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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로에 선 현대차 철탑농성

    기로에 선 현대차 철탑농성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가 송전 철탑 고공 농성을 풀고 내려올까?’ 13일 울산지방법원에 따르면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가 14일 만료되는 철탑 농성 자진 퇴거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간접 강제금 부과는 물론 강제 퇴거 조치에 나설 예정이다. 이에 비정규직 노조는 사내 하청 근로자 모두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풀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으로 맞서 마찰이 예상된다. 현대차 비정규직 출신 해고자 최병승씨와 천의봉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 17일 울산공장 명촌주차장 내 송전 철탑에 올라 89일째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울산지방법원은 지난해 12월 27일 한국전력이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와 송전 철탑 농성자 2명을 상대로 제기한 ‘퇴거 단행 및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과 현대차에서 제기한 ‘불법 집회 금지 및 업무 방해 등 가처분’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법원 집행관들은 지난 8일 송전 철탑 아래 불법 집회 현장에서 노조가 설치한 천막과 현수막 10개 정도를 뜯어냈다. 이날 법원은 비정규직 노조의 저항으로 30여분 만에 집행을 중단했지만 집행 착수를 통해 가처분 효력의 상실을 막았다. 김영호 울산지법 집행관은 “가처분 집행을 일단 착수했기 때문에 가처분 효력이 집행 완료시점까지 이어진다”며 “집행이 일시 중단됐지만 언제든 다시 강제 철거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또 고공 농성자 2명에 대해서도 14일까지 스스로 내려오도록 자진 퇴거(자진 농성 해제)를 명령했다. 농성자 2명이 자진 퇴거하지 않으면 15일부터 1인당 30만원씩 60만원의 간접 강제금을 부과하고 14일 이내(1월 28일까지) 강제 퇴거 조치할 방침이다. 반면 비정규직 노조는 고공 농성을 계속하면서 법원 집행관의 강제 철거에 맞설 예정이다. 이 때문에 강제 퇴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노조 측은 법원의 명령 불이행에 따른 여론 악화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비정규직 노조 측은 “법원이 가처분을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집행까지 하는 것은 현대차의 불법 파견을 외면하고 현대차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노사 합의점 도출 등 구체적인 성과가 나올 때까지 노조는 고공 농성을 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강제 퇴거보다는 농성자들이 내려올 수 있도록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사설] 쌍용차 이제 경영정상화에 노사 머리 맞대라

    쌍용자동차 노사가 그제 무급휴직자 455명 전원을 복직시키기로 합의한 것은 늦은 감은 있지만 기나긴 노사 협상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아무쪼록 이번 합의를 계기로 3년 넘게 끌어온 쌍용차 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새로운 도약의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무급휴직자 전원 복직 합의를 환영하면서도 정리해고자와 희망퇴직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반쪽 조치’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당초 새누리당이 약속한 ‘대선 직후 국정조사’를 무산시키기 위한 ‘꼼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실제로 정리해고자 159명과 희망퇴직자 1904명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해고 노동자들은 지금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천막을 치고, 평택공장에선 철탑 위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23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스트레스성 질환과 자살로 세상을 등졌고, 지난 8일에도 조합원 류모씨가 평택공장 생산라인에서 자살을 시도해 중태에 빠졌다. 쌍용차 사태는 이미 단순한 개별 기업의 노사문제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통합을 가로막는 갈등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이번 노사 합의로 갈등 해소의 단초는 열렸지만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만만치 않다. 중국 상하이자동차 같은 견실하지 못한 해외자본이 신규투자도 없이 기술을 빼갔는데도 피해보상이나 재발방지책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야당의 주장대로 국정조사를 한다면 그 원인과 대책을 차분하게 따져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여야가 책임 전가와 비난전으로 일관하며 기업 신뢰에 타격만 주는 국정조사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쌍용차 노사도 밝혔듯 기업 이미지 훼손과 국제 신인도 하락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 경쟁력 회복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쌍용차 사태는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말 쌍용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롯됐다. 경쟁력 약화가 근본 원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쌍용차의 모기업인 인도 마힌드라와 쌍용차는 향후 4~5년 내 신차 개발 등에 9억 달러(약 9500억원) 정도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국가 브랜드 파워가 괄목할 만큼 강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투자 계획을 앞당기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노도 사도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로 회사 경영정상화에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사 공히 더 큰 상생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 내쫓긴 2518명 중 23명 세상 등져… 해고자 “낙오된 느낌, 힘들다”

    “돈을 빌리고 또 빌리며 살아도 쌀독에 쌀이 떨어져 아이들에게 라면 먹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정치권의 (쌍용차) 부실 매각만 없었어도, 정부에서 제대로 지원만 했어도, 해고된 동료들의 투쟁방향만 올바랐어도…” 지난 8일 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조립 2팀 생산라인에서 목을 맨 류모(49)씨가 현장에 남긴 A4 6장 분량의 유서 중 일부분이다. 류씨는 동료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사상태다. 류씨는 그나마 회사에서 해고되지 않고 생계를 이어가던 근로자였다. 일터에 남은 류씨조차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해고된 사람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지난 3년간 쌍용 자동차 해고자 노동자와 가족 등 23명이 세상을 등졌다. 23명 가운데 유서를 남긴 이는 한 명도 없다. 이들은 원망도, 분노도, 한탄도 남기지 않았다. 대체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10㎡(3평) 남짓한 천막에서 지난해 4월 5일부터 10일 현재 281일째 농성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쌍용차 해고 사망자 23명의 임시 분향소이자 살아남은 자들의 농성장이다. 해고자들은 이곳을 ‘도심 안의 섬’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10월 서울광장에서는 가수 싸이의 무료 공연이 열렸다. 8만여명의 시민이 몰렸다. 쌍용차 농성촌까지 인파는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농성촌은 관심 밖이었다. 최기민(42) 쌍용차 범대위 정책실장은 10일 “싸이 공연 날 ‘우리는 싸우면서 이렇게 죽어나가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한번만 관심 가져주면 쉽게 풀렸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크든 작든 국민이 기쁨을 나눠야 하는 날에 해고자들은 상대적 소외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이탈된 느낌, 낙오된 느낌이 힘들게 한다”고 말했다. 김정욱(43) 쌍용차지부 대외협력부장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데다 해고의 고통을 가족들까지 함께 겪는 점이 가장 힘들다”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해고된 자와 살아남은 자로 갈라져 서로 얼굴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졌다는 것도 큰 상처로 남았다”고 전했다. 이들이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농성을 계속하는 것은 부당한 정리해고에 따른 억울함을 풀기위해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2009년부터 공장 밖으로 내쫓긴 2518명에 대한 부당 해고다. 근로기준법상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에만 실시할 수 있다. 2005년 1월 쌍용차를 5900억원에 인수한 중국 상하이자동차는 긴박한 경영 위기로 인한 부도 상황 등을 명분 삼아 2009년 정리해고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상하이차 측이 쌍용차의 기술을 취한 뒤 고의로 회사 부도를 내고 이를 위해 회계 조작은 물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는 의혹이 해고자들과 야권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상하이차는 쌍용차 인수 뒤 4년간 투자 한 푼 없이 차량 설계도 등 쌍용차 기술 대부분을 빼내갔다는 의혹을 받았다. 김정은 기자 kimje@seoul.co.kr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朴 ‘勞 껴안기’ 대통합 첫 시험대로

    朴 ‘勞 껴안기’ 대통합 첫 시험대로

    노동자들의 잇단 자살 등으로 격앙된 노동계가 4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상대로 ‘대투쟁’을 예고하면서 이들을 어떻게 껴안을지가 국민 대통합의 첫 시험대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당선 직후부터 ‘100% 국민대통합’을 강조해왔지만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과 고공농성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노동 현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등 ‘48%’ 부족한 ‘박근혜식 대통합’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대선 이후 보름이 지난 4일에서야 이한구 원내대표를 비롯해 평택을 지역구로 둔 새누리당 의원들이 ‘쌍용차 사태’의 해법 모색을 위해 경기 평택 쌍용차 공장을 찾았을 뿐이다. 박 당선인의 직접적인 행보는 이뤄지지 않고 있고, ‘노동자들의 죽음에 응답하라’는 요구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회와 금속노조, 한국진보연대 등 노동현안 비상시국회의는 이날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박 당선인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절망한 해고 노동자와 한 맺힌 비정규직, 그들의 철탑농성과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며 5일부터 전국적인 대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인수위가 본격 가동되기도 전에 노동계와 정치권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심상치 않은 파열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모습이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박 당선인이 대선 기간 약속한 쌍용차 국정조사부터 실시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 소속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박 당선인의 행보에 대해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정조사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는 이날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반대 진영에서 주장한 정책을 과감해 수용해야 100% 국민 대통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철탑 노동자, 천막 치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살필 것인가를 국민들이 지켜볼 것이다”면서 “이들을 끌어안는 상징적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또 생을 포기하는 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정기적으로 노사 대표자들을 직접 만나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해 노동 현안에 대해 듣고 같이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정호희 민주노총 대변인은 “공약을 지켜 당사자들인 노동계 대표부터 만나야 한다”면서 “노동자가 5명이나 죽었는데 이렇게 절박한 민생 현장이 어디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불법 공무집행 경찰 때려도 공무집행방해죄 성립 안돼

    경찰의 불법 공무 집행에 저항하면서 경찰을 폭행했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된 최성용(39) 민주노총 부산본부 교육선전국장에게 검찰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최씨는 지난해 6월 23일 부산 영도구청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 설치된 외부단체의 천막을 철거하는 행정대집행을 할 때 천막에서 자신을 끌어내는 경찰관에게 발길질을 하는 등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됐다.1·2심 재판부는 “경찰관의 강제 조치는 법령상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피고인이 저항하면서 손과 발로 경찰관을 때렸다고 해도 공무집행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최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법리 오해를 이유로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경찰관직무집행법, 공무집행방해죄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없다.”고 판시했다.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원칙과 신뢰의 수첩공주… 鐵의 리더십, 위기에 더 빛나

    원칙과 신뢰의 수첩공주… 鐵의 리더십, 위기에 더 빛나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선이 굵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큰 방향을 보고 나아간다. 말과 행동에 군더더기도 거의 없다. 원칙을 강조하는 박 당선자 특유의 리더십이다. 이 때문에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기 희생과 신뢰 정치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방향을 읽는 능력, 결단할 줄 아는 힘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부친인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 효과를 뛰어 넘는 것이다. 이러한 박 당선자의 리더십은 향후 5년 동안 ‘대한민국호(號)’를 이끌어 나갈 통치 스타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멘토… 영국 여왕, 대처 총리, 아버지 박 당선자는 ‘롤 모델로 삼는 정치인’으로 16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꼽았다. 여성성보다는 위기를 극복하는 강한 리더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박 당선자는 지난 8월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5명이 출연한 MBC ‘100분 토론’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어려서 고초를 많이 겪었다. 그 시련을 다 이겨내고 지도자가 됐다.”면서 “자기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관용의 정신을 갖고 합리적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파산 직전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박 당선자는 2007년 지지자들에게 공개한 ‘90문 90답’에서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라고 답했다. 박 당선자는 당시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리더십은 영국병에 신음하던 영국을 되살린 대처리즘”이라면서 “대처 총리가 영국을 살려낼 수 있었던 힘은 ‘시대에 맞는 원칙’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 후보의 멘토가 대처 전 총리에서 엘리자베스 1세로 바뀐 배경에는 ‘상황 논리’가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고질적 병폐인 파업 등 노조 문제에 단호히 대응해 영국 경제를 부흥시킨 대처의 방식은, 5년 전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자)를 앞세웠던 박 당선자의 공약과 맞닿아 있었다. 반면 박 당선자는 이번 대선에서 국민 대통합과 경제 민주화, 복지 확대 등을 내걸었다. 이는 동인도회사 설립, 빈민구제법 강화, 가톨릭·개신교 간 종교 갈등 해소 등 엘리자베스 1세의 정책 노선과 닮은 꼴이다. 박 당선자는 또 지난해 말 자신의 정치 철학에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에 대해 ‘아버지’라면서 “아버지는 고뇌하시고 정책을 발표하고 현장에서 실행되는지 계속 확인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갖고 계신 역사관이나 안보관, 세계관을 들으면서 많이 배웠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박 당선자는 이어 지난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년 추도식에서는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면서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는 국민들께 돌려드리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면서 ‘탈(脫)박정희’를 선언하기도 했다. ●키워드… 정치공학·전략은 금기어 박 당선자의 트레이드 마크는 ‘원칙과 신뢰’다.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과정에서 박 당선자는 정치 생명을 걸고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지켜낸 뒤 이러한 이미지는 훨씬 강해졌다. 이 때문에 박 당선자에게 ‘정치공학’이나 ‘전략’은 금기어에 가깝다. ‘속임수’와 비슷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가식적인 ‘쇼’는 안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로 ‘국민’, ‘민생’ 등의 표현은 박 당선자의 결단을 이끌어내는 촉매제라고 한다. 한 측근은 “박 당선자를 설득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유리하다.’보다 ‘이렇게 하는 게 옳다.’고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참모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모시기는 쉽다. 하지만 선거에는 적합하지 않은 후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투수로 치면 화려한 변화구를 구사하는 기교파라기보다는 묵직한 돌직구를 뿌리는 정통파인 셈이다. 이를 통해 박 당선자는 위기에 강한 리더십을 갖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 왔다.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표를 맡은 뒤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곧이어 치러진 4·15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커터칼 테러’를 당한 뒤에는 병원에서 한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위기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2년 3개월여 동안 당 대표로 각종 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해 말에는 여권 주요 인사들의 잇단 비리와 구속 등으로 위기에 처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컴백’ 했다. 당을 뜯어 고쳐 새누리당을 출범시킨 뒤 지난 4·11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대선 후보직까지 거머쥐었다. 15년여의 정치 인생 동안 선거에서 ‘아픈 경험’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패배가 유일하다. 박 당선자는 “우리나라는 큰 위기에 있다. 경험 많은 선장은 파도 속으로 들어가 (위기를) 이겨낸다.”면서 자신을 ‘경험 많은 선장’에 비유하곤 했다. 박 당선자는 이 시대에 필요한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위기 극복과 신뢰, 국민 통합을 제시했다. 그는 지난 4일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국정의 80%가 위기 관리 문제”라면서 “무엇보다 다음 대통령에게는 위기 극복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치를 해오면서 신뢰를 생명같이 생각해 왔다.”면서 “실천과 경험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에 대한 국민 신뢰를 회복해 국민 대통합과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덧붙였다. ●스타일… “탱크 중무장한 여사령관” ‘수첩공주’로 대표되는 꼼꼼하고 세심한 리더십도 박 당선자의 장점이다. 퍼스트 레이디 시절 청와대 참모들의 보고를 기록하면서 생긴 메모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메모 습관에 대해 “책임감 때문에 그렇다.”면서 “민생 현장에서 수많은 얘기를 듣는데 어떻게 메모를 안 하고 다니는가. 전부 메모해서 가능한 한 그것은 책임있게 해결하고 답을 한다.”고 말했다. 박 당선자에게 수첩은 국민과 소통하는 수단이자 민생을 챙기는 도구인 셈이다. 한 측근은 “(박 당선자가) 수첩에 뭔가 적으면 이는 나중에 반드시 챙기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박 당선자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해 ‘탱크로 중무장한 나바론 요새의 여사령관’으로 요약했다. 최 소장은 “7년간 지지율이 40%를 넘는 부동의 인기로 난공불락의 위치(나발론 요새)를 구축했으며, 하드파워가 강력한 참모그룹(탱크)이 포진해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용인술은 박 당선자의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선 박 당선자는 사람을 쓸 때 신뢰를 가장 중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단 한 번 맺은 인간 관계는 소중히 생각한다. 때문에 박 당선자는 참모를 자주 바꾸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인자’를 두지 않는 것도 박근혜식 용인술의 대표적 특징이다. 주요 측근들에 대한 평가는 “성실하다.”는 게 가장 많다. 개인기보다는 조직력에 초점을 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박 당선자는 ‘공식 라인’을 중시한다. 박 당선자는 일을 맡기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상당한 권한을 주는 스타일이다. 의사 결정 구조가 왜곡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다만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쓰다보니 인재풀이 좁다는 평가도 받는다. 박 당선자가 ‘불통’(不通) 이미지를 갖게 된 원인 중 하나다. 보안을 중시하는 폐쇄적인 의사 결정 구조도 불통 논란을 낳는 또 다른 원인이다. 역으로 얘기하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높은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헌정 사상 첫 부녀대통령… 34년만에 청와대 재입성

    헌정 사상 첫 부녀대통령… 34년만에 청와대 재입성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남은 생을 모두 바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넘어야 할 산이 아무리 험난하고 가파르다 할지라도 쉽게 주저앉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박근혜 당선자가 1997년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마음가짐을 자서전에 남긴 내용이다. 이러한 각오를 시험이라도 하듯 박 당선자의 15년 정치여정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의 40여년 삶만큼 파고가 높았다. 박 당선자의 측근들은 그에 대해 “진일보하는 정치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 주지는 않지만 정치 여정의 전체를 놓고 보면 한 단계씩 발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박 당선자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국가 부도 위기, 대량 실업사태와 생활고에 대한 기사를 접하며 박 당선자는 “가슴 밑바닥까지 분노가 일었다.”고 했다. 수많은 국민들이 피땀을 흘린 결과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데 대한 허탈함과 위기감이었다. 그는 1997년 12월 10일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996년 총선 직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경북 구미에 출마할 것을 제의했으나 정치에 별 뜻이 없다며 거절했다. ●“국민과 아픔 함께” 국회 본회의장 첫 발언 당선자는 이어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섰다.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된 직후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90%가 넘는 상황에서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여당 국민회의 엄삼탁 후보와 맞붙어야 했다. 이른바 ‘달성대첩’이다. 조직과 자금이 없었던 박 당선자는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유권자들과 만났다. 그는 “어느 후보보다 가난한 선거를 치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큰 차이로 이겨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나라가 어려운 때 정치에 입문하게 되어 더욱 어깨가 무겁다. 앞으로 깨끗하고 바른 정치,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정치가 구현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본회의장 발언대에 처음 선 박 당선자는 이렇게 밝혔다. 2000년 총선을 통해 16대 국회의원이 된 뒤 박 당선자는 전당대회 부총재 경선에 도전장을 냈다. 여성 몫 부총재 자리를 당연직으로 얻을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경선을 통해 2위로 부총재에 당선된 뒤 박 당선자는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정당의 구조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치시스템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당내 분란을 일으키고 종종 왕따가 됐고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정치개혁의 핵심으로 상향식 공천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이끌다가 같은 해 11월 한나라당이 자신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자 합당했다.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던 2002년 5월 박 당선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두 번째 대권 도전에 실패한 뒤 한나라당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차떼기, 탄핵역풍 등으로 위기에 놓였다. 박 당선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가 됐다. 이 자리에서 박 당선자는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고 한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이 자리에 섰다.”면서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당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호소했다. ●대표때 정당 사상 첫 ‘대국민 약속 실천 백서’ 발간 침몰 위기의 한나라당 선장이 된 박 당선자는 우선 당사에서 나와 여의도 공터에 천막당사를 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으로 개혁의 참모습을 보여 드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명동성당, 조계사, 영락교회 등 종교계를 다니며 사죄의 뜻을 보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비관적인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얻었다. 이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둥지를 튼 뒤에도 천안의 연수원을 사회에 환원했고, 비리 등의 혐의로 당원권이 정지된 당원, 중진의원들을 직접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개혁 의지를 강조했다. 박 당선자는 또 원내 정당, 정책 정당, 디지털 정당을 목표로 내세워 실천했다. 당 대표가 의원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함께 토론을 하도록 의원총회 형식을 바꿨고 정책이나 민원 관련 내용을 꼼꼼히 메모한 뒤 모두 실현에 옮겨 정당 사상 처음으로 ‘대국민 약속실천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당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스스로도 미니홈피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소통을 활발히 했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그동안 당 대표가 휘둘렀던 공천권을 시·도당에 돌려보냈다. “박근혜 실험정치 기로에 섰다.”는 평가가 나왔다. 박 당선자가 2년 3개월 동안 대표직에 있으면서 네 번의 보궐선거를 비롯한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당 대표 임기를 모두 채운 유일한 대표였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당 대표 때부터 생겼다.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열흘 남짓 앞두고 5월 20일 박 당선자는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를 위해 신촌사거리를 찾았다가 피습을 당했다. 죽음의 문턱에 갔던 박 당선자는 “남은 인생은 하늘이 내게 주신 덤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았기에 거둬 갈 수 있었던 생명을 남겨 둔 것”이라고 말했다. 병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대전은요?”라며 당시 지방선거의 판세를 걱정했다는 일화도 유명하고,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박 당선자는 2006년 6월 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17대 대선 경선을 준비했다. 그는 이임식에서 “국민 여러분께서 보내 주신 사랑을 큰 빚으로 생각하고 평생 갚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에서도 모든 유세현장에서 했던 이 말은 박 당선자 스스로도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이며 다짐”이라고 했다. ●17대 땐 MB에 당내 경선 져 대권 재도전 2007년 이명박 대통령과의 경선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한나라당 내 친이명박계, 친박근혜계의 계파가 나뉘고 갈등이 심화됐다. BBK를 비롯해 이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을 친박 진영에서 대거 제기하고 친이계가 이에 맞서면서 본선을 능가하는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박 당선자는 2007년 8월 경선에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는 모두 승리했지만 국민여론조사의 벽에 부딪혀 석패했다. 흰색 상의를 입은 박 당선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경선 결과에 승복한다고 밝힌 연설은 ‘아름다운 승복’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박 당선자는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총선 공천을 두고 친이계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친박계 인사들이 공천에 대거 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이후 복당 문제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해 박 당선자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후 몇몇 정책에 대해 박 당선자가 이 대통령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우며 당내 계파 갈등은 4년 내내 골이 깊었다. 박 당선자는 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최대한 드러나지 않은 행보를 하고 입장 밝히기를 꺼렸지만 박 당선자는 내내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였고 야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지녔다. 박 당선자는 2009년 4월 이상득 전 의원의 정치개입 논란이 일자 “이번 사건은 정치의 수치”라고 했고 같은 해 7월 미디어법 논란 당시 “(여당)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며 수정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2009년 이후 이 대통령이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 두 사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박 당선자는 세종시 수정안이 평소 정치 신념인 원칙과 신뢰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청와대와 ‘강도’라는 비유까지 써가며 거침없이 설전을 주고받았고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에는 직접 발언대에 서서 반대토론에 나섰다. 18대 국회에서 유일한 경우였고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무산됐다. 박 당선자는 2010년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을 발족하는 등 비공식적인 활동을 하며 대선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이 또다시 큰 위기에 닥쳤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이 불거지면서 민심을 잃고 추락했다. 또 한 번 박 당선자에게 구원 요청이 쇄도했다. 박 당선자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쇄신을 진두지휘했다. 정강정책에서 보수를 과감히 삭제하고 경제민주화의 가치를 넣었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 결과 100석 안팎에 그칠 것이라던 지난 4·11 총선에서 152석을 획득하며 제1당을 유지하며 박 당선자의 위력이 또 한번 발휘됐다.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 당선자는 “이번 대선이 저의 마지막 정치 여정”이라며 국회의원직까지 내던지고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2월 19일 박 당선자의 15년 정치 여정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새 기록을 남기며 새롭게 시작됐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강원 “골프장 문제 전면 재검토”

    강원 “골프장 문제 전면 재검토”

    주민들과 1년 이상 갈등을 빚어 온 강원 최대 민원인 ‘골프장 문제’가 특별위원회 구성으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해결에 청신호가 켜졌다. 강원도와 시민단체 등은 13일 골프장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사회단체·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강원도 골프장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특위에는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강원도 골프장 문제 해결을 위한 범도민대책위원, 강원 특별보좌관 등 1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특위 활동의 법과 행정 지원을 위해 관계 분야 공무원 5~6명으로 태스크포스(TF)도 별도 설치, 운영된다. 특위는 골프장 조성을 둘러싼 갈등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9월 도지사 자문기구로 출범한 ‘강원도 골프장 민관협의회’보다 상위 개념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다. 또 골프장 인허가 과정부터 해당 기관이나 골프장 시행사 측의 위법 및 탈법행위 등을 조사해 행정 또는 법적 책임을 요구할 계획이다. 골프장 공사로 발생한 묘지 훼손 등의 문제도 책임을 가려 원상회복시키는 등 주민과의 갈등 해결에도 적극 나서게 된다. 골프장 토지 수용은 최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등을 고려해 적극 재검토할 방침이다. 강원지역에는 지금까지 도청 현관 앞과 강릉시청 등에서 강릉 구정리 주민 등 도내 6개 지역 주민들이 연대해 움막 농성을 400일이 넘게 펼치는 등 골프장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깊었다. 도내에는 최근 5년간 골프장 29곳이 증가해 총 71곳으로 52곳이 운영 중이며 13곳은 건설 중이고 6곳은 미착공 상태다. 원주 여산CC와 강릉CC, 홍천 샤일데일 골프&리조트 및 마운트나인리조트 등 6곳은 산림조사 및 환경영향평가 부실 등에 대한 집단민원 등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도청 앞에서 펼치던 움막 농성 주민들은 특위 구성 발표와 함께 이날 자진 철수했다. 곽태섭 도 고충처리위원회 사무국장은 “갈등의 골이 깊어진 골프장 문제가 시민단체들과 행정, 전문가들이 한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면 조만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서울 그린벨트 훼손 면적 서울광장의 1.3배

    서울 그린벨트 훼손 면적 서울광장의 1.3배

    그린벨트에 있는 나무를 베어버리고 천막을 세워 창고로 쓰거나 땅을 깎아 음식점 영업장,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등 그린벨트를 훼손한 업주 등이 서울에서 대거 적발됐다. 이렇게 훼손된 면적은 1만 6689㎡로 서울광장의 1.3배에 달한다. 서울시 특별사법경찰은 7일 과거 위법 행위가 있어 시정명령을 받았던 300여개 지점 중 시정 조치가 되지 않았거나 민원을 일으킨 곳을 중심으로 수사를 벌여 위법 행위 35건을 적발하고 22명을 형사 입건했다고 밝혔다. 유형별로는 무단 토지형질 변경 10건(7719㎡), 물건 적치 6건(5197㎡), 무단 용도 변경 5건(2240㎡), 가설건축물 설치 6건(252㎡), 불법 건축물 신·증축 5건(164㎡), 공작물 설치 3건(1117㎡) 등이다.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그린벨트에서는 임야 3250㎡의 나무를 베어내고 땅까지 깎아 무단으로 천막을 설치했다가 적발됐다. 중랑구 신내동에서는 880㎡를 콩나물 재배사로 허가받은 뒤 원단 창고로 용도 변경해 사용했다. 그린벨트 내 음식점을 차려 버젓이 영업하다 덜미를 잡힌 경우도 있었다. 한 업주는 진관동 그린벨트 내에 가설 건축물을 설치해 오리 음식점으로 사용했고 강동구 둔촌동에서는 불법으로 건축물을 증축해 음식점 주방으로 썼다. 땅을 깎거나 밭을 다져 주차장으로 쓴 경우도 있었다. 위법 행위가 적발된 업주 등은 개발제한구역 관리법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3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게 된다. 시는 적발 사항을 검찰에 송치하는 한편 자치구에도 시정 조치하도록 통보했다. 박중규 시 민생사법경찰과장은 “그린벨트 내에는 허가받은 시설물 설치나 영업 행위만 가능하며 무단 토지형질 변경, 물건 적치, 벌목 등은 금지돼 있다.”며 “그린벨트 내 위법 행위를 적극 수사해 쾌적한 생활 환경을 확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음성군수가 폭행 사무관 비호”

    이필용 충북 음성군수가 부하 직원들을 폭행한 사무관을 감싸고 돌아 직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음성군지부는 6일 군청 현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폭력을 일삼는 사무관 A(56)씨가 군수의 도움으로 강등 처분에서 풀려나 사무관 직급을 유지하게 됐다.”면서 “이 군수는 즉각 사과하고 폭력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하라.”고 촉구했다. 전공노에 따르면 A 사무관은 지난해 6월 사무실에서 부하직원의 뺨을 때려 정직 1개월을 받았다. 민원인에게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는데, 폭행당한 직원은 해당 업무 담당자가 없어 업무를 대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A 사무관은 올해 1월에는 술 마시자는 것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부하직원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가 충북도 인사위원회에서 6급으로 강등 처분됐다. 그러자 A 사무관은 지난 7월 청주지법에 강등 처분 취소와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이 군수는 지난 9월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10월에는 최후 변론도 포기했다. 결국 A 사무관은 지난달 22일 재판에서 승소했고, 이 군수는 지난 4일 항소포기서까지 제출했다. 전공노 관계자는 “이 군수는 A 사무관이 30여년 군청에서 근무하며 군정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데 직원들의 고통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A 사무관에게 부당하게 시달려 신입 직원 2명이 사표를 냈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은 동료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군수는 즉각 항소를 해야 한다.”면서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천막시위와 군수 퇴진운동까지 벌일 계획”이라고 경고했다. 전공노 음성군지부 홈페이지에는 ‘자신이 징계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줏대없는 군수는 사퇴하라.’, ‘(A 사무관이) 우리 부서로 올까 겁난다.’는 등 직원들의 비판 글이 잇따르고 있다. 음성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데스크 시각] 김근태와 1970년대, 남영동/문소영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김근태와 1970년대, 남영동/문소영 문화부 차장

    오는 30일은 고(故) 김근태 민청련 초대의장의 1주기다. 제15~17대 국회의원과 열린우리당 의장,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나름대로 화려한 경력을 가졌지만, 김근태를 가장 김근태답게 하는 직함은 ‘민청련 초대의장’이라고 생각한다. 재야 운동권의 맏형으로 이름값이 높았던 그는 1994년 국민회의가 출범하자 48살의 늦은 나이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직함은 부총재였으나 빛 좋은 개살구였다.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정계은퇴를 번복한 뒤 ‘대통령 4수’를 준비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기에 동교동계 가신들과 비교해 한없이 힘없는 자리였지만, 김근태에겐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일념이 있었다. 일부 재야 운동권은 ‘변절’이라며 그를 숱하게 욕했다. 김영삼 야당총재가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자금 걱정 말고, 종로·중구에서 출마하라’고 제의했을 때 김근태가 거절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던 탓이다. 1998년 여름 초선의원 김근태를 처음 만났다. 외환위기에 몰려 한국은 IMF체제에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박정희 신드롬’이 기승을 부릴 때라 ‘김근태-조갑제 지상 논쟁’을 준비했던 탓이다. 흰색 드레스 셔츠에 감색 양복바지를 입은 김근태는 뽀얀 피부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귀공자였다.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일간 받은 고문을 폭로해 한국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비타협적인 투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치 현안에 대한 질문에 단칼에 자르듯이 말하는 법도,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도 없었다. 어떤 적의나 분노도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고문 받은 것이 맞나?” 싶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때는 지난해 7월 19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 가설한 임시 천막 앞에서다.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단식농성을 하던 때다. 김근태가 그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눌변이 더 눌변이 되고 표정도 어색했지만, 그는 “조만간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다. 그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다. 소설가 방현석이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를 내놓았다. 방현석은 그 소설에서 “98%의 사실에 2%의 허구를 섞어 순도 100%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했다. 가난한 교사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한 집안의 기대주 소년 김근태가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뒤 영국 유학이라는 출세의 기회를 뒤로하고 왜 고달픈 운동의 길로 들어섰는지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과 10월 유신헌법 제정 등으로 1970년대 한국사회를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고자 박정희는 인혁당·민청학련 사건 등 간첩단 조작사건을 터뜨렸고, 군대로 대학을 짓밟았으며, 교련을 도입해 지성의 대학을 병영화했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대중가요는 숱하게 금지곡이 됐다. 그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왔다면 즉각 금지곡이 됐을 터다. 김근태는 1971년 수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남파간첩보다 더 많은 포상금을 목에 건 채 10년을 숨어 지냈다. 10년. 상상하기 어려운 세월이다. 1980년에 수배가 해제된 그는 1983년 민청련이 발족하자 초대의장에 올라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 등 사회운동을 펼친다. 사실 그는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한 후배가 찾아와 “선배들은 어떻게 했기에 우리나라를 이 따위로 내버려 뒀느냐.”고 한 절규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한국의 1960~1970년대 정치인들과 결탁한 산업화세력은 자신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만한 꼴을 갖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1970~1980년대 김근태와 같은 민주화 운동세력이 없었다면, ‘민주주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근거를 대라고? 영화 ‘남영동 1985’와 ‘26년’이 그것이다.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저런 고문을 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들을 양산하고 가슴 펴고 다닐 수 있게 한 정권들이 있었다. 김근태를 다룬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김근태에게 진 빚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 “2012년을 점령하라!”라고 한 김근태의 유지가 실현되기를 기다려 본다.
  • 결식아동 등 300명에 특별한 사랑 배달한 중랑구 ‘이동 푸드마켓’

    결식아동 등 300명에 특별한 사랑 배달한 중랑구 ‘이동 푸드마켓’

    “불편한 몸이지만 컴퓨터 학원에서 취업준비를 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요.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사기도 쉽지 않았는데, 직접 집으로 가져다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습니다.”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지체장애인 김모(27·면목4동)씨는 28일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오후 2시 서울 중랑구 면목4동 용마폭포공원에서는 ‘사랑의 이동 푸드마켓’이 출발했다. 카드 업체의 후원 덕분이다. 면목동 차상위계층과 장애인·독거노인·결식아동 등 저소득가구 300명에게 식품 및 생활필수품을 집집이 전달하는 시간이다. 동 주민센터나 복지관에서 추천한 대상자 가운데 김씨처럼 거동에 불편을 겪는 이들을 빼고는 공원으로 나와 순번표를 확인한 뒤 긴요하게 쓸 물건을 5개 품목씩 골랐다. 현장에 나올 수 없는 이웃들을 위해 사랑을 실은 5t 트럭은 일정을 1시간여 넘긴 오후 6시까지 곳곳을 누비며 고추장 500g들이 200개, 밀가루 1㎏짜리 150개, 겨울철 장갑 300켤레 등 37개 품목 5280점을 골고루 나눠줬다. 카드 업체 자원봉사자 32명, 푸드마켓과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황용규 회장 등 임직원 13명, 구·동 직원 10명, 공익 및 공공근로자 7명이 선별·포장작업 등을 거들었다. 오전 9시 대형천막 6동을 설치하는 것으로 막을 올린 사전행사에선 ‘수정민요단’ 공연이 나눔의 의미를 널리 알렸다. 아울러 법률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저소득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법률상담실도 열었다. 홀몸어르신 함모(81·면목7동) 할아버지는 “갈수록 사나워지는 게 세상 인심인데, 힘들게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니 고맙기가 그지없다.”며 연신 감사인사를 건넸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美위성업체 “北, 3주내 미사일 발사” 美정부 “구체 정보 없어” 韓 ‘예의주시’

    북한이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기지에서 미사일 발사를 준비 중이라는 관측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중국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사실상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미국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미국의 민간 위성업체인 ‘디지털글로브’는 26일(현지시간) “지난 4월 장거리 로켓 발사 때 목격됐던 모습과 일치하는 활동이 포착되고 있다.”며 동창리 미사일 발사 기지의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디지털글로브는 “현장에서 관측된 새로운 천막, 트럭, 사람과 다수의 이동식 연료 및 산소 탱크는 북한이 향후 3주 내에 다섯 번째 위성(미사일)을 발사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앞서 아사히신문은 지난 23일 미국이 이달 초 북한의 평양시 산음동에 있는 무기공장에서 미사일 부품으로 보이는 화물이 동창리 기지 조립동으로 운반되는 것을 위성사진으로 포착해 한국과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와 군 당국도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분석하고 북한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군의 한 고위 소식통은 27일 “이달 초 장거리 미사일 동체가 동창리 기지로 이송된 이후 발사장 주변에서 발사를 준비하는 명확한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다.”며 “현재 준비 상황으로 미뤄 다음 달에서 내년 1월 사이에 발사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재로서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면서 “지금까지 접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소문과 언론 보도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중국 외교부의 훙레이(洪磊) 대변인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과 관련해 정례 브리핑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것은 관련국 공통의 책임”이라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훙 대변인은 “중국은 관련 보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5대종단 지도자 쌍용차 단식 농성장 방문

    5대종단 지도자 쌍용차 단식 농성장 방문

    5대 종단 지도자들이 19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천막에서 쌍용차 정리해고 관련자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41일째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을 방문, 단식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 김 지부장은 이날 오후 건강이 악화돼 병원으로 호송됐다.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1년째 골프장 벙커에 빠진 강원

    1년째 골프장 벙커에 빠진 강원

    강원 지역 골프장 건설 중단을 촉구하는 반대 농성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었지만 해결은 난망하다. 18일 강원도와 사업자, 주민들에 따르면 강릉 구정리 골프장 반대 천막 농성을 비롯해 홍천, 원주 지역의 골프장 반대 농성이 1년을 넘었다. 하지만 사업자와 주민들 간 이견이 여전하고 인허가에 관여한 행정 당국도 대책을 내놓지 못해 장기화될 전망이다. 구정면 주민들은 ㈜동해임산의 강릉CC 골프장 사업에 반발해 생업을 포기한 채 강릉시청과 도청에서 1년째 비닐 천막을 치고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다. 특히 도가 사업자에게 ‘골프장 대신 상업용지 등으로 전환시켜 주겠다.’며 대체사업을 제안했지만 주민들과 입장이 엇갈려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대체사업 이전에 부실한 인허가 과정에 대한 검증 절차가 빠졌다며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반대투쟁위원회 관계자는 “현장과 문서가 일치하는지에 대한 정밀 실사를 거쳐 의혹이 있다면 골프장 허가가 원천 취소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홍천 구만리와 갈마곡리, 동막리, 두미리, 원주 구학리 등 골프장 건설 반대 농성이 이어지고 있는 지역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사업 시행자들도 불합리한 행정 조치로 인한 공사 중지 피해를 주장하며 공사 재개를 요청하고 있다. 공사가 중단된 강원 지역 골프장 시행사 대책위원회는 최근 공사 재개를 위한 탄원서를 강원도와 국가권익위원회, 홍천군청에 제출했다. 그러나 최문순 도지사는 “사업자와 주민들 간 골프장 대체사업에 대한 합의가 있을 것”이라며 원론적인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글 사진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0) 이재순 vs 이범진

    [선택! 역사를 갈랐다] (30) 이재순 vs 이범진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대한제국에서 추진한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가 학자에 따라 엇갈린다. 개혁의 실효성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대한제국이 부정부패로 얼룩져 근대화 사업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반대로 광무개혁을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근대화하려 한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대한제국의 다양한 평가에 앞서 한국학계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대한제국의 개혁을 추진한 정치세력이다. 개혁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대한 천착이 없다면 대한제국의 다양한 해석도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켰다. 아관파천 이후 이재순(李載純,1851~1904)과 이범진(李範晋, 1852~1911)으로 구성된 궁내부는 고종 권력의 핵심세력이었다. ●이범진, 제정러시아 대한제국 개입 유도 1896년 2월 9일 러시아 순양함 아드미랄 코르닐로프의 내부는 긴박했다. 당시 아드미랄 코르닐로프는 제물포에 포함 보브르와 함께 정박했다. 함장 몰라스는 해군대위 흐멜레프에게 러시아 수병을 이끌고 신속히 서울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2월 10일 새벽 중위 미하일로프는 서대문에 도착해서 대위 흐멜레프를 비롯한 해병부대를 맞이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안내했다. 장교를 포함한 러시아 해병의 전체 인원은 135명이었다. 포함 보브르에서 대포 1문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송되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금천교(禁川橋)→내수사전로(內需司前路)→새문고개→러시아공사관으로 신속히 피신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왕이 안방을 내주고 셋방살이를 자처했다는 아관파천이었다. 2월 11일 저녁 러시아공사관과 영사관 사이의 광장에는 청색의 천막이 설치되었다. 1개 중대의 러시아 병력이 러시아공사관의 안팎에서 경계를 시작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내부 2개의 방을 침실과 접견실로 사용했다. 공사관 정문 앞에 있는 정원에는 대포가 설치되었고, 공사관 내부의 개조된 3개의 방에 33명의 해병이 거주했다. 영사관 내부의 개조된 2개의 방에는 62명의 해병이 거주했다. 그동안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에도 불구하고 제정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현상유지’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러시아의 ‘현상유지’ 외교 정책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북극곰 제정러시아를 움직인 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2월 2일 러시아공사관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왕세자와 같이 대궐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서 피신하려고 한다.”는 고종의 비밀 편지를 전달했다.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스페예르는 이범진에게 고종 피신의 위험성을 알렸다. 하지만 이범진은 “만약 스페예르가 고종의 피신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고종이 대궐에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며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심했다.”고 답변했다. 아관파천 직전 고종은 자신의 신변안전 때문에 파천의 실행을 주저했다. 그러자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의 지원을 확인하는 한편 ‘궁중(宮中)의 여화(餘禍)가 있을지 모른다.’는 일본의 ‘고종폐위설’까지 유포하여 고종의 결단을 유도했다. 1898년 9월 11일 경운궁이 발칵 뒤집혔다. 이날 저녁 식사 전에 고종과 순종은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커피의 절반을 마신 순종은 토하면서 혼절하였고, 고종은 구토했다. 남겨진 커피를 마신 내관들도 혼절하였다. ●이재순, 고종 커피에 아편 넣어 정적 제거 사건의 파장이 심각했기 때문에 신속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날 고종의 수라상에 관련된 인물은 14명이었다. 심문과정에서 김종화(種和)라는 인물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종화의 심문과정에서 전선사(典膳司) 주사(主事)를 지낸 공창덕(孔昌德)의 개입 사실이 드러났다. 공창덕에 따르면 그는 김종화에게 1000원의 사례금을 보장하면서 김종화가 고종과 순종의 커피에 ‘아편 1량’을 몰래 집어넣었다. 무엇보다도 공창덕의 심문과정에서 배후인물이 김홍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창덕에 따르면 김홍륙은 공창덕에게 협판을 보장하면서 고종의 독살을 지시하였고, 김홍륙은 자신의 처인 김소사를 통해서 공창덕에게 ‘아편 1량’을 제공하였다. 사건에 참가한 인물 중 김종화는 이재순의 추천에 의해 각감청(閣監廳)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현당(寶賢堂)의 창고지기인 김종화는 홍릉 제사 때에 비용을 사적으로 유용해서 면직되었다. 그런데 면직된 김종화는 사건 당일 대궐에 몰래 잠입하여 고종의 독살을 실행했다. 공창덕은 고종의 아관파천 시절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고용한 요리사였다. 아관파천 이후 공창덕은 김홍륙의 추천에 의해서 전선사 주사로 임명되어 왕의 주방에서 외국요리를 관장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의문을 살펴보면 첫째, 커피를 마신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독살의 의도가 있었다면 커피를 마신 사람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야 한다.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암살의 계획보다는 정치적 음모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둘째, 김종화라는 인물이 이 사건에 개입한 동기가 매우 부족하다. 또한 고종을 암살하려는 인물이 쉽게 체포된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면직된 인물이 대궐에 잠입할 수 있는가? 1898년 4월 부임한 러시아공사 마튜닌은 독차사건이 러시아통역관 출신 김홍륙을 파멸시키려는 음모로 파악했다. 당시 러시아의 후원 아래 김홍륙은 궁궐에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정치와 인사 문제까지 깊숙이 개입하였다. 마튜닌은 러시아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고종 독차사건의 배후로 궁내부대신 이재순을 지목하였다. 이재순은 김홍륙이 러시아공사의 후원 아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자,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재순은 자신이 김종화를 추천해 사건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었지만 사건의 처리과정에 개입했다. 이재순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고종의 승인을 얻었고 경무청에 조사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이후 1898년 10월 김홍륙·공홍식·김종화는 반역 음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소속한 이재순과 이범진 계열을 적극 후원했다. 이범진은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를 구해준 인연으로 황후의 총애를 받아 민비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법부대신에 임명된 이범진은 을미사변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이재순을 비롯한 권력집단은 이범진의 지나친 권력 집중에 반발하였다. 결국 이범진은 1896년 6월 주미공사, 1899년 3월 주러공사에 임명되었다.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도쿄, 워싱턴에만 자국 공사를 주재시켰다. 당시는 의화단 사건 이후 대한제국과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다. 주러공사 이범진은 고종의 여전한 신임 아래 대한제국 외교 정책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친정시문과에 합격한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은 종친 내부에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시종원경 이재순은 시위대 장교와 병사를 결집하여 고종 구출을 위한 춘생문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김홍륙의 암살시도 및 고종 독차사건의 배후였다. 궁내부대신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이재순은 고종의 군주권 강화를 위해서 각종 정치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 정치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핵심인물이었다. 이재순의 인맥은 충청도 출신자, 반면에 이범진의 인맥은 함경도 출신자가 주축이었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한 이범진과 이재순 계열은 군주권의 강화를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각각 러시아·프랑스와의 협력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지지기반이 달랐지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서는 상호 연대할 수 있었다. ●고종, 충성심 자극 위해 경쟁 유발… 갈등만 낳아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켰다. 그런데 고종은 이들을 단일한 세력으로 통합시키지 않으면서 상호간 경쟁을 유발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자극했다. 이러한 상호 경쟁은 대한제국의 신속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권력 독점을 향한 지나친 대립만 초래했다. 처녀지를 개간하려면 겉으로 미끄러지는 쟁기를 쓸 것이 아니라, 땅속을 깊이 파고드는 플라우(쟁기)를 써야 한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상경집회·궐기대회·천막농성… 강원 ‘몸살’

    평창동계올림픽 분산 개최, 전철역 지하화, 골프장 백지화 등 지자체별 마을별 민원이 장기화되면서 강원도가 몸살을 앓고 있다. 8일 강원도에 따르면 평창동계올림픽 경기 분산개최를 요구하는 원주·횡성지역 주민들과 원주~강릉 간 복선전철 신강릉역 지하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서명운동, 궐기대회, 상경시위로 이어지고 골프장 백지화를 요구하는 천막 농성도 1년 가까이 이어지는 등 각종 민원이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8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경기 분산개최를 요구하는 원주시는 16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아이스하키경기장 원주유치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10만 시민 서명운동을 전개한 데 이어 오는 12일 원주따뚜공연장에서 시민 1만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어 16일에는 강원도청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갖고 23일에는 서울 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기로 했다.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유치를 추진 중인 횡성군민들도 이번 주 중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방문할 계획이다. 범군민추진위원회는 추석 연휴 동안 지역 국회의원 등을 통해 조직위원회와 조직위원장에게 주민 면담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 스노보드 횡성 개최 당위성을 강조할 방침이다. 또 원주~강릉 간 복선전철 종착역인 신강릉역 지상화 계획에 반발하고 있는 강릉지역 시민들도 10일 강릉역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시민들은 도시 균형 발전과 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등을 위해 신강릉역사 지하화와 구정면 금광리 차량기지 설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1년 가까이 도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골프장 백지화문제도 좀처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아 강원도가 골치를 앓고 있다. 도 관계자는 “주민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지만 해결이 어려워 난감하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美 육군 신병훈련소 ‘포트 레너드우드’를 가다

    美 육군 신병훈련소 ‘포트 레너드우드’를 가다

    “서둘러!”, “정신차려!” 지난 25일 오후 8시(현지시간) 미국 미주리주 ‘포트 레너드우드’ 육군 기지에 대형 버스가 도착하자 천국 같던 가을 밤 공기는 지옥으로 돌변했다. 미 전역에서 세인트루이스 공항에 집결한 뒤 버스에 실려온 신병 50명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조교들의 ‘군기 잡기’는 시작됐다. 조교들의 무기는 구타도, 욕설도, 얼차려도 아닌 ‘얼굴 바짝 마주보고 고함치기’ 세례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 19세인 앳된 젊은이들은 충분히 얼어붙었다. 미국 젊은이 특유의 자유분방함은 온 데 간 데 없이 신병들은 조교의 불호령이 떨어질 때마다 부동자세로 “예, 조교님”을 큰소리로 복창했다. “머리띠, 귀고리, 목걸이 등은 떼어내라.”, “종교적인 이유라도 엑세서리는 허용되지 않는다.”, “티셔츠를 전부 바지 안으로 집어넣어 입어라.” 등의 지시가 이어졌다. 강당 안에 집결한 신병들에게 사과 한 개와 비스킷 한 조각, 물 한 컵이 저녁식사로 주어졌다. 조교는 “1분 안에 식사를 마쳐라.”라고 지시해 놓고 30초쯤 지났을 때 “식사 그만.”을 외쳤다. 신병들은 입에 남은 음식물을 서둘러 쓰레기통에 뱉어내야 했다. 이번엔 “각자 휴대전화를 꺼내 부모님께 전화해라. 단, 잘 도착했다는 말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신병들은 실제로 “무사히 도착했어요.”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껐다. 전화선 너머 황당했을 부모의 표정이 읽혀졌다. 일부 여성 신병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교들은 가차없이 휴대전화를 압수했고, 한참동안 신병들을 달달 볶은 뒤에야 취침을 허용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신병들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피해 대형천막 안에서 체력단련(PT) 체조를 했다. 한국 군의 PT 체조와 달리 모든 동작이 4회 반복으로 끝났다. 무려 1시간 동안 신병들의 진을 빼놓은 뒤에야 체조는 마감됐다. 6시 30분 도착한 식당은 시장바닥 같았다. 배식 중이거나 식사를 하는 신병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조교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자리에 앉은 신병들이 식사하는 중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동료 신병들이 옆에서 군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10분씩 식사시간이 주어졌지만, 실제로는 5분여 만에 “식사 그만.”이란 지시가 떨어졌다. 신병들은 식당 안에서도 뛰어야 했다. 한국 군의 경우 아무리 신병이라도 먹는 시간만큼은 비교적 관대한데 반해 미군은 식사를 군기 잡기의 일환으로 적극 활용했다. 식단은 고품질 유기농 일색이었다. 헤수스 에난데즈 상사는 “튀김요리, 탄산음료는 일절 제공하지 않고 철저히 칼로리를 관리한다.”고 귀띔했다. 취사병이 아닌 용역업체 직원들이 조리하고 배식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내무반은 호텔처럼 쾌적했다. 30명이 함께 잘 수 있는 방에 1인용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고 화장실과 샤워실, 세탁실 등이 아파트 구조처럼 바로 옆에 갖춰져 있다. 복도 곳곳에는 ‘성폭행은 범죄’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고, 개인장비인 총을 침대 머리맡에 잠금장치도 없이 놓고 자는 점도 특이했다. 내무반원끼리 밤에 2명씩 돌아가면서 한 시간 단위로 불침번을 서지만 건물 외곽 경비는 서지 않는다. 현관에 설치된 전자식 보안경비 장치가 무단침입을 적발해 주기 때문이다. 기지에는 실탄사격 훈련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상 훈련 센터’가 마련돼 있다. 총알 없이 전자오락처럼 스크린 표적을 향해 발사하는 식이다. 에린 앤더슨 중령은 “탄약 비용을 절감하고 안전사고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포트 레너드우드는 주로 공병 병과 신병들을 받는다. 모병제인 미국의 신병들은 입대와 동시에 1인당 1500달러(약 167만원)가량의 월급을 받는다. 입대 후 2~3일간 신체검사와 이발, 군복 지급 등을 마친 뒤 10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한다. 이어 10주간의 전공별 군사훈련을 받은 뒤 자대에 배치되는데 그때서야 가족 면회가 가능하다. 미군 신병들은 입대할 때 입고 온 사복을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보관했다가 집에 휴가갈 때 입고 간다고 훈련소 측은 밝혔다. 미군이 한국 언론에 신병훈련소 취재를 허용한 것은 처음이다. 글 사진 포트 레너드우드(미주리주)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광화문 차없는 거리… 차도 메운 인파

    광화문 차없는 거리… 차도 메운 인파

    일요일인 23일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된 서울 세종로에 일반 차량의 통행이 통제된 가운데 풍물거리 천막들이 차로 위에 줄지어 들어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2012 대선후보 심층분석] 박근혜의 측근 (상)용인술

    [2012 대선후보 심층분석] 박근혜의 측근 (상)용인술

    국정 운영은 대통령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대리인 격인 측근들의 도움 없이 권력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선 후보 역시 대통령에 당선되면 권력의 정점에서 국정 운영을 총괄하며 조력자들을 지휘해야 하는 입장이다. 한국 정치의 불행 중 상당 부분이 무능하고 부패한 측근들의 권력 횡포 및 남용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서울신문은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캠프와 측근들을 심층 분석, 미래 권력으로서의 자질과 가능성을 검증하고자 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주변 사람들을 꼬집는 말로 ‘오겹살’이라는 표현이 있다. 박 후보가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붙인 말이다. 박 후보가 ‘불통’(不通)의 이미지를 갖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고 비판한다. 또는 ‘친박근혜계’의 구조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표현으로 ‘해자(垓字·성 밖을 둘러 파서 만든 도랑)론’이란 것도 있다. “박 후보와 주변 인사들과의 사이에 해자처럼 일정한 거리감이 형성돼 있다.”는 것인데, 그의 주변 인사들은 “이 거리감이 특정 인사의 전횡을 차단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해자의 폭만큼의 거리감이 ‘핵심’의 등장을 막고, 핵심이 없기 때문에 권력의 남용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앞서 당내 대선 후보 경선 캠프를 꾸릴 때도 홍사덕·김종인 당시 공동 선대위원장 등을 포함, 아무에게도 명함을 찍지 못하도록 한 일이 대표적이다. 박 후보의 인사 스타일로, ‘2인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횡 방지 vs 토론 부재 그러나 해자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한편으로는 “해자 폭만큼의 물리적 거리감 때문에 조언을 받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의미로 통할 수 있다. 이 해석은 박근혜 캠프의 ‘빈약한 토론 문화’와도 연결된다. “그러니 토론이나 논쟁은 없고 늘 ‘박심’(朴心·박근혜의 뜻)밖에 없지 않으냐.”는 비판을 사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이광재·안희정같이 맞담배를 피우며 논쟁을 벌인 정치적 동지이자 직언 그룹이 있었지만, 박 후보 주변에는 그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 인혁당에 대한 발언이 문제가 되고 파문이 커진 뒤에도 그의 주변 인사들은 박 후보와 변변한 ‘논의’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선기획단 인사들이나 실무진이 삼삼오오 머리를 맛대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원론적인 표현으로 사태 수습을 시도하고 이튿날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당 대변인의 사과문을 발표했다가 이를 다시 부인한 것은 이 같은 내부 사정을 잘 보여 준다. 과거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박 후보와 그 측근들이 토론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해결책을 내고 ‘전달하는 일’에 그쳤던 것이다. 논쟁에 약한 것은 박 후보뿐이 아니다. 측근 간에 논란이 생길 때면 그 종착점은 역시 ‘박심’이다. 측근들 사이에서 이견이 표출됐을 때 “박 후보와 어느 시점에 얘기했느냐.”로 교통정리가 이뤄지는 일도 흔하다. 물론 측근 사이에 토론과 논쟁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토론과 논쟁의 결과는 ‘의견 개진’으로만 활용되는 때가 잦다. 이런 구조는 한편으로는 높은 효율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박 후보가 보여 준 ‘광폭 행보’는 실무팀의 건의가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져 실행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문제와 변화를 요구하는 문제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대선기획단의 회의 모습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 준다. 이주영 단장은 회의 도중 박 후보에게 직접 알려야 할 내용이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 단장은 이때 자신의 휴대전화를 스피커 모드로 해놓고 박 후보의 의견을 다른 구성원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한다. 대선기획단 전체가 박 후보의 생각을 자세히 알고 자신이 잘못 전달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3일 “박 후보는 ‘천막 당사 시절’이 보여 주듯 난국을 돌파하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있는 강인한 리더십을 보여 왔지만, 앞으로는 갈등을 조정하는 ‘코디네이터’적 리더십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인기보다 조직력에 초점 물론 해자 안쪽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개념에서의 측근들이, 적은 숫자로 존재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검증된 인사들이다. 많은 조언 그룹이 있지만 박 후보는 우선 이 측근들의 의견은 잘 듣는 편이다. 박 후보는 다른 어떤 의원들보다도 국회에 공식 등록된 보좌진을 신뢰한다. 이재만·정호성·이춘상·안봉근 등은 박 후보가 정치권에 입문한 1998년부터 줄곧 함께해 왔다. 박 후보의 의중을 가장 잘 알 뿐만 아니라 능력면에서도 이들에 대한 박 후보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최경환 후보 비서실장을 비롯해 2007년 경선에 참여했던 의원들도 ‘해자 안쪽 사람들’로 분류된다. 주요 측근들에 대한 평가는 “성실하다.”는 게 가장 많다. ‘딴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능력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도 하지만, 개인기보다는 조직력에 초점을 둔 박 후보 특유의 용인술로 해석된다. 다만 자신이 맡은 역할만을 충실히 담당하는,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구조로 인해 각 영역 사이에 높은 칸막이가 있는 것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당 안팎에서는 박 후보의 측근 상당수가 정치적 피해의식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내놓는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때 친이명박계와의 갈등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간주되지만, 정치적 경쟁 상대를 향한 경계심이나 거부감이 외연 확대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보안 제일주의’로 상징되는 폐쇄적인 조직 운영도 문제로 꼽힌다. 조정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주변 인물들의 충성도에 높은 의존도를 보이는 등의 모습이 폐쇄적인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면서 “여러 계층을 포용하는 이미지 구축을 위해서는 현재까지 해오던 방식보다 좀 더 과감하게 다른 계층에 자신을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실과 신뢰 vs 화학적 결합 어려워 다만 박 후보는 이들을 ‘공적 라인’에 배치함으로써 일정한 투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박 후보가 제일 꺼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특보’라고 한다. 그의 주변에서는 특보라는 직함을 가진 인사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 당이나 대선기획단에서 직함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시점에서 박 후보와 일정한 거리 내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데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박 후보는 경선캠프에서도 의원 보좌관 하나하나를 일일이 선택했으며, 이번 대선기획단 비서 자리 하나하나까지 직접 조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공적 라인을 중시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의사 결정 구조가 왜곡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으로 박 후보는 일을 맡기면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상당한 권한을 주는 스타일이다. 다만 이들이 ‘정치적 동지’로까지 잘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정치인 박근혜’의 한계로 지적된다. 과거 정치지도자들은 기존 측근들에 더해 새로운 인사들을 속속 합류시켜 ‘신주류’를 만들고, 세력 간 경쟁을 통해 정치적 활력을 공급받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박 후보의 캠프에 대해서는, 정치에 있어 강한 화학적 결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박 후보의 주변은 정치적 결사체라기보다는 후보를 중심으로 한 기능적 연결체에 가깝다. 이는 박 후보가 사람에 연연하지 않는 점을 보여 주며,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언제든 인물을 통해 변화와 쇄신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고 진단하면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김씨는 “박 후보의 용인술은 생각이 맞는 사람을 중용하는 방식으로, ‘한 번 신뢰한 사람은 계속 쓴다’는 표현 이면에는 이러한 관계가 깔려 있다.”고 요약했다. 이에 대해 박 후보 주변 사람들은 “박 후보의 용인술과 그간의 측근 관리 방식 등을 볼 때 집권 이후 박 후보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비리에 연루될 가능성은 다른 어떤 정치인 캠프보다 낮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장세훈·허백윤기자 shj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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