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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박의 DMZ­북 전방부대의 엇갈린 행태

    ◎북한군 지휘체계 “이변징후”/최전방 일부 초병 「경무」 완장 계속 착용/부대따라 다른 행동… “지도부 균열” 관측 북한군의 지휘체계에 균열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지난 4일 하오 5시 관영 중앙방송을 통해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에서의 유지관리 임무」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1시간 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관할하는 북한군은 「선언」에 따라 정전협정에 의무화된 「경무」라는 완장을 떼내고 근무를 서는 것이 목격됐다.정전협정 파기와 관련,북한군이 행동에 돌입했음을 뜻하는 첫 표시였다.이후 5일부터 사흘동안 하루 1차례씩 북한은 JSA에 중무장한 병력을 투입,무력시위를 했다.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각본에 따라 군 조직이 움직이는 듯했으나 「이변」이 생겼다. 7일 낮 1시쯤 서부전선에서는 북한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하는 경비병 12명이 초소에서 나와 우리측을 향해 『군사분계선을 넘어오지 말라』고 외쳤다.이들 사병 가운데 9명은 정전협정에 규정된 대로 「경무」라고 씌어진 완장을 착용한 것으로 목격됐다.내부통제가 어떤 나라보다도 철저한 북한에서,특히 최전방 초소의 경비병이 북한군의 지침과 다른 행동을 한 것은 북한 지도부에 문제가 있다는 추정을 제기하게 했다.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이같은 사실에 대해 『북한군 전체에 정전협정 파기선언이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면서 『북한군이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유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의 지도부에도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북한은 최근 유엔에 식량지원 재개를 요청했다.하지만 이는,군부의 반대로 외부의 식량지원을 더이상 받지 않겠다고 한 종전의 방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이 김정일과 군부의 갈등인지 또는 군부 내부의 갈등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북한 내부의 균열이 상당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증거로 보기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황성기 기자〉 ◎한·미 4자회동 무러 논의할까/북의 판문점 무력시위 의도 분석/평양측 도발 공동제재방안 논의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에 대비하는 한미 양국의 군사·외교적 대응태세가 긴밀하게이뤄지고 있다.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이양호 국방부장관,제임스 레이니 주한미국대사,게리 럭 주한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은 10일 아침 7시30분 한남동의 외무장관 공관에서 조찬회동을 갖는다.공장관이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이나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을 만나는 자리는 있었지만,이같이 양국의 외교·군사분야의 고위당국자가 4자회동을 갖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최근의 판문점 사태가 한미 양국의 외교·군사적인 면에서 복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날 회동에서는 우선 북한이 지난 4일 이후 끊임없이 비무장지대와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석하게 된다.이를 토대로 참석자들은 한미간의 공동대응책을 논의하게 된다.양국의 고위당국자들은 북한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않고,날마다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미북간의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의도는 명확히 알고있기 때문에,그에 대한 대응책의 선택은 우리측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이날 회동에서는 단순히 의례적인 의견 교환이 아니라,북한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철퇴를 내리는 양국의 공동대응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도운 기자〉
  • 오늘 독립신문 창간100돌·40회 신문의 날…한국신문현주소 점검

    ◎한국 신문 100주년·등록신문사 113곳… 발행부수 세계 8위/항일·광복·민주주의 정착·세계화의 기수로/조석간제 폐지… 언론통폐합 아픔의 역사도/서울신문 등 인터넷 정보서비스시대 진입 7일은 제40회 신문의 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 1백주년을 맞는 날이기도 하다.한국신문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뜻깊은 날인 것이다. 이날을 기념해 학계와 언론계는 한국 신문의 역사,회고와 전망,앞으로의 위상에 관련한 학술세미나를 여는 것을 비롯해 독립신문 완본 영인본 발간,기념전시회등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프레스센터 1층 서울갤러리에서는 「서재필과 독립신문」 특별전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또 신문윤리강령개정위원회가 35년만에 개정한 「신문윤리강령」과 「신문윤리 실천요강」을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등 3개단체가 승인해 오는 8일 신문의 날 기념식에서 선포한다. 그러면 지난 1백년간 우리 신문은 어떻게 발전해 왔고 오늘의 신문위상은 어떠한가. 한국최초의 신문은 독립신문보다 13년이나 앞서 1883년 10월 창간된 한성순보이다.관보의 성격이 짙었던 한성순보가 근대적 신문성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반면 개화파에 의해 태어난 독립신문은 민중계몽과 사회발전의 기수로 치열한 활동을 벌여나갔다.서재필,윤치호등 창간 주요인사들이 미국유학 당시 현지의 저널리즘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독립신문은 개화의식이 급속히 확산되던 당시 백성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1899년 12월,창간 3년8개월만에 폐간된 독립신문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신문의 운영과 제작방향에서 본보기의 역할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언론학회가 지난 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독립신문과 한·중·일 근대신문의 생성」이란 주제로 마련한 세미나는 독립신문의 이같은 성격을 적절히 해부해내 관심을 모았다.이날 경희대 이광재교수는 『독립신문은 사회질서의 모순과 부정·부패의 폭로,전근대적 기득권자들과 세계 열강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비판,산업개발과 민주주의에 대한 계몽·교육등 19세기후반 미국 언론계의 사조였던 뉴저널리즘의 특성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LG상남언론재단이 독립신문 창간 1백주년을 맞아 최근 펴낸 「독립신문 영인본」은 당시 독립신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자료다.서울대와 연세대가 소장하고 있는 「독립신문」원본을 조사해 빠진 것을 보충하고 보존상태가 좋은 것을 골라 발간 당시의 원본과 같은 크기로 제작한 이 영인본은 매호의 발행날짜와 면수를 표시했고 영문판 호외뿐만 아니라 본지에 삽입해 배포한 전단광고까지 수록했다. 독립신문이후 한국 신문은 양적인 팽창과 함께 숱한 질곡의 역사를 걸어왔다.일제치하에선 친일의 논조도 보였지만 조국광복의 기수 노릇을 맡았었다.해방후엔 좌우익의 대립 정국속에 신문도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시달렸고 4·19이후 잠시 자유를 누리다가 5·16으로 다시 험로를 걸었다. 군사정부는 언론정책 25개항을 발표,조석간제를 폐지하는등 언론통제를 시작했다.이후 한국신문은 공화당과 유신독재시절을 지나면서 부침을 거듭하다가 1980년 5월 언론통폐합 조치라는 철퇴를 맞아야만 했다.같은해 8월 언론인이 대량해직됐고 11월에는 많은 신문과 방송이 통폐합됐다. 그러나 88년 한겨레신문 국민일보 세계일보등 신생지가 잇따라 창간되면서 한국신문은 양적인 팽창시대를 맞는다.현재 공보처에 등록된 신문만 1백13개.이가운데 종합지가 중앙의 15개,지방 63개등 78개에 달하고 특수일간지도 32개,외국어일간지도 3개나 된다.발행부수는 세계 8위수준인 총 1천6백만부로 하루 종이 소비량은 98만톤에 이르고 있다. 원고지에 써서 납활자로 제작하던 신문은 컴퓨터 제작시스템(CTS)으로 바뀌어 편집국에 종이가 필요없게 되고 활자대신 컴퓨터 입력시대가 열렸다.전국동시인쇄체제와 인터넷을 이용한 기사정보 서비스등도 이루어지고 있다.그러나 신문의 질보다는 양에 치중한 무한경쟁 체제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관련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김성호 기자〉 □한국신문연표 △1883.10.31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창간 △1896. 4. 7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 △1898. 3. 2 경성신문 창간 △1898. 4. 9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 창간 △1899.12. 4 독립신문 폐간 △1904. 7.18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창간 △1907. 7.24 광무신문지법 공포 △1920. 3. 5 조선일보 창간 △1920. 4. 1 동아일보 창간 △1940.8.10∼11 조선·동아일보 폐간호 발행 △1945.11.22 서울신문 창간 △1946.10. 6 경향신문 창간 △1954. 6. 9 한국일보 창간 △1957. 4. 7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신문의날 제정 △1961. 2.11 IPI한국위원회 발족 △1961. 6.28 조석간제 폐지 △1961.10.13 신문발행인협회 창립 △1964. 8.17 한국기자협회 창립 △1964. 9.22 중앙일보 창간 △1980. 5.17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언론통폐합 △1980. 8. 2 언론인 대량해직 △1980.11.14 신문협회·방송협회 언론통폐합 결의 △1980.12.26 언론기본법 국회통과 △1981. 6.22 한국언론연구원 창립 △1988. 5.15 한겨레신문 창간 △1988.11.26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창립 △1988.12.10 국민일보 창간 △1989. 2. 1 세계일보 창간 △1991.11. 1 문화일보 창간 △1995. 5.14 제44차 IPI총회 서울서 개최
  • 공천 헌금·안정론 등 쟁점별 공방 “후끈”

    ◎서대문갑­“안정 의석”­“현정부 중간 평가” 열띤 공방/서울 종로­」경제 바로세우기」­「장씨사건 성토」 맞서/서울 용산­“내가 지역발전 적임자” 공약경쟁 불꽃 총선일을 11일 앞둔 일요일인 31일 전국에서 1백30회의 합동연설회가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면서 선거전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전날에 이어 두번 째로 열린 이날 연설회에서 후보자들은 공천헌금·안정론 장학노사건 등 쟁점 별로 공방을 벌였다. ○어두워도 청중 열기 ▷서울 종로◁ 대신중고등학교에서 열린 합동연설회는 「정치 1번지」답게 3천여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일대를 교통체증으로 몰아넣는 등 선거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모습.특히 정당후보들의 연설순번이 끝부분에 집중돼 어둑어둑할 무렵까지 청중들의 집단퇴장 없이 유세장의 열기가 지속됐다. 신한국당 이명박후보는 『이제는 「경제 바로세우기」가 필요한 때』라고 말문을 연뒤 『서민경제의 위기 상황은 실물경제를 담당해 본 사람만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전문경영인 출신인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그는 장학노씨 비리에 대한 시중의 여론을 의식한듯 『엊그제 김영삼 대통령과 통화해 싫은 소리를 많이했다』고 소개한뒤 『앞으로는 여든 야든 가신출신이 실세로 포진하는 정치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국민회의 이종찬후보는 연단에 오르자마자 『검찰이 최근 장학노사건을 수사하다 「청와대 5인방」의 엄청난 비리를 밝혔으나 덮어버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면서 『이를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의 노무현후보는 먼저 『왜 종로에 왔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서 지역구를 바꾼 이유를 설명한뒤 『5공정권의 특명을 받아 민정당을 창당한 주역』·『그가 신화의 주인공이면 정주영씨는 조물주냐』면서 국민회의 이후보와 현대그룹 출신으로 「신화는 있다」는 책을 쓴 신한국당 이후보를 비판했다. 자민련 김을동후보는 『여성정책의 잘못을 바로잡고 여성지위를 향상시키는데 이 한몸 바치겠다』고 강조했다.〈서동철 기자〉 ○정통 정책정당 강변 ▷서대문갑◁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린 합동연설회는 2천여명의 청중이 몰려 유권자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이에 화답하듯 5명의 후보들은 대선자금공개,개혁의 완성,3김청산 등의 단골메뉴를 주제로 열띤 설전. 첫 연사로 나선 국민회의 김상현후보는 연설에 앞서 청중들에게 시위중 숨진 연세대생 노수석군에 대해 묵념을 올릴 것을 요청.이어 『이번 총선은 김영삼 정권에 대한 심판이다』라고 맹공. 민주당 박경산후보는 『국민들은 YS가신이니 DJ추종자니 JP거수기집단이니 하는 1인보스정치에 신물이 나있다』고 말한뒤 『민주당만이 정통 정책정당』이라고 강변. 신한국당 이성헌후보는『지속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원내안정의석이 필요하다』고 운을 뗀 뒤『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사리사욕만 앞세우는 구시대 정치인을 청산하고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이뤄야 한다』며 국민회의 김후보를 겨냥. 무소속 고은석후보는 『지금 서울에는 고향만 있고 이웃은 없다』며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화합을 이루는 데 앞장서겠다』고 주장.〈김상연 기자〉 ▷도봉을◁ 쌀쌀한 날씨 때문에 일반 청중이 적어다소 썰렁한 분위기속에서 치러진 전통적 야당 강세지역인 서울 도봉을 선거구 합동연설회에서 신한국당 백영기후보는 『금융실명제가 있었기에 수천억원의 부정축재를 파헤칠 수 있었고 5·18청산 등 역사바로세우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강조하고 『20여년 동안 야당후보를 뽑아 낙후된 도봉을 되살리기 위해 국회로 보내달라』고 지지를 호소. 국민회의 설훈후보는 『국민회의가 한국 경제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만들어 흔들리는 한국경제를 바로 세우겠다』고 역설. 민주당 유인태후보(현의원)는 『우리 정치는 위안보다는 고통을 주고 희망보다는 절망을 줄만큼 불신을 낳고 있다』고 비판하고 『온갖 정경유착과 부정비리를 저지르고 수많은 검은 돈을 대선자금에 쓴 정권을 문민정부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일갈.〈손성진 기자〉 ○휴일 불구 신파몰려 ▷용산◁ 봄비가 내린 뒤 끝이어서 쌀쌀한 날씨속에 진행된 첫 합동연설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1천여명의 유권자들이 휴일임에도 연설회장인 한강로 2가 용산초등학교로 나와 한표를 행사할 후보들의 연설을 경청. 신한국당 서정화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여소야대가 재현되면 정치불안은 물론 사회불안,나아가 경제불안으로 이어져 국가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서 신한국당과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뒤 『용산은 21세기 지역발전을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만큼 영종도 신공항과 서울을 잇는 고속철도의 시발역을 용산역으로 유치하겠다』고 다짐. 국민회의 오유방후보는 이번 선거를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로 규정한뒤 서울시의 집행부와 의회를 국민회의가 장악하고 있는 만큼 2조원이 투자되는 「신용산개발계획」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자신을 국회로 보내줄 것을 호소. 민주당 강창성후보는 『88년 이후 여당의원만을 뽑아 용산엔 용은 커녕 지렁이만 득실되고 있다』면서 용산구의 최대숙원사업인 미군기지 이전과 서울시청 유치를 위해서는 한·미 국방정책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자신이 적임자하고 주장. 자민련 김재영후보는 「철학없는 개혁정치」를 비난한 뒤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진영이 단합할것을 강조.이밖에 무당파국민연합 정한성후보와 무소속의 이천형후보는 돈 안쓰는 깨끗한 선거를 약속.〈황성기 기자〉 ▷대구◁ 중구 동인초등학교에서 열린 대구 중구연설회는 청중들이 2천여명이 몰려,후보자들의 열띤공방을 지켜봤다. 첫 연사로 나선 국민회의 이수만후보는 『자신만이 유일한 중구 토박이』라고 주장하며 『이번 선거에서 지역 감정을 타파해 선거혁명을 이루자』고 말했으며 무소속 김영철후보는 『지역개발의 최대 관건인 위천공단조성을 위해 출마자 전원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안. 자민련 박준규후보는 『김영삼정권 3년동안 지역경제는 날로 위축되었다』며 『전직 대통령으로 부터 거액의 비자금을 받고도 구속까지한 현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는 허구』라고 주장. 민주당 이강철후보는 『국회의원 8번이나 한 사람이 대구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며 『전직 대통령비자금을 폭로한 민주당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 무소속 림철후보는 『이번 선거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일꾼을 뽑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젊고 참신한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주장. 무당파연합의 한병후보는 『무당파연합을 밀어주어 대구를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자』고 말했다. 신한국당 유성환의원은 『트집잡는 정치보다는 일하는 정치를 교활한 정치보다는 정직한 정치를 돈챙기는 정치보다는 가난하지만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며 주장. ○“선거폭력에 철퇴를” ▷해운대·기장갑◁ 이날 하오2시 부산 해운대구 반여1동 장산초등학교에서 열린 해운대·기장갑 선거구 합동연설회에는 8천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여·야 후보들은 ▲깨끗한 선거 ▲위천공단조성 불가 등을 주요 이슈로 내세우며 자신만이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 신한국당의 김윤환후보는 『부산의 아시안게임과 지하철3호선 건설계획등을 유치해 부산발전의 밑바탕을 마련했다』며 『지나친 정치논리에 휘말리면 경제가 죽는다』며 경제논리를 전개. 김후보는 또 최근 발생한 민주당 이기택후보의 부인 이경의여사의 실신사건과 관련,『불법선거를 감시하던 신한국당 청년당원이 이후보측 선거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스스로 넘어지는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 민주당의 이기택후보는 이번 선거는 『3김시대 종식을 묻는 선거로서 3김이후의 대안은 나와 민주당뿐이다』며 『더 큰일을 하기위해 나를 뽑아야 한다』며 한표를 호소 이후보는 『신한국당 청년당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 치료중인 부인이 휠체어를 타고 유세장에 나오려는 것을 말렸다』며 현 정부가 진정한 문민정부라면 선거폭력에 대해 특단의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며 폭력선거 추방에 정부가 나설 것을 강력 촉구.
  • 「독도 분쟁화」일 전략에 쐐기/정부 강경대응 배경과 방침

    ◎“영유권 거론대상 될 수 없는 우리땅” 확고/관할권 강력행사… 국제기구 제소해도 불응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우리 정부의 일관된 대응은 이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 영토라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공연히 과민반응을 보여 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일본은 90년대 들어 매년 8월쯤이면 ▲국제법상으로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은 독도로부터 즉시 철퇴하고 건조물을 철거하라는 구상서(verbalnote)를 우리 정부에 보내오고 있다.정부는 『당치않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신을 일본측에 보낸다.일단 반박기록은 남겨야 한다는 차원이다. 이에 더해 최근 일본정부가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총리와 이케다 유키히코(지전행언)외상까지 앞세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오는 16일로 예정된 일본의 2백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선포방침 발표와 관련돼 있다. 일본이 EEZ를 선포하면,우리 정부와 중국측도 잇따라 EEZ를 선포할 예정이다.한·일간의 거리는 4백해리를 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계선을 획정해야 한다. 한·일간 EEZ경계선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일본측 EEZ안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이 일본측의 희망인 듯싶다.일본의 속셈을 좀더 들여다보면 독도가 일본측의 EEZ수역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독도를 한·일간의 영유권분쟁지역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부는 이러한 일본측의 의도를 읽고 있으며,이에 따라 9일 서대원외무부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하시모토 총리와 이케다 외상의 망언을 강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일본측의 「도발」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어서 우리 정부로서도 내부적으로는 다각적 대책을 마련중이다.정부는 특히 일본측이 한·일간의 기존관계를 훼손하고,전면적인 외교전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도 있는 독도문제를 총리와 외상을 내세워 제기하는 데는 또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독도문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우리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독도영유권문제를 쟁점화,국제사법재판소나 새로 신설되는 국제해양법재판소로 가져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을 방침이다.또 해양경계분쟁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 관련해 영유권문제를 다룰 수가 없다는 게 외무부당국자의 설명이다. 정부는 독도영유권에 대한 우리의 입지를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일본에서 발행된 역사자료와 지도 가운데 독도를 우리 땅으로 규정한 자료도 확보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신종 관권선거 발본”강경 조치/선관위 김현수청주시장 고발 안팎

    ◎“노골적 지지 발언 묵과할수 없다” 판단/유사 사례 재발막게 초동단계서 “철퇴” 중앙선관위가 22일 김현수청주시장을 고발키로 결정한 것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민선자치단체장들의 선거개입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는 데 따른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선관위는 특히 지난 18일 김시장의 관권개입성 발언이 있은 지 불과 4일만에 선관위로서는 최고의 법적 제재인 형사고발 방침을 확정했다.6·27지방선거를 앞둔 지난해 2월 서울시내 4개 구청장이 관내 국민학교 새내기들에게 책받침을 돌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선거법위반 여부를 놓고 2개월여를 끌다가 『사전선거운동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애매한 판정에 그쳤던 것과 대비된다.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시대를 맞아 처음으로 치러지는 4월 총선에서 단체장과 소속 정당간의 「신종 관권선거」 기도를 초동단계에서 잡지 못하면 공명선거의 뿌리내림은 기대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김시장의 발언은 『총선에서 자민련 간판을 달고 나오는 후보를 모조리 당선시켜 달라』 『내년 대선에서도 충청인이 단합해 정권 한번 잡을 계기를 마련하자』는 등 임명직 시장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과감하고 노골적인」 내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개정된 통합선거법은 민선단체장의 선거개입금지 조항을 신설,특정당이나 후보를 위한 단체장의 선전·홍보행위와 정치행사 참석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김시장의 발언은 시점상 이 조항에는 걸리지 않는다.그러나 통합선거법은 86조에서 공무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으며,누구든지 선거운동기간 이전에 특정인이나 특정당의 당선 또는 낙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면 사전선거운동으로 처벌된다.(2백54조) 김시장은 소속당인 자민련으로부터 공천과 선거운동이라는 「은덕」을 입은데 대해 사전선거운동으로 「보답」하는 불미스런 전례를 남겼다.정당 소속일지라도 시장 직분으로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는 유사 사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초강경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것이 선관위의 설명이다. 선관위는 이날 김시장 고발을 계기로 공직자의 선거개입등에 단호히 대처키 위해 단체장의 선거관여 행위의 구분기준등을 포함한 종합대책을 마련,각급 선관위에 보내 「발본색원」을 지시했다.특히 전국을 4대 권역으로 나누어 중앙선관위와 해당 시·도 및 시·군·구선관위 합동으로 감시·단속반을 편성,24시간 감시체제를 갖추도록 함으로써 자치단체장의 불법선거운동에 대한 「전쟁」에 돌입한 분위기다.
  • 해도 너무한 성표현에 “철퇴”

    ◎3개월 연출정지 받은 MBC 「쇼!부부리서치」/상담 빙자 은밀한 사생활 드러내 웃음거리로/즉석서 비뇨기과 전문의에 건강진단 해프닝 『한달에 한번도 안해요』『단 한가지 불만이라면 아내가 잠자리에서 만족하지 못한 듯한데…』. M­TV 「쇼! 부부리서치」(금요일 밤 12시)가 최근 방송위원회(위원장 김창열)로부터 「사과방송 및 3개월 연출정지명령」을 받은 내용의 일부다. 결혼,부부와 관련된 주제를 놓고 일반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취지의 본격 성인프로그램 「쇼! 부부리서치」는 매주 부부 한쌍이 출연해 속내를 털어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솔직함을 가장해 속어·비어들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는데다가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볼 것을 시청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지난 8일자 「쇼! 부부리서치」방송에서는 부부출연자중 아내에게 최면술을 걸었다.이 아내에게 남편과 사회자가 번갈아가며 거침없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자가 『따로 사귀는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아내는 『맨 처음에는그랬어요.늦게 들어올때』라고 무엇에 홀린듯 주저리주저리 마음을 털어놓았다. 또 『손댄적 없죠』라는 질문에는 『한번 있었어요』라고 답했다. 아내가 『멋있게 지내고 싶었는데 한달에 한번도 안해요』라고 말하자 사회자는 곧 방청객을 향해 어떻게 해야되냐고 하소연했다.이내 방청객들은 『그건 너무했죠』라며 신혼때는 평균횟수가 몇번이어야 한다며 조언까지 했다.게다가 사회자는 즉석에서 남편에게 비뇨기과전문의의 건강진단까지 받게 하는 소동을 벌였다. 세상 부부들의 모든 문제가 성생활에 있다는 듯이 성문제만을 지나치게 파헤친 이 방송은 심야에 TV앞에 앉은 성인들조차 당혹하게 했을 정도였다.「쇼! 부부리서치」는 보호받아야 할 부부간의 사생활을 노출시켜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쇼」도 「리서치」도 아닌 어정쩡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렸다.
  • 「12·12주역」… 어제와 오늘

    ◎허삼수·허화평씨 14대 지역구 현역의원/황영시씨 육참총장 거쳐 감사원장 역임/장세동씨 두차례 투옥… 박희도씨는 도미 검찰에 고소·고발됐던 12·12 관련자들은 모두 38명.이들 대부분은 군 사조직인 「하나회」회원들로 5공과 6공을 거치면서 정·관계의 핵심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씨를 연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허삼수 당시 보안사인사처장은 5공초 「파워게임」에서 밀려나 오랫동안 낭인생활을 하다 지난 14대 총선 때 부산지역에서 민자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허씨와 함께 총장공관에 갔던 우경윤 육군범죄수사단장은 정씨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합수부측의 오인 사격을 받아 하반신 불구가 된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5공 때 골프장 사장을 지냈다. 허화평 보안사령관비서실장은 5공초 허삼수씨와 함께 「거세」돼 미국에서 지내다 6공초에 귀국했다.지난번 총선 때 무소속으로 포항에서 출마,당선된 뒤 민자당에 입당했다.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합수부수사1국장은 지난 89년 5공청산 이후 쇠락의 길을 걷기시작했다.이씨는 14대 총선 때 김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박희도 1공수여단장과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무력점거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12·12 군사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박씨는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뒤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5·18에 대한 재수사 방침이 발표된 직후 미국으로 출국,로스앤젤레스의 차남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최씨는 합참의장직에 올랐다가 예편,광업진흥공사사장과 국방부장관을 거쳐 현재 태권도협회장을 맡고 있다.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 청와대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거치면서 권세를 누렸으나 5공비리와 「용팔이 사건」으로 두차례 옥살이를 했다. 하나회 후견인 역할을 했던 유학성 군수차관보는 안기부장을 거쳐 정계에 진출,12·13·14대 의원에 당선됐으나 93년 재산공개 파문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황영시1군단장은 83년 육군참모총장으로 예편한 뒤 84년부터 88년까지 감사원장을 지냈다.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을 지내고 군수사령관으로 예편,5공 때 교통부장관을 지냈으나 장관 재직시절의 골프장 내인가와 관련,뇌물수수혐의로 89년 구속됐다가 91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6공까지 군에 남았던 가담자들도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으나 문민정부들어 철퇴를 맞았다. 김진영 33경비단장은 수방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다 93년 3월 하나회 숙정 1호로 전역조치됐고 9사단 29연대장으로 중앙청으로 출동했던 이필섭씨와 장태완 수경사령관 체포를 지휘했던 수경사상황실장(중령) 김진선씨도 문민정부 출범 직후 합참의장과 2군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 노태우씨 비리 수사­검찰 처리방향

    ◎「건넨 돈」 성격 거의 규명… 사법처리 임박/형평 고려… 노씨 구속땐 기업인 처벌 늘듯/10대재벌 등 「떡값명목 상납」엔 선처 고려/소명자료 사실 부합땐 그룹총수 소환 신중히 검찰이 5일 노태우 전 대통령과 비자금을 건네준 기업인들을 「일괄 사법처리」키로 한 것은 비자금 조성경위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돈의 성격」을 거의 대부분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검찰은 그동안 계좌추적을 통해 노전대통령이 밝힌 비자금 5천억원 가운데 3천5백억원 정도를 확인하고 비자금 잔고 1천8백여억원도 거의 파악했다고 밝혀 노전대통령을 포함한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임박했음을 내비치고 있다. 지난 4일 소환됐던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5일 새벽 귀가하고 수뢰 또는 뇌물제공 혐의가 짙은 이현우 전청와대 경호실장과 안영모 전동화은행장이 1∼3차례 소환됐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검찰청사를 총총히 나온 것도 이같은 범주로 해석된다. 검찰의 「일괄 사법처리」방침은 이 사건의 「주범」격인 노전대통령의 신병처리에 맞춰 나머지 관련자들의 사법처리강도를 조정,「형평성」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이에 따라 노전대통령의 구속,불구속여부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검찰은 그러나 누구를 구속하든 구속은 최소화할 것으로 알려졌다.사안에 따라 구속 등 철퇴를 가할 예정이나 특히 기업인은 구속할 경우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커 이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검찰은 사법처리 이전까지 돈의 성격 규명에 마지막 수사력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무엇보다 기업인으로부터 노전대통령에게 건네진 돈의 「성격」이 규명돼야 사법처리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검찰 고위관계자도 『돈의 사용처에 대한 수사도 중요하지만 우선 비자금의 총규모와 돈의 성격규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해 이 부분에 수사가 집중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50여명의 기업인 가운데 한보그룹 총회장 정씨와 배종렬 한양 전회장이 첫번째 소환대상으로 지목된 것도 돈의 성격,즉 뇌물공여부분에 수사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이들 2명은 노전대통령과 함께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가장 큰 셈이다.노전대통령에게 대가성 뇌물을 제공한 기업은 이들 이외에도 6공 당시 「권력」을 배경으로 급성장하거나 규모에 비해 굵직한 공사를 따낸 몇몇 건설업체 쪽으로 쏠리고 있다. 그러나 10대 재벌등 큰 회사들은 건네진 돈의 규모가 수백억원에 이르는 곳도 있지만 명목은 「떡값」이나 「정치자금」에 가까워 사법처리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이들 재벌들은 검찰이 확인한 돈과 자신들이 제출한 소명자료가 일치할 경우 그룹총수의 소환은 일단 면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기업인들을 모두 불러 조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느냐』고 말해 기업인에 대한 조사수위를 가늠케하고 있다.
  • 서유럽·남미 등 「부패와의 전쟁」 한창

    ◎세계 각국 「검은 돈」 스캔들로 “몸살”/부정축재 지도자들 실형·망명/좌·우 진영 거액들 줄줄이 법정위해­이태리/클린턴 「화이트 워터」로 구설수 올라­미국 세계 각국에서 정치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패와의 전쟁」이 한창이다.특히 최근들어서는 후진국에서의 엄청난 부패스캔들이 비교적 잠잠해지고 있는 가운데 서유럽과 같은 선진지역에서 크고 작은 스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로 대변되는 부패추방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좌·우파 정치세력의 거두들이 모두 철퇴를 맞고 있다.지난 9월 우파정치의 대명사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총리가 마피아조직과의 유착혐의로 법정에 선데 이어 지난 27일에는 20여년간 이탈리아 사회당을 이끌었던 베티노 크락시 전총리가 92년 총선 당시 유수 재벌인 페루치그룹으로부터 1백10억리라(약 55억원)를 수뢰한 혐의로 밀라노법정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마니 풀리테 이후 최대의 금융스캔들을 기록했다. 언론재벌출신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했다가 지난해 12월 연정붕괴로 집권 7개월만에 실각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총리도 자신 소유의 4개 기업이 세무관리들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현재 재판을 받을 처지에 놓여 있다. 프랑스에서도 「검은 돈」이 문제가 되고 있다.최근 우파정당인 공화당(PR)의 불법정치자금 조성경위를 조사하던 한 검사가 PR당사에서 2백40만프랑(3억6천만원)의 뭉칫돈을 발견,재정담당자로부터 이 돈이 총리관저에 보관돼 있는 비자금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현정부에 와서도 알랭 쥐페 총리가 파리 부시장 재직시 아들에게 낮은 임대료로 시소유의 아파트를 빌려준 혐의로 상당한 곤욕을 치르다 검찰의 불기소결정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한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사무총장인 빌리 클라스는 벨기에 경제장관 재직 당시인 지난 88년 2억2천5백만달러에 상당하는 헬기를 이탈리아의 군수회사로부터 도입하면서 1백60만달러의 뇌물을 받아 소속 정당인 플랑드르사회당에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나토 사무총장직을 사임한 것은 물론벨기에 사법당국에 의해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동산전문회사인 화이트워터사에 투자해 부당하게 재산증식을 한 「화이트 워터 스캔들」로 줄곧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으며 특히 상원 화이트워터 특위가 26일 클린턴 대통령측에 대해 49건의 문서를 제출토록 소환장을 발부하는 한편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에 대한 청문회 증인 출석문제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중남미도 정치지도자들의 부패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지역.비록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선고를 받기는 했지만 콜로르 전 브라질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뇌물수수혐의로 법정에 선데 이어 비슷한 시기 페레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공금횡령혐의로 법정에 섰다. 또 최근 알베르토 다익 에콰도르 부통령이 45만달러의 공금을 유용한 혐의로 도피,현재 코스타리카에 망명중이며 콜롬비아의 삼페르 대통령은 마약조직으로부터 6백만달러를 받아 선거에 사용한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 투명 정치자금(외언내언)

    노태우씨 비자금파문에서 국민들이 얻을 수 있었던 귀중한 플러스효과를 하나 들자면 깨끗한 정치,돈 적게 드는 정치에 대한 바람이 더욱 크게 증폭된 점이라 할 수 있겠다.또 이러한 국민적 갈망은 정치자금의 투명성 보증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정치권은 음성적인 자금조달의 그릇된 관행을 떨쳐버려야 하는 힘든 과제를 떠안게 됐다.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위해선 씀씀이가 헤픈 과소비적 정치행태가 사라지고 절약의 정치,감량의 정치가 이뤄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같다.따라서 후원회 지원이나 기탁금등 합법적인 모금수단에 의한 정치자금 실명제가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한다.모든 정치자금이 금융실명제의 투시창구를 거쳐야 한다는 얘기다. 또 비자금사건을 계기로 그냥 지나쳐선 안될 대목이 정치와 경제의 유착에 따른 부작용과 피해가 곧바로 정·경의 후진성 심화와 국제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지역할거」및 「패거리정치」「타락선거」 등으로 정치수준은 퇴보할 수밖에 없으며 정경유착식 경영에 안주하는 재계는 기술개발 등 힘든 노력을 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시장 경쟁에서 이기질 못한다.공존공영을 겨냥한 결탁이 결국은 공멸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실명제가 자리를 잡아갈 경우 정·경의 부패커넥션은 활동 무대를 잃게 될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국민들은 왜 5·6공 정부가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미뤘으며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무슨 까닭으로 음성적 정치관행에 철퇴를 가하는 실명제를 전격 시행케 했는가를 어렵잖게 알 수 있을 것이다.김대통령이 취임직후 『재임기간중 정치자금 안받겠다』고 말한뒤 실명제를 단행한 수순에서 깨끗한 정치풍토를 이루려는 통치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으로 풀이가 가능하다. 정치자금의 투명성 보장은 정치의 종속변수신세인 경제가 활력에 찬 제2의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 미 상원/「모조품 단속법」 상정/판매땐 벌금 100만 달러

    ◎SW 41%·레코드 14%가 복제품 【워싱턴 로이터 연합】 항공기 부품에서 T셔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십억달러 규모의 모조품 시장을 규제하는 법안이 9일 미상원에 상정됐다. 이 법안을 발의한 오린 해치 상원 법사위원장(공화)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제는 가짜 상품 시장에 철퇴를 가할 때이며 모조품을 생산·판매하는 것은 모든 미국인들의 재산에 대한 강도짓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해치 위원장은 모조품·불법복제 상품이 미국 영상시장의 8%를 점하고 있으며 레코드시장에서는 14%,컴퓨터 소프트웨어 시장에서는 41%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치 위원장및 다른 3명의 상원 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은 모조품을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연방 부당이득 방지법에 의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최고 1백만달러의 벌금및 배상금을 부과하고 있다.
  • “「4천억설 사정」 불똥 튈라” 긴장­재계

    ◎「비자금 조사」 금융권·재계 반향/“사실 확인 안돼… 나설때 아니다”­재경원/CD·금전신탁 동향 파악 등 “촉각”­금융계 전직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설」이 관련 부처는 물론 금융계와 재계를 바싹 긴장시키고 있다.특히 금융계와 재계는 검찰이 비자금설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계좌추적 작업에 나설 경우 자칫 삼복더위 속의 「한파」가 몰아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재정경제원은 비자금 파문과 관련,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도 현재로선 나설 상황이 아니라는 입장. 남궁훈 세제1심의관은 『4천억원의 비자금이 어떤 형태로 있는 지 금융당국으로선 알 길이 없다』며 『사실여부가 불분명한 설을 갖고 정부가 금융실명제를 위반해 가며 모든 예금계좌를 조사할 수는 없다』고 언급. 그는 『만약에 4천억원의 비자금이 사실이라면 돈의 속성상 주식이나 무기명 채권,예금의 형태로 분산돼 있을 것이며 계좌형태도 실명확인이 끝난 차명이나 가명계좌,실명확인을 안 거친 차명 등 다양할 것』이라고 설명. ○검찰서요청땐 협조 ○…국세청 관계자들은 「4천억원 비자금설」에 대한 조사를 검찰이 맡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 이들은 『국세청은 탈세 가능성이 있을 때나 세무조사를 할 수 있다』고 전제,그러나 검찰에서 수표추적등 협조를 요청해올 경우 국세청 직원을 즉시 파견할 수 있도록 사태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 ○계좌 움직임 주시 ○…금융계는 지금까지 전직 대통령들의 씀씀이를 볼 때 「4천억원 비자금설」이 전혀 근거없는 낭설은 아니라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 그러나 비자금의 성격상 극히 전문적인 「브로커」의 손을 거쳐 세탁이 이뤄졌고 계좌도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부문으로 분산됐기 때문에 쉽게 포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일각에서는 93년4월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 때와,지난 해 12·12 수사과정에서 일부 계좌가 사정기관에 적발됐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 ○…비자금설에도 불구하고 금융권의 CD매출이나 장기채권이 상품으로 운용되는 개발신탁 또는 특정금전신탁의 수신에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상황.일부 시중은행들도 비실명 계좌와 거액 입금 계좌의 움직임에 주시하고 있으나 특이한 변화가 없는 것으로 파악. C은행의 경우 실명제 실시 이후 만기 때 찾아가지 않은 CD가 전혀 없었는 데다 실명확인을 하지 않은 계좌도 대부분 만기가 97년인 공모주 청약예금으로 계좌당 금액은 3백70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 ○중기 자금조달 걱정 ○…재벌기업들은 전직 대통령 비자금설이 보도된 직후부터 자체 정보팀을 가동 시중에 나돌고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을까 촉각. 사안의 성격상 당국의 「해명성」조사에 그칠 가능성도 있지만 비판여론이 거세진다면 시범 케이스로 몇몇 재벌의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철퇴가 가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 특히 대통령 선거직전 총수가 『정기적으로 수억원∼수십억원 씩의 정치자금을 청와대에 제공했다』고 폭로했던 H그룹은 정부의 비자금조사가 본격화될 경우 1차 조사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우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사채시장의경색이 우려되지만 재벌그룹의 경우 사채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아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며 『사채시장과 제2금융권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은 한동안 기업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액예금자 대상 특별 운영/미국계은 「PBG」 관심/인적사항 직원조차 서로 비밀/「검은 돈」 상당량 유입 가능성 검찰이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설을 조사하기로 함에 따라,미국계 모은행 국내지점이 국내은행과는 차별적으로 고액 예금자들만을 대상으로 특별히 운영하는 PBG(Private Banking Group,개인재무관리부)에 관심이 집중. 이 은행 서울지점은 5년 전부터 PBG를 설치,예금자에 대한 철저한 비밀보장을 최우선,고액 예금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그러나 정확한 고객의 수 및 수신고 등은 외부에서는 알기 어렵다. 5명의 담당 직원 조차 고객의 인적 사항 및 예탁금에 대해 서로 모를 정도로 이 은행의 내부에서도 「성역」으로 통할 정도.금융계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국내 거부들이 이 은행을 애용하며,특히 비정상적으로 모은 돈을 예탁하기에 조건이 가장 좋아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이곳으로도 일부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으로 점친다. 한편 금융실명제 실시 전인 지난 93년 초에는 야당의 거물급 정치인이 이 은행을 방문,2천억원을 관리해 달라고 했다가 임원회의 끝에 거절당했다는 풍문도.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사라진 미풍양속(두만강 7백리:18)

    ◎홍살문 자리에 문혁열사 기념비가…/문혁이후­“토호열신 타도”… 사찰·성황당 등 불태워/「모택동 선집」·곡괭이·삽을 결혼예물로/개방바람 타고 최근 기우제·농악놀이 되살아나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에는 혁명열사 및 혁명전적기념비가 전망좋은 자리에 서 있다.이와는 반대로 그 많고도 많았던 민족 전통풍물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이를테면 혁명을 당해 사라진 것이다.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혁명열사비는 제법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왜냐하면 일제가 조선민족의 혈맥을 끊는답시고 쇠말뚝을 박았던 산혈에 세웠기 때문이다.그러나 화룡시 노과진 죽림촌의 열사비는 자리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다.산언덕에 세운 이 기념비 자리는 본래가 마을 어귀에 있었던 홍살문 자리여서 찜찜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종교를 미신 행위로 이 홍살문은 마을 사람들이 고사를 지내는 한 처소였다고 한다.해마다 음력 10월 초순이면 찰떡을 메로 치고 돼지를 잡아 홍살문 앞에 한상 차려놓고 단군성인께 치성을 드렸다.다음해에도 제발 풍년이 들게해달라고 넙죽넙죽 절들을 했다.치성이 끝나면 제물을 집집이 나누어 창호지에 싸다가 곡식더미 속에 묻었다.그리고 나서 다음날에 가서야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홍살문에 얽힌 사연도 많다.한국전쟁 당시 강건너 북한에 사는 안흥국이라는 사람은 홍살문 치성에 참석했다가 떡을 가져다 볏가리에 묻어두었다.그날 마침 미군 비행기가 떼로 날아와 폭격을 해댔다.그 때 벽가리에도 폭탄 파편이 튀었는데,공교롭게도 찰떡에 파편이 박혀 화재를 면했다는 것이다.하지만 홍살문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마을 노인들의 아쉬운 마음이야 아직도 남아있지만…. 노인들에게는 홍살문 뿐아니라 여러 가지의 민족풍속이 머릿속에 살아있다.그저 생생한 추억으로만 남은 민속을 놀아보지 못 하는 한을 오래도록 지닌 사람들이 오늘날 조선족 노인들이다.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되지 못하지만 노인들은 두고두고 말한다. 『어디 홍살문에만 제사했나….국사당에도 치성을 드렸다.가뭄이 들면 돼지잡아 피를 뿌리고 비를 달라고 기도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비가 안와도 기우제를 지내면 마음이 놓였다 이기야.기우제를 지낼때 과부들은 옷을 훌렁훌렁 벗어내치고 알몸에 물을 뿌리면서 통곡을 해댔디.더러워서라도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기런거야』 민족들 가슴에 묻어온 수천년 전래의 풍속이 저의 다 없어졌다.세 차례 혁명에 철퇴를 너무도 세게 맞아 풍비박산이 났다.민족의 전통풍속은 1947년 이른바 토호열신을 타도하는 운동에서 첫뺨을 얻어 맞았다.오늘날 화룡시 덕화진 구역 선경대에는 1885년 하홍락 스님이 지은 절이 있었다.그 후에 불에 탄 것을 1940년 강원도에서 황정숙이라는 비구니가 불상과 종을 가지고 와 절을 복구하고 칠성사라고 불렀다.해마다 초파일이면 이웃 촌민들이 떡을 치고 감주를 빚어와 칠성사에서 불공을 드렸다. ○족보까지 태워 없애 그러다 1947년 정부가 불교를 미신행위로 몰아붙였다.그것도 반동적이라는 명목으로….그 때에 군중이 동원되어 절에 불을 질렀다.절간에서 쫓겨난 그 비구니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절의 종은 신흥동학교로 떼어가 오랫동안 학교종으로 썼다. 두만강연안의 수십개 마을을 편답하는 동안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에서 성황당 나무 두 그루를 보았다.1958년 반우파투쟁때 성황당 나무를 닥치는대로 잘라버린 터여서 그것은 참으로 요행이었다.원래는 마을에 네 그루였으나 허수라는 사람이 두 그루는 찍어다 화목으로 썼다.반우파투쟁 이후에 이 나무들에는 왼새끼나 창호지 가닥 대신에 포탄피가 매달렸다.종을 대신한 포탄피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는데 이용되었다. 문화대혁명은 모든 전통을 더욱 깡그리 말살해버렸다.상두를 불살라 사람이 죽어서도 덜컹거리는 수레에 실려나갔다.닭을 풀어놓아 묘자리를 잡는 일도 어림없게 되었다.부자간에도 갈라져 「자산계급혈통론」이 나오고 족보까지 태우는 풍파가 일어났다.결혼 때 주고 받는 예단도 「모택동선집」이 제일이요,남자에게 주는 예물은 곡괭이나 삽이었다. 결혼식날 신부는 치마 저고리 대신에 당시 유행하던 군복을 입었다.잔칫상에 개떡이 올라 옛날 지주집 머슴 살던 때를 회상하기 일쑤였다.그래서 잔칫날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어떤 신부는결혼식날 새벽에 망태에다 집징승 똥을 거름으로 담아왔대서 당원으로 발탁되었다.농악놀이에 돌리는 상모가 공산당 영도력을 부정하는 몸짓으로 해석되어 농악을 복고주위로 낙인 찍어버리기도 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친척관계가 엉망으로 변한 것이다.연변에서는 한 때 할아버지는 아바이,할머니는 아매로 불렀다.그러니 외가나 다른 노인들이라고 별수가 없어서 아바이와 아매로 통했다. 아버지 나이를 기준으로 백부는 맏아바이,백모는 맏아매였다.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말하는 아바이·아매와 혼동을 가져왔다.또 아버지 나이를 기준으로 그 아래 친인척을 죄다 아주바이,아주머니로 호칭되었다.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대로 둔 것을 보면 지금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풍속이나 신앙을 뿌리째 말리지는 못했다.1958년 부동골에 극산병이 돌아다닐 때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쌀을 모아 떡을 치고 돼지를 잡아 치성을 올렸다.문화대혁명 당시 우리 고향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에 투쟁을 맞은 비구니가 살았는데,어렸던 내가 아프기만 하면 어머니께서 그 비구니를 찾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정치투쟁에서 해방 개혁개방 이후는 구질구질한 정치투쟁에서 해방되어 이제 하고 싶은 일은 하게 되었다.지난해 여름 심한 가뭄이 연변지역에 들자 두만강 연안 용연동에서 기우제를 지냈다.이 때 상화촌 과부 몇이 알몸으로 두만강에 들어가 옛날 사람들이 하던대로 통곡을 하면서 몸을 씻었다.화룡시 용성향 봉산동 마을 옆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어린이들이 자주 생명을 잃자 실로 오랜만에 마을에 솟대를 세웠다. 1938년 경상도에서 집단으로 이주해와 안도현에 자리잡은 신툰의 노인들은 마을에 농악을 보급시켰다.그래서 신툰농악은 지금 조선족의 한떨기 꽃으로 피어나는 참이다.지난해 선경대가 길림성관광지로 개발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북두칠성 절이 복구될 것이라는 소식이다.옥으로 만든 불상은 벌써 옛 절자리에 먼저 안치해 놓았다. 어떤 풍속을 미신으로 매도만 해서는 안된다.전통적 관습으로 마음에 자리잡은 공동체 삶의 한 부분이다.그것은 때로 위로가 되고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의 단합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 6·25 45주년을 맞으며/이호철 작가(일요일 아침에)

    강원도 동해항에서 태극기를 단 국적선이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2천t의 쌀을 싣고 북한 나진 항을 향해 첫 출발할 예정이다.이어서 3천t,5천t급 우리 국적선들이 잇따라 남한 곳곳에서 쌀을 싣고 목포·군산·마산항 등지를 출발,북한측이 지정한 남포·원산·청진·나진항 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금년 6·25 45주년의 뜻은 바로 이 엄연한 사실로 함축되지 않을까.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너무 기이하다.하필 어째서 6·25인가.하필 어째서 6·25 45주년을 맞아 북한에 가게 되는가. 하늘의 뜻 같은 것이 문득 와닿는다.45년 전,바로 이날에는 똑같은 최단거리 항로로 무시무시한 남침이 자행되었던 것이다.그리고 이날 이때까지 1백55마일 휴전선을 비롯한 남북 대치 상황은 애오라지 철통처럼 이어져 오기만 했던 것이다.아아,그렇다.이게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도에 따르면 동해항에 첫 도착한 쌀은 강원도 고성에서였다고 한다.이 점도 남달리 뭉클하게 와닿는다.역시 그렇지,그 곳은 45년전 6·25때까지는 북한 체제에 속해 있었고,지금도그 지방에는 6·25 피난민들이 가장 많이 터를 잡고 살며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고향하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그이네들이 어찌 이 일에 화끈하게 나서질 않을 것인가. 김영삼 대통령도 「남북관계 해빙의 대전기」를 획하게 된 남북한간의 쌀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지난 22일,『앞으로 더 주겠다.보유량 중 여유분이 없으면 외국에서 사서라도 주겠다』고 언명했다. 요컨대 이일에 화끈하게 들어서는 데는 위 아래가 없고 정부당국과 민간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굶기 직전의 북한 동포들에게 쌀을 보내주자는 일에 어느 누가 망설인다는 말인가.다만 여기서 다음 두가지 사실만은 명백하게 못 박아두어야겠다. 그 첫째는 이 쌀이 과연 남쪽 민초들의 뜻대로 정말로 굶주리기 직전의 북쪽 민초들에게 가 닿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사실은 북쪽의 민초들도 벌써 환히 알고는 있을 것이다.남쪽 동포들이 1차분으로 1천8백억원어치나 되는 쌀의 일부를 보내주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소식은 공기 알갱이의 기별과도 같은 「눈치」로 이미 훤히 꿰고 있는것이다.그것이야말로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바로 민초들,백성들의 지혜인 것이다.이것을 모르거나 소홀히 여길때 그 권력은 볼장 다 보게 된다.반드시 망한다.이 이상의 만고의 진리가 없다.남쪽 쌀이 들어왔다는 것을,남쪽 민초들의 피와 땀이 어린 갸륵한 정성이 가 닿은 것을 추호나마 속이려고 들거나 어물쩍하게 넘기거나 왜곡하려고 들때는 하늘의 철퇴가 내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금년 초에 귀순한 한 농업 전문가는 『남한 정부가 북한에 쌀을 지원해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김정일은 남한이 준 쌀을 끝까지 숨기면서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지도 않고,설령 나누어준다 해도 자신의 은덕으로 선전하는데 이용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는데,설마 그러기야 할까.아무리 악독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런 종류의 행태 끝이 어떠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선전? 선동? 그런 것들은 벌써 오래 전에 끝장나 있는 정보화 시대인 것이다.아무리 알 길을 막으려 들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작금의 지구촌 세계이다. 둘째,이번 「쌀협상」에서도 북한측은 안간힘으로 우리 「당국」과 민간을 분리시키려고 하였는데 북한 당국의 그 저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 남쪽의 민초들은 이미 속속들이 훤히 꿰고 있다.그리하여 이 자리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히거니와 이제 이 남쪽 세상은 이런 문제에 관한한 「당국」과 「민간」이 따로 없고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당국」이기도 하고 「민간」이기도 한 것이다.얼핏 「난장판」처럼도 보일 터이지만 이틀 뒤에 있게 될 우리 지자제선거는 바로 우리 민초 한사람 한사람이 진짜 진짜 당국자임을 보여주고 바로 이 힘으로써 딱한 처지에 있는 북한 민초들을 도우려고 나선 것이다.
  • 제헌국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2)

    ◎내각­대통령책임제 공방… 대통령제로 결말/여·순 발란 등 소용돌이속 국가보안법 통과 우리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호칭이 등장한 것은 19 48년 7월 12일이다.국가의 기본골격인 헌법이 이날자로 제정되면서 대한민국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그 헌법은 5·10 선거에 의해 개원한 국회가 제정했는데 초대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과도입법의원 맹활약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되었다.제헌국회는 물론 민주주의 방식의 첫 대의기구다.미군정 아래서 개원되었던 절반의 대의기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염두에 두면 사정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그러나 제헌국회는 과도입법의원의원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예행을 거친 국민들이 확실하게 뽑은 1백98명의 선량들이 참여한 국민의 대의기구였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15명이 국회에 진출,제헌국회개원에 깊숙이 간여했다.그들의 경험이 그만큼 존중되었던 것이다.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경선 상대가 없이 무투표 당선된 신익희의 역할이 컸다.그는 미군정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전면에 나섰다.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운영에 관한 규칙법안이 이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제헌국회는 5월 31일 역사적 개원을 맞았다.제1차 본회의는 당시 최고령자였던 임시의장 이승만의 사회로 열렸다.국회의장단 선거에서 1백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부의장에는 신익희(76표)와 김동원(77표)이 선출되었다.이날 서울 시내에는 경축 꽃전차가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하오2시 제헌국회 개원식이 베풀어졌다. 국회에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다.이 위원회는 먼저 헌법학자 유진오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유진오 전문위원은 내각책임제 및 양원제,3권분립을 중심으로 한 안을 내놓았다.그리고 법전편찬위원회(위원장 김병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비롯,임시정부헌장,과도입법의원 제정의 약헌,구미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기초에 착수했다. 내각책임제안은 곧 바로 이승만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12일 양원제를 단원제로 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이의없이 채택했다.이승만은 마침내 분노하고 말았다.6월15일 기초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내각책임제가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책임제로 번안해줄 것을 요구했다.그러면서 측근을 시켜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계속 밀고나가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은근히 위협해왔다. 그래서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그를 제외시킨 정치문제논의는 무의미할 정도로 당시 정치상황에서 이승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던 것이다.유일한 정당이었던 한민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이로써 6월22일 제17차 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대통령책임제헌법안으로 번안하기에 이른다.이어 6월 23일 제17차 국회본회의에 대통령책임제 헌법안이 상정되어 20일간에 걸쳐 17차례의 토론을 벌였다. ○헌법안 20일간 격론 대통령책임제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한 것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명의의 헌법 전문은 단기 4281년 7월 12일이라고 분명히 적었다.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2일 자정을 약간 넘긴 0시28분에 제3독회를 마쳤다.그렇게 해서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었다.기초과정부터 풍파를 일으킨 제헌국회의 헌법제정은 파란만장한 헌정사의 장래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법은 7월 16일 제31차 본회의에서 제정되었다.17일 공포된 헌법절차에 따라 7월 20일 제37차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8월 3일 제37차 본회의는 이범석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은 가결시켰다.그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선출에 따라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김약수가 부의장이 되었다.이어 8월 5일 제40차 본회의에서 김병로 대법원장 임명 요청을 동의함으로써 정부수립을 위한 기본조치를 매듭지었다. 제헌국회에서 원내 세력판도의 윤곽이 드러난 시기는 의장단 선거를 전후해서다.이승만의 의장피선은 초당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만 2명의 국회부의장 선출에서는 그 색깔이 드러났다.신익희와 김동원의 부의장 피선은 원내세력을 국민회와 한민당이 주도했다는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이 때부터 각 정파 및 무소속의원들은 지연·인연을 따라 독자적 원내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적 이론파였던 성인회를 비롯,동인회,청구회가 연합하여 이른바 소장파 그룹을 만들었다.이 그룹은 한민당·이정회와 정립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이는 10월 13일 긴급동의로 제출한 미군철수 결의안과 한미간의 여러 협정에 극력 반대하는 것등으로 나타났다.특히 미군철수 결의안은 북한 최고 인민위원회가 미·소 정부에 두 나라 군대 철퇴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직후에 나왔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1948년 10월부터는 국군에 침투했던 남로당 세포조직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0월 2일 제주도군 경비1대대의 반란,10월 20일 제40연대의 여수·순천 반란,11월 20일 대구 제60연대 무장반란이 그것이다.엄청난 사상자를 낸 가운데 곧 진압되었지만,그 잔여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유격전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요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농개법 등 획기적 조치 그래서 국회는 11월 21일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준엄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당시 상황에서 국가 보안법 제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에 앞서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1949년 2월 3일에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이들 법률의 내용과 집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혼란과 대립도 뒤따랐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다.국회안에서 소장파 그룹을 형성했던 노일환,김약수,김옥주등 13명의 의원들이 1949년 5월 20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실로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 제헌국회의 얼룩이었다. ◎하버드대 소장 「사찰요람」/「국회 남노당 프락치사건」 북노당도 개입/당시 부의장 김약수 「배후 조종자」 분류/전 북노당 고위간부 “남북 합작” 증언 1949년 5월 20일 제헌국회의원 노일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 경우도 없지않다.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과 증언을 통해 이 사건 배후에는 남조선 노동당(남로당)뿐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북로당)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친연구소에서 입수한 사찰요람에 따르면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김약수는 「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분류했다.이 문서는 그가 1947년 조선공화당을 조직,서기와 선전부장이라는 당직을 맡았던 사실도 들추어냈다.그리고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주한미군 정보처(G­2)의 주간정보보고서는 제헌국회 개원초기 이들이 들어가 있던 무소속구락부를 반우파적 집단으로 평가했다. 이어 주간정보보고서는 무소속구락부가 앞으로 좌익성향 구성원들의 집합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미 군정의 예측은 어느 정도 적중되어 국회활동을 통해 미군철수 결의안을 긴급동의로 제출하는 등 북한의 주장을 동조하고 나섰다.국회 프락치 사건에연루한 이들은 주로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어 모두 3차례에 걸쳐 13명이 붙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만난 전 북로당 고위간부의 증언에서 북로당도 깊이 개입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이 증언에 따르면 북로당원 성시백(김삼룡·이주하와 함께 6·25가 일어난 1950년 6월 27일 서울에서 처형되었음)이 관련되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남로당과 북로당의 공작이 횡적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포섭된 인물은 황윤호(진양출신),김옥주(함양출신),강욱중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 중 반체제인사 집중감시… 긴장속 평온

    ◎내일 「천안문」 6돌… 북경표정/관료층 부패수사로 시민관심 분산유도/지원지 북경대는 외부인 출입통제 강화 천안문광장은 평화로웠다.상오에 비가 내린 2일에도 붐비는 관광객들과 연날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천안문광장을 평화롭게 보이게 했다.천안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천안문과 인민대회당,역사박물관 건물꼭대기에도 오성홍기만이 한가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도 6년전 이곳에서 있었던 자유에의 함성과 탱크,그리고 젊은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듯 했다. 6·4천안문사건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였던 북경대학도 교문에서 외부인 통제가 좀더 까다로워졌을 뿐이다.저녁무렵 교정은 학교부설 무도장과 가라오케를 오가는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캠퍼스 곳곳은 아베크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천안문사건 6주년을 맞는 지금,당시 강경노선에 앞장섰던 고위 책임자들은 대부분 제2선으로 밀려났다.예외라면 북경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던 이붕 총리 정도.이붕 총리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인민해방군의 북경진입을 발표했던 당시 양상곤 국가주석은 이미 은퇴했고 강경진압의 중심축이었던 그의 동생 양백빙도 군부내 수족들이 잘리고 입지가 약화되는 타격을 입었다.시위대 진압에 직접 관여했던 북경군구사령관 주의빙과 정치위원 유진화도 「보상」대신 군복을 벗고 인민대표대회 대의원으로 밀려났다.현재 중국 군부는 당시 군의 북경진입과 시위진압을 반대했던 장성들이 장악하고 있다.총참모부장 장만년,국방부장 지호전등 현 군부의 실세들은 당시 군의 무력진압을 반대했던 장애평,서향전등 소위 「8 상장」들의 직계들이다. 강택민 정권은 올초부터 반부패 사정활동과 법제화작업을 가속화시키고 있다.온 국민의 공분과 불안요소가 되고 있는 관리들의 부패에 철퇴를 가하고 국민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지난달부터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활동을 강화해왔다.등소평 사망이 임박해지고 있는 시점이어서 평안한 겉모습과는 달리 중국정부로서는 어느 때보다 바짝 긴장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래서일부학자들의 정치범등에 대한 관용호소에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어쨌든 올 「6·4」6주년도 당국의 철통 같은 감시와 경계 때문에 큰 일없이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겨울잠 증시/지난해 「황금주」 요즘은 어떤가

    ◎「황제주」 쟁탈전 주역… 동반하락 “쓴맛”/태광·이통/무기력장속 한진해운 “순항”/핵심 우령주… 11만원대서 “오락가락”/삼성전자/부광약품/「작전」 철퇴맞고 거래 “뚝”/대영포장/「감시대상」 약재로 폭락/한진해운/1백원 상한가행진 지속 작년에 「금싸라기」로 불리던 주식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올들어 종합주가지수가 1백30포인트 가까이 곤두박질치고 부광약품이 작전종목으로 드러나 작전세력들이 사법당국의 철퇴를 맞자 이들의 주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작년 연말 막판 뒤집기로 「황제주」로 다시 등극한 태광산업,사상최고의 주가를 기록한 한국이동통신,우량주의 대명사인 삼성전자,연속 44일 상한가의 신기록을 세운 부광약품,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한 대영포장,7개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가격제한폭까지 오른 한진해운이 주인공들이다. ▷태광산업◁ 주가가 가장 비싼 황제주.지난 24일 장중 한때 63만2천원까지 치솟았으나 하락세로 반전,60만원선이 다시 무너졌다.부채가 거의 없는데다 사내 유보금이 대부분 이익잉여금이어서고금리시대를 맞아 이자수입이 기대되는 게 호재다.28일의 주가는 59만6천원. ▷한국이동통신◁ 성장성과 수익성을 겸비한 초우량주.작년 9월6일 46만2천원을 기록하며 태광산업을 따돌리고 황제주가 됐으며 10월19일 사상최고가인 65만2천원을 기록했다.그러나 이동전화 가입보증금 반환이라는 돌발악재를 만나 폭락세로 반전되며 40만원대로 추락했다. 이동전화와 무선호출(일명 삐삐)사업의 호조로 매출액은 전년보다 87%가 늘어난 8천억원,순이익은 70%가 증가한 1천3백억원규모.바닥권을 다지며 반등을 시도하고 있다.주가는 45만원. ▷삼성전자◁ 가장 핵심적인 우량주.반도체경기의 호황으로 작년 상반기에 상장사중 가장 많은 이익을 기록하자 8월부터 상승탄력이 붙어 9월17일 15만원까지 치솟았다.기관투자가들의 매수여력이 줄어들며 내림세로 돌아섰다.최근 11만원대에서 움직이고 있다.주가는 11만4천원. ▷부광약품◁ 최근 검찰과 증권감독원으로부터 「작전」종목으로 드러나 철퇴를 맞았다.지난 9월7일 1만4천5백원에서 올 1월4일에는 12만5천원까지 폭등했다.아스피린을 대체하는 「아스파라톤」의 개발 및 지분경쟁설을 작전세력들이 의도적으로 퍼뜨려 주가를 끌어올렸다.지난 16일이후 거의 하한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검찰수사가 마무리될 무렵인 24일이후엔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으며 하한가를 기록.주가는 6만1천원. ▷대영포장◁ 작년에 6백73%가 오르며 최고수익률을 기록한 종목.연중 최저가(작년 5월6일 3천6백20원)와 비교한 최고가(12월5일 8만6천1백원)는 무려 23.7배 수준.무공해포장박스개발이라는 재료에다 특정세력의 주가관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폭등했다.그러나 증권당국의 감시대상이 되며 폭락세로 반전됐다.요즘은 3만3천5백원. ▷한진해운◁ 작년 5월23일부터 지난달 27일까지 무려 2백27일간 상한가를 기록중인 관리종목의 황제주.이 기간중 1만5천6백원에서 3만3천7백원으로 급등했다.해운경기의 호황에 힘입어 매출액증가와 실적호조로 자본잠식상태에서 벗어남으로써 관리종목의 탈출이 기대되는데다 가격제한폭이 하루 1백원에 불과한 게 상한가행진을 지속한 요인.이달중 관리종목에세 벗어날 전망.지금은 3만3천8백원이다.
  • 깨끗한 사회구현(민주화에서 세계화로:7)

    ◎성역없는 사정… 「부패고리」 지속적 절단/동화은·슬롯머신비리 의원·고검장 구속/「율곡사업」 “메스”… 전총장포함 「별」 42개 “추락”/인천 「도세」 충격… 중하위직과 토착비호세력 발본 역점 슬롯머신수사가 막바지에 달한 93년5월 김영삼 대통령이 여성계지도자들을 위해 마련한 오찬석상의 분위기는 여느때와 달랐다. 특히 여성유권자에게는 부드러운 이미지의 대명사로 통하던 김 대통령이 『나는 어떤 특정사안 하나하나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감사원장과 법무부장관에게 특별지시했다.골수에 맺혀 있는 「한국병」 즉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신한국」이 결코 이뤄질 수 없다』고 역설하자 좌중은 매우 숙연해졌다. ○한점 의혹도 없게 김 대통령은 같은 날 교정대상 수상자 접견자리에 배석한 김두희 당시 법무부장관에게도 『한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파헤치라』고 재차 지시했다. 대통령의 이같은 지시는 슬롯머신사건 및 동화은행 비자금수사와 관련,검찰내부에 비호세력이있어 수사가 축소·은폐되고 있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관심을 증폭시켰다.그동안 사정의 최고기관임을 자임해온 검찰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지시가 검찰내 비호세력 수사의 「전환점」이 돼 이건개전대전고검장의 구속 등 「성역 없는 사정」으로 이어졌다. 서울지검의 한 간부는 당시 긴박한 상황에 대해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다.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이 깊은 반성과 함께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평소 정부정책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기로 이름난 대한변협도 『군과 검찰 같은 권력집단의 「구각」을 깨는 일은 김 대통령만이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 역시 사정의 고삐를 죄는 데 불을 댕겼다.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검찰의 수장격인 김덕주 전대법원장과 박종철 전검찰총장이 전격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법원의 한 고위관계자는 『공직자 재산공개는 깨끗한 정부를 구현하기 위한 제1보였다』고 말했다. 문민정부의 위력을 실감케 한 이들 사건은 공직사회의 「코페르니쿠스적 의식전환」을 요구한 셈이다. 또한 과거 군사정권의 총애를 받으며 성역중의 성역으로 꼽히던 군부도 사정의 도마위에 올라 국민의 「심판」을 달게 받았다. 군전력증강사업과 관련된 율곡비리사건으로 70여명에 이르는 군관계자가 군복을 벗었다.특히 해군과 공군의 진급인사와 관련된 상납비리는 군의 감춰진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별값」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상훈·이종구 전국방장관과 김종호·김철우 전해군참모총장,정용후·한주석 전공군참모총장,조기엽 전해병대사령관 등 군 최고수뇌부의 양어깨를 장식하던 42개의 별이 이틀에 한개꼴로 떨어졌다. 조직폭력배의 서식처가 돼온 슬롯머신업소에 대한 수사도 궤도를 되찾아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씨 형제 뒤에 숨어 있던 박철언 전의원,이전대 전고검장,엄삼탁 전안기부기조실장,천기호 전치안감 등 「비호세력」이 철퇴를 맞았다. ○제2사정 신호탄 그러나 지난해 9월 터져나온 인천북구청 세무비리사건은 그동안의 사정결과에 대해 다소 자만에 빠진 정부당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이에 따라 사정의 무게축도 고위공직자 중심에서 중하위직으로 바뀌었다. 국민과 직접 접촉하는 중하위직 공직자의 고질적·구조적 부정부패가 아직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음이 증명되면서 「제2사정」의 신호탄이 오른 것이다. 정부의 강력한 사정으로 93년부터 2년동안 모두 8천2백5명의 부정부패사범이 적발돼 이 가운데 3천5백79명이 구속됐다.구속된 공무원만도 9백28명에 이르렀다. 93년2월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깨끗한 정부」를 표방해온 우리나라와 얼마전까지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던 이탈리아를 비교해보자. 김 대통령은 여전히 사정의 고삐를 죄고 있는데 반해 「마니 풀리테」를 시작한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총리을 비롯,부패척결을 집권공약으로 내세워 총리직에 오른 베룰루스코니 전총리 등 전직총리 3명이 거꾸로 사정의 대상이 돼 법정에 섰다.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던 사정의 견인차 피에트로 검사도 정치권의 외압에 의해 현직에서 물러났다. ○3천5백명 구속 지속적인 개혁을 위한 사정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탈리아의 사정활동이 주춤거리고 있는 것은 지도층의 도덕성 결핍과 부정부패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최고통치권자의 흠집 없는 도덕성과 강력한 부정부패척결의지가 여전히 개혁의 구심력이 되고 있다. 김영진 대검수사기획관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고위층·사회지도층에 대한 사정작업이 성과를 얻은 틈을 타 지방토착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위직 비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면서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국민의 공복임을 망각한 이 일부 중하위직 공직자의 구시대적 부정부패의식을 뿌리뽑는 데 올 한해 검찰의 모든 수사력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계화에로의 길을 가로막는 부패세력에 대한 「제2의 사정전쟁」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주요 사정 수사 일지 93.5 상지학원비리 김문기 전의원 구속 93·4∼9 동화은행비자금 안영모 전동화은행장 〃 김종인 전의원 〃 이용만 전재무장관(해외도피중) 93·4∼5 군인사비리 김종호 전해참총장구속 조기엽 전해병대사령관〃 정용후 전공참총장〃 93·5 슬롯머신비리 정덕진 구속 이건개 전고검장〃 93·6∼94·11 포항제철관련 황경로 전포철회장 등 4명구속 박태준 전포철회장(불구속기소) 93·7 율곡사업비리 이종구 전국방장관 구속 이상훈 〃 한주석 전공참총장 〃 김철우 전해참총장 〃 김종휘 전외교안보수석(해외도피중) 93·11 한화그룹외화유출 김승연 회장구속 94·1 상무대공사대금횡령 조기현청우종합건설대표등 2명 구속 94·3 농협비리 한호선 회장 구속 94·3 상문고비리 상춘식 상문고교장 구속 박병용 전국립교육평가원장 〃 94·4 대전엑스포수뢰 이정재 등 12명 구속 94·8 한전사장수뢰 안병화 전사장 구속 94·10∼11 인천북구청,부천세무비리 65명 구속 94·12도로공사비리 전병식 전사장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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