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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개위 발표 개혁안/재정신청 확대‘특검제 효력’

    사법개혁추진위원회(사개위)가 7일 발표한 개혁안 중 눈에 띄는 것 가운데하나는 재정신청(裁定申請) 대상 범죄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가 제대로 정착만 되면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특별검사제를 대체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검찰이 특검제 도입을 저지하기 위해 재정신청 범위 확대를 양해했다는 분석도 있다. 재정신청은 현행 형법 제123∼126조에 공무원의 직권남용,불법체포·감금,폭행·가혹행위 등 3개 범죄로 국한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재정신청은 ‘장식용’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번 사개위 개혁안은 공무원의 직무와 관련된 모든 범죄와 지방자체단체나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이 저지른 모든 범죄로 확대했다. 따라서 공무원의 독직사건은 물론 뇌물수수·횡령 등에 대해서도 재정신청을 통해 기소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선출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의 모든 범죄로까지 재정신청 대상을 확대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인 결정에 철퇴를 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이 아닌 ‘정치인’에 대해서는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대한광장] 마비된 안전의식

    동네에 도시가스가 시설되고 난 몇달 후였다.무엇이 잘못 됐는지 배관이 묻혀 있는 대문앞 4미터 도로가 걸핏하면 파헤쳐져 차량출입이 금지되고 길에서 파낸 시멘트 파편들이 길을 메워 통행을 어렵게 했다. 무엇보다 시멘트를 부수는 굴착기 소음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먼지또한 집주변을 덮쓰듯 해서 참지 못하고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그리곤 “처음부터 철저하게 잘했으면 이렇게 두번 세번 파헤치지 않을 것 아니냐”하고 음성을 높였다. 그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미안하다는 말도,자기들이 첫 공사를 하지 않았다는 책임회피의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주민들의 질책에 면역이되어버린 사람들처럼 무표정에 무반응이었다.순간,섬뜩한 느낌이 왔다.YS정부 때의 엄청난 대형사고들이 떠오르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부르짖던 ‘안전’이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저렇듯 무감각 면역만 생기게 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지만 열차탈선,비행기 추락,배 침몰 거기다 땅속 가스폭발까지 하늘 땅 바다를 넘쳐 캄캄한지하로까지 뻗쳐지는가 싶더니,이듬해에는 멀쩡해 보이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아파트가 종이 구겨지듯 붕괴하는,그야말로 귀신도 경악할 대형참사가 터지면서 수백명의 소중한생명이 비명에 사라지지 않았던가. 사건이 연발할 때마다 모든 입달린 사람들은 안전을 부르짖고,또한 피맺히게 우리의 안전불감증을 성토했다. 성토의 기세가 워낙 크고 절실했기 때문에 이후부터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제반 시설물에는 안전규칙이 필히 지켜질 것이라 믿었다.안전불감증에 고질화된 중증환자라 해도 나라가 흔들릴 만큼의 대형사고를 겪었으니 스스로 깨달아 변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후 또다시 가슴을 에이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돈독이오른 어른들의 상혼(商魂)과 행정 관계자들의 무책임한 처리로 가건물 컨테이너가 철골조 정상건물로 둔갑되어 억만금 같은 어린 생명들을 화염으로 앗아가게 하고 말았다. 고사리손의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숨막히고 뜨거웠을 것이며 공포에 떨었을까 생각하면 명치께가 난자당하듯 저며지고 그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은죄책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다.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싶으면 그만 말이 막힌다. 그간 우리들의 안전불감증에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불과 수년전의 참사들을 TV드라마 시청하듯 건성으로 구경하고 세월따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인지,아니면 불감증이 불치의 질환으로 전신을 마비시킨 것인지실로 멍할 뿐이다. 세계의 방송 언론들은 한국을 당연히 교통사고 세계 1위에다 대형사고 1위국으로도 부상시켜 놓고 있다.누구의 자조(自嘲)처럼 과연 우리 민족은 북한의 게릴라 수출,마약밀매 기술 등과 함께 세계에서 유별난 특성의 종족인 것인지 새삼 음미해 보게도 된다. 물론 안전불감증이 불치의 질환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새로 태어나듯새 삶을 시작하듯 기초부터 완벽하게 원칙을 고수하는 ‘다지기교육’을 받을 자세만 되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변화·완치의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무자비한 횡포로 비명에 스러진 어린 원혼들의 피울음을 이번에야말로 망각해서는 아니 되리라는 생각이다.얼굴을 붉혀 부끄러워하면서 최소한의 어른 자존심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그것을 기억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음은 아직도순수한 인성(人性)을 지녔다는 것이고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됨으로의 여백이 있다.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의 가능성 또한 펼쳐져 있는 것이다. 무감각 무반응의 섬뜩한 마비와 납빛 면역현상은 지구의 황폐화 초래와 인간되기 거부의 자초 외에 더는 아니기에 씨랜드 아기들 참사사건은 어른들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자기 단근질의 철퇴로 영원히 살아 남았으면 싶다. 필자만의 바람일까만은. [김지연 작가]
  • [외언내언] 6월 항쟁

    그대는 가는가/어딜 가는가/그대 등 뒤에 내리깔린 쇠사슬을/마저 손에들고 어딜 가는가/이끌려 먼저 간 그대 뒤를 따라/4천만 형제가 함께 가야 하는가/아니다/억압의 사슬을 두 손으로 뿌리치고/짐승의 철퇴는 두 발로 차버리자/그대 끌려간 그 자리 위에/민중의 웃음을 드리우자/그대 왜갔는가/어딜 갔는가/그대 손목 위에 드리워진 은빛 사슬을/마저 팔찌 끼고 어딜 갔는가/ 87년 6월9일 교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20·경영학과 2년)군은 사고 전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군사독재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과 다짐을 담은 습작시를 남겼다. 그는 27일간의 혼수상태 끝에 7월5일 새벽 스무살의 짧은 생애를 거뒀다.민주제단에 온몸을 바친 것이다. 연세대에서 열린 영결식장에서 이군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단상으로 올라와“젊은이들이여!우리 한열이가 못다 이룬 민주화를 꼭 성취해주세요”라고울먹이면서“살인마 물러가라,살인마 물러가라”고 오열,영결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때가 어제같다. 이한열군을 필두로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은 잠자던 국민의 양심을 일깨우고,봇물처럼 흘러넘친 민중의 힘은 마침내 독재의 철옹성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6월26일의 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에 전국 33개 시,4개 군의 180만명이 참가하는 거대한 민중의 힘 앞에 독재세력은 6·29항복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6월항쟁은 1926년 6월10일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독립만세운동과 함께 민족해방과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우연찮게 같은 날에 접목되는 우리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날이기도 한다. 6월민주항쟁 12주년에 즈음하여 행사추진위원회(공동대표 김승훈 신부)는각계 610인 선언을 발표하고 정부에 강력한 개혁을 촉구했다.또 여러가지 행사를 통해 항쟁의 정신을 기린다.이와 함께 민주재단 및 민주화운동기념관추진위가 구성되어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민주화운동사업 추진 주체를‘민주화운동기념사업추진준비위원회’로 통합하고 기념관 건립과 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민주상 제정,연구소 등을 세워 민주화운동 계승과 민주인사 지원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6월행쟁을 모태로 하여 태어난 김대중(金大中)정부는 개혁을 통해 그 정신을 잇고 각종 사업에 적극 협력해야 할 것이다.
  • 前하원의원 조나단 에잇컨

    영국 사법부가 6년동안 60여만원의 ‘향응’ 혐의를 부인해온 정치가에게철퇴를 가했다. 영국 고등법원은 8일 언론사와 명예훼손 소송 중인 조나단 에잇컨 전 하원의원(56)에 대해 위증죄와 재판방해 모의죄를 적용,18개월형을 선고하고 법정수감했다. 재판부는 에잇컨이 2년전 열렸던 재판에서 자신의 부인이 호텔 숙박비의 일부인 4,257프랑(약65만원)을 계산했다고 위증하는 한편 부인이 딸과 함께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허위 증언진술서를 작성,딸에게 서명케 한 사실이입증됐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에잇컨은 보수당 총리감으로 지목받기도 했던 전도유망한 정치인이었다.그러나 영국 가디언 지와 그라나다 TV의 ‘행동하는 세계’ 프로그램이 지난 93년 10월 당시 국방부 조달국장으로 사우디 왕가와 방산계약을 진행중이던그가 한달전 사우디 왕가소유의 파리 리츠호텔에서 주말을 보내고서 숙박비를 아랍 사업가에게 대납토록 했다고 보도하면서 그는 영락의 길을 걷게 됐다. 내각의 자체 조사에서 사업가가 아니라 부인이 숙박비를 계산했다는 에잇컨의 진술이 받아들여 지고 각료선물제한법 위반 혐의도 벗은 뒤 94년 7월 존메이저 총리에 의해 재무차관으로 임명되자 대납 의혹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두 언론사는 그해 10월 에잇컨이 영국을 방문하는 아랍고객의 채홍사 노릇을 한 것은 물론 방산회사인 BMARC의 중역으로서 이 회사가 유엔제재를 무시하고 이란에 무기를 판매한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에잇컨은 95년 10월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끈질긴 가디언지가 최근 에잇컨의 부인이 문제의 97년 6월 주말동안 파리가 아닌 스위스에 있었다는 새로운 증거를 내놓자 그는 무릎을 꿇었다.명문 이튼과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보수진영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거짓말의 대가로막대한 법률비용 지출에 따른 파산과 이혼,굴욕만을 얻었을 뿐이다. 박희준기자 pnb@
  • 환타지 로드·서울88

    슬롯머신 업소는 지난 93년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鄭德珍)씨가 구속되면서 철퇴를 맞았다. 93년 12월에는 투전기업소의 신규허가를 중단하고 재허가를 금지하며 기존업소는 유효기간 동안만 영업을 허용하는 내용의 사행행위 규제 및 처벌에관한 특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슬롯머신 업소의 영업이 사실상 전면 금지된 것이다. 슬롯머신은 65년 5월 외국관광객 유치라는 명분으로 서울 워커힐호텔에 처음 등장했으며 70년대까지는 45곳에 불과했다. 그러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전후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93년에는 319곳이나 됐다. 슬롯머신의 신규영업이 금지된 지 2년3개월여 만인 96년 3월,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천지호텔의 천지오락실이 문을 닫으면서 슬롯머신 업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슬롯머신 대신 등장한 것이 게임오락장.현재 전국에 1만8,000여개의 업소가 운영되고 있다.명칭은 오락장이지만 상당수 업소가 사행성 기기를 설치해놓고 당국의 단속을 교묘하게 피하며 숨바꼭질식의 불법영업을 하고 있다. 업자들은 오락기기로 심의를 통과한 뒤 내부기기를 조작하거나 경품을 내거는 수법을 쓰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환타지 로드’와 ‘서울88’은 사행성이 확연히 드러난 빠찡꼬·슬롯머신류의 오락기기인데도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의심의를 통과했다. 슬롯머신처럼 릴식 기기인 ‘서울88’은 동전을 넣고 게임을 통해 일정한점수를 얻으면 경품을 주는 형태라는 점에서 슬롯머신과는 차이가 난다. 다만 베팅 보너스 현금배당 등 지불형태가 복잡하다는 점에서 변형된 슬롯머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공진협이 문제의 오락기기를 허가해주었다고 하더라도 슬롯머신이나 빠찡꼬업 자체는 여전히 불법이다.슬롯머신·빠찡꼬 전문 업소는국내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 특별취재반
  • 가격담합 맥주3사 과징금

    국세청의 행정지도를 핑계로 값을 똑같이 올렸던 맥주제조 3사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부과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공정위는 26일 ㈜두산(옛 오비맥주)과 하이트맥주㈜,진로쿠어스맥주 등 3사가 98년 2월 병맥주와 캔맥주,생맥주 등 각 주종의 가격을 똑같이 올리는 부당공동행위를 해 총 11억4,600만원의 과징금을 물렸다고 밝혔다. 맥주3사가 가격담합 혐의로 과징금을 부과받기는 처음이다.행정지도를 핑계삼아 가격을 담합해 온 주류업계의 뿌리깊은 관행에 공정위가 철퇴를 가한것이다.과징금은 매출액 규모에 따라 두산이 2억3,800만원,하이트가 6억7,800만원,진로쿠어스가 2억3,000만원 등이다. 공정위는 “국세청이 맥주3사에 대해 평균 가격인상률이 한자릿수 이내가되도록 지도하긴 했으나 업체들이 종류별·규격별 인상률을 각각 8.5∼14.0%로 똑같이 한 것은 각 회사의 원가나 경쟁력을 무시한 것으로 위법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김상연기자
  • 거리 불법광고물 살포에 ‘철퇴’

    서울 송파구(구청장 金聖順)가 주택가나 학교주변에 무분별하게 뿌려지는광고전단에 대해 철퇴를 가했다. 구는 19일 지난 3월부터 불법 길거리 광고전단에 대해 단속을 벌여 살포업자 30명을 적발,처음으로 폐기물관리법 위반혐의를 적용해 각각 10만원씩의과태료를 부과했다고 밝혔다. 구는 또 이가운데 유흥업소의 선정적인 전단이나 자동차를 담보로 한 대출안내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불법 광고물을 뿌린 20명에 대해서는 경찰에 광고물관리법 위반혐의로 고발조치했다. 행정기관이 불법광고물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행위자를 적발,처벌한 것은 처음이다. 이번 과태료 부과 및 고발고치는 현장에서 광고물 사진을 찍은 뒤 전화국을 통해 전화번호 주소지를 파악,청문을 거쳐 이뤄졌다. 송파구가 불법 광고물에 대해 단속에 나선 것은 가정집이나 차량 등에 유흥업소를 홍보하는 나체사진이 뿌려져 청소년들의 탈선을 부추키고 대출안내전단 역시 고금리로 가정파탄을 불러오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구는 이와 함께재활용과 직원 및 공익근무요원 등 13명으로 불법광고물 특별단속반을 구성,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단속을 벌일 방침이다. 전상영(全相榮) 재활용과장은 “주택가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3분의 2가 불법전단”이라며 “주민의 정서를 해치고 거리를 더럽히는 선정적이며 퇴폐적인 광고물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단속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덕현기자 hyoun@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22)-창작과 비평사

    진시황은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었다.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앗은 자들은 늘 그러했다.저항을 부르고 수많은 ‘금지’를 낳았다.우리 현대사에도 ‘지상의 양식’을 지향하다 ‘잉크를 묻힌 죽은 물체’가 돼버린 옥고들이 많다. 시집 ‘신동엽전집’(75),‘국토’(조태일),‘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82)‘대설 남(南)’(〃,82),‘8억인과의 대화’(리영희,77)…등도 그 대열에있다.당국의 붉은 딱지가 붙은 이 책들은 모두 모태가 같다.69년 등록한 출판사 ‘창작과 비평사’다. 저항의 첫 발은 약간 거슬러 올라간다.66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문우출판사에서 발행한 132면의 문예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그것. ‘…대중의 소외가 혹심한 사회일수록 철저한 수준을 고수하는 소수 작가·지식인의 비중이 커지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국토분단과 기성사회의 모순을 유지함으로써만 자신의 특권을 간직할 수 있는 소수를 제한다면,적어도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잠재적으로나마 우리의 이상에 동조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창작과 비평’창간호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자세’의 일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영문학자 백낙청교수의 의도에 공감한 국악인 황병기씨 등 지인들과 문우출판사 오영근사장 등이 쌈지돈을 모았다.‘비평의 정신’을 싹틔운 주역은 백교수와 소설가 한남철,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조교 김상기,기자이던 임재경·이종구씨 등 5인이었다.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어조는 단호했다. 69년 백낙청교수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염무웅교수(영남대 독문학)가 편집장으로 바통을 이어받아 암울했던 70년대를 버텼다.염교수는 ‘창비의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사회과학이나 현실에 발딛고 기본 민주주의 성취,실학·국학시리즈로 민족 전통의 현대적 계승과 분단 극복 지향,기층 민주주의 역량성장에 이바지등 3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학의 고유한 미적 가치를 최대로 추구하면서 이런 과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목적주의 문학이나 천박한 참여문학과는 차별성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에 발행한 ‘신동엽전집’(창비신서 10,75년)이 긴급조치 9호의 미움을 사면서 창비의 ‘화려한 금서 리스트’가 막을 연다.이어 77년에 ‘8억인과의 대화’(창비신서 18)로 편역자 리영희교수와 발행인 백낙청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리교수는 구속되고 백교수는불구속 기소되었다. 수난속에서도 명맥은 유지하던 ‘창비’는 80년에 이르러 ‘절망적인 탄압’에 직면한다.7월말 국가보위입법회의로부터 계간 ‘창비’의 강제 폐간이라는 철퇴를 맞은 것이다. 암중모색하던 ‘창비’는 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창비시선 33)로 새벽을 열려고 나섰다.이화여대·연세대 앞에서 불티나게 팔리던시집은 학원사찰팀의 눈에 띄여 판매금지·압수라는 공식적인 과정을 거쳤다.“압수된 책이 작두로 잘렸다”는 ‘창비인’들의 회고는 당시 검열의 상징이다.심지어 국세청 세무사찰로 추징금 1,000만원을 부과하는 비열한 수단도 동원했다.이에 굴하지 않고 ‘대설 남’ 1권을 내놓았으나 문공부가 판매금지하고 전량을 봉인했다. 끊임없이 ‘비판의무기’를 갈던 ‘창비사’는 85년 부정기간행물(무크)로 얼굴을 달리하여 ‘창비’ 57호를 간행했다.이번에는 서울시가 불법으로 정기간행물을 냈다는 꼬투리를 잡아 ‘출판사 등록 취소’로 탄압했다. 그러나 이제 ‘창비’는 혼자가 아니었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의 항의농성 및 성명발표와 ‘문학과 지성사’ ‘민음사’등 11개 출판사 대표의 항의성명이 이어졌고 문인·학계 인사가 중심이 돼 등록취소에 항의하는 ‘범지식인 서명운동’을 펼쳐 2,853명의 서명록을 문공부에 전달했다. 당시 발행인이었던 김윤수교수(영남대)는 “회사가 없어져 책임자로서 어깨가 무거웠다”면서 “‘창비’를 살리려고 문공부 담당국장과 10개월의 마라톤 협상에 들어갔다”고 밝힌다.그 과정에 당국은 ‘창비’ 회생조건으로 백교수가 손을 떼고 이름도 바꾸라고 강요했다. 어렵사리 사태를 수습한 김윤수 발행인은 86년 8월5일 ‘창작사’로 신규등록했다.87년 2월6일 부정기간행물 형태로 ‘창비 1987’(통권 58호)을 간행했다.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는 없다’는 말이 있듯 ‘창작사’는 87년 2월17일 ‘창작과 비평사’라는 출판사 이름을 되찾았고 다음해 계간 ‘창비’도 다시 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평탄한 앞날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어 다시 수난시대로 접어든다.이시영주간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이시영 상임고문은 “11월 23일 퇴근 길에 남산으로 끌려갔는데 안기부는그동안 저를 통해 최대로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문단에 대한 총점검을 하려고했다”면서 “‘창비’ 매호를 낱낱이 분석하고 필자들 성향까지 꿰뚫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숨가쁜 ‘창비’의 발자취에는 일그러진 현대사의 모습이 오롯이 녹아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기름지게 한 거름이기도 하다.정해렴 김윤수 고세현씨등으로 이어지는 발행인을 중심으로 현대사의 주역들을 일궈냈다. 고은 조태일 김지하 신경림 이성부 이시형 김용택 곽재구 김남주 고정희 김명수 등이 시로 독재자에‘침을 뱉었다’.이문구 황석영 현기영 방영웅 김한수 등이 소설이라는 쟁기로 척박한 땅에서 리얼리즘의 열매를 일구었다.송건호 리영희 박현채 강만길씨 등은 우상을 깨고 이성을 외쳤다.‘창비’는이들의 ‘사상의 거처(居處)’였다. 이제 ‘창비’의 나이 33세.‘잔치를 끝내지 않으려’는 과제가 남아 있다. 지난 96년 ‘영원한 창비인’ 백낙청교수(하버드대 교환교수로 재미)가 창비 30년을 정리하면서 밝힌 입장에서 ‘창비’의 앞날은 여전히 튼실할 것임을 예고한다. “정말 중요한 일은 시장경제의 논리와 ‘창비’ 고유의 지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혹은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이겠습니다”이종수기자 vielee@
  • [제2공화국과 張勉](15)분출하는 욕구(下)/기고

    1961년 2월4일 장면(張勉)총리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李承晩)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신문은 학생세력·민주당과 더불어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자유당 정권은,비록 그후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언론에 대해 탄압을 거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이다.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은 그 무렵 자유당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장면이 대표하는 민주당 신파를 지지했다.따라서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꼬투리를 잡아 경향신문에 철퇴를 가했다. 그러나 도하 각 신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시민의 항거를 끊임없이 보도했다. 따라서 4월혁명후 언론은 명실공히 입법·사법·행정에 못잖은 ‘제4부’로떠올라 그 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언론계의 변화는 먼저 양적인 팽창으로 나타났다.1960년 3월31일 현재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각종 정기간행물의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의 41종에서 112종으로,일간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주간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그야말로 ‘사무실 한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고 실업자 서너명만 모으면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는’시절이었다. 언론사가 급증하자 사이비기자가 판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에 따라강경·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이비기자 물러가라”며 데모하기도 했다.한국일보가 1961년 2월 말 연재한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記者群)-공갈기자’시리즈를 보면 그들의 성분과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공갈기자’와 ‘진드기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연무대 주변에서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또는 CIC군관,이밖에 퇴역군인이다.그래서인지 ‘진드기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통있는 언론사야 행태가 물론 달랐지만 그들 역시 정부 시책을 사사건건물고 늘어져 비난하는 것을 신문의 의무로 아는 듯했다.당시 언론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장경근(張暻根)이입원중인 병원을 탈출,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이 발생한다.이에 서울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국무총리 장면과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된 장경근을 한데 엮어 비난한 것이었다. 장총리의 공보비서관인 송원영(宋元英)이 서울일일신문의 이관구(李寬求)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이사장도 “이건 너무했다”면서 윤전기를 멈추고 만평을 뺐다고 한다(송원영 회고록에서).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있다 바로 공보비서관이 된 송원영은 “모든 매스컴이 장면정권을 두들겨팼다.마치 언론자유는 장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신문이 보도 면에서 신중과 자제를 잃어(宋建鎬 표현) 독자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부산일보는 동아대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20일동안 휴간했으며,한국일보는 ‘혁명전야’라는 연재소설에서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연세대생을 모욕했다는 항의를 받자 연재를 중단했다.박태선(朴泰善)장로교회 신도 수천명이 대낮에 동아일보 사옥에 침입,난동을 부린일도 있었다. 장면정부는 언론의 이런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설득하는 이외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장면정부의 언론 주무장관인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은 “심지어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쓰곤 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는‘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자리를 잡겠지’하는 생각에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세월이 흐르면 책임을 깨닫고 스스로 바로 설 것이라는 그 자율기능을 믿은 것이다. 장면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썼다.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4월혁명을 이룰 때까지 민주당과 신문은 ‘동지’였다.그러나 장면정부가들어서자 어제의 동지는 ‘적’으로 돌변했다.5·16쿠데타후 신문은 장면정부를 망친 ‘3신(新·신문,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신파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 가운데 하나로 인구에 회자됐고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이용원기자 ywyi@[기고] 언론자유 수호 自淨운동 싹 틔워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됐다.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허정(許政)과도정부는 1960년 7월1일 법률 제553호로서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이로써 허가제를 규정한 미 군정법령 88호는 폐지됐고,이제 등록만 하면 누구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과거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부서였던 공보실이 폐지됐고,국가보안법과선거법에 삽입된 언론통제 조항도 삭제됐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자유를 누렸다.그러나 갑자기 언론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 전에 비해 3배 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한편 1960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서울 등지의 여러 신문사에서 노조가 차례로 결성됐고,KBS도 ‘방송중립화 운동’을 펼쳐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그리고 1961년 2월13일에는 일본 거류민단계의 조용수(趙鏞壽)가 중심이 되고 국내 혁신계 인사인 송지영(宋志英) 윤길중(尹吉重)고정훈(高貞勳) 등이 참여한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게됐다. 이런 가운데 자신들에 관한 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항의시위나 난입,그리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이같은 사태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한 언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고 한 일부 독자들의 잘못된 의식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듯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언론자유는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집권 이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언론규제 장치로 ‘외국 정기간행물 국내 배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이것은 신문이 등록제로 대체되면서 폐기된 미군정법령 88호중 제5조만 유효하다는 유권해석과 함께 그것을 대신하는 법령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한 창간되기도 전에 민족일보에 대해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창간 이후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무국에서 제작됐는데,민주당 정권은 61년 3월 초에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하여 이 신문의 조판과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직접 언론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언론자유는 대체로 보장된 편이었다.또한 ‘신문망국론’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던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가 스스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시기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언론자유가 처음으로 허용됐고 또 이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언론계 스스로의 노력도 시작됐다는 점에서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5·16 이후 언론자유는말살되고,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며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신문학]
  • 세모네모-취임2년 田공정위원장 토로

    “어휴,개혁하기가 이렇게 힘듭니까” 지난해 11월 24일 공정거래위원장실에서 만난 田允喆위원장(60)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토해냈었다.그의 얼굴은 창백했다.전날 공정위가 포항제철과광양제철소 분리방안을 포함한 철강산업 경쟁촉진책을 내놓은 뒤 해당업계는 물론 산업자원부 등 정부부처까지 월권이라며 공정위에 집중포화를 퍼붓던때였다. 당시 공정위 직원들은 “포철 분리방안은 발표내용중 극히 일부분인데도 경쟁촉진책 전부가 문제인 것처럼 몰아붙인다”라며 억울해했다. 이 사건은 새 정부 들어 부쩍 강화된 공정위의 위상과 그에 따른 주변의 견제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였다.더 좁혀서 말하자면 ‘개혁의 전도사’ 田위원장에 대한 견제라 할 수 있다. 지난 한해 “너무 튄다”는 이유로 시샘을 받을 만큼 종횡무진 활약했던 田위원장이 지난 6일로 취임 2주년을 맞았다. 田위원장의 재임기간이 유난히 관심을 끄는 것은 임기가 이제 1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과연 1년안에 부당내부거래를 근절하고 상호채무보증을 해소하는 등 재벌개혁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그가 지금까지 올린 ‘실적’으로만 따지자면 목표를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지난해 공정위는 두차례에 걸쳐 5대재벌의 부당내부거래를 조사,914억원의과징금을 부과했다.6대이하 5개 재벌에 대해서도 부당내부거래 혐의로 217억원의 과징금을 물리는 등 철퇴를 가했다. 田위원장은 지난 6일에도 주변에 특별한 심경을 밝히지 않았다.하지만 애연가인 그가 30여년간 피워온 담배를 올초부터 끊은 데서 결연한 각오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고 직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金相淵 carlos@
  • 당국, 회사채 금리 안내려 ‘골치’

    재정경제부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등 관계당국이 회사채 금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은행간 급전인 콜은 연 5%대,만기 3년의 장기채인 국고채는 6%대까지 떨어졌으나 회사채는 8%대에서 묶여있는 ‘기(奇)’현상이 빚어지고있기 때문이다. 회사채 금리가 낮아지지 않으면 중소·중견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된다.은행권의 대출금리 인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왜 안내리나…당국은 회사채 금리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다.5대 그룹 발행 회사채 물량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한 조치의 부작용이 우선 꼽힌다.물량 규제로 기관투자가인 투자신탁사 등의 수요가 줄어 회사채 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투신사들이 전반적인 금리인하 추세에도 불구하고 공사채형 수익증권 등 투신상품의 수익률을 높게 제시하며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점도 회사채 금리를 떨어지지 않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부작용…회사채 금리가 떨어지지 않으면 중소·중견기업들은 비용부담 증가 등으로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 진다.대기업은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나 중소·중견기업은 쉽지 않다. 당국은 투신사들이 수익증권 수익률을 높게 제시하고 있는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은행들은 예금금리를 낮추고 싶어도 자금이 투신사로 몰려갈 것을우려하고 있으며,그로 인해 대출금리도 떨어뜨리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당국 대책…금감원은 투신사들이 일부 신탁상품에 대한 확정금리를 제시하며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에 철퇴를 가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금감원은그러나 ‘5대 그룹 발행 회사채 매입 제한조치’는 회사채 금리인하에 악영향을 끼치는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재벌의 자금시장 독식을 막는다는 도입 취지를 살리기로 했다.
  • 소비자우롱 기업 잇단 철퇴

    매출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거짓광고로 소비자를 현혹한 악덕기업들이 잇따라 철퇴를 맞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3일 엔진오일 제조업체인 주식회사 세진상사(대표 趙鐘勳)에 대해 허위·과장광고 혐의로 시정명령과 함께 법위반사실을 중앙일간지에 게재하라고 강제명령했다. 세진상사는 지난 97∼98년에 걸쳐 ‘SP-2000’이라는 엔진오일을 신문·전단 등에 광고하면서 객관적인 실험결과나 근거자료도 없이 ‘무교환,17만㎞주행’이라는 표현을 게재,마치 SP-2000을 한번만 주입하면 17만㎞를 달릴수 있는 것 처럼 속인 혐의를 받고 있다. 세진상사는 또 지난해 9월 사은행사를 하면서 신문 등에 ‘고객 선착순 300명에게 가정용 정수기를 무료로 드립니다’라고 광고해놓고 실제로는 6만9,000원을 지불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정수기를 제공했다.이에앞서 공정위는 12일 일간신문에 기만적인 방법으로 광고를 한 모토로라 반도체통신(대표 조지 윌리엄 터너)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중앙일간지에 법위반사실을 게재하라고 강제명령했다.특히 모토로라는 지난해 5월에도 광고에 휴대폰을 무료로바꿔주는 것 처럼 표현해놓고 실제로는 돈을 받고 판매,부당광고 혐의로 시정명령을 받은 적이 있어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한편 공정위는 국내 양대 소주제조업체인 두산과 진로가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는 광고를 게재한 사실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공정위는 두산이 신문광고에 진로소주를 떠올리게 하는 청색 소주병을 세워놓고 ‘흘러간 노래’라고 표현한 것과,진로가 ‘왜 그런소주를 마셨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을 사용해 두산의 그린소주를 연상시킨 것이 상대방 제품에피해를 주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제재할 방침이다.金相淵 carlos@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4회)

    ◆종교계 '민주운동 거목' 박형규 목사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의 실천운동을 벌이면서 숱한 옥고를 치렀던 朴炯圭목사(76).유신체제 아래서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로 꼽히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재야 원로다. 박목사는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운동으로부터 시작해 남산 야외음악당사건과 민청학련 사건,그리고 교회탄압에 맞선 노상예배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주역으로 92년 은퇴때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던 종교인.유신체제 하의 거침없는 발언으로 인한 탄압과 압박은 5·6공 군사정권까지 계속돼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박목사가 세인들의 관심대상이 된 것은 73년 남산야외음악당 사건.이로부터 시작된 민청학련 사건과 이와 관련한 그의 금서(禁書) ‘해방의 길목에서’(74년 사상사刊)에는 잊지못할 사연이 담겨 있다. 남산 야외음악당사건은 서슬퍼런 유신체제에 대해 공식 항거한 첫 집단운동.10월 유신이 시작된지 6개월만인 73년 4월22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당시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목사는각 교단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빈민들의 실질적인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20개 교단의 연합예배가 열리던 이날 행사장에는 10만명이 운집했다.언론자유와 학원자유 교회갱신 등을 주장한 플래카드와 전단을 마련,행사 당일 알리려는 사전 준비가 돼 있었다.행사장 주변에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펴 전단과 플래카드를 준비한 학생과 지역주민들이 정작 행사장 근처엔 접근도 못한 채 전단과 플래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날 행사에 참가하려다 불발에 그친 한 주민이 장롱속에 감추어 두었던 플래카드가 보안사 출신 이웃에게 알려지면서 불거졌다.집요한추궁끝에 박목사가 행사를 주동했음이 밝혀졌다.박목사는 7월부터 9월까지재판이 진행된 뒤 내란예비죄로 7년을 구형받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선고 이틀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내가 주도하는 활동중 도시빈민선교에 당국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요.보건소 이용이나 오물처리에 대한 혜택 등 실질적인 문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도시빈민들이 스스로 항의하고 요구하도록 만드는 것에 치중했는데 좌경용공으로 몰렸습니다.정치적 자유없이는 이웃사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빈민선교와 정치적 투쟁을 병행한 것인데 결국 철퇴를 맞은 것입니다” 남산 야외음악당사건이 이렇게 끝나자 맨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학생들과대학교수 등 지식인층이었다.그들은 서슬퍼런 상황에서 박목사가 보석으로풀려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이때부터 민청학련이 시작된다.당시 민청학련 10인위원회에는 박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서울제일교회 대학생부 학생들이 소속돼 있었다.74년 정초에 세배하러 온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다.그리고 자금주선을 요구했다.박목사가 尹潽善 전대통령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尹 전대통령도 선뜻 응했다.그러나 민청학련은 결국 발각돼 모두 묶여 들어갔고 박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정권은 이 사건을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한 것으로 몰아갔고 여기서 박목사는 대통령긴급조치4호 위반,국가내란음모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해방의 길목’은 박목사 재판이 진행되던 때 전국기독학생총연합회 간사였던 서울대학생인 아들 박종렬목사(현 전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와 부인,종교계 인사들이 박목사의 좌경성을 부인하기 위한 증명차원에서 펴낸 책이다.68년부터 70년까지 박목사가 기독교잡지 ‘기독교사상’의 주간으로 일하던 때 쓴 권두언과 설교들을 묶은 것이다.박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였다. 책이 나온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출판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왔다.책은 처음에 1,000부를 발간했으나 매진되자 다시 2,000부를 찍었다.그러나 이듬해 5월 마침내 ‘금서’로 묶였다.이책은 모두 압수당하고 지금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습니다.서슴없이 유신비판을 하고 나선데 대한 제재였지요.그때는 박형규 일당만 제거하면 기독교계는 문제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요” 5공에 들어서는 박목사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박목사가 제일교회에서 목회활동을 못하게 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그래서 ‘노상예배’가 시작된다.보안사의 사주를 받은 조직폭력배들이 교회건물 방에서 합숙하면서 직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84년 추석 전날 감금당하고 다음날까지 경찰들이 포위한 가운데 깡패와 반대파 교인들이 ‘박형규는 항복하라’며 수도 전기 전화선을 끊어버린사건이 일어났다.그해 12월9일부터 노상예배의 험로가 시작돼 90년 12월9일까지 6년동안 계속됐다.매주 치안본부장에게 전화를 걸고 중부경찰서 앞에서 예배를 지속했다.이 노상예배는 일종의 ‘순례지’가 됐으며 국내외 유명인사들이 참석해 설교를하기도 했다. 그는 유신정권과 5·6공은 물론,문민정부에 들어서도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여권 발급을 자유롭게 못받아 필요할 때마다 정부에서 내주는 단수여권을 써야만 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1년짜리 복수여권만 받을 정도였지요.95년 사면된 뒤에야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박목사는 92년 8월 서울제일교회에서 은퇴,험하고 험한 현역 목회자 생활을마감했다. 글 金聖昊 kimus@
  • 己卯年 새해 아침에

    기묘년(己卯年)새해 새날이 밝았다.올해는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 는 새로운 ‘천년대’(밀레니엄)를 한해 앞두고 있고,새로운 21세기를 이태 앞에 둔,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기도 하다.어느 해인들 새 해 새날을 맞아 크고 작은 소망과 다짐이 없을까만,올해는 그것들이 더욱 더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올해야말로 사회 모든 부문의 총체적 개혁을 통 해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우리가 21세기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 는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인 한해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는 헌정 50년사상 최초로 진정한 민주정부를 세웠다.金大中대통 령의 ‘국민의 정부’는 우리나라를 구조적으로 망쳐온 정경유착,관치금융, 방만한 기업경영,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과감한 국정개혁에 나섰다.민주 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적 추진이 그 처방이었다.‘여소야대’ 정치구도 때 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국정개혁은 우리사회 곳곳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정경유차과 부정부패는 꼬리만 보여도 철퇴를 맞고 있으며 관치금융과 방만한 기업경영에도 본격적인 수술이 가해지고 있다.이제 개혁은 광 범한 국민의 지지속에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 되었다.올해에도 국정 개혁은 더욱 깊고 광범하게 전개돼야 한다.무엇보다 정치가 개혁돼야 하고, 국정 각부문의 개혁과 함께 국민의식과 생활에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파탄으 로 끝난 지난 시대의 의식과 사회구조,낡은 패러다임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와 관련,우리가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는 안될 것은 역시 IMF사태가 아닐 수 없다.우리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와 경제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라는 치욕을 겪었다.그러나 정부와 국민이 밤낮 가리지 않고 합심 노력한 결과 우리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짧은 시일안에 위 기를 일단 돌파했다.거품빼기와 구조조정 과정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 랐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적 추진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과제가 아니 다.경제운용에 관한 과거의 의식과 관행으로부터 혁명적 발상전환이 앞서야 한다.경제개혁도 이제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이루고 있다.금융· 기업·공공부문·노사의 개혁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사활적 명제이기 때문 이다.올해에도 정부는 경제개혁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 경제는 여러 부문에서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따라서 우 리는 지난해 고통속에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올 한해를 경제재건의 원년으 로 삼아야 한다.경제가 비록 회복되는 기미가 있다하더라도 우리경제가 위기 를 완전히 벗어나 튼실한 경제로 바로서기까지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각부문의 구조조정이 추진됨에 따라 올해에도 실업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 다.비록 재원에 제약이 있겠지만 정부는 사회안전망 구축에 정책의 최우선을 두어야 한다.국민들 또한 실업자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실업자들은 현재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실업의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 이다.그러면서 우리는 올 한해만 허리끈을 졸라 매고 고통을 감내하면 경제 가 획기적으로 안정될 것으로 굳게 믿는다.그같은 확신은 세계를 놀라게 했 던우리의 저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다만 한가지 우려되는 바는 정치가 끼어 들어 경제회복의 추진력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정치과잉으로 경 제회복에 걸림돌이 되지말기를 정치권에 당부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이다.정치권은 정파 적 이해때문에 지역갈등을 더욱 증폭시켰고,고통분담의 형평성이 이뤄지지 않아 계층간의 갈등 또한 치유되지 않고 있다.우리는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 에서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다. 간첩선의 출몰에도 불구하고 소떼가 판문점을 넘어가고 금강산 관광길이 뚫 린 지난해는 통일기반이 확충된 해로 기록될 것이다.올해도 금창리 의혹 등 난관은 있겠지만 민족화해의 장정은 계속돼야 한다. 눈앞에 다가온 21세기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혁명기이자,세계가 하나로 되는 시대이며 무한경쟁의 시대이다.이같은 세계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우리는 지 식·정보화 시대에 대비해서 지식기반을 확충하고 고부가가치 미래산업을 키 우는데 국력을 집중해야 한다.그것은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한 필요적 조건이다.준비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우리는 지난 해의 성취 를 기반으로,올 한해도 자신감을 가지고 뛰고 또 뛰자.
  • 항공사고 ‘용두사미’ 징계/朴建昇 기자·경제과학팀(오늘의 눈)

    “인명 사고를 낸 것도 아닌데 전국 노선의 20%를 줄여라,도쿄노선을 감편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럽게 한쪽(대한항공)에 과중한 처벌을 하면서 한쪽(아시아나)은 그냥 두고,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는것 아니예요?” 지난달 10,11일 이틀간 과천청사에서 열린 국회 건교위의 건교부 국감 현장.밤 11시가 넘었는데도 대한항공을 감싸는 의원들의 발언이 계속됐다.이들의 안중에 사고예방대책 따위는 없는 듯했다.오로지 제재조처의 부당성에만 초점을 맞췄다.대한항공의 ‘안전불감증’에 대한 정부의 수술작업이 뒤틀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건교부 관계자들은 예상을 빗나간 공세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당시만 해도 대한항공의 잇따른 운항사고를 지탄하는 여론이 거셌다.항공사의 ‘나사’를 조이려면 특단의 제재조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런데도 ‘칭찬’은 커녕 ‘질타’만 쏟아지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기자들 사이에서 “대한항공이 의원들에게 고강도의 로비를 벌였을 것”이란 수군거림이 나올 만도 했다. 이로 부터 한달여 뒤인 12월18일.건교부는 대한항공 서울∼도쿄노선을 주 2회 감편운항 조처하려던 ‘철퇴’를 슬그머니 거둬들였다.대신 운항좌석수 7% 감축이란 ‘솜방망이’를 내밀었다.그러자 “(건교부가) 대한항공에 발목을 단단히 붙잡혔다” “의원 압력에 굴복했다”는 등의 온갖 비아냥거림이 터져 나왔다. 이번 징계 번복소동이 건교부의 자충수 때문이란 사실은 관계자의 해명에서 곧 드러났다.건교부측은 “일본측이 서울∼도쿄노선 운항을 줄일 경우 다음에 감축편수의 복원을 보장할 수 없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라며 일본의 항공운항권 관리 내규가 바뀐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당초 운항감편 조처를 결정할 때 항공법의 ‘면허취소’규정을 무리하게 확대적용한 점도 인정했다.정부가 별러온 항공사의 ‘안전불감증’ 수술작업에 건교부 스스로가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로비 의혹을 사고 있는 대한항공과 의원들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그러나 애초 이들에게 ‘외압’의 빌미를 제공한 쪽이 다름 아닌 건교부라는 점에서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건교부가 언제까지 항공사에 끌려다닐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 민주열사 열전:18회/前 조선대생 李哲揆(정직한 역사 되찾기)

    ◎반독재 활동혐의 수배… 경찰 검문뒤 변사체로/행방불명 1주뒤 의혹에 싸인 시신 수원지에서 발견/검찰 ‘도주중 실족 익사’로 수사종결… 재부검 요청 거부 불모의 독재 정권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민주화투쟁을 위해 스스로 몸을 받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의문사 희생자로부터도 푸른 수액을 받아 자라난다. 비록 몸은 독재의 철퇴 아래 억울하게 스러졌지만 잠들지 않는 푸른 혼은 철퇴를 두고두고 산화시켜 녹슬게 한다. 직선제 정부라던 6공화국 때도 철권 군사독재의 5공과 마찬가지로 여러 의문사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광주 조선대생 李哲揆의 죽음은 10년이 거의 지난 지금도 선명한 의문들로 덮여 있다. 이 의문들은 거꾸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과 공권력의 정당성에 날카로운 의문을 던진다. 1989년 5월10일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 4)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철규는 교지에 게재한 자신의 논문과 관련하여 4월18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 전남지역 공안 합수부에 의해 수배중이었다. ○검문경찰 “추격하다 철수” 주장 수배받고 있던 그는 5월3일 밤 10시쯤 후배의 생일을 위해 택시를 타고 무등산장 쪽으로 가던 중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되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검문 경찰은 신원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피검문자가 인근 산 속으로 도주,뒤쫓아 갔으나 붙잡지 못한 채 얼마후 철수했다고 주장했다.택시강도 혐의자를 잡기 위한 일상적 검문 상황이었지 피검문자가 300만원의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이 걸린 공안 수배범 이철규인줄은 전연 몰랐다는 말이였다. 이철규는 검문 1주일 후 검문을 받던 청암교로부터 76m 떨어진 곳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는 물가에서 3m 떨어지고 수심이 70㎝ 정도되는 지점에서 얼굴을 위로 한 채 물 위에 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은 검은 색으로 심하게 변색된 가운데 퉁퉁 부어 있었으며 왼쪽 눈알이 돌출된 끔직한 형상이었다. 특히 오른쪽 어깨는 왼쪽에 비해 크게 부어 있었다. 사체 상태나 실종의 정황에 비춰 단순한 익사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가족과 학생들은 즉시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었다. 5월11일 진상위에서 다수가 참관한 가운데 검찰 주도의 부검이 실시되었다. 진상위 측 참관인단은 위와 폐안에 물이 차 있지 않았으며 부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익사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검찰은 보다 상세한 검사가 필요하다면서 주요 장기를 국립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14일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좌측 눈의 돌출과 오른쪽 어깨의 부은 것은 단지 부패 때문이며 몸의 각 장기에서 플랑크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익사라고 결론내렸다. 보강 자료로 폐부종,국소출혈,폐포파열을 들었다. 검찰은 관련조사 및 부검 결과를 종합하여 익사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3일 밤 산 속으로 도주한 이철규는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다시 광주 쪽으로 돌아 오려고 철조망을 넘어 수원지 내로 들어왔다가 다소의 술기운에 실족,추락하여 익사하였다는 것이다. 추락의 방증으로 사건 당일 일부 경찰이 현장 근처에서 “풍덩,어푸어푸”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점을 들었다.다만 소리를 듣고 후레쉬를 비춰 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수면도 잔잔해져 물가까지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학생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선대생 8,000여명 등 학생 시민 1만여명은 89년 5월11일 정오부터 시신을 안치한 전남대 병원 앞 도로를 가득 메우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가두집회를 가졌다. 5·18 9주기를 앞둔 가운데 13일에는 전국 70여개 대학생과 시민 등 1만5,000천명이 전남대 금남로 조선대 등을 거쳐 시신이 안치된 병원까지 도심행진 시위를 벌였다. ○부거당시 슬라이드 공개안해 한때 2만5,000명까지 불어난 시위군중은 “이철규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으나 경찰과 큰 충돌은 없었다. 평화적으로 계속되던 시위는 그러나 25일 현장검증을 실시한 검찰이 30일 ‘실족 후 익사’ 라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를 종결하려 하자 격렬한 항의시위로 급변했다. 25일부터 전남대 영안실 앞과 서울 명동성당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사인규명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철규 고문살인 진상규명”을 소리높이 외치며 학생들은 눈으로 보면 누구라도 사인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며 사체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할 것과 진상위 측과 합수부 측이 TV공개토론를 가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여소야대의 국회도 개별 사안에 대해 십여년 만에 첫 국정감사를 6월1일부터 광주 현지에서 실시했다. 열흘 남짓 새에 60여명의 증인을 부르고 3,000페이지에 가까운 검찰수사 기록을 검토했으나 3주간의 조사에서 별다른 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인규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재부검 요청을 검찰이 거부해 의원들 역시 의문점만 재론했을 따름이었다. 유족과 진상위 측은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법의학자 로버트 커쉬너 박사를 초청하여 그의 참관 아래 재부검을 갖자고 했지만 검찰은 응하지 않았다. 나아가 1차 부검 당시의 슬라이드 요청마저 거부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철규가 실족해 익사한 뒤 1주일 동안 물 속에 있었다가 발견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일 밤 검문 때 경찰에 붙잡혀 연행된 뒤 조사를 받다가 살해되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발견 지점으로 옮겨져 익사체로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의문은 수사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실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늦게라도 6공 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폭발될 잠재력을 안고 있다. ○187일간 냉동안치뒤 안장 이철규는 82년 조선대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84년에 ‘학원 민주화 자율추진회’,85년에 ‘반외세 반독재 투쟁위원회’ 위원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85년 11월 ‘반외세’ 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87년 7월 가석방되었다.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나섰던 이철규는 전횡을 일삼던 조선대 재단을 밀어내는 학생들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89년 초 새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에 올랐다.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던 그는 죽어서 가족에게 돌아왔다. 그의 시신은 진상규명을 위해 187일이나 영안실에 냉동되어 있다가 의문의 얼음장을 깨지 못하고 89년 11월4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의문사 진상규명 노력/50건 육박… 80년대 집중/5共 청문회 특위 무산/인권법에 조사 명시 방침 군사독재 등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만큼 우리 현대사에서는 의문사가 여기 저기에 널려 있다. ‘타살당했다는 심적 및 물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에 의해 은폐,조작되어 사인이 철저하게 묻혀져 버린 죽음’인 의문사는 전국민족민주 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50건에 육박한다. 지난 73년 최종길 서울법대 교수의 의문의 죽음을 필두로 한 이들 현대사 의문사는 8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나 문민정부 때에도 계속되었다. 그동안 유가족을 중심으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끈질기게 펼쳐져 왔다. 서슬퍼런 5공 때인 84년에 강제징집 희생자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다. 6공 초기 여소야대 직후인 88년 10월부터 유가족들이 기독교회관 3층 시멘트 바닥에 모포를 깔고 135일 동안 추위에 시달리고 전경과 부딪히면서 줄기차게 투쟁한 결과 5공청문회에서 의문사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특위 일정까지 잡혔다. 그러나 가해자 측 증인이 나오지 않고 TV 중계도 않는다고 하자 유가족 측이 거부,무산되고 말았다. 90년부터 일반 시민 11만명의 서명을 받아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으나 끝내 폐기되고 말았다.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유가족들은 98년 11월4일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위해 또다시 국회 앞 도로에서 텐트를 치고 장기 농성에 돌입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전 정부와는 달리 현 정부·여당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사들에 대한 진상조사 문제를 곧 제정할 인권법에 명시하고 새로 설치될 인권위원회에 전담기구를 둬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할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일본판 禹 조교 사건’ 판결 눈길(뉴스 인사이드)

    ◎“저항 안해도 성희롱 성립” 피해자 승소 【도쿄 黃性淇 특파원】 상사나 동료로부터 성희롱을 당할 때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거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가해자는 처벌을 받을까. 최근 일본에서 목격자나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밀실에서의 강압적 성희롱에 철퇴를 놓는 판결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판 ‘禹조교 사건’이다. 센다이(仙台) 고등재판소는 지난 10일 아키타(秋田) 현립 농업단기대학 보조연구원(45·여)이 같은 연구실의 교수(55·남)를 상대로 낸 성희롱 손해배상금 청구소송에서 “피해자가 저항은 하지 않았지만 성희롱을 당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93년 9월 피해자가 피고인 교수와 함께 요코하마(橫濱)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을 때 발생했다. 직장 상사인 교수가 피해자의 호텔방에 느닷없이 들어와 침대에 밀어 쓰러뜨린 뒤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했으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저항은 하지 않았다는 게 사건의 개요. 피해자는 교수가 강제로 성추행을 했다며 334만엔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교수도 “감사와 격려의 기분으로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이다”라고 피해자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대한 550만엔의 위자료지급 청구소송으로 맞섰다. 지난해 1월 아키타 지방재판소의 1심 판결. 재판장은 “침대에 쓰러진 상태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은 점 등은 강제추행의 피해자로선 부자연스럽다”며 피해자의 청구를 기각했다. 오히려 피해자가 교수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60만엔의 위자료 지급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피해자는 항소를 제기했고 1심을 뒤집는 판결을 받아냈다. 센다이 고등재판소는 “직장의 상하관계나 동료의 우호관계를 지키려는 생각에서 피해자가 반드시 저항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결,‘저항하지 않으면 성희롱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종래의 개념을 깨버렸다.
  • 다시 ‘腐敗’를 생각한다(林春雄 칼럼)

    지난달 19일자 칼럼 ‘부패학 교육을 시작하자’가 나간후 몇몇 독자가 고견을 보내주었다. 생각은 좋으나 이나라의 부패문제가 교육으로 해결되리라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라는 고언(苦言)에서부터 교육도 좋지만 우선은 제도적 장치가 더 급하다는 견해도 있었다.부패방지법을 제정하는 일에서부터 정부도 구상중인 관급공사의 공사 당사자들이 반(反)부패협정을 맺도록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부패문제 제기에서 가장큰 소득은 우리사회가 공동체 차원에서 이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그 사실이다.정부 스스로가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부패 방지대책이란 것을 내놓았고 방지법 제정도 약속하고 있다. 특별히 참여연대등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부패방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앞서도 언급했었지만 이 나라의 보통사람들은 부패문제가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국민들 부패의 폐해 인식해야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국민의 세금부담으로 돌아오고 납품업자가촌지를 제공하면 제품의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부패는 나아가 우리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몰랐었다.시민들이 자각하고 부패의 피해의식을 갖게 될 때 감시의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시민이 나서서 감시하지 않으면 부패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한때 한국의 유식한 사람들중엔 부패예찬론을 편 이까지 있었다.적당한 부패는 돈을 돌게하는 효과가 있어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되고 결과적으로 경제전반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였다.그러나 이런 얘기는 뇌물의 단물을 즐기는 일부 사람들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괴변이다. ○‘신흥 특권층’ 해체 시급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공동 발행하는 권위있는 계간지 ‘금융과 경제발전’은 연초 부정·부패와 경제발전에 관한 특집을 낸 바 있다.이 특집은 부정·부패가 발전 도상국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일뿐 아니라 국가경제를 기본적으로 그르치게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90년대 들어 외환 홍역을 겪거나 당하고 있는 멕시코,태국,인도네시아,한국 등이 모두 부패한 국가들이란 지적이었다.부패가 국가경제를 망치게 한다는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사회가 이토록 부패한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중에도 지난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독재체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미국 조지 워싱턴대의 박윤식 교수는 진단한다.그는 “우리 경제위기는 그동안 암적으로 존재해온 부패 특권사회의 부산물”이라고 잘라 말한다. 특히 “61년 쿠데타 이후 우리나라에는 실질적인 정권교체 한번없이 정치군인들과 고급 관료들을 중심으로 신흥특권층을 형성해 왔으며,이들 최고세력의 이해집단이 경제발전이란 명분을 내세워 자기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권력과 각종 규제를 통해 국민과 기업인들을 먹이사슬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한국이 오늘의 경제위기를극복하려면 이들 부패 특권 사회구조를 먼저 해체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물론 이 나라의 부패는 지난 반세기 동안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그러나 부패를 줄이는 최선의 방책은 결국 투명한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금융과 경제발전’지는 부정·부패에 철퇴를 가할 절호의 기회는 국가가 위기를 당했을 때나 정권교체기라고 지적한다.지금 우리는 모처럼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IMF라는 국난을 맞고 있다.
  • 감사원,새달 15일까지 예산처리 특별감사

    ◎남는 예산 연말 소나기집행 철퇴 앞으로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연말까지 쓰지 않은 예산으로 보도블록을 교체하거나 부서 회식을 하는 등의 예산 낭비 행위에 철퇴가 내려진다. 감사원은 23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기획예산위원회를 비롯한 43개 국가기관을 상대로 60명의 감사인력을 투입,연말 예산집행 실태를 특별감사한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연도 말에 임박한 무분별한 예산집행 ▲불요불급한 예산 편성 및 집행 ▲예산 이·전용,사고 이월,예비비 사용의 적정성 ▲예산의 목적 외 사용 및 변칙적인 회계 처리·집행을 적발하는 데 초점을 맞춰 감사를 벌인다고 밝혔다. 감사원 관계자는 “올해 6조8,000억원의 세입결함이 예상되고 금융기관 구조조정 지원,고용안정대책 추진 등에 5조6,000억원 수준의 추가적인 재정소요가 예상되는 등 국가재정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데도 일부 기관이 불용예산을 남기지 않으려고 회계연도 내에 불요불급한 사업을 추진하는 등 무분별하고 낭비적인 예산집행 관행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이에 따라 연도말 불용 예산액을 쓰기 위해 한겨울에 공사를 발주,착공하거나 보도블록 교체,회식 등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추후 예산 배정에서 불이익을 주는 등 강력한 제재조치를 건의할 방침이다. 감사원은 또 각 기관이 연도 말에 예산을 몰아쓰는 것은 현재의 예산 체계가 단년주의를 적용,예산의 이월이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명시이월,사고이월로 나눠진 이월절차를 단순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해당부처에 통보할 방침이다.
  • 자동차 업체 강제 사원판매 철퇴/삼성 4개사에도 1억

    ◎2년째 동일차종 임직원에 할당/공정위,대우자판에 과징금 19억 대우가 사원들에게 자사 자동차를 강제로 판매해오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0억원 가까운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삼성도 2억여원의 과징금 및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공정위는 19일 사원들에게 대우자동차 구매를 강요한 (주)대우자동차판매에 대해 19억3,3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또 삼성중공업과 삼성정밀화학 삼성화재해상보험 삼성생명보험등 4개사가 삼성자동차의 SM5를 구입하는 임·직원들에게 1인당 360만원씩 9억7,700여만원을 지원한 행위를 불공정 행위로 간주,이들 4개사에 모두 1억1,99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조사도중 공정위 직원들의 팔을 비틀고 증거자료를 빼앗아 파기했던 삼성자동차에게는 1억2,0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자동차 사원강제판매 피해사례를 알아본다. ●사례1 대우자판 사원 崔모씨는 월급이 107만원이지만 실제 받는 돈은 50여만원 밖에 안된다. 쌍용에 있을 때 강제 구입했던 코란도밴 할부금 28만원과 대우에 와서 구입한 누비라 할부금 20만원 등 월 48만원이 월급에서 공제되기 때문. ●사례2 지난해 레간자를 구입한 대우자판의 金모 과장은 지난 2월 회사강요로 또다시 98년식 레간자를 구입했다. 어쩔 수 없이 새 차를 친구에게 전매했지만,金과장은 취득세 등 차량등록비용으로 130만원을 고스란히 물어야 했다. ●사례3 얼마 전 대우자판의 朴모 대리는 구입한 지 1년도 안된 누비라를 중고차 시장에 내놓았다. 지난 7월 회사 강요로 레간자를 새로 샀기 때문. 朴대리는 약 200만원의 손해를 본 셈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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