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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체 해로운 고엽제’ 언제 알았나/ 고엽제 살포 파문

    우리 정부는 68∼69년 비무장지대에 뿌려진 제초제가 인체에 해로운 고엽제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이 사실은 그동안 정부가 고엽제 살포를 은폐했는지 여부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될 뿐 아니라,앞으로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피해배상 요구에 대한 책임 소재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국방부 관계자는 “고엽제 문제가 국제사회에 본격 부각된 것이 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점을 감안할 때,당시에는 고엽제라는 인식이 없었고 단순한 제초제로 알았을것”이라며 은폐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김태영(金泰榮) 국방부 정책기획국 차장도 17일 기자회견에서 고엽제 살포사실이 기록돼 있는 ‘68년도 육군사’와 ‘육군화학병과 35년사’에 단지‘살초제’라고만 적혀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고엽제의 인체 위해성에 대한보고는 69년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71년에야 위해성이공식 인정돼 사용이 중지됐다. 국방부의 설명대로 미 1군단과 미 2사단의 요구를 받아 ‘강력한 제초제’를 사용하기로 했고,당시 이 제초제가 인체에 치명적인 제초제라는 사실을몰랐다면,우리 정부는 일단 피해배상 책임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 연방정부를 상대로 한 국내 베트남전 참전 고엽제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재미교포 마이클 최 변호사는 “한국 정부가 고엽제 살포 결정을 내렸더라도 인체에 유해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80년 들어 베트남전에 참전한 뒤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장병들에 대한 보상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마련되는 과정에서,정부가 60년대 후반 비무장지대에 고엽제를살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는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다.국방부는 “(60년대 후반 비무장지대 고엽제 살포에 참여한 장병들의) 피해 사실이 드러날 경우,‘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진료 등에 관한 법률’에 준해 정부차원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지만,30여년동안 국내 고엽제 살포에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득정기자 djwootk@
  • “고엽제살포 美軍이 먼저 제의”

    지난 68∼69년 휴전선 비무장지대 고엽제 살포 주체에 관한 한·미 국방부간의 주장이 엇갈려 책임 소재를 놓고 공방이 예상된다. 국방부 김태영(金泰榮) 정책기획국 차장은 17일 “국방부의 68년 1월12일자 언론발표문에는 ‘휴전선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막는 방책의 하나로 전방 철책 주변에 살초제 사용을 결정하고,유엔사에 4만5,000갤런을 요청했다’고돼 있다”면서 “당시 주한 미군은 예하 부대의 건의와 비무장지대 경계작전의 어려움을 감안해 미 국무부를 통해 한국 정부와 제초제 사용문제를 논의,승인을 얻었다”고 밝혔다. 국방부에 따르면 68년 4월15일∼5월30일 1차로 연인원 2만6,639명의 장병이 투입돼 총 1만8,150에이커에 ‘에이전트 오렌지’ 2만1,000갤런,‘에이전트 블루’ 3만4,375갤런,‘모뉴론’ 7,800파운드를 살포했다.69년 5월19일∼7월31일 2차 살포 때는 총 2,644에이커에 ‘에이전트 블루’ 3,905갤런,‘모뉴론’ 1,377파운드가 뿌려졌다.주요 살포지역은 민통선 북방∼남방한계선이남 일대,남방한계선 전방 철책 근처 100m 구간,OP(전방관측소) CP(지휘소) 근처,주요 전술도로 옆 30m 구간이다. 그러나 미 국방부의 크레이그 퀴글리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고엽제 살포) 결정은 당시 한국 정부와 군부가 내렸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있다”면서 “한국 정부가 미국측에 대금을 지불하고 고엽제를 구입해 한국군이 수작업으로 뿌렸으며,살포작업은 단기간 지속된 뒤 한국측의 재정적 이유로 중단됐다”고 주한 미군이 고엽제 살포를 제의했다는 우리 국방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편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국내 고엽제 피해자들의 미 연방정부 및 고엽제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맡고 있는 재미교포 마이클 최 변호사는 “한국 정부가 고엽제가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한국 정부에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미 연방정부와 다우케미컬,유니로열 등 고엽제 제조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사설] 고엽제 살포 진상밝혀야

    베트남 전쟁때 사용돼 엄청난 후유증을 남긴 고엽제가 주한(駐韓)미군측에의해 우리나라 휴전선에도 살포된 사실은 충격적이다.더욱이 고엽제 살포가우리나라와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이뤄졌으나 30여년동안 이런 사실이 은폐되어온 배경에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지난 68년 미국 화생방사령부에 보낸 비밀문서인 ‘고엽제 살포작전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미군은 1·21사태 이후 ‘식물통제계획’을 세워 한·미 합동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이남 2,200만평에 고엽제를 집중 살포한 것으로 드러났다.사용된것은 베트남전에서 쓰였던 ‘에이전트 오렌지’등 3가지로 2만1,000갤런인것으로 나타났다.고엽제 살포작전 계획은 미군이 세웠고 살포작업은 한국군장병들이 했다는 것이다.당시 작전에 동원됐던 7만명의 장병들은 단순히 제초제를 뿌리는 정도로 알고 아무런 사전교육이나 방독면 등 보호장비 없이고엽제를 살포해 이들은 지금까지 이유도 모른 채 후유증을 앓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미국이 베트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고엽제를사용한 적이 없다고 강조해온데다 현재 베트남전 피해자 1만7,200명이 제조회사를 대상으로 5조원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중인 상황에서 한국에서도 고엽제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미국·호주·뉴질랜드의 베트남전 고엽제피해자 20만명이 이미 84년 다우케미컬 등 미국제조회사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2억4,000만달러의 배상을 받았음에도 국내 피해자들은 과거 관계당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이제야법적절차가 진행중임을 안타깝게 생각한다.암을 유발시키는 다이옥신이 포함된 고엽제 사용은 이를 금지한 제네바의정서를 위배한 만큼 제조회사 뿐만아니라 미국정부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미국정부는 지금까지 ‘군복무중 발생한 우발적 사고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할 수 없다’는 연방대법원의 이른바 ‘페레스원칙’에 따라 정부차원의 배상을 거부해왔으나 휴전선일대 고엽제 살포작전은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 미국 정부에 건의해 딘 러스크 국무장관의 승인을 받은 만큼 ‘우발적 사고’로만 보기 힘들다하겠다. 이같은 사실과 관련,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이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사실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해 국방부가 구체적인 확인작업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조처이다.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실태를 철저히 파악하고 이들의 치료와 보상대책을 세워야 한다.또 베트남 참전 고엽제 피해자들의 보상과도 연계해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韓·美 연례안보협 23일 워싱턴서

    한국과 미국은 오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조성태(趙成台) 국방장관과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 등 한·미 양국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제31차 한·미연례 안보협의회(SCM)를 열고 노근리 사건 진상조사 방향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월남전 참전 한국군 고엽제 피해자 보상문제 등에 대해논의한다. 조장관은 이 자리에서 “노근리 사건의 진상조사는 6·25 발발 50주년이 되는 내년 6월25일 이전까지 마무리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노근리 사건과유사한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은 노근리 사건을 매듭지은 뒤 한·미간 협의를통해 조사 여부를 결정하자”고 제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우득정기자 djwootk@
  • 사목연구회 ‘대희년 심포지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소장 김종수)가 2000년 대희년(大禧年)을 앞두고 최근 개최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대희년 심포지엄’에서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고 반성하는 토론회를 가져 주목을 끌었다. 발제자들은 대표적인 잘못으로 ▲18세기 말 서양선박 요청사건 ▲제사금지에 따른 갈등 ▲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 무시 ▲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 태도 ▲신사참배 허용 등을 꼽았다. 원주교구 교회사연구소의 여진천 신부는 “1796년과 1801년 천주교회 지도자들이 서양 선박과 병력을 요청하는 서한을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낸것은 서양 배와 군대가 오면 천주교에 대한 금령(禁令)이 풀려 선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면서 “그러나 이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또 인천가톨릭대의 최기복 교수는 “18세기 교황청의 제사금지 조처는 천주교를 패륜의 사교(邪敎)로 낙인 찍히게 했고 복음의 토착화를 더디게 하는장애로 작용했다”며 교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가톨릭대 장동하 교수는 “개항기 선교사들이 민족 고유의 문화와 풍습 등을 야만시함에 따라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산 것은물론 지식인들의 반외세감정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전남대 윤선자 교수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천주교회가 민족운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행태를 문제를 삼았고,한신대 강인철 교수도 “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한 것은 반민족적·반가톨릭적인 과오였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천주교 전래기에 교회와 사회가 충돌했던 것은 대부분교회가 당시의 민족사적 요구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한 채 맹목적인 신앙의 논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성호기자
  • ‘노근리’ 화해·용서의 기도

    [클리블랜드 연합] 미군 양민학살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해 미군들이 반세기가까이 쌓여온 앙금을 씻어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 상징적인 첫 만남을가졌다. 한국전 당시 미군에 의한 대표적인 양민학살 사건으로 지목돼 온 노근리 사건의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10일 정오(현지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올드스톤 장로교회에서 당시 총격을 가했던 미군 참전용사들과 ‘노근리사건 인정 및 희생자 추모 합동예배’를 가졌다. 미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초청으로 이뤄진 이날 합동예배에는 ‘노근리 미군양민학살 대책위원회’ 정은용(鄭殷溶·77)위원장 등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이 참석했으며 미군측에서는 총격을 시인한 에드워드 데일리(68·당시 상병) 등 3명이 참가했다. 정위원장은 피해자 및 유족대표로 발표한 성명을 통해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이 앞으로 투명하게 조사되고 잘 수습됨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간에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양측은 또 조앤 캠벨 NCC 총무와 이승만 목사의 인도로 제단 앞에서 촛불을 밝히는 의식을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기원했다. 노근리 사건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12일 워싱턴에서 미 국방부 관계자 2명과 면담한 뒤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 “베트남戰 사상 한국군에 절반만 보상”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한국 해외참전전우회 회장인 박세직(朴世直)의원은9일 미국 정부에 대해 베트남전 한국군 사상자에 대한 보상으로 10억달러를요구했다. 3만명의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과 미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중인 박 의원은 이날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이 베트남전 한국군 사상자에 대해 두배의 보상액을 지불키로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며 보상액 지급을 촉구했다. 박 의원은 린든 존슨 행정부 당시 한·미 양국이 참전 한국군 사상자에 일정액을 지급키로 결정했으며 66년 3월 윈스롭 브라운 주한미대사가 미 정부를 대신해 이 보상액을 두배로 늘린다는 데 합의한 사실이 최근 한 서한에서밝혀졌다고 주장했다. hay@
  • [집중취재] 居昌 등 양민학살 10여건 진상규명 본격화

    *노근리사건 계기로‘한국전쟁 의문사’관심 고조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노근리사건’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정은용(鄭殷溶·76)노근리사건대책위원장이 지난 94년 사건의 진상을 실화소설로 엮은 책의 제목이다.책 제목대로 우리는 그동안 그들의 ‘아픔’을 얼마나 절감해 왔는가.피해자의 역사는 외면해도 되는 것인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빚어진 동족상잔의 ‘상처’ 가운데 하나인 ‘노근리사건’에 반세기만에 ‘진실의 햇살’이 내리쬐고있다.지난 9월말 미국 AP통신은 1년여에 걸친 현장취재와 문헌조사,관계자들의 증언청취를 토대로 ‘노근리사건’은 피난민 400여 명이 미군의 무차별폭격과 사격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라고 보도하였다.AP통신의 보도는 기존국내언론의 보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가해자인 미군병사들의 증언과 관련자료를 추가로 발굴했다는 점에서 노근리사건의 진상규명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이 보도는 한국과 미국에서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특히 지난 4일에는 당시양민학살에 가담했던 미군병사 한 사람이 노근리를 사죄방문한 바 있다. 아울러 노근리사건을 계기로 한국전쟁 전후·전쟁중 공권력(군·경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문제를 종합적으로 재점검,구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그러나 이들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과 논쟁이 예상된다. 우선 ‘노근리사건’을 보는 시각차 문제다.유족측은 이 사건이 ‘무고한양민에 대한 무차별학살’임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미국측은 ‘전쟁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는 보상문제를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이다.따라서 노근리사건에 대한 피해자 보상문제는 미국측의각별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미국은 민간인 504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한,월남전 최대의 양민학살사건인 ‘밀라이사건’을 처리하면서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육군중위 1명을 기소했을 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하지 않았다.이는미국이 이 사건이‘전쟁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과 관련,의외로 장시간이소요될 가능성도 있다.미국측은 정확한진상조사를 내세워 방대한 자료검토와 관련자 증언청취를 주장하고 있다.다만 미국측이 이 사건의 처리를 군 수사기관격인 육군성내 감찰기관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해자조사 문제는 상당한 수준까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노근리사건을 계기로 한국전쟁 전후에 다른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서도 ‘관심’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지난 96년 특별법이 제정돼 현재 명예회복·위령사업 등이 진행중인 ‘거창사건’을 비롯해‘함평사건’‘문경사건’‘고양사건’‘여순사건’ 등이 모두 10여 건의 ‘양민학살’이 당국의 진상규명·보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피해자들은 대개 한국전쟁 전후에 ‘통비(通匪)분자·좌익분자 소탕작전’이라는 명목하에 군이나 경찰들에게 학살당한 양민들이다.그동안 피해자나 유족들은 유족회등을 구성,수집한 자료나 증언을 바탕으로 반세기 가까이 관계당국에 진상규명을 호소해 왔다.‘함평사건’의 경우 60년 국회에서 특위를 구성,진상조사보고서까지 작성했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함평군청에서 이 사건을담당해온 전인균씨(법무통계 담당)는 “군 당국이 작전일지·전투상보 등은기밀자료라며 공개를 거부하고 있어 핵심자료에 접근이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말했다.그러나 국방군사연구소 나종삼 전사부장은 “한국군에서 작전일지·전투상보 등을 작성하기 시작한 것은 50년 12월경부터이며 ‘양민학살’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대개의 양민학살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증언 이외에 확보된 자료가 거의 없어 진상규명 자체가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이미 관련자료가 미국 등에서 확보된 사건의 경우 진상규명에 ‘서광의 빛’이 보이는 측면도 있다.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노근리사건이 마무리 되면 다른 지역의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인 것으로 안다”고 밝히고 “20세기에 발생한 불행한 일은 20세기에 해결하고넘어가는 것이 역사의 정의”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차영구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문답 ‘노근리사건’이 군의 주요현안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올 정기국회 국감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졌고 국방부는 진상규명 등 문제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다음은 국방부 차영구(52·육군소장) 정책기획국장과의 일문일답. ■‘노근리사건’ 해결과 관련,국방부의 입장은. 우선 정확한 진상조사가 급선무라고 본다.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관련자료 검토,현장조사 등이 치밀하고도 조직적으로 진행돼야 할 것이다. ■국방부 내에 별도의 조사기구 같은 것이 구성돼 있나. 현재 정부차원에서총리실 산하에 국무조정실장이 반장으로 있는 대책반이 구성돼 있으며 국방부 조사반은 그 산하에 포함돼 있다.국방부 자체 조사반은 국방부 정책보좌관이 반장,국방군사연구소장이 실무반장을 맡고 있으며,역사학 교수,6·25참전군인,유족 등으로 구성된 외부자문위원단을 현재 구성중이다. ■‘노근리사건’은 미국측의 반응·협력이 중요한데. 미 육군성 에커먼 감찰관(중장)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이 사건을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다루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현재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트럭 1대분 분량의자료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미국측 역시 피해자들의 증언내용과 이 자료들을 토대로 광범위한 조사작업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보상문제는 어떻게 됐나. 아직 거론된 바 없다.미국측은 ‘선조사 후처리’방침을 밝힌 바 있는데 결과에 따라 ‘처리’할 것으로 본다.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한미군사동맹체제가 위협받아선 곤란하다는점이다.억울한 개인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국가안보 역시 중요한 문제다.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과 관련,국방부가 관련자료 공개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 소관사항이 아니라 단언할 수 없다.다만 진상규명에필요한 자료라면 관계규정에 의거,참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정운현기자 * 49년만에 訪韓‘노근리 사격’美 데일리씨 한국민들에게 엄청난 분노와 회한을 안겨준 노근리 기관총 난사사건의 장본인으로 미 NBC방송 주선으로 지난 1일부터 닷새간 방한, 노근리 현장과 유가족들을 찾아보고 돌아온 에드워드 데일리씨는 5일 출국직전 기자와 만나 이번 방문을 “화해로의 여행”이라고 말하고 “이제야 원죄같은 악몽에서 조금은 벗어날 것같다”고 말했다. 한국전 개전 직후인 50년 7월26일 저녁 노근리에서 미 제1기갑사단 7연대소속 중사로 수백명의 피란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던 그의 노근리 방문은 49년여를 한(恨)속에 살아온 피해자들과의 화해인 동시에 자신의 ‘과거’와의 화해였다.19살의 나이에 ‘전쟁’의 이름으로,‘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부녀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이제 68세의 노인이 돼 그 피해자들을다시 찾아 사죄하고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던 것이다. ■유가족들과는 나눈 이야기는. 유가족들을 만나기로 한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나는 노근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대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같은 기분이었다.유가족들이 당시 상황에 대해 많은 질문을했고 나는 기억하는 대로 솔직히 대답하고 그분들에게 사과했다. ■피란민들을 왜 쏘았나. 7월25일 오후 늦게 우리 부대는 영동에 있는 제8연대로 합류하라는 명령을받았다.대전은 이미 함락됐다고 들었다.우리 부대는 26일 오후 노근리 인근철교에 도착했다.주민들은 이날 새벽부터 폭격을 피해 굴다리밑에 숨어있었다.오후 늦게 중대장인 맬번 챈들러 대위로부터 기관총을 굴다리 양쪽에 설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피란민들이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사살하라고 했다. ■터널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만 쏘았나.아니면 터널 안으로도 쏘았나. 터널 안으로도 쏘았다.우리도 극도의 공포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피란민들 쪽에서 응사가 있었는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때였다.터널안쪽에서 나오는 서너번의 총구 불길을내눈으로 보았다.기관총은 우군끼리 겨냥하지 않도록 예각을 이루어 배치됐다.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반대편쪽 우리편에서 날아온 총탄이었을 가능성도배제할 수는 없다. ■왜 피란민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보는가. 북한군 게릴라들이 피란민 대열에 숨어있다는 풍문이 무성했고 병사들은 극도의 공포에 떨었다.죽은 피란민 사이에 북한군 복장을 한 시체들과 북한군무기들이 나왔다는 말도 들었다. ■왜 이제 와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게됐나. 전우들과는 정기적으로 만나지만 누구도 노근리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죽인 일을 누가 입에 담고 싶어하겠는가.2년전 노근리 사건을 취재하던 AP통신 기자가 국방부 사료를 뒤지다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찾아왔다.내게 ‘진실을 말해주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그에게서 생존자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노근리 사건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노근리에서 남하하다 그해 8월12일 고령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 제10사단25연대에 포로로 잡혔다.그뒤 북한군의 선전용 겸 방패막이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가 9월12일 왜관에서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부대로 복귀했다.한국전과 노근리 사건은 내 인생에 최대의 악몽이다.정신과 치료도 몇번 받았다. ■한미 양국에서 진상조사가 시작됐다.끝까지 진실을 말해주겠나. 조사단에게 진실을 말하겠다.유가족들의 고통을 더 이상은 외면하지 않겠다. 이기동기자 yeekd@
  • [화제의 오너 2人] 김석원쌍용양회 회장/ 김승연한화 회장

    김석원(金錫元) 쌍용양회 회장이 ‘해병대 경영론’을 펴 관심을 끌고 있다. 김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최근 분사된 출판사인 FKI미디어가 31일발간한 번역서 ‘해병대 경영’에 해병 정신을 경영에 접목할 것을 제안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지난 70년 해병 223기로 자원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했던 김 회장은 이 글에서 “수만명을 거느리는 대기업을 혼자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것은 월남 정글의 근무보다 더 앞이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고된 해병대 생활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이를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면서 “그러나 상관의 무모한 명령이나 과욕이 아랫사람들을 고생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독단적인 결정이나 지나친 간섭을 경계,전문경영인에 경영권을 위임해 자율경영체제를 갖추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환용기자 dragonk@ * 김승연한화 회장 김승연(金昇淵) 한화 회장이 지난 달 29일 저녁 프로야구단 한화이글스가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직후 끝내 눈물을흘렸다. 이날 3루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본 한화 직원들은 가족과 함께 관중석에앉아있던 김 회장이 우승 확정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이내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고 전했다.김 회장은 (주)한화가 생산한 축포가 수백발 발사되는 순간에도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고 직원들은 덧붙였다. 한화 직원들은 “김 회장이 지난 97년 하반기부터 극심한 경영난으로 그룹이 부도 위기에 몰려 한화에너지 등 알짜배기 사업을 팔아야 했던 힘겨웠던상황을 되새기며 복받쳐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지난달 30일 오전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우승 자축행사에 참석,선수단에 격려금 3억2,000만원을 전달하고 선수단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했으며 1∼3일 중 충청지역에서 열리는 카퍼레이드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김환용기자]
  • 美NBC취재팀과 인터뷰

    [로스앤젤레스 연합]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국전 참전 미군이 이달 말 한국을 방문,피해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50년 7월에 발생한 사건 당시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7연대 2대대 중화기중대 소속 기관총 사수(상병)였던 에드워드 L.데일리(68·테네시주 클라크스빌 거주)씨는 26일(이하 미국시간)“NBC방송의 주선으로 오는 31일부터 1주일간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데일리씨는“NBC-TV의 유명 앵커인 톰 브로코와 함께 방한할 예정”이라면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사건 현장에서 당시 상황 등에 관해 NBC팀과인터뷰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데일리씨는 당시 상황과 관련,“여자와 어린이가 있었기 때문에 사격명령이 확실하냐고 상관에게 반문했으나 변함이 없었다”며“피란민들을 향해 정조준하지 않고 노근리 굴다리 큰크리트벽을 향해 총을 쐈다”고 말했다. 데일리씨는 다음달 8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소재 미국교회협의회(NCC)본부에서도 노근리사건 피해자 및 유가족 대표단을 만나 증언과 함께 화해를 모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 [인터뷰] ‘노근리 사건’첫보도 말誌 오연호기자

    * “인간을 인간으로 보면 비극은 없어” 최근 미국 AP통신의 보도로 세계언론의 이목을 집중시킨 ‘노근리 사건’을 첫 보도한 곳은 국내언론이었다.그러나 그 매체가 월간지였다는 이유로 ‘노근리 사건’은 그동안 국내 주류언론들로부터 외면당해 왔다.지난 94년 ‘노근리 사건’을 처음으로 현장취재해 진상을 세상에 알린 주인공은 ‘월간말’의 오연호(35)기자.88년 ‘말’지 기자로 취재활동을 시작한 이래 10여년간 주한미군범죄를 끈질기게 추적해 왔다.그런 연유로 ‘반미기자’라는별명을 얻은 오 기자가 최근 자신의 ‘10년농사’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노근리 그 후’를 월간말에서 출간했다.이 책은 주한미군범죄 55년사를 집대성한 것으로 ‘20세기 야만과의 결별을 위한 현장보고서’라는 독특한 부제가 눈길을 끈다.“해방직후이든 90년대의 것이든 노근리사건을 포함한 모든미군범죄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것입니다.인간을 인간으로 보지않는다면 그건 모두 야만입니다” ‘양민의 죽음’을 뉴스로 만든 AP가 진짜로 기여한것은 특종보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데 있다고 오 기자는 말했다. 오 기자가 주한미군 범죄사 추적을 ‘내 일’로 여기게 된데는 ‘사연’이있다.86년 연세대 총학생회 교육부장 시절 중고등학생 2만 여명에게 보낸 ‘편지사건’이 그것이다.그가 쓴 편지속에는 “미국은 6·25때 한국을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수한 동포를 죽였다”는 귀절이 포함돼 있었는데이 ‘편지’는 당시 조선일보 사회면 톱을 장식하였다.이 사건으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 때 내가 쓴 편지내용이 사실로 확인돼 명예는 회복한 셈입니다.다만 AP가 노근리를 ‘해방’시킨 날 왠지 씁쓸했습니다.외세에 의한 8·15해방이다시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88년 1월 ‘말’지의 기자가 되면서 그의 ‘미국(주한미군)탐구’는 본격화 됐다.그 해 6월 ‘르포-용산 미군기지’를 취재하면서 ‘탈선미군들’의 범죄행각을 접했고 이후 그는 현장취재를 통해 밝힌 미군범죄사를 ‘식민지의아들에게’‘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마라’‘실록소설 살아나는 임진강’이라는 이름의 책들로 엮어 고발해 왔다.오직 그만의 외로운,‘우리현대사의 숨은 그림찾기’였다.그런 그가 ‘한국속의 미국찾기’의 마지막에서 만난것이 바로 ‘노근리사건’이었다.94년 ‘말’ 7월호에 그가 게재한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백여명 학살사건’보도는 노근리에 대한 최초의 심층적 현장취재였다.당시 국내 언론은 아무데서도 주목하지 않았고 그는 금년 6월호에 다시 이를 다루었다.AP통신의 보도가 터져나오기 불과 석 달전의 일이었다. ‘반미기자’인 그는 95년부터 2년반가량 미국생활을 하고 돌아왔다. “‘미국속의 한국’을 알아야 ‘한국속의 미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귀국한 후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출간했는데이는 내가 ‘반미기자’에서 ‘반미와 친미를 능숙히 배합하길 원하는 기자’로 바뀌고 있는 중임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오 기자는 “국익보다 사실(인권유린)보도를 우선시한 AP의 편집철학에 찬사를 보낸다”며 한국언론의 ‘외신사대주의’를 다시한번지적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美,노근리 사건 참전 미군 기소면제 검토

    [로스앤젤레스·뉴욕 연합] 노근리학살사건을 조사중인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이 사건과 관련된 참전 군인 등 모든 미국인에 대해‘전례 없이’기소를면제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23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일괄 기소 면제로 증인들이 조사에더 협력하게 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기록을 최대한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한국전 초기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공격상황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필름이 발굴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 MBC가 23일 미 국립기록보관소로부터 입수,방영한 이 필름은 개전 초기인 50년 7월29일과 30일,8월13일에 미 공군 제25전투비행단 소속 F-80전투기들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기체 하단에 부착한 카메라로 촬영한 것으로 미군전투기들의 무차별 공습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노근리 진상규명 이후 다른 학살사건도 조사”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은 한국전쟁 중 발생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진상규명작업에 이미 착수했으며 이를 마무리한 후 다른 사건들에 대한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미 국방부가 20일 밝혔다. 케네스 베이컨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담당한육군부가 문서검토의 형식으로 노근리 사건의 진상조사를 시작했으나 참전장병들과의 인터뷰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베이컨 대변인은 이 사건의 진상규명작업이 “심각하고 매우 복잡한 것”인만큼 “우리는 지나치게 서두르기 보다는 시간을 갖고 올바로 처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그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 급선무라고 밝히고이 사건에 대한 작업이 완료된 후 미국은 다른 유사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할것이나“현 단계로서는 조사가 어느 정도로 확대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21세기 여성시대](4)군인

    지난 97년 개봉됐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지 아이 제인(G.I.Jane)’은 오락물에 불과하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금녀(禁女)지대인 해군특수부대(SEAL)조차 이제는 벽을 허물어야 할 때가 왔음을 보여줬다.1차대전때 여성 군입대가 공식화되고 2차대전때 병과(兵科)확대가 이뤄진 이후 불과 50여년만에 여성의 군(軍)진출은 비약적인 속도로 이뤄져왔다.여성은 사병에서부터 장관까지,단순 사무직에서 전투기조종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병과에 진출,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이같은 개방화 속도로 미뤄볼때 21세기여군의 역할증대는 거역할수 없는 추세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사상 첫 여성 학과장직을 맡았던 실라 위드넬 박사는미 역사상 최초의 공군장관을 역임한 인물.그녀는 93년 30년간 몸담았던 강단을 떠나 현역군인만 38만명인 공군을 거느리고 군현대화,조달부문 개혁 등탁월한 업적을 쌓았다.97년 퇴임,강단으로 돌아간후 지금까지도 이름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예비역 해군소장인 로버트 해자드는 미군내 최고위 계급 여성으로 알려져있다.작전,훈련,인사 등 다양한 경험이 그녀를 해군 인사참모부장까지 이끌어갔다.이들은 현재 미군내 여성의 지위와 여군의 미래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역사상 여성의 군대 진출은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도 기원전 1300년전 중국상왕조 우딩(武丁)의 푸하오 왕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그러나 정식 여군으로 복무하게 된것은 1차대전때부터.그 전까지 여성은 남자로 변장한 다음에야 군인이 될 수가 있었다.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던오를레앙의 처녀영웅 잔 다르크도 ‘남자’로서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지 여군은 아니었다. 여성이 정식으로 군에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대전때.물론 간호와 사무에 한정됐으나 대우는 ‘최고’였다.1차대전말 미 여군 간호장병만 총3만4,000명에 달했다.여군 병과확대가 이뤄진 것은 2차대전때로 수송,기계수리,항공,첩보 등에까지 진출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50만여명의 여성이 암호해독과 레이더기지 운용 등 지원업무는 물론 적지에 투입돼 정보수집과 후방교란업무를 수행하는 특수작전도벌였다.인도계 영국인 베굼 누르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낙하된 최초의 여성스파이였다.암호명 ‘메덜린’으로 암약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1년여동안 정보를 보내다 독일군에 발각돼 44년 처형됐다. 유태계 폴란드인인 한나 세네쉬 역시 유고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체포돼 23살의 나이에 총살된 비운의 주인공이다. 러시아 여군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80만명의 여군중 70%가 전방에서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다.티토의 빨치산 투쟁에는 200만명의 여성이 가담했다가28만2,000명이 처형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여성은 독립투쟁의 선봉장이었다.나이지리아에서1929년 일어난 ‘아바봉기’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기를 든 ‘여성의 전쟁’으로 유명하다.국민당과 싸웠던 중국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장정에는 35명의 여성당원이 끝까지 길을 같이 했다. 현재 미군내 여군은 육군과 해병대만 각각 3만2,000명과 4만8,000명.공군장교의 15%,사병의 10%가 여성이다.아파치 공격헬리콥터를 몰며 탱크를 호위하는 여군의 모습은 이제 더이상 생소하지 않다.‘사막의 폭풍’작전때만 4만1,000명 여군이 참전했다. 박희준기자 pnb@ * 韓·日 여성지도자 세미나 개최 여성의 힘을 빌어 ‘21세기 한-일관계’를 새롭게 모색해보려는 대규모 한일(韓日) 교류행사가 열린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회장 이춘호)은 창립 30돌을 맞아 일본 여성 지도자 500여명을 초청,오는 24일∼26일까지 서울 힐튼 호텔에서 양국 여성지도자 세미나를 가진다. 세미나 주제는 ‘21세기 여성의 정치적 역할’.한일 여성국회의원을 비롯해지방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의 배우자,학계 및 여성단체 대표,여성 경제인,여성 언론인 등 한일 여성지도자 1,000여명이 참석하는 이번 세미나는 여성계최초의 대규모 한일 양국교류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이번 세미나는 일본 자민당의 모리야마 마유미 의원을 비롯,양국 모두 초당적인 입장에서 여성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해 양국 여성정치발전에 관해 진지한토론을 열 예정이다. 구체적인 논의과제는 제1주제인 ‘새천년을 향한 여성의 정치세력화’와제2주제인 ‘21세기 여성의 가치변화를 주도할 주요 요인’.이중 제1주제에대해선 ▲21세기 정치세력으로서의 여성의원의 비전(김정숙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정치인 배우자는 정치자원이 될 수 있는가(김정옥 이해찬 국회의원 배우자)▲여성지방의원과 생활정치의 이상(안상현 강원도 의원) 등의소주제로,제2주제와 관련해서는 ▲멀티미디어를 통한 여성의 가치변화(신낙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한일대중문화와 여성(하윤금 방송진흥원 연구원)▲사이버시대의 여성경제활동에 대한 전망(최영희 내일신문 발행인)▲여성의 정보화와 정치세력화(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등의 소주제가 토론된다.일본측에서도 각 1인이 발표자로 나선다. 특별행사로는 참가비(각 10만원)로 마련한 장애인 전용버스 증서(1억2,000만원)를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 전달하는 뜻깊은 행사와 함께 이번 세미나를위해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야시로 에이타(八代 英太) 일본 우정장관 등에 대한 공로패 수여식이 있을 예정이다. 연맹의 이춘호 회장은 “한일 여성지도자들의 잦은교류를 통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국 여성이 진정한 동반자로서 여성문제 뿐 아니라 제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2000년에는 일본 삿뽀르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한일 양국 여성지도자 교류세미나를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경옥기자 ok@ * 한국 女軍의 어제와 오늘 한국 여군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50년 9월 피난지 수도 부산에서 여자 의용군 491명으로 창설됐다.당시 여자 의용군은 정보수집,수색활동을 비롯,군가보급,간호활동을 벌였다.의용군은 곧 해체되고 51년 육군본부에 여군과가 설치돼 여군에 대한 인사행정업무를 처음으로 다루게 된다. 여군의 독자적 훈련기관인 여군 훈련소가 서울 서빙고에 창설된 것은 55년. 이후 여군은 여군처로 개편(59년)되고 70년대 들어 여군훈련소와 여군대대를예속부대로 한 여군단으로 확대되는등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기갑,포병을뺀 모든 병과에서 남자에 못지 않은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여군은 간호장교 800명을 포함,2,000명 가량.창설이후 2만명의 여군이배출됐다.엄옥순(嚴玉順·43)여군학교장과 민경자(閔慶子·47) 육군본부 여군담당관이 현역중 최고직위인 대령으로 재직하고 있다.예비역으로는 13대여군 병과장을 지낸 정영숙(鄭瑛淑) 여성단체협의회 수석부회장과 김화숙(金和淑) 재향군인회 여성회장이 사회에서 활동중이다. 여군의 최대숙원은 장군 배출.엄옥순·민경자 대령이 입대 26년이 되는 2001년 육사 31기와 함께 장군진급심사 대상에 들어간다.보수적인 군문에서 최초의 여성 장군이 탄생될지 관심을 끈다. 황성기기자 marry01@ *역대 최고의 女戰士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여전사(女戰士)는 누구인가.미국의 인터넷 정보제공 업체인 ‘네트 사라소타’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중국의 화무란(花木蘭),미국의 몰리 피처,베트남의 트룽 자매를 꼽았다. 잔 다르크는 15세기 백년전쟁 때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험에 놓인 나라를구해낸 프랑스의 여걸.소작농의 딸로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둬 영국의 침략야욕을 분쇄했다. 1429년 영국군에 의해 포위된오를레앙에 군대를 이끌고지원을 나간 잔 다르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서서 병사들을 독려,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다.1920년 5월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성인으로 추증됐다. 화무란은 5세기 중국 북위(北魏)시대때 흉노족의 침입으로 강제 징집령을받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미국의월트디즈니사가 화무란을 ‘뮬란’이라는 제목의 만화영화로 제작,98년 전세계에 개봉함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특히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그해 중국 방문전 이 영화를 보고 동양적 충효사상에 감명을 받아 중국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미 독립전쟁 때 맹활약한 몰리 피처는 본명 메리 매컬리보다 별명 ‘몰리피처(물주전자 몰리)’로 더욱 유명하다.남편 헤이스와 함께 뉴저지의 몬머스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쉴틈없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부상병과 갈증에허덕이던 병사들의 목을 축여줘 이 별명을 얻었다.포병인 남편이 쓰러지자자신이 직접 포수가 돼 싸움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베트남의 트룽 자매도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여전사들.트룽 트락과 트룽니 자매는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의 공주들이다. 중국군이 트락을 성폭행하고 남편을 살해하자 8만명의 반군을 조직,거대 중국에 대항했다.뛰어난 게릴라 전으로 당시 중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빼앗은 것은 물론 세력권을 중국 남부까지 확대했다. 김규환기자 khkim@
  • 신경가스 보호제가 ‘걸프전증후군’ 원인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90∼91년 걸프전 당시 신경가스로부터 미군장병들을보호하기 위해 투약했던 약물이 이른바 ‘걸프전 증후군’으로 알려진 질병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19일 보도했다. 포스트지는 캘리포니아주 소재 두뇌집단인 랜드 코퍼레이션이 국방부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연구 결과,피리오스티그민 브롬화물(PB)이 일부 걸프전 참전 미군장병들이 앓고 있는 고질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전했다. ‘걸프전 증후군’은 일부 참전 장병들이 겪고 있는 만성통증,소화장애,구토증,피부발진,피로,기억력상실 및 집중력장애 등 광범위한 증상의 질병이며,이 질병을 앓고 있는 참전 장병들의 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은 이라크의 신경가스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참전장병 총 69만7,000명 중 약 30만명에게 PB를 투약했다. 걸프전 증후군 연구에 약 2,000만달러를 배정하고 있는 미 국방부는 PB의영향 등에 관한 연구에 약 1,300만 달러를 투입했다. hay@
  • 北·中 62년 국경조약 체결 백두산 일대 국경선 확정

    불분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백두산 천지 일대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지난 62년에 확정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시 체결된 ‘조-중 변계조약(邊界條約)’에서 북한은 백두산 천지의 5분의 3과 그 일대를 영토에 편입,1909년 청·일 간도협약 당시보다 서울시 면적의 45% 정도인 약 280㎢를 더 확보했다는 것이다. 백두문화연구소 이형석(李炯石)대표는 20일 “지난 여름 중국 옌볜대 동북아 지리연구소장으로부터 조약내용을 상세히 들었다”며 “이 조약은 62년 10월12일 평양에서 주언라이(周恩來) 중국총리와 김일성(金日成) 북한주석간에 체결된 비밀조약”이라고 주장했다. 이대표가 확인한 조약 내용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천지 수면을 서로 공유키로 합의,천지 안에서는 양측 모두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규정했다.압록강 최상류지역으로부터 천지 주변을 거쳐 모두 21개의 국경 표지비를 설치했다. 이 조약에 따라 해발 2,750m로 백두산 최고봉인 백두봉을 비롯,쌍무지개봉향도봉 단결봉 제비봉 등은 북한측에,옥주봉 백운봉지반봉 금병봉 용문봉등은 중국측에 각각 속하게 됐다. 이대표는 “중국측은 당초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참전 대가로 삼지연까지할애할 것을 요구했으나 북측은 ‘천지 일대를 넘겨주면 대국인 중국이 형제국의 영토를 빼앗았다고 비난할 것’이라고 반박,중국측의 양보를 이끌어 냈다”고 설명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20세기 문명기행] 4. 대량학살과 세계대전

    “1917년 육군에 입대한 나는 1차대전중 프랑스 육군에 배속됐다.우리가 속한 807 파이어니어 보병대원은 350여명이었다.파이어니어 보병대는 전투부대가 아니고 교량부설이 주임무였다.그런데도 귀국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모두 12명 뿐이었다”(뉴스위크지에 실린 미국인 참전용사 허버트 영 회상 중에서). 1차대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흉탄으로 어처구니 없이 시작됐으나 9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희생자수가 19세기 최대의 국제전이었던 보(普)·불(佛)전쟁의 15만명보다 무려 60배나 많다.1차대전이 20세기 ‘대량살상의 시대’를 연 셈이다. 대량살상의 시대를 여는 데는 과학기술도 ‘한몫’을 했다.독일군의 독가스,영국군의 탱크가 처음 등장함으로써 대량살상을 부추긴 것이다.대량살상 신무기는 지상에만 있지 않았다.독일군은 당시 혁명적 교통수단이었던 비행기를 폭격에 동원,영국을 초토화시켰고 U보트(잠수함)로 연합국 전투함을 수장시켰다. 30년대말부터 히틀러의 광기로 세계는 초토화됐다.반(反)공산주의 및 인종차별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나치즘은 악의 뿌리인 소련지역까지 영토를 확장,독일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유대인을 배척하자고 주장했다.이 때문에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고 2차대전이라는 극단으로 몰고 갔다.히틀러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촉발된 2차 대전은 6년간의 전쟁으로 6,500만명의 생명이빼앗긴 인류 최악의 전쟁이었다.전쟁이 끝날 무렵 등장한 원자폭탄은 대량살상 무기발전의 ‘절정’을 이뤘다. 2차대전이 끝나자,또다른 불행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세계 맹주로 떠오른 미국이 유럽을 원조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자,소련과 소련이 이끄는 공산진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냉전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한데 이어,중국마저 공산화됨으로써 공산주의는 전세계 인구의 30%를 지배하게 됐다.50년대 벽두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들로 시작됐다.소련과 중국,두 거대 공산국가는 2월15일 ‘중소동맹’결성을 발표,공산주의 연합전선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다. 냉전의 ‘유탄’은 은둔의 나라 한반도로 튀었다.북한군이 6월25일 새벽 전격남침하자 미군과 유엔군이 급파됐고,소련에 이어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동서냉전이 열전으로 바뀌었다.3년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한민족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채 ‘미완의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250만명의 한국인과 100만명의 중국인,5만여명의 미국인 등 4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서진영이 맞붙은 두번째 결전장인 베트남전쟁은 ‘무적함대’ 미국에 첫패배를 안겼다.동남아지역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명분 아래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50만명 이상의 미군을 투입하고 폭탄을 무차별 쏟아부었으나 결국 쫓겨났다.5만5,000명의 미국인과 100만명 이상의 목숨을 바치고서야수렁에서 빠져나왔다. 냉전의 악순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프랑스 유학중 공산주의에 심취한폴 포트(98년4월 사망)가 무장투쟁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지식인 등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어린이까지 닥치는대로 학살했다.인구의 4분의 1인 200만명이 희생돼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만들었다. 소련의 개방·개혁정책을 실시로 냉전에 종지부를 찍자마자 민족 분규로 대량학살이 자행됐다.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는 ‘인종청소’가 그치지 않고 르완다 등 아프리카에서도 무차별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다.그러나 동티모르가오랜 내전을 딛고 독립을 쟁취했고,북아일랜드는 신·구교도간의 유혈분쟁을종식시켰다.새천년을 앞둔 세계에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김규환기자 khkim@ *인류의 공포 核무기 사라질까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뒤 지구촌은 핵무기의 악몽에 시달려왔다. 미국과 옛 소련은 세계 패권을 잡기 위해 핵경쟁을 시작,전인류를 수십번죽이고도 남을 양의 핵무기를 생산,배치했다.여기에 19세기의 강자 영국과프랑스가 뛰어들었고 중국도 뒤질세라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46년부터 96년 말까지 50년간 이들 5개 핵강국들은 무려 2,045회의 핵실험을 실시했다.이중 미국이 1,030회로 가장 많고 러시아(715회),프랑스(210회),영국 및 중국(각각 45회)의 순이었다.지하핵실험이 1,517회였다. 핵강국들은 이같은 핵실험을 거쳐 다량의 핵무기를 생산,배치했다.96년 말현재 모두 3만9,047개나 된다.실전배치한 것과 비축분,폐기대기중인 것을 다합한 것이다. 러시아가 2만5,000개로 가장 많다.미국은 1만2,937개로 미국과 러시아가 전세계 핵탄두의 97%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엄청난 숫자의 핵실험과 무기는 인류복지 증진에 쓰였을 돈을 투입함으로써 가능했다.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40년부터 96년까지 핵무기 개발과 생산 등에 5조5,0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이는 경제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 총매출과 맞먹는 돈으로 미국인 한사람이 2만2,000달러를 부담한 꼴이라는 계산이다.옛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경쟁 패배로 해체됐으나 ‘핵유산’은 여전히 옛 소련의 자식들인 동구국가들에 이어지고 있다. 전세계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을 통해 추가 핵실험과 핵무기 확산을 막으려 하지만 실효성은 없다는 지적이다.그나마 미 의회의 비준 거부는업친데 덮친격이 되고 있다. 더우기 미국은 2008년까지 매년 36억달러 이상을 핵실험과 운반수단의 개발 등에 투입한다는 계획이다.인도,파키스탄,북한 등 제3세계 22개 국가들은핵프로그램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때문에 새천년에도 핵무기가 전인류의 최대 악몽으로 남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박희준기자 pnb@
  • “제2의 노근리사건 다신 없어야”

    [로스앤젤레스연합]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21보병 연대 전우회는 14일노근리사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서한을 에릭신세키 미 육참총장과 제임스 존스 해병대사령관에게 전달키로 했다. 21보병연대 전우회는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맨처음 파견됐던 태스크 포스 스미스부대원 540명 중 생존해 있는 장교 및 사병 출신 19명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무공훈장을 받은 칼 F 버나드 미 예비역대령(73) 등 회원들은 이날 전우회 명의의 서한에서 “노근리사건의 교훈은 간단하다”면서 미군에 대해 “보이스카웃의 격언처럼 (전투에) 대비하라”고 충고했다. 이 서한은 “우리는 (한국전에) 대비하지 못했다”며 “오늘날 육군이 전장에서 싸울 태세가 더 잘 돼있고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 진정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버나드씨가 대표집필한 서한은 “이라크,레바논,아이티,소말리아,코소보,동티모르의 정치군사적 돌발사태는 군·민 첩보기관들의 유능함,즉 정책결정자들에게적시에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위험상황을 설명하는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버나드씨는 이런 서한을 보내려는 이유에 대해 “미 육군과 해병대가 다시금 노근리사건과 유사한 유혈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고밝혔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우리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면서 “AP통신이 수치스러운 사건을 매우 분명하게 보도하고 있는데도 그런 희생은 아직 주목받지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고령 ‘득성교 폭파’ 참가 美장병 인터뷰

    [뉴욕연합] “미안할 뿐이다.그러나 당시는 전쟁상황이었고 어쩔 수가 없었다” 미 제14전투공병대대 출신으로 지난 50년 8월3일 경북 고령군의 득성교 폭파에 참가했던 캐럴 킨즈먼(71·미시시피주 고티어시)씨는 14일 전화회견에서 폭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득성교 폭파 당시의 상황은. 미 21사단으로 생각되는데 폭파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미군 병력이 다리를건너기를 기다렸다.다리 위에 많은 피란민 행렬이 있었지만 미군 병력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폭파명령이 내려졌다. ■누가 명령을 내렸는가. 당시 현장에 대령이 나와 있었다.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순간까지기다리다 폭파명령을 내렸다. ■득성교 위에는 얼마나 많은 피란민이 있었는가. 나는 250여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다리 위가 꽉 찬 것으로 보였으며 500∼1,000명까지 추정하는 동료도 있었다.다리를 폭파한 뒤 곧바로 트럭을 타고 현장을 떠났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란민이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던 피란민들이 모두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리를 폭파한 것이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한다.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폭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다리 폭파 직전에는 멀리서 북한군의 T-34 탱크 굉음이 들렸었다.한국어 통역을 통해 ‘다리가 곧 폭파되니 뒤로 물러서라’고피란민들에게 경고하고 머리 위로 위협사격을 했지만 필사적으로 다리를 건너려 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당시 나이와 계급은. 21세였으며 상병이었다.한국전에는 50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참전했다. ■이 사건과 한국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좋지 못한 일이지만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미군 부대 PX에 일하던 한한국여성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줘 고맙다”는 참전에 대한 감사의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전쟁이었고 적이 한국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했으며 우리는 한국을 돕기 위해 그곳에 갔다.
  • 美軍, 왜관·고령교 폭파 왜했나

    [워싱턴 AP 연합] 1950년 8월초,당시 미 제1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한지 불과며칠밖에 안된 호바트 게이 장군은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한군 게릴라들의 격퇴 방안을 고심하던 중 3일 저녁 15마일 서쪽에 북한군 집결 보고를 받고 미리 폭약을 설치한 왜관교 폭파를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미군은 경고사격을 통해 한국인 피란민들에게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나 피란민 행렬은 계속 왜관교를 통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희생자가 많았다고 참전용사들은 전했다.지난 83년 작고한 게이 장군은 훗날 미군 전사에 기록된 글을통해 “그 다리엔 수백명의 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폭파명령을 내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술회,희생자가 많았음을 시사했다. 제1기갑사단의 지난 50년 전황일지에는 희생자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지난60년 발간된 미군 전사에는 게이 장군의 말을 인용,왜관교 희생자들에 대한기록이 남아 있다. 또 제14전투공병대대 하사관 출신의 캐럴 킨즈먼은 고령교 폭파와 관련,“미군이 밀려드는 피란민 머리 위로 총격을 가해 다리가 폭파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려 했으나 피란 물결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됐다”면서 “그런 와중에 당일 오전 7시1분 상부에서 폭파 명령이 내려왔다”고 말했다.고령교폭파로 인한 희생자 발생에 관한 보도는 최초로 나온 것이다. 킨즈먼과 루돌프 지아넬리 등 일부 참전병사들은 고령교 폭파 희생자가 수백명에 달한다고 증언한 반면,이포크 등은 30∼40명의 난민을 목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재향군인들은 그러나 고령교 폭파 지시를 내린 지휘관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밝혔으며,제14공병대 기록에는 고령교 폭파와 관련,‘작전,멋지게 완료’라고 적혀 있다. 유진 헤슬먼과 로버트 러셀은 “난민들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들을전멸시켰으며,미군은 모험할 처지가 아니었다”면서 “사망자들 중에는 위장한 북한군 10명 정도가 끼여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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