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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 한국전쟁 참전용사 60주년 기념 울산 방문

    울산시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터키 코자엘리시의 참전용사들을 29일 초청했다. 울산시에 따르면 코자엘리에 거주하는 참전용사 이스마일 아티만(81), 압둘라 탄리쿨루(81), 무스타파 산(78) 등 3명과 인솔 공무원 등 총 6명을 초청했다. 이들은 오는 7월2일까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산업시설과 대왕암공원, 부산 유엔기념공원, 경주유적지 등을 관광할 예정이다. 시는 이들에게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 자유는 귀하의 희생과 헌신 위에 이루어졌다.”는 내용의 감사패와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다. 시는 2002년 터키 코자엘리시와 자매결연해 다양한 교류사업을 펴고 있고, 지난해 6월 시 대표단이 방문했을 때 참전용사 초청의사를 전달했다. 한편 터키는 한국전쟁에 여단급 규모인 육군 1만 4936명을 파병해 전사·사망 741명, 부상 2068명, 실종 163명, 포로 24명 등 3216명이 피해를 입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여론을 잘 반영하는 기사 보고싶어/유명진 이화여대 불문과 4년

    [옴부즈맨 칼럼] 여론을 잘 반영하는 기사 보고싶어/유명진 이화여대 불문과 4년

    2010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화두는 단연 부부젤라가 아닐까 싶다. 일정한 박자나 리듬 없이 수많은 부부젤라가 모여서 내는 굉장한 소음은 경기를 시청하는 전 세계의 축구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사실 이러한 ‘소음’이 우리 사회에도 있다. 질서 없이 밀려 들어오는 수많은 여론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부부젤라의 웅웅대는 소리처럼,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면 이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문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뜨거운 여론의 이면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부젤라의 시끄러운 소음을 단순하게 축소하거나 삭제해 버리는 태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부부젤라를 불면서 응원을 하는 남아공 사람들의 열정이나, 그들의 정서를 먼저 읽어서 전달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시간이 제한된 방송 뉴스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세세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문의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문 기사를 읽다 보면, 정말 기사에서 여론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사건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 이면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건을 겪어 낸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목소리는 어떠한지가 궁금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신문이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다양한 면에서 기획·보도한 한국전쟁 관련 기사는 의미가 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것은 시대적·역사적으로 너무나 먼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시의성이나 현장감 묘사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어낸 많은 인물들을 취재하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녹여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기사였다. 한국 전쟁에 관련된 러시아·중국·일본 학자들의 글은 역사적 사실을 좀더 세계적인 눈에서 조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도 ‘푸른 눈 노병 세 번 울었다’ 기사에서 볼 수 있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이야기, ‘금순 할머니들의 특별한 6·25’의 실향민 ‘금순 할머니’들의 모습, ‘부산항 목숨 걸고 지켰지만 아무도 기억 못 해’에서 읽을 수 있는 참전군인들의 실감나는 전쟁 경험담,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에서 다룬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장의 목소리까지, 전쟁을 겪어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서울신문은 전쟁이라는 소용돌이를 겪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담아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던 젊은 학생, 군인, 실향민이나 참전 군인들의 가족들이 생각하는 전쟁의 의미까지 귀 기울여 들어봐도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조금 더 현 시대를 직시할 수 있는 기사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현 시점의 이슈를 다루는 데에도 다양한 취재원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서울신문은 23일, 세종시 수정안 부결 기사를 통해 수정안이 부결된 이유를 분석하고, 기업과 학교·정치계의 목소리를 두루 실었다. 1면 ‘갈팡질팡 세종시 모두가 패자였다’라는 기사를 통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2·3면에 기업이나 대학, 여당·야당의 의견을 담았다.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냈지만 실상 지역 주민들이 어떤 점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정안이 부결된 시점에서 지역 주민들의 감정이나, 세종시 대상 지역의 분위기에 대한 것도 궁금하다. 부부젤라의 소음처럼 많은 이해관계가 연결돼 있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건, 사고를 전달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넓게 보면 모두 비슷비슷한 목소리로 보이겠지만, 그 개개인의 사연과 표정을 읽어 보면 각자의 사연과 목소리가 있다. 그 깊은 정서를 끌어내는 것이 기사를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서울신문이 더 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 주기를 바란다.
  •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한 주목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승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다. 북한군대가 남한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지 않다. 남한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과 합의한 38도선 파기를 소련이 주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공산군에 편입된 이른바 한인 3개사단을 1950년 1월까지 중국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보장받는다.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제기한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는 38선을 지킬 명분과 능력을 미국 스스로 없애고 있다.” “왜 우리가 38선에 얽매여야 하는가.”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 극동방위선 발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는 미국 불개입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김일성 동지의 불쾌감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남행동에 대해 “언제고 만나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이 전문이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문건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남침조건, 전쟁지원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미군개입의 철저한 평가, 중국의 남침승인, 소련의 직접 참전에 대한 기대 포기 및 철저한 전쟁준비이다. 5월 중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승인을 알리면서 마오의 승인을 얻는다. 미군 개입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는 데 합의한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북한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할 시 조약을 발효시킬 것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중국은 소련에 더욱 의존할 것이며 미국은 국력의 손실로 세계적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하게 이동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1950년 1월과 7월사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의 불참은 계획된 것이었다. 미국이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는 1950년 8월 체코 대통령 고트아트에 보낸 비밀전문에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부대 명칭을 중국인민 “지원군”으로 제시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한·만 국경지역에 한정하는 등 중·소동맹조약의 의무가 발동돼 미군과 군사분쟁에 들 수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만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르지만 개전시기를 소련 군사고문단이 주장한 7월서 6월로 앞당긴다. 개전계획도 옹진반도의 진격에 의한 단계적 확전에서 비밀누설 위험 때문에 전 전선 공세계획으로 바꾼다. 중국은 10월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간곡한 파병요청을 받으면서 참전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국원의 반대와 소련 공군력 지원이 불분명해지자 그 결정을 스탈린에 알리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협상사절로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을 재차 거부함을 알리면서 동북지역으로 조속히 퇴각할 것을 지시한다. 10월8일 미군이 북진하고 유엔이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설립을 결정하자 마오쩌둥은 서둘러 파병명령을 내리지만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에 장악될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만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중국군은 사실상 한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노력을 저지시켰다. 6·25전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산블록의 세력확장 기도에 적절한 억제책을 적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6·25는 억제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의 부재 때문에 발발했다. 휴전이후 한·미동맹과 주한 미군의 역할, 남북한 군사력 균형 및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억제의 취약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 억제를 넘어 한반도에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평화통일은 한국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경찰 6·25 전투사 펴낸다

    경찰청은 25일 한국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경찰관의 숭고한 혼을 기리기 위해 ‘경찰 전투사’를 발간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은 각 전선에 지휘소를 두고 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해 9848명이 전사하고 7158명이 실종되는 등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경찰의 전투사는 2003년 참전경찰유공자회에서 펴낸 적이 있지만, 그동안 경찰이 자체적으로 조사·연구를 거쳐 전투상황을 상세히 정리한 역사서는 없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시민단체와 학계, 경찰 관련 단체 등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호국경찰 선양위원회’(가칭)를 구성해 올해 안으로 경찰 전투 자료를 수집해 전투사를 발간할 계획이다. 한편 강희락 경찰청장은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 지역을 답사하고, 전적기념관과 충혼탑을 찾아 참배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워싱턴서도 기념식… 한·미동맹 강조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미국 수도 워싱턴은 한국전쟁 추모에 잠겼다. 미 국방부와 의회는 24일 오전 펜타곤 청사와 의회에서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기념식을 갖고 한국전 참전의 의미를 되새겼다. 미 행정부 공식 행사인 국방부 기념식에는 조지프 웨스트팔 육군성 차관과 한덕수 주미대사, 찰스 랭글 하원의원과 참전용사 등이 참석했다. 웨스트팔 차관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용기를 바탕으로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아시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세계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면서 “한국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고 소중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한·미동맹을 강조했다. 연달아 미 의회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상·하원 지도부가 총출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의사당내 유서 깊은 장소인 스테튜어리 홀에서 거행된 행사에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비롯, 하원의 스테니 호이어(민주), 존 베이너(공화) 원내대표와 상원의 해리 리드(민주), 미치 매코넬(공화) 원내대표가 모두 참석했다. 미 의회의 지도부가 한국 관련 행사에 참석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하원 의장과 상·하원 양당 원내대표 5명이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다른 행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세계 속 행사로

    ‘한국전쟁 60주년’ 세계 속 행사로

    6·25전쟁 60주년 행사가 노병들의 전역식부터 해외 참전국 용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까지 세계 속의 행사로 진행됐다. “충성! 6·25 참전용사 소령 전인식(82) 등 26명은 2010년 6월25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1951년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창설된 ‘백골병단’의 생존 용사들 중 26명이 59년만에 전역 신고를 했다. 6·25 60주년을 맞아 육군이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마련한 전역식에서다. 당시 이들은 임시계급을 부여받고 전투에 참전했지만 급박한 전황과 부대 사정으로 전역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20대의 청년에서 80대의 노병으로 돌아왔지만, 꿈에도 그리던 전역신고에서 노 병사들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주먹밥’을 통해 6·25를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전쟁 당시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우리 군과 유엔군은 주먹밥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운반해 배고픈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행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이상의 합참의장,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 조지 필 미 8군사령관 등 한·미 군 지휘부가 함께했다. 특히 유엔군으로 참전한 21개국의 주한 무관들도 주먹밥 먹기 행사에 참가했다. 전쟁기념관 중앙로비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6·25전쟁 당시 노무부대(일명 A부대)가 전투 장소까지 운반했던 주먹밥과 고구마, 감자, 쑥떡 등 전쟁 때의 음식을 함께 준비했다. 군수물자도 모자라던 당시 그릇 대신 탄약통에 주먹밥을 담아 지게로 산 위로 날랐던 상황도 함께 설명했다. 또 전쟁 때 사용된 105㎜ 포탄 탄피에 된장국을 담아 행사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6·25전쟁 60주년 행사는 해외에서도 잇따라 열렸다. 공군은 미국 공군박물관의 ‘6·25전쟁 특별전’ 개관식에 참석하고 미 참전용사들의 헌신적인 희생에 감사를 표시했다. 미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개관하는 이 박물관에 전쟁 당시의 작전일지와 F-51 비행수료증 등 유물 13점과 미 공군 참전사진 400여점 등을 기증했다. 개관식에 참석한 박종헌 공군 교육사령관은 데이턴 시내의 6·25전쟁 기념공원에서 7000여명의 시민들에게 “낯선 나라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장렬하게 산화한 공군 장병 7084명과 368명의 부상자, 53명의 실종자, 220명의 포로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면서 미 공군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를 전했다. 영국에서도 행사가 마련됐다. 주영 한국대사관은 런던 세인트폴 성당과 템스강변의 런던시청 앞에 정박돼 있는 군함 ‘벨파스트함’에서 6·25전쟁 6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기념식에는 추규호 주영 한국대사와 한국전에 참전했던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영국의 한국전 참전용사회(BKVA) 고문 피터 다운로드 등이 참석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섹션TV’, 6.25특집 ‘코레 아일라’로 대체편성

    ‘섹션TV’, 6.25특집 ‘코레 아일라’로 대체편성

    지난 25일 MBC ‘섹션TV 연예통신’ 방송이 결방됐다. 매주 금요일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MBC 연예정보프로그램 ‘섹션TV 연예통신’은 MBC 현대사 연속기획 6.25특집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로 대체 편성됐다.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는 MBC에서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준비한 현대사 특집극. UN군의 일원으로 6.25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와 전쟁고아인 5살 한국소녀 아일라 사이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코레 아일라’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나서는 터키군 장교의 감동적인 과정이 방송돼 호평을 받았다. 사진 = MBC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美 행정부·의회 한국전쟁 60주년 행사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24일(현지시간) 기념행사를 갖고 한국전쟁의 의미를 기리고 한·미동맹 강화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미 국방부는 이날 오전 9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펜타곤 내부 광장에서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상·하원 의원들과 참전용사, 미 국방부 및 정부 인사 등이 참석한 이 행사는 미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첫 한국전 기념행사다.  국방부 관계자는 “미 행정부가 한국전 60주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정부 차원의 한국전 기념행사가 없었지만 60주년이기 때문에 특별히 청사에서 공식행사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미 의회도 상·하원 합동으로 이날 오전 11시부터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환영인사를 하고, 상원 민주당 대표 해리 리드, 공화당 원내 대표 미치 매코넬 의원,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스테니 호이어, 공화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 등 상·하원 지도부가 모두 참석해 환영연설을 했다. 찰스 랭글, 하워드 코블, 존 콘이어 하원의원, 알렌 스텍터 상원의원 등 한국전쟁 참전 의원들이 참석했다. 이어 한국전쟁 발발일인 25일에는 주미한국대사관 주최로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에서 미 정부 관계자와 미군 전쟁포로 송환자, 참전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식을 가질 예정이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 名著]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전후 세대들에게 한국전쟁은 낡은 흑백사진이다. 호화찬란하지도, 역동적이지도, 극적 반전도 없는 재미없는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는 뉴스는 듣지 못했다. 이 모든 얘기들이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쟁쟁한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가 출판되기 전의 얘기다.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은 이 책에 대해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정의했다. 부연한다면 미국인의 눈으로 본 걸작 한국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보다 흥미가 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을 확실하게 불식시켜 준다. 방대한 문헌과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을 정공법으로 조명하면서도 소설처럼 읽는 재미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책은 200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으며,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됐다. 4만 8000원이라는 가격보다 1082쪽이라는 분량 때문에 지레 질릴 수도 있다. 잠깐의 망설임만 극복하면 일사천리로 읽힌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전투와 작전묘사는 숨이 막힐 듯 생생하고, 전쟁의 막후에서 벌어지는 정치인, 고급 군인들의 권력투쟁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다. 60년 전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된 국제정세가 60년이 지난 지금과 판박이라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실감 난다. 학자들은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치다. 흥미 위주의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된 이유는 막강 화력의 미군이 중국 해방군에게 처절하게 패했을 뿐 아니라, 참전자들의 인간 스토리가 별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돌아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핼버스탬은 이 책의 출판을 30년 동안 구상했고, 10년 동안 집필했다. 참전용사들을 찾아 미국 구석구석을 뒤졌다. 책의 진가는 인터뷰 대상자 목록에서 나타난다. 그가 인터뷰했다고 이름을 밝힌 사람은 모두 130명이다. 이 중에는 알렉산더 헤이그 전 국무장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명예교수 등 유명인사도 있다. 대부분은 최전선에서 싸운 초급 장교이거나 사병들이었다. 저자는 후기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의 변두리에 사는 폴 맥기를 특별히 소개했다. 그는 지평리 전투 당시 소대장이었다. 저자는 “맥기는 55년 동안 내가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 같았다.”고 했다. “일반대중이 얼마나 고귀한 이야깃거리를 가슴속에 숨겨두고 있는지 알았고, 그들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을 기획하고 연출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공산 지도자는 물론 옛 소련 적군 소령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에서의 행적, 대륙에서 쫓겨난 장제스 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책은 중국군과의 첫 교전으로 시작해 미국의 참전 배경으로 옮겨간다. 세계 최강의 부대 미군이 중국군에 얼마나, 어떻게 호되게 당했는지 낱낱이 알려준다. 미국인답게 워싱턴 내부 정가와 군부의 이야기가 압권이다. 한국전에서 동고동락한 맥아더, 리지웨이, 알몬드 등 세 장군의 애증 관계가 저자 특유의 저널리즘적인 서술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갈등과 알력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만 알려진 맥아더의 야망에 대한 분석은 새롭다. 족보까지 파헤치면서 맥아더의 허상을 밝혔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한반도에는 100년 만에 닥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책제목은 하복차림으로 투입된 미군들이 중국군이나 인민군보다 ‘동장군’ 때문에 고생했다는 데서 따왔다. 50년 동안 21권의 저서를 남긴 핼버스탬은 베트남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의 이야기를 주로 썼다. ‘최고의 인재’는 베트남전쟁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한 권이다. ‘콜디스트 윈터-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는 유작이다. 저자는 2007년 봄 마지막 퇴고작업을 마무리한 닷새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미식축구에 관한 새로운 책을 준비하려고 캘리포니아로 가던 길이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월드컵 新풍속도] 老兵들도 길거리 응원

    우리나라와 아르헨티나가 맞붙은 지난 17일. 젊은이들로 가득찬 서울 반포시민공원 한쪽에 백발의 노병(兵)들이 자리했다. 붉은색의 응원복 대신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었다. 이들은 다리가 불편한 옛 전우의 느린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렁차지는 않아도, 강단 있는 목소리로 “대~한민국”구호를 목놓아 외쳤다. 정확한 박자는 아니어도,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짝짝~ 박수도 쳤다. 젊은이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뜨거운 응원과 대한민국의 선전이 누구보다 즐거웠던 이들, 바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다. 1950년 6·25때 수병으로 참전했던 김승봉 옹(80)은 전쟁 때 다친 다리가 덧나 절뚝이는 옛 전우 손경우(80)옹을 부축하고 회원 8명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나이리지아전은 손옹이 입원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함께했다. 그는 “2002년과 2006년엔 집에서 경기를 지켜봤다.”면서 “천안함에, 정치에, 분열된 남과 북의 요즘 현실이 가슴 아파 젊은이들에게 화합의 메시지를 주고 싶어 전우들과 함께 응원을 나왔다.”고 말했다. 월드컵이 ‘노병’들을 일깨우고 있다. 2002년과 2006년, 무심히 축구경기를 지켜봤던 6·25와 베트남 전쟁 등 참전용사들이 이번 월드컵에는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고령의 나이도, 이른 새벽시간도 개의치 않은 채 응원전에 ‘충성’중이다. 전문가들은 천안함 사태와 6·25를 통해 촉발된 사회적 관심이 국가대항 성격을 띤 스포츠 행사로까지 확산됐다고 분석했다. 또 이들이 월드컵을 계기로 분열된 사회분위기를 하나로 모으고, ‘소통과 화합, 통일’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사회 안팎에 전하려는 것으로 평가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참전용사의 경우 경기 자체를 즐기는 젊은 층과 달리 국제적 스포츠 행사에서의 승리를 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서 “천안함과 6·25 등으로 동기를 부여받아 사회안팎에 ‘통일’과 ‘화합’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맹호부대 소속으로 1969년 월남전에 참전했던 월남전 참전용사 전우회원들도 23일 모여 응원전에 나섰다. 13명의 강서지구 회원들은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 등 전적지 순례를 마치고 강서구 일대에 모여 새벽 응원전을 펼쳤다. 이상호(63) 월남참전용사 전우회 강서지부장은 “거리응원에 나선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단합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싶어 나왔다.”고 말했다. 해외 참전용사도 가세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파란 눈의 노신사 등 300여명의 해외 참전용사들도 거리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힘을 북돋웠다. 응원에 참가한 미국인 멀리 제이 피터슨(79)은 “한국전에 참전한 지 벌써 60년이 흘렀는데 아직 분단된 한국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면서 “다음 월드컵엔 꼭 두 팀이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병상에서 참전용사 전우들과 월드컵을 응원한 손경우옹은 “빨리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이 하나로 뛰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25일 TV 하이라이트]

    ●한국전쟁 <정전>(KBS1 오후 10시) 자그마치 1년4개월을 끈 포로 협상.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미국에 의해 계획됐으나 불발된 에버레디 계획(이승만 제거 계획). 남과 북 어느 쪽으로도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제3국행을 택한 88명의 포로들. 그리고 북한에 억류돼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5만여명의 한국군 포로들의 삶을조명해 본다. ●VJ특공대(KBS2 오후 9시55분) 한국 축구 16강 진출, 월드컵 속 기회를 잡아라. 월드컵 열풍에 그라운드 밖에서는 대박 행진이 펼쳐진다. 편의점 하루 매출이 3000만원, 남아공 월드컵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아프리카 용품 전문점까지 4년 만에 찾아온 월드컵.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휴먼다큐멘터리 사랑 아빠의 집으로(MBC 오후 10시55분) 경남 산청 읍내에서도 외길로 30분을 더 들어가는 산골마을에서 단둘이 사는 친할머니와 손녀 가은이. 막 다섯 살이 되던 해 아빠의 이혼으로 가은이가 할머니 집에 맡겨진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하지만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돼 버린 두 사람에게는 예정된 이별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는데…. ●귀농프로젝트 농비어천가(SBS 오후 6시30분) 오이 농사에 도전하게 된 형석. 대망의 오이농사 첫날 비료 뿌리기에 도전한다. 유연한 몸짓을 자랑하며 뿌리기에 나선 형석과 진탁. 반면 준원은 특이한 몸짓으로 형석의 오이 밭을 휘젓고 다닌다. 피곤해도 잠 못들고 뒤척이는 진탁의 고민. 늦은 밤 이장님을 찾아 갈 수밖에 없었던 진탁의 속사정을 공개한다. ●스크린 한국어(EBS 오후 1시40분) 지난 시간에 이어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의 명장면을 보고 일상생활에서 쓰일 수 있는 한국어 표현을 익힌다. 영화 속 장면을 ‘뉴스’로 다시 보는 시간. 이번 시간에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 계속’이라는 내용으로 뉴스나 신문 기사에 자주 사용되는 어려운 말들을 율리아와 함께 배워 본다. ●명불허전(OBS 오후 10시)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해 잊혀져 가는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4성 장군 백선엽 장군을 초대해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다. 백 장군은 긴박하고 참혹했던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6·25전쟁의 의미와 참전 용사의 희생을 후대들이 기억해 줄 것을 당부한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 바뀔 수도 있습니다. KBS 02-781-1800 MBC 02-780-0015 SBS 02-2113-3190 OBS 032-670-5000 EBS 02-526-2000 서울신문STV 02-777-6466
  • 한국전쟁 60주년, 방송사별 특집편성

    한국전쟁 60주년, 방송사별 특집편성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기념일이다. 우리 민족 질곡의 역사와 전쟁의 참상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각 방송사마다 기념일 특집 준비에 열심이다. MBC는 이날 오후 1시40분 현대사 특집극 ‘노근리는 살아 있다’ 1부와 2부를 연속 방송한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5일부터 닷새간 충북 영동군 노근리 일대에서 발생했던 미군의 양민 살상 사건이다. 제작진은 노근리 사건의 진상과 피해 생존자들의 지난했던 삶, 어려웠던 진상규명 운동 과정을 조명한다. 오후 9시55분에는 ‘코레 아일라(Ayla)’를 마련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와 전쟁 고아인 다섯 살 한국 소녀 ‘아일라’ 사이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려진다.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 가지고 소녀를 찾아나서는 외국 군인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SBS는 오후 8시40분 ‘소련으로 끌려간 국군 포로-그 이송설의 진실’을 방송한다. 제작진은 6개월에 걸친 취재를 통해 국군 포로 2만여명이 소련에 이송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국군 포로 이송 지역으로 지목된 현장을 취재하고, 같은 시기 강제 노동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북한 정치범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군포로의 행적을 추적한다. 아리랑TV의 아리랑 투데이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특집 방송을 준비했다. 오전 7시 1부에서는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이란 주제로 ‘민·관·군 한마음 625㎞ 이어달리기 행사’를 소개한다. 이 행사 3만여명의 참가자들은 호국영령 추모행사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풍선 625개를 날리고 DMZ 박물관에서 참전용사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 오전 11시에 방송되는 2부 ‘한국전쟁 또 하나의 얼굴, 소년 학도병’에서는 학도병들의 활약상이 전시돼 있는 경북 포항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서 그들의 희생을 되새긴다. tvN은 특집 다큐멘터리 ‘625인의 6·25’를 오전 11시에 방송한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와 실향민, 유엔 참전 군인들을 직접 만나 전쟁에 대한 기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잔혹함과 분단의 아픔 등을 전할 예정이다. 딱딱한 다큐멘터리보다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느끼고 싶다면 채널 CGV를 참고하면 좋겠다. CGV는 전쟁의 아픔을 담은 영화들을 방영한다. 오후 3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시작으로 오후 5시30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볼 수 있다. 오후 9시에는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밤 12시30분에는 나이지리아 내전을 소재로 한 ‘태양의 눈물’이 준비돼 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외세개입으로 무력통일 불가능 증명”

    [국내 학자가 본 한국전쟁] “외세개입으로 무력통일 불가능 증명”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남다른 식견 때문에 설화에 휘말린 적이 많았는데,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한국 역사에서는 세 번의 통일전쟁이 있었는데, 삼국통일전쟁과 후삼국통일전쟁 그리고 6·25전쟁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으로만 여겨온 6·25전쟁에 통일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재향군인회 회원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항의에 직면해야 했다. 독일의 전쟁사가 클라우제비츠가 설파한 것처럼 모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인 것이 분명하다. 전쟁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6·25전쟁의 목적이 통일에 있었다는 해석이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전쟁 발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남북의 지도자들은 모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1949년에 들어서자 공공연히 ‘국토완정=공산화 통일’을 주장했다. 결국 6·25전쟁의 방아쇠를 먼저 당긴 것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설득에 성공한 김일성이었다. 남한 지도자들의 북진통일 주장은 인민군의 기습남침으로 빛이 바래 버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에 나선 국군은 38선의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해 자유의 깃발을 꽂으려 했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형태는 다르지만, 전쟁을 통해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보는 것은 행위자들의 주관적 의도만을 고려한 역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행위자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전혀 다른 길로 전개되는 과정과 그 결과도 함께 고려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전쟁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3년여에 걸쳐 폭력과 학살의 광기에 지배된 전쟁은 엄청난 인명의 손실을 초래했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물적 자원과 생산력도 파괴했다. 전쟁은 남북대립 및 좌우대립을 통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몰고 갔다. ‘미제와 그 주구에 대한 적개심’ 및 ‘공산당에 대한 반감’은 극한적으로 증폭되고 내재화되었다. 전쟁은 남북화해와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를 놓고 보면 6·25전쟁을 통일전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한 역사인식이며,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전쟁이 통일이 아니라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6·25전쟁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다.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여건상 전쟁으로 어느 한 편을 말살하여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각축하는 전략적 요충지,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이 각축하는 열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북한이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은 신속히 참전해서 공산화 통일을 저지했고,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자 중국은 신중국의 운명을 걸고 인해전술로 맞서 자유통일을 막았다. 6·25전쟁은 무력을 통해 한반도 전체에 통일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나 반대로 통일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불가능했음을 극명하게 증명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 체제로 통일될 뻔했고, 그 중반에는 반대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 통일될 뻔했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가 그 적대 세력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반대하는 외세의 개입으로 남북의 무력통일 기도는 모두 실패하고 도로 분단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상충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원인이 되어 분단된 한반도 지역에서, 적어도 195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분단국가의 어느 한 쪽 세력이 주도해 한반도 전체를 무력으로 통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바로 6·25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병사의 불안한 초상·편지·유품… 전쟁 흔적 그대로

    병사의 불안한 초상·편지·유품… 전쟁 흔적 그대로

    “처음에는 새까맣고 다부진 군인들을 떠올리고 초상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특전사에서도 해병대에서도 그런 군인은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 얼굴이 하얗고 단정한 용모의 사병들을 만났죠.”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진작가 10명이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6·25전쟁의 심리적 지도를 그린 ‘경계에서’전을 8월20일까지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연다. 20여년간 인물 사진을 찍으며 아줌마, 소녀 등의 얼굴에서 불안을 포착했던 사진작가 오형근(47)은 24일 “병사의 초상을 통해 얼굴에 스민 불안, 외로움, 고립감을 잡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부가 하얗고 연예인을 능가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병사들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알고 보니 요즘은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자외선 차단제를 지급한단다. 오형근은 결국 파란 하늘, 하얀 벚꽃 아래서 용맹스러운 군견과 함께 병사의 초상을 찍어 흰 얼굴에 담긴 ‘미열 같은 불안감’을 포착했다. 구본창(57)은 특유의 명상적 시선으로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유물인 전투화, 수통, 혁대, 안경, 단도, 포탄, 탄환 등을 찍었다. 무엇보다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1953년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김종섭 하사가 전쟁터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사진이다. 김 하사는 당시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참전했다. 아직도 고운 모습인 101살의 어머니 박외연씨는 곱게 보관한 편지를 내밀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여전히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믿는 어머니의 모습과 죽은 아들이 부친 편지 사진이 나란히 전시된 곳 앞에서는 울컥하는 목울음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주명덕(70), 강운구(69) 등 원로 사진가들은 3만 5000명이 산화한 경북 대구 다부동 등의 전적지와 철책선, 초소 등을 흑백필름 카메라로 찍어 직접 인화했다. 원성원(38), 난다(41) 등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대의 작가들은 디지털 카메라와 포토샵을 이용해 요즘 세대들이 바라보는 전쟁에 대한 시선을 그려냈다. 대북 심리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강원도 양구 가칠봉 수영장에서 1992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가 열렸던 일을 소재로 한 난다의 디지털 합성 사진은 재미있으면서도 ‘낯선 풍경’이다. 어린이날 난다가 촬영을 위해 찾은 전쟁기념관은 마치 대공원 같은 분위기였으며, 시민들은 황토팩을 하고 소파에 앉아 천안함 침몰 뉴스를 시청한다. 전후 세대들의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사진작가들에게 1년간의 준비 기간을 주며 자유롭게 군사 기밀 지역을 촬영할 수 있도록 후원했던 국방부는 연예 병사들을 내세워 전시 홍보에 나섰다.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오전 10시30분, 낮 12시에는 군 복무 중인 영화배우 이준기와 이동욱이 특별 해설자로 나선다. 이메일로 받은 1차 예약은 이미 일본의 한류 팬으로 마감됐다. 6월26일, 8월14일 미술관 4층에서 열리는 6·25 60주년 특별콘서트에는 국군홍보지원단 대원인 가수 김정훈이 함께한다. 미국·영국 순회전도 예정돼 있다. 관람료 1000원. (02)333-0664.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

    [한국전쟁 60주년]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미국 대통령이 있다. 참전 결정을 내렸고, 3년 뒤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제33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다.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먼대통령도서관의 마이클 드바인(65) 관장과 22일(현지시간) 전화 인터뷰를 갖고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와 한·미동맹의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특별행사들을 많이 준비했는데 트루먼 대통령과 한국전쟁과의 관계는. -한국전쟁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집권 중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였다. 유엔 깃발 아래 미군을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한 힘든 결정이었다. 전쟁 와중에 인기가 높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불러들여 전역시킨 것은 어려운 결단이었다. 늘어나는 사망자와 전쟁포로들로 인해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율은 20% 중반까지 떨어졌고, 이 낮은 지지율은 2008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 초반을 기록할 때까지 50년 넘게 깨지지 않았다. 이처럼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던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트루먼대통령도서관은 미국에 있는 13개 대통령도서관 중 하나로 문서 약 1500만쪽과 2만 5000점의 각종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60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반도는 긴장이 여전히 높고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다. 하지만 1953년 휴전 이후 거의 60년간 남북한간에 전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의 천안함 사건은 60년 전 북한의 도발적 행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휴전협정에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다. 3차전쟁을 막은 것과 함께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 있도록 한 것이야말로 트루먼 대통령의 업적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은 군사·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도 무력을 통한 통일은 원치 않는다. 주요 국가들은 지역 안정을 해쳐 가면서까지 통일을 추진하길 원치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남북한이 스스로 평화적으로 통일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북한 정권의 변화 가능성은. -현 김정일 체제에서는 가능성이 낮다. 북한 지도부는 개방 후 중국의 부와 파워를 부러워하지만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다. →트루먼은 남북한이 60년씩 분단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을까. -아니다. 수년 내에 협상을 통해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분단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임연설에서 소련의 독재체제가 내부적으로 붕괴에 이를 것으로 정확히 내다봤다. →추가로 밝혀져야 할 비사가 있다면. -한국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자료들이 공개됐다. 남아 있다면 미국과 중국간에 주고받은 북한과 관련된 외교 서신 정도인데, 이 부분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과 관련해 보다 자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한국민들의 무관심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는데. -한국 국민들이 트루먼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1970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인천에 갔었다. 큼지막한 맥아더 장군 동상은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의 자취는 없었다. 맥아더 사령관을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한 데 대해 한국인들의 반감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해 남북 통일이 안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로 말이다. 한국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나 평화봉사단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데 정작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인색한 것 같다. 역사학자로서 한국을 위해 트루먼 대통령보다 더 많이 기여한 개인은 없다고 본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개항 이후 조선전쟁의 연장” “마오·스탈린은 휴전 꺼렸다”

    [한국전쟁 60주년] “개항 이후 조선전쟁의 연장” “마오·스탈린은 휴전 꺼렸다”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를 짚어보는 국제학술대회가 23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주최로 이 대학 연세·삼성학술정보관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박명림(연세대), 와다 하루키(일본 도쿄대), 브루스 커밍스(미국 시카고대), 션즈화(중국 화동사범대), 안드레이 란코프(국민대) 등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들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한·일·미·중·러 5개국 입장에서 한국전의 의미를 되짚었다. 첫 발제자 하루키 교수는 한국전쟁을 개항 이후 오래된 ‘조선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청일전쟁 같은 것도 조선전쟁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루키 교수는 “개항 이후 발발한 전쟁은 그 목적이 조선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전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피해자인 조선의 입장도 명확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션 교수는 중국의 참전 결정은 합리적이었으나 1951년 UN의 휴전 제안을 거부한 것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미군을 나약한 군대로 잘못 판단, 휴전을 거부하면서 불필요한 희생만 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출신 란코프 교수는 이에 대해 스탈린의 국제전략 문제를 지적했다.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을 장악하자 미국을 동아시아에 붙잡아두기 위해 한국전쟁을 승인했고, 개전 뒤에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휴전협상 진전 방해해 중국의 국력 소모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전쟁의 역설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이로웠지만 장기적으로 남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개항 이래 한국문제는 계속 불안정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한·미동맹의 틀에 편입되면서 어쨌거나 안정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이라는 문제점도 낳았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문제로 북한을 소련이나 중국의 꼭두각시로만 여기는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오해를 꼽았다. 자신의 수정주의는 미국정부의 오판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얘기다. 지금도 똑같다. 커밍스 교수는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은 유사시 북한에서 핵물질을 찾아 처리하는 훈련을 한다.”면서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하는 이유는 꼭두각시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푸른 눈 노병 세 번 울었다

    [한국전쟁 60주년] 푸른 눈 노병 세 번 울었다

    휠체어에 앉은 노병은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새겨진 긴 회랑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벽면 가득 새겨진 이름들 중 사선을 함께 넘나들었던 전우의 이름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흔 나이의 침침한 눈으로 3만 8000여명의 전사자 중에 아는 이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어디선가 함께했을 낯모르는 전우의 이름만 안타깝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보내서 왔고, 싸우라고 해서 싸웠을 뿐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깊게 파인 주름 위로 눈물을 툭 떨구는 이 노병의 이름은 엘리스 앨런(90). 한국전쟁 이후 60년 만에 한국땅을 다시 밟은 그가 2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경기 용인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6·25 60주년을 맞이해 참전용사와 가족들 87명을 초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노병의 머리 위로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국민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그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회랑 문구가 스쳐 지나갔다. 참전 당시 한국은 그에게 듣도 보도 못한 극동의 작은 나라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한국은 조국만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남은 곳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그는 그 이름을 훈장처럼 여기며 산다. 가장 먼저 찾은 국립현충원에서 그가 한 첫마디는 “우리의 희망이 헛되지 않았다.”였다. 그 사이 전혀 다른 땅으로 변한 한국에 대한 자긍심 어린 찬사였다. 이곳에서 그는 전우들에게 꽃을 바쳤다. “한 친구는 고향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총탄에 맞아 전사했어요. 그렇게 기뻐했는데….” 주름진 눈가가 다시 젖어든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포병 부대 통신담당관(중사) 임무를 띠고 부산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힘차게 북진하던 그의 부대는 10월 거대한 중공군 무리와 만났고, 결국 모두 포로가 된다. 그 후 그는 만주로, 중국으로 끌려다니며 광산 노역을 했다. 휴전협정까지의 33개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 그가 살아서 고향땅을 밟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처음 함께한 부대원 640명 중 생존자는 60명, 그 중 한 명이 앨런이었다. 전쟁기념관을 둘러본 앨런과 동료들은 서울 N남산 서울타워와 삼성전자 수원공장을 차례로 찾았다. 남산 정상에서 앨런은 서울 시내를 손으로 가리키며 “모두 황무지였는데 빌딩숲이 됐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삼성전자에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라고 했던 한국이 이렇게까지 성장할지 몰랐다.”고 감탄했다.행사는 국무총리 주최 만찬으로 끝났다. 앨런 등 참전용사들은 24일 대구 2군사령부 방문, 25일 6·25기념식 참석 등의 일정을 소화한 뒤 27일 출국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부산항 목숨걸고 지켰지만 아무도 기억 못 해”

    “부산항 목숨걸고 지켰지만 아무도 기억 못 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6월25일 밤 부산 앞바다에서 해전이 있었고 우리 해군이 대승을 거둬 부산항을 지키고 위기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를 기억해 주지도, 우리에게 감사해하지도 않아요.” 18살 때 해군으로 한국전쟁 당일 부산 앞바다에서 발생했던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했던 황상영(78) 한국해군동지회 회장의 말이다. 황 회장은 당시 포탄을 운반하는 탄약수였다. ●“北 특수전요원 600명 탄 선박 침몰시켜” 대한해협해전은 한국전쟁 당일 밤 특수전요원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침범하려던 1000t급 북한 선박을 우리 해군 백두산함(PC-701)이 침몰시킨, 한국전쟁에서 아군이 첫 승리를 거둔 전투다. 1950년 6월24일 오전 11시30분쯤 백두산함이 진해항에 입항했다. 그날 오후 갑자기 해군본부에서 “북한 괴선박이 남하 중이라는 첩보가 있다. 무조건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외박 나갔던 승조원들을 수소문해 73명 전원이 백두산함에 타고 곧바로 출항했다. 다음날 오후 9시쯤 부산항 북동쪽 54㎞ 해상에서 배이름도 국기도 보이지 않고 온통 까맣게 칠해진 괴선박을 발견했다. 백두산함에서 발광신호로 국적과 출항지 등을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강한 불빛을 비추니 배 꼬리부분에 친 천막속에 완전 무장한 군인 600여명이 있었다. 백두산함 최충남 함장이 북한 출신이라 배 옆에 부착돼 있던 인공기를 알아봤다. 사정거리 확보를 위해 곧바로 후퇴했다. 26일 0시15분쯤 해군본부에 이를 보고했고 곧바로 “북한 배로 확인되면 발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즉시 주포였던 3인치 포 1발을 쏘자 곧바로 북한 선박에서 쏘아댄 기관총탄과 소총탄이 백두산함으로 비오듯 쏟아졌다. 거리를 뒀기 때문에 소총탄은 백두산함에 미치지 못했다. 20여분간 정신 없는 교전 끝에 북한 선박은 선명한 불꽃과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황 회장은 “북한 선박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역을 서너 차례 돌자 바다에 떠 있는 선박 파편과 침몰해 있는 선체를 확인했다.”면서 “ 적은 전원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으며 교전 중 아군도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쳤다.”고 말했다. ●“참전자·유족 추모행사 다시 이어지길” 백두산함 승조원은 73명이었다. 현재 살아 남은 사람은 황회장을 포함해 20명. 부산 시장이 정부를 대신해 1년에 한번 6월24일 참전자와 그의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하는 행사를 가졌는데 그마저도 없어졌다. 황 회장은 “1년에 한 번이라도 우리를 기억하는 행사가 다시 이어졌으면 하는 게 백두산함 참전자들의 마지막 소망”이라며 말을 맺었다. 연합뉴스
  • ‘종전의 키스’ 간호사 91세로 별세

    ‘종전의 키스’ 간호사 91세로 별세

    세계 2차대전의 종전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유명한 ‘타임스 스퀘어의 키스(Times Square Kiss)’의 주인공 간호사인 에디스 세인(Edith Shain)이 향년 91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 엔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타임 스퀘어의 키스’는 ‘라이프(Life)’ 지(誌)의 사진작가였던 알프레트 아이젠슈테트가 1945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촬영한 사진. 사진이 촬영된 8월 14일은 일본이 항복하면서 2차대전이 종전을 고한 날로 타임스 스퀘어에서는 종전을 기뻐하는 인파가 몰려나왔다. 아이젠슈테트는 종전의 기쁨에 한 수병이 간호사의 허리를 감고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장면을 포착했고 이 사진은 그 다음주 라이프 잡지에 실렸다. 그후 2차대전의 종전과 종전의 환희를 상징하는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미스테리로 남은 간호사의 신분이 알려진 것은 70년대 말. 에디스 세인이 아이젠슈타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알려졌다. 당시 27세의 에디스 세인은 ‘닥터스 병원’(Doctor’s Hospital)에 근무하던 중 종전의 소식을 듣고 뉴욕 스퀘어 광장으로 나왔다가 수병의 키스를 받았다. 세인은 “그 수병이 우리를 위해 전쟁에 참가한 것을 알기에 그의 키스를 받아 드렸다” 고 말했다. 키스를 나눈 수병과 간호사는 그렇게 서로 통성명도 없이 헤어졌다. 사진속의 수병이라고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여럿이었으나 법정소송까지 가는등 논란속에 남아있다. 신분이 확인된 세인은 전쟁기념행사나 퍼레이드에 초대를 받으며 많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세인의 세아들 중 한명인 저스틴 덱커는 “어머니는 항상 2차대전 참전용사들을 돌보려고 노력했다” 고 말했다. 사진=’종전의 키스’ 와 2007년 당시의 에디스 세인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김형태 tvbodaga@hanmail.net@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다. 전쟁을 도발한 공산진영의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과 맞선 자유진영의 대표주자였다.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5성 장군 계급장을 달고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끝까지 함께 가지 못했다. 정책결정자 트루먼은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맥아더의 최후는 참담했다. 연합군이 중국군에 쫓겨 38선 이남으로 후퇴한 1951년 4월11일 트루먼으로부터 연합군 사령관직 등 모든 직위에 대한 해임통보를 받았다. 상원청문회장에 선 ‘전설적 장군’은 문민통제에 대한 불복종과 오판은 물론 거짓말까지 줄줄이 드러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 의회는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를 참작, 청문회 공식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도쿄에 머문 맥아더 전세 파악못해 루스벨트라는 걸출한 대통령의 그늘에서 인기 없는 상원의원과 부통령직을 지낸 트루먼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는 후세 역사가들로부터 스탈린과 함께 냉전의 양대 축으로 평가받았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이뤄진 트루먼 대통령의 확신에 찬 해군 및 공군 출동명령과 엿새 만의 지상군 참전결정이 없었다면 낙동강전선 사수와 인천상륙작전의 역공, 서울수복과 압록강 국경까지의 북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은 재임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정치적 앙숙인 맥아더를 사장시킨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매도당했다. 한국 땅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 3000여명을 전사시키고도 전쟁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대통령이었다. 맥아더 해임 당시 트루먼은 패배자였지만, 후일 승리자로 기록됐다.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군사자문기구인 합동참모본부가 만장일치로 승인한 ‘군사적 결정’이란 점이 작용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은 트루먼의 참전결정과 함께 한국전쟁의 양대 분수령이었다. 보급라인이 길어진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해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전쟁역사상 육군의 공급선을 차단하면 열에 아홉은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큰소리쳤다. 사실이었다. 맥아더 일대기에는 “그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15일 하루였다.”고 적혀 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의 거대한 도박에 성공한 것이다. 성공확률은 맥아더 자신의 언급이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맥아더는 “이 작전이 도박이라면 후에 1달러로 변해 나오게 되는 5센트를 항아리에 던져 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가 남한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한반도를 민주국가로 통일시키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유일한 미국 장군이었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수호자’로 숭배를 받았다. 한국의 통일이 바람직하다고 천명한 1950년 10월의 유엔결의가 맥아더의 호승심(好勝心)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싱턴의 행정부 및 군 수뇌부는 중국과 옛 소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했고,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다. 한국전쟁이 세계 제3차대전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제한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수단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했다. 맥아더의 거침없는 북진이 못마땅했지만, 상륙작전 성공 이후 ‘전쟁의 신’으로 격상된 맥아더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정부의 개입 경고를 무시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도 엄포라며 한 귀로 흘렸다. 오히려 원폭투하 발언과 압록강 교량 폭격으로 가뜩이나 민감해진 중국 지도부를 자극했다. 오만에 빠진 맥아더의 결정적 오판이었다. ●1951년 전시중 해임통보 받아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제10장 맥아더의 해임’ 편을 보면 미국 대통령과 내각,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군사정책에 관련된 정책수립 및 자문기구를 맡는 합참과 맥아더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이 책은 “합참요원은 예외 없이 맥아더 장군보다 후임이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는 육사 12년 선배인 맥아더 준장 아래서 소령으로 근무했다. 콜린스 육참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맥아더가 육사교장이었을 때 초급장교였다.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사관생도에 불과했다.”고 기술했다. 또 “군사조직이 이러한 인적관계로 구성됨에 따라 그 영향이 의사전달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서신에서는 합참에 대한 암시적인 훈계 또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발견됐다. 역으로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결정적인 방법으로 명령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들이 기안한 지침서는 선임자에게 실례나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공손한 말로 표현됐다.”고 적었다. 맥아더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1보를 보고받은 트루먼과 맥아더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도쿄의 극동사령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무관심하면서도 초연했다. 함께 있던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걱정하자 맥아더는 “단순한 정찰병력이며 등 뒤에 한 손을 묶은 채로도 처리할 수 있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26일에도 천하태평이었다. 오히려 덜레스가 “무초 미 대사가 서울을 탈출했다.”는 급보를 전하자 그때야 알아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1945년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맥아더에게 한국은 관심 밖의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거듭되는 보고를 무시했으며, “남한문제는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지시가 전부였다. 맥아더의 보좌관 바워즈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을 꺼렸으며, 한국문제는 국무부 소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러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도쿄로 돌아가곤 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나 북진공격 때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까지 거침없이 북진하면서 “중공군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장담과 달리 중국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뒤로 밀리자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 대표들은 맥아더가 한국의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사령관이 자리를 지키지 않는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맥아더가 파면된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리지웨이 장군은 종전 후 40년이 흐르고 나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싸워야 했는지 도쿄의 사령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이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으며 그런 상황을 만든 총사령관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트루먼의 대처는 단호하고 빨랐다. 미국은 결코 ‘한반도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판단을 비웃듯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6월30일 새벽 5시 지상군의 투입을 승인했다. 유엔 안보리도 한국에서의 무력사용을 의결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1950년 6월25일자로 트루먼과 맥아더의 삶이 함께 엮였다. 대통령은 장군을 통제하지 못해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장군은 대통령직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라고 분석했다. 또 “트루먼은 우연히 대통령이 되었지만, 맥아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고 썼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미국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아서 맥아더 장군의 아들이었다. 웨스트포인트 4년 동안 역대 최고 학점을 기록했고 미군 역사상 모든 최연소기록을 갈아치웠다. 1918년 처음 별을 단 이래 최연소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장, 소장, 대장, 원수에 올랐다. 1944년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는 떼어 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트루먼은 결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었다. 함정을 파거나,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저격당한 지 90년이 지난 뒤에야 훌륭한 대통령으로 추앙받은 링컨을 거울로 여겼다. 트루먼은 사적인 자리에서 “문제는 그가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라고 맥아더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인생은 쇼, 세상은 무대’라고 생각하는 맥아더가 보기에 트루먼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경쟁자였다. 워싱턴에 있는 반대세력의 수장이었다.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군 경력은 주 방위군 대위 계급장이 전부인 ‘미주리 촌놈’에 불과했다. 자신을 파면한 트루먼을 탄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봤다. 그가 도쿄를 떠날 때 25만명의 일본인이 성조기를 흔들며 울었고, 뉴욕에 도착해 행진을 벌였을 때 700만명의 인파가 열광하면서 장군의 귀향을 슬퍼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전쟁의 순교자로 여겼다. 맥아더 해임은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헌정위기를 불러왔다.’고 기술될 정도로 혼란상을 가져왔다. 상원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던’ 장군의 진면목은 매일 3000만명이 지켜보는 TV중계 앞에서 발가벗겨졌다. 일흔 살 대원수의 진실은 미리 준비한 연설과 달리 사흘 내내 계속된 청문회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그는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10월17일 웨이크섬 회담에서 맥아더 장군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두 번씩이나 본국소환에 불응하는 기록을 세운 전무후무한 장군이기도 했다. ●군사작전 실행후 추후 보고 합참은 맥아더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4월8일 전원회의에서 참모들은 ‘예외 없이 맥아더 해임’에 찬성했다.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열거한 맥아더 해임의 주요 이유는 타이완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의 불화였다. 맥아더는 중립을 추구하는 트루먼 정부의 타이완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중국의 개입에 대한 오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뒤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북진, 압록강 교량 폭격 같은 중요한 군사작전을 실행 후 추후 보고형식으로 승인받았다. 이 밖에 대외정책에 대해 공개 언급하지 말라는 대통령 훈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했다. 맥아더가 3월24일 중국본토로의 확전을 언급하자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더는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해임을 결심했다고 미국 합참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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