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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변호사 에바디의 회고록 출간

    ‘다음 처형할 대상은 에바디’ 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60)는 1990년대 후반 암살된 지식인의 가족을 변호하기 위해 정부 관료와 암살 전담반이 나눈 대화록 파일을 열람하다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러나 보통사람에게는 소름이 끼칠 이런 ‘사건’도 에바디에게는 그저 일상에 불과했다.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시린 에바디, 아자데 모아베니 지음, 황지현 옮김, 황금나침반 펴냄,2007)’는 정치적 억압과 유혈 투쟁으로 격동의 역사를 살아온 이란에서 여성과 아동의 인권 수호에 앞장선 시린 에바디가 쓴 회고록이다. 1947년 이란 하마단에서 태어난 에바디는 당시로서는 아주 특별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는 에바디와 남동생을 아들과 딸로 구분하지 않았고, 또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극히 존중했다. 이렇듯 이슬람국가 답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평등의식과 자존감을 키워온 에바디는 자연스럽게 불합리한 처사와 불평등에 비판의식을 갖게 됐고 행동으로 옮기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에바디는 1970년 23세의 나이로 이란의 첫 여성 판사가 됐지만 영예는 오래가지 않았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뒤 강경 보수파의 신정 체제가 ‘여성은 법 집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듬해 판사직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에바디는 단순 사무직으로 강등됐다. 하지만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는 등 엄혹한 세월이 닥쳤지만, 조국과 정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에바디는 1992년부터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에바디는 여성의 생명 가치를 남성의 절반으로 규정하고, 여성의 이혼권 및 자녀양육권을 인정하지 않는 법 체계를 바꾸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에바디는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무슬림의 한 사람으로, 진정한 이슬람 율법은 여성의 평등권 및 민주주의 가치와 공존하는 것임을 입증해보인다. 그에게는 2001년 노르웨이의 국제적 인권상인 라프토 상을 비롯해 권위있는 상이 잇따라 주어졌다. 하지만 상의 목록보다도 더 빛나는 것은 무자비한 가부장적 체제와 편파적 법전 해석에 맞서 온몸으로 싸운 에바디의 피와 땀 그 자체이다.1만 20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7) 역관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7) 역관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시대 외교의 강령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귄다.’는 것이다. 외교는 예조(禮曹)에서 관장했지만, 실제적인 사무는 사역원과 승문원(承文院)에서 맡았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통역하는 사역원 역관들은 모두 중인이었으며, 승문원에서 외교문서의 글씨를 쓰던 사자관(寫字官)이나 한문에 중국어를 섞어 쓰던 이문학관(吏文學官)들은 전문 지식인이었다. 청나라에 파견된 역관들이 모두 외교활동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20대부터 북경에 여러 차례 드나들며 청나라 문사들과 친했던 오경석(1831∼1879)은 곳곳에 지인들이 있어 몇 차례 외교적인 사건을 잘 처리하였다. ●러시아 외교 전문가 하추도와 사귀다(‘북요휘편’을 읽고 러시아의 위험성을 깨닫다) 복건성 출신의 하추도(河秋濤·1823∼1862)는 20세에 이미 ‘형률통표(刑律統表)’라는 법률 서적을 저술한 학자인데, 오경석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형부 주사로 있었다. 러시아 세력이 중국 북방을 압박해 오자 중국·러시아와 관련된 역사와 지리 자료를 정리해 ‘북요휘편(北彙篇)’ 6권을 1858년 즈음에 편찬했다. 이 책을 다시 증보하여 80권으로 편집하고,1860년 초에 함풍제(咸豊帝)에게 바쳤다. 오경석이 청나라 문사들에게 받은 편지 292통이 남아 있는데,7첩으로 장황(표구)하였다. 양무운동(洋務運動)에 앞장선 사상가들의 편지가 많다. 그 가운데 하추도가 ‘북요휘편’ 증보를 마무리하고 오경석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기로 하자. 역매선생 각하, 무오년(1858) 정월 유리창에서 만나 오랜 친구같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평생지기같이 기뻐했지요. 제가 지은 시를 받고 묵매(墨梅)를 그려 주셨으니, 마음속 깊이 간직했습니다. 어느날엔들 잊겠습니까. 아우는 올해 겨울에 황제의 명을 받들고 서적을 편찬하여, 경신년(1860) 정월에 일을 다 끝내고 황제께 바쳤습니다. 이 편지는 신유년(1861) 2월4일에 썼으니, 여기서 말한 서적이 바로 ‘북요휘편’이다. 황제는 이 책에 ‘삭방비승(朔方備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삭방’은 북쪽을 가리키니,‘북방을 방비하기 위한 역사자료집’이라는 뜻이다. 이홍장(李鴻章)이 이 책을 간행한 해는 1881년이었으니, 오경석이 세상을 떠난 뒤이다. 오경석은 ‘삭방비승’ 간행본을 보지 못하고 ‘북요휘편’ 필사본만 보았는데, 골동 서화를 판매하는 유리창에서 시작된 사귐이 외교적인 자문을 받는 데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경석은 이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관해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하추도는 오경석이 지은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정독하고 충고하는 편지와 함께 서문도 써 주었다. 그러나 위의 편지를 쓴 이듬해에 39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오경석은 북경 외교가의 강력한 후원자 한 명을 잃게 되었다. ●청나라 친구들에게 병인양요에 관한 조언을 구하다 오경석이 하추도에게서 위의 편지를 받은 때는 5차 연행이었는데, 오경석 일행은 정작 청나라 황제를 만나지 못했다.1860년 10월 북경에 도착해 보니 북경은 이미 8월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황제는 열하(熱河)로 피난 가 있었다. 9월에 굴욕적인 천진조약을 체결해 연합군은 철수했지만, 중국뿐만 아니라 오경석 일행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부터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원군은 1866년 정초에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하였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잡혀 처형되자,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간신히 탈출해 동양함대 로즈 제독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했다.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대원군은 청나라에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도 탐지할 주청사(奏請使)를 보냈다. 정사(正使)는 유후조(柳厚祚)였고, 오경석은 통역 겸 뇌자관(賚咨官)이었다. ●‘천주교 박해´ 외국정세 탐지하러 淸으로 사절단이 북경에 도착하여 사흘이 지나자, 청나라 각국총리아문에서 숙소에 관리를 보내어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일이 있는지 물었다. 당상 역관은 숨기자고 했지만, 오경석은 숨기지 말자고 했다. 그런 사실을 묻는 것 자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며, 청나라에 숨겼다가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청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경석은 이와 별도로 청나라 관원들을 만나 프랑스 동양함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들이 조선을 침략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자문했다. 오경석이 사귄 친구들 가운데는 남방 출신이 많았는데, 남방에선 아편전쟁을 겪고 여러 항구를 개항한 경험이 있었다. 자문한 내용들은 정사의 수행원 심유경(沈裕慶)을 통해 본국에 보냈는데, 군공(軍功)을 세워 복건성 통판에 임명된 유배분(劉培芬)의 조언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6월8일 등주에서 배를 탈 때 서양의 병선(兵船) 십수 척이 있으므로 서양 배에 있는 광동인을 불러 물은즉, 바야흐로 고려에 향하기 위하여 구병(兵·군대 출동)한다고 운운하였다. 병(兵)의 다소를 물은즉 한 배에 500∼600명이라 하였다.(줄임) 대개 서양의 장기는 화륜선(火輪船)인데, 하루에 1400여리를 간다. 병선(兵船)은 작고 연통은 짧으므로 바라보면 알 수 있으며, 수심이 1장(丈)이면 뜨고 2장이면 간다. 이보다 얕으면 움직이지 못한다.(줄임) 저들의 포에는 비천화포(飛天火砲)가 있는데 포환의 크기는 쟁반만 하며, 그 안에 소환(小丸) 천백개가 들어 있어서, 발사되어 진중(陣中)에 들어와 땅에 떨어진 연후에 대환(大丸)이 갈라지면서 소환이 사방에 발산하여 사람을 부상시키니,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신용하교수 번역) 유배분은 프랑스의 대포가 조선의 대포와 다른 점까지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오직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 말라고 권하였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와 주북경 프랑스공사 베로네는 청국 정부에 조선에서의 천주교 승인을 요청하고, 청나라의 공문에 의한 동의를 받고 출병하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오경석은 예부상서 만청려를 만나 이 정보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고, 그 면담 내용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유배분:만상서(萬尙書)의 말에 중국의 운남병(雲南兵)이 프랑스 해군과 함께 이거(移去)한다 하는 설에 대하여 물으니, 가로되 이것은 서양인의 거짓말이라 하였다. 이것은 중국을 겁내서 성세를 과장하려는 계책에 불과하다. 종교의 시행을 청한 공문의 의미를 물은즉, 가로되 다른 나라의 출병은 처음부터 중국에 관계가 없는데 어찌 공문을 청하는 이치가 있을 것인가고 하였다. 그러나 귀국이 대국을 섬김을 아는 고로 그 공문에 한번 빙자하고자 한 것이다. 만청려:서양인의 소위 공첩(公帖)은 그들이 스스로 주관한 것에 불과하고, 처음부터 중국이 아는 바가 아니다. 총리아문은 행문전교(行文傳敎)를 불허하였다. 서양인은 전적으로 재리(財利)를 가장 숭상한다. 영국 오랑캐는 통상을 주로 하고, 법국(프랑스) 오랑캐는 행교(行敎·종교시행)를 주로 한다. 법국인은 집요하고 사나우며, 무릇 거사하면 일을 이룰 때까지 쉬지 않는다. 아라사(러시아)는 더욱 불가측이며, 탐랑(貪狼)하기 한량없고 또 바라는 바는 토지이다.(신용하 교수 번역) ●병인양요 동안 北京 머물며 외교활동 복건성 통판 유배분은 청나라 정부가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예부상서 만청려는 프랑스가 천주교를 앞세워 집요하게 자극할 것이지만, 정작 조선의 영토를 노리는 나라는 러시아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1860년에 러시아와 북경조약을 맺고 우수리강 동쪽 영토를 양도했던 뼈저린 경험을 알려준 것이다. 그 사이 8월에 프랑스 동양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사절단 일행은 북경에 계속 머물며 뜻하지 않은 외교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다고 생각한 대원군은 기고만장하여 쇄국정책을 고집했지만, 오경석은 뒤처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주청(駐淸) 프랑스공사관과 청국총리아문(淸國總理衙門) 사이에 오간 외교문서라든가 청나라가 조선정부에 보낸 자문(咨文)도 다 수집하였다. 음력 10월에 귀국한 오경석은 이런 자료들을 다 묶어서 ‘양요기록(洋擾記錄)’이란 책을 편집했다. 사절단의 활동을 보태고, 병인양요 기간에 조선정부의 대처와 국내의 동향도 일자별로 간추려 기록하였다.254쪽 분량에 음력 10월7일까지 기록이 남아 있으니, 정부 차원에서도 정리하지 못한 ‘병인양요 백서’를 오경석 한 개인이 정리한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를 대신했다고 할 만하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아우슈비츠 독일 나치 수용소’ 유네스코 공식 명칭 확정

    |파리 이종수특파원|독일과 폴란드의 신경전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유네스코는 27일(현지 시간) “앞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공식 명칭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독일 나치 수용소 및 처형 캠프’로 부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로니 아멜란 대변인은 “폴란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고 운영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 의혹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실제 몇몇 언론매체에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라고 잘못 언급한 사례가 있었다. 이에 폴란드 대통령과 총리인 레흐와 야로슬로브 카친스키 형제는 국제무대에서 아우슈비츠 명칭 개정을 촉구해왔다. vielee@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31) 천도교 발상지 경주 ‘용담정’

    [종교건축 이야기](31) 천도교 발상지 경주 ‘용담정’

    경주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0㎞쯤 떨어진 구미산 자락에 앉은 용담정(경주시 현곡면 가정리).7평 남짓 크기의 아담한 단층 목조 건물이지만 천도교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1824∼1864) 대신사(大神師)가 득도해 동학 천도교를 일으킨 천도교의 발상지이자 최고 성지이다. 지금은 교적 교인 10만명에 불과한 군소 종단으로 쇠락했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이 있었던 무렵엔 교인이 300만명이나 됐을 만큼 번창했던 민족종교 천도교. 그 대표 성지인 용담정엔 역사의 숨결과 민족혼을 느끼려 찾아드는 교인은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자.’는 사인여천(事人如天).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동학 천도교는 바로 이 세 가지의 기본 교리를 근본으로 삼는다. 최제우 대신사는 득도 후 원래 ‘무극대도(無極大道)’란 이름으로 동학을 세웠지만 훗날 유림과 관가의 탄압을 피해 살던 중 “내가 동에서 태어나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인즉 천도(天道)요, 학인즉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한 다음부터 동학이란 이름이 널리 통용됐다고 한다. 용담정은 바로 이 ‘무극대도’를 낳은 천도교의 발상지. 지금의 경북 경주 현곡면 가정리의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난 수운은 19살 때부터 10년간 전국을 떠도는 구도행각 끝에 처가가 있던 울산 유곡동에 은거, 수도에 들었다. 여우가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여시바윗골’이라 불렸던 외진 유곡동에 초가와 초당을 마련해 구도하던 중 을묘년인 185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으로부터 기이한 책(天書)을 받고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구도와 수련방식을 택한다. 이른바 천도교가 ‘을묘천서’라 부르는 큰 사건으로, 수운은 이때부터 “세상을 떠돌며 도(道)를 구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내 안에서 도를 얻을 것”이라며 구도의 방법을 바꾼 것이다. 국가 발간자료인 ‘비변사담록’과 ‘고종실록’에서 수운이 5∼6년간 울산에 기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만 ‘을묘천서’와 관련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천서의 흔적 역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천도교단 초기 내부 자료인 ‘수운실록’(1865년)과 ‘도원서기’(1879년)에 내용이 전할 뿐이다.“을묘년 봄잠을 즐기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밖으로부터 주인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중략)…노승을 초당에 오르게 했더니 책을 한 권 내놓고 그 내용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흘 뒤 선생이 ‘이 책의 내용을 알았다.’고 말하니 그 스님이 ‘부디 책의 내용대로 하옵소서.’라 말하며 떠났다.” 이 천서를 놓고 천주학서인 ‘천주실의’였을 것이란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됐지만 천도교는 10년간 세상을 주유했던 수운이 당시 그 유명한 ‘천주실의’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고 을묘천서를 받은 뒤 인근 내원암과 적멱굴에서 수도한 점을 들어 천주교와는 무관하다며 부인하고 있다. 아무튼 수운은 이 천서를 받고 4년 후 고향인 용담정으로 돌아와 6개월간 수도 끝에 한울님으로부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심법과 천도교 상징인 영부(靈符), 주문(呪文)을 받아 ‘무극대도’ 즉, 동학을 세웠다. 용담정은 원래 복령이란 스님이 지은 작은 암자였는데 수운 대신사의 할아버지가 암자와 인근 땅 수백평을 사들여 아들, 즉 수운의 아버지인 근암공 최옥에게 학업을 닦게 했다고 한다.30여년의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었다가 최옥이 글공부를 하도록 서사(書社) 네칸을 만들어 용담서사란 이름을 지었다. 용담전 위쪽의 사각정에는 최옥의 문집인 근암집 목판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결국 수운은 울산을 떠나 처자와 함께 이곳에 정착,“도를 깨닫기 전에는 구미산 밖으로 나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리라. ”고 맹세한 지 꼭 6개월 만에 이곳에서 무극대도인 천도(天道)를 얻은 것이다. 수운은 1863년 관군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조정에 맞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의 죄목으로 대구 장대에서 순도했는데 그 후 용담정 네칸과 살림집 다섯칸이 모두 헐렸다. 조정의 서슬이 무서워 아무도 용담정을 복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914년에 가서야 재건작업을 벌여 용담정이란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40여년간 인적이 끊겼다가 1960년 천도교 부인회가 창도 백주년기념사업으로 중창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75년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가 동학에 깊이 관여했던 때문인지 박정희 전대통령은 이 용담정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대한민국은 천도교에 큰 빚을 졌다.”는 말을 자주 했던 박 전대통령은 실제로 용담성지를 경주국립공원에 편입시키도록 지시했으며 용담정(龍潭亭)과 용담성지의 정문인 포덕문(布德門), 중문인 성화문(聖化門), 용담수도원의 편액 글을 직접 썼다. 정문 포덕문을 들어서 왼쪽에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상을 바라보며 300m쯤 숲길을 관통하면 오른쪽에 수도원과 사무실이 나타난다. 바로 앞 중문 성화문을 넘어 다시 숲길을 오르면 돌다리 용담교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오른쪽에 선경(仙境)이라 새겨진 바위틈에 석간수가 흐른다. 수운이 기도할 때 쓰는 청수(淸手)를 받던 곳으로 지금도 교인들이 아주 신성시한다.2005년 영남대 석좌교수에 임명돼 이곳을 찾은 김지하 시인은 “나처럼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용담정에 오를 수 있겠느냐.”며 용담교에 무릎을 꿇은 채 절만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용담정 정면에는 수운 영정이 모셔져 있고 양옆에 천도교 상징인 영부가 걸렸다. 수운이 득도할 때 눈에 나타났다는 그 영부이다. 왼쪽 벽면에는, 남아 있는 수운의 유일한 친필인 거북 ‘구(龜)’자가 걸려 있다. 수운은 생전에 후학들의 마음급함을 질타하며 조급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龜’자를 많이 써주었다고 한다. 이 ‘龜’자 밑 8폭병풍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不知明之所在 遠不求而修我’(밝음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겠거든 멀리서 구하지 말고 나를 닦아라). 한울님과 문답 끝에 득도의 경지에서 남긴 천도교 1세 교조의 일침이라지만 ‘남 아닌 나부터 제대로 보라.’는 수신(修身)의 보편적인 교훈이 아닐까. kimus@seoul.co.kr ■천도교의 발자취 몰락한 양반가에 태어난 수운이 구도행각에 나선 것은 기울어가는 가세와 조선말 불안정한 사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유교의 폐습에 불만을 가졌고 10년간의 주유천하에 나서 인간과 우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세웠던 것이다. 이 시천주는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시천(人是天)으로 발전하며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이어져 천도교의 종지가 되었다.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은 센세이션을 몰고 왔고 이를 못마땅히 여긴 조정에서 결국 ‘서학(西學)’‘이단(異端)’이라 하여 탄압의 칼을 뽑았다.1세 교조 수운은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대구 장대에서 참형으로 순도했고 도통을 이어받은 2세 교조 최시형도 지하포교에 나서 삼남지방에 형성된 교세에 힘입어 동학혁명을 주도하다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최시형의 수제자였던 3세 교조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는데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출감한 뒤 곧바로 사망했다. 결국 천도교의 1·2·3세 교조는 모두 순도한 셈이다. 천도교의 종교행위는 수행과 신앙을 겸하는데 그 방법으로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侍日), 성미(誠米), 기도(祈禱) 등 오관(五款)을 택하고 있다. 주문은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로 수련할 때 반복해서 외우며 청수는 매일 오후 9시의 기도식을 비롯해 모든 의식에 쓰인다. 시일은 일요일 오전 11시에 봉행하는 집회를 말하며 성미는 매일 밥을 지을 때 식구마다 한 숟가락씩 정성으로 떠놓은 쌀을 모았다가 한달에 한번씩 교회에 헌납한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중앙총부를 중심으로 전국에 130여개의 교구와 전교실이 있으며 현재 김동환 교령이 교단을 이끌고 있다.
  • “北 정치범 20만명 5개 수용소에 수감”

    탈북자 안명철(38)씨와 신동혁(24)씨가 19일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와 영국·북한의회그룹 의원들을 만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증언했다. 두 사람은 영국·북한의회그룹 주최로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열린 회의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비참한 실상과 탈북해 한국에 오기까지 험난한 과정에 대해 밝혔고, 오후에는 캐머런 보수당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두 탈북자의 영국 방문은 영국의 기독교 인권단체 세계기독연대(CSW)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살인, 강제노동, 강간, 고문 등 인권범죄들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발간한 데 맞춰 기획한 것이다. 1987∼1994년 북한 정치범수용소 경비원을 지낸 안씨는 “정치범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5개 수용소에 20만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한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본인은 물론 3대에 걸쳐 이 수용소에 수감된다고 밝혔다. 그는 당 간부인 아버지가 취중에 반체제 발언을 한 죄로 부모와 동생들이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탈북을 결심하고 중국을 통해 1995년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영국·북한의회그룹 위원장인 자유민주당 출신 데이비드 앨튼 의원은 “북한 수용소 수감자들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런던 연합뉴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4)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24)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Ⅰ

    인조반정의 발생과 성공은 대외적으로도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조선에서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는 소식에 명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후금의 군사적 압박에 밀려 수세에 처해 있던 명에 조선은 가장 중요한 번방(藩邦)이었기 때문이다. 명은 조선을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 들어선 인조 정권이 자신들의 대후금(對後金) 정책에 순응할 것인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명은 조선의 정국(政局) 향배를 주시하는 한편 조선의 새 정권을 ‘길들이기’ 위한 묘책을 마련하려고 부심했다. ●원가립의 ‘찬탈(簒奪)’ 인식 정변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던 인조와 서인 반정공신(反正功臣)들 또한 명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조선의 ‘상국’으로 군림해온 명으로부터 자신들의 집권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는 것이 시급했다. 광해군이 비록 ‘폐모살제’ 등의 패륜 행위를 자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하 된 처지에 쿠데타를 일으켜 임금을 폐위시킨 행위 또한 명분적으로 쉽게 정당화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거사와 집권을 정당화하고, 이후의 통치를 원활히 하려면 명의 인정이 절실했다. 1623년(인조 1) 4월26일, 반정이 일어난 사실을 명 조정에 알리고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한 사절단이 서울을 출발했다. 주청사(奏請使) 일행은 정사(正使) 이경전(李慶全), 부사(副使) 윤훤(尹暄), 서장관(書狀官) 이민성(李民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5월22일, 평안도 철산(鐵山)의 선사포(宣沙浦)에서 명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당시 요동의 대부분이 후금에 점령되었던 상황에서 조선에서 명으로 이어지는 육로는 이미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선사포 맞은편의 가도를 거쳐, 요동반도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상륙하는 해로를 이용했다. 주청사 일행은 산동반도에 상륙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다. 도중에 들렀던 섬에서 만난 명군 지휘관들이 인조반정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광록도(廣鹿島)에서 만난 이씨 성을 지닌 지휘관은, 조선의 새 정권이 의주부윤 정준(鄭遵)을 처형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주청사 일행에게 ‘정준이 전적으로 오랑캐(후금) 편으로 기울었다.’고 지적했다. 6월13일, 일행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도착하면서부터 명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산동성의 지방장관인 순무(巡撫) 원가립(袁可立)은 주청사 일행을 힐문했다. 그는 ‘무슨 이유로 광해군을 함부로 폐위했냐?’고 힐문했다. 원가립은 조선에서 일어난 정변의 성격을 ‘찬탈’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정’으로 인정해 줄 것으로 믿었던 명의 고위 신료가 ‘찬탈’이라는 평가를 내리자 주청사 일행은 경악했다.‘찬탈’로 평가하는 한 주청사 일행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앞잡이’로 매도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북경의 험악한 분위기 북경에 도착하여 목도한 명 조정의 분위기는 훨씬 싸늘하고 심각했다. 주청사 일행은 명의 예부(禮部)에 나아가 반정의 전말을 설명하고 인조의 즉위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의 정문(呈文)을 제출했다. 당시 명 조정 주변에는 조선의 정변과 관련하여 ‘경악할 만한’ 풍문이 돌고 있었다.‘조선의 반정세력은 거사가 일어난 당일 궁궐에 불을 질러 광해군을 살해했고, 일본군 3000명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이 골자였다. 사신들을 면대했던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국방 차관)은 “광해군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힐문한 뒤,‘무슨 이유로 먼저 명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함부로 폐위했냐.’고 다그쳤다. 주청사 일행은 난감했다. 그 같은 험악한 분위기에서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왜 인조반정을 ‘찬탈’로 인식하고 주청사 일행을 다그쳤을까. 그와 관련해서는 반정 소식이 알려진 직후, 절강도어사(浙江都御史) 팽곤화(彭鯤化)가 명 조정에 올린 상소의 내용이 주목된다. 그는 상소에서 ‘광해군은 십수년 동안 명에 충순(忠順)했고 별다른 과오가 없었다.’고 평가하고,‘그런 그를 하루아침에 쫓아낸 불충한 자들이 명을 도울 리가 있냐?’고 반문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명 조정의 신료들이 대체로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광해군이 보여주었던 절묘한 외교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1618년 명이 후금을 치는 데 동참하라고 요구했을 때, 처음에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부정적이었지만 결국 군대를 보냈던 것은 명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심하 전역’ 이후, 광해군은 명의 재징병 요구를 실제적으로는 거부하면서도 명의 힐책을 피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광해군은 ‘외교는 때로 사술(詐術)을 피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그 같은 지론과 수완을 통해 적어도 명 조정으로부터 ‘충순하다.’는 평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명 조정이 광해군의 폐위 소식을 접했을 때 당황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명, 조선을 길들이려 하다 명 조정의 신료들 가운데서는 인조반정을 ‘찬탈’로 인식하는 것은 물론,‘조선의 난신적자들을 토벌하고 광해군을 원상복귀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강경파까지 나타났다. 예과도급사중(禮科都給事中) 성명추(成明樞) 같은 이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명 조정의 가장 큰 관심은 조선의 새 정권을 ‘길들여’ 그들을 후금과의 대결 구도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그러려면 조선의 정정(政情)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실제로 명의 신료 가운데는 휘하의 인물을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조선에 들여보내 정세를 정탐하는 자도 있었다. 조선의 주청사 일행도,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위해 조선을 활용하려 했던 명의 속내를 정확히 읽었다.1623년 9월께까지도 명 조정이 인조를 승인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청사 일행은 새로운 ‘카드’를 빼어들었다.‘조선은 후금과 대치하고 있고, 명의 원수(怨讐)인 그들을 토벌하려는 강한 의지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인조의 책봉이 늦어져서 그들을 토벌하려는 명령 등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명 조정에서는 조선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위기가 점차 높아갔다. 각로(閣老) 가운데 한 사람인 손승종(孫承宗)은 ‘조선 문제를 섣불리 처리하지 말고 형세를 보아 명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난신적자들을 토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금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조선에 대해 ‘종주국’을 자처하는 명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승인도 받지 않고 국왕을 갈아치운 반정세력의 행위는 명분적으로 분명 커다란 하자였다. 하지만 조선의 새 정권이 지닌 ‘명분적 약점’을 적절히 활용하면 조선을 확실히 후금과의 대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명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던 인물은 호부시랑(戶部侍郞) 필자엄(畢自嚴)이었다. 그는 희종(熹宗)에게 올린 상소에서 인조반정을 ‘불법 행위’라고 분명히 정의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스스로의 ‘허물’을 거듭 인정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후금을 토벌하게 한 뒤에야 그를 국왕으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하려는 절묘한 방책이었다. 필자엄의 상소 이후 명 조정에서는 인조정권의 명분적 약점(‘찬탈’ 행위)을 이용하여 조선을 후금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향후 조선과 후금 사이에 긴장이 높아질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인조반정은 이렇게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 동아시아 정세에 미묘한 파장을 몰고 왔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1623년(광해군 15) 3월13일 새벽, 광해군은 다급하게 창덕궁의 담을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반정군(反正軍)의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안국방(安國坊)의 여염으로 숨어들었다. 궁궐 담을 넘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광해군’이 되었고,‘폐주(廢主)’,‘혼군(昏君)’으로 불리기 시작했다.‘쫓겨난 임금’,‘어리석은 임금’이란 뜻이다. ‘폐주’는 몸을 숨긴 지 하루도 못되어 체포되었다. 이윽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졌다. 유배지 제주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19년. 광해군이 ‘인생무상’,‘권력무상‘을 곱씹어야 했던 그 시간,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역사도 요동쳤다. ●인조반정, 성공하다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1623년의 쿠데타를 보통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반정’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른 곳으로 돌아간다(發亂世反諸正)’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모의는 162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서(李曙), 신경진(申景 ), 구굉(具宏) 등 무신들이 먼저 발의하고 김류(金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면서 급진전되었다. 신경진과 구굉은 모두 능양군(綾陽君·인조)의 인척들이고 김류와 이귀, 최명길 등은 광해군대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西人)의 명망가들이었다. 그들은 왜 정변을 기도했을까?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반정의 명분을 기록하고 있다.1613년 ‘은상(銀商) 살해 사건’에서 비화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고, 곧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났던 것이 결정적이었다.‘폐모논의’는, 그것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효(不孝)의 극치’이자 패륜으로 인식되어 광해군 정권에 치명타가 되었고, 반정 주도 세력에는 ‘거사’를 정당화하는 절호의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주도세력들이 거사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고변(告變) 때문에 거사 계획이 몇 차례나 누설되었지만 용케도 토벌을 피했다.1622년 가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이귀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기밀이 누설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광해군의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겨우 무마되었다. 1623년 3월의 거사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12일, 북인(北人) 김신국(金藎國)은 자신이 입수한 서인들의 거사 계획을 정승 박승종(朴承宗)에게 알렸다. 곧바로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왕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국청이 설치될 무렵,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를 벌이려던 참이라 재가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반정 주도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이윽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반정군은 3경 무렵 창의문(彰義門)을 깨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광해군, 폐위되다 인조반정의 거사를 이끌었던 반정군의 전력(戰力)은 사실 보잘것없었다. 병력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가 이끄는 700명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생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무기를 잡아보거나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그들이 기율이 있을 리 만무했다.‘일사기문(逸史記聞)’의 저자는,“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반정군이 그나마 대오를 갖추고 기율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장 이괄(李适)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려던 직전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귀가 그의 장재(將才)를 알아보고 대장을 맡긴 것이었다. 이서 등 몇몇을 빼면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했던 반정군 지휘부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군이, 광해군에 대한 경호를 책임지고 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정예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거의 무혈입성(無血入城)했고, 광해군은 반역세력에 대한 진압 한번 시도하지 못한 채 궁궐의 담을 넘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항상 내부로부터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다. 즉위 말년의 광해군이나 그의 측근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정치적으로 모두 문제가 있었다. 대북파의 핵심인 이이첨은 정치적 반대파인 서인과 남인(南人)을 모두 축출한 이후 권력이 극도로 비대해졌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광해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광해군 또한 권간(權奸)이 되어버린 그를 불신하고 견제했다.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 6년 동안 자신의 경호 책임자인 훈련대장을 11차례나 교체했다. 평균 1년에 두 차례나 바꾼 것이다. 제대로 믿을 만한 신료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불신감의 표출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거사가 일어날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은 반정군에게 포섭되었다. 광해군을 배신한 이흥립은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난입하는 것을 방관했다. 광해군은 또한 말년에 김개똥(金介屎)이란 상궁을 총애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귀, 김자점 등 반정 주도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이귀가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수차례나 들어왔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비호 때문이었다. 말년의 광해군은 정치적 판단력에서 분명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폐위의 명분이 된 외교정책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부활했다. 인조는 반정 성공 직후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그녀를 찾아뵙고 반정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인조에게 옥새를 넘기고 그의 즉위를 선언했다. 그로써 인조는 선조(宣祖)의 왕통을 잇는 계승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윽고 광해군이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에 대한 그녀의 원한은 처절했다. 인목대비는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이라며 광해군의 목을 베려고 시도했다. 인조와 신하들은 ‘폐출된 임금이지만 신하들이 그에게 형륙(刑戮)을 가할 수는 없다.’고 결사적으로 방어했다.3월14일,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제시하고 그를 폐위한다는 교서를 공식적으로 반포했다. 당연히 ‘폐모살제(廢母殺弟)’가 먼저 언급되었다.‘궁궐 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것’,‘선왕조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쫓아낸 것’,‘뇌물로 인사를 단행하여 혼암(昏暗)한 자들이 조정에 넘치게 한 것’ 등의 ‘악행’들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인목대비는 이어 ‘외교 문제’를 언급했다.‘선조는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명나라가 위치한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역 때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가 되게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한마디로 ‘재조지은을 배신했기 때문에’ 폐위한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광해군 시절의 대북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영구히 축출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거사가 성공한 당일, 인조가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에게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점이다. 박엽과 정준은 서쪽 관방(關防)인 의주와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 및 후금과의 외교 교섭을 전담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처형한 것은, 향후 인조정권의 대외정책이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조처였다. 바야흐로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중계석] 안네 프랑크 닮은 탈북어린이들/크리스토프 NYT 칼럼니스트

    “부끄러움도, 겁도 많은 14살 탈북소녀가 홀로 남겨진 9살짜리 두 탈북소년을 돌보고 있다. 이 세 어린이의 삶은 현대판 안네 프랑크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뉴욕타임스 내에서 손꼽히는 ‘아시아 전문가’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4일(현지시간) 북한과 중국의 국경 지대에서 숨어 지내는 탈북 어린이들을 비밀리에 만난 뒤 드러낸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는 칼럼에서 탈북 어린이들을 2차대전 때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희생된 소녀 ‘안네 프랑크’에 비유했다. 은신처에서 만난 14살 소녀는 한 겨울에 부모와 함께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 탈출했다. 소녀의 가족은 중국 공안을 피해 달아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가족의 생사도 모른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미국 남부 흑인노예의 북부 탈출을 돕던 비밀조직)’라고 지칭한 한 탈북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네 곳으로 분산된 은신처를 방문했다. 최근 북한과 중국이 합동으로 탈북자 단속에 적극 나서면서 탈북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북한은 1년 전부터 송환된 탈북자들을 감옥에 수감하고 재범자와 기독교인은 가족 전체를 노동수용소에 보내는 등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일부 탈북자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탈북 후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공개 처형된다고 한다. 중국 정부도 탈북자들을 돕다 적발된 중국인들을 수감하는 등 처벌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는 칼럼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탈북자들을 고문과 투옥, 처형이 기다리고 있는 북한으로 인계하는 것은 유엔 난민협약 위반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크리스토프는 이어 부시 정부도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리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29)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29)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한국정교회. 신교인지, 구교인지, 아니 한국에선 그 존재마저도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 하지만 엄연히 전국에 2000명의 세례교인이 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교회다. 서울을 비롯해 인천 부산 전주 춘천 양구 용미리 등 7개의 정교회 성당에서 매일 하루 두번씩 예배가 열리며 주말엔 어김없이 성찬예배가 진행된다. 이 가운데 서울 마포경찰서 맞은 편 언덕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마포구 아현1동 424-1)은 한국정교회의 총본산격으로, 한국에선 처음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독특한 공간이다.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정교회 교인들은 신앙의 신조 ‘니케아 신경’을 외울 때 이렇게 말한다.‘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오순절에 거룩한 사도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전파되었고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조직되고 지역공의회와 세계 공의회의 보호를 받은 교회’.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5대 교구가 형성되어 내려오던 그리스도교는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로 인해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4개 지역을 관할하는 정교회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졌다. 이 가운데 정교회는 서방교회라 부르는 로마 가톨릭과 구분해 동방교회로 통한다. 한국정교회는 아직 독립교회나 자치교회로 인정받지 못한 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를 모교회(母敎會)로 선교활동을 펼치는 작은 교회. 그리스에서 파송된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를 중심으로 그리스 출신의 주교와 한국인 신부 6명, 한국인 보제신부 1명, 러시아 출신 신부 1명 등 9명의 사제가 사역하고 있다. 종교로서의 정교회는 1900년에야 이 땅에 처음 들어왔지만 정교회와 우리와의 만남은 800년전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몽골 군이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시대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 보면 몽골의 왕실은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하게 대접했다.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등의 귀족 자제들이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조선 영조시대 청나라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던 이윤신은 ‘문견사건(聞見事件)’에서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大鼻獺子)를 만났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대비달자는 바로 ‘코 큰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 조선 선교책임자로 입국한 러시아 흐리산토스 쉐헤트콥스키 대신부가 그해 2월17일 러시아 공사 관저의 큰 방에서 성찬예배를 드린 것이 한국정교회의 시초. 한국정교회는 그 날을 생일로 삼고 있다. 고종으로부터 부지를 하사받아 지금 경향신문 자리인 서울 정동 22번지에 첫 성당을 세웠는데 러시아에서 제작해 들여온 7개의 크고 작은 이색 종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소리가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이후 정교회는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의 선교사가 모두 추방되면서 사실상 단절됐지만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교구로 조직되어 교세를 늘여가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다시 철퇴를 맞았다.1947년 한국인 사제 알렉세이 김의한이 서품되었지만 전쟁 발발 두 달뒤 납북되어 처형되었고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이다. 정동성당도 전쟁의 와중에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당시 한국에 파병된 그리스 병사들이 매월 1달러씩 모아 성당 복구 비용에 보태기도 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육군의 종군 사제인 안드레아스 할쿄풀로스 대신부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보리스 문이춘이 교회재건에 나서 1968년 아현동 언덕에 지금의 성당을 세워 놓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들이 긴 사각형의 공간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신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바실리카 양식을 택한다면 정교회 교회들은 한결같이 중앙의 둥근 돔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빛을 수렴하는 비잔틴 양식을 쓴다. 성니콜라스 대성당도 다르지 않다. 멀찌감치서 볼 때도 지붕의 둥근 돔이 가장 먼저 눈에 든다. 성당 입구 왼쪽에 선 아치형 종탑도 보통 교회나 성당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모두 5개의 크고 작은 종들에 내리 걸린 줄을 잡아당겨 치도록 했는데 요즘도 매일 예배 때 어김없이 종이 울린다. 정교회가 처음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이 러시아에서 7개의 종을 들여왔는데 전쟁중 2개만 남긴 채 모두 파손되었고 지금은 이 2개와 나중에 그리스 정부가 기증해온 3개의 종을 모아 5개의 종을 걸었다.1978년 종탑을 세울 때도 파병 그리스 병사들이 모금한 돈이 쓰여졌다고 한다. 정문 위에 걸린 수호성인 성 니콜라스의 금색 모자이크상을 보며 성당 문을 들어서면 비잔틴 양식 그대로 천장의 거대한 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앙 돔을 기준으로 신자석과 전례공간인 지성소가 나뉘지만 중앙 돔 양쪽에 사각형 공간을 각각 두어 결국 내부 공간은 십자가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성당 문 바로 앞에는 양쪽에 촛불을 밝히는 성초대가 있는데 신자들이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나를 희생하고 이타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정화의 공간이다. 전례공간으로 가다 보면 신자석 앞 왼편에 세례조가 눈에 띈다. 전통적으로 침수 세례를 고수하는 정교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지하 1.5m 깊이의 공간에 물을 채워 신자들이 세번 물속에 잠기는 과정을 통해 세례를 받는다.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화(聖畵)를 중시한다고 한다.4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성화는 대부분 복음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진리를 신자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보조교재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당 안은 온통 성화로 도배되다시피 장식됐다. 모두 그리스 아테네대학의 소존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제작해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중앙 돔 역시 거대한 성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꼭대기의 예수를 정점으로 성모 마리아와 천사·세례요한, 구약의 예언자 아브라함·다윗·모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이른바 구약의 의인들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결국 이 돔은 천상의 예수님부터 지상의 인간까지 연결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신자석과 전례공간인 지성소를 구분하는 이코노스타시스(성상 칸막이)도 천주교 성당과는 달리 높게 쳐져 있어 독특하다. 꼭대기에는 정교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꽃봉오리 십자가가 올려져 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짊어진 예수의 고귀함을 아름답게 표현한 십자가이다. 성상 칸막이 중간의 ‘아름다운 문’ 양쪽에는 역시 예수와 세례요한, 성모마리아상이 새겨졌다. 성상 칸막이 안쪽의 전례공간 구성은 천주교 성당과 비슷하지만 제대 벽은 성모상과 아기예수, 최후의 만찬을 형상화한 성화로 마감하고 있다. 성당 왼쪽, 선교사관과 사무실·교육실로 쓰이는 건물의 지하엔 성 막심 성당이 있다. 중앙 성당이 일요일 성찬예배가 열리는 곳이라면 이곳은 평일 두차례씩 예배가 열리는 소성당. 초기 선교사들이 입던 제의와 18세기 제작된 성화, 복음경, 한글 기도문, 성가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러시아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영어 예배도 이곳에서 열린다. kimus@seoul.co.kr ■ “교세 확장보다 진실된 믿음 전파에 힘써” 소티리오스 트람바스(78) 대주교는 1975년 문이춘 신부의 후임으로 그리스 정교회에서 부임해 32년간 한국정교회를 이끌고 있는 한국정교회의 가장 웃어른. 교인 2000명에 불과하지만 한국정교회를 대표하며, 세례며 온갖 성사를 주례하는 ‘영적 아버지’로 통한다.“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달랑 성당 하나밖에 없었어요. 종탑도 없이 성당 한 쪽에서 종 몇 개를 매달아 예배를 알리곤 했는데, 돌이켜 보면 놀랄 만한 성장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정교회는 천주교 못지않게 이 땅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세계 어느 지역 정교회에도 뒤지지 않는 신자들의 열성과 신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소티리오스 대주교. 그는 “한국의 정교회 교인들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가르침’의 의미를 가진 정교회 교리에 존경스러울만큼 충실한 채 성숙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거듭 자랑한다. “서구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인해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지만 정교회는 초기 교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된 믿음(복음) 전파에 치중해온 역사를 갖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정교회는 이같은 초기 교회의 정신을 올곧게 지키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이 분쟁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한국은 지구상 유례없는 다종교국가라는 소티리오스 대주교는 “그러나 같은 종파이면서도 분열을 재생산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며 “성장과 신자 확보에 치중하지 않는 정교회를 주목해 달라.”고 주문했다.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9) 이차돈순교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9) 이차돈순교비

    신라는 국사시간에 배운 대로,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신라의 불교 공인이 ‘대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중국을 거쳐 인도에서 들어온 이 종교가 훗날 민심을 한데 모아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차돈의 순교 설화를 담은 높이 106㎝의 아담한 비석이 하나 전시되고 있습니다. 헌강왕 10년(818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6각형 조각입니다. ‘스토리를 새긴 순교비’란 전례가 없습니다. 불상이나 석탑처럼 전통적인 양식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식 표현을 빌리자면, 조각가는 자신의 조형세계를 그야말로 마음껏 펼쳐놓을 수 있었겠지요. 한 면에는 순교 설화가 전하고 있는 대로, 이차돈이 처형되는 순간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젖빛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땅이 울리는 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습니다. 조각가는 이런 장면을 비면의 아래쪽에 집중배치했는데, 전통 조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도가 참신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다섯 면은 둘러가며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설화의 내용을 글자로 새겨놓았습니다. 순교비는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의 백률사(栢栗寺)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옛 이름이 자추사(刺楸寺)인 백률사는 순교 당시 망나니의 칼에 잘려나간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라고 설화는 기록하고 있지요. 경주박물관에는 1914년 3월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는데, 처형 장면을 조각한 비면이 하늘을 향한 채 순교비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입니다. 방치되는 동안 순교비의 지붕돌도 사라져 여태껏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교비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공인을 설화의 형태로 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이 설화로 각색되어 전승되는데 얼마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지요. 실제로 이차돈의 순교 설화는 순교비 말고도 몇가지가 더 전합니다.‘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도리사 아도화상사적기’ 등입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법흥왕이 토착신앙을 고수하려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정착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을 희생시켰고, 그 결과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으로 압축됩니다. 특히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법흥왕과 뜻을 같이하던 이차돈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로 ‘해동고승전’ 등에 등장하는 천경림(天鏡林)의 존재에 주목했습니다. 천경림은 당시 사회적으로 널리 일반화되어 있었던 토착신앙의 성스러운 공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이차돈이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사를 일으키려 했으니 갈등과 마찰은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법흥왕은 불교의 단계적 정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반면 이차돈은 처음부터 토착신앙의 본거지에 사찰을 지음으로써 일거에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려 했다는 뜻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염촉(厭觸)이라고도 불린 이차돈은 순교 당시 22세였습니다. 순교비는 죽음으로 신라사회를 바꾸어놓은 젊은 ‘혁명가’를 조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을 만큼 역사성과 조형미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dcsuh@seoul.co.kr
  • 프랑스 ‘사르코지 시대’ 막 올랐다

    |파리 이종수특파원|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가 16일(현지 시간) 오전 11시 관저인 엘리제 궁에 입성하면서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취임식은 전통에 따라 신·구 대통령의 만남에 이어 간단하게 진행됐다.●시라크와 40여분 비공개 환담퇴임하는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10시58분 엘리제궁 입구에 나와 신임 사르코지 대통령을 영접했다. 두 사람은 바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비공개로 40분여 대화했다. 그 과정에 사르코지는 시라크로부터 핵무기고 비밀코드를 넘겨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사르코지는 시라크와 악수를 한 뒤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엘리제궁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엘리제궁으로 돌아온 사르코지는 장 루이 드브레 헌법위원장의 취임 선언에 이어 대통령 훈장을 받은 뒤 서명했다. 사르코지는 환영객 앞에서 국가 원수 자격으로 처음 연설했다. 그는 “국민이 나에게 통치권을 위임했기에 그 신뢰에 부응하고 면밀히 수행할 것”이라며 “국제 경쟁 시대에서 변화에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순간 앵발리드에서는 21발의 축포가 발사됐다.●엘리제궁 앞 도로 환영 인파 이날 취임식에는 사르코지의 가족과 친구, 전날 사퇴서를 제출한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 의회 지도자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한편 이날 취임식에는 외신 기자 200여명이 몰려 취재에 열을 올렸다. 또 엘리제궁 앞 도로에는 시민 500여명이 신·구 대통령이 지나갈 때 손을 흔들며 반겼다. 한편 대선 결선투표 불참으로 화제가 된 새 영부인 세실리아는 이날 소매가 없는 진주빛 원피스를 입고 5명의 자녀들과 함께 환영객을 맞았다. 사르코지는 취임식 뒤 개선문의 무명용사 묘를 참배한 뒤 샹 젤리제 거리의 샤를 드 골 장군 동상에 헌화했다. 가는 도중 사르코지는 환영 인파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며 화답했다. 이어 파리 서쪽 외곽 불로뉴 숲으로 가서 2차 세계대전 때 학생 저항군이 독일군에 처형당한 장소를 방문했다.●피용 총리 임명… 내각 인선은 미뤄 사르코지는 공식 취임 행사가 끝난 뒤 바로 독일로 날아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 15명의 내각 인선 구상에 돌입했다. 애초 17일 내각 인사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회당 소속 전직 장관 등의 임명을 둘러싸고 진통을 겪느라 프랑수아 피용 전 교육장관만 총리로 임명하고 나머지 장관 인선은 미뤄질 것으로 알려졌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총리 시절 보건장관을 지낸 베르나르 쿠슈네를 외무장관에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일간 르 피가로는 14일 내각 인선과 관련 “경제·고용 전략장관에 장-루이 보를루 현 고용·연대 장관, 국방장관에 에르베 모랭, 문화장관에 크리스틴 알바넬 등이 임명될 예정”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퇴임한 시라크 부부는 모로코로 휴가를 다녀온 뒤 센 강 주변의 아파트에 임시로 머물다 거처가 마련되면 이사할 예정이다.vielee@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8)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8) 절두산 천주교 순교 성지

    1만명에서 많게는 2만명의 순교자를 냈다는 이 땅의 천주교 역사는 그야말로 처절한 박해의 점철이다.‘박해의 역사’란 말 그대로 곳곳에는 목숨을 던져 신앙을 지켜낸 천주교 선구들의 외침을 소리없이 전하는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휘광이´(천주교에서 망나니를 부르는 말)의 칼날 아래 피를 뿌리며 스러져간 숱한 순교자들 가운데 지금까지 성인 품에 오른 이는 103위이다. 지난 1984년 시성(諡聖)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 103위의 영혼은 뒤늦게나마 위로받은 채 빛을 발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 순교자들은 부지기수다. 전국의 천주교 순교터 가운데 절두산 성지(서울 마포구 합정동 96의1·사적 399호)는 이름 나지 않은 무명의 초기 신자들이 가장 많이 피를 흘린 성지이다. ‘절두산’(切頭山).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순교 터이다. 수천명(3000∼7000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신원이 파악된 순교자는 고작 29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24명만 이름과 행적이 확인됐고 나머지 5명은 이름만 겨우 알 수 있을 뿐이다. ●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참배 지난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한국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공항에서 곧바로 직행해 참배했던 곳도 이곳이다. 이 땅에선 어떤 험한 일이 있었을까. 옛 양화진 일대를 포함하여 사적지로 지정된 이 순교 성지는 지금의 이름과는 달리 원래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했던 곳. 양화진 동쪽 봉우리의 절두산은 ‘동국여지승람’이며 ‘세종실록’등에 ‘머리를 높이 든 형상’, 혹은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형세’라 하여 ‘가을두(加乙頭)’니 ‘잠두봉(蠶頭峰)’의 이름으로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 강희맹은 그 형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호는 도성에서 10리도 안 되게 떨어져 있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러 형승이 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 남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 같으며 혹은 잠두라고 불린다.” 그 말마따나 늘상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루손들이 그늘을 찾던 평화로운 곳으로, 중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유람선을 띄웠다고 한다. 그렇듯 한가롭게 명승을 이루던 양화나루와 잠두봉이 피비린내 나는 ‘절두’의 극형지로 변한 것은 바로 병인년인 1866년의 병인양요 때문이다. 그해 두차례의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온 배경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확인한 대원군과 조정이 박해의 칼을 들었다.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온 바로 그 양화진을 보란 듯이 사형지로 삼은 것이다. 당시 절두산에서 처형을 하기 전 내건 포고문에서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내용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교회사연구소와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조사한 대로라면 이곳에서 휘광이의 칼이 피를 뿌렸던 시기는 1866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였다. 황해도 출신으로 시흥 봉천동에서 잡혀온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 아들 붕익(바오로)이 순교한 것을 시작으로 수천명이 9개월간 차례로 목숨을 잃어간 것이다.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의 주 처형지였던 새남터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선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 얼마만큼 절두산 처형을 집요하게 진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재판의 형식과 절차가 있었을 터이지만 절두산의 처형은 무지막지한 선참후계(先斬後啓)였다. ● 순례성당·박물관 등 웅장하게 세워져 “일단 먼저 머리를 자르고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은 29명만 빼놓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을 성지로 삼은 천주교계는 1962년 ‘가톨릭 순교성지’ 기념탑을 세웠다가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은 1966년 기공식을 갖고 그 이듬해에 종탑과 순례성당, 박물관으로 구성된 절두산 기념관을 웅장하게 세워놓았다. 사제관을 겸한 순교성인시성기념관을 지나 야외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오른쪽에 3층의 기념관이 우뚝 섰다. 순교자기념상을 쳐다보면서 오른쪽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가장 먼저 ‘절두산’이라 새긴 바윗돌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계단과 소로를 조금 더 올라 꼭대기에 닿으면 형 집행 때 썼던 형구들을 전시해놓은 진열장이 당시 처형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진열장 정면에 박물관, 그 오른쪽에 성당 출입문이 따로 나 있다. 기념관은 잠두봉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채 순교자들의 정신을 오롯이 담았다고 한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전통 갓의 모양을 한 돔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중앙 제대와 독서대, 해설대, 감실을 환히 비춘다. 양쪽 벽을 두른 14처며 천장에서 제대 앞으로 내리건 십자고상, 부활절에만 밝힌다는 제대옆 부활초, 죄인이 목에 쓰는 칼을 형상화한 독서대의 모습이 독특하다. ● 순례객들 발길 끊이지 않아 신자석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성해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가장 먼저 찾은 공간으로 순교 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가 모셔져 있다. 왼쪽 위에는 빈 공간이 마련된 채 앞으로 봉안될 순교자 6위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옆 박물관은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 박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공간. 절두산 순교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초대 교회 창설을 보여주는 이벽, 이가환, 정약용의 유물과 순교자 유품, 형구(刑具)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한국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을 포함해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도 들어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야외전시장으로 내려서면 병인박해 때 교수형을 집행하던 형구들이며 희생자들의 행적을 재현해 놓은 갖가지 전시물들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김대건 신부 동상을 비롯해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가 순례객들을 차례로 맞는다. 한 집안 열여섯명이 한꺼번에 희생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를 새긴 비석 앞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순교 성지를 다지기 위한 작업이 한창일 무렵 “너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라 절두산으로 부른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계기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절두산 성지’. 무명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해 천주교계가 어렵사리 마련해 놓았지만 그 형세는 마치 칼을 쓰고 처형을 기다리는 순교자의 모습을 닮아 있어 순례객들을 안타깝게 한다. 기념관과 사제관 앞쪽을 가로지르는 당산철교와 성당 아래쪽 강변북로, 일산 방향으로 뻗은 지하차도가 ‘ㄷ자’ 모양으로 성지를 옥죄고 있다. 한국 천주교 사상 가장 혹독했다는 ‘병인박해’의 순교자들은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kimus@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정확한 순교 위치는 어디? 수천명 천주교 신자의 목숨을 빼앗은 절두산 순교 성지. 그 많은 순교자들이 희생된 처형장의 위치를 놓고 천주교계는 엇갈린 견해를 보이고 있다. 정확한 처형 장소는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처형장은 절두산 잠두봉 꼭대기인 지금의 순례성당 제대 뒤쪽의 이른바 ‘치명터’. 어차피 신자들의 처형장면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을 택했다면 한강에 인접한 봉우리 꼭대기였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천주교계가 성지 조성을 하면서 접촉한 주민들은 “절두산 꼭대기에서 칼로 신자들의 목을 쳐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한 오랏줄에 여러 명의 교우들을 결박하여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밀었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증언했다고 한다. 이같은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 기념탑을 절두산 꼭대기에 세웠고, 나중에 이 탑을 헐고 마련한 기념관과 성당도 그 자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많은 사람들이 올라 형을 집행하기엔 절두산 꼭대기가 비좁고, 각종 기록과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양화나루 앞 길가 평지가 처형지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같은 입장은 정부측의 관련자료나 교인들의 증언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치명일기’에서 모두 처형지를 절두산 꼭대기가 아닌 ‘양화진두’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다는 근거를 들고 있다. “양화진두에서 군민을 많이 모아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라는 정부측 기록의 ‘진두’와 천주교회측 자료의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이 일치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근거로 미루어 순교 장소는 당산철교로 인해 순교기념관에서 성지가 분할된 동쪽의 꾸르실료 건물, 즉 세계성체대회기념교육관과 잠두봉의 중간 어느 지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18세기 일본에서 쇼군(將軍)이 정권을 세습하면서 가장 먼저 조선통신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박지원은 역관 이언진의 전기 ‘우상전’ 첫머리에서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준비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저축을 늘리고 건물을 수리했으며, 선박을 손질하고 속국의 여러 섬들을 깎아서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기재(奇才)·검객(劍客)·궤기(詭技·술수꾼)·음교(淫巧·기교꾼)·서화(書畵)·문학 같은 여러 분야의 인물들을 에도(江戶)로 모아들여 훈련시키고 계획을 갖추었다. 그런지 몇년 뒤에야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치 상국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손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도 문신으로 삼사(三使)를 선발한 뒤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을 수행원으로 발탁했다. 박지원은 이렇게 기록했다.“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으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은 모두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여러 명이 범인 목격…외교문제로 비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과 일본 두나라가 국력을 기울여서 온갖 전문기예자를 총동원해 맞섰다. 일종의 국제문화박람회라고도 할 수 있다. 무력으로 이름난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군관이다. 이들은 사행단을 호위하며 무예를 과시하거나,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才)를 공연했다.1763년 사행 때에 486명 일행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 선장 유진원은 배 밑창 곳간에 떨어져 죽고, 소동(小童) 김한중은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격군 이광하는 미친 증세가 일어나 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러나 경상도 무관(장교)이었던 도훈도 최천종은 일본인 역관에게 찔려 죽었기에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이는 외국인을 보기 힘들었던 일본에서 200년 동안 연극이나 소설의 소재로 전해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처음 가져온 것으로 널리 알려진 통신사 조엄(1719∼1777) 일행이 에도에서 외교적인 의전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1764년 4월7일 오사카(大阪)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도훈도 최천종이 피살됐다. 이 절에는 500명을 재울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조엄이 새벽에 보고를 듣고 의관과 군관을 급히 보냈더니, 곧이어 한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최천종이 피가 흥건하게 흘러 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닭이 운 뒤에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돌아와 새벽잠을 자는데, 가슴이 답답해 깨어보니 어떤 사람이 가슴에 걸터앉아 칼로 목을 찔렀소. 급히 소리 지르면서 칼날을 뽑고 일어나 잡으려 하자, 범인은 재빨리 달아났소. 이웃방 불빛에 보니 왜인이었소. 나는 어떤 왜인과도 다투거나 원한 맺을 꼬투리가 없으니, 나를 찔러 죽이려 한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죽게 되니 너무 원통하오.” 첩약을 붙이고 약을 달여 마시게 했지만, 최천종은 해가 뜨자 운명했다. 자루가 짧은 창과 ‘어영(魚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이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왜인의 것이었다. 범인이 달아나다 격군 강우문의 발을 밟아 그가 “도적이 나간다.”고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여러명이 목격했다. 조엄은 “범인을 색출해 목숨으로 변상하라.”고 일본측에 통고했다. 밤늦게야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왕복행차를 호위하는 쓰시마 수행원과 살해사건이 일어난 오사카의 법관, 그리고 조선의 역관들이 함께 입회해 검시(檢屍)했다. 최천종은 조엄이 대구 감영에 있을 때부터 신임하던 장교였으므로 정성껏 장례준비를 했다. 14일에 주변 인물들을 신문하던 과정에서 쓰시마 역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하는 편지를 보내고 달아났다. 일본측에서 목격자 진술에 의해 인상서(人相書)를 만들어 배포했다. 범인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 나이 26세, 쓰시마 역관, 얼굴색이 희고 키는 5척3촌이라고 자세하게 밝혔다. 수백명의 수사력이 동원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 ●범인 “거울 도둑으로 몰며 때려 살해했다.” 17일부터 군사 2000명과 배 600척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서,18일 다른 지방에서 체포했으며,19일부터 니시혼간지 경내에서 신문했다. 최천종이 6일 거울을 잃어버렸는데, 스즈키 덴조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말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해 밤늦게 찾아와 살해했다는 동기까지 밝혀졌다. 그러나 과연 거울 하나 때문에 국제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범인을 처형하니 조선 역관과 군관들이 참관해 달라는 통고가 29일에 왔으며,5월2일 삼헌옥(三軒屋)에서 집행했다. 조엄은 김광호를 시켜 최천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원수를 갚았다고 아뢰게 했다. ‘명화잡기(明和雜記)’나 ‘사실문편(事實文編)’을 비롯한 일본측 기록들은 대부분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달라는 독촉 때문에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몇달 걸리는 국제여행 경비를 조정에서 직접 지급하지 않고 인삼을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수행원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른 물건으로 사왔다. 사대부들은 정량을 지켰지만, 역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남몰래 더 가지고 갔다. 몇차례 단속에 발각되면 인삼도 빼앗기고 엄한 처벌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밀무역은 그치지 않았다. 쓰시마 역관들이 에도까지 따라가면서 호위하는 과정에서 인삼을 팔아주었으니,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가지는 과정에서 칼부림이 났을 가능성이 많다. 밀무역 죄를 감추기 위해 거울을 잃어버려 말다툼이 생겼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한양에서 따라온 조선 역관들의 일본어 회화실력이 낮았으므로, 저간의 숨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야기는 계속 부풀었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피살된 사건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최천종이 살해된 사건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작품을 ‘도진고로시(唐人殺し)’라고 한다. 도진(唐人)은 외국인을 가리키며 네덜란드인,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포함된다. 박찬기 교수는 이들 수십종의 작품을 이국인(異國人) 살해, 통역관 살해, 혼혈아의 원수 갚기, 인삼 밀거래에 의한 보복 살해의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국인 살해와 통역관 살해 유형은 가부키(歌舞伎)와 조루리(淨瑠璃)로 상연되었다. 박찬기 교수가 정리한 도표에 의하면 오사카와 교토의 여러 극장에서 1767년부터 1883년까지 42회, 에도에서 5회 상연됐다. ●막부 압력으로 연극 줄거리 바뀌기도 가장 먼저 1767년 2월17일 아라시히나스케 극장에서 상연된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 )’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허구화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글자는 다르지만 제목에 ‘스즈키’라는 음이 들어간 것만 보아도 최천종 살해사건을 다루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열흘도 못 되어 같은 작가가 다른 제목으로 바꿔 같은 극장에서 또 상연했다. 가부키 연표에는 “첫날 둘째 날은 관객의 반응이 좋아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사정이 있어 상연 중지”라고 기록되었는데, 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염려한 막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후에 줄거리가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은 나카야마 라이스케(中山來助)와 지카마츠 도쿠조(近松德三)가 지은 ‘겐마와시사토노다이츠(拳揮廓大通)’이다.1802년에 초연을 시작해 1883년 5월까지 33회나 상연됐다. 이 작품에는 이국인을 살해하는 장면 묘사가 없고, 역관 고사이덴조(香齋傳藏)를 살해하는 유형으로 바뀌었다. 덴조(傳藏)라는 쓰시마 역관의 이름 정도만 남고, 이국인의 복장이나 언어 같은 이국적 정취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안녕하셔요] 수다장이 싫다는 극성파 강부자(姜富子)

    [안녕하셔요] 수다장이 싫다는 극성파 강부자(姜富子)

    안방극장의 극성파 주인공 강부자양은 요즈음 모처럼 마련한 새집 단장에 여념이 없다. 한강 「맨션·아파트」 34동 203호. 남편 이묵원(李默園)씨와 함께 「탤런트」부부 합동작전으로 『셋방신세 3년만에 내집 마련했읍니다』고 희색이 만면-. 극성파 일변도엔 질색 “현모양처가 적격예요” 「드라머」에서는 수다장이에다 억척꾼으로 극성을 부리곤하지만 실제로는 알뜰한 주부. 차분하게 들려주는 말솜씨라든가 풍겨주는 인상이 한마디로 현모양처형. 「드라머」에서 처럼 극성을 떨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분위기를 풍겨준다. 『어쩌다 그런 극성스런 역에만 출연하다 보니 이젠 아예 내 자체가 그런 「타이프」인 것처럼 시청자에게 인상지어져 버렸어요. 달갑잖은 일이에요. 어디 여자가 그렇게 왈가닥일 수가 있겠읍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건 방송국에서 이제 그런 역이 아니면 내가 할 역이 없다고 딱지를 붙여 놓은 거예요.지금까지는 그저 주는대로 아무 역이나 마다않고 했는데 이제부터는 좀 가려가면서 해야겠어요』 물론 작가나 연출가가 모두 잘 알아서 맡기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나 극성파 일변도로만 딱지를 붙이면 곤란하다는 얘기. 자기 용모나 성격으로 보아서 현모양처역이 가장 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죠. 나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연출가의 말을 절대적으로 지켜오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에요. 설사 내가 옳고 연출자의 말이 못마땅하다고 할지라도 내쪽에서 고집을 꺾어요. 그러는게 도리이고 또 연예계의 「룰」이라고 생각해요. 안그러면 가뜩이나 흩어지기 쉬운 이 세계가 도저히 제대로 발전해나갈 수가 없다고 봐요』 요즈음 신인 「탤런트」들을 보면 공연히 「폼」만 먼저 잡으려고 하는데 그런 태도는 삼가야하리라는 의견. 강양의 「데뷔」 당시에는 그저 「열심」히 하자는 마음 하나로 매달렸다는 것과 비교하면 요즈음엔 그런 정열과 정신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못마땅한 표정. 녹화시간 지키지 않는 탤런트를 제일 싫어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죠.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디 하루 아침에 「톱·탤런트」가 될 수 있겠읍니까? 그만큼 노력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배워야죠. 제가 KBS-TV 2기로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간 사람이 15명이었는데 지금 남은 사람이 저와 두사람(이묵원, 권명오(權明五))뿐이에요. 그것만 보아도 이 직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과 자세. 조금만 인기가 높아지면 으례 녹화시간에 한 두시간씩 늦게 나오는데 그럴 수가 없는거라고 언성을 높인다.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녹화시간만은 꼭 지키고 있읍니다. 9시 집합이라고 하면 8시에 나가서 미리 화장하고 소도구 챙겨놓고 모든 준비를 완료해야 하는 겁니다. 모두 그렇게 한다면 왜 밤을 새운다, 빵꾸가 난다하는 소동이 일어나겠읍니까? 출연자 때문에 「슈팅」이 늦어진다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준비 다 해놓고 한 두사람 때문에 몇시간씩 기다리는 것이 지겨워, 한때 영화에 나가던 것을 그만 두었다고. 영화는 주연배우가 나타나기 기다리다 해 다 보내는 것 같아서 생리에 맞지가 않더라는 것. 강양은 KBS-TV 「탤런트」2기생. 충남 강경이 고향으로 강경여고를 거쳐 충남대학 국문과를 62년에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탤런트」 시험에 응시한 것이 「재수가 좋아」 합격됐다고. 1기 모집때에는 「얼굴」만 보고 모집했기 때문에 아마 그때 응시했으면 틀림없이 미역국을 먹었을 거란다. 무작정 출연하다 보니 도움도 됐고 손해도 봐 「탤런트」시험에 응시한 것은 별로 뚜렷한 동기에서가 아니고 우연히 해본 것일뿐. 어렸을 때부터 예능 방면에 소질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꿈은 「아나운서」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성우가 되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탤런트」시험이 먼저 있어서 그냥 연습삼아 응시해본 것이 합격, 오늘에 이르렀다. 남편 이묵원씨와는 KBS-TV 동기생. 처음에는 동료 「탤런트」로 친구처럼 지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졌고 4년 동안의 연애끝에 67년 5월에 「골·인」-. 8년 동안 「탤런트」 생활을 하면서 출연한 작품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작품은 별로 없단다. 『그만큼 아무 작품에나 나갔다는 얘기겠죠. 무슨 역이든 주면 마다 않고 그냥 했으니까요. 도움이 된 점도 많지만 손해도 많아요. 돈만을 생각한다면 많이 출연하는게 이익이겠지만 어디 꼭 돈만을 생각할수가 있겠어요? 차분히 생각해볼 문제예요』 그러나 이말은 연출가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못박는다. 9월10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릴 제2회「탤런트」축구경기에 대비, 매일 연습장에 나가 「콜라」 빵을 사주며 성원하는 것이 일과. 그밖에 녹화가 없는 날이면 하루종일 연습장(휘문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살았다. 조용히 자연을 벗삼아 농장 경영하는 것이 꿈 「유호(兪湖)극장」 『꿈은 좋았는데』가 끝나고 이어서 들어가는 『언니』에는 「타이틀·롤」을 맡았다. 그밖에 『고독한 길』에 출연 중. 연극무대에도 열을 올리고 있어 63년부터 극단 「산하(山河)」의 「멤버」다. 무대작품수 30~40편을 헤아리는 고참(?) 배우지만 역시 연극은 어렵고 어려운 것.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연극인 것 같다고. 「라디오」에도 심심찮게 출연해왔는데 요즈음에는 동아방송에 『사모님 만세』라는 「프로」에 나가고 있다. 결혼 3년만에 집을 마련한 강양의 앞으로의 꿈은 농장을 경영하는 것. 조용히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최대의 행복일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꼭 「여류작가」가 되겠단다. 대학 전공과목이 「국문학」이긴 했지만 웬일로 살아가노라니 글로 써서 남기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막상 글재주가 없어서…. 그러나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꼭 문학공부를 해서 여류작가가 되고 싶어요』하며 수줍게 미소 짓는다. 외딸 헌주(憲柱)양은 올해 2살.[선데이서울 70년 9월 13일호 제3권 37호 통권 제 102호]
  • “로마 검투사 패하면 죽였다고?”

    “로마 검투사 패하면 죽였다고?”

    “검투사들은 패하면 바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다. 많은 검투사들이 상처를 치료받고 다시 싸웠다.3년 동안 싸워 살아나면 안락한 은퇴생활을 한 뒤 자연사하기도 했다.” 고대 로마시대의 ‘검투사’에 대한 오해가 벗겨졌다. 3일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대도시인 터키의 에페수스에서 검투사들의 집단묘지와 검투사들과 관련된 분명한 글씨가 있는 묘비 3개가 처음 발견됐다. 묘지에서는 수천개의 뼈가 발견돼 검투사들이 어떻게 살았고, 싸웠고, 죽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 병리학과의 카를 그로스슈미트, 파비안 칸츠 두 교수는 발굴된 두개골, 뼈 등에 남아 있는 상처 또는 치료 흔적 등을 토대로 5년간의 연구를 통해 검투사들의 나이, 부상, 사인 등을 추정했다. 두 교수는 분석을 통해 모두 20∼30세인 67명의 유골 흔적을 확인했다. 검투사들이 고가의 치료를 받았음도 추론해냈다. 한 유골은 외과적 절단수술의 징후도 있었다. 특히 검투사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무사나 맹수와의 결투에서 살아 남을 가능성이 역사 기록(3분의1)보다 높았다. 물론 두개골이 삼지창에 찔린 흔적도 많았다. 두 교수는 복수의 상처 흔적이 한꺼번에 발견되지 않은 것을 통해 결투가 심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추론했다. 역사 기록에는 겁을 먹고 제 기량을 보이지 않으면 “창으로 찔러버려.”라고 군중들이 요구하면서 즉결 처형도 이뤄졌다고 나와 있다. 결투 중 치명상을 입으면 무릎 꿇린 상태에서 약간의 온정을 가미, 안락사 격으로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음도 규명됐다. 검투사들은 원형경기장의 결투에서 3년간 살아남을 경우 자유를 얻어 은퇴한 뒤 검투사 양성기관 강사 등으로 여생을 보냈음을 두개골 중 한 개가 보여주었다고 방송은 덧붙였다. 고대로마는 전쟁포로나 노예, 죄인 등에게 검투사를 시켰다. 그들은 칼을 들고 사람이나 맹수와 싸웠다. 일부는 스포츠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자유인도 검투사가 됐던 배경이다.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 [문화마당] 라이시테/김다은 소설가 추계예술대 교수

    숟가락을 막 들었는데, 식탁 앞 친구가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숟가락을 도로 놓을 수도, 밥을 퍼먹을 수도 없다. 그 짧은 순간, 허공에 매달린 숟가락은 민망하다. 한국인 식탁에서 한번쯤은 경험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1000여년의 가톨릭 전통을 가진,4명 중 3명의 종교가 가톨릭이라고 대답하는 프랑스(2002년 자료)에서는 식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톨레랑스(관용)와 함께 프랑스 문화의 기본정신을 이루는 라이시테(laicite) 때문이다. 번역하면 ‘비종교성’ 정도 된다. 비종교성은 종교를 부정하는 반종교성은 아니다. 비종교성은 ‘정치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정신이다. 그런데 밥상 앞에 무슨 정치성이 있을까? 최초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왕권과 교권이 연합하여 국민들의 정신과 생활전반을 지도했다. 하지만 왕권과 교권은 수시로 충돌했고, 더구나 프랑스 대혁명 때는 왕권과 교권 모두 타도 대상이었다. 좌파에 해당하는 혁명 주동자들이 신부들을 처형함으로써 교회는 정치적 우파와 동일시되었고, 프랑스 전역은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을 심고자 하는 ‘적색파’와 전통적인 정치와 가치를 보존코자 하는 사제 중심의 ‘백색파’로 나누어졌다. 점점 전 국민이 적색과 백색의 피 말리는 색깔 논쟁에 휘말렸고, 한 집안의 밥상 앞에서도 기도를 하자 말자로 식사를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라이시테는 19세기 내내 지속된 공화주의적 반교권주의와 가톨리시즘의 처절한 싸움 뒤에 형성된 개념이다.1905년 프랑스 정부는 정교 분리법을 통과시켰고, 이로써 밥상뿐만 아니라 책상 앞에서 교사가, 연설 단상 앞에서 정치가가, 공식석상에서 국가가 특별한 종교를 표방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서 대통령 당선자가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프랑스는 2004년에도 우파와 좌파의 합의하에 ‘과시적인’ 종교적 표지를 드러내는 복장을 공교육기관에서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라이시테가 떠오른 것은 최근 대권 주자들이나 종교 원로들의 ‘과시적인’ 언행 때문이다. 마음속으로야 대한민국을 통째로 하나님께 바쳐도 좋지만, 수도 서울은 국민의 것이니 이명박 전 시장이 공식석상에서 제 마음대로 바치면 반칙이다. 가톨릭 신자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이 절 저 절 옮겨 다니며 탈당을 결심하는 과정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표의 ‘기불릭(기독교+불교+가톨릭)’적 종교 태도도 정치적 함의로 오염된 면이 없지 않다. ‘교육법 재개정’을 위한 개신교의 집단적인 삭발,‘원탁회의’라는 용어를 빌린 진보 종교계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들의 ‘과시적인’ 종교적 언행과 종교인들의 ‘과시적인’ 정치적 언행은 종교와 정치가 서로 연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던 전근대적 문화 마인드를 상기시킨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정치인도 어떤 종교나 신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첫째딸’인 프랑스가 밥상에서조차 기도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한번쯤 눈여겨보자. 일용할 양식을 준 신에게 감사드리는 단순한 기도도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드는데, 종교와 정치가 뭉쳐 이데올로기적 편가르기를 하면 서로에게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국민들은 밥상 앞에서, 책상 앞에서, 연설 단상 앞에서, 국가 정체성 앞에서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해야 하고, 결국 끝없는 갈등과 반목의 전쟁판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한 가족이 같은 밥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길까 걱정하면, 기우일까? 김다은 소설가 추계예술대 교수
  • [美 교포학생 총기난사 파문] 조승희 팔 문신 ‘이스마일 액스’는 무슨 뜻?

    버지니아 공대 ‘학살’로 전 세계를 경악케 한 교포 학생 조승희씨는 ‘이스마일 도끼(Ismail Ax)´란 말로 무엇을 얘기하려 했을까. 그는 자신의 팔 안쪽에 붉은 잉크로 ‘이스마일 도끼’란 글을 쓴 채 범행을 저질렀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인터넷에는 이 어구가 ‘신의 처형’이나 ‘대량학살’을 뜻한다는 해석들이 올라오고 있다. 먼저 종교적인 해석. 이스마일(기독교의 이스마엘)은 이슬람교에서 유일신 알라를 믿기 시작한 이브라힘(기독교의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슬람교도들의 조상으로 여겨진다. 이브라힘은 우상 숭배를 타파하기 위해 도끼를 들고 예배소에 올라가 작은 우상들을 모두 깨뜨리고 큰 우상의 목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한 네티즌은 ‘이스마일 도끼’는 이슬람교와 관련된 것으로 ‘이스마일의 처형’이란 뜻이라고 분석했다. 이 문구가 성서적으로 ‘대량학살’을 뜻한다는 의견도 있다. 인터넷 사전 위키피디아에는 ‘Ishmael’이 고아나 망명자, 추방자란 의미로 조씨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버려진 사람이란 메시지를 남기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버지니아공대에는 ‘Alpha Chi Omega’라는 여성 동아리가 있는데 ‘AX’는 이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란 분석도 제기됐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영화 300’에 역사적 진실 없다?

    ‘영화 300이 실은 오류 투성이라고?’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왕이 보낸 사자(使者)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에게 땅과 물을 요구하자 왕이 분노해 사자를 처형 갱에 밀어넣는 ‘영화 300’의 한 장면. 페르시아·스파르타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모티브가 사실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란다. 역사책에 따르면 당시 사자를 처형, 갱에 밀어넣으며 전의를 불태운 나라는 아테네이며, 스파르타는 그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돼 있지만, 극적인 재미를 살리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맞바꿨다는 것이다. 케이블TV ‘히스토리채널’은 16일 오후 7시 ‘역사특강, 숨은그림찾기-영화 속 그리스 전쟁사, 페르시아 전쟁’편을 내보낸다. 그리스 전문가인 유재원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를 통해 최근 인기를 누린 ‘영화 300’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의 배경인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길고 기나긴 페르시아 전쟁 중 일부. 영화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과 300명의 전사가 역사적 영웅으로 추대받는다. 페르시아인을 흑인이나 반인반수의 허구적 인물로 묘사하고 페르시아 왕 또한 성을 탐닉하는 사치스러운 인물로 묘사한다. 하지만 당시 페르시아나 그리스의 문화, 관습을 감안할 때 이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테르모필라이 전투가 세계사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전쟁의 목적이 부나 명예의 쟁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수호에 있었기 때문이다.‘자유’라는 개념은 그리스인들을 통해 세계사에 처음 선보였다. 유 교수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의 인간중심주의와 강대국으로서 영토 확장에 주력하는 페르시아의 패권주의에 대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강의를 펼친다.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탈북 청소년 3명 중국거쳐 라오스 도착 뒤 체포

    |워싱턴 이도운·베이징 이지운특파원·서울 안동환기자|“다른 계산은 하지 말고 사람을 살려달라. 그들은 우리를 살려서가 아니라 죽여서 북한으로 데려가려 한다.”(17세 탈북 소녀 최향미양의 편지 내용) 탈북 청소년 3명이 중국을 거쳐 약 3200㎞ 이상을 달아난 끝에 라오스에 도착했지만 라오스 당국에 의해 감금됐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11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세 탈북 청소년들의 비극을 크게 보도했다. 현재 라오스에 감금된 탈북 청소년은 최혁(12)군과 누나 최향(13)양 남매와 최향미(17)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청소년은 탈출 과정에서 붙잡힌 다른 수천명의 북한 주민들처럼 강제 북송될 위기에 처해있으며 인권단체들이 석방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쿄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 탈북난민 생명기금(Life Funds for NKR)은 라오스 관리들에게 3000달러의 돈을 건네지 않으면 이들 청소년이 북한 외교관들에게 인도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혁군은 지난 6일 “북한으로 끌려가 투옥되거나 처형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버리겠다.”고 쓴 편지를 난민기금측에 전달했다. 최향미양도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의 공안 관계자들로부터 조사를 받았으며, 그들은 세 사람을 북한으로 송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히고 있다. 최양은 “이것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제발 석방의 대가로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통해 호소했다. 최양은 탈북 과정에서 어머니가 중국의 인신매매단에게 팔려가는 것을 목격해야 했으며, 남동생은 실종됐다. 이들을 라오스에서 직접 면담한 난민기금 히로시 가토는 “아이들은 굶주림뿐 아니라 부모와 친척들의 죽음으로 살기 위해 탈출했고 중국에서는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단체 리사 콜라쿠르시오는 현재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탈북 난민들을 미국과 한국 정부가 외면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한편 중국 신화통신은 최근 라오스를 거쳐 한국으로 가려던 탈북 여성 6명이 최근 중국 남부 윈난(雲南)성의 중국∼라오스 국경지대에서 경찰에 체포됐다고 10일 전했다. 신화통신은 한국으로 데려가려던 한국인 1명도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중국측에 인도됐다고 전했다. 중국 동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 공안국 산하 출입국관리국은 지난 1일 윈난성의 유명 관광지인 시솽반나(西雙版納) 태족자치주 징훙(景洪)시에서 탈북 여성들을 체포했다. dawn@seoul.co.kr
  •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 앙드레 말로 지음

    소설 ‘인간 조건’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앙드레 말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실참여 지식인이다. 1958년 드골이 재집권한 뒤 문화장관을 10년이나 지낸 그는 발튀스, 샤갈, 브라크 등 많은 화가들과 절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책까지 쓴 화가는 피카소가 유일하다. 그의 책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박정자 옮김, 기파랑 펴냄)는 말로가 피카소와 나눈 대화, 마그 재단에서 열린 ‘상상미술관’ 기획전에서 했던 연설 등을 소개하며 피카소의 예술세계를 분석한다. 말로는 피카소가 입체파의 서막을 연 ‘아비뇽의 처녀들’은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의 구도를 그대로 그린 것이며,80세 때인 1961년에도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재해석했으며,‘한국에서의 학살’은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모방의 천재’인가. 저자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이렇게 앞선 시대의 예술을 모사하면서 그림과 그림들의 대화, 화가와 화가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냈고 결국 새로운 자기를 창조해 냈다는 것이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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