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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 인류학 대가 정수일의 아프리카 답사기

    문명 인류학 대가 정수일의 아프리카 답사기

    “60여년 전에 백두산 오지에서 난 촌뜨기가 아프리카를 처음 접했습니다. 이집트 고대 문명에 놀라고, 전 대륙의 식민지화라는 치욕을 당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습니다.”정수일(85)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아프리카 답사기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1·2’(창비)를 펴냈다. 정 소장은 1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저서에 대해 “종횡 세계일주를 수행한 하나의 인증샷”이라고 평가했다. 평생을 범지구적 실크로드 연구를 통해 인류 문명 교류의 증거를 찾으려 한 그다. 정 소장은 중국과 북한의 외교 사절로 18년, 한국에서의 10년 등 총 28년간의 답사를 통해 실크로드가 유라시아 구대륙만을 포괄한다는 통론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전작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010), ‘문명의 보고 라틴아메리카를 가다’(2016)가 그 같은 행보의 결실이다. 정 소장은 1955년 중국 국비 유학생 1호로 처음 이집트 카이로 땅을 밟았다. 아프리카에서 변혁 1~2세대들의 투쟁, 그들이 꿈꿨던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는 청년 정수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책에는 당시 대중연설 현장에서 청중이 던진 신발을 맞고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던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 모로코 국왕에게 중국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 통역을 하며 겪은 일화 등 아프리카 현대사의 장면이 담겨 있다. 그는 단국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다 1996년 북한 공작원 신분이 드러나 5년을 복역한 바 있다. 통일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최근 통일에 대한 당위성이 희박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자이고 우리는 한 민족이기 때문에 꼭 통일해야 합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칼럼니스트 박사의 사적인 서재] 국가는 왜 그토록 출산율에 집착할까

    [칼럼니스트 박사의 사적인 서재] 국가는 왜 그토록 출산율에 집착할까

    가족과 통치/조은주 지음/창비/376쪽/1만 8000원“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외치던 시대에 나고 자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겠다면 독신세를 거두겠다”는 위협 속에 늙고 있다. 내용은 달라도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만은 수미일관하고 있는 가운데를 관통하며 살아내고 보니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둘만 낳아 잘 기르라는데 하필이면 둘째이면서 “또 계집애”로 태어나 장남의 대를 끊어놓은 나는 의도치 않게 봉건적인 친척들의 복잡한 심사를 견뎌내야 했는데, 이제 와서는 ‘정상가족’의 밖에서 사회제도에 편승하려는 이기주의자로 눈총을 받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시 말해, 이 책의 부제대로,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 사회학을 공부하고 생산과 재생산의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저자는 “가족은 이 시대 최대의 격전지이자 각축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가족이 국가와 개인, 젠더와 계급이 부딪치는 첨예한 현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원인으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벌였던 가족계획사업이다. 국가권력을 근대적으로 재편하는 일은 우리 삶의 근간이라 할 만한 가족 차원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났다. 저자는 이때 생긴 ‘정상가족’의 이미지가 우리 현실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지목한다. 박정희가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했던 가족의 상은 출산율이 떨어지는 등 다양한 변화를 맞으며 위기에 부딪쳤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예전 가족계획이 산아제한을 핵심으로 두었다면, 요즘 국가는 출산율 증가를 적극 권장한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을 직접 맡고 있는 여성의 삶은 고려하지 않는다. 2016년 가임기 여성 수를 헤아려 지방자치제에 순위를 매긴 ‘대한민국 출산지도’는 여성들에게 모멸감을 줄 정도였다. 맹목적이고 안이하다. 저자는 지금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지 짚어 본다. 가족이 붕괴되고 개인이 재생산 단위가 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한국의 출산율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드러내는 증상이자 징후”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제 인구문제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할 때는 지났다는 말이다. 다시 질문할 때가 되었다. ‘정상가족’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장점은 풍부한 자료다. 80쪽이 넘는 미주(尾註)를 통해 제시하는 자료의 목록은 풍성하게 넘친다. 사진으로, 만화로, 통계로, 정책에 대한 기록으로, 기사의 발췌로 가까이 다가서서 들여다보고 멀리 떨어져서 분석하기를 반복하며 저자는 역사의 생생한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 [책꽂이]

    [책꽂이]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자서전 쓰기 열풍이다. 자기 삶을 돌아보고 기록해 보는 일은 바람직하다. ‘지(知)의 거인’으로 불리는 저자는 여기에 ‘역사’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역사적 사건을 투영해 개인사를 살펴보란 이야기다. ‘자기 역사 연표’를 비롯해 철저한 취재와 분석법을 담은 글쓰기 방법도 큰 도움이 된다. 309쪽. 1만 7800원.읽거나 말거나(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봄날의책 펴냄) 199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서평집. 전방위적인 독서 편력을 자랑하는 그가 1967년부터 2002년까지 읽고 감상평을 쓴 책 138권을 다룬다. 춘향전과 삼국지 등도 있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지성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책에만 집중하는 순수한 ‘애호가’로서 면모가 잘 드러난다. 460쪽. 2만원.헌법의 현장에서(김선수 지음, 오월의봄 펴냄) 대법관 취임 전 변호사를 폐업해 화제가 됐던 김선수 대법관이 그동안 맡은 12개의 헌법재판 변론을 묶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 등에 담긴 그의 고군분투기가 생생하다. 신임 대법관이 된 그가 이야기하는 헌법재판소의 한계와 개선 방향은 무엇일까. 392쪽. 1만 8800원.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이소영 지음, 모요사 펴냄) ‘명필은 붓을 안 가린다’고 하는데 그건 뭘 모르는 소리다. 화가들은 당대 최신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는 데 누구보다 앞선 ‘얼리어답터’였다. 금속과 암석, 심지어 벌레를 달걀과 기름에 섞어 물감으로 만들어 낸 괴짜들 덕분에 미술도 한 발 나아갔다. 304쪽. 1만 7500원.우리 괴물을 말해요(이유리·정예은 지음, 제철소 펴냄) 드라큘라, 토미에, 기생수, 블러드 차일드, 워킹데드. 만화책,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 등장하는 괴물의 이름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괴물을 우리는 왜 두려워할까. 인간의 내면이자 시대의 내면이 이들에게 투영됐기 때문 아닐까. 292쪽. 1만 6000원.왜 그러세요, 다들~(전국 중고등학생 89명 지음, 창비교육 펴냄) ‘초췌하고 해쓱해질 때, 표정이 어둡고 지쳐 보일 때…약보다는 축구’. 역시나 어른의 생각과는 다르다. 전국 중고등학교에서 제작한 1011종의 학급 문집에서 글 94편을 가려 엮었다. 청소년들의 꾸밈없는 생각과 진솔한 마음이 글에 드러난다. 212쪽. 8500원.
  • [어린이 책] 소중한 것을 잃어 본 이들에게

    [어린이 책] 소중한 것을 잃어 본 이들에게

    광활한 우주 이름 모를 어느 별에 사는 소시지 할아버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할아버지가 데려온 건 커다란 곰인형. 여전히 마음 한쪽이 채워지지 않는 가운데 반려동물 가게 앞에 버려진 작은 개가 할아버지의 마음을 붙든다. 홀로 남겨진 채 의지할 곳 없는 모습이 자신과 꼭 닮아 애처로워 보여서. 개를 데려가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결국 할아버지는 갈 곳 없는 그 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자신을 거둬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 할아버지의 몸을 이리저리 핥으려는 개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혹시나 자신의 말랑말랑한 몸을 물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다. 우주복까지 사 입으며 단단히 무장한 할아버지는 개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하다가 별다른 목적 없이 자신의 몸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개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곁을 내준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쓸쓸해진 개는 집 밖으로 나온다. 할아버지가 그랬듯 누군가의 온기를 찾아 헤매던 개는 머리카락이 한 올 난 폭탄 아이와 숲에서 숨어 지내는 불을 만난다. 겉으로 보기에 쉽사리 친구가 될 것 같지 않은 셋은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수박 수영장’, ‘할머니의 여름 휴가’ 등으로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작가 안녕달의 신작 ‘안녕’은 광활한 우주에서 알게 된 ‘나’와 ‘당신’의 특별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홀로 태어났지만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우리가 서로 눈길을 나누고, 손을 마주 잡고, 가슴을 터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책은 넌지시 알려 준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라는 주제를 662컷에 묵직하게 담아낸 작가의 구성력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열린세상]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새로운 백 년의 평화를 상상한다/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열린세상]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새로운 백 년의 평화를 상상한다/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부교수

    지난 칼럼에 센다이에서 김기림의 평화주의를 생각하자고 제언했다. 이에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들이 늘어 올 하반기에 센다이에서 행사를 개최할 가능성이 생겼다. 센다이에 유학을 가거나 여행 가는 사람들이 어쩌다 센다이가 루쉰의 유학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의 시비나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있어도 김기림을 아는 사람이 없어 안타까웠던 터였다. 그를 기리는 작은 시비라도 건립돼 센다이를 거쳐가는 우리 국민이 그의 시비 앞에서 아픈 기억을 새로운 미래의 희망으로 되새길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센다이와 그 주변에는 한국인이 꼭 찾아봐야 할 곳이 몇 군데 있다. 우선 센다이에서 동북쪽으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이시노마키시(石?市)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현창비(顯彰碑)다. 영화 ‘박열’을 본 사람이면 그 이름에 익숙할 것이다. 후세는 1880년생으로 조선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일제에 저항했던 조선 청년들을 변론한 사람이다. 그가 조선인 사건과 관련해 처음 변론에 나선 것은 1919년 2·8독립선언 관련 출판법 위반 사건이었다. 한때 이시노마키시 문화센터에는 그에 관한 상설 전시 코너가 있었다. 그러나 3·11 동일본대지진으로 문화센터가 침수한 뒤 복합문화시설 구상이 마련돼 새로운 전시실 등이 세워지고 있으나 후세 다쓰지의 상설 전시 코너는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나, 이후 그를 기리는 어떤 행사가 열렸는지 들어 본 바가 없다. 이시노마키 시민들이 후세 다쓰지를 기리는 운동을 시작한 게 1986년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시노마키시의 한 공원에 현창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3·11 쓰나미 이후에 들어선 가설 주택에 가려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위해 죽겠다’는 그의 의지가 잊혀지고 있다. 그가 사회주의자였던 탓에 한국 사회가 그에게 무관심하다면 이념으로 역사를 지우는 과보가 두렵다. 이시노마키시에서 서쪽으로 35킬로미터,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35킬로미터 거리에 후루카와(古川)라는 곳이 있다. 1920년대 일본의 다이쇼 민주주의를 이끈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고향으로 기념관이 있다. 그가 천황주의를 긍정하고, 민본주의에 입각해 식민지의 합리적 지배를 원했던 관대한 제국주의자였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당대 일본의 최고 지식인들 가운데 드물게도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갖고, 3·1운동에 이해를 표시하며 독립을 주장하는 조선의 청년에게 다가가려 했다. 특히 그가 여운형의 식견과 인품을 높이 평가해 그가 가진 정의를 일본이 포용하지 못하면 일본에 장래가 없다고 경고한 것은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자로서 보편적 정의에 서고자 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요시노 사쿠조 기념관에서 간혹 그와 조선의 관계를 주제로 한 특별전이 열리지만,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후루카와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 17킬로미터, 센다이로부터는 약 52킬로미터 올라가면 구리하라시가 나온다. 여기에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절이 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 이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 준 글이다. 안중근의 인격에 감복한 지바가 제대 후에 고향에 돌아가 안중근의 유묵을 소중히 간직하다가 1980년 도쿄 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해 한국에 기증했다고 한다. 다이린지에는 지바의 유패가 봉인돼 있으며, 안중근의 유묵이 기증된 뒤 비석이 세워졌다. 안중근이 태어난 9월 2일 해마다 추도 법요가 열린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던 2013년 말 다이린지의 안중근 위령제와 현창비를 문제 삼아 일본 우익 시민단체가 미야기현에 항의서를 보낸 적이 있다. 미야기현은 ‘민간단체’가 추진한 것이라고 하여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시노마키와 후루카와, 구리하라가 모두 조선 독립 운동의 역사와 얽혀 있다. 이 세 도시를 엮어 도호쿠 평화 순례의 길을 열어 한ㆍ일의 시민들이 함께 걸어 보는 것은 어떨까? 3·1운동 100주년이 내년이다. 도호쿠 평화 순례의 길에서 새로운 백 년의 평화를 상상해 보자.
  • “엄마를 부탁해 표절 아냐” 신경숙 작가·출판사 승소

    “엄마를 부탁해 표절 아냐” 신경숙 작가·출판사 승소

    수필가 오길순씨가 소설가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가 본인의 수필을 표절했다며 낸 출판 금지 소송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부장 최희준)는 11일 오씨가 신경숙씨와 ‘엄마를 부탁해’의 출판사 ‘창비’를 상대로 낸 출판 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오씨는 2008년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가 2001년 본인이 발표한 5쪽 분량의 수필 ‘사모곡’ 내용을 표절했다며 출판 금지와 1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두 작품에 등장하는 실종 사건의 발생 상황이 다소 유사성을 띠는 것은 사실이나, 정신이 온전치 않은 어머니의 실종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와 같은 유형의 사건이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면서 “치매·뇌졸중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부모를 실수로 잃어버린다는 소재는 다수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나비인 듯 꽃밭인 듯 그림인 듯 현실인 듯

    나비인 듯 꽃밭인 듯 그림인 듯 현실인 듯

    가녀린 몸이지만 쉴 새 없이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지닌 한 마리의 작은 나비. 소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나비는 노란색의 머리 방울이 됐다가 이내 과일을 깎는 사람 손가락 위의 예쁜 초록색 반지가 된다. 풀밭 위에서 축구를 하는 사람의 빨간색 신발끈이 된 나비는 바깥의 활기를 만끽한다. 고요한 공기 속을 떠돌다가 도시의 소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나비. 이 작은 춤꾼의 환상적인 비행의 끝은 어디일까.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잔잔한 감성으로 사랑받는 일본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가 쓴 그림책 ‘나비’(미디어창비)는 광활한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나비의 섬세한 날갯짓을 따라간다. 일본 화가 마쓰다 나나코가 그린 책 속 그림들은 노랑, 빨강, 파랑, 검정 등 원색이 두드러져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 새까만 밤, 푸른 바닷가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는 금방이라도 날개가 팔랑거릴 듯 생생하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를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인 수많은 나비를 보고 있으면 마치 꽃밭에 서 있는 듯 눈길이 오래 머문다. 에쿠니 가오리는 소설뿐만 아니라 그림책과 동화, 번역 등 폭넓게 활약하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일궈 왔다. 그림책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데이비드 위즈너, 루드비히 베멀먼즈 등 영미권 아동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번 작품 ‘나비’는 에쿠니 가오리가 지난해 ‘몬테로소의 분홍 벽’ 이후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선보이는 그림책이다. 작가는 마쓰다 나나코가 그린 ‘나비’ 그림에 반해 그림에 어울리는 글을 쓰고 싶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애정이 깊은 만큼 작가는 시적인 글로 그림의 맛을 한층 살려냈다. 국내 번역은 평소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에쿠니 가오리를 꼽은 임경선 작가가 맡았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공양왕 3부자 교살한 태조, 삼화사서 수륙재 열어 왕생 기원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공양왕 3부자 교살한 태조, 삼화사서 수륙재 열어 왕생 기원

    삼척은 삼국시대 초기 실직국의 중심이었다. 이 나라는 102년(파사왕 23) 신라에 병합됐고 장수왕의 고구려에 함락되기도 했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이 지역을 되찾아 실직주라 했고 757년(경덕왕 16) 삼척군으로 개칭한다. 고려시대엔 척주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삼척은 수도권에서도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를 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삼척은 오지의 이미지가 강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폐위시켜 삼척으로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이성계 세력은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우면서 ‘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진짜 왕을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1389년 신종의 7대손 정창군 왕요를 즉위시켰으니 곧 공양왕이다. 하지만 공양왕도 결국 이성계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공양왕은 1392년 7월 12일 이성계의 사저에서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이때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폐위를 청했고 공양왕은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공양왕은 원주로 보내졌고, 이성계는 17일 즉위한다. 사흘 뒤인 20일자 태조실록에는 ‘왕요를 공양군으로 삼아 간성군에 두고 요의 아우 우는 귀의군으로 봉해 마전군에 두어 왕씨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전조 왕대비 안씨는 의화궁주로 삼았다’는 대목이 보인다.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격하하고 원주에서 다시 간성으로 보내기는 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마당에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는 즉위교서의 정신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은 듯하다. ●조정 공론 후 전국의 왕씨 후손들 대거 살육 하지만 이성계의 측근들은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들을 잠재적 화근으로 보고 있었다. 그해 9월 대사헌 남재 등은 ‘만일 무뢰배들이 왕씨를 구실로 삼아 난을 일으키려 한다면…’이라는 이유를 들어 ‘원컨대 모두 강화도와 거제도에 거처토록 하여 미리 방비하소서’라고 건의한다. 그런데 1394년(태조 3) 1월 참찬문하부사 박위가 연루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박위가 동래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을 맹인 점술가에게 보내 “전조 공양의 명운이 우리 주상 전하와 비교해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 가운데 누가 명운이 귀한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처벌은 전조의 왕실 인사 전체로 확대됐다. 이 사건 이후 형조는 ‘공양군을 비롯한 왕씨들을 섬에 안치하는 것은 물론 대역죄에 속하는 만큼 제거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청하게 된다. 그러자 태조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왕씨들을 귀양 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간성의 공양군 삼부자도 삼척으로 옮겼다. 이후 태조는 왕씨의 운명을 조정의 공론에 맡겼고, 의견은 곧바로 왕씨에 대한 ‘처분’으로 모였다. 조정은 중추원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전림을 삼척에 보냈다.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로 갔다. 삼척의 공양왕과 두 아들은 4월 17일 교살됐다. 15일과 20일에는 각각 강화와 거제의 왕씨들이 바다에 던져졌다. 이어 전국의 왕씨 후손을 모두 처형토록 했다. 이후 이성계의 태도는 흥미롭다. 왕씨를 대거 살육하고 3개월이 지난 1394년 7월에는 금으로 ‘법화경’을 사경해 내전에 펼쳐 놓고 읽었다. 이어 ‘수륙의문’(水陸儀文)을 판각해 ‘법화경’과 함께 강화에서 가까운 개성 관음굴과 삼척 삼화사, 그리고 견암사에 내렸다. 견암사는 거창 우두산의 고견사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태종 때 조성된 공양왕릉 석호, 문·무신상 등 갖춰 태조는 이듬해 2월부터 세 사찰에서 수륙재를 열도록 했다. 수륙재란 원통하게 죽어 물과 육지를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이다. 수륙의문은 수륙재의 의식 절차를 적어 놓은 문서를 말한다. 자신이 강화와 삼척, 거제에서 살해한 왕씨들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그러니 삼화사 수륙대재는 공양왕 삼부자의 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태조의 집안과 삼화사는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세종실록에는 ‘전 현감 김계가 효령대군을 통하여 아뢴 이야기’라면서 ‘삼척의 노인들이 서로 전하되, 삼화사에 간직된 금은자경(金銀字經)은 목조께서 손수 쓴 불경’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안사가 삼척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 곧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와 부인 삼척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무덤인 준경묘와 영경묘는 지금 삼척의 태백산 동쪽허리에 남아 있다. 공양왕릉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맹방해수욕장과 대진항, 남쪽으로는 초곡항과 장호해수욕장이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에 남서향을 하고 있는데, 그 동쪽 너머는 휴양객들이 많이 찾는 궁촌해수욕장이다. 돌계단을 오르면 네 기의 무덤이 나타난다. 오른쪽의 호석을 두른 무덤이 공양왕릉이다. 나머지 두 기는 왕자의 무덤, 다른 한 기는 왕의 시녀 혹은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에 오르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태백준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대로 좌청룡, 우백호를 제대로 갖춘 명당인 듯하다. 하지만 무덤에 석물(石物)은 보이지 않는다. 공양왕릉은 경기 고양시 원당동에도 있다. 공양왕과 부인 순비의 무덤으로 알려진다.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재위 16년인 1416년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봉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이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삼척과 달리 무덤 앞에 비석과 상석, 석등, 석호, 문·무신상이 늘어서 있다. 석호, 곧 돌호랑이는 전통적인 고려 양식이면서도 조선 태조 건원릉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미술사학자들은 설명한다.삼화사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창건설이 전한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했는데 이것이 삼화사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이후 화재와 중건을 이어 오다가 1907년에 일본군이 의병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불을 질러 대웅전을 비롯한 200칸 남짓한 당우가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공양왕 제향 대상에 포함돼 ‘수륙재’ 막 내려 동해 시내에서 삼화사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시멘트 광산과 공장이 우선 눈에 띈다. 하지만 삼화사가 있는 무릉계곡에 접어들면 그야말로 선계와 같은 경치가 펼쳐진다.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찰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의 삼화사는 시멘트 공장 부지에 있던 절을 1979년 옮긴 것이다.삼화사는 공양왕의 고혼을 위로하고자 베푼 국행수륙도량(國行水陸道場)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삼화사 수륙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 초기 삼화사에서는 공양왕의 초상을 제단에 올려놓고 수륙재를 올렸다. 고려시대부터 남아 있던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화사의 공양왕 수륙재는 조선왕조가 공양왕을 복권시키고 전 왕조 제향 대상에 공양왕을 포함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막을 내린 듯하다. 하지만 삼화사 수륙재는 소멸되지 않고 대상을 한정 짓지 않은 불교의식으로 오히려 확대될 수 있었다. 글 사진 사진 dcsuh@seoul.co.kr
  • [이주의 어린이 책] 아이가 배 아플 땐 이유가 있다

    [이주의 어린이 책] 아이가 배 아플 땐 이유가 있다

    수영장 가는날/염혜원 지음/창비/48쪽/1만 3000원참 이상한 일이다. 아이는 토요일 아침만 되면 배가 아프다. 엄마는 다정한 얼굴로 배를 쓸어 주면서 괜찮을 거란다. 속도 모르는 엄마가 괜스레 야속하다. 생각만 해도 즐거워야 할 토요일에 배가 아픈 건 다 수영 수업 때문이다. 엄마에 이끌려 억지로 온 수영장은 어찌나 시끄럽고 차가운지. 수영 모자는 꽉 끼고 배는 여전히 아프다.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만 바라보다 첫 번째 수업이 끝나 버렸다. 신기한 건 수업이 끝나자마자 배가 멀쩡해졌다는 거다. 두 번째 수업 때도 여전히 배가 아팠지만 선생님의 도움으로 조심스레 물에 들어가 본다. 생각보다 물이 따뜻해서인지 배도 덜 아픈 기분이다. 덕분에 팔을 젓고 발차기를 해 본다. 선생님이랑 수영장을 끝까지 건너고 나니 왠지 신나는 걸. 그다음 토요일엔 물 위에 둥둥 뜬 채 천장을 바라보니 미지의 세계가 나를 떠받치는 것만 같다. 이 짜릿한 기분이란. 처음은 늘 떨리는 법이다. 때론 출발선에서 한 걸음 떼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조바심보다 인내심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두려움을 떨쳐내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긴장이 설렘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처음으로 수영을 배운 아이가 다음 수업을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2009년 ‘어젯밤에 뭐 했니?’로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하며 국내외에서 주목받은 염혜원 작가의 신작이다.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수영장의 푸른 물과 아이들이 입은 수영복의 다양한 색감이 생생하다. 수영장에 간 첫날 느낀 괴로움과 절망부터 물에서 발장구를 치면서 느낀 기쁨까지 아이가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상처 극복하는 마음은 원래 우리들 안에 있었다”

    “상처 극복하는 마음은 원래 우리들 안에 있었다”

    상처 지닌 남녀의 이야기 ‘경애의 마음’ 지난 겨울 광화문광장서 힘과 위로 얻어한 번이라도 마음을 잃어 본 사람이라면 알 터다. 속절없는 사랑에, 사무치는 외로움에, 찢어질 듯한 아픔에 공허해진 마음을 채우는 건 또 다른 마음이라는 것을. 위로의 한마디, 따뜻한 눈빛과 손길이 차곡차곡 쌓였을 때 생채기 난 마음에 새 살이 차오른다.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한국 문단의 기대주 김금희(39) 작가의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창비)은 바로 우리가 주고받았던 그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다.최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사옥에서 만난 작가는 “서로가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마음은 새롭게 생겨났다기보다 우리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라는 것, 그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할 때 나도 모르게 그의 안위를 신경쓰는 순한 마음들 덕분에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작가는 타인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이 ‘경애(敬愛)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두 남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덕분에 ‘반도미싱’이라는 회사에서 어렵사리 팀장직을 단 ‘공상수’와 파업에 참여했다가 회사의 눈밖에 난 공상수의 유일한 팀원 ‘박경애’가 그들이다. 우연한 기회에 한 팀에 엮인 두 사람은 처음엔 삐걱거리지만 상대방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슬픔을 응시하면서 서로의 진심에 가닿는다. “처음엔 진한 연애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두 사람을 연애 관계로 두고 쓰다 보니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됐는데, 여러 방면에서 조력자로 설정하니 생동감 있게 흐르더라고요.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인식하지는 못해도 결국 서로의 곁에 조력자로 남는 이야기를 그리게 됐어요.” 회사에서 처음 알게 된 경애와 상수에겐 그들 자신도 모르는 연결 고리가 있다. 경애가 자신의 연애 고민을 털어놓는 페이스북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의 운영자인 ‘언니’가 상수라는 것과 두 사람 모두 고등학교 시절 인천에서 발생한 호프집 화재사건으로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회사에서 겉돌며 ‘이중 생활’을 하는 상수와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애가 서로의 삶을 다독이는 과정을 가만한 문장으로 들여다본다.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보여 주는 건 참 어려운 일이죠. 그 마음을 끄집어냈을 때 상대가 이해하도록 하는 행위는 구도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고요. 저 역시 언제라도 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혼자 있는 게 익숙한 사람이지만 최근에서야 힘들면 친구들을 만나 마음을 털어놓곤 하거든요. 현실의 어려움을 혼자 극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우리 곁엔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다시 어려움에 빠진다고 해도 서로 마음을 나눈다면 지금보다 더 수월한 상태가 될 거예요.” “모든 소설은 ‘우리 함께 살아보자’고 말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는 지난 겨울 광화문광장에서 생각지 못한 힘을 얻었다고 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경험이 감동적이었어요. 사실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그때의 경험이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제게 큰 힘이 됐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한 그 순간의 질감 덕분에요. 우리가 (촛불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우리 사회를 좀더 좋은 쪽으로 추동하는 마음들을 확인한 덕분이겠죠.”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6·12 북미 정상회담] 통일 다룬 책 상반기 판매량 작년의 8배…트럼프 ‘거래의 기술’ 베스트셀러 등극

    [6·12 북미 정상회담] 통일 다룬 책 상반기 판매량 작년의 8배…트럼프 ‘거래의 기술’ 베스트셀러 등극

    출간 종수 절반에도 판매 폭발 “올림픽·정상회담 이슈가 견인”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에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관련 도서들도 상종가를 치고 있다. 올해 상반기 북한 관련 도서 판매량이 지난 3년간 판매량과 맞먹을 정도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 관련 도서 판매량이 껑충 뛰었다.12일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0일까지 팔린 북한·통일 관련 도서는 모두 2만 9950권이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8배나 증가한 수치다. 출간 종수는 46권으로 지난해(88권)의 절반 수준이었지만, 판매량은 지난 3년간 전체 판매량에 맞먹는다. 손민규 예스24 사회·정치 MD(담당자)는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 참가에 이어 두 차례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이 관련 도서 판매량을 대폭 견인했다”고 분석했다.특히 트럼프 대통령 관련 도서의 약진이 눈에 띈다. 북·미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협상이 화제가 되면서다. ‘거래의 기술’(살림)을 비롯해 ‘도널드 트럼프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한국경제신문사), ‘트럼프 시대 트럼프를 말하다’(서교출판사) 등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내건 책이 인기다. 예스24에 따르면 이 책들은 지난달 대비 무려 6.4배나 더 팔렸다. 특히 그의 자서전인 ‘거래의 기술’은 예스24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영풍문고 집계 결과 지난해 대비 판매량이 5배나 급증했다. 미국 NBA 선수 출신인 데니스 로드먼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 책이다. 트럼프가 어떻게 사업을 운영하고 삶을 꾸려 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북한 관련 책 가운데에는 지난달 발간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기파랑)가 상승세를 이어 가고 있다. 북한의 실상을 고발한 책은 3주 연속 예스24 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세계적인 평화학자이자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의 방북을 중재했던 박한식 조지아대 명예교수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도 주목받는 책이다. 서울신문 강국진 기자가 ‘김정은과 트럼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한반도 비핵화는 실현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하고, 박 명예교수가 답을 제시했다. 영풍문고에 따르면 책은 지난달 대비 판매량을 2배 이상 넘기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이 밖에 탈북자 주승현씨의 자전적 에세이 ‘조난자들’(생각의힘)과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의 ‘70년의 대화’(창비) 등의 신간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쓴 ‘통일을 보는 눈’, 개성공단에서 근무한 남측 주재원들의 이야기를 엮은 ‘개성공단 사람들’ 등의 옛 책들도 다시 판매 순위권에 올랐다. 도서관에서도 북한·통일 관련 책의 대출이 증가 추세다. 도서관 대출 정보 플랫폼인 ‘도서관 정보나루’가 2013년부터 올해 4월까지 3627만여건의 대출 추이를 분석한 결과 ‘새로운 100년’, ‘노무현 김정일 246분’, ‘서해전쟁’, ‘개성공단 사람들’, ‘북한 현대사’가 상위권에 올랐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지금까지 북한 관련 도서가 워낙 적어 일부 눈에 띄는 책과 과거 출간된 책들까지 독자들이 찾아보는 것”이라며 “북·미 정상회담이 좋은 결과를 낸다면 앞으로 관련 도서 판매량 상승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시민 직접 참여 없이 통일은 어렵다”

    “시민 직접 참여 없이 통일은 어렵다”

    “남북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당신의 분단체제론은 맞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럴 때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분단체제가 다시 굳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답했다. 판문점 선언을 비롯해 최근 정황을 돌아보니, 내 의견이 맞았던 것 같다.”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창비)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들어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너스레로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그가 주장했던 통일 담론인 ‘분단체제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설명한 것이다. 그는 반민주적인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남북 어느 쪽에서도 온전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분단체제가 허물어질 것이라 진단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이후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의 압박이 이어지면서 남북 관계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이번 신간을 통해 분단체제론에 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재확인했다. 책은 창비 출판사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한반도 정세를 진단하고자 마련한 ‘창비담론아카데미’에서 7차례에 걸쳐 진행한 ‘분단체제론과 변혁적 중도주의’의 토론 내용을 담았다. 교사, 문인, 연구자, 시민운동가, 출판사 편집자 등 30명이 백 명예교수의 글과 저서를 읽은 뒤 첫째, 셋째, 다섯째 주에 모여 토론했다. 둘째, 넷째, 여섯째 주에는 백 명예교수가 참여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함께 토론했다. 이어 마지막 일곱째 주에 종합토론을 진행해 완성했다. 당시는 남북 관계가 상당히 악화됐을 무렵이었다. 이 탓에 책엔 남북 관계를 비관적으로 보는 내용이 다수 실렸다. 백 교수는 그럼에도 촛불시민혁명을 내세워 “희망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래의 통일 방안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시했다. 중도주의는 ‘중도가 아닌 것들을 하나씩 깨나가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는 “분단체제에 무관심하거나 전쟁에만 의존하는 통일 방식, 남한이나 북한만의 변혁을 요구하는 방식, 또 평화주의 생태주의가 결여된 방식 등을 깨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국의 야합이 깨지면서 전쟁이 발발한 예멘이나 국민당 정부와 중국 정부가 통일을 주도하다 관계가 틀어져 버린 대만의 사례를 돌아보라. 시민들이 참여하지만 통일은 어렵다. 시민들이 촛불혁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이어질 남북 교류와 협력, 재통합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정부를 채찍질하거나 필요하면 직접 참여해야 한다. 시민사회는 동아시아나 국제사회와의 연대 등도 꾀해야 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주의 어린이 책] 악어·오랑우탄 지나 드디어 할머니 품에

    [이주의 어린이 책] 악어·오랑우탄 지나 드디어 할머니 품에

    오후 3시 무렵 기차역 승강장. 빨간 티셔츠를 입은 한 아이가 2호차에 올라탄다. 곰돌이 가방을 꼭 움켜쥔 채 앉아 있는 소년 앞에 나타난 늑대 차장은 승차권을 보더니 오른쪽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아이가 잘못 앉은 모양이다. 홀로 떠나는 여행에 잔뜩 긴장한 아이는 다른 객차로 향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소년을 반기는 건 금목걸이에 금팔찌를 찬 덩치 큰 오랑우탄. 무서워서 황급히 다음 객차로 넘어왔지만 산 넘어 산이다. 악어가 헤어치는 늪을 지나니 커다란 상어가 기다리는 물속이다. 잠수복을 입은 낯선 사람까지 아이의 뒤를 쫓는다. 걸음을 재촉하던 아이는 끝내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소년을 잡아 삼킬 듯 따라오던 악어와 상어, 오랑우탄, 잠수부, 생쥐는 왜인지 소년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 12호차에 다다라서야 안도하는 소년. 떠나온 지 4시간을 넘긴 오후 7시 20분쯤. 드디어 소년의 험난했던 여행은 끝이 났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할머니를 마주하니 웃음이 절로 번진다. 신예 작가 한아름이 지은 첫 창작 그림책 ‘이상한 기차’는 부모님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난 아이가 느낀 복잡한 감정을 풀어냈다. 2호차에서 12호차까지 자신의 자리를 찾아 달리는 동안 아이는 극도의 불안감을 마주했을 터다. 엄마나 아빠에게 투정을 부리지도 못한 채 낯선 사람들을 피하는 동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그래도 기나긴 모험 끝에 마주한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과 할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은 짜릿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아이의 다채로운 심리 변화를 글 없이 그림만으로 구현해 냈다. 바람에 흔낱리는 커튼,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변화, 등장 인물들의 역동적인 동작은 기차 안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탈북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이 바로 통일의 작은 시험대”

    “탈북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이 바로 통일의 작은 시험대”

    “탈북민들이 취업해 잘 정착하는 것이야 말로 통일의 작은 시험대 입니다.”그간 격하게 대립했던 남북이 지난달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관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탈북 청년들의 역할 찾기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의 수가 3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거나 현재 재학중인 청년들은 누구보다 남북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고립과 폐쇄로 일관했던 북한이 최근 남북 화해 무드에 편승해 핵포기와 개혁·개방을 맞바꿀 것이란 기대감이 나오는 상황이다. 때문에 탈북청년들은 통일이후 자유시장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를 선도할 사명감에 고무돼 있는 모습이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창비서교빌딩에서는 탈북 청년 단체 ‘위드유’(with-U)가 주최한 제2회 with-U 통일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연사로 참가한 고경빈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은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에 와있는 탈북민들이 우리사회에 잘 정착하는 일이 핵심적인 것”이라며 “탈북 청년들의 정착을 위해 정부와 기업, 사회 모두가 나서서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고 이사장은 또 과거 동서독이 통일될 때도 동독 주민들의 생활 안정에 서독 정부가 적극 나섰던 것을 거론 하며 “탈북민들이 취업해 잘 정착하는 것이야 말로 통일의 작은 시험대이다”라고 주장했다. 탈북 청년들의 사회적 역할과 통일이후 남북 사회 통합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한 청년 단체 ‘위드유’의 활동은 지금까지 안팎의 주목을 받아 왔다.2011년 탈북민 출신 대학 졸업생 8명이 모여 결성한 ‘위드유’는 그 해 3월 발대식을 갖고 통일에 대한 이슈와 동향인들의 친목을 다지는 모임을 가져 왔다. 북한 출신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스스로 바꿔보자는 목표로 활동해온 이들은 ‘말보다는 행동’이란 생각으로 2014년 8월 가수 이승철과 함께 ‘독도음악회’를 개최했다. 또 2015년에는 좌·우 이념 갈등을 넘어 균형 있는 역사관을 배우려는 취지로 직접 마련한 한국 현대사 강좌를 개최했다. 강좌에서는 보수·진보 인사가 고르게 강사진으로 참여해 이승만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의 현대사까지 우리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해 폭 넓은 시각을 보여준 바 있다. 또 그해 북한의 DMZ 목함지뢰 도발로 부상을 입은 당시 하재헌 하사에게 바자회를 통해 마련한 500만원을 위문금으로 전달해 감동을 주기도 했다.2016년 7월에는 독일을 방문해 베를린 장벽에서 ‘오늘의 베를린에서 내일의 평양을 본다’ 주제로 통일 기원 합창을 진행한 바 있다. 박영철 위드유 대표는 20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다가올 통일시대에서는 탈북민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이라며 “위드유가 플랫홈이 되어 탈북청년들이 남북사회 통합의 가교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with-U 통일포럼은 남북정상회담 전날인 지난 4월 26일 첫회를 시작으로 연말까지 포럼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 포럼은 하나금융그룹에서 후원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문맹(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국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5~2011)의 자전적 소설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작가가 모국어를 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던 프랑스어를 뒤늦게 배워 작품 활동을 했던 기억을 풀어냈다. 128쪽. 1만 1000원.나의 직업 우리의 미래·불안 위에서 서핑하기(이범·하지현 지음, 창비 펴냄) 각계각층 전문가가 청춘들의 대학·취업 고민에 대한 전략과 대안을 전하는 ‘나의 대학 사용법’ 시리즈 책. 교육 평론가 이범은 최근 노동시장의 변화인 ‘탈스펙’과 ‘노동시장의 이중화’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은 예측 불가능한 시대를 살아 가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마음의 태도를 설명한다. 각 권 148·204쪽. 각 권 1만 1000원.통행금지(박상률 지음, 서해문집 펴냄) 국내 청소년문학계 대표 작가인 저자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신작 소설. 군인들이 쏜 총에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는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광주시 외곽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화목한 광민이네 가족의 눈을 통해 당시 광주의 풍경을 그려냈다. 128쪽. 9000원.뉴욕은 교열 중(메리 노리스 지음, 김영준 옮김, 마음산책 펴냄) 교정·교열·편집이 까다롭기로 정평 난 미국 주간 잡지 ‘뉴요커’의 책임 교열자인 메리 노리스가 40여년간 일하며 작가·동료와 있었던 에피소드와 각종 문장부호들에 담긴 의미, 비속어에 대한 생각, 영어 대명사와 젠더 문제, 연필에 대한 애정 등을 소개한다. 280쪽. 1만 5000원.성서 그리고 사람들(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이상원 옮김, 황소자리 펴냄) 그리스도교 경전인 동시에 매혹적인 이야기책이기도 한 성서의 주요 등장인물들을 시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성경 속 이야기를 인류학·고고학·지리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성서 관련 예술품과 유물 사진을 곁들였다. 380쪽. 6만 8000원.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김기봉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역사학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대변되는 ‘어제의 역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21세기에 걸맞은 역사학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저자는 ‘내일의 역사학’을 위해 일제 식민사학의 유산인 한국사·동양사·서양사 체제를 청산하고 민족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글로벌 한국사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12쪽. 1만 5000원.
  • 詩요일에 만난 이별과 아버지

    詩요일에 만난 이별과 아버지

    시인 55명 이별詩 모은 시선집 ‘아버지’ 주제 엮은 산문집 출간출판사 창비가 운영하는 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인 ‘시요일’이 1주년을 맞아 시요일 운영진들이 시선집과 시 산문집을 선보였다. 지난해 4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이용자가 21만명을 넘어선 시요일은 최근 아이돌그룹 워너원의 강다니엘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추천하는 글을 올리면서 이틀간 1만 5000여회 다운로드되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시요일 기획팀은 성원에 힘입어 그간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키워드인 ‘사랑’과 ‘가족’을 테마로 한 시들을 엮었다.시선집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는 백석, 최승자, 기형도, 이제니, 박준, 자크 프레베르 등 시인 55인의 이별 시를 한데 모았다. 사랑의 시작이 아닌 사랑이 끝난 자리를 더듬어 보는 시들만 모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별 직후 마주하는 쓸쓸한 감정의 흐름을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벽 뒤에 살았습니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리운 차마 그리운’이라는 제목을 달아 4부로 구성했다.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는 박준 시인은 “우리들의 사랑이 모두 다른 모양이었던 것처럼 사랑의 끝자리도 모두 다르다”면서 “지나가거나 혹은 머물러도 좋을 사랑의 끝자리에 함께하면 좋을 시들”이라고 설명했다. 신용목·안희연 시인이 엮고 쓴 시 산문집 ‘당신은 우는 것 같다’는 한번쯤 아버지를 미워했거나 아버지와 서먹한 관계를 경험한 이들에게 건네는 시와 산문이 실렸다. 특히 가정의 달인 5월, 곁에 있지만 늘 잊고 마는 부모님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책이다. 두 시인은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스물일곱과 만났다’는 제목 아래 각각 20편의 시를 엮고 각 시 뒤편에 시인의 아버지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산문을 덧붙였다. 박신규 시요일 기획위원장은 “사랑과 가족이라는 큰 주제 아래 이별과 아버지라는 뜻밖의 소재에 집중한 것은 보통의 시집과는 다른 다양한 시도”라면서 “이별 후 처음에 자포자기했다가 나중에 서서히 깨닫게 되는 감정들이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떠올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백지연의 생각의 창] 더 멀리 걷는 꿈

    [백지연의 생각의 창] 더 멀리 걷는 꿈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러시아 교민 가족들이 들려준 학교 이야기가 마음에 깊이 남았다. 러시아 학교 일과 중에는 ‘산책시간’이 있어 학생들이 그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배려한다고 한다. 학생들은 그 시간에 산책을 포함해 운동이든지 공부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산책할 수 있다니.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잠시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 과외까지 병행하는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나 역시 돌아보니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함께 산책하는 일은 정말 까마득한 기억이 됐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 가까운 산과 넓은 공원이 있는 지금의 동네로 이사 왔다. 가장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은 여러 가지 길로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과 하루하루 미묘하게 다른 공기를 쐬는 일이 좋아서 걷고, 달리기도 하고, 뒤늦게 자전거 타기도 시작했다. 유치원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도 얼마나 바깥 활동을 많이 하는 곳인가였다. 아이가 옷에 흙이 잔뜩 묻어 돌아와도, 때로는 물장난으로 흠뻑 젖어 돌아와도 마음이 편했던 시절이었다.작가이자 활동가인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반비ㆍ2017)에서 마음을 가장 잘 돌아보는 길은 ‘걷는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이 책은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로서 ‘걷기’를 주목한다. 저자는 걷기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하는 일임을 다양한 문화적 고찰을 통해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걷기는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표인 행위’다. 걷기는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 예를 들면 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행위다. 우리는 걸으면서 ‘사유와 육체 사이의 풍부한 잠재적 관련성, 어떤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상상과 연결되는 방식’을 체감할 수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까운 보행, 몸을 움직임으로써 만드는 사유의 시간은 어른뿐만 아니라 경쟁과 속도 체제를 사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이다. 어릴 때 자연스럽게 추구할 수 있었던 산책의 시간은 어느 순간 등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시험과 경쟁에 최선을 다하기를 요구하는 학습 환경에서 아이들은 뭐든지 열심히 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해석하고 통찰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을 달달 외우고 수많은 유형의 문제를 풀어야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이주민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수자 문제를 진솔하게 서술한 이항규의 ‘후아유’(창비ㆍ2018)는 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식 교육의 힘과 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집중하는 한국 학생들의 성실함이 좋은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근본적 고민이 필요하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하라고 시키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이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능력에 맞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잘 도와주는지”에 대한 고민은 어른들이 답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멀리 나아가는 꿈을 꾸는 탐색의 시간과 일상의 기쁨을 누리며 충실하게 사는 일은 얽혀 있다. 진은영의 시가 간절하게 일러주는 것처럼 ‘멀리 있으니까’ 좋은 그 무엇들을 꿈꿀 수 있어야 가까이 있는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철수보다 폴이 좋았다/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더 멀리 있으니까/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더 멀리 있으니까/나의 상처들에서//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성경보다 불경이 좋다/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더 멀리 있으니까//나의 책상에서/분노에게서/나에게서//너의 노래가 좋았다/멀리 있으니까//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혁명이, 철학이 좋았다/멀리 있으니까//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진은영, ‘그 머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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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추사 김정희(1786~1856)를 30여년간 연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재조명한 추사의 일대기. 탄생부터 만년까지 까칠한 천재가 위대한 예술가가 된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림 ‘세한도’와 글씨 ‘침계’ 등 280여점의 컬러 도판이 추사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600쪽. 2만 8000원.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얀 루프 오헤른 지음, 최재인 옮김, 삼천리 펴냄)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 때 일본군으로부터 성학대를 받은 사실을 증언한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 오헤른의 회고록. 평화와 여성 인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가 지난 50년간 가슴속에 담아둔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놓는다. 308쪽. 1만 7000원.요코 씨의 말 1~2권(사노 요코 지음, 기타무라 유카 그림, 김수현 옮김, 민음사 펴냄) 가식 없는 솔직담백한 에세이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일본 작가 사노 요코가 생전에 발표한 작품 중 큰 공감을 얻었던 글을 엄선해 기타무라 유카가 그림을 붙였다. 노년의 일상, 소박한 기쁨, 잃어버린 것에 대한 쓸쓸함 등 가벼운 소재이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글들이 묶였다. 각 권 180쪽. 각 권 1만 4000원.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이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 연세대 중국연구원의 전문 연구원인 저자가 천년 고도 시안, ‘삼국지연의’ 낙양으로 잘 알려진 뤄양, 송나라의 카이펑, 중국 시인 소동파의 고장 항저우, 근현대사의 비극이 서린 난징, 중국의 수도 베이징 등 중국 역사의 심장부를 이룬 여섯 도읍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24쪽. 1만 8000원.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이수희 지음, 부키 펴냄) ‘아이 없는 삶’을 비주류 혹은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한국의 가족주의 사회에서 아이 없이 사는 여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다양한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직면하는 일에 당당하게 대처하는 법도 일러준다. 264쪽. 1만 3800원.공감의 언어(정용실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명사 인터뷰와 책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알린 26년차 아나운서 정용실이 공감을 끌어내는 대화와 소통의 가치를 설명한다. 저자는 진정한 호기심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살피는 훈련을 해야 유연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44쪽. 1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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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하지 말고 달려라-초고속! 참근교대(도바시 아키히로 지음, 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펴냄)일본 에도시대 막부들이 다이묘(지방영주)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도록 강제한 일종의 인질제도를 일컫는 ‘참근교대’를 둘러싼 일화를 그린 소설. 참근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지방의 영주 마사아쓰에게 5일 만에 다시 참근하라는 막부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그린다. 388쪽. 1만 4000원.나.36.이승엽(이승엽 지음, 김영사 펴냄)인생에 홈런 한 방이 필요한 이들에게 건네는 한국 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 ‘라이언킹’ 이승엽의 이야기.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숨은 노력과 고통, 이승엽을 만든 태도와 사람, 두려움과 고난을 이겨 온 시간을 담았다. 300쪽. 1만 5000원. 애주가의 대모험(제프 시올레티 지음, 정영은 옮김, 더숲 펴냄)술을 통해 세상을 탐험해 나가는 음주 모험가인 저자가 1년간의 음주 여행을 통해 세계사·문화사·지리학을 넘나들며 술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이 담긴 ‘음주 인문학’을 탄생시켰다. 496쪽. 1만 8000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하재영 지음, 창비 펴냄)소설가이자 동물단체 활동가인 저자가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을 추적하고 개산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한국 개산업의 실태를 고발한 르포. 316쪽. 1만 5000원. 웰빙·웰다잉(박명윤 지음, 라이크출판사 펴냄)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최대 욕망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2010년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건강 칼럼을 게재해 온 저자가 100세 시대를 맞아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도움이 되는 칼럼들을 담았다. 366쪽. 1만 8000원. 징검다리꽃(성민선 지음, SUN 펴냄)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지낸 저자가 정년퇴직 후 새롭게 배우는 자세로 수필을 쓰기 시작해 46편의 이야기가 담긴 첫 번째 수필집을 펴냈다. 256쪽. 1만 3000원.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화암사 ‘대시주’무인 성달생 위패 모신 한 칸짜리 사당

    소박하면서도 단정하게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사찰을 두고 흔히 ‘곱게 늙은 절집’이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 내사랑’에서 말한 ‘잘 늙은 절 한 채’의 변주(變奏)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던 절은 완주 화암사(花巖寺)다. 절에 오르기는 쉽지가 않다. 시인이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다’고 한 그대로다. 그렇게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 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나타나는 절이 화암사다. 그런데 ‘화암사 중창비’의 분위기도 안 시인의 묘사와 닮아 있다. ‘바위 벼랑의 허리에 한 자 폭 좁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서면 이 절에 이른다.…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다’ 비문은 1441년(세종 23) 지은 것이다.●‘하앙식 구조’ 화암사 극락전 국보 지정 화암사라면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1년 해체 수리하면서 찾은 기록으로 1605년(선조 38) 세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극락전은 이른바 하앙식(下昻式) 구조로 유명하다. 복잡한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만, 한마디로 지붕을 높여 맵시 있게 보이기 위한 건축적 장치라면 크게 망발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건물의 겉모습만으로 알아차리기란 전문가도 쉽지 않다. 하앙식 구조가 아니더라도 날아갈 듯 아름다운 지붕이 우리나라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극(極)·락(樂)·전(殿) 세 글자를 한 글자씩 따로따로 내건 편액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물론 편액을 이렇게 만든 것도 하앙식 구조이기 때문일 것이다.화암사를 말할 때 강당에 해당하는 우화루도 빼놓으면 안 된다. ‘잘 늙은 절 한 채’라는 이 절의 인상은 아마도 우화루에서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극락전과 우화루, 여기에 적묵당과 불명당이 마당을 감싸며 이른바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이 완성됐다. 화암사가 아름다운 것도 각각의 전각도 전각이지만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오늘은 극락전도, 우화루도 아닌 화암사에서 가장 작은 철영재(英齋)로 눈길을 돌려보고자 한다. 극락전 동쪽에 자리잡은 철영재는 불과 한 칸짜리 사당이다. 뜻밖에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성달생(1376~1444)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절집에 무신의 사당이라니….●철영재 현판 글씨는 문인 자하 신위가 써 철영재 현판 글씨는 자하 신위(1769~1845)가 썼다. 추사 김정희와 비교되곤 하는 조선 후기 문인이다. 자하는 금강경을 필사하고 감상을 적은 ‘서금강경후’(書金剛經後)를 남겼을 만큼 불교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물이 사당의 현판 글씨를 썼다니 성달생과 화암사, 나아가 성달생과 불교의 인연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화암사는 창건 연대가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중창비는 전한다. 원효와 의상도 수도했다고 적었다. 1425년(세종 7)부터 1440년(세종 22)까지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대(大)시주가 성달생이다. 그는 1417년(태종 17)부터 이듬해까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화암사와 인연을 맺은 듯하다. 그런데 인연은 중창에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 불경(佛經) 간행의 역사에서 화암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중심에 성달생과의 인연이 있다. 성달생은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지낸 성석용의 아들이다. 유후는 조선의 창건 수도인 개성을 다스리는 벼슬이었다. 태종실록에 있는 성석용의 졸기(卒記)에는 ‘글씨를 잘 썼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런데 글씨라면 그의 아들 삼형제 달생·개·허도 일가견이 있었다.●법화경 등 판각한 조선 불경 간행 중심지 성달생과 성개가 필사한 안심사판 묘법연화경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완주 안심사는 화암사에서 멀지 않다. 화암사와 더불어 불경 판각이 활발했던 안심사에는 금강경, 원각경, 부모은중경 등 조선시대 한글 경판도 다수 전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성달생의 글씨로 찍은 화암사판 불경은 1443년(세종 25)부터 쏟아져 나온다. 법화경, 능엄경, 중수경, 부모은중경, 지장경, 육경합부, 시왕경 등 모두 12종에 이른다. 육경합부(六經合部)는 금강경, 화엄경, 능엄경, 아미타경, 관세음보살예문, 법화경의 한 대목씩을 엮은 것이다. 성달생의 아들과 손자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성승(?~1456)과 성삼문(1418~1456)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성달생이 필사한 화암사판 법화경에는 성승과 성삼문도 발원자로 참여했다. 화암사판 법화경은 이후 복각본만 24종이 나왔다. 조선시대 법화경은 성달생 글씨를 판각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봐도 크게 과장은 아니다. 철영재 현판을 쓴 자하 역시 ‘성달생 법화경’을 읽으며서 불교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여 갔을 것이다. 그러니 화암사는 성달생의 존재로 ‘조선시대 불경 간행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절 경내, 그것도 큰 법당 곁에 이런 인물의 사당을 지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화암사에 남은 성달생의 흔적은 철영재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창비는 높이 130㎝, 폭 52㎝, 두께 11㎝이니 그야말로 아담하다. 비문은 15세기 중엽 지었다지만 비석을 세운 것은 1572년(선조 5)이다. 중창비에는 비문을 누가 짓고, 글씨를 누가 썼는지 나타나 있지 않다. 매우 이례적이다. 그 주인공으로 성달생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문을 지었다는 1441년은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으니 성달생도 무사하지 못했다.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승의 아비에 대하여 연좌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는 대목이 보인다. 파주 무덤의 석물(石物)을 모두 없앤 것이다. 성승과 성삼문이 복권된 것은 1691년(숙종 17)이다. 중창비를 세운 시기 그들은 여전히 ‘대역죄인’이었다. 성달승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달생은 일화도 많이 남긴 인물이다. 전라도관찰사에서 내직인 내금위삼번절제사로 옮긴 1418년 세종이 명나라 사신을 전송할 때 직책상 칼을 찼다. 세종이 즉위한 해다. 그런데 상왕, 즉 태종 앞에서 칼을 찼다는 이유로 세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파직된 것이다. 형제의 난을 일으키는 등 칼로 일어선 태종 이방원이 적지 않게 놀랐던 때문일 듯하다. ●유감동 ‘섹스 스캔들’에 연루돼 물의도 성달생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명나라 황제의 친척’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는 공녀(貢女)의 악습을 원나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1408년(명나라 영락 6)부터 1433년(명나라 선덕 8)까지 7차례에 걸쳐 114명의 조선 소녀를 징발한다. 성달생의 열일곱 살난 딸도 여기에 포함됐다. 공조판서 시절이었으니 조선시대를 통틀어 공녀의 부친으로는 가장 벼슬이 높았다. 성달생은 유감동의 간부(奸夫)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유감동은 양반 가문의 딸이자 고위 관리의 부인으로 세종시대 40명 남짓한 조정의 전·현직 관리와 스캔들을 일으켜 물의를 빚었는데, 성달생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는 충청도 초수로 안질을 치료하러 간 세종을 호종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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