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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작가 제임스 월러 새소설 「보더 뮤직」

    ◎“중년의 사랑 노래한 한편의 서정시”/베트남전 참전 퇴역군인의 이야기/NYT,“나이 든 성인용 소설 개척” 평 우리나라에서도 40대 여성을 독자층으로 끌어들여 베스트셀러가 됐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저자 로버트 제임스 월러가 최근 세번째 소설을 써냈다.제목은 「보더 뮤직」(Border music·미국 워너 북스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시더벤드에서 느린 왈츠를」등 두편의 소설을 관통한 중년의 낭만적 사랑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하다.월러의 소설은 『줄거리가 단순하고 유치하다』는 일부의 혹평속에서도 최근 몇년동안의 초베스트셀러로 꼽힌다.이에 대해 미 뉴욕타임스 북리뷰는 소설가 로버트 플렁킷의 입을 빌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장르,「나이 든 성인용」(OLD ADULT)을 개척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동안 소설의 주류였던 「젊은 성인용」(YOUNG ADULT)은 세상에 나혼자라는 외로움속에서 무언가 확신이 필요한 불안한 청년들을 집중 공략한데 반해 월러의 소설은 삶이 허무하게 지나갔으며 나를 평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래전에 선택했던 것들­자식,결혼등에 꽁꽁 묶여 있다고 느끼는 위기의(?) 중년을 포섭한다. 물론 중년층을 다룬 책은 많지만 월러가 차별성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느끼고 있는 허무감에 대해 단호히 「노」라고 주장하는 것.월러는 그의 책을 통해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며 당신의 고통은 절대 침울한 것이 아니다』고 속삭인다.또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생에 단한번뿐인 황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 공식을 전형적으로 따르고 있는 「보더 뮤직」은 베트남전 참전 퇴역군인 텍사스 잭 카민의 이야기.이 책은 잭이 한 술집에서 손님으로부터 희롱당하고 있는 무희 린다 로보를 구해 함께 차를 타고 전전하다가 서부 텍사스에 있는 그의 목장에 도달하는 것이 기둥 줄거리다.여기다 늘 모험을 꿈꾸다가 결국 이를 이루고 마는 잭의 아저씨 본 로머의 이야기가 병렬된다.주인공 잭은 린다나 본 아저씨에게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즉 일정한 선을 넘나들도록 부추기는 촉매역할을 하지만 자신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이는 잭의 공포에 가득찬 베트남전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행동 또는 도덕적 갈등보다는 감정을 최우선으로 다루는 월러답게 「보더 뮤직」은 서정시와 노래를 연상케 하는 문장으로 감정의 파고를 극대화하고 있다.세파에 치인 중년들은 이 소설로 꽤나 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다.
  • 태권도(한국문화 세계화의 길:5)

    ◎“재미있게” 규칙 개정·장비 개선 필요/동호인 세계 145개국 4천만명… 해마다 늘어/체계적 무도철학 정립,인성교육 도움돼야 무도철학의 신체적 발현인 태권도는 아름다움을 신체적 동작으로 추구하는 사물놀이,탈춤등 처럼 우리의 민족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인이 낳은 문화 가운데 태권도처럼 세계적으로 보급된 문화는 없을 것이다.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이조의 도자기나 현대의 자동차보다도,어쩌면 김치나 갈비보다도 온세계에 널리 퍼져 침투한 것이 태권도다.예컨대 격투기 인구가 많은 미국에서도 무도체육관의 70%는 태권도가 차지하고 있고 그 비율은 지금도 상승하고 있단다』(일본의 스포츠전문잡지인 「스포츠 그래픽 넘버」의 88서울올림픽특집호). 『현재 세계태권도연맹(WTF)에 가입한 회원국은 145개국이며 수련생은 약4천만명에 이르고 있다.앞으로도 아프리카의 여러나라들이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가입할 것으로 전망되며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 수련생의 증가도 예상된다』(WTF이경명사무차장). 태권도가 동양의 다른 타격기(정격기)무도를 제치면서 세계화의 선두를 달리고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한마디로 무도의 합리적인 스포츠화에 가장 먼저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금 치러지고있는 태권도는 한국전통무예인 태권도가 아니라 경기스포츠로서의 태권도다.안전성에 대한 배려,알기쉬운 승패,기타 경기를 성립시키는 갖가지 요소를 지금의 태권도는 모두 갖추고 있다』(일본의 격투기전문잡지 「격투기통신」88년12월호). 태권도의 뿌리는 태껸이다.그러나 현재의 태권도는 태껸과 크게 다르다. 『태껸이란 한마디로 한국무도의 근원이다.태권도도 태껸으로부터 태어났다.태껸을 현대적인 스포츠로 만든 것이 태권도다.태껸과 태권도의 차이는 태권도가 직선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견주어 태껸의 움직임은 곡선적인 것과 종합무도이기 때문에 태껸에는 기술에 제한이 없어 손에 의한 안면공격과 메치기기술도 있다는 점등이다』(정경화태껸지도자). 태권도는 73년5월에 WTF를 창설하고 눈부신 세계화를 이룬끝에 94년9월 파리에서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총회에서 20 02년 시드니올림픽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지구가족으로부터 가장 합리적인 동양의 타격기로 받아들여지도록 태권도를 스포츠화한 것이 세계화 달성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단 20년 남짓 사이에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성장하기까지에는 다음 두가지가 크게 작용했다. 하나는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과 함께 전쟁터로 건너간 태권도가 다른 나라군대에게 실전무도로 소개되어 큰 관심을 모으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월남전이후 많은 태권도지도자들이 온세계로 퍼져나갔다. 또 구 서독에 광부로 건너간 사람들 가운데에도 태권도지도자들이 적지않게 끼어있어 광부로서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귀국하지 않고 세계각국에 태권도체육관을 연 사람들이 많았다. 뿐만아니라 미국과 중남미를 향한 이민붐을 타고 많은 태권도지도자들이 남북미대륙으로 건너가 태권도보급에 힘썼다. 또하나는 외국어구사능력과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 비올림픽경기종목인 태권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IOC부위원장의 자리에 올라간 김운용WTF총재가 각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각 대륙의 스포츠통활체등을 설득해서 선수권대회 창설과 대륙단위종합체전의 정식종목으로 태권도를 채택하도록 만든 것도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까지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할 것이다. 태권도가 세계속에 보다 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태권도를 보다 재미있는 경기로 만들기 위한 경기규칙개정과 장비의 개선등이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태권도철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세계화 시키는 것이 앞으로 치러야할 제2단계 작업이라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될 것같다. 『유도의 세계화가 이루어지자 88서울올림픽에서 유도의 종주국인 일본은 금메달을 한개밖에 따지 못했다.어쩌면 이 결과야 말로 유도의 참된 세계화일는지도 모른다.태권도의 세계화도 언젠가는 유도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한국이 태권도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경기기술의 부단한 개발과 아울러 태권도철학의 이론적 체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태권도 철학이야말로 태권도를 세계속에 보다깊이 뿌리내리도록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민경호·UC버클리교수·초대 미국태권도협회회장). 『미국에서는 이제 학교선생님의 말씀도 잘 안듣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아직도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칠수 있는 사람은 신부나 목사등의 성직자와 무도사범뿐이다.태권도지도자들에게도 경기기술뿐만아니라 수련생의 인간교육을 기대하는 부모들이 많다』(메어리 추·재미 여성태권도지도자). 온세계의 많은 청소년들에게 태권도수련을 통해 전인교육이 베풀어질때 태권도의 세계화는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태권도의 역사/태껸이 뿌리… 소림사권법보다 3백년 앞서 태권도의 기원은 삼국시대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역사적인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삼국시대부터다. 고구려 제10대 산상왕13년(209년)부터 수도였던 환도산성에 있는 무용총벽화에는 오늘날의 태권도와 같은 자유대련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이 벽화는 우리 태권도의 역사가 중국의 소림사권법 보다도100년에서 300년이상 앞선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놀라운 역사적 자료다』(김광성,김경지 교수가 함께 지은 「한국태권도사」). 태권도의 원형은 태껸,수박,권법,수박희,수벽타,각저,날파람등 여러가지로 불렸으며 고구려의 청년무사집단인 선배,신라의 화랑등이 이 격투기를 익혔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사를 뽑는 시험과목의 하나로 태권도겨루기가 실시됐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또 옛기록에 보면 몸을 날려 상대방의 상투를 발로 스치는 비각술이라는 것도 있었다. 오늘날의 태권도가 가라데나 쿵후보다도 다채로운 발기술을 많이 쓰고 있는 것도 역시 옛날부터의 전통이 살아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제때 탄압을 받았던 태껸,혹은 수박은 광복후 여러유파의 도장이 난립했으나 61년에 통합을 이루어 대한태수도협회를 탄생시켰고 65년에 명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고쳤다. 태권도의 어원을 살펴보면 태는 발로 뛰고 차고 내려친다는 뜻을,권은 손 또는 주먹으로 친다는 뜻을,도는 철학적 태도 또는 생활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문인이 말하는 태권도의 길◁ ◎새로운 경기기술 개발 노력을/김운용씨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 태권도의 세계화는 일단 달성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 싶다. 그러나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으로 열리는 올림픽의 조직위원회들이 그때마다 태권도를 선택해 주어야만 한다. 육상이나 수영등의 기본종목은 조직위원회가 빼버릴수 없지만 유도,복싱,태권도등은 조직위원회만 외면하면 그 올림픽에서는 빠지게 된다. 조직위원회가 종목을 선정할때 그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세력이 있다. 막대한 방영권료를 지불해서 올림픽을 재정적으로 크게 지원해주고 있는 TV방송국이 바로 그것이다. 선수의 뇌에 손상을 준다는 우려와 판정을 둘러싼 말썽 때문에 늘 IOC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복싱이 그래도 올림픽에 머물 수 있는 것은 복싱을 선호하는 미국TV방송국이 바람막이 노릇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는 호구의 착용으로 안전성이 확보되어 있고 전자심판기의 등장으로 판정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 또한컬러도복착용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라져 있는 유도와는 달리 일찍부터 호구의 컬러화로 TV쪽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다만 팬들과 TV의 관심을 보다 끌기위해 경기규칙과 장비의 개선,그리고 새로운 기술개발에 대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스포츠와 무도 융화시켜야/박동근씨 미태권도협 기술분과위원장 『태권도는 스포츠에 앞서 하나의 정신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운동경기의 측면만을 강조해서는 안되고 무도,즉 정신적 측면을 적절하게 융화시켜야 합니다』 25년동안 미국에서 태권도보급을 위해 애써온 미국태권도협회(USTU) 기술분과위원장 박동근(55·뉴욕대·태권도9단)교수는 태권도 세계화의 요체를 정신력강조라면서 『가라데·쿵후 등 미국에 소개된 동양경기중 태권도만 그 주도권을 미국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고 여전히 한국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정신력에서 앞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내의 태권도가 지나치게 기술위주의 경기력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한 박교수는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해서는단순한 스포츠만이 아닌 무도로서의 체계화와 세계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룰과 폼의 정립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뮤지컬(브로드웨이 “새바람”:5)

    ◎「팬태스틱스」 35년째 공연 “세계최장”/작년 내한 「캐츠」도 13년째 막올려… 인기는 여전/감미로운 선율·치밀한 구성에 관객 갈채/서쪽 소호·그리니치 빌리지 지역 소극장 몰려/연기·노래·춤 어우러진 총체적 공연예술 워싱턴 스퀘어(광장)를 중심으로 한 그리니치 빌리지의 겨울 낮 동안은 매서운 추위와 수북한 눈덩이 속에서 모든 것이 고요하기만 하다.그러나 날이 저물면 밤의 열기로 거리는 뜨겁게 달아오른다. 남쪽으로 커낼 스트리트에서 북쪽으로 14 스트리트에까지 이르는 브로드웨이 서쪽의 소호와 그리니치 빌리지는 수많은 화랑과 소극장·라이브 하우스들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예술의 거리를 이룬다. ○예술기행의 필수 코스 브로드웨이의 예술은 뮤지컬로 대표된다.워싱턴 스퀘어 아래쪽 설리번 스트리트의 플레이하우스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팬태스틱스」는 브로드웨이 공연예술 기행의 필수 입문코스다. 『9월을 기억해 보세요,생명이 서서히 익어가는/9월을 기억해 보세요,풀은 파랗고 곡식은 누렇게 변해가는/9월을 기억해 보세요,당신이 부드럽고 가냘프던 때를/기억해 보세요,기억이 나거들랑 그대로 따르세요…/12월이 깊어지면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상처가 없는 가슴은 공허 뿐인 것을/12월이 깊어지면 기억하기 좋을 거예요,우리를 익게 한 9월의 열기를/12월이 깊어지면 우리의 가슴은 기억해야 해요,그리고 따라야 해요』 이 뮤지컬의 극중 해설자인 로버트 스미스가 고음으로 부르는 주제곡 「기억해 보세요」(Try to Remember)의 감미로운 선율은 눈덮인 브로드웨이의 겨울에 한송이 눈꽃으로 피어 있다. 그리니치 빌리지 한 모퉁이에서 19 60년 공연을 시작하여 세계 최장수 뮤지컬의 명성을 얻고 있는 이 극은 극장이 위치한 설리번 스트리트 도로표지판 위에 팬태스틱스 레인(골목)이라는 표지판을 하나 더 달게 할 정도로 기념비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시골의 한 마을에 사는 16살의 소녀와 20살 청년의 사랑이야기인 단순한 내용에 등장인물 8명으로 오프 브로드웨이(브로드웨이 외각을 뜻하며 이곳의 소극장들은 브로드웨이 극장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실험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경향이 있다)의 작은 극장에서 시작한 평범한 뮤지컬임에도 한 장소에서 한 세대를 뛰어넘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설리번 스트리트 플레이하우스는 10m도 채안되는 폭에 길이 50여m의 작은 극장.관람석은 둥그렇게 무대가 자리잡은 중앙부분에는 세줄 밖에 놓일 수 없고 양쪽 옆으로 놓인 7∼8줄을 포함,모두 1백52석에 불과하다.브로드웨이 대형극장의 오케스트라 역할은 무대 뒤와 옆에 놓인 피아노와 하프 한대가 맡는다. 세트는 네개의 쇠기둥이 달린 마루판과 소품을 꺼내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드나들기도 하는 커다란 검은 상자 두개와 의자 하나가 고작이다.좁은 무대에서의 공간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극에는 검은 옷에 마술사 모자를 쓴 무언배우(Mute)가 등장,유연한 몸짓으로 담장이 되기도,나무가 되기도 하며 눈도 뿌리고 배우들에게 소품을 공급해주는 등 바쁘게 오간다. 반대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들과 딸의 결합을 원하는 양측 아버지들이 연극을 꾸며 극적인 해피 엔딩의 결합을 가져오게 하는 이 극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루젤」과 「캐츠」의 주연으로 활동한 바 있는 소녀역의 리자 메이어와 「오클라호마」,「쇼보트」 등에서 명성을 날린 해설자역의 로버트 스미스 등으로부터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의 신인인 남자역의 조시 밀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의 배우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제곡 40여명이 불러 이 극은 또 35년동안 공연해 오며 온갖 기록을 보유한 브로드웨이의 산 역사로 남아 있다.70여개국 1천여회의 외국 공연을 포함,모두 1만4천여회를 공연했으며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유명배우들 대부분이 이 극을 거쳐갔다.소년의 아버지 허클비로 나오는 65세의 고든 존스는 브로드웨이 최고령 배우이며 늙은 배우 헨리역의 브리안 헐은 한 극에서 14년 연속출연이라는 진기록을 지니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한 9명의 역대 미국대통령이 관람한 기록도 갖고 있는 이 극은 특히 주제곡 「기억해 보세요」와 「곧 비가 내릴 거야」(Soon It’s Gonna Rain)를 에드 에임스,앤디 윌리엄스 등 40여명의 가수들이 레코드로 취입,공전의 히트를 시킨 기록도 갖고 있다.이 극장의 2층은 조그만 박물관으로 각종 사진자료들과 4달러에서 현재의 33달러에 이르기까지의 입장료 변천사 등이 진열돼 있다. 61년부터 이 극에 출연,뮤트역과 인디언역 등을 거쳐 현재 무대감독을 맡고 있는 제임스 쿡씨(58)는 『이 극의 제작자인 탐 존스와 하베이 슈미트는 50년초 서로 시기를 달리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편지를 통해 대본과 음악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전쟁에의 공포가 없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서 『젊은층과 노년층,미국인과 외국인,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내용과 제한된 상황에서의 치밀한 무대 구성이 장수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설명했다.그는 또 『일본에는 세차례나 가서 공연했는데 한국은 막상 한차례도 갈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다』고 덧붙였다. 「팬태스틱스」 다음으로 현재 공연중인 작품 가운데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를 통틀어 장수의 기록을 갖고 있는 작품은 「캐츠」다.지난해 한국에서도 공연된 이 작품은 1982년의 첫공연 이래 13년동안 브로드웨이 50 스트리트의 윈터 가든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지금 그리고 영원히」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아직도 그 인기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9월29일 5천회 공연기념으로 맨해튼의 국민학생 1천명을 초청해 기념공연을 가진 「캐츠」는 지금까지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기록을 갖고 있는 슈버트 극장의 「코러스라인」(6천1백37회)과 에디슨 극장의 「오! 캘커타」(5천9백59회)의 기록을 깨는 것이 시간문제로 돼있다. ○일정한 대사없이 진행 뮤지컬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로버트 웨버의 대표적인 영국 뮤지컬인 「캐츠」는 시 「황무지」로 유명한 티 에스 엘리엇의 고양이에 대한 단편들을 모아 각색한 것이다.관람석을 포함한 무대 전체를 타이어 등이 쌓이고 지저분한 쓰레기가 널려 있는 폐차장으로 꾸민 무대장치에서 파격미가 느껴진다.일정한 대사도 없고 20여곡의 노래로만 진행된다. 제각기 독특한 의상을 차려 입은 의인화된 고양이들이 매력적인 춤과 노래로 재미 있거나 때로는 슬픈 과거를 회상하는 이 뮤지컬에는 하루종일 앉아 있기만 하는 늙은 굼비,신비의 힘이 있는 매캐비티,철도변에 사는 스킴블레생크,바지선을 타고 여행하는 난폭한 그롤티거,매력적인 그리자벨라 등 수많은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무대 벽면이 앞으로 내려와 거대한 배로 변하기도 하고 또 바퀴와 기관·연통 등을 제각기 갖고 나와 기차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무대변화가 극의 흥미를 더해준다. 특히 그리자벨라가 올라탄 타이어가 로켓처럼 불을 뿜으며 공중으로 치솟아 하늘에서 내려온 계단과 연결돼 그리자벨라가 하늘로 오르는 장면은 다양한 현대 무대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자벨라 고양이로 분한 리즈 콜라웨이가 두차례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이 뮤지컬의 주제곡 「메모리」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주디 콜린스가 이 노래로 음반을 제작,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의 최장수 뮤지컬의 주제가는 공교롭게도 아름다운 회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그러나 연기와 노래와 춤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적 공연예술의 메카 브로드웨이는 끊임없는 변신의 몸부림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 풀브라이트와 한국/김학준 단국대이사장·정치학(기고)

    지난 2월9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윌리엄 풀브라이트 전 미국 연방 상원 대외관계위원회 위원장은 적어도 세가지 맥락에서 한국에 연결돼 있다. 첫째,그가 상원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입법한 풀브라이트 교환계획이다.국제적 이해의 증진이 세계평화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믿었던 그는 이 교환계획을 입법화하는데 성공해 사실상 미국 정부의 돈으로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다른 나라로 가서 연구하게 했고 또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미국으로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한국은 이 계획의 대표적 수혜자들 가운데 하나이다.적지않은 한국인들이 풀브라이트 스칼라십을 통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또 연수를 받았다. 둘째,그는 미국의 베트남정책을 매섭게 비판했으며 그러기에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해서도 좋지 않게 여겼다.베트남 전쟁을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북베트남이 외세의존적 부패정권인 남베트남을 「해방」하기 위한 내전으로 파악한 그였기에 남베트남을 유지시키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을 쏟아넣는 존슨 대통령의 확전정책,그리고 거기에 발맞추는 한국 정부의 베트남 참전이 아주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상원 대외관계위원장이라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통해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베트남 전쟁에 대한 청문회를 자주 열어 문제점들을 사정없이 노출시킴으로써 정부를 난처하게 만든 것이다. 60년대 말에 미국의 대학가를 휩쓸다시피한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은 어떻게 보면 풀브라이트 청문회에 자극된 것이기도 했다.그리고 그 반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존슨 대통령은 68년 봄에 「대통령 재출마 포기」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브라이트의 베트남 청문회와 관련해 특히 우리로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김치」발언과 「용병」발언이다.그는 베트남에 파병된 우리 군인들을 「용병」이라고 매도해 우리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산 일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그때 주한 미국대사이던 윌리엄 제임스 포터와 김치 문답을 벌인 것이다. 발단은 『한국 군인들은 김치를 먹지 않으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그렇게되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는 포터대사의 발언이었다.그러자 풀브라이트가 『김치가 뭐냐』고 물었고 포터는 『배추를 소금에 절인 뒤 고춧가루와 마늘을 배합해 만든 것』이라고 대답했다. 셋째,그는 미국의 정치가들 가운데 처음으로 「2개의 코리아 정책」을 미국 정부가 채택하도록 제의했다. 풀브라이트의 의견으로 한반도에는 2개의 국가가 실존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이 현실을 공인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는 그 논리위에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제의했다.그리고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대화하고 협상하는 가운데 평화공존을 이룩해 내야 하며 그 바탕 위에서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마침내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풀브라이트가 이러한 구상을 내놓았던 때가 지난 70년이었으니 우리 정부로서는 「하나의 코리아」정책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이른바 「한국판 할슈타인 원칙」을 고집스럽게 밀고나갈 때였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풀브라이트의 제의를 비판했다.그렇지 않아도「용병」발언으로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2개의 코리아」를 들고 나오니 풀브라이트가 곱게 보일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풀브라이트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셈이다.한국 정부는 73년의 6·23선언을 통해 사실상 「2개의 코리아」정책으로 돌아섰으며 91년 가을에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실현됐다. 베트남 전쟁도 풀브라이트가 내다본 방향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군사력으로는 결코 베트남 민족주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리라고 늘 주장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풀브라이트의 죽음을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미국의 유력지들은 미국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던 지혜로운 정치가」를 잃었다면서 그에 대한 경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외교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풀브라이트가 했던 말들 가운데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의 구상들 가운데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 정계에도 그만한 인물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 징용한인 보상문제/유엔인권위에 제기/국제 인권단체서…여론 고조계기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적인 인권옹호단체인 「반차별국제운동」(IMADR)은 11일 일본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의 전쟁희생자원호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조선인인 전 일본군 군인과 군속에 대한 보상실현을 요구하는 의견을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고 일본 도쿄신문이 12일 보도했다. 일본군 군인과 군속으로 제2차대전에 참전한 재일동포의 보상문제가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기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관례상 해당 정부가 답변을 하도록 의무화돼 있기 때문에 일본에 전후보상을 구하는 국제여론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전망했다.
  • 워싱턴 DC(세계의 명소/걸작건축감상:11)

    ◎국회의사당/링컨기념관/재퍼슨기념관/백악관/워싱턴 기념탑 축으로 동서남북 배치/불 건축가 설계… 1792년이후 계속 건설/워싱턴기념탑­의사당 사이엔 국립미술관·스미소니언박물관 자리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중심부에 위치한 링컨 기념관에 대리석 링컨이 엄숙한 표정으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그 뒤로는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문이 새겨진 석판이 있다.「국민의,국민에 의한,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설파하는 링컨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여기서 1㎞쯤 동쪽으로 링컨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높이 1백69m의 워싱턴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다.백색 대리석 기념비가 낮에는 희게 빛나고,밤에는 조명을 받아 어둔 밤하늘을 배경으로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게 된다.기념비 주위로는 미국 50개주를 상징하는 성조기 50개가 펄럭인다.미국 건국의 확고부동한 표상이다. ○나라사랑… 공간초월 링컨의 시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워싱턴 기념비 너머로는 또 약2㎞ 떨어져 미국 국회의사당이 자리잡고 있다.국민들의 대표인 상하원 의원들이 모여 밤이 깊도록 쉴 틈 없이 국사를 논하는 장소다.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때면 워싱턴 기념비의 그림자가 점점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사에 골몰하는 상하원 의원들에게 다가간다.물론 링컨의 엄숙하되 자애로운 눈길도 이쪽으로 향해 있다.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두 명의 대통령의 나라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토록 계속 이어진다. 링컨 기념관,워싱턴 기념비,국회의사당이 이루는 동·서 직선축을 직각으로 교차하는 남·북 직선축의 남쪽 끝에는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의 기념관이 있다.제퍼슨은 초창기 미국의 정치제도를 확립한 대통령이다.그는 또한 그가 작성한 미국독립선언문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삶과 자유와 행복추구의 권리를 지님을 주장하기도 했다.미국 대통령의 귀감이 되는 이 제퍼슨의 입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그의 시선 역시 워싱턴 기념비에 닿게 된다.또 이 워싱턴 기념비 너머 북쪽 끝에는 다름아닌 백악관이 있다.오늘의 미국을 이끌어가는 백악관 안의 클린턴 대통령에게도 워싱턴 기념비의 모습이 보일 것이요,제퍼슨 대통령의 지혜로운 눈길이 와닿을 것이다. 이렇듯 워싱턴 기념비를 중심으로해서 동서남북에 각기 국회의사당,링컨 기념관,제퍼슨 기념관,백악관이 놓여 이루는 광장을 「워싱턴 몰」이라한다.이곳이야 말로 미국의 심장부라는 워싱턴시의 핵심부가 된다. 이 광장 주변,특히 워싱턴 기념비에서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지역에는 물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우리네 상식으로는 이 건물들은 관청건물들이 될만하다.그런데 이들은 모두 미술관 아니면 박물관 건물들이다.국립미술관이 있고,우리 귀에도 그리 낯설지 않은 스미소니언 박물관이나 항공­우주 박물관 등이 이 곳에 몰려 있는 것이다. ○V자형 참전기념비 이 워싱턴 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하나 더 있다.미국이 치른 전쟁중 전무후무하게도 패전한 월남전 참전용사비다.이것은 용감무쌍한 군인들의 동상을 나열하게 되는 여느 전쟁기념비와는 다르다.검은 대리석 벽으로 V자를 만들어 놓았는데,이 V자를 우뚝 세운 것이 아니라 땅 위에 뉘어 놓았다.이 대리석 벽에는 월남전에서 전사한모든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용산에 있는 우리네 전쟁기념관에도 이것을 흉내내어 놓은 것이 있다).이곳을 찾는 옛 전우들과 유족들은 검은 대리석 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죽은 자의 이름이 겹쳐지는 것을 보며 소리없는 눈물을 흘린다. 워싱턴 몰의 건축·구조물 배치의 공통된 특징은 「시각적 중첩」이다.워싱턴 기념비를 사이에 두고 링컨 기념관은 국회의사당을 건너보고,제퍼슨 기념관은 백악관을 건너보고 있다.초창기 대통령이었던 링컨과 제퍼슨은 미국 국부인 워싱턴을 매개로 해서 나름대로의 애정어린 감시의 눈초리를 오늘의 미대통령과 상하원 의원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월남전 참전용사비에서는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가 검은 대리석 벽을 매개로해서 서로 겹쳐지며 만나고 있다. 이러한 절묘한 배치기법이 애당초 의도된 바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을 두고 이들 건축·구조물들이 각기 들어서면서 자연히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워싱턴시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성장해 온 도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지 열다섯째 해가 되던 1791년 워싱턴 대통령은 현재의 워싱턴을 미국의 수도로 정하고 도시건설을 시작한다.무릇 새 국가의 시작은 새로운 수도의 건설로 이어지게 마련인가 보다.피에르 랑팡이라는 프랑스인 건축가가 신수도의 설계를 맡았는데 이때 이미 국회의사당,백악관의 위치가 정해졌고 게다가 추후에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광장을 도시 곳곳에 미리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워싱턴 기념비는 1888년에,링컨 기념관은 1922년,제퍼슨 기념관은 1942년,월남전 기념비는 1982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첫째로,미국인들은 자신의 국가의 수도 설계라는 중책을 주저없이 프랑스인 건축가에게 맡겼다는 것이다.잘 할 수만 있으면 누구라도 데려다 쓴다는 미국인의 실용주의는 이미 2백년 전에 「세계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둘째로,프랑스인 건축가 랑팡의 마스터플랜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후로 2백년간 이것을 충실히 따라 각종 기념물의 놀라운 시각적 중첩효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미국인들의 신중함과 철두철미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불과 3∼4년만에 신도시들을 뚝딱 건설해 놓고도 이제와 보니 도시계획이 잘못 되었다느니 원래 계획대로 지어지지 못했으니 뜯어고쳐야 한다느니 말도 많은 우리네 현실이 새삼 낯뜨거워진다. 세계의 대도시는 다 미리 계획된 도시가 아니라 자연히 발생하여 성장해 온 것이 대부분인데 워싱턴만큼은 앞서 보았듯 예외가 된다.또 하나의 예외로서 우리의 수도 서울이 있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지금부터 6백년 전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정도전을 시켜 신도시를 건설한다.북악의 줄기가 뻗어내려 온 곳에 경복궁을 짓고 그 앞에 광화문을 세우며 이를 지나 남대문으로 향하는 탄탄대로를 세운다.이것이 오늘의 세종로다.서울의 마지막 백년이 지나는 동안 이 세종로에는 청와대에서 시작되어 경복궁,구 중앙청을 지나 이순신장군 동상에 이르는 일종의 선형배치가 이루어진다.얼핏 보면 워싱턴 몰의 선형배치와 비슷하기도 하다. ○타산지석재고할만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링컨 동상과는 다르다.링컨이 오늘의 미국을 움직이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앉아 애정어린 감시의 눈길을 주고 있다면 이순신 장군은 몇해전까지도 오늘의 한국을 움직이던 중앙청과 현재의 청와대를 아예 등지고 서 있다.링컨의 엄숙함이 미국의 상하원 국민대표들을 향한다면 이순신 장군의 위용은 그저 평범한 국민들에게만 떨쳐지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 몰과 세종로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세종로 주변에는 박물관이 없다.단지 세종문화회관이 하나 있을 뿐이다.나머지는 정부종합청사,보험회사 건물,통신회사 건물,그리고 남의 나라 대사관 건물 등이 있다.또 세종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폭이 넓은 길이기는 하되,그 길이 모두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되어있다.국민들은 이 길 양쪽으로 걸으려면 여기저기 워키토키를 들고 서 있는 사복의 전경들에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어디에서고 잔디가 깔린 워싱턴 몰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롭고 밝은 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총독부(중앙청)건물이 지어진지 70년만에 헐린다고 한다.이것이 지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은 슬프다.그래도 남들은 2백년에 걸쳐 원래의 마스터플랜을 따라 차근차근 예술품에 비견 될 만한 건축·구조물들을 자기 나라의 심장부에 세워오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나라의 심장부에 아무런 마스터플랜이 없이 건물을 짓고 허물고 또 짓는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그것도 기념비적으로 지어져 서로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혼자서 멋진 상업건물들을 짓고 있으니 말이다.
  • 칸스 미 CIA국장 지명자(뉴스인물)

    ◎공군 정보통… 예비역 4성장군/월남전 참전… 2백회 출격 경력 새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지명된 마이클 칸즈(57) 장군은 35년간 공군에 복무한 뒤 지난해 9월 전역한 4성장군 출신.전투기 조종사로 월남전에 참전했으며 전역 직전 공군참모차장으로 일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칸즈 장군은 정보를 다뤄본 바 있기 때문에 정보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칸즈 장군은 『냉전은 사라졌지만 지역의 불안정,테러리즘,마약거래,범죄및 핵무기 확산 등이 문제로 등장했다』면서 『이런 시기를 맞아 대통령이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정확한 정보를 적절한 시기에 대통령에게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91년 걸프전 때 국방부에서 합참의장의 수석행정보좌관을 맡아 다국적군의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했다.그가 보좌했던 콜린 파월 전합참의장은 칸즈 장군의 일처리 솜씨를 높이 평가하고 정보국장직에 적합한 인물로 추천했다고 백악관측은 밝히고 있다. 베트남전에서 2백회 이상 출격했으며 6천4백시간의 비행시간을 기록.지난 87∼89년 태평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했던 칸즈 국장은 군출신으로는 7번째로 중앙정보국장직을 맡았다. 37년 캔자스주 정크션시티에서 출생,59년 공사를 졸업.77년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가족으론 부인과 두자녀.
  • 윌리엄 풀브라이트/미상원의원 별세

    【워싱턴 AP AFP 연합 특약】 전직 미 상원의원으로 지난 30여년간 미국의 외교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던 윌리엄 풀브라이트가 9일 뇌일혈로 숨졌다.향년 89세. 지난 45년부터 74년까지 30년간 상원의원을 지낸 풀브라이트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했던 대표적인 인사로 유명하다.
  • 변화시대의 덕목/통찰력·조정력에 전문성 갖춰야(신지도자론:6)

    ◎국제조류 꿰뚫고 세계화 과제 해결 힘써야/시대상황 감안,옛지도자 용퇴선택 바람직/나카소네 전총리,미국 모르면 일본발전 없다”갈파 12년전인 83년1월 어느날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일본총리에 취임한지 두달 밖에 안된 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를 위해 부시부통령이 만찬을 베풀고 있었다.만찬도중 나카소네는 지난날을 회상하다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그는 『27살의 병사로 미국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전하고 반드시 고국을 부흥시키겠다고 결심했습니다.그러나 나는 둘째딸이 11살 되던 해 홀로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내 딸을 맡아준 미국인 역시 2차대전에 참전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다 끝내 목이 메고만 것이었다.부시부통령도,배석한 슐츠국무장관과 와인버거국방장관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다음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레이건대통령은 크게 감동한 나머지 나카소네를 만나자 서로 「론」 「야스」라고 스스럼 없이 부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나카소네의 정치리더십이 최선은 아니다.그러나 「미국을 모르고서 일본의발전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꿰뚫은 통찰력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그가 총리가 된 뒤의 캐치프레이즈는 「전후정치의 총결산」이었다.50년대에 둘째딸을 미국에 보낼 때는 80년대를 내다본 것이고 총리에 올라서는 「미국의 그늘을 벗어난 새 일본」을 외친 것이다.그의 생각은 아직도 일본 정계를 지배한다.일본 정계의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의 「일본개조계획」으로 이어지며 일본열도에 공감대를 얻고 있다. 국민 다수가 21세기형 지도자의 대두를 기다리는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정치학자는 물론 정치인 스스로도 세계화시대의 가장 큰 덕목으로 「미래에 대한 통찰력(비전)」을 첫손으로 꼽는다.20∼30년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없는 지도자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알맞는 국가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가 없다. 서울신문이 여론조사기관인 미디어 리서치사와 공동조사한 여론조사 결과(서울신문 28일자 시리즈5 참조)도 새로운 정치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미래지향적 비전」을 꼽은 이가 45.8%로 가장 많았다.경희대 오세덕교수는 『비전제시 능력은 앞을 내다보는 직관력과 함께 과거와 현재,미래를 관통하는 분별력을 의미한다』고 했다.외국어대 김인철,단국대 강태훈교수도 『세계화라는 시대과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꿰뚫고 그것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이』가 새 정치지도자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시대과제가 무엇인지는 대통령자문기구인 21세기위원회가 잘 요약한 바 있다.「생명으로 인식해야 할 자원과 환경,미지의 문명을 열어갈 과학기술 정보,지역주의와 다자주의가 혼합된 국제경제 질서」가 그것이다.여기에 분단 반세기를 넘기는 우리로서는 「통일」이라는 민족적 지상명제를 하나 더 안고 있다.이러한 미래의 명제 가운데 한두분야 이상에서 전문가에 버금가는 지식을 갖추지 않고는 대통령은 물론,국회의원이 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박종웅의원(민자당)은 말한다. 전문지식을 갖추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정치인의 전형으로 미국의 앨 고어 부통령이 꼽힌다.그는 부통령 취임후 초고속정보화계획과 행정개혁을 주도했다.「환경지도자」 하면 그가 떠오를 정도가 됐다.지난해 한때 우리 정계에서는 「고어를 배우자」라는 바람이 일기도 했다.그런 고어도 최선의 대통령감이냐 하는데는 사람마다 견해가 갈린다.현실정치를 모른다는 지적이 있다.전문능력은 좀 뒤떨어지지만 조정력과 협상력이 뛰어나 독일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콜총리도 훌륭한 지도자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미래의 우리 정치지도자도 통찰력,전문성과 함께 조정력을 지녀야 한다.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손학규의원(민자당)은 『앞으로는 지도자가 권력분산을 수용하는 정치개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권력을 공유하면서도 전체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인하대 이영희교수도 『새 리더십은 개인적 카리스마 보다는 그룹리더십을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적인 면에서 우리의 새 지도자에게 또하나 필요한 덕목은 지역감정의 타파와 분명한 진퇴라고 할 수 있다.한림대 김재한교수는 『냉전적 대결구도,지역당 구도를 해결하는 사람이 21세기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이화여대 김석준교수는 「기존 지도자들의 솔선」을 요구한다.『급변하는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옛 지도자가 새 유형의 지도자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만 바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라는 것이 김교수의 진단이다.
  • 미 군정체제 확립(새로 쓰는 한국현대사:5)

    ◎“일인활용 불가피”속 행정권 장악에 석달/서울 입성뒤 「북쪽 접수」 주력… 개성 첫 점령/북의 소군은 2개월 앞서 「도인민위」 설치/인천입항 미군 환영길 한국인 2명 일경에 피살 미군이 인천에 첫발을 디딘 1945년 9월8일은 미 군정 3년을 포함해 이후 반세기동안 유지돼 온 한미간 특수 역사관계의 출발점이었다.그러나 한국인과 미군의 첫 만남은 그 시대상황을 상징이라도 하듯 비극적인 사건으로 얼룩졌다.미군을 환영하러 부두로 몰린 한국인들이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두명이 숨지고 십여명이 부상한 것이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운 근대 해항지여서 일찍부터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고 그 세도 강한 항구도시였다.반면 부두노동자들이 조직한 노동조합이 활발히 움직이는등 반일세력도 만만찮았다.따라서 해방이 되자 인천시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일본경찰은 재향군인 9천명을 급하게 모아 특별경찰대를 조직,각 파출소에 배치하는등 경비를 강화했으며 한국인들도 이에 맞서 치안유지회(보안대)를 결성해 대치하는 분위기였다. 「미군이 9월8일 인천항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며칠전부터 떠돌자 시민들은 「해방군」을 맞는다는 기쁨에 들떴다.이에 조선총독부는 9월5일 담화를 통해 『미군은 민중환영등 의례적인 행사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이어 8일에는 인천경찰서가 의사·산파·우편배달부를 제외한 사람의 외출을 금지한다고 공시했다.그리고 『이것은 미군의 지시』라고 못박았다. 8일 아침이 되자 인천시내 곳곳에는 미군을 환영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자연스레 하나의 무리를 형성했다.미군 함정이 부두에 도착한 하오2시쯤에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인천항쪽으로 나아갔다.인파가 현재의 인천우체국 자리를 지나 산업은행 앞에 이르자 일본 특별경찰대의 99식 소총이 불을 뿜었다.이 발포로 행렬에 앞장선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 권평근(당시 45세)과 보안대원 이석우(20세 가량)등 2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권평근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사는등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된 우리땅에서 독립운동가가 일본경찰에게 공공연하게 피살된,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이 사건에는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사전정보부족과 한국에 대한 그릇된 시각,일본측 농간들이 복합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군은 진주에 앞서 한국주둔 일본군사령관 우에쓰키(상월양부)와 연락,그로부터 『무장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를 듣자 「미군이 인수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일본군의 치안유지권을 인정한다.이같은 미군의 입장은 권평근·이석우의 사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장례식이 끝난 뒤 유족들이 미군에 발포경찰관등을 고발,이에 대한 군사재판이 13일 열렸다.이 자리에서 일본인인 인천경찰서장등은 『미군 지시로 환영·외출을 금지했는데 이를 어겼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들의 행위를 「합법」이라고 판정했다.재심청구를 했지만 곧 기각됐다. 이 사건은 미국 신문에 즉시 보도돼 미국내에서도 비판여론이 크게 일었다.종군기자 리처드 E 라우터배크는 「뉴욕타임스」9월9일자 기사에서 『일본군이 환영군중에게 발포한 것은 미군사령부의 지시때문』이라고 공개했다.「뉴욕타임스」는 이어 11일자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심각하게 제기했다. 한국점령 임무를 맡은 미 제24군단 가운데 8일 인천을 통해 맨 먼저 들어온 부대는 7사단이었다.7사단은 인천에 17보병연대를 남겨놓고 9일 아침 서울로 향했다.당시 미국신문들은 거리풍경을 『흰옷을 입고 이상스런 검정모자(갓)를 쓴 한국인들이 길가에 죽 늘어서서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USA Army Welcome」이라고 쓴 환영아치도 가끔 눈에 띄었다』고 보도했다.한국인들은 대부분 순수한 마음에서 미군을 「해방군」으로서 환영했던 것이다. 이날 하오4시6분 서울 조선총독부 건물(현 국립중앙박물관)제1회의실에서 38선이남 일본군의 공식 항복행사가 열렸다.일본측 대표인 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조선총독,우에쓰키 주둔군사령관등이 먼저 들어왔고 이어 하지중장,킨케이드중장(제7함대사령관)등 미군대표가 자리를 잡았다.하지중장 뒤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X자로 세워져 있었다. 다음날부터 미군은 38선이남의 영토와 행정조직을 장악하는데 본격적으로 나선다.서울에 본부를 둔 7사단은 우선 북쪽지역에 주력해 12일 개성을 점령한 다음 소련과 연락할 전신장치를 설치했다.이어 그리고 미군정은 각 도에 군정지사를 보내 행정권을 장악했다.지사 발령날짜를 보면 ▲경기도 10월2일 ▲강원도 11월26일 ▲충북 11월8일 ▲충남 10월9일 ▲경남 9월28일 ▲경북 11월3일 ▲전북 11월20일 ▲전남 10월26일등이다.초대 군정지사들은 영관급 장교가 대부분이고 경남지사인 찰스 해리스가 유일하게 준장이었다. 미군이 지방에 분산 배치된 초기에는 군정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군단위까지 확보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고 특히 훈련된 행정요원은 턱없이 모자랐다.그런가 하면 현지실정을 몰라 한동안 일본인 관리를 활용해야 했으며,일부 지역에선 「조선인민공화국」이 임명한 관리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그러나 각 도에 군정지사를 파견해 자리잡음으로써 미군정은 1945년 11월 말쯤 전국적인행정체제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 진격속도가 빨랐던 북쪽의 소련군은 군정체제를 이루는데도 앞섰다.8월9일 참전한 소련군은 일부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을 받긴 했지만 8월 말까지는 38선이북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끝냈다.점령군은 제25군,그 사령관은 IM 치스차코프대장이었다. 치스차코프는 평양에서도 조만식이 주도하는 「평남 건국준비위」와 「공산당 평남도위원회」를 합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케 했다.이 위원회는 비록 조만식을 대표로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소군은 이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정치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을 엮은 인민위원회를 9월 말까지 각 도에 구성했다. 미군이 남쪽에서 직접통치의 형태를 갖췄다면 소군은 자치적으로 보이는 「인민위원회」구성을 통해 간접통치하는 교활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해방된 내땅인데… 일경에 맞서다 피살/유족 최초 증언… 「권평근의 인천참사」/미군 의뢰 따른 일 통제에 강력 저항/20∼30년대 노조운동 통해 항일투쟁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 일본경찰의 흉탄에 희생된 권평근(1900∼45년)은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였다.그는 1919년 「3·1운동」부터 45년 9월 숨질 때까지 독립운동에 앞장서 왔지만 아직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지 못했다.그에 관한 기록이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어 미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본사 취재팀은 일본측 기록인 ▲삼전방부의 저서 「조선 종전□ 기록」(암남당서점)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인 「국외□어□□용응조선인명부」 ▲경성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31년 9월 발행한 「사상월보」9월호들을 검토했다. 또 ▲서울경찰청이 1993년 6월9일 국가보훈처에 회신한 「권평근에 대한 지문조회」결과 ▲국가보훈처 소장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기록 ▲조선일보 1931년 7월24일자,8월27일자,9월4일자 ▲동아일보 1931년 8월27일자,10월27일자 등 각종 자료와 가족으로부터 단독입수한 권평근의 미공개사진,증언들을 종합해 국내 언론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는 권평근의일생을 복원했다. 권평근은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배재학당에 다니던 그는 「3·1운동」때 고향에서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다가 3년동안 충청도로 피신한다.이어 26∼27년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해외 반일조선인 명부」에는 그를 『배일사상이 농후한 요주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권평근의 경력은 30년대에 빛난다.인천으로 이사해 노동조합에 투신한 그는 31년 7월 「일본인습격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된다.당시 만보산사건이 일어나자 국내에서도 한국인과 중국인사이에 충돌이 잦았다.그러나 권평근 등은 일본이 한·중 양국을 이간질시키려고 사건내용을 과장한 것이라며 중국인을 공격하는 군중의 분노를 일본인에게로 돌렸다.이 사건으로 그해 10월26일 경성지법 형사제1부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는다.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권평근은 이해 5월1일,6월10일,7월5일 등 세차례에 걸쳐 반일시위를 벌이려고 구체적인 준비를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복역을 마친 권평근은 노동조합을 통해 더욱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당시에는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장이었다.총격 현장에서도 그는 일본경찰에게 『해방된 우리땅에서 웬 참견이냐.쏠테면 쏘라』며 가슴을 내밀었다고 한다.그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장(일부 기록은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딸 명숙씨(55·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742)는 아버지를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기억했다.또 그리 어렵지 않은 살림인데도 자신은 하루 두끼만을 먹으며 어려운 이웃에게는 식량과 옷을 서슴없이 나눠줬다고 회상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김성호 〃 ▲김경운 〃
  • 미 연락사무소/베트남에 개설

    【하노이 AP 연합 특약】 미국과 베트남은 28일 외교자산반환협정에 조인하고 연락사무소 개설에 합의했다. 이로써 하노이 주재 미국 연락사무는 설날연휴가 끝나는 2월3일부터 업무를 개시하며,베트남도 조만간 워싱턴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할 예정이다. 제임스 홀 신임 하노이 주재 미국 연락사무소장은 이날 베트남 영빈관에서 구엔 수안 퐁 베트남 외무부 미주국장과 함께 협정에 서명한 뒤 『공식문서 서명으로 이제 연락사무소가 개설된 셈』이라고 말했다.이날 행사는 미공화당의 반발을 의식,취재진의 출입을 금지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제시 헬름스 미상원 외교위원장(공화)과 하원의원 8명은 지난 24일 베트남 주재 연락사무소 개설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클린턴대통령에게 보냈고,다른 상원의원 1백9명은 26일 지지 서한을 보낸 바 있다. ◎국교정상화 물꼬 텄다/미­베트남,교역파트너로 서로 인정/「실종자­포로」문제 해결이 수교 관건(해설) 냉전시대 종식과 함께 자취를 감춘 이념대결의 공백을 경제제일주의가 대부분 메우고 있다.이같은 시대상황에서 일련의 화해단계를 거쳐 나온 미국과 베트남간의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은 예견된 결과다.양국 관계개선은 베트남의 필요로부터 출발했고 미국도 국익에 부합된다고 판단,화답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베트남은 지난 86년부터 도이모이(쇄신)정책을 추진해왔다.최대후원자였던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경제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기술을 국제금융기관이나 서방국들로부터 도입해야 했다.미국과의 관계개선은 그 선결조건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됐다.캄란만을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용의를 표명하고,현상금까지 내걸면서 미군실종자 파악 및 유해송환에 적극성을 보이는 등 화해의 손짓을 했다.이번 자산반환 협상에서 호치민(옛사이공)시의 옛 미국대사관 건물을 비롯한 외교자산 22채와 정유시설 등 2억3백50만달러 상당의 민간자산을 반환해달라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 베트남은 전적으로 수용했다.반면 베트남은 워싱턴의 옛월남대사관 건물 한채만을 되찾는데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갈망하는 베트남정부의 다급한심정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미국도 인구 7천2백만명의 마지막 황금시장인 베트남을 대만 홍콩 일본 프랑스 등 아시아·유럽 각국에 선점당하는 상태를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기업인들의 건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지난해 2월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무역금지 조치를 해제한 이후 10개월여 사이에 미국기업의 베트남 투자가 2억2천3백만달러에 이르러 베트남시장에 거는 적지않은 기대를 말해준다. 사망·실종자 가족과 수십만명의 월남전 참전용사와,상하양원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적 성향인 공화당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클린턴행정부는 2천2백여명으로 추산되는 미군포로·실종자의 소재 및 유해발굴작업에 대한 베트남측의 성의를 봐가며 국교정상화 시기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유동적이면서 다소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그러나 정식수교는 상징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현실적으로는 이미 수교된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월남전 콤플렉스에 오랜 세월 시달려왔다.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데 걸프전 승리가 다소 기여했다.오는 4월30일 사이공 함락 20주년을 앞두고 고자세를 굽히지 않고도 실리를 챙기면서 이뤄낸 베트남과의 관계 개선도 콤플렉스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유럽의 새모색/「카리스마」보다「융합의 리더」찾는다(신지도자론:3)

    ◎“발전적 EU건설” 외교력을 제일 덕목으로/불/좌파 개혁실패에 민의 우파 선호/독/화학적 민족통합·경제성장 기대/영/강력개혁 대처 영국병 치유 업적 21세기의 유럽국가들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프랑스의 한 국제문제연구소는 『민족주의 강화로 21세기가 반드시 장미빛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미국의 석학 새뮤얼 헌팅턴은 『앞으로 민족문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민족과 문화에 대한 비전이 미래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떠오를 것이라는 얘기다. 그와 함께 현재 경제적 통합의 중간지점까지 진전된 유럽연합의 앞날을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과의 협조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자질도 요구된다고 보고 있다. 선택은 국민에게 달렸다.시대 변화에 따라 국민이 원하는 국가지도자상은 늘 바뀌어 왔다.유럽 여러나라 지도자들의 진퇴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은 지난 58년 드 골장군을 막강한 권한까지 주면서 대통령으로 택했다.그러나 11년 뒤에는 그에게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 대통령직을 그만두게 했다.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난뒤 정치·사회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데다 당시 식민지 알제리에 주둔하던 군부의 쿠데타조짐까지 겹친 위기상황을 맞자 초야에 묻혀 있던 드 골장군을 불렀다.국민들은 대통령에게 외교·국방·내치에 방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5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켜주면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드 골대통령은 카리스마적인 국가경영으로 전반적인 안정기를 이룩하지만 60년대말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는 바람이 불어닥친다.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월남전 참전에 대한 젊은층의 반전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었고 국내적으로 2.7%라는 당시로서는 높은 실업문제와 학교시설 개선문제 해결등이 요구됐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조르주 퐁피두,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등장해 경제적 안정을 이루지만 변화에 대한 국민적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던 것같다.81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미테랑 대통령에게 가히 혁명적인 개혁을 기대했다.사회당 정권의 출범에 겁을 먹은 일부 부유층은 해외로 도피했을 정도였다.하지만 이상적인 사회주의 정책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점차 퇴색했고 실패한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경고」는 두번의 좌우 동거정부에서 나타난다. 프랑스는 오는 5월 대통령선거에서 21세기 지도자를 선출할 예정인데 그동안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자크 들로르 전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의 인기가 높았다.이들은 정치인 출신이 아닌 행정관료에다 경제전문가라는 특징을 갖고 있어 프랑스의 미래 지도자상을 읽을수 있게 한다. 사회당 집권 14년에 대한 염증에다 사회당 후보로 유력시되던 들로르위원장의 불출마 선언으로 국민의 선택은 우파로 결정될 것 같다.새로운 지도자의 자질로는 3백만명을 넘어선 실업자 문제 해결책,유럽통합(EU) 비전,외교력의 균형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 프랑스가 비교적 폭넓은 지도자의 변화를 추구했던데 비해 이웃나라 독일은 경제및 통일지도자를 한결같이 요구해왔다고 할수 있다.아데나워 총리(재임 49∼63년)은 패전국이던 서독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케 하는 강력한 지도자로 적합했고 에르하르트 총리(63∼66년)는 경제부흥을 위한 경제전문가로 등장했다. 경제적인 기적을 이룬 독일국민들이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한 지도자는 빌리 브란트(66∼74년),헬무트 슈미트(74∼82년),헬무트 콜총리(82년∼)등으로 이어진다.특히 89년 역사적인 통일을 이룬 콜 총리의 신속한 상황판단과 기민성은 새시대의 지도자 덕목으로 지적된다. 콜 총리는 85년 옛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등장해 신데탕트시대를 맞이하자 이를 적극 활용해 89년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방독초청으로 2차대전의 남은 숙제를 해결한다.나아가 그는 동서독과 4대전승국간 회담을 통해 독일통일의 열매를 거둔다. 콜 총리는 지난해 10월 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거듭 지지를 받아 16년동안 최장수 총리를 할 수 있게 됐지만 국민이 요구하는 그의 활약상은 분명 바뀌고 있다.이제는 통일이후 문제해결과 화학적인 통합,경제성장을해야 한다는 쪽이다. 종전이후 영국에 나타난 현상은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저조한 생산력,전국을 마비시킬 수 있는 호전적인 노동조합등 이른바 영국병의 만연이었다.대영제국의 광영은 커녕 유럽내 2류국가로 전락할 상황에서 국민이 요구한 것은 강력한 지도력이었다. 그래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여사가 79년 등장해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노조의 파업에 강력히 대응하는등 개혁조치를 취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대처 총리가 11년만에 다우닝가를 내준 것은 주민세 추진같은 비타협적인 강경함에 국민들이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존 메이저 총리는 합의를 중시하는 온건정책을 펴면서 북아일랜드와의 휴전같은 내치문제로 눈을 돌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이제 유럽은 카리스마에 의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들이 아닌 합의와 조화를 추구하는 지도자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결국,지도자란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읽고 목표를 설정하며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 그 목표를 달성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 “미 육군 예산에 유방암 연구비 웬말”/국방예산 전용금지 촉구

    ◎미 「안보회복 법안」 관련 헤리티지 보고서/“병력동원 의회승인 폐지/대러 ABM 협상 유예를”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위원장 벤자민 길만)는 24일(한국시간 25일)국가안보회복법안에 대한 청문회를 열고 진 쿼크패트릭 전유엔대사를 초청,그녀의 견해를 들었다. 공화당이 클린턴 민주당행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수정을 촉구하기 위해 공약의 하나로 「안보회복법안」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싱크탱크역할을 하고 있는 미헤리티지재단의 로렌스 리터 외교국방연구소 부소장이 법안제정의 구체적인 방향에 관해 보고서를 냈다. 다음은 이 보고서가 안보회복법안에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들을 요약한 것이다. ▲1973년의 전쟁동원법안을 폐지해야 한다=지난 73년 제정된 이 법안은 대통령이 미군병력을 동원,배치할 때는 60일내에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이 법은 당시 월남전 참전에 대한 반발로 의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한 것이다.그러나 이는 군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의 외교정책수행능력을 줄이고 헌법상의책임에 의회가 간섭을 하는 것이며 모든 병력동원이 전쟁수행을 위한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95년의 전쟁동원법은 미국의 국익과 관계가 없는 평화유지 등엔 병력파견을 제한하고 사전에 의회와 협의를 하도록 해야 하며 그 반면 미국이나 맹방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경우엔 의회의 승인없이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방예산의 전용을 일체 금지해야 한다=95년 미육군의 예산중엔 유방암연구비 1억5천만달러가 포함되어 있다.이같은 비용은 국방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국방비에 숨길 것이 아니라 별도의 예산을 세워서 시행해야 한다. ▲지난 72년의 요격미사일조약(ABM)의 개정협상은 일시 유예되어야 한다=클린턴 행정부는 이 조약에 대한 공화당의 검토가 끝나기 전에 러시아와 이의 수정협상에 동의해서는 안된다.이의 수정은 스커드미사일 등 전역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요격미사일의 연구,개발,배치에 제한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공화당은 전역방어미사일망의 구축에 어떤 제한을 가하는 것은 미국의 국가안보에 반할 수도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각군별 역할과 임무에 대한 재검토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활동해야 한다=지난 92년 콜린 파월 당시 합참의장의 주도로 이 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에 착수,중복임무의 단일화,과잉부분의 삭감,통폐합 등을 모색했다.당시 금년 5월까지 최종 보고서를 마련하기로 했으나 의욕만 넘치고 아직 성과를 얻지 못했다.공화당이 다수당으로 된 이 시점에서 이 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회계말인 9월30일까지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시한도 그 내용도 늘리고 전반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 「케네디가 신화」 이룬 안방마님/로즈여사 타계

    ◎미 보스턴 시장 딸… 24살때 결혼/아들 셋 대통령·의원으로 키워/두아들 암살당하는 비운 감내 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 로즈 케네디 여사가 22일 1백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사인은 폐렴에 따른 합병증. 그녀는 미국대통령과 두 상원의원을 키워내는 등 미국신화를 창조한 훌륭한 어머니로 존경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사고와 흉탄에 아들·딸들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었다.그녀는 아들들이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하거나 유세장에 직접 나가 지지를 호소하는 등 적극적 역할을 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돋보이게 한 것은 지난 63년과 68년 장남인 존 F 케네디 대통령(당시)과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됐을 때 보인 기품과 용기였다. 그녀는 지난 1890년7월 존 피츠 제럴드 보스턴 시장의 「귀염둥이」 딸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1914년 고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결혼,4남5녀를 낳았다.2차대전중 남편이 영국주재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재기넘친 해학과 지적 능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944년미국으로 돌아오면서 그녀 자신이 「환희와 고통」으로 표현한 또다른 인생이 시작됐다.장남인 조지프가 미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데 이어 4년 뒤에는 둘째딸 캐슬린마저 비행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었다.첫째딸인 로즈마리 역시 정신 이상으로 폐인이 되고 말았으나 아들들이 대통령과 상원의원이 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그녀는 평생을 장애아들을 돕는데 헌신하고 70세 때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80세까지 골프를 즐기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해왔으나 지난 84년 심장발작을 일으켜 휠체어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우편엽서 모으기/미에 동호인 6만­취미클럽 1백개

    ◎“돈 적게 들여 각국풍물 감상”/6·25참전용사 한국엽서 7천장이나 수집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 세계 각국의 다양한 풍물을 접하면서 수집벽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우편엽서모으기」가 미국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미국 뉴 저지주 모리스타운에 사는 데이비드 코베트(36)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포함해 모리스타운의 풍경을 담은 엽서를 6백장쯤 갖고 있다.그래서 그는 이제 이 도시에서 1910년대의 모리스타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펜실베이니아주 노드에 사는 제임스 루이스 로(65).한국전 참전용사인 그는 한국우편엽서를 7천장이나 수집,한국우편엽서 최대 소장자로 꼽힌다.그는 이것들을 모으는데 3만달러(2천4백만원)쯤 들었다. 로가 모은 것은 현대 서울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일제 지배하에 만들어진 오래된 것들이었다.한국인은 게으르고 일본인은 문명화된 것으로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특히 한국인이 술에 취해 술병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묘사한 것도 있다. 해방이후 한국은 일본이발행했던 수십만장의 엽서를 없애 버렸다.그러나 전후세대는 그들의 과거의 일부로서 이러한 옛 우편엽서들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로가 지난91년 한국에서 우편엽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뤘다.로는 다른 종류의 엽서들도 모으고 있으며 「표준 우편엽서 목록」등을 포함,여러권의 우편엽서 관련 서적을 펴낸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에서는 6만명가량이 엽서를 모으고 있고 전국적으로 약1백개의 수집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비싸게 팔린 우편엽서는 「아르 누보」작가 알퐁스 뮈샤가 도안한 것으로 1990년 1만3천5백달러(1천80만원)에 매매됐다.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미국우편엽서 역사를 저술한 앤드리어스 브라운은 『그 취미의 아름다움은 태양아래 있는 모든 사물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우편엽서 수집을 예찬했다. 우편엽서는 뒷면에 글씨가 씌어 있으면 가치가 깎인다.일부 예외도 있다.마릴린 먼로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과 같은 이의 서명이 담겨 있는 엽서는 명사들의 친필을 모으는 사람들 덕택에 수천달러씩에 팔리기도 한다. 일부 수집가들은 그들이 모은 엽서를 발행처나 도안가별로,또는 주제나 지역별로 분류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열성수집가들은 또한 엽서의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탐구한 서적등 우편엽서관련 서적등을 두루 섭렵,우편수집 이론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 미군의 한반도 진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

    ◎「소군 남진」에 당황 “38이남 접수” 명령/하지 24군단장에 “군정기구 창설” 임무/남한정보 부족속 오키나와서 「골격」 완성/선발대 B25 2대로 9월6일 김포공항에 전세계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항복소식에 숨을 죽인 1945년8월15일.그 지루한 대전이 끝나던 여름날,오키나와에 있는 미 제24군단에 한통의 특별지시가 떨어졌다.필리핀 마닐라의 태평양사령부로부터 날아온 특별지시 제14호였다.미국의 한반도점령지가 북위 38도선 남쪽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이 문서는 24군단으로 하여금 작전에 필요한 계획을 세우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이날 저녁 오키나와에는 천황의 항복조칙이 발효되었음에도 폭탄을 실은 일본전투기가 날아들었다.또 다른 가미카제(신풍)들은 일본 본토주위를 순항중인 미 제3함대 순양함을 공격했다.그러나 미국은 그까짓 산발적 저항에는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다.다만 신경을 써야 했던 지역은 오키나와에서 자그마치 1천6백9㎞나 떨어진 한반도였다.전쟁이 끝난 마당에 한반도를 더이상 「힘의 공백지대」로 방치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의 남진소식은 미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소련이 인천을 점령한 데 이어 해군을 서울에 보냈고,8월15일에는 서울정부를 세운다는 보고가 들어온 터였으니까….하지만 소련군의 남진은 많은 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 보편적 견해다.소련군은 8월25일이 지나서 38도선을 남쪽으로 약간 비켜선 개성까지 왔었다는 것이다.소수의 소련군이 서울까지 정찰했다는 설이 있기는 하다. 미 제24군단에 북위 38도선 이남을 대상으로 한 점령계획수립명령이 떨어졌을 때 소련군의 한반도작전을 살펴보자.소련군 작전은 극동전선 왼쪽을 맡은 제25군사령관 I·M 치스차코프대장 등이 쓴 회고록의 한 부분 「제25군 전투행로」에 잘 나타난다.이 회고록에 따르면 8월15일에 함북 나진항구와 시내를 완전장악하는 한편 청진항에도 일부병력이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8월12일 새벽 제358해병대대의 상륙으로 시작된 나진전투는 2일동안 끌었다. 이에 앞서 소련군은 8월9일 대일전에 뛰어든 즉시 제10급강하폭격기사단등의 비행부대들이 웅기·나진·청진을 폭격한 바 있다.대일전에 참가했던 해군대장 S·E 자하로프는 뒷날 회고록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에서의 태평양함대」를 통해 10일까지 6백16회의 비행기록을 남겼다고 적었다.이 출격에서 일본 수송선 격침 11척,파괴 11척의 전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때의 프라우다는 「함정들이 웅기를 향하는 도중 관측자들의 눈에는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보였다.우리 비행사들의 폭격을 받아 타고 있는 군사목표물이었다」고 보도했다.어떻든 속도전으로 한반도 북단을 몰아붙인 소련군은 8월16일 웅기에서 열린 환영집회에 참석한 정도였다.한반도북단을 점령한 소련은 프라우다 등을 통해 전쟁영웅과 주민 사이에 얽힌 미담들을 만들어냈다.정치성 공작이 재빨리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 오키나와로 다시 돌아올 차례가 되었다.미 제24군단이 제10군단으로부터 한국점령임무를 물려받은 것은 한반도 38도선이남 점령계획수립명령이 떨어지기 3일 전인 8월12일.그리고 군단장 J·R 하지중장에게 주한미군(USAFIK)사령관이라는 새로운 지휘권이 8월19일에 부여되었다.또 38도선 남쪽 일본 육·해·공군과 예비군 항복을 접수할 때 태평양사령부를 대신하는 임무도 통보받았다. 그러나 제24군단 참모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1945년4월에 간행한 「제니스 75」라고 부른 한국에 대한 육·해군합동정보처의 보고서가 고작이었다.이 자료 역시 점령작전을 위한 전술공격용일 뿐 정치·경제·사회분야를 다룬 정보는 거의 없었다.심지어는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일본군 소속 한국인 포로를 통해 정보를 얻어내려 했으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전력파악도 미진했다.그래서 한국은 자칫 위험하기 짝이 없는 특공대훈련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한국주둔 일본군 전투력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한 기록도 여러군데에 나온다.일본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종전당시 남한의 일본군병력은 3백15개의 각급부대에 23만2백58명이 배속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이는 미 합동전쟁기획위원회(JWPC)가 밝힌 27만명에 비해 3만여명이 모자라는 숫자다. 미국으로서는 시간은 부족하고 정보는 더욱 모자랐다.하지장군은 미군에게 한국군정임무 부여에 따라 추진되었던 이른바 「블랙리스트」계획에 참여했던 10군단 소속의 장교들을 차출해 급히 불러들였다.10군단 행정처(G­1)의 프레스코대령과 에스테즈소령이 그들이다.이들에게 군정조직 완성임무를 주었는데,프레스코대령은 뒤에 미군정청(USIK,MG)의 민정장관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기존의 일본정부기구를 활용키로 한 태평양사령부는 8월29일 지령을 내렸다.이 지령은 한국에서 항복조건 실행을 위해서라면 일본정부(조선총독부)를 잡아두라는 내용이었다.미군정이 일본관리들을 많이 쓰게 된 빌미가 바로 이 지령이었다는 것이 전사가들의 비판이다.제24군단은 마침내 9월1일 초기 한국정책의 지침이 된 부속서류를「군단 야전명령 제55호」에 포함시켜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국을 통치할 미군정기구는 이보다 앞서 8월29일 한 부대가 어떤 편제에 의해 창설되듯 오키나와에서 골격을 갖추었다.이에 따라 24군단에게는 주한미군의 참모기능이 돌아간 가운데 군단사령부와 본부중대,제10군단 대공포대는 군정임무를 맡게 되었다.그리고 8월2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조선총독부에게 특별명령을 하달한다.9월7일 미군이 한국에 상륙한다는 것과 일본군사령관은 8월31일 하오6시(토쿄시간)에 미 24군단과 무선접촉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24군단은 모든 무선부호를 동원,서울과의 통신을 시도한 끝에 9월1일 서울을 지칭하는 말 『여기는 경성(게이조)』이라는 응답을 받아냈다.24군단은 당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한국주둔 일본군 제17지역 사령관 우에츠키(상월양부)와의 교신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우에츠키는 몇 차례의 통화에서 질서를 방해하는 독립운동가들과 급료인상을 요구하는 인천항 노동자들을 미군 상륙의 위협적 존재로 떠올렸다. 그래서 24군단은 두 가지 종류의 전단을 서둘러 준비했다.미군의 한국도착이 임박했으니 질서를 유지하라는 것과 미군이 한국의 정부수립을 위해 진주한다는 내용이었다. 첫번째 전단 15만부는 9월1일 제380폭격단 B­24폭격기가 실어다 부산·서울·인천에 뿌렸다.9월5일에는 두번째 전단이 같은 방법으로 살포되었다.한·소국경을 넘은 8월9일부터 소련군이 북한지역에 전단을 뿌린 사실을 상기하면 초보적 선무공작도 미군이 5주나 뒤졌다. 한국을 향한 8대의 B­25가 9월4일 오키나와를 이륙했다.C·S 해리스준장이 지휘하는 선발대가 탄 이들 비행기 가운데 2대가 이날 하오 김포에 내렸다.나머지 6대는 기상이 나빠 회황했다가 9월6일 김포에 닿았다.그리고 나서 구축함과 항공모함의 호위를 받은 다섯줄 밀집종대의 전함들이 남중국해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첫 호위함이 인천항에 닻을 내린 것은 소련군의 한반도점령보다 한달이 늦은 9월8일 아침이었다. ◎“한국 문외한… 「군정사령관」 부적” 평가/하지 그는 누구인가/“정글전의 권위자”… 군인으로는 상당한 명성 태평양전쟁 마지막을 오키나와에서 보낸 미 제24군단장 J R 하지중장.그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 자격으로 24군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던 일리노이주 골콘다 출생(1893년6월12일)의 그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지금 썩 흔치 않을 것이다.그러나 한국현대사 속의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육군사관학교 출신은 아니다.1917년 일리노이대학 재학중 보병예비대 소위로 임관했다.그해 같은 계급으로 육군에 정식편입되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뮤즈 아르곤 전투 등 유럽전선에 참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육군대학,참모학교,보병학교,화학학교 등을 졸업한 그는 육군내에 몇 안되는 항공전술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제2차대전 중인 1942년11월 과다카날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을 때 제25사단 부사단장이었고,보겐빌작전에서는 아메리칸사단을 지휘했다. 그의 능력은 43사단에서 발휘되었다.부대를 전투단위로 조직,전투력을 향상시킨 야전 지휘관의 작전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특히 솔로몬군도 전투에서 받은 전시공로훈장,훈공장 등은 빛나는 전공의 논공행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44년4월1일자로 24군단에 전입되었다.24군단은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상의 여러 섬을 수륙양용으로 공격하기 위해 그 해에 창설한 부대.호전적 부대로 알려진 24군단은 팔리우섬에서 시작하여 필리핀의 레이테 침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미 육군성 전사실 소장의 하지 중장의 기록철을 보면 「자신의 부대에 대한 접근 방법이 독특할 뿐 아니라 간결한 비방록으로 유명하다」고 적었다.그리고 「정글전의 권위자」로 평가해놓았다.그러나 1945년 가을에 작성한 「루스 메시지」의 한 파일은 「아시아문제에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하지를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비판기록을 남기고 있다. 1963년11월12일 70살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볼링그린공원/뉴욕첫공원…각종조형물의 천국(브로드웨이“새바람”:2)

    ◎맨해튼 남단 1번지… 역사의 자리/각국 문물수용… 스스로 변신추구/북쪽보도 거대한 황소상­배터리파크의 한국전참전비는 관광명소 「볼링 그린」.브로드웨이 대장정의 출발점인 이 물방울 모양의 작은 공원에 서면 브로드웨이는 무성한 가지를 뻗어낸 거대한 나무로 치솟아 있다. 이 수령 3백년의 나무를 키워낸 볼링 그린은 미국민들이 자랑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의 시민정신 발상지자 아메리칸 드림의 시발역 이라는 역사의 무게로 오늘날의 브로드웨이를,그리고 맨해튼을,뉴욕을,미국을 떠받치고 있다. 뉴욕 최초의 공원이기도 한 볼링 그린을 중심으로 남쪽의 배터리 파크와 북쪽으로 월스트리트가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트리니티 교회를 포함,브로드웨이 1백번지까지 반원형의 도입부는 브로드웨이가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자양분 역할을 해온 역사의 거리다.부두에서 연결되는 배터리 플라자,스테이트 스트리트,화이트홀 스트리트등 세갈래 길을 통해 겉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유럽 문물을 볼링 그린이 수용하여 새로운 길 브로드웨이로 쏟아내고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브로드웨이가 오늘날 세계 문화 예술의 수도로 희망의 도시,가능성의 도시로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이 출발점이 품고 있는 다양한 자양분에서 비롯되고 있다.브로드웨이 또한 스스로의 끊임없는 실험과 변신의 노력으로 갈수록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다. ○관광객 필수 코스 볼링 그린 남쪽에 1907년 건립된 대표적 건물인 세관 건물이 지난해부터 아메리칸 인디언 박물관(조지 구스타프 헤이 센터)으로 새출발하게 된 것은 브로드웨이에 풍요를 더해 줄 하나의 사건으로 기대된다.브로드웨이 문화의 출발점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이 건물에 이질적인 인디언 문화가 이식되는 것은 브로드웨이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 또 볼링 그린의 북쪽 보도 한가운데는 커다란 청동 황소 한마리가 눈을 부라리며 마천루 사이로 뻗어나간 브로드웨이의 소실점을 응시하고 있다.긴꼬리를 하늘로 치켜세운채 앞다리를 약간 낮추고 금방이라도 들이받을 자세로 서있는 이 황소 역시 새로운 도전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유명해지고 있다. 조각가 아투로 미도디카의 작품으로 1987년 10월에 세워진 높이 1·8m에 무게 5t인 이 황소상은 공원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어느날 밤에 이곳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도로 가져가라는 당국과 이곳에 기증해야겠다는 작가와의 입씨름이 수년간 계속되는 동안 황소상은 어느새 이 거리의 명물이 되고 말았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줄서서 기다려 사진찍는 필수 코스가 됐으며 그 많은 사람들이 뿔에 매달리고 올라타고 두드려도 이 황소상은 우그러지거나 손상되기보다는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반들거릴 뿐이다. 볼링 그린 남쪽 배터리 파크의 클린턴성(성)옆에 세워진 한국전참전비도 이 지역 또하나의 명물로 되어가고 있다.자유의 여신상을 향해 배 타러 가는 길목에 지난 91년 세워진 이 기념비는 검은 화강암에 총을 메고 행군 하는 병사의 모습을 파내어 뻥뚫리게 만들었다.기단부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비롯,참전(의료지원단 포함) 22개국 국기를 새겨놓았으며 바닥에는 빙둘러서 각국의 참전병사수와 사망자수를 새겨놓았다. 한쪽에서 보면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만의 푸른 바다가 병사의 가슴속에 들어와 있고 다른 쪽에서 보면 맨해튼의 마천루가 병사의 온몸에 들어차 있는 이 절묘한 조각품은 새세기를 맞는 브로드웨이와 한국과의 새로운 연계의 상징물로 보여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원래 17세기초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뉴암스테르담으로 건설되었으나 점차 지배권이 영국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1664년부터는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고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 창구로 발전했다.볼링 그린은 당시 영국의 절대군주 조지 3세가 말을 타고 출정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던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1776년 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전해진 독립선언의 소식은 영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 지역 주민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닷새후인 7월9일 성난 군중들은 볼링 그린 한복판에 서있던 조지 3세의 동상을 무너뜨리고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했다.그들은 이 동상을 녹여 4만2천개의 총알을 만들었으며 이 총알로 맨해튼 전투에서 4백여명의 영국군을 전사시켰다. ○세계적 금융가 형성 볼링 그린의 획기적인 역할 변화와 함께 바로 옆의 브로드웨이 1번지는 당시 영국인 사교클럽 케네디하우스가 있던 곳이었으나 독립선언후 조지 워싱턴 장군의 사령부가 들어서 영국군과의 싸움을 독려했다고 건물 벽면에 크게 붙여진 동판이 말해주고 있다. 이 건물은 1921년 새로 지은 것으로 과거 대서양을 주름잡던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라인사가 자리잡고 있다가 현재는 시티뱅크가 들어있다.또다른 대표적인 건물로는 호화건물의 극치로 1920년대 이 지역의 건축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쿠나드빌딩(25번지,현재 우체국)과 존 록펠러가 자신의 부를 쌓아올렸던 스탠더드 오일 빌딩(26번지,금융역사박물관)등이 15m폭 브로드웨이의 양쪽으로 높게 솟아 있다. 볼링 그린을 출발한 브로드웨이는 오른편으로 골목길인 익스체인지 플라자를 만나고 이어 다음 블록에서 월스트리트를 만나며 그 일대에 세계적인 금융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건너편에 위치한 트리니티교회와 교회묘지는 맞은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갈색벽돌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의 첨탑은 주변의 마천루숲과 어우러져 기묘한 스카이라인을 이룬다.1693년 영국왕 윌리엄 3세때 처음 세워졌던 이 교회는 1776년 화재로 소실됐고,1839년에는 설계 잘못으로 붕괴된후 현재는 1846년 리처드 업존에 의해 세번째 건축된 것이다. ○묘비문에 역사가 이 교회는 신성모독의 도시로 자리잡혀 가던 초기 뉴욕의 주민들에게는 신성회복의 경고였으며 그후 3백년이 넘도록 뉴욕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특히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교회묘지는 마천루숲 사이의 오아시스 구실을 하고 있으며 명재상 알렉산더 해밀튼,보스턴 티파티의 주역 새뮤얼 애덤스,불후의 해군함장 제임스 로렌스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묻혀 있어 이들의 묘비명을 차례로 읽어 나가노라면 미국 역사의 한페이지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마저 느끼게 된다. 이 지역의 남쪽으로는 배터리 파크가 자리잡고 있다.바다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포를 설치해 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배터리(포대)라고 이름지어진 이 공원은 맨해튼섬의 남단에 위치해 브로드웨이의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중앙부의 클린턴성을 중심으로 많은 기념물들이 이곳저곳에 위치해 있으며 자유의 여신상과 이민국이 있던 엘리스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곳이다. 배터리파크 북부의 스테이트 스트리트 17번지는 소설 「백경」의 저자 허먼 멜빌의 출생지로 유명하다.오늘날 그곳에는 뉴욕굴착박물관이 위치해 있어 3백년전부터 뉴욕의 도시계획 지하시설물 설치·철거등 지하공사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모든 것이 역사가 되고 그것은 보존되며 현재의 거울로 활용되고 있다. 볼링 그린을 중심으로 한 브로드웨이의 출발점은 이같은 끊임없는 거듭남으로 브로드웨이의 풍요를 약속하고 있다.중앙 분수대에서 뿜어내는 소담스런 물줄기를 감도는 바다 갈매기와 육지 비둘기의 평화로운 만남처럼 브로드웨이 1번지는 소박한 모습으로,그리고 넓은 포용력으로 조용하게 마천루 숲을 향해 그 문을 열고 있다.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자양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겨울손님」 철새 모이주기/어제 민통선지역서 6백㎏ 뿌려줘

    ◎본사주최 환경단체 3백명 참가 【철원=김명국·김희영기자】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한 「겨울철새 모이주기와 탐조회」 행사가 15일 하오 강원도 철원지역 민통선에서 열렸다. 서울신문·스포츠서울과 한국조류보호협회가 공동주최하고 두산종합식품이 후원한 이날 행사에는 겨울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비롯,봉화산악회 예술인동호회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월간사진서울클럽 등 서울신문사 환경감시단체와 육군 청송부대 장병 등 3백여명이 참가해 밀 옥수수 등 새모이 6백㎏을 뿌려주었다. 국내 최대의 철새도래지인 이 지역은 70여종의 각종 겨울철새들이 찾아 겨울을 나고 있으며 최근의 폭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한 철새들은 눈위에 뿌려진 먹이를 찾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이날 탐조회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준비해 간 망원경으로 세계적 희귀조인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 재두루미(203호) 독수리(243호) 등의 생태 관찰에 여념이 없었으며 어린이들은 새들의 특징을 기록하는데 열의를 보였다.
  • 두다예프/산악지대 게릴라 진지 구축/러군 막판 대공세 이모저모

    ◎포연 뒤덮인 그로즈니,죽음의 도시로/클린턴 “러 민주주의 발전은 계속 지원”/러하원 공격중단 결의안 압도적 채택 ○…러시아군의 막판 대공세가 취해지고 있는 14일 체첸 수도 그로즈니는 황폐화된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주민들은 대부분 산속으로 피신했으며 시내의 버스 정류장·아파트 등 많은 건물에서는 폭격으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러시아군은 체첸 대통령궁에 대한 집중 공격을 강화하고 체첸전사들이 집결해 있는 그로즈니 남부지역에 대한 로켓공격도 강화. ○…러시아관리들은 체첸에 어떤 형태의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으나 체첸전사들은 남쪽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통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고.많은 체첸전사들은 이미 게릴라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두다예프 대통령도 남부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가 체첸의 러시아연방 이탈을 막기 위해 시작한 체첸사태는 오히려 미묘한 러시아연방 구조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국내외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그루지야공화국에서는 러시아군의 공격에 고무되어 1천여명의 무장 민족주의자들이 분쟁지역인 압하스에서 그루지야정부군과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13일 체첸 유혈사태의 중단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천명.주요 서방국가들도 옐친이 체첸사태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선거가 실시되는 오는 96년까지는 권좌에 계속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나 러시아 장래를 이끌어 나갈 최선의 지도자라는 생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체첸전투에 참전하고 있는 러시아병사들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자식이 전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체첸사태에 관해 정부가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체첸전투에 참전한 19세된 아들 세르게이를 두고 있는 어머니 발렌티나 쇼미나(40)는 『군에 봉사하는 것은 그의 의무이지만 전쟁에서 죽는 것도 그의 의무인가.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라면서 아들의 안전을 염려. 당국은 체첸사태로 지금까지 러시아병사 3백94명이 숨지고 1천여명이 부상했다고 밝혔으나 관측통들은 전사자가 3천여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하원인 국가두마는 옐친대통령에게 체첸공격의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그러나 러시아군의 공세를 저지할 실질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으며 결의안은 구속력이 없다.
  • 남북분단의 전말(새로쓰는 한국현대사:3)

    ◎미 「한반도 점령」 44년초 첫 구상/4국 공동관리→「힘의 진공화」 전략 추진/소의 대일 선전포고에 “양분” 전격 결정/전황 변화 따라 한때 “단독점령” 의지… 대소견제에 역점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1945년 8월11일 새벽(미국 시간)미국 워싱턴 맥클로이 전쟁성차관보의 사무실.미 육군 링컨준장과 러스크대령,본스틸대령등 3명은 벽에 걸린 대형 「내셔널 지오그래픽」지도를 바라보며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곧 지도 한 귀퉁이 한반도 지형 위로 붉은 줄 한가닥이 휙 지나갔다.서울과 평양사이를 통과한 이 줄 오른쪽에 누군가가 「북위 38도」라고 썼다.세 사람은 이어 눈길을 중국대륙 쪽으로 옮겨 나직한 목소리로 뭔가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연합국측에 항복선언을 하기 나흘 앞서,전후 처리를 맡은 미 전쟁성 전략정책단(단장 링컨준장)간부 몇사람에 의해 「38선」은 이렇게 태어났다.이들이 한반도 처리방안을 논의한지 30분이 채 안되서였다. ○30분만에 「붉은 줄」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38선이 그려진 배경과 의미를 이해하려면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일본과의 전쟁에서 연합국을 이끈 미국이 한반도를 포함한 전후처리도 역시 주도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한반도 문제를 다루었다」는 오랜 통설과는 달리 최근의 연구성과는 미국이 일찌감치 한반도에 관심을 보였으며 전쟁의 흐름,소련과의 관계변화에 따라 한때는 한반도를 단독점령하려는 의지까지 가졌음을 보여준다.최근 비밀해제된 미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국(NARA)의 「국무성 일반자료군」,워싱턴국립기록센터(WNRC)의 기밀문서,국무성 외교문서들에 따르면 미국은 1944년 2월 한반도 점령구상을 처음 마련했다.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의 세 정상이 「적절한 과정에 따라」한반도를 독립시킨다고 합의한지 두달만의 일이다. 44년 들어 전황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지자 미국은 전후처리 방안을 세우는 기구의 하나로 국무성에 영토연구국을 만든다.이 연구국이 처음 한 일이 「한반도의 해방·점령」보고서를 만든 것이다.국무성은 이 보고서에서 종전후 미·소·영·중등 4개국의 공동점령­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또는 임시정부 수립­완전 독립이라는 3단계 안을 냈다.이 안은 「한반도를 한 국가의 세력권으로 분류하면 소련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크므로 이를 막기 위해 여러나라가 참여해야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최근 발굴한 국무성 메모랜덤(44년 5월 작성)에도 『한반도가 독립에 앞선 신탁통치 기간동안 소련에 의해 관리되는 것은 중대한 정치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미국은 한반도가 소비에트화하는 것을 태평양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라고 밝혀 소련 견제가 중요한 정책목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 한반도 정책의 주도권은 국무성에서 군부로 넘어가 「힘의 공백지대화」전략이 은밀히 추진된다.이 전략도 「한반도 처리문제를 섣불리 꺼냈다가 소련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논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자」는 구상에서 나왔다.「힘의 공백지대화」는 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주소련 미대사 해리먼의 군사전략회의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이 회의에서 스탈린은 『만주의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려면 소련 육해군이 「북부 조선의 항구들」을 점령해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해리먼은 의도적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회피한다. ○소주장 의도적 외면 이 전략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지돼 결국 미국이 별다른 무력동원 없이 1945년 8월 한반도 반쪽을 차지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45년 초 미 군부는 『태평양상에 방위체계를 구축하기 위해』한반도를 비롯한 일본점령 지역을 미국이 단독점령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그해 2월에는 링컨준장이 이끄는 전략정책단이 새로운 한반도 처리방안을 내놓았다.이 안은 한국을 도계에 따라 넷으로 나눠 미·소·영·중등 4개국이 분할점령하되 서울과 부산·인천등 주요도시는 미국이 맡는다는 구상이었다. 미국 루스벨트대통령이 45년 4월 서거해 트루먼이 그 뒤를 잇자 한반도 정책은 또 한차례 변화를 겪는다.루스벨트가 국제주의자로서 소련과의 협력에 정책 우선순위를 뒀던 것과는 달리 트루먼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견제 전략을 적극적으로 펴나간다. 국수주의자 성격이 강한 그는 45년 2월 열린 얄타회담에서 전임자가 만주를 소련 세력권으로 인정한 것 자체를 「지나친 양보」로 보았다.더욱이 원자폭탄 개발로 일본에 대한 승리가 확실해지자 트루먼은 소련이 대일본전에 끼어들기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서두른다.곧 소련이 참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끝내면 전후 처리에 있어서도 소련을 배제시킬 수 있다고 희망했기 때문이다.따라서 45년 7월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도 예의 「힘의 공백지대화」전략을 써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동유럽의 공산화에 몰두한 소련은 괜히 미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한반도문제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1945년 8월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다.그러자 소련도 기회를 놓칠세라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한다.「소련을 배제한 채 승리를 따낼지도모른다」는 미국의 기대는 물건너 갔다.미국으로서는 이제 「한반도」라는 떡덩어리를 혼자 먹을지,소련과 나눠먹는다면 그 크기는 어떻게 잘라야할지 결정할 순간이 왔다. ○고심끝 정치적 판단 미 정부 고위층은 10일 밤늦게까지 고심하다 「소련측과 나눌 수밖에 없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고 구체적인 「줄긋기」는 전략정책단에게 맡겼다.「한반도를 도계에 따라 분할점령한다」는 안을 낸 적이 있을 정도로 한국사정에 밝았던 링컨단장은 망설임없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붉은 줄을 그었다.그 줄이야말로 소련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8월11일 밤 함경북도 웅기를 점렴함으로써 한반도에 첫발을 내디뎠고 미군은 9월8일 인천을 통해 상륙했다.이어 소련은 8월27일 38선을 봉쇄,인적·물적 교류를 차단했다.미국도 9월2일 미국육군태평양총사령관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1·2·3호」에서 38선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경계선이 아니라 군정관할선임을 분명히 했다. 민족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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