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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음역일대 ‘에듀파크’ 로

    성북구 길음동 ‘길음뉴타운’에 이르면 오는 2005년 말까지 자립형 사립고가 들어선다.길음역 주변은 ‘균형발전 촉진지구’로 지정돼 사설학원단지가 조성될 전망이다. 서울시는 21일 이같은 내용의 길음뉴타운 개발기본계획을 확정,발표했다. 기본개발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시는 도로,공원,학교 등 도시계획시설에 대해서는 다음달 중 도시계획시설 결정을 한 뒤 실시계획인가 및 보상 등을 거쳐 내년 5월쯤 공사에 착수,오는 2005년 말까지 완공할 방침이다.도시계획시설 조성에는 모두 1600억원이 투입된다. 민간재개발 방식으로 추진되는 아파트는 2007년 말까지 완료할 계획이다.아파트는 용적률 220∼250%를 적용받는다.길음뉴타운은 1만 4000가구 규모로 이 가운데 20∼25%는 일반에 분양될 전망이다. ●자립형 사립고,학원단지 조성 기본계획에 따르면 성북구 길음동 624번지 일대 95만㎡(28만평) 규모의 길음뉴타운내 인수로변에 1만 5000㎡의 학교부지를 확보,자립형 사립고를 유치할 계획이다.시는 길음뉴타운 서북쪽에 위치한 대일외고와 자립형 사립고,뉴타운 남쪽끝 길음역 주변의 사설학원단지를 연계,이 일대를 ‘에듀파크’로 만들 방침이다. 김병일 지역균형발전추진단장은 “현재 자립형 사립고에 부정적인 교육부,시 교육청과 협의중”이라면서 “은평·길음뉴타운 외에 이달말 추가로 지정될 뉴타운 1∼2곳에도 특목고나 자립형 사립고를 유치하는 게 서울시의 목표”라고 밝혔다. 길음역 사설학원단지 조성과 관련,길음역 주변을 ‘균형발전 촉진지구’로 지정하는 방안이 유력시되고 있다.균형발전촉진지구에 들어서는 연면적 1500㎡ 이상의 학원시설 등은 건축비의 75%내에서 100억원 이내의 시설자금을 3년 거치 5년 균등 분할상환조건으로 지원받을 수 있다. ●보행자 중심의 녹색타운 뉴타운 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인 인수로는 기존 4차로에서 2차로로 줄어든다.대신 도로변에 폭 20∼30m,총 길이 1.3㎞,면적 1만 2300평에 달하는 대형 가로공원을 조성,철저하게 ‘보행자 중심의 거리’로 만들 계획이다. 도로가 줄어드는 대신 단지내에 순환형 마을버스 노선 2개를 확보,승용차 대신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유도할 방침이다.삼양로,미아로,정릉길 등 주변 도로에서 뉴타운으로 진출입 할 수 있는 진출입로 6곳도 신설한다. 단지 전체를 순환하는 폭 6∼8m,총 길이 2.7㎞의 순환 보행도로를 비롯한 보행전용로 6개를 만들어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한다.동사무소,파출소,주민자치센터,유치원 등이 한 건물에 들어서는 행정센터와 보건소,노인보호시설,유치원,동사무소 등을 갖춘 보건센터 등 모든 공공시설과 생활편익시설도 함께 배치된다.신설 학교의 담을 없앤 뒤 운동장을 공원으로 조성,주민들에게 개방한다. ●간판,아파트 벽면에 디자인 개념 도입 옥외공간 종합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제시돼 뉴타운내 모든 가로설계와 가로등,벤치 등 가로시설물과 아파트 외관 등에 적용된다. 이에 따라 아파트 측벽에 커다랗게 쓰인 시공사명 및 로고 등의 크기가 줄고 위치도 아래로 내려온다.아파트 옥탑에는 산뜻한 디자인의 지붕 조경이 의무화되고 에어컨 실외기 등 발코니 돌출부도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다. 단지내 상가도 한 구석에 몰려 있던기존 방식 대신 도로(인수로)를 따라 들어서게 된다.상가의 간판은 일정 면적 범위내에서 업소당 2개 이내로 제한된다.네온 및 전광류 간판도 금지돼 ‘천박한’ 도시의 밤거리가 유럽 도시처럼 품격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 류길상기자 ukelvin@
  • [열린세상] 安分知足의 정치를 펴라

    ‘민족 대이동’이었다고 한다.언론에서 즐겨 쓰는 말이다.길 나선 국민이 3000만명은 되지 않겠느냐는 어림셈이 의심없이 통한다.도대체 어디로들 몰려간 것일까. 한가위는 본래 ‘계절의 한가운데’를 뜻하는 말이다.“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한 것은 이 계절이 ‘풍요의 한가운데’임을 말해준다.가득차고,넉넉하고,넘치는 때라는 뜻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고 겸손되이 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세계관의 표출이다.이런 생활 철학은 놀랍고 또 자랑스럽다. 그러나 ‘더도 덜도’의 철학과는 무관하게,‘오늘 여기’의 현실은 아주 난감하다.안분이고 지족이고 겨를이 없다.당장 가서 목격한 고향의 농사는 지나친 비와 모자란 햇볕으로 드물게 보는 흉작이다.흉작보다 근본적인 것은 나라 경제가 어둡고 괴롭다는 사실이다.정치는 갈수록 저능(低能)이고 퇴영인데,사회는 리더십을 잃고 바야흐로 ‘만인과 만인의 투쟁’ 양상이다.서민들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 하소연한다.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벼랑 끝에 내몰려,그 벼랑에서 끝내 떨어져가는 사람들로 우리 사회는 지금 ‘자살의 계절’을 맞이했다.비극이다. 우리나라의 자살자 수는 지난 2002년에 1만 3055명으로 교통사고 사망자 7090명을 크게 앞질렀다.문제는 자살자의 급증이 ‘빈곤 자살’에 기인한다는 점이다.통계는 올들어 7월까지 자살자 6005명 가운데 6.7%인 408명이 빈곤 자살이었다고 기록했다.빚에 몰려서,생활고로 목숨을 버리는 생계형 자살자가 한 달에 58명,하루 2명꼴이라는 얘기다. 카드빚에 쫓기고,부도내고,마침내 신용불량자 낙인이 찍혀서,시장경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생존권마저 박탈될 위기에 놓인 인구가 350만명을 헤아린다.이들을 벼랑 끝에서 받아줄 ‘생명의 그물’은 없다.‘이 세상의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라고 하는 정의(定義)는 적어도 이들에게는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통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빈부격차이고,그 심화다.우리 시중은행에 월 1000만원 이상을 정기 저축하는 계좌가 6만 3575개나 된다는 금감원 자료가 다시 놀라게 한다.그 중 8000개 가까이는 10대와 20대가 주인이다.다달이 1억원씩 쌓을 수 있는 ‘나이 어린 부자’를 상상해야 하는 처지는 괴롭다.고문이고 폭력이다. 우리는 경제규모 세계 13위,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일원이지만 그 복지수준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다.“돈 없으면 치료를 받을 길이 없는” 의료 사각(死角)에 방치된 인구가 300만명을 넘고,전구 몇 개 밝히는 가정용 최저 전력요금이 3개월 이상 밀려서 단전(斷電) 조치된 집이 전국에 3만 1000가구라는 통계도 있다. 빈곤을 넘어서는 문제도 쌓였다.심각한 청년실업은 그 중 하나다.이민박람회에 몰리는,어디서도 받아 주는 곳이 없어 길을 헤매는 젊은이들이 겪는 지독한 절망을 위무할 방안이 우리에게 없다.그들이 누구인가.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이어야 할,지금 우리사회를 힘차게 움직여 가야 할 주력(主力) 세대가 그들이지만,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정치는 지금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는가. 우리 정치인들은 ‘그들만의 기 싸움’에 죽기살기다.그들이 민생과는 무관한 일로 드잡이하는 사이 청년들의 절망은 깊어가고,정치는 더욱더 혐오의 대상이 되고,카드빚에 몰린 젊은 엄마들은 아파트 베란다를 찾는다.대인의 풍모라고는 구경할 길이 없는,천박한 아귀다툼의 명수만이 정치를 하는 듯한,너죽고 나죽기 식의 우리 정치 판에서,‘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정치,아름다운 관용의 정치를 소망하려는 이런 칼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정 달 영 칼럼니스트 ssisi61@hanmail.net
  • [21세기 한국을 읽는다]방민호 교수가 만난 문학지성 (6)조동일 - 한국의 학문, 탈 식민지화를 위해

    저 옛날 원효는 중국으로 가려다 중도에 돌아왔으되 당대 불교철학의 첨단에 서 있었다.오늘날에도 해외에 유학하지 않고 세계적인 학문을 이룩하는 사람이 있다.그가 바로 국문학자 조동일 선생이다.“유럽 문명권의 독주 때문에 빚어진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일제히 노력하는데 동아시아도 다른 여러 문명권과 함께 적극 기여하는 것이 마땅하고,한국에서도 할 일을 해야 한다.나는 내 나름대로 그 임무의 일단을 수행하면서,주위의 다른 사람,이웃나라 학자,다른 문명권 학계의 분발을 촉구한다.”(조동일 ‘세계문학사의 전개’(2002) 중에서) 말복을 앞두고 부채질을 해야 할 만큼 뜨겁던 날,선생의 연구실 바깥에서는 매미 소리가 따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선생은 역시 변함이 없었다.뭔가 혼자만의 담대한 구상에 빠져 있다 불청객을 맞은 듯했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지 손수 녹차를 타주시는 배려를 보이기까지 했다. 비록 내 자신이 도둑맞은 건 아니었지만,선생과의 인터뷰 테이프를 도둑맞은 나는 뭐라 변명 드릴말씀이 없었다.빨리 본론을 시작하는 수밖에. “다시 선생님의 근황을 여쭈어 보아야겠어요.” “‘지방문학사 연구의 방향과 과제’라는 책을 썼어요.이제 교정을 다 봐서 책이 곧 나올 단계입니다.그리고 ‘국문학통사’도 한 번 더 고쳐서 제4판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이 작업은 오래 걸려서 2005년 초에나 나올 예정입니다.” “오랫동안 한국문학사를 연구해 오셨는데요.우리의 문학은 중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문학과 어떤 점에서 구별될 수 있을까요?” “한국문학사가 세계문학사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점이 뭐가 있느냐.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어요. 첫째,구비서사시의 전통입니다.우리 문학을 보면 고대부터 근대까지 서사시가 면면히 이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어느 한 시대에 구비서사시의 풍부한 유산을 가진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렇게 시대에서 시대로 이어지면서 면면히 새롭게 창조되는 구비서사시를 볼 수 있는 것은 한국문학이 특별한 경우입니다.시대에 따른 역동성이 있다는 것이죠. 둘째,한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간에 위치해있습니다.중국이 중심부이고 일본이 주변부라면 한국은 중간부인데 중간부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중심부가 발전시킨 공동 문어문학과 주변부에서 일찍부터 발전시킨 자국어 민족문학이 비슷한 비중으로 발전하면서 그 양자가 밀접한 관련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한국문학의 이런 특징은 다른 문명권의 중간부에서도 발견됩니다.산스크리스트어 문명권의 타밀,아랍 문명권의 페르시아,유럽 문명권의 프랑스나 독일 등이 그렇지요. 셋째,한국은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근대문학을 일으켰는데 식민지 경험을 가진 다른 어느 나라의 문학보다 훌륭한 근대민족 문학을 이룩했습니다.그리고 그것은 앞 시대의 축적의 대가입니다.일본 식민지 통치는 언론과 정치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했고 이것이 문학에서는 고도의 암시와 상징,비유를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근대문학은 문학적 창조의 방법을 보이면서도 민족이 요망한 것을 깊이 집약하는 양면성을 갖추었습니다.이것은 우리 문학이 가진 한 특성이면서 제3세계 근대문학이 가진 보편적 특징을 잘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중세,근대에 걸쳐 한국문학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전통과 가치를 구비하고 있는 셈이군요.문명권을 중심부,중간부,주변부로 보는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동아시아 문명권의 경우 중국은 공동 문어문학,즉 한문학의 중심부이고 그 규범을 보인 성과가 높은 반면에 중국의 백화문학은 근대에 들어서야 성립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반면에 일본은 공동 문어문학을 많이 하지 않았고 그 수준도 별로 높지 못한 데 반해 자국어문학은 일찍 성립된 편입니다.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한 것인 양 자랑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명권의 주변부가 가지는 일반적 특성일 뿐 민족성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못합니다.일찍 자국어문학을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보다 유럽 문명권에서 주변부 중의 주변부인 아이슬란드보다 못합니다.중세에는 공동 문어문학을 잘한 중간부,즉 한국이 아주 위세가 높았고,근대에 와서는 주변부였던 탓에 자국어 문학이 일찍 개화한 일본이 조금 나은 형편에 놓여 있는 거지요.그러나 근대를 넘어서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근대와 중세의 유산을 함께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공동 문어문학에 함유된 가치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중간부인 한국의 중요성이 커집니다.유럽처럼 동아시아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중세적 보편성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을 함께 구비하고 있는 한국이 두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구실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한국문학 연구를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면서 주체적,독자적인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를 깊이 고민해 오신 것 같은데요.” “학문하는 데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두 가지 조류가 있어요.하나는 서양 학문을 가져와서 우리 것을 만들고 또 그것을 토착화하자는 수입학이죠.그런데 이 수입학은 아무리 잘해도 원산지보다 잘 할 수는 없어요.원산지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죠.또 수입학으로 대안을 만들 수는 없는 거죠. 다른 하나는 국학,우리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자립학이라고 했어요.수입학이 범람하는 와중에 자립을 하자는 것도 좋지만 우리 것에 매달리면서 그것의 의의를 많은 경우 감정적으로 설정하고,우리 것이 가지는 보편적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성이 결여돼 일반이론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자립학입니다.이러한 자립학으로도 우리 학문은 학문이 크게 나갈 수는 없어요. 수입학의 폐단과 자립학의 폐쇄성을 함께 넘어가는 바람직한 학문의 방법이 필요한데,나는 이것을 창조학이라고 명명했습니다.창조학이란 뭐냐면,우리 것,우리 민족,우리 유산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의의를 발견하고 그것을 한편으로는 동아시아로 확대하고 제3세계로,세계로 확대하는 것이죠.동아시아로 확대한다는 것은 중세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제3세계로 확대한다는 것은 근대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요.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유럽문명권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따져보는 거죠.그렇게 해서 근대를 합리화하는 그들의 한계에서 벗어나,유럽 문명권 중심주의를 세계 전체로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그것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하고 대안이 되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학문의 바람직한 자세일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 같습니다.그런데 학문을 함에 있어 언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예컨대 영어를 잘 알아야 한다든가,말입니다.” “국제비교문학회 같은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해 보면,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할 말이 없고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말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겪게 됩니다.우리나라뿐 아니라 제3세계가 다 마찬가집니다.말할 수 있으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영문학,혹은 국문학 전공자들이 해외에 나가서 영어는 빠지지 않게 하지만 내용이 없다는 것이죠.할 말도 있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도 있고 그것을 외국어로 표현할 줄도 아는,그러니까 양쪽을 갖춘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영문학자나 국문학자가 그렇게 하기는 매우 어려워요.국문학을 깊이 공부하는 사람이 비교연구의 관점도 다 갖추고 세상에 통용되는 말로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현실이고 제3세계 국가들도 모두 비슷합니다.그런 공통적인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경쟁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견해는 만만치 않은데요.복거일씨가 그런 분 가운데 한 사람이었죠?” “영어는 일종의 교통어입니다.모국어가 다른 사람끼리 통용하기 위한 말인데,교통어로서의 영어가 갖는 효용성을 부정할 수는 없겠죠.그렇다고 해서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할 말은 점점 더 없어져요.할 말이 있고 말을 못하면 다른 사람이 번역을 해서라도 내놓을 수 있는데 말을 할 수 있고 말할 내용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선생은 어조가 한결 높아진다. “지난번에 그런 주장이 횡행하길래 3개월 만에 급한 대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관심이 있어 자료는 모으고 있었지만 내 분야가 아니었기에 바로 쓸 계획은 없었어요.그러나 문제가 시급하다는 생각,몇 달 만에 책을 썼고 원고 넘기고 한 달여 만에 책이 나왔어요.그 책의핵심 중 하나는,영어 공용어 국가는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였거나,자기 나라 사람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뿐이라는 것이에요.우리나라 사람끼리 말이 통하지 않게 하는 것,영어를 공용어로 만들어 한국어를 못 쓰게하는 것은 어떤 정치권력이나 법으로도 불가능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리를 떠드는 것은 사람의 의식을 혼미하게 하는 거예요.영어를 공용화한 나라가 얼마나 많은 불행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 조사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정책을 좌우하는 사람들까지 부응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그것은 경쟁력도 못키우고 학문을 발전시키지도 못합니다.” 선생은 외국어를 가장 잘하는 국문학자 가운데 한 분이고 학문을 하려면 5개국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영어 공용어론에 대해서는 여간 강경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 평생 학문을 학문답게 해온 사람의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닐는지. 나는 선생께,선생님도 생활이라는 개념이 있느냐고 여쭈었더니,그렇단다.매년 8월 아무 날에는 제자들과 속리산에함께 오르신단다.이 글을 정리하느라 선생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매주 일요일 오후 1시5분쯤이면 도봉산역에 도착해 등산을 하신단다.참으로 놀라운 생활이 아니냐.그 규칙성,그 성실함이라니. ■방교수가 본 국문학자 조동일 옛날에 신림 4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어떤 큼직한 가방을 멘 사람이 혼자 쑥 들어오더니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호프 500cc를 한 잔 시켜 마시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그가 바로 조동일 선생이었다.그 무렵 나는 그가 늘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마냥 큼직한 커리어백을 끌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그는 다른 생각 없이 공부만 하고 땅만 보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생각은 하늘에 두고. ●도전과 의지의 삶… 저서 50여권 이번에 조동일 선생과 인터뷰를 치르는 동안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녹취 테이프 푸는 일을 맡은 작가 김신우씨 집에 도둑님이 들어 테이프를 잃어버린 것.생각다 못해 선생에게 다시 인터뷰를 하자고 어렵게 말씀 드렸더니 쾌히 그러자신다.천재지변 같은 일을 어떻게하겠느냐고. 나는 선생 연구실의 낮은 문턱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높고 낮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었다. 1939년 경상북도 영양 사람으로 예천 출생이다.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한 뒤 국문과에 다시 입학,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도전과 의지의 삶을 살아왔다.1982년에 간행되기 시작하여 모두 다섯 권으로 낸 ‘한국문학통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쓴 저서가 모두 50여권. 그의 관심은 한국문학에서 출발하여 한국문학으로 끝나되 그 단일 주제는 끊임없이 확장,심화되어 왔다. ●평생 한국학의 세계성 탐구 ‘우리 학문의 길’(1993) 등이 보여주듯,그는 한국 지식사회가 주체성과 독자성을 확보하는 길을 고민해 왔으며 나아가 그러면서도 정저지와(井底之蛙)에 머무르지 않는 학문의 창조성을 고창해 왔다.최근 ‘세계문학사의 전개’(2002)처럼 그동안의 학문적 성과를 갈무리하는 저서를 내는 한편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민족문화가 경쟁력이다’(2001) 같은 저서로 사회 일각의 천박한 서양 동화주의를 비판하면서 우리언어와 학문의 가치 옹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 [LOOK 아시아]21ㅜ 아시아, 분열되면 서양에 또 당한다 (3)韓·中·日 젊은이 좌담

    “티켓 하나로 한·중·일 3개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열릴 것이다.”“3국 공동어가 있으면 어떨까.”“동질성도 좋지만,천박한 대중 문화로 젊은이들이 통합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아시아의 동쪽에 나란히 위치,역내 질서 형성에 큰 축을 형성하는 한국·중국·일본 3개국의 젊은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21세기,고국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이들에겐 ‘3국 협력’이란 말 자체가 고루하게 느껴지는 듯하다.‘톡톡 튀는’ 젊음 그 자체의 코드로 3국간 상생(相生)의 길은 찾아질 수 있다는 논리다. 베이징대 한국어과 출신으로 평양에서도 8개월간 머문 적이 있는 한반도통(?) 왕옌,고등학교 때 엄마 따라 관광온 한국의 친절에 반해 서울로 유학온 구와바라 요코,세계는 넓고 할 일은 너무나 많다는 한국청년 서정환씨가 20일 대한매일 회의실에서 만났다.먼저 요코가 ‘3국의 섹스 문화’를 다뤄보자며 도발적 제안을 했다. ●굳이 동질성을 찾지 않아도 -요코 솔직히 얘기해 보자.나는 한국 사람들이 혼전 순결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일본과 한국은 시내 간판의 글씨만 다를 정도로 모든 게 비슷한다.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혼전에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는 것 아니냐. -정환 글쎄,고교 때까진 입시 준비에 몰두 하느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별 생각을 하지 않는다.수험생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매우 밀접해 있고,특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실제로 많이 변했다. -옌 중국도 마찬가지다.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개방되고 발달한 도시들에선 부모들에게 얘기하지 않고 동거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동거 연령도 낮아지고 있다.남녀간에 심각한 채팅도 많다.한국도 비슷하다.한·중·일 모두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최근엔 몸으로 다 깨고 있다는 생각이다. -정환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있다.육체적 접촉에 관한 한 체면을 중시한다는 점이다.2000년 유네스코 청소년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유럽에서 온 학생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키스를 해댔다.눈살을 찌푸린 것은 한·중·일 3국의 참가자들이었다.나머지는 개의치 않았다. -요코맞다.우리가 굳이 동질성을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너무 비슷한 게 많다.한자를 쓴다는 점,젓가락과 숟가락을 쓴다는 점 등이다.최근 3국에서 비만아들의 증가가 사회 문제화되는 것도,모두 서양음식이 몸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중국·일본 3각 고리 -옌 사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일본은 잘 알았지만,한국은 몰랐다.수교가 안됐기 때문이다.1988년 올림픽 때 처음 한국을 인식했다.사실 베이징대에 입학하면서 일본어과는 경쟁이 너무 세 한국어를 택했는데,지금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코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어머니를 따라 한국을 여행했다.말이 안통하면 따라오라 해서 길을 가르쳐 줄 정도로 친절했던 사람들이 가슴에 남았고,유학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자연스레 한국을 택했다. -정환 많은 교류를 통해 서로를 아는 게 중요하다.정신대 할머니들의 문제도 그렇고,내가 아는 일본 친구는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일본 대사관앞 수요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직접 피해자·가해자가 아니어서 감정적대립은 없다. -옌 일본인들이 주변국과 역사를 모르는 것은 일본 정부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개인 경험을 얘기해서 미안하긴 한데,나는 원래 과거사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일본 학생이 내 침대를 사용해 어지럽혀 놓은 일이 있었다.나의 항의는 아랑곳 않았고 아예 무시했다.불쾌했다.그때부터 일본 정부가 한국과 중국에 하고 있는 역사관련 자세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3국이 극복해야 할 과제 -정환 중국의 경우,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사상이 너무 강해 주변국들에 부담을 주지 않나 싶다.지난번 유네스코 캠프에서도 어떤 중국 참가자가 “지금은 경제적으로 한·일에 뒤지지만 결국 중국이 최고로 앞설 것”이라는 주장을 여러번 해서 다른 아시아 사람들이 불편해하곤 했다. -옌 개인적인 차이일 것이다.누구나 자기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자긍심이 있지 않느냐.상대방을 고려해야 하는 부분은 모든 국가들이 함께 새겨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우리 아시아는 유럽연합(EU)처럼 정치·사회 통합을 지향하기는 힘들 것 같다.모두 각기 다른 주권국이다.중국은 정치적으론 사회주의 체제이다. -요코 한국인들도 강한 자의식을 극복해야 한다.외국인들에게 상당히 배타적이다.일본은 섬나라이고,한국도 반도여서 그런 심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옌 맞다.한국말로 한참 이야기 하다가,옆 친구가 내가 중국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그자리에서 입을 다물어 버려 당황한 적이 좀 있다.중국은 원래 다민족 국가니까 그런 부분은 좀 약한 것 같고,한국 일본은 단일민족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미래상은 -정환 한국의 가수 보아가 일본에서 대 인기를 끌고 있고,중국에선 한류 열풍이 부는 것을 보면,한·중·일 3개국 젊은이들의 문화코드는 이미 동질화된게 아닌가 한다.유럽 여러 나라들의 국경이 개방된 것처럼,우리 3국도 티켓 하나로 여행하는 시대가 머지않아 올 것으로 보인다.한·일 해저터널 연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하지만 저질 오락이나 만화,저급한 섹스 문화 등 천박한 문화로 동질화되는 것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본다. -요코 3국 공용어가 생기면 도움이 될 것이다.같은 한자권이니까 기발한 아이디어도 있을 것 같다.3개국이 서로의 입장을 고려하며 받아들일 때,그리고 자국의 고유 문화정체성을 살리면서 협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옌 지금 현재 하고 있는 ‘베세토’(베이징·서울·도쿄를 잇는 문화 교류 프로그램)행사를 좀 더 자주 하고 청년 교류 프로그램을 늘리면 서로를 진지하게 알고 3국 관계는 더욱 긴밀해질 것이다. 정리 김수정·조승진 기자 crystal@ ●한국 서정환(24) 소속:서울대 영어교육과 3년 장래 희망:유엔 등 국제기구나 국제 NGO 단체 근무 기타:아버지의 해외 근무로 지난 86∼87년 2년간 미국 거주 ●일본 구와바라 요코(桑原陽子·24) 소속:일본 호세이(法政)대 국제문화학부.지난해 8월 연세대 교환 학생으로 내한,오는 6월 귀국 예정 장래 희망:해외여행 관련 사업 ●중국 왕옌(王岩·26) 소속:고려대 국제대학원 국제통상학과.베이징대 한국어과 졸업한 뒤 2001년 8월 내한. 장래 희망:마케팅 분야 전문가
  • 유시민씨 원색적 혹평 “검사들 오만·무례 범벅”

    개혁국민정당 전 대표 유시민(사진)씨가 자신의 홈페이지(www.usimin.net)를 통해 검찰에 대해 ‘오만과 무례,자신만의 사명감’ 등의 노골적인 표현을 써가며 비판하고 나섰다. 유씨는 9일의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토론을 본 뒤 소감을 한마디로 “참담합니다.”라고 밝힌 뒤 검찰의 토론 내용과 태도를 날카롭게 비난했다. 유씨는 “평검사들은 검찰과 국민의 관계가 불신에서 신뢰로 전환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검찰인사위원회 설치,검찰 인사권의 검찰총장 위임만을 노래했다.”면서 “대한민국 검사들은 국민들과의 교신망을 끊고 살아온 것 같다.”고 적었다. 또 나약함과 무책임성과 관련,“외압타령은 그게 무서워서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라고 반박하면서 “언론인과 학생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반세기 동안 보직과 승진의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가 없어서 외압에 굴복했다는 자백을 검사들이 한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무례함에 대해 “대통령과 장관에게 말을 적게 하고 자기네 말만 들어달라고 했다.”면서 장관에게는 ‘점령군’ 단어를 쓰지 말 것을 요구했고,대통령에게는 ‘검찰에 대한 문민통제’라는 표현에 기분이 나쁘다고 한 말을 예로 들었다.이어 “검사들에게는 극복하기 어려운 직업병이 있다.”며 그것은 오만과 무례함이라는 질병이라고 밝혔다.스스로 ‘검찰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은 뒤 그들은 ‘자기들만의 사명감’으로 산다고 답하기도 했다.‘검사들만의 사명감’은 천박한 교양·특권의식·나약함 등으로 범벅이 됐다고 설명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기고] ‘脫향락’을 위한 사회문화적 대안

    법률적 제재와 처벌에도 불구하고 향락산업이 번창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사회문화적 조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식민지 시기 공창제가 도입되면서 성의 상품화를 매개로 한 향락산업이 사회의 비공식적 하위섹터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더구나 남성우월주의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뿌리깊게 남아 있는 현실은 향락산업을 남성의 성욕구 분출구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우리 사회의 소비문화다.상대방에 대해 뭔가 호의를 바랄 때 가장 흔하게 이용되는 것이 향락을 통한 향응 제공이다.이같은 이유로 매년 막대한 양의 접대비가 향락산업에 소비되고 이는 다시 향락산업의 비대화를 초래하고 있다. 결국 ‘탈향락 사회’의 관건은 건강한 사회문화와 윤리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선 수준 있는 문화와 여가 생활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인프라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동안 경제적 수준은 향상됐고 쓸 돈과 여가는 다소 늘어났지만,사람들의 문화와 여가충족 방식은 말초적이고 단순 욕구충족적인 수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도서관·박물관·공연장 등 문화적 하부구조를 구축하고,값싸고 접근성 높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제공,사람들이 건강하고 질 높은 문화생활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다음으로 향락산업의 소비자인 남성들의 왜곡된 성의식이 바로잡혀야 한다.룸살롱 등을 통한 기업의 접대문화가 만연하고 성매매와 원조교제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성과 여성에 대한 그릇된 사고에서 비롯된다.이는 상당 부분 지금의 기업문화가 여성을 배제한 남성 중심적으로 형성돼 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이같은 그릇된 관념을 바로잡기 위해 기업내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을 제도화하고 ‘성폭력 클리닉’ 등 재교육 시스템과 캠페인을 통해 왜곡된 성문화를 바꾸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청소년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기초교양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투자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며 단시간 내에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로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장기적이고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깊이 있는 교육에 대한 투자는 인색한 편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가 천박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돈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과 실천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장미경
  • [대한포럼]기능뿐인 인터넷 교육

    인터넷 강국의 청사진에 얼룩이 지기 시작했다.인터넷 역기능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교육인적자원부와 공동으로 ‘2002교육 정보화 백서’를 발간했다.중학생 인터넷 이용률이 99.3%로 대학생의 97.7%를 넘어섰다.궁금증이 생긴다.중학생들이 도대체 뭘 그리 할 게 많다고 대학생보다 인터넷을 더 많이 이용한다는 말인가.중학교의 인터넷 숙제가 대학생의 리포트보다 많다는 것인가. 학술정보원의 다른 정보화 백서를 들춰보면 의심이 풀린다.중3과 고1 학생 2509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고 한다.인터넷의 활용 대상을 물었더니 38.3%가 게임하기를 비롯해 동영상 감상(21.8%),메일 주고받기(15.1%),사이트 탐색과 채팅(각각 12.4%) 순이었다.얼른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응답자의 59.3%가 인터넷에서 음란물을 보았다고 말했다.여기에 사행성 게임이나 엽기적인 폭력물을 보태면 84.4%로 늘어난다.그러니 79%가 인터넷으로 ‘똑똑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인터넷이 빗나가고있다.허겁지겁 정보화 교육의 양적 팽창에 매달린 나머지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몰랐다.1970년 전자 계산기 교육에서 시작된 컴퓨터 교육이 1992학년도 제6차 교육 과정이 도입되면서 초·중등 학교에서 컴퓨터 단원과 함께 컴퓨터 과목이 생겨났다.그 결과 초등 학생의 88.6%가 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을 생활화하게 됐다.그러나 조작 기능 향상에 몰두하느라 컴퓨터 교육의 혼을 잊었던 것 같다.컴퓨터가 음란물과 폭력물이나 들여다보고 게임이나 하는 기구로 전락했다.그리고 60.7%는 습관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중독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청소년의 빗나간 인터넷은 오염으로 찌든 어른들 사이버 월드와 맞닿아 있다.인터넷 문화가 싹도 틔우기 전에 날로 고도화하는 과학 기술에 편승해 기능성만 웃자랐다.경찰청이 지난 한 해동안 집계한 성인 사이버 범죄는 6만 68건이었다.2001년보다 80%나 폭증했다.통신 및 게임 사기,성폭력과 명예훼손,개인정보 침해 등 하나같이 반도덕적인 사안들이다. 인터넷의 기형적 성장은 온라인 게임 산업의 지칠 줄 모르는 신장에서도 확인된다.한국게임산업개발원은 지난해 온라인 게임 산업의 매출이 4425억원으로 무려 65% 성장률을 보였다고 밝혔다. 인터넷의 한 축은 정보 공유다.누구나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대신 정보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제공하는 사람 누구도 베일에 가려진다.정보의 공유가 인터넷의 약(藥)이라면,익명성은 독(毒)인 셈이다.인터넷은 익명성의 맹점을 제거했을 때에만 비로소 약이 되는 것이다. 네티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려는 자기 주도적인 평생 학습자 자세를 지녀야 한다.그러지 않고서는 언제나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에 함몰되는 굴레를 벗기 힘들 것이다. 인터넷의 독을 없애는 작업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성인들의 오염된 인식은 물리적 단속으로 억제하는 한편 청소년들에게 바른 인터넷 문화를 심어 주자는 것이다.학교의 인터넷 교육이 학습주의에서 교육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컴퓨터 기능 위주의 교육을 네티즌으로서 소양을 먼저 새겨주라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자기 주도적인 학습 방법을 일깨워천박한 정보의 유혹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 주어야 한다.이미 때가 늦었다.당장 새 학년부터 컴퓨터 교육의 학습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학생들에게 인터넷의 혼을 찾아 주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정 인 학 chung@
  • 대한매일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작 - 장난감 총

    변 혜 령 등장인물 - ♂ 정만석 (30대 초반) ♀ 나채연 (20대 후반) ♂ 박 PD (30대 초반) ♂ 이실장 (40대 중반) 무대 - 스튜디오가 갖추어진, 전형적인 성인 인터넷 방송국이다. 무대 중앙 (스튜디오) - 알록달록한 스테이지, 천장에는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가 매달려있고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모니터의 글들이 관객에게 보여진다. 그밖의 공간 (사무실) - 커튼으로 무겁게 가려진 커다란 창문. 책상 위엔 노트북이 놓여져 있다. 바닥, 트라이포드 위에 놓인 카메라에선 작동중임을 알리는 빨간 시그널이 켜져있고 그 옆으론 여기저기 놓여진 방송용 소품 바구니.스테이지와 사무실은 분위기, 조명등이 확연히 다르다. 결국 하나의 공간이지만 이중 공간이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면, 알록달록한 스테이지만 현란한 조명으로 반짝인다. 선정적인 속옷 차림으로 홀로 미친 듯이 춤추는 채연. 마치 애무라도 하듯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동작. 음악 소리 작아지면, 동작 멈추고 간드러지게 웃는 채연. 컴퓨터를 사람 대하듯, 요염하게 시선 보내며 대화한다.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에 빠르게 떠오르는 자막들.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되어지는 언어들과 이모티콘, 기호들이 고스란히 스크린을 통해 보여진다. 글 올리는 접속 회원들의 아바타도 성격에 맞게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거나 입혀져 있는 옷들이 선정적이다. 불끈:졸려염 아함~ @@ 무기:열심히 춤춘 당신, 벗어라~ (입 찢어져라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 떠오른다.) 야수:벗어라~ 벗어라~ (양볼이 붉게 물든 얼굴의 이모티콘 떠오른다.)자막을 확인하고는, 거리낌 없이 상의를 벗어 던지는 채연. 채 연:아이~ 급하긴….저 나채연, 이름값 톡톡히 한다구요. 달래 PJ라 부르겠어 요? PJ가 뭐냐구요? 아잉~ 순진한 척은….포르노 쟈키의 약자! 다들 아시죠? 전요, 체질적으로 벗는 걸 즐기걸랑요. 안 벗겠다구 내숭떠는 년들, 그 년들은 프로두 아니에요. 몸매가 뭣 같으니까 그런 거지. 다시 떠오르는 자막들. 야 수:마저 벗어 줘~ 이잉~ ㅡ..ㅡ앗 싸:앗싸~ 나채연 홧팅~ *^^*채연, 마저 벗으려는데 무대 구석에서 불쑥등장하는 만석.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스테이지로 뛰어든다. 만 석:진아야. 이실장:저 미친놈 뭐야? 엉? 잡아와. 빨리! 박 PD, 끌고 들어가려는데 만석의 저항이 거세다. 엎치락뒤치락 격렬하게 버둥대는 두사람. 결국 이실장까지 합세해 스테이지 밖으로 만석을 끌어낸다. 달려가 카메라의 작동을 정지시키는 박 PD. 카메라가 정지되면, 무대조명이 전체적으로 밝아진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이실장, 다짜고짜 만석에게 주먹부터 날린다. 주먹이 만석의 얼굴에 닿기 일보 직전, 버럭 소리지르는 만석. 만 석:그, 그마안~ 만석의 고함에 스틸 사진처럼 정지하는 사람들. 만석, 가쁜 숨 몰아쉬며 가방을 내려놓는다. 씨익 웃으며 뻗어 있는 이실장의 팔에 가방을 걸어 놓는 만석. 이실장을 건드리지 않고 날렵하게 빠져나온다. 만 석: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동방예의지국, 말 그대로 선비의 나라 대한민국! (음 넣어 부르며 방방 뛴다.) 오~ 필승 코리아~ 에서 백주 대낮에 말만 한 처녀가 옷을 벗습니다. 저요? (채연 가리킨다.) 아, 그야진아를 보고 반 가워서 뛰어들었습니다만, (눈 가늘게 뜨고 채연의 얼굴 살핀다.) 아닌가 봅니다. 자 그럼- 이실장 앞에서는 만석, 처음의 자세를 취한다. 만석, 조심스레 가방을 빼낸다. 만족한 웃음 웃으며 자세를 바로 잡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만 석:어디더라? 오른쪽? 왼쪽? (어느 쪽이 맞을까 손가락으로 점쳐 보고는) 그렇지, 왼쪽. 만석이 왼쪽에 가방 메고 서면, 곧바로 주먹을 날리는 이실장. 샤샤샥 피하는 만석.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채연. 박PD:의상 안 갈아입어? 부리나케 퇴장하는 채연. 이실장:저 새끼 뭐야? 엉? 뭐 하는 새낀데 남의 방송을 통째루 망가 먹어? 박 PD:(연신 카메라 장비 살피며 잔뜩 주눅든 소리로) 그러니까…그게요…회원수 준다고 김작가 짜르구…저 친구 저래뵈두 글발이 장난 아니거든요. 이실장:작가? 저런 띨빵진 놈이 작가란 말이야? 당장 다른 놈으로 갈아치워! 박 PD:웬만한 작가는 우리 방송국 안 와요. 성인 인터넷 방송…머시기 하잖아요? 이실장:머시기? 월급을 두 배나 주는데 멋이 뭐시기해? 거 배때기들 불렀구만? 박 PD:작가 출신은….그 뭣이냐 작가 주의에 입각해서 예술을 하려는…. 이실장:닥쳐! 너 지금 국민 교육헌장 읊어대냐? 무슨 주의? 이~입각? 예술이 밥 멕여주냐? 박 PD:실장님이 주신 돈으루다가 밥사먹죠. 갑자기 모니터에 떠오르는 회원들의 항의성 자막들. 야 수:모야? 모야아~~ 방송사고?? (칼 날리는 이모티콘이 주르르 떠오른다.) 조아조아:돈 물어내랏!!! 삐리리 사깃꾼!!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모티콘 떠오른다.) 무 기:당장 탈퇴할래~ 잉잉~ ㅜ ㅜ의상 갈아입고 등장하는 채연. 채 연:어떻게든 해봐. 항의가 빗발친다구. 이실장:재방 내보내. 빨리! 박 PD:사과 방송 자막 큐! 박PD가 장비를 만지면, 다시 스테이지로 가서 서는 채연. 재방 방송을 재연하기 시작한다. 리와인드 화면처럼 춤추고 옷벗고 간드러지게 웃음 웃고를 반복하는 채연. 스테이지밖에 있는 사람들은 채연의 재방송과는 무관하게 대화를 나눈다. 이실장:2부 방송 어쩔 거야? 엉? 이 십분 뒤잖아? 박 PD:(덥석 만석 끌어다 놓으며) 이, 이 친구가 쓸 겁니다. 만석, 소란을 떠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몽롱한 시선으로 채연만을 바라본다. 이실장, 신경질 부리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요즘 유행하는 컬러링 벨소리다. 섹시한 여자 목소리로 “오우~ 어빠아~ 전화 받으세요~” 발신 번호 확인하고 180도로 태도 바뀌어 전화 받는 이실장 이실장:예. 예. 고의원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 고…예? 지금 즉시 사업 기획서 가지고 찾아 뵙겠습니다. 의원님께서 벤 처 투자 건에 저희를 밀어만 주신다면, 분골쇄신! 의원님의 돈줄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구요. (통화하며 퇴장) 박PD, 재빨리 만석을 노트북 앞에 끌어다 앉힌다. 박 PD:급하다. 급해. 글쓰란 말이다. 글! 만 석:글? (희미한 미소) 글! (여전히 채연만 바라보며) 처음…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했다. 진아만의 줄리엣…로미오와의 첫날밤을…줄리엣에게 웨딩 드 레스를 입혔다…. 빠른 속도로 자판을 쳐 대는 만석. 장난감 총을 들고 등장하는 이실장. 만석이 대본 치는것을 보고는 화가 누그러진다. 이실장:(장난감 총 건네며) 방송에 써먹을 소품이다. 박 PD:(꼼꼼히 살펴보다) 키야~ 이거 진짜 총 같은데요? 이실장:세상 참 좋아졌다. 가짜가 진짜 찜쪄먹으니 원. 자판만 눌러 대던 만석, 쓰던 걸 멈추고 물끄러미 장난감 총을 바라본다. 총을 조심스럽게 책상 서랍에 넣는 박PD. 빤히 쳐다보는 만석. 박PD, 시선 느끼고 박 PD:다 썼어? 노트북으로 걸어가는 박PD와 이실장, 만석이 써 놓은 것을 읽는다. 이실장:로미오와 줄리엣? 새하얀 웨딩드레스? (몸짓 발짓 줄리엣 배역 흉내내며 새된 소리로) 벌써 가시렵니까? 겁에 질린 당신 귓전에 방금 울린 그 소리는 종달새가 아니라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랍니다. 로미오님, 정말이지 그 소리는 나이팅게일이었습니다. 박 PD:오~ 줄리엣. 나는 잡혀도 좋소. 사형을 당해도 좋소. 이대로 마냥 머물고 싶소. 죽음이여, 오려면 오라. 반갑게 맞아 주마. 줄리엣님의 소원이시다. 이실장:이따우를 대본이라고 쓴 거야? 이걸 엇따 써먹어? 엉? 박 PD:아후~~ 상상해 보세요. 삐리리의 글래머 줄리엣,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서 있다. 헤헤- 그러니까요, 웨딩 드레스란게 안감을 다 뜯어내는 겁니다. 그 러면 속살이…흐흐흐. 거기다 갑자기 비를 뿌려 주는 겁니다. 완전한 영상 미 아닙니까? 하얀 색이 화면 가득, 비에 젖어 있기까지 하니까…거기서 끝나느냐? 말밥 아니죠. 클라이맥스에는 그 하얗고 순결한 웨딩드레스를 천천히, 천천히 벗는 겁니다. 마치, 마치 순결이, 순결이…헤헤헤. 이실장: 거 좋다. 빨리 방송 준비해. (퍼뜩) 그런데? 웨딩드레스가 우리 소품 중에 어딨어? 박 PD:그, 그게… 만 석:내가 가지고 있다. 웨딩드레스…진아가…줄리엣이 입었다…. 가방에서 부스럭부스럭 눈부시게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꺼내는 만석. 반색하며 달려가 뺏어 드는 박PD. 희희낙락하는 이실장. 박 PD:그거 보십쇼. 저놈아, 소품두 준비 안 하구 글쓰는 놈이 아닙니다. 똑부러지 는 놈이다 이겁니다. (폼나게 사인하며) 자- 방송 오분전. 스테이지 조명, 더욱더 천박하게 반짝인다. 그제야 동작을 멈추는 채연. 박PD와 이실장, 웨딩드레스의 안감을 무자비하게 뜯어낸다. 그러고는 채연에게 던져 준다. 재빨리 의상을 갈아입는 채연. 요란한 화장을 고친다. 화려하게 웨이브진 가발까지 벗으면, 긴 생머리가 가지런하다. 어느새 순결한 처녀의 이미지로 변신해 있다.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만석. 또다시 채연을 진아로 착각한다. 만 석:진아? 진아야! 달려가 채연을 스테이지에서 끌고 내려오는 만석. 갑작스러운 만석의 행동에 넋빠져 보고만 있는 박PD와 이실장. 두사람, 속수무책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스테이지 조명 아래 서 있다. 스테이지 밖의 조명은 전체적으로 어두우면서 몽환적이다. 채연은 스테이지에서 내려오자마자 진아로 변한다. 만 석:진아야. 진 아:오빠. 만 석:며칠만 있으면 결혼식이다. 우리 결혼식…이쁘다 드레스 입은 내색시…. 진아(채연):(주룩 눈물 흘린다.) 오빠…어쩌지…어쩌지? 우리… 할매목소리: 안 된다아~ 만석아~ 이놈~ 이놈시키~ 그년은 창녀여~ 만 석:하, 할매? 진아(채연):(슬피 울며 스스로 스테이지로 걸어간다.) 만 석:(멍하니 보기만 한다.) 진아야? 뭔 소리여 그거이 시방? 응? 진아가 스테이지에 올라서자마자 일순 천박한 조명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스테이지에 올라선 순간 채연으로 변하는 진아. 현란한 음악이 나오면, 스테이지에서 내려오는 이실장. 카메라 작동시키는 박PD. 요염한 포즈로 모니터 앞에서 춤을 추는 채연. 야수:나채연 결혼 하냐? (모니터에서 조그맣게 장송곡이 울려 퍼진다.) 불끈:키야아~ 의상 쥑인다! (눈알 튀어나오는 이모티콘이 떠오른다.) 터프게이:벗는 거보다 더 야시시? 그래두 벗어라!! 귀족:유부녀 돼두 출연하죠? 추카추카~ (장미꽃 다발 이모티콘 떠오른다.) 밝힘:벗어라! 벗어라! 음악 소리 작아지며 천천히 몸을 흔드는 채연. 위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 나온다. 온몸으로 물을 맞는 채연, 젖은 머리 쓸어 올리며 모니터 바라본다. 천천히 옷을 벗는 채연. 반라가 되자마자 확 꺼지는 스테이지 조명. 무대에는 만석만 홀로 서 있는 것 같다. 어두운 스테이지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이실장:으흐흐 하하 으흐하하.좋았어. 아주 좋았어. 오늘 접속 회원 수가 근래 들어 최고야. 최고! 돈이 아주 다발로 굴러 들어오는구나 엉? 우히히히. 박 PD:앞으로 모바일과 연계한 성인 방송도 문제없겠어요. 사람들의 소리 들으며 서 있는 만석, 울상이다. 만 석:뭔가가 잘못된 모양입니다. 고향 친구 놈이 서울서 출세했답니다. 무지하게 커다란 방송국에 취직을 했다나요? 그래서…염치 불구하고 친구 놈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아주 반갑게 취직을 시켜준다지 뭡니까? 자그마치 이백. 구미가 당기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도통 헷갈립니다. 진아를 닮은 저 여자는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속옷만 입고 있습니다. 나처럼…가난해서일까요? 추워 보입니다. 진아…나의 진아가 말입니다…(웃옷 벗더니) 덮어 줘야겠어…덮어줘야 돼…. 홀린 듯 비척이며 스테이지로 걸어가는 만석. 만석이 스테이지에 오르기도 전에 조명 밝아진다. 사람들, 우르르 만석에게 다가온다. 이실장:수고했어, 정작가. 내 한눈에 범상치 않은 작가다 싶었어. 이실장,만석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퇴장. 과장되게 포옹하는 박 PD. 악수를 청하는 채연.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 만석. 덥석 손을 잡아 흔드는 채연. 만석을 잡아끌다시피 노트북 앞에 앉히는 박PD. 채연은 컴퓨터 앞에서 사람한테 하듯 요염하게 웃기도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방송 준비를 하고 있다. 박PD, 무대를 바쁘게 왔다갔다하며 만석만 재촉한다. 박 PD:땡기는 대로 써라. 그게 바로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거다. 만 석:써? 뭐를, 박 PD:좋은 거 많잖아? 일곱난쟁이와 백설공주! 그거 조오타~ 일곱 명의 난쟁이와 백설공주가 벌이는 정사씬! 키야아~ 만 석:동화? 안데르센? 개구리왕자! 만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테이지 조명이 천박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소품 바구니에서 얼른 왕관을 찾아 쓰는 채연. 스테이지 중앙에 올라선다. 그와 동시에 카메라를 작동하는 박 PD. 큐 사인 보낸다. 또박또박 들려 오는 어린아이 해맑은 목소리. 꼬 마:(목소리만) 옛날 옛적, 어여쁜 공주님이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만큼 모든 사 랑을 한 몸에 받았던 공주는, 예쁜 황금 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품 바구니에서 황금 공을 꺼내 얼른 채연에게 던져 주는 박 PD. 아이의 목소리대로 연기하는 채연. 꼬 마:(목소리만) 어느 날, 공주는 황금 공을 가지고 놀다가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놀란 공주가 엉엉 울고 있는데, 연못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나왔습니다. 기괴한 음악 흘러나오면, 흉측한 개구리 탈을 쓰고 등장하는 이실장. 손이며 발이며 개구리의 형상으로 분해 있다. 개구리라기보다는 기묘한 괴물 형상이다. 이상한 춤동작으로 채연에게 다가가 희롱하는 개구리. 그와 대조적으로 맑고 또렷한 꼬마의 내레이션이 계속 된다. 꼬 마:(목소리만) 공주님, 공주님, 울지 마세요. 제게 키스해주면 황금 공을 찾아 줄게요. 채연 위로 올라타는 개구리. 채연과 개구리,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엎치락뒤치락 뒤엉키기 시작한다. 점점 커지는 기괴한 음악. 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는 두사람. 두사람의 몸놀림 위에 더욱더 현란하고 천박하게 요동치는 조명. 스테이지 밖에서 아랑곳없이 글만 쓰던 만석,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러고는 스테이지의 광경을 바라본다.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 만석, 바라만 보다가 웩웩거리며 토악질을 해댄다. 간신히 비척이며 일어서려는 순간, 스테이지 조명 꺼진다. 괴롭게 헐떡이는 만석, 스테이지가 어둠에 휩싸이자 풀썩 주저앉아 다시 웩웩거리기 시작한다. 만 석:이상…하다…이건 안데르센이 아니다…. 스테이지 조명 밝아진다. 그 위에서 이실장, 박PD, 채연은 흥겨운 분위기로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다. 이실장:우히히히. 좋아 좋아. 갈수록 퀄리티가 높아지는구만? 채 연:호호호. 실장님 기분 요즘 왔다네? 돈방석에 앉는 건 시간문제야. 그치? 나…출연료 좀 올려주라 응? 이실장:나채연이 너, 재계약 도장 찍었어? 박 PD:(바로 주머니에서 계약서 꺼내 머리 조아리며) 준비됐습니다. 계약서. 채 연:도장 없는데? 이실장:지장 찍어. 박 PD:(얼른 귓속말로) 그래도 계약선데 도장을 받으세요. 이실장:요 앞에 가서 이쁜거루다 하나 파라. (주머니에서 오천원짜리 꺼내 쥐어 준다.)힘없이 쳐다보다 돈 받아들고는 퇴장하는 채연. 둘러보다 널브러져있는 만석을 부축하는 이실장. 아무렇게나 만석의 주머니에 돈 봉투 찔러 넣어 주며, 이실장:앞으루두 잘해 보자구. 정작가. (퇴장) 박 PD:수고했다. 만석아. 만 석: 고향 사람들…니가 성공한 줄 안다. 박 PD:너, 돈벌구 싶댔지? 잘만 하면 돈버는 거 시간문제다. 만 석:돈? (절망적으로) 진아…. 박 PD:진아가 그렇게 됐다는 거, 나도 마음 아프다. 하지만, 다 잊고 살궁리를 해야지?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랬다. 요즘 세상, 돈 있음 못할 거 없다. 만 석:다…잊어…? 박 PD:할매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며? 그래서 불러 줬음 돈벌 궁리나 해 임마. 만 석:진아가…나를 버렸다. 세상이…. 박 PD:그러니까 너도 양심을 버리란 말이다. 그러면 사는 거 편해진다. 그러면 세 상에서 대우받고 잘살 수 있다. 만석을 쳐다보다가 퇴장하는 박 PD. 고개 숙여 흐느껴 우는 만석. 아련하게 진아의 목소리가, 채연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진 아:오빠…만석 오빠…. 만 석:(벌떡 일어난다) 진아? 어딨어 진아야? 진 아:여기….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면 어두운 스테이지에 진아의 실루엣이 보인다. 미친 듯이 스테이지로 달려가는 만석. 그러나 스테이지에 오르기도 전에 스테이지 조명이 밝아진다. 앉아 있는 진아, 청순함은 바래지고 채연이의 선정적인 분위기가 묻어 난다. 요동치는 조명. 조그만 테이블 들고 등장하는 이실장, 채연 앞에 놓고 앉는다. 양복 입고 촌티 나게 가르마 탄 머리를 올 백으로 넘겼다. 진아가 다녔던 단란 주점의 단골손님으로 분해 있다. 일순 스테이지가 단란 주점으로 변한다. 분주하게 등장하는 박PD, 시골 단란 주점 웨이터로 분해 있다. 쟁반에 양주와 잔을 받쳐들고 진아의 앞에 세팅하기 시작한다. 술 따르기 시작하는 진아. 허허거리며 진아를 더듬는 이실장. 진아가 몸을 빼내려 하자 돈 뭉치 꺼내 진아의 가슴팍에 넣어 주는 이실장. 만 석:(고함 지르려는데 숨이 턱턱 막힌다. 간신히 쥐어짜는 소리로) 진아야. (스테이지로 올라가려는데) 진 아:(일어서서 만석을 막아선다) 지쳤어. 만 석:우, 우리 결혼…. 진 아 :모르겠어? 나…술집 다니는 거 소문 다 났어. 만 석:괘, 괜찮다…. 진 아:(슬픈 표정이나, 모질게) 돌아가. 술취한 이실장, 비틀거리며 진아에게 다가와, 안 듯이 스테이지 쪽으로 끌고 간다. 따라가려는데 눈 부라리며 막아서는 박PD. 진아를 따라가려고 버둥거리는 만석. 박PD, 만석을 세차게 밀어 버린다. 그 힘에 바닥에 엎어지는 만석. 만석이 넘어지면서 스테이지 조명 꺼진다. 퇴장하는 사람들. 넘어진 채로 흐느껴 우는 만석. 만 석:진아야…. 도장 들고 등장하는 채연. 채 연:엎어져서 뭐하는 거야? 4부방송 써야지?등장하는 박PD. 채 연:(도장 내민다.) 오빠가 찍어. 박 PD:(계약서 보이며) 읽어는 봐야지? 고개 젓는 채연. 채연만 바라보던 만석, 계약서를 가로채 읽는다. 계약서를 박박 찢어발기는 만석. 박PD, 경악해서 말까지 더듬는다. 박 PD:너, 너? 이, 이, 이거? 기가 막혀 입까지 헤- 벌리는 박PD,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더 이상 할 말을 잃는다. 한숨 쉬며 찢어진 종이를 주워 가지고 퇴장하는 박PD. 미친 듯이 깔깔대며 웃어대는 채연. 채 연:호호호호. 진짜 귀엽네 이 오빠? 박PD랑 이실장 찜쪄먹겠어? 만 석:도장 찍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 모르는 거니, 진아야? 채 연:(담배 꺼내 문다.) 오년 뒤에 대 스타가 되는 거지. 만 석:거짓말. 채 연:인터넷에, 휴대폰에, PDA에 내 모습이 팍팍 뜰 거야. 앞으로. 만 석:다 거짓말이다. 채 연:멀쩡하네? 안 미쳤어? (만석의 얼굴에 담배 연기 내뿜는다.) 맞아. 말 그대 로 노비 문서. 계약서라는 이름의 노비 문서. 만 석:(콜록거리며) 벗으라면 벗고, 춤추라면 춤추고. 꽃다운 나이 다 보내고 조 금 이라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위약금 물어내야 한다…. 갑자기 스테이지로 뛰어 올라가는 채연. 스테이지 조명이 다시 강렬하게 비추어진다. 과거, 채연의 모습이므로 조명이 강렬할 뿐 천박하지는 않다. 채 연:안녕하세요? 접수 번호 445번 나채연이에요. (꾸벅) 세계적인 여배우가 되는게 제 꿈이랍니다. 36-24-38. 특기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춤, 노래, 연기…(섹시하게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어 댄다.) 라크 버진~ 우~ (갑 자기 노래를 뚝 그친다.) 네? 신음 소리요? 시나리오에 그런 내용은 없던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잘할 수 있어요. (리얼하게 신음 소리 내는) 오우~ 아~ 아~ 채연의 간드러진 신음 소리가 최고조를 이르면서 스테이지 조명 꺼진다. 멍하니 쳐다보는 만석. 일어서려는데, 온통 붉은 빛으로 스테이지 조명이 밝아진다. 스테이지 중앙에 섹시한 포즈로 누워 있는 채연. 그 앞에서 에로 영화 감독으로 분한 이실장이 확성기 들고 앉아 있다. 카메라 들고 설쳐대는 박PD, 에로 영화 촬영겸 조감독으로 분해 있다. 감독(이실장):(소리질러 댄다.) 야-야- 가슴팍 드러나게 팍팍 벗어제끼라니까? 채 연:(겁먹은 목소리로) 가, 감독님. 시나리오가, 내용이 달라요. 감독(이실장):니가 메멘토냐? 한말 또하구 또하구 되풀이하게? 퀄리티를 위해서 씬을 추가했다고 몇 번을 말해? 채 연:그, 그치만, 그치만…. 감독(이실장):니 한 몸 바쳐서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겠다며? 오디션 때 니 입으루다가 읊었냐? 안 읊었냐? 채 연:그때는 시나리오가 정상적이었구요…. 감독(이실장):그래서? 채 연:(결연히 일어선다.) 못 찍겠어요. 감독(이실장):(채연의 얼굴에 계약서 던진다.) 이건 엄연히 계약 위반이야. 알아? 채 연:파기할래요. 계약…. 조감독(박PD): 위약금 물어내야 될 건데? 자그마치 삼십배! 채 연:네에? 사, 사, 삼 십배? (스테이지 조명 꺼진다.)어두운 스테이지에서 채연의 신음 소리와 이실장의 목소리만 들린다. 감독(이실장):(소리만) 자-자- 좀더 섹쉬하게- 과감하게 리얼리티를 살려서, 그렇 지. 좀더, 더, 더…소리지르는 만석. 만 석:그만, 그만, 그만! (스테이지는 소리도 조명도 없이 조용해진다. - 스테이지 잠시 보고)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악몽! 어른이 되어 갈수록 악몽이 늘어 만 갑니다. 그렇게 악몽을 꾸고나면 하나 둘 씩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젠 꿈이 무섭습니다. 꿈…나만의 꿈…(불현듯이) 진아를…찾아야 하는데…진아를…. 미친 듯이 스테이지로 달려가는 만석, 잠시 그 앞에서 주춤 선다. 두려운 얼굴로 스테이지를 바라보다천천히 올라선다. 스테이지에 올라서면, 조명이 밝아진다. 소품을 정리하면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채연. 그 옆에 앉는 만석. 채 연:이 세상엔 뭐가 있는지 더 높이 날을 거야.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 주 지 않아~ 애잔하게 채연을 바라보는 만석. 채연의 짙은 화장이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후다닥 채연의 시뻘건 입술을 손으로 지우는 만석. 채 연:뭐, 뭐야? 태연하게 눈의 화장까지 벅벅 지우는 만석. 만 석:이쁘다. 진아야. 채 연:아우씨이~ 변태네 이 오빠? 세차게 만석을 밀어젖히는 채연. 풀썩 엎어지는 만석. 채 연:(거울 찾아 얼굴 본다.) 아우~ 씨바. 엉망이네. 만 석:미…안하다…. 채 연:그렇게 닮았어? 끄덕이는 만석. 거울 보면서 대충 화장기 지우고 스스로 머리를 반듯하게 묶는 채연.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만석. 일순 얼굴 마주보며 웃는 채연과 만석. 채 연:진아라는 사람, 오빠 애인이야? 어딨는데? 만 석:죽…었다. 인간은…환생한다.…그게…너다.…그렇지 진아야? 채 연:순정파네 이 오빠. 그런 사람이 이 바닥엔 뭐하러 기어 들어왔대? 하긴…직업에 귀천 없다잖아? 이왕 온거 빨랑 돈 벌구 이 바닥 떠. 그래야 오빠 두 알콩달콩 여우 같은 마누라랑 살지. 만 석:진아랑 결혼할 거다. 가방에서 옷을 꺼내 채연에게 건네주는 만석. 목위까지 단추가 달려 있는 얌전하고 고상한 원피스다. 만 석:입어 봐. 채 연:나 주는 거야?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는 채연. 흡족한 표정으로 패션쇼하듯 무대를 워킹 한다. 만 석:결혼하자. 채 연:나? 나랑? 실수한 거야. 작가 오빠. 남자들은 말이야, 나를 만지려고는 해 도…특히 결혼이란 말 따윈…안 해. 만 석:진아야…채 연:채연이라니까? 따라 해봐. 천천히. 나, 채, 연. 만 석:나, 채, 연, 결혼…하자. 채 연:첫눈에 반한 거야? 나한테? 만 석:그래. 진아는…채 연:프로포즈라…가능성 있어. 오빠는 에로 작가, 난 에로배우. 딱이다. 딱! 바쁘게 등장하는 박 PD, 채연보고 기겁한다. 박 PD:그 옷 입고 촬영할 거 아니지? 채 연:어때서? 박 PD:이미 써먹었잖아, 그 컨셉? 식상해.채 연:그건 웨딩드레스고 이건…. 박 PD:벗어. 그 옷은 아니야. 영상이 안 된다구. 오로지 자극적인 거 볼려고 돈 내는데. 채 연:믿어 봐. 사람들도 좋아할 거야. 박 PD:실시간 방송이라구. 항의가 빗발칠 거야. 만 석:(시계 보더니 퍼뜩) 카메라 앞에 서. (박 PD 흉내내) 방송 오분전. 박 PD와 만석, 실랑이 벌이는 몸짓. 컴퓨터 앞에 서는 채연. 기어이 박 PD를 뿌리치고 카메라 작동시키는 만석. 손가락으로 큐 사인 보내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차분히 앉아 있는 채연. 채 연:안녕하세요? 불끈 님, 무기님, 조아조아님. 그 외에도 많이들 들어오셨네요. 순간 모니터에 빠르게 항의성 자막이 떠오른다. 무 기:벗는 게 최상의 정치!! (이빨 드러내는 이모티콘 떠오른다.) 노 예:안 벗는 년 프로도 아니라며? (화난 얼굴의 이모티콘 떠오른다.) 밝 힘:삐리리 웬일이니 웬일이니 웬일이니? 나채연 웬 내숭? 미스터빅:오늘, 전 회원 탈퇴의 날… (검은 장미의 이모티콘이 다발로 떠오른다.)떠오르는 자막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채연. 안절부절못하는 만석에게 눈짓 보내는 박 PD. 씨근덕거리며 뛰어들어오는 이실장. 무대를 한바퀴 휘익 둘러본다. 이실장:어떤 새끼야? 누가 방송을 이따우로 하래 엉? 둘러보다 카메라 잡고 있는 만석에게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린다. 맞고만 있는 만석, 쓰러진다. 계속 짓밟아대는 이실장. 말릴 생각조차 하지못하는 박 PD. 이실장:개새끼. 누굴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어. 말해 봐 새꺄. 계속되는 발길질과 주먹질. 당황한 채연, 다급해져서 원피스를 세로로 ‘부욱’ 소리나게 찢는다. 일순 무대에 스치는 적막. 모든 동작 정지하고 채연만 주목하는 사람들. 암전.조명 밝아지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만석. 코며 입이며 피가 엉겨 붙어 있다.손으로 만석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주는 채연. 채연의 손길을 느끼며 시니컬하게 키들거리는 만석. 그런 만석을 바라보다 같이 키들거리는 채연. 영 불편하게 서 있는 박 PD. 박 PD:너…진아가 죽고나서는 정말 이상해졌다. 만 석 ; 아무 것도 모른다. 다들…. 박 PD:결혼할 여자가 술집나간거, 가슴 아프겠지. 자살한 건 더욱 충격일 테고. 하지만…. 만 석 ; 임신했었다. 진아…. 박 PD:뭐, 뭐라고. 너 사고 친 거야? 만 석:내 애…아니다. 박 PD:그러면 술집에서, 만 석:홀아버지 약값 벌겠다고 아무도 모르게 나간 거다. 박 PD:그런걸 동네 사람들한테 들켰으니…. 만 석:세상은 바뀐다는데, 휴대폰에서는, 인터넷에서는 성(性)을 판다는데…진아는…진아는 …. 채 연:원래가 순수한 건 깨지고 흠집 나는 거야. 현실이 그래. 현실이…. 박 PD: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사람도 잊혀진다. 만 석:움직이는 거라구? 사랑이? 광고가 떠들고 인스턴트가 판치고…나는 왜 움직이지 않을까….(채연 바라본다.) 진아는 남아 있는데,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데…왜 모든 게 변할까…. 좋은 건…. 채 연:멋지다. 이 오빠, 맘에 들어. (박PD 보고, 자랑하듯) 나한테 결혼하쟀어. 박PD, 어이없게 쳐다본다. 만석에게 충동적으로 키스하는 진아. 때마침 등장하는 이실장. 이실장:어쭈구리? 눈까지 맞았어? 저 새끼 짜르라니까 너 뭐하는 놈이야? 채 연:벗을게.화끈하게 벗는다구. 회원수 안 줄어. 봤잖아? 옷 찢어서 반응 좋았 던 거. 처음부터 컨셉이 그거였어. 그거였다구. 이실장 ; 뭐야?박 PD:그, 그게, 그러니까…. 이실장:더듬지 말고 말해. 새꺄. 박 PD:마, 맞습니다. 고전적인 원피스에 갑자기 옷을 찢을 꺼라고 누가 상상을 하겠습니까? 이실장:그랬단 말이지? 다시 방송 시작해. 지금부터 내가 방송에 관여한다. 박 PD, 카메라를 손본다. 살며시 만석의 머리를 바닥에 편히 눕히는 채연. 아니꼽지만 참는 이실장. 채연, 카메라 앞에 선다. 차분하게 묶은 머리를 풀어헤친다. 카메라가 작동되면 이실장, 채연에게 인사 멘트하라고 사인 보낸다. 무시하고 음악에 맞춰 천천히 춤추는 채연. 이실장, 말하라고 계속 손짓해 댄다. 채연, 말없이 옷 벗는다. 잠든 것 같던 만석, 벌떡 일어나 채연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다가 소리 없이 서랍으로 간다. 장난감 총을 꺼내 드는 만석. 각자의 일에 몰두해 만석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 만 석:소, 손들어! 이실장:또 뭐야? 만 석:쏘, 쏜다.이실장:저거 미친놈 아니야? 장난감 총 들고 설치면, 어쩔 건데? 박 PD:그만해. 만석아. 만 석:모두 카메라 앞에 서. 이실장:장난 하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그래, 오랜만에 우리 빙신 춤 한 번 춰 보자. 엉. 이실장이 만석에게 다가가려 하자, 급하게 이실장을 안다시피 카메라 앞에 세우는 채연. 천천히 춤추며 이실장의 온몸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채 연:(귀에 대고) 속삭이는 컨셉이야. 저 총, 소품으로 쓰라며? 이실장:그래? 은근슬쩍 채연에게 몸을 밀착시키는 이실장, 기묘한 성적인 쾌감을 느낀다. 점점 더 노골적으로 채연의 몸을 더듬기 시작하는 이실장. 이제는 방송이라는 자각보다는 본능에 따르고 있다. 순간 모니터에 여러 개의 자막이 빠르게 떠오른다. 야 수:와- 새롭다!! 새로운 장르? 에로다큐? (두 눈 튀어나오는 이모티콘 떠 오른다.) 불 끈:앞서가는 삐리리! 오늘 방송 별 다섯 개! (별모양의 이모티콘이 주르르 떠오른다.) 터프게이: 에로 방송 대상 줘라~~ 무교동:리얼리티 짱이다! (엄지손가락 보이는 이모티콘 떠오른다.) 귀족:전국에 알려 회원수 늘려 주자!! 갑자기 쏟아지는 반응을 보고 입이 찢어져라 웃는 이실장. 이실장:와하하하. 이것 봐라? 반응이 이렇게 좋아? 박 PD:크, 클릭 수가 급증해요. 갑자기 폭주해서 접속이 안될 지경이에요. 이실장:그래 그래. 이 한 몸 바쳐서 한 밑천 땡겨 보자. 우히히. 좋았어. 아주 좋아. 클릭수. 만 석:(총구를 박 PD에게 겨누며) 카메라 앞에 서. 박 PD:너 정말 미쳤어? 이실장:들어와 새꺄. 대장이 벗는데 쫄병이 구경만 해? 울상이 되는 박 PD. 눈을 부라리는 이실장. 어쩔 수 없이 카메라 앞에 서는 박 PD. 스스로 옷을 벗는 이실장. 동물적인 본능과 자극에만 의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 PD 역시 처음엔 어색하게 움직이지만, 차츰 채연의 동작에 동화된다. 점점 행위에 몰입하는 사람들. 한 몸이 되어 뭔가에 홀린 듯 같은 동작을 한다. 만 석:나는 너희들을 저주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내게 행한 악은 너무 크고 내가 너희들한테 행한 악도 너무 커서 그것은 자발적인 것일 수 없다. (詩-이지도르 뒤카스) 자연스럽게 채연의 몸을 더듬는 이실장. 그 모습 바라보는 만석. 부들부들 떤다. 총까지 떨린다. 이실장을 겨냥하는 만석. 박PD, 장난감 총인지라 말리지 않고 피식 웃는다. 이실장:쏴. 쏘란 말이야 임마. 그래야 클릭수 늘어나지?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받쳐 잡는 만석. 침착성을 되찾는다. 만석, 다시 한번 이실장과 박PD, 채연을 차례로 바라본다. 아랑곳없이 채연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이실장. 순간, 분노로 경련을 일으키는 만석,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탕-’ 찢어지는 듯 한 파열음. 겨냥이 빗나가 풀썩 힘없이 쓰러지는 박 PD. 시뻘건 피가 흥건히 번져 나온다. 놀라 만석을 바라보는 채연과 이실장. 만석, 총을 한 번 쳐다본다. 넋이 나가 풀썩 주저앉는 채연. 이실장, 갑자기 무릎꿇고 애걸복걸 빌기 시작한다. 비굴하기 짝이 없다. 이실장:저, 정선생, 아, 아니, 정작가님, 훌륭하신 작가 분이 이러시면 안되죠? 예? 진정하세요. 예술을 하신다는 분이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예? 잘못했어 요. 사,살려줘요, 응? 내가, 내가 다 사과할게. 응? 만 석:너희는 너희들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걸었으되 그 두 길은 모두 유사하 고 모두 삐뚤어진 길이었다. (詩- 이지도르 뒤카스) 무표정한 얼굴로 이실장을 바라보는 만석, 악마적인 미소 날린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만석의 얼굴에 피 흩뿌리며 쓰러지는 이실장.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만석을 쳐다보는 채연, 벌벌 떨고 있다. 총을 떨어뜨리는 만석. 털썩 주저앉는다. 아련하게 경찰 사이렌 소리 들려 온다. 채연, 놀라서 만석의 팔을 잡아끈다. 움직이지 않는 만석. 채 연:어, 어쩌지? 만 석:쉬고 싶다…. 채 연:무서워…도망치자. 응? 도망치자. 만 석:니 옆에서…잠들고 싶어 … 채 연:나, 난 아니야. 대 스타가 되는 게 꿈이야. 도망쳐야 돼! 만 석 ; 진아야…. 채 연:옆에 있어 줄게. 일어나. 만 석:(두 눈 감는다.) 채 연 ; 이대로 끝낼 수 없어! 긴박하게 경찰 사이렌 소리 들려 온다. 불안감에 싸여 도망 갈 곳을 찾아 무대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채연. 두껍게 덮여있는 창문 앞에 선다. 와락 커튼을 젖히는 채연, 힘들게 창문을 연다. 밖을 내려다보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채 연:(주저앉으며) 토할 거 같아. 노, 높다. 주, 죽으면 어쩌지? 만 석:(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같이 가 진아야. 채 연:주, 죽는 게 나을까? 아, 아니 잡히는 게? 만 석:이제는 안 놓친다. 점점 더 가깝게 들려 오는 사이렌 소리에 동요하는 채연. 채 연:여기서 끝내는 건 너무 억울해. 도망 쳐야 돼. 만 석:너만 있으면 된다. 사색이 되어 출입문을 바라보는 채연. 경찰들의 발자국 소리 들려 온다. 점점 울상이 되는 채연, 만석과 함께 창틀에 올라선다. 망설이던 채연, 만석을 의지하며 꼬옥 끌어 안는다. 다시 한번 절망스럽게 문을 바라보는 채연. 문 앞까지 경찰들의 발자국 소리 들린다. 뒤이어 들려 오는 확성기 목소리. 두 눈 질끈 감는 채연. 경관 목소리:너희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순순히 자수해라. 셋을 세고 들어간다. 하 나, 두울, 세엣- 크게 문 부서지는 소음과 동시에 비명 지르며 뛰어 내리는 채연과 만석.“아악”하는 두사람의 비명이 찢어지듯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암전. 어두운 무대에 음악 흐른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뉴스. 소 리:다음 뉴스. 오늘 새벽 인터넷 방송국 내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 당시 비디오 자키로 촬영 중이던 나모 여인과 가해자 정모씨는 1층에서 도주하려다 추락, 병원에 이송됐으나 나모 여인은 혼수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모씨는 현재 약국에서 아스피린을 받아먹고 안정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각 정부 부처의 반응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문광부와 내무부는 서로 조사권을 주장, 부서간에 큰 충돌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여성부에서도 관심을 표명하는 가운데…. 음악 흐르면서 막. ◆당선소감 이제 겨우 조그마한 목소리로 소리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저기요… 저 아직 죽지 않고 글써요….”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 속에서 꿈결처럼 당선 소식을 들었다.믿어지지 않아 텅 빈 머리로 조금 더 누워서 빈둥거렸다. 남들이 열 개를 가질 때 다섯 개를 가지면 만족한 것이 나라는 사람이었다.하지만,그 다섯 개를 가지지 못하면 미쳐 버리는 것 또한 나라는 사람의 습성이었다.글이라는 것이…,내게는 그 다섯 개였고 전부였다.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 했던가? 책임감처럼 전화질을 해댔다.그러고는 곧 또다른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앞으로 단명하지 말고 더욱더 좋은 글을 쓰라는 달콤한 채찍질이구나….더 많이 공부하고,겸손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하는 거구나….그 사실에 눈물 나도록 감사했다. 졸업하고 한번도 찾아뵙지 못한 오교수님,깊이깊이 고개숙여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정말 감사합니다.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보아주신 큰아버님과 큰어머님,고맙습니다.당선 소식에 너무나 좋아한 윤환 오빠와 새언니,성희언니와 형부에게도 이 기쁨을 전합니다.선배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어 준 박수진 선배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애정을 가지고 지켜 봐준 성예 경희 나연 미현 현철 정석 우석 석윤 재중 남헌이…,모두에게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변혜령 ●약력 71년 서울생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우승컵 양보없다” ◆심사평 모더니즘의 기수였던 T S 엘리어트나 제임스 조이스는 모두 극을 최고의 예술장르로 여겼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쓴 희곡들은 시나 소설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한정된 시공간에서 살아있는 배우가 압축된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 희곡은 무엇보다 입체적인 연극적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문학지망생들에게 희곡은 그만큼 긴 시간의 수련이 필요한 장르다.이번 희곡 응모작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재가 다양해졌다는 점이다.분단문제나 문명비판,지하철 노숙자나 재개발 문제를 둘러싼 사회문제와 가족관계 등을 골고루 다뤘다.식지 않은 월드컵의 열기도 느껴진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진부한 시각과 관념적인 글쓰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많은 경우 서술적인 전개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최종심의에 오른 작품은 ‘나난 가노란 말도 못다 고’와 ‘장난감 총’이다. ‘나난…’은 남편의 오랜 병수발을 한 아내가 남편이 잠시 숨을 멈추자 불효한 아들에 대한 분노로 먼저 세상을뜬다는 내용의 작품이다.상황 설정이 기발하고 반전의 묘미를 준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장난감 총’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이의가 없었다.성인 인터넷 방송국을 무대로 성과 양심이 매매되는 우리 사회의 비극적 단면을 드러낸 작가의식이 결코 가볍지 않다.다채로운 무대활용 기법,동시대적 언어감각,시종 극적 긴장을 이어가는 탄탄한 구성력이 자칫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는 희곡에 연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오래도록 우리 무대를 지키는 작가로 남길 바란다. 오태석 김미희
  • 올 가장 ‘썩은 정치인’ 클린턴부부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남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미국 공직자 부패 감시기구인 ‘사법감시’(Judicial Watch)가 뽑은 ‘부패12인’(Dirty Dozen)의 선두를 나란히 차지했다. 보수적 시민단체인 ‘사법감시’는 클린턴 의원을 “반지를 찾기 위해 악의 세계로 자꾸만 내려오는 현대판 ‘골럼’(소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탐욕스러운 도깨비)”으로,클린턴 전 대통령을 “‘천박한 8년’ 동안 섹스와 거짓말,범죄 연루로 백악관을 가득 채운 인물”로 묘사하면서 각각 1,2위에 선정했다. 힐러리는 “화이트워터 사건에서 연방수사국(FBI) 파일게이트,트래블게이트,200만달러의 불법 선거자금 모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악(惡)에 연루됐다.”는 평을 받았다. ‘사법감시’는 공화당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2001년 스캔들로 사임한 루이스 프리 전 FBI국장은 “FBI 사상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국장”으로,찰스 로소티 전 국세청(IRS) 청장은 IRS를 “리처드닉슨조차 자랑스러워 할 정치무기”로 사용한 인물로 평가됐다.
  • [마 당] 대선과 문화사이

    이제 종반전으로 치닫고 있는 대선 상황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이번 대선은 대규모 유세전으로 서로의 세를 과시하던 과거보다는 조용하지만,두 당이 역전과 역전을 거듭해 2강으로 압축된 지금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면서 물 밑으로 그 치열함이 점차 더해가고 있다. 나 역시 오늘 아침도 여러 일간신문과 인터넷에 나타난 대선의 양상을 훑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아마도 새 지도자를 뽑는 대선에 높은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나름의 기대와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장기 군사독재와 쿠데타로 이어지는 어두운 시절을 거쳐 지난 10년간 문민정부와 국민정부를 차례로 경험했다.이제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민주화와 경제번영을 이루었지만 아직도 과거의 잔재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역분열과 정경유착,사회비리와 부정부패,입시지옥 등 지금 우리 사회가당면한 모든 사회문제들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그늘을 만들고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21세기 첫 정권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러한 낡은 시대의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우리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는 정권일 것이다. 지금 각 당에서는 많은 정책들이 앞다투어 제시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속에서 새로운 우리 사회의 미래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각 당이 모두 나름의 경제성장의 목표수치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과연 우리 사회가 어떠한 사회를 지향해 가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당면한 현상적인 문제의 해결책에만 매달려 보다 근본적인 문제 인식이 담긴 구체적인 미래의 비전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나라다운 나라”“새로운 대한민국”이란 구호가 아직도 공허하게만 들려온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미래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가 돼야 하고 이러한사회의 건설을 위해 지금 무엇을 개혁하고 준비해 갈 것인지 구체적인 정책제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성장을 위해,민주화를 위해 많은 대가를 치렀고 그 결과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하지만 경제성장과 민주화는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토대이며 수단일 뿐이다. 경제성장과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우리 사회는 이제 보다 근본적인 지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고 흔들리고 있다. 과외의 중압에 못이긴 초등학생들이 줄이어 자살을 기도하고 청소년들은 최소한 사회적 책임조차 망각한 텔레비전의 천박한 문화에 중독돼 가고 있다. 이것은 독재시대의 폭정보다도 더욱 무서운 우리 사회의 질병이다.나는 이러한 질병들은 보다 수준 높은 문화의 힘으로만이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이 선거를 지켜보면서 해방 후 김구 선생께서 생각하신 우리 사회의비전을 다시금 떠올린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나아가 남에게 행복을주기 때문이다.” 윤광진 연출가·용인대 교수
  • 책꽂이/폭력의 고고학 外

    ●폭력의 고고학(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변지현 등 옮김,울력 펴냄)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저자(프랑스 인류학자)가 쓴 원시사회에 관한 글모음.그는 원시사회를 ‘국가의 성립을 항구적으로 거부하는 사회’로 본다.미개사회로서 계몽의 대상도 아니고,전 자본주의 사회로서 생산력의 발전이 이뤄져야 하는 사회도아니라는 것이다.1만5000원. ●전시의 담론(윤난지 엮음,눈빛 펴냄) 오늘날 미술관은 ‘미술관’이라는하나의 용어 아래 수렴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면모를 지닌다.전통적인 미술관 개념에서 벗어난 미술관들이 적지 않다.새로운,또는 여러 겹의 아이덴티티를 지닌 미술관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이 책은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미술관의 전시에 관한 담론을 펼친다.‘제시의 정치학:뉴욕 현대미술관’‘포스트모더니즘의 벽 없는 미술관’‘접촉지대(contact zone)로서의 박물관’ 등이 주요 내용이다.1만 6000원. ●이슬람사전(김정위 지음,학문사 펴냄) 이슬람교는 불교나 그리스도교와는체제가 전혀 다르다.그것은 종교,공동체,문화가 입체적으로 결합된 삼위일체의 종교다.1400년의 역사를 지닌 이슬람의 추종자는 세계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명 꼴.그 수가 13억에 이르며 무슬림국가는 60개국에 육박한다.이 사전에는 이슬람 관련 용어가 빠짐없이 실려 있어 이슬람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돕는다.8만원. ●선과 악(안네마리 피퍼 지음,이재황 옮김,이끌리오 펴냄) 인간이 무리를이뤄 살기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제기돼온 선과 악의 문제를 자연과학적·사화학적·철학적 관점에서 고찰.고대와 근대의 유토피아론(플라톤,토머스 모어,캄파넬라,베이컨),현대의 반유토피아소설(자마틴,헉슬리,스키너) 등에 대한 분석도 담겼다.1만원. ●우리 어디에 서 있어도(이대동창문인회 엮음,이대출판부 펴냄) 전숙희·조경희·나영균·정연희·천양희·함정임 등 이대출신 문인 78인의 학창시절이야기.9000원. ●삼신할미,음양의 파도를 넘어(강명자·황보임 지음,선 펴냄) 여성불임 한방 전문의인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심각한 역경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저자의 성공적 삶의 요인이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파온 성실성임을 보여 준다.‘삼신할미’는 여성 한의학 박사1호인 저자의 별명.1만원. ●역사 속의 한국불교(이이화 지음,역사비평사 펴냄) 한국불교의 역사를 사회사적으로 조망.한국불교사 관련 책들이 대부분 사상사 중심인 것과 달리,불교가 이 땅에서 지나쳐온 역사의 실체를 파헤치는 데 역점을 뒀다.불교는4세기 후반 전래된 이래 그 본래의 가르침보다는 지나치게 세속의 길을 걸어 시대정신을 외면하거나 천박한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중세유럽 기독교의 도그마와 타락이 이 땅의 불교에서도 연출된 것이다.이 책은 한국불교의 지난날을 냉정하게 돌이켜보게 한다.1만 6000원. ●검은 고라니는 말한다(J.G 니이하트 지음,김정환 옮김,두레 펴냄) 미국의시인인 저자가 인디언 예언자 ‘검은 고라니’와 인터뷰를 한 뒤에 쓴 인디언 최후의 항쟁기록.‘검은 고라니’는 인디언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오그랄라수우족’의 예언자 겸 주술사.그는 생애를 되돌아 보며 인디언의 훌륭한 문화와꿈이 백인들에 의해 어떻게 처참히 무너져버렸는지 이야기한다.1만2800원. ●피부야 피부야(차미경 등 지음,삼성출판사 펴냄) 전문가들이 쓴 깨끗한 피부만들기 비법.눈가나 입술 등 빠뜨리기 쉬운 피부의 사각지대에 대한 관리요령도 담겼다.9500원
  • [열린세상] 386세대와 정치문화

    끝없이 지속되는 것 같던 3김의 시대도 이제는 저물고 있다.여전히 한국 정치의 전면에는 두 거목이 남아 있지만,이들도 한 해를 지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3김 시대의 이같은 종언은 새로운 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치에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몇 가지 의미 있는 세대의 부침이 있었다.역사적 사건과 시대의 흐름은 4·19,6·3,유신,산업화,민주화 등의 이름을 그 시대의 주인공들에게 붙였고,많은 정치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호명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세대의 뒤바뀜을 인물의 부침 이상의 의미 있는 역사적 계기로 전환시키지 못했다.과거의 엘리트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엘리트들이 등장할 때마다 시대의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고,문화적 의미가 축적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행동과 사고는 과거나 지금이나 전혀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세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너무나 쉽게 ‘원칙’을 포기하기 때문인것 같다.당장 정치적 생명이 유지되고,온갖 ‘지위’와 ‘특권’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손도 잡을 수 있다는 천박한 생존의 논리만이 대다수 정치인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인물이 바뀐다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 진보를 스스로 이끌어 왔다고 자부하는 민주화 운동세대들 또한 이러한 정글의 생존 논리로부터 크게 자유로운 것 같지는 않다.대선을 앞두고 진행되는 새로운 정치의 판 짜기는 386세대의 정치인들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그러나,3김 시대의 정치와큰 차이 없이 진행되는 패거리 만들기 게임에서 이른바 386세대의 리더임을 자부해 온 일부 정치인들조차 벌써부터 옮겨 탈 배를 찾아 방황하고 있다.이들이 헤어지고 다시 모이는 모습을 보면,원칙을 지키는 공인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가 386세대의 움직임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들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민주화를 외치고,독재에 대항하면서 저항의 문화를 이 땅에 일구어 왔고,이제는 사회의 곳곳에 스며들어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열어가야 할 책임을 지닌 기둥으로 성장한 세대이기 때문에 이들이 지닌 정신적 자산과 능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386세대의 자기 균열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민주화와 사회 진보를 외치며 사회에 진출한 민주화 세대의 수많은 인물들은 여전히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이 시대의 변화를 앞서서 선도하는 개척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그리고 이들이 지켜 온 이상은 우리 정신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다른한 편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동시대의 엘리트들이 이미 그들의 성공에 안주한 채 명품소비에 몰두하면서,자녀들에게 외국 시민권을 선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골프나 즐기면서 그들이 그토록 질타하던 지배층,중산층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편입되고 있다. 이들은 사회의 지위 서열에서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중산층으로 남아있기 위해,그리고 그들의 지위를 자식들에게 이어주기 위해 광적인 지위 획득 경쟁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세대와 구분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원칙과 소신을 분명히 하면서 새로운 정치 문화를 주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새로운 문화와 정신의 주체임을 자부해 온 386의 민주화 세대,한국 정치에서 주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 과거의 정치 세대들과 큰 차이 없는 구태의연하고 원칙 없는 기득권 층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만큼 우리를 슬픔과 실망에 빠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21세기의 한국 정치는 또 한 차례 세대의 실험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 사회학
  • [386세대가 본 W세대] ‘네 멋대로’ 式 20대의 사랑

    서울 마포노인복지회관 앞 버스 정류장에는 20대가 모여 들어 풍선을 달고 메모도 남긴다.얼마 전 몰아친 비바람 탓에 그 많던 메모가 사라졌건만 그들은 끊임없이 작업하기를 멈추지 않는다.그들은 얼마 전 종영한 TV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팬클럽 회원들이다.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현장을 그들은 뜻 깊은 장소로 만들어 가고 있다.이처럼 신세대의 ‘드라마 기억하기’는 직접적이고 행동적이다. ‘네 멋대로 해라’(이하 네 멋)는 최근 10∼20대에게 널리 인기를 끄는 일본만화 ‘꽃보다 남자’(이하 꽃보다),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이하 엽기)와 마찬가지로 신세대의 실상을 보여주지만,상반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명징하게 신세대의 문화와 사랑을 표현했지만,서로 다른 각도를 보여준다. ‘꽃보다’는 현대형 ‘신데델라 콤플렉스’다.다만 순종형 신데렐라 대신 감수성 예민한 깡패형 신데렐라로 돌아갔다고나 할까.상류사회의 자식들이 가는 엘리트 고교에,계급상승의 꿈에 불타는 천박한 부모를 가진 서민 여학생이 입학하면서 생기는 사랑의 에피소드를 담았다.부자 학생의,가난하지만 당당한 연인.연재 중이지만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이 예상된다. ‘엽기’의 그녀는 무늬만 현대적이고 내용은 진부하다.차리리 엽기녀는 ‘꽃보다’보다 더 깡패 같다.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과거에,옛 사랑에 머물러 있다.현실의 돌출적인 행동은 옛 사랑을 잊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그녀는 현재를 사랑하지 않으며,새로운 사랑을 향해 쉽게 달려가지도 못한다.결말이 해피엔딩인 건 어째 어설프다.이것이 오늘날 20대가 가진 속성일 수도 있으나,미래지향형 진실보다는 속절없는 꿈과 낭만적 향수에 가깝다. 이들의 반대편에 ‘네 멋’이 있다.세 사람의 주인공은 각자 현실에 찌들려 살지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보여준다.그들은 자기 안에서 제대로 꿈꾸고 성장한다.부자이지만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엄마를 가진 경,가난에 찌들었지만 스스로 살아가는 고아 미래,그리고 소매치기 출신으로 불치병에 걸린 복수.경은 집보다 자신의 사랑과 일을 더욱 중시한다.미래는 스스로 성공하기를 바라고,떠나버린 사람의 새 사랑을 인정해 준다.콤플렉스 덩어리인 복수는 사랑·일·가족에서 모두 비극적인 상태에 있지만 그 비극을 해결해나간다.‘극적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세 사람은 ‘자신과 오늘’을 사랑한다. ‘네 멋’도 20대가 가진 하나의 현상이고 본질이다.사랑할 때 충실히 사랑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20대라면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네 멋’이 현재를 사는 20대의 이야기라면,‘꽃보다’와 ‘엽기’는 아무래도 만화 속의 주인공을 모방하는 코스프레 같다. 유민영 (모아이 커뮤니케이션기획실장)
  • ‘꽃을 든 남자’ 연출하는 연극계 샛별 김태웅/””콧수염에 반해 빠져든 연극재미와 깊이 함께 담을 겁니다””

    무대에 들꽃이 활짝 피었다.아름답지만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곳에 비석 하나 없는 작은 흙무덤이 있다.“죽어서 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한 남자를 통해 역설적으로 삶을 긍정하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연출가 김태웅(37).그가 연극 ‘꽃을 든 남자’를 선보인다.지난 97년 ‘파리들의 곡예’로 데뷔한 뒤,2000년 조선 연산군 시절의 궁중 광대를 다룬 두번째 연출작 ‘이’(爾)로 동아연극상·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등을 휩쓴 연극계의 샛별.이어 386세대의 고민과 비판의식을 담은 ‘풍선교향곡’과 ‘불티나’를 선보여 평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제목부터 말랑말랑한 게 좀 이상하다.무덤에 숨겨둔 10억원 상당의 금불상을 찾는 두 남자 덕이와 봉이의 이야기.추악한 욕망을 좇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천박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그보다는 자신의 무덤을 갖고자 거짓말을 하는 덕이에 초점을 맞추며 죽음과 언어에 관한 철학적인 사유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을 쓰기 전인 98년에 쓴 희곡입니다.왠지애착이 가서 이번에 무대에 올리게 됐어요.제목이요? 아,그건 상업적인 배려입니다.원래 제목은 꽃이름 ‘쑥부쟁이’였는데 주위에서 생뚱맞다고 하더라고요.” 이 작품에 애정을 갖는 이유는 어린 시절을 지배한 ‘죽음’에 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담았기 때문.초등학교 시절 집 뒷산이 공동묘지였다.상여와 마주치고,장사를 지낸 다음 마당에 떨어지는 재를 보며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처음엔 종교로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집안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신자예요.저도 목사가 되려고 했고요.” 하지만 그도 80년대의 거대한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서울대 철학과 입학후 유물론 세례를 받고 종교를 점차 멀리했다.그리고 택한 것이 연극.집에서는 난리가 났다.목사의 꿈을 포기한 데다,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돈 안되는 연극판에 뛰어들다니…. “콧수염을 기른 연극반 후배의 모습에서 신비감이 느껴졌어요.도대체 뭐가 저런 느낌을 만드는지 궁금해 그 다음날로 연극반에 찾아갔죠.” 그날 이후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은 ‘어울리지 않게’ 예술에빠져들었다.취미로 끝날 수도 있었다.졸업반 때는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똑같이 영어단어를 외우는 모습이 싫었어요.고시 공부하듯 연극을 하면 뭐라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연출가 김광림(현 연극원장)을 만난 건 운명이었다.대학생 연극경연대회에서 입상한 그에게 “너 연극 계속해라.”라고 한 심사위원 김광림의 말이 족쇄가 됐다.그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로 예술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예술과 연극에서 발견한 것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웃음과 구라’.‘웃음’은 살아서 숨쉬고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의 희열을 되살려줬다.그는 이 웃음을 사회 비판과 결합해 풍자를 만들었다.또 기본적으로 ‘구라를 까먹고’사는 사람이 됐다.말하는 순간 거짓말이 돼 버리지만 그 언어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힘을 발견한 것.‘꽃을…’는 그 웃음과 거짓말로 죽음을 극복한자전적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이제 그는 연극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됐지만 여전히 가난하다.“동료 연극인이 동창회에 나갔더니 ‘넌 잘 될 줄 알았는데….’라고 했대요.저도 고교시절 땐 ‘범생이’여서 동창들이 지금 제 모습에 놀라죠.그럴 때마다 오기가 생겨요.” 그는 제대로 작품활동을 하고 싶어 극단 우인을 창단했다.‘꽃을…’는 창단 작품이기도 하다.목표는 천박한 상업주의를 배척하고 작가주의 예술을 추구하자는 것.연극이든 영화든 구분 없이 신명나게 진짜 예술을 해보고 싶단다.베이스기타에 매료된 남자에 관한 시나리오도 구상중이다. 그렇다고 상업적인 예술을 다 싫어하는 건 아니다.그의 작품도 참 ‘웃긴다’.“저도 재미있는 건 좋아해요.하지만 요즘 공연계는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의 균형을 잃었죠.셰익스피어처럼 재미와 깊이가 동시에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너무 일찍 ‘떠서’ 부담스럽다는 그는,남은 건 후퇴뿐이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든단다.하지만 그에겐 언제나 창작욕구가 넘친다.계획중인 작품만 4편.앞으로의 작품에 관해 술술 아이디어 보따리를 풀어내는 모습에서,그는 이제 막 긴 경주의 첫발을 뗐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3∼5일 오후 7시30분,6·7일 오후 4시30분·7시30분,8일 오후 3시·6시.학전블루 소극장.(02)764-8760. 김소연기자 purple@
  • [열린세상] 역사의 무게 느끼는 정치를

    월악산의 미륵사지 석불은 참으로 신비로운 불상이다.그윽한 산기슭을 휘돌아 미륵사지에 이르면 대형 석불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어,저 부처님 얼굴을 새로 해 넣었는가.”할 만큼 깨끗한 부처님 얼굴이 도드라져 보인다.신비롭게도 몸 부분은 1000년의 세월이 주는 고색(古色)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얼굴만 씻은 듯 말끔한 것이다.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때가 벗겨져 왔다는데 놀랄 수밖에 없다.이 부처님 얼굴이 맑아질수록 국운이 융성한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신화는 사실과 접목될 때 사람들을 더 고무시킨다.현재 한국은 제2의 국운융성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낙후된 저발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선 것이 제1의 국운 융성기였다면,중진국에서 선진국 진입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이 제2의 국운 융성기 초입이다.실제로 세계 현대사에서 저발전국이 선진국이 된 예는 싱가포르와 같은 작은 도시 국가 말고는 없다.그만큼 선진국 진입 장벽은 두텁다.그 장벽을 과연 한국은 어떻게 뚫을 것인가? 마침 우리가 가진 여건은 상당히 좋다.중진국 가운데 한국처럼 탄탄한 산업구조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반도체 산업과 정보통신산업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랐고,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 등 경쟁력 있는 중후장대형 산업을 우리만큼 두루 갖춘 나라도 찾기 힘들다.비록 땅 속의 자원은 별로 없지만 국민의 교육열과 대학진학률,인터넷 사용률이 세계 최고인 ‘순발력 있는 열혈 국민’을 가진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IMF 위기라는 ‘보약’(?)을 먹으면서 기업도 견실해졌고,사회 각 부문의 신뢰도나 위기 관리 능력도 제고되었다.유수한 신용평가기관들이 모두 A를 줄 만큼 이른바 한국의 펀더멘털은 어느 때보다 튼튼해진 것이 사실이다.이런 긍정적 에너지를 잘만 발양시키면 40년 전국민소득 100달러에서 출발한 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도 ‘이미 진행된 미래’일 수 있다. 이 미래를 선취하는 과업을 누가 이끌 것인가? 정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아무리 각 분야의 능력과 잠재력이 뛰어나도 이를 시너지로 승화시키는 것은 정치의 몫인 것이다.여기서 정치는 ‘권력 정치’로 환원될 수 없다.그것은 변화를 한 발 앞서 이끌어 가는 주도력,복합적인 문제와 갈등을 조정하는 관리 기술,국민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제도적 행위들을 포괄하는 것이다.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국민이 부여한權(권력)을 잘 활용하여 經(치세)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이 권경(權經)조화의 중심 무대가 바로 정치의 장인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눈에는 한국 정치가 이런 희망의 장소로 비쳐지지 않는다.줄기장창 정쟁만 일삼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정치의 품격과 위엄이 사라진 공간은 천박한 비방과 협박의 언어들로 메워진다.이런 식으로 가다간 ‘한국호’의 뱃머리가 선진국 진입의 항로를 벗어나 암초에 걸리는 것이 아닐지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지금이야말로 정치인 모두가 ‘역사의 무게’를 느껴야 할 때이고,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의 사명을 생각할 때가 아닌가 싶다.하물며 대선 후보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트루먼은 전후 미국의 장래에 대해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어깨에 얹혀진 역사의 엄중함을 토로했다.우리의 대선 후보들도 권력의 유혹 이전에 대통령이 이 시점에서 얼마나 책임이 무거운 자리인가를 통감했으면 한다.“저 사람이 대통령 자리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개척할 소명의식을 갖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그것이 국민과 정서적 일체감을 형성하여 사회통합을 이루는 첫 발이 될 것이다.그러려면 우선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과 같은 극한 대립의 정치(polar politics)로부터 빗겨나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와 성찰의 모습을 먼저 보였으면 한다.그것이 미륵사지 부처님의 국운 융성 신화를 정치가 저버리지 않는 길이리라. 박형준 동아대 교수 사회학
  • [사설] 천연기념물도 못지키는 나라

    경북 울진에서 올무에 걸려 죽은 산양은 우리 사회의 부박(浮薄)함과 정부의 환경의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산양은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멸종위기종이다.그런 위기종이 지난 2000년 이후에만 백두대간 삼척∼울진 지역에서 이미 네번이나 사체로 발견됐는데도,그동안 정부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서식 실태조사나 아무런 보호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그 무신경이 놀랍다. 지난달 지리산에서 발견된 천연기념물 제329호 반달가슴곰의 예에서도 멸종위기의 희귀동물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가 드러난다.지난해 9월 방사된 네 마리중 하나인 ‘반순이’의 전파발신기는 절단기로 잘린 채 사체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밀렵꾼에 의한 도살인 것이다.멸종된 종(種)은 영원히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없다.때문에 이를 밀렵하는 것은 반인류적 범죄행위다.사회는 이를 조장하고,정부는 말리는 시늉만 하고 있다. 밀렵이 활개를 치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한 조사에 따르면,희귀동물만을 표적하는 전문·비전문 밀렵꾼의 수가 2만여명에 이르고,연간 거래액이 2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정력에 좋다는 이유로,혹은 표본전시해 두려는 상류층의 천박한 욕구들이 민족과 인류의 자산을 멸종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환경부의 밀렵감시 예산은 5억원 수준이라고 한다.인적이 없는 오지에 서식하기 마련인 희귀동물들을 이런 수준의 예산으로 보호하기란 애당초 어렵다.정부의 정책을 숫자로 표시한 것이 예산인 만큼 천연기념물은 물론 야생동물 전체에 대한 정부의 정책의지가 5억원밖에 안되는 셈이다.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이미 따오기·황새·크낙새·사향노루 등을 기억 속에만 간직하게 됐다.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멸종위기종에 대한 사회와 정부의 각성이 필요하다.
  • [2002 길섶에서] 고독과 죽음

    시인 조병화는 인간이 풀 수 없는 두 가지 고민은,살아있는 동안의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했다.그의 시작(詩作)도 이같은 고민을 시어로 담아내려는 몸부림이었다. 팔순의 김춘수 시인은 몇년 전 자전소설 ‘꽃과 여우’에 머지않아 닥칠 죽음에 대한 바람을 담았다.일제때 친구들에 이끌려 종삼(종로3가 옛 사창가)을 찾았을 때의 어색함과 그 곳을 나설 때의 편안함,그리고 성적 쾌감 때문이 아니라,뭔가 두려웠던 현상을 깬 데 대한 ‘안도감’등등….일본 유학시절 노동자 합숙소에서의 하룻밤도 그랬다.땟국 절은 이불로 움츠리며 들어갔을 때의 불안함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달콤했던 숙면의 기억.60여년 전 일들이 어제 일처럼 다가온다고 했다.이제 죽음도 그렇게 맞았으면 좋겠단다. 우리는 무얼 고민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걸까.거창하게 고독,죽음은 아니더라도 주위를 성찰하는 여유만이라도 가질 수는 없는 걸까.자기 보신에만 익숙한 군상들에서,천박한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럽다. 최태환 논설위원
  • 精文硏 오늘부터 1회 세계한국학대회 개최, 한국학 지평 넓히기 집중 모색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주요 한국학 연구기관 및 단체들이 참가하는 ‘제1회 세계한국학·조선학·코리아학 대회’가 17일부터 20일까지 성남시 분당에 있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20세기 한국학의 성과를 점검하고 21세기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는 자리.국내외 다수 연구단체가 공동 주최하는 최초의 한국학 국제학술대회로,규모에 있어서도 역대 한국학 관련 학술대회중 최대다.23개국에서 140여명의 한국학 전공자들이 참여해 주제발표를 한다. 정문연·국제고려학회·유럽한국학회·오스트랄아시아한국학회가 공동주최하는 이 대회의 주제는 ‘타자에 대한 포용-한국인과 외국문화의 대화’.세계 각지에서 300여명이 넘는 연구자들이 논문 발표를 신청해 이 가운데 144명에게 130개 주제발표 기회를 제공했다. 발표자 중에는 에드워드 슐츠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소장을 비롯해 저명한 학자도 포함돼 있으나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학 전문가들에게 발표기회가 많이 돌아갔다. 지정 패널은 △언어 △역사 △문학△사상·종교 △예술·민속 △사회·문화 △정치·경제 △교육 △북한 등 9가지로 나눴다. 17일 등록 및 리셉션에 이어 18일 베르너 사세 유럽한국학회 회장과 정해창정문연 대학원장이 기조강연에 나선다. 사세 회장은 ‘한국학의 지평확대-내적 시각에서 세계문화적 시각으로’란 주제발표를 통해 “과거 한국학이 한국문화를 외부 문화와 비교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면,현재 한국학은 한국문화와 외부문화의 상호작용에,미래의 한국학은 세계문화의 한 예(例)로서의 한국문화에 포커스를 맞추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정 대학원장은 ‘현대에 있어서 상호성과 세계화-자아와 타자 사이에서’란 주제 강연에서 한국학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일원주의와 다원주의 양쪽 모두 편협한 국수주의 또는 천박한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러한 오판의 가능성을 경계하면서도 대세인 세계화 흐름에 맞설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그는“세계화는 지역·인종·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며“‘이성’,곧 학자들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패널별 발표에서 프랑스 리옹3대학 이진명 교수는 프랑스의 척박한 한국학연구의 현주소를 알린다. 이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한국학 연구 교수나 연구원 수는 일본학이나 중국학의 10분의1에 불과하다.게다가 한국어 교육도 이들 두 나라는 물론 아랍어 히브리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등에도 크게 못미친다.2002월드컵 이후 한국학을 배우는 학생 수가 약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지만,일시적 현상일 뿐이다.이 교수는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지만 이게 곧 한국학 연구자 증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며 “장기적으로 세계문화 속에서 영향력을 증대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조금씩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정문연측은 당초 이번 대회에 앞서 북한측 인사들을 초청하려고 북한을 방문,사회과학연구원 관계자들과 협의했으나 ‘서해교전’이 터진 뒤 북측으로부터 답신이 없는 상태다. 장을병 정문연 원장은 “5년마다 세계 한국학대회를 열 계획이지만 북한측이 개최를 원한다면 내년이라도 제2회 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월드컵/심판이 한국편이라고?

    ‘이탈리아, 그것 참 시원한 일이군.’ 해외 축구사이트 사커리지닷컴(www.soccerage.com)의 객원 해설위원 그레그 다인하르트는 19일 이탈리아 축구가 한국과 16강전에서 사상 최악의 거친 경기를 연출했다며 이 나라의 축구가 ‘태도’를 바로잡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토마토를 던져야 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인하르트는 이탈리아가 ‘카테나치오(빗장수비)’란 미명아래 한 골만 넣으면 지킬 수 있다는 데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며 ‘아주리 군단’은 점수를 지키기 위해 셔츠를 잡아당기고 엄살을 피우며 쓰러지고,팔꿈치로 가격하는 등 ‘천박한 태클’을 사용하는 데 맛들여 있었다고 꼬집었다. 다인하르트는 그러나 축구팬들에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한국이 18일 새로운 형태의 압박 전술로 이탈리아를 격퇴시킴으로써 과거처럼 부정적이고 불평이나 늘어놓는 스타일로는 더이상 세계 축구계에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탈리아에 각인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각국의 언론들이 이탈리아의 패배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승리에 맞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충격의 1-2 역전패를 당한 뒤 조반니 트라파토니 이탈리아 감독은 “한국은 몇차례 이득을 보았다.우리가 왜 이런 고약한 결정에 희생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승자는 우리였어야 했다.”고 흥분해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 8일 크로아티아 전과 13일 멕시코 전에서 4골의 무효 판정과 최소한 3개 이상의 오프사이드 오심 때문에 경기를 망쳤다며 화가 잔뜩 나있었다고는 하지만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황당한 얘기도 있었다. 일부 협회 관계자들이 한국팀 관계자에게 “도대체 심판을 어떻게 매수했느냐.”며 “포르투갈 전때도 은퇴를 앞둔 심판에게서 덕을 보더니 도대체 얼마나 줬느냐.제소하겠다.”는 등 폭언을 늘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CNN이 인터넷으로 긴급 설문조사한 결과(한국시간 오전 10시55분 현재)에 따르면 9만여 응답자 중 94%인 8만 7721명이 이탈리아의 주장에 공감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탈리아가 옳다고 본 이는 6%인 5552명에 그쳤다. 임병선기자 bsnim@
  • 역사소설 자리매김 논쟁 본격화

    ‘한국의 역사문학’에서 한국사는 무엇인가. 그동안 생산된 우리의 역사문학,그 중 역사소설이 ‘대중화보다 더 천박한 오락성의 산물’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역사를 이끄는 척후’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긍정적인 궁구(窮究)가 필요하다는 데서 논의는 출발해야 한다.최근 평론가 임헌영씨가 대산문화 6월호에 기고한 ‘한국문학의 역사 수용양식’을 통해 ‘역사소설의 역사성’문제를 짚어 본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소설은 1916년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된 ‘해왕성’에서 시작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그러나 해왕성은 ‘몽테 크리스토 백작’의 일본어판인 ‘암굴왕’을 이상협이 번안한 작품으로,조악한 상업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동양고전의 빼어난 전통을 왜곡시키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후 우리 역사소설은 1920년대 애국계몽기를 거치면서 ‘친일문학’이라는 강요된 주제를 벗어나는 유효한 피난처였는가 하면,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을 통해서는 ‘민족의식 고취’라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매개체가 되기도한다. 비록 ‘문학성이 뒤진다.’는 일부 평가를 받으면서도 암흑기에 주체적 역사의식을 저변에 깔고 맥을 이어온 역사소설은 근대 이후 이런 전통에서 일탈,오락성에 기운 작품이 양산되기에 이르렀다.임씨는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후 모든 근대 역사소설이 오락성과 대중성이란 전제 아래 씌어졌다.”고 지적한다.특히 예외없이 신문연재로 발표되는 역사소설이고 보면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신문이 추구하는 대중적 상업주의에 매일 수밖에 없었으며,이런 점에서는 예술·민중·상업성을 동시에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임꺽정’이나 ‘장길산’도 예외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역사소설로 볼 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민족의식이 박약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고 지적한다.‘도쿠가와 이에야스’등 국수적이기까지 한 역사소설과 외세항쟁 문학이 일본 중국에 범람하고 있으나 우리는 민족적 허무주의를 조장하는가 하면 조상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공판장’같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역사소설이 치열한 민족적 각성을 담아내지 못했다면 이는 역사학의 빈곤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임씨의 지적마따나 역사소설은 작가의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적 성과를 바닥에 깔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역사소설이 역사학을 추월하거나 견인한 사례도 없지 않다.임씨는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송기숙의 ‘녹두장군’,조정래의 ‘태백산맥’등은 역사학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작품이나 역사학을 초월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장길산의 경우 부마항쟁에 맞춰 난민들이 세곡창을 털게 했고,남민전사건때는 검계(劍契)와 살주계(殺主契)를 내세웠으며 광주민중항쟁 때는 관군이 구월산토벌에 나서도록 해 작가의 역사·시국관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주장했다. 또 이 작품속 곽말득은 해남 기독교농민회 정광훈 총무,마감동은 광주항쟁때의 윤상원,산진이는 시인 김남주를 투사시켜 역사를 문학으로 복원해 내기도 했다고 풀이했다. 이런 우리의 역사소설이 1990년대를 고비로 급속하게 퇴보하고 있다.흥미로 치장한상업주의가 민족적 역사관을 몰아내 제대로 된 역사소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어떤 이유도 역사소설이 민족사를 바로 수용하지 못한 데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면 지금,우리 역사소설의 죄는 무엇인가? 심재억기자 jes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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