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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이어 유엔 “北인권 위험수위”

    ‘국제사회의 대 북한 인권 압력은 어디까지.’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미 국무부가 ‘2007년 인권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최악의 인권위반국으로 지정한 데 이어 유엔도 13일 북한인권특별보좌관의 보고를 통해 북한의 인권이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가장 노골적인 정치공세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반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과거 정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국은 이번 보고서에 대해 믿을 만하다며 긍정 평가를 내렸다. 비팃 문타폰 유엔 북한인권특별보좌관은 보고서를 통해 “북한에서 고문과 공개처형이 여전히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다.”며 “국제차원에서 형사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영호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 연구관은 “보고서에 진실은 어느 곳에도 없다.”면서 “그것은 유엔 인권위원회 시절에 만연했던 가장 노골적이고 극단적인 정치공세와 이중 잣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시대착오적인 유산인 특별보고관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장동희 주제네바 한국 차석대사는 “그는 북한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교수는 “유엔은 결의안을 통해 북한에 인권 개선을 촉구하고 미국은 법안을 통해 실질적으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를 경제 지원과 연계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55) 절두산 성지

    [거리 미술관 속으로] (55) 절두산 성지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순교박물관’에는 개화기 때의 천주교 역사를 담은 다양한 조형물이 놓여있다.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 전뢰진 홍익대 명예교수 등 국내 원로 조각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을 맞아 전 교수가 제작한 ‘김대건 동상’이 처음 자리한 곳이 바로 절두산 성지이다. 받침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에 이르는 거대한 조형물로, 원형은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졌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은 1972년 최 교수가 제작했다. 첫 순교자 가족으로 기록된 이의송(프란치스코)의 가족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두 어른과 한 아이의 몸통 위에 목이 겨우 얹어있는 모습이다. 아빠, 엄마, 아이의 다정한 모습 같아 보이지만 아이 손에 묶인 밧줄을 보는 순간 당시의 처절함이 생생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성모상이 곳곳에 놓여있다. 특히 조영동 성신여대 명예교수와 고(故) 이남규 전 공주사대 교수가 공동 제작한 ‘안수 성모상’은 위안을 받기에 충분하다. 앞으로 뻗은 두 손이 보통 키의 성인 머리 높이와 딱 맞아떨어져 마치 얼굴을 보듬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최 교수의 ‘성모상’이나 1978년에 만들어진 ‘성모동굴’도 편안한 마음의 휴식을 가져다 준다. 역사적 가치를 가진 유물도 곳곳에 서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다가 발견한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나, 모조품이긴 하지만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된 ‘척화비’가 그것이다. 1866년에 순교한 다섯명의 성인이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러갈 때 쉬었다 간 바위라는 ‘오성바위’와 다블뤼 안 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 밟고 다녔다는 문지방 돌도 고스란히 보관해 놓았다. 1만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데서 붙어진 ‘절두산’이라는 으스스한 이름만큼 살벌한 유물도 많다. 병인박해 당시 교수형틀인 ‘형구돌’을 비롯해 성당 앞 형구 전시장에는 순교자를 고문했던 형구들이 전시돼 있다. 종교색을 내세워 외면하기엔 역사적 깊이와 한강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너무 좋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박철언의 비자금 장부?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과 관련, 박 전 장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돈관리 장부’가 공개돼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10일 뉴시스가 입수해 밝힌 박 전 장관의 자금관리장부에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차명계좌 명의자, 신탁, 예금의 종류, 계약과 만기일, 통장번호, 금액 등이 박 전 장관의 자필로 빼곡히 기록돼 있다.A4 용지인 장부에는 P,JK,CK,K 등과 같은 이니셜과 함께 ‘JK친구 부인’,‘서(처형)’, 경북고 동창 K씨, 장모 등 60명의 명단이 등장한다. 이 기간에 이들의 차명계좌에서 660여억원이 입출금됐다. 장부에는 세금 추징과 계좌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금을 한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차명계좌 한 개당 3000만원에서 많게는 19억여원까지 나눠 입금하는 등 철저히 분산 관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1∼5년 만기 은행 정기예금을 이용하거나 증권사의 고수익 공사채, 개발신탁 수익증권, 특정금전신탁 등 갖가지 금융상품도 이용했다. 장부에는 횡령 혐의로 피소된 서울 H대 무용과 K여교수 명의의 3억 1900만원짜리 2년 만기 예금과 5억 3300만원짜리 3년 만기 예금계좌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김호규 전 보좌관 등이 지난 1986년부터 관리해온 100억원대 비자금이 누락된 데다 박 전 장관으로부터 피소된 서모 은행 지점장과 K교수 등의 비자금의 경우 일부만 기록돼 있어 전체 비자금 규모는 훨씬 클 것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박 전 장관 측근은 “돈관리 장부는 없으며 660억 비자금도 터무니없는 억측”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매년 재단설립을 위해 관리했던 돈을 A4용지에 적는 방식으로 자금내역을 확인했다.”면서 “내역에는 날짜, 관리자 이름별로 정기예금이나 적금 등의 목록과 액수를 함께 적어둬 오해를 산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한편 박 전 장관으로부터 피소된 K교수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부산 모대학 무용학과를 졸업한 뒤 국립무용단 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K교수는 이후 2년제인 부산 모 예술전문대학 무용학과 강사를 거쳤으나 불과 강사생활 5년여만인 지난 1996년 국공립 4년제 대학인 H대학 무용학과 조교수로 임용된 것으로 알려져 급작스런 상황 변화(?)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K교수가 재직한 것으로 알려진 P대학 관계자는 “교내 이력서에 강사는 일반적으로 시간강사를 말하는 것이며, 전임강사의 경우 교수로 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2일 TV하이라이트]

    ●체험, 삶의 현장(KBS1 오전 9시) 가수 김지훈, 한겨울 얼음을 깨고 못메기를 잡으러 경상북도 의성으로 출동한다. 개그맨 김상태가 국립공원 일꾼으로 캐스팅됐다. 도봉산 구석구석 구슬땀 흘린 개그맨 김상태의 체험무대를 지켜 본다. 모양도 맛도 가지가지 찰순대, 야채순대, 김치순대, 왕순대, 오징어 순대까지 다양한 순대 만들기에 가수 진미령이 도전한다.●오천만의 일급비밀(KBS2 오전 9시40분) 낮은 신발을 즐겨 신는 여성과 굽 높은 신발을 즐겨 신는 여성의 신발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초고속 카메라와 특수 장비로 전격 비교실험을 해본다. 전문가도 깜짝 놀란 높은 굽 신발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은? 건강한 발을 위한 생활 속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발 마사지 법을 공개한다.●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50분) 1963년 일본.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나 겨우 살아난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주위의 어떤 소리나 움직임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훗날 이 아이는 작곡까지 하게 됐다. 아이의 일화를 바탕으로 쓴 아버지의 소설은 국제적인 상까지 받게 되는데….●굿모닝 세상은 지금(SBS 오전 7시40분) 공짜로 물을 마시는 시대는 지났다. 레스토랑에 등장한 물 메뉴판. 백화점에도 생수전문매장이 생겼다. 한 병에 5만원이 넘는 미국산 생수에서부터 유아전용생수까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고급생수시장을 살펴 본다. 물로 살을 빼고 병을 고쳤다는 사람들. 물로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을 찾아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 본다.●튜더스, 헨리 8세의 야망 그리고 사랑(EBS 오후 5시50분) 영국 튜더 왕가의 가장 매력적인 왕 헨리 8세. 그는 잉글랜드의 절대왕정을 공고히 했지만, 결혼과 이혼문제로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여섯 왕비를 두었으며, 두 왕비와 세 명의 공신들을 처형하는 등 잔학무도한 모습을 보인다. 그를 둘러싼 왕실의 암투와 음모, 배신과 사랑이 펼쳐진다.●인사이드 월드(YTN 오후 5시30분) 세계 2차 대전 이후,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은 오늘날의 개발도상국들과 같은 환경오염 문제에 직면했었다. 산업 단지 조성이 활발해지면서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대기를 오염시키는 주 요인이 된 것이다. 과거, 일본은 이러한 심각한 환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왔는지 알아 본다.●SBS스페셜(SBS 오후 11시5분) 일반적으로 오징어는 알만 낳으면 곧 바로 떠나버리는 비정한 어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징어의 수명은 1년 남짓으로 어미 오징어는 산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어미 오징어의 산란과 죽음, 그리고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거친 삶을 시작하는 새끼 오징어들의 수중 생활을 소개한다.●비포&애프터 성형외과(MBC 오후 11시40분) 건수는 기남과 용우가 가까워지는 것을 알고 질투를 한다. 서진은 남편에게 폭행 당한 인희를 구해주게 된다. 응급치료를 받던 인희는 남편에게 도망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성형수술을 해달라고 한다. 한편 전신성형을 한 주희는 다시 찾아와 얼굴성형을 부탁하게 된다.
  • 이수광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

    이수광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그의 삶의 역정은 혼란의 시대에서도 단연 두드러진다.‘러시아 정부가 인정한 정치인’‘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재러 한인사회 지도자’‘독립운동가’‘일본군의 총탄도 두려워하지 않은 거인’….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겠지만 러시아에서는 전설적인 민중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노비’로 태어나서 굶주림을 피하고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간 최재형 선생은 온갖 밑바닥 생활을 하며 자산가로 성장했다. 삶이 안정되자 재러 한인사회의 근대화에 힘을 쏟아 재러동포들은 물론 러시아 정부로부터도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특히 1905년 항일운동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1920년 연해주에서 일본군에 처형될 때까지 의병을 조직하고, 민족 언론을 운영하는가 하면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아낌없이 바치는 등 온몸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민족 사학자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가 바로 그다. 사망하기 전인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된 그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지킨다는 신념으로 취임치 않고 끝까지 러시아에 남아 있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최재형 선생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주요 활동무대가 중국이 아닌 교류가 적은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소설 ‘대륙의 영혼 최재형’(이수광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으로 부활됐다.‘노비’로 어렵게 보낸 소년기부터 시신조차 남기지 못했던 비참한 죽음, 풍비박산 난 가족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최재형 선생의 일생을 생생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복원한 팩션이다. 작가는 “최재형 선생은 동지들과 민중의 지지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인물”이라면서 “자산가로 성공했는데도 자기 삶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과 조국을 위한 혁명과 독립운동에 영혼까지 송두리째 바쳤다는 사실이 너무 존경스럽다.”고 밝혔다.1만 2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1630년 무렵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후금이 요구했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과의 교역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도( 島)의 한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는 후금이 조선을 ‘평가’하는 핵심 관건으로 사실상 명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인조정권은 곤혹스러웠다. 정묘호란 당시 조야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루어졌던 화친은 ‘명과 조선의 부자(父子) 관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후금과의 형제 관계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육로가 끊긴 상황에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가도와의 왕래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조선의 고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도는 모문룡 시절이래 내내 조선를 들볶았고, 조선 또한 ‘부자 관계의 상징’인 가도를 외면하지 못했다. ●영원한 애물단지, 가도 후금도 한동안은 양측의 관계를 묵인하는 듯이 보였다. 조선을 거쳐 가도에서 들어오는 명나라 물자가 필요했던 데다,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가도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금이 1629년 기사전역(己巳戰役),1631년 대릉하 전투 등을 통해 명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으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본토 방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명은 가도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다시피했고, 그 때문에 가도의 고립과 곤궁은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럴수록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 더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가도를 이미 ‘손안에 들어온 물건(掌中之物)’이라고 여겼던 후금이 조선에 대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의 지원만 없다면 가도의 한인들은 대거 후금으로 투항할 것이고, 가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가도가 무너진다면 후금은 얼마나 홀가분할 것인가. ‘뒤를 돌아보아야 할 걱정(後顧之憂)’ 없이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산해관으로 나아가 명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수 있었다.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대한 공격을 구상하면서 후금은 명이 자신들의 배후를 역습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하지만 산해관 바깥이 후금군에 의해 봉쇄된 상황에서 명의 육군이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명이 조선을 지원하려 할 경우 천진(天津)이나 등래(登萊)에서 수군을 동원할 것이고, 명 수군은 분명 가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아 조선을 지원하거나 요동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이 후금의 판단이었다. ‘가도를 내버려 두라.‘는 후금의 압박 속에서도 조선은 끝내 가도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멈추지 못했다. 명과의 ‘부자관계’를 차마 끊지 못한 데다, 유사시 명의 지원을 끌어들일 수 있는 ‘거점’이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정에 정통한 후금 조선은 가도에 대한 지원을 은밀하게 한다고 했지만 후금은 그 전말을 거의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조선 사람 가운데 후금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632년 12월, 철산(鐵山)의 아전 이계립(李繼立)은 조선이 가도의 한인들에게 물자를 대주고 있다는 사실을 용골대에게 밀고했다. 후금 자체가 본래 첩보 활동에 뛰어난데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같은 사정은 함경도 쪽에서도 비슷했다. 조선의 북변 거주자들과 호인들 사이의 교통을 통해서도 조선 정보가 새 나가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두만강 부근에서는 번호(蕃胡)라 불리는 호인들과 조선인들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번호들이 국경을 넘어와 조선인들을 납치해 가기도 했고, 그들 자신이 조선으로 귀순하기도 했다. 물론 강을 건너 여진 지역으로 도망가는 조선 사람들도 있었다.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모두 평정한 뒤에도 양자의 접촉은 끊이지 않았다. 실제 1629년 11월의 ‘양경홍(梁景鴻) 역모’는 이 같은 접촉 배경에서 빚어진 사건이었다. 양경홍은 북인의 잔당으로 인조반정을 맞아 한옥(韓玉), 신상연(申尙淵), 이극규(李克揆), 정운백(鄭雲白) 등과 함께 경원(慶源)으로 귀양갔다. 양경홍 등은 현지에 살던 양사복(梁嗣福) 양계현(梁繼賢) 부자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끌어들여 모반을 시도했다고 한다. 양계현은 젊었을 때 포로가 되어 여진 지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인물이었다. 공초(供招) 과정에서는 ‘정운백이 한윤(韓潤)에게 서신을 보내, 만약 오랑캐를 이끌고 오면 마땅히 앞장서 인도하고 투항하겠다.’고 했다는 진술이 나와 수사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윤은 이괄(李适)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로 당시 후금에 망명 중이었다. 우습구나 삼각산아 (笑矣三角山) 옛 임금은 지금 어디 있나 (舊主今安在) 지난번에 강도 만나 (頃者遇强盜) 강화도에 가 있다네 (往在江華島) 수사 과정에서 공개된, 양경홍이 지었다는 시의 내용이다. 반정으로 쫓겨난 지 6년 이상이 지났지만 인조정권을 ‘강도’로 표현할 만큼 적개심이 여전히 높다.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지만, 조선 조정은 이 사건 이후 후금과 접촉한 경험이 있는 함경도 주민들의 동향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후금은 실제로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에 살던 불평 불만자들을 끌어들여 조선어 역관으로 활용했다. 양계현은 부친 양사복이 처형된 뒤에 후금으로 귀화하여 조선을 왕래하는 역관이 되었다. 양계현을 통해 조선의 민감한 내부 사정이 후금에 알려졌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1630년대 조선을 드나들면서 악명이 높았던 중남(仲男), 정명수(鄭命壽) 등도 비슷한 계기로 역관이 되었다. 후금은 이래저래 조선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후금, 명을 흉내내기 시작하다 명을 능멸할 정도로 힘이 커진데다 조선 사정까지 훤하게 알고 있었던 후금의 요구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1632년 9월, 용골대는 추신사(秋信使) 박난영(朴蘭英)을 만났을 때 홍타이지의 ‘불만’ 사항을 전달했다.‘조선은 명의 사신이 오면 모든 관원이 말에서 내려 영접하면서 왜 후금 사신에게는 말 위에서 읍(揖)만 하느냐?’는 힐문이었다. 이제 후금 사신도 명 사신과 동동한 수준으로 영접하라는 요구였다. 1632년 10월에 왔던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평양에 이르러, 조선이 후금에 보내는 예단(禮單)의 수량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뒤 다시 명을 거론했다.‘명에는 봄가을의 사신말고도 성절사(聖節使)까지 보내면서 우리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는 더 나아가 ‘명 사신들을 접대할 때는 금은으로 된 그릇을 쓰면서 후금 사신들에게는 사기 그릇을 쓴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곧 이어 서울로 향하던 후금 사신 소도리(所道里) 일행은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명사 수준으로 영접하지 않으면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비변사는 ‘부자관계와 형제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고 설득하는 한편, 만월개 일행에게 푸짐한 선물을 안겼다. 어떻게든 명과 후금 사이에서 현상을 유지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1632년 무렵, 조선이 취한 대외정책은 일견 절묘했다.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은 삼국 관계에서 ‘독립변수’가 아니었다. 명이나 후금 어느 한쪽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조선은 곧바로 ‘선택의 기로’로 내몰렸다.1632년 명에서 일어난 공유덕(孔有德)의 반란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였다.‘공유덕의 반란’ 때문에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위기를 향해 치닫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씨줄날줄] 다크 투어리즘/함혜리 논설위원

    몇해 전 동유럽 출장 중에 폴란드의 크라쿠프시 인근에 있는 오시비엥침(Oswiecim)을 방문했다. 오시비엥침의 독일식 이름은 아우슈비츠. 나치가 4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곳이다.‘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를 만든다)’라는 유명한 선전 문구가 쓰인 입구를 지나자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고문실, 처형대, 가스실, 화장터, 생체 실험실, 희생된 어린 아이들의 옷가지와 신발들, 사람의 머리카락이 가득 쌓여있는 거대한 유리관 등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생한 고통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울음을 터뜨리는 방문객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죄악은 정말 끔찍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우슈비츠는 피해자인 이스라엘인들은 물론 가해자인 독일인들에게도 반드시 방문해야 할 역사적인 장소다. 독일 초등학생들의 필수 방문코스가 되고 있으며 유럽의 많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역사 체험 여행지로 권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이거나 잔학무도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나 그런 사건과 관련한 곳들을 찾는 여행 패턴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한다.2000년 영국 글래스고의 칼레도니언 대학의 교수 두명이 펴낸 책의 제목으로 쓰이면서 널리 알려진 역사문화관광의 한 패턴이다. 역사의 참상을 돌아보며 자기 반성과 교훈을 얻는다는 점에서 블랙 투어리즘, 그리프 투어리즘이라고도 불린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외에도 2001년 9월11일 발생한 미국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현장인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도 유명한 다크 투어리즘 코스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다크 투어리즘의 대상지가 되고 있다.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지 1주일째인 지난 주말 불탄 숭례문을 보기 위한 행렬이 줄을 이었다.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투명창을 통해 숭례문 잔해를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눈물을 짓기도 하고, 묵념을 올리거나 절을 하기도 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마음은 모두 한가지였을 것이다.“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서해 표류 北주민 22명 북송

    지난 8일 서해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남측 해안으로 표류했던 북한 주민 22명이 모두 본인들의 뜻에 따라 북으로 귀환 조치됐다고 정부 당국이 17일 밝혔다. 그러나 이들이 북한에 돌아가 곧바로 처형됐다는 설이 제기돼 정부 당국이 진위 파악에 나섰다. 특히 20명이 넘는 북한 주민을 표류 당일 저녁 조사한 뒤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북송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관련당국이 회의 한번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17일 이들에 대한 관계기관 합동신문 결과 귀순 의사가 없는 것으로 확인,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만일 처형설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북한 인권문제가 부각될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관계자는 이날 “22명 모두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그동안 동·서해상에서 표류 중 구조된 후 귀순 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모두 수용해 온 만큼 이번에도 본인 의사에 반하는 북송은 없었다.”고 말했다. 합동신문에 참석했던 경찰 관계자는 “조사 당시 보트에 노와 조개잡는 기구만 있었을 뿐 귀순시 준비물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이런 경우 북으로 돌아가 처형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들은 처형설과 관련,“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황해남도 보위부가 귀환한 주민 22명을 지난주 초 곧바로 비공개 처형했다는 소문이 황해남도 주민들 사이에 퍼졌다.”고 밝혔다. 소식통들은 “설 연휴에 있었던 사건이라 쉬쉬하면서 전국적으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상황”이라며 “황해남도 주민들은 처형당한 사람들이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힌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국정원과 통일부의 당국자들은 “북송된 22명의 처형 여부는 확인된 바 없으며, 여러 경로를 통해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국정원 관계자는 “그들 모두 귀순 의사가 없어 돌려보낸 만큼 처형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그들이 북한 해상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굴 채취에 나섰다고 밝혔기 때문에 관련 조사나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어로작업 승인을 받지 않고 대규모로 승선, 탈북 기도 혐의를 받아 처형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연평도 해상에서 목선을 타고 표류하다 구조된 북한 주민 4명이 귀순 의사를 밝힘에 따라 남쪽에 정착토록 했으며,2006년 3월에도 소형 선박을 타고 표류 중 동해상에서 구조된 북한 주민 5명을 본인 의사에 따라 귀순토록 했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후금이 대릉하 원정에 앞서 평안도 일원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바짝 높아졌다. 인조는 강화도 정비에 몰두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방책 마련에도 신경을 썼다.1631년 8월, 인조는 서쪽 교외로 나아가 무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는 열무(閱武)를 행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후금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위기 의식 속에서 상무(尙武)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것만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북 포기론´ 떠돌자 민심 흉흉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 방어와 정비에만 몰두하는 자세를 보이자 청북(淸北) 사람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져 갔다. 조선 전기부터 ‘서북인 차별’의 굴레 때문에 내내 불만을 삭이고 살던 그들이었다.‘조정이 청북 방어는 이미 포기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평안도 전역으로 퍼졌다. 청북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조정에서도 청북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1631년 10월, 사간 김세렴(金世濂)은 평안도, 그 가운데서도 의주 방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안도는 ‘나라의 문호(門戶)’라고 강조한 뒤 청북을 포기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팽배해 있다고 지역 민심을 전했다. 김세렴은 이어 ‘나라를 지키려면 백성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조정은 도리어 백성들의 원망만 사고 있으니 위기를 맞으면 누구에게 손을 벌릴 것이냐?’라며 대책을 촉구했다. 당시 청북 주민들의 불만과 위기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후금과 지척에 있는 데다 정묘호란 당시 막심한 피해를 온통 뒤집어썼던 그들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에서 별다른 방어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자 그들의 불만과 우려는 높아만 갔다.‘용골산성(龍骨山城)의 영웅’ 정봉수(鄭鳳壽)도 서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일찍이 절규했던 적이 있다. 청북 주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고을 인근에 있는 산성(山城)을 손봐달라고 조정에 요구했다. 산성은 후금군이 들이닥쳤을 때 그나마 자신들의 몸을 숨길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1631년 8월 이후, 청북 지역의 요충지에 산성을 새로 쌓거나 수리해 달라는 건의가 봇물처럼 밀려들었다.8월12일 의주사람 백광종(白光宗)은 의주성을 수축하자고 했다.15일에는 곽산에 사는 김은정(金殷鼎) 등이 능한산성(凌漢山城) 안의 태초봉(太初峯)과 사인봉(舍人峯) 사이에 성을 쌓고 곡식을 저장하여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21일에는 철산 백성들이 정충신(鄭忠信)을 통해 운암산성(雲巖山城)을 수축해 달라고 건의해 왔다.9월 7일에는 운산 백성들이 용각산성(龍角山城)을 쌓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백성들 스스로 나섰던 것이다. ●서북 방어, 재정궁핍이 발목 잡아 성을 수축해 달라는 청북 백성들의 바람은 절실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문제는 성을 쌓는 비용과 완공 이후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병력과 군량을 마련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데 있었다.9월3일, 부원수(副元帥) 정충신이 차자를 올렸다. 청북 사람들의 축성 요구를 현장에서 직접 접했던 그였다. 하지만 정충신은 냉정했다. 그는 의주성을 쌓아봤자 소용이 없다고 했다. 성을 쌓는 것도 문제지만 완공 뒤 들여보낼 병력과 군량이 없는 현실에서는 우선 시세를 관망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비변사는 ‘정충신의 말대로 하면 청북의 민심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어렵게 모인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비변사 또한 병력과 군량을 마련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원칙론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1631년 9월5일, 도체찰사 김류( )는 평안도 방어와 관련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의주를 지키려면 최소 1만명의 병력이 필요한데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군량이 5만석이라고 추산했다. 또 의주 방어에 필요한 용골산성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병력을 미리 들여보내면 군량이 없어 견디지 못하고, 그렇다고 적의 침입을 맞아 들여보내면 시간에 맞출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어차피 의주를 방어하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안주와 황주 방어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주를 지키든, 안주와 황주를 더 중요하게 여기든 병력과 군량을 확보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서북 지역에서 조정이 가장 신경을 썼던 곳은 안주였다. 안주에는 약 7000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군량은 겨우 몇 개월도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김류는 경기도와 황해도 사이에 진을 만들어 강화도를 바깥에서 응원하는 거점으로 삼자고 청했다. 김류의 대책이란 결국 ‘강화도 방어론’과 다름이 없었다. 위기를 맞아 서북 지역의 방어책 마련이 절실했지만 군량과 재정의 궁핍은 대책 마련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조선이 이렇게 자기를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명 장수들은 여전히 수시로 들락거리며 양곡을 지급하라고 떼를 썼다. 직접 서울로 올라와 양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아예 배에다 중국산 재물을 싣고 황해도 연안 등지로 몰려와 양곡 무역을 요구하는 자도 많았다. 그들이 몇 개월씩 머물며 돌아가지 않자 연안 주민들은 그들의 등쌀에 몸살을 앓았다. 1631년 10월26일, 가도의 도독 황룡(黃龍)은 군량을 독촉하는 자문을 다시 보내왔다.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자신이 가도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조선이 후금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떠벌렸다. 후금과 가도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 역시 가관이었다. ●다시 ‘화친’상태로 돌아가다 1631년 윤 11월22일, 후금 사신 영아이대(英俄爾岱) 일행이 도착했다. 조선에서는 보통 용골대(龍骨大)라고 부르던 그는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내밀었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 백성들이 후금 지역으로 넘어와 산삼을 캐가고 있음에도 조선 조정이 방관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가도 사람들을 계속 상륙시키고, 형제국이 빌려달라고 요청한 배도 내어 주지 않는 조선은 이웃을 사귀는 데 정성이 없는 나라’라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가도의 명 장수들이나 조대수(祖大壽)가 후금을 이길 수 있다고 믿어 교묘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앞으로 언행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양국의 맹약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며 뼈있는 말을 남겼다. 인조는 이튿날에는 대릉하전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추신사(秋信使) 일행을 접견했다. 추신사 박로는 대릉하 싸움의 전황을 설명한 뒤, 홍타이지가 자신들에게 후금군의 병세(兵勢)를 과시했다고 보고했다. 후금군의 병력이 7만 정도 되고, 명군 사령관 장춘(張春) 등도 후금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이윽고 윤 11월24일, 조정의 고관들은 형조(刑曹) 앞마당에 모였다. 국경을 넘어가 산삼을 캐다가 잡힌 안덕간(安德幹)과 김태수(金太水)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용골대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채삼인(採蔘人)의 월경(越境)을 금지해 달라.’는 후금 측의 요구에 대한 성의 표시였다. 비변사는 이어 인조에게 후금 측이 요구하는 물자를 넉넉히 보내주자고 건의했다. 대릉하 전투 시작 직전 급격히 고양되었던 후금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는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적개심에 맞물려 위기의식은 높아졌지만 그것을 돌파할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한 이후부터 모두 융복(戎服)을 입었다. 조복(朝服) 대신 융복을 입은 것은 고난과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1631년 12월까지도 계속 융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융복을 착용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만으로는 후금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막막한 현실을 돌파할 특단의 조처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다른 지역구 노리시죠” 신경전 치열

    “다른 지역구 노리시죠” 신경전 치열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12일 여의도 당사에서 서울 강북 지역 19개 지역구 공천 신청자 94명을 시작으로 면접 심사에 착수했다. 한나라당은 신청자 전원을 대상으로 면접을 실시해 지역별로 2∼4명까지 대상자를 압축한 뒤 여론조사를 통해 공천자를 가릴 계획이다. 면접에만 2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경쟁자들을 한 자리에 모은 탓에 약간 거북한 장면도 연출됐다. 성동갑에 출사표를 던진 진수희 의원이 면접을 마치고 나와 경쟁자인 권혜경 휴먼오리엔티드 네트워크 대표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다. 진 의원이 건넨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권 대표는 “다른 지역구를 알아 보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라며 일침을 놨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분과 간사인 진 의원은 이 당선인 측근으로 분류된다. 권 대표는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의 딸이자, 임태희 당선인 비서실장의 처형이다. 남편은 김태기 전 성동갑 당협위원장이다. 면접장에서 ‘출마의 변’을 발표할 때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냉기류가 흐른 것으로 알려졌다. 진 의원이 먼저 “‘이명박 사람’인 제가 이 지역에 출마해 대선 때 높았던 지지도를 당 지지도로 연결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답변 기회를 얻은 권 대표는 “대선 때 이 당선인 득표율이 높았던 이유는 제가 이웃의 김장도 해주는 등 지역일에 열성을 다해 봉사했기 때문”이라고 지역 연고의 우위를 내세우며 반박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현역 의원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구 현역 의원들은 면접에 참석하지 않아도 됐지만, 종로 박진 의원과 용산 진영 의원은 면접장에 들러 인사를 하고 갔다. 단독 공천신청자인 박 의원은 공심위원들과 데면데면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돌아갔다. 반면 홍준표·박성범 의원은 면접장에 들르지 않았다. 광진갑에 공천을 신청한 김영숙 의원은 여성부 폐지에 관한 견해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김 의원은 “여성부가 폐지된 게 아니라 기능이 통합·확장된 것”이라고 답했다. 역시 광진갑에 출마한 권택기 당선인 비서실 정무기획팀장은 면접이 끝난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마디를 남겼다.“이거, 할 짓이 아니다.” 신청자들의 투정에도 아랑곳 없이 공심위원들은 “신청한 지역구에 연고가 있느냐.”“당에 무슨 기여를 했느냐.”“직업이 정당인이라면 무슨 일로 생계를 꾸리나.”“병역 면제를 왜 받았느냐.” 등 질문공세를 폈다. 특히 당적과 지역 연고에 관한 질문이 신청자들을 괴롭혔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공천 신청지역 현안에 해박하고 열정을 갖고 있다고 호소했다. 당적 문제는 조금 더 예민한 주제가 됐다. 전날 입당 절차가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천 신청이 반려된 25명 가운데 일부가 반발해서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 출마 경력이 있는 인사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측근인 박종웅 전 의원은 “대선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았는데, 입당 처리가 안 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면접장 바깥에서 1시간 동안 시위를 벌이다가 안강민 위원장과 면담을 했다. 인천 부평을에 출사표를 낸 이재명 전 의원은 “국회의원 시절 당적을 옮겼지만, 다른 당적으로 선거에 출마한 적은 없다.”고 부당함을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인천시당 관계자는 “일단 입당 심사 통보가 왔고, 우리는 그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분투했지만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집요한 포위 끝에 대릉하성을 무너뜨린 후금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명의 수세(守勢)와 낙조(落照)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말았다. ● 祖大壽, 투항을 결심하다 1631년 10월 7일, 홍타이지는 한인 출신 장수 강계(姜桂)를 대릉하성으로 보냈다. 그는 홍타이지에게 투항한 23명의 한인 장관(將官)들이 직접 작성한 투항 권유서를 들고 있었다. 조대수에게 투항하라고 설득할 참이었다. 조대수는 그를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강계는 할 수없이 성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쳤다. 투항 권유서를 쓴 사람들이 누구누구며, 원군을 이끌고 왔던 장춘(張春)도 이미 후금군에 참패하여 투항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조대수는 완강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자신의 옛 부하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성에서 죽을 것이니 다시는 오지 말라.”고 외쳤다. 병사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어도 조대수는 좀처럼 투항하려 들지 않았다. 조대수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10월 20일, 편지가 묶인 화살을 성안으로 날렸다. 그는 편지에서, 명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부하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명 병졸들에게 ‘너희는 죽어봤자 이름도 남기지 못하는데 왜 다른 사람의 고기가 되느냐.’며 ‘상관을 죽이고 귀순하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명군 진영을 흔들기 위해 심리전을 폈던 것이다. 심리전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10월 25일 조대수로부터 회답이 왔다. 조대수는 홍타이지에게 한인 출신 장수인 석정주(石廷柱)를 보내달라고 했다. 조대수는 석정주를 성안으로 들이면서 자신의 아들 조가법(祖家法)을 후금 진영에 인질로 보냈다. 조대수는 석정주에게 항복을 결심했다고 말한 뒤, 깜짝 제안을 했다.‘나는 이미 나라에 충성하기는 틀린 몸인데 목숨을 비록 구하더라도 처자를 볼 수 없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면 먼저 금주성을 함락시켜 내 처자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앞장서서 금주성을 함락시킬 복안이 있으니 홍타이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당시 조대수의 가족들 대부분은 금주성에 있었고 둘째아들은 북경에 있었다. 어차피 상황에 떠밀려 항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피붙이라도 챙겨야겠다는 결심이 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대수의 변신과 홍타이지의 배포 10월 28일 조대수는 마침내 성문을 열었다. 조대수는 투항하기로 결심했지만 부하 하가강(何可綱)은 그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하가강은 사실상 부사령관으로 성을 쌓는 공사를 감독했던 주역이었다. 그는 조대수에게 “공과 저는 모두 요동 사람입니다. 공이 나가지 않으면 요동 사람의 마음을 묶어둘 수 없고, 제가 죽지 않으면 요동 사람의 의리(義理)를 밝힐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제문을 지은 뒤 주변 사람들에게 “죽게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성을 나가서 영원히 비웃음을 사겠는가?”라고 했다. 조대수는 사람들을 시켜 그를 성밖으로 몰아냈다. 성밖에는 이미 후금군 장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가강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후금군에 의해 그의 숨이 끊어지자 그의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굶주린 명군 병졸들이 달려들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조대수는 후금군 지휘관들과 하늘에 맹서하는 의식을 치렀다. 조대수는 ‘홍타이지에게 몸을 맡겨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후금군 지휘관들은 ‘귀순한 한인들을 온전히 보양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조대수는 홍타이지의 장막으로 인도되었다. 홍타이지는 관원들을 1리(里) 밖까지 보내 그를 환영했다. 조대수가 장막 앞에서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겠다고 하자 홍타이지는 극력 만류했다.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홍타이지가 포견례(抱見禮)를 행한 것은 그동안 귀순해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거물이었던 조대수에 대한 배려의 표시였다. 조대수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면 직접 금주성으로 들어가 명군을 무장해제시켜 투항하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마치 후금군의 포위를 뚫고 대릉하성을 탈출한 것처럼 가장하여 금주성의 명군을 속인 다음 ‘거사’를 이루겠다는 복안이었다. 대릉하성을 포위하느라 지쳐버린 홍타이지는 조대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조대수의 ‘변신’도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홍타이지의 ‘배포’ 역시 대단한 것이었다. 11월 1일 조대수는 출발하면서 ‘금주성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면 입성한 다음날 포 한 발을 쏘고, 성을 접수하는데 성공하면 11월 4일까지 역시 포를 쏘아 신호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홍타이지에게 ‘성공’했다는 포성을 들으면 병력을 이끌고 즉시 금주성으로 오라고 했다. 11월 2일, 금주성에서 포성이 울렸다. 하지만 약속된 날짜가 되었지만 더 이상의 포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조대수가 배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여겼다. 그는 대릉하성에서 새로 얻은 명군 장졸들과 노획한 화기들을 챙겨 철수 길에 올랐다. 대릉하성에서 새로 얻은 명군 병력은 1만 1000이나 되는 많은 수였다. 노획한 대소 화기는 3500문이 넘었다. 병력과 무기는 고스란히 후금군의 새로운 전력(戰力)으로 보강되었다. 홍타이지는 끝까지 치밀했다. 그는 철수에 앞서 대릉하성의 성첩과 시설물들을 모두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홍타이지, 자신감이 더욱 커지다 대릉하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홍타이지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11월 10일,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 일행에게 대릉하 승리의 전과(戰果)를 설명하고, 자신들이 조대수에게 보냈던 초항장(招降狀, 항복 권유서)을 보여 주었다. 당시 대릉하의 후금 진중에는 오신남(吳信男)을 비롯한 조선 사신 두 명이 심양으로부터 와 있는 상태였다. 홍타이지는 명군을 굴복시킨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사신들에게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상국’으로 섬겼던 명의 장졸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조대수가 항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면서 오신남 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착잡했을 것이다. 또 어렵사리, 근근이 유지되고 있던 조선과 후금 관계의 장래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상상을 했을 것이다.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어디에 먼저 성을 쌓고, 어디를 먼저 방어하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이었다. 결국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갑론을박하다가 공사 착수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홍타이지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察哈爾)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 대릉하성에서 새로 합류한 명군 장졸들도 원정에 동참했다. 원정이 거듭될수록 후금의 힘은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젠가는 조선을 향해 다가올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500년전 英왕비 머리카락, 400만원에 낙찰

    영국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 파(Catherine Parr)의 머리카락이 경매를 통해 판매됐다. 유독 왕비가 많았던 헨리 8세의 여섯번째이자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Catherine Parr)의 금발 머리카락 한줌이 지난 15일 런던 본햄스 경매에서 우리돈 약 400만원에 낙찰된 것. 이 머리카락의 낙찰자는 우스터셔 와이크(Worcestershire Wyke) 지역의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은 캐서린 파 왕비가 헨리 8세에게 선물로 받은 영지(領地)이기도 하다. 머리카락을 손에 넣은 찰스는 “왕비께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땅으로 가져가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본햄스 경매소 대변인은 “머리 뭉치는 DNA테스트 등의 세부적인 검증을 거쳐야 한다.”며 “역사적인 영지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 해피엔딩”이라고 말했다. 캐서린 파 왕비는 노쇠해져 가는 헨리 8세를 보살핀 마지막 왕비로 교육에 정성을 쏟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비롯한 왕실 자녀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머리카락이 돌아가게 될 와이크 지역은 왕비 사망 후 앨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려 했던 앤소니 바빙턴(Anthony Babington)에게 넘겨졌다. 앤소니 바빙턴 처형 후 땅은 월터 롤리(SWalter Raleigh)경이 받게 됐으나 그도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결국 정치적으로 휘말리지 않았던 땅의 마지막 주인은 캐서린 파 왕비였던 셈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기고] ‘공룡부처’와 ‘경제살리기’/이창원 한성대 교수ㆍ한국조직학회회장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인 미국과 일본의 정부가 세계 13위 경제규모의 우리나라 정부조직보다 적은 것이 있다. 중앙행정기관 중 비교 가능성을 고려해 부(部)에 해당하는 기관만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18부인데,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이 15부이고, 일본이 1부 11성 1위원회로 총 13개이다. 노무현 정부의 행자부도 “부처의 수는 국가마다 편차가 심하나, 선진국의 경우에 내각의 중심인 부는 15개 전후 수준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요즘 차기정부 조직개편 논의시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개념이 바로 대부처주의(大部處主義)이다. 조직세분화로 인한 낭비요소를 제거하고 부처할거주의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한다는 차원에서 대부처주의로 가자는 것이다. 음식점도 퓨전(fusion)형이 인기가 높듯이, 정부조직도 지식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산업융합(convergence), 기술 및 서비스융합 등의 현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부처간 통합을 기반으로 한 대부처형태가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대부처주의의 추구가 ‘공룡부처’ 출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2001년 일본의 하시모토 내각이 우리의 보건복지부격인 후생성과 우리의 노동부격인 노동성을 통합하여 후생노동성을 출범시킨 후 벌어진 사건은 공룡부처의 출현이 나라의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후생노동성이 내부조직에 대한 통제가 부실해져 작년 연금납부기록 5000만건이 누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7월 일본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터진 이러한 연금 부실관리 문제는 국민들의 엄청난 불신을 부추기면서 여당인 자민당이 선거에서 참패함으로써 결국 아베 정권 퇴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논의하고 있는 정부조직개편의 방안 중에도 우려할 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인수위 관계자들이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은 기획조정 기능이 너무 약화돼 있다. 기획·조정 기능을 강화한 경제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경제기획원이나 재정경제원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언급으로, 국가전략 관련 부처를 만들자는 주장으로 들린다.IMF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 차원에서 재정경제부·기획위원회·예산청으로 쪼개졌던 재정경제원을 ‘전략’이라는 개념을 하나 더해서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은 공룡부처의 재출현으로 볼 수도 있다. 한국조직학회에서 정부조직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국가 전체의 전략을 마련하고 미래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80% 찬성), 전략기획 기능을 담당할 조직으로는 반민·반관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고(52% 찬성), 특정부처가 담당해야 한다는 의견은 18%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차기정부가 기업친화적인 정부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금융관련 정부조직을 일원화하고, 일본의 경제산업성처럼 기업지원 기능을 강화해야 하며, 예산관련 부처는 예산편성권만 유지함으로써 각 부처에 대한 지원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세계 13대 경제대국인 우리나라의 국가전략 개발은 고위 경제관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 관료들이 이야기하는 ‘조정’이라는 것은 다른 힘없는 부처와 민간기업에는 사실상 ‘명령’이고 이러한 인식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경제부처 강화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경제부처 강화는 경제관료와 경제부처를 살릴 뿐 시장중심적 경제운영에는 걸림돌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과연 경제관료들만 모르고 있을까? 이창원 한성대 교수ㆍ한국조직학회회장
  • 세상을 바꾼 어리석은 생각들/말·글 빛냄 펴냄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에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해 한 번은 맞힐 수 있다.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은 가려서 듣는다.”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동쪽의 나라’ 인도로 가려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천동설을 뒤엎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국민투표와 여성 권리 확대를 주장하다 기요틴에서 처형된 올랭프 드 구즈…. 당시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평가절하한 ‘기괴한’ 발상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문명을 꽃피우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독일의 저명 법학자인 프리더 라욱스가 쓴 ‘세상을 바꾼 어리석은 생각들’(박원영 옮김, 말·글 빛냄 펴냄)은 당시에는 쓸데없고 미친 짓으로만 치부되던 생각들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다른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생각과 연구, 기술 분야에서 진정 새로운 것은 다른 이들에게 소용없거나 이상하다고 여기는 아이디어로부터 나온다고 역설한다. 아직 길이 나지 않은 곳, 소용도 없는 곳인 만큼 눈앞의 이득을 곧바로 가져다 주지도 않지만 세상을 뒤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얘기다. “G W 라이프니츠는 컴퓨터 계산기의 관점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1703년 오로지 숫자 1과 0만을 사용하는 이진법 계산체계를 발표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누구도 현실적이고 경제적으로 이용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실현될 수 없는 탓에 쓸모없는 기계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기본 토대가 된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강조한다. 눈부신 과학적 성과나 정치사회적인 변화의 계기는 다름 아닌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고하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파악 가능한 이념을 받아들여 그것의 씨를 뿌린다. 그러나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다.”라고 ‘대담한’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만 38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 ●계운궁(啓運宮) 상례(喪禮) 논란 병자호란을 겪을 때까지 인조 정권은 안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주된 까닭은 인조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등극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정변을 통해, 신료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인조는 늘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신료들과 갈등을 빚었다. 정통성 확보와 관련된 첫 현안은 인조의 생부모(生父母)를 왕실의 종통 속에서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인조는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왕실의 법통상 조부인 선조를 계승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1580∼1619)과 생모인 계운궁(啓運宮) 구씨(具氏,1578∼1626)를 사친(私親)으로 대접할 것인지, 아니면 인조의 왕통 속으로 끌어들여 ‘왕’과 ‘왕비’로 대접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후자를 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정원군과 구씨를 사친의 예에 따라 대접해야 한다고 맞섰다. 논란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1626년 1월, 인조의 생모 계운궁이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계운궁을 위해 몇 년 상을 치러야 하는지가 당장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3년 상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대신들과 예조판서는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멸사봉공의 입장에서 사적인 예는 축소해야 한다.’며 3년 상에 반대했다. 그들은 1년 상을 치르되 ‘상주가 지팡이를 짚지 않는(不杖期)’ 상례를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이귀를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이 선조의 대통을 계승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내세워 3년 상을 치러도 무방하다며 인조에게 영합했다. 대신들과 예조는 인조가 상주(喪主)가 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인조는 왕통으로 볼 때 이미 선조에게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생모를 위해 상주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이 상주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신료들의 공론을 무시했다. 예조판서를 비롯한 반대하는 신료들은 사직을 요청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상주가 되려 하고 사친을 위해 국상(國喪)을 고집하는 것은 참월할 뿐 아니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인조는 결국 신료들의 반발에 밀려 상주 역할을 동생 능원군(綾原君)에게 넘겼다. ●신료들 “인조 아버지는 선조” 인조가 상기(喪期)와 상주 문제를 놓고 신료들과 논란을 빚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계운궁의 상례를 ‘왕비’의 예로써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실제로 5일 만에 빈소를 차리고(成殯),6일 만에 상복을 입고자(成服)했는데 예조는 그것이 ‘왕비의 예’라며 반대했다. 신료들은 3일에 ‘성빈’하고 4일에 ‘성복’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자신의 명을 듣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신료들을 위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시간을 끌면 어차피 자신의 의도대로 5일 ‘성빈’,6일 ‘성복’을 관철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운궁의 상례와 관련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계운궁의 관을 궁궐 안에 두는 문제, 반혼(返魂) 의식을 궁궐에서 하는 문제, 인조가 산소까지 따라가는 문제 등도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운궁을 모신 김포의 산소 이름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명명했다.‘사친을 왕비의 예로 대접하면 안 된다.’는 신료들의 반발과 공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추대된 왕’으로서 자신이 지닌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인조는 더 나아가 작고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다. 신료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반발했고 당연히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추숭을 둘러싼 논란은 정원군과 인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예학(禮學)의 권위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은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왕통으로 볼 때 인조의 아버지(考)는 선조’라고 못박았다. 왕통은 사적인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내세워 정원군을 ‘아버지’로 대접하려는 인조의 의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선조와 인조를 부자 관계로 하면 정원군과 인조는 형제가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김장생의 의견에 반대했다. 대다수 신료들이 ‘왕통은 사적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김장생의 의견에 동조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귀와 박지계(朴知誡) 등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여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인조에게 철저히 영합했던 것이다.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논의는 1624년경에 제기되었다가 정묘호란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 8월, 음성(陰城) 현감 정대붕(鄭大鵬)이 다시 제기했다. 그는 ‘계운궁의 상례를 국상으로 치르고도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인조는 그의 의견이 반가웠지만 대다수 신료들은 반발했다. 정대붕의 상소를 계기로 이귀는 정원군을 추숭하고, 그를 모시는 묘(廟)를 세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이귀는 무리를 동원하여 추숭을 요청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리게 하는 등 ‘여론 조작’까지 시도했다. 이원익, 김류, 오윤겸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대신들은 모든 대소 신료들을 이끌고 인조를 압박했고, 성균관 생도들까지 나서 인조에게 ‘공론을 따르고, 비례(非禮)’에 집착하지 말라.’고 외쳐댔다. 정치판은 바야흐로 인조, 이귀, 박지계, 최명길 등 소수의 ‘추숭 찬성론자’들과 대다수의 ‘반대론자’들로 나뉘어졌다. ●1632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집권 이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한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 이귀는 그 과정에서 솔선해서 ‘총대를 멨다.’그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추숭을 주장하다가, 반대하는 신료가 있으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성토하고 모욕을 주었다. 인조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숭 문제를 놓고 신료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결국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을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이어 5월에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원종과 계운궁을 모신 산소는 장릉(章陵)으로 승격되고,1635년에는 그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데도 성공했다. 신료들의 반대와 조야의 공론을 모조리 무시하고 밀어붙여 얻어낸 ‘성과’였다. 당시 조선은 가도의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하려 시도했고, 유흥치는 곧 심세괴(沈世魁)에게 피살되는 등 서북 변경 상황이 몹시 심각했다. 후금 또한 조선에 대해 이런 저런 경제적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역시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을 통해 왕권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지만 물경 10년 가까이 계속된 ‘추숭 논란’은 신료들 사이에 불신의 벽을 높이고 국력을 갉아먹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추스르고 국방력을 제고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는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부토 후계자 남편·19세 장남 빌라월

    ‘남편과 아들이 후계자’ 파키스탄 최대 야당인 파키스탄인민당(PPP)은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 전 당의장의 후계자로 그의 아들과 남편을 임명했다고 현지 일간 ‘더 뉴스’가 30일 보도했다. PPP는 이날 부토의 고향인 파키스탄 신드주 나우데로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부토의 아들인 빌라월 부토 자르다리(19)와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51)를 공동의장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앞서 영국의 더 타임스 등 외신들은 빌라월이 새 지도자로 지명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셰리 레만 PPP대변인은 “(어린) 빌라월에게 당의 지도권을 통째로 넘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PPP는 창당 이후 부토 집안에서 대를 이어 조직을 이끌어 왔다. 테러로 사망한 부토도 1979년 아버지가 군사정권에 처형된 뒤 장녀라는 점 때문에 당을 맡았다. 빌라월은 현재 옥스퍼드 대학 1학년으로, 부토의 1남 2녀 가운데 맏이다. 빌라월의 이력은 영국으로 망명한 어머니와 헤어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서 고교를 다닐 무렵부터 두드러졌다. 부학생회장을 맡던 2004년 8월 파키스탄 유력지 ‘여명’(Dawn)과 인터뷰에서 “정의와 민주주의 없이는 파키스탄의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면서 “정치에 입문할지, 다른 부문에서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할지 생각 중”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부토 테러 사망] 부토는 누구?

    [부토 테러 사망] 부토는 누구?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는 이슬람국가 최초의 여성 지도자로서 파키스탄 정치의 한 축을 지켜 왔다. 두 차례의 총리직을 지내고 투옥과 망명을 되풀이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겪어 왔다. 지난 10월 8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함께 있던 140여명이 희생되는 대형 폭탄 테러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대규모 집회를 강행하는 등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총재로서 총선을 준비해 왔다. 부친은 총리를 지낸 줄피카르 알리 부토로 육군참모총장인 모하마드 지아 울 하크의 군사쿠데타로 실각되고 1979년 처형됐다. 부토가 미국 하버드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의 일이다. 이후 부토는 부친이 창당한 PPP의 중앙위원을 맡았으며 야당연합체인 민주주의회복운동(MRD)의 일원으로 반정부운동을 본격화했다. 1981년 하크 정권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84년 유럽으로 망명했다.PPP를 지휘하면서 MRD를 통해 계엄령 철폐와 대통령 하크의 사임을 촉구했다. 대통령 하크가 계엄령을 해제한 뒤 1986년 4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전국을 돌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1988년 8월 대통령 하크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11월 선거에서 최다 의석을 얻어 총리로 취임했다. 취임 후 11년에 걸친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민주화개혁을 시도했지만 군부와 야당 견제로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1991년 총선거에서 패배,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이듬해 다시 조기총선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시위를 주도,1993년 10월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다 1999년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현 대통령의 쿠데타로 다시 영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무샤라프에 맞설 만한 상징성과 카리스마,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다시 귀국, 권토중래를 시도했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숭정제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원숭환의 생사는 바야흐로 동림당과 엄당 대결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그 배경 1630년 9월22일, 원숭환은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임금을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책형(刑)이라 불리는 가장 잔혹한 형을 받았다. 기둥에 묶어 놓고 형리들이 달려들어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중에는 두개골까지 부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형벌이었다. 후금이 파놓은 반간계에 휘말려 원숭환을 처형했던 사람은 숭정제였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원숭환을 죽이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이었다. 이들은 숭정제 즉위 후 약화된 자신들의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당의 잔당들을 규합하려 했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숭환을 제거하려 했던 것과 ‘모문룡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모문룡은 가도에 위충현의 소상(塑像)을 세웠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었다. 모문룡은 해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막대한 요향(遼餉·명 조정이 요동으로 보내던 군량) 가운데 상당한 양을 횡령했고, 그렇게 착복한 자금을 바탕으로 위충현 등 엄당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조선과 후금 상인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인삼, 모피, 진주 등의 보화도 철철이 엄당 신료들에게 보내졌다. 엄당은 뇌물을 챙기는 대신 모문룡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죽었다. 때마다 쏠쏠하게 들어오던 뇌물도 뚝 끊어졌다. 당연히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그와 연결된 동림당에 대한 적의(敵意)는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타 조정 신료들 중에도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북경 주변의 경기 지역에 원림(園林)이나 정사(亭舍)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장성을 넘어와 경기 지역을 유린하자 그들이 소유한 원림이나 정사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원숭환을 원망하게 되고, 궁극에는 그가 후금군을 고의로 끌어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원숭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 원숭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확연히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환을 죽이고 전용석 등 동림당 관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온체인 등은 숭정제를 주무르며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상황 파악이 어두운 황제와 그에게 달라붙은 간신들의 발호 속에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리 없었다. 한 예로 원숭환을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祖大壽)는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명에 대한 후금의 도전이 본격화되었던 만력 연간부터 숭정 연간까지 원숭환은 명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죽자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겼다. 원숭환은 자연스럽게 과거 송(宋) 시절 금(金)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주화파 진회(秦檜) 등에 의해 제거되었던 명장 악비(岳飛)에 비견되었다. 청나라 말엽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열기가 높아갈 무렵 ‘한족의 영웅’으로서 원숭환을 추모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변법자강 운동에 가담했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기려 ‘원독수전(袁督師傳)’이라는 글을 썼다. 광서(光緖) 연간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였다. 원숭환과 같은 광동(廣東) 출신이었던 그는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의 발문에서 그는 ‘원숭환이 죽음으로써 명이 드디어 망했고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장백정은 원숭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궁극적으로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을 죽게 만든 것은 청’이라고 하여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냈다.‘반청흥한’의 분위기 속에서 원숭환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1952년 북경시 정부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북경의 지식인들은 모택동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시장 팽진(彭眞)에게 원숭환 묘를 원위치에 보전하도록 지시했는데, 모택동 또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애국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신(貳臣)들 홍타이지 명령받아 반간계 실행 원숭환이 투옥되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은 명이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이었다. 명이 이렇게 자멸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담당했던 부류가 이신(貳臣)들이다. 이신이란 ‘두 조정을 섬긴 신하’, 즉 명에서 벼슬하다가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신료들을 가리킨다. 명이나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배신자’였지만 후금이나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중용(重用)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후금의 국가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실제 당시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를 제시했던 사람도,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반간계를 실행으로 옮겼던 사람도 모두 이신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아, 사로잡은 명의 환관들이 있던 옆방에 머물면서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말하며 반간계를 실행했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에게 원숭환을 제거할 반간계를 기획하여 제공한 사람은 한족 출신 범문정(范文程)이었다. 그는 심양의 명문 출신으로 증조 범총(范총)은 명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부 범심(范瀋)은 심양위지휘동지(瀋陽衛指揮同知)를 역임했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策士)로 중용했다. 범문정은 1629년 홍타이지의 관내(關內) 원정에 수행했는데,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를 제거할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뒤 시기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施政)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이신들이 청으로 귀순했던 이유는 제각기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북경까지 달려와 사투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숭정제를 보면서 조대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 앞에서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윤봉길의사의 폭탄은 도시락 아닌 물통폭탄”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윤 의사 순국 75주기인 19일을 맞아 윤 의사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18일 공개했다.우선 윤 의사가 1932년 4월29일 훙커우(虹口) 의거 때 실제 사용한 것은 도시락 폭탄이 아닌 물통 폭탄이었다. 윤 의사가 가져간 2개의 폭탄 가운데 물통 폭탄은 저격용,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다. 윤 의사의 조카인 윤주 기념사업회 부회장은 “폭발한 물통 폭탄은 목격한 사람이 없지만 터뜨리지 못한 도시락 폭탄은 사진이 공개돼 오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또 일본군이 윤 의사를 당초 폭탄 투척 현장인 훙커우공원에서 공개 처형하려다가 국제 여론을 의식해 포기한 사실도 공개했다.공개 처형하면 윤 의사가 인류평화 수호를 위해 침략군을 응징한 세계 영웅으로 오를 수 있어 일본은 이를 포기했다고 기념사업회는 전했다. 또 1932년 11월21일자 아사히신문에 일본으로 압송되는 윤 의사의 호송차량 뒷모습 사진만 실리고 호송 장면이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기념사업회는 “윤 의사가 일본 헌병에게 ‘사진기자들이 찍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단호히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년 9월, 원숭환(袁崇煥)이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처형된 것은 명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홍타이지, 명의 허를 찌르다 1629년 10월2일, 홍타이지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을 길잡이로 앞세워 북경 공략에 나섰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굳게 지키고 있던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영평(永平) 관할의 용정관(龍井關)과 준화(遵化) 관할의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산해관에서 영원성으로 이어지는 주공로(主攻路) 방어에 집중하고 있던 명군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일찍부터 혼인 정책 등을 통해 몽골 부족을 회유하여, 산해관 동북의 장성 외곽을 돌파하려 했던 후금의 시도가 성공했던 것이다. 그 같은 사태는 원숭환이 이미 예견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산해관을 제외한 장성 외곽지역의 방어 태세가 몹시 취약하다는 것, 후금이 몽골을 회유하여 쳐들어 올 경우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10월26일, 후금군은 황성(皇城) 코앞의 경기(京畿) 지역까지 들이닥쳤다. 영원성에 머물던 중에 홍타이지의 공격 소식을 접한 원숭환은 당황했다. 그는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미친 듯이 북경을 향해 달려갔다. 원숭환은 산해관에 도착한 직후 참장(參將) 조솔교(趙率敎)에게 병력 4000을 주어 준화를 구원하도록 명령했다.11월4일, 후금군은 준화성 공격에 나섰다. 왕원아(王元雅)가 이끄는 명군은 힘껏 저항했지만 곧 무너지고 말았다. 성안에서 후금군에게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준화를 향해 달려오던 조솔교는 중간에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말았다. 성 함락 후 준화에서는 후금군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준화 함락과 대학살 소식에 북경은 전율했다. 11월17일,9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온 원숭환은 북경 광거문(廣渠門) 앞에 이르렀다. 병사와 말 모두 굶주림도 잊고 휴식도 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부총병 주문욱(周文旭)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상황을 보아 북경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원숭환은 듣지 않았다. 황성이 포위되려는 마당에 휴식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11월20일, 원숭환의 명군은 광거문 앞에서 후금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6시간 이상 벌어진 10여차례의 사투 끝에 후금군은 뒤로 물러났다. 무리한 행군과 굶주림 속에서도 정신력으로 버틴 끝에 얻은 승리였다. ●홍타이지 원숭환에 패해 후퇴하다 11월23일, 후금군을 물리친 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장거리 행군과 전투, 그리고 노숙에 지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숭정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원숭환이 분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에게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후금군이 북경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 원숭환의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숭환 휘하의 병력은 엄동에 다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11월27일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원숭환은 후금군을 격파했다. 원숭환이 있는 한 북경을 도모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병력을 북경 외곽의 남해자(南海子)란 곳으로 철수시켰다. 그는 북경에서 물러나면서 숭정제에게 서신을 보내 화친을 맺자고 요구했다.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홍타이지는 이후 북경의 상황을 관망하면서 북경 주변의 여러 지역에 병력을 풀어놓았다. 후금군은 영평(永平), 준화, 난주( 州), 천안(遷安) 등지의 성과 촌들을 마구잡이로 겁략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사람과 가축, 각종 물자를 약탈하고 저항하는 인원들을 도륙했다. 황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명군은, 후금군이 외곽 지역에서 벌이고 있던 약탈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후금군은 통주(通州) 등지에서 1000척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웠다.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후금군 병사 한 사람에게 1필씩 돌아갈 만큼의 우마를 획득했다. 잔혹한 학살과 방화, 그리고 약탈 속에서 북경 주변은 초토화되었다. 비록 황성은 어렵사리 지켜냈지만 명은 심장부가 유린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통해 또 다른 명의 장성(長城)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뜨리게 된다. 그 ‘장성’이란 다름 아닌 원숭환이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귀중한 포로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마방태감(馬房太監)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이 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이 두 사람의 포로를 활용하여 원숭환과 숭정제를 이간시킬 수 있는 반간계를 구상했다. 양춘과 왕성덕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이 밀담을 나누었다. 밀담은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공취(攻取)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겨우 벽 하나로 나뉘어진 옆 방에서 환관 두 사람은 고홍중과 포승선의 밀담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홍타이지와 후금군 지휘부가 의도적으로 그 같은 상황을 연출했음은 물론이다. 11월29일, 홍타이지의 명을 받은 고홍중과 포승선은 태감 두 사람을 고의로 풀어주었다. 자금성으로 달려온 두 환관은 숭정제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홍타이지가 북경을 기습한 직후부터 명 조정에 있던 엄당(奄黨)의 잔당들은 원숭환을 제거할 함정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원숭환이 오랑캐를 일부러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다.’는 참소가 주된 내용이었다. 또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의 통주에 다다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번도 접전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도 떠돌고 있었다. ●원숭환, 하옥되다 당시 19세에 불과한 데다, 대국(大局)을 볼 수 있는 역량이 없었던 숭정제는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1629년 12월1일, 황제는 원숭환을 황성으로 불렀다. 명목은 ‘군량 문제를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원숭환이 오랑캐와 내통하고 있다.’고 믿었던 숭정제는 혹시라도 원숭환이 낌새를 채고 오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군량 문제’를 운운했던 것이다. 원숭환이 황성 앞에 도착했을 때 문지기들은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오랑캐’에게 북경 주변이 포위된 계엄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대신 성 위에서 밧줄에 달린 바구니가 내려왔다. 당시 계요총독(遼總督)이자 병부상서 직책을 갖고 있던 원숭환은 바구니에 실린 채 황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황성으로 들어선 직후 원숭환은 금의위(錦衣衛)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반면에 그와 동행했던 총병 만계(滿桂)와 흑운룡(黑雲龍) 등은 황제로부터 칭찬을 듣고 승진했다. 내각 대학사 성기명(成基命)이 원숭환을 구명하기 위해 애써 숭정제에게 호소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림당(東林黨)에게 복수하기로 작심했던 엄당의 신료들은 원숭환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원숭환은 동림당 계열의 대학사 전용석(錢龍錫)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원숭환의 ‘죄’를 물고 늘어지면 동림당 계열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반간계는 완벽하게 성공했다.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성을 공격하여 선전포고했던 이래 후금군은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그 승승장구에 제동을 걸고 끝내 누르하치를 비명횡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원숭환이었다. 그가 영원성과 산해관을 막아서는 한, 아니 그가 존재하는 한 중원 정복이라는 목표는 실현될 수 없었다. 원숭환은 바로 명의 장성이었다. 그런데 그 ‘장성’이 반간계 한 방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요컨대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숭정제는 암우(暗愚)했다. 지도자의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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