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참전
    2026-06-15
    검색기록 지우기
  • 4안타
    2026-06-15
    검색기록 지우기
  • 소환
    2026-06-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098
  • 대미 공식창구 노린 유화책/북한의 미군유해 송환 안팎

    ◎미 의회와 직접 접촉… 관계개선을 모색/남북대화 진전·긴장완화에 「한몫」 기대 북한이 미국의 현충일인 28일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미군병사 유해 5구를 판문점을 통해 미 의회대표단(단장 GV 몽고메리하원 원호위원장·민주·미시시피주)에게 인도한 것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북한이 유엔군사령부소속 장병들의 유해를 유엔사에 마지막으로 인도했던 것은 휴전협정이 발효된 1년뒤인 54년 8월17일로 당시 유해는 북한의 한만 국경지역 14개 포로수용소에 수감중 사망한 미군 1천8백69명을 포함한 4천23구로 올해 유해송환은 만 3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유엔군사령부는 휴전이후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공산측과 80여차례나 유엔군장병 유해송환을 위한 협상을 벌였으나 북한측의 무성의로 결실을 보지 못했었다. 미국은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인 88년 12월6일 북경에서 북한과 외교접촉을 전개하고 지난달 26일까지 8차례의 비공식접촉을 통해 양국간의 현안을 토의해왔다. 미국측은북한과의 접촉에서 ▲남북대화 진전 ▲비무장지대안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 ▲실종미군유해 인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 가입 ▲테러포기 ▲대미 비방중지등을 촉구하고,북한측은 ▲주한미군 철수 ▲남북한 상호감군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팀스피리트훈련 중지 ▲한미 정부간 직접대화및 관련개선 ▲실종미군 송환을 위한 양국정부간 협의등을 내세웠다. 지난 1년 5개월동안 수차례에 걸쳐 계속된 북경접촉과 주유엔 북한대표부 허종부대표의 워싱턴에서의 미 정계·관계인사들과 빈번한 접촉끝에 이번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해송환에는 북한측이 미국측에 보내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중 혹은 포로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미군은 모두 8천1백77명이며 이밖에 한국군과 영국·프랑스·터키·캐나다 등 참전 16개국의 유해도 2천2백33구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만3백여구의 유해중 이번에 인도되는 5구의 유해송환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군과 참전 16개국의 유해송환문제도 계속 협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군사관계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 대변인 링크대령은 『북한이 어떤 의도로 5구의 유해를 미국측에 인도하는지 알 수 없으나 외교적인 루트를 통하지 않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판문점을 이용하는 것은 앞으로 남북대화나 긴장완화를 위해서도 긍정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은 당초 미군의 유해발견 사실을 뉴스를 통해 흘린 뒤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측 대표들의 인도주의적인 인도요구를 무시하고 미국과의 공식대화의 무기로 이용하려는 기도를 보여왔다. 유해반환은 교전 당사국간의 군사적 문제로 정전위원회 소관사항이나 북한이 유해인도계획을 몽고메리의원에게 직접 서한으로 통보한 것은 미 의회와 접촉해 보려는 외교적인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측은 처음 미 의회대표단이 직접 평양에 와서 유해를 인수해 가라는 제의를 했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로 인도장소를 바꾸었다. 이번 인도된 5구의 유해는 판문점에서 헬리콥터를 이용,오산 미 공군기지로 이송된 뒤 29일 C141 미 수송기로 미 육군중앙신원감식소(USACIL)에 보내져서 첨단과학 장비를 이용,신원확인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신원감식소에서는 인식표·단추·만년필 등 유류품이 있을 경우 이를 토대로 1차 감정을 하고 2차로 X선·레이저빔·유골의 조직검사 등으로 신원을 최종 확인한 뒤 유가족에게 통보한다. 1975년 월남전쟁이 끝난 뒤 설립된 미 육군신원감식소는 그동안 태평양전쟁이나 월남전에 희생된 유해를 정밀하게 분석,신원파악을 해와 이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미군 관계자들은 이번의 경우 전쟁이 일어난지 40년이나 지나 유해만 가지고 신원파악이 어려운 데다 설령 신원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유족을 찾는 작업이 더 어려워 이들의 대부분이 무명용사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37개월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미군은 8천1백77명의 실종자이외에 3만3천6백29명의 사망자와 10만3천2백84명의 부상자를 내고 3백89명의 돌아오지 않는 포로를 내었다. 미국이 무명용사의유해반환을 위해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이나 베트남·북한과 공개접촉 혹은 비밀접촉을 하는등 끝까지 송환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유족들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인도주의적인 면도 있으나 미국군복을 입고 전사한 장병들의 시신은 끝까지 국가가 신경을 써 응분의 대우를 한다는 것을 보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긍지를 높이려는 의도도 짙다. 북한도 그동안 회피해왔던 미군유해 송환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은 이를통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려는 계산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전인철외교부부장이 지난 15일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우리는 미군의 유해를 더 발견하는 경우 유해를 모두 반환할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협상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실종·미귀환포로 현황 (유엔군사령부 집계) 국적 실종 미귀환포로 계 한국군 1,647 1,647 미군 8,177 389 8,566 기타참전국 18 197 215 계8,195 2,233 10,428
  • 오늘 인도 미군 유해/북한,2구 신원확인

    【워싱턴 AP 연합】 미 국방부는 28일 북한으로부터 인도받게 될 5구의 한국전참전 미군병사 유해 가운데 2구의 신원이 북한관리들에 의해 밝혀졌다고 26일 말했다.
  • 국가유공자 명예훼손/TV코미디프로 고발

    6ㆍ25참전용사로 무공화랑훈장을 받은 김순태씨(59ㆍ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 280)는 24일 KBS 코미디프로인 「쇼비디오자키」의 「아버지와 두아들」이 국가유공자들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KBS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발.
  • 28일 정전위서 미군유해 인도/북한통신,공식보도

    【도쿄 AFP 연합 특약】 북한은 오는 5월28일 판문점 군사정전위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미군병사 유해 5구를 미측에 인도키로 했다고 도쿄에서 수신된 북한중앙통신(KCNA)이 14일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유해는 28일 상오10시를 기해 미 의회대표단에 인도되며 이같은 조치는 한국전쟁 참전 실종 미군의 유해문제에 대한 「인도적인 해결」 차원에서 내려졌다고 밝혔다.
  • 베트남에 「따이한 혼혈아」5천∼1만명

    ◎취학ㆍ취업등서 차별… 신원 속이며 생활/그리운 아버지나라 한국행 가장 원해 한국의 베트남 참전으로 혼혈아라는 부담을 안고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고 있는 한국계 2세들이 줄잡아도 5천명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씨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국제사회복지협의회(회장 정주태)와 관련을 맺고 있는 국제사회복지개발주식회사의 베트남 지사장으로 파견돼 있는 김병하씨(61)는 베트남이나 한국정부가 베트남의 한국계 2세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아 분명한 숫자는 헤아릴 수 없으나 대략 5천∼1만여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64년 9월 비둘기부대를 효시로 베트남이 공산화되기 전인 73년 3월까지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약 32만명이었고 여기에 민간기술자ㆍ기능공ㆍ개인사업가 등까지 합치면 베트남 전쟁기간 중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은 약 40만명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베트남사회에서 「라이따이한」(한국계 혼혈아)이라는 약간 경멸조로 불려지고 있는 한국계 2세들은 대부분 취학이나 취업을 위해 신원을 속이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신원이 노출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과거 한국군이나 민간기술자들이 근무했던 지역에서는 거의 어디서나 발견되며 나이는 대략 15세∼20대초반을 이루고 있다. 호치민시의 경우 과거 한국인 기술자들이 집단으로 일하고 있었던 쭈민가장에는 아직도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서 돼지고기와 닭고기,생선 등을 반찬으로 구워 초라한 밥집을 경영하고 있는 구엔 티 안여인(53)은 라이 따이한들이 베트남 사회에서 크게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으나 취학과 취업에는 다소 제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안 여인은 라이 따이한들은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의무교육기간인 9년밖에 학교를 다닐 수 없으며 정부기관이나 정부운영회사에서는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취업을 거부하는 사례가 더러 있다면서,대부분의 한국인 현지처나 라이 따이한들은 신원노출을 꺼리고 있으며 날품팔이나 재봉일ㆍ자전거 수리ㆍ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길거리에서 음식이나 복권등을 팔아 그날 그날을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67년 H사의 전기수리공으로 베트남에 와 75년까지 있었던 한국인 오모씨(64)의 베트남 현지처가 된 안 여인은 월맹군과 베트콩 게릴라들이 사이공을 함락시킨 75년4월30일 이후 두달간은 보복같은 것이 두려워 벌벌떨며 문밖에도 잘 나가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하고 비록 오씨와의 사이에 「구엔」이란 이름대신 김치양(20),도선군(18ㆍ직업고2),동진군(16ㆍ직업고1) 등 한국이름으로 남매를 두고 있으나 오씨를 이해하기 때문에 재결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러나 오씨가 자주 베트남을 방문,어려운 생계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을 하고 있는 김치양은 다섯살때 떠난 아버지가 그동안 아프리카국가들을 전전하면서 편지를 보내왔고 지난해 10월에는 호치민시를 직접 찾아 돈까지 주고 갔다면서 언젠가는 그리운 아버지의 나라인 조국 따이한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라이 따이한들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무학이거나 국교와중학교 중퇴생들이다.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의 일부는 또 대도시를 떠나 시골로 생계지를 옮기고 말았다. 이들의 최대희망은 베트남인의 최대희망이 「해외탈출」이듯이 「한국행」이다. 현지처들이나 라이 따이한들은 그러나 너무나 흘러버린 긴 세월의 간격탓인지 남편ㆍ아버지와의 재결합은 거의 포기하고 있다.
  • 외언내언

    미국사람들은 15년전 월남전의 패배를 공식적으로는 인정치 않는다. 어디까지나 교전당사국간 정치적 평화협상에의한 종전이며 전략적 철군인 것이다. 나라 밖의 어떤 전장에서건 결코 패배해본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미국이지만 월남전은 두번다시 기억하고싶지 않은 수치스런 전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미국에 6ㆍ25한국전쟁은 어떤것인가ㆍ 어떤 미국 전쟁사가는 일찍이 『이상한 시기에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하게 일어난 전쟁』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그럴듯한 지적일듯 하지만 전쟁자체가 정당이 아닌 이상상태일진대 그런 정의는 낡아빠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미국을 대표하는 부시대통령의 6ㆍ25관은 어떠한가.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되 「잊혀진 승리」로 불려진다』. ◆「잊고 싶은 전쟁」(월남)이나 「잊혀진 승리」(한국)란 표현은 따지고 보면 오십보 소백보격이다. 두 전쟁 다 「승리의 주체」로서 보면 이념과 체제는 다르지만 그 명분과 승리가 개운찮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사실 6ㆍ25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라든가 전쟁사적 규정은 우리에게도 아직 미완인채로 남아있다. 그래서 동란이니 사변이니 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조선전쟁 또는 그냥 6ㆍ25전쟁이라고도 쓴다. ◆6ㆍ25는 이를 체험한 세대들에겐 여전히 비극이며 악몽으로 남아있다. 휴전선과 판문점,국립묘지와 녹슨 훈장,「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말없는 경원선 절단지점등이 그 실체이다. 6ㆍ25는 북한의 남침이었고 김일성은 연합군 대위였다는 최근의 모스크바 방송내용과 평양방송의 대응비난등 모두가 아직 끝나지 않은 6ㆍ25의 모습들이다. ◆앞에 인용된 부시의 6ㆍ25관이 미국의 한국전참전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목표1천만달러)행사에서 피력된 것도 흥미롭다. 마침 때를 같이 해서 김일성이 그곳을 잃고서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다는 백마고지의 승전 종합전적지가 조성됐다. 전쟁은 잊되 전쟁의 교훈마저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뜻에서이다. 6ㆍ25에 관해 「남침」이었다는 전통주의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 따위 수정주의에 도전받고 있는 때 이라서 더욱 그러한 것이다.
  • “한국전 참전기념비 세우자” 미서 1천만불 모금운동

    ◎부시도 참여… 5백50만불 이미 모아/링컨기념관부근에 93년까지 완공 【워싱턴=김호준특파원】 미국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 만찬이 1일 저녁(미국시간)워싱턴의 옴니 쇼람호텔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및 상ㆍ하의원 40여명을 비롯한 미 정ㆍ재계 고위인사 1천여명과 이 모금행사를 지원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부시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한국전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최초로 되돌린 전쟁이었으나 역사에 의해 종종 무시돼 「잊혀진 승리」로 불려지고 있다』고 회고하며 『이 기념비가 세워지면 미국인들은 미국의 용감한 아들 딸들이 침략을 저지하면서 부딪쳤던 자유의 시험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대통령은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에 걸쳐 목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행진은 한국전에서의 자유수호가 그 기초를 놓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1백만달러의 모금을 목표로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왕년의 명코미디언 보브 호프와 여가수 로즈메리 클루니가 여흥을 맡아 한국전 당시를 회고케 했으며 한국전을 배경으로 한 「3일의 약속」이란 소설을 출간,그 판매대금 20만달러를 기념비 건립기금으로 기부한 교포의사 정동규씨도 참석했다. 한국전 참전기념비 건립위원회(위원장 리처드 스틸웰 전주한미군 사령관)는 모금 목표액 1천50만달러 가운데 이날 만찬전까지 총 10만명으로부터 5백50만달러를 모금했다고 밝히고 1만달러이상 기부자 가운데는 포드자동차,크라이슬러사,IBM,두폰,필립 모리스 등 미국굴지의 기업과 현대 포철 대우 등의 미 현지법인들이 포함돼 있다고 공개했다. 위원회는 6ㆍ25동란 발발 40주년을 맞아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리스 등 미국 각지에서 80여건의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라고 설명하고 91년 10월까지 모금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모금은 지난 86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 의회를 통과한 기념비건립법안에 서명한 뒤부터 착수됐다. 기념비는 휴전협정 40주년 기념일인 오는 93년 7월27일까지 완공될 예정이다. 링컨기념관 부근 2천4백평 부지위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한국의 38선을 상징하는 무장병사 38명의 행군 입상이 중심을 이루며,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병사들의 조상 사이를 걸어서 대형 성조기가 게양된 경배구역에 다다르도록 설계돼 있다.
  • 가평전투 39돌 기념식 유엔 한국참전국협서

    사단법인 유엔한국참전국 협회(회장 지갑종)는 29일 상오10시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영연방참전기념비」에서 6ㆍ25당시 중국군의 춘계대공세를 저지한 영연방군의 「가평전투 제39주년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기념식에는 지회장과 영국ㆍ뉴질랜드ㆍ캐나다ㆍ호주대사관직원과 참전용사등 3백여명이 참석했다.
  • 임정수립 71주년 기념식/광복후 처음 정부주관 행사

    ◎문창범선생등 18명에 훈장 추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제71주년 기념식이 13일 상오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재경광복회원,3부요인,정당대표,전직주요인사,각계대표등 2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렸다. 올해 처음으로 정부행사로 열리는 이날 기념식에서 상해임시정부 교통부총장을 지낸 문창범선생에게 건국훈장대통령장,정인보선생등 납북인사 5명을 포함한 17명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이 각각 추서됐다. 이날 훈장이 추서된 독립 유공자는 그동안 공적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분단국가로서의 제약때문에 포상을 받지 못하다가 민족동질성회복,국민대화합,민족정기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첫번째 임정수립 기념행사에서 그 유족들이 포상을 받게 된 것이다. 강영훈국무총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3·1독립운동의 결정체로서 71년전 오늘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가 패퇴하는 날까지 나라잃은 겨레의 유일한 정통정부로서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고 지적하고 『임시정부는 민족사상 처음으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기틀을 확립했다』고 말했다. □건국훈장 포상자 공적 ▲문창범(1870∼1934,건국훈장 대통령장)=1908년 만주 노령에서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피선. 1919년 대한국민회의 회장으로 선출,해삼위에서 3·1독립만세운동 주도. 같은해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총장피선. ▲정인보(1885∼납북,건국훈장 국민장)=1910년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등과 동제사조직,조국광복운동. 1919년 귀국,연희전문대 교수로 재직중 1926년 「6·10만세운동」과 중앙고보학생들의 「5인독서회」등 학생운동 지원. ▲김의한(1900∼납북,〃)=1919년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에 가입,중국으로 망명. 1928년 한국청년동맹 재정위원으로 활동. 1932년 임정 항주로 이전시 김구등과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임정활동참가. ▲오영선(1896∼1939,〃)=1919년 상해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1931년11월까지 임정국무원비서장·국무원·법무총장·군무부장·외무부장역임. ▲이관식(1883∼1972,〃)=1907년 육군부위로 근무중 군대가 해산되자 유인식·김동등과 경북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구국계몽활동. ▲김일곤(1912∼1943,〃)=1938년 조선의용대 입대후 각지에서 항일전에 참전. 1943년 중국 호북성에서 일본군 탱크 2대를 파괴하는등 활약하다 순국. ▲김상덕(1891∼납북,〃)=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회원과 2·8독립선언후 체포돼 7개월의 금고형받음. 1920년 중국으로 망명,28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통합추진. 42년 임시의정원의원·임정선전위원으로 활동. ▲이광민(1900∼1945,〃)=1915년 만주 신흥학교수료. 1924년 전만통일회주비회 발기회에 군정서 대표로 활동. ▲이병화(1906∼1952,〃)=1921년 통의부에 가입,의주군 청성진 경찰주재소 습격,순사살해. ▲이종건(1887∼1958,〃)=1923년 재만독립운동단체의 재통일을위해 10개단체를 통합,정의부를 조직,중앙행정위원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징역 7년. ▲최이붕(1897∼1973,〃)=1919년 간도에서 철혈광복단 청년단조직, 조선은행자금 15만원탈취해 무기구입,북로군정서에제공. ▲윤 해(1888∼미상,〃)=1915년 만주에서 간민회조직,활동. 1918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창립,부회장으로 활동. ▲명제세(1885∼납북,〃)=1919년 이동령 주도로 상해서 불변단조직시 총무로 활동. 박은식 등과 함께 제2독립선언문 발표. ▲장철호(1892∼1945,〃)=1928년 국민부중대장. 1919년 조선혁명군 소대장으로 일군과 항전. ▲김형빈(1894∼1943,〃)=1919년 독립단에 입단,친일파 김하룡처단,군자금모집활동. ▲박건웅(1906∼납북,〃)=1932년 조선의열단대표로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결성,조선인군관학교에서 혁명투사양성. ▲장도빈(1888∼1963,〃)=1908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취임,애국 계몽운동 전개. ▲조지영(1916∼1950,〃)=1937년 중국군에 배속돼 대일전에 참전. 1942년 임정군무부 비서·군사과장 역임.
  • 「연안해군」탈피,대양방위에 첫발/환태평양 합동훈련 참가의 의미

    ◎선진 전술경험 축적,연합작전 능력 강화/유사시 태평양 주요해로 확보를 목표 우리해군이 창군이래 처음으로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 등 우방국가의 해군들과 함께 1만 마일의 환 태평양훈련(RIMPAC)에 참가함으로써 본격적인 태평양해군의 일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한국해군은 80년대 초부터 한국형 구축함을 자체생산,실전배치 함으로써 질과 양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거듭해왔으나 전함이나 잠수함 순양함 한척 없어 9백마일의 연안을 지키는 연안해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10대 무역국의 하나인 한국은 하루에 소모되는 57만5천 배럴의 원유공급을 모두 해상수송에 의존할 뿐만아니라 1년에 약30만척의 각종 선박이 출입하며 무역량의 99%가 해상을 통해 운송되고 있어 한국의 상선대를 보호할 수 있는 막강한 함대가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6ㆍ25동란 발생시 연인원 1백만명이 넘는 참전16개국의 증원병력과 수억t에 달하는 탄약 장비 원조물자 등의 99%가 해상수송로를 통해 부산과 인천항으로 입항했으며 한국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증원되는미국의 병력과 장비가 대부분 해상수송로를 통해 한국으로 오게되어있어 태평양의 해상교통로 완전확보야말로 우리에게는 사활이달린 지상의 과제라 할 수 있다. 환태평양 해군훈련은 유사시 태평양상 중요해상교통로의 완전 확보를 위해 미3함대와 7함대가 주축이 되어 71년부터 캐나다 호주 등이 참가해서 약 2개월에 걸쳐 실시돼 오고있다. 격년제로 실시되고 있는 환태평양훈련을 통해 미국은 태평양 연안국간에 연합작전능력을 향상시키고 상호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전술작전과 전략방향을 발전ㆍ평가해왔다. 80년도에는 일본이,86년도에는 영국이 참가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88년도에 제독2명을 포함한 참관단을 파견했으며 올해 최초로 소규모함대를 파견,당당한 훈련국의 일원으로 참가 하게됐다. 지난해 미국 서부해안에서 하와이ㆍ필리핀ㆍ괌 등의 훈련 해역에서 대규모 항공모함전단과 전함ㆍ순양함ㆍ구축함ㆍ잠수함ㆍ지휘통신함 등 30여척의최신함정의 기동훈련을 참관하고 돌아온 해군의 한 관계자는 우리해군의 시야가 연못의 올챙이 정도밖에되지않는다며 해군력 건설을 역설하기도 했다. 한국해군은 이번 림팩훈련 참가를 통해 영해에서는 실시하지 못한 대함ㆍ대잠수함ㆍ대공전 및 상륙작전을 포함한 기동훈련을 실시함으로써 하늘과 바다ㆍ수중ㆍ해안작전의 경험을 얻게 된다. 해군관계자들은 이번 훈련참가로 첫째 미국ㆍ캐나다ㆍ호주ㆍ일본 등 태평양연안국가들의 해군과 상호협력관계를 통해 선진해군의 작전ㆍ전술능력을 습득할수 있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둘째 정치ㆍ외교ㆍ군사적인 차원에서 국제적인 지위향상과 함께 국내에서는 실시할 수 없는 해상 실탄사격훈련과 첨단장비의 정밀성능검사를 통해 고도의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할 수 있을것도 큰 성과중의 하나로 보고있다. 그러나 림팩훈련의 한국 참가는 이제 막 시작된 북방정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이 훈련을 놓고 소련과 중국은 공산권국가들의 태평양 진출을 막으려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해상 봉쇄정책이라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은 한국이 일본해군과 함께 해양작전을편다는 것이 국민감정에 좋지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어 국방당국자들은 한동안 고심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하고 상선대를 보호하기 위한 함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국민감정이나 북방외교의 추진에는 다소 장애가 되더라도 『협상과 힘의 확보는 별개의 문제』라는 실리적인 입장에서 훈련 참가를 결정하게 됐다. 한국은 이번 훈련 참가를 통해 미ㆍ일ㆍ캐나다ㆍ호주 등과의 군사협력관계를 마련하고 동북아시아의 교통요충지로서의 역할 증대를 꾀할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외언내언

    고르바초프 페레스토로이카의 배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필요」와 「이익」이다. 팽배한 관료주의의 지배아래 창의력과 성취력을 잃은 그 상태로 둔다면 소련은 21세기를 향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수 없을뿐더러 끝내는 2류 공업국으로 전락하고 말리라는 절대절명의 위기감의 소산이라 해도 좋다. ◆일반적으로 소련인은 정치는 「힘」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국내정치도 국가관계도 최종적으로는 힘에 의해 결판난다는 신념이다. 이데올로기나 체제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련인은 그런 것도 주먹 앞에서는 결국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러시아인은 힘이 없는 동지보다도 강력한 적을 내심으로는 훨씬 존경하는 쪽이다. 과거 쿠바 사건에서의 소련의 굴욕은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강한 결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건이다. 그때까지는 케네디대통령을 연약한 풋나기 정도로 얕보고 있었던 소련인도 이사건 뒤에는 그를 아주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쿠바의 굴욕은 소련의 군비확장의 큰 동기가 되었다. 그 소련이 지금 왜 군축에 앞장 서는가. 그들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쿠바사건의 소련측 당사자는 흐루시초프였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동서화해나 군축추세 또는 페레스토로이카의 연원을 거슬러 찾자면 흐루시초프에 이를지 모른다. 그가 은퇴한 뒤 써낸 회고록에서는 6ㆍ25 한국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음을 명확히 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두차례나 찾아와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보고했고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은 스탈린이 마침내 동의했다』 ◆최근들어 6ㆍ25에 관해서는 「남침」이었다는 전통주의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 따위 수정주의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실재의 과거」이다. 사실은 수정되지 않는다. 드디어 소련은 6ㆍ25기간중 7만명의 공군병력을 동원,북한을 지원했고 지상군을 투입시킬 계획을 세웠었다고 참전을 시인했다. 그것도 관영 모스크바 방송이다. 지금은 아주 가까워진 소련이다. 그러나 역사는 남고 현재는 흐르는 것이다.
  • “소 공군 7만 6ㆍ25때 참전”/모스크바 방송 보도

    【내외】 소련은 6ㆍ25동란 기간 중 7만명의 공군병력을 동원,북한을 지원했으며 이와함께 한때는 5개의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지상군을 전투에 투입시킬 계획을 세웠었다고 21일 모스크바방송이 보도했다. 소련이 6ㆍ25때 북한을 지원키 위해 7만명의 공군병력을 동원한 사실과 지상군을 파견하려는 계획을 세웠음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모스크바방송은 소련 공군조종사로 6ㆍ25동란에 참전했던 게오르기 블루드미로프의 말을 인용,동원된 7만명의 공군병력은 전투기조종사ㆍ기술자ㆍ고사포병 등이었으며 5개의 기갑사단은 북한군의 전투상황이 악화될 경우 소련공군의 협조아래 투입하려 했었다고 전했다.
  • 워싱턴∼평양 “새로운 냉기류”/미­북한관계 최근 흐름을 보면

    ◎미의 잇단 유화조치에도 북한측 냉담/여행허가 신청 거부등 서로 강경 대응/미,상호주의 철저 고수… 일방적 양보는 없을 듯 미국이 대북한관계개선 노력에 「상호주의」 입장을 철저히 견지하고 있다. 미국의 88년 10월 대북한 유화조치에 북한이 「화답」하지 않는 한 미국의 일방적인 양보는 더이상 없으며 평양이 「강경」으로 나오면 워싱턴도 「강경」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또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더라도 교차승인원칙에 얽매어 미국이 북한을 자동 승인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을 공공연히 시사하고 있다. 미정부의 이같은 태도는 「변화하지 않는 북한」에 대한 「실망과 불만」의 표시이자,변화를 촉구하는 「경고」의 의미로 워싱턴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 2월 북한이 연례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 팀스피리트의 실시를 트집잡아 남북대화는 물론 모든 미ㆍ북한접촉을 중단시키자 워싱턴과 평양간에는 새로운 냉기류가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미 스탠퍼드대 군축문제연구소가 추진해온 남­북한­미 3국 학자들간의 군축세미나 개최(3월26일∼30일)에 합의했다가 참가를 철회한 데 이어 자신들의 초청으로 평양방문길에 오른 워싱턴 소재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수석연구원 윌리엄 테일러에 대해서도 중도에서 입국 불허를 통보했다. 지난 6일 미국무부는 북한의 유엔주재 대표부 차석대사 허종이 IMF(국제통화기금)본부 방문을 이유로 제출한 워싱턴 여행허가 신청을 거부했다. 미국은 또 이번에 미측이 제의할 차례인 북경에서의 미­북한 외교관 접촉을 잠정동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실망과 불만은 남북한 교차승인 문제에 관한 미정부의 입장을 밝힌 지난 13일의 국무부 논평에 잘 나타나 있다. 국무부는 이 논평에서 『한국의 대소접근과는 달리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향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노골적으로 지적했다. 미국은 노태우대통령의 7ㆍ7선언에 호응하여 88년 10월31일 발표한 대북제재 완화조치를 통해 ▲미ㆍ북한 외교관 접촉을 재개,북한의 대미접촉길을 터주는 동시에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자유화하고 ▲미ㆍ북한간비정치적 교류및 ▲인도적 교역을 허용했다. 워싱턴은 이 조치에 대해 북한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반응을 보여야 다음 단계의 조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상호주의」 추구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했다. 그리고 88년 12월6일 이래 북경에서 갖고 있는 양측 외교관 접촉에서 북한측에 대해 ▲남북대화의 진전 ▲6ㆍ25참전 미군유해 송환 ▲반미선전 중단 ▲비무장지대내 신뢰구축 조치 ▲핵 안전협정 수락 ▲테러리즘 포기 선언 등 6개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미국은 특히 남북한 관계의 진전에 따라 미ㆍ북한 관계도 진전될 수 있다며 북한에 대해 무엇보다도 남북대화를 중시하도록 강조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주한미군 철수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양측 접촉수준의 참사관급에서 대사급으로 격상 ▲유해 송환을 위한 양국 정부간 협의 등을 주장하는 바람에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난 1월18일의 마지막 7차접촉에서 북한측은 미군 유해 5구의 송환을 위해 미의회의원 초청 계획을 통보하고 팀스피리트훈련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킨다며 이의 취소를 요구했다. 북한은 유해 송환을 위해 양국 정부간 협상을 갖자는 그들 주장을 미국이 끝내 반대하자 미의원들을 초청,이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미국은 유해 송환문제가 판문점의 군사정전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한측의 미의원초청 계획에 반대했다. 미국무부의 드세이 앤더슨 동아태담당부 차관보는 13일 의회 증언에서 『북한과의 관계가 더욱 확대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고 밝히면서도 『그러나 평양이 핵 안전협정 수락,테러리즘 포기 선언 등과 같은 믿음을 주는 조치를 취해야 미­북한 대화가 진전될 것』이라며 상호주의 원칙을 거듭 확인했다. 따라서 북한측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미­북한 접촉은 재개되더라도 실질적인 진전이나 급격한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 미군,6ㆍ25때 소 극동비행장 오폭/한국전 참전 미 조종사 회고

    ◎「북한 조종사 훈련기지」 청진 오인… 그로미코 항의/트루먼 대경실색… 맥아더장군 해임의 계기된듯 소련이 한국전에서 손을 떼게 된 것은 자신과 동료의 소련 비행장 오폭 때문이었다고 6ㆍ25참전 미전투기 조종사 출신인 앨턴 쿠안벡씨가 4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게재된 기고문에서 주장했다. 미 공군에서 22년간 복무한 후 브루킹스 연구소ㆍ상원 정보위원회ㆍCIA(중앙정보국) 근무를 거쳐 지금은 농장주로 있는 쿠안벡씨는 자신의 오폭이 트루먼 미 대통령의 맥아더 장군 해임에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음은 쿠안벡씨 기고문의 요지다. 한국전 초기인 1950년 10월8일 나는 같은 편대원인 알 디펜돌프와 함께 북한 상공에서 작전중에 있었다. 고도 3만7천피트의 구름위를 비행하던 우리가 항로를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을땐 우리는 이미 소련 영내로 수마일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F­80기를 강하시켜 양쪽에 산을 낀 넓은 하천 계곡을 따라 비행했다. 남동쪽의 해안선을 향해 곧장 날아가면 중소 국경을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편대의 오른쪽으로 약 5백야드 떨어진 작은 마을의 한 2층 건물 꼭대기에서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 며칠동안 적의 활동을 알리는 신호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는 트럭 1대를 발견한지 약 20초후에 디펜돌프가 『비행장을 봐라. 비행기로 차 있다』고 소리쳤다. 그건 전투기 조종사들이 꿈속에서 그리던 표적이었다. 비행장에는 2차대전중 미국에서 만들어 소련으로 보냈던 P­39및 P­63형 항공기 약 20대가 두줄로 늘어서 있었고 비행기의 담갈색 동체에는 가느다란 흰 테를 두른 큰 붉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당초 우리가 부여받은 공격 목표는 한반도 북동해안에 위치한 청진의 한 비행장이었다. 지금 우리 눈아래 있는 비행장은 지표가 단단하다는 청진 비행장에 대한 묘사와 맞아 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는 귀로에 비로소 그곳이 청진이 아니었음을 알고 그렇다면 소련국경에서 20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나진의 불용 비행장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작전완료후 우리는 항공기 1대를 파괴하고 2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보고했으나 몇달후 극동 공군사령부의 한 보고 장교는 『그 비행장이 1주일간 불탔다』고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목격한 화염에 싸인 비행기가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이 공격은 즉각 국제적 반발을 샀다. 소련 외무차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2대의 미군 전투기가 소련 국경에서 1백 km 떨어진 소련의 수카야 레츠카 지역을 침범,비행장에 기관총을 난사함으로써 재산 피해를 입혔다』고 항의를 제기했고 미국은 책임을 시인했다. 이 이야기는 1면을 장식했으나 양국 정부는 각자의 사정때문에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결정적인 시기에 북한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해리 트루먼 미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한 조치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믿고 있다. 문제의 사건이 터지기 전날 우리 편대는 청진으로 출격했으나 비행장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건 당일 아침 또 한차례 청진을 정찰 비행했지만 적의 활동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련 국경에 가까운 한반도의 북동부에서 2백명의 북한 조종사가 훈련을 받고있다는 정보 보고 때문에 그때 우리의 모든 관심은 청진에 집중돼었다. 당시 소련은 시베리아와 한반도 북부및 서부 지방의 모든 기상정보를 암호화,우리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우리편대가 이륙하던 날엔 높은 구름이 일어 우리는 고도 3만7천피트까지 올라가 구름 위를 비행했다. 이륙 40분 후 편대장 부드애번스가 엔진이상 때문에 기지로 돌아가겠다고 무선으로 연락해왔다. 디펜 돌프와 내가 구름속에서 처져 20대의 비행기가 앉아있던 소련 국경 부근의 한 활주로 뒤로 가게된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10월8일 오폭사건은 소련 지도층으로 하여금 그들 동부군의 취약성과 현대화된 미공군에 대한 방어의 무력성을 깨닫게 했다. 스탈린은 북한에서 빠져 나오기로 결정했고 우리의 공격이 있은지 2주일 후인 10월 22일엔 모든 추가 원조를 중지시켰다. 워싱턴에선 그 공격때문에 트루먼 대통령이 대경실색했다. 그는 대소전을 촉발시키려는 맥아더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의심아래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간주했다. 이 사건 직후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자신과 웨이크 도에서 회동할 것을 명령했고 6개월후에 맥아더는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 일본이 미국을 사들인다는데… /유장희(서울시론)

    ◎통상마찰 축소ㆍ경협 상호이득 될 수도 일본이 미국을 사들인다고 야단이다. 얼마전에는 미국의 종합예술의 산실이라고 볼수 있는 컬럼비아 영화사를 일본기업이 사들였는가 하면 최근에는 뉴욕의 심장부에 위치한 록펠러 센터를 일본의 모재벌이 매입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세인의 눈에 쉽게 띄는 빙산의 일각일 뿐 미국 전역에 걸쳐 일본기업들의 진출과 재산매입현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것 이상으로 대단한 수준이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내셔널저널」지는 최근호에서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서머스군 얘기를 초점기사로 싣고 있다. 즉 재정난에 봉착한 서머스군의 보건국은 일본정부에 재정원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개도국원조는 최하위 아무리 군단위 행정이라해도 정부기관임에는 틀림없는데 어떻게 승전국 미국의 정부기관이 불과 40여년만에 패전국 일본정부에게 재정원조를 해달라고 손을 내밀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제2차 대전후 승전국 미국은 이른바 마셜플랜이라는 것을 세워 유럽각국과 일본의 전후복구사업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지원정책이 주효하여 불과 4∼5년사이에 유럽참전국들은 주요생산시설의 원상회복이 가능하였고 특히 일본의 경우는 맥아더장군의 일본경제개혁정책과 잘 조화되어 눈부신 복구와 성장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혹자는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성공을 가리켜 미국식 자본주의 이식의 첫결실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혜택을 입어 성장한 일본이 이제 보은한다는 뜻에서 재정난에 봉착한 미국의 지방정부 몇개쯤 도와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미국내 도처에서 일본의 원조를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주민들의 여론이 꽤 거센 모양이다. 이러한 반발의 배경에는 물론 미국인들의 자존심이 깔려 있고 또 하나는 호혜정신이 부족한 일본인들의 불공정ㆍ불공평 관행도 들 수 있다. 이제 그만큼 벌었으면 시장도 개방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의무도 이행해야 할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일본이다. 선진국중 개발도상국을 도와주는 노력에 있어서 일본은 아직도 최하위국중의 하나다. 즉 GNP대 협력기금출연 비율을 보면 18개선진국중 15위에 머물고 있다. 무상원조 공여액을 보면 18개국중 18위에 불과하다. 반면에 장사를 목적으로 한 해외투자는 부동산 투자까지를 합하여 작년 한해만도 1천6백억달러에 달했고 89년말현재 일본의 해외자산 총누계는 1조달러를 넘음으로써 선진국중 최고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단순히 장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기업들은 상대국의 산업을 옭아매는 경향도 있다. 기술과 필수부품을 독점함으로써 상대국의 생산공정 자체를 전횡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미국의 ICBM시스템이나 다탄두 유도탄,그리고 이들을 원격조종하는 제어시스템이 일본의 첨단기술 제품을 사용치 않을때 제대로 작동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일본은 미국을 최소한 5년은 앞서있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경제학적 측면에서 볼때에는 일본기업이 미국기업이나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이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양국을 위해서 바람직스러운 일로서 해석되어야 옳으리라고 본다. 그 이유의 첫째는 일본이나 서독의 기업이 미국으로 많이 진출하면 할수록 미국의 산업구조는 빨리 개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록펠러센터를 사들였다는 발표가 있은 다음날 동센터의 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앓던 이를 뺀 것 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도심의 낡은 빌딩을 좋은 값에 팔아서 이젠 그 돈으로 뉴저지 교외의 숲속에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세기의 명빌딩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현대식 초자동화 빌딩을 짓게 되는데 뉴욕의 일류 업체들이 이미 입주신청을 끝낸 상태라한다. 이로써 일본은 뉴욕 중심부 건물을 샀다는 자긍심을 얻었고 미국은 업체변혁을 이룩할 계기를 맞게 된것이다. ○재정지원 요청하기도 일본인 특유의 경영기법을 고려할때 낡은 록펠러 건물을 그대로 두고 쓸리는 만무하다. 이를 개조하고 변형하여 그 중심가에 꼭 맞는 유용한 건물을 만들어 낼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양측의 노력을 다 합할때 미국사회 전체에 득이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단순한 부동산 거래였지만 장기적으로 볼때 미국복지의 증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부동산 소유권은 일본기업에 있으므로 결국 귀중한 재산이 일본인손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하는 질문을 던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라는 실체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속지주의 위에 건설된 개방사회이다. 즉 누구든지 들어와서 정착하면 미국인이요,미국기업이 되는 것이다. ○미산업구조 개편돼야 거시경제적 측면에서 봐도 일본기업의 대미진출은 양국에 다 이로운 것이다. 높은 금융비용 때문에 산업구조의 개편이 지연되고 있는 미국에 일본기업의 매수와 합병은 금융비용도 적게 들 뿐만아니라 경영혁신이라는 신선한 충격도 되는 것이다. 자본의 국가간 이동을 통해 양국의 금리격차는 줄어들 것이며 따라서 미국내 투자는 다시 활성화될 것이다. 미국의 경쟁력은 향상될 것이며 수출이 늘고 지속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일본은 자본의 한계효율이 높아짐으로써 확대재투자가 가능하고 미국내 현지법인을 갖게 됨으로써 통상마찰 등을 빚어낼 염려가 없을 것이다. 다만 달러화의 국제수요가 증대함으로써 미국의 수출에 약간의 흠집이 생길 것이나 이는 앞서말한 산업의 개편 및 경영혁신으로 보전되고도 남을 것이다. 공정과 공평이라는 국제사회의 룰만 지킨다면 일본자본의 대미진출은 공동선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된다고 본다.
  • 새 자주국방시대와 한국의 과제/정종욱 서울대교수ㆍ정치학(서울시론)

    ◎안보ㆍ통일정책 조화,평화정착 주도를 체니 미국방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주한미군 감축에 관한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현 임기가 끝나는 93년까지 5천명의 비전투 요원을 추가로 철수시켜 주한미군을 3만6천명 수준으로 감축시킨다는게 주요 골자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놓고 미군의 완전철수를 주장하는 급진적 제안도 있었던 터라 우선 제2사단과 그 지원부대가 계속 주둔한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체니가 밝힌 주한미군에 관한 입장은 단순히 병력수준을 감량한다는 체중조절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하는 주요한 대목이 하나 있다. ○미군 임무에 중대 변화 그것은 미군의 기능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한미군은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는 주역을 맡아왔다. 한국에 배치된 미군의 주력이 비록 지상군 1개 사단과 그 지원부대라 하지만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화력은 통상편제를 훨씬 넘는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미군들이 서울과 판문점을 잇는 서부전선의 전략적길목을 지키고 있음으로 해서 유사시에 미군의 참전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체니가 이번 서울 방문에서 주한미군의 기능을 보조적인 것으로 바꾸고 주도적 역할은 점차 한국군이 맡아 가야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 주역과 조역의 위치를 바꾸겠다는 얘기이다. 이와같이 임무교대가 이뤄지기 때문에 한미연합사 체제하에서 평시 작전통제권도 한국에 넘어올 수 있으며 휴전회담 대표도 한국군 장성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소리라 할수 있다. 월등히 많은 병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 나라 지키는 일의 주역을 남에게 맡겨 놓았다는 사실이 정상이 아니였기 때문에 이제야 겨우 모양이 바로잡혀 간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역에서 조역으로 바뀐다는 것은 우리의 체면문제와는 상관없다. 이것은 주한미군의 역할과 임무에 관해 미국정부 내부에서 그동안 신중히 검토되어온 구상의 일단을 반영하는 것으로 매우 심각한 의미가 있다.주한미군이 갖는 기능은 전략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과 한반도적인 것의 세가지가 있다. 전략적인 기능은 대소전략의 일부로서 한국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미군이 갖는 공통적 임무이다. 이에비해 지역적 기능은 아시아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여 미군의 투입이 필요할 경우 주한미군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한반도적 기능은 북한의 도발을 견제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억지의 임무를 맡는 것이다. ○새 아시아 전략 전제로 이들 세가지 기능은 미소관계와 남북한 관계등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지며 주한미군의 배치나 편제도 셋중에서 어떤 기능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세계정세에 비추어 주한미군의 대소전략적 기능은 거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고 현재의 주한미군의 편제와 배치는 주로 대북한용이라 할수 있다. 제2사단이 위력적 화력으로 중무장된채 북의 남침 주공로에 전진배치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내에서는 주한미군의 임무를 한반도적인 것에서 점차 지역적인 것으로 바꾸어야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남북한 관계개선 등의 이유로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이 상당히 완화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군의 현대화와 함께 자주국방의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임무도 점차 한반도를 벗어나 아시아 지역 전반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주한미군의 임무가 이와같이 점차 지역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면 배치와 편제가 재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전전배치에서 후방으로 한 발짝 물러나 유사시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 투입될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할 것이며 장비와 병력도 공수에 편리하도록 규모와 중량을 줄여야 할 것이다. 제2사단의 경량화가 시도될 것이며 이것이 주한미군의 점진적 부분 감축이 지향하는 목표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역할이 한국방위의 조역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국의 경제사정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 전략구상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면 주한미군은 제2사단의 경량화를 달성할 때까지 점진적으로 감축될 전망이 짙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이 흔들리거나 또는 남북한 군사균형이 한국에 결정적으로 불리해지는 무리한 조치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격에 비해 우리쪽이 너무 격상되어 체면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측의 외무ㆍ국방장관과 미국측의 주한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구성되는 4인위원회가 구성되어 향후 감축문제를 협의하도록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다행스럽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감축이 미국의 주머니 사정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새로운 전략구상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과연 미국과 재정분담을 넘어 전략적 역할분담까지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감축의 속도를 늦추면서 방위비 분담을 가능한한 낮추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이번의 대미군사외교가 얻어낸 큰 수확이긴 하지만 보다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전략적 역할분담 곤란 한국의 선택은 억제력의 증강과 화해의 모색이라는 두가지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한반도에서적극적 평화가 실현되게 노력하는 것이다. 미군의 감축으로 인해 남북한 군사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독자적 방어능력을 배양하는 가운데 남북한간에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관계개선이 이루어지도록 안보정책과 통일정책을 조화시켜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가 전쟁발발이 억제되는 소극적 성격을 넘어 전쟁의 구조적 요인들을 하나씩 둘씩 제거시켜 나감으로써 평화정착이 제도화되는 적극적인 정책을 펴나가야 할 것이다. 미군감축과 한국군의 자주국방력 제고가 남북한간에 신뢰구축을 바탕으로 하는 군비통제의 길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중하고도 면밀한 구상과 조처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주한미군의 감축문제는 방위비 분담금 몇 푼 덜내고 나가겠다는 군인들 몇천명 더 잡아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남북한 관계개선과 통일정책과 연계될 수 있도록 그 규모와 속도를 조정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북한,미 의원 초청/미군 유해 송환 협의

    【워싱턴 연합】 북한은 한국전참전 미군유해 5구의 송환문제를 협의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면서 이를 위해 미하원 원호위원회위원장 몽고메리의원(민ㆍ미시시피주)이 평양을 방문해 주도록 초청했다. 몽고메리 의원의 한 보좌관은 몽고메리의원이 북한측의 초청을 받았음을 확인하면서 초청수락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 소식통은 몽고메리의원이 국무부 당국자들과 평양방문 문제를 협의중이라고 전하고 국무부측은 북한이 미군유해를 송환할 의사가 있으면 판문점 군사정전위 회의를 통해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몽고메리의원의 방북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무부측은 북한측이 몽고메리의원을 초청한 것은 미군유해 송환을 미끼로 미ㆍ북한간의 대화채널을 다방면으로 유지하기 위한 구실로 간주하고 있다.
  • 미ㆍ북한 첫 대사급 접촉/일지 보도/북경ㆍ유엔등서 비공식으로

    ◎테일러 미 전략연 부소장,새달 평양방문 【도쿄=강수웅특파원】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센터 윌리엄 테일러 부소장이 오는 2월 북한을 방문한다고 일본 아사히(조일)신문이 13일 보도했다. 한국전에 육군대령으로 참전한 일이 있는 테일러부소장은 아사히신문 워싱턴특파원과 만난 자리에서 『시거 전미국무 차관보의 평양방문이래 북한은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어 문호개방은 시간문제』라고 말했다고 이 보도는 전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보도에서 미정부는 이미 중국의 동의를 얻어 북경및 유엔을 무대로 북한측과 대사급을 포함한 비공식접촉을 하고 있으며 북한도 남북대화의 대폭적인 확대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북한은 북경을 무대로 6차례에 걸쳐 참사급 접촉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양국이 대사급 접촉도 하고 있음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미 관계개선을 바라는 북한은 전부터 접촉수준을 정부당국자 또는 대사급으로 높이자고 미국정부에 요구해왔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