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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컵/ 한국속 이 나라 - 브라질, 터키

    ■브라질 ●한국과 관계= 59년 수교 이후 브라질인 4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응원= 3000여명이 대회 기간 한국과 일본을 찾아 응원할 예정이다.브라질 외교부는 지난달 24일부터 울산에 임시 영사관을 운영하고 있다.(052)273-5707. ●공연= 3일 울산월드컵경기장 옆 호반광장에서 열리는 ‘축구인을 위한 전통예술공연’에 브라질팀이 참가한다.5일까지 상암동 서울월드컵플라자에서 열리는 드럼 페스티벌에도 브라질 타악그룹이 참가해 삼바 리듬을 선사한다.13일 코스타리카와 브라질이 맞붙는 수원월드컵경기장 주변에서 펼쳐지는 해외 민속공연에도 참가한다. ■터키 ●한국과 관계= 57년 수교했으며 200여명이 거주하고 있지만 월드컵때 3000여명이 입국한다. ●응원= 6·25 참전용사 34명이 브라질전에서 한국인 서포터스들과 함께 응원전을펼친다.그 보답으로 터키 용사들은 4일 부산에서 열리는 한국-폴란드전에서 한국을 응원한다. ●공연= 전통음악 밴드가 4일 오후 7시 여의도공원에서 공연한다.13일 상암동 서울월드컵플라자 ‘터키의 날’행사에 민속공연팀 ‘10V’이 출연하고 ‘터키의 리키 마틴’으로 불리는 팝 가수 타르칸도 이날 무대에 선다.(02)309-0379. 임병선 정은주기자bsnim@
  • 월드컵/ 우리는 외국팀 ‘서포터스’ -””라이라이 투르키에”” “”비브 라 프랑스””

    ‘라이라이 투르키에 투르키에’(터키 힘내라),‘비브 라 프랑스’(프랑스 만세) 지구촌의 잔치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오∼필승,코리아’나 ‘대∼한민국’이 아닌 생소한 응원구호들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외국팀을 응원하는 한국 축구팬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기 때문이다.이들은 월드컵 개최 도시가 조직한 공식 서포터스와는 달리 다양한 이유와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뭉치고 있다. 우선 ‘보은(報恩)형’ 응원단이 눈에 띈다.2000여명의 네티즌이 참가하고 있는‘터키팀을 응원하는 모임’은 한국전쟁 당시 터키의 지원에 보답한다는 취지에서 터키팀을 밀고 있다.이들은 터키팀의 경기가 있는 3일과 9일 서울 여의도 공원의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 응원을 벌일 예정이다. 한국전 참전용사와 국가유공자 자녀로 이뤄진 ‘인천 시민 터키 서포터스’회원150여명은 경기장을 직접 찾기로 했다.박경애(41)씨는 “경기장에서 터키 국기를 상징하는 빨간 손수건 2000여장을 관중에게 나눠줄 것”이라며 터키팀의 선전을 기원했다. 한국에 자국민이 거의 없고,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아 대규모 응원단을 파견하지못한 나라를 지원하기 위한 ‘동정형’ 응원단도 있다. 부산·경남의 축구동호회원들로 구성된 ‘남아프리카공화국 서포터스’는 남아공축구대표팀의 애칭인 ‘바파나 바파나’를 응원구호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응원연습을 해왔다. 대구에서는 ‘슬로베니아 서포터스’가 만들어졌다.회원 박호섭(46)씨는 “축구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약소국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민간외교 사절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응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월드컵을 기회로 해당국의 문화와 어학을 익히려는 ‘실속파’응원단도 생겨났다. ‘프랑스 서포터스 인 서울’의 회원 100여명은 지난달 31일 밤 광화문 등 도심전광판에서 프랑스-세네갈전을 지켜보며 프랑스팀을 열렬히 응원했다.이들은 지난달 25일 샹송가수 프랑시스 라란을 모임에 초청해 프랑스 응원가를 배웠고,29일에는 ‘한국·프랑스 우정의 날’행사를 갖고 양국의 민속무용을 관람하기도 했다. 회원 이지은(20·여·고려대 2년)씨는 “평소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응원단에 가입했다.”면서 “축구 경기를 즐기며 프랑스를 많이 배우고 싶다.”고 활짝 웃었다. 이창구 김유영기자 window2@
  • 한국전 참전 터키용사 34명 월드컵 응원 입국 “”상흔 씻고 축제 놀라워요””

    “가질러리(노병들이여),이킨치 와타나 호스젤디니즈(제2의 고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코레,세비요리즈(한국을 사랑합니다).” 1일 오후 인천공항 입국장에는 제복 차림에 머리가 희끗한 터키인 할아버지 34명이 감회 어린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50년 한국전에 참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터키 참전용사들이 반세기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돌아온 노병’들은 전쟁의 비극으로 얼룩졌던 땅이 월드컵 축제의 무대로 바뀐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입국장에는 이들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소속 참전 용사들과 터키팀을 응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뭉친 시민 응원단이 박수와 환호로 이들을 맞았다. 한국군 참전용사 34명은 터키 전우들의 목에 저마다 꽃다발을 걸어 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볼을 부볐다.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은 한참 동안 뜨거운 포옹도 나눴다. 무슬루 알쿠살(73·당시 소위)은 낙동강 전투에 함께 참여했던 한국군 전우 조남신(75)씨에게 영문 편지와 참전 당시의 사진을 선물로 주었다.터키 참전용사 대표인 셀축 유네겔(79·당시 대령)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의 뜨거운 우정을 50년만에 다시 느낄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알리 이산(73)은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개성 전투에 함께 참여한 둘도 없는 친구였던 사진 속의 ‘김’을 찾으러 왔다.”고 수소문했다.그는 “한국이 50년 만에 이렇게 발전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한국전 당시 터키군은 1만 5000여명이 파병돼 36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특히 이날 노병들과 함께 입국한 오스만 카라테 킨(52)의 감회는 남달랐다.킨의 아버지 오스만 아리(당시 24)는 압록강 국경지대 근호리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당시 생후 45일의 갓난아기였던 킨은 이후 홀어머니와 함께 터키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항상 아버지의 ‘청춘’이 묻힌 한국을 가슴에 담아왔다고 한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킨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한국에 오고 싶었다.”면서 “전 세계인의 잔치인 월드컵을 계기로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국에 오게 돼 너무나도 기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국립묘지를 찾아 한국전에서 희생된 용사들에게 헌화하겠다는킨은 “터키와 한국이 나란히 월드컵에서 선전하길 바란다.”며 응원도 잊지 않았다. 터키 전쟁 유공자회의 요청을 받은 주 터키 한국대사관과 기업체 등의 도움으로한국에 온 이들은 서울 중구 인현동 풍전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이들은 3일 브라질,9일 코스타리카,13일 중국과 경기를 벌이는 터키팀을 경기장에서 직접 응원할계획이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터키응원 모임의 고석중(27·한성대 4년)씨는“비록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세대의 사연이지만,월드컵을 계기로 가슴 뭉클한 만남이 이뤄지게 돼 기쁘다.”면서 “터키의 선전을 위해 힘껏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이영표·김유영기자 tomcat@
  • ‘보훈가족 월드컵응원단’ 구성

    국가보훈처(처장 李在達)는 월드컵이 열리는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추모·문화행사와 함께 보훈가족의 월드컵 참관 및 봉사활동도 펼친다고 31일 밝혔다. 보훈 관련 행사로 우선 오는 4일 국무총리 주재로 호국·보훈관계 장관회의를 열어 보훈가족의 삶의 질 향상 대책을 논의한다. 제47회 현충일 기념식과 제52회 6·25기념행사가 전국 240개 지역별로 열리며 초청음악회,백일장,학술회의,안보현장 견학 등도 마련됐다. 특히 ‘보훈가족 월드컵 응원단’을 구성,6·25참전 16개국 가운데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덴마크·프랑스·남아공·터키·미국 등 5개국 선수단의 훈련 캠프를 방문,격려한 뒤 경기 당일에는 응원전을 펼칠 계획이다. 선수들과 함께 참전기념비도 참배한다. 김경운기자
  • ‘영천대첩비’ 제막

    한국전쟁 당시 북진 반격의 전기로 평가받는 영천대첩을기념하기 위한 ‘영천대첩비’가 27일 준공됐다. 이날 오후 4시부터 경북 영천시 고경면 청정 2리 영천호국용사묘지에서 준공식이 치러진 대첩비는 영천호국묘지내 부지 3800여㎡에 높이 30m,폭 13.8m 규모로 들어섰다.사업비는 모두 30억원이 투입됐다. 지난 93년 3월 역대 8사단장 출신 예비역 장성들이 영천대첩비건립기념회를 구성,본격적으로 활동을 벌여온 지 6년여만이다.건립기념회 김정무(金貞武)회장은 “영천대첩의 자유수호 정신을 기념하고 참전용사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대첩비를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영천 김상화기자
  • [씨줄날줄] ‘고엽제 판결’ 유감

    ‘고엽제에 함유된 다이옥신이 질병을 유발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서울지방법원이 23일 국내 고엽제 환자들이 미국의 고엽제제조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고엽제 환자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부보상과 지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현재 고엽제 후유증 환자 4945명(4월30일 기준)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다.1등급에게는달마다 277만원,7등급에게는 18만원을 지급한다.4만 8271명의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도 장애등급에 따라 21만원에서 42만원의 수당을 받는다.34명의 고엽제 후유증 2세 환자도 45만원에서 70만원까지 수당을 준다.고엽제 환자의 자녀에게는 학자금을 지급하고 취업 때 가산점도 준다. 서울지법의 판결대로 월남전 때 살포된 고엽제와 질병간 인과관계가 없다면 고엽제 환자에 대한 보상은 국가가 베푸는시혜이다.그러나 국가보훈처는 국내외 역학조사를 근거로 고엽제 후유증과 후유의증 환자를 판단해 왔다고 설명한다.미국과 호주 정부,세계다이옥신학회에서도 다이옥신과 질병간인과관계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월남에서는 전쟁이끝난 지 27년이 지난 요즘 미국 정부의 참여 아래 대규모 역학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지법의 판결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국의 제대 군인들이 1978년에 제기했던 손해배상 소송을 되새기게 한다.제조사측은 7년이 넘게 소송을 끌다 84년 5월 선고를 바로 앞두고 1억 8000만달러에 합의했었다.1억 8000만달러는 94년까지 이자가 붙어 2억 4000만달러로 늘어났으며,5만여명의 환자에게 지급됐다.하지만 서울지법은 “다이옥신과 질병간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미국 제조사측 손을 들어줬다. 서울지법의 판결은 1심이기는 하지만 고엽제 환자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현실과 괴리된 듯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더욱이 고엽제의 고통은 1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국가가고엽제 후유증 2세 환자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도 알수 있다.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의증 전우회에 따르면 최근 ‘대물림' 환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2세들이 성년이되면서 아버지와 같은 병을 앓는 것이다. 병역 비리가 횡행하는 요즘 국가의 명령에 따라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고엽제 환자들이 우리 사회를 원망하게 해서는 안된다.다가오는 6월은 현충의 달이다. ▲황진선 논설위원 jshwang@
  • 고엽제 ‘5조 손배訴’ 패소

    고엽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고엽제 피해자들이 패소했다.이번 판결은 고엽제의 주성분인 다이옥신과 질병과의인과관계에 대한 최초의 법률적 판단이다. 서울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金熙泰)는 23일 “월남전 참전 당시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에 노출돼 각종 지병을 앓고 있다.”며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의증(擬症) 전우회 소속회원 등 1만 7000여명의 월남전 참전군인과 가족이 미국고엽제 제조사인 다우케미컬사와 몬센토사 등을 상대로 낸 5조 100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원고 패소 판결을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들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와미국·한국 내 연구기관들의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볼 때고엽제의 주성분인 다이옥신과 원고들의 질병간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려운데다 원고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입증을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설사 원고들이 앓고 있는 질병과 다이옥신간의 인과관계가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통상 손해배상 채권의 재판청구 시효가 3년에서 10년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효상의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고엽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움직임은 94년부터 시작됐다.이들은 처음에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인과관계 입증 문제로 흐지부지됐다.그러다 서울고법이 99년 5월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 전우회’가 다우케미컬사 등을 상대로 낸 국내특허권 가압류 신청을 인용함으로써 분위기가 반전됐다.가압류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본안 소송에서도승소할 가능성을 높여준 것이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관련단체들이 대거 소송에 참가,원고인단 수는 1만 7000명,소송가액이 5조 1000억원,인지대만 200억원에 이르렀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백영엽(白永燁) 변호사는 “고엽제와 질병간 고도의 개연성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기계적인 인과관계만 따진 이번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항소할 뜻을 비쳤다.현재 국가가 인정한 고엽제 피해자는 후유증 환자가 2399명,이보다 증세가 덜한 후유 의증환자가 1만 4997명에 이른다. 조태성기자 cho1904@
  • ‘고엽제 5조 소송’내일 선고

    월남전에 참전한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1만 7000여명이다우케미컬과 몬산토컴퍼니 등 미국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낸 5조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선고 공판이 23일열린다. 이 사건 심리를 맡았던 서울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金熙泰)는 21일 “2년6개월간 진행돼 왔던 고엽제 소송에 대한 심리를 마치고 23일 선고하기로 하고 원·피고 양측에 통보했다.”고 밝혔다.99년 12월 월남전에 참전했던 고엽제후유증 환자의 소송 제기로 시작된 이번 사건은 후유의증환자,고엽제 환자 2세 등도 소송에 참가하면서 소송 규모가 크게 불어났다. 또 손해배상 소멸시효 문제와 재판관할권 문제 등 법리적 문제뿐 아니라 고엽제와 후유증 발병 사이의 과학적인 인과관계 입증 문제를 놓고 양측이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이번 선고공판은 고엽제와 후유증의 인과관계를 따지는첫 판례인 데다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질 경우 월남전 당시 주변국 고엽제 피해자들까지 소송을 낼 가능성도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월드스타 이들을 주목하라] 프랑스 영웅 지단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두뇌플레이의 황제,축구 아티스트…’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31)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현란하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를 ‘백인대장’이라고 불렀다.지혜롭게 작전을 펴다가,상황에 따라서는 적진에 직접 뛰어들어 ‘제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적장의 머리를 베는 로마군 전투력의 핵심이다. 공격형 미드필더인 지단이 축구에서 보여주는 역할과 꼭맞아 떨어진다.'중원의 지휘자'로서 지능적으로 볼을 공급한다.여의치 않으면 수비수 두 세명쯤은 직접 제치고 대포알같은 슈팅을 터뜨린다. 98 프랑스월드컵도 마찬가지였다.우승컵을 안기까지는 티에리 앙리,다비드 트레제게 등 ‘정예 병사’들이 많았다.하지만 이들을 톱니바퀴 돌듯 움직이게 하여 '전공'을 이끌어낸 힘은 고스란히 지단으로부터 나왔다. 지단은 그러나 상대의 거친수비에 종종 흥분을 참지못하여 구설수에 오르고 팀을 어려움에 빠뜨리기도 한다.역시프랑스월드컵 예선 3차전에선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비수를고의로 밟아 퇴장과 함께 2게임 출장정지를 당했고,유벤투스에서 뛰던 지난해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도 함부르크의수비수를 머리로 들이받아 팀을 탈락시켰다. 지단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아버지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1962년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로 알제리가 독립하자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에 귀화했다.남부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알제리계 혼혈꼬마’는 가난과인종차별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흙먼지 날리는 골목에서 축구공을 차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지난 88년 16살의 나이로 프랑스 1부 리그에 이름을 올린 지단은 94년 체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대표팀에 발탁됐다.2-0으로 뒤지던 후반 교체선수로 투입된 뒤 5분 동안 2골을 몰아치며 프랑스인들의 머리속에 ‘지단’이라는 이름을 또렷이 새겼다. 지단의 몸값은 세계 최고다.지난해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 유벤투스에 이적료 6553만 4000달러(820억원)를 지불했다.그는 올해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축구사에 기록될만한 예술적 발리슛으로 팀을 정상에 등극시킴으로서 자신의 몸값이 '이유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단은 자신에게 찬사를 보낸 시오노 나나미에게도 할말이 있을지 모른다.로마군에 백인대장은 수백명이지만 프랑스 축구에 지단은 오직 하나라고.누군가 지단을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그런 그의 발끝은 벌써 월드컵2연패의 시동을 힘차게 걸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프로필 ◆출생지 프랑스 마르세유 ◆생년월일 1972년 6월 23일 ◆체격 185cm 80㎏ ◆포지션 미드필더 ◆소속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등번호 10번(대표팀),5번(레알 마드리드) ◆경력 94프랑스 1부리그 신인왕,98프랑스월드컵 최우수선 수,98년 유럽 최우수선수,98·2000년 FIFA 최우수선수 ◆출생지 프랑스 마르세유 ◆생년월일 1972년 6월 23일 ◆체격 185cm 80㎏ ◆포지션 미드필더 ◆소속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등번호 10번(대표팀),5번(레알 마드리드) ◆경력 94프랑스 1부리그 신인왕,98프랑스월드컵 최우수선 수,98년 유럽 최우수선수,98·2000년 FIFA 최우수선수
  • 동두천 자유수호박물관 개관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20일 개관됐다.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162의 10에 문을 연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은 지난 97년 부지 4만㎡,건축면적 2617평의 지상 3층 규모로 착공,모두 72억원이 투입됐다. 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전쟁문화 유산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문을 연 이 박물관은 내부 전시공간에는 전쟁 참전군인들의 모습을 대형 벽화로 제작한 상징조형물과 참전국 병사들의 군복과 소지품등을 전시하고 인천상륙작전 등을 담은 영상물도 배치했다. 동두천 한만교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대한광장] 최외교 발언과 WP의 ‘헛스윙’

    필자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미국의 대외정책과 관련된 과목을 다수 선택해 수강했고,학위 논문도 미국의 대아시아 외교정책을 다루었다.미국의 대외정책은 19세기 고립주의를 표방한 먼로 대통령 시대를 넘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외적으로 개입과 팽창의 방향으로 추진되었다.그러한 외교정책을 이끈 대통령이 저 유명한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많은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숀 코네리가 주연한 ‘바람과 라이언'이라는 영화에서 아프리카에까지 성조기를 나부끼게 한 그의 모습이등장하고 있다. 그는 평소 “부드럽게 말하라,그리고 큰 채찍을 들어라.”(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는 미국 속담을 즐겨 인용했다.이는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외교정책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루스벨트는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육군 중령으로 참전했던 전쟁 영웅이며,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그런 루스벨트가 이 속담을 말했을 때에는 ‘부드럽게 말하라'는 전반부보다 ‘채찍' 즉,강력한 군사력에 바탕한 힘의 외교를 강조하고 있는것이다.아니 꼭 루스벨트의 어법과는 상관없이 이 속담은‘채찍'에 비중을 두고 있다. 얼마 전 최성홍 외교부 장관이 특사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방미하는 동안 그의 발언을 실은 워싱턴 포스트의 한 칼럼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최 장관은 “때때로 채찍을 드는 것이 북한을 (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Sometimes carrying a big stick works in forcing North Korea to come forward.)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최 장관이 루스벨트의 속담을 인용했음에도 이 신문이 앞부분을 생략하고 뒷부분만 부각함으로써 대화를 강조한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어,마치 최 장관이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지지한 것처럼 비치게 되었다고 한다. 분명히 최 장관은 임동원 특사와 김정일 위원장의 회담내용을 미국측에 전달하려는 방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진력했을 것이다.최 장관은,북한이 대화를 통해 북·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과 “체제와 지도자에 대한 비난을 하며,여러 조건을 붙이면 대화가 어렵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말을 미국에 알려주었다고 보도된바 있다. 비록 파월 국무장관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고위층 인사들에게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돌아왔다. 신임 외교부 장관으로서 상견례와 동시에 한반도 문제에대한 미국의 협조와 이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내용은 대미를장식할 수 있는 곳에서 헛 스윙을 한 아쉬운 대목이 아닐수 없다.외교부의 해명대로 설혹 루스벨트의 ‘부드럽게 말하라.'는 표현이 삭제되었다고 하더라도,위의 속담은 강경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금의 북·미관계에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우리는 우리대로 북한에 대해 미국과의 대화 필요성을 촉구하여 어렵사리 북한의 마음을 돌려놓았는데,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이 지금까지 취한 대북 강경책이먹혀들어 북한이 대화에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북한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직까지 북·미 대화는 재개를 알리는 징후들은 보이지만 정작 재개가 가시화되지는 않고 있다. 북한은 최근 ‘민족공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과거 ‘통미봉남(通美封南)'이란 말이 한때 유행했지만,남북 정상회담 이후 사라졌다.그러나 국제사회를 배척하는 민족공조가 아니라,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력을 수반하는 민족 공조가 필수적인 것이 우리가 놓여 있는 한반도의 현실이다. 박재규 경남대 북한대학원장·전통일부장관
  • 96년 러 대선후보 레베드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

    [모스크바 AFP AP 연합] 지난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던 인기 정치인 알렉산드르 레베드(52)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가 28일 헬기 추락사고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보도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육군장성 출신인 레베드는 지난 96년 대선 1차투표에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겨뤄 3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으며 이후 옐친의 후계자 물망에 오르면서 러시아 정치를 이끌어갈 유력 정치인 가운데 한명으로 주목받았다. 레베드는 그러나 옐친의 몇몇 정책에 반기를 들면서 후계자 대열에서 밀려났다.
  • 이산상봉 이모저모/ “”내가 죄인…”” 한숨·회한

    금강산에서 처음 이뤄진 이번 제4차 이산가족 상봉에서도눈물겨운 사연들이 흘러 넘쳤다.반세기 만에 만난 부부와부모·자식 등은 한숨과 회한으로 점철된 지난 세월의 아픔을 눈물로 씻어냈다. 부부상봉 ■6·25때 부인 이영희(73)씨와 다섯살배기 아들(창근·57)을 두고 평양을 떠나온 길영진(吉永鎭·82)씨는 백발의부인과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여보,내가 죄인이구려,죄인.”이라며 어쩔줄 몰라 했다.평양의 건설회사에서 일하던 길씨는 당시 북측의 토지국유화 조치로 땅을 빼앗긴데다 전쟁이 나자 “곧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라며 화물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 월남 후 재혼한 길씨는 “나도 없는데 창근이를 이만큼키웠으니… 할 말이 없소.”라며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못한 채 아내의 손을 쓰다듬으며 눈물만 흘렸다. ■안용관(安龍官·81·경기도 안산시 사동)씨도 반세기 만에 만난 아내와 딸을 마주하고는 “그 곱던 피부에 주름이많이 패었구려.”라며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 없이딸과 아들을 키운 아내와 아버지없이 힘든 생활을 견뎠을딸에게 연신 “미안하다.”며 어깨를 감쌌다. 안씨는 전쟁 막바지인 53년 인민군을 피해 황해도에서 서해 앞바다의 수니도로 아내 윤분희(75)씨와 함께 피란했다.당시 두 살이던 아들 희복(53)과 100일도 안돼 이름조차없던 딸(안복순·51)은 부모에게 맡기고 움막을 짓고 피란생활을 했다.그러나 인민군이 갑자기 섬으로 들이닥치는바람에 아내와도 생이별을 한 지 50년이 지났다.아들은 건강이 나빠 금강산에 오지 못했다. 부모·자식 상봉 ■“필순아 미안하다.” 51년 만에 딸(55)을 만난 오정동(吳鼎東·61)씨는 복받치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오씨는 어느덧 주름이 가득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헤어질 당시 세살배기의 잔상을 찾으려 애썼다.“고모를 많이닮았구나. 아니야 할아버지를 닮았어.”라고 혼자 되뇌이기를 여러번하다 끝내 끌어안고 울었다. 황해도 옹진이 고향인 오씨는 51년 1·4후퇴 때 동생 관동씨가 국군으로 참전해 전사하자 인민군의 보복이 두려워야반도주했다.“며칠만 숨어있다 돌아올 생각으로네 어머니와 너를 두고 떠났는데….”라며 울먹이던 오씨는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는 딸의 말에 고개를 떨구었다. ■남측 가족 가운데 최고령인 권지은(權志殷·88) 할머니는 막내 아들 이병립(62)씨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살아있어 고맙다.”는 말만 되뇌였다. 47년 5월 먼저 남쪽으로 간 남편 이석주(36년전 사망)씨를 찾아 3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온 권 할머니는 “너무 어려 나중에 데리고 올 생각으로 두고 온 일곱살짜리 막내아들이 눈에 밟혀 57년동안 죄책감 속에 살았다.”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아들 이씨도 노모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 ‘임실 호국용사묘지’ 준공식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李相薰)는 30일 오후 3시 전북임실군 강진면 백련리에서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를 비롯,향군 회원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실 호국용사묘지’ 준공식을 갖는다. 총 180여억원을 들여 10만6000여평에 조성된 임실 묘지는 납골묘 2만기와 납골당 3만기를 수용할 수 있다.참전용사를 비롯해 10년 이상 장기복무 제대군인,전몰 군·경,무공수훈자 등이 안장 대상이다. 김경운기자 kkwoon@
  • [월드컵 이야기] (13)터키

    터키 국민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광적인 수준이다.터키 국민 모두가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축구다.터키에서 프로축구팀이 처음 창설된 것은 52년전인 1950년.현재 전국적으로 200여개 프로팀이 등록돼 있어 거의 매일 경기가 열리고 있다.모든 국민이 ‘축구로 잠을 깨고,축구를보다가 잠을 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터키는 2002년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조 추첨 결과한국에서 예선전을 치르게 되자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체육·언론계 인사들은 터키가 브라질을 제외하곤 비교적 해볼 만한 상대인 코스타리카·중국과 함께 예선 C조에 배정돼 절호의 예선통과 기회를 잡았다며 흥분했다. 터키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54년 월드컵 이후 48년 만이다.터키는 당시 서독에 1대4로 패한 뒤 한국에 7대0으로 이겼으나 8강전에는 오르지 못했다. 터키의 명문 프로축구팀인 갈라타사라이는 99·2000 유럽축구연맹(UEFA)컵 대회에서 우승,터키의 뛰어난 축구 실력을과시했다.터키 대표팀은 갈라타사라이,페나르바흐체,베식타시등 명문 프로팀 소속 선수들로 구성됐다.터키는 오는 6월3일 브라질과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9일 코스타리카,13일 중국과 각각 예선전을 치른다.터키 대표팀은 현재 최소한 8강전에는 오른다는 목표 아래 마무리 맹훈련을 펼치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터키대표팀이 전통적인 우방국가인 한국에서 예선전을 치르게 된 것은 행운이라며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터키와 한국은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 이후 혈맹의 우방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터키군은 6·25전쟁에서 740명이 전사하고 2100명이 부상하는 등 참전 16개국 가운데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봤다.터키 전몰 장병들은 부산 유엔묘지에 잠들어 있다. 터키 국민들은 이렇듯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는 한국에서 경기를 할 때 한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응원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터키 국민들은 대부분 TV를 통해 이번 월드컵 경기를 관전할 것이다.이때 한국인들의 응원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된다면 양국의 우호관계는 더욱 증진될 것이다.터키 국민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우리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부탁드린다. 김영기 대사
  • 佛대선/ 프랑스 좌파 참패‘좌우동거’ 전통 흔들

    ■佛대선 르펜 돌풍 파장 ‘극우파 승리’로 끝난 21일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회당은 33년만에 최대의 위기에 처했고 프랑스 정계의지각변동이 불가피해졌다.대외적으로도 지난해부터 유럽에 불기 시작한 우경화 바람이 가속화돼 유럽 통합과정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좌파 참패 ‘안돼(NO!)’,‘지각변동’ 22일자 프랑스 좌파지 리베라시옹과 보수지 르 피가로·르 몽드의 1면 제목들이다. 조스팽은 현직 총리라는 이점에도 불구,득표율이 16.07%에 그쳐 사회당 후보로는 1차투표 최저 득표라는 불명예를 안았다.사상 최고의 경제성장률과 최저 실업률이라는 집권중 경제 성과를 활용도 못해보고 패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의 차별화 실패와 좌파 후보 난립,극좌파 부상,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 반발,개인적 이미지 등이 패인으로 꼽힌다. 1차투표 결과는 단순히 사회당의 실패가 아닌 좌파의 참패를 의미한다.좌파 연정에 참여한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후보들 득표율은 합쳐봐야 24.75%에 불과하다.공산당은 득표율이 3.41%로 역대 최저를 기록,존립기반마저 위협받고있다. 반면 극우파는 르펜(17.02%)과 브뤼노 메그레(2.36%)의득표율이 20%에 이른다.범죄와 이민정책,세계화와 유럽통합에 밀려난 국수주의 공략이 성공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르펜 돌풍이 2차 투표까지 이어지진 않을 것으로 본다.1차 투표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도 시라크가 80%의 압도적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2차 투표 결과와 관계없이 르펜의 급부상은 기존정치체제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평가다. ▲정계 지각변동 정치분석가들은 이번 선거결과가 좌우파의 역학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정치적 지각변동’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5년간 불안하게 유지돼왔던 좌우동거 정부도 막을내리게 됐다. 사회당은 조스팽 총리의 사임으로 지도자 부재상태에서 6월 총선을 치르게 됐다.대선 참패로 중도우파에 집권당을 내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번 선거의 반작용으로 시라크 등 우파가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선거 파장은 정계개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전통적으로정치성향이 좌우파로 양분된 프랑스 유권자들은 좌파 후보의 부재로 공민권을 박탈당했다며 이번 선거의 합법성에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극단적으로 새로운 정치체제의도입마저 거론되고 있다. ▲유럽 우경화 가속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파가 부상하면서 유럽의 우경화가 가속화할 전망이다. 지난해 이탈리아 총선에서 우파인 실비아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승리를 시작으로 지난해 말 덴마크,지난달 포르투갈선거에서도 모두 우파가 승리했다.올해 총선이 실시되는네덜란드(5월),프랑스,독일(9월)에서도 ‘우파 바람’이거셀 것으로 예상된다.사이먼 머피 유럽연합의 영국 노동당 지도자는 “프랑스 대선 결과에 유럽은 전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균미기자 kmkim@ ■르펜은 누구-유럽통합·이민 반대 인종차별주의자 장 마리 르펜 국민전선(FN) 당수는 국수주의를 바탕으로반(反)이민을 내세우는 인종차별주의자. 이민자들의 높은 범죄가 프랑스의 치안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주장,최근 급증한 강력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과이민에 대한 반감을 자극해 2차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선투표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승리가 확실시되지만 1차 투표 통과 자체만으로도 르펜으로선 큰 승리다.유럽통합에 대한 반대 및 사형제 부활 등 그가 주장해온 극우노선에 대한 일정 부분의 지지를 확인한 때문이다.그의 급부상은 최근 서유럽에 나타나고 있는 우파 쪽으로의 편향과 겹쳐져 유럽 통합 움직임에 타격을 가하지 않겠느냐는우려까지 부르고 있다. 파리 법과대학 재학 당시 3년간 극우학생단체인 ‘라 코르포’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1954년과 1957년에는 인도차이나전쟁과 알제리 사태에 참전하기도 했다.1965년 극우정치인 장 루이 틱시에르-비나쿠르의 선거운동을 도왔으며 1972년 FN을 창설,극우지도자로 발을 내디뎠다. 처음 대통령에 도전했던 1974년 0.74% 득표라는 참패를맛보았던 그는 그러나 1984년 14%,1995년에는 15%의 득표율을 기록,확고부동한 극우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그러나 1998년 후계자로 거론되던 브뤼노 메그레가 FN을 이탈해 공화국운동연합(MNR)을 만들며 큰 타격을 받아 지지율이 급락했다. 하지만 지난해 9·11 테러 이후 급증한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교묘히 파고들어 1차투표를 한 달 앞둔 시점부터 지지율이 급등하기 시작,마침내 유럽과 전세계에 충격을 던진 대격변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유세진기자 yujin@
  • 佛대선 ‘극우’ 르펭 돌풍

    ‘빅 투’(Big two)의 2차 결선투표 진출이냐,아니면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 마리 르펭(73) 당수의 결선투표 진출이냐?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간 양자대결로치러질 것으로 예상됐던 프랑스 대통령선거 1차투표(21일)를 앞두고 막판 인기가 급상승한 르펭의 결선투표(5월5일) 진출 가능성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현재 1차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 1차 투표 상위득표 2후보가 벌이는 결선투표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번 프랑스 대선 1차투표는 여러 면에서 전례없는 선거가 될 전망이다.역대 최다인 16명의 후보가 18일 막바지유세를 펼쳤지만 여전히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는 데는 실패,투표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또 주류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로 군소후보의 약진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좌우 진영의 선두주자 조스팽 총리와 시라크 대통령이 선거운동 기간 내내 “혐오스러운 2인조”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하면서 군소후보들의 입지가 커졌다. 이 틈을 르펭 후보가 파고들며 막판 활약을 보이고 있다.15일 발표된 여론조사는 르펭 후보가 1차투표에서 14%의지지율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지난 2월까지만 해도 르펭의 지지율은 9%대에 머물렀다. 후보자 중 최고령인 르펭은 노골적인 극우파로 인도차이나반도,알제리전쟁 참전용사 등 고정 지지자를 확보하고있다.지난 1988·95년 선거에서도 15%의 지지를 얻었다. 외국인 이민 반대,사형제 부활 등 극우 민족주의적인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심리를 자극해 왔으나 최근 범죄 증가,프랑스의 대외영향력 감소 문제에 초점을 맞춘 전략이 주효해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시라크와 조스팽의 지지율은 각각 18.5%와 17%로 아직은르펭을 앞서고 있다.그러나 르펭이 다른 극우파 후보들의표를 끌어올 경우 조스팽을 따돌리고 결선투표 진출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라크·조스팽의 결선대결에 더 무게를두는 분위기다.전문가들은 두 사람간 결선이 치러질 경우시라크의 승산을 더 높게 보고 있다.우파에서는 르펭을 제외한 후보 대부분이 시라크에 동조하고 있는 반면 좌파에서는 조스팽이 다른 군소후보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상숙기자 alex@
  • 국제민주연대 ‘평화문화제’ 6월 개최

    베트남전을 둘러싼 과거청산 운동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등 인권유린을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전용사 단체는 이에 대해 “국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군인들을 모독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권단체인 국제민주연대가 베트남전 참전군인과 베트남인 피해자 등이 고루 참여하는 평화운동을 마련해 관심을 모은다. 국제민주연대는 어느 한쪽의 사죄를 요구하기 보다,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아픈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양국 사람들이 평화운동을 펼치려는 것이다. 국제민주연대는 우선 의료자원봉사 단체인 베트남 평화의료연대와 함께 오는 6월29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평화문화제’를 개최한다. 행사에는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피해 및 전쟁참상을담은 작품을 발표해 온 다큐멘터리 감독,문인,전쟁 피해자,어린이 등 베트남 현지인 10여명과 한국에 있는 베트남노동자,베트남전 참전군인 및 시민들이 참여할 예정이다.또 베트남 현지에 평화역사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할계획이다.베트남전 희생자들에게 민간차원에서 한국인들의 사과의 마음을 전달한다는 의미다.국제민주연대는 그동안 ‘평화의 벽돌쌓기 운동’을 펼치며 역사관 건립 기금을모아 왔다. 고엽제 후유증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참전군인들의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온 국제민주연대는 이밖에 성공회대와 공동으로 베트남전 교육용CD를 제작해 5월부터 학교에 배포한다. 이 단체 최재훈 사무국장은 “참전군인과 희생된 베트남민간인들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라면서 “우리가 준비하는 일련의 사업이 양국 국민 사이의 앙금을 털어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원로가수 현인씨 별세

    ‘신라의 달밤’‘비내리는 고모령’‘굳세어라 금순아’등을 부른 원로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씨가 지난 13일 오후 9시45분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서울중앙병원에서별세했다.83세. 현씨는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현 도쿄예대)를 마치고 1940년대 초 일본과 중국 상하이(上海)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후 귀국,1000여곡의 노래를 남겼다.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미정(72)씨와 아들 재헌씨 등 1남3녀가 있다.빈소는 서울중앙병원 영안실,장례는 16일 오전 10시 한국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진다.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이었던그의 빈소에는 최고령 원로가수인 신카나리아(90)씨를 비롯해 박호 연예협회 명예이사장,원로가수 안다성 신세영은방울자매 오기택씨,원로희극인 구봉서씨,작곡가 하기송씨,종군참전연예인협회 석현 회장,한국연예협회 남진 이사장,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김광진 위원장,남성듀엣도시아이들의 박일서씨 등 문상객이 줄을 이었다.(02)3010-2270. 이송하기자 song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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