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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대학서 박사학위 받은 신부님

    불교대학서 박사학위 받은 신부님

    가톨릭 사제가 불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눈길을 끌고 있다. 24일 열리는 동국대 2007학년도 가을 학위수여식에서 ‘깨달음 달의 출현(Prabodhacandrodaya) 해탈관에 대한 연구’로 인도철학 박사학위를 받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박문성(40) 신부가 주인공이다. 동국대 관계자는 “불교대학 학부 과정에 수녀님들이 다닌 경우는 몇 차례 있지만 석·박사 과정을 모두 마친 것은 박 신부님이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1995년 사제 서품을 받은 박 신부는 불교의 뿌리인 인도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98년 동국대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에 편입했다. 박 신부는 “상대 종교의 교리와 언어를 보다 정확하고 폭넓게 이해하고 싶었다.”면서 “불교의 뿌리이며 한국인의 심성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도철학을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단과대 수석을 두 차례 차지할 만큼 ‘늦깎이 모범생’이었던 박 신부는 2004년 ‘파슈파타(Pasupata)의 실천원리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3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마쳤다. 박 신부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배우고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교수님과 동료 학생들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종교플러스] 새달 6일부터 ‘부모 성 교실’ 운영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정사목부는 9월6일부터 27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 서울교구청 사목센터에서 ‘부모 성 교실’을 운영한다.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를 대상으로 올바른 성교육을 위한 강의를 진행한다.(02)756-1045.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5·끝)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35·끝)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한국 천주교는 이 땅의 사람들이 스스로 일으킨 ‘자생 신앙’이란 자부심을 갖는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신앙 한국천주교의 태동지가 바로 천진암(天眞菴·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산500)이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면서 불교와 유교를 빼고 설명할 수 없는, 유불천(儒佛天)의 합류지 천진암. 이 천주교 발상지에서는 지금 천주교 선조들의 정신을 오롯이 되살려내기 위한 독특한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지난 1984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한국 순교성인 103위의 시성(諡聖·천주교에서 성인품을 인정하는 공식적인 절차)식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강론을 남겼다.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베이징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중략)…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세계인의 관심을 모은 시성식장에서 로마 가톨릭의 최고 수장인 교황이 한국 천주교의 자생신앙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그런데 교황이 강론 첫머리에 세세하게 강조한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란 누구일까. 바로 천진암에 모여 천주교를 공부했던 이벽(1754~1785)·이승훈(1756~1801)·권일신(1742~1791)·권철신(1736~1801)·정약종(1760~1801), 그러니까 천주교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5인의 성조(聖祖)’이다. 천진이란 산제사나 당산제, 산신제 등을 지낼 때 모셨던 단군의 영정(影幀).195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선 이 천진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천진각이나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집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사료들을 들여다보면 천진암은 원래 천진당이 있던 자리였다. 불교의 천진암(天眞庵)이 들어섰다가 폐찰이 되었고 한때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였으며 나중에는 대궐의 음식 장만하는 일을 관장하던 사옹원의 관리를 받기도 했다.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1779년경 정약용)/“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1797년 홍경모의 ‘남한지’)/“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1850년 다블뤼 주교) 이벽을 중심으로 이른바 5인의 ‘성조’들이 모여 공부할 무렵의 천진암은 거의 허물어져 가는 초라한 폐찰이었다. 당시 일반 집과 서당, 사찰에서 생소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기란 아주 어려웠을 터. 이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외딴 곳을 물색, 바로 천진암을 공부방으로 삼았던 것이다.1779년 이곳에서 강학회를 결성한 뒤 약 5년간 천주교리 연구와 강의, 공동신앙생활을 하며 천주교회를 창립했다. 교회라야 이 5명과 이들의 뜻에 동참한 정약전,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그리고 그 가족들이 전부. 대부분 당대의 명망 높은 남인(南人)계열 집안의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진암을 자주 찾아 천진암에 얽힌 시를 90여 편이나 남긴 정약용이 대부분의 시에서 천진암의 ‘암’자를 ‘庵’이 아닌, 남인 학자들의 호 돌림자 ‘菴’으로 썼던 것일까. ‘5인의 성조’와 동지들은 학문을 연마하던 강학회를 종교신앙의 수련회로 발전시켰고 신·구약 성경 내용을 서사시 형태로 집약한 ‘성교요지’며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르며 허술하나마 교회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쟁쟁한 유가의 10∼20대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학을 공부하고 실천했으니 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함께 공부했던 강학자 이승훈을 베이징으로 보내 영세받도록 했으며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은 귀국후 이벽에게 영세를 주었다. 천진암은 이렇듯 중요한 한국천주교의 성지이지만 1980년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한국의 천주교회가 교회사 정리를 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의 문헌에만 의존했던 탓에 이 선교사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천진암이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천주교 수원교구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변기영 몬시뇰이 1975년부터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1981년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성역화위원회’를 구성, 이곳에 한국천주교 200년 기념 ‘천진암대성당’을 세우기 위한 큰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벽을 포함한 ‘5인의 성조’는 모두 박해를 받아 모진 매질 끝에 옥사하거나 참수당해 순교했다.‘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터를 지나 산길을 오르면 왼편에 ‘한국천주교 창립 성현 5인묘역’이라 쓴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천주교를 창립한 성조 5인의 유해를 옮겨 이장한 곳이다. 반대쪽엔 그 가족묘역이 조성되었다. 묘역 초입에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터’라 쓴 비석을 올려다보며 산길을 오르면 ‘강학회터’라 새긴 표석이 눈에 든다. 천주교리를 공부하고 교회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 덩그맣게 표석 하나만 남았지만 젊은 선비, 아니 천주교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혈기를 나누던 현장에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5인의 묘를 봉안한 곳이 바로 옛 천진암 터. 가운데 ‘세자 요한 광암 이벽’이라 새긴 이벽의 묘를 중심으로 왼쪽에 정약종·이승훈, 오른쪽에 권철신·권일신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훨씬 전 앞서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연구하고 교회로 발전시키다가 순교한 한국천주교의 선구들. 목숨을 던져 신앙을 창시하고 지키다 희생한 선조들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채 옛 신앙 터만 소리없이 지키고 있다. kimus@seoul.co.kr ■천진암대성당 어떻게 짓나 천진암성역화 작업의 핵심은 아무래도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이름 그대로 한국 천주교 발상지에 100년에 걸쳐 기념 성당을 우뚝 세워 놓겠다는 것이다. 천진암의 성격에 맞춰 지붕은 사찰 대웅전의 처마형태를 갖춘 기와 지붕, 외벽은 유교 서원의 골격, 내부는 천주교 성당 양식을 택해 그야말로 ‘유불천’의 조화를 이룬다. 99만㎡ 넓이의 성지에 대성당을 중심으로 조성되는 광장이 16만 5000㎡, 성당 터만 해도 2만 6000㎡(좌석수 3만석). 성당의 높이는 기단∼2층 50m에 지붕부분 35m를 포함하면 전체 85m. 길이도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각각 195m에 달한다. 성당 넓이는 1층 2만 6800㎡,2층 1만 8600㎡. 기둥만 해도 42개가 세워진다. 벽과 기둥, 기단에는 사방 1m 크기의 한국산 화강암 10만개가 쓰이며 모든 돌에는 돌값을 봉헌한 사람의 이름과 봉헌번호, 봉헌연도가 새겨진다. 제대는 중앙 제대를 포함해 1,2층에 걸쳐 모두 55개. 지금은 지반 등 성당 터닦이 공사만 마쳐 휑한 모습. 성당 터 맨 위쪽에 1994년 축성식때 마련한 86t짜리 중앙 제대석이 놓였고 그 앞에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복문을 직접 써 안치한 대성당 머릿돌(초석)이 있다. 5년 내에 철골·지붕공사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그때부터는 미사도 진행할 수 있다. 임시 성당격인 성모경당을 대성당 터 위에 지어 놓았으며 대성당 완공 때까지 이곳에서 미사를 진행한다. 외벽과 장식까지 포함해 20여년 안엔 모든 공사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게 변기영 몬시뇰의 귀띔이다. 예상 공사비는 골조공사 500억원, 조적공사 500억원 등 총 1000억원.100년간 연평균 10억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공사다.
  • 인혁당 유족 이영교씨 “배상금으로 추모사업 벌일 것”

    “고교생이던 큰 아들은 ‘빨갱이’라는 놀림에 세 차례나 전학다녔고, 두 아들은 장성한 뒤에도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조차 못했습니다. 전 화병에 시달렸어요.” 32년간 긴 악몽을 꾸었던 것일까.21일 법원이 1975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희생자 유족에게 국가배상을 판결한 뒤 고(故) 하재완씨의 미망인 이영교(70)씨는 “돈을 얼마나 받든 남편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면서 “(국가의 항소 없이) 이번 판결로 종료되길 원하며 배상금으로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주축이 된 사단법인을 만들어 추모사업 등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판결 직후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날 배상판결은 올해 초 재심에서의 무죄판결에 이어 유족들에게 정신적·물질적 피해회복을 의미한다. 이씨는 “앞서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간 국정원(전 중앙정보부)조차 남편이 고문을 당했고, 인혁당사건은 조작됐다고 인정해 명예회복은 됐다.”면서 “괴로웠던 지난날을 더이상 돌이켜 보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그저 사법부가 이제야 제 구실을 다했다는 게 좋고, 앞으로 이런 희생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간첩가족’으로 낙인찍힌 30여년의 삶은 이씨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참기름 행상 등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덕분에 고혈압과 불면증, 관절염까지 잔병치레를 이어왔다. 최근에는 무릎관절치환술까지 받았다. 하지만 당시 15살,3살이던 두 아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함이 앞선다. 이제 47살,35살 장년으로 장성했지만, 두 아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채 취업조차 할 수 없었다. 이씨는 “큰아들이 판결 뒤 ‘죽이지나 말지 돈은 무슨 돈이냐.’고 하더라.”며 잠시 울먹였다. 이씨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사업회 운영계획은 이미 유족들 사이에 합의가 됐으며, 국민들이 통일을 위해 힘쓰다 누명을 쓰고 죽은 남편을 기억할 수 있도록 여생을 바치겠다.”고 밝혔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인혁당 유족에 245억 배상”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사건으로 판결 16시간 만에 사형당한 8명의 희생자 유족들에게 국가가 245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1인당 27억~33억… 사상 최고액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8부는 21일 고(故) 하재완씨 유족 등 4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희생자 1인당 27억∼33억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시국사건과 관련한 국가 배상액 가운데 최고액이다. 법원이 거액의 국가배상 책임을 물은 데는 공권력을 이용한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한 근절 의지를 표방하고 유족들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유족들에게는 사법부를 통해 명예 회복을 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유족과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은 “사법 살인을 당한 8명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됐다.”며 환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보장할 임무가 있음에도 오히려 국가 권력을 이용해 사회 불순세력으로 몰아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면서 “30여년간 유족들이 사회적 냉대, 신분상 불이익과 경제적 궁핍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으므로 피해자 본인에게는 각 10억원, 처나 부모에게는 6억원, 자녀들에게는 각 4억원 등을 위자료로 정한다.”고 밝혔다.“사망 시점을 기준으로 10년 만에 손해배상 청구권의 공소 시효가 소멸됐다.”는 국가측 주장에 대해선 “유족들이 과거의 판단이 오판이었음을 인정받기 전에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일축했다. ●“사단법인 만들어 추모사업” 이에 따라 고 우홍선씨 등 결혼한 희생자의 유족은 가족별로 27억∼33억원씩을, 여정남씨 등 미혼인 채 사망한 희생자는 형제와 누나, 조카 등이 모두 30억원을 각각 받게 됐다. 유신 정권에 반대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휘말려 사형 선고를 받았던 8명은 올해초 32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열린세상] 3만달러 시대를 위한 묘책/차동엽 신부·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열린세상] 3만달러 시대를 위한 묘책/차동엽 신부·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바람직하지 않은 줄은 알지만 저녁식사를 밤 10시 이후에 하는 일이 많다. 강의 일정상 귀가 시간이 자주 늦는 데다 외식은 잘 안하기 때문이다. 그뒤 소화될 때까지 약 30분간,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케이블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필자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다. 이 짧은 시간을 통하여 대충 요즘 문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 잡는다. 물론 연구소장직을 맡았기에 사회정보를 수집하는 경로가 TV뿐만은 아니지만. 그건 그렇고, 케이블 TV로 ‘미녀들의 수다’ 재방송을 보면서 그녀들의 말에 공감한 적이 있다. 수다 속에서 가끔 문화의 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를 자아내는지 실감하게 된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 자화상을 발견하는 것도 유익한 점이다. 그 프로를 보는 중에 외국에서 약 10년간 유학할 때 느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하나, 언어문화의 차이를 발견했을 때 온 영감(inspiration)을 소개한다.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학위 공부를 하였다. 막 독일어를 배울 때 ‘축하합니다’라는 의미의 단어 ‘Gratulieren’을 외우면서, 이 단어는 생일이라든가 기념일에 축하하면서 사용하는 단어 정도로 익혀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단어가 우리 한국어 문화권에서 짐작하는 정도 이상으로 일상용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분좋은 문화쇼크였다. 그곳에서는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들의 언어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에티켓 언어가 상당히 많다. 심지어 재채기를 할 때에도 ‘줌 볼(Zum Wohl: 좋은 일이 있기를)’이라는 말을 쓴다. 이런 체험은 미국에서도 있었다. 미국 보스턴대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한 교수는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challenge me(나에게 도전하라)’라는 말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폭포수 같은 질문을 퍼붓는 것을 즐겼고 학생이 올바른 대답을 하면 항상 ‘컨그레출레이션(Congratulation)’이라는 말로 축하해 주었다. 앞에서 필자는 ‘영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렇다. 그것은 영감이었다. “바로 이 차이다.‘축하합니다’라는 단어를 특별한 날에만 사용하는 우리 언어문화, 그리고 하루에도 여러차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구미의 언어문화, 이 차이가 국민소득 2만달러를 향하는 대한민국과 이미 3만달러를 넘어선 저들의 차이로구나!” 언어는 문화의 바로미터다. 사고방식과 사는 태도의 지표이다. 국민소득은 이 모든 것들의 총화로 이루어지는 결과일 따름이다. 경제가 좋아지려면 사회적 및 문화적 인프라가 함께 좋아져야 한다. 이것은 법칙이다. 경제만 좋아지려고 해봐야 어림없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되진 않을 것이다. 필자는 확신한다.‘축하합니다’라는 말이 전 국민의 일상용어가 될 때 우리나라는 1등 국민,3만달러 소득의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와 같은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그러한 용어가 아직 일상용어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배우면서 ‘Thank You.’ ‘I’m Sorry.’등의 표현을 접하게 되었고, 그후 점점 우리 국민 언어에서도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라는 표현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된 의식과 병행하여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나라가 2만달러 문턱까지 온 것은 다 그러한 말들로 인한 의식변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한국인이 배워야 할 용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축하합니다.’라는 말이다. 2만달러 소득은 경쟁논리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만달러 시대는 공생의 논리, 축하의 논리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하다고 본다.‘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와 같은 속담이 없어질 때, 국가의 미래는 한층 높은 수준으로 도약할 것이다. 차동엽 신부·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 [부고]

    ●심종린(전 주택은행 부행장)종완(미국 거주)종범(〃)씨 모친상 찬구(스포티즌 대표)씨 조모상 김경수(미국 거주)씨 빙모상 1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0일 오전 10시 (02)3410-6901●염옥선(한국은행 국고증권실 과장)씨 부친상 17일 전남 나주 한국병원, 발인 19일 오전 9시 (061)334-4311●한구영(전 동화인쇄공사 부사장)씨 별세 상욱(김&장법률사무소 변호사)상진(울산대 사회학과 교수)혜경(명지전문대 교수)씨 부친상 김자경(디지털위성방송 부장)황미영(부산카톨릭대학 교수)씨 시부상 1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0일 오전 9시 (02)3410-6915●김경덕(바우산업 과장)춘임(전 국민은행 과장)수진(보라매병원)수영(고성 거진초등학교 교사)씨 모친상 송효석(국민은행 청담동 부지점장)최병수(서울대병원)박재호(속초 중앙초등학교 교감)씨 빙모상 16일 서울대병원, 발인 18일 오전 6시 (02)2072-2022●백승권(프로축구 전북 현대 사무국장)씨 부친상 17일 인천 길병원, 발인 19일 오전 7시 (032)471-6361●이수찬(힘찬병원 대표원장)수천(늘푸른비뇨기과 원장)씨 부친상 박혜영(내과전문의)김미경씨 시부상 17일 서울 목동 천주교회, 발인 19일 오전 6시 (02)2645-6648●손귀영(만나교회 담임목사)귀학(자영업)귀정(국악인)귀연(대신증권 법인영업부 팀장)씨 모친상 16일 보라매병원, 발인 18일 낮 12시 (02)831-1899
  • 종교계 “생명·평화운동 자성”

    종교계 “생명·평화운동 자성”

    ‘지금 종교계의 큰 화두는 생명.’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종교계에서 ‘생명’과 ‘평화’라는 쉽지 않은 화두를 풀어내려는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생명평화결사가 10일 오후 3시 거창 수승대 거북극장에서 마련하는 공개토론회와, 다음달 2일 오후 7시 서울 명동성당서 천주교가 주관하는 ‘천주교 생명수호대회’. 모두 주제 자체가 첨예한데다 참석인사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거창 토론회가 확산되는 생명·평화운동의 현주소를 평가, 반성하는 공개토론장이라면 천주교계의 생명수호대회는 생명 평화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적극적인 실천 다짐으로 눈길을 끈다. ●생명·평화 운동의 개인 역량 되찾기-거창 토론회 전국을 돌며 생명, 평화 인식을 세상에 심는 탁발순례 중인 ‘생명평화결사’회원들이 자신들의 위상과 행동을 되돌아보기 위한 반성의 자리. 세상에 생명과 평화를 강조하는 다양한 목소리와 행동이 많지만 아프간 피랍사태를 계기로 과연 이같은 것들이 사회 전체와 개인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 일반인 앞에서 냉철하게 심판받자는 뜻에서 마련, 입소문이 번지고 있다. 가장 큰 관심부분은 진보적 논조로 주목받고 있는 김규항(‘고래가 그랬어’발행인)씨가 이 생명평화결사 실행위원 9명에게 비판의 화살을 거침없이 쏜다는 점이다. 도법(탁발순례단장) 스님을 비롯해 황대권(작가·생태운동가), 이병철(시인·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정해숙(초대 전교조 위원장), 김경일(성공회 신부), 박두규(시인·교사), 김민해(목사·월간 ‘풍경소리’발행인), 박소정(순천YMCA이사장), 김귀옥(교사)씨 등 9명이 김씨의 질문과 비판을 받아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명평화결사의 탁발순례를 비롯해 여러 생명 평화운동의 허와 실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최병진 목사(광주 미래에서온교회 담임·생명평화결사 문화홍보위원장)는 “종교계와 시민단체들의 생명평화운동은 개인을 종교권력·정치권력·시민권력 앞에서 자유롭도록 도와야 하는데 거꾸로 이같은 권력들에 함몰되어가고 있다.”며 “개인이 슬로건식 생명 평화의 기치아래 끌려가는 게 아니라 개인이 주체가 되는 생명 평화운동의 방향을 찾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토론회에서는 당연히 아프간 피랍사태도 빠지지 않을 전망.‘한국 개신교 교회들의 배타적 선교가 오히려 사람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는 생존권 침입의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관련해 첨예한 논쟁이 이어질 전망이다. ●“생명문화 건설에 동참을” 천주교 생명수호대회 천주교계가 작심하고 준비한 대규모 생명 수호대회. 주교회의가 주최하고, 주교회의 생명31운동본부와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공동주관,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주교단·사제단과 신자 국회의원,7대 종단 대표, 정부 관계자, 일반신자 등 6000여명이 참석한다. 외부인들은 주최측이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권고(회칙‘생명의 복음’)를 따라 ‘생명을 사랑하는 선의의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다. 행사는 핵심사안인 ‘배아도 인간’임을 천명하면서 생명경시 풍조에 정면 대응한다는데 초점을 맞췄다.‘낙태를 합법화한 것’으로 받아들여 모자보건법 제14조의 개정을 거듭 촉구한다. 정진석 추기경과 주교단이 공동 집전하는 생명수호 미사를 시작으로 퍼포먼스, 촛불행렬과 묵주기도가 이어진다.24일부터 9월1일까지 전국 본당에서는 미사마다 ‘생명수호대회 9일 기도’를 봉헌, 관심과 참여를 늘려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플러스] 18~21일 제주서 ‘가톨릭 청년대회’

    ‘2007 한국가톨릭 청년대회’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주제 아래 18∼21일 제주도 전역에서 열린다. 천주교주교회의 청소년사목위원회가 주최하고 제주교구가 주관하는 행사에는 국내 교구는 물론 일본 교토교구를 비롯한 해외청년 2900여 명 등 3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0) 계룡산 중악단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0) 계룡산 중악단

    계룡산이 민간신앙과 신흥종교의 성지라지만 대전 쪽에서 동학사를 거치거나, 충남 공주에서 갑사로 오르는 일반적인 방문코스에서 이 산이 지닌 신령스러움을 느끼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주에서 갑사로 들어가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계룡산 중턱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을 굿당이나 암자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판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하지요. 기독교와 천주교의 기도원도 보이는데, 계룡산이 발산하는 영적인 기운이 무속이나 불교, 신흥종교에만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읽고 싶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달리다 계룡산 기슭으로 난 왼쪽길로 접어들면 곧 신원사가 멀리 보입니다. 신원사는 눈 푸른 납자들이 수행하는 국제선원이 있는 절로도 유명하지요. 하지만 신원사를 기억해야하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이곳에 중악단(中嶽壇)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룡산에서 가장 높은 해발 845m의 천황봉을 등지고 있는 중악단은 조선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며 끊어졌던 계룡산 산신제는 1998년부터 민간차원에서 되살려 해마다 모셔지고 있지요. 조선은 묘향산을 상악(上嶽), 계룡산을 중악(中嶽), 지리산을 하악(下嶽)으로 삼아 각각 상악단과 중악단, 하악단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묘향산과 지리산의 제사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중악단이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1959년 발간된 ‘공주군지’는 1879년(고종 16년) 계룡산사(鷄龍山祠)라는 이름을 중악단으로 바꾸며 건물도 중수한 것으로 전하지요. 일본인 인류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1931년 ‘조선의 풍수’에서 대한제국 수립 이후 고종이 1898년(광무 2년) 중악단을 위엄있게 짓고,神院寺(신원사)였던 절 이름도 제국의 기원을 연다는 뜻에서 新元寺(신원사)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신원사의 역사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경내에서는 백제시대 와당(기와)이 발견되었다고 하지요.神院(신원)이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을 뜻하는데,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제사터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백제시대 계룡산 제사터의 위상은 확실하지 않지만, 통일신라는 전국의 5대 명산을 5악(五嶽)으로 지정하고 국가적 제사터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합니다. 토함산이 동악, 지리산이 남악, 계룡산이 서악, 태백산이 북악, 팔공산이 중악이었지요.5악신앙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태조는 계룡산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이라는 작호(爵號)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조선 태조가 계룡산의 산세를 높이 평가하여 새로운 왕조의 도읍으로 삼고자 한동안 공사를 벌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17세기 들어서면서는 계룡산 신도안이 이씨 왕조의 400년 수도 한양에 이어 새로운 왕조가 800년 동안 도읍할 땅이라는 ‘정감록’이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조선 말에 이르러 사회적 불안이 증폭되면서 계룡산이라는 존재는 왕실에 적지않은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종이 중악단의 격을 올리고 건물도 새로 지은 것도 새 왕조의 도읍으로 공공연히 일컬어지는 계룡산의 땅기운을 억누르려는 의도였다는 것이지요.‘정감록’의 예언이나 왕실의 중악단 중건이 모두 계룡산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고도의 정치행위였던 셈입니다. dcsuh@seoul.co.kr
  • 日海에 화려한 휴가 풍파

    심의조 경남 합천군수와 ‘화려한 휴가’를…. 최근 영화 ‘화려한 휴가’가 인기를 끌면서 잠잠하던 경남 합천의 ‘일해공원’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새천년 생명의 숲’을 일해공원으로 바꾼 합천군청 홈페이지에는 이 영화를 관람한 네티즌의 항의 글이 봇물을 이루고 있으며, 천주교 정의사회구현 마산교구 사제단도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천주교 사제단 “합천군수와 영화 함께 보자.” 마산교구 사제단은 7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천년 생명의 숲을 일해공원으로 변경한 합천군을 비난했다. 사제단은 이를 강행한 심의조 합천군수와 이를 찬성한 합천군의회 의원들이 이 영화를 관람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영화표 11장을 구입해 등기로 발송했다고 밝혔다.9일 오후 7시10분 창원CGV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관람권이다. 백남해 신부는 “학살 원흉의 아호가 새겨진 공원에서 우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살고 있는 우리들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밝혔다. 이 영화가 개봉된 지난달 26일 이후 합천군청 홈페이지는 일해공원을 비난하는 네티즌들의 글로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네티즌 최모씨는 “합천은 역사의 단죄를 아직 다 받지 못한 자를 옹호하는 곳으로 오명을 영원히 갖게 될 것이고 우리의 자녀와 청소년들은 그 오명의 역사에 혼란스러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토론공간인 ‘아고라’에도 반대 의견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네티즌 ‘어린작가’는 “세상 어느 나라가 한쪽에서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로 국민들을 아프게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죄 없는 국민을 죽인 원흉을 기념하기 위해 공원을 만들겠는가.”라고 비난했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일해공원 개명 철회 서명운동’도 이 영화가 개봉된 이후 다시 탄력을 받아 반대의견을 올린 네티즌이 2만명을 돌파했다. 일해공원 반대 경남대책위는 이달 중순 합천군이 지난달 설치한 ‘일해공원 안내표지판’ 철거를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경남대책위는 지난 3일 일해공원 안내 표지판 철거를 요구하는 공문을 합천군에 보냈다.9일에는 합천군민을 대상으로 ‘화려한 휴가 함께보기’ 운동을 벌일 예정이며, 영화 제작사와 협의해 상영 기간이 끝나면 일해공원에서의 상영도 추진키로 했다. 이에 앞서 5·18 유족단체인 ‘오월어머니회’는 6일 광주 동구 장동에 있는 ‘오월어머니회’ 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사모(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 등에게 ‘화려한 휴가’를 함께 보고 공개 토론을 할 것을 제의했다. 오월어머니회 관계자는 “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단성사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예정이며 전사모쪽의 답변이나 반응이 없더라도 영화 감상은 예정대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사모는 ‘화려한 휴가’ 비난 인터넷 카페 ‘전사모’ 자유게시판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비난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전사모는 오는 19일 합천 일해공원에서 여름철 정기모임을 갖고, 공원을 청소하면서 전 전 대통령의 업적을 홍보한 뒤 생가를 방문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유배객, 세상을 알다’/김려 산문선

    ‘유배객, 세상을 알다’/김려 산문선

    “그대 어디를 그리워하나?그리운 저 북쪽 바닷가/부령의 친구들 모두 나이 지긋한데 나와 백능까지 모두 여덟명./국보는 소처럼 마셔 몸 못 가누고 익보는 하루에도 거뜬히 백잔./담수는 밥보다 술지게미 좋아하고 권씨는 취하면 더욱 온순해지네./문성은 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언소는 항아리 째 벌컥벌컥 마셨네./그대들 생각하나 볼 수 없어서 괴로운 이 마음 가슴이 터질 듯.” ●함경도 부령·경상도 진해서 10년 ‘고초´ ‘부령의 술친구들’이라는 김려의 시다. 고향 친구를 그리는 듯 보이지만, 부령은 다름아닌 그의 첫번째 유배지. 김려는 함경도 부령에 4년 동안 유배된 뒤 다시 경상도 진해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이 시는 진해에서 부령의 술친구들을 못잊어 쓴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김려(1766∼1822)는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에 진사에 급제한 전도유망한 선비였다. 그런데 32세되던 1797년 벗 강이천의 옥사에 연루된다. ‘함께 모여서 서학(천주교)을 이야기하고, 서해에 진인(眞人)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이른바 강이천의 비어사건(飛語事件)으로, 김려는 두 곳에서 장장 10년 동안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김려는 이 시에 나오는 문하생 백능을 두고 ‘소년 풍모가 좌중을 압도한다.’고 했다. 국보는 병영의 아전이고, 익보는 그의 사촌동생으로 역시 아전. 담수와 언소 역시 아전이었다. 이렇게 보면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은 대부분 아전이다. 김려가 사대부라는 허위의식을 벗어던지고 진정으로 사람을 사귀어가는 모습이 드러난다. 김려 산문선 ‘유배객, 세상을 알다’(강혜선 옮김, 태학사 펴냄)의 재미는 유교적 질서에 얽매어 있던 선비가 제도권에서 내팽겨쳐지면서 오히려 본연의 인간성을 찾아가는 모습에 있다. 그가 진해에서 남긴 시는 ‘사유악부(思樂府)’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한결같이 “그대 어디를 그리워하나?그리운 저 북쪽 바닷가(問汝何所思,所思北海湄)”로 시작하는데서 대부분은 기생 연희를 그리는 연가(戀歌)이다. ●부령은 명필 이광사의 로맨스로도 유명 부령은 조선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가 유배를 살았던 곳으로, 장애애라는 여인이 이곳에서 원교를 모시다가 신지도까지 따라갔던 로맨스로도 유명하다.‘부령의 술친구’에 나오는 담수는 바로 원교 이광사에게 배운 인물로 명필이라고 이를 만했다고 한다. 김려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자연스러운 심성을 되찾을 수 있었던 데는, 유배 과정에서 마주친 갖가지 인간군상의 모습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듯 하다. 그는 옥사에 연루되어 형조에 갇힌 11월12일부터 부령에 닿은 12월10일까지 일기를 썼는데, 험한 지경을 지나왔다는 뜻으로 ‘감담일기’라고 일컬었을 만큼 고난의 길이었다. ●주민들의 덕성에 ‘감화´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행된 유배길에서 폐병이 악화된 김려는 하루에서 서너 차례 피를 토할 정도였는데, 부령부사는 혹심한 감시와 핍박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부령 주민들과 사귀어 가면서 따뜻한 인정에 힘입어 유배생활의 고통을 극복해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북방민 삶의 현실을 알게 되고 그들의 소박한 인간미와 덕성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려는 진해 바닷가에서는 ‘매일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매일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에도 일부가 소개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는 그 체험의 종합판이다. 우해는 진해의 옛 이름으로 어류 53항목, 갑각류 8항목, 패류 11항목 등 모두 72항목이 담긴 ‘우해이어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보다 11년 빠른 한국 최초의 어보(魚譜)이기도 하다.1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종교플러스] 청소년을 위한 생명 UCC 축제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는 ‘제1회 청소년을 위한 생명 UCC(사용자제작동영상) 축제’를 연다.‘인간 생명의 소중함’이란 주제 아래 청소년, 청년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31일까지 홈페이지(www.forlife.or.kr)를 통해 응모하거나 응모작을 사무국에 등기우편으로 보낼 수 있다.(02)727-2350.
  • [서울광장] 종교가 살상의 명분이 되어서야/황진선 편집국 수석부국장

    [서울광장] 종교가 살상의 명분이 되어서야/황진선 편집국 수석부국장

    도올 김용옥은 21세기 인류의 과제로 첫째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 둘째 모든 종교·이념간 배타의 해소를 꼽았다. 모두 인류의 생존과 평화 공존이 달려있는 중요한 문제들이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특히 종교간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고 했다. 멀리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최근의 레바논·수단·보스니아 내전, 인도·파키스탄의 분쟁, 지구촌의 화약고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전쟁의 배경은 종교간 대립과 반목이다. 소련의 붕괴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념에서 비롯되는 냉전과 분쟁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특정 종교를 믿는 민족간의 국지적 분쟁은 더 늘어나고 있다. 지금 시시각각 전해지며 가족과 온 국민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아프간의 한국인 피랍사태는 종교 갈등을 되새기게 한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와 선교사 등 23명은 봉사 활동을 위해 아프간에 입국했지만, 탈레반은 그들을 납치했다. 그 중 배형규 목사는 가슴 아프게도 목숨을 잃었다. 탈레반은 미국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라덴을 숨겨주었다가 아프간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이슬람 무장세력이다. 여성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로켓을 동원한 아프간의 불교 유적 및 불상 파괴도 그들의 극단주의적인 면을 보여준다. 우리도 종종 주변 사람들 중 고집이 센 원칙주의자를 탈레반이라고 얘기할 정도다.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과의 접촉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뼈아픈 경험을 했다. 한국천주교 초기 100년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됐다. 중국·프랑스 신부들뿐 아니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순교자 중 김대건 신부 등 103위가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고, 현재 윤지충과 최양업 신부 등 또 다른 순교자 125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데서도 충분히 어림할 수 있다. 우상숭배라 하여 제사를 금한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체제를 부정하고 토착 문화를 무시한 것이었다. 종교 분쟁을 되새기면서 문득 떠오른 인물이 미국의 ‘반전 엄마’ 신디 시핸이다.2004년 4월 이라크 전장에서 아들을 잃은 시핸은 2005년 8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휴가를 보내던 텍사스주 크로퍼드 목장에서 1인 반전 시위를 시작했다. 아들을 숨지게 한 이라크를 원망할 법도 하건만, 그보다는 미국의 군사주의와 군수산업 확장이라는 이라크 전쟁의 본질을 꿰뚫으며 전 세계에 반전운동의 불을 지폈다. 지난해 눈길을 모은 종교 행사 가운데 하나는 삼소회(三笑會)의 세계성지순례다. 가톨릭 불교 원불교 성공회의 여성수도자 16명은 2월 전남 영광의 원불교 성지를 시작으로 인도의 불교, 영국의 성공회, 이스라엘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탈리아의 천주교 성지를 차례로 순례하며 서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용서와 이해를 구하며 종교의 벽을 허물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형식으로 예배를 올릴지라도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평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소문 그대로 일부 교회에서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해외선교를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나라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교활동을 편다면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종교가 더 이상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살상과 죄악을 저지르는 단서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랍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한다. 황진선 편집국 수석부국장 jshwang@seoul.co.kr
  • 조선시대 3대 방죽… 당진 합덕제 복원

    전북 김제 벽골제, 황해도 연안 남대지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방죽인 충남 당진 합덕제(合德堤)가 복원된다. 30일 당진군에 따르면 합덕읍에 있는 합덕제 복원의 기본계획수립 용역을 충남발전연구원에 발주하기로 했다. 군은 내년 초 용역결과가 나오면 도비 등 120억여원을 투입해 2010년까지 900m의 둑을 복원하고 일부 방죽은 연못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둑 야외공원, 둑 체험로, 수리민속공연장, 수리체험 데크, 육각정자 등이 있는 수리공원도 만들어진다. 이곳은 조선조 초기의 토목공법과 수리농경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교육장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충남도기념물 70호 합덕제는 후백제왕 견훤이 왕건과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군마에게 먹일 물을 공급하기 위해 쌓은 높이 4m 길이 1771m의 둑과 만수면적 102㏊의 저수지다. 이후 주민들이 보강해 내포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로 활용했으나 1970년대 삽교천 유역 종합개발사업 등이 진행되면서 저수지는 농경지가 되고 둑만 원형대로 남아 있는 상태다. 합덕제 주변에 합덕수리민속박물관, 한국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 솔뫼성지, 합덕성당이 있다. 군 관계자는 “합덕제는 우리나라 3대 쌀 경작지인 이곳 내포평야의 젖줄이었다.”며 “성지순례 코스와 연계해 문화관광벨트화하겠다.”고 말했다.당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최후의 만찬’ 새로운 비밀… “사실일까?”

    ‘최후의 만찬’ 새로운 비밀… “사실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둘러싼 새로운 이론이 제기돼 화제가 되고 있다. 이탈리아 IT 전문가 슬라비사 페스치는 다빈치의 그림에서 새로운 형태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이론을 지난 25일 공개했다. 페스치가 제시한 방법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원본 이미지를 겹쳐서 보는 것. 그는 컴퓨터를 사용해 이 방법대로 그림을 겹치면 성배 기사단으로 보이는 인물과 아기를 안고 있는 다른 인물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페스치의 주장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알리는 장면이 아니라 성체 성사(천주교 용어로 예수가 정한 일곱 가지 성스러운 일 중 ‘성체’를 받는 것)를 하는 모습이다. 그는 “겹쳐진 그림에서 예수의 앞에 술잔이 보이는 것이 그 증거”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페스치는 “다빈치는 수학에도 능통했던 학자였다. 최후의 만찬은 그의 치밀한 계산으로 그려졌을 것”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했다. 그러나 다빈치 박물관장인 알레산드로 베조시는 이 새로운 이론에 대해 “단지 공상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베조시 관장은 “작품의 훼손으로 불분명한 형태들이 겹쳐 보이는 것”이라며 “작품이 그려진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렇게 복잡한 계산이 개입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 주말 미국의 폭스 뉴스 등 해외 언론들을 통해 이 내용이 보도되자 페스치의 이론이 공개된 사이트에 네티즌들이 몰려들어 현재까지도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다. 나우뉴스팀@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사르자, 천주교 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양반층의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 남인이었으므로, 탕평책을 내세웠던 정조는 영의정 채제공의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으려고 그들을 교화시켜 유학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 신자들이 많이 천주교 신앙을 버렸으므로, 자연히 중인층의 비중이 높아졌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이라는 논문에서 진산사건(1791) 이후 신유교난(1801)까지의 천주교 지도층을 38명으로 선정하고, 이 가운데 중인이 21명으로 55%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신분미상자 3명을 제외하고 통계를 내면 60%로 높아진다. 중인 지도층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천주신자 신주를 불사르다 초기에 성직자가 없었던 조선 천주교에서는 중요한 교리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북경에 사람을 보내 유권 해석을 구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나무장사를 하던 윤유일(尹有一)인데,1789년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자문,1790년과 1792년에는 성직자 파견 요청을 위해 북경에 다녀왔다. 그는 1790년에 돌아와 “천주교에서는 조상 제사를 금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알림으로써 큰 동요를 일으켰다. 진산군에 살던 선비 윤지충(尹持忠)은 고산 윤선도의 6세손으로 다산 정약용의 외사촌인데,2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1784) 겨울 서울에 올라와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서적을 빌려보고,3년 후 정약용 형제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1791년 여름에 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천주교 교리를 지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다. 외사촌 권상연도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친척과 유림들이 그 사실을 알고 관가에 고발하였다. 진산군수 신사원이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그들은 교리가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신앙을 고수하였다. 전주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자 12월8일에 참수하였다. ●정조 “미혹된 중인을 교화하라” 이 와중에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정조는 탕평 정국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교화정책을 썼다. 형조에서 11월11일에 “사학(邪學) 죄인 정의혁·정인혁·최인길·최인성·손경윤·현계온·허속·김계환·김덕유·최필제·최인철 등 11명을 혹은 형조의 뜰에서 깨우쳐 감화시키기도 하고, 혹은 그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간곡히 깨우쳐 회개하도록 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가운데 신분이 알려진 최인길과 최인철은 역관, 손경윤과 현계온·최필제는 의원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이렇게 전교하였다. “중인 가운데 잘못 미혹된 자들에 대해 반드시 그 소굴을 소탕하려는 것은 한편으로 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자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려는 것이다. 중인 무리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인(常人)도 아닌 중간에 있기 때문에 가장 교화하기 어렵다. 그대들은 이 뜻을 알아서 각별히 조사하여 혹시 한 명이라도 요행으로 누락시키거나, 한 명이라도 잘못 걸려드는 일이 없게 하라. 모두 새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중인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천주교에 심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구조인 문제라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탄압하기보다는 교화시켜 새사람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성경 언문번역본 보급… 평민신자 확보 최필공(崔必恭)은 의원인데, 경거사괴(京居邪魁), 즉 서울에 사는 사학 괴수로 지목되었다.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우고 1790년에 입교한 그는 큰길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을 향해 노방전도를 하였다. 그래서 ‘정조실록’ 15년(1791) 10월23일조에 “예전에는 나라의 금법을 두려워해 어두운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대낮에 마음대로 행하고 공공연히 전파한다. 예전에는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서 겹겹으로 싸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지금은 제멋대로 간행하여 경향에 반포한다.”고 개탄하는 홍낙안의 편지가 실릴 정도였다. 그가 열렬한 전도활동으로 천주교 지도층이 되자, 조정에서 그를 회유하였다. 작은아버지와 동생이 간청하자 신앙을 버리고 종9품 심약(審藥) 벼슬을 받았으며, 아내를 얻어 장가들고, 집도 구했다. 결과적으로 모범적인 배교자가 되었기에 정조는 “최필공같이 완악한 자도 교화되었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최필공의 예에 따라 도신(道臣)이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여 개과천선한 효과가 있으면 방면하라.”고 지방관들을 타일렀다. 그러나 다시 교회에 들어가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므로, 순조가 즉위하자 1801년에 정약종·이승훈 등의 지도자 5명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초기 천주교 서적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지식층만 읽었다. 양반으로는 남인 학자들 사이에 신앙과 관계없이 널리 읽혔으며, 중인들도 북경을 드나들며 수입해 읽었다.‘승정원일기’ 정조 9년(1785) 4월9일조에 “서양 천주의 책이 처음 역관 무리로부터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지 여러 해 되었다”는 유하원의 상소가 실렸으니,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1784년 이전에도 역관들이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을 수입해왔음을 알 수 있다. 역관 최창현(崔昌顯)은 이승훈이나 이벽 같은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며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다 1784년 겨울에 입교했는데,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활동적이어서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진산사건 이후에 신자층이 평민으로 확산되자, 그는 평민 신도들에게 교리서를 읽히기 위해 ‘성경직해(聖經直解)’를 언문으로 번역해 보급하였다. 그가 도피생활중에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자 배교자가 밀고하여 체포되었다. 포청에서는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배교했지만, 국청에 넘겨지자 배교를 취소했다. 호교문(護敎文)까지 지어 적극적으로 신앙을 지켰으므로,4월8일에 정약종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책판(冊板)을 찾으러 간다.”는 신도의 진술이 있었고, 사학도로 적발된 사람 가운데 인쇄나 출판작업에 종사하는 각수(刻手)가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목판본으로 인쇄한 교리서들이 중인과 평민 신자층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 교리서와 성경 번역을 통해, 암클로 천대받던 언문이 새로워졌다. ●중인, 주문모 신부 입국 돕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자, 몇 년 동안 신자들 사이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1801년 3월15일에 자수하였다.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당해 숨어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혼자 살아 남기도 미안했기 때문이다. 영부사 이병모는 그가 조선에 들어온 과정을 정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양 학문에 종사하다가 북경 천주관(天主館)에 전입했다고 합니다. 이승훈이 사서(邪書)를 구입해 온 뒤에 정약종의 무리가 사사롭게 양인(洋人)과 왕래하여 교주(敎主) 얻기를 요구했는데, 천주관에 와 있는 양인은 정원이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에 가게 되면 저들이 알게 되므로, 수업하던 중국 사람을 우리나라에 내보낸 것입니다.” 이튿날 주문모 신부를 신문했는데, 그는 아직도 조선말이 서툴러 한문으로 필담하였다. “갑인년(1794) 봄에 조선인 지황(池璜)을 만나 동지사(冬至使) 행차 때에 변문(邊門)이 통하므로 책문(柵門)으로 나왔습니다.(줄임) 처음에 만났던 지황은 을묘년(1795)에 포도청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의주에서 서울까지 학습하기를 원하는 여러 사람의 집을 옮겨다니며 지냈습니다.” 그가 영세를 주었다고 자백한 사람 가운데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의 이름이 나와, 주문모 신부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죽음을 내렸다. 주문모 신부는 6년 전에 이미 잡힐 뻔했는데, 신부는 달아나고 악사(樂師) 지황, 역관 최인길, 나무장사 윤유일만 잡혀서 매맞아 죽었다. 노론에서는 남인 정권이 자파 천주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내자 3명을 때려죽여 입을 막았다고 비난했다. 윤유일은 몰락한 양반이지만, 지황과 최인길은 중인이었다. 초기 천주교에서 중인과 평민의 비중이 커진 사실에 대해 조광 교수는 “남인 학자들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운동적 차원으로 전환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이벽이 1780년대에 한문으로 썼다는 ‘성교요지’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정약종이 1790년대에 언문으로 쓴 ‘쥬교요지’에서는 더 이상 신분평등을 주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토요영화] 혈의 누

    ●혈의 누(KBS2 토요명화 밤 12시25분) 비릿한 바닷바람에 피 냄새가 섞인다. 고립된 섬마을 분위기가 점점 흉흉해진다.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2005년 제작)는 외딴 섬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미스터리 시대극 스릴러물이란 점에서 색다른 공포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챙겨보면 좋을 듯하다. 19세기 조선시대 동화도에서 어느 날 만들어 놓은 한지가 수송선과 함께 불타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화도는 제지업으로 삶을 영위하는 마을로 그 한지는 조정에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사건이 벌어지자 수사관 이원규(차승원) 일행이 마을로 들어온다. 화재 사건 해결을 서두르던 원규 일행 앞에 갑자기 참혹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을 알지 못해 동요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7년전 천주교도 패거리로 낙인 찍혀 온가족이 몰살 당한 강객주(천호진)의 저주라고 여기면서 두려움에 휩싸인다. 원규는 사건 해결에 전력을 다하지만 참혹한 살인 사건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게다가 강객주의 은혜를 입었다는 두호(지성)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점점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 영화는 전라남도 여수와 보성, 경상북도 경주 등을 무대로 마치 조선시대에 온 것 같은 사실적 배경을 선사한다. 또 ▲죄인의 머리를 길거리에 달아매어 놓는 효시 ▲몸을 밧줄로 묶고 가마솥에 넣는 육장 ▲얼굴에 종이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키는 도모지 ▲몸을 줄로 묶은 채 잡아당겨 돌담에 머리를 부딪치게 하는 석형 ▲사지를 밧줄로 묶어놓고 우마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몰아 사지를 찢는, 흔히 능지처참이라고 불리는 거열 장면은 스펙터클 고어라고 할 만큼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효시 장면을 찍기 위해 시신을 만드는 데만 수천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적 디테일을 섬세하게 살려 볼거리와 흥미를 더한다. 그러나 미국 드라마 등 현란한 수사물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혈의 누’에서 진행되는 수사 과정은 다소 단조롭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개봉 당시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화제가 됐으며, 제13회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에서 올해의 감독상, 남우조연상 등 7개상을 수상했다. 상영시간 119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적 성향은?

    ‘우리나라의 종교지도자들은 정치와 종교에 대해 어떤 인식과 성향을 갖고 있나?’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가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종교 성향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는 흥미로운 토론회를 열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는 30일 오후 2시 만해NGO교육센터에서 각 종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하는 토론회가 그것. 이 자리에선 천주교 개신교 불교계 지도자들의 성향과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비교된다. 토론회는 윤남진 NGO리서치 부소장의 발제에 이어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개신교)와 박희택 위덕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불교),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장(천주교)이 차례로 논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흥미로운 것은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가 그동안 천주교 본당주임신부와 개신교 교회 담임목사, 불교 사찰 주지를 대상으로 실시해온 설문조사 결과가 이 자리에서 발표된다는 점. 응답자 가운데 300명의 의견이 공개된다. 설문조사는 87년 6월 민주화운동,97년 외환위기 등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가운데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인식한 일이 무엇인지를 살폈다. 이와 함께 논란 중인 사형제도와 생명복제, 종교와 정치의 관계, 종교차별과 종교자유의 침해, 자치단체 정교분리 위반과 종교간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도 물었다. 한편 설문조사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간 갈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 ‘배타적 전파방법’을 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종교편향적이었던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던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33) 105년전 세운 ‘고딕식’ 대구 계산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33) 105년전 세운 ‘고딕식’ 대구 계산성당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대구광역시 중구 계산2가 71-1, 사적 제290호). 박해를 피해 모여든 신자들과 함께 산골에서 은둔하던 프랑스 선교사가 직접 설계해 1902년 지금 자리에 세워놓은 뾰족집이다. 초기 성당들과는 다르게 높은 언덕이 아닌 평지에 세워진 영남 지역 최초의 고딕 성당. 국내에선 보기 드문 정면쌍탑의 고딕식 건물이란 건축의 특이함에 더해 이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과정의 고충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한 신앙유산이다. ● 중세건축 흐름 이은 영남 최초의 ‘뾰족집’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천주교 전교가 트이고 신자들에 대한 족쇄가 풀렸지만 영남지역에서의 신앙생활은 조약 이후에도 여전히 험한 길이었다. 대구본당이 신설된 이듬해인 1886년, 그러니까 조불조약이 체결된 그 해에 대구본당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프랑스 선교사 로베르(김보록·Achille Paul Robert) 신부만 하더라도 몸을 피해 인근 산골에 꼭꼭 숨어 지내야 했다. 당시 신나무골(현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과 죽전 새방골(현 대구 서구 상리동)은 거듭되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찾아든 신자들이 은밀히 모여 살았던 영남지역의 대표적 교우촌. 로베르 신부는 낮에는 바깥출입을 일절 하지 않고 밤마다 상복으로 변장한 채 신자들을 방문하며 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성당이 세워진 것은 신앙 길이 트이면서 읍내인 대야불(현 대구 중구 인교동)로 들어온 로베르 신부가 정규옥(1852∼1931) 승지의 집에서 활동할 때였다. 열성적인 신자였던 정규옥이 사랑채를 내줘 7년여간 임시성당으로 쓰다가 번듯한 신앙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로베르 신부는 성당 자리로 현재의 계산동 성당과 그 서편 동산 두 곳을 놓고 고민했는데 “높은 허허벌판 구릉에 성당을 지을 수 없다.”는 노인 신자들의 고집에 밀려 결국 지금 자리를 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1899년 지어진 처음 성당은 지금의 서양 고딕식 건물이 아닌, 한옥 기와지붕의 십자형 건물이었다.45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는데 지붕 한가운데 대형 십자가를 올려 ‘주님의 집’임을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대구 본당 100년사’에는 당시 성당과, 한식 기와집의 2층 사제관 단청을 들이던 스님들이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들어 있다. 그 무렵 약현(서울 중림동 1892년)성당, 인천 답동(1896년)성당, 종현(서울 명동 1898년)성당이 모두 서양식 뾰족집을 택했던 것을 볼 때 로베르 신부와 신자들이 건물을 통해서나마 신앙 토착화를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성당 건립의 기쁨도 잠시뿐. 한밤중 일어난 화재로, 세워진 지 40일 만에 성당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당시 대구에 큰 지진이 있었는데 제대에 켜놓은 촛불이 넘어지면서 성당 전체로 옮겨 붙은 것이었다. 한국에선 네번째로 세워진 성당이자 당시 유일한 순수 한식 성당이었지만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어 천주교계와 학자들이 두고두고 안타까워하는 건물이다. 로베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편지 글을 보면 당시 성당을 잃은 참담한 심경이 절실히 읽힌다. “한국 건축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틀담(성모 마리아)의 루르드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됐다. 지금 나에게는 제의도 일상복도 생활 필수품도 없으며 고해를 듣기 위한 영대와 중백의 조차 없다.1000명이 넘는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는데 바람막이조차 없다.” 지금의 성당은 “천주께서 우리의 신덕을 시험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인 줄로 받아들이고 성당을 더 잘짓기로 한마음으로 협력하자.”는 로베르 신부의 호소문에 감동받은 신자들이 십시일반 격으로 추렴해 1902년 다시 세운 건물. 설계는 로베르 신부가 직접 했고 중국에서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데려와 일을 시켰다고 한다. 준공 이듬해에야 축성식이 열렸는데 당시 “영호남의 모든 신부들이 참석했고 사방 200리 안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구 전체가 축제에 휩싸였다.”고 교회지는 기록하고 있다. 성당은 처음에는 주보성인으로 루르드의 성모를 택한 만큼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란 뜻에서 성당대문에 ‘성모당’이라 쓴 현판을 달아 놓았었다. 그런데 이 현판을 눈여겨보던 주민들이 “천주교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성모 마리아를 믿는다.”고 수군대 할 수 없이 ‘천주당’으로 바꿔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래의 ‘성모당’ 현판은 성당 오른쪽 계산문화관 2층의 성당유물전시관에 보관돼 당시의 상황을 소리없이 전한다. 전체적인 구조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지만 평면 구성은 라틴십자형 3랑식 공간의 전형적인 고딕 양식. 서쪽 정면 출입구 위에 2개의 종탑을 높이 세운 쌍탑이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외벽은 화강석 기초석 위에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 대구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본당이 되면서 신자들이 급속히 늘자 미사며 전례행사 때마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1918년 신자들이 비용을 분담한 증축공사에 나서 신자석과 지성소 사이에 100평 정도의 공간을 새로 들이고 양쪽에 각각 신자석(익랑)을 만들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종탑 지붕도 두 배가량 높여 더욱 뾰족해졌다. 1991년부터 1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이 때 지붕을 함석 대신 동판으로 교체했고 바닥도 목재를 걷어낸 뒤 지금의 대리석으로 다시 깔았다. 현재 교적상의 신자는 6000명. 주교좌성당이란 위상과 역사적 가치 때문인지 한창 번창할 때는 주일미사에 1만 2000명이나 참석했다고 한다. 성당측이 인근 성당들로 신자들을 분리시키고 있지만 교적을 옮기지 않고 끝까지 이 성당에 남겠다는 신자가 적지 않다고 주임신부가 귀띔한다. kimus@seoul.co.kr ● 성당의 볼거리들 출입구 위 두 개의 종탑을 나란히 뾰족하게 올린 ‘전면쌍탑’은 계산성당의 트레이드마크. 이 쌍탑 사이에 만든 커다란 ‘장미꽃 창’은 성당 안에서는 제대 벽을 통해 제의공간을 환하게 밝히는 빛의 통로가 된다. 이 ‘장미꽃 창’은 신자석과 제의공간인 지성소 사이의 양쪽 익랑에도 설치되어 신앙공간을 한층 더 엄숙하게 장엄한다. 양쪽 벽을 빙 둘러 장식하고 있는 14처도 다른 곳의 것과는 달라 눈길을 끄는 부분. 성당 건립 초기에 중국에서 만들어 들여온 때문인지 14처 아래 붙인 중국어 표기가 이채롭다. 14처와 마찬가지로 양쪽 벽에 낸 스테인드글라스(색유리창)는 성당 건립때 프랑스에서 들여온 것. 예수부활을 증거한 12사도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성당을 증축하면서 늘린 좌우 회랑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한국의 성인 6위를 모신 점이 눈길을 끈다. 신자석에 앉아 성당 공간을 나누는 기둥들을 눈여겨 보면 기둥에 새긴 독특한 문양의 십자가가 궁금해진다. 성당 축성때 로베르 주교가 만든 축성패인데 문양과 색채가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채 또렷하다. 폴란드에서 들여와 성당 출입문 윗쪽 성가대석에 세워 놓은 파이프오르간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전자식이 아닌 기계식 오르간 가운데 명동성당의 것을 빼곤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음색을 갖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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