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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은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은 없었다”

    “모든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이다.” 1960년대 서구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인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 그는 지배계급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해야 할 모든 혁명이 숙명적으로 패배의 요인을 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모순이지만, 일면 시행착오를 통한 역사발전이란 긍정적 요소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혁명의 불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때 인기를 끌던 학부 교양과목인 ‘시민사회와 혁명’은 강단에서 썰물처럼 밀려났고, ‘철 지난 혁명’의 기억은 겨울바다처럼 쓸쓸한 추억으로 남았다. ‘원조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원죄는 아닐까.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숨 가쁘게 달음박질쳤던 4·19혁명과 그 아들딸들이 계승했던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은 정녕 사라졌는가”란 물음의 화두를 던진다. 역사학계에선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탈취 사건으로 불거진 200년도 더 된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혁명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시선과 감춰진 이면을 짚어낸 수정주의가 충돌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더욱 풍부한 역사적 해석을 낳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저자는 수정주의적 해석에 힘을 싣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은 없다”고 단언한다. 프랑스 혁명은 지적 모험가들이 탐험을 멈추지 말아야 할 미지의 세계라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는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은 식민지 유색 인종과 여성을 배반했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현 아이티공화국)에서 18세기 말 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혁명정부는 노예 해방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시한다. 1791년 봉기 때 처형된 흑인 노예의 소지품에선 인권선언문이 발견됐다. 그만큼 카리브해의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와 평등은 신분제 철폐로 이해됐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달랐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프랑스 혁명의 이데올로그였던 E J 시에예스는 “흑인과 원숭이를 교배시켜 노동전문계급을 만들어 프랑스 노동계층을 노동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사에서 아이티 혁명과 흑인 노예제가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은폐된 이유다. 흑인 반란군의 힘이 세지고 백인 농장주들이 영국, 스페인과 동맹을 맺자 혁명정부는 아이티에서 노예 해방과 노예제 폐지를 조건부로 허락한다. 인권선언의 결과라기보다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들의 영역도 가사, 육아와 같은 영역으로 축소된다. 혁명 이후 나폴레옹 1세가 등장하자 여성 관련 법률은 약화되거나 폐지됐다 나폴레옹 민법은 가장이 원하면 아내와 자녀를 교정원에 감금할 수 있도록 했다. ‘성격 차이에 의한 이혼’이 불허되고, 아내가 간음할 때 남편이 살해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다. 초기에 당당하고 주체적인 대접을 받던 프랑스 여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반동분자로 전락했다. 참정권도 주변국보다 30여년 늦은 1940년대에야 얻을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이 오히려 여성운동을 억압하는 못된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혁명이 외친 자유·평등·우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1789~1795년 세 차례에 걸쳐 발표된 인권선언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 보편주의는 남성, 백인, 유산계층에만 적용됐다. 저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세계 인권 발전에 오히려 나쁜 기억과 유산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물음 하나. 지난해 대선을 전후해 국내에서 60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영화 ‘레 미제라블’의 배경은 과연 프랑스 혁명일까. 엄밀히 따지면 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이 아니다. 영화 도입부에 장발장이 석방되던 해는 왕정복고기(1814~1848)의 초입인 1815년이다. 영화 후반부의 파리 시가전도 1832년의 일이다. 저자는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민중은 프랑스 대혁명의 후손들이라고 말한다.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 사이에 낀 소위 ‘1820년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은 1792~180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원조혁명을 마중물 삼아 부르봉 왕가 타도를 사명으로 삼았다. 저자는 나폴레옹 키드인 ‘1820년 세대’와 박정희 키드인 우리나라의 ‘386세대’를 비교한다. 독재타도에 젊음을 바쳤지만 공통점은 딱 여기까지라고 했다. 박제화된 혁명의 기억, 혁명의 퇴보가 ‘386세대’의 특징이란 이야기다. 혁명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과거완료형 사건이 아니라 장기지속적이며 진행형인 미완의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아시아나機 美서 사고] “딸이 어깨·다리 다쳤다는데… 그 뒤로 연락 닿지 않아” 발 동동

    [아시아나機 美서 사고] “딸이 어깨·다리 다쳤다는데… 그 뒤로 연락 닿지 않아” 발 동동

    “딸 머리 위에서 불꽃이 튀고 선반이 부서져 내렸다고 하던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빨리 얘기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사고가 난 아시아나항공 여객기에 탑승한 김지은(22·여)씨의 어머니 이춘희씨는 7일 서울 강서구 오쇠동 아시아나항공 본사 운항동 1층에 마련된 피해자 가족 센터를 찾아 “딸이 방학을 맞아 미국 친척집으로 놀러 갔는데 도착할 때가 돼도 연락이 없어 걱정하던 차였다”면서 “딸이 어깨랑 다리를 다쳤다고 했는데 그 뒤로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시아나항공은 이날 오전 5시쯤 직원들을 소집해 비상대책본부를 꾸리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본사 교육훈련동에는 임시 취재본부가 마련됐고 새벽부터 국내외 언론사 기자 100여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인천공항의 여객터미널 지하 1층에 대기실을 마련해 놓고 가족들에게 통보했지만 미처 연락을 받지 못해 본사를 찾아온 가족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시아나항공은 사상자 수와 현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피해자 가족의 항의가 쏟아졌다. 이날 오후 5시 현재까지 공식 집계된 사망자 수와 사고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은 공식 브리핑에서 “금번 사고로 인해 탑승객과 가족들, 국민들께 크게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고 원인과 사상자 수, 부상자들의 상태 등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인천공항에 마련된 피해자 가족 대기실도 하루 종일 50여명의 취재진과 아시아나항공 관계자, 피해자 가족들로 북적였다. 오전 7시부터 항공사 측이 마련한 대기실에는 피해자 가족들의 안타까운 발길이 이어졌다. 대기실을 찾은 오모(52)씨는 “미국에 사는 부인과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처형과 장모님이 비행기를 탔다”면서 “처형은 많이 다쳐 헬기로 실려 갔고 장모님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인근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데 연락이 안 돼 답답한 마음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항공사 측이 기다려 달라고만 할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공항에서 TV를 켜 놓고 뉴스만 보는 상황”이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사고 비행기에 탔다’는 50대 남성은 “여든의 노모가 사고를 당해 응급실로 갔는데 큰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항공사 측에서 자꾸 호텔로 돌려보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런 식으로 대처해도 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오후 1시 33분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특별기를 마련해 피해자 가족들을 탑승시킬 계획이었지만 피해자 가족 상당수가 비자 등 출입국 절차 문제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초 피해자 가족을 태우고 오후 4시 30분 출발할 예정이었던 샌프란시스코행 정규 노선 여객기는 현지 공항 사정으로 30분가량 지연됐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前프로농구선수 처형 살해 암매장

    전직 프로농구 선수가 평소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아내의 쌍둥이 언니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 화성동부경찰서는 3일 정모(31·폐차업)씨를 긴급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정씨는 지난달 26일 오전 11시쯤 화성시 정남면 처가에서 아내(32)의 쌍둥이 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 살해한 뒤 시신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이틀간 자신의 승용차에 싣고 다니다 오산 가장동 공터에서 암매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씨는 범행 다음 날 숨진 처형의 휴대전화로 아내에게 “힘든 것 정리하고 일요일(30일) 돌아오겠다”며 여행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언니가 약속한 날을 넘기고도 연락이 없자 정씨 부인은 정씨와 함께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정씨가 범행 당일 처형의 벤츠 승용차를 대부업자에게 1200만원을 받고 판매한 사실을 추궁하다 3일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경찰은 조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정씨는 고교 시절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대학 입학 후 적응하지 못해 중퇴했다. 이후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 나와 오리온스에 8순위로 지명됐으나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팀을 이탈해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다. 2006년 울산 모비스에 영입됐지만 역시 적응하지 못해 선수생활을 접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왜 무시하냐”며 쌍둥이 처형 죽이고 시신 갖다버려

    평소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아내의 쌍둥이 언니를 목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3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 화성동부경찰서는 3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정모(31·폐차업)씨를 긴급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정씨는 지난달 26일 오전 11시에서 낮 12시 사이 화성시 정남면 처가에서 아내(32)의 쌍둥이 언니를 목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곳에서 8.8㎞ 가량 떨어진 오산 가장동 야산에 시신을 묻어 유기한 혐의도 받고 있다. 처가살이하던 정씨는 지난 1일 아내와 경찰서를 방문, “처형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며 미귀가 신고를 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정씨가 범행 당일 처형의 벤츠 승용차량을 중고차 매매상에 1200만원 받고 판 사실을 추궁하다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한편 경찰은 정씨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되는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처형 살해’ 정상헌, 시신 차에 싣고서…

    아내의 쌍둥이 언니를 목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남성이 전 프로농구 선수 정상헌(31)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상헌은 지난달 26일 오전 11시에서 낮 12시 사이 화성시 정남면 처가에서 아내의 쌍둥이 언니 최모(32)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목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상헌은 또 처형의 시신을 여행용 가방에 넣고 이틀 동안 자신의 승용차에 싣고 다니다 집에서 8.8㎞가량 떨어진 오산 가장동 야산에 시신을 암매장한 혐의도 받고 있다. 처가살이를 하면서 최씨와 잦은 갈등이 있던 정상헌은 경찰에서 “처형이 나를 무시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정상헌은 범행 다음날인 27일 숨진 최씨의 휴대전화로 아내에게 “힘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암매장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언니가 돌아오지 않자 정상헌의 부인인 최씨는 지난 1일 오전 1시쯤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했다. 수사에 나선 경기 화성동부경찰서는 정상헌이 범행 당일 숨진 최씨의 벤츠 승용차를 대부업자에게 1200만원에 판 사실을 추궁하다 3일 오전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경찰은 정상헌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되는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정상헌은 경복고 재학시절 신인왕급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고려대 입학후 팀에 적응하지 못해 이탈을 반복하다 중퇴했다. 이후 2005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돼 대구 오리온스에 지명됐지만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팀을 이탈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다. 이듬해 2006년 울산 모비스에 입단한 뒤 군 입대를 하고 2009년 상무에서 재대하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역시 적응을 하지 못해 프로무대에서 은퇴한 뒤 폐차업을 시작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히틀러 음식 검시관 “英 독살시도 알고 시식가 고용”

    히틀러 음식 검시관 “英 독살시도 알고 시식가 고용”

    세계 제2차대전 중 독일인 마르곳 뵐크(96)는 몇 년이나 고급 식사를 즐겼지만 항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먹을 음식에 독극물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용된 시식담당자였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2일 뵐크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뵐크는 히틀러가 1945년 자살하기까지 2년 반 동안 매일 오전 11시에서 정오 사이에 음식을 먹어야 했다. 별 탈이 없으면 음식은 당시 ‘늑대굴’로 불리던 폴란드 북부의 야전지휘본부로 보내졌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였다. 음식은 흰 아스파라거스와 최상품 과일, 꽃양배추 같은 훌륭한 것들이었다”고 뵐크는 회고했다. 다른 여성 14명과 함께 일했던 뵐크는 “시식담당이 따로 있었던 이유는 히틀러가 첩보를 통해 영국의 독살 시도를 알았기 때문”이라면서 “매끼 시식했던 우리는 서로 껴안고 울었고 ‘내일 살아있을까’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뵐크는 목숨을 걸고 히틀러를 위해 일했지만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애견을 보는 데 그쳤다고 전했다. 뵐크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일부 군 간부들이 늑대굴에 설치한 폭탄이 터진 1944년 7월 20일도 기억한다. 당시 뵐크는 군인들과 함께 근처 막사에서 영화를 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고 우리는 나무 벤치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누군가 ‘히틀러가 죽었다’고 소리쳤지만 알고보니 그는 손을 조금 다쳤을 뿐이었다”고 뵐크는 전했다. 이 사건 이후 뵐크는 감시를 받는 숙소로 옮겨져 죄수 같은 생활을 해야했다. 뵐크는 히틀러 자살 후 베를린으로 도주해 은신했다.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하고 조여왔으며 방공호에서 공습을 피하던 뵐크는 소련군에게 붙들려 2주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 뵐크와 함께 일하던 다른 14명의 시식자들은 야전지휘본부에에 남아 있다 모두 처형됐다. 전쟁이 끝나고 연금보험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뵐크는 소련군에게 붙잡혀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도 만났다. 뵐크는 전쟁 전 살았던 집에 되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맨 오브 스틸’ 슈퍼맨은 망토 두른 예수?…마케팅 논란

    ‘맨 오브 스틸’ 슈퍼맨은 망토 두른 예수?…마케팅 논란

    최근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맨 오브 스틸’의 영화 제작사가 미국 현지의 목사들을 상대로 ‘타깃 마케팅’에 나선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고있다. 특히 제작사 측은 목사들을 상대로 무료 영화 시사회를 열고 슈퍼맨을 예수와 비교해 종교적인 주제로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슈퍼맨과 예수를 비교하는 논쟁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다른 세계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온 슈퍼맨이 성경 속에 등장하는 예수의 일대기와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 특히 이번 슈퍼맨 시리즈 ‘맨 오브 스틸’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하나님에 비유되는 친아버지 조엘(러셀 크로우 분)은 영화 속에서 “이 아이가 지구에 가면 아마 신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슈퍼맨을 넘기라는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 분)의 요구에 슈퍼맨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투항한다. 이때 슈퍼맨의 나이는 33세. 이 역시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처형된 나이인 33세와 같으며 슈퍼맨을 조드 장군에게 넘기는 지구인의 모습은 성경 속 유다와 유사하다.   이외에도 슈퍼맨이 신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장면에는 큰 예수 그림이 배경으로 나오며 적 우주선으로 점프하는 장면에서는 슈퍼맨의 팔 근육에 십자가 모양이 비친다.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 볼티모어의 목사 퀸틴 스코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정말 영화 관계자 말대로 예수님과 슈퍼맨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면서 “영화를 설교의 주제로 사용할 수 있게 돼 정말 흥분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은 “종교를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해 돈을 버는 행위”라며 비판에 나서기도 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사설] 서울 프로세스, 한·중 ‘탈북자 공조’로 출발하라

    탈북 청소년 9명 강제 북송(北送) 사태를 계기로 탈북자들의 신변 안전과 인권 보호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당장 북송된 청소년들이 처형되는 상황을 막아야 함은 물론 지금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떠돌고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최소한 신변 안전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탈북 청소년들의 안전 보장을 북한 당국에 촉구하고 중국 등에 대해서도 추방조치 금지를 요구했는가 하면, 수전 솔티 미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7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할 것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요청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극심한 굶주림 등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북한 주민들은 국제법상 최소한 정치적 난민에 버금가는 ‘준(準)난민’으로 간주해 강제 송환을 금하고 필요한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러나 이런 노력만으로 탈북자 문제가 풀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라오스 정부가 탈북자 단속과 강제 추방 조치를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는 등 현실은 국제사회의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양상이다. 특히 수만명의 탈북자들이 오늘도 숨어 지내고 있는 중국 역시 대규모 탈북과 이에 따른 사회 혼란, 대북 관계 악화 등을 우려해 탈북자 단속의 고삐를 늦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라오스의 탈북 루트 차단 움직임에 우리 외교 당국이 바빠졌지만 이런 미봉책을 넘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탈북자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달 하순에 있을 한·중 정상회담이 좋은 기회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서울 프로세스)을 중국에 이해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공조의 범주에 환경·재난 등 범지구적 현안뿐 아니라 인도적 차원의 인권 보호 노력이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한·중 양국은 그제 정승조 합참의장과 팡펑후이(房峰輝) 중국군 총참모장의 군사회담을 통해 군사 분야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강화하기로 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우호 협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으로 하여금 난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도적 체류자 지위’를 탈북자들에게 부여해 마구잡이식으로 잡아 북으로 넘기는 일이 더는 없도록 외교 당국은 좀 더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 ‘스칼렛 핌퍼넬’ 16년만에 공연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 피에르가 정권을 장악한 18세기 말, 1년 동안 1만명 이상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공포정치가 펼쳐진다. 영국 귀족 신분인 퍼시는 친구들과 비밀결사대 ‘더 리그’를 결성, 낮에는 귀족으로 밤에는 혁명가 ‘스칼렛 핌퍼넬’로 활약한다. 퍼시는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 마그리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혁명의 여파로 마그리트의 가족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퍼시는 마그리트를 프랑스의 첩자로 오해한다. 한편 더 리그와 핌퍼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로베스 피에르의 수하 쇼블랭은 핌퍼넬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비면서 퍼시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영국 작가 바로네스 오르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이 1997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16년 만에 국내 무대에 오른다. 음악은 ‘지킬 앤 하이드’의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했다. 18인조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와 18세기 프랑스를 옮겨놓은 듯한 화려한 의상과 무대가 볼거리다. 퍼시 역에 박건형·박광현·한지상, 마그리트 역에 김선영과 바다가 열연한다. 7월 6일~9월 8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5만~13만원. (02)1577-3363.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열린세상] 또 꿈틀대는 ‘대동아전쟁’/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언론정보대학원장

    [열린세상] 또 꿈틀대는 ‘대동아전쟁’/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언론정보대학원장

    착잡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람의 복부를 사무라이 칼로 가르고 파헤쳐 내장을 드러나게 하는 천하의 무뢰배들. 난도질은 부녀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살육과 폭력의 조종으로 조선을 울린 흉포한 무뢰한들. 매화꽃을 찾아 떠난 길에 들른 목포의 ‘근대역사관’에서 목격한 일본군의 만행이었다. 식민지의 피와 땀을 착취하려고 1920년 6월에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목포지점 건물에 전시된 일제침략의 실증적 유적·역사 교육이 뒷전으로 밀려난 시대를 살면서 부끄럽게도 오랜만에 우리 역사를 자각했다. ‘임산부와 노약자 관람 주의’라는 권고문에 예상은 했다. 사람을 포박하여 땅바닥에 앉혀 놓았는데, 방금 잘린 목이 붙어 있던 부위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구쳤고, 강제동원됐을 사람들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항일조직 간부들은 무릎을 꿇리고 뒤에서 머리를 쏘아 사살했다. 짐승만도 못할 짓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가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공포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우는 아기와 동생을 안간힘으로 안고 있는 어린 형. 그 시대와 사람들의 지옥 고통을 알려주는 자료들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이 처참했다.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사진으로 찍어 식민지 무단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인면수심의 범죄자들. 일제 침략자들의 후예는 오늘도 침탈을 대한민국 근대화로 견강부회한다. 동양척식의 서양식 건물은 앞선 세계건축양식을 조선에 도입했다는 식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자원을 수탈하려고 만든 신작로와 철도를 교통의 근대화라고 억지를 쓴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담은 사진촬영기는 문명사진술로 강변된다. 이러니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민족과 문명에 대한 편견을 교묘하게 위장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더욱이 일본 총리 아베는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망언과 망동에 앞장서고 있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참배하는 것은 당연하고 총리의 책무다”(2005년 4월),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언이나 뒷받침하는 것은 없다”(2007년 3월), 2012년 12월 26일 총리 취임 이후에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과하는 내용이 포함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 않겠다”(2013년 4월 22일),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2013년 4월 23일). 이쯤 되면 아베의 심신은 조선의 무고한 양민의 배를 가르고, 목을 자르고, 머리에 총을 쏘고, 어린 자식 앞에서 부모를 죽이던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하수인들과 다르지 않다. 지난 5월 12일 아베는 731이라는 번호가 붙은 자위대의 항공훈련기 조종석에 올라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731 세균부대’는 수많은 한국·중국·몽골·러시아인들을 마루타(통나무)로 취급하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함께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행위이다. 정치적 인기를 위해서든, 영혼 없는 집단최면의 발로에서든 망언을 제조하고 있는 아베와 일본 정치인들은 제2의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고 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사죄한 브란트 전 독일 총리 같은 정치인이 일본 풍토에서 나오기는 불가능한가.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68년이 지나서도 93세의 나치 용의자를 찾아 기소하는 독일 국민의 반성을 일본 사회에서 기대할 수 없다면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자명하다. 역사에 대한 건망증을 경계하며 자기반성을 상실한 일본과는 전혀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현재와 미래에 반영하는 사회, 동시에 지구촌 세계의 일원으로서 보편적 가치와 양식을 공유하는 국가로 가야 한다. 이는 자신의 야만을 부정하고 정당화하는 역사 왜곡은 물론이고 반인륜적·반문명적 저질행태를 지속하는 일본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이기도 할 것이다.
  • [씨줄날줄] 밀양 송전탑/박현갑 논설위원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죽은 남편의 고향에서 피아노 교습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신애(전도연)는 외아들을 유괴로 잃고 눈물로 지새운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범인도 용서하려고 꽃을 들고 교도소를 찾는다. 하지만 살인마는 이미 하나님한테 용서를 받았다며 웃는다. 그녀는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느냐.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느냐”고 외친다. 신이 가해자와 한패라는 배신감에 절규하는 그녀를 종찬(송강호)은 말없이 지지하며 위로한다. 영화 ‘밀양’의 줄거리다. 2007년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밀양의 여인’ 전도연은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밀양을 세계에 알렸다. 밀양은 연극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올해로 13회째가 되는 밀양 여름공연예술축제는 국내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축제로 자리잡았다. 남편의 외도, 자식의 죽음까지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의 삶을 다룬 연극 ‘어머니’를 연기한 연극인 손숙도 밀양 여인이다. 밀양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랑이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이 어느 날 밤, 달 구경을 나갔다가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자에게 저항하다 흉기에 찔려 죽는다. 아버지는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다 달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자리를 물러난다. 그런데 이후 밀양에서는 신임 기관장이 부임 첫날 밤이면 의문의 시체로 발견돼 관료들이 임관을 기피하게 된다. 하지만 이상사(李上舍)라는 기관장은 부임 첫날 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사연을 듣고 범인을 찾아내 처형하고 아랑의 주검을 수습해 위로한다. 이후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여인의 지조와 정절의 표상인 아랑낭자 설화의 줄거리다. 정선·진도 아리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히는 밀양아리랑도 이 아랑설화에서 비롯됐다. ‘빽빽할 밀(密), 볕 양(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밀양은 여름이면 전국 최고기온을 기록하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5월 밀양은 이미 뜨거운 ‘전쟁터’다. 송전탑을 세우려는 한전과 이를 저지하려는 주민들의 갈등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다. 마을 입구와 논, 밭, 뒷산을 가로지를 송전탑 공사를 저지하려고 할머니들은 상의를 벗어젖혔다. 알몸 시위다. 이를 막아야 할 권력의 방패들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도, 손주뻘인 경찰도 모두 피해자다. 아랑의 원혼을 이상사가 풀어주듯, 종찬이 신애를 묵묵히 바라보며 구원해 주듯, 지금 밀양에는 소통이라는 은밀한 햇살이 필요하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3만명 학살’ 아르헨 독재자 비델라 종신형 받고 복역 중 초라한 죽음

    3만명의 반체제 세력을 살해한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의 원흉이자 군사 독재자인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17일(현지시간) 사망했다. 87세. 비델라는 인권탄압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인근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고령으로 숨졌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비델라는 군 총사령관이던 1976년 3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1974~1976년) 대통령을 몰아낸 뒤 의회·법원·정당 등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는 아르헨티나 지식인은 물론 평범한 시민들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여 물과 전기로 고문하고 산 사람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려 살해하는 등 각종 악행을 일삼았다.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3만여명이 살해당했으며, 사망자 대부분은 600여곳의 비밀수용소에서 처형된 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델라는 남미 지역 군사정권들이 자행한 정치적 탄압 활동인 ‘콘도르 작전’에도 참여했다. 이 작전은 1975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6개국 군사정권의 첩보기관이 자행했다. 이들은 좌익 게릴라 세력 척결을 주장하며 사회운동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납치, 고문, 살해 행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10만여명이 사망하고 40만여명이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델라는 군부 독재 말기 ‘사면법’이라는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고 정권을 이양했으나 1986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5년 만에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2003년 집권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이 이를 취소하고 처벌에 나섰고, 2007년 아르헨티나 사법부가 그의 사면을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다시 재판을 받았다. 결국 2010년 12월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법원은 비델라에게 납치·구금·살인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지난해에는 좌파 정치범들의 아이들을 빼내 군인 가족에게 불법 입양시킨 ‘유아 절도’ 혐의로 50년형을 선고 받았다. 한편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비델라 독재 정권의 더러운 전쟁 당시 진보적인 해방신학운동에 관여한 사제들이 군부에 체포되는 과정에 소극적으로 임해 “군사 정권을 방조했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참회하라!…이 땅의 불교와 친일의 야합

    전북 군산엔 동국사라는 독특한 절집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백수십 개의 사찰 중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일본 최대의 불교 종파인 조동종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해 역시 이 땅의 수탈과 황국신민화에 앞장섰던 절이다. 지금은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인 동국사 스님과 신도들이 “뼈 아픈 과거사도 엄연한 역사”라며 일제강점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애쓰고 있고 이런 동국사 측의 입장에 동조해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일본인 단체까지 생겨났다. ‘조선 침략 참회기’(이치노헤 쇼코 지음, 장옥희 옮김, 동국대출판부 펴냄)는 바로 그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의 대표인 일본 아오모리현 조동종 운쇼사(雲祥寺) 주지가 지난해 일본에서 펴낸 책의 한국어판이다. ‘일본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나’라는 부제 그대로 이 땅에서 불교, 특히 조동종이 일제와 어떻게 결부해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를 직접 발로 뛰어 발굴한 자료들을 토대로 절절하게 엮은 참회록이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 불교 역시 구한말 외세 강점기 다른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포교의 명분을 내걸고 일제의 수탈과 황국신민화의 적극적인 앞잡이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895년 5월 조동종 종무국이 간행한 ‘조동종무국 보달전서’는 “청일 교전에서 황은에 보답하고 교화를 선포하여 종문의 군사에 대한 충성을 선양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러일전쟁기인 1904년 2월에도 일제의 선전 조칙을 받은 조동종은 즉각 종령을 내려 ‘천황폐하의 옥체강녕·성수무강과 군인의 신체건전·무운장구를 기도할 것’과 ‘충용의 정신으로 군인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설파할 것’ 등을 명령했다. 특히 책을 통해 처음 밝혀지는 몇몇 사건들은 충격적이다. 저자는 명성황후 살해에도 조동종이 깊숙이 관여했으며 살해만행에 참여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라는 조동종 승려는 후에 살해사건의 보상으로 조선 조동종 총괄 자리인 조선포교관리에 취임했다고 밝히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이 아버지의 처형 직후 중국 상하이에 은신해 있던 중 조동종 압력을 못 이겨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의 죄를 눈물로 사죄한 사실도 추적했다. 이것 말고도 경복궁 위패당인 준원전을 옮겨 세운 박문사의 요사채가 80년이 지난 지금 신라호텔 영빈관 파티장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도 고발하면서 가슴 아파한다. 1만 8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세계 최강 미국·일본 관계사 전직 日외교관이 파헤치다

    한 나라의 운명은 친소 관계를 맺는 나라의 정책과 입장에 영향받기 마련이다. 특히 그 관련국이 상대하기 어려울 만큼 강국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동맹국이라는 허울 좋은 관계의 내면도 따져보면 종속과 추종이 압도적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세계사는 관계국 간의 지배와 종속이 부른 흥망성쇠로 점철된다.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양기호 옮김, 메디치 펴냄)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실감 나게 파헤친 책이다. 일본의 2차대전 패망기인 1945년부터 2012년까지의 미·일 관계사를 역대 수상·정권별 기록과 증언으로 솔직하게 고발했다. 저자는 영국, 구 소련, 이라크, 캐나다, 우즈베키스탄, 이란 대사를 거치며 36년간 일본 외무성에서 근무한 외교관 출신. 그런 그가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패전 이후 미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과 처지는 변함없는 추종’이라는 것이다. 일본 내에 미국의 견제와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주파와 친미·종미파 간의 갈등과 전복이 있어 왔지만 ‘미국은 갑, 일본은 을’인 관계의 지속은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일본의 미국 추종사는 1945년 연합국 총사령부의 일본통치가 막 시작될 무렵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고 주장했던 요시다 시게루 외상의 노선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때 이후 그 추종 노선을 벗어나려는 이른바 대미 자주파 수상과 정권이 어김없이 거세됐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책에 줄줄이 등장한다. 패전처리비 삭감을 주장하다 추방된 이시바시 단잔, 미군 완전철수론을 펴다가 의문의 급사를 당한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추진하다 공직서 추방된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 미군의 유사시 주둔론을 주장해 정계에서 강제 은퇴당한 아시다 히토시…. 이들의 희생과 미국의 배후 조종 사료와 고증이 예사롭지 않다. 일본 말고도 이른바 미국의 ‘분할 통치’에 걸림돌이었던 각국 지도자들의 실각과 죽음도 만만치 않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처형은 물론, 미국에 적극 협조했던 이란 팔레비 국왕의 축출과 패망한 월남 응오딘지엠 대통령의 살해도 모두 미국이 개입한 것으로 저자는 단정한다. 지미 카터와의 정상회담 때 카터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안보론을 펴고, 미국의 청와대 도청기 설치에 맞서 미국대사관을 도청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런 연장선에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평화와 질서보다는 일본 국익에 철저해 보이는 저자의 지론은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한·미 관계는 미·일 관계보다 훨씬 더 긴박한 순간이 많았다. 그만큼 미국으로서는 한국 문제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고, 미국이 한국 내정에 개입한 사례는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서문 속 적시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1만 8000원.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DB를 열다] 1963년 사형당한 최영오 일병 사건

    [DB를 열다] 1963년 사형당한 최영오 일병 사건

    군부대 총기사고는 근래에도 심심찮게 발생하지만 1960년대 최영오 일병 사건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2년 7월 8일 오전 8시, 모 부대에서 최 일병이 고참 두 명에게 M1 소총을 발사해 살해했다. 최 일병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천문기상학과에 다니다 입대했다. 그는 애인이 보내온 연서 12통을 같은 내무반의 선임병 2명이 먼저 뜯어보고 조롱하자 대들고 사과를 요구하다가 구타를 당했다. 분을 참지 못한 최 일병이 선임병들을 총으로 살해한 것이다. 군사법원은 최 일병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최 일병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백철, 박화성, 최정희씨 등 문인들과 서울대 재학생들이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3년 3월 18일 오후 2시 40분, 서울 수색의 형장에서 최 일병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됐다. 처형 직전 그는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사체인수통지서를 받아든 어머니도 아들의 뒤를 따른 것이다. 홀몸으로 행상을 하며 아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당시 61세)는 그날 밤 빨래를 하러 다니던 서울 마포 근처 한강의 절벽으로 가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사진은 사형당한 다음 날 서울 아현동 최 일병 집에 이웃 주민들이 모여 애통해하는 모습이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지방시대] 사통팔달의 편리함/서정욱 배재대 심리철학과 교수

    [지방시대] 사통팔달의 편리함/서정욱 배재대 심리철학과 교수

    미국 드라마 중에 스파르타쿠스가 요즘 인기가 있다. 로마제국이 생기기 전 로마공화정 시대가 있었다. 로마공화정 시대 제1차 삼두정치를 이끈 사람이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에게 이들은 익숙한 이름이다. 이들의 시대가 끝나고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그중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삼두정치를 끝내고 아우구스투스황제가 되어 로마제국을 건설하였다.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소설, 영화, 혹은 드라마는 지금까지 많이 나왔다. 철학자 마르크스는 그를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등, 그에 대한 평도 다양하다. 제1차 삼두정치가의 세 장군이 스파르타쿠스를 제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나선 것만 보아도 그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준다. 결국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는 이들에 의해서 진압되어 죽거나 포로로 잡힌다. 역사가에 의하면 6000여명의 무리들이 십자가형을 받고 로마로 들어가는 길에 공개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십자가형을 받은 거리가 바로 ‘아피아 가도’(Via Appia)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바로 이 아피아 가도에서 생겨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 사람들은 전쟁을 위한 전진과 후퇴 혹은 전투의 재정비를 위해 필요한 것이 거리라는 것을 알았다. 수도인 로마에서 로마공화정 밖의 나라까지 쉽게 물자를 이동하고 공급하기 위한 거리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피아 가도다. 그리고 이 아피아 가도를 통해 이탈리아는 로마공화정에서 로마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공화정 시절에 이미 거리의 중요성을 안 이탈리아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어떤가. 기차가 처음 놓아질 때, 우리의 선조들은 반대를 하였다. 철 덩어리가 감히 산과 들을 뚫고 지나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주’가 들어가는 도시는 모두 기차가 통과하지 못했다. 그 덕을 가장 많이 본 도시가 있다면 두말 할 것 없이 대전이다. 이때부터 대전은 우리나라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대전은 기차뿐 아니라 고속도로와 외곽순환도로가 완성되었으며, 우리나라 동서남북을 잇는 모든 고속도로는 대전을 통과하고 앞으로도 통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KTX가 나온 이후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1일 생활권은 서울을 중심으로 기업인이나 사업가들의 하루 출장 권역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 5일제가 모든 노동자들의 의무화로 치닫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여행과 레저가 활성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 최고 수단은 도로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는 자동차가 자리할 것이다. 자동차로 1일 생활권이 가능한 도시 하면 전국에서 대전뿐이다. 이탈리아는 아피아 가도를 통해 로마제국을 건설했다. 대전은 다른 도시들이 기피할 때 도로의 중요성일 일찍 깨닫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통팔달의 도로망 마련을 통해 진정한 1일 생활권의 기틀을 오래전에 마련했다. 사통팔달이 주는 혜택은 대전에 사는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 대한민국 진보의 씨앗 뿌린 조봉암의 삶

    1959년 7월 31일. ‘사법 살인’이라 불리는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시신을 받으러 갔더니 형무소 측은 각서를 쓰라고 했다. “인수 하루 만에 매장하고 조문받지 않고 묘비를 세우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장례를 그리 치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하자 형무소 측 답은 이랬다. “국법에 따라 처형된 형사자이므로 조선총독부령 제120호를 적용한다.” 이 법령은 혹시 독립 만세 시위라도 벌어질까 봐 “일제가 순국한 독립투사의 공개 장례를 금지하고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게 했던 규정”이었다. 식민지의 법령을 적용하다니, 한국의 나라 꼴이 우습다. ‘조봉암 평전’(이원규 지음, 한길사 펴냄)은 ‘건국대통령 이승만’과 ‘건국과 부국의 역사’ 깃발이 휘날리는 시대에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승만과 처음부터 악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봉암의 언변에 이승만은 탄복하기도 했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시키기도 했다.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이후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받는 토지 개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승만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국회부의장이었던 조봉암은 국회에 남아 나라의 서류들부터 피난시키는 데 열중하느라 가족을 챙기지 못해 부인 김조이 여사가 납북됐다. 반면 북진통일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독려 방송을 틀어 놓고 수원으로 몰래 도주했다. 거기다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의 악재가 연이어 터지자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그 유명한 사사오입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조봉암은 이때 발췌개헌안에 찬성했다. 대체 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판국에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계속된다면 원조를 끊고 유엔군이 신탁통치하겠다고 미국이 통보해서다. 어떻게 얻은 독립이던가. 권력에 눈먼 이승만은 양보할 리 없으니 자기가 물러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결심한 것이 독자 정당 결성과 대선 출마였다. 이승만은 엄청난 부정 선거를 동원해 당선됐다. 당선된 이승만은 감히 ‘국부’의 코털을 건드린 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저자는 충실한 문헌 조사와 현지 답사, 유족 및 친인척, 생존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조봉암을 입체적으로 복원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로 기울었던 민족주의자들의 초상, 국내파 공산주의자 박헌영과의 협력과 갈등 관계, 공산주의와 결별하는 과정, 정치 행보에 발목 잡히기도 했던 여자 문제, 일제 말 국방성금을 둘러싼 친일 행위 논란의 진실, 토지 개혁을 입안하는 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2만 2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히틀러 암살 ‘발키리’ 작전 최후 생존자 사망

    1944년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암살 작전에 참여했던 마지막 생존자 에발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AP통신에 따르면 그의 아내 군둘라 폰 클라이스트는 남편이 지난 8일(현지시간) 뮌헨의 자택에서 숨졌다고 12일 전했다. 1922년 7월 폴란드에서 태어난 폰 클라이스트는 나치에 반대하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40년 독일군에 입대했고 1944년 동부전선에서 부상으로 요양하던 중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만나 암살 계획을 제안받았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 앞에서 새 군복을 소개하는 모델로 뽑힌 폰 클라이스트에게 자살 폭탄 조끼를 입고 있다가 히틀러가 다가올 때 터트리는 것을 제시했으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폰 스타우펜베르크는 그를 다시 찾아와 ‘7월 20일 작전’으로 알려진 암살 계획에 참여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폰 클라이스트의 아버지 등 수십명이 체포돼 처형됐다. 히틀러 암살 계획 중 가장 유명한 이 사건은 톰 크루즈가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역을 맡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DB를 열다] 1979년 초봄 창경원 동물원을 찾은 인파

    [DB를 열다] 1979년 초봄 창경원 동물원을 찾은 인파

    1979년 3월 4일 옛 창경원 동물원을 찾은 사람들이 코끼리를 구경하고 있다. 겨울 추위가 이제 막 물러간, 벚꽃도 피지 않은 쌀쌀한 봄날씨에도 성급한 상춘객들이 나들이를 나왔다. 창경궁은 성종이 즉위 15년(1484)에, 당시 생존했던 선왕 세조·덕종·예종의 비(妃)인 정희·소혜·안순왕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탄 뒤 다시 지어져 조선 후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여러 왕이 창경궁에서 태어났으며 취선당에서 주로 살았던 장희빈이 처형을 당한 곳도 창경궁이고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다음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여드레 동안이나 두어 죽게 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일제는 전각을 헐어버리고 진귀한 동물과 식물들을 방방곡곡에서 채집해서 옮겨 놓고, 일본에서 벚꽃 나무 수천 그루를 날라다 심었다. 궁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원(苑)은 사냥이나 놀이를 즐기는 곳이니 궁궐을 유원지로 격하시켜버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이라며 창경원의 문을 연 것은 1909년 11월 1일이었다. 창경원은 광복 후에도 회전목마와 팽이차, 케이블카, 코끼리열차 등 놀이 시설을 갖추고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나들이 장소로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철이 되면 수십만명씩 밀려드는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봄날 휴일이면 아빠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들과 연인들의 발길로 종로 4가부터 혜화동, 원남동 일대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들이 인파가 몰리는 휴일이면 가족의 손을 놓친 미아가 보통 100명은 발생했다. 종로 화신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보고 전차로 이동해 창경원의 동물 구경을 하는 것은 시골 사람들의 관광 코스가 되기도 했다. 창경궁은 1980년대 들어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1984년부터 1986년 8월까지 동·식물원과 일본식 건물이 철거되고 문정전 등 전각이 복원되었다. 벚나무도 모두 뽑혔고 소나무나 단풍나무가 그 자리에 심어졌다. 800여 마리의 동물들은 1984년 5월 개장한 서울대공원으로 삶터를 옮겨 갔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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