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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이제는 대한민국 인권도 생각할 때다/정선미 변호사·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기고] 이제는 대한민국 인권도 생각할 때다/정선미 변호사·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휴전선 하나를 두고 있는 북한 인권 수준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그런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중국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는 탈북민들은 대한민국을 믿고 목숨을 담보로 일종의 도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바람과는 달리, 탈북민들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에 암담해한다. 특히, 탈북민 여성들은 탈북 과정에서 중국 남성과 결혼을 하든가, 인신매매를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대한민국에 겨우 정착하는 경우도 많다. 이후 대한민국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모은 돈으로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을 탈북시키기 위해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을 지급한 탈북민들은 자신의 가족이 중국 공안에게 붙잡혔다는 처절한 소식을 듣게 되기도 한다. 중국에서 강제 북송되어 잔인한 고문 끝에 처형을 당하든가 극히 열악한 교화소 혹은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되는 등의 모진 처벌을 예상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2017년에는 탈북민 가족 5명이 모두 음독자살을 한 바 있다. 작년 11월에는 중국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귀순 의사를 밝힌 북한 선원 2명이 급하게 강제 북송되는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헌법상 북한 주민은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러나 탈북민들의 인권에 대해 현 정부, 특히 외교부나 통일부는 모두 뒷짐을 지며 중국과 북한 눈치만 보고 있다. 마찬가지 현상들이 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가오는 3월 26일은 천안함 폭침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장병 46명이 전사한 가슴 아픈 사건임에도 현 정부는 아직도 북한의 만행을 100%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천안함 생존자 58명 중 22명이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으나 9명만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됐다. 이와 같이 천안함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묻히거나 잊혀지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특히 최저임금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소상공인들의 폐업이 늘고 있지만 이러한 절규들도 다 묻힌다. 일부 근로자는 주52시간으로 끊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돈벌이가 너무 줄었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이처럼 힘없고 억울하며 어려운 분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하는 것이 진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분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고, 이런 분들이 억울하지 않게끔 진짜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며, 이런 분들이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공정한 사회라고 하겠다. 정선미 변호사·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 마산 보도연맹 희생자 6명 70년 만에 무죄 선고

    마산 보도연맹 희생자 6명 70년 만에 무죄 선고

    6·25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영장 없이 불법 체포·감금 당한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당한 민간인 6명이 7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창원지법 마산지원 형사부(이재덕 지원장)는 14일 마산지구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고 노상도씨 등 보도연맹원 6명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가는 이들이 남로당과 규합해 괴뢰군에 협력하는 등 이적행위를 했다며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들이 북한에 호응하는 등 이적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948년 정부 수립 전에 남로당 산하단체에 가입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이런 인사들을 모아 전향을 목적으로 설립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노씨를 비롯한 경남 마산지역(현 창원시) 보도연맹원 수백명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중순∼8월 초순 사이 헌병과 경찰의 소집 통보를 받고 모였다가 영장 없이 체포돼 마산형무소에 수감됐다. 마산지구계엄고등군법회의는 이들에 대해 국방경비법의 이적죄 혐의로 재판을 해 1950년 8월 18일 141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같은 달 말 마산육군헌병대가 사형을 집행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법원 영장 없이 보도연맹원들이 불법적으로 체포·감금돼 희생됐다고 밝히자 유족들은 2013년 창원지법 마산지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법원은 재심 청구 사유를 인정해 2014년 4월 재심 개시 결정을 했지만 검찰이 항고와 재항고를 하면서 재심 절차가 늦어졌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이 검찰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재심이 확정돼 재심 개시 6년여만에 마침내 무죄가 선고됐다. 고 노상도씨의 아들인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은 “돌아가신 분들은 당시 ‘논을 매다 잠시 보자고 해서 불려갔거나 부역하러 오라고 해서 나갔다가 희생됐다”며 “가족들은 내 남편, 내 자식이 어디로, 어떤 죄로 끌려갔는지도 모르고 수십 년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70년 만에 무죄가 나와 좋기는 하지만 가슴이 먹먹하다”고 밝혔다. 희생자 유족들을 변호한 이명춘 변호사는 “무죄 판결이 났지만, 당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거나 통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이 많다”며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사회도 이날 법원의 무죄판결을 반겼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70년이 걸렸다”며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은 모든 고통이 이번 무죄 판결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기원한다”는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허성무 창원시장도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법원의 이번 결정은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진전이다”는 환영 성명을 냈다. 열린사회 희망연대,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등 14개 지역 시민단체는 “무죄판결을 환영하며 진실화해위원회 재출범, 보상특별법 제정, 가해자 처벌 등이 이뤄지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열린세상] 한반도는 터지기 직전?/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열린세상] 한반도는 터지기 직전?/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나는 매일 새벽 남산에 가는데, 산책길 어귀에 작은 샤워실과 탈의실이 있다. 마침 설 연휴를 맞이해 미국에 사는 아들이 잠시 귀국했다. 모처럼 아들과 새벽 산행을 하는데 이 집들을 보더니 아들이 대뜸 ‘미국은 위험해서 이런 데에 공중 시설 두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매일 이 시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곳은 여성이 이 어두운 새벽에 혼자 와도 아무 문제없을 정도로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매우 안전하고 좋은 나라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됐다. 또 외국인들은 한국은 살기에 너무도 편한 나라라고 칭송한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가 깨끗할 뿐만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싸서 좋다. 또 배달 안 되는 것이 없고, 새벽 2, 3시에 여성이 혼자 나가 편의점에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고 좋아한다. 우리는 이런 데에 익숙해져 있어 그것의 대단함을 모르는데 전 세계에 이런 사회 분위기를 가진 나라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나라를 멋지고 빼어나게 만들어 놓고 자신들은 왜 힘들다고 하는 것일까. 한국이 이처럼 살기 좋은 나라가 된 것은 모두 우리가 좋은 문화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지 누가 해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인 본인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서로 미워할까? 지금 한반도는 남북을 막론하고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다. 남한은 ‘좌우’가 극명하게 분열되어 있고 특히 여권의 난맥상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래서 ‘이게 나라냐’는 자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온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매일 매일 경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곧 대폭발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이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핵을 포기할 수도, 갖고 있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처한 ‘김’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경제도 문제지만 김정은은 주위의 인물들을 모두 처형해 스스로 파국을 만들어 가고 있다. 게다가 느닷없이 창궐하는 폐렴균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김씨 세습체제가 내일 무너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우리를 둘러싼 형세가 이렇게 불리한데 이 곪을 대로 곪은 한반도의 기운이 한 번 터지면 앞으로 잘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한 번은 대폭발이 있어야 구악이 상당 부분 말소되기 때문이다. 바닥을 치면 이제 남은 일은 반등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누가 뭐래도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나라를 잘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한국의 미래가 밝다는 것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운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영화 ‘기생충’이 전 세계적으로 혁혁한 전과를 내고 있고 방탄소년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그 외에 소소한 분야에서 한국 젊은이들의 활약상이 눈부시다. 망할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 한국인들은 매우 선한 성품을 지녔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한국인들은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애국가나 학교 교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의 국가를 보면 애국가처럼 자연을 노래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혹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고 하면서 자연을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니던 학교의 교가를 보라. 노상 ‘○○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우리 학교’로 시작하지 않는가? 이처럼 한국인들은 자연과 가깝다. 그러니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와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선한 사회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조선조에서 이어받은 성리학적 폐단 때문이다. 성리학은 자신만이 진리를 갖고 있다는 배타주의가 매우 강하다.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작금의 좌우 분열과 상호 간의 멸시는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게 지금 터지기 직전이다. 이게 터지고 분해되면 한국인이 본래 갖고 있었던 선한 성품이 크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진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로 탈바꿈할 것이다.
  • 용인시에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조성된다

    용인시에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조성된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은이성지에서 안성시 미리내성지로 이어지는 순례길이 조성된다. 시는 순례길을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 용인시는 30일 천주교 수원교구청 대강당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명품 순례길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시와 수원교구청은 천주교 관련 역사적 명소인 은이성지와 손골·한덕골 성지, 고촌골 공소, 이윤일 요한 묘역 일대에 명품 순례길을 만들어 세계적인 순례 명소로 조성하기로 했다. 용인 양지면에 있는 은이성지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5세 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다. 또 김대건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했던 곳으로 당시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고 순교하기 전 공식적으로 마지막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미리내성지는 김대건 신부와 병오박해 때 처형된 순교자 열두 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용인시는 은이성지~미리내성지 일대에 2.0∼12.5㎞에 이르는 5개 코스의 순례길을 조성해 시민들이 사색하며 힐링할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올해 4억원의 예산으로 은이성지 순례길 조성을 위한 실시설계를 마치고 신덕고개·망덕고개·애덕고개에 쉼터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용인시는 명품 순례길을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관광코스로 개발하고 스탬프투어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국내·외 천주교 신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방문을 유도하기로 했다. 백군기 용인시장은 “은이성지~미리내성지 순례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용인시의 큰 유산이자 자산이다”라며 “종교를 넘어서 모든 시민이 사색하며 쉴 수 있는 명소가 되도록 명품 순례길을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훈 수원교구장은 “우리나라 최초 김대건 신부의 자취가 깃든 이곳에 명품 순례길을 조성하게 돼 뜻깊고 기쁘다”며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매우 어려운데 이 일대에 조성되는 천혜의 휴식공간이 치유 차원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명품 순례길 5개 코스는 ▲은이성지길 A코스(9.8㎞: 은이성지~신덕고개~곱든고개~문수봉~애덕고개~미리내성지) ▲은이성지길 B코스(12.5㎞: 은이성지~신덕고개~와우정사~망덕고개~애덕고개~고초골 피정의집) ▲피정의길 A코스(3.6㎞: 애덕고개~문수산터널 관리소~고초골 피정의집) ▲피정의길 B코스(10.2km: 망덕고개~애덕고개~성모영보수녀원 피정의집) ▲골배마실길(2.0㎞: 골배마실 성지~칠봉산) 등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김경희, 남편 장성택 처형 6년 만에 깜짝 등장

    김경희, 남편 장성택 처형 6년 만에 깜짝 등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가 남편 장성택이 처형된 이후 6년여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신변이상설을 잠재웠다.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김 위원장이 ‘백두혈통’의 건재함을 안팎에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6일 김 위원장이 삼지연극장에서 설 기념 공연을 관람했다고 전하며 수행한 간부로 김경희를 호명했다. 김경희가 김 위원장 부인 리설주 여사와 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 사이에 남색 한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사진도 공개됐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유일한 친동생이자 생존한 유일한 백두혈통 2세대인 김경희는 2011년 조카인 김 위원장 집권 이후 후견인 역할을 해 왔으나 2013년 9월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장성택이 같은 해 12월 ‘반혁명분자’로 체포돼 처형됐다는 설이 제기되면서 김경희 숙청설, 와병설이 난무했다. 미국 CNN은 2015년 김 위원장이 김경희 독살을 지시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경희가 6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낭설로 확인됐다. 앞서 국가정보원은 2017년 국회에 김경희가 평양 근교에서 은둔하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이 김경희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제재 장기화와 관련해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이후 백두혈통의 정통성과 단합된 모습을 주민들에게 보여 주며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보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고모부 장성택 처형과 형 김정남 암살 이후 김 위원장에게 생긴 가족 불화와 갈등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백두혈통 결속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홀로서기를 선포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경희가 지난 6년간 막후 후견인 역할을 지속해 왔다고 가정하면 이번 등장은 김경희 건강 악화의 증거라는 것이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포토] 김정은, 부인 리설주와 설 공연 관람

    [포토] 김정은, 부인 리설주와 설 공연 관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설 당일인 지난 25일 삼지연극장에서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명절 기념공연을 관람했다고 조선중앙TV가 26일 보도했다.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이자 처형된 장성택의 부인이었던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 리일환 노동당 부위원장, 조용원·김여정 당 제1부부장, 현송월 부부장이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김 위원장이 리설주와 공연장에 입장하고 있다. 리설주 왼쪽에 한복을 입은 김경희가 보인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연합뉴스
  • 태영호 “김경희 등장은 후견 끝나고 ‘김정은 홀로서기’ 알린 것”

    태영호 “김경희 등장은 후견 끝나고 ‘김정은 홀로서기’ 알린 것”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년 동안의 후견 정치를 종식하고 홀로서기를 선포한 것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이자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가 6년 4개월 만에 공석에 등장한 것이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26일 색다르게 분석했다. 태 전 공사는 김경희가 극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처형설은 가짜로 판명됐고, 설 명절을 지내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을 것이라면서 지난 6년 동안 북한 내부 정치흐름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 본다고 전했다. 200자 원고지 42장 분량인데 태 전 공사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면서 23장으로 줄였다.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면 전적으로 기자 잘못이다. 정리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1. 장성택파 숙청 누가 주도했나? 김경희의 역할 베일 벗나? 필자가 2016년 여름 한국으로 망명하자 국정원은 물론 외국 정보기관들까지 필자에게 장성택 숙청을 누가 주도했는지, 김경희가 장성택 처형에 동의했는지, 김경희의 생존 가능성, 권력기반이 약했던 김정은이 짧은 기간에 권력을 틀어쥘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이 질문들이 필자가 스스로에게 수십 번 던졌던 질문들이다. 가. 장성택은 정말 처형됐는가? 장성택 일당으로 분류되는 중앙당 행정부와 그 산하 54부에서 공개적으로 총살된 사람은 부부장과 과장급 11명이다. 나머지 수천명이 숙청돼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됐다. 그러나 장성택이 처형되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오히려 필자가 북한에 들어갔던 2014년 2월 상당수의 북한 엘리트들은 장성택이 처형되지 않았고 감금돼 있다고 했다. 당시 북한은 당내적으로 ‘장성택 여독 청산사업’을 3년동안 벌인다고 했다. 모든 간부들이 장성택이나 그 라인인 행정부, 54부와 있었던 일들을 자필로 빠짐 없이 써서 바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고위급 간부들은 장성택 여독 청산이 끝날 때까지는 장성택을 살려둔다는 것이었다. 물론 쉬쉬 하며 돌아다니는 소문이 그랬다. 지금도 장성택이 확실히 죽었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북한 내부를 살피면 장성택은 이제 없다고 볼수 있다. 장성택처럼 수십년 동안 북한 언론매체에 나와 있는 사람을 다 지워버린다는 것은 전 당, 전 국가적으로 해야 하는데 2015년까지 북한은 이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장성택이 처형됐다고 공개했으니 번복할 수도 없고, 장성택 여독 청산은 2016년 초 평양시 교외 대성구역에 건설했던 민속공원을 다 부숨으로써 마무리됐으며 이 때 장성택도 내부적으로 처형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이다.나. 장성택 숙청은 누가 주도했을까? 김경희가 발기하고 김정은이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에도 서술돼 있듯 장성택과 김정은의 관계는 원래 껄끄러웠다. 장성택의 마음은 김정은보다는 김정남에게 기울었다. 그러나 김경희는 오빠의 유언대로 김정은을 옹립할 수밖에 없었다. 장성택은 조카를 내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 되레 권력공백을 이용해 돈 되는 이권은 다 행정부로 집중시켰다. 눈치 빠른 이들은 장성택 주위에 몰려 들었다. 장성택이 야심가란 것을 제일 잘 아는 이는 당연히 아내였다. 김경희 모르게 장성택의 비리를 당 지도부가 수집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김경희가 장성택 숙청을 발기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보면 명백해진다. 첫째 아무리 장성택이 밉다고 하더라도 고모가 눈뜨고 보고 있는데 고모부를 제거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장성택 숙청은 김경희의 발기나 묵인, 혹은 적극적인 지지 없인 불가능하다. 둘째 장성택 일당이 숙청되면서 김경희 라인이 반사이득을 봤다.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최룡해, 박봉주, 조연준 등이다. 셋 모두 부침을 겪었지만 김경희의 지원 아래 살아났고, 장성택 숙청 이후 오히려 득세했다. 지난달 당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당 정치국 위원 5명이 물러났는데 박광호, 리수용, 김평해, 태종수, 안정수 등이다. 박광호를 빼고 4명은 수십년 동안 김경희 라인이었다. 당 국제사업담당 부위원장 자리에 리수용 대신 전 러시아대사 김형준이 임명됐는데 그 역시 대표적인 김경희 라인이다. 김경희가 70년대 당 국제사업부에서 일할 때 김형준이 지도원으로 들어갔고, 김경희가 과장으로 있던 유럽과에서 일했다. 김경희의 추천으로 당국제사업부 유럽담당과장, 외무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이번 당 전원회의 인사에까지 김경희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필자의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 388쪽에 나오는 개인적 경험도 김정은의 뒤에 김경희가 있음을 증명한다. 김정은의 형 김정철에게 필자가 위스키를 따르겠다고 건의했더니 ‘런던에 오기 전에 누구를 찾아가 인사를 했더니 자신은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 마시라고 해 과음하느라 혼났다’고 고백했다. 3층 서기실 간부들의 표정이 충격적이었는데 늘상 있는 일처럼 무덤덤했다. 그런데 26일에야 알게 됐다. 김정철이 찾아간 인물은 소문난 알코올 중독자 김경희였던 것 같다. 김경희는 2013년 12월 장성택 숙청 후 김씨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좋아하던 술도 딱 끊은 것 같다. 지난 6년 동안 김정은의 뒤를 김경희가 꾸준히 봐주고 있으며, 김정은이 중요한 결심을 채택할 때마다 김경희의 조언을 구한다는 것을 3층 서기실 측근들은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2. 김경희를 이 시점에 등장시킨 이유는? 김경희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김정은 체제의 위기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김정은의 건강 등에 이상 조짐이 보이니 갑자기 김경희를 등장시키고 김정은 유고시 김경희를 통해 혼란 과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필자에게 던진다. 일부는 지난 6년 동안 김경희를 가택연금시켜 힘을 다 빼놓았으니 이제는 내놓아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으니 김정은 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것을 시위한 것이 아니냐고도 묻는다. 그러나 지난 6년 동안 뒤에서 최고급위급들을 관리하고 후견인 역할을 해온 김경희를 갑자기 등장시킨 것은 오히려 김경희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다. 남편이 처형됐는데 아내가 어떻게 마음편하게 주민들 앞에 나타나겠는가? 김경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면 김정은은 영원히 고모를 독살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니 빨리 고모의 건재를 보여줘 고모부를 처형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고모의 결심이었으며 자신은 고모의 결심을 이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면 김경희는 왜 이런 점을 알면서 받아들였을까? 답은 역시 김씨 일가의 역할 분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책임은 자신이 지고 저승으로 가고 조카에게는 좋은 이미지만 남겨놓겠다는 것이다. 결국 고모와 조카는 장성택을 철저히 패륜아로 몰고 일가의 정통성을 세우는 데 역할 분담을 했고 향후 김정은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도 성공한 셈이다.3. 김경희의 등장이 향후 북한 정책에 미칠 영향은? 가. 김경희는 북한 정치의 꼰대 김경희는 북한에서 ‘혁명의 2 세대, 한국 식으로 표현하면 꼰대, 수구세력, 이념파, 강경파에 속한다. 생모 김정숙처럼 대단히 가부장적이며 체제의 도덕성, 순결성, 완벽성을 따진다.김정일의 술자리와 여성편력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고, ‘휘바람’이란 노래가 평양 학생 들 사이에서 대열합창곡으로 불리는 것을 보고 오빠에게 말해 혁명가요만 부르도록 지시하게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김경희는 어릴 때 생모 김정숙을 잃고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성격이 강해졌고 아버지 김일성이 정적을 어떻게 쳐내는가를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김정은은 어릴 때 별채에 갇혀 지내 이런 숙청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지만 김경희는 어릴 때부터 이것을 체험하면서 자랐다. 김정은의 무자비함은 대부분 김경희에게 넘어왔을 것이다. 나. 김경희 후견 정치의 종식, 김정은 홀로서기의 시작 지난해 두 차례 당전원회의를 계기로 김경희 라인의 많은 간부들이 집으로 들어갔다. 김경희 라인 대다수는 70대, 80대로 김경희보다 조금 위거나 동년배들이다. 지금 북한 당중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최룡해나 박봉주, 김형준 등인데 그 중 박봉주만 80대이다. 김경희의 나이가 46년생으로서 올해 74세이고 최룡해가 70세, 김형준이 71세이다. 지금 북한 권력서열에서 70대도 찾아보기 힘들다. 몇년 안에 70대는 다 들어가고 60대가 주종을 차지하게 되면 김정은과 간부들의 나이 격차가 30년으로 좁아질 것이며 향후 20년, 10년 안으로 또 좁아진다. 벌써 김재룡, 김덕훈 등 김경희가 전혀 모르는 간부들이 핵심요직에 들어서고 있다. 이렇게 꼰대, 수구세력이 빠지고 김경희의 입김도 빠지면 김정은, 김여정 등 3대가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게 돼 탄력성과 동시에 혼란도 커질 것이다. 향후 김정은의 고민은 소장파, 실용파와 북한의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지난달 김정은이 군단장들을 백두산에 데려가 향후 북한의 운명은 혁명의 대를 어떻게 이어놓는가에 달려 있다고 우는 소리를 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김정은의 강경정치 한계점이 다가 오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소장파가 좌회전 깜박이를 켜고 경적은 요란하게 울리면서 실제로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서서히 돌리지 않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수구와 이념은 물러나고 실용을 중시하는 소장파가 권력을 잡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순리다. 통일은 다가오고 있다. 향후 10년, 20년 안에 큰일이 일어난다. 지금부터 적극적인 대비를 해야 한다.
  • 김경희 건재 확인, 정성장 “사망설 주장한 이들 뭐라고 할까”

    김경희 건재 확인, 정성장 “사망설 주장한 이들 뭐라고 할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이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가 2013년 9월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 약 6년 4개월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끌고 있다. 김경희는 지난 25일 삼지연극장에서 진행된 설 명절 기념공연을 김정은, 리설주, 김여정 등과 함께 관람함으로써 안팎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녀의 마지막 공개 활동은 2013년 9월 9일 정권 수립 65주년 경축 노농적위군 열병식과 평양시군중대회 및 조선인민내무군 협주단 공연 참석이었다. 그런데 이 공개활동 전후에 김경희는 계속 신부전증, 고혈압, 뇌종양, 발가락 문제 등으로 수술과 치료를 받는 상황이었다. 김경희는 이미 2012년에 싱가포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고, 이듬해 5월에는 파리에서 뇌종양으로 치료를 받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11월까지는 러시아에서 발가락이 휘는 문제로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13년 12월 12일 남편 장성택이 처형된 사흘 뒤 발표된 김국태 당중앙검열위원회 위원장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후 스위스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했지만 건강이 더 나빠져 장기간 입원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한때 삭제된 김정일 기록영화에서도 김경희 영상이 복원됐고 201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선거 당선자 명단에 ‘김경희’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동명이인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며 신변이상설은 계속됐다. 국가정보원은 2017년 8월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를 통해 김경희가 평양 근교에서 은둔하며 신병치료 중이라고 밝혔고 통일부는 그가 지난해 4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대의원에 선출된 것으로 파악했다. 김경희의 건강 상태는 매우 위중했지만 서서히 회복된 것으로 알려졌고, 파리 유학 중이던 딸 장금송의 자살, 2013년 남편 처형 등을 겪으며 알코올 중독, 우울증, 치매 등을 앓고 있다는 설들이 제기돼 왔지만 이번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과거 마른 체격이었던 것에 비해 다소 살이 붙은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 동안에도 김경희는 김정은 기록영화에 한동안 계속 모습을 드러내 공개활동을 장기 중단한 것은 장성택 처형보다 건강 문제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지적했다. 김경희가 공석에 다시 등장하긴 했지만 그가 현재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어떤 직책도 맡고 있지 않고 2010년 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의에서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 32명 중 지금도 이 핵심 지위에 남아있는 인물은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 부위원장 한 명일 정도로 북한 지도부의 핵심 파워 엘리트가 거의 전면적으로 교체됐기 때문에 김경희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정 센터장은 봤다. 김경희가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도 장성택 처형과 김정남 암살 이후 김정은 가족의 불화와 갈등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백두혈통의 결속과 김정은 가족의 화합을 대외적으로 뽐내 김정은 위원장의 정면돌파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시점에 한 가지 돌아볼 대목은 백두혈통인 김경희가 사망했다면 북한이 이를 숨길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오랫동안 김경희 사망설을 주장했던 국내외 언론들이다. (강성산 전 북한 총리의 사위인) 탈북자 강명도씨, 강씨의 주장과 김경희 독살설을 보도한 미국 CNN, 2014년 10월 김경희 사망설을 주장한 산케이신문, 김경희가 자살했다고 주장한 NK지식인연대가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궁금하다고 정 센터장은 덧붙였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포토] 김정은 부부, 김여정·김경희까지 가족과 함께 설맞이 공연 관람

    [포토] 김정은 부부, 김여정·김경희까지 가족과 함께 설맞이 공연 관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설 당일인 25일 평양 삼지연극장에서 단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날 공연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내외,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우원장,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참석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이자 처형된 장성택의 부인이었던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가 2013년 9월 9일 처음 공개석상에 등장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 서슬 퍼런 나치 치하 베를린에서 조용히 항거한 세 여성

    서슬 퍼런 나치 치하 베를린에서 조용히 항거한 세 여성

    보통 나치 독일이 점령한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이 있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독일 베를린에서도 조용한 레지스탕스 활동이 있었다고 영국 BBC가 25일(현지시간) 전했다. 다른 이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엄청난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요란하지 않게 꾸준히 도운 여성 셋을 소개했다. 먼저 러스 윙켈만. 아버지가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는 등 가족 가운데 16명이 수용소로 보내져 희생됐다. 하지만 열네 살의 그녀는 유대인 혈통을 감추고 정원 움막에 2년이나 몸을 숨겨 살아남았다. 그녀는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공포를 지금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며 “처음에는 우리 모두 나치의 위험성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지만 차츰 분명해지더니 1938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본색을 드러냈다”고 돌아봤다. 윙켈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엘리자베트 샬롯테 글로에덴 같은 베를린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고발하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흔히 리젤롯테나 릴로로 알려져 있는 글로에덴은 남편 에리히와 함께 베를린 자택에 유대인들을 숨겨준 다음 독일을 빠져나갈 수 있는 안전한 여행권을 구해줬다. 부부는 1944년까지 무려 5000명 가까운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는데 그 해 7월 16일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프리츠 린데만 장군이 게슈타포에 검거되면서 정체가 발각됐다. 부부와 그녀의 어머니는 플로첸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변호사 견습생이었던 릴로는 직접 가족을 대변했다. 하지만 판사는 선고의 90%가 사형일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해서 가족 모두 길로틴 처형을 당했다. 끝으로 펠리시타스 나를로크인데 어느날 현관 문을 두들겨 도움을 요청한 유대인 여성 차바 베르그만에게 숨을곳을 마련해줬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이었지만 10대였던 그녀가 선뜻 문을 열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는 마침 딸이 여행 중이던 이웃 여성의 딸인척 살게 해주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녀는 “누구라도 나랑 똑같이 했을 것”이라고 머리를 숙였다. 차바의 손자 알렉스 하벨은 “그녀의 개입과 지원이 없었더라면 난 전쟁과 해방 이후 우리와 함께 20년을 더 사시다 가신 할머니를 못 ?을 것이다. 유대인 속담 ‘한 사람을 구하면 세상 전체를 구한 것과 마찬가지’를 가슴에 새기고 산다. 펠리스타스와 그 가족이 그 일을 해낸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남편 처형에도 건재한 北 김정은 위원장 고모 김경희, 함께 공연 보며 힘 보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 노동당 전 비서가 남편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건재한 사실이 26일 확인됐다. 남편이 처형된 이후 6년여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그동안의 신변 이상설을 잠재웠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 동지께서 리설주 여사와 함께 1월 25일 삼지연극장에서 설명절 기념공연을 관람하셨다”고 전했다.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리일환 노동당 부위원장, 조용원·김여정 당 제1부부장, 현송월 부부장이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방송은 김경희 동지도 관람했다며 최룡해 다음으로 호명했는데, 사진 확인 결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이자 처형된 장성택의 부인이었던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로 확인됐다. 1946년생인 김경희는 검은 한복을 입고 김정은과 같은 줄에 부인 리설주와 여동생 김여정 사이에 앉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일한 여동생으로 ‘백두혈통’의 대표 인물인 김경희가 건재함을 과시해 선대로부터 이어지는 김정은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행보로 해석된다.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 위원장의 유일한 친동생으로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후견인 역할을 했던 김경희가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은 2013년 9월 9일 이후 6년여만이다. 그는 김정일 체제에서 핵심 인사로 활동하고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후견인 역할을 했으나 장성택이 2013년 12월 처형된 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3년 9월 9일 김정은과 함께 정권 수립 65주년 경축 노농적위군 열병식에 참석하고 조선인민군내무군협주단 공연을 관람한 게 마지막 공개활동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숙청설까지 제기했지만, 이번 설 공연을 통해 건재함이 드러났다. 장성택 처형 이후 호적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정보원은 김경희가 평양 근교에서 은둔하면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다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한 적이 있다. 김경희는 당뇨와 알코올 중독 등으로 건강이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날 사진 속 상태는 크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는 김정은 위원장 부부와 김정은 위원장의 유일한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 사이에 나란히 앉음으로써 ‘살아있는 백두혈통’의 결집을 대내에 과시했다. 김정은과 김여정이 백두혈통 3세대라면, 김정일과 김경희는 2세대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경희는 유일하게 생존한 2세대로서 김정은이 백두혈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특히 김정은이 지난해 두차례 백두산을 등정하고 선대의 ‘항일빨치산’ 정신으로 미국의 제재 압박 등 여러 난제를 정면 돌파하자고 선언한 시점에 김경희의 재등장은 의미있다. 김경희와 김여정 등 북한의 백두혈통이 이번 공연에 총출동한 것은, 그간 김경희를 둘러싼 구설을 잠재울 뿐 아니라, 김씨 일가의 건재와 단합된 모습을 주민에 과시해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통신은 “관람자들은 김정은 동지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위대한 우리 당의 탁월한 정면돌파사상과 실천강령을 받들고 불굴의 혁명신념과 견인불발의 투쟁정신으로 당 창건 75돌이 되는 뜻깊은 올해에 사회주의강국건설사에 특기할 새로운 승리를 이룩해갈 혁명적 열의에 충만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남편 장성택 숙청 이후에도 김정은 고모는 건재, 7년만 공개석상

    남편 장성택 숙청 이후에도 김정은 고모는 건재, 7년만 공개석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 노동당 전 비서가 남편 장성택 처형 이후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조선중앙통신은 26일 “김정은 동지께서 리설주 여사와 함께 1월 25일 삼지연극장에서 설명절 기념공연을 관람하셨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리일환 노동당 부위원장, 조용원·김여정 당 제1부부장, 현송월 부부장이 함께 공연을 관람했다. 북한 방송은 김경희 동지도 관람했다며 최룡해 다음으로 호명했는데, 사진 확인 결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이자 처형된 장성택의 부인이었던 김경희 전 노동당 비서로 확인됐다. 1946년생인 김경희는 검은 한복을 입고 김정은과 같은 줄에 부인 리설주와 여동생 김여정 사이에 앉았다.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는 김정일 체제에서 핵심 인사로 활동하고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후견인 역할을 했으나 장성택이 2013년 12월 처형된 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3년 9월 9일 김정은과 함께 정권 수립 65주년 경축 노농적위군 열병식에 참석하고 조선인민군내무군협주단 공연을 관람한 게 마지막 공개활동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숙청설까지 제기했지만 이번 설 공연을 통해 건재함이 드러났다. 장성택 처형 이후에는 호적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정보원은 김경희가 평양 근교에서 은둔하면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다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한 적이 있다. 특히 이번 공연에는 김경희뿐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도 참석, 북한의 ‘백두혈통’이 총출동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김경희를 비롯한 백두혈통과 공연을 함께 관람한 것은 올해 미국과의 정면돌파를 앞두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백두혈통을 상징하는 백두산에 연이어 등정하며 선대의 항일빨치산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하는 등 강력한 체제 수호 의지를 피력했다. 통신은 “관람자들은 김정은 동지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위대한 우리 당의 탁월한 정면돌파사상과 실천강령을 받들고 불굴의 혁명신념과 견인불발의 투쟁정신으로 당 창건 75돌이 되는 뜻깊은 올해에 사회주의강국건설사에 특기할 새로운 승리를 이룩해갈 혁명적 열의에 충만되어 있었다”고 전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쿠르드족의 평화 갈망했던 헤브린 칼라프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쿠르드족의 평화 갈망했던 헤브린 칼라프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헤브린 칼라프(35)는 시리아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떠오르는 샛별 정치인이었다. 긴 갈색 머리에 보조개가 파인 얼굴의 그녀는 2018년 미래 시리아 당(FSP)을 창당하고 전선이나 다를 바 없는 시리아 북부 라까 일대를 누볐다. 라까는 시리아 반군에 이어 이슬람 국가(IS)가 마지막 수도로 삼아 최후의 항전을 했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 12일(이하 현지시간) 칼라프는 시리아 북부와 터키 국경을 나란히 달리는 M4 고속도로를 달려 라까로 가던 길이었다. 방탄 도요타 SUV의 뒷좌석에 앉아 창 밖으로 9년 내전에 할퀸 고향 마을들의 상흔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터키군의 공격이 끝난 지 사흘 되는 시점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미군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밝힌 지 얼마 안돼 터키군이 마음 놓고 국경을 넘어와 유린한 것이었다. 칼라프는 정치적 회합에 참석하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쿠르드족, 아랍인, 투르크멘족 등 종교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자고 호소해 분열과 갈등에 익숙한 이 지역에 꼭 필요한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 지역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관용을 목놓아 호소하기도 했다.칼라프는 터키 국경에서 10㎞ 떨어진 테릭이란 곳에서 살았는데 쿠르드족 자치 지역 ‘로야바(Rojava)’ 가운데 하나였다. 로야바는 다양성, 자치, 여성의 인권을 중시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정부는 9년을 끈 내전의 와중에도 영토를 조금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쿠르드족에 자율권을 부여했다. 쿠르드족과 아사드 정부는 불가침 협정을 맺어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IS가 발호하면서 상황은 달라졌고 쿠르드족 전사들은 1만 1000명의 목숨을 희생해 나라의 3분의 1에서 IS 전사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찾아온 평화는 미군 철수와 터키군의 공격으로 지난해 10월 초 산산조각 났다. 칼라프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탈 아비아드 마을 근처의 고속도로에서 터키의 지원을 받는 무장세력 아흐라 알 샤르퀴야의 매복 공격을 받아 세상을 등졌다. 도요타 SUV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 괴한들은 차량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한 괴한이 죽어 누운 기사를 향해 “또 한 마리 달아나던 돼지를 국민군이 박멸했다”고 외쳤다. 이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여인 목소리가 들리는데 나중에 그의 어머니 수아드 무함마드는 딸의 목소리가 틀림 없다고 확인했다.미국 음악잡지 롤링스톤의 제이슨 모틀락은 지난달 18일 장문의 현지 르포를 통해 어머니 수아드가 “딸의 피가 모든 쿠르드인, 쿠르드족과 아랍인, 기독교도를 단결시키길 바란다. 헤브린은 이걸 위해 혼을 희생했다. 세히드 나미린(순교자는 죽지 않는다)!”라고 외쳤다고 전했다. 그녀의 집 벽에는 두 남자형제, 큰딸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터키에서 쿠르드족의 자치를 위해 싸우다 숨졌다고 했다. 여기에 헤브린까지 더해졌다. 다만 어머니는 헤브린은 “폭력이 먹힌다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총알에도 결코 손을 댄 적이 없다”고 말했다. FSP 사무총장으로서 그녀는 여러 부족 지도자들을 만나 신뢰를 구축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희생자들을 위한 워크숍을 열고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진 것도 없이 늘 여성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칼라프는 다수의 총격을 받고 다리와 두개골에 골절이 있었으며 처형 전 끌려다닌 듯 엉덩이 쪽에 상처가 많았다. 그녀와 기사, 비서, 그리고 적어도 8명이 M4 고속도로에서 처형 당하듯 희생됐다. 어머니는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많았고 목과 귀, 손목 등에서 장신구를 빼냈다고 했다. 무함마드는 “그녀는 터키에도, 누구에게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은 에르도안(터키 총리)이 이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느냐”고 절규했다. 아래 동영상은 영국 BBC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아흐라 알샤르퀴야의 거짓 해명을 조목조목 파헤친 9분 분량의 탐사 보도물로 13일 공개됐다. 평화를 갈구했던 그녀의 안식을 기원할 따름이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해리스 美대사에게 전하는 ‘주한명군’의 빗나간 동맹 스토리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해리스 美대사에게 전하는 ‘주한명군’의 빗나간 동맹 스토리

    중동 파병 압박·분담금 5배 인상 요구 한국의 자율적 주권 부정하는 언사 잦아 “근래 드문 총독형 외교관” 지적 많아 외세 방어 외쳤던 명나라 모문룡의 군대 주둔비·상납 요구에 병자호란의 빌미 예속 스스로 끊는 민중의 복수 기억해야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요즘 보기 드문 ‘총독형’ 외교관이다. 부임 이래 방위비 분담금, 한국군의 파병, 남북 관계, 한일 관계 등 한미 현안과 관련해 보인 그의 언행은 해방 후 미 군정장관을 빼닮았다. 불과 1년 1개월 전 방위비 분담금을 10억 달러 이상으로 증액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했던 그는 채 1년도 안 돼 한국은 분담금을 다섯 배는 증액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뚜렷한 근거도 없다. 오로지 한미 동맹 강화가 이유였다. 그가 말하는 동맹의 강화란 한국의 미국에 대한 예속의 강화를 의미하는 듯했다. 지난 7일 해리스 대사는 말했다. “나는 한국이 중동에 파병하기를 희망한다.” 황제가 속국의 왕에게 지시할 때 쓰는 ‘점잖은’ 명령이다. 한국군을 미군 예하 부대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하기 힘든 말이었다. 8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이나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 등재 추진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미국과 협의할 문제다.” 한국 정부의 자율성, 한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언사였다.배경이 궁금하다. 그는 주한미군을 통할하던 태평양사령부 통합사령관이었다.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은 주한미군에 있으니 그의 눈에 한국은 주권국가가 아닐 수 있다. 그는 툭 하면 주한미군 철수를 앞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하곤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일본인이라는 혈통도 개운치 않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거나 지배했다. 막무가내의 해리스를 보면 400년 전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떠오른다. 조선 땅에 주둔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군량과 은을 뜯어내고 명청전쟁에 조선군을 동원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모문룡의 군대는 호란의 빌미가 됐고, 조선은 두 차례나 쑥대밭이 됐다.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는 2013년 펴낸 ‘역사평설-병자호란’에서 ‘주한명군’(駐韓明軍)이라는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표현을 선보였다. 1621년부터 평안북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의 군대(‘모병’)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른바 ‘주한명군’은 1637년 청군이 정벌하기까지 청(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준다며 주둔비와 작전 비용은 물론 각종 상납까지 요구했다. 중원을 노리던 후금(청)에 가도의 ‘주한명군’은 목젖을 노리는 송곳이었다. 중원으로 나아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요동이었다. 대체할 수 없는 이 병참선을 위협하는 해상 요충지가 가도였다. 또 ‘주한명군’의 존재는 후금에 정복된 지역에서 한족의 동요를 부추겨 후방을 불안케 했다. 한족들은 이들을 믿고 조선이나 가도로 도망쳐 후금에 저항했다. 모문룡이 군사작전보다는 조선을 등치며 ‘해상 천자’ 놀음에 빠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놀고 있다 해도 칼날은 칼날. 그것을 유지하고 강화한 게 조선이었다. 1627년 중원 정벌에 앞서 조선을 침략(정묘호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조선을 정벌한 후 후금은 ‘주한명군’에 대한 조선의 지원 중단을 조약으로 명기했다. 가도의 명군은 애초 패잔병 무리였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연패하던 명이 1621년 요동마저 잃게 되자 영관급 장교 모문룡이 떠도는 패잔병을 모아 편성한 부대였다. ‘모병’은 평안북도 용천, 의주 등지를 떠돌며 노략질로 연명했다. ‘부모의 나라’ 군대라는 이유로 행패를 징치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모문룡을 설득도 하고 어르기도 해 가도를 내줬다. 명과 후금을 모두 자극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후금으로서도 모병이 조선의 청북(청천강 북쪽)에서 활개를 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광해군 시절 ‘찬밥’이었던 ‘모병’은 인조가 즉위하자 반정세력의 구세주가 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명나라의 책봉이었다. 책봉이 늦어지면 ‘이괄의 난’ 같은 또 다른 반란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은 책봉을 차일피일 미뤘다. 조카가 삼촌을 내쫓은 것이었으니 책봉할 명분도 약했고, 반정세력 내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날 만큼 불안정한 정권이었으니 섣불리 책봉했다가는 망신만 살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명에 책봉 사절을 보내려 해도 요동이 막혀 험난한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길목에 있는 것이 가도였다. 인조는 명의 실세를 자처하는 모문룡에게 매달려 로비를 했다. 20세기 한국의 쿠데타 정권이 미국의 인정을 받고자 주한 미국대사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모문룡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 조선으로부터 군량은 물론 온갖 뇌물을 챙겼다. 그것으로 당시 명 조정의 최고 실세였던 환관 위충현을 구워삶아 놓았다. 모병의 위세가 커질수록 조선은 등골이 빠졌다. 인조 즉위 원년(1623년) 조선은 모병에 쌀 6만 석을 지원했다. 매년 그 규모가 늘어나, 인조가 명의 책봉을 받은 이듬해(1626년)엔 16만 석을 제공했다. 조선은 이 ‘모문룡 군량(모량)’을 채우기 위해 특별세(토지 1결당 쌀 1말 5되)를 신설해야 했다. 모문룡은 이 밖에도 수시로 평안도 일대의 수령들에게 은과 군량을 요구했다. 수령들이 거부하면 병사를 동원해 창고를 약탈했다. 당시 평안감사 윤훤은 ‘온 나라 식량의 절반이 모문룡 휘하에게 넘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여기에 한족 유민 10만여 명이 ‘주한명군’을 믿고, 평안도를 쓸고 다니며 곡식은 물론 개, 돼지, 닭까지 노략질했다. 이정구는 이들을 ‘조선의 홍건적’이라고 한탄했다. 오죽하면 ‘청북’(청천강 이북 지역)을 포기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모문룡은 가끔 후금을 정벌하겠다며 원정군을 상륙시켰다. 물론 후금과 전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군량과 물자를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병은 함경도까지 돌아다니며 각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은 약탈하던 모병을 체포해 곤장을 쳐 내쫓았지만, 모문룡의 항의를 받은 인조는 이완을 강등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김류로 하여금 평안도 안주에 모문룡 공덕비를 세우도록 했다. 정묘호란 때 모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량이나 인삼 따위를 뜯어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정묘호란 이듬해(1628년) 11월엔 명나라로 가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에게서 은과 인삼 등 조공물을 빼앗기도 했다. 1629년 명의 병부상서 원숭환은 모문룡을 제거한다.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할 조선이 모문룡의 등쌀에 망해버릴까 걱정해서였다. 이후 ‘벗겨먹기’는 주춤했지만, 원숭환이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처형당하자 즉각 부활했다. 후임 손원화는 1630년 11월 조선 조정에 ‘군량과 전마 2000필을 공급하라’고 재촉했다. 가도의 도독 유흥치는 툭 하면 평안도로 나와 접대를 요구했고, 명군은 노략질과 부녀자 겁탈을 일삼았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1633년 1월 ‘가도 정벌에 필요한 전함 300척과 배를 조종할 수군을 의주 포구로 가져와라. 듣지 않으면 사신 왕래를 끊겠다’고 통보했다. 인조는 쿠데타의 기치였던 ‘숭명’의 이념을 버릴 수 없었다. 호란으로 말미암은 국토의 유린은 망각한 지 오래였다. 인조는 허황된 결단을 했다. “단교는 물론 전쟁도 불사하겠다”, “오랑캐가 침략해 오면 자신이 전방으로 나아가 장사들을 독려하리라”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해 가도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진압군을 파견해 반란군을 추격하기도 했다. 1633년 6월 여순을 함락한 후금이 ‘가도를 돕지 말라’고 다시 경고했다. 그러나 인조는 10월 가도의 부총병 정룡의 요구에 따라 군량을 제공했다. 1636년 11월 25일 결국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선언했다. 병자호란이었다. 그가 환구단에서 고한 전쟁의 이유 6가지 가운데 4개는 ‘주한명군’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은 다시 한 번 쑥대밭이 됐다. 인조는 청 태종의 ‘신하’가 됐다. 4개월 뒤 인조는 황해도의 병선 100척과 수군 3000여명을 징발했다. 가도의 명군을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청연합군의 지휘관은 1633년 조선군이 토벌하려던 공유덕이었다. 가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청군보다 더 심하게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병자록’). ‘주한명군’이 저지른 패악질에 대한 민중의 복수였다. 상대를 예속시키고 수탈하는, ‘빗나간’ 동맹의 결과이기도 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평화주의자 쿠르드 여성 정치인의 잔혹한 죽음… BBC “처형당했다”

    평화주의자 쿠르드 여성 정치인의 잔혹한 죽음… BBC “처형당했다”

    터키가 국경선 넘던 지난해 10월 칼라프 피살시리아의 유명한 쿠르드족 여성 정치인 헤브린 칼라프(34)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터키가 지원하는 무장세력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고 영국 공영방송 BBC가 12일(현지시간)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미군 철수를 발표한 며칠 후인 지난해 10월 12일 오전 6시 30분에서 7시 사이, 칼라프는 차에서 끌려나와 터키가 지원하는 반군세력인 아흐라르 알샤르키야 무장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칼라프는 시리아에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전진시키겠다는 목표로 미래시리아당(FSP) 창당을 도왔던 쿠르드 여성 정치인이라고 미국 대중문화 매체 롤링스톤이 전했다. 터키 지원 무장세력, 처형 모습 영상 올려칼라프는 이날 오전 5시 30분쯤 알하사카에서 자신의 도요타 SUV를 타고 출발, M4 고속도로를 따라 정치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쿠르드족이 장악한 최대 도시인 라카로 향했다. 이날은 또 터키군이 시리아국가군(SNA)의 안내를 받으며 국경을 넘었다. SNA는 2019년 조직된 반군으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시리아 정부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SNA의 한 무장세력인 아흐라르 가 ‘그날 일’을 텔레그램에 동영상으로 올렸다. 아흐라르 알샤르키야는 오전 6시30분에서 7시 사이 시리아 북부 고속도로 옆에서 한 사람이 처형당하는 모습의 영상을 텔레그램에 공개했다. 위성사진으로 주변 지형과 물체들을 판독한 결과 동영상이 촬영된 곳은 티르와지야 검문소와 일치했다. 이때는 터키군은 에르도안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 국경선에서 30km를 더 침입해 들어와 쿠르드족을 쫓아내는 등 ‘청소’를 하던 시기였다.동영상을 보면 차량은 왼쪽에 총탄 자국이 가득하고 타이어는 터져나갔다. 그러나 칼라프가 앉는 자리 창문은 방탄 처리가 되어서 내부가 멀쩡했다. 아흐라르 알샤키야는 BBC 아랍뉴스에 “다수의 전사들이 그날 티르와지야 검문소에 있었다”며 “그들이 차량을 향한 사격이 있었고, 이를 중지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들은 “칼라프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며 “그녀가 어떻게 피살됐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터키 지원세력이 올린 동영상, 범행 장소 찾아동영상에는 차량 옆에 피를 흘리는 운전사 파르하드 라마단의 모습도 보인다. 이때 차 안에서 여성 목소리가 들렸다. BBC가 “그 목소리를 증폭했고, 이 목소리를 칼라파의 어머니 수아드 모함메드에게 들려주니 ‘이건 칼라파의 목소리가 맞다’고 확인해주었다”고 설명했다. BBC가 아흐라르 알샤르키야가 올린 동영상과 증거를 분석한 결과 칼리프의 차량 주변에 아흐라르 알샤르키야 전사들이 몰려있다. 목격자인 현지 농부는 “오전 7시 30분쯤 검문소 점거할 때 옆을 지나갔다. 시체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다. 여자 시신이 차에서 5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얼굴은 완전히 뭉개졌고, 다리는 부러진 듯 정말 심하게 손상돼 있었다”며 “보복 당할까봐 현지 주민들은 차량에 있는 시신을 옮기는 것을 도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티르와지야 검문소에서 9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BBC “칼라프, 처형당해”… ‘터키 세력’ 혐의 부인칼라프의 시신은 이날 낮 12시쯤 다른 3명의 시신은 함께 시리아 북부 말리키야 군병원으로 운송되었다. 병원의 의료 보고서 따르면 칼라파는 20발 이상 총상을 입었고, 두 다리는 심한 물리적 가격으로 부러져 있었다. 의료 보고서와 동영상을 분석한 결과 칼라프는 차에서 살아있는 채로 끌려 나왔고, 말을 하는 것으로 미뤄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있었지만 물리적 공격을 받았고, 차량 바깥에서 아흐라르 알샤르키야 전사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BBC가 결론지었다. 이는 사실상 전쟁 범죄이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해 아흐라르 알샤르키야는 BBC에 보낸 성명에서 “그날 M4도로를 막은 그룹은 허가를 받지 않은 것으로 재판을 받을 것”이라면서도 “우리는 칼라프의 사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다시 말한다”고 밝혔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21년 동안 런던 이층버스에서 밤을 보낸 노숙인 ‘서니’ 스토리

    21년 동안 런던 이층버스에서 밤을 보낸 노숙인 ‘서니’ 스토리

    영국 런던의 명물 이층버스에서 잠을 청하는 나이지리아 난민 얘기는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21년 동안 그렇게 했단다. 프리랜서 기자 베네티아 멘지스는 지난 1995년 영국에 첫 발을 디딘 ‘서니’란 가명의 58세 난민과 함께 지난 일년 동안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나눈 얘기들을 12일 BBC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다 닳아 헤진 런던의 대중교통 이용권 ‘오이스터 카드’에 그가 적어놓은 성경 문구가 눈길을 붙든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의 예수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기사들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오이스터 카드를 감지기에 갖다댄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일층 뒤쪽 좌석이다. 가방을 가슴에 품고 잠을 청한다. 붐비면 관광객 등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간다. 새벽 3~4시쯤이면 취객들이 몰려들어 그에겐 가장 힘든 시간이다. 늘상 이층버스에서 밤을 지새다보니 런던의 축소판처럼 여겨진다. 크게 세 부류를 만나는데 이른 새벽 도심 빌딩을 청소하기 위해 출근하는 이들, 클럽에서 밤새 놀다 귀가하는 토종 영국인, 어디에도 갈곳 없는 노숙자들이다. 술이 얼큰해진 이들이 아무리 짓까불어도 서니는 화를 내지 않는다. 맥주 몇 잔에 계층 간 장벽도 눈 녹듯 사라지는 일을 종종 경험한다.젊을 적 그는 나이지리아 감옥에서 사형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죄목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는 것이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던 어느날 간수가 족쇄를 풀어줘 달아났다. 가족과 친지들이 간수를 매수했던 것이다. 항공사 관계자까지 매수해 런던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망명 신청은 계속 거부당했다. 철권 통치가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해서 이층버스를 도피처로 삼았고, 속절 없이 21년이 흘렀다. 교회의 여신도가 그에게 한달 짜리 오이스터 카드를 계속 건넸다. 그녀가 없으면 다른 친구들이 돌아가며 호의를 베풀었다. 교회 허드렛일을 돕고, 웨스트민스터 도서관에 가 책들을 뒤적이며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남은 음식을 싸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심야 이층버스 노선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북쪽 외곽 우드 그린까지 가는 N29 번이다. 24시간 내내 운행하며 방해받지 않고 잠을 이룰 수 있다. 운좋게 착한 기사를 만나면 종점 교대 시간에 그를 쫓아내지 않아 푹 잠들기도 한다. 여성 홈리스들도 성폭행을 당할 위험이 있는 거리보다 버스를 찾아든다.그가 아래층을 선호하는 것은 가족 단위나 어르신 승객이 많아 흉악한 일이 벌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뒷좌석도 머리를 편히 뒤로 젖힐 좌석은 아니지만 마음의 평안을 찾기에 좋다. 하지만 덜컹거림이나 네온 불빛, 시끄러운 폭주족들, 엔진 굉음 등이 그의 눈꺼풀을 떨게 한다. 두 시간만 푹 잠들면 성공했다고 본다. 새벽 버스에서 내린 그는 레스터 광장에 있는 맥도널드 점포로 향한다. 구걸하지는 않지만 친절한 직원이 남은 먹거리를 건네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면도를 할 수 있어서다. 손님이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N29 노선의 중간에 있는 해링기 맥도널드 지점은 훨씬 덜 붐벼 테이블 위에 머리를 댄 채 잠을 청할 수 있다. 성탄절 연휴에는 버스 대신 교회 등이 제공하는 야간 쉼터에서 겨울밤을 버틴다. 런던에만 일곱 곳이 있는데 각기 다른 방향에 있어 서니는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처럼 노숙자들이 저녁 출입 문이 잠기기 전에 침상에 깃들려고 떠돈다고 했다. 눈치가 빠삭해져 이제는 얼굴만 보면 안전한지 여부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알아채며 사고뭉치 10대들, 인종주의자들이라고 판단되면 재빨리 피한다. 취한 축구 팬들, 베일 쓴 여성, 지친 통근족,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이들, 갱단원들을 보면 일단 피하고 본다.그가 다니는 레스터 광장 근처 노트르담 드 프랑스 교회 법무팀이 알아보니 그가 20년 동안 영국에 거주한 사실을 사람들이 증명하면 체류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시설 이용료, 은행 잔고 증명, 임대 계약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는 늘 서류나 문서 작업을 피하며 살아왔다. 친절한 기사들이 지지하는 편지를 써주거나 “한결같이 버스를 이용한 승객”이라고 증언하는 편지를 써줬다. 교회들에서도 도움이 되는 서류를 만들어줬고 그가 등장하는 자선행사 사진 등을 구해왔다. 그렇게 해서 55세이던 2017년 떠나거나 머무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그에게 주어졌다. 일년 뒤 그는 영국에 남아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이제 그는 사우스 런던 외곽에 정착했다. 지금도 가끔 심야 버스에 오른다. 마음이 편해져서다. 나이가 들어 버스에서 내릴 때도 무릎을 부여잡고 조심조심 내려선다.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의 고단한 싸움이 녹록지 않은 세월을 이겨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사진 베네티아 멘지스 제공 BBC 홈페이지 캡처
  • [단독]인권위, 강제북송 북한 선원 긴급구제신청 기각

    [단독]인권위, 강제북송 북한 선원 긴급구제신청 기각

    “기본권 침해 가능성만으로 개입 어려워”“이미 북송된 시점, 구제 실효성도 불분명”“북송 선원 상태 확인 노력 계속 하겠다”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1월 강제 북송된 북한 선원에 대한 긴급구제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권위는 북송된 선원들의 기본권 침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면서도 추정만으로 긴급구제에 나서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다만 선원들을 북으로 보낸 정부의 대처가 적절했는지에 대해 계속 조사하기로 했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상임위원회를 열고 북한 선원 북송 관련 긴급구제 신청 사건을 심의한 결과, 긴급구제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지난 2일 이런 사실을 신청인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측에 통지했다. 인권위는 “북한의 사법체계 현실에 대한 유엔(UN) 등 국제사회의 우려 및 각종 보고서 등을 종합해 보면, 정부가 (지난해 11월 7일) 북송한 선원들에 대한 기본권 침해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우나 그와 같은 추정만으로는 이번 사건이 국가인권위원회법상 긴급구제 조치 요건인 ‘인권침해 가능성의 개연성’과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의 발생’ 모두를 충족하는 경우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또 “긴급구제 조치 판단을 위해서는 북한으로 추방된 2명의 북한 선원이 국제사회 및 여러 시민단체의 우려와 같이 인도적이고 합법적인 법원의 판단을 거치지 않은 채 고문이나 공개 처형 등의 위기 상황에 있는 등 피해 발생이 임박했다거나 위원회의 개입으로 피해의 확대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러나 현재 정부기관 및 유엔 인권기구 등을 통한 조사만으로는 북송 선원들의 정확한 근황 및 사법 절차 단계 등을 확인할 수 없고, 이미 북송이 완료된 시점 이후의 단계에서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자에 대한 위원회의 구제 가능성 및 실효성 여부도 분명하지 않다”고 밝혔다. 다만 인권위는 “북한 선원 북송 사건과 관련한 정부 대처의 적절성 여부, 북송 선원들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 등은 지속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기로 한다”고 말했다.앞서 통일부는 지난해 11월 2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나포한 선원 2명을 같은 달 7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이 2명이 동해에서 조업 중인 오징어잡이 배에서 동료 승선원 16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전했다. 당시 통일부는 “이들은 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를 저질러 보호 대상이 아니며, 우리 사회 편입 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되고 흉악 범죄자로서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서 강제송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14일 국제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입장문을 통해 “범죄행위가 있다고 해서 개인의 난민 지위가 자동 취소되는 것은 아니며, 범죄행위는 난민 지위를 반드시 인정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면서 “강제송환 금지 원칙은 고문이나 기타 부당 대우에 대한 절대적인 금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범죄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고 정부를 비판한 적이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금요칼럼] 추악한 ‘근대’와 영원한 ‘근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추악한 ‘근대’와 영원한 ‘근태’/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지금은 많이 약해졌지만, 예전에는 ‘중세 암흑기’라는 말이 널리 회자했다. 로마 멸망 후 르네상스 전 약 1000년을 인류 문명사의 발전을 가로막은 암울한 시기로 규정한 근대주의 시각의 결정판이다. 그런 암흑을 몰아내고 문명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환골탈태시킨 근대(modern)를 한껏 드높이는 의미를 행간에 담은 말이기도 하다. 솔직히 근대라는 이름의 다양한 혁명이 없었다면 고도로 진화한 현재의 문명도 이처럼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중세를 비하하고 근대를 치켜세우는 심리가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여전하다. ”당신은 참 중세적이다”라고 할 때, 그것이 부정적 의미로 작동하는 현실은 그 좋은 방증이다. 그런데 중세만도 못한 근대도 적지 않다. 겉으로는 아주 근대화한 것처럼 말쑥해 보일지 모르나 근대의 가면 뒤에 숨은 내면의 본질이 더 추악한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고문 행위를 꼽을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고문 자체가 합법이었다.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고문만큼 확실하고 편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극한 고통에서는 누구라도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도 한몫 거들었다. 근대는 바로 이런 비인간적 고문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성문화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을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법 이면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온전히 포기하기에는 고문의 유용성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체로 중세의 고문이 공개적이었던 데 비해 근대의 고문은 주로 은밀한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한 예로 조선시대에는 대역 죄인일지라도 피의자에 대한 심문은 공개적으로 행했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도 같은 장소에서 발생했다. 피의자의 공초 내용 또한 거의 그대로 기록으로 남았다. 둘러선 관원도 많았다. 지방이라면 동네 사람들도 고문 광경을 줄곧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차피 사형을 면치 못하리라 판단이 들면 피의자 입장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절규하듯 외칠 수 있었다. 자신의 진심을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었다. 저주의 말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고문 중에 죽거나 공개 처형을 당하더라도 현장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왜 죽는지 당당하게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억울하게 죽을 수는 있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근대의 고문은 달랐다. 법으로 금지됐으니 공개적으로는 어떤 고문도 불가능했다. 그 대신 외부와 단절된 밀실로 고문의 장소가 바뀌었다. 제3의 눈동자가 전혀 없는 그곳에서 피의자는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일방적 폭력 앞에서 급격히 인간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차라리 정신적으로 힘이 나겠는데, 고립무원의 밀실에서는 심리적 공포가 몇 배로 올라간다. 전해 듣기로는 고문실에서 가장 힘든 때가 “너 여기서 이렇게 죽어도 아무도 몰라”라고 고문자가 귓속말로 속삭일 때였다고 한다. 이게 바로 추악한 근대의 한 사례다. 지난 월요일은 김근태 전 의원의 8주기였다. 20일이 넘도록 오롯이 감내한 잔혹한 고문의 후유증과 함께 그는 결국 눈을 감았다. 당시 고문에 의한 조서임을 뻔히 알면서도 기소한 검사는 검찰 조직 그 자체였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비슷한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사 지휘와 기소를 독점한 검찰이 불법 고문 행위를 밥 먹듯 묵인했으니, 한편으로는 헌법을 일상적으로 부정한 범법 집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합법을 가장한 추악한 근대 검찰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마침 같은 날인 30일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 이제 추악한 근대를 청산하고 민주화와 함께 영원히 ‘근태’를 기억할 2020년대의 밝은 해가 막 떠올랐다.
  • [2030 세대] 두 교황/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2030 세대] 두 교황/김현집 미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영화 ‘두 교황’을 보았다. 상영관이 많지 않아 어렵게 찾아 아침 일찍 보고 왔다. 베네딕토 16세와 현재 교황인 프란치스코 두 교황 얘기다. 두 사람의 다름을 다룬 영화다. 두 지성인의 진지한 대화를 듣고 나오니 웬만한 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신학 교수였던 베네딕토는 정통을 지키고 싶어 하는 보수의 상징으로, 프란치스코는 수수하고 서민적인 진보의 상징으로 나온다. 호화로운 예복을 갖춰 입고 로마 외곽에 있는 아름다운 여름 별장과 바티칸 사이를 헬리콥터로 오가는 베네딕토를 보고 조용히 미소 짓는 프란치스코에게 카메라의 앵글이 맞춰진다. 감독의 시선은 프란치스코 편에서 베네딕토를 바라보는 것으로 고정돼 있다. 이런 게 순방향일까. 프란치스코의 맑고 진지한 모습에 베네딕토가 점차 동화돼 간다는 건 사실 좀 뻔한 영화 구도다. 같이 탱고도 추고 피자도 시켜 먹고 축구도 본다. 이러한 소박한 모습에 우리는 흡족해진다. 이 기분은 무얼까. 너나 모두 별다를 게 없다는, 같은 인간이라는 공감? 영화에서 프란치스코는 낙태와 동성애 같은 이슈에 진보적인 의견을 보인다. 베네딕토의 답은 묻힌다. 신학 교수로 20년을 지내고 긴 시간 신과 인간에 대해 사색한 ‘실제 베네딕토’는 무어라고 답했을지 알고 싶다. 프란치스코는 말한다. 인류는 거대한 하나다. 지중해에서 목숨을 잃는 난민도 도와야 한다. 그럼에도 유럽에 들어오는 난민의 물결을 막고자 하는 사람들 중 누가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을 바꿨을지 궁금하다. 12월 치러진 영국의 총선에서 패배한 야당 대표 제러미 코빈은 패배 후 말했다, “우리가 논쟁은 이겼다”고. 영어에 ‘에코 체임버’, 즉 ‘메아리방’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에게 동조하는 주장과 생각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럼으로써 편견이 더 깊어지는 상황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다음 학기에 그리스 비극 강의가 있다. 그리스 비극은 어떤 관점도 의도해 이끌지 않는다. 이를테면 반역자인 가족 편을 들지, 조국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아들이 처형하는 게 옳은지, 존속살해는 잘못인지 묻는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비극이 민주주의를 막 설립한 아테네 국민들에게 ‘자유 의견’을 훈련할 목적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두 교황’은 따뜻한 영화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두 남자와 두 시간 함께하면 잃었던 초심을 바로잡게 된다. 다만 누가 누군가를 흡수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진정 두 세계가 충돌하는 것, 서로 상충하는 충정 사이의 고난을 보고 싶다. 뱀발 같지만, 그 전날 본 영화 ‘아이리시맨’을 차라리 추천하고 싶다. 노란 불빛이 아름다운 연회장의 왈츠 사이에서 오가며 번민하는 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이 두 교황의 번민보다 설득력이 있었다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환타를 마시며 혼자 식사하던 베네딕토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 일본 10년 만에 중국인 사형 집행, 일가족 넷 잔혹하게 살해한 웨이웨이

    일본 10년 만에 중국인 사형 집행, 일가족 넷 잔혹하게 살해한 웨이웨이

    일본 정부가 사형 집행 내역을 공개하기 시작한 2007년 이후 처음으로 외국인 사형수를 처형했다. 모리 마사코(森雅子) 일본 법무상은 26일 일가족 네 명을 살해하고 그들의 손에 수갑을 채운 뒤 덤벨을 달아 바다에 빠뜨려 은닉하려 한 혐의로 2003년 사형이 선고돼 후쿠오카(福岡) 구치소에서 복역 중이던 중국 남성 웨이웨이(40)를 교수형으로 처형했다고 밝혔다. 모리 장관은 2003년에도 다른 두 학생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저지른 웨이웨이의 집행 명령서에 “오랜 고민” 끝에 지난 23일 서명했다고 설명했다. 모리 장관은 특히 그가 “여덟 살과 열한 살 자녀를 포함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을 아주 이기적인 이유로 살해한 극악 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어학 연수를 왔던 웨이웨이는 네 건의 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지만 자신은 주범이 아니며 중국으로 달아난 두 공범이 범행을 주도했다고 강변했다. 세 용의자는 2003년 6월 후쿠오카에 있는 기업인 마쓰모토 신지로(41)의 자택에 침입해 그를 넥타이로 목 졸라 살해하고 부인 치카를 욕조에 빠뜨려 숨지게 한 다음 두 자녀를 교살하고 시신들을 하카타 만에 빠뜨렸다. 두 공범은 2005년 중국 공안에 체포돼 한 명은 그 해 곧바로 처형됐으며 자수하고 수사에 협조한 한 명은 종신형을 복역 중이라고 지지 통신은 전했다.이번 집행은 2007년 사형이 집행된 이들의 명단을 공개한 이후 두 번째로 처형된 외국인이라고 AFP 통신이 전했다. 2009년에도 중국인 남성이 도쿄 근처에서 동거하던 세 명의 중국인을 살해하고 셋을 다치게 만든 혐의로 목 매달렸다. 일본이 가장 최근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지난 8월로 살인 혐의로 유죄가 확정된 두 남성에 대한 집행이었다. 올해 들어 세 번째이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2기 집권이 시작된 2012년 12월 이후 처형된 사형수는 모두 서른아홉 명이다. 지난해에는 모두 열다섯 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했는데 1995년 사린가스 테러를 도쿄 지하철 역사 등에서 저지른 옴 진리교의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 교주를 비롯해 신자 열셋이 포함됐다. 현재 일본의 사형수는 110~120명이며 선진 7개국(G7) 가운데 미국과 일본만 사형제를 존속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의 반대, 국제적인 압력에도 국민들의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편도 눈길을 끈다. 특히 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에야 사형수에게 이를 알리는 점도 인권단체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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