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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 대통령 訪美­클린턴 국빈만찬 환영사·金 대통령 국빈만찬 답사

    ◎클린턴 국빈만찬 환영사 나는 지난 92년 인종폭동 당시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金대통령을 처음 만난 때를 기억합니다.대통령이 되어 돌아온 金대통령에게 나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격려의 힘이 되고자 합니다. 金대통령의 삶은 자유가 댓가없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한국전쟁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처형될 뻔했고,14t이나 되는 트럭이 살해 목적으로 덮치기도 했습니다.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고는 군사쿠데타로 며칠만에 의회가 해산됐으며,80년에는 단 60분의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나는 그가 옥중서신에서 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호랑이에 물려가도 살아날 길이 있다’는 말처럼 다시 승리할 것으로 믿습니다. 金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의 중심에 서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독재와 맞서 싸우며 불가능했던 일을 결국 현실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金 대통령 국빈만찬 답사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양자 정상회담을위한 첫번째 방문국가로 미국을 택하게 된 것은 미국이 개인적으로 내 생명의 은인이며,국가적으로 소중한 민주주의의 전우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각하와 같이 탁월한 지도자와 공동의 관심사를 하루속히 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각하께서 미국을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로 이끈데 대해서 깊은 존경과 흠모의 뜻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미국 방문을 통해 나와 한국 국민 모두는 한미관계가 종래의 안보와 경제 차원의 협력만이 아니라 한층 더 높은 차원의 동반자 관계로 진입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그것은 이제 한미 양국의 협력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한국에서 병행 발전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념 아래 한미 두나라의 폭넓은 경제적 유대와 공고한 안보협력이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를 열어가는 견인차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朝鮮海 표기 ‘일본판 金正浩’展(특파원 수첩)

    【도쿄=姜錫珍 특파원】 일본의 ‘에도 도쿄 박물관’에서는 요즘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전’이라는 흥미로운 지도 전람회가 열리고 있다. 이노는 19세기초 일본 전국을 실제로 답사해 가면서 전국 지도를 완성한 인물.그가 그린 지도는 깜짝 놀랄 만큼 정확해 100년 뒤에 사용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한국의 金正浩인 셈이다. 전람회에는 출품된 지도나 측량용 기구 등 눈길을 끄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한국 기자의 관심을 모은 것은 따로 있었다.이노의 스승인 다카하시요시토키(高橋至時)의 장남으로 역시 걸출한 지도 제작자였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만든 두 장의 지도였다. 하나는 에도 도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베 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라는 동아시아 지도.당시에는 모두 세계 최고의 지도로 평가 받았던 터다. 신정만국전도와 일본변계약도의 한반도와 일본 사이 부분을 들여다 보면 동해가 ‘조선해(朝鮮海)’로 적혀 있었다.한반도쪽에 가깝게 적혀 있는 ‘조선해’라는 세 글자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동해를 ‘한국의 바다’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95년 7월 요코하마 개항자료관에서 열렸던 미국 외교관 폴C 블룸 소장 고지도전에서도 동해가 한국해(Sea of Korea)로 표기된 지도가 다수 출품되었다. 동해라는 명칭이 갖는 일방성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역시 동해의 원적은 한국(조선)에 있음을 가게야스는 두 장의 지도로 보여주었다. 가게야스는 후일 독일에 지도를 유출시켰다는 죄로 처형되고 말았다.땅과바다를 정확하게 그리고,부르려 했던 그의 노력과 용기는 대동여지도를 그린 金正浩의 일화를 생각나게 했다.
  • 보건의료기술 연구 개발/610개 과제 273억 지원

    보건복지부는 9일 올해 보건의료기술 연구개발비로 610개 과제에 273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복지부는 지난 3월 공모를 통해 접수된 1,103개 과제를 대상으로 보건의료기술 연구기획평가단과 보건의료기술 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원대상 과제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선정내역은 계속과제가 378건 156억원,신규과제가 232건 117억원으로 과제 당 평균 연구비는 4,500만원이다. 특히 올해에는 벤처형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기술개발 연구비의 3%인 15억원을 배정하고,24개 기업을 선정·지원키로 했다.
  • 국립묘지·열사릉 교환참배(김삼웅 칼럼)

    ○유족 상호방문 성묘토록 남한이나 북한이나 일제시대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애국지사들을 모시는 성지가 있다. 우리는 서울 동작동의 국립묘지가 있고 북한에는 평양근교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이 있다.서울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는 상당수의 항일지사가 묻혀있고 1995년에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이 새로 조성되었다.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선생 등 임정요인 44명의 유해가 임정묘역에 안장되었다. 1986년 9월 완공된 평양의 애국열사능에는 김규식 조소앙 오동진 양세봉 최동오 홍명희 이기영 선생 등이 묻혀있다.이곳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된 조봉암 선생의 가묘도 있다고 한다. 서울 관악산 줄기 43만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동작동국립묘지는 조선조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던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었던 곳으로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듯한 상서로운 기맥이 흐른다는 명당으로 꼽힌다. 평양시내에서 서남쪽으로 2㎞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애국열사릉은 오목한 분지가운데 돋아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좌청룡 우백호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알려진다. 국립묘지와 열사릉의 풍수지리를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다.새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고 각계 인사들의 방북의 발길이 잦아진다.리틀엔젤스의 평양공연에 이어 재벌총수도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다고 한다. 국가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조국해방을 위해 한마음이 되어 항일전선에 섰던 선열들이 분단과 함께 남북으로 갈리고 사후에는 ‘이산가족’이 된 것도 비극인데 자손들이 성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애국선열에 대한 국민의 도리를 생각해서라도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들의 유족이 교환방문을 통해 성묘할 수 있도록 남북한 정부가 길을 터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애국지사의 유족으로 현재 북한에 생존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애국열사릉에 묻힌 독립지사의 유족으로 남한에 생존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남북한 정부나 양측 적십자사가 나서서 뒤늦게나마 유족이 선대(先代) 애국지사들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할 수있도록 하는 것이 참다운 보훈의 정신이고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항일지사는 민족동질성의 원형 분단 반세기를 넘기면서 남북한 사이에는 각가지 이질적 요인들이 켜켜히 쌓여가고 있다.이런 속에서 민족적 동질성을 찾는다면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쟁과 항일지사들의 존재가 아닐까 한다.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도 풍광좋은 터를 골라 애국지사들의 묘역을 만들고 성역화하는 것도 이런 연유때문일 것이다. 남북한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보훈정신에서,그리고 인도주의와 겨레의 동질성 회복차원에서 이 일을 조속히 성사시켰으면 한다.그리하여 오는 광복절이나 늦어도 추석에는 남북의 애국지사 유족들이 판문점을 넘나들며 국립묘지와 애국열사릉에 묻힌 조상을 찾아 참배하고 성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反民특위 강제 해체/‘6·6사건’의 의미(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미완의 단죄’로 민족사 굴절/제헌국회,48년 반민족처벌법안 통과/화신재벌 朴興植 등 검거 재판대 세워/본격 활동 앞두고 李承晩이 강력 제동/조사대상 30%만 기소… 결국 흐지부지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을 벌인 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러나 이 특위는 李承晩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이듬해 6월6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반민특위 활동의 미완성은 이후 49년 동안 우리 현대사 굴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1949년 6월6일 아침 8시.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경찰을 가득 태운 2대의 드리쿼터가 들이닥쳤다. 습격대 지휘자는 尹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尹을 비롯한 40여명의 경찰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 직원들을 연행했다.반민특위 金尙德 위원장과 金相敦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항의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金부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장 權承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 역시 안하무인의 경찰에게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지휘권자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호통도 소용없었다. 연행된 사람은 모두 35명.특경대원 24명,직원 및 경호원 9명이었다.직원을 면회온 민간인 2명도 엉뚱하게 같이 끌려 갔다.연행자 중 22명이 입원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날의 ‘6·6사건’은 해방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이었다.경찰력이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특위를 사실상 해체,李承晩 독재의 길을 열었다.친일파 제거에 실패함으로써 헌정사 왜곡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입법부가 행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48년 9월29일.올해가 50주년이다.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李承晩 독재는 물론,이후 군사정권도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제헌국회는 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반민특위 위원은 각도 출신국회의원 중 선임됐다.金相敦(서울) 趙重顯(경기) 李鍾淳(강원) 朴愚京(충북) 金明東(충남) 吳基烈(전북) 金俊淵(전남) 金尙德(경북) 金孝錫(경남) 金庚培(제주·황해) 등이었다.金炳魯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權承烈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부,李元鎔 총무과장이 이끄는 중앙사무국이 각각 구성됐다.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5일 공식업무를 시작했다.특위는 1월8일 화신재벌 朴興植을 검거하는 것을 필두로 전광석화같이 친일파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일제 경찰 출신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이들 출신으로 추산된다.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李承晩도 반민특위가 눈엣가시였다.李承晩은 盧德述 崔燕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6·6사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특위는 49년 8월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활동을 끝냈다.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른 나라의 사례/佛,나치협력 3만∼4만명 처형/시민법정 설치… 9만5천여명 시민권 박탈/中·대만 정부 친일파 漢奸 색출 상당수 처벌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처리가 있다.뉘른베르크재판에서는 22명의 1급 전범이 기소되어 나치군 원수 괴링 등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7명이 종신형∼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도쿄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기도 고이치(大戶幸一) 등 18명에게는 종신형∼금고 20년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친일파 문제와 비슷한 것은 유럽국가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중국·대만의 한간(漢奸·친일파)재판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멸망 직후인 44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4개의 훈령을 내렸다.이 훈령에 따라 조사받은 인원은 150만∼200만명.드골은 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나치협력자로 처형됐다고 밝히고 있다.드골은 작가,언론인,학자 등 나치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엄히 다스렸다.현대사가 로베르 아롱은 “3만∼4만명이 재판에 의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민족반역자로 사형당했다”고 추정했다.프랑스는 형사재판권이 없는 시민법정도 설치,9만5,000명을 ‘비국민’으로 판정해 시민의 권리를 박탈했다. 덴마크는 1만4,000명,네덜란드는 4만명,벨기에는 5만명, 노르웨이는 2만명의 나치협력자를 각각 민족반역자로 무기에서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중국과 대만정부도 2차대전이 끝난후 친일파 제거에 나섰다.한간재판은 중국공산당 정부와 장제스(蔣계石)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46년 4월부터 48년 9월까지 따로 진행되었다.중국·대만정부에 의해 한간으로 판명된 상당수 인사들이 처형됐지만 개별처리 사실만 알려질뿐,전체적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특위 총무과장 역임 李元鎔옹/“민족정기 바로서는 날 두눈 감기전 보았으면” “金大中 대통령이 명실공히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되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과 조사관을 역임했던 李元鎔옹(78)은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반민특위에관계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타계한 현실에서 그는 당시 특위의 고위 중앙요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서울 공대 전신인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48년 10월 반민특위 구성때 민간인 신분으로 행정실무를 주도했다.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 ­현재의 심경은. ▲오늘 이 땅위에 사는 구세대 치고 일제의 학정과 인간 이하 대우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일본의 관헌에게 우리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던 애국지사를 밀고,또는 체포해 넘긴 반역자가 있었습니다.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두 눈을 감기전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 못한 이유는. ▲국내사정에 어두운 李承晩 대통령이 친일파들의 간계에 현혹되어 경찰력을 동원,하루 아침에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습니다.제헌국회의 결정에 따른 헌법기관이 불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헌정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기게 됐지요.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金泳三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치로 내걸어 혹시 하며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실효없이 용두사미격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라도 관계 각료나 관련 인사들이 모여서 기구를 만들어 과거에 처단치 못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해야 합니다.그래야 이 나라의 기초가 탄탄해집니다.金대통령은 해박한 경제관과 탁월한 국제 외교력을 겸비했습니다.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많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해주는 데도 힘써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그것이 경제 등 다른 난국의 극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반민특위 활동 일지 ▲48년 8월5일=제헌국회,‘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 ▲9월7일=‘반민족행위 처벌법’ 국회 통과 ▲9월29일=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반민족행위 조사특위(반민특위)’구성동의안 국회 가결 ▲10월1일∼11일=반민특위 10명 조사위원 선임 ▲10월23일=반민특위 1차위원회 ▲49년 1월5일=반민특위 사무실 개소,업무 개시 ▲1월8일=화신재벌 총수 朴興植 1호 체포 기록 ▲1월13일=崔麟 검거 ▲1월25일=盧德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검거 ▲2월7일=崔南善 李光洙 검거 ▲2월15일=李承晩 대통령,반민처벌법 개정 필요성 특별담화 ▲3월28일=李琦鎔 朴興植 등 반민자 첫 공판 ▲5월하순∼6월초=정부,1·2차 국회 프락치사건 발표 ▲6월6일=경찰,반민특위 습격,조사요원 불법체포,특경대원 무장해제 ▲6월26일=金九 선생 암살 ▲8월31일=반민특위 공식해체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도쿄재판과 전범미화 영화(金三雄 칼럼)

    ‘데드 바이 행잉(Dead By Hanging)’­1948년 11월12일 오후,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웨브 재판장은 2년 반 계속된 일본전범재판의 마지막 순서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도조는 이날 히로다 등 6명의 A급 전범과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해 12월23일 이른 아침 스가모 구치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한 줌 이슬로 사라졌다. 도조는 처형 직전에 “이제는 그만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陀)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란 유언시를 남겼을뿐 결코 참회하지 않았다. 도조는 1937년 관동군 참모장, 1940년 육군 대신, 1941년 총리대신이 되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인류를 전화에 몰아넣었다. 도조 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자행한 정신대 노무자 지원병 학도병 공출 등 8백만의 희생과 수탈의 만행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맥아더 원수는 전범들에 대한 형의 집행을 명령하면서 “나는 전지전능의 신이 이 비극적인 죄상 소멸의 사실로써, 인류의 최악 최대의 죄인 전쟁이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모든 선의의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 모든 국가로 하여금 전쟁을 포기시킬 때까지 상징으로서 전언되기를 희망한다.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형집행 당일은, 나는 일본 전국의 종교단체 회원들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하지 않도록, 이 세계를 평화 속에 유지할 수 있도록, 가호하고 인도해 주도록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고 ‘평화의 기도’를 일본 국민에게 당부하였다. 전범들이 처형되던 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평화의 기도’라는 사설에서 “우선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우리 국민 사이에 이 재판의 비극적 종말로 인하여 과거에 있었던 일본의 잘못이 완전히 보상되고, 국민은 일체의 책임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안이한 생각은 없는가, 또 이를 모면하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실종된 ‘평화의 기도’ 만일 이 기회에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용기가 없이,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대로 내버려둔 국민성의 나약함과 도의적 책임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일곱 피고의 처형도 도쿄재판 자체도 그 의미의 태반을상실하고 말 것이다”라고 일본 국민의 책임과 반성을 촉구했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시간이 지난 오늘, 일본에서는 ‘평화의 기도’ 정신과 반성은 사라지고, 도조를 미화하는 「프라이드­운명의 순간」이란 영화가 일본열도를 복고의 열기로 휘몰아넣고 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일본 일본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15억엔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만든 이 영화가 지난 23일부터 일본의 145개 극장에서 일제히 개봉되어 일본인은 물론 그들의 침략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이웃나라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까짓’ 영화 한 편을 두고 과잉반응을 할 이유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전범들이 묻힌 묘역을 일본정부 각료들이 성역화하여 참배하면서 물의를 일으켜온 전례에서 보듯이 ‘영화 한 편의 일’로 묵살하기에는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A급 전범 중에서도 원흉인 도조를 미화한다는 것은 바로 침략전쟁 자체를 미화하려는 ‘음모’의 연장선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재판이 끝날무렵 필리핀의 이브닝 크로니클이 사설에서 “히틀러무솔리니가 죽고 도조가 처형되더라도 다른 자가 그들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침략전쟁을 행하는 능력은 한 나라의 지도자에게 있다기보다도 그 나라의 국민성과 그들이 사는 환경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과 독일 두 국민의 성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 지적은 오늘의 일본을 투시하는 탁견이다. 우리의 경각심이 요구된다.
  • 망명·처형… 독재자들의 말로

    ◎마르코스­족벌정치·축재… 고국땅 못밟아/차우셰스쿠­24년 철권통치끝에 총살 당해 인도네시아 수하트로 대통령이 21일 하야함으로써 또하나의‘철권 독재자’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됐다. 독재자들은 대부분은 말년을 처형이나 망명생활를 하면서 비참한 종말을 맞았던 터.수하르토와 함께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필리핀의 페르디난도 마르코스는 끝내 미국 망명길에 올랐었다. 마르코스도 족벌정치에 의한 경제력 장악,철권통치에 비롯된 부패 등이라는 점에서 수하르토와 비슷했다. 세기의 철권 독재자라면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도 세계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24년간 루마니아를 강압 통치해왔던 차우세스쿠는 89년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부부가 함께 시민들에게 붙잡혀 총살형을 당했다.처형장면이 TV화면과 사진으로 전세계에 전달돼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었다.대부분 독재자들이 종교나 민족,이념을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어떤 명분도 갖지 못한채 ‘학살의 독재자’였다. 결국 8년간 50만명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다 쿠데타로 고달픈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밖에 옛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아이티의 장 클로드 뒤발리에,포르투갈의 안토니우 살라자르,이란의 무하마드 팔레비 그리고 94년 사망한 북한의 金日成도 세계 역사에 기록된 악명 높은 독재자들로 꼽힌다.
  • 파출소 “내 관할 아니다”/강도피해자 4시간 전전

    ◎3곳서 서로 떠넘겨… 소장 등 5명 징계위 회부 【대구=황경근 기자】 경찰이 강도 피해자를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번씩이나 다른 파출소로 떠넘겨 피해자가 4시간30분 동안 파출소를 옮겨다니며 밤을 새 말썽을 빚고 있다. 20일 상오 2시50분쯤 대구시 달서구 월성동 남대구IC 부근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김모씨(41·여·대구시 달성군 화원읍)는 강도로 돌변한 택시기사에게 현금 40만원과 휴대폰 등을 빼앗기고 지나가던 시민의 도움으로 자신의 주소지 근처인 달성 경찰서 화원파출소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화원 파출소는 사건발생 장소가 관할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파출 소순찰차에 김씨를 태워 월성2동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월성2동 파출소도 김씨의 진술에 따라 현장 확인을 거쳐 다시 관할이 아니라며 김씨를 이웃 유천 파출소로 넘겼다. 그러나 유천 파출소에서는 ‘택시강도사건은 최초 접수처에서 처리한다’는 대구 지방경찰청의 지침을 내세워 사건접수를 거부,사건을 다시 화원 파출소로 넘겼고 김씨는 유천 파출소에서 상오 7시쯤 귀가했다.김씨의 연락을 받고 화원파출소에서 김씨와 함께 파출소를 옮겨다닌 김씨의 제부 이모씨(40)는 “파출소를 옮겨 다니며 지친 처형이 ‘내가 잊어버린 것을 모두 포기할테니 제발 집에 보내 달라’고 호소할 정도 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와 관련,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건을 떠넘긴 달성경찰서 유천파출소장 李文基 경위,월성2파출소 康孝寬 경장,화원파출소 李炳善 순경 등 5명을 징계위원회에 넘겼다.
  • 戰犯의 영웅화/李世基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일제시대를 살아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다 한국에서는 강제징병과 학도병제를 실시하고 종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서 ‘A급 전쟁범죄자’로 회부되어 48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일본의 군국주의자다. 그런 전쟁범죄자가 일본 영화 ‘프라이드:운명의 순간’에서 전범이 아닌 ‘영웅적 사무라이’로 등장해 중국과 서방언론등에 의한 국제적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일제의 식민지 침탈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한 정당한 전쟁이자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었음을 강변하고 도조는 ‘일본의 명예를 지키려다 연합군측의 사전각본에 따라 부당하게 처형되는 희대의 영웅’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작은 일에 생색내고 무의미한 것도 의미있는체 꾸미는가 하면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이고 보면 또한 번심한 장난을 쳤구나 하는 안쓰러운 감이 없지 않다. 최근까지도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나 남경 대학살등을 고교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은 ‘자학(自虐)사관’ 이라면서 반일교과서 회수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 왔었다. 그릇된 과거를 덮으려는 자체가 이미 그릇됨을 인정한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 개봉을 앞둔 영화시사회에서 과거사 망언으로 유명한 한 고위관리가“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뿐 아니라 핵심을 찾아내는데도 성공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니 그 뻔뻔스러움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인간사회에서의 참다운 영웅이란 자신의 존재를 대중속에 파묻고 사는 자존심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한 영웅이 있듯이 악한 영웅도 있다. 영웅이 없는 사회에서 오죽이나 궁색했으면 전범을 영웅화했겠느냐는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서 도도한 세계사를 역행시킬수는 없다. 영화라는 방법으로 과거를 미화하려는 자체가 영웅의 이미지에서는 이미 어긋난 처사다. 차제에 무분별한 일본영화수입을 심사숙고해봐야겠다.우리 청소년의 역사를 보는 눈은 우리어른들이 지켜줘야하기 때문이다.
  • ‘폭력에 대항한 양심’/종교의 광기에 맞선 자유인

    독재의 얼굴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종교·사상·민족·개발 등 갖은 이름으로 자신의 등장과 행동을 합리화한다.히틀러가 그랬고 킬링 핑드의 주역 폴 포트가 그랬다.그러나 외양은 다를지라도 독재의 본질은 같다.그것은 단 하나의 이념 아래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한다는 점이다.16세기의 제네바 역시 마찬가지였다.종교라는 이름의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제네바에는 단 하나의 진실만이 남았고 칼뱅이 바로 그 예언자였다. 당시 제네바의 모든 권력을 차지했던 칼뱅은 정신적인 독재자이자 광신적인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였다.이런 칼뱅에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맞서 관용의 정신을 부르짖은 이가 있었으니 그가 카스텔리오다.최근 도서출판 자작나무에서 나온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안인희 옮김)은 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삶을 통해 16세기 제네바의 정신적 풍경을 그린 인문교양서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라는 책에서 이미 16세기 유럽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에라스무스의 모습을빌어 당대의 폭력과 혼란에 항의했다.그 뒤를 이어 나온 이 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1536년 5월 어느날 검은 색 사제복을 입은 깡마른 칼뱅이 코르나뱅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 제네바의 자유는 사라졌다.그는 거대한 조직력을 이용해 자유시민들로 구성된 도시와 국가 전체를 엄격한 복종기구로 만들어버렸다.그의 가르침은 곧 법이었다. 이 엄청난 권력에 대항한 카스텔리오는 그야말로 코끼리 앞의 모기였다.그러나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신학적인 견해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세르베토 살해사건’을 목격하면서 영웅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양심의 부름을 느낀 카스텔리오는 칼뱅을 고발한다.시대의 광증에 사로잡혀 이단자들을 들짐승처럼 쫓고 고문하던 때,박해받는 이들을 위해 변론을 떠맡은 카스텔리오는 홀로 불의에 대항해 싸운다.카스텔리오의 공격은 칼뱅이 세르베토 처형사건을 관청에 의한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칼뱅은 이단의 처형을 부정하고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카스텔리오의 책들을 불태웠다.결국카스텔리오를 기다린 것은 세르베토가 그랬던 것처럼 화형장의 불길이었다.칼뱅은 카스텔리오의 사상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을 철저히 봉쇄했다. 카스텔리오라는 이름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작가 츠바이크의 손길이 닿을때까지 역사의 뒤안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폭력에 대항한 양심’에는 독재의 해악과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정신의 치열함이 담겨져 있다.
  • 미국에 역사소설 바람

    ◎“소설가들이 부쩍 과거에 열을 올리는 것은 컴퓨터가 할수 없는 일.즉,사람들을 과거로 데려가는 일을 하고픈 까닭일까” 【워싱턴=金在暎 특파원】 최근 미국에 역사소설 붐이 일고 있다. 어느 나라나 현재가 아닌 지나간 과거를 무대로 삼거나 잘 알려진 과거사를 소재로 하는 소설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누린다.미국의 대히트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뿌리’도 역사소설이지만 미국도 역시 딴 나라들에서 처럼 대개의 역사소설은 익히 알려진 과거사를 재탕삼탕 ‘쥐어짜는’ 데 그쳐 역사인식이나 소설적 격식이 그다지 높지 않다. 대신 미국에서는 플리쳐 상이 증명해주듯 역사 넌픽션과 전기 문학이 고도로 발달해서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그런데 최근 소재가 쓰기 쉬워 고른 역사소설이 아니라 소설적 형상화의 방편으로 역사를 택한 격조있는 역사소설이 동시에 많이 나오고 있다고 뉴스위크 지는 주목하고 있다. 뉴스위크가 거명한 소설가들은 워낙 예전부터 소설적 자존심이 ‘센’ 작가들이라 최근의 동시출간을 아류가 범람하는 유행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보다 심층적인 이유가 있다고 뉴스위크는 말한다.그렇더라도 지난해 하드커버로 1백60만부가 팔린 찰스 프레이져의 ‘추운 산’을 이런 붐의 엔진으로 꼽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무명작가의 첫 소설인 이 작품은 남북전쟁을 소재로 했다.지난해에는 이 작품 말고도 헤비급 역사소설이 여럿 있다.플리쳐 수상작가인 돈 드릴로의 ‘지하세계’는 미국의 냉전시대를 조람한 것인데 마지막까지 ‘추운 산’과 내셔널 북 상을 다투가 밀려났었다.미국에서 가장 현대적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고도 밖에 얼굴을 내밀지 않아말 그대로 가장 신비한 작가인 토머스 핀천은 독립전쟁 무렵이 시간대인 ‘메이슨과 딕슨’을 발표했었다. 올 봄엔 중량급 작가들의 역사소설이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다고 뉴스위크는 말한다.엘모어 레오나드의 ‘자유 쿠바’는 19세기 후반의 미·스페인 전쟁을 다루고 있고 T.C. 보일의 ‘쪼개진 바위’는 금세기 초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백만장자 아들 이야기로 그의 정신병적인 성적 행태와 환상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조명하고 있다. 놀라운 박람강기에다 현학적 문체로 유명한 고어 바이들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된 역대 미 대통령 납인형들이 밤만 되면 되살아나 13살짜리 소년에겐 역사적 사건들을 다른 식으로 전개해 보여주는 환상적인 ‘스미소니언 협회’를 냈다.러셀 뱅크스는 남북전쟁 1년전에 흑인 노예의 반란을 기도하다 처형당한 열렬한 노예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주인공으로 7백매가 넘는‘구름을 가르는 사람’을 썼다. 이밖에도 올 봄에 선보인 역사소설도 많는데 “소설가들이 과거에 부쩍 열을 올리는 것은 컴퓨터의 사이버 혁명과 상관이 있다.작가는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일,즉 사람들을 과거로 데려가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다”고 토머스말론이란 작가 겸 비평가가 말했다고 뉴스위크는 전한다.
  • 르완다 학살범 공개 처형

    ◎국제사회 만류 불구 5개 도시서 22명 총살/1만5천여 주민 참관… ‘피의 보복’ 확산 우려 【키갈리 AP DPA 연합】 지난 94년 르완다 내전 때 주민 대량학살에 가담한 후투족 22명에 대한 르완다 정부의 공개처형이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24일 집행됐다. 대량학살과 관련,기소돼 사형언도를 받은 후투족중 1차로 집행된 이날 공개처형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를 비롯한 세계 인권단체와 미국·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르완다 정부에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해온 가운데 강행됐다. 패트릭 마짐하카 르완다 국무장관은 처형이 시작되기 전 대량학살에 가담한 후투족들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공개처형을 옹호했다. 앞서 주요 국제인권단체들은 23일 공개처형을 단행하지 말 것을 파스퇴르비지뭉구 르완다 대통령에 촉구했었다. 제임스 루빈 미 국무부 대변인은 미 정부는 학살연루자들이 적법한 재판 절차를 밟지 못한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 처형은 수도 키갈리 외에 4개 도시에서 집행됐으며 키갈리에서만 1만5천여명의주민이 처형을 지켜 봤다. 르완다에서는 지난 94년 발생한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유혈분쟁 과정에서 50만명 이상의 주민이 후투족에 의해 학살됐으며 희생자의 대부분은 투치족이었다. 피해자인 투치족은 같은 해 7월 후투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뒤 대량학살에 가담한 투치족 검거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재판을 받은 학살 가담자는 330명 이상으로 이중 116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12만5천명 이상이 재판대기 상태에 있다.
  • 킬링필드 주역 폴 포트는 누구인가

    ◎동족 2백만명 학살 ‘인간 백정’/부농 태생… 농경 유토피아 꿈꾸며 철권통치/작년 반역 혐의로 인민재판 받고 가택연금 폴 포트는 ‘킬링필드’를 주도하면서 캄보디아의 근간을 바꾸려 한 세계 최악의 ‘폭력적 혁명가’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75∼79년 집권기간중 마오쩌뚱(毛澤東)식 ‘농경 유토피아 건설’을 기치로 철권통치를 한 결과 2백만에 가까운 캄보디아인을 처형과 질병,기아로 사망케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개인적 사생활 대부분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출생 과정도 그러려니와 만년에 들어서는 사망설과 체포설을 뿌리는 등 갖가지 의혹을 낳았다.그는 20년대 후반 캄보디아 중부 콤 퐁통의 부유한 농가에서 살로드 사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나이도 올해 72세 정도로 추정될 따름이다. 75년 권좌에 오른 뒤 폴 포트가 행한 만행은 가히 광적이라 할 만하다.도시민들을 지방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종교를 없애는 등 전국민을 상대로 사회주의 실험을 강행했다.안경을 썼거나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등 인텔리 냄새가 나는 인물들은 혁명 반대세력으로 간주돼 무차별 처형됐다. 어린 시절 ‘친절하고 얌전한’ 아이였던 폴 포트는 파리유학을 거쳐 53년 지하단체인 캄보디아 공산당에 입당했고 62년 서기장이 됐다.뛰어난 매너와 언변이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해 북동부 정글로 숨어들었다.그곳에서 크메르족들의 원시적 생활을 보면서 자신의 이상향을 설정했다. 75년 집권에 성공했으나 79년 베트남 침공 이후 다시 정글로 도망갔고 80년대말 게릴라지도자직에서 공식 사임했다. 지난해 7월 반대파에 의해 반역 혐의로 인민재판을 받은 뒤 폴 포트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국제적 수배대상이 되는 한편 크메르 루주와 캄보디아 정부의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하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
  • ‘북풍’ 예의 주시… 공작팀 정비 나선듯

    ◎입장정리·대책마련 부심… 연루자 숙청설/안기부 해체 요구·남북 경색 구실 가능성 한국 새 정부와의 관계설정을 탐색하고 있는 북한은 ‘북풍공작사건’돌출에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충격 속에 사태추이를 주시하며 입장정리와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북풍조작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중앙방송·평양방송을 비롯,당기관지 노동신문과 중앙통신 등 공식 언론매체들은 한국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다만 대남지하방송인 민민전방송만이 지난 14일 이 사건 수사 진행 상황과 정치권의 반응 등을 대담 형식으로 내보냈다.북한 공식 언론매체들이 남북커넥션과 북풍조작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번 사건이 남북한 모두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인데다 북한 내부의 입장정리가 쉽지 않은데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조평통 서기국은 지난 17일 북풍조작사건에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안기부를 해체하라고 요구하고 나왔다.중앙방송 역시 이날 시사논단프로에서 북풍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안기부를 그대로 두고서는 남조선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될 수 없고 북남관계도 개선될 수 없으며 통일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그러나 이같은 표면적인 반응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대남공작 루트가 노출됨에 따라 대남공작팀을 전면 정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김정일에서 당비서 김용순으로 이어지는 최상층 라인은 변함이 없겠지만 당·정 실무부서장 등 중하층부에는 대폭적인 손질이 가해질 것으로 북한문제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이와 관련,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흘러나오는 첩보에 따르면 국내 모 의원과 접촉했다는 안병수 조평통 부위원장과 전금철 아태평화위원장 부위원장이 이번 북풍파문으로 경질 위기에 놓여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북한에서는 한국에서 북풍조작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인 지난해 가을에 북한판 ‘남풍사건’의 회오리가 몰아쳤던 것으로 알려졌다.청년동맹간부 등이 한국측에 연루된 혐의가 북한당국의 집중적인 사상검열에서 발각돼 처형됐다는 것이다.청년동맹이 운영중인 은성무역상사의 이변서 총사장과 사회안전부 함운건 정치국부국장은 베이징과 마카오 홍콩 등에서 한국정보기관과 접촉했으며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가 포착돼 국가반역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리고 농업당당 비서 서관희가 간첩혐의로 처형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남북커넥션에 따른 숙청은 현재도 진행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연초에 김정일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청년동맹 제1비서 최용해가 전격숙청을 당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오는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남북적십자회담 때 북측의 기류가 감지되겠지만 북풍사건이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북한측이 남북관계 경색의 구실로 삼을 가능성이 많다고 분석했다.이와함께 한동안 당국간 대화는 계속 외면하면서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기들이 지난 2월18일에 제안한 이른바 ‘정당·단체연합회의’제의 수락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나올것으로 전망했다.그러나 식량난과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국의 지원이 절실한 만큼 식량지원·경협 등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민간차원의 대화에는 적극 나설 것으로 내다봤다. ◎새정부 출범전후 북측 동향 ▲2월18일=정당·단체연석회의 제안 수락 촉구 ▲20일=한국의 6자회담 제안 비난 ▲28일=대통령 취임사내용 실망 논평 ▲3월9일=강인덕 통일부장관 임명 비난 ▲11일=천용택 국방장관 발언 비난 ▲11일=적십자회담 북경서 갖자 회답 ▲14일=민민전방송 북풍사건 첫 언급 ▲17일=조평통 안기부 해체 촉구 ▲17일=중앙방송 안기부 해체 요구 ▲17일=강장관 계속 비난 ▲18일=4자회담에서 한국 의중떠보기
  • 여순반란사건(대한민국 50년:12)

    ◎20개월 앞서 치른 ‘6·25 리허설’/진압에 미군 고문단 관여… 한국전 미 개입 레일 깐셈/주한미군 철수 연기·국가보안법 제정 촉발한 효과/좌파세력의 투쟁방식 게릴라전으로 전환한 계기로 “경찰이 쳐들어 오고 있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시 신월동 국군 제14연대.늦가을의 어둠이 짙게 깔린 하오 8시쯤 14연대의 연병장에서는 고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목소리였다. “경찰을 타도하자.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지상사의 선동에 연병장에 모여든 장병들은 “옳소”를 연발했다.반대한 하사관 3명은 즉석에서 사살됐다.연병장에 모인 2천5백여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무장하고 시내로 뛰쳐나갔다.여순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경찰이 쳐들어 온다’는 선동으로 일어난 여순사건은 당시의 시대상황 탓이다.해방 5개월뒤인 46년 1월부터 각 시도별로 연대 창설 및 모병업무가 시작됐다. ○병력 절반 이상이 좌익 이른바 ‘향토경비대’.14연대는 여순사건 5개월전에 창설됐지만 당시의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에 불과하다는 게 일반인들의 인식이었다.특히 경찰은 허술하게 조직된 경비대원들을 오합지졸로 간주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고 군인들은 일제의 주구였던 경찰이 자신들을 폄하하는 것이 못마땅했다.게다가 무기·장비·복장·급식 등 모든 처우에서 경찰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불만은 팽배해 있었다. 46년부터 48년 사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했다.새 조국의 건설을 위해,친일경력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또는 공산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군을 선택했다.향토경비대 입대과정에서는 신원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처우 등의 불만때문에 군을 그만두거나 탈영하는 이가 적지 않아 충원작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14연대가 여순사건의 진원지였던 까닭은 병력의 절반이상이 좌파였기 때문이다.미군정의 무장단체 해산령과 남로당의 조직적 침투로 군은 적화돼 있었던 것이다.군정의 해산령은 좌익계열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좌파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군대로 물려들었다.남로당은 사병들에게 ‘반경의식’을 고취시켜 미군정의 물리적 기반인 경찰과 군의 반목을 조장하려 했다.다시말해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지창수 상사가 연병장에 서기 직전,당세포 40여명과 함께 무기고를 미리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좌익세력때문에 가능했다.좌익은 비상계엄령이 발령된 제주치안 확보를 위해 연대가 출동하기 전날밤에 여순사건을 일으켜 좌익반란을 본토에 확대하려 했다는 게 당국의 시각이다.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인 이범석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주사태를 남한 각지에서 전개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거리로 뛰쳐 나간 반군들이 여수시가지로 진입한 것은 5시간여 뒤인 20일 새벽 1시20분.이들은 여수읍내 좌익단체와 학생단체에 무기를 지급했고 상오 3시쯤에는 여수경찰서를 점령했다.반란군은 이어 주요기관을 완전 장악했으며 거리에는 온통 인공기의 물결을 이뤘다.여수 인민위원회가 복구됐고 인민재판소는 체포된 경찰,국군장교,지주,그리고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이 때숨진 경찰관은 5백여명.반란군은 식량창고를 개방해 쌀배급을 실시했으며 창고에서 흰 고무신을 꺼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이런 인민행정은 14연대 병력이라기 보다는 남로당과 연계된 토착 좌익세력에 의해 이뤄졌다.보복정책과 동시에 선심정책이 이뤄졌던 것이다. ○식량창고 탈취 쌀 배급 반란군은 상오 8시 순천행 통근열차를 타고 북상하기 시작해 순천읍을 장악했다.이어 광양,곡성,구례,고흥 등 동부 전남지역을 손아귀에 넣었고 경찰은 반군이 오기도 전에 도망하는 일도 벌어졌다.군인들의 봉기는 토착 좌익세력들과 어울려 거대한 민중봉기로 발전했다. 반란군이 순천에 진입할 즈음 서울에서는 긴급히 비상회의가 소집됐다.국방장관 이범석,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 로버츠 준장,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등이 참석한 회의는 작전지도부를 광주에 급파하기로 했다.21일에는 송호성 사령관이 반군토벌사령관으로 임명됐다.전군 지도부가 총력대응 태세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벌군은 반란 사흘째인 22일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진압작전에 나섰으나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얻지 못했다.군 자체가 지휘불능과 병력 붕괴상태가 나타나기도 했다.가까스로 순천 탈환작전에 성공한 토벌군은 23일 여수 진압에 나섰다.송호성 사령관은 부산에서 급파된 병력 지원을 받아 바다에서 박격포 포탄을 쏟아 부었다.하지만 박격포 포사격의 미숙과 반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엄청난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AP통신기자도 사망 송사령관은 24일 2차 여수진압작전을 직접 폈으나 오히려 자신이 반군의 기습으로 부상만 입었다.AP통신기자가 총탄에 맞아 숨진 것도 이 때였다.두차례의 실패를 맛본 토벌군은 반란 8일째인 26일 대대적인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다.이날 정오쯤 경비정 6척이 여수반도를 포위한 채 배위에서 엄청난 박격포 포격을 가했다.여수시내는 불바다로 변했고 5분의 3은 잿더미로 바뀌었다.하지만 토벌군의 작전이 개시될 즈음 반란군들은 모두 시내를 빠져나간 뒤였으며 학생들과 좌익단체 회원들만 남아 있었다.27일에야 여수 시내를 완전 탈환함으로써 9일동안의 여순사건은 진압됐으나 2천3백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2천8백여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여순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됐으며 주한미군 철수도 연기됐다.전남 동부지역을 휩쓴 여순사건은 좌파세력의 투쟁방식이 대중투쟁에서 게릴라투쟁으로 바뀐 것 뿐이었다.지리산으로 들어간 반군세력 주력들은 벌교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해방후 좌우익이 반란과 진압으로 대규모 충돌한 여순사건은 2년뒤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다시말해 여순사건은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고,전쟁은 사실상 이미 시작됐던 것이다.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순사건의 상흔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여수·순천주민들에게 남아 있다.여수·순천 시민들은 여순사건을 ‘여순병란’으로 바꿔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다.시민들의 봉기가 아니라 ‘향토 경비대 14연대’의 반란이라는 것이다. ◎미군기 정찰­진압 병력 수송 참여/주한 미 24군 ‘G­3보고서’ 입수 확인 여순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주한 미군의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사태발생과 진압 등 5개 분야에 걸쳐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기록자는주한 미24군 G­3.제목은 ‘여수와 대구 등지에서의 반란사’로 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없이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PMAG)의 로버츠 단장은 미국인들이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따라서 미군은 지휘역할을 맡았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G­3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G­2의 존 리드 대위 등은 미군의 직접 개입없이 가장 빠른 시일내 반란군을 포위·진압할 수 있는 작전을 수립했다.이에따라 하우스만 대위와 리드 대위 등은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육본 정보참모부장 정일권,정보국장 백선엽 등과 함께 광주로 직접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미군의 C­47 수송기는 한국군 병사,무기,기타 물자를 대구에서 실어 날랐으며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정찰기들은 반란기간 내내 여순지역을 감시했다. 미군 비행사들은 여수의 반란 세력이 2개의 군 중대와 1천여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여순사건이 2년뒤 한국전쟁의 리허설이었듯이 미군의 한국전 참전 조짐도 이때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 전인대·행정부 입장조율 과제로/이붕 상무위장의 역할

    ◎보수파 퇴조로 영향력 약화 불가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16일 리펑(이붕)총리를 국회의장격인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함에 따라 그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의 최대 당면과제는 법치제도 정비에 따라 행정부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있는 전인대와 행정부사이의 입장 조정,민주화 요구에 대한 대응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상무위원장으로 선출됨에 따라 정계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계속할 수 있게됐다.그러나 권력기반인 보수세력의 전반적 퇴조로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다.이같은 세력약화로 장쩌민(강택민)등 주류파에 협조적이며 차오스(교석)을 밀어내는데도 동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0년동안 장쩌민,차오스와 함께 중국을 이끌어온 3두 마차로 알려져온 리펑은 국민당에 의해 처형된 ‘혁명열사’의 유복자다.초우언라이(주은래)등의 보호아래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49년부터 모스크바 동력대학에서 유학했으며 유학파 기술관료들의 핵심에 있었다.
  • 러 마지막 황제 유해 선왕 품으로

    ◎니콜라이 2세,볼셰비키 처형 80년만에/7년간 과학적 검증… 황실성당 안장키로 【모스크바=유민 특파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와 가족들이 볼셰비키 혁명대원들에 의해 총살된지 꼭 80년만인 오는 7월17일 선왕들이 묻혀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그 피터폴 성당에 안장된다. 이들의 유해는 91년 우랄지방 예카테린부르그시에서 발굴된 뒤 진위 여부를 놓고 지난 7년 동안 논란이 계속돼 왔으며 과학적인 검증방법이 총동원되는 등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보리스 넴초프 제1부총리가 이끄는 ‘유해진위조사팀’은 지난 2일 “91년 발굴된 유해는 니콜라이2세와 그 가족들인 것으로 최종 확인됐으며 이에 따라 7월 17일 피터대제 이후 로마노프왕가 후손들이 묻혀 있는 ‘피터성당’에 묻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조사팀은 95년에도 이들 유해가 마지막 황제 가족의 것임을 확인했으나 러시아 정교회측이 ‘과학적인 검증이 더 필요하다’는 견해를 내놓아 최근까지 검증작업이 계속돼 왔다.확인작업에는 러시아 미국 영국 스위스 등의 화학분석 전문가 수십명이 동원돼 정밀 유전자 감식을 했으며 체첸 전쟁때 시신확인을 위해 쓰였고,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최첨단 성분 분석기기(러시아제)도 투입됐다. 문제는 이와 관련한 여론,특히 러시아정교회의 입장이다.정교회는 교회와 황권이 공산혁명의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그동안 마지막 황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다.일부 정교회에서는 니콜라이2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을 정도다. 정교회 사제단은 정부결정이 나자 “정부결정에 따를 것이며 안장때 러시아정교 예식을 치를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사제들과 러시아 밖의 정교회인사들은 그러나 “정교회측이 니콜라이2세에 대한 시성식을 예정하고 있는데 만에 하나 ‘가짜’임이 드러나면 거짓숭배에 대한 파장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신중한 결정을 정부에 촉구했다. 니콜라이황제와 부인 알렉산드라,5명의 자녀,하인들은 1917년 10월 혁명 발발후 시베리아 유배지인 예카테린부르그까지 끌려갔으며 이듬해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그 이파티예프가의 지하실에서 볼셰비키 혁명 저격수들에 의해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격동의 대한제국 이면사/철없는 임금(비록 남가몽:1)

    ◎고종 첫 어명 “계동 군밤장수 처형하라” 대원군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해가면서 와신상담 집권의 기회를 노리다가 1863년 마침내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위에 올려 놓는데 성공하였다.이 분이 바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다.고종의 즉위식 날이 음력으로 12월13일이었으니 양력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취임식 날인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는 열두살 철없는 어린아이였다.만으로 따지면 10살 밖에 안되는 아이였으니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다.그러나 고종 앞의 철종이 18살이었고 그 앞의 헌종이 8살,그 앞의 순조도 11살 나이로 등극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 둘째 아들… 12세 즉위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계속해서 왕위에 올랐느냐 하면 순조,헌종,철종 등 3대 60여년에 걸쳐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 김씨가 의도적으로 어린 왕을 세워 권력을 전단하려 했던 탓이라 한다.그런 세도정치하에서 흥선군(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에 부른 존칭)처럼 난처한 사람은 없었다.흥선군은 영조대왕의 현손(증손자의 아들)이었으니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다.그러니 그는 안동 김씨들의 일급 요시찰 인물이었다.까딱하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는 몸이었다.말이 세도정치지 사실상 군사독재보다 더한 공포정치였다.그러니 철종 14년간은 대원군으로서는 살얼음 밟듯 조심하여 살아야 했던 눈물의 재야시절이었다. 흥선군의 사저는 최근 복원된 운현궁이다.말이 궁이지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흥선군이 거지나 다름없이 살았던 초가 삼간이었다.이 초가 삼간에 왕기가 서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집터 때문이었다.터 좋은 데를 명당자리라 하지만 운현궁 자리는 그보다 더 좋은 왕후정승이 나는 터,대지였다. 운현궁 터에는 본시 관상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관상대는 일명 서운관이라 했으므로 서운관의 구름 운자를 따서 운현궁이라 했다는 것이다. 관상대라면 천기를 엿보는 기관이다.왕이 되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천기를 엿보는 고개마루의 초가집에서 왕이 났다.운현궁에 왕기가 서린다느니 또 성인이 난다느니하는 소문은 벌써 철종 초년부터 났었다.그러면 그럴수록 흥선군의 처신이 더 어려워져 마침내 탁질양광,옛날 양녕대군이 그랬듯이 온갓 미친 짓을 다하며 정신병자처럼 행세하여 안동 김씨의 눈을 속였던 것이다. 고종이 왕좌에 오르게 된 데에는 집터 말고 고종의 관상이 좋았다는 설도 있다.경상북도 청도에 사는 박유붕이라는 애꾸눈 관상쟁이가 있었는데,어느날 운현궁에 와서 고종 얼굴을 보더니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고 난 뒤 “왕이 될 관상이니 이 말을 절대 누설하지 마십시요”라고 했다고 한다.이 사람은 그 공으로 고종이 즉위하자 이듬해 경기도 남양부사와 수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관상보는 것도 출세의 한 방편이었다. 1863년 말 강화도령으로 이름난 철종이 나이 32살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게 되니 흥선군은 극비리에 조대비와 내통하여 전격적으로 후계자를 자신의 둘째 아들로 결정해 버렸다.즉위식은 지금의 창덕궁 안에 있는 인정문에서 거행되었다. ○“운형궁에 왕기 서린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누가 대통을이을 것인지 논란이 많았다.중론이 분분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사슴(대권)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와같이 의론이 분분하게 갈려 있는 시점에 조대비가 특별히 처분을 내려 운현궁의 흥선군 제2자 재황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명령을 내리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그리하여 12월 길일 양신에 고종이 보위에 오르니 만조 백관들이 모두 축하하고 만세를 불렀다.한쪽에서는 철종의 장례를 치르고 한쪽에서는 즉위식을 거행하니 조정의 백관들은 눈코뜰새가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철없는데다가 평소 굶주리며 자라온 고종이었기에 옥좌에 앉자마자 제일성으로 하는 소리가 계동에 사는 군밤장사를 잡아다 죽이라는 것이었다. 놀란 대신들은 황급히 제지하였다. “전하가 지금 보위에 오르시어 성선의 덕으로써 정치를 하셔야 하는데 어찌해서 주살의 위엄을 먼저 보이십니까” 이에 고종은 반박하여 말하기를 “다른 이유는 없다.내가 여러 번 군밤 하나를 달라고 하였으나 한번도 주지 않았으니 이 어찌 인심이 그럴 수 있단 말인가.이같이 이익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자는 죽어 마땅하며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어찌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대신 한 사람이 아첨하여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시여.훌륭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다른 사람의 불선한 마음을 막는다는 교를 내리시니 과연 임금의 도량에 알맞습니다.그러나 일개 하찮은 군밤장사를 효수하라는 것은 전하께서 처음 등극하신 자리에서 혹 국가의 화평한 기운에 미안한 일인 듯 생각됩니다.” 이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대비(신정왕후)는 교를 내리기를 “대신이 말씀드린 것은 금석과 같은 말입니다.그 효수하라는 명령은 거두어 들이시는 것이 타당할 것 같으니 짐짓 그만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했다. 이 말을 한 대신이 다름 아닌 안동 김씨 핵심인물이었는데 그 아첨하는 말솜씨는 후세의 정치인들에게 으뜸 가는 귀감(?)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 “북 식량난 과장발표”/귀순 외교관 김동수씨 회견

    ◎망명 잇따르자 24개 공관 철수 북한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식량난을 크게 부풀려 발표하고 있으며 구호식량의 상당부분을 군량미로 비축하고 있다. 특히 외화난 속에 해외공관원들의 망명이 잇따르자 핀란드 등 24개 해외대표부를 철수시켰으며 공관원들에 대한 사상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지난 6일 부인 심명숙씨(38)와 아들 김진명군(9)을 데리고 귀순한 이탈리아 로마주재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북한대표부 3등서기관 김동수씨(38)는 18일 상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김씨는 “FAO 북한대표부 대표 김흥림은 지원식량이 군부에도 들어가고 땅속에 많이 저장돼 확고한 전쟁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면서 “자체 생산하는 식량 2백30t 이상과 외부에서 지원되는 85만t이면 사람들이 굶지 않을텐데도 군량미 비축 등으로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다”고 폭로했다. 또 “북한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많으려면 피해상황이 심각해야 하기 때문에 각종 통계자료를 부풀려서 세계식량계획 등 구호기구에 제출하고 있다”면서 “최근 북한 큰물피해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각종 통계자료가 가공된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고 말했다. 지난 해 10월 장승길 이집트주재 북한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해외 근무자들의 사상해이 심화와 공관유지비 부담 등을 이유로 덴마크 핀란드 등 24개 해외 공관에 대한 철수령이 내려져 현재 철수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작년 8월 서관희 노동당 농업비서를 포함,수십명의 사로청 간부와 사로청 산하 외화벌이 담당자들이 간첩혐의로 처형됐다”고 말했다.
  • 귀순 북 외교관 김동수씨 일가족 문답

    ◎“국제지원 식량 상당량 전쟁용 비축”/당 간부들 주민 습격 대비 철제문 달아/“김정일 생일때 알사탕 하사”는 말뿐/자본주의 사상 중간 간부들까지 확산 귀순한 김동수씨(38) 일가족의 일문일답 내용을 간추린다. ­망명한 이유는. ▲황장엽 비서를 비롯,장승길 대사와 장승호 참사가 망명하고 농업담당비서 서관희이 간첩죄로 공개처형을 당했다는 등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데다 농업의 피폐로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북한의 현실을 듣고 사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북한 주민들은 하루 1만t의 곡식으로 충분히 연명할 수 있는데 원조를 포함한 총 3백60만t에 이르는 곡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북한 정부와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대사에게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한 뒤 강한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이후 나의 소환문제가 거론된다는 말을 듣고 망명을 결심했다. ○백화점 출입 엄두도 못내 ­로마에서의 생활은. ▲심명숙=북한은 지옥이고 대표부는 천당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월 398달러가 나오는데 200달러로 생활한다.매월 100달러는 저축하고 분기마다 북한의 시어머니와 딸에게 100달러를 보낸다.생필품 구입은 인근 시장을 이용한다.백화점에서 판매하는 포장된 물건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북한 외교관사람들만 시장을 이용한다.조선사람이냐고 묻는 상인에게 자존심 때문에 일본인이나 남조선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고위관료들의 부패실상과 전쟁수행 능력은. ▲특히 경제부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책임지는 사람이 없다.처벌이 두려워 공장기계를 파는 것을 알고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과거에는 간부들 사이에 뇌물이 암암리에 거래 됐지만 요즘은 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어느 한 부분이 마비되면 다른 부분도 영향을 받아 수습하기 어렵게 된다.김흥림 대표(FAO주재 북한대표부)에 따르면 지원식량이 군부에도 들어가고 많은 양이 땅속에 저장돼 있어 전쟁에 대한 확고한 준비가 됐다고 한다. ○미·EU 곡물 지원 협상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북한의 자세변화 가능성은. ▲현재 미국과 EU를 통해서는 막후협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미국은 20만t을 보내기로 약속했고 추가로 10만t을 보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자체 생산한 식량과 지원식량이 군부나 특수기관에 들어가 전쟁을 위해 비축 중이기 때문에 정작 주민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남한의 식량이 직접 들어오면 사상에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국제기구를 통하도록 하고 있다. ­김정일 생일 때 특별 하사품은. ▲알사탕 등을 중국에서 들여와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려 했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경제난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굶어죽는 사람 계속 늘어 ­지금까지 굶어 죽은 사람이 2백80만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됐나. ▲지난 12월 2주간 평양을 방문한 세계식량계획(WFP) 영양담당 직원이 이와 관련된 중국 지방신문을 봤다고 했다.나는 당시 북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숫자라며 불가능한 일이라며 부정했다.지난 95년 홍수피해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북한 대표부를 방문한 사람을 통해 들었다.대략 10만∼20만 정도라고 알고 있지만 확실한 수치는 잘 모르겠다. ­식량난에 대해 과장된 부분은. ▲일반적으로 식량지원을 많이 받기 위해 통계자료를 과장하곤 한다.북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기구들의 명확한 현장조사가 필수적이다. ○반정부 음모 혐의로 처형 ­서관희 농업담당 비서가 처형됐다는데. ▲친척에 대한 비료제공 알선이 빌미가 됐다.비료담당 일꾼이었던 서관희는 부인 친척의 청탁을 받고 비료를 내준 뒤 이 사실이 폭로돼 해임됐다.이후 다시 남한의 식량을 지원받는 과정에서 남조선에 매수됐다는 내용의 사로청 사건에 연루돼 결국 반정부 음모 혐의로 공개사형을 당했다. ­북한이 해외공관을 철수시키고 있다는데. ▲최근 핀란드,덴마크,우즈베키스탄,싱가포르 등 24개 대표부가 철수했다.외화난과 함께 외교관들의 심리 동요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철수 공관 중에는 김평일이 대사로 있던 핀란드 대사관도 포함돼 있었다. ○농민들 농업정책 큰 불만 ­북한의 식량난 해결 방법은. ▲어떤 자구책도 없는 불가능한 상태이다.정책상 오류가 있다.이런 체제로서는 안되겠다는 주민들의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이미 농민을 비롯한 하부층에는 자본주의 사상이 구축돼 있고 이 체제가 중간간부로까지 확산돼 있다. 주민들의 요구를 알면서도 위에서는 누구하나 이야기를 못하는 실정이다.개방되면 체제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국제적 개방에 대해서는 문을 닫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어느 정도 자본주의 형태가 이루어 질 것으로 본다. 김흥림 대표에 따르면 식량난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돼 간부들의 집은 주민들의 급습에 대비하기 위해 목제 출입문에 철문을 덧붙이기도 한다고 한다.김대표 자신도 북한에 가면 이탈리아 주재 대사라는 것을 거리나 아파트에서조차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WFP(세계식량계획)에서 지원된 식량이 북한 상점에서 판매되고 있다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지원식량은 피해지역 주민들에게만 주게 되어 있지만 더 어려운 친척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다른 물건과 교환하기도 한다.상점에서 쌀을 판매하는 일은 극히 제한된 일이다.○외교관도 돈벌이에 급급 ­북한 외교관들의 생활은. ▲북한의 국내 경제 등 여러가지 사정이 너무 어려워 최근 대표부에 유지비를 지급해 주지 않고 있다.그래서 불법이지만 생활을 위해 할 수 없이 마약밀매를 결심하게 된다.외국 생활뿐 아니라 귀국해서도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 얼마라도 챙겨가야 한다는 생각이 외교관들 사이에 강하게 퍼져 있다.이런 상황에서 본 업무에 전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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