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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B·昌 연대 무산… 정치권 지각변동 서막

    ■ 심대평 대표 탈당 파장 자유선진당 심대평 대표의 탈당으로 정치권은 작지 않은 파장에 휩싸일 전망이다. 당장 자유선진당은 원내교섭단체 자격을 잃게 됐다. 자유선진당은 그동안 창조한국당과 공동으로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만들어 원내교섭단체 요건인 20석에 턱걸이를 하고 있었으나 심 대표의 탈당으로 양당의 의석은 19석에 그치게 됐다. 국회 내 역학관계가 크게 재편될 수밖에 없다. 자유선진당은 그간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중재 또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왔지만 앞으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양당 체제가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민주당은 30일 “한나라당 2중대 노릇으로 야당 공조 체제를 저해했던 자유선진당의 와해는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의 입지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당도 미디어법 처리과정에서 자유선진당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하는 등 주요 고비마다 눈치를 살펴왔다. 다만 ‘완충 지대’의 실종이 가져올 분위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해 6월 쇠고기 정국과 8월 개원 협상, 연말 예산국회와 입법 대치 등의 국면에서 자유선진당은 나름의 중재력으로 주요 역할을 해왔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번 9월 정기국회 개회 교섭에서부터 자유선진당을 배제할 조짐이다. 자유선진당으로서는 이인제 의원 등 무소속 의원을 추가 영입해야 하지만, 성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로써 자유선진당과 이명박 정권과의 관계는 급냉각될 전망이다. 한때 ‘충청 연대론’으로 형성됐던 우호 분위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자유선진당은 “청와대가 총리직 한 자리로 충청권과 자유선진당을 분열시키려 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정책 연대’ 등에서 진정성을 보이지 않은 채 ‘사람 빼가기’에 몰두했다는 비난이다. 정치컨설팅업체 포스의 이경헌 대표는 “자유선진당은 여권과 대립각을 더욱 날카롭게 세울 것이며, 민주당의 장외투쟁 지속 결정과 맞물려 정국의 고착 상태가 길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원내 변화뿐 아니라 정국 전체에도 파장이 미칠 것이란 관측이다. 나아가 내년 지방선거에도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민주당의 한 주요 인사는 “충청권의 균열로 민주당이 다소 유리해질 것”이라면서 “그동안 충청권에서 자유선진당에 가려 제1야당으로서의 이미지가 약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서 보완될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관선 1회, 민선 3회 등 충남지사를 4차례나 역임한 심 대표는 대전·충남 지역의 구심 역할을 했으며 자유선진당의 ‘창업주’라 할 수 있다. 심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를 위해 신당을 창당하거나 새로운 세력에 가세한다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어부지리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여권이 자유선진당의 분열을 촉발한 쪽으로 여론이 형성된다면 자유선진당의 결속력은 배가될 수 있다.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은 “심 대표의 탈당은 야권 파괴를 위한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공작의 결과”라면서 “국민을 통합하기보다 정치권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지운 홍성규기자 jj@seoul.co.kr
  • 54년만의 선거혁명… 新일본 열다

    54년만의 선거혁명… 新일본 열다

    │도쿄 박홍기특파원│30일 새로운 일본이 열렸다. 이날 실시된 중의원선거(총선거)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은 54년간 장기 집권해온 자민당에 완벽하게 압승했다. 이로써 민주당은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달성,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체제를 출범시키게 됐다. 반면 자민당의 ‘1955년체제’는 막을 내렸다. 선거구별 개표 집계에 따르면 31일 0시20분 현재, 총의석 480석 가운데 민주당은 301석을 획득, 단독 과반수 241석을 훨씬 넘어섰다. 자민당은 112석, 공명당은 20석에 그쳤다. 또 공산당 8석, 모두의 당과 사민당이 각각 5석을 얻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로써 민주당은 절대안정의석을 얻어 중의원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독점할 전망이다. 투표율은 69%를 넘어 지난 2005년 총선거의 67.5%보다 높았다. 차기 총리에 오를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이날 밤 선거결과와 관련, “국민의 뜻이 마침내 결실을 보아 정권교체를 이루게 됐다.”며 국민의 성원에 감사했다. 정권교체를 선택하는 총선거에는 모두 1374명이 출마했다. 소선거구제로 300명, 전국을 11개 권역으로 나눈 비례대표제로 180명 등 모두 480명을 뽑았다. 지난 20 05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96석, 민주당은 113석을 얻었다. 창당 이래 최대 참패를 당한 자민당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아소 다로 총리는 “자민당에 대한 불만을 씻어내지 못했다.”면서 패배를 선언한 뒤 사퇴의 뜻을 밝혔다. 호소다 히로유키 간사장을 비롯, 당료들도 책임을 지고 당직을 내놓기로 했다.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를 포함, 자민당 최대 파벌의 수장인 마치무라 노부타카 전 관방장관, 나카가와 쇼이치 전 재무상 등 정치 원로 및 중진들도 줄줄이 낙마했다. 연립정권의 한축이었던 공명당의 오오타 아키히로 대표도 낙선했다. 하토야마 대표는 31일 곧바로 ‘정권인수팀’을 구성, 정권 인수 작업에 공식 돌입하기로 했다. 하토야마 대표는 새달 15일쯤 열리는 특별국회에서 차기 총리로 선출된다. 정권이행팀은 하토야마 대표가 31일 발표할 관방장관, 국가전략국 담당상, 재무상, 외무상 등 주요 각료 내정자와 간사장 등 당 중역들로 구성된다. 특히 하토야마 대표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등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 한·일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을 전망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긴밀하고 대등한 외교’를 천명, 미·일 관계의 조정이 주목되고 있다. hkpark@seoul.co.kr
  • 심대평 왜?

    자유선진당 심대평 대표가 30일 결국 이회창 총재와 결별을 선택했다. 심 대표는 지난해 자신이 이끌던 ‘꼬마 자민련’ 국민중심당을 자유선진당으로 흡수, 해산시키며 이 총재와 손잡았다. 하지만 충청권 맹주로서 나름대로 입지를 다져왔던 심 대표는 이 총재와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총재는 제왕적 리더십으로 당을 완전히 장악했고 심 대표의 위상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여권 내부에서 ‘충청 연대론’과 함께 심 대표의 국무총리 기용설이 나오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심 대표는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다른 점이 없다.”며 의지를 보였지만, 이 총재는 여권과의 정책공조 또는 연대 수준의 틀이 아니면 총리직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심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와 지난 1월 개각, 그리고 이번까지 모두 3차례 총리직을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번번이 ‘이회창 변수’에 걸려 ‘총리행’이 좌절됐다는 것이 심 대표 쪽 주장이다. 한 측근은 “초대 총리는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기로 한 이 총재와의 약속 때문에 심 대표가 거절했지만, 나머지 두 차례는 이 총재가 거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총리직 제의를 받았지만 심 대표는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심 대표는 이날 향후 행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가능성만 열려 있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차차기 총리’로서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라는 관측이 나온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심 대표가 신당을 창당하거나 세종특별자치시장에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하토야마의 뉴 재팬] ① 총선 압승 의미·전망

    [하토야마의 뉴 재팬] ① 총선 압승 의미·전망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국민은 30일 54년간에 걸친 자민당 장기정권을 거둬들였다. 선거의 결과는 여론조사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민당은 지난 2007년 7월 참의원에 이어 중의원까지 민주당에 넘겼다. 1955년 창당된 자민당은 존립마저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민주당의 승리는 자민당 정치의 종식과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국민들의 선택의 결과다. 자민당은 당초 내세웠던 반공과 경제성장을 1990년대 시대적 흐름과 함께 국민들의 땀과 노력 끝에 달성했다. 그렇지만 자민당은 일당으로서의 지위만 누렸을 뿐 시대의 변화에 따르지 못했다.장기집권에 따른 관료조직의 폐쇄성과 단체 및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족(族)의원’ 등 이른바 ‘정·관·업’의 유착은 고질화됐다. 민주당이 목소리를 높인 것처럼 자민당은 ‘관료가 주도하는 정치’로 굳혀졌다. ●사회개혁 양극화만 키워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출현은 자민당으로서는 분수령이었다. 자민당에 재기할 기회를 줬지만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2001년부터 5년5개월에 걸쳐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두고 추진한 사회 개혁은 빈부, 대도시와 지방, 도시와 농촌 간 등의 양극화를 한층 키웠다. 때문에 개혁의 효과보다 폐단이 부각됐다. 2005년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을 깨부순다.”는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믿음에 296석을 몰아줬지만 자민당은 바뀌지 않았다. 국민들은 실망했다. ●“이번엔 바꾸자” 열망 반영 더욱이 고이즈미 전 총리에 이은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아소 다로 총리는 더욱 구태를 탈피하지 못했다. 파벌의 담합에 따라 총리가 선출되는 데다 새로운 정치인의 등용을 막는 정치세습제에 연연했다.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은 전체 근로자의 33%를 넘어섰고 ‘워킹푸어(근로빈곤층)’도 일반화됐다. 지난달 실업률은 5.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민주당은 국민들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었다. 2007년 참의원선거에서는 ‘국민생활이 제일’을, 이번 선거에서는 ‘정권교체, 새로운 일본’을 기치로 내걸었다. 국민들은 자민당과의 정책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민주당을 대안으로 삼았다. 자민당 정권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다. 아사히신문의 28일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가 됐을 때 무려 54%가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민주당은 철저하리만큼 표밭을 다졌다. 자민당은 수권정당의 책임과 경제회생을 강조했지만 국민들을 파고드는 데 실패했다. 자민당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은 그만큼 깊었다. ●관료들 위상 추락 불가피 민주당의 집권은 내정과 외교에 적잖은 변화를 예고한다. 자민당 정권에서 정책의 중심에 서 있던 관료들의 위상 추락은 불가피하다.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일본 정치의 중심을 관료에서 국민으로 바꾸겠다.”고 역설했던 터다. 대미 외교의 경우 미·일 동맹을 기본으로 하되 자민당의 미국 ‘추종’과는 달리 ‘대등한 외교’의 노선을 택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은 참의원에서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탓에 사민당, 국민신당과 연립 등의 공조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따라 내년 7월 예정된 참의원선거에서 단독 과반수를 확보할 때까지 힘의 논리에 앞서 대화와 협력을 내세우며 신중하게 대응, 정국을 운영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 hkpark@seoul.co.kr
  • [新일본 열다] 오자와 창당 13년만에 정권창출 총지휘

    [新일본 열다] 오자와 창당 13년만에 정권창출 총지휘

    │도쿄 박홍기특파원│30일 중의원선거에서 일본의 정치판을 뒤엎은 민주당은 고작 13년의 역사를 가졌다. 54년된 자민당과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에 비유될 정도다. 민주당은 지난 1996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가 정치개혁을 내걸며 신당 사키가케를 탈당한 뒤 창당했다. 현 민주당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구 민주당으로 부른다. 민주당의 현 체제는 1998년 4월 민정당·신당우애·민주개혁연합 등이 합류하면서 갖춰졌다. 창당 때만 해도 민주당이 정권 교체를 이룰 것이란 관측은 사실 불가능했다. 게다가 민주당은 ‘잡당’으로 불릴 만큼 보수에서 좌파까지 이념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은 데다 6개의 당이 뭉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계파·이념을 떠나 목표는 확실했다. 정권교체다. 특히 핵심인물들이 만만찮았다. 당의 얼굴인 하토야마 대표를 비롯해 오자와 이치로, 간 나오토 대표대행,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이 포진했다. 모두 당대표 출신이다. 오자와 대표대행은 지난 5월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선거운동을 총연출했다. 하토야마 대표를 후임으로 선택한 것도 오자와의 작품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킹 메이커, 선거의 귀재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정책공약, 선거전략, 후보공천, 후보자금지원에 이르기까지 선거 전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질적인 일등 공신이다. 오자와 대표대행은 또 당내에서 120명의 의원을 거느린 최대계파의 수장이다. 게다가 정치신인들이 이번 선거에서 대거 당선, 새로운 ‘오자와 칠드런’이 생겼다. 하토야마 대표가 당 밖의 간판이라면 오자와 대표대행은 당 안에서의 최대 실세다. 때문에 자칫 하토야마 내각과 오자와 정국이라는 이중권력체제가 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간 대표대행과 오카다 간사장의 역할도 컸다. 당 내에서 일정 지분을 갖고 있다. 간 대표대행은 변리사 출신으로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다 1980년 사회민주연합 후보로 중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1998년 민주당의 당권을 잡았지만 다음해 당내 선거에서 패배, 하토야마에게 대표직을 내줬다. 2002년 12월 다시 당 대표에 올랐지만 2004년 5월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사건이 터져 물러났다. 도쿄대 법대 출신의 오카다 간사장은 깨끗한 이미지 때문에 당내 소장파 의원의 지지를 받는 차세대 주자다. hkpark@seoul.co.kr
  • [新일본 열다] 뉴리더 하토야마 유키오는

    [新일본 열다] 뉴리더 하토야마 유키오는

    │도쿄 박홍기특파원│새로운 일본을 이끌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는 정치권에서 ‘우주인’으로 불린다. “다른 별에서 온 정치인 같다.”는 의미에서다. 정치판에서 이미 사라진 ‘사랑’, ‘미’, ‘존엄’을 정치에 접목시키려는 이단아로 비쳤기 때문이다. 정치철학도 실제 ‘우애(友愛)’다. 1955년 자민당을 창당한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의 정치 신조였던 ‘우애’의 영향이다. 하토야마 대표는 4대째 내려온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증조부는 중의원 의장, 할아버지는 총리, 아버지는 외무상을 지냈다. 친동생 구니오는 아소 다로 정권에서 총무상을 지냈다. 어머니는 세계적인 타이어제조업체인 브리지스톤 창업자의 맏딸이다. 하토야마 대표의 정치입문은 남다르다. 인문계 출신의 가족과 달리 도쿄대 공학부 출신이다. “지금부터는 엔지니어링의 시대다.”라며 공학부를 선택했다. 1984년 “정치를 과학화한다.”며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집안에서는 반대했다. 주위에서도 정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과학자로 인식했을 정도다. 하토야마 대표는 집안 덕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정치 텃밭인 도쿄 분쿄구를 물려받지 못한 탓에 1986년 불모지인 홋카이도에서 출마, 첫 당선됐다. 때문에 스스로 세습정치에 부정적이다. 민주당의 공약에도 정치세습의 금지를 포함시켰다. 2선 의원 때인 1993년 자민당을 탈당했다. 고도 성장만을 떠받쳐온 자민당의 역사적 역할은 끝나고 새로운 책임세력이 요구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1996년엔 구 민주당을 창당, 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주당의 창당선언에서는 공개적으로 ‘우애정신’을 내세웠다. 1998년 오자와 이치로 전 대표가 이끄는 자유당과 합당, 현재의 민주당을 탄생시켰다. 지난 5월 당시 오자와 대표가 정치자금수수의혹에 휘말려 대표직을 사퇴하자 경선에 도전, 다시 당권을 잡고 정권교체의 선봉에 섰다. ‘우주인’은 자민당을 대파하고 총리에 올라 ‘우애정치’를 펼 준비를 하고 있다. hkpark@seoul.co.kr
  • 1993년 10개월여 ‘깜짝 야당’… 고이즈미 시절 민심이반 심화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을 54년간 통치해온 이른바 ‘1955년 체제’의 자민당이 사실상 궤멸된 상태다. 중의원선거에서 처음으로 제1당도 빼앗겼다.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자민당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권력을 장기 독점해 왔다. 하지만 2007년 7월 참의원선거 패배에 이어 이날 중의원선거도 완패했다. ●1955년 자유당+민주당으로 탄생 자민당은 창당 이래 10개월간을 빼고는 사실상 집권당의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터다. 1990년 중의원선거 때 리쿠르트 사건, 우노 소스케 전 총리의 여성스캔들 등 최악의 상황에서도 버텼다.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는 과반수에 실패했지만 제1당을 지켰다. 물론 당시 자민당 장기 집권에 반발한 야당들이 비(非)자민, 비공산 연립정권에 합의해 호소카와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한때 처음 야당으로 전락했다. 총리도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이치 의원이 맡았다. 하지만 호소카와 내각의 자중지란에 따라 자민당은 1995년 6월 일본사회당 등과 연립, 다시 여당으로 복귀했다. 10개월 만이었다. 이후 자민당은 한층 쇠퇴의 길에 빠져들었다. 중의원·참의원선거에서 잇따라 기존의 표를 잃어갔다. 자유당, 공명당과의 연립을 통해 정권을 겨우 유지했다.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우정(郵政·우체국) 선거’는 예외다. 우정 민영화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개혁 표방에 유권자들은 열광했다.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했다. 언론들은 ‘진통제 효과’로 평가했다. 실제 고이즈미 총리의 재임 5년 5개월 동안 도시와 지방간의 격차 심화, 농촌의 피폐화 등 개혁의 피로증에 민심 이반은 심화됐다. 세습 정치인의 전형인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의 갑작스러운 중도 퇴진, 아소 다로 총리의 좌충우돌 행동과 발언은 자민당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한층 키웠다. ●16선 가이후 전총리도 첫 고배 반자민당 정서는 정치 원로와 중진들에게도 직격탄이었다. 16선의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는 정치인생 49년 만에 처음 고배를 마셨다. 자민당내 최대 파벌의 수장인 마치무라 노부타카 전 관방장관, 야마자키 다쿠 전 부총재, 아소 총리의 친구인 나카가와 쇼이치 전 재무상, 9선의 요사노 가오루 재무상 등도 힘을 쓰지 못했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내일 새로운 일본?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중의원선거(총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자민당이 정권을 유지할지, 민주당이 정권을 교체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30일은 이른바 ‘정권선택의 날’로 불리고 있다. 지난달 21일 중의원 해산, 지난 18일 공고를 거쳐 40일간 겨뤄온 대장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결정만 남겨 놓고 있다. 일본 미디어의 막판 여론조사에서도 민주당은 자민당에 비해 여전히 우세를 지켰다. 민주당의 예측 의석 수는 무려 300석을 넘고 있다. 일본에서 거세게 부는 ‘바꿔 보자.’ 바람이다. 예상대로 선거결과가 나올 경우 1955년 창당한 자민당의 ‘55년 체제’는 사실상 몰락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지난 2007년 참의원선거에서 제1당을 차지한 민주당은 참의원·중의원 양원을 모두 장악, 완벽하게 정권을 잡게 된다. 마이니치신문이 26~2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비례대표 투표에서 민주당에 투표하겠다는 응답은 44%로 나타났다. 자민당 21%에 비해 두 배를 넘는 수치다. 정당 지지율도 민주당이 39%로 자민당의 21%를 크게 앞섰다. 교도통신의 조사에서도 민주당의 비례대표 선택률은 35.9%, 자민당은 17.9%에 그쳤다. hkpark@seoul.co.kr
  • 서로 못믿는 민주·친노… 대통합 진통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구심점을 잃은 진보진영이 주도권 다툼에 휘말리고 있다. 자칫 분열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대통합 작업에도 진통이 예상된다. 균열은 민주당과 친노(親) 신당파 사이에서 시작됐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26일 여의도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친노 신당파를 겨냥해 “김 전 대통령의 유지(遺志)에 따라 민주개혁세력이 대동단결해야 할 이 시점에 어떤 주장과 명분으로도 신당 창당은 오히려 국민 분열이나 민주개혁 세력의 갈등으로 치닫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적통 계승을 둘러싼 신경전에 대해서도 “그 누구도 ‘개인’이 대신할 수 없다. 민주당 전체가 ‘포스트 김대중’이 되어야 한다.”며 모든 주체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건 없이 동시·일괄 통합을 이룰 것을 제안했다. 노영민 대변인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과 부채는 민주당이 모두 승계했다.”면서 “친노 신당이라는 것은 없다. 신당일 뿐이다.”고 가세했다. 민주당의 이날 공세는 전날 친노 좌장격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신당파 핵심인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민주당의 정체성과 비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데 따른 것이다. 이 전 총리는 여의도 한 빌딩에서 열린 ‘노무현 시민학교’ 특강에서 “민주당이 스스로 자기혁신을 하길 기대하지만,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면서 “민주당 없이는 안 되겠지만, 민주당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안 하겠다.”고 밝혔다. 천 전 수석 역시 “민주당의 지역구 정당 조직을 보면 민주당 역사 수십년 이래 최악의 상태”라면서 “거듭날 가능성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주장했다. 친노 진영의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은 기본적인 정치 노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노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참여 민주주의’를 기본 형태로, 다각적인 소통 정치를 추구하는 친노 진영으로선 구시대적인 민주당의 소통 구조에 순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주당으로 흡수 통합되면 자유로운 소통과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겠느냐는 현실적 회의론도 친노 진영의 독자행보를 재촉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삼았던 민주당 내 옛 민주계는 대북송금 특검을 용인한 참여정부에 여전히 감정적 앙금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진보진영의 대통합으로 대여(對與) 투쟁의 동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는 만큼 완전한 결별보다는 전략적 공조 체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양쪽 내부에선 오는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 등에서 전략적인 연대와 상호 지원을 내심 바라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민주당 지도부는 인재 영입과 대통합을 위해 주내 가동되는 혁신위의 성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한 핵심당직자는 “혁신위가 뉴민주당의 방향성을 확정하는 단계에서, 진보진영이 원하는 정치노선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日선거 보수표 쟁탈전

    │도쿄 박홍기특파원│오는 30일 치러질 일본 중의원선거가 종반전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보수표 쟁탈전’이 한층 치열해졌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300석 이상이 ‘예고’된 민주당은 보다 확실한 승리를 굳히기 위해, 벼랑 끝에 몰린 자민당은 최후의 ‘반전 카드’로 최대의 표심인 보수층에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은 ‘원조 자민당’, 자민당은 ‘진정한 보수’를 내세우는 형국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23일 도쿄 다이토구 야나카 지역의 유세에서 1955년 자민당을 창당한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를 화두에 올렸다. “할아버지 하토야마도 작금의 정치를 지켜보면서 ‘정권을 잡아라.’라고 말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조 자민당’의 장점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하토야마 대표는 지난 20일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고향인 시마네현을 찾아 “다케시타 전 총리 덕분에 정치인이 됐다.”며 자신이 자민당의 옛 다케시타파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지탱해온 보수층을 파고들기 위한 민주당의 전략, ‘자민당론’이다. 또 하토야마 대표와 함께 오자와 이치로 대표대행도 자민당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보수층의 공략에서 적잖게 효과를 보고 있다. 역할 분담 차원에서 간 나오토 대표대행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은 개혁을 앞세워 부동층의 확보에 적극적이다. 민주당은 일찌감치 부동층을 집중 공략, 우위에 섰다. 교도통신이 24일 내놓은 부동층의 여론조사 결과 43%가 민주당의 비례대표에, 15.3%가 자민당의 비례대표에 투표할 생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무려 3배 가까운 차이다. 자민당은 민주당에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아소 다로 총리는 23일 TV토론에 출연, “바람이 없다.”며 어려운 판세를 솔직히 밝혔다. 그러면서 “전달보다 이번 달, 전 주보다 이번 주, 어제보다 오늘, 점점 판세가 좋아지고 있다.”고 자체 평가했다. 특히 아소 총리는 지난 20일 가고시마현의 유세에서 “자민당은 진정한 보수”라며 등돌리는 보수층을 막는 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보수층의 결집을 겨냥, ‘색깔론’까지 들고 나왔다. 민주당을 좌익, 사회주의 쪽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홈페이지에 민주당에 대해 ‘노동조합의 굴레에 있는 좌익세력’이라며 날선 표현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또 민주당이 일본교직원노동조합(일교조)의 지원을 받는 사실과 관련, “민주당=일교조에 일본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매달 2만 6000엔(약 33만 8000원)씩 지급하려는 아동수당의 공약 역시 선심성 사회주의정책이라고 꼬집었다. hkpark@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3김시대’ 막내려… 여야 대치 새국면으로 전환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3김시대’ 막내려… 여야 대치 새국면으로 전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이 23일 마무리되면서 향후 정국에 상당한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큰 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3김 시대’의 종식을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논의와 시도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계보·계파 정치 탈피에서부터 지역구도 극복 문제 등을 포괄하는 내용이 담론의 대상이다. 중기적으로는 진보·좌파 진영의 행로도 관심사다. 앞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이번 국상으로 핵심의 두 축을 잃은 상태다. 내부 통합의 물꼬를 트게 될지 아니면 분열의 길을 걷게 될지 전망이 엇갈린다. 태동 조짐을 보이는 친노 신당의 창당 움직임이 그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가져온 남북간 만남과 이에 따른 관계 변화 여부도 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당장 여야간 대치 정국도 새 국면으로 접어들 여지를 갖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화해와 통합’이라는 화두를 정치권에 던지고 있다. 의회주의자로서의 일생이 새삼 국민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바라는 국민적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정치권도 지난 5월 노 전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올해만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겪은 만큼, 조문정국 이후의 ‘대응법’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이미 정국 타개책 모색을 위한 직·간접 대화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9월 정기국회 개회에다 10월 재·보선 공천 등 각자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다. 한나라당은 ‘조건 없는 등원’ 요구로 민주당을 압박하려 하고 있다. 국회 내에서 정치·민생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의할 예정이다. 동시에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미뤄놓았던 당·정·청 쇄신을 통한 국정 드라이브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제안한 선거제도·행정구역 개편 등 정치개혁에 대한 후속작업으로 국면을 전환하고, 내각 및 청와대 개편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쥐겠다는 심산이다. ‘상주’를 자임해온 민주당은 아직 이 문제를 공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앞으로도 1주일 이상은 애도 분위기를 이어가겠다는 생각이다. 이 기간 내부 의견수렴을 통해 원내외 병행투쟁 전략을 준비할 계획이다. 다만 당 내부에서는 등원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조문 기간에 조성된 화합 분위기를 외면하고 장외투쟁만을 고집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달 남짓 남은 추석 민심을 겨냥,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10월 재·보선이 바로 뒤이어지는 중요한 때이다. 여야의 행보는 일차적으로 상호 움직임에 영향을 받게 될 전망이다. 예컨대 곧 단행될 내각과 청와대 개편이 얼마만큼 국민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인지도 중요하다. 10월 재·보선 결과는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2기 국정운영 기조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선거제도·행정구역 개편 등에 대한 여야 협상의 속도 등도 이런 요인들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이지운 홍성규기자 jj@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김대중 前대통령 서거] 사선 다섯번 넘어… 민주주의 유토피아 꿈꿨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3김(金)시대’의 한 축이었던 고인(故人)은 1997년 겨울, 반세기만에 ‘선거혁명’을 통한 정권교체를 이뤘다. 3전4기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반도 정세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5차례의 죽을 고비와 5년여의 감옥생활, 6년여의 가택연금, 3년의 망명생활 등 고인의 삶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으로 점철됐다. 가톨릭 세례명인 ‘토마스 모어’처럼 고행하는 구도자의 삶을 이어온 셈이다. “정이 많은 분이다.” 영원한 비서실장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을 이같이 묘사했다. 말년에도 거의 매일 서울 동교동 자택을 드나든 박 의원은 “지난 1월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방문해 용산참사에 대해 말을 꺼내자 이내 김 전 대통령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면서 “평소에도 드라마 속 (비참한) 사람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힐 만큼 평소 인정도 많으셨다.”고 전했다. 말년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등장과 맞물려 케네디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여론주도층을 만나 서민과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 안전망, 생산적 복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매서운 바닷바람을 등진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는 지금도 생가터가 남아 있다. ‘후광’(後廣)이라는 호(號)도 여기서 따왔다. 중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입학한 수재였지만 반일운동으로 학적부에 ‘시찰계요’라고 적힐 만큼 반골기질을 드러냈다. 1945년 약관의 나이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 신민당에 입당했지만 8개월 만에 탈당한다. 이어 3단계 통일방안(1972년)과 광주 민주화운동(1980년) 등을 거치면서 색깔론에 휘말렸다. 고인은 1946년 첫 부인 차용애 여사와 가정을 꾸리고 해운회사를 경영, 큰돈을 모은다. 뛰어난 상술로 목포일보를 인수한 뒤 주필을 겸하기도 했다. 자금을 끌어대고 경쟁상대를 꺾으며 사람의 마음을 낚는 장사와 정치는 닮은꼴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우익단체 참여를 빌미로 인민군에게 처형될 위기에 몰렸지만 이송 중 극적으로 탈출, 첫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3대를 포함, 4차례 낙선의 쓴잔을 연거푸 마셨다. 1958년 강원도 인제군 민의원 선거 때는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1959년 보궐선거에선 색깔론에 휘말렸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1961년 인제군 보궐선거에서 당선의 첫 기쁨을 누린 김 전 대통령. 하지만 사흘 만에 5·16을 맞아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교도소로 직행한다. 토머스 모어의 교훈은 오히려 고난 극복의 힘이 됐다. “늦어도 100년 뒤면 (토머스 모어처럼) 역사에서 재평가받을 것”이라며 고통을 이겨냈다. 1962년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 고인은 이듬해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1964년 5시간20분간 행한 ‘필리버스터’ 발언과 6개월간 13차례 본회의 발언 등은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1년 7대 대선은 기회이자 시련의 계기였다. 1970년 45세의 나이에 ‘40대 기수론’의 라이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물리치고 신민당 후보로 나섰지만 이듬해 선거에선 94만표 차로 패배했다. 이후 20년간 혹독한 시련이 밀려왔다. 일본 망명 중인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시작으로 전두환 군사정권까지 55차례의 연금생활, 5년반 동안의 감옥생활, 2차례의 망명생활을 겪었다. 1976년 명동 3·1구국선언으로 구속(긴급조치 9호 위반)됐고, 1981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훗날 고인은 “솔직히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계의 구명운동 덕에 목숨을 건진 고인은 1982년 도미,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이끌며 민주화 운동의 외로운 무게중심이 됐고, ‘인동초’란 별칭도 얻게 된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한 고인은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만든 신한민주당이 2·12총선에서 109석을 확보, 1987년 6월 항쟁의 기틀을 마련한다. 사면복권 뒤 1987년 13대 대선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3위에 머무르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에 따른 비난에 휩싸였다. 1988년 총선의 평민당 ‘황색 돌풍’으로 일선에 복귀했지만 19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고인은 “40여 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며 대선 낙선의 소회를 곱씹었다. 막을 내릴 것 같던 정치인생은 영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만에 다시 불꽃을 살렸다. 1993년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고, 빗발치는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대선 4번째 출마를 선언한다.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난이 일었지만 단 1.6%포인트의 표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색깔론과 지역감정의 벽을 넘었다. 보수세력인 자민련과의 DJP연합이 힘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색깔과 지역의 부조화스러운 조합이기도 했다. 고인의 대표 브랜드는 ‘햇볕정책’이다.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쪽의 문을 열게 하는 열쇠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뤄진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가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탈냉전체제로 진입하는 촉매제가 됐다. 고인을 한반도 유일의 노벨상 수상자로 만든 일대 사건이었고, 퇴임 뒤에도 논쟁이 있는 사안에 대해 비중있게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고인은 대통령 임기말 측근들의 비리가 뒤늦게 터진 데다 아들들이 구속되는 등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과 밀거래한 사실은 안타까운 기록으로 남게 됐다. 또 완벽주의와 제왕학적 리더십은 권위주의적 통치라는 오명도 남겼다. 오상도 허백윤기자 sdoh@seoul.co.kr
  • 친노일부 연내 신당창당 선언

    친노(親) 세력의 일부 인사들이 17일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이들은 올해 안에 창당을 완료해 내년 6월 지방선거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모든 시·도에 광역단체장 후보를 배출한 뒤 한나라당에 맞서 민주당은 물론 다른 진보정당들과의 선거연합을 주도하겠다.”는 것이다.이에 따라 오는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야권의 정치지형에 파장이 예상된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민주개혁진영의 대통합 작업도 차질을 빚게 됐다.신당에는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천호선 전 대변인, 김충환 전 혁신관리비서관, 문태룡 전 참여정부평가포럼 집행위원, 김영대 전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을 비롯해 1642명의 참여자들은 창당 제안문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하려면 제대로 된 정당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지역주의 해체와 지역분권을 실천하는 전국정당, 시민주권의 국민참여정당, 인터넷·휴대전화로 참여하는 ‘내 손 안의 정당’ 등을 신당의 방향으로 제시했다.천 전 대변인은 “지난해 ‘촛불’을 보면서 국민참여형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다고 봤다.”면서 “기존 정당이 담을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해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 등 신당 창당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친노 인사들도 신당을 창당하는 것 자체는 존중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창당 제안을 담은 홈페이지(www.handypia.org)를 통해 “민주당은 국민이 당에 참여해 정당의 주인이 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언젠가 지지자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시민과 함께하기 위한 혁신 가능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민주당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창당은 한나라당에 승리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도 했다.신당의 정치적 파괴력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유시민 전 장관을 비롯해 참여정부의 실질적인 지분을 가졌거나 고정 지지층을 지닌 인사들이 향후 신당에 참여할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해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이명박 정권의 독선과 일방적 독주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면서도 “지금은 단일대오가 필요하며, 모든 민주세력이 연대하고 힘을 합칠 때”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씨줄날줄] 죽산 조봉암/김종면 논설위원

    1950년대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 자유당 이승만은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북진통일론을 외쳤다. 이에 맞서 진보당 당수 죽산(竹山)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부르짖었다. 항일독립운동가로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그는 1952년 직접선거로 이뤄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차점으로 떨어진다. 모두가 명철보신하며 제 살 길을 찾고 있을 때 감연히 이승만 독재에 도전한 것이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다시 낙선한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결별, 진보당을 만들어 위원장으로 정당활동을 하던 죽산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다음해 처형된다. 혹자는 죽산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에 견주기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제정에 참여하는 등 건국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죽산의 행적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1950년대 극우반동시대 평화통일·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 진보정치운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이다. 6·25전쟁 이후 부패 특권경제 아래 신음하던 서민들에게 진보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은 큰 호응을 얻었다. 전후 농지개혁과 관련된 죽산의 역할과 사상은 농업의 국내총생산(GDP) 비중이 절대적이던 ‘농업국가’ 한국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죽산은 몽양 여운형과 함께 진보정치세력이 따라 배워야 할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꼽히기도 한다. 죽산의 진보당이 뿌리내렸더라면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사회민주주의가 국정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죽산은 지난 50년간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사형돼 ‘간첩’ 대접을 받아 왔다. 정치보복에 따른 ‘사법살인’의 희생자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돼 온 것이다.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진보정치인. 그는 과연 우리에게 잊혀진, 아니 잊혀져도 좋은 인물인가. 엊그제 여야의원과 사회원로들이 죽산 50주기를 맞아 선생의 명예회복을 청원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도 지적했듯 진실과 정의, 인권의 문제는 이념을 떠나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다. 법원의 신속한 재심이 있어야겠다. 역사의 진실 규명에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라프산자니, 이란 개혁파 재결집시키나

    개혁 진영의 대표적인 지도자이자 지난달 실시된 이란 대선에서 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를 지지했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17일 이란 대중 앞에 섰다. 이날 설교가 흩어진 개혁 진영을 결집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라프산자니는 이날 “우리는 적들이 시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우리를 비난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면서 “시위자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한다. 부정선거 시비가 제기된 지난 6월12일 대선과 관련, 공개 토론도 제안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라프산자니의 연설은 하메네이만큼 파괴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날 연설은 사실상 와해된 시위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기름을 부을 수도 있을 만큼 이란 개혁 진영 움직임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목을 끌었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보도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날 라프산자니의 연설이 반정부 세력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또 일부는 이날 연설이 개혁 진영을 결집,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에 대비하는 발판을 마련해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망했다. 이날 연설에는 무사비 전 대선 후보도 참석했다. 대선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법적 통로가 다 차단된 만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은 현실이다. 이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개혁 진영에서는 아마디네자드에 대항할 정당 창당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가 필요한데 현 정부가 불법적으로 들어섰다고 규정하고 있는 무사비가 선택하기에는 어려운 카드라는 지적도 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昌 “우리가 한나라 2중대냐” 연대설 일축

    昌 “우리가 한나라 2중대냐” 연대설 일축

    최근 ‘심대평 총리론’ 등으로 정치권에서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연대설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가운데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가 “우리가 한나라당 2중대냐.”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 총재는 13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정책공조 없는 보수대연합이나 총리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연대설을 일축했다. ●昌 “우리는 독자적 야당…연대설 오간 일 없다”  그는 “선진당은 독자적인 제3야당”이라고 강조한 뒤 “어떻게 총리를 빼가고 장관을 빼간다는 얘기가 나오느냐.불쾌한 일이다.”라고 비판했다.이 같은 비판은 보수진영 결집을 위해 선진당 심대평 대표를 총리로 추대해야한다는 정부와 한나라당 일각을 겨냥한 것이다.  이 총재는 “다만 정당 사이에 정책공조나 정치연대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런 틀이 없이 장관·총리를 기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면서 “정책연대나 정치연대 부분은 빠지고 보수대연합을 하려고 한다는 것처럼 나왔는데,분명히 그런 이야기는 오간 적이 없었다.”고 거듭 강조했다.이어 현재 선진당은 정책연대나 정치연대를 말할 상황과 시기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주요 당직자회의에서도 “요즘 선진당과 여권 사이에서 충청권 연대니,대연합 같은 말이 오가고 있는 것처럼 보도되고 있지만 그런 말이 오간 일이 전혀 없다.”며 당내 수습에 나섰다.  특히 “여권과 정책공조·정치연대의 틀이 생기면 모르겠지만 한두사람이 총리나 장관으로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우리 당은 창당 역사가 짧고 작지만 정직하고 원칙과 정도를 지켜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앞으로도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는 한나라당과의 연대설을 놓고 민주당이 거세게 비난한 것과 관련, “우리는 독자적 야당”이라면서 “근거없는 추측으로 우리 당의 정체성까지 헐뜯는 것은 공당으로 지켜야할 자세를 저버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총재가 이처럼 연대설에 선을 긋는 것은 미디어법 등을 놓고 쟁점법안을 놓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한나라당 2중대’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충청권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민주당의 행보도 당내 거부감을 더하고 있다.한 선진당 충청권 인사는 “연대설을 보고만 있으면 지금도 어려운 당의 운신폭이 더 좁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친박 “충청도민 무시하는 처사”…연대설에 불쾌감  한편 한나라당내에서도 선진당과의 연대설을 놓고 친박(친 박근혜) 진영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다.선진당과의 연대가 사실상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것 아니겠냐는 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특히 연대설이 흘러나온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와 친이(친 이명박)계가 역대 선거에서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던 충청권에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내 비주류인 친박 진영의 입지를 더 좁힐 수 있다는 계산으로 보인다.한 친박의원은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강조하면서 “충청연대론이 성사된다면 친박의 피해가 가장 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박 진영의 송광호 최고위원도 1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연대설을 언급하면서 “당 최고위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은 사항이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은 뒤 “만약 사실이라면 충청도민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이어 “총리 한자리 주고,장관 몇자리 준다고 떠난 민심이 급선회해서 돌아온다면 이는 충청도민 무시하는 것”이라고 거듭 비난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제2창당 수준의 통합·혁신 추진”

    “제2창당 수준의 통합·혁신 추진”

    “제2 창당에 버금가는 통합과 혁신을 추진하겠다.” 5일로 취임 한 돌을 맞은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던진 화두다. 정 대표는 이날 여의도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후반기 체제부터는) 민주개혁진영의 연합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면서 “세력통합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이를 위해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의 변화를 예고했다. 지지세가 취약한 영남에서는 “광역단체별로 적어도 한 석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했고, 텃밭인 호남에서는 “자기 사람 심기 관행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의 풀뿌리 민주주의 엘리트를 영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민주개혁진영 연합을 언급하며 특히 친노(親) 그룹에 대해서는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뜻”이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오는 10일)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고 언급해 이르면 오는 10월 재·보선이 첫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정 대표는 또 “서민에게 희망이 되는 민주당”을 강조했다. 그는 “부자 감세를 추진하면서 서민 증세를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서민중도행보와는 거꾸로 가고 있다.”며 현 정권을 비판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부고] 서상린 전 국회의원

    서상린 전 국회의원이 9일 별세했다. 84세. 고인은 육사 8기 출신으로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경기 용인·안성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공화당 창당위원 및 당기위원장 등을 지냈다. 6∼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오인순씨와 광수·광일씨 2남. 빈소는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발인은 11일 (02)790-4444.
  • 유럽의회에 당당히 발 들여놓는 스웨덴 ‘해적당’

    ‘미국이 왼쪽으로 가니 유럽은 오른쪽으로’  7일 끝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영국과 헝가리, 그리스 등 모두 11개국에서 집권당이 패배하고 보수 성향 정당들이 득세한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미국의 인터넷매체 드러지 리포트가 초반 개표와 출구조사 결과를 함축해 붙인 제목이다.  그러나 각국에서 선전한 진보 성향의 정당도 많다.특히 스웨덴에서는 인터넷 지적재산권(copyright)을 무력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해적당(The Pirate Party)’이 초기 개표 결과 7.1%를 득표,758개 의석 가운데 18석이 할당된 스웨덴 몫 가운데 1석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 눈길을 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AP통신은 이 정당의 예상 득표율을 7.4%로 소개했다.  해적당은 지적재산권을 무력화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를 표방하는 한편,특허 시스템을 파기하고 인터넷 환경의 감시를 줄이는 것을 정강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당의 후보 1번으로 유럽의회 입성이 확실시되는 크리스티앙 엥그스트롬은 “정말 환상적”이라며 개표 결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개인의 순수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인터넷에서 새로운 정보를 올바로 다루는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한 태도 만으로 뭉친 이 모호했던 정파는 지난 4월 세계 최대의 파일 무료공유 사이트인 ‘파이어러트 베이’가 고발한 4명의 남성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가파르게 지지율이 상승했다.창당한 2006년 스웨덴 총선에서 1%도 넘지 못했는데 3년 만에 6%포인트 안팎의 상승을 기록한 것이다.  인터넷 ‘해적질’을 옹호하는 이들은 현재 이 재판의 재심을 요구하고 있다.  엥그스트롬은 젊은 유권자들의 호응이 이같은 당의 도약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그는 “우리 정당은 30세 이하 유권자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다.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이다.이제 그들은 더 이상 거대 정당들이 이들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동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줬다.”며 “개인의 순수성과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당찬 각오를 밝혔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씨줄날줄] 로자 룩셈부르크/김종면 논설위원

    “세계의 질서가 왜 이 모양일까. 그러나 한탄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와 맞서야 하고 세계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그는 1918년 독일 공산당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창당한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혁명가다. 그는 진창에 빠진 자본주의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다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제창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 무렵 활동한 그는 개인적 친분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관료주의와 공포정치를 끊임없이 비판하며 혁명과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화해와 공존을 역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피에 굶주린 로자’‘붉은 로자’라는 평가도 따른다. ‘거리의 전투나 감옥에 있는 나의 자리에서 죽기를 소망한다.’고 할 만큼 그는 타협을 모르는 강골이었다. 로자의 시신이 90년 만에 독일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발견됐다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엊그제 전했다. 그는 47세이던 1919년 독일 우파 민병대에 의해 총살돼 란트베어 운하에 던져졌고, 피살 5개월 뒤에 시신이 발견돼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진짜 시신은 따로 있다는 주장이 간단없이 제기돼 왔다. 생전의 로자는 150㎝의 단신이었다. 골관절염 때문에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평생 절뚝거렸다. 삶의 변방으로 밀려난 그는 인간 실존의 모순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의 주검은 그 찬란한 불행의 완결판 같다. 슈피겔은 발견된 시신의 머리가 없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두개골 수집이 유행했기 때문일 수 있으며, 민병대가 살해한 뒤 손발에 돌을 매달아 던져 수족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좌파의 성소가 된 그의 ‘빈’ 묘지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추모행사가 이어진다. 21세기다. 혁명의 우상은 스러지고 동상은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로자는 여전히 혁명의 향수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 ‘혁명’이전에 ‘인간’ 그 자체를 위해 살고자 했던 그의 진정한 혁명의지 때문인지 모른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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