 경쟁하는 공동체들간의 갈등은 회피한다.”고 지적한다. 책 전반부는 자유주의 일반론을 다루고 있다. 룩스 교수의 결론은 하나다. 개인의 권리로써 자유주의는 서구문명의 산물이지만, 합리적 토론을 추구하며 동시에 그 결과의 한계까지도 인정하는 자유주의적 이성은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룩스 교수는 이 자유주의적 이성이 정말 보편적인가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선다. 그 자신이 한계를 인정하는 자유주의적 이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4) 원효의 화쟁사상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4) 원효의 화쟁사상

    7세기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화쟁(和諍)사상이겠다.12세기에 들어와서 고려 숙종은 원효대사를 기려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우도록 왕명을 내렸다고 한다. 원효의 사상을 이미 고려시대부터 화쟁으로 대변하였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화쟁사상은 많은 이들이 말하는 만큼 그 사상의 진수가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원효의 사유에는 대중적으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기 때문이리라. 원효의 화쟁은 불법을 설명하는 기본 사유의 방식이지만, 이 사유가 우주의 필연적 법칙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에 다름 아니므로, 결국 화쟁적 사유는 우주의 필연적 법칙을 말하는 방식을 뜻한다.‘금강경’(17장)에 불법이 우주의 사실적 법칙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단적으로 우주의 필연성은 공(空)과 색(色)의 두 가지 계기의 실이 서로 새끼꼬기나 천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화쟁사상의 기본이다. 불교를 상징하는 卍(만)자가 바로 저 새끼꼬기나 천짜기의 법칙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공은 눈에 안 보이는 진여의 진리요, 색은 눈에 보이는 세속의 진리다. 안 보이는 진리와 보이는 진리가 물론 서로 다르지만 또한 연계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색의 존재는 눈에 안 보이는 허공의 바탕에 의지하여 생긴 무늬에 불과하다. 만약에 허공이라는 배경이 없고 모든 공간이 다 색의 물질들로 빈틈없이 꽉 차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색의 물질들도 구분할 수 없으리라. 허공이 바탕이요, 물질은 무늬에 비유되므로 허공은 물질을 물질로 존재하게끔 해주는 근거이고, 물질은 그 허공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허공의 공과 물질의 색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의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허공과 같은 공을 어떻게 이해할까? 허공은 생사(生死)와 유무(有無)의 모든 변화무쌍한 순환을 다 초탈하고 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죽게 되므로 오직 영원한 것은 불생불멸한 공밖에 없다. 바다를 공에 비유한다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파도의 부침은 곧 생멸의 현상과 같다. 따라서 공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이중부정과 같다. 불생불멸은 또 비유비무(非有非無=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의 이중부정과 같다고 하겠다.‘금강삼매경론’에서 원효는 이 이중부정의 공 세계를 홀로 해맑은 초탈의 의미를 지닌 ‘독정(獨淨)’이라고 명명했다. 현상적 존재의 생멸과 유무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허공이나 바다가 만물의 부침에 의하여 조금도 영향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만물의 부침을 가능케 해주는 근거다. 그래서 공은 불교에서 허무의 상징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무한기(無限氣)의 상징이 된다. 공이 이중부정이라면, 색은 어떠한가? 색은 물질인데, 그 물질은 독존하지 않고 연기(緣起)의 법으로 존재한다. 연기의 법은 서로 다른 만물과의 상호 얽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물과 햇볕과 땅과 바람과의 상호 연관성에 의거해서 존재한다. 이 연관성의 관계가 다르면, 다른 나무가 생긴다. 이것을 연생(緣生)이라 부른다. 이 연생의 관계를 최소한도로 생략하면, 이중긍정이 된다. 나무는 물과 햇볕, 또는 땅의 흙과 하늘의 바람과 각각 이중긍정의 존재양식을 얽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무는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인 물과 햇볕과 흙과 바람의 흔적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색의 물질은 고착된 하나의 독립개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인연으로 다양하게 얽힌 타자들과의 관련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색의 물질을 차이의 상관성으로 읽는다. 나무는 물과 불(햇볕)과 흙과 바람이라는 차이의 상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이 연기법의 존재방식을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에서 차연(差延=difference)이라 부른다. 차연은 차이(差-異)와 연기(延-期) 또는 연장(延-長)의 두 뜻을 합쳐서 줄인 말인데, 예컨대 나무는 물과 다르면서(차이) 물의 힘이 거기에 시간적으로 약간 연기되어 작용하거나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상징한다. 철학적 차연과 불교적 연기는 같은 뜻이다. 연기법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존재방식이 서로 다양하게 차이 속에서 연계돼 있음을 가리킨다. 차이 속의 연계와 같은 존재방식은 허공처럼, 바다처럼 넓고 깊어야 가능하다. 한국의 식자들은 흔히 다양성의 문화를 당위로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성의 문화가 연기법처럼 가능하기 위하여 마음과 문화가 깊어져야 한다. 깊지 않은 마음과 문화는 결코 다양한 존재방식을 사실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화쟁사상도 깊어진 사유에서 가능하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이중긍정의 연기법을 담연(湛然=깊고 넉넉함)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다 아는 얄팍한 당위만 역설하지 말고, 깊고 넉넉한 문화를 일구기 위해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중부정인 공의 해탈이나 이중긍정인 색의 존재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상관적으로 얽혀 있어서 새끼꼬기나 천짜기의 상관성을 맺고 있다. 공이 없으면 색의 존재도 성립되지 않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또 색이 없다면 공도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구름과 새들의 비상과 해와 달의 색으로 인하여 우리가 허공을 문득 지각하기 때문이다. 만물도 서로 다른 것과의 차연적(연기적) 관계로서 존재한다. 공사상은 2∼3세기경 인도의 나가르주나(한자명=龍樹)의 중관사상으로 대변되고, 색사상은 역시 3∼4세기경 인도의 마이트레야(한자명=彌勒)의 유식사상에서 개화된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불교적 쟁론을 통합시킨 사유라고 보겠다. 그러나 원효의 화쟁사상은 그 이상의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의 화쟁사상은 이 우주의 법이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닌 이중성의 사실로 존재함을 인식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중성은 모든 사실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일원적으로 합일되는 것도 아니고 이원적으로 갈라지는 것도 아닌 중도의 법으로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고, 원효는 이를 또한 융이이불일(融二而不一=둘을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 않음)이라 불렀다. 공과 색이 이미 그런 이중관계로 엮어져 있음을 우리가 앞에서 설명했다. 색의 존재방식도 역시 이중긍정의 방식인데, 그것은 나무의 경우처럼 물과 불(햇볕)이 소 닭 쳐다보듯이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변증법적 투쟁에 의하여 하나로 합일하는 것도 아니다. 나무에서 물과 불이 차이를 유지하면서 서로 상관하고 있다. 화쟁사상은 이런 이중성의 존재방식을 말하기에 변증법적 통일을 부정한다. 차이가 모순투쟁을 초래하지 않고, 차연과 같은 상관적 관계를 부른다. 이것이 화쟁사상이다. 이 화쟁사상은 노자의 도(道)와 유사하다. 선과 악이 다르지만 동시에 동거하고 있고, 약이 독과 다르지만 역시 동거하고 있다(3·4회 글). 노자는 명암의 이중적 동거양식을 밝음(明)에 염하듯(襲) 옷을 입히는 뜻으로서 습명(襲明)이라 비유했다(4회 글). 이런 이중성을 장자는 보광(光=빛을 보자기로 덮음)이라 불렀다. 이것은 다 흑백의 선명성 논리와 택일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말 것을 종용하는 사유다. 이 점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은 노장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며,20세기 서양의 해체주의적 철학자인 독일의 하이데거와 프랑스의 데리다의 차연적 세상읽기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선명성을 좋아하는 택일의 논리는 이 세상의 필연적 사실의 법과 맞지 않고, 자아가 타자를 박살내고 자아의 동일성만이 승리하기를 노리는 투사의 심리와 다르지 않다. 투사는 자기동일성의 승리를 쟁취하는 투쟁의 도사이나, 세상을 경영하는 지혜와 내용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경영은 배척의 투쟁에서가 아니라, 화쟁과 같은 다양성의 포괄과 그것을 포용하는 깊이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화쟁사상은 투쟁사상이 아니다. 화쟁의 ‘화(和)’자는 불교의 卍(만)자처럼 동일성과 타자성이 서로 새끼꼬기하듯 만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그런 이치를 가리킨다. 거기에 이미 허공의 빈 곳이 사이에 끼어서 둘을 갈라놓고 또 하나로 합치게 하는 배경을 이룬다. 이것은 또 마음이 허공처럼 허심하여 소유론적 집착을 놓지 않으면, 화쟁의 사실을 결코 실천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마음이 이미 자기고집에 편파적으로 집착되어 있으면, 화쟁은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투쟁의 심리로 마음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약간 어렵겠으나 원효의 화쟁사상을 말하는 한 구절을 ‘대승기신론소’에서 인용한다.“동일함(一)은 동일하지 않음(非一)에 상응하므로 다름에 상관적이어서 다름과 같이 동거하며, 다름(異)은 다르지 않음(非異)에 상응하므로 동일함에 상관적이어서 동일함과 동거한다.” 오른쪽은 왼쪽과 다르지만 왼쪽이 없으면 자기도 존립하지 못하고, 반대로 왼쪽도 오른쪽과 다르지만 오른쪽이 없으면 자기도 성립하지 못한다. 화쟁사상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홀로 생기는 법이 없기에 반드시 어떤 일의 작용과 상대방의 반작용을 동시에 고려함이다. 이것이 이중긍정의 태도다. 이것과 저것은 서로 작용과 반작용의 상관관계를 지니므로 오로지 나는 100% 정당하고, 상대방은 100% 그르다는 생각으로서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노장이 말하는 습명과 보광의 중도적 태도가 아니다. 중도는 어중간한 기회주의적 눈치보기나 단물만을 좇는 속물적 출세주의를 더구나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리사욕의 대명사다. 중도는 세상의 필연적 존재방식이 다 이중성의 공존으로 짜여져 있기에 단정적인 막말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핀다. 우리는 세상일에 대하여 너무 흑백논리와 선악심리로 막말을 하고 단죄한다. 그런 풍토에선 같이 참회하고, 같이 손에 손잡고 강강수월래를 부르기가 어려워진다. 빨리 끓고 쉽게 식는 사회는 사유가 얄팍하다. 화쟁은 오직 사회가 깊어지기를 바라는 곳에서 자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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