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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젠 사람입국이다] 12. 캐나다의 평생학습

    [이젠 사람입국이다] 12. 캐나다의 평생학습

    |오타와·에드먼턴(캐나다) 전경하 특파원|캐나다는 10개의 주와 3개의 준(準)주로 이뤄진 연방제 국가다. 교육에 관한 정책결정 권한은 각 주가 갖지만 연방정부가 큰 틀을 정한다. 각 주정부는 교육장관협의회(CMEC·The Council of Ministers of Education,Canada)에 참여, 교육정책을 공유한다. 연방정부에서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인력기술개발부(HRSD)는 토의 주제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에만 참여한다. 대신 HRSD는 322개의 지방사무소를 통해 지방과의 협조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평생학습이 잘돼야 세금도 늘어 HRSD는 평생학습이 국가경쟁력 차원에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 수준이 높은 국민일수록 정부 지원금은 적은 반면 이들이 내는 세금은 많다. 또 범죄 발생률도 낮고 빈곤이 세습되는 것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로버트 사우더 HRSD 학습·전략정책 담당국 부국장은 “공부를 해도 직장을 얻지 못한 경우가 있지만 이는 노동력에 대한 투자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캐나다 정부의 평생학습 초점은 크게 세가지다.▲현재 인력을 기술변화에 맞춰 생산적으로 만들고 ▲노령화된 노동력을 재교육해 일하도록 하며 ▲이민자들의 언어(영어)사용 능력 향상을 꾀하는 것이다. 캐나다도 저출산율(1.6명) 영향으로 노동력의 고령화가 진행중이다. 이민에 적극적이다 보니 이민자들의 영어능력 향상이 산업안전과 사회통합에 필수 요소가 됐다. 이를 거울삼아 동남아 등으로부터 인력을 받아들이는 한국 정부가 준비해야 할 부분이다. ●중앙은 수단, 지방은 내용 제공 연방정부는 평생학습의 접근 용이성에 중점을 둔다. 지난 96년 온라인학습을 지원하는 지역사회 학습네트워크를 설립, 이를 통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데 초점을 뒀다. 연방정부가 지역사회 학습네트워크 자금의 50%를 지원하며 나머지는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각 주의 대학이나 산업체와의 협력관계를 구축시키기 위해서다. 또 연방정부는 PLAR(Prior Learning Assessment and Recognition) 프로그램을 운영, 구직자들의 시간을 절약해준다.PLAR란 졸업장이나 학위가 아니라 일하면서 얻은 노동자의 능력을 정부가 나서 인증해주는 제도다. 이를 통해 특정 능력을 갖고 있는 인력 풀(pool)이 조직되는 장점이 있다. 주와 지방정부에서는 평생학습을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을 발굴·조직한다. 각 주의 평생학습은 지역별로 조직된 지역성인학습협회가 주도한다. 주로 대학, 특히 2년제 대학(커뮤니티 칼리지)이 평생학습의 중심이 된다. 지역성인학습협회는 이민자들의 언어 지도를 위한 주민들의 자원봉사활동도 조직한다. ●대학의 중심이 되는 평생학습 캐나다에서 평생학습이 가장 잘 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앨버타주의 경우 지역내 2년제·4년제 대학, 직업훈련기관 등이 갖고 있는 다양한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과목별, 기간별로 분류해 놓은 안내책자를 발간하고 있다. 각 대학에서의 주차·탁아 서비스 가능 여부도 포함돼 있다. 대학들도 평생학습으로 출산율 저하에 따른 학생 부족을 메우고 있다. 지식기반 경제에서 새로운 일자리는 보다 높은 교육수준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25세 이상 인구와 이들 가운데 시간제로 대학에 등록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대학들은 보고 있다. 90여년이 넘게 평생학습을 위한 단과대학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앨버타대학은 프로그램 다양화로 수요 변화에 대처하고 있다. 프로그램마다 고용주, 학생, 공공부문 지도자 등 다양한 인사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있기 때문이다. 응용과학, 교양과목, 경영, 공공분야 등 7개 분야에서 200여개에 육박하는 프로그램이 학기마다 열리고 있다. ●대학, 강의를 팔아라 앨버타대 평생학습단과대학이 수업료와 관련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연간 600만캐나다달러(50억원 정도)나 된다. 이런 수익은 앨버타대의 끊임없는 혁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평생학습단과대학 마케팅담당자인 아누 바르사바는 “대학이 앉아서 학생을 받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면서 “강의를 상업적으로 팔 수 있도록 만드는 기술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로 앨버타대학은 특정 수요 계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한다. 에드먼턴시 경찰국의 고위직 퇴직자가 90년대 후반들어 늘어나자 업무 연계성을 강화할 필요성이 생겼다. 앨버타대는 이에 부응,5개 과목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프로그램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2003년부터 경사 이상으로 승진을 할 경우 의무적으로 들어야하는 프로그램이 됐다. 또 앨버타대는 60년대부터 앨버타 주정부와 계약해 지방공무원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인터넷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교과과정 전체를 온라인(www.govsource.net)으로 배울 수 있게 되자 캐나다 전역과 전 세계의 학생을 받고 있다. 올해에는 멕시코와 아프리카의 공무원들도 참여하고 있다. ■ 모범사례 에드먼턴개발공사 |에드먼턴(캐나다 앨버타주) 전경하 특파원|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시는 지난 1993년 에드먼턴개발공사(EEDC)를 설립, 시의 경제개발과 관광기능을 전담시켰다. 자금은 에드먼턴시가 100% 지원하고 시의회가 운영을 감독한다. 캐나다에서 경제개발과 관광기능을 별도의 공사를 설립해 전담시킨 예는 에드먼턴이 유일하다. 에드먼턴은 캐나다에서 ‘현명한(smart)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주민들의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다. EEDC의 홍보를 맡고 있는 짐 루돌프는 “기업가들이 시청과 직접 상대하다 보면 관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느끼는데, 이를 없애기 위해 공사를 설립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공사는 관광업무를 전담하게 되면서 그동안 독립적으로 운영됐던 컨벤션센터도 공사 소속으로 뒀다. 에드먼턴에 국제회의를 유치, 참가자들이 이곳에 와서 ‘돈을 쓰게’하는 것이 EEDC의 기능 중 하나다. EEDC안에는 13개 산업집적군 조정위원회가 있다. 산업성격에 따라 위원수가 다르지만 75% 이상을 산업계에서 맡는다. 이 위원회는 당면 과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도록 돕는다. 필요한 자금은 연방·주정부에서 받는데, 규모와 구성비는 산업별, 사업별로 다르다. 최근 역점을 두고 추진중인 사업은 농산물 운송체계 정비다.EEDC가 집합 장소를 결정하고 농민들이 이곳에 상품을 가져오면 목적지까지 일괄배송되도록 처리한다. 루돌프는 “자영업자들의 비용절감은 투자와 고용을 이끌어내는 측면이 있다.”고 효과를 설명했다. 에드먼턴에 투자를 유치하는 것도 EEDC의 몫이다.EEDC는 최근 세계 1위 PC회사인 델컴퓨터의 소비자센터 유치에 성공했다. 오는 7월 센터가 세워지면 500여명의 고용이 창출될 것이라고 EEDC는 밝혔다. 델컴퓨터가 에드먼턴에 투자를 유치한 배경에는 에드먼턴의 교육수준이 큰 몫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계 회사 게코도 북미지역에서는 가장 큰 재활용 공장을 에드먼턴에 세울 예정이다. 투자자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기업가를 연결시키는 중개기능도 EEDC의 역할이다. 부유한 퇴직자들을 등록, 그룹을 만든 뒤 이들 앞에서 혁신적인 생각이나 기술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설명회를 갖도록 한다. 설명회에 앞서 젊은이들의 발표 및 의사소통 기술 향상 교육을 진행한다. ■ 활발한 자영업 육성 |오타와(캐나다) 전경하 특파원|캐나다 연방정부의 고용보험은 기술개발, 자영업 지원, 고용창출을 위한 협력관계 구축 및 임금 보조 등 네가지로 나눠진다. 주정부마다 개별 항목에 대한 지원방법이나 비중은 다르지만 기술개발에 많은 자금이 집행되는 편이다. 투입자금 대비 효율성에서는 자영업 지원이 상대적으로 효과가 크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성공률이 80%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캐나다 인력기술개발부에서 고용보험을 총괄하는 헤더 자름 인력개발프로그램·서비스국 부국장은 “창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른 경우보다 동기 부여가 잘 돼 있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름 부국장은 자영업은 다른 고용보험 혜택에 비해 고용창출 효과가 있어 적극 장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용실 가내수공업 등 지원대상에 대한 특별한 제한은 없다.17세 이상이며 고용보험대상으로 실업자가 됐으나 자신의 사업을 하려는 사실만 증명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자금지원은 최대 52주(장애인은 78주)까지다. 또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각종 조정단체로부터 사업영위에 필요한 기술적·경영적 조언을 최대 3년까지 받을 수 있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그룹 ④-무역·중화학·서비스 CEO

    “삼성물산의 역사는 삼성그룹의 역사입니다.”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인 삼성물산의 지난해 매출은 9조 6963억원으로 주력인 삼성전자 57조 6324억원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를 비롯해 삼성석유화학, 삼성정밀화학, 삼성카드, 삼성SDS, 제일기획 등 숱한 관계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주식 1.38%를 보유하고 있고 등기임원(회장)으로 직접 챙기고 있는 데서도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회장이 등기임원으로 활동하는 삼성 계열사는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물산, 제일모직, 호텔신라, 삼성에버랜드뿐이다. 국내 종합상사 1호인 삼성물산은 84년 3위,1998∼2000년,2002년에 2위를 기록했던 것을 제외하면 종합상사의 매출기준이 달라진 2003년까지 줄곧 매출 1위 기업 자리를 지켜왔다. ●‘그룹의 역사’ 삼성물산과 인재들 고 이병철 회장이 28세였던 1938년 3월1일 대구시 서문시장 인근 수동(현 인교동)에서 250여평 규모로 출발한 삼성상회가 삼성물산의 전신이다. 이 회장은 이에앞서 경남 마산에서 정미소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부동산 투자’에서 다 날리고 자본금 3만원으로 상회를 시작했다. 삼성(三星)의 삼은 우리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로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첫 사업은 대구일대에서 생산되는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이었다.‘라면부터 미사일까지’ 취급한다는 종합상사의 70년전 버전인 셈이다. 삼성물산은 삼성의 대표기업답게 거쳐간 인물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초창기 삼성상회의 지배인으로 영입된 이순근씨는 이병철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그는 정계에 투신했다 월북, 농림상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거의 모든 경영을 이순근씨에게 맡겼는데 오늘날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찌감치 시험한 것이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지 1년 만인 1948년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 2층건물에 삼성물산공사로 간판을 걸 당시에는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전무를, 김생기씨가 상무를 맡았다.1949년 11월 마른오징어 3만근을 배에 싣고 홍콩으로 떠난 조홍제씨가 교포무역상과 챤넬양행으로부터 오징어를 담보로 각각 면사 50근을 외상매입한 것이 국내 최초의 D/P(Document against Payment Base) 거래로 꼽힌다. 조홍제 회장은 62년 효성물산, 한국타이어를 갖고 삼성을 떠난다. 김생기씨도 삼성에서 독립, 영진물산·영진식품·혜성개발 등을 일궈냈다. 삼성물산 창립멤버로 60∼61년 사장을 역임한 고 허정구씨도 눈에 띈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사돈인 고 허만정씨의 장남인 허씨는 이후 삼양통상을 설립했다. 허남각 삼양통상 회장, 허동수 GS칼텍스정유 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아버지다. 70년에 대표이사를 지낸 정상희 사장은 3·5대 국회의원과 삼호무역 회장을 역임했고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남편인 정재은 명예회장의 아버지다. 이병철 회장과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을 이어준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86년 이병철 회장의 요청으로 삼성물산 회장으로 영입됐다. 홍 회장의 공백을 메우며 이건희 회장 체제가 자리를 잡은 91년까지 물산 회장과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이필곤 전 부회장도 삼성물산 대표이사를 두차례(85∼93년,95∼97년)나 지낸 대표적인 ‘물산맨’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진두지휘하다 사업진출 차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국으로 물러난 뒤 삼성을 떠났다. 서울시 부시장을 거쳐 현재 알티전자 회장과 삼성 CEO 출신들의 모임인 ‘성대회’ 회장을 맡고 있다.93∼95년 사장을 역임한 신세길씨는 현재 서울반도체 회장이다. 현명관 부회장은 아직도 물산의 비상근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 삼성물산은 2001∼2004년 배종렬 사장을 끝으로 공동대표체제가 굳혀졌다. 건설부문의 이상대(58) 사장은 충남 서천생으로 경복고와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73년 제일합섬으로 입사한 뒤 대부분 삼성건설에서 일했다. 건설이 삼성물산에 합병되면서 97년 삼성물산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했고 2000년부터 주택부문 대표를 맡았다. 이 사장의 경복고 2년 선배인 상사부문 정우택(60) 사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을 거쳐 77년 삼성물산에 입사했다. 휴스턴 지점장, 카자흐스탄 법인장 등 줄곧 상사부문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병철의 세번째 회사 제일모직 1954년 9월 설립된 제일모직은 삼성상회, 제일제당(53년)에 이은 삼성의 세번째 회사다. 긴 역사만큼이나 숱한 인재들을 배출했는데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구조본 차장,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총괄 사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사장, 안복현 삼성BP화학 사장,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 등이 제일모직에서 잔뼈가 굵었다. 지난해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부임한 제진훈(58) 사장은 경남 산청생으로 진주고와 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일모직에 입사한 ‘모직맨’이다. 제일모직에는 올초 상무보로 승진한 이건희 회장의 차녀 서현씨와 남편 김재열 상무가 같이 일하고 있다. ●‘봄날’을 기다리는 화학·중공업 80년 유공 인수 실패,90년대 중반 자동차 사업의 좌절 등으로 자동차·중공업∼정유·석유화학·화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중화학그룹’을 도모했던 삼성의 꿈은 사실상 좌절됐다. 오늘날 삼성을 대표하는 업종은 전자와 금융이다. 하지만 화학·중공업 계열사들의 ‘절치부심’이 예사롭지 않다. 화학·중공업 계열사 CEO가운데 비교적 많이 알려진 CEO는 허태학(61) 삼성석유화학 사장이다. 경남 고성생으로 진주농림고와 경상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69년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했다. 허 사장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마저도 조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정도로 보수적인 농촌출신으로 한때 덴마크의 달라스나 그룬트비히 같은 농촌 계몽자를 꿈꾸었다고 한다. 호텔신라 총지배인, 삼성에버랜드 사장, 호텔신라 사장을 거쳐 2003년 삼성석화에 자리를 잡았다. 에버랜드 사장시절에는 ‘캐리비안베이’라는 테마파크를 조성, 리조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93∼2002년 삼성에버랜드는 이재용 상무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한 ‘징검다리’로 부상하면서 구설수도 따랐다. 허 사장은 96년 에버랜드의 전환사채(CB)를 이 상무에게 저가로 발행한 것과 관련, 최근 징역 5년을 구형 받았지만 지금도 공공연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건희 회장을 꼽을 정도로 삼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삼성 CEO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로 ‘자기 PR’에도 열심이다. 삼성과 고 이병철 회장에게 큰 상처를 줬던 삼성정밀화학(옛 한국비료)은 제일합섬,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종합화학, 삼성중공업, 삼성카드, 삼성자동차 등 가장 많은 회사를 옮겨 다닌 것으로 유명한 이용순(59) 사장이 2003년부터 맡고 있다.64년 8월 27일 설립된 ‘한비’는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을 계기로 67년 10월 삼성이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한 회사다. 한비는 이후 산업은행이 대주주로 공사형태로 운영됐지만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를 맞자 94년 다시 삼성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홍식(58) 삼성토탈 사장은 삼성 사장단 가운데 몇 안되는 호남 출신으로 광주일고와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유난히 영남출신 CEO가 많은 삼성에서는 전주 출신의 배정충(60) 삼성생명 사장, 전남 구례생인 양인모(65) 삼성엔지니어링 부회장과 고 사장이 호남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이 기계공학과 1년 선배다. 72년 삼성에 입사한 고 사장은 줄곧 제일합섬에서 일하다 92년 비서실 경영팀장,93년 신경영실천위원회 팀장 등을 맡으며 그룹 전반의 일을 익히기 시작했다.95년 삼성종합화학 소속으로 화학소그룹 전략기획실장을 맡으며 화학계열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갔다.2001년부터 삼성종합화학 CEO를 맡으며 97년 당시 부채비율 800%로 ‘회생불능’이었던 삼성종합화학을 프랑스 토탈과의 합작과 고효율 경영으로 지난해 매출 2조 8000억원, 영업이익 5700억원(이익률 21%)이라는 ‘알짜기업’으로 변신시켰다. 순차입금 비율은 20%로 뚝 떨어졌다. 스스로 “화학이 곧 내 인생”이라는 고 사장은 2010년 이익 1조원 돌파를 목표로 삼성그룹 내에서 비교적 위상이 처지는 화학 사업의 ‘중흥’을 노리고 있다. 2006년 세계 1위 조선업체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중공업은 ‘현장경영’,‘극한원가’,‘질적인 1위’를 부르짖는 김징완(59) 사장의 지휘하에 부활을 꿈꾸고 있다. 경북 달성생인 김 사장은 현풍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마치고 73년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중공업과는 88년부터 인연을 맺어 2001년 대표이사로 부임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생산성 높은 조선소를 만들고 싶었던 이병철 회장은 일본 IHI사와의 합작을 통해 경남 통영시 안정리에 150만평 규모의 조선소를 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의 여파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고 썩 내키지 않던 거제의 우진조선을 인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또 하나의 ‘초일류’, 삼성 서비스 삼성에버랜드가 언론에 크게 부각될 때는 대부분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관련돼 있다. 그도 그럴것이 에버랜드는 이건희 회장(3.72%)은 물론, 이재용 상무 25.10%,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 이윤형씨 등 세딸이 나란히 8.37%의 지분을 갖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4녀인 덕희씨의 남편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0.48%), 맏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남편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장도 0.08% 지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국내 최대, 세계 6위권의 테마파크와 골프장, 빌딩관리 등 자산관리, 단체급식 등 유통, 조경 등 환경사업을 영위하며 지난해 매출 1조원 1600억원, 순이익 800억원대를 거둘 정도로 탄탄한 경영을 자랑한다. 박노빈(59) 사장은 보성고와 서울대 수학과를 마치고 74년 제일제당으로 입사,91년 삼성중공업을 거쳐 93년부터 에버랜드에 발을 담갔다. 사업 구상이후 무려 7년이 지난 79년 개관한 호텔신라는 초기 경기하락과 오일쇼크까지 겹쳐 적자에 허덕였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홍진기 회장의 총 지휘하에 손영희 사장이 경영을 맡고 장녀 인희가 고문이 돼 음식조리 등 안살림을 챙기고나서부터야 경영이 호전됐다.”고 회고했다. 경복고와 서울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삼성물산에서 해외영업을 담당한 이만수(55) 사장이 2003년부터 경영을 맡고 있다.2001년 호텔신라로 들어와 지난해 상무보 승진에 이어 올초 상무로 승진한 이부진씨도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삼성의 서비스 사업 가운데 가장 독특한 영역인 보안업체 에스원은 2002년부터 이우희(58) 사장이 맡고 있다.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 출신으로 삼성내 거의 유일한 이건희 회장의 친척이다. 이 사장은 부산고와 부산대 법학과를 마치고 제일제당에 입사했다.94년부터 계속 비서실 인사팀장으로 일해왔다. 국내 최대 광고회사인 제일기획 배동만(61) 사장은 보성고와 고려대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73년 중앙일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제일제당, 호텔신라를 거쳐 비서실 홍보팀장, 에스원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2001년 제일기획 사장으로 부임했다. 지난해부터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 초창기 사업동지 이병철·조홍제 세간에는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 효성 창업주인 고 조홍제 회장이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를 다녔고 삼성을 공동 창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910년생인 이 회장은 서당을 다니다 1922년 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 회장의 고향은 의령군 중곡면 중교리지만 진주시 지수면과는 인접해있다. 지수에는 이 회장의 둘째누이 분시씨가 결혼해 살고 있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이 회장은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그해 9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했고 25∼29년에는 중동학교를 다녔다. 1906년생으로 이 회장의 형인 병각씨와 동갑인 조 회장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상경,1922년 중동학교 초등과 1,2,3학년 과정을 이수하고 이듬해 협성실업학교 초등과 4,5,6학년 과정을 마쳤다. 효성 관계자는 “언제부터인지 선대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LG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이 지수보통학교 동문으로 소개됐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29년 도일,30년 와세다(早稻田)대 전문학부 정경과로 입학했고 조 회장은 27년 와세다대 공업전문학부에 입학했지만 29년 일본 호세이(法政)대 경제학부에 다시 입학한다. 둘의 동업관계에 대한 회고도 조금씩 다르다. 이 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은 48년 서울 종로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세울 당시 전무가 조홍제 회장, 상무가 김생기 전 영진약품 회장이었으며 설립자본금의 75%는 이 회장이, 나머지 25%는 조 회장, 김 회장, 이오석, 문철호, 김일옥씨가 분담했다고 밝혔다. 반면 조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는 48년 말 평소 안면이 있던 이 회장이 명륜동 조 회장의 집을 찾아와 사업얘기를 하던 차에 조 회장이 사업자금 800만원을 빌려준 것으로 나온다.2개월 뒤쯤 조 회장은 200만원을 더 투자해 1000만원을 채웠다. 이 회장이 이미 투자한 돈은 700만원이었다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헤어졌던 둘은 51년 이 회장이 당시 가족이 피난가 있던 마산에 들렀다가 조 회장을 만나 부산에 새로 차린 삼성물산에 와서 일하기를 권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조 회장 역시 이와 비슷하게 기억했다. 호암자전은 또 조 회장과의 결별에 대한 별도 언급없이 63년 3월 2일 효성물산과 한국타이어, 한일나일론을 양도했다고만 명시했다. 나의 회고는 60년 3월초 일본 도쿄에서 골프를 치던 도중 이 회장이 결별 의사를 밝혔다고 소개한다. 이날 두 사람은 서로의 지분에 대해 언쟁을 가졌다. 둘의 재산분배는 62년 8월 이 회장의 자택에서 다시 논의된다. 조 회장은 “내 지분이 삼성 전체의 3분의 1쯤 되니 제일제당을 떼어달라.”고 제의하고 이 회장도 이를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갈등이 점점 커지다 64년에야 결론이 난다. 조 회장은 자신이 분배받은 재산(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삼성 지분 50%, 효성물산)은 3억원 정도로 자기 몫의 10분의 1도 안됐다고 밝혔다. 분가하면서의 불화는 한동안 재계 인사들에게 회자됐었다. 그러나 지난 8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조 회장의 빈소를 이 회장이 찾아와 한참동안 머물며 ‘앙금’이 없었음을 내외에 알렸다.3년뒤인 87년 이 회장도 영면했다. ukelvin@seoul.co.kr ■ 삼성물산 역대 대표이사 1938년 이병철 회장 1960년 허정구 사장(LG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사돈 허만정씨의 장남, 삼양통상 창업주) 1961년 박도언 사장 1963년 김선필 사장 1966년 안동선 사장 1967년 김진하 전무 1967년 박태암 사장 1967년 성상영 사장 1968년 정수창 사장(전 두산그룹 회장) 1970년 정상희 사장(이명희 신세계 회장 시아버지) 1971년 김정렬 사장 1974년 이은택 사장 1977년 손상모 사장(전 동부그룹 부회장) 1978년 송세창 사장(전 나산그룹 부회장) 1981년 경주현 사장(전 삼성종합화학 회장) 1984년 배상욱 사장 1985년 이필곤 사장 1993년 신세길 사장(현 서울반도체 회장) 1995년 이필곤 부회장(현 알티전자 회장) 1997년 현명관 부회장(현 전경련 부회장) 2000년 이상대 사장(현 건설부문) 2001년 배종렬 사장 2004년 정우택 사장(현 상사부문)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80년 인생 회고록 펴낸 김광수 대한교과서 회장

    “문예월간지 ‘현대문학’을 50여년 동안 발행해 오면서 한번도 흑자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문단의 발전을 위한다는 신념 하나로 이끌어 왔지요.” ‘대한교과서’하면 우리나라 교과서 출판역사의 대명사처럼 통한다. 특히 최근에 ‘현대문학 600호’를 발행할 만큼 문단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0년대에는 현재 40∼50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추억의 어린이 잡지 ‘새소년’을 발행했다. 대한교과서의 김광수(80) 회장은 최근 이같은 ‘역사’를 담은 회고록 ‘나의 뜻, 나의 길’(대한교과서刊)을 펴냈다. 그는 “원래는 회고록 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현대문학 50년, 나이 팔순, 또 대한교과서 창립 60주년을 앞둔 상황에서 기록으로 남겨 달라는 주위의 권고가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고 피력했다. “6·25때 인민군에 의해 문을 닫았던 일, 부산에 피란 가 교과서를 찍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쟁 중에도 교육은 멈출 수가 없지요.” 그는 1925년 전북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 삭골(沙洞)마을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1938년 무풍공립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혼자서 ‘중학 강의록’을 공부하다가 가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우석(愚石) 김기오 선생을 만나 부자의 연을 맺었다. 대한교과서는 1948년 양아버지 우석에 의해 설립됐다. 김 회장도 이때 대한교과서 창립사원으로 참여했다.6·25로 서울이 함락되자 ‘대한교과서’ 기능이 중단됐고 김 회장은 의용군으로 끌려가던 중 가까스로 탈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국민방위사관1기로 임관, 참전했으며 육군경리학교 보급장교로 제대했다.52년 해군 당국의 도움을 받아 부산에 교과서 공장시설을 세워 부활했다. 서울로 돌아온 창업자 우석은 54년 ‘현대문학사’를 설립한다.1961년 김 회장은 창업주의 뒤를 이어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이어 ‘어문각’사장,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한국잡지발행인협회 이사장 등의 직함을 가졌다.64년에는 ‘새소년’을 창간했다. 당시 ‘새소년’은 어린이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는 출판 인생 외에 국회의원을 다섯 차례나 지내 정계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73년 무소속을 시작으로 15대 국회의원까지 5선의원을 지내면서 한국국민당 부총재, 자민련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정치가에서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초심의 각오로 다시 대한교과서 자리에 돌아왔지요. 앞으로 대한교과서를 상장할 계획입니다. 이제 기반을 닦아 놓았으니 출판계를 리드하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지요.” 그는 “나이 80을 넘는 동안 출판과 정치라는 험난한 두 길 가운데 부끄러움과 오욕의 흔적을 남겨왔다.”면서 ‘요가수련’이 건강유지의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①삼성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①삼성그룹

    어느 시대에나 나라와 집단을 움직이는 인맥은 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시절에는 권력 중심의 인맥이 조명을 받았지만, 요즘은 자본을 토대로 형성된 인맥집단이 눈길을 모은다. 지난해 말 단행된 주요 그룹 인사에서 창업자의 2,3세들이 사장이나 임원으로 속속 승진하면서 재계의 ‘가계도’가 주목받고 있는 것도 무관치 않다. 사실 재계의 인맥과 가계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계급간 갈등이 악화되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발전해 왔듯이 90년대 이후 재벌가문의 인맥도는 정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의 주요 그룹들이 창업에서부터 2세,3세로 내려오면서 어떻게 가업을 승계해 왔고, 총수와 더불어 대그룹을 일군 주역들이 누구인지를 주 1회씩 연중 기획으로 조명해 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후원자인 메디치가, 근세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알려진 합스부르크왕가, 미국의 케네디·부시가 등 서양에는 그 사회가 인정해 주는 명문가가 있다. 한국에도 수백년 내력의 명문가문이 존재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존재가 미약하다. 대신 일제치하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자본을 축적한 ‘재계 명문가’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권력이 최우선이었던 시대가 지나고 금력의 위력이 커질수록 재계 명문가의 위상도 커지고 있다. 재계 명문가를 일군 창업주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 출신도 아니고 고등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대를 내려오면서 후손들은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한국의 몇 안되는 ‘상류층 클럽’의 최정점에 재벌 2,3세들이 서 있고 또 그 정상에는 삼성가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일군 ‘삼성가’는 오늘날 대한민국 재계의 대표 가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이 회장은 1938년 29세때 자본금 3만원과 은행자금 20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만주에 청과물과 건어물을 수출하고 제분업을 병행하면서 1년 만에 두배의 이익을 거뒀고 이를 토대로 연산 7000석 규모의 ‘조선양조장’을 매입하며 삼성의 기틀을 세웠다. 현재 삼성은 자산규모 92조원으로 공기업인 한국전력에 이어 2위다. 하지만 지난해 자산을 꾸준히 늘려 올 4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가 나면 명실상부한 재계 1위로 부상할 전망이다. 삼성은 지난해 매출 136조원, 세전이익 19조원이라는 경이로운 경영성과를 이뤄냈다. 직접 수출만 527억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2542억달러)의 21%를 차지했다.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한때 120조원을 넘었다가 현재 94조원에 달한다.2위인 LG그룹(36조원)과 비교해 보면 그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삼성은 또 CJ, 신세계, 한솔, 새한그룹과 연결돼 있고 중앙일보그룹, 보광그룹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신세계 5조 2000억원(21위),CJ 4조 9000억원(23위), 한솔 3조 4000억원(36위), 중앙일보·보광 1조원 등을 더하면 ‘범 삼성가’의 자산은 106조 5000억원에 달한다. ●다양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혼맥 이런 위상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혼맥은 의외로 담백하다. 특히 이건희 회장대로 내려오면서 특별한 집안을 ‘간택’하지 않았다. 이미 재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선 삼성가로서는 더 이상 혼맥을 통해 뭔가를 기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은 91년 11월 신세계와 전주제지(한솔),93년 6월 제일제당(CJ),95년 7월 제일합섬(새한),99년 중앙일보 등을 독립시키며 세포분열을 거듭했다. 새한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영역에서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8명(3남 5녀)이나 되는 자녀를 분가시켰지만 명성만큼 화려한 혼맥은 아니었다. 이맹희씨가 그의 회고록에서도 밝혔듯이 이 회장은 혼사를 통해 권력층과 줄을 잇는 체질이 아니었다. 다만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고 홍진기씨 집안과 사돈(이건희 회장)을 맺은 것이나 둘째딸 숙희씨를 LG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3남인 구자학씨에게 시집보낸 것 정도가 눈에 띈다. ●비운의 장손가, 화려한 부활 장남 이맹희씨는 어릴 적부터 약조가 돼 있던 손영기 전 경기도 지사의 딸 손복남씨와 결혼했다. 한때 17개 계열사 경영을 맡으며 장남의 역할을 다했지만 일찌감치 그룹 경영에서 발을 빼야 했다. 맹희씨의 존재는 항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묻어둔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 등의 회고록에서 “고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제일’자 계열과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나에게 넘기기로 했었다.”고 발언,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맹희씨는 현재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살고 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맹희씨의 꿈은 지난 2002년 장남인 이재현씨가 CJ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고려대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은 삼성과 무관한 씨티은행에 공채를 통해 입사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 경리부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그는 이후 93년 잠깐 현재 이재용 상무 자리인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제일제당과 함께 했다. 이 회장은 비록 CJ그룹이 삼성그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 차이가 나지만 삼성가의 장손으로 그 위상이 만만치 않다.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 여사도 2000년 타계하기 직전까지 서울 장충동에서 이 회장과 함께 살았다.87년 이병철 회장 장례식때 영정을 들고 앞장선 사람도 이 회장이었다. CJ그룹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미국에 머물던 이 회장의 누나인 미경씨를 CJ엔터테인먼트,CJ CGV,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에 임명했다.CJ는 이 회장의 외삼촌 손경식 회장이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새한의 도전과 좌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인인 이영자씨와 연애 결혼한 차남 창희씨는 91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비사건(사카린 불법유통사건)으로 한때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고 67년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전주제지) 이사로,68년에는 삼성물산 이사로 일했지만 그룹 경영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었다. 창희씨는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창희씨 사후 새한은 부인 이영자씨를 회장으로 97년 새 CI를 선포하며 독립그룹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곧바로 경영위기를 겪고 만다.2000년부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돌입했는데 채권단에 따라 ㈜새한 계열과 새한미디어 계열로 나눠졌다. 새한미디어는 현재 론스타로의 매각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새한은 99년 일본 도레이사와 3대7 합작을 통해 도레이새한을 출범시켰다. 2000년 지분을 채권단에 양도한 이영자 전 회장과 아들인 이재관 전 부회장은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한은 삼성의 분가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몰락하고 말았지만 혼사만큼은 화려했다. 장남 재관씨는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가의 딸인 희정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재관씨는 ㈜동방 주식 1만 6000여주를 갖고 있지만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재찬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인 선희씨, 재원씨는 김일우 서영주정 사장의 딸과 결혼했다. 막내딸인 혜진씨도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가로 시집갔다. ●글로벌 삼성을 만든 이건희 회장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된 것은 유교적 전통과 장자승계가 원칙인 한국에서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70년대에 이미 ‘3남 후계’ 방침을 확정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는 주위의 권고와 본인 희망대로 그룹 경영을 일부 맡겨 봤지만 6개월도 못가 맡겼던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면서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해 희망대로 해주었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와세다대 1학년때 중앙매스콤을 맡아보라고 했더니 본인도 좋다고 했는데 조지워싱턴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룹 경영에 차츰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기업경영이 하도 고생스러워 중앙일보만 맡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양녕대군, 효령대군 대신 3남인 충녕대군(세종)을 택한 태종의 결단과 닮은 꼴이다. 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뒤 12일 만인 12월1일 삼성의 2대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7년 만에 삼성의 차원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매출 13조 5000억원과 비교하면 14년 만에 매출이 10배로 늘어났다. 세전이익은 1900억원에서 19조원으로 100배나 늘었다. 원달러 환율이 100원 이상 절상된 올해도 삼성은 매출 140조원, 세전이익 14조 6000억원을 목표로 세웠다. 이 회장의 ‘신경영 전도사’라는 평가를 받는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은 최근 이 회장의 ‘17년 경영’을 이렇게 평가했다. “반도체 투자 같은 천문학적인 액수는 보통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한때 잘나갔던 일본 반도체 업체들도 CEO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해 투자시기를 놓쳤다. 반면 삼성은 이 회장이 전략을 제시하고 투자를 결정해 줌으로써 강력한 리더십이 생긴다. 계열사 사장들은 회장의 비전 제시를 책임감 있게 충실히 이행하고 구조본은 이 과정에서 정보분석 등 보좌업무를 수행한다. 삼성의 힘은 이같은 ‘3각 경영시스템’에서 나온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사장을 비롯해 임직원들이 ‘우리 회장’을 진심으로 따르고 승복하니까 이같은 영향력이 나오는 것이다.” 이 회장과 홍라희 여사의 만남은 부친들끼리 미리 약조가 돼 있는 상태에서 66년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처음 이뤄진 뒤 7개월 뒤인 67년 5월 결혼으로 이어졌다. 홍 여사는 당시로는 큰 키(165㎝)에 미모와 지성을 갖춘 재원으로 이후 한국 재계의 ‘퍼스트레이디’로 자리매김했다. 서울대 미대(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 여사는 79년 막내 윤형씨를 낳고 난 뒤인 83년 현대미술관회 이사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67년 삼성으로 시집온 뒤 이건희 회장의 후계구도가 확정된 71년부터는 삼성그룹의 사실상 ‘안방마님’이었지만 서열상으로 엄연히 형님(맹희·창희씨 부인)들이 있고 위로 시누이가 넷(인희·숙희·덕희·순희씨)이나 있어 편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홍 여사는 85년부터 98년까지 친정아버지(고 홍진기씨)가 회장으로 있는 중앙일보 상무로 재직했다.95년 호암미술관장으로 취임한 홍 여사는 96년에는 삼성문화재단 이사장까지 맡았지만 98년 이사장직을 남편인 이 회장에게 돌려줬다. 지난해 4월 현대미술관회 부회장으로 선임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승지원’ 옆에 국내 최고 수준의 미술관인 ‘리움(Leeum)’을 개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해외활동도 활발해 93년부터 CIMAM(국제근현대미술박물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 현대미술박물관 국제이사회 회원, 영국 테이트갤러리 국제이사회 회원이다. 이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96년 프랑스 문학예술훈장인 ‘코망되르’를 받았고 2003년에는 제57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딸들의 맹활약 삼성가는 딸들의 경영활동이 활발하기로 유명하다.5명의 딸 가운데 덕희(숙명여대)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화여대 출신이다. 장녀인 이인희씨는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로 시집갔다. 남편인 조운해씨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이사장 및 병원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도 맏사위 자격으로 삼성에버랜드 주식을 일부 갖고 있다. 인희씨는 91년 삼성에서 분리,92년 한솔그룹으로 이름을 바꾸며 새 출발했다. 한때 계열사가 16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현재는 8개 계열사로 줄었다. 장남인 조동혁 회장에 이어 현재 그룹 경영은 3남인 조동길 회장이 맡고 있다. 차남인 조동만 전 한솔PCS 회장은 PCS 사업매각 관련 비리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차녀인 숙희씨는 LG가로 시집을 갔다. 남편인 구자학씨는 해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제일제당, 동양TV 이사, 호텔신라 사장, 중앙개발 사장 등 처가에서도 활발한 경영을 펼쳐 눈길을 끈다. 그는 삼성이 전자사업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본가로 돌아간 뒤 금성사 사장,LG반도체·LG건설 회장 등 굵직한 자리를 맡다 지난 2000년 외식산업인 ‘아워홈’을 갖고 독립했다. 지금도 LG가에서 구자학 회장은 ‘구씨답지 않게 낭만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인물’로 회자된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삽입형 생리대인 ‘탐폰’을 국내 처음으로 내놓는 등 여성적인 섬세함은 ‘LG가’보다는 ‘삼성가’에 가까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숙희씨의 아들 본성씨도 한때 삼성 계열사에서 일했다. 딸인 명진씨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인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과 결혼했다. 3녀 순희씨는 대학교수와 결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4녀 덕희씨는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의 대지주 이정재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마산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온 남편 이종기씨는 중앙일보 부회장, 제일제당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회장까지 지내다 은퇴했다. 그는 지금도 삼성전자 주식 8만주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큰손’이며 동서인 조운해씨와 마찬가지로 에버랜드 주식도 갖고 있다. 삼성가의 딸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5녀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 회장의 시아버지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로 남편인 재은씨가 차남이다. 남편인 정재은씨는 경기고·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 삼성항공·삼성종합화학 부회장, 삼성전기 회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삼성그룹에서 맹활약하다 분가와 함께 삼성을 떠났고 현재 신세계 고문직을 갖고 있다. 신세계가의 후계자인 정용진 부사장은 미스코리아 출신 고현정씨와 결혼했다가 2003년 이혼했다. ●최고의 사돈감,‘소박한’ 결혼 이건희 회장은 홍 여사와의 사이에서 재용(삼성전자 상무), 부진(호텔신라 상무보), 서현(제일모직 부장), 윤형(학생)씨를 낳았다. 이재용 상무는 경복고와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마쳤다.91년 삼성전자에 입사했으며 차분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중장기 전략담당인 이 상무는 최근 소니와의 7세대 LCD(액정표시장치)합작사인 ‘S-LCD’의 등기이사로 등재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S-LCD는 삼성과 소니가 ‘명운’을 걸고 시작한 사업. 차기 CEO로 꼽히는 구타라기 겐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이사로 내세운 소니는 삼성측에 이 상무의 이사 등재를 특별히 부탁했다. 이 상무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첨단기술에 관심이 많아 혼자서도 사업장을 둘러보고 관련 전문가들에게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등 열심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는 평이다. 이 상무는 98년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인 세령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당시 ‘미원-미풍 전쟁’을 벌였던 삼성과 대상이 사돈을 맺었다는 점과 연세대(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세령씨의 빠른 결혼, 영호남 대표기업의 혼사 등이 화제를 모았었다. 임씨는 삼성가 며느리라는 지위 외에도 ㈜대상 주식 10.22%를 보유하고 있는 등 만만치 않은 재력을 자랑한다. 세령씨의 서문여고 동창들에 따르면 학창시절부터 말수 없이 조용한 데다 미모를 갖춰 일찌감치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혔다고 한다. 지난해 초 호텔신라 상무보로 승진한 부진씨는 연세대 아동학과 출신으로 99년 삼성 계열사의 평범한 회사원 임우재씨와 결혼했다. 임씨는 현재 삼성전자 소속으로 미국 유학중이다. 미국 뉴욕의 패션전문학교 파슨스 출신인 둘째딸 이서현 제일모직 부장은 2000년 동아일보 사주인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재열씨와 결혼했다. 재열씨는 지난해 초 제일모직 상무로 승진했다. 아직 미혼인 막내 윤형씨의 배필이 누가될지 벌써부터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화여대 불문과 98학번인 윤형씨는 지난해 싸이월드에 개설한 미니홈피가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었다. 당시 윤형씨는 재벌가의 딸답지 않는 소탈하고 귀여운 글을 많이 남겨 ‘삼성가’에 대한 세인들의 궁금증을 어느정도 풀어줬다. 지금은 활동이 중단됐지만 ‘다음’의 윤형씨 팬카페(이뿌니 윤형이네) 회원수가 1만 2000여명이 넘을 정도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씨가와 홍씨가 LG가 구씨-허씨의 ‘합작품’이라면 삼성은 이씨와 홍씨가 함께 이끌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 홍진기 회장의 장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최근 각을 세워왔던 노무현 정부의 주미대사로 내정됨에 따라 현 정권과 중앙일보, 삼성가로 이어지는 관계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과 고 홍 회장의 인연은 4·19 직후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와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이 회장이 면회를 가면서 시작됐다. 전 국무총리 신현확씨의 소개로 이뤄졌는데 신현확씨도 이후 삼성물산 회장까지 지내며 삼성과 돈독한 인연을 유지했다.87년 이병철 회장 사후 이건희 부회장을 2대 회장으로 추대한 회의도 신현확씨가 주재했다. 홍 회장은 65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 개국 4개월 뒤 경영을 맡았는데 80년 신군부에 동양방송을 ‘강탈’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의 중앙일보를 일궈냈다. 홍 회장이 삼성그룹에서 직접 경영한 것은 중앙일보(66∼67년,68∼86년)밖에 없지만 그가 삼성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다. 삼성의 언론사업에는 비화가 있다.‘호암자전’과 ‘삼성 60년사’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은 60년대 초 정계 투신을 결심했었다. 기업가의 사회적 공헌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오히려 ‘부정축재자’,‘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한비의 국가 헌납 등)에 환멸을 느낀 이 회장이 직접 정치를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1년간의 고심 끝에 정치보다는 언론사업을 택했다. 이른바 ‘정권은 유한하지만 언론은 무한하다.’는 세간의 ‘이치’를 일찌감치 간파한 셈이다. 홍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타계 직전인 86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회장은 조사를 통해 “당신은 내 일생을 통해 제일 많은 시간을 접촉한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 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고, 가정적으로는 나의 사돈이었다.”며 진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관·언·재의 홍씨 4형제 홍씨 가문은 네 아들을 뒀는데 하나같이 훤칠한 용모에 좋은 머리를 갖고 있다. 주미대사로 내정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와 미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엘리트로 30대(39세)에 세계은행(IBRD)의 이코노미스트를 지냈고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등 정부쪽 일도 수행했다. 홍 회장은 삼성코닝 상무·부사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뛰다 99년 중앙일보의 계열분리를 계기로 중앙일보 회장에 취임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신문협회(WAN) 회장에 올라 국제사회에도 그 이름을 알렸다. 홍 회장의 장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고 신직수씨다. 사시 18회인 둘째 홍석조 인천지검장은 경기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서울지검 남부지청장(현 남부지검장), 법무부 검찰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홍 지검장은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 홍 지검장의 부인은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동생 양기식씨의 딸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인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은 86년 미 노스웨스턴대 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삼성코닝 이사로 입사했다.95년 삼성전관(현 삼성SDI) 상무로 이동, 기획홍보팀장을 거쳐 2002년 부사장(경영기획팀장)으로 승진했다.‘로열 패밀리’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꿰고 있을 정도로 자상한 면모를 갖고 있다. 선친때부터 살아 온 서울 성북동 집을 지키고 있다. 4남인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회장으로 승진, 오너 경영을 본격화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홍 회장은 79년 제13회 외무고시에 합격, 외무부 의전과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홍 회장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했다.95년 외무부 기획조사과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홍 회장은 보광 상무이사로 경영활동에 뛰어들었다. 제8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 대한스키협회 부회장, 한국광고업협회 부회장, 서울대 기성회 회장 등 외부활동도 활발하다. 보광그룹은 아직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편의점인 보광훼미리마트, 자판기 유통업체인 휘닉스벤딩서비스, 보광창업투자,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문화상품권 발행사인 한국문화진흥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PDP(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 부품업체인 휘닉스PDE, 반도체 관련 업체인 휘닉스디지탈테크, 반도체패키지 제조업체인 STS반도체통신 등 전자 계열사들은 사돈기업인 삼성전자, 삼성SDI 등과 거래가 활발하다. 특히 지난해 코스닥에 등록된 휘닉스PDE는 홍 회장이 13.89%, 홍석조 인천지검장,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 홍라영씨가 나란히 10.89%를 보유해 눈길을 끈다. 홍씨가의 주력은 중앙일보 그룹이지만 실제 ‘자금줄’은 보광그룹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보광이 주요그룹으로 성장한다면 정·관계, 언론계를 주름잡은 이 가문이 재계에서도 능력을 검증받게 된다. 막내인 홍라영씨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둘째아들인 철수씨와 결혼했다. 노 전 총리의 장남 경수씨는 현대산업개발 정세영 명예회장의 큰딸 숙영씨, 차녀 혜경씨는 ㈜풍산 류진 회장과 결혼했다. 이대 불문과, 미국 뉴욕대 예술경영학 석사 출신인 라영씨는 95년 삼성문화재단 기획실로 입사, 현재 삼성미술관 부관장직과 한국박물관협의회 부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ukelvin@seoul.co.kr ■ 이병철 회장의 경영어록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잘 모르는 경우에는 가리지 말고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해서 2∼3년이 지나면 물어보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 것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혼자 삼성 전체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과거 오랫동안의 경험을 살려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1983년 6월 반도체회의) ●“인재제일, 인간본위는 내가 오랫동안 신조로 실천해온 삼성의 경영이념이자 경영의 지주이다. 기업가는 인재양성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인재양성에 대한 기업가의 기대와 정성이 사원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전달되어 있는 한 그 기업은 무한한 번영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1982년 10월 기고문) ●“사람을 관찰해 보면 세 부류가 있다. 첫째 어려운 일은 안 하고 쉬운 일만 하며 제 권위만 찾아 남만 부리는 사람, 둘째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 셋째 알아듣긴 해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1982년 9월 사장단 오찬회의) ●“모든 설비투자계획에 있어서 5년 정도만 내다보고 세우지 말고 10년 이상 50년 정도의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1977년 6월 삼성조선 건설현장) ●“미국에서는 사람의 후천적 교육에 치중하고 소질은 별로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는 선천적 소질 내지는 능력에 60%를 두고 교육에 40%를 둔다.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아무나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은 따로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1976년 6월 ‘재계회고’) ●“일이 잘돼 나갈 때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 기업가도 뜻하지 않은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가 좌절을 모르고 자라난 기업가보다 훨씬 더 강인한 기업경영 능력을 갖고 있다.”(1975년 9월 ‘최고 경영자와의 대화’) ■ 이건희회장의 경영담론 ●“그동안은 세계의 일류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빌리고 경영을 배우면서 성장해 왔으나, 이제부터는 어느 기업도 우리에게 기술을 빌려 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기술 개발은 물론 경영 시스템 하나하나까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자신과의 외로운 경쟁을 해야 한다.”(2005년 1월3일 신년사)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경영진들이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너무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우리 기업이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산업밖에 없다고 생각해 과감히 투자를 결정했었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반도체에서 시기를 놓치면 기회손실이 큰 만큼 선점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2004년 12월 반도체 30년 기념식) ●“4∼5위에서 2∼3위로 가는 것하고 2∼3위에서 1위로 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2003년 11월 휴대전화사업 격려 자리에서) ●“행정규제,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이 일류 국가로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1995년 4월 중국 베이징 특파원 오찬간담회) ●“선친이 장사하는 것을 보며 세살 때부터 주판을 갖고 놀았다. 정치보다 장사를 잘 알고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키워졌다. 난 양복과 잠옷만 있고 중간 옷이 없다. 잠옷 입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잠옷을 입고 정치할 수는 없지 않으냐.”(94년 10월 마이클 헤슬타인 영국 상공부 장관과 만찬자리에서 정치 참여에 대해) ●“변하는 것이 일류로 가는 기초다. 앞으로 5년이면 회장 취임 10년인데 10년 해서 안 된다면 내가 그만두겠다. 자기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93년 6월 신경영 선포)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사람 ‘섬기는 리더십’ 뜬다

    사람 ‘섬기는 리더십’ 뜬다

    ‘우울한 경제, 자신감 회복, 남북 관계 대형 이벤트’ 삼성경제연구소는 5일 ‘2005년 국내 10대 트렌드’를 발표하면서 “국내외 여건 불안으로 내수경기에 이어 수출도 악화되는 등 저성장 기조가 계속되겠지만 사회 전반에 한국과 한국인으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움직임도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우선 경제분야에서는 공급능력 감소와 수요 위축이 겹치면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 후반에 머무는 등 저성장 기조가 지속된다. 다만 정치권과 정책 당국이 민생경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회 통합에 노력을 기울인다. ●GDP성장률 3% 후반 전망 한·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일본과의 FTA 최종 협상 등으로 개방이 급물살을 타면서 이해 당사자간 마찰도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보기술(IT) 등 성장산업으로의 ‘쏠림현상’이 가속화되고 대기업·중소기업간의 격차는 더욱 커진다. 우량기업들조차 상시 구조조정 체제를 갖춰야만 살아남을 전망이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영업범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국내외 금융기관간, 은행과 제2금융권간 경쟁이 격화된다. 하이브리드카,700만화소 TV폰,e헬스케어,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등 신기술과 디지털 편의점, 슈퍼슈퍼마켓, 셀프다이어트방, 남성미용전문점, 죽카페, 빅사이즈 의류 전문점 등 새로운 창업이 성행할 전망이다. ●디지털 편의점·슈퍼슈퍼마켓 창업 유망 기업의 고용 창출력 악화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 체감 고용사정은 더욱 악화된다. 결국 과격투쟁 대신 합리적 노동운동이 확산되고 노사정이 대화를 시작한다. 증권집단소송과 개정 공정거래법 등 새로운 제도 도입으로 기업 부담은 커진다. 거래소 상장을 폐지하는 기업이 생겨나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의 위협에 대처해 기업간 전략적 제휴가 활발해진다. 경제분야의 보랏빛 전망과 달리 정치·사회분야는 희망적이다. 정치권에서 역량있는 인사들이 파벌과 당선 횟수를 뛰어 넘어 지도부에 참여하는 등 다원화 사회로 이동한다. 권위적·통제적 리더십 대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섬기는 리더십’이 확산된다. 개인의 가치관은 ‘부자’에서 ‘웰빙’,‘명상’,‘느림의 미학’ 등으로 바뀐다. ●개인 가치관은 ‘부자’서 ‘웰빙’으로 을사보호조약 100년, 광복 60년을 맞아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한국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정치, 경제, 법, 문화 등에서 한국적 모델의 성공 가능성을 발굴한다. 미국과 북한의 갈등은 계속되겠지만 북핵문제를 ‘주도적’으로 풀겠다고 선언한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 60주년,6·15선언 5주년을 계기로 대규모 정치 이벤트를 벌일 가능성도 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2004 결산] 사라진 별들-꽃은 졌으나 그 향기는 영원하리라

    세월은 정직하다. 그 어김없는 흐름에 올해에도 각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는 법. 그들이 남긴 지혜와 역정은 오롯이 남아 후세의 귀감이 된다. 현실이 실타래처럼 꼬일 때마다 그들의 부재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각부 종합 ■ 국내 ●정·관계 지난 9일 한국 외교계와 야당사에 큰 획을 그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과 이민우 신민당 전 총재가 나란히 타계해 세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 전 장관은 10여년 동안 한국 외교사의 주요 현장을 지킨 ‘외교사의 산 증인’으로 65년 한·일협정을 비롯, 베트남 파병 등 외교사의 길목에서 기틀을 다졌다.19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는 6선을 거쳐 87년 신민당 총재로 정계 은퇴하기까지 정치 인생 40여년을 외곬으로 야당을 지켰다. 유도 10단으로 대한유도회장, 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남다른 체력을 자랑하던 5선 의원 출신의 신도환 전 신민당 최고위원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다. 관계 인사로는 장예준 초대 동력자원부 장관을 비롯, 7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한빈 전 부총리,98년 한은법 개정 뒤 첫 한은 총재에 부임해 외환위기 타개를 이끌었던 전철환 전 한은 총재, 내무부와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친 뒤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씨 등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밖에 5·16 직후 군정에 반대하다 군복을 벗은 원충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캐나다에서 생을 마감했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수사받던 안상영 전 부산시장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시절 인사·납품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태영 전 전남지사는 ‘자살’로 삶을 마감해 충격을 던졌다. ●재계 카지노의 대부로 불렸던 전낙원(77)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는 73년 국내 최초의 서울 워커힐호텔 외국인전용 카지노를 관광공사로부터 인수, 이를 기반으로 호텔과 면세점, 건설 등 관광·레저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파라다이스그룹을 일궈냈다. 대한산업그룹 창업주의 아들로 40여년간 대한전선을 중견그룹으로 키워낸 설원량(62) 대한전선 회장도 지난 3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박남규(83) 전 조양상선그룹 회장도 해체된 조양상선그룹의 재기를 보지 못하고 지난 2월26일 세상을 떴다. 또 장기하(72) 전 진로그룹회장은 9월에, 이은범(76) 전 범양사 사장은 5월에, 양회문(53) 대신증권 회장은 9월에 타개했다. ●사회·체육계 사회분야에서는 종군위안부로 고통을 겪은 김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 김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머물며 종군위안부의 피해실태를 증언하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원일한 전 연세대 재단이사와 설대위 전주예수병원 원장 등 두 사람의 미국인도 눈에 띈다. 원씨는 연세대와 YMCA를 설립한 언더우드가(家)의 3세이다. 미국 이름이 데이비드 존 실인 설씨는 전쟁 고아와 버림받은 노약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체육분야에서는 1970년대 씨름왕 김성률씨와 국가대표 농구선수 출신 이원우씨, 송만덕 한양대 배구감독 등이 많지 않은 나이에 부음을 알려 안타까움을 더했다.1935년 프로자격을 얻은 한국인 프로골퍼 1호로 국제대회 첫 출전과 국내대회 첫 우승 기록을 보유한 연덕춘씨도 타계했다. ●문화예술계 문화예술계에서는 우리 문학의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해온 큰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져 안타까움을 남겼다. 연작시 ‘초토의 시’에서 한국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줬던 한국 시단의 원로 구상(85) 시인은 7개월여의 폐질환 투병 끝에 지난 5월11일 별세했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 ‘다보탑’으로 친숙한 시조 시인 김상옥(84)은 부인 김정자 여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장례식 이틀만인 지난 10월31일 세상을 하직해 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의 애송시 ‘꽃’의 시인 김춘수(82)는 기도폐색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4개월간 투병을 벌이다 지난달 29일 끝내 타계했다.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과꽃’‘꽃밭에서’등 350여편의 주옥 같은 동시를 지은 아동문학가 어효선(79)도 지난 5월15일 소천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농부 작가 전우익(79)은 지난 1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등의 저서를 통해 그가 전해준 소박한 삶의 소중함은 더욱 가치있게 다가온다. 1953년 출판사 ‘일조각’을 설립, 반세기 동안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계 원로 한만년 대표도 ‘한국사신론’(이기백 저),‘고가연구’(양주동 저) 등 기념비적인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예술계에서는 6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누빈 악역 스타이자 영화배우 독고영재의 부친인 원로배우 독고성(75)이 지난 4월10일 별세했다.‘빨간 마후라’를 작곡한 작곡가 겸 평론가 황문평(85)도 800여곡의 영화·드라마 음악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재즈계, 타악 연주계의 거목인 김대환(71),‘오뚜기 인생’의 가수 겸 음반제작자 김상범((66),‘곡예사의 첫사랑’을 부른 가수 박경애(50)도 올해 우리가 떠나보낸 스타들이다. ●학계 올해 학계도 훌륭한 스승을 잃었다. 사학계에서는 동양사학계의 거목 고병익(80) 박사와 연세대 황원구(74) 교수가 5∼6월 잇따라 별세했다. 실증주의사관의 확립자로 불리는 국사학계의 태두 서강대 이기백(80) 교수도 6월 타계했다. 한글학회에서도 ‘한글지킴이’ 허웅(86) 한글학회 회장이 1월26일 눈을 감았고 지난달 21일에는 KBS 라디오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로 유명한 한글재단 한갑수(91) 이사장마저 세상을 떠났다. 진보사회과학계의 큰별 서울대 김진균(67) 교수도 2월14일 별세했다. 민족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한 김 교수는 늘상 정권의 핍박에 시달렸지만 그가 만든 산업사회연구회는 진보학술운동의 모태였다.‘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도 김 교수의 작품이다.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육각수이론을 창안해 ‘물박사’로 통했던 전무식(72) 박사와 한국 핵의학분야를 개척한 전 서울중앙병원장 이문호(82) 박사가 8월13일, 지난 5일 각각 별세했다. 또 전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84) 박사도 5월29일 타계했다. 화학야금학을 공부한 최 박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소장, 과기처 장관을 지내면서 과학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았다. ●종교계 올해 종교계는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세수 77)의 입적이 무엇보다 큰 뉴스였다. 지난달 30일 원적에 든 숭산 스님은 달라이 라마, 틱 낫한 등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으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진력해왔다.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40년 가까이 세계를 돌며 32개국에 120여개의 선원을 세웠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가르침 속에 한국 불교 세계화에 일생을 바친 숭산 스님은 5만여 눈푸른 납자와 제자들을 뒀다. 기독교 쪽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지낸 조용술 목사가 지난달 15일 84세로 별세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신대를 나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재단이사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복음 전파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 국외 한 시대를 풍미한 지구촌의 별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숱한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한줌의 흙이 됐으나 그들이 남긴 자취는 또렷하다. 올해 사라진 인물들을 되돌아본다. 야세르 아라파트(75) 35년간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이끈 중동의 풍운아. 이집트 태생으로 지난달 파리의 군병원에서 사망했다.59년 무장단체 ‘파타운동’을 설립했다.6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96년 자치정부 수반이 됐다. 테러와 평화협상을 병행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94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부패와 개인축재 등의 의혹에 시달렸다. 그의 사망으로 중동의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로널드 레이건(93) 구두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B급 영화배우에서 미 40대 대통령(81∼89년)에 올랐다. 뛰어난 정치감각과 유머로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공급경제학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고 우주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스타워스’를 구상,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다 지난 6월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타계했다. 자크 데리다(74) 이성 중심의 전통적 서양철학에 반기를 든 ‘해체론’의 창시자.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두로 10월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숨졌다. 언어의 명료성과 통일성이 아니라 다극적 의미를 강조,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은 ‘반(反)철학’의 후계자로 평가된다. 레이 찰스(74) 노래로 미국 내 흑백통합을 이룬 흑인 솔 음악의 거장.7살 때 시력을 잃고 15살 때 고아가 됐으나 천부적인 자질로 13차례나 그래미상을 받았다.‘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8월 사망했다. 말론 브랜도(80) ‘대부’의 돈 콜리오네 역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워터프런트(50년)’와 ‘대부(73년)’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나 두번째 상은 북미 인디언에 대한 미국의 차별정책에 항의해 거부했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51년)’,‘지옥의 묵시록(79)’ 등에서 열연했다.7월 타계. 크리스토퍼 리브(52) 가슴에 ‘S’자를 달고 붉은 망토를 걸친 불멸의 ‘슈퍼맨’.78년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슈퍼맨에 발탁된 뒤 83년까지 3차례 시리즈에 출연했다.95년 승마대회에서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재활치료 끝에 휠체어를 타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나 10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애인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했다. 에스티 로더(97) 지난 4월 타계한 미 화장품업계의 여왕. 그가 창안한 ‘공짜샘플’과 ‘고급매장’ 전략은 20세기 모든 마케팅의 표본이 됐다. 부엌에서 만든 미용크림으로 46년 에스티 로더를 창업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현재 세계 130여개국에서 50억달러어치의 화장품을 판다. 프랜시스 크릭(88)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처음 발견한 영국의 생물학자. 지난 8월 결장암으로 미 샌디에이고에서 숨졌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 과정을 밝힌 공로로 62년 노벨상을 탔다. 생명공학 산업의 기초를 일궈 다윈과 멘델에 견줄 만한 과학자로 평가된다. 이밖에 할리우드의 여배우로 ‘킹콩’의 페이 레이(96)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릴러 ‘사이코’에서 열연한 재닛 리(77)가 8월과 10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내전을 카메라에 담은 전설적 사진작가 앙리 브레송(96)은 8월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슬픔이여 안녕’의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69)은 9월에 타계했다. 자신을 마담으로 부르도록 한 네덜란드의 여왕 줄리아나(94)는 1월에, 장징궈(蔣經國) 전 타이완 총통의 부인인 장팡량(蔣方良·88)은 지난 15일 사망했다. 1968년 북한에 피랍된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함장 로이드 부커(76)는 1월에 죽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창시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66)은 이스라엘의 헬기 공격으로 숨졌다. 의약업계의 황제 잭 에커드(91)와 이탈리아 자동차 왕국 피아트의 움베르토 아그넬리(69)는 5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 [바다로 가자] 통영 이맛도 보이소

    [바다로 가자] 통영 이맛도 보이소

    ●중화요리 이선생(649-2999) 온갖 수산물이 다 나는 통영에서 웬 중식당이냐고? 70년대부터 장안을 뒤흔들던 유명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리(73)가 운영하는 집이다. 운영자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까다로운 입 맛 탓에 맛이 한결같고 좋다. 특히 7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이씨는 직접 싱싱한 해산물과 진주 등지에서 채소를 해온다. 메뉴가 통영의 가격대로 만만치가 않지만 제대로 된 중국요리를 맛볼 수 있다. 쟁반자장(1만 4000원·2인분)은 면발이 꼬들꼬들하게 살아있고 부추와 고추를 넣었다. 다소 매웠지만 느끼한 맛이 없었다. 점심 특선요리(7만원·4인분)도 좋다. 게살수프·짜춘결(계란말이)·해물채소볶음·탕수육·자장면·후식이 나온다. 일품요리로는 송이쇠고기철판·철판해삼갈비(각 3만 5000원)도 있다. 비싼 메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장면·우동·자장밥 등 5000원. 사천장·초마면은 7000원. 서울 논현동에 통영에서 공급받은 수산물로 만들어 내는 이선생 분점(02-545-1999)이 있다. ●충무김밥 통영에 왔다면 꼭 맛을 볼 만한 음식이 ‘충무김밥’이다.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만한 충무김밥을 한 입에 넣으면 목이 메는 듯하다. 이때 사각거리는 엇박(무김치) 하나를 먹으면 시원하게 내려간다. 오징어 무침을 먹고 입이 매운 듯하면 시래기를 넣은 된장국을 마시면 입이 개운해진다. 통영에서 개발된 충무김밥은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낚시꾼·등산객·선원들에게 여전히 인기다. 강구안에는 충무김밥집 10여곳이 성업 중이다. 모두 원조,3대,60년, 오리지널 등의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최초는 뚱보할매김밥(645-2619)이다. 이 집의 창업자인 어두리(1994년 작고)할머니가 충무김밥을 개발했다. 어두리 할머니는 승객뿐만 아니라 어부들에게도 이렇게 만든 충무김밥을 팔았고, 이후 다른 사람들도 강구안에 모여 따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뱃사람들이 충무에서 먹는 김밥이라 하여 충무김밥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 뒤 1981년 국풍때 어두리 할머니가 충무김밥을 서울에서 선보여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뚱보할매김밥은 어두리 할머니의 막내 며느리가 잇고 있고 그 옆에 맏딸인 이씨가 원조충무김밥뚱보할매딸(645-1945)을 하고 있다. 무김치와 오징어 무침의 맛은 두집이 같다.1인분은 충무김밥 8개에 3000원. 통영 사람들이 맛있다고 꼽는 집인 한일김밥(645-2467)의 오징어 무침은 약간 단 듯했다. 도시락 포장 판매만 한다.1인분 3500원. ●데바수스(649-5152) 인구 20만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통영에 제대로 된 독일 하우스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데바수스는 독일의 맥주대회인 옥토버페스트에서 3연속 우승한 전설적인 브루마스터의 이름이다. 독일에서 맥주 숙성 시설과 귀리·보리와 효모 등을 직접 수입해 쓴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데바수스는 용남면 통영지원·지청옆에 자리잡았다.1층에 독일식으로 맥주를 만드는 공장이 있고, 저녁엔 라이브 공연도 한다. 가장 인기좋은 맥주는 흑맥주인 복과 둥클레스로 500㏄ 한잔에 각 6000원이다. 헬레스와 바이젠은 5000원. 데바수스는 용남면에 자리잡아 한려해상 공원의 절경이 보인다. ●한산섬식당(642-8330) 항구도시 통영에서 회를 맛보지 않으면 서운하다. 선원들이 최고로 꼽는 횟집은 정량동 굴수협뒤쪽의 한산섬식당이다. 회는 계절별로 달라지는데 계절 생선을 잘 모르면 그냥 ‘회 한접시’를 주문하면 된다. 대(大) 5만원(4∼5인분), 소 3만원이다. 요즘엔 전어를 조금씩 내놓는데 기름기가 흐르는 고소한 맛이 그만이다. 매운탕(7000원)맛도 일품이다. 매운탕 생선은 계절별로 바뀌는데 생선회를 먹고 남은 뼈로 매운탕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 2종류의 생선을 통째로 넣고 끓여 낸다. ●호동식당(645-3138) 통영에서 과음한 다음날 해장을 위한 복국을 찾는다면 서호시장의 호동식당이 좋다. 김부자(53)씨가 시어머니 손맛을 이은 것으로 50년이 된 호동식당은 복국(7000원)이 좋다. 매운탕이 아니라 맑은국으로 나오는 복국은 계절별로 조금씩 다른데 요즘은 까치복이 나온다. 한겨울이나 봄철에는 졸복을 내준다. 복뼈다귀와 머리를 우려낸 국물은 투명하고 진하며 맛은 담백하다. 진한 복국 맛을 보고 싶다면 특복국(1만원)도 좋다. ●울산다찌(645-1350) 통영에선 소주 3병에 3만원이다. 보통 3000원인 시중 가격과 비교하면 무척 비싸보인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비싼게 아니다. 전어회·쥐치회 등 5가지의 자연산 회가 나온다. 또 굴·문어·개불·피조개·멍게 등 6가지의 해산물이 안주로 제공되는데 모두 술값에 포함돼 있다. 양도 푸짐하다. 다른 지역에서 통술집이나 실비집과 비슷한데 통영에선 ‘다찌’라고 부른다. 현지 사람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꼽는 다찌집이 미수동 해저터널 가는 길목에 있는 울산다찌를 꼽는다.
  • [데스크 시각] 어느 재벌2세의 때늦은 후회/홍성추 산업부장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중견기업 총수였던 K씨는 요즘 폐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때 그는 재벌 2세라는 신분에다 세칭 일류라는 ‘KS’ 출신에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총수로 촉망받는 재계 인사였다. 그러나 IMF 환란을 넘기지 못하고 ‘워크아웃’ 기업인이라는 나락으로 내몰리고 말았다.K씨는 얼마전 사석에서 기자에게 “선진 이론만 고집하면서 창업정신과 현장을 모른 것이 원인이었다.”고 후회했다. 선대 회장이 왜 그렇게 현장을 중시했는지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고백이었다. 최근 재벌 2·3세들의 경영 형태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오죽해야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창업주들의 도전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질타까지 했을까. 실제로 재벌 2세들의 모험적 기업가 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공격형’에서 ‘관리형’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리스크가 적은 돈벌이에만 혈안이 돼 있다. 투자를 하라고 하면 분위기가 아니다는 말로 치부해 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투자를 할 것인가 하고 오히려 반문할 정도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이 창업주들이 기업을 일으킬 때보다 그렇게 열악한 것인가. 아무리 강성노조가 있고, 고임금으로 효율성이 떨어졌다지만 1960년대나 70년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양질의 노동력과 집중된 산업 인프라 등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업주들은 여건 탓만 한다. 기업 경영은 타이밍이다.90년대 초·중반 기업들은 앞다투어 문어발식 경영을 일삼았다. 빚을 얻어 기업을 인수하고, 인수한 기업의 보증으로 또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식으로 확장 경쟁이 한창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문어발식 경영을 일삼던 기업주들은 거의 철퇴를 맞았다. 그후 2·3세 경영인들은 대부분 관리형 경영자로 돌아섰다. 돈은 있는데 투자는 하지 않고, 투자가 없으니 고용을 늘릴 이유가 없어졌다. 기존 직원들의 수는 명퇴·정리해고 등으로 줄여만 갔다. 여기서 도태된 이들은 결국 실업자로 나앉는 악순환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2·3세들은 손쉽고 리스크가 작은 사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세계 유명 외제차 국내 딜러들 대부분이 재벌 2·3세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재벌 2·3세들은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젠 신분에 걸맞은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할 시점이다. 투자와 고용을 늘리면서 실업자로 내몰리는 사원들을 한 사람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녹슬고 있는 공장에 기름을 칠하고, 큰 이윤이 없더라도 공장이 돌아가도록 독려해야 한다. 선대 회장들이 현장에서 직원들과 노숙을 하면서 공장을 일으켰듯, 도면 하나만 들고 해외에 나가 수주를 받았던 창업주 정신을 본받을 때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세계 최대의 기업인 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이 “이제는 관리를 중시하는 경영자 시대는 끝났으며 성장의 리더십이 절실한 시대”라고 주장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고성장 시대에는 성장의 중요성을 깨우치지 못했다. 지금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저성장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지금의 기업인 화두는 성장이 돼야 하는 것이다.80년대,90년대 문어발식 확장기업인이 외환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했듯이, 다음의 위기는 변화를 읽지 못하는 안주형 기업인에게 먼저 닥칠 수 있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천하대업의 꿈을 잃지 않았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철학이 ‘잘나가던 재벌 2세 총수에서 추락한 재벌 2세’로 떨어지는 길을 막는 평범한 진리일지 모른다. 홍성추 산업부장 sch8@seoul.co.kr
  •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100년 맛 이어받은 전성근 ‘이문설농탕’ 주인

    ●설렁탕 서울을 대표하는 토속음식이다.조선시대 왕이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몸소 쟁기를 끄는 친경례(親耕禮)를 하면서 60세 이상의 노인에게 곰국을 대접하면서 비롯됐다고 한다.왕은 친경례에서 수고한 백성에게 석잔의 술과 음식을 내려줬다.이때 내린 것으로 술은 막걸리,음식은 설렁탕이었다.설렁탕은 현장에서 쟁기질 하던 소를 잡아 끓인 것이 아니다.소를 마구 잡는 법이 아닌데다 설렁탕은 국물이 제대로 우러나오려면 하루는 족히 끓여야 하기 때문이다.쇠고기는 성균관 인근에서 살면서 서울의 쇠고기를 독점 생산,판매하던 반촌(泮村)의 반인들이 댔다고 한다. ■“손기정·김두한·박헌영씨도 한때 단골” “맛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게 100년 장수의 비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으로 알려진 서울 종로구 공평동 종로타워 뒤쪽 이문설농탕 주인 전성근(田聖根·59)씨는 역사의 비결을 묻는 물음에 “오래 됐다고 손님들이 오는 게 아니라 맛이 똑같기 때문에 옵니다.”라고 말했다. 1907년 개업,한 자리에서 98년째 문을 열고있는 최고의 음식점 주인 말치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신선하다.하지만 그 말 속에는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이 담겨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이 넘는다곤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식당은 참으로 드물다.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치열했던 근세사를 건너기가 쉽지 않은 탓일 것이다. 최근 외식산업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취업도 어렵고,정년도 짧아진 세태에서 쉽게 생각하고 창업하는 것이 ‘먹는 장사’다.한 집 건너 새로 문을 열고 그만큼 간판을 내리는 업종이 외식업이다. ●70대는 ‘어린’단골 이런 까닭으로 최고(最古)의 이문설농탕이 주목받는다. 이문설농탕은 전씨 집안이 전적으로 일으킨 가업은 아니다.전씨의 어머니 유원석(2002년 작고)씨가 1960년,양모씨로부터 이문설농탕을 인수해 지켜오다 아들인 전씨에게 물려줬다. 이문설농탕의 간판을 처음 단 사람은 홍모씨로 알려져 있고 그뒤 양씨가 인수해 운영해왔다.이들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창업 연도도 여러 갈래다.당시 경복궁 주위의 경기·배재·중앙·휘문고보 등을 다녔던 노인들의 기억에 따르면 멀게는 1902년부터 짧게는 1907년까지 거슬러 간다.그래서 전씨는 가장 짧은 1907년을 개업 연도로 삼고 있다. 전씨는 “옛날에 이 부근에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할아버지가 돼 손자들 손을 잡고 오시지요.3·4대째 단골이 많지요.저희 집에선 70대는 청춘이고 90대가 돼야 어른 대접을 받습니다.60∼70년 단골이 부지기숩니다.”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70년대 초 건국대 농대를 졸업한 전씨는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과 함께 목장을 운영했다.목장이 사실은 할아버지(田熙哲)대부터 내려온 가업.할아버지는 목원대 전신인 감리교 대전신학원 초대교장을 지낸 목회자였다. 전씨가 식당일에 나선 것은 어머니를 돕기로 한 1981년부터.2∼3년 ‘잠시’ 돕겠다고 식당에 나왔다.“당시만해도 식당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선입견이 달갑잖았지요.”하지만 식당일을 계속하면서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이집은 보통 집이 아니야.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이야.”하는 노인들의 격려에 힘을 얻은 전씨는 식당 운영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오늘의 이문설농탕이 있게 한 공로를 어머니께 돌렸다.그의 어머니 유씨는 1930년대에 이화여전 가사과를 나온 당시의 ‘신여성’이었다.동기로는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의 어머니 이원숙씨가 대표적이다.한국전쟁중이던 50년대 초 부산 광복동에서 유씨는 이씨와 동업으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유씨는 이후 음식점 운영의 길을 걸었다. 이 집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단골들도 역사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시영부통령,국어학자 이희승박사,남로당 거물 박헌영,주먹천하의 김두한 등이 단골이었다.김두한은 10대때 한때 종업원으로 일했다고 전해온다. 80년대는 먹성좋은 운동선수 특히 유도 복싱 레슬링 등 격투기 선수들이 많이 찾았다.당시 유도대표 선수들은 YMCA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고,유도선수들의 소개로 복싱 레슬링 선수까지 이어진 것이다.유도의 하형주,복싱의 김광선 문성길 등이 대표적이다. 단골이 많은 이 집의 한결같은 맛은 100년 전이나 똑같은 설렁탕을 끓여내는 방식에 있다.단지 장작이 연탄에서 액화석유가스(LPG)로,다시 액화천연가스(LNG)로 바뀌었고,무쇠솥이 압력솥으로 변한 것 뿐이다.건물도 일제시대 그대로다. ●퓨전을 이기는 전통의 맛 이 집의 설렁탕은 소의 거의 모든 부위를 넣고 15시간 푹 곤다.국물이 뽀얗고 맛이 담백하면서도 짙다.그래서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부른다. 농후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국물에 분유나 프림 등을 섞는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때 많은 집들이 타격을 입었다.하지만 제대로 끓여내는 것으로 단골로부터 인정을 받아온 이문설농탕은 오히려 더 장사가 잘됐다. “음식을 엉터리로 만들면 손님이 먼저 알아차립니다.”그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유혹도 많지만 맛에 대한 고집으로 프랜차이즈나 분점도 내지 않고 있다. 상호는 1970년대에 이미 등록했다.“요즘 젊은 사람들이 ‘국적없는’ 퓨전 음식을 찾지만 이들도 나이가 들면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문설농탕은 일본 언론매체가 특집으로 다루면서 10여년 전부터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특히 아침 손님은 일본인이 더 많다.전씨는 이런 이유로 이문설농탕은 이제 자신 개인소유의 식당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역사의 명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이 된 까닭이다.“저희 집은 값도 마음대로 못올립니다.단골 어르신들에게 먼저 의향을 여쭤봅니다.”설농탕 보통 한 그릇에 5000원.수십년째 가격에 못이 박혔다. 뽀얀 국물처럼 햇빛에 바래 역사가 쌓이고 있는 이문설농탕.“전통을 잇는 장인의 각오로 이 자리를 지켜나가겠습니다.”라는 전씨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100년기업 100년상품] 국내 最古기업 두산

    우리나라 기업사를 되짚어볼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두산(斗山)이다.우선은 올해가 창립 109년째로 국내 최고(最古)기업(한국기네스북)이란 게 그렇다.또 재벌(財閥) 시스템이 갖는 문제를 한몸에 끌어안고 있다가 존망의 위기에 놓이는 시련을 겪었고,이를 계기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해 변신에 성공했다는 점도 경영학 교과서의 한 장을 장식할 만하다. 두산의 모태는 경기도 광주 출신 소작농의 아들 박승직이 1896년 서울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에 세운 ‘박승직 상점’(포목점)이었다.박승직은 ‘광장’이라는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공익사’라는 국내 최초의 무역회사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박승직은 36년 맏아들 박두병을 회사 취체역(지금의 상무급)으로 입사시키며 2세 경영체제를 구축했다.박두병은 경성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 선진화를 시도했고 46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따 회사명을 ‘두산상회’로 바꿨다. 8·15 광복은 두산이 대형화하는 도약대가 됐다.미 군정청은 한국내 일본인 재산을 처분하면서 쇼와기린(昭和麒麟)맥주의 관리인에 박두병을 지명했다.박두병은 이미 42년부터 쇼와기린의 대리점을 운영해 온 터였다.48년 회사 이름을 동양맥주로,상표는 OB(Oriental Brewery)로 바꿨던 그는 미 군정청이 물러날 때 동양맥주를 34억원에 사들였다. 두산상회와 동양맥주라는 양대축을 기반으로 성장을 거듭하던 두산은 6·25전란 속에 창업자 박승직이 타계하고 서울 영등포 맥주공장이 잿더미로 변하면서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그러나 53년 8월 맥주출하를 재개하면서 회복의 발판을 마련했다.60년대 들어 박두병은 두산상회를 두산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열사 설립 및 인수합병에 박차를 가했다.60년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설립 및 합동통신사 인수,66년 한양식품(코카콜라 제조) 설립,67년 윤한공업(현 두산기계) 설립 등 그룹의 외형은 꾸준히 확대됐다. 박두병은 타계(73년)하기 4년 전인 69년 정수창을 동양맥주 사장에 선임했다.정수창은 일제 쇼와기린맥주 시절 박두병이 직접 뽑았던 사원이었다.이 때부터 10여년간 두산의 ‘전문 경영인 시대’가 이어졌다.81년 두산은 정수창 시대를 마감하고 창업 3세인 박용곤 회장체제를 구축했다. 60∼70년대 고도성장과 중동건설 특수 등에 힘입어 거침없는 성장세를 이어온 두산은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휘청거렸다.식품·출판·건설·기계·전자 등 과도한 사업다각화 속에 주력기업인 동양맥주가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에 추월당해 적자에 빠지는 등 사업부진이 계속됐다.95년 그룹 적자규모는 9000억원,부채비율은 625%나 됐다. 두산의 구조조정은 이 때문에 외환위기 이전인 96년부터 본격화됐다.오너 일가는 3M·네슬레·코닥 등 핵심 합작사 지분매각,코카콜라 영업권 양도,계열사 사옥·토지 매각 등 뼈아픈 구조조정에 들어갔다.98년에는 그룹의 모태인 동양맥주를 벨기에 인터브루에 넘겼고,그룹의 상징이었던 서울 을지로 사옥도 팔았다.100년 역사의 두산이 사라진다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 때의 감량은 나중을 위한 힘의 원천을 비축하는 계기가 됐다.2000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는 두산의 재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기자기한 소비재에서 중후장대한 중공업으로 색깔을 바꾼 두산의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여정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삶과 경영 이야기] ⑨초저가 ‘미샤’ 돌풍 (주)에이블 C&C 서영필 사장

    ㈜에이블C&C의 본사는 회사가 파는 화장품의 가격만큼이나 소박했다.서울 구로구 독산동의 3층짜리 낡은 건물.원래는 교회로 쓰였다고 한다.화장품 회사라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PC 유통혁명의 대명사인 미국 델(Dell)컴퓨터가 창고에서 출발했다는 기억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서영필 사장이 자동판매기에서 캔커피 두개를 꺼내와 자리에 마주앉았다. ●내 안의 나를 발견하다 -1989년 대학(성균관대 화학공학과)을 졸업한 뒤 한 생활용품 회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월급쟁이’ 생활이 내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내 전공을 살린 나만의 회사를 갖고 싶다.” -94년 회사를 나와 방향제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하지만 경험은 없이 의욕만 앞섰다.시장성도 생각하지 않고 무려 40만개를 한꺼번에 만들었다.결과는 비참했다.돈은 돈대로 날리고 마음의 상처도 컸다. -95년에는 ‘엘트리’라는 회사를 세우고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화장품 유통단계에 워낙 거품이 많이 끼어있던 시절,이것 때문에 초기에 꽤 재미를 봤다.원가 1000원짜리 화장품에 1만원짜리 가격표를 붙였다.화장품 매장에서는 80% 할인을 한다며 소비자에게 2000원에 팔았지만 그래도 원가보다는 1000원이 남았다. -하지만 이듬해 도입된 ‘오픈 프라이스 제도’(제품에 정가를 표시하지 않는 것)는 탄탄대로를 달리던 회사를 다시 어렵게 만들었다.화장품 전문점들은 우리가 정해준 가격보다 싸게 팔면서 출혈경쟁에 나섰다.“똑같은 제품의 가격이 가게마다 다르다면 소비자는 우리 회사 제품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화장품 매장들을 다니며 “제발 싸우지 말고 똑같은 가격을 받으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우리 회사처럼 인지도 낮은 업체의 서러움이었다.“브랜드 가치를 지키려면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우리만의 매장이 필요하다.” ●인터넷과 역발상이 만들어낸 가격혁명 -98년쯤부터 확산된 인터넷은 나의 바람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됐다.재빨리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다.우리 제품 사용자들의 반응을 알아볼 요량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많이 올리는 사람들에게 1만 7000원짜리 화장품을 공짜로 보내줬다.예상 외의 성공이었다.인터넷의 힘을 그렇게 일찌감치 피부로 경험한 것은 행운이었다.공짜 화장품을 얻어가려는 회원들이 하룻밤새 수천명씩 늘어났다.특히 여성 회원들이 많아 화장품 외에 영화,드라마,여행 등으로 커뮤니티가 확산돼 사실상의 ‘여성 포털사이트’가 됐다. -하지만 이 ‘행복한 비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경영위기의 원인으로 돌변했다.회원이 급격히 늘면서 배송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됐다.배(화장품)보다 배꼽(배송비)이 더 커져버린 것이었다.글 올리는 사람이 늘면서 이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또 우리 화장품을 공짜로 받아쓰면서도 정작 홈페이지에서는 “역시 공짜화장품보다는 샤넬같은 명품이 좋더라.” 식의 CEO(최고경영자)로서 참기 힘든 글들을 올려댔다.고심 끝에 회원들에게 화장품 공짜배송의 중단을 선언했다. -배송을 중단하자 회원들은 “배송료는 우리가 부담할테니 화장품은 공짜로 계속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곰곰이 따져보니 ‘회원들은 배송료 3000원 정도는 화장품 가격으로 낼 용의는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제품의 내용물은 값싼 플라스틱 용기에 그대로 담되 가격은 3000원으로 하면 화장품 원가가 싸기 때문에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게시판을 읽고 포인트 점수로 화장품을 사고 배송료는 회원들이 내는 것,마케팅만 따라준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혁명적인’ 수익모델이었다.일본의 저가 의류브랜드인 ‘유니클로’(Uniqlo)를 벤치마킹하기로 했다.이 제품은 생산업체인 ‘패스트 리테일 컴퍼니’라는 이름처럼 양질의 제품을 다량 생산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빨리 파는 게 특징이다.일본에서는 ‘유니클로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더군다나 화장품은 옷처럼 브랜드가 바깥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기존의 화장품이 유통되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브랜드로 다른 가격에 팔면 안되기 때문에 2000년 ‘에이블 C&C’라는 회사를 만들어 엘트리와 합병시키고 ‘미샤’라는 브랜드를 따로 만들었다.가격도 더욱 구체화됐다.우체국과 배송 계약을 맺을 때 10%의 부가가치세 300원이 붙어 지금의 미샤 판매가격인 3300원이 나오게 됐다.‘3300원=화장품가격=배송료’였다.중간 유통 단계 없이 제조자인 미샤와 소비자인 뷰티넷 회원들이 온라인 시장에서 직접 만나게 됐다.회원들의 입소문이 번지면서 월 매출이 5억원에 이르렀다. ●회사가 고객에게 설득당한다 -하지만 미샤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3300원이라는 화장품 가격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여전히 힘들었다.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창업투자사들을 대상으로 펀딩(자금모집)을 하려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사업구상을 설명하면 대개 유학파였던 이들이 하는 말은 똑같았다.“샤넬이 있는데 왜 이런걸 씁니까.” 3300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가격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미샤를 사지 않는 고객들도 있었다.“화장품은 비싼게 좋은거야….”라고 말하는 고객들,또 제품의 품질에는 만족해도 미샤라는 이름이 어색해서 수입화장품 케이스에 미샤의 내용물만 옮겨담는 고객들을 보면 가슴이 찢어졌다.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제품의 질이라는 생각뿐이었다.제품 품평회를 열어 회원들이 평가를 하고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회원들이 다시 평가를 하고….끊임없이 회원들과 대화했다.회원들이 홈페이지에 상품 개발을 제안하면 연구소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 신상품을 개발했다.매달 4품목 이상의 신제품이 나왔다.신제품이 나온 뒤 ‘제품에 향이 강하다.’,‘너무 끈적인다.’는 등의 반응이 올라올 때마다 제품을 리뉴얼(수정)했다.시제품이 완제품으로 될 때까지 꼬박 1년 이상 걸렸다.반응이 신통치 않은 제품들은 주저하지 않고 생산을 중단했다. -다행히 지난해 7월 벤처캐피탈 업체인 동원창업투자에서 사업확장이 필요했던 시기에 투자 의사를 밝혀와서 가맹점을 본격적으로 늘려나갈 수 있었다.오프라인 매장 역시 온라인 매장처럼 유통단계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대리점과 소매점을 거치던 기존의 복잡한 화장품 유통구조를 탈피,직영점이나 가맹점 형식을 취하고 ‘선불결제’를 했다.기존의 유통구조는 화장품 제조업체에서 제품이 판매된 뒤에야 돈을 수금하러 다니는 영업사원 수십명을 고용해 인건비가 많이 들었다.또 16개 공장에 제품의 80%의 생산을 맡기는 ‘아웃소싱’을 통해 원가를 절감했다.자체 공장에서도 제품을 만들면서 원가·제조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아웃소싱 업체에 적정 납품가를 요구할 수 있었다.미샤에 대한 입소문이 다시 번지면서 입점하기 어렵다는 현대백화점에서도 가맹점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다.지금 2곳에 입점했는데 잘될 때는 하루 매출이 1000만원에 이른다. ●화장품에 대한 나의 철학 -에이블C&C를 설립하기까지 나 자신도 성공 가능성에 대해 자문해봤다.이 때 60년대 말의 미국의 그룹사운드인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를 생각했다.이들은 자신들의 지적 소유권을 포기했다.기찻길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면 팬들이 뒤따라오면서 음악을 녹음해서 팔았다.이것이야말로 인터넷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브랜드가치 역시 마찬가지다.브랜드 가치는 브랜드가 시장에 얼마나 인지되어서 얼마나 점유하는 지에 대한 척도다.제품 인지도가 올라가서 더 많이 팔리면 원가가 낮아질텐데 이는 가격에 반영 안 된다.영양크림 하나에 40만원을 호가하는 화장품 가격에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장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화장품 제조 능력은 세계 10위권에 들 정도로 우수하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수입 브랜드가 30%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 반성을 해야 한다.지난해 말 회원들이 미샤를 키워준만큼 미샤도 ‘메이드 인 코리아’를 내걸고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에 매장을 내겠다고 약속했다.현재 미샤와 유사한 브랜드가 거리에 생겨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가격’의 화장품 시장이 더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미샤는 제품의 질에 대해 끊임없이 피드백을 해주는 170만명의 인터넷회원이라는 든든한 백이 있다는 점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서영필 사장은 누구 ‘미샤(MISSHA)’로 초저가 화장품 돌풍을 몰고 온 ㈜에이블C&C 서영필(42) 사장은 업계에서 이단아로 통한다.가격 거품을 확 걷어내 비싸야 잘 팔린다는 업계의 통념을 깼다.전국 115개 매장에서 팔리는 700여종 제품 가운데 절반 이상이 3300원짜리다.2000년 회사 설립때 연간 25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지난해 150억원으로 뛰었고 올해에는 10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서 사장은 연말까지 판매가맹점을 200개로 늘릴 계획이다.또 올 여름 오스트레일리아와 싱가포르에도 진출한다.화장품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에 매장을 내겠다는 서 사장의 ‘꿈★’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다. ˝
  • “역시 개성상인” 피는 못속여

    ‘송상(松商)’의 피를 이어받은 ‘개성상인’ 후예들이 각광받고 있다.광복 이후 월남해 자린고비 정신으로 기업을 일군 창업주에 이어 2세들도 눈부신 경영실적을 올리며 선대(先代)들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0여개 회사 눈부신 성장 이어가 지난 9일 선친 서성환 회장의 1주기 추도행사를 마친 태평양 서경배(41) 사장이 개성상인 후예들 가운데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다. 서 사장은 태평양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사업이 급성장,지난해 매출 1조 1000여억원에 순이익만 1500여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최악의 경기불황으로 대부분의 화장품업체가 두 자릿수의 매출 감소를 기록한 것과 대조적으로 화장품업계에서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했다.오는 2015년까지 단일 브랜드로 1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메가 브랜드 10개를 육성해 세계 10대 화장품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야심에 차 있다. 사무기기의 대명사 신도리코 우석형(48) 회장도 개성상인 2세 경영인이다.우 회장은 지난해 매출 5143억원,영업이익 619억원을 올릴 정도로 창업자 고 우상기 회장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돈을 외부에서 빌려 본 적이 없는 ‘무차입 경영’의 기록도 유지하고 있다.우 회장은 “일본,미국,영국 등 외국의 파트너 기업들과 구축된 글로벌 신뢰관계를 통해 세계 시장에 경쟁력 있는 제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라며 송상인의 기개를 자랑했다. 개성상인이 세운 대표적인 기업인 한일시멘트의 고 허채경 회장의 후예들도 능력있는 경영인들로 인정받고 있다.지난 95년 작고한 허 회장의 뒤를 이어 장남 정섭(65)씨가 현재 한일시멘트 명예회장으로 있으며,3남 동섭(56)씨는 회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차남 영섭(63)씨는 일찌감치 독립해 녹십자를 창업했고,4남인 남섭(53)씨는 서울랜드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화장품 임광정(85) 명예회장과 임충헌(63) 회장,동양제철화학을 창업한 이회림(87) 명예회장의 아들 이수영(62) 회장도 개성 출신 기업인들이다. 이밖에 해성그룹 한국제지를 설립한 고 단사천 회장의 아들 단재완(57) 한국제지 회장도 송상의 피를 이어받았다.단 회장은 한국제지를 비롯해 계양전기,한국패키지,해성산업 등 해성그룹을 꾸리며 선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명성을 날리고 있다. 대한유화 이정호(82) 회장과 이순규(45) 사장,서흥캅셀 양창갑(81) 회장과 양주환(52) 사장,성보화학 윤장섭(82) 회장과 윤재천(60) 사장도 개성상인 경영인들이다. ●자린고비 정신이 성공의 비결 개성 출신 기업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탄탄한 재무구조를 중시한다는 점이다.신용을 중시하고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2세 경영인들도 이런 송상의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성실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창업 이후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신도리코를 비롯해 태평양·녹십자·한국제지·한국화장품 등은 부채비율이 50% 이하다.한일시멘트는 선대 허 명예회장의 대를 이어 투명경영을 실천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주는 ‘경제정의 기업상’을 96년,97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세번째 수상했다. 상단을 조직해 전국을 누빈 개성상인들이 생명처럼 중하게 여긴 것은 신용이다.회사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신용을 잃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신용을 쌓고 있다. 개성상인들에게 근검은 좌우명이나 다름없었다.아무리 부유한 상인일지라도 가무(歌舞)와 고기굽는 냄새가 담장 밖을 넘어가면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개성상인 후예 기업인들에게도 이런 근검 정신이 몸에 배어 일상화됐다. 개성상인들은 업종전문화 차원에서 일단 한 가지 사업을 정하면 최고에 이를 때까지 한 우물만 판다는 점도 공통점이다.이것 저것 돈이 된다 싶은 사업에 무조건 뛰어드는 문어발식 확장을 지양하고 한 가지 업종에만 역량을 집중한다. 동양제철화학은 50년대까지만 해도 광산과 시멘트업체,서울은행 등을 소유했으나 대부분 정리하고 30년 이상 공업용 기초화학 제품 생산에만 전념하고 있다.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만 ‘화학공업의 조미료’라 불리는 소다회를 비롯해 기초화학제품에 몰두하고 있다. 태평양은 향수 전문 회사 빠팡 에스쁘아,두발용품 회사 아모스,화장품 포장지를 만드는 태신인팩 등 계열사대부분이 화장품과 관련된 회사들이다.한국화장품과 한일시멘트도 창업 이래 30여년간 화장업과 양회업에만 전념해왔다. 복사기에서 출발해 최근에는 프린터가 주력 사업이 된 신도리코도 사무기기라는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우 회장은 지난 97년 외환위기 때 풍부한 자금력 때문에 숱한 투자제의를 받았지만 사무기기의 디지털 네트워크 사업에만 매진했다. 개성 출신 기업인들의 강한 결속력과 네트워크도 특징이다.50·60년대 개성 출신들이 창업하는 기업에는 대부분 개성 출신 주주들이 참여할 정도로 강한 단결력을 갖고 있었다. 녹십자는 60년대 초 개성 출신 인사들로 구성됐을 만큼 개성 기업인들의 구심점이 됐다.이북5도민회 중 개성 사람들만 유일하게 ‘송도’라는 소식잡지를 발간해 올 정도다. 개성시민회와 송도고등학교 등을 통해 개성상인 정신을 물려 받은 2세들에게도 부친 세대의 두터운 유대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주말매거진 We/꼬불 꼬불 뒷골목 -서울 천호4동 ‘족발골목’

    도시의 가로가 정장 차림으로 맵시있게 차려입은 신사나 숙녀라면,골목은 일상복을 입은 바로 우리들입니다.그래서 골목길은 정겹고 인간의 정취가 서려 있습니다.1000만 거대 도시의 뒷골목을 찾아 그 유래와 요즈음 풍경을 살펴봄으로써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는,흔해 빠진 말은 않겠습니다.하지만 입소문이 나 전국에서 알아주는 족발이죠.” 서울 지하철 5·8호선 천호역에 내려 3·4번 출구로 나와 현대백화점 옆으로 난 2차로를 걸어 들어가다 보면 한길에서도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떨어진 입맛을 금방 되살릴 듯한 이 은은한 냄새의 주범(?)은 현대백화점에서 7∼8분 거리인 천호4동 417 ‘희망3길’ 족발 골목이다. 천호동산 족발은 인근 423번지에 위치한 이른바 ‘텍사스촌’과 운명(?)을 같이 해왔다는데,업주들은 이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족발전문 골목길로 변한 것도 대규모 윤락가가 들어서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내 대표적 윤락가인 천호4동 423 일대에는 현재 40여개 업소만 남았지만 한때 400여개를 헤아렸다.여기서 생활하던 수천명의 ‘입’을 맞추려는 맛내기 경쟁은 자연스레 불꽃을 튀겼다. ●야화(夜花)들이 만든 천호동 족발의 전성기 “80년대 초에는 천호동이 전국의 ‘족발 열풍’을 주도했습니다.장충동 아래로 치면 서운하지요.” 강원도 철원군이 고향인 선친에 이어 족발집을 운영 중인 철원족발 업주 김광수(50)씨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서울로 피란와서 자신이 태어난 곳도 바로 지금의 가게란다.선친과 함께 상경한 외삼촌이 골목 10여m 앞에 낸 가게도 건재하다. 여행객들과 까다롭기만 한 윤락가 ‘밤꽃’들의 입맛을 사로잡자 천호동 족발의 유명세는 80년대 초 야식 열풍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김씨는 “횟집 못잖게 족발집도 칼질 솜씨가 맛을 내는 데 필수”라면서 “당시 전국 각지에서 천호동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라면 스카우트해가는 바람에 인력 충당에 애를 먹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시민 유영규(40·강동구 암사4동)씨는 “소문이 자자해 고교 때 경기도 광주시에서 버스 타고 와 족발을 사먹은 적도 많다.”고 말했다. ●전쟁통 피란민들이 일궈낸 반세기 전통 보기 드물게 2층짜리 업소가 10여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천호동 족발골목은 3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때 강원도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닭무침,막국수,파전 등 강원도 전통음식과 함께 팔다가 주변 여건 변화에 따라 60년대 말∼70년대 초 전문화 시대를 열었다. 춘천,홍천,철원 등 강원도 지명을 딴 업소가 이를 말해준다.이들 3개 강원도지명 족발집은 창업자의 아들 내외가 대를 이어 영업하며 독특한 맛을 선보이고 있다.나머지도 처음엔 업주가 강원도 출신이었는데,새 주인을 만나면서 천호족발·장충족발·몽땅족발 등으로 가게 이름이 바뀌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교통의 요충지인 이 곳에 강원도 각 지방을 오가는 시외버스터미널이 바로 옆에 들어서 90년대 초 터미널이 한 건설회사에 매각될 때까지 여행자들의 입맛을 끌어당겼다 업주들은 “한창 잘 나갈 때는 하루 매출이 1000만∼15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다.”며 화려했던 옛날을 회고했다. 9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주변 재개발 등으로 환경이 급변해 전성기에 비해 내리막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괜찮은 편이다.경기도 성남시 등 인근 지역은 물론 캐나다·일본 등 해외로부터 단골이 심심찮게 찾아오고,영양식으로 평가되면서 가족단위 고객도 늘었기 때문이다. 업소마다 하루에 평일 40∼50인분,휴일 70∼80인분을 판다.많게는 하루에 돼지 20마리 분량이다. 또한 이 일대가 서울시 뉴타운 건설 예정지에 포함돼 전통은 보존하되 새로운 음식문화에 맞는 리모델링으로 특화,곧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한다는 꿈에 한층 부풀어 있다. 송한수 기자 onekor@
  • “잘나가는 기업 한우물만 팠다”삼성硏 호황기업 분석

    신도리코의 모든 구내 식당에서는 식판에 밥을 주지 않는다.밥공기에 담은 후 뚜껑을 덮어서 배식한다. 일손이 많이 들지만 직원들에게 집에서 먹는 밥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회사측의 배려가 담겨 있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 ‘나홀로 호황’을 구가하는 기업들은 이처럼 작은 것에서도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3일 농심,한샘,신도리코,신세계,태평양 등 ‘내수 불황을 모르는 고성장 5개 기업’이 고속 성장을 질주하는 배경과 비결을 소개했다. 사무기기 1위 업체인 신도리코는 직원들의 복지에 남다른 신경을 쓴다. 충남 아산공장의 5만평 부지 중 70%가 사원들의 복지 공간이다. 노래방,도서실,체력단련장,실내극장,노천극장 등으로 이뤄졌다.또 주인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회사의 경영 상태를 매달 직원들에게 설명한다.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노조를 만들지 않았다.이런 과정이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나 창업(1960년) 이후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연구소는 “핵심 사업에서 확실한 지위를 확보해 높은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면서 “신규 유망분야를 유행처럼 쫓아가지 말고 본업의 경쟁력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
  • [中企를 살리자](4)전문가 좌담

    장지종 기협중앙회 부회장 이장범 구미중기협 회장 서영주 중기청 정책국장 대한매일은 중소기업 집중점검 시리즈를 마치며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정부와 경제단체,기업 대표 등 3명을 초청,‘정책과 현장의 만남’이란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중소기업청 서영주(徐泳柱) 정책국장,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장지종(張志鍾) 상근부회장,경북 구미 중소기업협의회 회장인 이장범(李章範) 가나공사 대표가 참석했다. ●중소기업이 아주 어렵다고 한다.어떤 점에서 그런가. 이장범 대표 지금 산업현장에선 기업하는 사람들이 의욕을 상실하고 종업원들은 현장이 싫어 떠나고 있다. 장지종 부회장 여러가지 이유가 중소기업을 힘겹게 하겠지만 한가지 덧붙이자면 대기업의 노사분규로 발생하는 각종 손실비용을 상당부분 중소기업들이 떠안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대기업 근로자의 임금이 끝없이 오르면서 중소기업과의 임금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대기업은 회사경영이 빡빡해지니까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를 깎고 있다.악순환인 셈이다.중국이나 베트남의 저임금 경쟁력은 이미 우리의 노동 현실과 비교가 안 된다.낮은 가격의 수입품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또한 신용불량자가 급증하자 은행은 애꿎게 중소기업의 자금줄을 조이고 있다.재고가 쌓이니까 은행에서 대출도 안 해주고,기왕 대출한 돈도 빨리 갚으라고 재촉한다.중소기업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대표 과거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시행될 때에는 은행들이 공장시설의 감정 가격을 100% 보장했는데,외환위기 이후엔 기계설비나 건축물을 담보로 쳐주지 않고 있다.요즘 금리가 내렸다고 하지만 우량기업들만 연 6%의 이잣돈을 쓰고 나머지는 11%짜리를 쓴다.은행들이 BIS(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기업 사정도 고려해야 한다. 서영주 국장 근본적으로 중소기업이 글로벌 경제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도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전통산업을 탈피해 선진형 생산구조로 전환하는 것이 지연되었고 혁신능력을 제고하는 데 미흡했다.임금상승,복지후생비용의 증가와 물류비용 증가 등을 상쇄시킬 수 있도록 경쟁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기업들 스스로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 장 부회장 서 국장의 말처럼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현재 중소기업 처지로는 우수한 인재를 데리고 있을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이 대표 중소기업의 자생력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산업 근대화 이후 대기업의 하청구조로 발전해 왔다.대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서 기술집약적 구조로 바뀌었는데 중소기업은 이를 뒤쫓기 힘들었다.대기업은 노동시장의 경쟁력만 악화시켜 놓고 이제 와서 해외로 이전한다고 한다.중소기업은 대기업들이 일거리를 안 주면 그대로 주저앉는다.현재 중소기업의 처지에서 기술이 돋보이는 상품을 개발하거나 경쟁력 있는 해외마케팅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는 없다.우리 중소기업들은 그동안 기술 카피(복제)는 잘 해왔는데,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는 갖지 못했다.단기적인 해결 방안과 중·장기적인 진흥책을 마련할 시점이 됐다. ●중소기업에 가장 절실한 문제는. 장 부회장 정부는 흔히 기업들을 위해 규제완화를 했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정부 각 부처마다 갖고 있는 규제에 안 걸리는 것이 없다.규제가 풀려도 또 다른 규제가 기업을 조인다. 서 국장 중소기업이 가장 어렵다고 여기는 것은 인력난과 판로(販路)문제일 것이다.중소기업의 인력부족은 지난 5월 기준으로 약 20만명으로 추산된다.특히 이 가운데 생산직 근로자의 부족은 17만명이나 된다.상품재고율은 지난해 12월 8.1%였으나 금년 6월에는 16.0%로 두배로 높아졌다.중국 등지의 저가 상품이 우리 상품이 설 땅을 잃게 만들었다. 장 부회장 중소기업은 인력난을 겪고 있지만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 6월 현재 20대 청년실업자는 33만명이나 된다.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다.의식을 바꾸기 위해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용돈 안 주기 운동’이라도 해야 한다.눈높이를 낮춰야 한다.판로문제와 관련해서,지적재산권 보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중소기업이 어렵다고 하지만 기술 좋은 기업들도 제법 많다.특허까지 냈는데 복제품이 돌아다닌다면 정말 기업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장 부회장 중소기업이 살려면 기업인들이 신명나게 기업을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이를 위해선 사회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초등학교 때부터 수출기업인들을 받드는 교육을 해야 한다.요즘 머리 큰 자녀들은 아버지가 중소기업 사장이라는 것을 숨긴다고 한다.사람들이 툭하면 “너희집은 부도나지 않느냐.”고 묻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 국장 정부도 기업인들의 사기진작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수출기업인이 애국자로 통하는 시대를 만들고 싶다.이를 제도화하기 위해 오는 2010년까지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발전상을 연구하고 있다.기업인들에게 발전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다.목표를 제시하고 로드맵을 만들어 그대로 따르도록 할 계획이다. 이 대표 서 국장께 묻고 싶다.대기업과 중소기업,업종간의 양극화,지역과 지역과의 양극화 현상이 최근엔 더욱 심해지고 있다.지방분권화를 한다면서 산업이 수도권에 집중되도록 하고 있다.수도권에 기술과 인력이 집중되고있다.지방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상당한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30년 가까이 기업을 운영한 경험에서 보면 현재 구미공단의 땅 값은 평당 40만원선인데,수도권에 공장을 지어 5년만 지나면 땅값 상승폭이 100만원 이상에 달한다.공장 운영으로 돈을 벌면서 부동산 가치도 커진다.담보력도 높아진다.지방분권화를 외치면서 시장원리에 이를 맡기면 모두가 수도권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정부가 지금 해 줄 일은 지방에 특화산업단지를 만들어 육성하는 것이다.세법도 손질해서 지방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지방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에겐 세금도 감면해 주어야 한다. ●획기적인 중소기업 구조개편 어떻게 해야 하나. 서 국장 정부는 근로자 10명 미만의 소상공인 기업에 대해 정책적 배려를 구상하고 있다.벤처기업뿐만 아니라 중소제조업들에도 구조개편 문제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려면 그 같은 소득 수준에 맞게 산업구조도 고도화돼야 한다.불필요한 사업구조는 축소 또는 폐지돼야 한다.정부는 선택과 집중을 기본 틀로 구조개편 작업을 하려고 한다.가격경쟁력을 상실했거나 비용이 과다한 분야는 구조조정을 통해 업종전환이 필요하다.고(高)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장 부회장 경제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획기적인 정책이 무엇이 있겠나.경제운용에서 획기적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리스크(위험)가 높다는 말이다.우선 정부는 업계와 현장의 의견을 꼼꼼히 챙겨보고 단계적이고 점차적으로 구조개편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이 대표 우리나라는 산업근대화 이후 40년만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에 도달했다.그런데 어떻게 수년안에 2만달러 시대를 열 수 있나.방법은 한 가지다.이 부회장의 말씀을 이해는 하지만 지금 중소기업에는 과감하고 획기적인 정책적 배려를 해줘야 한다.각 부처마다 중소기업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지원’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달라.지원이 아니라 자생력을 갖출 수 있는 보호육성 정책을 펴달라는 말이다.1960년 제2공화국 때 정부에 중소기업국이 생기고 김영삼 정부 때 중소기업청이 만들어졌다.지금은 중기청을 강력한힘을 지닌 부처로 승격시켜야 한다.산만한 중기정책을 곳곳에서 양산하기보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학계와 해외지사,단체,정부·민간 연구소 등을 망라해 일관된 기업정책을 펴야 한다. ●중소기업 인수·합병(M&A)을 위해 필요한 점은. 장 부회장 기업인들은 창업한 뒤 나중에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인식을 달리해서 안 되는 사업은 빨리 접고 다른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 이 대표 나는 이미 10년 전부터 중소제조업도 벤처기업들처럼 M&A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M&A가 기업을 살리고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길이라고 말했다.과거엔 5개 기업이 같은 상품을 만들어도 별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은 고비용을 견디지 못해 모두 쓰러지는 꼴이 되고 있다. 장 부회장 M&A는 제도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기업인들의 의식이 중요하다.M&A는 기업을 운영하다 너무 어려워 망하기 직전에 하는 빚잔치쯤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되묻고 싶다. 이 대표 기업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현실적으로 기업을 통·폐합하면 설비의 자산가치는모두 사라진다.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준 뒤 기업인을 독려해야 한다. 서 국장 수도권에 기업이 집중되는 것이 현실이다.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펴겠다.수도권 집중문제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검토할 사안으로 좋은 지적을 해주셨다.중소기업 M&A는 현재 법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실패한 기업의 자산가치를 재활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정부는 중소기업 M&A에 대해 상당한 비중을 갖고 정책을 펴기로 했다.중소기업 M&A는 기업문화가 우선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대표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은 회사 이름 때문에 자부심을 갖고 있고 월급도 높다.중소기업 근로자들에게도 그와 견줄 수 있는 혜택을 주어야 한다.중소기업 근로자들에게 세제혜택을 주어야 한다.학자금도 융자해 주어야 한다.기술평가기관이 지역마다 있으면 좋겠다. 국가의 기술평가와 금융지원이 잘 연계돼야 한다.러시아 등지를 돌아보면 괜찮은 기술이 많이 있다.러시아의 기술력을 우리의 자본력과 합치면 산업발전을 이룰 수 있다.이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 달라. 사회·정리 김경운기자 kkwoon@
  • 이사람 / 한국 라면의 산증인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

    한국 라면의 산증인’ 전중윤(全仲潤·83) 삼양식품 회장.라면 하나로 1960년대 보릿고개를 해소하는 데 일조(一助)한 ‘그 사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생산된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작지만 단단한 체구였다.적어도 20년은 젊게 보이는,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특별한 건강비결은 없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틈만 나면 뛰거나 걷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점심 식사 후 30분 정도 낮잠을 즐기고 주말이면 강원도 대관령 삼양목장을 찾아 맑은 공기를 마시는 습관도 건강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한때 즐기던 골프는 1998년 회사가 화의를 신청하면서 그만뒀다. “1961년 회사를 설립해 승승장구했지요.그런데 1989년 우리 회사를 포함한 5개 식품업체들이 라면에 비식용 우지(牛脂)를 넣었다고 검찰이 발표했어요.이 무슨 날벼락입니까.나중에 대법원이 무죄라고 판결했지만 엄청난 타격을 받았어요.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경영난이 심화돼 화의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최근 영업이익이 몇년째 흑자를 보이고 있어 2,3년이 지나면 화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주거래은행인 신한은행 등 채권단이 지난달 채무액 2300억원 중 보증채무 400억원을 출자전환해 줬습니다.담보채무의 금리는 연 10%에서 7%로,무담보채무는 7%에서 4%로 각각 낮춰줬어요.큰 혜택이지요.” 전 회장은 시간 날 때마다 직원들에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정직과 신용을 가장 앞세워라.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먼 미래를 내다보고 생각하라.그래야만 우리가 일구어놓은 기업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대대손손 번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 30여년 동안 그를 지켜본 정호권(鄭鎬權·전 건국대총장) 박사는 “전 회장은 아마 기업인보다 교수를 했으면 더 잘 했을 것”이라면서 “항상 책을 읽고 확고한 철학도 가지고 있는 데다 바른 정신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고 평했다. 그래서일까.전 회장은 한달에 50만박스씩 팔려 회사의 주력상품으로 40년째 자리를차지하고 있는 삼양라면의 맛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라면시장의 70%를 매운 라면이 차지하고 있지만,삼양라면의 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요즘 입맛으로 치면 맨송맨송할 수 있겠지만,“맵게 먹어 건강에 좋을 게 없다.”는 전 회장의 지론 때문이다.다만 품질만 업그레이드할 뿐이다.전 회장은 “우리나라에 암환자가 많은 것은 맵고 짜게 먹는 탓”이라면서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더라도 처음 내놓은 삼양라면의 맛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먹거리 철학은 경영권을 넘겨준 아들 인장(40)씨에게로 이어졌다. 인장씨는 1999년 처음으로 매운 맛의 수타면을 내놓았다.회사를 살리기 위한 비상대책이었다.그럼에도 무작정 맵게는 하지 않았다.수프를 분말· 플레이크·고추양념 등 세 가지로 만들었다.소비자가 기호에 따라 매운 맛을 조절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다른 회사 제품은 매운맛과 야채 등 두 가지 수프로만 돼 있다.세 개의 수프는 먹거리의 철학을 지키면서도 시장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고심의 결과라고 주변에서는 풀이한다.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매운 라면은 내놓지 않을 작정이다. 그가 ‘우지 파동’을 겪은 것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었다.“(그때를 회고하며 지금도 화가 나는 듯) 난생 처음 듣는 공업용 우지라니,말이나 됩니까.검찰 발표가 무책임했죠. 결국 3개월간 회사 문을 닫고 시중에 유통 중이던 라면을 전량 회수해 사료로 처분했습니다.” 이때 가슴을 차지한 한(恨)을 다스리기 위해 독서에 매달렸다.전 회장이 소장한 책은 무려 9000여권.관심 분야는 식품회사 창업자 답게 주로 식품과 건강 서적이다.요즘은 역사와 철학,불교 책을 읽는다.끊임없이 독서한 덕분에 불교 입문서인 ‘대승불교경전(大乘佛敎經典)’과 교육 방법론인 ‘인격과 교육’ 등의 책을 펴냈다. 정박사는 “전 회장은 특히 불교와 유교 등 동양문화에 철학적 깊이를 두고 있다.”면서 “‘자기가 정당하면 반드시 바로 선다.하지만 한번 잘못하면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후손들에게 해가 미친다.’는 말을 외우고 다닐 정도”라고 전한다. 슬쩍 화제를 정치 등 다른 사안으로 옮기려 하자 전 회장은 손사래를 친다.우지파동에 워낙 ‘덴’ 탓인지 “그런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면서 “정치나 사회 얘기를 하다 보면 잡념이 생겨 회사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라면을 만들 때 안전한 천연 원료만을 고집한다.“다른 업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식품업계가 돈벌이에 급급하면 안됩니다.자칫 안전성이 떨어지고 영양이 부실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식품은 절대 안전해야 합니다.인간은 120살까지 살 수 있습니다.사람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식품이 75%를 기여하는 만큼 건강식품을 만들기 위해 안전성이 검증되고 영양이 많은 성분을 추가해 나갈 계획입니다.” 그의 이같은 생각은 라면산업의 낙관적 전망에서 비롯된다.라면 시장은 해마다 4∼5%씩 꾸준히 신장하고 있고,세계 120여개국에서 소비되고 있다.하지만 경영이 정상화되더라도 결코 사업의 외연(外延) 확장에 치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재무구조 건전화와 윤리경영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라면의 인기는 21세기에도 계속됩니다.가격이싸고,빨리 조리할 수 있으며,맛도 있고,영양을 갖춘 식품이기 때문이죠.특히 시장개방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라면만큼은 수입품이 발을 못 붙일 것입니다.” ‘인생백회 천세우(人生百懷 千歲憂)’ 그의 좌우명이다.사람은 백년을 살지만 천년 후를 생각하자는 뜻이다.폭넓은 독서를 통해 그가 찾아낸 이 좌우명은 인간과 기업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김규환기자 khkim@ ■‘삼양라면' 발자취 ‘제2의 쌀’로 불리던 삼양라면의 탄생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남대문시장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전 회장이 식량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제일생명 사장직을 포기하고 나와 삼양식품을 설립하면서 비롯됐다. 하지만 라면을 생산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계속됐다.1년여 동안 하월곡동 창고에서 숙식을 하며 개발에 착수,우리 입맛에 맞는 라면을 개발했으나 곧바로 생산에 들어가지는 못했다.일본에서 라면기계를 들여올 만한 자금이 없어 생산라인을 갖추지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외환보유고가 1800만달러에 불과할 때였죠.라면기계구입비 6만달러가 어디 있겠습니까.그래서 주무부서인 상공부를 찾아가 설득했습니다.5개월에 걸친 끈질긴 설득작전이 주효해 5만달러를 지원받았죠.” 전 회장은 5만달러중 2만 7000달러로 일본 명성식품으로부터 라면기계 2대를 구입하고 로열티 지불없이 선진 제조기술까지 전수받았다. 지한파(知韓派)인 당시 명성식품 사장이 국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그를 ‘예쁘게’ 봐준 덕택이다. 특히 당시로는 거액인 나머지 2만 3000달러를 국가에 반환함으로써 정부의 신뢰감도 얻었다.63년 9월15일 마침내 ‘삼양라면’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첫발을 내디딘 삼양라면의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광고매체가 발달돼 있지 않아 제대로 홍보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무료 시식회였는데 대성공이었다. 서울역·남대문시장에 설치한 즉석 라면 요리대의 쫄깃쫄깃한 면발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극장가등에서 무료로 나눠주면서 라면은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때마침 정부의 분식장려운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져 라면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라면 개발 초기 2년 동안 무려 1억원의 적자를 낸 삼양식품은 3년째 들어 흑자로 돌아섰다.63년 2900만원에 불과하던 매출액은 65년 2억 3900만원,67년 10억 1400만원,71년 100억원대를 돌파하는 등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삼양식품은 89년 우지파동이라는 직격탄을 맞아 30년 가까이 쌓아온 명성이 뿌리째 흔들렸다. 4000여명이던 종업원들 가운데 1000여명이 떠나갔고,65%를 웃돌던 시장 점유율도 6%대로 곤두박질쳤다. ‘화불단행(禍不單行·화는 잇따라 온다)’이라고 했던가.우지파동으로 위기를 겪는 와중에 97년 외환위기라는 악재가 겹치자 결국 98년 1월 화의를 신청했다. 이후 서울 종로 본사 부지 등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하고 강원레저 등 계열사 매각과 함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했다. 이러한 자구책과 ‘수타면’ 등 신제품 개발에 힘입어 시장 점유율이 20%대로 올라갔다. 지난해에는 2500억원대의 매출과 200억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창출했다. 전중윤 회장은 ●1919년 8월 강원도 철원 출생 ●57년 동방생명보험 부회장 ●61년 제일생명보험 사장 ●61년∼현재 삼양식품 회장 ●67년 경희대 경영행정대학원 졸업 ●76년 연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82년∼현재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 [맛 에세이] 요리사와 명예

    그가 자살했다는군요.리드미컬한 맘보에 맞춰 몸을 살살 흔들며 춤을 추던 잘 생긴 남자 장국영이….놀랍고 안타깝습니다. 음식 동네에도 얼마 전에 유명 요리사의 자살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지난 2월24일,프랑스 최고 요리사 반열에 오른 베르나르 루아조가 자신이 운영 중인 레스토랑 ‘라 코트 도르’(부르고뉴 소재)의 등급 하락을 비관해서 자살한 것입니다.‘라 코트 도르’는 레스토랑 전문 소개서인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았고,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주식이 상장된 레스토랑이다. 그런 레스토랑을 또다른 레스토랑 전문 소개서인 ‘고미오’가 등급을 낮추자 이를 비관한 것이 그의 자살 원인이랍니다. 미슐랭이나 고미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스토랑 가이드북입니다. 타이어 생산업체 창업자인 미슐랭 형제가 1900년에 만든 미슐랭은 처음엔 타이어 구매 고객에게 타이어 판매점 위치나 도로법규,주유소 위치,그리고 운전자의 허기를 달래줄 식당 정보가 실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00년의 세월 동안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있지요.여기서 붙여주는 별(*)의 개수에 따라 레스토랑의 흥망이 좌우됩니다.별이 3개면 아주 훌륭한 음식점이므로 그곳을 가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이 된다는 뜻이죠. 고미오 가이드 역시 1972년 앙리 고와 크리스티앙 미오,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든 책.역시 엄격한 심사를 하고 20점을 만점으로 점수까지 줍니다.베르나르 루아조는 프랑스 미식문화의 자부심과 권위를 상징하는 고미오에서 줄곧 19점을 받았다가 17점으로 2점이 내려간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거죠.그의 자살 이후 레스토랑 평가에 대한 여러가지 불만들이 나오고 있다니 앞으로 레스토랑 평가단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진 셈입니다. 명예 때문에 자살한 요리사는 프랑스 역사 속에도 있습니다.1660년경 프랑스 콩드 왕자의 궁정 요리사였던 ‘바텔’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유명 요리사였던 바텔이 루이 14세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는데 예정에 없던 손님 70명이 더 와서 요리가 모자랐고,다음날 아침에도 예정과 달리 생선이 크게 모자라자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그대로 자살을 해버렸답니다. 그의 삶이 ‘미션’ ‘시티 오브 조이’ 등으로 유명한 롤랑 조페 감독에 의해 ‘바텔’로 영화화되기도 했답니다. 노력 없이 성공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프랑스 요리를 세계 최고로 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는 까닭은 바로 바텔이나 루아조처럼 프랑스 요리사로서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신 혜 연 월간 favor 편집장
  • [맞수 기업·맞수 CEO] 제화업계

    업계에 영원한 챔피언은 없다.선두 주자라고 해서 한눈 팔다가 언제 도전자에게 당할지 모른다.그렇다고 특정 업체의 독주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라이벌이 없으면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이런 맥락에서 보면 라이벌은 시장을 함께 키워가는 파트너인 셈이다.2∼3년을 버티지 못하고 도산하는 기업들이 속출하는 현실에서 수십년씩 장수하며 업종을 대표하는 맞수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곳이 적지 않다.이 기업들의 사령탑을 찾아 기업관과 경영철학,미래전략을 알아본다. ■금강제화 정순엽 사장 금강제화의 이미지는 ‘중후한 멋’을 풍긴다.약간은 보수적이어서 젊은층 공략이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많이 달리졌다.20,30대 패션리더를 겨냥한 독특하고 캐주얼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갑작스런 변화,새로운 브랜드의 남발은 고객에게 친근함보다 어색함을 줍니다.아주 천천히 변화하면서 고객의 니즈(욕구)에 다가가는 것,이것이 50년 금강제화가 걸어온 길입니다.” 정순엽(鄭淳曄·사진·55) 사장은 금강제화의 장수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1954년 10월 고 김동신(金東信·97년 별세) 명예회장이 서울 서대문구 2층 건물에 세운 ‘금강제화산업사’가 국내 1위 제화업체 금강제화의 효시다.1층은 매장,2층은 구두를 만드는 공장이었다.한국전쟁 직후 대부분의 소비재 공급이 수요를 채우지 못하던 때에 과감히 수제(手製)를 탈피,기계화를 통해 대량생산에 나섰다. 60년대 초 서울 광화문·명동매장을 차례로 열고 66년 본사를 금호동으로 이전했다.69년에는 ㈜금강제화로 사명을 바꾸는 등 ‘공격경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70년대는 해외수출에 눈을 돌렸다.국가차원의 수출 장려책에 힘입어 제화업계가 전반적으로 성장했던 때이기도 하다.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던 금강제화는 70년대 중반 무려 생산량의 70∼80%를 일본과 미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 사업규모는 나날이 커졌지만 경영이념인 ‘제일주의’와 ‘인본주의’는 변하지 않았다.제일주의의 기본은 한 우물만 공략할 것,그리고 여기에 조금씩 변화를 가미하는 것이다.기업 이미지나 컨셉트가 대체로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정 사장은 “20,30대 젊은이들이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했다고 해서 이들을 위한 브랜드 개발에만 힘을 쏟다보면 오랜 고객인 40∼50대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이라며 “고객 취향을 따라가기보다 고객의 마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새 브랜드 출시보다 브랜드의 컨셉트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회사운영의 요체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본주의다.“회사는 직원에게 비전을 제시하고,상사는 부하직원에게 행동을 보여줘야 합니다.윗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를 보면서 아랫사람들이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는 것이죠.모든 것은 사람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죠.” 탄탄한 기업이라고 어려움이 없었을까.90년대 후반들어 해외브랜드 유입과 내수급랭은 매출부진으로 이어졌다.매출이 지난 99년 405억 8000만원을 정점으로 2000년,2001년 각각 19%,18.42%의 감소세를 기록했다.그러자 고급화전략에서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지난해 장수브랜드 ‘비제바노’를 수입화 못지않은 최고급 브랜드로 재출시했다.악어·뱀·도마뱀 등 비싼 원자재에 수작업 비율을 절반 수준으로 끌어올린 수십만원대의 고가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최여경기자 kid@kdaily.com ■에스콰이아 이범 회장 ㈜에스콰이아 이범(李范·사진·46) 회장은 유쾌한 최고경영자다.우선 “비즈니스는 즐겨야 오래간다.아니면 투자가 낫다.재미있지 않으면 안한다.”는 경영철학부터 다소 특이하다.그는 여성을 상대로 하고 제품 주기가 짧은 패션만큼 재미있는 사업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 회장은 42년 역사의 에스콰이아를 ‘젊은 상표’로 만들었다.지난해 중장년층을 위한 상표는 아예 없애 버렸다.나이들어 보이는 것을 원하는 여성은 없다는 생각에서 젊은층을 위한 디자인으로 싹 바꿨다. ‘존경하는 남성’이란 뜻의 에스콰이아는 미국의 유명한 남성잡지 이름을 본뜬 것이다.서구적인 냄새가 나면 무조건 인기를 끌던 60년대,에스콰이아 구두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창업주 이인표(李寅杓) 명예회장은 하루에 기술자 1명이 구두 3켤레를 만들던 수제화에서 출발했다.차남 이범 회장은 지난해 30억원을 들여 구두 공장을 이탈리아 유명 브랜드처럼 카페 분위기로 바꿨다. 1년에 5∼6번은 이탈리아로 해외출장을 간다는 이 회장은 “이탈리아인들은 한국인과 기질이 똑 같다.”며 “이탈리아에서 패션과 연예오락 산업이 성공한 것처럼 한국의 패션과 연예오락 산업도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그는 해외출장을 가도 패션쇼장보다 직접 매장에 들러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을 살펴볼 정도로 철저히 ‘현장경영’을 중시한다. 에스콰이아의 40년 장수비결도 고객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고객의 목소리를 가장 두려워한 덕분이라고 밝혔다.때문에 에스콰이아는 본사보다 매장 직원의 대우가 훨씬 좋다고 한다. 창업주는 1주 매출의 절반 이상을 올리는 주말 매장을 놔두고 골프장에 갈 수 없다며 임원들에게 골프를 치지못하게 했다.지난해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으니 올해는 골프를 배워볼까 생각중이라고 이 회장은 웃었다. 이 회장은 영화와 잡지를 제작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에 대해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예술하셨을분”이라고 소개했다.창업주의 취향이 서로 달라 경쟁업체인 금강제화는 기능성과 남성화에,에스콰이아는 디자인과 여성화에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에스콰이아를 이탈리아의 구치나 프랑스의 샤넬과 같은 세계적인 패션회사로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구두 매출은 줄이고 가방,의류,향수,시계 등의 매출을 늘릴 생각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상품권 남발로 구두 매출액이 너무 많습니다.패션은 매출 1위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재구매율과 상표 선호도에서 1위를 차지해야 합니다.”화장품 등 새로운 분야는 직원을 뽑아 연구 중이라며 2년쯤 뒤에 새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구두는 1년에 6번,의류는 8번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패션산업에서 그의 번뜩이는 감각과 몰아붙이는 집중력이 에스콰이아를 세계적인 상표로 올려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윤창수기자 geo@
  • 복지40~80 / 기초생활보장제-복지국가 진입 ‘절반의 성공’

    우리나라의 복지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 3년째에 접어들었다. 1999년 9월 법이 제정돼 2000년 10월 시행된 이 제도는 97년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실업을 극복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노숙자 등 근로능력이 있는 빈곤인구가 급증하고 가정이 해체되는 등 미증유의 사회적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근로능력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를 따지기 이전에 최저생계비 이하 저소득층의 기초생활을 국가가 보장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이는 종전의 생활보호법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저성장,고실업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공공부조제도의 출범을 의미했다.기초생활보장제가 시행되기 이전 40년동안 노인,장애인 등 근로무능력자에 대한 단순생계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보호법이 빈곤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에게 돌리면서 복지의 개념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시혜적 조치로 여겼다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복지를 국민의 권리이며 국가의 의무로 보는 복지개념의 일대 전환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생산적 복지’의 추진이라는 출범구호와는 달리 일단 수급자로 선정된 저소득계층은 제도아래서 주어지는 현금급여,의료보호 등 달콤한 혜택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빈곤의 악순환을 겪는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지적됐다.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자활인프라를 확충하고 근로유인제도를 도입하는 등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시행 3년째를 맞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성과 및 올해의 정책 방향을 짚어본다. ●올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나 현금지급수준이 4인가구 기준으로 87만원에서 89만원으로 인상됐으며 부양비 부과율 30% 대상자를 신설,조부모·손자와 같이 부양의무가 약한 부양의무자의 부담을 줄여 주는 등 보장제도가 내실화됐다.자활특례대상자중 의료급여 수급자를 개인에서 가구전체로 확대도 눈에 띈다. 사회복지시설 입소자의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선정기준이 완화돼 근로소득을 장기저축하면 소득산정시 공제해준다.부모의 이혼 및 재혼 등 가족관계가 단절돼 부양을 받지 못하는 시설 입소자,미혼모,성매매여성,에이즈감염자등은 부양의무자 조사를 유예해준다.시설 입소자의 생일축하금,신발비 등을 신규로 지원하는 한편 보장시설에는 정부양곡을 50% 싸게 공급하는 방안도 마련했다.또 사회적응기간이 필요한 출소자 등 사회저변의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주거가 곤란해 형제집에 얹혀사는 경우도 별도세대로 인정해 준다.무엇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선정 및 급여기준이 되는 소득,재산기준을 소득인정액 기준으로 일원화하는 재산의 소득환산제가 시행된다.소득은 낮지만 재산을 다소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수급자가 될 수 없었던 가구도 보호대상이 된 것이다. ●자활사업 활성화가 기초생활보장제의 핵심 기초생활보장제는 근본적으로 자활을 목표로 하고 있다.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근로의욕을 고취하고 근로이탈 방지를 위해 소득중 일정비율을 공제하는 소득공제제도의 경우 상시근로자,자활사업참가자 등 근로소득이 파악되는 5만명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실시한다.특히 소득창출형 자활사업자들에게는 급여를 인상해주거나 차별지급키로 했다.자활후견기관 사업참여자들이 독립채산제 형태의 사업체로 운영하는 자활공동체를 198곳에서 350곳으로 대폭 확충할 방침이다.이에 따라 자활공동체 참여자의 월평균 소득이 지난해 66만5000원에서 올해는 76만5000원으로 10만원 정도 오를 전망이다.지방자치단체의 기초생활보장기금 796억원을 활용,자활공동체 창업시 지원하는 7000만원 한도의 전세점포지원금을 지난해의 20곳에서 올해는 100곳까지 늘리기로 했다.자활지원사업의 5대 표준화 사업으로 간병,집수리,청소,음식물 및 폐자원 재활용사업으로 정했다.집수리대상가구는 3만가구에서 5만가구로 확대되고 간병도우미 사업 참여자도 2500명에서 4000명으로 늘어난다. ●의료급여제도의 사각지대 해소 의료급여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적정급여 수준을 보장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자활특례자 7000명에게 의료급여 2종혜택을 부여하고 2종 수급자가 병원에 입원했을때 30일간의 본인부담금이 30만원을 초과하면 초과금액의 50%를 깎아준다. 또 1종 수급권자의 연령기준 및 질병기준을 강화하고 32개 시·군·구에 의료급여 전담인력을 1명씩 배치,수급자 상담 및 교육 등 사례관리를 실시토록 했다.사회복지전담공무원들의 자질을 높이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익근무요원 3000명을 보조인력으로 신규지원하고 38억원을 들여 개인휴대용단말기(PDA)를 보급한다. 노주석기자 joo@kdaily.com ★전문가 의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생겨난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우리나라를 복지국가로 격상시킨 획기적인 제도임에 틀림없다.그러나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몇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향후 이러한 문제점은 중장기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첫째 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복지국가의 걸음마단계에 해당하는 초보적 수준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무엇보다도 현행 제도가 추구하는 보장수준이 최저보장에 머물고 있으며 선진복지국가들이 1960년대 이미 달성했던 적정수준 보장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기초보장의 수준을 최저수준과 적정수준으로 구분할 때 우리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절대빈곤 개념에 바탕을 둔 최저수준 보장을 목표로하고 있으며 상대빈곤에 기초한 적정수준 보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경제력을 고려할 때 절대빈곤 개념에 입각한 현행 기초보장 수준은 중장기적으로 상대빈곤 개념을 바탕으로 도출된 적정수준의 보장으로 개선돼야 한다.또 현재 획일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최저보장 기준은 거주지역과 가구특성 등을 고려,다양한 욕구에 맞게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현행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부양의무자 기준 재산기준 등으로 인해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계층이 존재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따라서 중장기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의 완화 등을 통해 최저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로부터 배제되는 계층을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현행 제도는 최저 생활보장을 위해 최저생계비 수준이하의 소득을 가진 근로무능력자와 근로능력자 모두에게 그 차액만큼을 지급하는 보충급여방식을 채택하고 있다.이러한 보충급여체계는 근로소득이 증가해도 급여가 감소함으로써 가처분소득이 동일해지기 때문에 수급자의 근로의욕 저하와 수급자간의 형평성 문제를 낳는다.단기적으로 근로소득공제 등을 시행하고 중장기적으로는 근로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는 보충급여체계의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행 제도는 동일한 선정기준에 의해 생계,주거,의료,교육 등 모든 급여가 통합적으로 제공되고 있는데 이는 빈곤선 이상의 소득이 있지만 의료,교육,주거 등 부가적인 급여에 대한 욕구가 있는 차상위계층을 수급자로 머물도록 유인,공공부조제도에 대한 의존 및 부정수급의 문제를 낳고 있다.생계급여 이외의 부가적인 급여에 대한 분리 운영 등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포함한 공공부조제도체계에 대한 전반적인 개선이 중장기적으로 요구되는 대목이다.
  • 맞수 기업 맞수 CEO/광고

    ★광고-전풍 오리콤사장vs웰콤대표 문애란 ‘영원한 강자는 없지만 영원한 맞수는 있다.’ 재계만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도 없다.그러나 무한경쟁의 세계에서도 엎치락 뒤치락하며 나란히 성공가도를 달리는 기업이 있다.1945년 해방 이후 57년간 국내 도료산업을 이끌고 있는 노루표-제비표페인트,몇 안되는 토종기업으로 국내 광고계를 주름잡고 있는 웰콤-오리콤,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명가(名家)의 맥을 잇는한국도자기-행남자기가 대표적 사례다. 외국계자본이 50%을 웃도는 국내 광고업계에서 토종 광고회사는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이 중 최근 주목받는 두 회사의 CEO가 오리콤 전풍(田豊·48) 사장과 웰콤 문애란(文愛蘭·49) 대표. 두 CEO는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독특한 리더십으로,팔방미인으로 광고계에서 고유의 이미지를 전파하고 있다는 점은 같다.그러나 전 사장이 질레트,오랄비 등 외국계 기업을 두루 거친 반면 문 대표는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20여년을 광고제작에 몸담아 온 광고계의 대모(代母)다. 지난 2월 전 사장 취임당시 오리콤의 성적은 정체 상태였다.‘경쟁PT(프리젠테이션)’의 승률은 10%대.35년 역사의 오리콤으로선 부끄러운 성적이었다. 취임 즉시 ‘업계 5위권 진입’을 경영목표로 정하고 우수 인재 확보에 총력을 쏟았다. 전 사장은 ‘펀(Fun)경영’을 강조한다.“신바람을 일으켜야 회사가 산다.”는 것이다.오리콤은 올 하반기 경쟁PT에서 6연승의 성과를 냈다. 웰콤의 문 대표는 광고계의 유일한 여성 CEO.크리에이티브 부문에서 잔뼈가 굵었다.그래서 처음도,끝도 오로지 ‘창조·창의·독창’이다. CEO 주도의 경영방식을 탈피,직원들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독려했다.각각의팀을 독립된 전문집단으로 인정했다.팀의 CEO인 팀장이 광고 전반을 맡고 회사의 CEO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면서 마케팅에 충실한 광고를 만들고 있다. 광고인의 생명인 ‘감(感)’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달에 한차례 전직원이 참여하는 ‘감(感)따기 대회’를 갖고 있다.경쟁 PT를 갖고 감과 상금을 준다. 최여경기자 ★페인트-'노루표'회장 한영재vs'제비표'사장 신경태 노루표페인트(디피아이·옛 대한페인트)와 제비표페인트(건설화학공업)는국내 도료 분야의 양대 산맥이다. 대표적인 해방둥이 기업인데다 회사이름보다 브랜드명이 더 유명하다는 점,철저히 ‘선택과 집중’을 중시하는 점 등공통점이 많다. 노루표페인트는 지난 45년 서울 회현동의 한 허름한 건물에서 일제 중고기계 1대를 갖추고 창업해 현재 도료관련 8개 계열사,한해 매출액 5000억원의기업으로 성장했다. ‘노루표’는 노루처럼 거짓말하지 않고 투명경영을 하겠다는 고 한정대 선대 회장의 뜻을 이어받은 브랜드다.2세 경영인 한영재(韓榮宰·47) 회장의경영철학도 이에 기초한다.지난 88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표이사를 맡은 그는 선친의 경영이념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투명경영’ 덕분에 지난 97년 이후 임직원의 40%를 줄이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했지만 별다른 노사마찰을 빚지 않았다. 제비표페인트의 경영방침은 다소 공격적이다.고 황학구 창업주가 45년 12월부산에 차린 도료회사가 제비표페인트의 모태.지난 52년 건설화학공업으로상호를 바꾸고 제비표라는 브랜드명을 도입했다.유달리 새를 좋아했던 창업주가 계절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제비’를 상표로 정한 것이다.현재 12개 계열사를 거느린 강남그룹으로 성장,연간 매출이 5000억원에 이른다. 지난 2000년 대표이사에 오른 신경태(申敬泰·63) 사장의 경영목표는 ‘지속적인 신기술 개발’.이를 위해 250만달러를 들여 7000여평 규모의 중국 제2공장을 세우고,제1공장의 생산량을 3배 이상 늘리는 등 중국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 ★도자기-행남자기 회장 김용주vs한국도자기회장 김동수 ‘60년 경쟁속에 서로 닮아가는 기업?’ 한국의 대표적인 도자기 업체인 행남자기와 한국도자기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CEO의 경영스타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김용주(金容柱) 행남자기 회장은 노사협력을 경영의최우선 과제로 꼽는다.창업 이래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전 직원을 가족이라고 여긴다.회사를 생계유지 수단이 아닌 집과 같은 편안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철학이다.김준형(金浚炯) 명예회장의 영향이 크다.김 명예회장은 1963년 노조 설립 당시 직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직접 노조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기업문화는 현 김용주 회장에게도 그대로 배어 나온다.한달에 10일 가량은 해외에 머물 만큼 바쁘지만 직원들의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는다. 행남자기는 최근 새 브랜드 ‘모디(Modih)’를 내놓고 과거 중저가 위주의제품 수출이 아닌 고급 본차이나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김동수(金東洙) 한국도자기 회장도 인간중심의 경영으로 유명하다.도자기는 장인정신이 깃든작품임을 잘 알기 때문에 직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남달리 애를 쓴다.무료식당,목욕실,사원후생복지관,실내체육관,사원용 아파트 등을 지었고 미취학자녀를 돌보는 어린이집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도자기에는 10년 이상 장기 근속사원이 20%를 웃돌고 부부사원,형제·자매 사원이 많다.외환위기 때도 단 한명의 정리해고자가 없었다.그렇다고해서 방어적인 경영만 하는 것은 아니다.내년 수출목표를 지난해보다 50∼70%로 늘린 것이 단적인 예다. 김회장은 “국제품질인증 ISO9001과 ISO14001을 세계 도자기업계 최초로 획득했다.”며 “2005년에는 세계 1위의 도자기 기업을 목표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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