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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꽂이]

    ●여름이 좋아(민느 글, 나탈리 포르티에 그림, 이정주 옮김, 어린이작가정신 펴냄) 산에 텐트를 치고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감상하고, 참나무나 느티나무를 구별해보고, 아무 일도 안 하고 한낮 무더위를 낮잠으로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름방학 중에 꼭 해보면 좋은 일들이 길게 소개돼 있다. 8500원. ●형제가 간다(방미진 글, 이경석 그림, 창비 펴냄) 열 살 형 봉호, 아홉 살 동생 경호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귀엽고 인사성 밝고, 성격 좋은 형은 인기 짱이지만, 공부가 더디고 혼자 책읽기도 힘들어하는 동생은 학교에서 ‘꼴통’, 집에서 ‘골칫거리’. 하지만 형에게 비밀이 있었으니, 형도 꼴통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또는 그래서 형제는 즐겁다. 8500원. ●흥부네 똥개(이형진 글 그림, 느림보 펴냄) 점박이는 흥부네 집에서 키우는 잡종개다. 점박이는 자신이 흥부 자식 열두 남매 중 아홉째로 믿고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점박이는 똥을 즐긴다. 그러나 막내 흔들이가 병이 들자 흥부는 점박이를 ‘잡자’고 한다. 똥개 눈에 비친 인간은 흥부조차도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이다. 9800원. ●물을 찾는 아이(잔 오머로드 지음, 노경실 옮김, 해와나무 펴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농장에 사는 두기는 가뭄에 농장이 타들어가자 나뭇가지를 들고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냈던 할아버지를 따라 직접 물을 찾아 나선다. 두기는 나뭇가지가 아래 위로 흔들린 지점을 삽으로 파냈지만, 물은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달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두기는 발견한다. 두기의 가족과 말, 사슴들은 충분히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물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8500원. ●개척자와 공상가들(토마스 뷔르케 글, 유영미 옮김, 채연석 감수, 웅진주니어 펴냄) 8월 중에 전남 고흥군의 나로우주센터에서 소형위성발사체인 ‘나로호’를 발사하면 한국은 10번째 우주클럽의 회원국이 된다. 우주 탐험에 도전한 인류의 개척 역사에 이제 한국도 포함되는 것이다. 닐 암스트롱이 있기까지 공상가에 불과했던 개척자들의 이야기. 1만 5000원.
  • 비관주의자 삶 통해 역사의 진보 말하다

    비관주의자 삶 통해 역사의 진보 말하다

    역사의 발전과 세상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낙관론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일까? 아니면 이율배반적이지만 비관론의 외피 속에서 오히려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것일까? 70~80년대 절박했던 민주화운동 대오의 맨앞 혹은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노()작가는 ‘위악적(僞惡的) 비관론’을 들고 나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맡아 잠시 문단 밖으로 외도를 했던 소설가 현기영(68)이 꼬박 10년 만에 새 장편소설 ‘누란’(창비 펴냄)을 내놓았다. 1975년 등단한 이후 참혹했던 제주 4·3사건을 ‘순이 삼촌’,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의 소설로 고발하고, 억눌렸던 역사의 한(恨)을 풀어왔던 현기영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생의 화두인 ‘4·3’을 떠난 소설을 내놓은 셈이다. ●시대정신·공동체의식 실종 비판 ‘누란’은 1980년대 시민의 이름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꿈꾸고 그렸던 시대정신과 공동체 의식의 실종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다. 또한 지금 오히려 더욱 강하게 드리워진 절망과 죽음, 공포의 실체를 직시하는 강고한 시선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틀이 당혹스럽다. 현기영의 작품은 역사와의 두려운 만남을 회피하지 않는 서사의 묵직함과 문장의 아름다움이 특유의 미덕이다. 하지만 ‘누란’은 기존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이런 미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소설은 ‘386운동권의 막내’인 주인공 허무성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 허무성은 동료의 이름을 불고 변절자,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자학적인 심정으로, 고문의 가해자이며 책임자인 박정희주의자 김일강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교수 자리까지 얻는 등 악마가 내민 손을 잡는다. 그러나 ‘자학적인 비관주의자’ 허무성은 87년 6월의 전국민적 승리의 기억과 그 당시 부르짖었던 시대정신을 몸에 각인시키고 있는 인물. 그는 2002년 월드컵 붉은악마의 물결과 서태지 신드롬, 대량생산, 대량소비로만 유지되는 사회, 비판과 저항문화의 실종, 파시즘으로 회귀하는 한국 사회 등에 대해 소설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한’ 비관론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 ‘누란’은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사막 사이에 존재하다 모래폭풍에 뒤덮여 사라진 역사 속의 고대왕국이다. 비관론을 앞세워 풀어낸 작품답게 2009년 한국의 암담함에 빗댄 묵시록적인 제목이다. 현기영은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여전히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서도 “낙관주의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비관론을 갖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당혹해할지 모를 독자들에게 설명했다. ●“4·3에 대한 간절함 더해” 어쨌든 이 작품을 통해 현기영은 제주와 4·3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일까. 현기영은 “4·3은 나에게 실어증까지 앓도록 만든 내면의 억압이었다.”면서 “이를 떠나서는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던 운명의 사건이자 나를 지배해온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일곱 살 소년이 생생히 목도한 목잘린 시체 등 참혹한 4·3학살의 장면들은 쉬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오래 속박됐던 4·3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른 얘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면서 “이 작품을 쓰면서 후련함도 들고,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벗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4·3에 대한 간절함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4·3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최소 3만명 이상 죽음들의 억울함이 새삼스럽게 하나씩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덧붙였다. 변화하는 현기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현기영이 모두 반갑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합리적 보수·성찰적 진보 연대 경색된 분단체제 변혁 나서야

    합리적 보수·성찰적 진보 연대 경색된 분단체제 변혁 나서야

    이명박 정부 출범이후 경색된 남북관계가 좀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면서 2000년 남북이 합의한 6·15공동선언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지내며 분단체제의 체계적 인식과 극복에 매진해온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현 상황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그가 주장하는 ‘한반도식 통일’과 ‘시민참여형 통일’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최근 사회평론집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를 펴낸 백 교수는 11일 “한반도식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궁극적으로는 시민참여 통일과정으로 될 가능성이 오히려 커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명쾌하다. “그 길 말고는 파국을 면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근거는 이렇다. 1994년과 2005년 핵 위기는 모두 북·미 갈등이 주된 요인이었고 남한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위기를 모면했다. 반면 이번 핵 위기는 근본적으로 ‘남한발’인데도 남한 정부는 해결 의지나 능력이 없다. 한반도 문제를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접근하는 미국, 중국, 러시아와 오히려 훼방꾼에 가까운 일본의 입장을 고려할 때 파국을 면하는 최선의 방법은 남한의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길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 교수는 “시민참여형 통일이라고 해서 시민이 정부를 제쳐놓고 통일을 추진하는 건 불가능하고 독일, 베트남, 예멘과 비교할 때 시민이 오랜 기간 꾸준히 참여해 통일과정에 영향을 주는 비중이 훨씬 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시민참여 통일과정의 실천적 개념으로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안했다. “분단체제를 ‘변혁’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분단체제의 실상과 동떨어진 단순논리로 인해 분열되어 있는 여러 세력이 새롭게 힘을 합쳐 참된 ‘중도’를 찾는다.”는 의미다. 수구 세력의 강경한 반북 태도와 마찬가지로 일부 진보세력의 ‘우리끼리의 통일’ 혹은 ‘남한만의 발전’은 남북관계의 발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백 교수는 “공허한 급진노선이나 안이한 개혁노선을 배격하고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가 연대해 총체적인 변혁의 길에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흔히 보수와 진보를 갈라서 얘기하지만 보수로 분류되는 인사 중에서도 합리적인 분들이 많고, 진보 인사 중에서도 ‘내가 추구하는 진보가 진짜 진보인가’ 성찰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 분들끼리의 연대가 얼마나 폭넓게, 그리고 얼마나 짧은 기간내에 이뤄질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이 지점에서 ‘변혁적 중도주의’가 단순히 좌우의 극단을 뺀 중간세력을 겨냥한 정치권의 ‘중도마케팅’과 한묶음으로 엮이는 걸 경계한다. 그가 내세우는 변혁적 중도주의는 원칙과 일관된 경륜, 지속적인 실행력을 갖는 줏대있는 중도 세력을 뜻한다. 백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강화론’에 대해서도 “정치적 선택이란 점에서 일견 중도마케팅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일관된 전략이 아니란 점에서 진짜 중도마케팅을 하는 정치인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백 교수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오바마 정부의 클린턴 특사 파견으로 북·미관계가 개선될 기미를 보일 때 남한이 적극적으로 편승해서 남북관계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오장환문학상에 백무산 시인

    실천문학사와 보은문화원이 공동 주관하는 제2회 오장환 문학상에 시인 백무산(54)씨의 시집 ‘거대한 일상’(창비·2008년)이 선정됐다. 수상자 백씨는 1984년 등단한 이후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밖의 길’ 등 시집을 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다음달 18일이다.
  • ‘40년 詩쟁이·책쟁이’ 이시영 시선집

    이시영은 1980년 창비에서 편집장으로 시작, 2003년 대표이사를 그만둘 때까지 23년 동안 책 만드는 일을 했다. 또 그 기간을 포함,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 등 유신 반대운동으로 시작해 30년 넘게 민주화 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어떤 삶의 모습이어도 이시영의 몫은 시인(詩人).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시조), 월간문학(시)으로 등단한지 꼬박 40년이 됐다. 후배 시인들이 이를 기리며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창비 펴냄)를 냈다. 그가 40년 동안 펴낸 11권의 시집 중 김정환, 고형렬, 김사인, 하종오가 각각 20편 남짓 엄선했다. 1~3부가 각각 28편씩 담고 있다. ‘긴 노래, 짧은 시’는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거의 모든 시를 관통하고 있는, 끈적하게 세상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가없는 애정이 우리네 편안한 입말의 옷을 입고 함빡 담겨 있다. 하지만 이시영의 시세계 40년을 쭈욱 따라가고 싶다면 첫 시 ‘만월’부터 마지막 ‘봄날’까지 한 편 한 편 꼭꼭 씹어서 읽어볼 일이다. 이시영은 고은 시인이 만인보를 쓰기 전인 1970년대부터 사람의 한 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며 시 같은 이야기, 이야기 같은 시로 풀어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후꾸도’, ‘정님이’를 보면 개인의 삶을 꿰뚫고 지나가는 시대가 읽혀진다. 머슴 신세 벗어나려 (도시로)도망가지만 결국 거리에서 사과 좌판 처지 이상 되지 못하고(‘후꾸도’), 정 많던 정님이는 도시로 가서 부엌데기로, 여공으로, 색싯집으로 전전할 수밖에 없다.(‘정님이’) 이시영은 농경사회에서도, 산업화사회에서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되고, 소외되는 형태로 반복됨을 가슴 먹먹함 감추며 애써 덤덤히 이야기한다. 이런 덤덤함은 치열함이 조금씩 걷혀지는 1990년대 시를 모은 2부에서 조금씩 변화한다. 이야기를 풀되 극단적일 정도로 짧은 시의 실험이 시작된다. ‘이 바람 지나면 동백꽃 핀다/ 바다여 하늘이여 한 사나흘 꽝꽝 추워라’(‘오동도’ 전문) 또는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사이’ 전문) 식이다. 이시영은 시선집 앞머리에 “시여, 지난 40여년간 나를 옥죄고 있던 사슬을 풀고 너도 이젠 좀 자유로워지거라.”라고 말하며 시와 또다른 관계를 맺어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日, 천황제 논의 비켜가는 한 진정한 식민지 사과는 난망”

    “日, 천황제 논의 비켜가는 한 진정한 식민지 사과는 난망”

    재일동포 학자 윤건차(65) 가나가와대 교수는 30년간 한·일관계와 민족문제 연구에 매진해왔다. 해방 직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남한과 북한, 일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이니치’(재일조선인)란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일 현대 사상사와 지식인 사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한국 지식인의 이념 지형도를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킨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2000년)과 ‘한·일 근대사상의 교착’(2003년) 등이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윤 교수가 지난 5년간 한·일 현대사의 소용돌이에서 양국 지식인의 사상적 흐름을 비교분석해 집필한 신간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조선인’(창비 펴냄)이 국내에 출간됐다. 지난해 ‘사상체험의 교착’이란 제목으로 일본에서 먼저 소개된 것으로, 지금까지 그가 연구한 한·일 사상사 연구의 결정판이다. 이 책과 첫 시집 ‘겨울숲’(화남 펴냄)의 동시 출간에 맞춰 방한한 그를 지난 20일 서울 명동에서 만났다. 윤 교수는 “‘사상체험’은 머릿속 생각만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결과가 현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이 책은 1945년 해방 또는 패전 이후 한국, 일본, 재일조선인의 역사 속에 각인된 사상체험에 대한 탐구서”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연구는 정보 수집이 어려워 거의 다루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가 보기에 일본 사회의 근원적인 사상 과제는 천황제이다. 그는 “마루야마 마사오, 와다 하루키 등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도 천황제 문제는 비켜간다. 천황제에 대한 논의가 터부시되는 한 식민지 과거를 둘러싼 일본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때문에 한국은 일본 측에 사과를 계속 요구하되 섣부른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최대 과제는 남북 분단의 극복이다. 그는 “북한에 대해서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또 통일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보지 않지만 식민지배의 유산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과업임에는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이 책에서 독특한 시도를 했다. 한국, 일본, 재일조선인의 사회상을 대표한다고 보는 시 68편을 뽑아 분석 자료로 활용했다. 그는 “사회과학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려면 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직접 시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 시에는 일본과 남북한, 세 개의 나라 사이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재일조선인으로 어떻게 고민하고 투쟁하며 살아왔는지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시집 ‘겨울숲’은 대학 때 썼던 시와, 지난해 아내와 사별한 뒤 집중적으로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윤 교수는 향후 과제로 ‘자이니치 정신사’ 연구를 꼽았다. 재일조선인 2세대로서 1세대와 3세대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아마도 자서전을 쓰는 느낌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올해 안식년인 그는 가을 학기에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는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문화 소통하는 인터넷 공간 마련”

    “문화 소통하는 인터넷 공간 마련”

    “지난해 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인터넷에 연재하는 기간에 실시간으로 네티즌과 소통·접촉하면서 ‘네티즌들이 문화적 소통을 하는 인터넷 공간이 중요한데 우리가 방치하고 외면하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느꼈고, 이것이 인터넷잡지 ‘나비’ 출범의 계기가 됐습니다.” 소설가 황석영(66)씨는 21일 서울 프라자호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웹진 ‘나비’의 공동편집인으로 참여하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뒤, “책으로 내는 잡지형태가 인터넷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생각들은 산발적으로 몇년 전부터 해오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씨는 “웹진의 주인공들이 독자들인 만큼 그들의 참여가 많아지고 나아가 ‘젊은’ 문화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이 공간을 통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공동 편집인으로 위촉된 도정일(68) 문학평론가도 이날 “문화에 대한 수요와 욕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이를 충족시킬 만한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는 책을 읽고 문학을 즐기는 문학수요자들도 생산자 대열에 끼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됐다.”고 선언했다. 웹진 ‘나비’는 인터넷서점 ‘예스24’와 창비, 문학동네, 한겨레출판, 위즈덤하우스 등 7개 출판사가 공동으로 창간한 온라인 상의 문화잡지로 이날부터 서비스를 제공했다. ‘나비’는 크게 기성작가의 문학공간인 ‘문학온라인’과 네티즌 참여공간 ‘나는 나비 2.0’으로 구성된다. ‘문학온라인’에서는 시인 김선우씨의 ‘캔들 플라워’, 김도언씨의 ‘꺼져라, 비둘기’, 정수현씨의 ‘셀러브리티’ 등 세 편의 장편소설이 연재된다. 기획물로 서양화가 황주리씨의 미술소설 ‘네버랜드 다이어리’와 가수 김완의 ‘환상스토리’ 등이 연재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엄마와 읽는 동화] 우리 아빠 이름은 반칠득/방미진

    [엄마와 읽는 동화] 우리 아빠 이름은 반칠득/방미진

    설 전날, 아빠와 나는 창원에 있는 큰집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에 올랐다. “멀미 나나?”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나에게 아빠가 물었다. 나는 대꾸도 없이 창밖만 봤다. 넓은 도로가 시원스레 펼쳐지면서 커다란 나무들과 공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어느새 창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창원은 한적하고 깔끔한 도시다. 나는 창원의 탁 트인 느낌이 좋다. 하지만 큰집이 가까워 올수록 멀미는 심해졌다. “멀미 나면 오징어 먹어라.” 아빠가 내 눈치를 보며 오징어를 내밀었다. 나는 아빠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또 술 먹을 거가?” 기어이 말하고 말았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안 묵는다. 정초부터 무슨 술이고.” “약속했데이.” “알았다. 오징어나 묵어라.” 나는 그제야 무시하고 있던 아빠의 손에서 오징어를 받았다. 아빠는 날마다 술을 먹는다. 옛날부터 그랬다. 하지만 친척들 앞에서 술 먹는 것만큼은 정말 싫다. 큰집에 도착했다. 큰엄마, 큰아빠, 식이 형, 고모, 고모부, 영이, 공이. 모두 와 있었다. 다들 들어서는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큰엄마가 아빠 손에 들린 청주 한 병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오느라 힘들었제. 차 안 밀리드나?” 우리가 거실 가운데로 들어올 때까지, 청주는 아빠 손에 그대로 들려 있었다. 아빠는 슬그머니 거실 한쪽에 청주를 내려놓았다. “야! 시내 구경하러 가자!” 식이 형이 말했다. 나는 나가면서 아빠에게 눈짓을 보내, 다시 한 번 술 마시지 말라는 다짐을 해 두었다. 하지만 아빠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 눈을 피했다. 불안한 마음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따라 나왔다. 우리는 길거리 음식을 먹으면서 시내를 구경했다. “경수, 니 키 마이 컸네. 내 보다 더 크나?” 같은 나이인 영이가 바짝 다가와 키를 쟀다.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고 뭘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니야. 경수 오빠야가 더 크다.” 일곱 살인 공이가 내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살갑게 구는 공이 덕에,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 많이 사라졌다. 나는 공이가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동생이라도 되는 듯, 괜히 더 살뜰하게 챙기며 공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큰집이 가까워오자 또 불안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벌써 술판을 벌였는지 떠들썩한 소리가 대문 밖까지 들려왔다. 다행히 아빠는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한잔 더 하소.” 고모가 술을 권했다. “마, 고만 묵을란다.” 아빠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인데 무슨 소리고. 한잔 받아라. 요새 가게는 장사 되나?” 큰아빠가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장사? 잘 되지! 안 될 리가 있나.” 아빠는 몇 년째 회사도 안 나가고 엄마가 하는 분식집 일을 거들고 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손님도, 배달도 줄어 아빠는 하루 종일 가게 구석에 앉아 홀짝거리며 술을 마신다. 아빠는 눈을 반짝이며 술잔을 받았다. 그때부터 아빠는 자제력을 잃고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풍을 쳐댔다. “야는 일등밖에 안 한다.” 아빠가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나는 반에서 30등 하면 잘하는 거다. “야가 이번에 중학교 들어 가제?” 고모가 물었다. “하모. 일등 중학교 안 들어가나. 무슨 시험이든 일등이라.” 입학시험 치는 중학교는 없을 뿐더러 일등 중학교도 없다. 아빠는 계속해서 빤한 거짓말을 해댔다. 친척들 얼굴에 슬슬 지겨운 표정이 드러났다. “니는 고만, 입 좀 다물어라.” 큰아빠가 일어나며 말했다.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큰아빠의 발에 청주병이 걸려 넘어졌다. “뭐가 이래 걸리적거리노? 이게 뭐고?” “식이야 저거 좀 치워라. 술병을 와 저 놔뒀노?” 큰엄마가 삐죽거렸다. “엄마, 냉장고에 넣으까?” “아무데나 갖다 놔라.” 괜히 가슴이 오그라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경수야. 게임하자. 이리 온나.” 식이형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동정 받는 것이 싫었다. 식이형이 나를 억지로 끌었다. 나는 못이긴 척 식이형을 따라 방으로 가면서 아무도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설날 아침이었다. 우리는 제사를 지내고 성묘도 하고 왔다. 집에 돌아와 어른들은 다시 술판을 벌였다. 아빠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나는 그만 마시라고 계속 눈치를 줬다. 하지만 아빠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피했다. 아빠는 술에 취해 또 허풍을 쳐댔다. “동네에 사장님, 사장님 하면서 따르는 사람이 천지다. 내가 운만 따랐으면 벌써 국회의원 돼 있을 놈이라. 큭큭큭.” “쓸데없는 소리 고마해라. 시끄럽다마.” 큰아빠가 말하자 고모도 맞받아쳤다. “코딱지만 한 가게하면서 무슨 사장이고? 제발 정신 좀 차리소. 분수를 알아야지.” “뭐? 분수? 지금 어떤 놈이 내한테 분수 어쩌고 지껄여 샀노? 내가 누군 줄 아나? 어? 반칠득이라고! 반. 칠. 득! 알겠나?”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써댔다. “여기 오빠야 칠득인 거 모르는 사람 있나? 조용하소.” 고모가 화를 냈다. 아빠는 더욱 악을 쓰며 몸부림을 쳐댔다. 급기야는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기 진짜 미칬나! 니 칠뜩이 아니랄까봐 이라나! 와 이라노! 칠뜩이짓 고만해라. 어이!” 큰아빠였다. 엄마가 아빠랑 싸울 때도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큰아빠가 그러니까 눈물이 핑 돌았다. “술 마시면 개다. 개!” 큰엄마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식이 형이 따라 들어왔다. “새끼 우나? 뭘 그라노? 다들 술 채 가지고 헬렐레해서 그러는 거 아이가. 어디 한두 번이가? 니가 이해해라.” 매년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래서 더 싫은 거다. 식이 형도 싫다. 큰아빠 자식이라서 싫다. 친척들도 다 싫다. 영이, 공이도 다 싫다. 창원도 싫고 설날도 싫다. 추석도 싫다. 아빠도 싫다. 어른들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다. 밤이 되자 어느 정도 술이 깨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는 과장되게 웃고 떠들었다. 그 모습이 광대처럼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집에 가자.” 아빠에게 말했다. “하루만 더 있다 가자. 오랜만에 만났다 아이가. 와 그라노?” 왜 그러는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가? 나는 아빠를 계속 따라다니며 졸랐다. “오빠야, 더 있다 가라.” 공이가 나를 잡아끌며 말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 하루만 더 있다 가그라. 이 밤에 어딜 간단 말이고. 차표도 없을 거구만.” 큰엄마였다. “야가 와 자꾸 갈라고 이라노? 아빠 회사도 안 간다 아이가. 오래 있다 가그라 마.” 고모였다. 나는 뚱하니 아빠 팔만 잡고 흔들어댔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왔다. “경수 여자 친구 만날라고 안 그라나. 니 내일 약속 있제. 그자?” 식이 형이 말했다. 고마웠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하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감추려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결국 아빠와 나는 한밤중에 큰집을 나왔다. 아빠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와?” “아빠가 술 마시고 그라니깐 그렇지! 다시는 여기 안 올 거다!” 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나는 아빠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터미널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표도 모두 매진이었다. 우리는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이대로 다시 큰집에 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차라리 여기서 밤을 새야지 싶었다. “뭐 좀 먹을래?” “됐다.” 나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아빠가 내 눈치를 슬슬 봤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가서 표를 구해왔다. “니도 내 싫나?” 대뜸,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꾸만 눈이 시려왔다. 나는 눈에 뭐가 들어간 척, 눈을 비벼댔다. 손등에 물기가 축축하게 묻어났다. “가자!” 아빠가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빠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아빠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빠 손은 꺼끌꺼끌하고 차가웠다. 문득, 아빠 손한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말 가족이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남들 앞에 섰을 때요. 그럴 때면 내 가족이 남들 앞에서 초라하다는 사실이 분하고, 슬프고, 견딜 수가 없어 도망치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못난 부분을 보듬어 주는 것 역시 가족이 아닐까 합니다. 경수가 아빠의 손을 꼭 잡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작가약력 1979년 울산 출생.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술래를 기다리는 아이’로 등단. 지은 책으로는 단편동화집 ‘금이 간 거울’(창비), 명랑심리동화 ‘행복한 자기감정 표현학교’(다산어린이), 청소년소설집 ‘라일락피면’공저(창비), 그림책 ‘비닐봉지풀’(느림보) 등이 있음.
  • “불행히도 현재 상황이 무진(霧津)”

    “불행히도 현재 상황이 무진(霧津)”

    낙후되고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야만적 폭력, 거기 저항하는 이들과 그들을 억압하는 상류층의 교묘한 야합. 공지영의 신작 장편소설 ‘도가니’(창비 펴냄)가 다루는 현실은 어둡기만 하다. ●2년만에 책을 묶어내 ‘즐거운 나의 집’ 이후 2년 만에 책을 묶어냈다. 최근 기자와 만난 공지영은 “소설을 처음 구상했을 때와 마친 지금의 시대상황이 너무 변해 스스로도 놀랐다.”면서 “불행히도 그동안 나라 전체가 무진(霧津)으로 변해간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안개의 도시 ‘무진’은 이번 소설의 배경으로,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따왔다. 그곳에 위치한 청각장애우 학교 ‘자애학원’에서 자행된 장애여성 성폭력 사건이 스토리의 발단. 몇 년 전 광주에서 실제 일어난 일을 모티브로 삼았다. “소설이라는 틀 때문에 사건의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실제 현실은 더 참혹했습니다.” 조그만 신문기사를 보고 작품을 쓰기로 했다는 작가는 관련 문서는 물론, 사건 현장인 광주에도 십여 차례 찾아갔다. 그러다 비슷한 일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가는 여기에 “나는 무쇠처럼 튼튼한 사람인데도 이걸 쓰면서 아팠고 또 쓰고 나서도 계속 아팠다.”고 서글픈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고 아무런 감시가 없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광장에 서 있었던 듯한 피로감 느껴 ‘도가니’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포털 ‘다음’에 연재한 것. 누적 조회수 1100만, 회당 댓글이 적게는 100여건, 많은 날은 800여건까지 달렸다. 첫 인터넷연재를 끝낸 소감은 어떨까. “댓글 말고는 신문연재와 다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6개월간 광장에 서 있었던 듯한 피로감을 느꼈어요. 아직 후유증에 시달려 아무 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댓글로 전하는 독자들의 바람과 자신이 짜놓은 스토리가 충돌할 때 특히 힘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유동적인 분량으로 연재하는 등 인터넷 매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면 한번 더 해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광장의 피로’를 아직 느끼고 있다는 그는 요즘 꿈처럼 달콤한 휴식을 보내고 있다. 곧 집필에 들어갈 차기작은 1980년대 박종철 치사 사건때 부검을 맡았던 황적준 박사를 중심으로 법의학과 역사의 만남을 다룬 소설이라고 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매기의 야구노트(린다 수 박 글·최정인 그림, 해와달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 고려 청자 이야기를 담은 ‘사금파리 한 조각’으로 뉴베리상을 수상한 한국 작가. 골수 야구팬 매기와 한국전쟁에 파병된 짐 아저씨의 우정을 통해 이번엔 한국전쟁과 노근리 사건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초등 고학년 이상. 9900원. ●우리 숲을 지키는 도토리 나무 육형제(이상배 글·조미자 그림, 해와나무 펴냄) 도토리는 도대체 어떤 나무에서 열리는 걸까. 도감을 찾아 봐도 도토리나무는 없는데….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 도토리 열매는 맺는 여섯 종류의 참나무를 재미난 일화와 그림을 곁들여 소개한다. 초등 고학년 이상. 8500원. ●신들의 나라, 그리스(조성자 글, 센 그림, 시공주니어 펴냄) 올림포스 신전, 크노소스 궁전, 아크로폴리스 등 유적지를 보며 이야기를 들으면 그리스 신화가 쏙쏙 들어오지 않을까. 두 번에 걸쳐 그리스를 꼼꼼하게 훑고 온 저자의 살아 있는 경험과 생생한 사진이 그리스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준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1만 1000원. ●똑똑한 뇌의 기발한 그림(요나탄 린드스트룀 글·그림, 김순천 옮김, 웅진주니어 펴냄) 수많은 뇌 관련 지식이 쏟아지지만 뇌는 여전히 신비로운 영역. 아주 간단한 실험과 진기한 체험을 통해 뇌의 기능과 역할을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게 한다. 1만원. ●침대 밑 그림 여행(권재원 글·그림, 창비 펴냄) 한 전자회사가 광고 속에서 세계 명화 속 인물들을 살려냈듯이 이 책도 마찬가지. 호기심 많은 주인공 그림이를 따라 샤갈, 모딜리아니, 고흐, 로댕, 뭉크, 마티스 등 유명 화가의 그림 속 인물들과 시·공간을 넘어 조우하는 경험을 준다. 만화식으로 구성돼 있어 더욱 친근하다. 취학 전 아동부터. 1만원.
  • 일그러진 청춘의 극단성 묘사 따뜻한 인간애로 고통 감싸

    일그러진 청춘의 극단성 묘사 따뜻한 인간애로 고통 감싸

    사내에게는 늘 어미가 없다. 그 탓일까. 남편과 사별한 애 둘 딸린 연상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정신을 못차린다.(‘생각하니 점점’) 혹은 갓 스물을 넘긴 어미 없는 청춘 남녀는 욕짓거리를 일상 언어로 내뱉으면서도 결국 서로를 가련하게 여기며 풋사랑을 일궈간다.(‘바닷가 그 집에서, 이틀’) ●어미없는 등장인물의 우울한 선택 어미 없는 사내의 상실감은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세상의 벼랑 끝 마지막 한 걸음까지 밀려난 남매간의 금지된 사랑(‘아직 아직은’)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아니면 팔뚝에 어미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놓고 살며 끔찍한 연쇄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한다.(‘천국의 기원’) 이상섭이 3년 만에 펴낸 새로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처럼 철저하게 일그러진 가족 관계가 짙게 드리워놓은 그늘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어미없는 청춘들’이다. 세상이 아름답게 반짝이면 반짝일수록 꽃다운 젊음은 역설적으로 더욱 우울해진다. 빼빼 말라비틀어지거나 정반대로 익사 직전의 상황에 내몰려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꿈틀거리는 건강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 그의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표제작 ‘바닷가 그 집에서, 이틀’에서는 어머니가 없는 철없는 젊은 연인들이 자신을, 상대방을 동정하다가 마지막에는 ‘더러운 웅덩이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그리고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한 마리 나비’처럼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다. 또한 그럼에도 ‘여기 왜 왔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가족 관계 안에 희망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강점은 이미 첫 소설집 ‘슬픔의 두께’(2004년)와 두 번째 ‘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2006년)에서 확인된 바 있다. 바다를 무대로, 탄탄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한 삶의 구석진 귀퉁이에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들을 애써 찾아다녔다. 이번 소설집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근친상간, 연쇄 살인, 사체 유기 등 극단적 상황을 보여주며 리얼리즘이라는 문학의 형식적 굴레까지 벗어던진 것 아니냐는 의문을 낳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이상섭의 장점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빛난다. 극단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우연에 내맡기지 않는다. ●풍자·해학의 타고난 이야기꾼 문학평론가 구모룡씨는 “이상섭의 변화는 소위 정공법으로 불리는 서술 전통을 서서히 이탈하는 데서 감지되었다.”면서 “세상의 위악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려는 그의 태도는 상실과 고통을 따스한 인간애로 감싸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상섭은 2002년 ‘바다는 상처를 오래 남기지 않는다’로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하고 있다. 문예적 기교를 앞세운 가벼운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시대이기에 전업작가가 아니면서도 건강한 해학과 풍자를 놓치지 않는 이상섭이 더욱 돋보인다. 내친 김에 구성지고 질펀한 서사를 펼쳐내는, 가슴이 뻑적지근해지는 장편소설을 그에게 기대해본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엄마는 왜 의사·변호사가 되라 하지?

    공부 좀 꽤 하는 아이들이라면 나중에 커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살지도 모르겠다. 직업 선택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이 중차대한 일에 한국의 부모들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왜죠?”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그 직업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돈 많이 벌어 편히 살 수 있으니까.”라는 세속적인 속내를 감추고 “훌륭한 사람이잖니.”라는 궁색한 대답을 내놓았던 부모들에게 이 책의 출현은 반갑다. 창비에서 ‘직업 탐색 보고서’ 시리즈의 1탄으로 ‘궁금해요! 기자가 사는 세상’ ‘궁금해요! 의사가 사는 세상’ ‘궁금해요! 변호사가 사는 세상’ 등 3권을 출간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중학생을 대상으로 삼았다. 의사와 변호사는 부모와 아이들이 선호하는 직업군에 속할 테지만 기자는 좀 의외다. 창비는 지난해 여름방학에 아이들이 관심있는 직업을 알아보기 위해 캠프를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를 토대로 했다고. 책에 나온 기자는 신문기자가 아닌 방송기자로, 연예인처럼 TV에 나온다는 것에 호기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세 직종에 대해 매우 쉽고 소상하게 알려주는데 ‘직업 탐색 보고서’라는 이름표가 무색하지 않다. 이러한 장점은 아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보통 직업의 세계를 알려준다며 일방적으로 정보를 쏟아내기 일쑤인데 이 시리즈는 쌍방향의 교류를 통해 태어났다. 캠프를 통해 선발된 중학생 5명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의사, 변호사, 기자를 찾아가 3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 내용을 실었다. 순진하고 다소 엉뚱한 질문은 오히려 송곳이 되어 직업 세계 구석구석을 파헤친다. 드라마, 영화에 의해 잘못 채색돼 온 부분들이 책을 통해 바로잡힌다. 덕분에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그 직업과 인생에 대한 유용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인터뷰 대상자가 된 세 명의 저자는 서홍관 국립암센터 의사, 이상호 MBC 기자, 금태섭 변호사로 자신의 분야에서 반듯한 걸음걸이를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다. 얼마 전 열린 간담회에서 이들은 “인터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참여했는데 에세이까지 써야 해서 힘들었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후속 기획으로 요리사와 디자이너가 예정돼 있다. 각 9500원.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6·10항쟁 과정 생생히 담아 만화가 최규석 ‘100℃’ 펴내

    6·10항쟁 과정 생생히 담아 만화가 최규석 ‘100℃’ 펴내

    1987년 1월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지자, 건국대 사태로 옥살이를 하고 있던 대학생 영호는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인지, 그 끝이 있는 것인지 괴로워한다. 한 양심수가 벽을 사이에 두고 말을 건넨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보면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가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이 몇도인지, 얼마나 더 불을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나. 다만 그럴 때마다 지금이 99도다…그렇게 믿어야지. 99도에서 그만두면 너무 아깝잖아. 허허허.” 22년이 지난 2009년 6월, 우리는 섭씨 몇도일까? 국내 리얼리즘 만화의 계보를 잇는 최규석(32) 작가가 창비를 통해 ‘100℃’를 펴냈다. 1987년 민주항쟁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지난해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CD 형태로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됐던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반공소년이었던 영호가 대학생이 되며 이제까지 몰랐던 세상에 눈을 뜨고, 그 과정에서 함께하는 영호의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의 이야기를 박종철·이한열 열사, 그리고 6월 항쟁과 씨줄날줄로 엮어낸 팩션 드라마다. 주인공들이 정치적이고 사변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우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인물들이라 교감의 폭은 더욱 크다. 1987년 당시 10살 초등학생으로 그때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최 작가.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역사책과 수기집을 통독했고, 영상물을 섭렵했다. 각종 인터뷰를 통한 증언 청취도 빼놓지 않았다. 최 작가에게 전화를 걸자, 대뜸 본격 민주주의 학습만화라는 부제를 단 부록 ‘그래서 어쩌자고?’가 어땠는지 먼저 묻는다. 시민교육센터 이한 강사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안 교안’을 각색한 부록을 놓고 그는 “청소년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몇 가지 관점만 건져도 좋겠다.”고 말했다. ‘100℃’를 통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는 계속 신경쓰지 않으면 쉽게 변해버리는 연약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빌려 “(민주주의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전작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에도 우리 사회의 현실이 진하게 배어 있다. 자유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이었다는 최 작가는 만화를 그리며 사람을 관찰하고, 캐릭터의 성격을 표현하려다 보니, 정치 사회적인 영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었고, 그래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점점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대개 일관된 그림체를 유지하는 게 보통인데 그의 작품은 성격에 따라 극화체와 명랑체를 오간다. “하고 싶은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라고 웃는 그는 슈퍼히어로들이 사회 기득권층으로 편입돼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과 노동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스펙터클하게 그리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책꽂이]

    ●그네(문동만 지음, 창비 펴냄) 노동자·민중의 건강한 삶을 노래했던 첫 시집 ‘나는 작은 행복도 두렵다’ 이후 13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 시위 현장을 돌아 다니며 만난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세계를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 내고 있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훈훈함을 전하려고 했다. 7000원. ●보이A(조너선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이레 펴냄) 1993년 리버풀에서 일어난 두살배기 영아 살인사건을 소설화했다. 10살 나이로 살인을 저지르고 가석방 이후 교통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며 영웅이 된 소년 A의 이야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만 1000원.
  • 창비의 위기냐, 기회냐

    누가 뭐래도 창비는 40여년의 세월 동안 명실상부하게 민족문학, 리얼리즘 문학 진영의 맏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1인 중심 운영 시스템, 정체성이 모호한 동아리주의, 진지한 비판의 수용을 거부하는 폐쇄성 등을 이유로 일부 젊은 비평가들의 공격에 직면한 상황이기도 하다. 계간지 43년, 출판사 35년 역사의 창비에 또다른 젊은 변화의 기운이 꿈틀대고 있다. 최근 발행된 창비의 계간 문예지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는 젊은 문학평론가 권성우가 쓴 창비의 인문학적 담론과 문학적 담론의 허실에 대한 총체적 비평이 실렸다. ●한기욱 교수의 재반론도 게재 또한 인제대 영문과 교수이자 창비 편집위원인 한기욱을 통해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손정수(계명대 문창과 교수)의 글 ‘진정 물어야했던 것’에 대한 재반론을 실었다. 손정수의 글이 2008년 겨울호 특집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감안하면 재반론으로, 건강한 논쟁의 형식을 띄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겨울호부터 시작해 사회적·문화적 담론의 리더 역할을 재정비하고 있는 창비에 자기 비판을 포함한 담론의 확산, 그리고 소통을 통한 성찰과 혁신이 새삼 기대되는 대목이다. 권성우는 ‘정치적 올바름은 미학적 품격과 만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지난 호에 실렸던 손정수의 글은 백낙청, 한기욱에 대한 전면적이며 직설적인 비판으로 채워져 있었다.”면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 글이 다름아닌 창비 지면에 수록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창비와 대척적인 위치에 있는 비평가의 강도 높은 비판을 수록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창비의 어떤 자부심과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면서 “이는 역으로 대부분의 문예지들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거의 용납하지 않는 편협한 관행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가를 역력히 드러내 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자기 비판을 서슴지 않은 창비에 대한 격려와 동시에 자기 비판을 외면하는 문예지들의 관행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언론과의 대립 기피… 문제 제기 그는 창비에 대한 근본적 비판 자체를 비껴가지 않았다. 권성우는 “창비가 언론문제와 정면 대결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서 “창비가 그 긴 싸움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입장이라면 거대 보수언론의 편파적인 프레임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관건이 될 것이다.”고 언론과의 대립을 기피하려는 창비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한기욱 역시 지난해 겨울호 특집에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실은 뒤 손정수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의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라는 글을 게재했다. 한기욱은 “어떤 관념이나 코드가 아니라 작품의 언어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비평, 다른 비평가의 비평 언어에 담긴 생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독법이 중요하며 이를 사무사(思無邪)와 유물론적으로 하는 비평이라면 어떤 논쟁이든 생산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김수영 미발표시 ‘겨울의 사랑’ 발표

    ‘니가 준 요보(요의 커버)의 꽃잎사귀 위에서 잠을 자고 / 니가 준 수건으로는 아침에 얼굴을 씻고 (중략) / 이만 하면 나는 너의 애정으로 목욕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다’(‘겨울의 사랑’ 중) ‘풀’의 시인 김수영(1921~1968)의 미발표작이 발굴됐다. 기존 민중적·이념적 작풍과는 전혀 다른 애절한 사랑시 한 편이다.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내 벨라지오에서 열린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펴냄) 출간기념 간담회에서 책을 엮은 이영준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은 시인의 부인인 김현경(82) 여사가 보관 중이던 미발표시 ‘겨울의 사랑’을 발굴해 이 책에 실었다고 밝혔다. 김수영 시인은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고 4·19혁명을 기점으로 한 참여시를 발표해 한국 문단의 거대한 뿌리로 추대돼 왔으나 1968년 6월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고인이 남긴 시집은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단 한 권의 시집뿐. 이번 육필 전집은 이 연구원이 40년 넘게 원고를 보관해온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시상 메모와 초고를 일일이 사진으로 촬영해 편집한 것이다. 전집에는 김수영 전집에 수록된 시 177편의 영인본 이외에 지난해 발굴된 시인의 원고와 메모, 김 여사가 정서한 원고 등 모두 354편의 육필 시 원고가 수록돼 있다. 이중 가로 25㎝, 세로 14㎝ 크기인 거친 종이에 검은색 잉크로 쓴 ‘겨울의 사랑’은 지난해 창비를 통해 미발표작이 나올 때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연구원은 “자료 수집을 위해 집안 곳곳을 뒤지던 중 책갈피 사이에 끼워져 있던 이 작품을 편집자가 발견했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김수영이 거제도 수용소에 있던 당시 알게 된 간호장교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당시 각별히 지내던 이 간호장교는 이후 미도파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부인 김현경과 헤어져 있던 김수영을 돌봤다. 이 연구원은 “원고 끝에 완성을 뜻하는 돼지꼬리표가 있는 것으로 봐서 완성작임을 알 수 있다.”면서 “전쟁 중 생사를 몰라 헤어진 김현경 여사와 다시 만나면서 이 작품을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정치적 측면에 많이 치우쳐 작품 자체로 읽어내는 노력은 많이 부족하다.”면서 “주어진 텍스트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창작 과정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전집을 준비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학자 2인의 우리시대를 향한 두가지 시선

    법학자 2인의 우리시대를 향한 두가지 시선

    어려서부터 공부깨나 한 사람치고 ‘판·검사가 돼라.’는 소리를 안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 담임 선생님, 친인척까지 주문처럼 외던 ‘판·검사가 돼라.’는 말에는 다양한 함의가 들어 있다. 개인의 영광과 출세, ‘개천의 용’들에게는 집안의 부흥, 전관예우로 표현되는 막대한 미래의 확보된 부, ‘백’이 생겼다는 안심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판·검사의 신성불가침의 높은 지위와 명예 등등이다. 대통령도 탄핵하는 선진국형(?) 사회가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판· 검사가 돼라.’는 주문에는 결정적으로 ‘법이 한 사회에서 어떤 형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배제돼 있다. 과거와 달리 이것이 사회적 부담이 되는 시대가 됐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로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 불멸의 신성가족 】김두식 지음 창비 펴냄 ‘불멸의 신성가족’(창비 펴냄)은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내부자로서 사법부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과 사법 시스템의 개선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 1년간 판·검사 25명을 인터뷰해 써낸 연구논문이다. 익명을 전제로 한 이 인터뷰는 사법시스템 내부의 썩은 부분을 솔직하게, 또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디가 잘못됐고, 어디가 곪았는가. 왜 판사와 검사, 변호사는 서로 끌어 주고 밀어 주면서 ‘사법 패밀리’를 형성하고, 불멸의, 신성불가침의 가족으로 재구성 될 수밖에 없는지 말이다. 법조계는 매우 좁은 동네다. 대체적으로 같은 대학을 나와 사법연수원에서 같이 교육을 받고, 동기로 묶여서 패키지로 돌아다니는 극소수의 엘리트 집단이다. 이러다 보니 거절할 수 없는 돈이나 청탁 등이 법조계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 이를테면 부장판사로 모시던 선배가 변호사 개업을 해서 참석하게 된 회식자리에서 상품권이나 돈봉투가 뿌려지면, 그 자리에서 받기를 거부하는 청렴한 법조인이 ‘또라이’로 찍힐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새끼 웃기는 놈이더라.’는 평판이 돌면, 승진도 어렵고 아울러 부장판사나 대법관으로 옷을 벗은 뒤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와 달리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재판에 개입해 소장 판사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 왜 벌어질 수 밖에 없는지 파악할 수 있다. 판·검사가 되는 것과 대법관이 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명예와 부가 걸려 있었다. 비교적 청렴하다고 평가되는 이용훈 대법원장의 경우를 보자. 대법관을 마치고 변호사를 지내던 2000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5년 동안 472건의 사건을 수임하고 60억 여원의 수임료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전관예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신동 소리를 듣던 고시생이 바늘구멍 같은 사법시험을 뚫고 나면, ‘마담 뚜’를 거쳐가야 하고, 결혼이란 거래를 마치면 선배 판사들의 빡빡한 도제식 수업을 통해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법조인으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권위에 도전하거나 기존 질서를 흔드는 성향의 사람들은 도태되고, ‘원만한’ 사람들만 살아 남아 최고의 승자가 된다. 이런 역경을 거쳐 법원을 졸업하면, 법원 브로커들에게 밥줄을 대주는 전관 변호사 개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법개혁이 왜 필요한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몸에 사무치도록 느껴진다. 고압적인 사법부 내부를 들어다 보는 재미에 책을 언제 다 읽었는지 모르게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다. 저자는 서울지검 검사를 경험한 법학과 교수로, 2004년 ‘헌법의 풍경’이란 책을 내 법조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이 분야에 경륜 있는 저자다. 1만 3000원. 【 보노보 찬가 】조국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보노보 원숭이가 있다. 종명이 파니스쿠스로 아프리카 콩고 밀림지대에서 산다. 이 종은 원숭이의 대명사인 침팬지(종명 트로글로디테스)와 완전히 구별되는 영장류다. 보노보 원숭이는 집단내 수직적인 서열을 만들지도 않고, 평등한 문화를 유지하며, 무리 내에 병자나 약자를 소외시키거나 구박하지 않고 보살피고 끌어안는다. 인간적 특성으로 평가되는 동성애적인 경향까지 있어 인간과 가장 유사한 영장류로 평가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 세계가 침팬지와 비슷하다는 거다. 무한경쟁, 수컷들의 권력투쟁, 전쟁, 유아학살, 남성지배 등의 모든 특징이 그렇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의 ‘보노보 찬가’(생각의 나무 펴냄)는 ‘정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평화적인 보노보 원숭이와 같은 길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현재 한국 사회가 자본의 이익추구를 위해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을 으깨고 갈아서 상품화하는 ‘악마의 맷돌’이 통제되지 않은 채 빠르고 거칠게 돌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OECD 국가 중 가장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과 청소년 실업, 열악해지는 복지환경을 우려했다. 한국 사회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 보면 ‘21세기 공산당 선언’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촛불집회와 관련한 법 적용을 두고 권위주의 정부시절로 돌아가는 인상을 주는 형법의 남용을 우려했다. 특히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안’ 등은 집권세력의 막가파식 복수극의 대본에 불과하고, 집회와 강경진압의 악순환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비판한다. 역사적 경험 속에서 우리 민족과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인들은 ‘방어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론’ 등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런 성향이 인종차별적인 사상으로 전환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하라는 주문도 나온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양심적 병역거부자, 한센병 환자, 여성, 급증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1만 10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엄마와 읽는 동화] 허수아비와 들쥐/김소연

    [엄마와 읽는 동화] 허수아비와 들쥐/김소연

    너른 들판에 가득 찬 벼 이삭들이 가을바람에 춤을 춥니다.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의 낡은 저고리도 덩달아 나부낍니다. “허! 그 놈 참 험악하게도 생겼다.” 논두렁을 지나던 이웃 농군들이 허수아비를 보며 흉인지 칭찬인지 한마디씩 던집니다. 농부는 망태 할아범처럼 생긴 허수아비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어요. 허수아비를 세워 둔 후론 얄미운 참새들이 얼씬도 못했으니까요. “금쪽같은 내 곡식들, 잘 지켜야 한다.” 농부 말에 어깨가 으쓱해진 허수아비가 무서운 얼굴로 고함을 쳤어요. “어떤 놈이든 논가에 얼씬만 해라. 이 허수아비님이 가만 안 둔다!” 가을들판엔 허수아비 빼곤 개미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질 않았어요. “내 덕분에 올 해도 풍년이구나.” 허수아비는 한껏 으스댔지만 그 모습을 보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침에 한번 농부가 나와 둘러볼 뿐, 하루 종일 허수아비 혼자였지요. 따가운 햇살에 머리가 지끈거려도, 차가운 밤비에 옷이 젖어도 누구하나 얘기 나눌 친구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뒷산에서 들쥐 한 마리가 들판으로 내려왔어요. 벼가 다 익어가니, 겨우내 먹을 쌀을 장만하러 오는 게지요. 들쥐는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논 한가운데로 들어왔어요. 잘 익은 벼 이삭 하나를 똑 잘라 물고 나가다 그만 허수아비에게 들키고 말았지요. “웬 놈이 남의 벼를 훔쳐 가느냐!” “아이고 깜짝이야. 간 떨어지겠네.” 천둥 같은 고함소리에 놀란 들쥐가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에이, 난 또 뭐라고…. 허수아비잖아.” 들쥐는 허수아비를 보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어요. 그리고 놓쳤던 이삭을 입에 물고 제 갈길을 갔어요. “아니, 네 이 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 논에 함부로 들어 온 게냐? 혼구멍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허수아비는 큰소리로 으름장을 놓았어요. 자기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들쥐가 괘씸했거든요. 하지만 들쥐는 허수아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어요. “어쩌려고요? 막대 팔로 날 잡으려고요?” “뭐, 뭐라고?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느냐?” “무서워요? 그 우스꽝스러운 바가지 얼굴이 무서워요? ” 들쥐의 대답에 허수아비가 할 말을 잃었어요. “아저씨, 나는 겁쟁이 참새하고는 달라요. 허수아비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요.” 들쥐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어요. “아저씨는 그저 속 빈 강정이에요. 저고리 속은 텅 비어가지고 논바닥에 쿡 박혀 꼼짝도 못하는 그야말로 허깨비, 그게 바로 허수아비죠.” ‘속 빈 강정? 허깨비?’ 허수아비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화 낼 생각조차 잊어버렸어요. “그럼, 이만. 내일 또 봐요.” 들쥐는 멍하니 서 있는 허수아비를 두고 벼 포기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버렸어요. 다음날부터 생쥐는 제 멋대로 들판을 오가며 벼이삭을 물어갔어요. “도둑놈 같으니. 당장 나가지 못 해!” 허수아비는 들쥐를 볼 때마다 고함을 지르며 내쫓으려 했지만 들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요. 보다 못한 허수아비가 들쥐를 나무랐어요. “너는 남이 일 년 내내 공들여 키운 곡식을 허락도 없이 축 내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 말에 들쥐가 발길을 멈추었어요. “우리 짐승들에겐 이 벼들도 산에서 나는 열매와 다를 게 없는 걸요.” “무슨 소리야? 이 논엔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그거야 사람들끼리 하는 소리지, 어디 이 땅이 생길 때부터 농부 것이었나요?” “그래도 모를 내고 벼를 키운 건 바로 주인 농부라고.” 허수아비는 제가 마치 농부인 양 점잖게 말했어요. “산에 나는 열매는 저절로 큰 줄 아세요? 하늘이랑 바람이랑 산이 서로 도와가며 키운 것이지.” 들쥐는 반들거리는 코를 벌름거리며 대꾸했어요. “따져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산에 올라와 마음대로 열매를 따가잖아요. 사람들이 언제 산이나 하늘에 허락받고 가져 간 적 있나요? 지난 봄에는 나무꾼이 다람쥐네 참나무를 통째로 베어갔어요.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긴 다람쥐 가족이 얼마나 울었는데요.” 들쥐의 말에 허수아비가 입맛을 다셨어요. “다람쥐네 식구들한텐 안 된 일이군.”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허수아비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어요. “그래도 너무 많이 물어가진 말아다오. 내 체면도 있으니까.” “그럼요. 저도 염치가 있는데.” 들쥐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어요. 다음날, 벼이삭을 물고 이랑 사이를 지나던 들쥐가 갑자기 허수아비 어깨위로 쪼르르 올라왔어요. “아저씨. 혼자 심심하지 않으세요?” “심심하다니. 난 지금 일하는 중인데.” 허수아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들판을 살피며 말했어요. ““근데, 며칠 다녀보니까 이 논에는 아저씨 말고는 메뚜기 한 마리도 안보여요.” “그야 당연하지. 너처럼 맹랑한 녀석이면 모를까, 다들 날 무서워하거든.” 들쥐는 잘난 체하는 허수아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어요. “다들 아저씨를 무서워만 하는데, 슬프지 않아요? 친구 하나 없이?” “친구? 그런 것 보단 내 몫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한 법이야.” 허수아비 말에 들쥐가 입을 쌜쭉거렸어요. “피~. 그런 게 어딨어. 아저씨, 그러지 말고 제가 아저씨 친구 할까요?” “친구랍시고 논에 있는 벼 맘 놓고 훔쳐가려고?” 허수아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어요. “치! 아저씬 벼밖에 몰라.” 들쥐는 혀를 쏙 내밀더니 어깨에서 내려가 버렸어요. 들쥐는 그 후 며칠 더 왔다 갔다 하더니, 이후론 나타나질 않았어요. 허수아비는 벼를 훔쳐가는 들쥐가 사라지자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도 혼자 심심할 때면 들쥐의 또랑또랑한 눈이 생각났어요. 얼마 후, 추수가 시작되었어요. 농부는 콧노래를 부르며 벼를 거두었어요. 그리고 허수아비를 벼 그루터기 사이에 던져놓고 가버렸어요. 이제 허허벌판엔 허수아비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가을 내내 고생한 나를 쓸모없어졌다고 내버리다니….” 허수아비는 농부의 야속한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어요. 날은 갈수록 추워졌어요. 허수아비가 쓰던 벙거지는 늦가을 찬바람에 떠밀려 어디론지 날아가 버리고, 저고리도 비바람에 헤져 여기저기 찢겼지요. “이제 겨울이 닥쳐오면 얼어 죽겠지….” 허수아비는 힘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그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저씨. 여기 누워서 뭐하세요?” 어느 틈에 왔는지, 들쥐가 머리맡에 서서 허수아비를 빠끔히 내려다보고 있질 않겠어요? “아니. 너 여기 웬일이냐?” 허수아비는 반가운 마음에 큰소리로 물었어요. 들쥐는 대답 대신 허수아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중얼거렸어요. “지나가는 길에 와봤더니…. 농부가 그예 버리고 갔구나!” 그 말에 허수아비는 두 볼이 벌게졌어요. “정말 이렇게 있다간 한 겨울에 얼어 죽겠어요.” “그게 허수아비 운명이라면 할 수 없지.” 허수아비가 체념한 듯 우물거렸어요. “가만있자…,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들쥐가 논두렁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어요. 잠시 후, 볏짚을 잔뜩 물고 온 들쥐는 허수아비 저고리 속으로 쏙 들어갔어요. 들쥐가 저고리 안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허수아비는 간지러워 웃음이 터졌어요. “뭐하는 거야? 히히히….” “저고리 속을 짚이랑 마른 풀로 가득 채우면 바람도 막고, 추위에 끄떡없을 거예요.” 이 말에 허수아비는 웃음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들쥐를 쳐다봤어요. 그러자 들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들쥐는 하루 종일 쏘다니며 마른 풀들을 모아 저고리 속을 채웠어요. 덕분에 저녁노을이 질 무렵, 허수아비는 두툼한 외투를 걸친 것처럼 뚱뚱해졌지요. 들쥐는 손을 흔들며 산으로 돌아갔어요. 밤이 되자 첫 눈이 내렸어요. 밤새 내린 눈은 솜이불처럼 허수아비를 덮어 주었어요. 그래도 저고리 속은 휑하니 찬바람이 가득했어요. 그때였어요. “허수아비 아저씨! 어디 계세요?” 들쥐의 목소리가 눈 쌓인 들판에 울려 퍼졌어요. 허수아비가 서둘러 대답했지요. 들쥐는 허수아비에게 다가와 바가지 얼굴에 덮인 눈을 쓸어냈어요. 허수아비는 들쥐를 보자마자 두 눈이 커다래졌어요. 들쥐는 마치 큰 싸움이라도 한 것 같았어요. 콧등엔 할퀸 자국이 선명하고, 털은 땀과 흙이 범벅인데다 이마에는 멍까지 들었어요. “어떻게 된 거야? 겨우내 집에서 따뜻하게 지낸다더니.” 그 말에 들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요. “어젯밤, 난데없이 오소리가 쳐들어왔어요. 창고에 가득 채워둔 식량을 빼앗더니, 집까지 부셔버렸어요. 간신히 목숨만 구해 도망쳐 나왔어요.” 들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허수아비를 바라보았어요. “아저씨한테 작별인사 하러 왔어요. 먹을 것도, 집도 잃었으니 이번 겨울은 나기 어려울 거예요. 아저씨 부디 안녕히 계세요.” 들쥐가 힘없이 뒤돌아섰어요. “무슨 소리야? 여기가 네 집인데.” 들쥐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어요. “네? 어디가요?” “어디긴. 바로 내 저고리 안이지. 얼마나 따뜻하고 아늑한데.” 허수아비는 뽐내듯 가슴을 쭉 내밀었어요. “겨울동안 나랑 같이 지내자. 들판엔 농부가 떨어트리고 간 이삭도 제법 있으니 양식 걱정은 말고.” 허수아비가 왼쪽 눈을 찡긋하더니 한마디 덧붙였어요. “어때, 친구?” “아저씨!” 들쥐는 연못에 뛰어드는 개구리처럼 허수아비의 품으로 뛰어들었어요. 그제야 허수아비는 온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답니다. ●작가의 말 힘겹게 농사지은 쌀을 훔쳐가는 들쥐는 얄미운 도둑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람이야말로 자연의 가장 큰 도둑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자연에게 한없이 베풀어 달라고 조르면서 막상 제가 가진 것은 쌀 한 톨도 그냥 내어주지 않으니까요. 곡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리는 허수아비야말로 그걸 세워 둔 사람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요? 혼자서 모든 걸 독차지 하려고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그래서 밤낮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그런 허수아비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약력 ▲2004년 단편 ‘행복한 비누’가 샘터문학상 동화부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등단 ▲2007년 창비가 주관한 좋은 어린이책 공모에서 장편 ‘명혜’가 당선 ▲2008년 창작동화집 ‘꽃신’ 발표 ▲지은 책으로는 ‘명혜’ ‘꽃신’ ‘나불나불 말주머니’ ‘선영이, 그리고 인철이의 경우’등
  • [책꽂이]

    ●솔아 푸른 솔아(박영근 지음, 백무산·김선우 엮음, 강 펴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익숙한 민중가요 노랫말의 원작자 박영근 시인의 시 선집이다. 올해 그의 3주기를 맞아 첫 출간 시집부터 유고시집까지 여섯 권의 시집에서 58편의 시를 골라 묶었다. 민중의 척박한 현실을 노래하면서 서정시의 호흡도 놓치지 않는다.●야생사과(나희덕 지음, 창비 펴냄) 5년 만에 나온 시인의 신작시집. 한층 더 원숙하게 조탁된 시어들과 차분한 리듬이 전개된다. ‘…한입 베어물었다 / 달고 시고 쓰디 쓴 야생사과를 //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처럼 타자화된 나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창비 시선 301번으로 판형과 디자인이 새로 바뀌었다.
  • “분단 문제는 내 정체성 극복하기 위해 또 썼죠”

    “분단 문제는 내 정체성 극복하기 위해 또 썼죠”

    “분단 문제도 결국은 제 정체성 중 하나입니다.” 전작 ‘국경을 넘는 일’(2005) 정도의 수작이면 작가가 가진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 갈음한 것 같은데, 소설가 전성태는 아직 부족한 모양이다. 실천문학신인상, 신동엽창작상 등 수상기록이 아니라도 비평가들 사이에 한창 주목 받는 그가, 새 작품집을 냈다기에 부랴부랴 작품을 읽어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새책 ‘늑대’(창비 펴냄) 곳곳에도 분단 문제가 양념처럼 묻어난다. 전화를 걸었다. 작품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하니 반갑게 답하는 작가. 안성으로 가는 길이라 한다. 작품집을 정리한다고 얼마 전까지 연고도 없는 충남 보령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제 홀가분히 털어버리고 경기도 안성에 자리를 잡았단다. 거기서 모교(중앙대)로 출강도 하고, 또 쉬지 않고 단편도 쓰며 지낸다고 한다. 에둘러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결국 전화한 목적을 밝혔다. “또 분단 얘기인가요?”라고. 직접적 분단경험이 없는 1969년생, 그가 이렇게 이 문제에 천착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는 당당히 “그게 나의 정체성”이라 한다. ●“분단 경험 없지만 무의식 작용” “우리 세대 안에도 분단국가 국민이 가지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에 나가면 그 현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죠.”라면서 국경을 넘을 때 드는 공포감이나, 외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남쪽에서 왔냐 북쪽에서 왔냐.”고 묻는 것을 예로 들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분단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이번 작품집에서는 분단을 뼈저리게 실감한 공간이 몽골이다. 책에 실린 10편 중 6편(‘늑대’, ‘목란식당’, ‘남방식물’, ‘코리언 쏠저’, ‘두번째 왈츠’, ‘중국산 폭죽’)이 몽골 배경이다. 몽골 얘기를 안 꺼낼 수 없었다. 작가가 몽골에 간 건 두 번. 2002년에 잠깐 들렀고, 2005년에 문화예술위원회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6개월가량 체류했다고 한다. 2005년의 체류 경험이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실제로 표제작 ‘늑대’ 등은 몽골에서 바로 초고를 잡아 온 것이라고 한다. “처음 갈 때는 큰 기대감이 없었는데, 가서 보니 작업거리들이 눈에 계속 띄었다.”는 작가. 3개월 체류 프로그램이었지만 사비까지 털어 총 반년을 지내고 온 것이었다. ●“몽골, 분단 한국 바라볼 수 있는 공간” 몽골은 어떤 공간이냐고 물었다. “자본화 움직임이 활발한데 그 모습이 꼭 1970~80년대 한국식 개발주의예요. 또 재미있는 게 몽골은 1992년 전까지는 북한, 그 이후에는 남한과 교류를 해, 남북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요.”라고 한다. 몽골은 1992년에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체제를 전환했다. 그러다 보니 산업화 시절 한국이 겹쳐 보이는 곳이자, 분단된 한국을 타자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그의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겠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으라고 하니 그것도 몽골에서 쓴 ‘늑대’를 들었다. 또 하나 든 게 ‘강을 건너는 사람들’. 절대적 빈곤 때문에 굶어 죽는 아이와 아이를 잃은 어머니를 다룬 작품인데, 읽는 사람들이 자꾸 ‘북한 인권’ 문제로만 환원시켜 안타까운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분단 문제에서 자유로운 젊은 작가들이 부럽다고 한다. “저도 분단을 넘어서고 싶습니다. 넘고 싶어서 열심히 쓰고 있는 겁니다.”라고 했다. 넘고 싶어서 공부하고 공부했으니 소설로 발언한다는 얘기다. 간단한 논리다. ‘시대적 의무’ 운운하며 무겁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작가는 요즘 장편을 계획하고 있다. “제 고향 전남 고흥 얘깁니다. 이곳은 정치적 출세길이 막혀 스포츠 영웅이 많이 나왔죠. 그들의 이야기를 코믹하고도 깊이 있게 그리고 싶어요.”라고 했다. 코믹한 스포츠 영웅이라. 그럼 분단 문제는 이번 작품집으로 극복했다고 이해해야 할까? 차마 거기까지 물어 볼 수 없었다. 신작이 나와봐야 알 일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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