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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금 한한자전/남광우 엮음(화제의 책)

    ◎한자의 음·뜻 변천사 가나다순으로 정리 한자가 비록 중국문자이지만 우리도 오래 써 온 만큼 글자마다 한국 고유의 성격이 더해졌다.이 책은 역대 우리나라에서 나온 자전을 망라해 한자의 음과 뜻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담은 첫 자전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기준은 물론 조선시대에 나온 훈몽자회·신증유합·천자문 등 각종 자료,북한에서 정한 교육용 한자까지도 두루 참고해 한자의 정확한 음과 뜻,장단음을 가렸다.또 우리가 만들어 쓰는 한자도 소개했다. 한자마다 표준음,뜻,소리의 길고 짧음과 용례를 자세히 밝혔다. 표제로 올린 한자는 7천3백52자.그러나 표제 한자를 설명하면서 함께 다룬 속자,본자,고자를 합치면 수록한 한자 수는 10만자를 넘어 중국의 대표적 자전인 「강희자전」을 능가한다.한글 옛글자도 2천5백여자 사용했다. 또 일반 자전과는 달리 한자를 음에 따라 가나다 순으로 실어 독자의 편의를 도왔다. 엮은이는 인하대 명예교수이자 한국어문회 회장으로 국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10여년에 걸쳐 이 자전을펴냈다고 한다.인하대 출판부 10만원.
  • 화제의 수험생/초고령 71세 이근복씨 최연소 13세 곽장수군

    ◎64세에 국교 검정고시부터 시작·“농대 진학 우량농산물 연구 하고파”­이씨/국졸후 6달만에 검종고시 마쳐·“컴퓨터 공부 시키려 일찍 진학 계획”­곽군 올해 수능시험 응시생 가운데 최고령자는 이근복(71·서울 마포구 아현2동)씨,여성 최고령자는 양금직씨(62·강원도 춘천시 요선동 13)로 각각 밝혀졌다.또 최연소자는 곽장수(13·서울 구로구 구로동 701)군이 차지.손자뻘되는 수험생들과 함께 서울 한성중에서 시험을 친 이씨는 93·94년에 이어 최고령 3연패의 「영예」를 차지. 이씨가 뒤늦게나마 학문연마의 길에 들어선 것은 64세 때인 지난 88년.일자무식이나 면하려고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게 전부였던 이씨는 향학열도 남달라 늦공부를 시작한지 3∼4년만인 91∼92년 사이 국졸·중졸·고졸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이씨는 『요즘 젊은이 뿐만 아니라 농민들까지 농사를 경시,농촌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이 안따깝다』면서 『농과대에 진학,세계적인 우량농산물 개발연구에 전력투구하겠다』고 소박한 포부를 밝혔다. 최연소자인 곽군은 지난 2월 서울 구일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5월과 8월에 각각 중졸·고졸검정고시를 끝냈다. 곽군은 국교 내내 반에서 2∼3등을 유지해 오다 국교 5학년 때부터 영어·수학 과목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중·고교검정고시를 준비했으며 수능시험은 지난해 3월 이후 1년8개월 동안 준비해왔다고. 곽군의 아버지 종식(42·번역가)씨는 『장수가 컴퓨터에 몰두하느라 정규 학교수업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진학,컴퓨터를 전공하도록 이번에 시험을 보게 했다』면서 『남들보다 수능시험을 빨리 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장수의 머리가 특출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전문화·다양화

    ◎컴퓨터 강좌·자연보호 프로 등 다채/환경·성 주제 학술세미나 마련/연세대/다큐멘터리 「21세기 선택」 상영/이대/부모께 편지·쓰레기 수거 운동/서강대 대학가의 「오리엔테이션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틀에 박힌 학교소개와 환영행사 일변도에서 벗어나 대학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학과별 특성에 맞는 학술특강·환경보호를 주제로 한 행사,신입생과 학부모·선배와의 대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선보이고 있다. 또 일부 대학에서는 학과별로 교수와 신입생간의 개별 면담시간을 마련,학생의 애로점을 듣고 올바른 대학생활을 위한 지도를 하는 등 사제지간의 정을 돈독히 하겠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14∼17일 나흘동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가질 예정인 연세대는 총학생회주최로 「환경」과 「성」에 대한 학술세미나를 열고 이와 별도로 학교측에서는 송자 총장이 신입생과의 대화시간을 통해 국제화·세계화의 조류에 따라 경쟁력있는 대학으로 살아남기 위한 「연세대의 21세기의 전망과 비전」이라는 내용의 특강을 하며 양순국 연세전산원장이 컴퓨터강의를 할 예정이다. 이화여대는 16∼17일 이틀동안 다큐멘터리 「21세기 이화의 선택」이라는 특집을 마련,이화의 21세기 비전을 제시하고 학부모·선배 등을 초청해 신입생과 대화하는 「만남의 시간」을 준비해 두고 있다.이밖에 학사일정 학사관계 학생생활 장학 취업등을 영상자료로 만들어 상영할 예정이다. 각 단대별로 충북 괴산군의 화양유스호스텔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오리엔테이션을 갖는 서강대의 경우 문과대학은 「21세기의 대학과 대학생활」이란 주제로 박홍 총장의 특강이 있으며 경영대학은 자연환경보호운동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쓰레기수거 운동」을 벌이고 「부모님께 편지쓰기」「성공적인 대인관계와 예절」「신입생 상호간 이미지 타인평가」라는 이색적인 프로그램도 들어있다.경상대학은 「나의 대학생활에 대한 다짐」을 결의하는 행사도 갖는다. 또 성균관대는 대학생활과 사회적 문제점을 함께 조명해 보는 문화·통일·여성·이야기·역사 등 주제별 행사를 가지며 문화분야의 「영상촌」코너에서는 재학생과신입생이 함께 영상매체를 통해 토론하는 장이 마련돼 있어 신세대 대학문화의 달라진 일면을 느끼게 하고 있다. 지난해 교수폭행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동국대는 신입생들의 인성교육을 위해 학과별로 교수와 학생간의 개별면담을 통한 전인교육을 강화하기로 했으며 1개월 과정으로 컴퓨터강의·천자문읽기·영어회화 등의 프로그램도 마련하기로 했다. 또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권력이동」「장자」「삼국유사」등 우수도서 6권을 선정해 신입생의 필독서로 권장할 계획이다. 이밖에 단국대도 「한국경제의 세계화와 우리의 자세」라는 주제로 상대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준비하고 있다. 동국대 곽준규 학생처장은 『신입생들의 대학생활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돕는다는 취지에서 학교차원에서 오리엔테이션일정을 다양하게 짰다』며 『앞으로 여건이 허락되면 장기간 합숙훈련을 통해 인성교육을 폭넓게 할 수 있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 천자문/운율에 맞춰 PC로 공부한다

    ◎하이텔,음성기능 추가 DB 8종 선보여/모뎀만 갖추면 전국 어디서나 무료이용 한국통신은 최근 하이텔을 통해 제공중인 교육정보서비스에 문자·그림·음성 등이 복합된 멀티미디어 학습DB 8종을 새로 선보였다.이번에 추가된 멀티미디어 학습정보는 주제토론학습·한자학습만화·학습퀴즈·학습백과사전·외국어학습·온라인음악정보·유아학습·시험정보 등이다. 새로 나온 DB는 이용자 계층을 어린이부터 일반인까지 넓히고 국내 처음으로 온라인 음성·음악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 이들 DB 가운데 외국어학습과 유아학습은 학습프로그램을 전송받아 이용하는 다운로드방식으로 한자학습만화·음악정보와 함께 PC에서만 이용할 수 있으며 그밖의 정보는 하이텔단말기로도 이용이 가능하다. 한자학습만화는 전송 속도 2천4백bps 이상의 모뎀과 한국통신에서 보급하는 사운드카드를 PC에 장치하면 천자문을 운율에 맞추어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외국어학습(듣기평가 등)의 경우도 음성파일크기를 약 34분의 1로 압축할 수 있어 PC통신으로 전송받더라도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교육정보서비스는 하이텔단말기나 PC 이용자가 01 410번으로 하이텔망에 접속,초기 메뉴화면에서 1번(하이텔)을 선택한 뒤 이용자번호를 입력하면 된다.비가입자는 이용자번호에 「hitel」로 입력하고 공공DB가입자로 등록과정을 거치면 전국 어디서나 무료이용할 수 있다. 새로 제공되는 학습정보는­ ▲주제토론학습=주어진 주제에 대한 토론을 통해 논리력·사고력을 길러주고 학습에 관련된 질의·답변도 가능하며 현직 교사들이 직접 운영한다. ▲한자학습만화=만화를 통해 천자문을 학습.온라인으로 천자문을 운율에 맞춰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학습퀴즈=국민학생(3∼6년)을 대상으로 학교 교과목에 관련된 문제를 퀴즈형식으로 풀면서 학습. ▲학습백과사전=국민학교 사회 및 자연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대상으로 주제별 해설을 그림과 함께 제공. ▲외국어학습=TOEFL·TOEIC·생활영어를 화상정보와 함께 외국인의 음성으로 학습. ▲온라인음악정보=초·중·고 음악교과서에 실린 노래의 해설과 연주,찬송가 전곡 연주 및 건전가요 연주곡을 그림화면과 함께 제공.이 정보를 이용하려면 전화국에서 배부하는 통신소프트웨어 하이콤 3.0이 필요하다. ▲유아학습=재미있는 이야기와 동화로 유아의 논리력과 수학능력을 길러주는 서비스. ▲진학·시험정보=전국 대학별로 입시요강 및 개설학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진학상담과 적성검사도 해준다.
  • 남정 박노수(이세기의 인물탐구:63)

    ◎세속과 거리먼 대쪽기상… 한국화의 대가/노송­여인의 머리결등 한국적 비감의 정서 관조/여백­색채 절묘한 조화… 관념­실경산수 넘나들어/내년 열번째 개인전 계획… 신품의 경지 기대 남정 박노수의 간원화실은 어느 듯 스산한 초동이다.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잡고 있으나 인왕산자락에 파묻혀 마치 심산유곡인 듯 산새소리 바람소리만이 유랑한다.대문에서 작업실에 이르는 긴 길목은 가으내 진 낙엽이 산처럼 쌓여있고 화사의 화숙다운 청한한 적요가 사방에 깃들 뿐이다.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지천을 이루고 여름은 울창한 수목,나목한천의 백색겨울등 간원에 머무르는 사계절의 변화는 눈에 닿는 풍경마다 살아있는 명화가 아닐수 없다.간원은 그의 옥인동집에서 보면 동북방에 위치한 동산이란 뜻이다. 남정은 아침 9시반에 집에서 나와 주로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루종일 별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따로 시중을 드는 이도 없다.쉬고 싶으면 혼자서 마당에 나가 물을 뿌리거나 수석을 돌본다. 남정의 화실은 처음은 원효로에 있었고 70년대 후반에 비원앞 가든타워, 그후 사직동의 한 아파트로 옮겼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는 세속과 도무지 화통하는 법없이 그림에만 전념하는 화가다.대쪽같고 겨울강처럼 차가운 성격은 아무하고나 쉽게 만나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더라도 무슨 이야기든지 부담없이 나눌수 있는 친밀감을 주지도 않는다. 본인은 그런 소리가 나오면 수원시화중의 한구절을 들어 「가슴속이 탁 터지고 온화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불식이라도 참 시인일것이요, 성미가 빽빽하고 속취가 분분한 자라면 비록 종일 글을 깨물거나 글씨를 씹고(교문작자) 쓸데없이 문장이 장황해도(연편누독) 시인이 될수없다」고 한것처럼 만약 소방하지 않다면 어찌 좋은 화가일수 있느냐고 반문한다.그러나 논리는 정연하고 음성은 따뜻할지라도 차고 냉정할 때가 오히려 그답다고 할 수 있다.그만큼 원칙을 중히 여기고 순리적인 흐름을 수용하는 주의다. ○목선이 긴 비마등 이채 옛선비의 의지가 몸에 밴 그의 기상은 지금도 내일모레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짐작되지 않는다.그림의 격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정열과 큰 그림을 그릴 때의 현완직)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 보는 이로 하여금 범접 할 수 없는 위엄을 준다.그의 성격의 일면은 60년대 중반 일본 중국화풍을 모방한 국적불명의 그림들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한심하게 여긴 나머지 한 신문에 기고한 글만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나라에서 시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망국족자 상선자망기문화」,즉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자는 언제나 먼저 스스로 그 문화를 망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는 화단의 경각심을 촉구하여 지식있는 많은 층의 호응을 받았었다. 그림도 그렇다.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그것이 남정화인줄을 한눈에 알아본다.한국적인 노송과 강안의 야트막한 산들,청결하게 빗어넘긴 여인의 머릿결과 잔잔히 치켜올라간 눈매,소년의 외로운 등모습과 목선이 긴 비마는 한국적인 비감의 정서를 무위로 관조하고 있다. 돛단배의 돛과 선비의 취월창의,멀리 지나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바탕색인 군청 비취록과는 달리 호박색이나 산호색으로 점을 찍어 청색 비단보에 싸인 별빛같은 효과를 내는 것도 그만의 채색기교라 할수 있다. 그의 색조는 초기에는 물기가 마르기전에 발묵 채색하는 선염법을 쓰다가 피카소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을 되살려 검푸른 청남과 여명으로 영롱한 운기를 살려낸다.이른바 오채가 깃든 먹과 쪽빛 섞인 청화색은 광활한 하늘로 배분하고 준열한 한 획의 선은 산의 기개로 과시된다.이때 강을 사이에 둔 언덕은 부세의 영욕을 적멸한 피안이며 인물들의 표정에는 상락이 깃들여 정중동의 관념산수와 동중정의 실경산수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함축시키고 있다. 「여기에 무한감을 수반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그림이 될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는 화면에다 우주로 통하는 공간을 설정하고 먹과 선으로 공간을 공략하여 여백과 색채가 어울린 기운생동을 성취해낸 것이다. ○28세때 대통령상 받아 이런 측면으로 추적한다면 그림속의 주인공들은 그의 소년시절의 시심을 간직한 것처럼도 보인다.혹은 언덕에 기대어 앉거나혹은 범주에 몸을 실은채 먼 강산을 우러른 소년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그 시선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는 충남 연기의 한학자(부친 박상래)집안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외조모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부친에게 붓글씨를 익히는 어린시절을 보냈다.청주상고에 다닐 때는 문학지망을 꿈꾸기도 했으나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 있는 청전 화실에 드나들면서 초기엔 인물화를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자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과 심산 노수현 월전 장우성을 사사, 일찍이 청전은 고귀한 품성을 지닌 이 미소년의 범상치 않은 재질을 보고 이미 「일총한 화가탄생」을 주변에 일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학재학 시절에는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상명여고 동흥중 성동고등에 시간강사로 출강,당시 상명여고 교감으로 있던 문학평론가 곽종원씨가 전임을 맡기려하자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강직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기엔 학교 숙직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책들을 난독하면서 인생에 대한 무상에 빠져 술로 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았다.가슴속에 이유 모를 비감이 가시지 않아 그림의 소재도 유랑극단의 곡예사나 피리불며 정처없이 떠도는 소년의 방황에 그쳤다.그러다가 인생을 극도로 비관하는 염세주의와 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폐인이 되고 말리라는 자책끝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고 다시 화폭과 대좌했다. 28세때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이란 인물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비로소 독자적인 채색과 여백의 미를 화면에 전개해 나갈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골프나 바둑이나 술과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그림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일체를 삼간다.그의 취미는 일요일 등산하는 것과 난과 수석뿐이다.난은 섬세하고 유연한 동양화의 선을 감춘데다가 순수한 향기로 정신을 수려하게 정화시킨다는 차원에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는 듯 하다. 그외 그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국전 대통령상 수상기념으로 그에게 남정이란 아호를 지어준 소전 손재형 소설가 유주현과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이고 지금은 서울대 시절의 스승인 월전과 시인 김춘수 정병욱등과 담소를 즐긴다.가족은 부인 장신애여사와 큰자녀들은 출가하고 두딸이 있다. ○“품격 높은 예술” 극찬 그의 결벽한 일면은 그의 개인전 팸플릿에 반드시 이경성의 서문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화단일각에서는 이를 섭섭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경성과는 이대교수로 함께 재직하면서 그의 제작의 내부까지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평론가의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는 「남정화론」을 굳게 믿는 것 같다. 이경성은 남정의 작품을 「한마디로 격조의 예술」로 천명한다.「품격이 높고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정신과 기술을 아울러 갖췄을 뿐만 아니라 북화적인 큰 스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어울려 새로운 한국화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색채를 화면에 부여함으로써 남정은 그곳에 반드시 존재돼야할 바위나 산이나 사람을 만들어낸다.이른바 모든 사물의 전화가 그의 날카로운 붓끝에서 창조되고 그렇게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예술로서 존속된다.인위와 조작이 없는 「순도높은 인품이 담긴 작품」,그리고 세련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처리와 평면감각을 극도로 추구하여 회화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있다.이렇게하여 그는 한국 현대회화사상 우뚝한 봉우리중의 하나로 서게 되었다. 내년은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잡혀있다.그러나 변화추구보다 신운이 깃든 절제의 필치로서 그는 진실하게 화면을 지휘하는 시기다.따라서 능란한 능품이나 기교적인 묘품,뛰어난 절품을 지나 화가 최고의 영예인 신품의 화경에서 명품절색을 경이로 펼칠 것에 틀림없다. ▷연보◁ ▲1927년 충남 연기출생 ▲1949년 국전 제1회부터 81년까지 30회출품 ▲1952년 서울대미대 회화과졸업 ▲1953년 국전 특선및 국무총리상 ▲1954년 대한미협전서 공보실장상 ▲1955년 국전 대통령상,대한미협전 국무총리상 ▲1956년부터 이대미대교수 ▲1957∼79년 국전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 심사위원·초대작가 선정위원,국전심사위원및 심사분과위원장,국전 운영위원 ▲1958년 첫 개인전 ▲1960년 묵림회 창립회원 ▲1962년부터 서울대미대 교수 ▲1964년 청토회 창립회원 ▲1964∼81년 「19 10년이후의 한국미술」「해방이후의 한국화」「오원 장승업연구」「신벽화 연구」등 논문발표 ▲1965년 도쿄 일동화랑 개인전 교토 토교화랑 개인전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 기록화(역진개척도)제작 ▲1976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인전(그라피오 테케트 화랑) ▲1977년 개인전(현대화랑),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1980년 개인전(현대화랑) ▲1981년 3·1문화상,서울시 문화상심사위원,유럽및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 미술교육시설 시찰 ▲1982년 일본서「한·일·중 동양화3인전」(주일 한국문화원),한미수교 1백주년기념 사절단으로 도미 ▲198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이후 해마다 예술원회원전 ▲1986년 이대대학원 교수 ▲1987년 예술원상,박노수미술전(백악미술관),하와이 동서문화협회 초청전시 ▲1989년 서울미술전 추진위원장 ▲1991년 예술원미술분과회장,이대정년퇴직,현대미술초대전추진위원 ▲1994년 5·16민족상 학예부문상,예술원 개원40주년 기념전 ▲ 대한민국 예술원정회원
  • 유교문화의 영향(백제를 다시본다:26)

    ◎고이왕때 경학사상 바탕 관제 정비/6좌평 16관계는 주례·예기 모델로/4세기엔 경학박사 배출… 일에 파견/성왕땐 태학교육 확충… 졸업생 대부분 관직에 등용 백제의 사상은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이는 백제불교가 계율불교로 자리잡는데도 유교의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백제유교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론 원시유교와도 부딪치지만,북방으로부터 남하한 백제건국 집단과 직결된다.이들 건국집단은 대륙의 선진학술을 수용,경학론이에 입각한 백제유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백제는 한성시대부터 이미 한대의 경학을 받아들였다.한의 경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의 군현이었던 낙낭·대방과 가까이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그래서 백제사상은 고조선 이후 전승되어 온 원시유교적 본질과 한대의 경향을 기본으로 틀을 잡아나갔다.이러한 경학사상을 국가사회의 문물제도에 접목시켰다.우리는 여기서 유교가 도교나 불교 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백제를 선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은 백제초기인 3세기경 국가제도정비에 우선 나타난다.백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어느 정도 갖춘 것으로 보는 고이왕(AD 234∼286년)때의 중앙관제 제정이 그것이다.고이왕은 중앙관제를 6좌평 16관계로 제정했는데,이는 「주례」의 육관제와 거의 같은 것이다.공복제도를 갖춘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그리고 고이왕은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예기」명당편에 나오는 남당은 군주가 신하들과 이야기하고 정사를 말하는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예속에도 영향 유교사상에 의해 국가제도가 정립된 것처럼 일반사회의 예속 또한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교는 인간도덕성을 매우 중시하면서 예의를 숭상했다.특히 원시유교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예의사상은 백제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중국의 사서 「주서」백제조는 이를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백제는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절을 하는 예는 두손으로 땅을 짚고 공경하는 뜻을 표했다.혼례는 중국 풍속과 거의 같았고,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3년동안 복상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체제를 굳건히 다지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유고사상이 깔려있다.국민을 복종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과도 직결된 유교사상은 학술의 발전을 가져왔다.4세기경 백제를 중흥시키는데 공헌한 근초고왕(AD 346∼375년)은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케했다.그 사서는 바로 「서기」다.국가 중흥기에 국사로서의 정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동시에 통치차원에서도 필수적인 국가사업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학문을 중시한 흔적은 「주서」이역전에도 나온다.「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경서와 사서를 좋아했는데,그중에 뛰어난 이는 한문을 읽어 글을 지었다」고 기술했다.또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와 강례박사를 데려왔다는 기사도 보인다.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중국에서 초빙한 학자를 가리킨다.그러나 백제에도 일찍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근초고왕때 국사를 편찬한 박사 고흥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파악된다. 우리는 고흥이라는 인물의 백제박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유는 근초고왕 즉위 뒤에 중흥의 시대를 맞은 백제는 중국에서 처럼 관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전문학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이 분야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근초고왕 26년(AD 371년)에 고구려를 크게 무찌른 백제가 한산으로 천도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창설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고구려가 세운 태학의 충격을 받아 동진의 태학제도를 청사진으로 그리고 이 학교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처음 박사로 임명된 케이스가 고흥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사서에는 또 다른 백제의 박사가 등장한다.근초고왕 재위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간 박사 왕인이 그 사람이다.근초고왕의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아직기의 추천으로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일본왕의 태자 도도차랑자의 스승이 되었다.또 경서에 통탈한 그는 왕자 이외에 군신들에게도 경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왕인,일왕자 교육 일본의 사서 「고사기」는 왕인의 이름을 화이로,「일본서기」는 왕인으로 적고 있다.화이나 왕인은일본식 발음으로 다 같은 「와니」(Wani)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자이름의 표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되어있으나,「일본서기」는 아신왕 말년쯤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 처럼 기록했다.30∼40년의 차이는 발견되지만 왕인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스승임에는 틀림이 없다.백제는 AD 475년 날로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핍박속에 웅진(공주)으로 남천하기에 이른다.이어 백제의 중흥대업을 꾀한 성왕(AD 523∼554년)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여러 제도를 정리,개정했다.내관 12부,외관 10부로 구성된 22부나 22첨노제가 그것이다.이들 관제는 10간12지와 오행사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백제의 중앙집권체제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 뒤에 완비되었다.이와 더불어 성왕은 무령왕이 웅진시대에 중국에 남량의 제도를 본떠 학교를 확충하고 오경박사를 둔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강화했다.그래서 성왕 때 들어와서는 전경전사가 비로소 등장하거니와,경학교육을 전담한 종래의태학교육은 신설된 22부의 하나인 사도부가 담당하게된다. ○실용교육도 병행 이 사비시대는 유교주의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시기이기 도 하다.특히 상류계층은 태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아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따라서 이들은 주요관직에 등용되었다.중국의 군현제와 흡사한 첨노의 지방장관은 모두 상류층 자제로 충원했다는 기록이 「양서」백제전에 나온다.백제가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4세기 후반에 창설한 태학교육이 6세기에 만개한 것으로 보면 옳다. 오경박사나 전경박사로 불리는 학관 말고도 전업박사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전업박사의 존재는 AD 553년(성왕 31년)「백제가 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해에 의,역,역등의 박사를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일본서기」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백제는 경학 위주의 관학성격의 교육을 실용교육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따라서 6세기 후반 백제의 교육은 의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분야로 확대된다.이는 전통경학이 사회전반에 스며들어간지 오래여서 새로운 실용학문을 추구한 일종의 학술적 경향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이같은 백제의 선진교육은 일본의 고대학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다만 1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제교육제도가 뒤늦게 일본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삼국의 유고/고구려·백제선 교육·통치와 직결/신라는 지리적 여건상 2백∼3백년 뒤져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나라들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유교문화를 일찍 수용했다. 우리나라에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유교가 부분적으로 처음 들어온 시기는 대략 BC 3세기경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로 여겨진다.이 시대의 유교는 예의에 입각한 사회정의와 윤리적 정절을 강조하는 이른바 원시유교다.다시 말하면 중국 은대의 상고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문화와 주대의 인문주의적 예제문화가 유입된 것이다. 고대국가 가운데 맨 먼저 유교를 수용한 나라는 고구려다.고구려 유교를 자세히 전하는 자료는 없지만 몇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유교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그 하나가 사서의 편찬인데,「유기」와 「신집」을 국가사업으로 찬수했다.그리고 교육제도의 정립은 가장 큰 고구려 유교문화의 소산으로,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 태학을 소수림왕 2년(AD 372년)에 설립한 것이다. 백제는 알려진대로 고구려계가 남하하여 세운 고대국가다.따라서 건국 초기부터 유교체제의 통치력을 갖추었다.그 뿐이 아니라 국가차원의 종묘제도 방식을 수용함으로써 유교의 교사지례를 실천했다.이는 온조왕이 창업 6년만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는 것과 후대의 왕들이 즉위하는 해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신라의 경우는 한반도 동남쪽에 외지게 자리잡은 데다 중국과도 거리가 멀어 유교수용시기가 늦다.법흥왕 재위시기인 AD 520년에 가서야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기에 이른다.그리고 「국사」편찬은 진흥왕 6년(AD 545년),국학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 2년(AD 682년)에 설치하는 등 유교문화가 고구려와 백제보다 2백∼3백년 뒤늦은 시기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 국보급 고서화 2백80점 도난/장서가 협회장집서

    ◎중무공간찰 등 포함 지난달 30일 하오1시쯤 서울 성동구 금호동 1가 1030 한국장서가협회장 신영길씨(68)집에 도둑이 들어 신씨가 집에 보관중이던 국보급 고문서와 그림·서적등 2백80여점을 훔쳐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신씨는 『30일 하오2시쯤 외출을 하고 돌아와보니 안방 장롱위에 놓여 있던 비닐가방속의 고서화등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신씨가 도난당한 물품 가운데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편지형식 연락문인 간찰과 고 이방자여사의 친필천자문,조선 정조가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믿아가는 장면을 그린 「정조대왕 능행도」등이 포함돼 있다. 경찰은 범인이 받는 사람의 이름이 명시된 「쌍낙관」이 찍힌 그림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뤄 고서화판별능력이 있는 문화재전문도범일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다.
  • 임병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완의 의병조직 독립의군부 이끌어/12년 고종밀서 받고 대규모 전쟁준비/착수 2년만에 일경에 발각… 수포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돈헌 임병찬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되믿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장세력인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추진하다 일제에 붙잡혀 유배중 숨진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44세때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선비로서 지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제 불량배들에게 시해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66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의병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1851년 2월 전북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세살때에 천자문을 읽을 만큼 총명을 타고난 선생은 15세때 전주부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관직에 나섰으며 38세때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다음해 낙안군수에 임명됐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기로 하고 곧 관직을 청산,귀향해 회문산 북쪽 종성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일제를 물리칠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집안의 남녀종복을 풀어주는등 가산을 정리한 선생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1년전인 1904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으나 정부 대신들이 『시기가 이르다』고 만류하자 거사를 일단 중단하기도 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고는 즉시 의기투합,서로 사제의 의를 맺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포천에 살고 있던 면암은 같은해 정월무렵 영호남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 것을 도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문인들이 『호남의 한 선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자 선생을 믿아왔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따라 그해 6월4일 의병 80여명을 모아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게 들고 일어났다. 이 의병들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날로 태인지방을 휩쓸어 군기와 군량을 확보한데 이어 정읍·순창을 차례로 격파,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거사 5일만인 6월8일에는 순창에서 마주친왜군을 단숨에 물리쳐 곡성을 점령하는등 기염을 토했으며 의병수도 9백여명으로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면암과 선생은 6월12일 전주와 남원 진위대군사가 반격작전에 돌입하자 동포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조직한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전주진위대는 해산과정의 의병들을 공격,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했으며 선생과 면암등 13명이 전주진위대를 거쳐 일본군사령부에 잡혀가 7월9일 대마도 위수영에 감금됐다. 그뒤 면암이 옥중단식으로 순국하자 선생은 1907년 첫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불매동맹·국채보상운동등을 전개하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됐다.선생이 순무대장으로 지명된 것은 1906년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례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보냈으나 황제는 다시 밀소를 내려보내 그를 신임했다. 선생은 1914년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의군부의 이같은 계획은 그해 5월 일경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일경이 6월3일 총사령인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12일 금고 1년을 선고받은뒤 거문도에 다시 유배됐다.선생은 2년뒤인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글자순서/박래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굄돌)

    아침 저녁 신문을 볼때 우리는 으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위에서 아래로 읽어내려간다.옛글을 읽거나 아이들이 천자문을 배울때에도 그같은 순서로 읽어내려간다. 그런데 같은 신문이라 할지라도 커다란 제목부터 시작해서 사진설명이나 광고에 이르기까지,기사에 따라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윗줄에서 아랫줄로 읽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도서관 책꽂이에 잘 정리되어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 참 흥미롭다.한글이나 한자로 되어있는 책등의 경우는 물론 위에서 아래로 책제목 저자명 출판사명 하는 식으로 적혀있다. 그런데 알파벳으로 된 외국의 책을 보면 어떤 것은 글자가 오른쪽으로 누워 있고 어떤것은 왼쪽으로 누워 있다.또 두꺼운 책은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책명이 적혀있는 경우도 있다. 이같이 우리들의 생활화된 습관속에는 실제로 따지고 보면 서로 어긋나는 일들이 많다.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그런 것을 별로 문제삼지 않고 잘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자그마한 일들도 컴퓨터와 같이 기계식으로 처리하면 일률적으로 하나의 체계에 따라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서 인간이 하는 일과 기계가 하는 일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글자의 방향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글자의 순서이다.글자의 순서로 말하자면 시인 이상의 오감도가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또 한자로 표기한 숫자의 순서가 완전히 역순으로 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위에서 아래로 읽게 되어있는 옛날 어느 문장의 한구절도 생각난다.이와같이 순서에 따라서 전개되는 논리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은 비단 우리의 경우에서 뿐만아니고 서양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인문주의자 카스틸리오네가 「논리의 전복은 아름답다」고 한 말은 특히 현대의 환상적인 예술 표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국립미술관 잇단 중진 개인전… 연말 화단 “풍요”

    ◎곽훈·불 술라주·김창렬전 등 개최/곽훈/“동양정신을 현대정서 용해/김창렬/물방울·문자대비 일체감 탁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내외 비중있는 작가들의 대규모 개인전을 잇따라 개최,연말화단을 풍요롭게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달 23일 개막한 재불화가 손동진전(16일까지)에 이어 프랑스 추상미술계의 대표작가 피에르 술라주전(3일∼12월10일)을 열고 있으며 재미작가로 현지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곽훈전을 9일부터 12월3일까지 개최하며 물방울의 작가로 이름난 김창렬화백의 회고전을 오는27일부터 12월21일까지 펼친다. 저마다 수준높은 회화성과 작품성을 갖추고 있는 이들의 전시는 개인전을 쉽게 허용하지않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한다는 점에서 작가 스스로도 매우 뜻깊은 기회로 여기고 있다. 특히 재미작가 곽훈씨는 요즘 괄목할만한 변신을 거듭,작업터전인 미국 서부지역 화단에서 눈에 띄게 성가를 높이고 있으며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에 몰두하는 김창렬화백 또한 그 특유의 소재인 물방울과 문자의 유기적 관계를 깊이있게 천착하고 있어 이들의 연이은 전시에 국내화단과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곽훈씨(52)는 이번 귀국전에서 신추상의 새 작업을 대거 선보이고있다. 이번 귀국전은 미국작업 18년을 결산하는 전시라고 할만큼 야심의 자리로 실험적인 추상과 최근 시도하고있는 「겁」시리즈등 대작 2백여점을 내놓고 있는것. 이 전시 참관차 내한한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인 조신 얀코와 수잔 라슨이 입을 모아 격찬하는 곽씨의 작업은 동양적 정신과 신념을 서구의 현대성에 용해시켜 동서양의 정서를 고르게 산출해내는데 큰 비중을 두고있다. 그의 전속화랑인 인사동 선화랑(9∼23일)과 경주의 선재미술관(12월10일∼94년1월10일)에서도 귀국전을 함께 한다. 김창렬화백(64)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과 함께 전속화랑인 갤러리현대(12월1∼15일)에서 근작전을 함께 연다. 그의 「물방울그림」은 이미지가 강한데다 뜻밖에 장식용 복제품들이 많아 주변에 흔한 것같은 인상을 주지만 화랑가에선 그의 진품을 접하거나 구하는 일이 결코 쉽지않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물방울그림」의 진면모를 확인할수 있는 귀한 자리로 기대를 모은다. 특히 80년대말부터 화면에 천자문등의 활자체를 등장시키면서 물방울과 문자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거꾸로 이미지가 통합되고 양자가 일체를 이루는 「독자적인 회화」를 성립시켜온 그의 변신의 폭을 가늠할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한편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회고전형식으로 꾸미고 있는 피에르 솔라주(74)는 지난47년부터 근작까지 그의 작업을 시대순으로 망라하는 회화52점을 내놓고 있다. 서정추상회화의 대표작가로 형태보다는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며 「검정」으로 대변되는 매우 경제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그의 작업은 전후의 실존적인 정신세계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어버이(외언내언)

    어버이 없는 자식은 세상에 없다.더러 어버이 얼굴 모르는 자식이 있을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에게 역시 어버이는 있다.나에게 생명을 있게 해준 가시적존재가 어버이이다.그리고 어느날 그 자식도 어버이가 되고 그 자식의 자식도 또 어버이로 된다.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 내려왔고 그렇게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오늘의 내가 귀한 자리에 있건 못한 자리에 있건 혹은 가멸지게 살건 가난하게 살건 어버이로 해서 얻어진 삶을 값지고 보배롭게 생각할줄 알아야 하는 존재가 사람이다.더구나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키워낸 공로를 생각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알게 될것이다.사실 세상의 자식들은 어버이 은공에 보답 못한 채 그 자식에게로 사랑을 옮겨간다.그것이 섭리의 뜻이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날 「천자문」을 뗀 다음 배우는 「동몽선습」은 이렇게 시작된다.­『천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 그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풀이이다.그래서 어버이는 자애하고 자식은 효도해야(부자자효)한다.이 생각과 함께 세상의 자식들은 「부모은중경」의 「장엄한 효론」에 한번쯤 귀기울여봐야 한다.­『가령 어떤 사람이 있어 그 왼쪽어깨에 아버지를 메고 그 오른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메고서 살갗이 닳아 뼈에 이르고 뼈가 패어 골수에 이르도록 수미산을 돌고 백천번을 돌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는 아직 능히 다 갚지 못하느니라』 풍요로워진 세상 따라 심성은 더 각박해진다는 것인가.늙고 병든 어버이가 귀찮은 존재로 돼간다.「현대판 고려장」이 생겨날 정도로.하지만 우리 모두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일은 사람이란 누구나 늙어간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모든 노후가 평안하고 안정된 사회가 바로 복지사회라는 사실이다. 우리도 지금 고령화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시점이다.가족뿐 아니라 사회정책이 이 문제에 한단계 더 깊이 접근해야할 때가 됐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다.
  • 어버이와 자식이 공범이니(박갑천칼럼)

    서당에 다니던 옛어린이들은 「천자문」을 뗀다음 「명심보감」을 배운다.그 훈자편에 이런 글귀가 있다.­『귀여운 자식에게는 매를 많이 때리고 미운 자식에게는 먹을 것을 많이 주느니라』(연예다여봉,증예다여식).이게 무슨 소린가.「과보호」란 말의 뜻을 미처 깨단하지 못한 요즘의 어떤 어버이들이라면 이말의 참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자식사랑의 질이다.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해볼 때 「명심보감」이 말하는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이해해 준다는 미명 아래 매사에 관대하기만 함으로써 버릇을 못쓰게 들여버린 결과를 사랑이라 할 것인가.베풀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용돈 많이 주고 좋은것 먹여서 비만아 만들어 버린 결과를 사랑이라 할것인가. 다음 얘기를 한번 새겨 생각해 보기로 하자.조선초기의 명신으로 청백리에 녹선된 정절공 정갑손의 경우이다.그가 일찍이 함길도감사가 되었을 적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데 과거 합격자의 방이 나붙었기에 보니 그의 아들 오도 합격이 되어 있었다.이에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을 꾸짖는데­『늙은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내 자식 오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인다는 말인가』.그러고서 아들 이름을 방에서 지워버린 다음 시관도 그 자리에서 내쫓아 버리고 있다.서거정의 「필원잡기」(필원잡기:권1)에 적혀 내려오는 일화이다. 이에 대해 정절공이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해석하는건 잘못이다.다만 그는 대의를 먼저 생각했던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식을 위해서도 멀리 내다보는 사랑에의 길로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이름을 지우게한 정절공은 눈물어린 사랑의 매를 때렸던 것이라고 하겠다. 오늘의 어버이들은 제 자식 합격에 자기들이 나서서 몹쓸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어버이와 자식이 합세해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건만 그렇게 하는 것을 자식사랑인 줄로 알고 있는 듯하다.그렇게 몹쓸짓을 함께 하는 일이 합격 못하니만 못하다는 데에 왜 생각이 못미치는 것일까.어버이로서 차마 할짓이 못되는 그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할줄 모르는 그 대목이 생각있는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 한자의 컴퓨터입력(컴퓨터생활)

    여태까지 고집부리면서 한자를 싹 무시하고 한글로만 글을 써왔던 필자가 얼마전부터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왜 한글전용론에서 한자혼용론으로 돌아섰느냐고 물어보지 말아주기 바란다.문자코드의 표준화에 관해서 관심을 둔지 벌써 20년동안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으며,한글만으로서는 새로운 기술용어를 만들어낼 조어력(조어력)이 너무 뒤떨어진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글자코드를 제정함에 있어서 한자의 필요성은 현행 출판장비들을 고려하여 코드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여론에 따라서 한글한자의 표준코드작업이 지난 10년간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그래서 오늘날의 PC에서는 한글만이 아니라 한자까지 처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필자의 책상위에 있는 PC로서 한자를 쳐넣기 시작해 보았다.그런데 우리의 한자입력방식은 아직 소리를 입력해서 한자로 변환시키며 동음이자(동음이자)인 경우는 눈으로 확인하고 해당하는 글자를 골라내는 방식으로 입력하고 있다.동음이자가 너무 많아서 단어별로 입력하는 수도 있다.이것으로 한자입력이 완전한가? 천만의 말씀이다.입력자가 한자음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입력이 가능하다. 중국의 고전중에서 한마디씩 입력하려고 했는데 아예 한국표준한자에 빠져있는 경우도 문제려니와 한자음을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필자도 10살때 천자문을 뗐고 그 뒤에도 한자를 배워서 분명히 2천자를 넘는 한자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음을 모르는 한자가 이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으며,하물며 한글세대가 많은 우리사회에서 한자입력을 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일본,중국,대만,홍콩,싱가포르,베트남등의 나라에서도 우리와 꼭 같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나름대로의 입력방식을 개발해 두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한자음에 의한 변환방식」밖에 없는 실정이다.그런데 이것으로서는 결코 충분하지가 못한다. 한글의 코드문제 때문에 가리워졌지만 이미 제정된 한자세트가 모자라기 때문에 추가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타오르고 있다.이 말도 옳은 말이기는 하다.그러나 한자의 입력방식이 현행대로라면 별로 쓸모가 없지 않느냐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국민 가운데서 한자를 입력해야 할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며,이들을 위하여 아주 익히기 쉬운 「한자입력방식」을 개발한 후에 한자추가여부에 관해서 논의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누가 「한자입력방식」을 개발할 것이며,누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한자세트」를 정할 것인가? 정부부처간에서도 끌어당기기가 아니라 밀어내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컴퓨터로 천자문 배운다/포스데이타,한석봉서체 학습프로 서비스

    ◎획순따라 써주고 단어풀이… 삽화 첨가/고사성어·지방쓰는법 등 상식도 담아 컴퓨터를 통해서 한자와 사무자동화 기술을 익힐 수 있는 학습서비스가 포스트데이터의 PC통신 서비스인 포스서브를 통해 11일부터 제공되고 있다. 학당 천자문으로 이름붙인 이 서비스는 포스데이타와 대영컴퓨터가 공동 개발한 것.서비스 내용은 크게 한자 학습 프로그램인 천자문의 OB용 학습프로그램으로 돼있다. 천자문 서비스는 한문공부의 기초인 천자문이 학습을 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한석봉의 서체를 획순에 따라 써주고 자세한 설명과 삽화를 곁들여 학습효과를 높이고 있다. 또한 한자를 사용한 단어와 그 뜻풀이를 하여 어휘력을 넓히고 있으며 옥편과 같이 한자를 찾아 볼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였다. 이외에도 고사성어 풀이와 지방 쓰는법,제삿상 차리는 법,삼강오륜등 생활상식을 담고 있다. 학당 천자문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기존의 계몽포스회원 처럼 학당 천자문 서비스 회원에 별도로 가입하여야 하며회원들은 학습물을 디스켓에 저장,반복적으로 학습할 수있다. 천자문 가입비는 6천원,OA시리즈는 6천원,천자문+OA시리즈 1만원. 다운 파일 요금은 천자문이 3천5백원,OA시리즈가 9천원이다. 문의전화는 포스데이터 PC통신사업부 전자학습팀 411­1322∼4,대영컴퓨터 558­5520.
  • 인제대교수 권태완의 성남(명사의 고향:49)

    ◎청계산돌아 십리길 타박타박 걸어 등하교/초가집·등잔불이 정겹던 소박한 촌락/다리네고개 공동묘지 지날땐 “으시시”/서울시 지척인 내고향서 콩이나 심고 가꾸며 여생보내는게 꿈 내 고향은 수평선이 앞에 펼쳐지는 시원한 바닷가도 아니요,기암괴석과 함께 산수가 수려한 멋진 곳도 아니다.말하자면 별로 특색이 없는 조용한 벽촌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듯이 서울 발치에 있으면서도 문명의 혜택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토박한 농촌에서 나는 태어났다. 지금은 눈앞에 경부고속도로가 달리고 등잔불은 전등으로 바뀌었으며 어디에나 전화를 걸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 버스까지 들어오고 있다. 이젠 도시의 문명이 부러울 것이 없다 할 만큼 그동안 크게 변화한 것이다.물론 초가집은 사라졌으나 집다운 집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 데에서 아직도 이 동네의 어설픈 생활 수준을 살필 수 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외부인의 비닐하우스가 일부 덮였을 뿐 농촌이면서도 농토를 놀리고 농사를 팽개친 현실이 그저 가슴 아프기만 하다. 이제 내 고향은농촌이 아니요,외부인이 잠자러 들락거리는 그러면서도 또 한 차례의 큰 변화를 기다리는 엉거주춤한 촌락이 되고 만 것이다.행정구역으로 볼 때에는 도시에 속해 있으나 그 모습은 여전히 시골이요,분당을 눈 앞에 두고서도 개발 제한 구역에 묶여 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그 예측을 불허하는 정중동(정중동)의 고요함이 감싸고 있을 따름이다. ○농촌모습 곳곳에 내 고향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3통이다.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자면 첫 고개를 넘게 된다.다리네 고개라고 하는 이 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에 도로공사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검푸른 청계산으로 끌고 가는 포장 길이 눈에 들어 온다.이 마을 길이 어린 시절에 내가 학교에 다니던 길이요,지금도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로서 마을 버스가 다니는 길이기도 하다.이 길을 따라 비닐하우스 숲 사이로 들어가서 구버러진 모퉁이를 한번 돌면 내 고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여기가 경기도 성남시로 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원래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금토리 내동이었다.옛날 어른들은 둔투리 안말이라 하셨고 (안동)권씨 양촌자손 안양공파 후손들이 대대로 살 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이 마을로 시집을 오시니까 양식을 넣어 놓을 만한 그릇조차 변변히 없었다고 한다.그래서 할아버지 잠방이의 다리를 잡아 매어 놓고 거기다가 보리쌀을 넣어 놓고 잡수셨다는 이야기다.그때야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하였다고 하거니와 우리 집에는 특별히 그럴만한 사유가 있었던 것 같다.할아버지께서 5대 독자이셨고 양자로 이어 온 집안인지라 그때는 농사를 짓고 사는 데 생산력이될 일손이 늘 부족하다 보니 무엇이고 축적될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남달리 부지런히 일하신 덕분에 나는 그래도 배고프지 않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던 것이다.일찍이 할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웠고 서당에 가서 명심보감을 배우다가 국민학교에 다니느라고 판교까지 10리 길을 매일 왕래하였던 것이다.지금의 도로공사 자리가 그때는 공동묘지였는지라 하학길에 혼자서 그 앞을 지나갈 양이면 무서워서 힐끗 힐끗뒤돌아 보면서 뛰어 갔던 생각이 지금도 난다. 또,아버지는 12남내 중에 늦게 태어나시고 유일하게 살아남으셨으니,6대째로 독자가 되셨던 것이며 이렇게 우리 집안은 그야말로 자손이 늦고 귀해서 번창하지 못한 것이다.그러니 자연히 항렬이 높아져서 나는 같이 자라던 일가 아이들에겐 증조(증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같은 나이 또래에 종조할아버지가 되다 보니 그 아이들은 나를 꽹가리 할아버지라고 놀려대었고 어린 나에겐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가 싫었던 것이다. ○손이 귀햇떤 집안 지금은 나이도 들고해서 고향에 가면 일가들이 반기면서 대부(대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연시되고 말았으니 어느덧 나는 동네 대부가 되고만 것이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때 고향을 떠나왔으며 다시 고향에 잠시 머무르게된 것은 6·25때였다.고향을 피란처로 삼았으며,이집 저집에 가서 얻어먹기도 하였다.의용군에 끌려 가지않은 것도 고향 덕분이며,고향의 인심이 나를 그렇게 숨겨준 것이다. 그러길래 나는 고향과끊임없이 숨쉬고 있으며,틈만 있으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나무도 심고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객지 생활을 하셨지만 말년에는 고향에 자주 드나드셨다.여러가지 묘목을 심으시면서 아버지의 이상향(이상향)을 가꾸시던 어느날,그 꿈을 채 이루지도 못한신채,아버지는 그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20년이 지난 오늘날,그 묘목은 제법 자라서 아버지의 산소는 물론,할아버지의 산소와 동네까지도 푸르게 하고있다.그때만해도 나는 아버지께서 나무를 심으시는 이치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경제성이 없다고 만류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할아버지와 할머니,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를 모신 내 고향에 나는 지금 나무와 꽃을 심으면서 가신님과 속삭이고 있다. ○부친의 뜻 깨달아 언젠가 이헌조사장(금성사)이 김호길박사(포항공대)와 다녀갔는데,그는 한시 한수속에 내고향을 이렇게 그려냈다. 방권태완박사고리 지호금토격매연 일사귀래반무전 과우취미위수장 천운홍조범화선 금조종두하심작타일유민원계연 시문인생궁극의 청계산하송여년 금년에 소위 회갑을 맞이 했다.그동안에 쓴 글들이 모아져서 수상집이 되었고,가족과 몇몇 친구들이 모여서 조촐하게 저녁을 같이했다.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비닐하우스가 임시로 세워졌고,고향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가운데 술잔이 오가고 노래 소리가 울려나왔던 것이다.이 잔치에 초대된 손님은 바로 판교에 같이 다니던 낙생 국민학교 17회 동창생들이었다.어제의 코흘리개들이 모두 할아버지,할머니가 되어 와 준것이 고마웠다.이렇게 내고향이 가까이 있는것이 나의 기쁨이요,자랑이기도 하다.이제 나는 내가 하고있는 봉사가 끝나는대로 고향에 가서 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공덕비 건립 감사 성천 유달영선생께서 청계산 밑에서 태어났다해서 그 이름에서 「계」자를 따시고 「인」자를 붙여서 「인계」라고 호를 지어 주셨다.이에 부끄러움없이 그야말로 인계답게 여생을 살았으면 하는 것도 내 작은 소망중의 하나.그리고 동네 새마을회관 앞에는 「권태완 박사 공덕비」라고 새겨진 비가 서 있으니,내 어찌 고향 사람들의 따사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빚진 마음에서 헤어날 수 있으랴! 「고향!」이 얼마나 포근하고 편안함인가! 동양을 빼놓고도 독일말에는 옛고향(AltHeimat)이라는 멋진 말이 있다.그런데 영어에는 그런 말이 없으니 어찌 된 셈인지 나는 모른다.고향이 없는 영어권의 사람들은 아마도 마음의 한구석이 비어 있으리라. □약력 ▲1932년 12월16일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출생 ▲서울대 화학과 졸업 ▲미 플로리다주립대 박사 ▲미 아이오와주립대 조교수 ▲KIST 책임연구원 한국식품개발연구원장 ▲인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대한화학회 한국식품과학회 회원 ▲저서 「한국식품 연구문헌총람」외
  • 문헌안의 거북선 사실입증 첫걸음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등 실증/거북선 실물 인양 가능성 크게 높여/「귀함 별황자총통」 인양의 의미 임진왜란 당시의 대포였던 별황자총통(총통)의 발견은 조선조 전사(전사)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문헌상에만 기록돼 있어 실체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총통이 거북선의 주포였음이 확인됨에 따라 가까운 시일안에 거북선의 잔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까지 갖게 하고 있다.황자총통발견의 의의와 사료로서의 가치·인양과정등을 알아본다. ▷전문가 평가◁ 이번에 발견된 별황자총통(별황자총통)에 대해 문화재 전문위원 조성도씨(해군사관학교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사는 물론 조선후기의 무기발달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국보급으로 평가했다. 거북선에 장착됐던 것으로 보이는 이 총통의 현장실측평가작업에 참가했던 조씨는 『그동안 거북선에 관한 사료(사료)는 상당수 있으나 거북선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 총통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또 『이 총통에 새겨진 제조연대와 발견장소가 임진왜란때의 거북선과 왜국 수군이 싸우던 격전지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제까지 남아있는 조선조의 보물급 대포 16종보다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제작시기만 보더라도 기존의 대포들과는 달리 이 총통은 당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제작연도를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거북선에 장착됐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 문헌상으로만 보존돼오던 거북선의 실체를 입증해주고 있다. 총통이 발견된 해저지점에 대해 그는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을 거둔 곳이며 이장군의 뒤를 이은 2대 수군통제사 원균이 일본군에 대패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총통에 새겨진 귀함황자경적선 일사적선필수장이라는 내용의 칠언시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조선수군의 굴하지 않는 정신을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총통이 거의 원상태로 남아있는 것에 대해 『발견지점에는 모래 자갈층이 30㎝두께의 퇴적층을 이루고 있어 부식을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바다는 조개·기타 유기물질에 의해 퇴적속도가 빨라 침몰된 거북선도 원래 모습을 그대로 지닌채 퇴적층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양경위◁ 고색이 창연한 황자총통에는 귀함이라는 총통의 소속함정과 만력 병신(만력 병신·1596)이라는 제조일시가 명기되어 있어 거북선의 주포임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됐다. 해군은 지난89년 노태우대통령의 지시로 그해 8월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을 해군사관학교에 창설,3년동안 심해잠수요원과 탐사정·소해정·시추장비등을 투입해 탐사작업을 벌인 결과 이번에 거북선과 관계되는 실증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하게 됐다. 발굴단은 그동안 8차례에 걸친 정밀탐사를 통해 거북선이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백87㎦의 해역중 30%인 54·5㎦를 탐사완료하고 앞으로는 한산도와 당포 근해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발굴관계자들은 이번에 총통이 발견된 한산도해역은 임진왜란당시 대해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총통이외의 다른 유물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모두 3척이며 임진왜란이 끝난뒤에도 10여척을 건조한 기록이 있어 당시 수군이 활동하던 남해와 서해에는 거북선이 분명히 매몰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이미 4백년이 지났으며 침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당시의 해안선도 항구의 축조와 매립 등으로 크게 바뀌어 바닷속의 거북선을 인양하기란 한강밑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탐사반원들은 총통발견을 계기로 거북선발굴작업이 크게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외국에서도 지난 60년대에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 1천2백년전의 바이킹배 3척을 인양한바 있고 70년대에는 영국에서 6백년전의 목제군함을 원형그대로 인양한 적이 있다. ▷총통◁ 총통이란 고려시대와 이조시대때 왜구를 격퇴·섬멸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했던 화전·화통·화포등의 화기를 총칭한다. 「공민왕5년(1356)에 총통을 사용해 전을 발사했다」는 고려사 병지의 기록으로보아 14세기 전반부터 이미 유통식 화기인 총통이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원나라에서 전래된 총통은 이조 세종때 서북변경 개척의 적극화로 각종 화기와 화약의 수요가 급증하게 됐고 이에대한 제조기술이 향상되면서 조선화포중에서 가장 큰 천자총통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화포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조선 특유의 형식으로 규격화하는 일이 진행됐다. 총통의 구경에 따라 가장 큰것은 천자,그다음이 지자,현자,황자로 나누었다. 천자문의 맨처음 구인 천·지·현·황순서로 크기를 정한 것이다. 구경 15∼16㎝의 천자총통과 13∼14㎝인 지자총통은 현재 육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2∼13㎝인 현자총통은 해사박물관,구경 11∼12㎝의 황자총통은 현충사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발견된 황자총통에 「별」자가 있는 것은 총통의 위력을 강화한 「특」이라는 뜻이다. 황자총통의 사정거리는 약8백보(1천21m)이며 철환과 화살 또는 유황으로된 화염탄등을 실탄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외언내언

    탤런트가 행패 부린 사건이 「또」보도된다.얼굴하며 이름이 꽤나 알려진 인기인.음주운전한 것부터가 잘못인데 술김이었던가 그를 단속하던 의경한테 주먹질까지 해서 상처를 입혔다.◆「또」라고 한 까닭이 있다.요얼마 사이 그들의 범법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이달 들어서면서 서민의 인상을 풍겨주던 한 탤런트가 음주운전하다가 40대 여성을 치었다.그에 이어 같은 성의 또다른 탤런트가 저지른 불법 임야훼손 사건이 알려졌다.괴상한 표정과 목소리로 특징이 있는 개그맨은 무허가 카페를 차려 심야영업을 하다가 들통이 났고.그의 경우 접대부까지 고용한 불법이었다.◆종교인이 많다 보니 숨겨논 아들을 둔 케이시주교 같은 사례도 생긴다.연예인도 많다보니 별의별 사람이 별의별 짓을 한다고 할수도 있겠다.또 그들이라 해서 특별히 모범적이어야 할수만도 없는 것이고.그렇긴 해도 그들은 얼굴 이름이 팔린 그만큼 세인의 주목을 받아야 하게는 돼있다.그래서 그런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한다.­돈 벌고 인기 얻으니 간이 부은것 아닌가.세상이 돈짝만해 보이고.엉덩이에 뿔난 송아지 같으니라고.◆고대 헤브라이의 솔로몬왕은 『교만은 패망의 시작』이라는 말을 남겨놓고 있다.전통사회에서 「천자문」을 뗀다음 읽는 「명심보감」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남에게 사랑을 받거든 욕이 돌아올 것을 미리 생각하고 편안한 곳에 살거든 위험한 일이 있을까 미리 염려할 것이다』.현달하면 할수록 몸을 낮추면서 더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처신하라고 하는 가르침.한데 그들의 심상에는 같잖은 교만이 둥지틀고 있었다.그래서의 범법이다.◆이런 일을 타산지석으로 자성해야 할 부류가 우리사회에는 적지 않다.권위의식·특권의식에 젖어 자존자대하며 법을 업신여기는 사람들.가슴에 손을 얹어보도록 하자.
  • 한자교육은 국교부터/김은호 변호사·전변협회장(굄돌)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우리국민은 한문을 알아야 한다.우리 국어인 한글만 가지고는 문맹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정보사회에서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어주는 신문이 한문을 병용하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고서는 문맹과 다를 바 없으며 우리말이 표음문자인 까닭에 한문을 모르고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있다.우리 언어는 실상 한문자음으로 사용하면서 한글전용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근 우연히 국민학교 생활통지서를 본일이 있다.물론 한글로 쓰여진 생활통지서다.그 내용을 보면 역시 한글로 표시하여 「1 교과학습 발달상황」이라는 항목아래 교과,국어·산수·바생·슬생··즐생·도덕·자연·체육·음악·미술·실과라 기재되어있고 2 항에는 행동발달상황,3항에는 특별활동상황이라 기재되어 있다.1항의 교과학습발달상황이란 한문의 교과학습발달장황임을 알 수 있고 2항도 한문의 행동발달장황,3항은 한문의 특별활동장황임을 알 수 있고 한문을 배운사람이면 누구나 선뜻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한문 일상언어가 자음표현으로 우리말에 동화된지 오래이기 때문에 한문을 몰라도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른다.그러나 국민학생에 있어서는 교과는 뭐다,학습과 발달 또는 상황이란 이런뜻이다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아니하고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우리의 언어는 수천년대의 한자음에서 발달했다고 해야할 때 한자를 모르고 우리의 오늘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현재의 국민학교생활통지서 자체가 한자음의 표현이고보면 한문은 국민학교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교육자나 교육정책상 이론이 있을지 모르나 옛날에는 지금의 유치원생시절에 천자문을 비롯하여 한문교육을 받았었다.그래서 옛날에는 초등교육만 필해도 신문도 읽고 주소 성명도 쓰고해서 사회인으로 행세하는데 큰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떠냐.초등교육6년을 마쳐도 신문을 해독하기는 커녕 성명을 쓰지도 못하니 무슨 교육이 이런가 싶다.6년간의 교육을 마쳐도 학교 교육만 가지고는 중대한 자신의 신분에 관계되는 주민등록표등본이나 호적등본 또는 자신의 성명이나 부모형제의 성명도 해독할 수 없다면이거야말로 국민교육상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문교육은 오늘의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실시되어야 한다.따라서 초등교육으로 옛문헌을 독파하라기보다 자기의 성명은 물론 부모형제,나아가 조상의 성명도 해독하고 신문도 대체나마 해독할 수 있도록 국민학교 때부터 한문교육을 한글과 병행해야겠다.
  • 일에 논어·천자문 소개/왕인은 실재인물

    ◎재일 홍상규교수·서지학자 안춘근씨,저서 통해 입증./AD405년 위나라 종요의 「천자문」 전수/“가상인물” 일 국수주의사학자 주장 일축 「천지현황,우주홍황」으로 시작되는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주흥사가 지은 것으로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그리고 삼국시대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그런데 왕인에 대해서 우리의 사서에는 일체 언급이 없고 대신 일본의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따르면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때가 서기 3백년이전인 것으로 되어 있다.주흥사의 생존연대(470∼521)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모순된다. 이때문에 지금까지 왕인의 도일을 두고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 엇갈려 왔다.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나 일본학자 소천환수같은 이는 왕인의 도일시기를 주의 사망연도인 521년 이후로 추정했다.또 진전좌우길이나 백조고길같은 이들은 아예 왕인의 존재를 부정,백제에서 온 귀화인들이 만들어 낸 가상의 인물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이같은 종래의 엇갈린 주장들을 불식시키고 왕인의 실체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연구물 두 가지가 나와 주목된다.하나는 일본 오사카 예술대학 홍상규교수가 단행본으로 펴낸 「왕인」(웅진문화간)이며 하나는 서리학자 안춘근씨(중앙대 객원교수)가 「91출판학 연구」(범우사간)에 기고한 논문 「왕인박사 일본전수 천자문고구」이다. 특히 「왕인」은 한국의 사학계가 아직까지 왕인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 재일 교포학자의 고군분투끝에 나온 역작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 홍교수는 일본사서에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갖고 왔다고 기록된 것은 기록자가 「논어」와 「천자문」으로 유교와 교학 일체를 상징한 것으로 보아야지 굳이 주흥사의 「천자문」과 연결시켜 왕인의 실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또한 왕인의 실체를 부정하는 부류는 대개 일본의 국수주의 사학자들로서 그들이 왕인이라는 도동인에 의해 일본문화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저작들에서 쉽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홍교수는 특히 동양사학자 나가통세(18 51∼1908)의 「고정기년설」에 따라 왕인의 도일연대를 바로잡고 있다.「고정기년설」이란 한·중의 사서에서는 연대의 일치를 보이는 것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는 1백20년정도 앞당겨져 있다는 주장으로 이 두 책은 일본왕실의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보다 연대를 일찍 잡은 경향이 뚜렷하다는 것이다.그 예로 홍교수는 박제상의 순절이 「삼국사기」에는 418년으로 기록된데 반해 「일본서기」는 205년으로 기록된 것 등 많은 자료를 제시했다.따라서 285년으로 되어있는 왕인의 도일연도도 「삼국사기」의 연표와 중국사서들을 대조하여 405년으로 밝혀냈다. 한편 안춘근씨는 왕인이 가져간 「천자문」은 주의 것이 아니라 위나라 종요(151∼230)가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학자들의 학설을 반박하고 있다. 주흥사이전에 이미 종요의 「천자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몇몇 문헌에 보일 뿐 아니라 진의 왕희지(307∼365)가 이를 임서했다는 글씨가 전해내려오기 때문이다.다만 왕희지의 진적은 오래전에 일실되었고 지금은 명대에 만들어진 복제본만 남아있는 까닭에 종래 이를 위작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안씨는 비록 복제본이긴 하나 서두에 『왕희지가 황제의 칙명을 받아 종요의 천자문을 쓴다』로 되어 있고,「진부장서지인」등 낙관이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보아 원본을 왕희지가 썼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했다.그는 또 이 글씨가 설사 왕이 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종요의 「천자문」이 분명히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고 말했다.따라서 주의 「천자문」으로 왕인의 실체를 부정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종요의 「천자문」은 「이의일월 운로엄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국내에는 이번에 처음 소개된다고 안씨는 밝혔다.안씨는 지난 해 중국에서 이 영인본을 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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