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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거된 필리핀 위안부 소녀상

    철거된 필리핀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기리려고 필리핀에 건립한 조각상이 또 철거됐다. 4일 일간 마닐라 심분(신문) 등에 따르면 필리핀 북부 라구나주(州) 산페드로시는 지난해 12월 30일 여성의 집에 건립했던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했다.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 28일 건립된 이 소녀상은 청동으로 만든 의자에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앉아있는 조형물로 2011년 12월 14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 것과 같은 작품이다. 당시 이를 조각한 김서경·김운성 작가 부부가 제작했다. 카타퀴즈 산페드로시 시장이 2017년 9월 충북 제천을 방문했을 때 소녀상 건립을 제안하고 이근규 당시 제천시장 등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됐다. 제막식에는 이 전 시장과 김서경·김운성 부부 등 한국대표단 8명은 물론 카타퀴즈 시장을 비롯한 현지 대표 10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주필리핀 일본대사관이 “이번 경우를 포함해 다른 국가들에위안부 조각상을 세우는 것은 매우 유감이며 일본 정부의 입장과도 배치된다”는 성명을 발표한 지난해 12월 30일 전격 철거됐다. 카타퀴즈 시장은 지난 3일 성명에서 “평화와 여권신장을 기원하고 한국인과 필리핀 국민의 우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한국인들이 소녀(상) 옆에 필리핀 여성상을 두지 않아 원래 개념이 곡해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필리핀과 일본의 좋은 관계를 훼손할 의도가 없었는데 ‘미완성’ 조각상으로 그런 우려가 제기돼 더 이상의 논란을 피하려고 철거했다”고 밝혔다. 지난 1일 일본 측의 항의 성명에 대해 ‘표현의 자유’라고 반박했던 살바도르 파넬로 필리핀 대통령궁 대변인도 지난 3일에는 “누가 소녀상을 철거했는지 모른다”면서도 “지방자치단체가 정부 정책에 따른 것 같다”고 주장했다. 산페드로시 관계자는 “소녀상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UPI통신은 이 소녀상이 카타퀴즈 시장의 사저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필리핀에서는 지난해 4월에도 수도 마닐라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 동상이 일본 측의 강력한 요청이 있고 난 뒤 철거됐다. 이 동상은 2017년 12월 필리핀 국가역사위원회와 위안부 피해자 단체가 건립한 것으로 마닐라시가 배수시설 개선 작업을 명분으로 심야에 철거해 여성단체의 반발을 샀다. 여성인권단체 ‘라일라-필리피나’는 소녀상에 대한 일본 측의 항의에 대해 “평화의 소녀상을 궁극적으로 철거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또 이 단체 상임이사인 샤론 실바는 “고통받는 위안부 여성을 위한 소박한 성지가 거부되고 재정지원의 협상 카드가 되는 것에 분노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필리핀의 주요 원조국이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도심 한복판에 옛 청주역 복원

    도심 한복판에 옛 청주역 복원

    옛 청주역이 51년만에 복원돼 역사(驛舍) 전시관으로 활용된다. 4일 청주시에 따르면 구 청주역사 재현 및 환경정비 사업이 완료돼 오는 7일 청주 역사 전시관이 문을 연다. 전시관은 상당구 북문로2가 113-2번지 일원에 2227㎡(건축면적 202㎡, 광장·주차장) 규모로 조성됐다. 1921년부터 1968년까지 충북선 청주역이 있었던 자리에 옛 역사를 그대로 복원했다. 시는 옛 역사 건물 형태의 전시관 내부에 청주시 기록사진, 과거 승무원 물품, 청주역 소개물 등을 전시했다.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관람료는 무료다. 이 사업은 옛 도심 활성화, 청주의 정체성 회복, 휴식 공간 및 볼거리 제공 등을 위한 국토교통부 도시 활력 증진사업 대상에 뽑혀 추진됐다. 시는 이 일대에 남아있던 성매매 업소들을 철거하고 역사를 만들었다. 시는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수립 등 조례상 절차를 거쳐 오는 3∼4월쯤 청주역사 전시관과 인근 도시재생 허브센터 위탁운영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일본에서 확산되는 ‘묘지 철거’…“찾아줄 사람 없으니”

    [특파원 생생리포트] 일본에서 확산되는 ‘묘지 철거’…“찾아줄 사람 없으니”

    수용 규모 약 2만 4000기로 일본 오사카부에서 가장 큰 ‘오사카 호쿠세쓰 공원묘지’. 2017년 이곳에 신규로 들어선 무덤은 30기에 불과했지만, 기존에 있다가 철거된 무덤은 10배에 가까운 286기에 달했다.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감소 등 영향이 일본에서 묘지 철거의 확산으로 나타난 것이다. 최근 10년간 이곳에서 사라진 무덤은 1400기에 이른다. 공원묘지 관계자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전체 운영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4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조상이나 가족의 무덤을 없애고 다른 유골과 합장하거나 사찰 등에 봉안하는 등의 묘지 철거가 일본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산케이는 “자녀 감소와 혈연관계의 약화 등으로 묘지를 돌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관리에 따른 수고로움와 비용 문제 등도 묘지를 없애는 이유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관리대상 묘지의 간소화 차원에서 다른 곳에 있는 무덤을 가까운 곳에 옮기는 이장도 늘고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16년 일본 전역의 이장 건수는 약 9만 7000건으로 5년 전에 비해 2만건 정도가 늘었다.비슷한 이유로 생존해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의 합장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아키타시에서는 1500명 규모의 합장묘를 조성하기로 하고, 사후 이곳에 안치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았다. 첫날부터 신청자가 쇄도해 1500기분 접수가 금세 마감됐다. 초기비용 1만 7000엔(약 17만원) 외에 추가경비가 필요 없고 전문업체가 관리해 준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아키타시 관계자에 따르면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 “후손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등 이유로 합장묘를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 높은 인기를 확인한 아키타시는 추가로 1500명분의 합장묘를 조성할 계획이다. 나가노현 고모로시는 지난해 2월부터 ‘고향납세’(출신지역이나 선호하는 지방에 기부금을 보내는 것. 해당 지역에서는 그 대가로 지역특산품 등을 답례로 제공한다)의 답례품으로 지역 합장묘 안치권을 주고 있다. 고향납세로 24만엔 이상 내는 사람들을 대상을 한 것이지만, 지난해 9월까지 400건 정도 문의가 들어왔고 이 중 27명이 실제로 신청을 했다. 그 중 70%는 도쿄도와 사이타마현 등 수도권 주민들이다. 요시카와 미츠코 장례·묘지 컨설턴트는 “앞으로는 (관리 등의 부담이) 후대로 이어지지 않아도 되는 묘지들이 주목받을 것”이라면서 “가족들이 마음 편히 참배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애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햇살 한 뼘 담요/조성웅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햇살 한 뼘 담요/조성웅

    -------- 햇살 한 뼘 담요 / 조성웅 울산 용연 외국계 화학공장에 배관철거 수정 작업 나왔다 기존 배관라인을 철거하는데 먼지가 일 센티미터 이상 쌓여 있었다 변변찮은 마스크 하나 쓰고 먼지 구덩이에서 일을 하다 보면 땀과 기름때로 범벅이 된 내 생의 바닥을 만나곤 한다 마스크 자국 선명한 검은 얼굴로 정규직 직원 식당에 밥 먹으러 가면 까끌까끌한 시선이 목구멍에서 느껴졌다 기름때 묻은 내 작업복이 부끄럽지는 않았으나 점심시간 어디를 찾아봐도 고단한 몸 쉴 곳이 없었다 메마른 봄바람이 사납고 거칠었다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 물고 버티는데 축축해진 몸에 한기가 돌았다 흡연실 쓰레기통 옆이 그런대로 사나운 바람도 막아주고 햇살 한 뼘 따뜻했다 함께 일하던 이형이 쓰레기통 곁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더니 몸을 오그려 고개를 숙였다 이내 코고는 소리가 쓰레기통에 소복이 쌓였다 난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아팠다 안정도 지금 그를 안내할 수 없고 행복도 지금 그를 도와줄 수 없고 코뮤니즘도 지금 그를 격려할 수 없었다 쭈그려 쪽잠 자는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꿈조차 꾸지 못하는 그의 고단한 몸을 깨우지 않는 것이었다 햇살 한 뼘조차 그늘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난 햇살 한 뼘을 가만히 끌어다 덮어주고 싶었다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맨몸으로 도달한 투명한 수평 햇살 한 뼘 담요! - 시는 느낌이다. 설명을 하면 죽는다. 마음의 행간에 종이배를 띄우고 천천히 흐르자. 당신이 ‘햇살 한 뼘 담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멋지지 아니한가. 곽재구 시인
  • 필리핀에 불법 수출한 폐기물 일부 국내 온다

    환경부 이르면 내주 평택항으로 반환 6500t 중 압류 51개 컨테이너 1400t 수출업체에 구상권… 전수조사 돌입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됐던 쓰레기 폐기물 일부가 이르면 다음주 한국으로 돌아온다. 환경부는 최근 필리핀 정부와 쓰레기 폐기물 일부를 한국의 평택항으로 반환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3일 밝혔다. 우선 반환되는 물량은 지난해 불법 수출된 플라스틱 폐기물 6500t 중 컨테이너에 담겨 필리핀 미사미스 오리엔탈 항구에서 압류된 51개 컨테이너(1400t)다. 폐기물 반환이 늦어지는 것은 필리핀 정부와 필리핀 현지 수입업체 간 견해차 때문이다. 환경부는 이미 컨테이너에서 하역해 필리핀 폐기물 야적장에 방치된 5100t의 폐기물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도 지난주 파견했다. 이번에 폐기물을 반환하는 데 드는 비용은 5300만원 수준이다. 환경부는 예산을 투입해 운송비를 직접 지불한 후 쓰레기 폐기물 수출업체에 구상권을 청구해 돌려받을 방침이다. 환경부는 이달부터 한국 폐기물 수출업체에 대한 전수조사에 돌입했다. 관세청도 환경부와 협조해 부두에서 쓰레기 폐기물로 의심되는 컨테이너들을 검사하고 있다. 환경부와 관세청은 이달 안에 쓰레기 폐기물 수출업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 짓는다. 서울신문이 확인한 인천 연수구 송도동에 위치한 무허가 쓰레기 수출선적장도 조만간 철거된다. 해당 토지의 1차 임대인인 A업체는 오는 3월 말까지 폐기물을 처리할 예정이다. 다만 폐기물을 방치한 책임이 있는 2차 임대업체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해당 업체에 대한 추가 조사도 이뤄진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1919년 3·1운동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임시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잘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 머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상하이정부·노령정부 통합 앞서 갈등 표출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상하이 상업지역 화이하이중루. 10·20세대가 주로 찾는 거리 한 모퉁이에 글로벌 의류 브랜드 매장이 입점한 6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하비로 청사’라고 부르는 곳으로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정부가 그해 8∼10월 사용했다. 당시 임정이 청사로 쓰던 2층 양옥은 1920~1930년대 철거됐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11일 개헌을 통해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여기서 결정해 선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전했다. 상하이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국내외에서는 세 임정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성·상하이정부는 정부 수립을 전후해 양측 인사들이 꾸준히 교류한 터라 통합에 거부감이 적었다. 한성정부 대표 자격으로 상하이정부 안창호(1878~1938)와 협상을 벌인 이규갑(1887~1970)의 증언을 보면 당시 양측의 우호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도산과 두 정부의 통합을 논의했다. 나는 상하이정부가 먼저 생겼으니 우리 한성정부가 합류하는 것이 맞다고 양보했다. 하지만 도산은 한성정부야말로 국내 13도 대표가 총의를 모아 만든 정부이니 당연히 자신들이 속한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며 (내 제안을) 사양했다.”●안창호 “해산 후 한성 밑으로 모이자” 제안 사실상 상하이정부와 노령정부 간 통합 논의만 남았다. 노령정부가 먼저 나섰다.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어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의정원을 합치고 러시아에 행정부를 두자는 의견을 정했다. 노령정부는 5월 특사 원세훈(1887~1959)을 중국에 보내 이를 제안했다. 상하이정부에서도 안창호가 본격적인 통합 협상에 나섰다. 6월 17일 상하이정부 국무원(행정부)은 노령정부와의 협의 내용을 반영한 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되, 새 의회는 러시아로 이전이 가능하도록 여지를 뒀다. 하지만 의정원은 상하이에 계속 남고 싶었던 탓인지 안건을 거부하고 국무원에 돌려보냈다.●노령정부 불만 터져 불완전한 결합 이뤄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안창호는 새 아이디어를 냈다. 상하이·노령정부를 모두 해산하고 한성정부 밑으로 다시 모이자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제3지대 창당론’이 될 것 같다. 단, 통합 정부는 ‘한성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르고, 상하이에 남기로 했다. ●상하이정부, 한성을 ‘우회 상장’ 통로로 여겨 노령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8월 30일 총회를 열고 의회를 해산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 해산하기로 한 의회와 행정부를 그대로 둔 것이다. 정부 조직만 한성정부 형태로 바꿔놨다. 비유컨대 건설업자가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기로 약속한 뒤, 실제로는 건물 도면에 맞춰 리모델링만 한 것이다. 당시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실제가 아닌) 정신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정통성은 있지만 실체가 없던 한성정부를 동등한 통합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울에서 생겨난 정부라는 법통을 흡수하려는 ‘우회 상장’ 통로로 여긴 듯 하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상하이정부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려다가 생겨난 일”이라고 분석했다.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문창범(1870~1938)과 이동휘(1873~1935)는 “상하이가 우릴 속였다”며 취임을 거부했다. 문창범은 연해주로 돌아가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재건을 선언했다. 통합 임정으로서는 미래 정부 활동 자금줄이자 무장 투쟁 동력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도 새 내각 불참을 선언했다. 임정 통합 중심축 이동휘, 독립자금 좌파세력 유용으로 치명타이승만(1875~1965)이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문제 삼았다. 통합 임정이 시작도 전에 분열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이동휘는 안창호의 간곡한 설득으로 11월 3일 통합 임정 국무총리에 복귀했다.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과 재무총장 이시영(1868~1953), 법무총장 신규식(1880~1922) 등도 함께 취임식을 가졌다. 이렇게 세 임정은 불완전하게나마 통합정부로 다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상하이정부가 생겨난 4월 11일이 아니라 세 임정을 통합한 9월 1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상하이정부가 노령정부를 모두 끌어안아 완전체가 됐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통합 임정에 힘 실어 준 아전의 아들 이동휘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가슴이 떡 벌어졌다. 군인답게 콧수염을 길러 마치 프랑스 원수 같았다. 민족운동의 거성인 동시에 저명한 혁명가였다. 열렬한 행동주의자였으며 불덩이 같은 신념을 지녔다. 천군만마를 노호할 듯한 기개와 위엄을 갖춘 당당한 거인이었다.”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가 이동휘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는 ‘반쪽짜리’로 전락할 뻔한 통합 임정에 극적으로 합류해 독립운동 중심체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에게서 받은 통합 임정 운영자금을 자파(自派) 유지비로 돌려써 독립운동 분열도 초래했다.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통인(군수의 시중을 드는 하급관리)이 됐다. 23살 때 탐관오리였던 단천군수 홍종후가 잔칫날 어린 기생을 무릎 위에 앉혀 추행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술상 옆에 놓인 화로를 군수에게 끼얹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이동휘는 서울로 도피했다가 함경도 명천 출신 관료 이용익의 도움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해 군 장교가 됐다. 이후 일제가 그의 애국심을 우려해 수차례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자 1913년 북간도로 탈출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1914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당시 일본은 러시아 영토를 탐내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벌여 단박에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일본군과 맞서던 러시아 볼세비키(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자 북간도로 넘어가 중국과 연합해 대일 독립전쟁을 치르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도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 제출한 권익 확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한편이 돼 이 역시 무산됐다. 1918년 5월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군사학교 설립과 한인적위대 조직에도 나섰다. 애초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3·1운동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설립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질 리 없고 조선 지식인들이 기대를 건 파리강화회의 역시 식민지 해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동휘는 “상하이 측과 정치 싸움을 벌여선 대국(일본)을 파괴할 수 없다”며 통합 임정에 뛰어들었다. 그의 결단 덕분에 통합 임정은 ‘이승만(한성)-안창호(상하이)-이동휘(노령)’라는 3대 축을 갖춰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독립자금 전용 탓 신뢰 잃어… 국제사회도 외면 그는 씻기 힘든 과오도 남겼다. 1920년 1월 통합 임정은 이동휘의 측근 한형권(생몰연대 미상)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보냈다. 레닌 정부와 접촉해 정식국가로 승인받고 독립 자금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받기로 하고 1차분 60만 루블을 얻어냈다. 지폐의 양이 많아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고 일단 40만 루블을 김립(1880~1922)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는 이 돈을 통합 임정에 전달하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좌파 운동세력에게 나눠줬다. 일부는 개인 용도로도 썼다. 이동휘는 소련 자금 배달사고의 배후로 지목돼 입지가 좁아졌다. 1921년 1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일로 사회주의 계열은 신뢰를 잃고 독립운동 주류에서 배제됐다. 통합 임정도 국제적으로 평판이 나빠져 운영 자금 마련이 더 힘들어졌다. 이후 이동휘는 연해주 일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숨을 거뒀다. 서울·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중기중앙회 이례적 신년회…방명록엔 “활력 중소기업!”

    중기중앙회 이례적 신년회…방명록엔 “활력 중소기업!”

    청와대가 2일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개최한 신년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4대 그룹 총수 등 경제계와 각계각층 300여명이 초청됐다. ●벤처기업인·소상공인 등 300여명 참석 청와대 신년회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연 것은 처음으로 올해 민생경제를 최우선에 두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 인사에서 장소 선정에 대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특히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신년회에는 이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가 일제히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장, 김영주 한국무역협회장,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 등 경제단체장도 참석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도 초대… 현충원 참배도 소외계층, 소방관, 집배원, 발달장애인이 일하는 회사의 대표 등 평범한 이웃도 초대받았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 김미씨, 이상룡 선생의 증손 이항증씨, 부부 독립운동가인 김예진·한도신 선생의 아들 김동수씨 등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의 후손들도 참석했다. 오프닝으로 올해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던 인물 11명의 인터뷰 영상도 상영됐다. 박항서 베트남 국가대표팀 축구 감독, 화재 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한 최길수 소방관, 감시초소(GP) 철거작업을 한 전유광 5사단장 등이 새해 덕담을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하며 올해 첫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짓누르는 적폐 뿌리 뽑자… 세상을 바꾸면 내 삶도 바뀐다”

    “짓누르는 적폐 뿌리 뽑자… 세상을 바꾸면 내 삶도 바뀐다”

    #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그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얻어냈지만 그 값진 승리를 노태우 정권이 가져가 ‘미완의 혁명’으로 불린다. 그러나 2016년 겨울~2017년 봄 사이 연 1700만명이 183일 동안 밝힌 촛불은 불의한 권력, 부패한 정치를 탄핵하고 기득권이 세운 낡은 체제를 바꿀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박종철·이한열 열사가 그 겨울 광장의 촛불을 봤다면 뭐라 말했을까. 두 열사의 가상 대담 형식을 빌려 촛불혁명이 바꾼, 그리고 바꿔 갈 민주주의의 모습을 그려 봤다.박종철 촛불의 함성에 눈을 뜨니 30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혁명의 광장 한복판에 작은 촛불로 서 있었어요. 화염병도 아닌 촛불을 들었는데 전율이 흘렀죠. 촛불 시민들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주권자의 존엄으로 증명하며 시대의 대반전을 이뤄내고 있었어요. 이한열 돌아보니 동학농민들이, 독립운동가들이, 4·19의 의인들이, 스무 살 거리에서 함께 싸운 젊은 동지들이 촛불과 한 몸이 돼 마주 걸어가고 있더군요. 3·1운동 이후 100년의 경험과 기억이 이 새로운 혁명을 끌고 가고 있었어요. 박종철 우린 그것을 공동체의 기억이라고 부르지요. 내면에 흐르던 좌절의 기억과 시대의 모순이 만든 상처가 위기의 순간 각자도생으로 분리된 개인을 견고하게 묶어 촛불연대를 만든 것이죠.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똑같은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에요. 평화집회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했으니까요. 하지만 광장의 시민들은 그 ‘다름’과도 함께 했죠.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화음을 만들어냈어요. 비정규직, 해고당한 노동자, 장애인 등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해 겨울 촛불 광장은 민주주의의 현현이었어요. 이한열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씨가 12차 촛불집회 때 연단에 올라 한 말이 생각나네요. “이제 곧 저는 살아오는 종철이를 만날 겁니다. 시퍼렇게 되살아오는, 살아서 돌아오는 민주주의를 만날 겁니다. 저는 종철이를 부둥켜안고 고맙다고,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다시는 쓰러지지도 말자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반드시 승리합시다.” 박종철 세월호 아이들, 공권력에 죽임당한 백남기 농민, 용산 철거민 등 작고 힘없는 이들의 혼백이 그날 광장에서 다시 살아난 듯했죠.이한열 30년 전 6월 항쟁 때도 우리는 ‘연대’했는데, 왜 미완의 혁명으로 그쳤을까요. 나와 내 친구들은 최루탄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고, 고향도 출신 학교도 제각각인 직장인들이 ‘넥타이 부대’라는 이름으로 직장이 아닌 거리로 뛰어나왔어요. 시민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손수건을 흔들었죠. 박종철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확대된 민주주의의 공간을 채울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지 못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민주화 이후에도 30년 가까이 박정희 시대의 ‘잘살아 보자’는 성장 담론이 한국사회를 지배했죠.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성찰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보니 분명히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졌는데 삶의 내용은 빈약해지고 양극화의 고통이 줄기는커녕 더 커진 것이죠. 내일의 희망이 없는 청년들은 이를 ‘흙수저’,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말로 표현한다지요? 이한열 정치권도 항쟁 정신을 받아안지 못했죠.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하지 못해 결국 대통령 자리가 신군부 출신 여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돌아갔어요. 박종철 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스러진 나의 죽음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머리를 맞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니었어요. 6월 항쟁 때 혁명의 시간을 경험한 청년들이 2017년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다시 한번 혁명을 이뤄냈으니까요. 이한열 확실히 6월 항쟁 때와 달리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이들이 다양했어요. 영국 로이터 통신도 ‘학생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군중 곳곳에서 보였다. 대규모의 평화적인 행진이었다. 이전 시대의 양상과는 달랐다’고 보도했어요. 외신도 연령대와 계층이 다양해진 새로운 형태의 시위에 관심을 보였죠. 박종철 저는 그것을 직장과 가정의 일상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싶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삶을 망치는 것들과의 분투를 통해 일상에서 민주주의로 훈련된 것이죠. 결국 민주주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인간답게 대접받는 세상을 위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없애 가는 과정이거든요. 이한열 예. 30년 전 우리가 독재 정권 하나 타도하자고 거리로 나선 게 아니듯 2017년의 촛불도 낡고 부패한 정권 퇴진을 넘어 새로운 삶, 새로운 시대정신을 원했기에 광장에 모인 것으로 생각해요. 박종철 저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촛불혁명의 도화선이 됐지만 광장을 메운 시민들이 외친 ‘이게 나라냐’라는 절규의 기저에는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폭발할 듯한 분노가 쌓여 있었다고 봐요.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 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말로 가난해서 자식한테 미안한 부모의 마음에, 박탈당한 청춘의 울분에 불을 붙였죠. 이런 마음이 모여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이란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어요. 이한열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은 민주주의를 일컫는 또 다른 말이기도 해요. 지난 역사가 증명했듯 내 삶의 주도권과 의사 결정권을 극소수 기득권에 빼앗긴다면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말 거예요. 박종철 촛불혁명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잉태했다고는 하나 그것을 완성한 것은 아니에요.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씨가 안전 매뉴얼마저 지켜지지 않은 일터에서 처참하게 숨졌어요. 2016년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고로 숨진 김모군의 가방에도, 김용균씨의 가방에도 컵라면이 들어 있었죠.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을 시간도 없이 하청 노동자란 이유로 위험에 노출된 사업장에서 일해야 했어요.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며칠 전 겨우 국회를 통과했죠. 법 개정까지 28년이 걸렸어요. “우리 용균이와 같이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을 살려 달라”는 김용균씨 어머니의 호소가 법안 통과를 끌어냈어요. 이한열 너무나 참담한 일이에요. 우리 사회 곳곳에는 제2의 김군이, 또 다른 김용균씨가 있어요. 곳곳에서 낡은 구조가 개인의 삶을 짓누르고 무너뜨리고 있어요. 70년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기득권 동맹체의 뿌리는 너무나 깊고 단단해요. 3·1운동 이후 100년을 마감하고 촛불혁명으로 향후 100년을 열어젖힌 촛불 시민의 삶은 이 적폐의 뿌리를 뽑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나를 짓누르는 게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무엇도 바꿀 수 없어요. 박종철 그런 면에서 향후 100년의 민주주의는 안과 밖 동시의 혁명으로 설계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바꾸는 것은 곧 내 삶을 바꾸는 것이니까요. 이한열 정권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개인의 삶에는 당장 큰 변화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우린 촛불 혁명을 경험한 역사적 존재들이에요. 나라를 나라답게 세우는 개혁이 지난하더라도 전환의 계곡을 낙오자 없이 벗어나 함께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면 굽이치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혁명은 곧 끈질긴 저항이니까요.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인촌 동상 현 상태 유지 여론 높아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인촌 김성수’의 고향 전북 고창군 주민들은 동상과 도로명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일 고창군에 따르면 최근 3주 동안 주민 1000명을 대상으로 ‘인촌 동상 철거’와 ‘인촌로 개명’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조사 결과 인촌 동상 철거는 현 상태 유지가 51%로 철거해야 한다 39%, 친일행적 안내판 설치 8% 보다 훨씬 높았다. 인촌로 명칭 변경 역시 현 상태 유지가 54%, 바꿔야 한다 33%, 잘 모르겠다 12%로 집계됐다.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서울시 성북구가 구청장 직권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8%의 찬성을 얻어 ‘인촌로’를 ‘고려대로’로 바꾸기로 한 것과 대조적이다. 고창군은 이번 여론 조사 결과를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 군수 직권으로 도로명을 바꿀 지 여부는 결정하지 않았다. 고창군 관계자는 “앞으로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해 인촌 선생뿐 아니라 서정주 시인까지 전반적인 친일 인사들의 문제를 다룰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에대해 항일독립운동단체들은 공론화 의미가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박해종 항일독립지사선양단체연합 팀장은 “친일 논란은 이미 정부에서부터 대법원까지 결론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공론화까지 될 사항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고창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1부>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①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우리는 헌법 전문을 통해 우리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해방을 맞게 됐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임정은 1919년 여러 정부가 하나로 합쳐져 세워진 뒤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았다. ‘식물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전쟁을 병행한 독립 운동의 총괄체였다.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서울신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있는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임정의 역사와 인물, 이슈 등을 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12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역사 탐구에는 김원봉(1898~1958년)과 김산(1905∼1938년), 조봉암(1898∼1959년) 평전을 쓴 이원규(72) 작가와 독립운동가 김연방(1881~1919년)의 증손자 김주용(53)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가 함께했다.●신한촌碑, 고려인 독립운동 중심지 일깨워 지난달 초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가 몰려왔다. 서울보다 기온이 10도 가까이 낮았다. 기자를 안내한 교포2세 권세라(27) 가이드는 “그래도 여기는 연해주 다른 도시보다는 따뜻한 편”이라며 “러시아에는 ‘40도 이하 술은 술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안 되는 추위는 추위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며 웃었다. 공항에서 남부 루스키섬 쪽으로 50여분쯤 달리자 시내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 직사각형 모양 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놓여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묶어 놓은 태극기와 노란 리본도 눈에 들어왔다. 신한촌 기념탑이었다. 3개의 기둥은 우리 민족과 친근한 숫자인 3을 형상화한 것이다.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명분 삼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던 고려인 마을 구(舊)개척리를 철거했다. 한인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의 신한촌을 세웠다. 1919년 3월 17일 우리 민족이 세운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때 1만명이 넘는 고려인이 여기에 살았지만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을 모두 파괴했다. 지금은 기념비만이 이곳이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구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3·1운동은 세계 각지에 임시정부 설립을 촉발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히면서 여기저기서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정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정부 수립을 위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300년 넘게 러시아를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년)은 열강의 제국주의 책동을 비난하며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우리도 반제국주의 흐름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같은 해 5월 문창범(1870~1938년)과 최재형(1860~1920년)이 중심이 돼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열었다. 러시아 전역의 한인을 대표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의미다.이들은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25일 중국 간도 지역 동포들과 함께 총회를 열었다. 이때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바꾸고 연해주와 간도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의회 의장에 문창범을 선출하고 외교부장 최재형, 군무총장 리동휘(1873~1935년) 등을 임명했다. 공식 선포는 20일쯤 뒤인 3월 17일에 이뤄졌는데, 이는 3·1운동과 궤를 맞추려는 의도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노서아(러시아) 영토에 있던 임시정부’라는 뜻으로 ‘노령정부’라고도 한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가 기능을 한 곳에 모아 집행하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했다. 단시일 내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정부 조직 과정을 다수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대한국민의회는 정부 선포 직후 각국 영사관에 전문을 보내 일본 제국주의와의 혈전(血戰)을 선언했다. 간도 뤄쯔거우(나자구)에 군사 훈련소도 마련했다. 신한촌 옛터에서 이원규 작가는 “전 세계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독립 전쟁으로 영토를 되찾아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노령정부는 이런 임정의 본령을 구현할 최적지에 있었다”고 평했다.다만 이 정부는 상하이·한성 정부와 달리 별도의 헌법을 발표하지 않아 조직 구성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고려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유산계급인 원호인(러시아 귀화자)들이 무산계급인 여호인(미귀화자)들을 차별해 한인 사회가 둘로 쪼개지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러·韓 어느 곳에도 최재형 추모비 하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우수리스크. 발해성 등 2개의 성터가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쌍성자’로 부르던 곳이다. 민가가 즐비한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가자 단정히 정돈된 최재형 생가가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러시아 인부들이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느라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집은 그가 1919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살던 곳이다. 권 가이드는 “최재형을 빼놓고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이나 러시아 어느 곳에도 추모비 하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전했다.노령정부 태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들자면 단연 ‘연해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최재형이 꼽힌다. 안중근(1879~1910년)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를 저격할 수 있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을 건넨 인물이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였던 아버지 최형백과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9살이던 1869년 가족들이 배고픔과 학정을 이기지 못하고 크라스키노(연추)의 한인마을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밥만 축낸다”는 형수의 구박에 집을 뛰쳐나왔다가 포시에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러시아 선장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최재형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는 이 부부와 전 세계를 항해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양문명을 체험했다.187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군수업자로 변신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이 지역 노동자 한 사람의 급여가 월 10~15루블 정도였는데, 그는 포시에트항을 근거지로 여러 사업을 벌여 매달 1만루블 이상을 벌었다. 거부가 되자 그는 자신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고국을 돕고자 발벗고 나섰다. 1909년 10월 안 의사의 하얼빈역 저격을 도운 것이 대표적이다. 최재형의 막내딸인 엘리자베트 표트로브나의 회고록에는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고 실행 전 우리 집에 기거하며 사격 연습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해주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페치카’(러시아식 난로)라는 애칭도 얻었다.●전 재산 독립에 쓰고… 日 헌병대에 총살당해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본은 1920년 4월 러시아혁명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상륙해 대대적인 체포·학살에 나섰다. 조선 독립에 전 재산을 쓰고 어렵게 살던 최재형은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의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4월 5일 처형됐다. 63세였다. 당시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여러 차례 애원했지만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봐 담담히 앞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죽음을 맞으러 발걸음을 내딛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외로웠을까. 블라디보스토크·바라바시·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캠퍼스 금연했더니 주민들이 켁켁… 고민 빠진 日대학

    [특파원 생생리포트] 캠퍼스 금연했더니 주민들이 켁켁… 고민 빠진 日대학

    일본 주오대 다마캠퍼스(도쿄도 하치오지시)는 13곳에 이르는 교내 흡연실을 모두 없애고 지난 9월부터 ‘전면금연’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연기됐다. 흡연실을 단계적으로 철거하는 과정에서 전체 학생 2만명의 5.6%에 이르는 흡연자들이 학교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커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건강 증진과 학교의 위상 제고를 위해 실시하려던 전면금연이 오히려 대학의 이미지 저하를 가져오게 되자 학교 측은 계획을 철회했다. 화장실에서 몰래 피우는 학생들에 대한 비흡연 학생들의 불만도 “차라리 흡연실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는 요구로 이어졌다.일본 사회 전체적으로 흡연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대학들이 고민에 빠졌다. 간접흡연 대책을 강화한 건강증진법이 지난 7월 개정되면서 일본 대학들은 내년 7월쯤부터 강의실 등 건물 내 전면금연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건물 외부에는 흡연실을 설치할 수 있다. 그러나 상당수 대학들은 이참을 실내·실외 완전금연을 선언할 기회로 보고 있다. 재학생의 건강 증진은 물론이고 우수한 학생의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30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전국 약 780개 4년제 대학 중 24%인 186개 대학은 이미 ‘모든 캠퍼스 완전금연’을 실시하고 있다. 5%인 37개 대학은 일부 캠퍼스에서만 금연을 시행하고 있다. 대학들의 바람과 달리 완전금연이 생각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주오대 다마캠퍼스처럼 전면금연 이후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학교 이미지를 갉아먹는 학생들’ 때문에 흡연을 부활한 대학이 적지 않다. 야마가타현 야마가타대와 아키타현 아키타대도 비슷한 이유로 몇 년에 걸쳐 시행해 오던 전면금연을 철회하고 ‘흡연 가능’으로 돌아섰다. 강경한 대응을 유지하는 학교들도 있다. 나고야여대(나고야시)는 신입생들에게 ‘재학 중에는 절대로 흡연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요구한다. 소가대(도쿄도 하치오지시)는 담배를 피우는 학생에게 금연보조제 처방까지 해 준다. 내년 여름 학교 흡연규제 강화에 맞춰 어떤 선택을 할지 일본 대학들의 고민은 계속될 전망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쌍용차 71명, 9년 만에 출근길 오른다

    마지막 남은 48명은 내년 상반기 채용 노조 “손배·가압류 취하·책임자 처벌 등 진실을 밝히는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 “복직 신고합니다. 거칠고 투박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보듬고 쓰다듬어 주시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해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우 전 지부장은 9년 만의 출근을 앞두고 페이스북에 “참된 삶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서 “그 자양분을 옹이처럼 뇌리에 새기고 잊지 않으면서 실천하는 노동자로 거듭나겠다”고 적었다. 김 전 지부장은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 철거를 막았다는 이유만으로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2009년 쌍용자동차의 정리 해고로 일자리를 잃었던 노동자들이 9년여 만인 31일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복직 대상자 71명이 31일 경기 평택공장으로 출근한다고 30일 밝혔다. 정리해고 사태 이후 남아 있던 노동자 119명의 60% 정도 되는 규모다. 명단에는 김 전 지부장을 비롯해 윤충열 수석부지부장, 김정욱 사무국장 등도 포함됐다. 이들은 복직 당일 아침 평택공장 정문에서 기자회견과 축하 카네이션 달아주기, 가족 편지 낭독 등의 간단한 행사를 진행한다. 노사는 지난 9월 14일 대통령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중재로 해고 노동자의 복직에 합의했다. 당시 쌍용차지부, 쌍용차노조와 사측은 남은 해고 노동자 60%를 2018년 연말까지 채용하고, 나머지 40%는 2019년 상반기에 단계적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앞서 노사는 2013년 무급휴직자 454명을 복직시켰다. 2015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자와 해고 노동자들을 단계적으로 복직시켰다. 이번에 71명이 복직하면 48명이 남게 된다. 올해 복직자 명단에서 빠진 김득중 지부장은 “10년 싸움을 책임진 지부장으로서 조합원들이 모두 복직한 후 가장 마지막에 복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고 말했다. 쌍용차는 2009년 경영난 등을 이유로 전체 인력의 37%에 달하는 2646명에게 구조 조정을 통보했다. 1666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고, 980명이 정리 해고됐다. 이에 노조는 공장을 점거하고 옥쇄 파업을 벌였다. 이명박 정부는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했다. 이후 해고 노동자 3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한편 쌍용차 지부는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손해배상·가압류 취하가 경찰의 내부 반발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폭력 진압에 대한 책임자 처벌도, 대법원의 재판거래 진상 규명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진실을 밝히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성남시-LH, 순환정비방식 재개발사업 협약

    성남시-LH, 순환정비방식 재개발사업 협약

    경기 성남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는 27일 오후 시청 상황실에서 은수미 성남시장, 박상우 LH 사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남시 재개발사업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기본업무 협약’을 맺었다. LH는 협약에 따라 성남시 재개발 사업 시행자로 참여 때 해당 구역 소유주와 세입자가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순환용 주택을 마련한 뒤 정비 공사가 진행된다. 성남시가 내년 상반기 중 수립하는 ‘2030년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에 포함하는 재개발 사업 구역이 추진 대상이다. 전면 철거 후 재개발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LH가 소유한 임대주택에 사업구역 주민이 거주하도록 해 원래 살던 곳에 재정착할 수 있게 하려는 조처다. 현재 이런 방식의 순환 이주 재개발사업이 추진 중인 곳은 LH가 시행하는 성남시 2단계 재개발사업 구역이다. 신흥2구역(21만350㎡, 6488가구), 중1구역(10만8423㎡, 3113가구), 금광1구역(23만3366㎡, 7499가구)이 해당한다. 4718가구의 소유자·세입자가 위례·여수지구에 마련된 순환용 공동주택으로 2016년 6월부터 2017년 10월 사이에 이주했다. 재개발사업이 완료되는 오는 2022년까지 이곳에 거주하게 된다. 시 관계자는 “대규모 이주 수요 발생으로 원주민들이 재정착하지 못하고 밖으로 내몰리는 전면 철거방식의 재개발 사업 부작용을 해결하려고 이번 협약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한양서 가장 깊은 계곡 삼청동천 물길… 북촌의 힘이었구나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한양서 가장 깊은 계곡 삼청동천 물길… 북촌의 힘이었구나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4회 삼청동(삼청공원의 겨울) 편이 동짓날인 지난 22일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경복궁역 5번 출구에 모인 참석자들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국무총리 서울공관~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서울 요새화의 산물, 방호연막탄 지주~제1호 도시계획공원 삼청공원을 차례로 둘러봤다. 청와대 앞 무궁화동산과 왕실에서 길어먹던 복정우물·성제우물, 북창이라고 불렸던 신식무기 제조창 금융연수원 안 번사창, 칠보사의 큰 법당 옆 500년 묵은 느티나무도 구경했다. 종착지인 삼청공원은 덕수궁 돌담길과 함께 한때 연인들의 성지였다. 삼청동천(三淸洞天)에 공원을 만들자는 여론에 따라 1940년 조성됐다.도시에서 물길과 사람길 그리고 건물의 생몰을 살펴보면 도시형태의 변화가 보인다. 삼청동을 이해하려면 물길을 먼저 알아야 한다. 삼청터널 어림에서 발원, 동십자각을 거쳐 청계천까지 2900m를 흐르는 삼청동 계곡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면 삼청동의 역사를 놓칠 공산이 크다. 20세기 역사학의 지평을 연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는 평면이 아니라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3차원의 입체이며, 최소 3층짜리 건물의 구조를 띠고 있다고 역설했다. 상층부에는 단기지속의 시간을 나타내는 사건사(事件史)가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삼청동 계곡이 복개돼 집이 들어서고, 용도가 변경되고, 증축이 일어나며, 개축했다가 철거되는, 반세기에 걸친 변화이다. 정치적 시간의 흐름이다. 중간층에는 경제·사회·문화 등 좀더 장기적이며 불변적인 요소를 포함한 문명사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국면사(局面史)로서의 사회적 시간이 흐른다. 유교 논리가 판친 조선사회에서는 의외인 도교의 신전 삼청전(삼청보전)과 도교의 제사의식을 행하는 관청 소격서의 존재가 그것이다. 500여년에 걸친 제도와 문명사가 읽힌다.브로델은 맨 아래를 구조사(構造史)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사람의 행위에 의해 변하는 사건사와 국면사에 비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지리적 시간을 말한다. 비록 삼청동천이 복개돼 길로 바뀌고, 계곡에 집이 들어섰지만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의 지형적 본질은 바뀌지 않고 장기 지속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악산이라는 이름은 진국백(鎭國伯)이라는 관직에 봉해진 여신을 모신 백악신사에서 유래했다. 마주 보이는 목멱산(남산)에는 목멱대왕을 모시는 목멱신사를 두고 제사를 올렸다. 왕의 시선이 머무는 남산에 한 등급 위의 신분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의 주산 아래 법궁 경복궁을 세운 것은 만고불변의 원칙이었다. 백악산은 세 개의 골짜기를 거느리고 있는데 하나는 서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백운동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흐르는 삼청동천이다. 마지막은 도성 밖 백악의 북서쪽 사면을 돌아가는 백석동천이다. 백운동천은 개천(청계천)의 원류를 이루고 삼청동천은 북창교~소격교~장원서 앞 다리~경복궁 건춘문을 따라 흘렀다. 동십자각을 벗어나면서 서울의 4부 학당 중학을 만나 중학천으로 이름이 바뀐 뒤 교보문고 앞 혜정교에서 개천과 합류했다. 백석동천은 세검정을 거쳐 홍제천과 만났다. 조선시대 백악산 양쪽 삼청동천과 백운동천,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 낙산 서쪽 쌍계동천, 남산 아래 청학동천이 한양 5대 계곡으로 꼽혔다. 그중 삼청동천을 으뜸으로 쳤다. 동천(洞天)이나 동천(洞川) 또는 동문(洞門)은 수려한 골짜기를 일컫는 말이다. 같은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자연부락을 ‘골짜기 동’(洞)이라고 부른 데서 기원했다. 골짜기 동에 ‘하늘 천’(天) 자를 붙여 쓴 것은 신선이 노닐 만큼 풍광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1960년대 말 지금의 모습으로 복개되기 전까지 삼청동천은 서울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계곡이었다.용재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삼청동은 소격서 동쪽에 있다”고 썼고, 손곡 이달도 “삼청보전(삼청전)은 예 모습 그대로인데…”라는 시를 읊었다. 정조는 ‘삼청녹음’(三淸綠陰)을 나라 안 으뜸가는 8개의 경치인 ‘국도팔영’에 꼽았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도 ‘유(遊)삼청동기’를 통해 탄복했다. 삼청터널 어림에서 발원한 물길이 칠보사와 삼청공원을 지나 금융연수원 앞에 있던 북창교(금융연수원 안 번사청을 북창이라고 했음)에서 합쳐져 태화궁(국무총리 서울공관) 앞 너른 계곡에서 절정을 이뤘다. 총리공관 앞에 서면 ‘북촌8경’ 중 8경인 삼청동 돌계단이 거대한 병풍바위 절벽 사이에 뚫려 있는 게 보인다.유심히 관찰하면 바위에 새겨진 ‘삼청동문’(三淸洞門)이라는 암각 글씨 중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50m가 넘는 바위벽에 가로·세로 70㎝ 크기의 4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울시등록문화재 제58호이다.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콘크리트가 흘러내려 글씨가 일부 훼손됐다. 골목 안 지붕 위에 올라가지 않으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글씨의 주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숙종 때 명필 김경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해응이 쓴 ‘동국명산기’에는 김경문, 유본예의 ‘한경지략’에는 이상겸, 장지연의 ‘유삼청동기’에는 송시열의 필적으로 엇갈린다. 총리공관 자리에는 조선시대 태화궁이 있었다. 1970년 삼청동에 흡수되기 전까지 이 동네 이름은 태화동이었다. 국회의장 공관을 거쳐 1961년부터 국무총리 공관으로 사용 중이다. 공관 안에는 서울시 천연기념물 제254호인 900년 묵은 등나무와 255호인 300년 묵은 키 11m의 측백나무가 있다. 등나무는 키 16m, 둘레 1.8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맞은편 삼청동 산35 꼭대기에는 세종 때의 청백리 맹사성이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불던 집터가 있다. 맹씨 일가가 살아 ‘맹동산’이라고도 한다.오백 살 넘은 느티나무가 일품인 칠보사 옆 계곡에 운룡정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운룡정’(雲龍亭)이라는 바위 각자만 남아 있다. ‘서촌 5사정’은 운룡정을 비롯해 옥인동의 등룡정, 사직동의 대송정과 등과정, 누상동의 백호정을 일컬었다. 칠성당에 제사 지낼 때, 정조의 수라상에 올렸던 성제정(星祭井) 혹은 형제우물, 양푼우물이 칠보사 위 60m 지점에 있다. 우물 옆 벽면에 ‘운룡천’(雲龍泉)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삼청동은 북쪽으로 부암동·성북동, 동쪽으로 가회동·계동·원서동, 남쪽으로 팔판동, 서쪽으로 청운동과 4면을 접하고 있다. 삼청동이라는 동명은 도교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성진(三淸星辰)을 모시는 삼청전이 있던 데서 유래했다. 삼청전의 위치는 삼청공원 서쪽 백련봉 기슭 ‘영월암’이라는 바위 글씨 근처로 추정된다. 스물두 살의 가난한 청년 연암 박지원이 백련봉 아래 이장오의 별장에 세 들어 살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시를 지은 곳이다. 조선 말 장동 김씨 세도가 김조순과 김유근 부자의 별서 터가 삼청동에 있었다. 김조순이 살던 옥호정은 금융연수원 길 건너편에 있고 김유근의 집 백련사는 감사원 아래 국군서울지구병원 안에 있다. 이들의 집 앞에는 인사 청탁을 하러 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삼청전의 후광이 장동 김씨의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전무후무한 세도와 정권교체기 금융연수원 안에 설치되는 새 정부 인수위원회의 권세로 이어졌다는 후문이 있다. 태조는 소격전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태종 때 삼청동파출소 뒤 소격서 터에 자리잡았다. 세조는 소격서로 개칭했다. 성종 때 도가사상 배격을 요구하는 조광조 등 유학자들의 반대에 못 이겨 산속 깊이 내쫓겼다. 제후국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관왕묘 신앙에 밀려 빛을 잃었다. 소격동이라는 동명과 소격서 터 푯돌로 남았다. 삼청동은 중국보다 더한 공자의 나라 조선에서 드문 도교의 흔적이다. 삼청동 밑바닥을 흐르는 삼청동천 물길이 ‘북촌의 힘’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서울의 영화2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 ●일시:12월 29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을지로 3가역 12번 출구
  • 상부 지침 어기고 GP철조망 與의원에 선물…군기 빠진 사단장

    국방부 “잔해물 보존” 지시 불구 7사단, 방문한 7명에 액자 기념물 자의적 활용한 軍 ‘기강 해이’ 비판 관련 의원들 논란 일자 “즉각 반납” ‘9·19 남북 군사합의서’에 따라 완전파괴된 비무장지대(DMZ) 내 10개 전방 감시초소(GP) 잔해물을 보존하라는 상부 지침에도 육군 7사단(사단장 박원호 소장)이 철조망 일부를 잘라 GP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에게 선물해 ‘기강 해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의원들은 논란이 벌어지자 즉각 반납 의사를 밝혔다. 군 관계자와 정치권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 민주당 윤호중 사무총장과 김두관 참좋은지방정부 위원장, 권미혁 원내대변인 등 의원 7명이 남북 군 당국 간 긴장 완화 현장을 점검하기 위해 7사단 상승칠성부대를 방문했다. 윤 사무총장 등은 7사단 칠성전망대에서 장병들을 격려한 뒤 059 GP 현장을 찾았다. 059 GP는 북측 GP로부터 900m 떨어진 곳으로,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지난달 26일 완전 파괴된 곳이다. 7사단은 시범 철수 작업 때 철거한 059 GP 안쪽 철조망을 잘라 12월 부대 방문자에게 주려고 11개의 기념품을 미리 만들어 놨다. 한반도 지도 중앙에 7㎝ 크기의 폐철조망을 놓고 액자에 담긴 형태다. 이들 기념품은 부대를 방문한 민주당 의원들을 비롯해 군인공제회 간부와 대형은행 간부들에게 전달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미 지난 4일 GP 시범 철수와 연관된 육군 전 부대에 ‘철수 GP의 잔해물 처리 지침’이라는 공문을 하달해 잔해물의 문화적 활용이 검토되고 있어 별도의 지침이 있을 때까지 GP 잔해물을 훼손하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에도 일선 부대가 잔해물을 임의로 처리해 의원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육군 관계자는 26일 “관련 계통을 통해 하달한 잔해물 처리 지침 공문을 지휘관이 미처 인지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대한 정부의 지침을 해당 부대의 지휘관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거나 부대 내 소통 미숙으로 이를 임의로 처리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에서도 정부 간 협의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GP 잔해물 일부를 군 당국이 자의적으로 활용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의원들은 논란이 일자 선물받은 잔해물 기념품을 즉각 반납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앞으로는 철조망 액자 제작을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명예기자가 간다] 철책 없어진 해변은 ‘숨겨뒀던 보석’… 오래 볼 수 있게 체계적 개발 힘써야

    [명예기자가 간다] 철책 없어진 해변은 ‘숨겨뒀던 보석’… 오래 볼 수 있게 체계적 개발 힘써야

    강원 강릉시에 사는 김모(54)씨는 주말마다 정동진 나들이에 재미를 붙였다. 정동진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바다부채길’을 산책하는 재미에 흠뻑 빠진 것이다. 이 지역은 2016년 9월까지만해도 군(軍)이 해안 경비를 위해 철조망과 경계초소를 설치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은 곳이었다. 하지만 군과 지방자치단체가 철책을 철거하고 정동진과 심곡항 사이의 2.5㎞에 해안산책로를 조성하자 경관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처럼 그간 군부대의 통제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던 전국 해안지역 상당수가 국민에게 개방된다. 국민권익위원회와 국방부는 최근 공동으로 이런 내용의 ‘유휴 국방 군사시설 관련 국민 불편을 해소 방안’을 마련해 실행에 들어갔다. 개선안에 따르면 2021년까지 작전 수행에 필요한 시설을 제외하고 해·강안 철책과 초소 등 유휴시설을 3522억원을 투입해 정리한다. 더이상 국방 업무 수행에 필요 없다고 판단한 시설을 철거해 주민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해·강안 지역에 설치됐던 경계철책 284㎞를 2021년까지 철거해 주민에게 개방한다. 부대 내외 시설 중 노후했거나 안전상의 이유로 사용하지 않은 시설물 8299개(120만㎡)도 철거된다. 군 초소 483개도 포함됐다. 정부가 유휴 국방군사시설을 정비하는 것은 주택가와 해안지역에 방치된 군 시설을 정비해 달라는 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권익위가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국방·군사시설 관련 민원을 분석한 결과 1172건이 접수됐는데 이 가운데 57%(676건)가 국유지 환매, 사유지 무단 점유, 시설 철거 등이었다. 사업이 본격화되면 주민 민원과 불편이 줄어들고 지역 경제와 관광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대 이면에는 부작용도 우려돼 지자체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우선 환경 오염에 대한 걱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은 상대적으로 환경 오염이 덜 된 측면이 있다. 또 무분별한 난개발로 빼어난 자연경관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어 지자체의 체계적인 개발계획 수립과 주민 참여를 통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아울러 시설 철거 과정에 환경 오염이 우려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도 가져야 한다. 정부가 국민들의 고충 해소를 위해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국방·군사시설을 정비하는 만큼 국민들의 권익 증진과 지역 발전의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조덕현 명예기자 (국민권익위 국방보훈민원과장)
  • 관악, 하수관로 새 정비공법 특허… 매년 2000만~5000만원 수입 기대

    관악, 하수관로 새 정비공법 특허… 매년 2000만~5000만원 수입 기대

    서울 관악구가 국내 최초로 공사기간 단축은 물론 예산도 절감하는 노후 하수관로 부분 굴착 개량 공법을 개발해 지난달 특허청으로부터 특허를 취득했다고 24일 밝혔다. 관악구는 민간 개발업체나 전문 건설기술연구원에서나 주도할 것으로 여겨지는 하수관 부분 굴착 개량공법을 개발, 상용화에 성공해 특허증을 교부받는 쾌거를 이뤄냈다.최근 도로 함몰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구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신속하게 불량 하수관로를 조사하고 정비에 나섰다. 이번에 특허받은 새 공법은 파손된 하수관로 일부만 철거하고 새 관을 설치한 뒤 이음부에 보강용 거푸집을 장착, 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를 일정한 비율로 섞어 반죽해 놓은 것)를 주입해 필요한 구간만 개량할 수 있다. 이번 특허 등록으로 관악구는 출원일로부터 20년간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돼 매년 2000만~5000만원의 재정 수입도 얻게 됐다. 박준희 관악구청장은 “이번 특허 등록은 더욱 안전하고 살기 좋은 관악구를 만들기 위해 관련 부서 직원들이 자신의 업무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 맺은 아름다운 결실”이라며 “범국가적으로 추진 중인 도로 함몰 방지 사업에 기여할 수 있게 돼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울시 “故김용균 광화문분향소 자진철거” 공문

    노동계 반발… “박원순 조문입장과 배치” 市 “무단점유 따른 일상적 행정절차 불과” 서울시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광화문 분향소를 철거해달라고 요청해 노동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24일 서울시와 민주노총에 따르면 시는 이날 오후 민주노총에 ‘광화문광장 무단 시설물(고 김용균 분향소) 자진철거 요청’ 공문을 보냈다. 시는 공문에서 “귀 단체는 광화문광장을 무단 점유하고 시설물을 설치해 광장을 이용하는 시민에게 불편을 초래하고 주변 미관을 해치고 있다”며 “자진철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 “광화문광장 무단 점유에 따른 변상금은 12월 17일부터 철거 시까지 부과될 것”이라며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제83조 및 행정대집행법에 따라 행정대집행 등의 조치를 당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리니 꼭 유념해달라”고 했다. 분향소는 지난 17일 오후 광화문광장에 들어섰다. 광장을 쓰려면 사용 예정일로부터 6∼7일 전까지 허가 신청서를 시장에게 내야 한다. 분향소는 이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는 “전 국민적 추모 물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며 반발했다. 대책위는 보도자료를 내고 “서울시의 공문은 박원순 시장이 분향소에 조문 와 밝힌 입장과 배치되는 이중적인 태도”라며 “당장 공문 발송을 철회하고 유족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시장은 조문 후 페이스북에 “다시는 ‘죽음의 외주화’ 앞에 우리의 청춘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글을 남겼다. 다만 서울시 측은 자진철거 요청은 광장 무단 점유 시설물에 대한 일상적 행정 절차에 불과하며 구두로 같은 내용을 설명했음에도 대책위 측이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는 입장이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시장이 조문까지 해놓고는…서울시, 故 김용균 광화문분향소 자진철거 요청

    시장이 조문까지 해놓고는…서울시, 故 김용균 광화문분향소 자진철거 요청

    공문엔 “17일부터 철거시까지 변상금 부과할 것”시민대책위 반발…서울시 “일상적인 행정 절차에 불과”서울시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 광화문 분향소를 철거해달라고 요청해 노동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철거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변상금을 부과하겠다고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조문까지 해놓고는 철거하라는 건 이중적 태도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서울시와 민주노총에 따르면 시는 이날 오후 민주노총 앞으로 ‘광화문광장 무단 시설물(고 김용균 분향소) 자진철거 요청’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서 시는 “귀 단체는 광화문광장을 무단 점유하고 시설물을 설치해 광장을 이용하는 시민에게 불편을 초래하고 주변 미관을 해치고 있다”며 “무단 설치시설물의 자진철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광화문광장 무단 점유에 따른 변상금은 12월 17일부터 철거 시까지 부과될 것”이라며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제83조 및 행정대집행법에 따라 행정대집행 등의 조치를 당할 수 있음을 알려드리니 꼭 유념해달라”고 했다. 분향소는 지난 17일 오후 광화문광장에 들어섰다. 광장을 이용하기 위해선 사용 예정일로부터 6∼7일 전까지 사용허가 신청서를 시장에게 제출해야 한다. 분향소는 이 같은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는 서울시의 공문을 받은 직후 “전 국민적 추모 물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며 격렬한 반응을 내놨다. 대책위는 보도자료를 내고 “서울시의 공문은 박원순 시장이 분향소에 조문 와 밝힌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중적인 태도”라며 “진심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시장의 발언처럼 죽음의 외주화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당장 자진철거 공문 발송을 철회하고 유족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박 시장이 조문 후 페이스북에 “이 참담한 죽음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차마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죽음의 외주화’ 앞에 우리의 청춘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쓴 바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서울시 측은 자진철거 요청은 광장 무단 점유 시설물에 대한 일상적인 행정 절차에 불과하며 앞서 구두로 같은 내용을 설명했음에도 대책위 측이 과도한 반응을 보인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광장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큼 향후 절차를 안내하려는 취지에서 공문을 보낸 것”이라며 “대책위 말처럼 실제 강제철거 등을 염두에 뒀다면 특정일까지 자진철거를 요구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주거환경·통학로 개선 집중… ‘살고 싶은 영등포’로

    주거환경·통학로 개선 집중… ‘살고 싶은 영등포’로

    환경 정비가 주민 제안의 56% 차지 교육 때문에 영등포 떠나는 일 없게 43곳 통학로 안전 향상… 금연거리로소통 창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소통 과정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이 정책으로 실현돼야 한다. 서울 영등포구는 쓰레기, 청소, 주차 문제 등 주거환경 관련 정책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주민 정책 제안의 56% 정도가 관련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23일 영등포구에 따르면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생활 속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살고 싶은 영등포’가 된다는 채현일 구청장의 의지도 한몫했다. 영등포구는 당산역, 구청사거리, 영등포 청과물시장 등 주요 도로 7곳에 재활용품 분리수거함 28개를 설치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을 대상으로 재활용품 배출 시 주민 편의를 증진하고, 재활용품 수거 회수율을 높이려는 조치다. 일반 주택가에도 재활용품 배출이 상시로 가능한 장소를 마련해 고정식 재활용 정거장 51곳을 운영하고 있다. 쓰레기 무단투기 지역에는 폐쇄회로(CC)TV를 추가로 설치하고 화분을 설치하는 방안도 시행했다. 주차 문제와 관련해서는 도로폭이 5m 이상인 곳은 일방통행으로 지정해 차량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주차구역을 확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당산공원 인근 이면도로에서는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해 주차공간을 공유하는 서비스가 시범 시행 중이다. 학부모들과 만남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제안인 ‘통학로 안전 개선’도 구가 집중하는 정책 가운데 하나다. 채 구청장은 “교육과 주거환경의 첫 번째 조건은 안전”이라며 “아이들이 교육 때문에 영등포구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교육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구는 지역 내 초·중·고 43곳을 대상으로 통학로 안전 개선사업을 추진 중이다. 학교 주변에 어린이보호구역 태양광 발광다이오드(LED) 교통안전표지를 46개, 속도제한 표지 100개를 설치했으며, 전국 최초로 초·중·고 통학로를 금연거리로 지정하기도 했다. 주거환경 개선은 단순히 생활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달에는 서울시가 문래동의 대선제분 공장을 전시와 공연 공간, 상점 등이 들어서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도시재생 구상 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내년 8월이면 밀가루 공장이 있던 이 자리에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서게 된다. 영등포 고가차도 철거와 타임스퀘어 등 영중로 일대를 보행자 친화거리로 조성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시동을 걸었다. 채 구청장은 “구민을 비롯해 내부 직원, 서울시, 구의회 등과 탁 트인 소통으로 구민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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