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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우 찾아 60년 만에 방북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조종사 출신 88세 미국인이 동료 유해를 찾아 6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해 눈길을 끈다. 19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20일 미국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는 주인공은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전투에서 해군 조종사로 콜세어 항공기를 몰며 항공화력지원 작전을 수행했던 토머스 허드너 중위. 그는 당시 동료이자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조종사인 제시 브라운 소위가 몰던 콜세어가 중공군에 피격돼 추락했음을 알고 그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콜세어를 근처 눈밭에 동체 착륙시키고 브라운 소위를 구하려 했지만 영하의 추위 속에서 브라운 소위의 다리가 부서진 기체에 끼여 결국 구조에 실패했다. 비록 구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구조 노력이 알려져 1951년 4월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허드너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허드너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뒤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러던 중 허드너의 전기 집필을 문의해온 작가 애덤 마코스로부터 방북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들은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 설립자이자 북한 군부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재미교포 김지연씨를 찾았고, 김씨는 허드너와 마코스, 그리고 장진호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리처드 보넬리 등과 함께 유해 발굴단을 꾸렸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6대1 경쟁률 뚫고 레바논 평화 지키러 떠난다

    6대1 경쟁률 뚫고 레바논 평화 지키러 떠난다

    레바논에서 6년째 유엔 평화유지군(PKO)으로 활동 중인 동명부대에 충원될 13진 장병 파병환송식이 19일 열렸다. 조정환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이날 인천 국제평화지원단에서 열린 환송식에는 파병준비단장인 김시범(학군 31기) 중령 등 305명의 파병 장병과 가족, 군 관계자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6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13진 장병 가운데는 대(代)를 이어 파병된 장병도 5명이나 된다. 작전장교 차정석 소령은 월남전에 민사심리전부대 중위로 참전했던 차기문 예비역 중장의 아들이다. 이상민 대위와 한상헌 원사, 이석주 상사, 김범규 하사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도 주월십자성부대와 맹호부대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 바통을 이어받은 형제도 있다. 정보통신중대 무선반장 이호진 중사의 친형 이진현 대위는 12진 화학장교로 파병돼 임무를 수행 중이다. 13진 장병 가운데는 레바논, 동티모르, 이라크 등에 이미 파병됐던 경험자가 88명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 동명부대는 인도적 지원사업 156건, 레바논군 지원사업 62건 및 의료지원 6만여명 등 다양한 민군작전을 통해 평화유지군과 현지인에게 ‘신이 내린 선물’로 불리고 있다. 13진 장병들은 2개 제대로 나뉘어 24일과 새달 5일 출국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롯데, 유엔군 참전용사 돕기 나서

    롯데그룹이 국방부와 함께 생활고를 겪고 있는 한국전쟁 해외 참전 용사 지원에 나선다. 롯데그룹은 17일 국방부와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유엔군 참전용사를 지원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롯데그룹은 향후 5년간 국방부가 추진하는 한국전쟁 해외 참전용사 보은 활동에 소요될 사업비를 지원한다. 롯데와 국방부는 매년 사업 규모와 대상 등을 협의하기 위한 공동 실무위원회를 운용하기로 했다. 다음 달 태국에서 첫 활동을 시작한다. 롯데와 국방부는 참전용사들의 거주마을인 방콕 외곽 ‘람인트라’ 지역을 방문해 복지회관 건립 및 주거시설 개·보수 작업을 진행한다. 롯데는 이 활동에 7억원을 지원한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전몰군경 사후로 출생신고 해도 실제 자녀라면 유공자 가족으로 인정해야”

    국가유공자 유족을 판단할 때 법률보다 실질이 앞서야 한다는 행정심판이 나왔다.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14일 민법상 자녀로 인정받지 못했더라도 실제로 국가유공자(전몰군경)의 자녀로 살아왔다면 유족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11월 A씨는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에 태어나 출생신고가 늦어진 것을 두고 민법상 친자 관계 조건에 맞지 않아 유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A씨는 1960년 호적에 이름을 올리면서 생년월일을 1954년 7월 8일로 했다. 참전한 아버지 권모씨가 사망한 시점(1953년 6월)보다 1년이나 늦다. 유공자 가족으로 인정받으면 교육, 의료 등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A씨도 지난해 9월 유족으로 등록하려 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안동보훈지청은 호적상 출생 연월일과 아버지의 사망 시기가 민법 844조(포태기간 경과)에 어긋난다면서 자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행정심판위는 가족관계증명서 등에 권씨와 A씨가 부녀 관계로 기재돼 있고 A씨 친척들도 “A씨의 출생 시점이 실제보다 4년 늦었다”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친자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정전협정 60년] (7)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상)

    ■미국·중국의 입장 美 ‘中 견제 전초기지’ vs 中 ‘대미 완충지대’… 전략적 인식 심화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한반도 분단의 조속한 종식과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연방하원의 여야 의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을 발의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한반도 통일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통일 한국’은 친미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통일 한국’이 친(親)중국 성향으로 기울 것이란 우려가 제기될 경우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소극적으로 변할 개연성이 크다. 현실주의 이론의 대가인 미국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셰이머 교수는 2011년 한 세미나에서 “그동안 급속한 국력 신장을 이룬 중국이 향후 수십년간 더욱 힘을 키워 미국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은 중국에 편승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설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지리적으로 중국에 매우 근접해 있는 한국이야말로 대(對)중국 견제의 전초기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틈만 나면 한·미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으로 부르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배경에는 이런 계산법이 작용한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북한발 위협이 사라지면서 미국의 한반도 방위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최근 중국의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이런 전망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반도 방위 역량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한국전쟁’ 하면 떠올리는 것은 ‘미군의 북한 침략’이다. 중국의 대표 백과사전 격인 사해(辭海)에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해 “한국에 내전이 일어나자 미군이 북을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 변경인 단둥(丹東)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중국이 전쟁에 참여해 나라를 지키고 북한을 도와 미국을 물리쳤다”고 미화한다. 중국에서도 김일성의 남침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화둥(華東)대학 역사학과 선즈화(沈志華) 교수는 러시아 비밀 문서를 토대로 한 연구를 바탕으로 꾸준히 남침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0년 환구시보 영문판에서 “스탈린이 1950년 4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허락했고, 그해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이 돕겠다는 승락을 받았다”며 남침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역사관은 아직도 북침이다. 일부 개혁파 지식인들은 “중국의 참전 결정은 마오가 소련과 밀착해 국내 정권 기반 강화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국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참전 결정은 마오가 내린 것이고 마오는 중국의 국부여서 마오에 대한 부정은 곧 중국 공산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전문가들은 한·중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지만 당국이 아직은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물론 한반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핵은 중국에도 위협 요소여서 중국이 북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이고 미국과 협력하면 북한 문제는 바로 해결된다”면서 “다만 이 경우 미군의 도움으로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고, 중국은 여전히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분단 해결에는 장애물이 많다”고 내다봤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러시아·일본의 시각 러 “北, 중·러 감정골 이용 땐 분단 상황 지속” 1948년 한반도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미국과 함께 냉전의 한 축을 이뤘던 소련(현 러시아)은 영토 접경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막을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홍완석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소장은 “소련은 영토가 크기 때문에 항상 완충지대를 만든다. 유럽의 핀란드, 중앙아시아의 몽골이 대표적이다. 북한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소련은 38선 이북을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보루로 삼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소련이 갖고 있던 영향력의 우위는 서서히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북한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소련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북한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즈음만 해도 북한 지도부가 혁명적 이상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시각에서 북한의 남침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이었다”며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과 소련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북한이 이를 잘 활용하면서 분단이 계속 이어지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끝내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남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계형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연구교수는 “러시아는 한국이 통일되는 게 동북아의 안정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도 있는 등 한국의 통일이 러시아의 장기적인 이익과도 일치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분단의 ‘당사자’였다면 일본은 ‘수혜자’였다. 분단이 고착화된 결정적 계기 중 하나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을 한국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의 입장 때문이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일본과 서둘러 맺었고, 이를 통해 패전국 일본은 정치적으로 ‘정상 국가화’ 됐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의 정치인들은 이런 점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인이 일본에 혜택을 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고엽제訴 사실상 패소… 피해자 39명만 인정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에 노출돼 후유증을 겪었다며 미국의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14년 만에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참전 군인들이 겪은 후유증 중 당뇨병, 폐암, 비호지킨임파선암, 말초신경병, 버거병 등 질병에 대해 고엽제 노출을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염소성여드름은 고엽제 노출이 원인이 됐다며 제조사 책임을 세계 처음으로 인정했다. 대법원 3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12일 참전 군인 김모(70)씨 등 1만 6579명이 고엽제 제조사인 미국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당뇨병, 폐암 등 질병은 유전·체질 등의 선천적 요인과 음주·흡연 등 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질환”이라면서 “이 질병들이 베트남전에서 살포된 고엽제가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고엽제 피해자들의 딱한 사정만으로 판결할 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에서 일부 승소한 5227명 중 시효가 소멸되지 않은 염소성여드름 피해자 39명에 대해서는 “1인당 600만∼1400만원씩 모두 4억 6600만원을 지급하라”며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이와 관련, 다우케미컬 측은 이날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법원 판결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참전 군인들은 “유해물질인 다이옥신이 포함된 제초제 때문에 피해를 겪었다”며 1999년 9월 5조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김성욱 고엽제전우회 사무총장은 선고 직후 “대법원이 우리 주권을 포기했다는 기분까지 든다”며 “판결문을 받아본 뒤 변호사와 상의해서 향후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500인 원탁토론-함께하는 수원교육을 말하다(OBS 토요일 밤 8시 15분) 찬성과 반대가 아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가는 새로운 형식의 500인 원탁토론을 펼친다. 이번 시간에는 ‘올바른 공교육 혁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평생학습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 가지 의제로 생생한 시민의 의견을 듣는다. ■정전 60년 특별기획-내 기억 속의 전쟁 앙카라 학교(KBS1 토요일 밤 9시 40분) 정전 60년, 이제는 전쟁의 상흔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도시 서울에서 처참했던 기억을 수집하는 남자가 있다. 터키에서 변호사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건너온 부라크 카라쿠르트. 그가 참전용사였던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간의 조건(KBS2 토요일 밤 11시 15분) 경환의 초대로 숙소를 방문한 ‘짐승돌’ 2PM. 불이 없어 컴컴한 집안 분위기에 당황한 손님을 자가발전 자전거에 태워 페달을 밟게 하는 ‘인간의 조건’ 멤버들. 한편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고깃집에서 빌려온 불판으로 마당에 펼친 전기 없는 가든파티를 보여준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15분) 2013년 4월 경기 파주시 문산읍 여우고개 부근. 흙 사이로 사람의 다리로 추정되는 물체가 보인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이 출동해 흙을 파내기 시작했고 곧 들짐승에게 왼쪽 다리가 훼손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신원확인 결과 피해자는 2012년 12월 겨울 서울에서 실종됐던 남성 김석준씨였다. ■강연 100℃(KBS1 일요일 밤 8시) 74세 요가의 달인 조정부씨. 지금은 누구보다 유연하고 건강한 몸을 자랑하는 그는 어려서부터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40대 이후 찾아온 위염, 대장염, 비염, 만성 간염까지 누구보다 힘들었던 그다. 걷기 운동과 등산으로 건강을 되찾은 것도 잠시. 60대에는 척추관 협착증이 그를 다시 괴롭혔는데…. ■금 나와라 뚝딱(MBC 일요일 밤 8시 45분) 성은은 심덕에게 몽희가 현수의 도움으로 보석회사에 근무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심덕과 몽희의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몽현은 덕희에게 돈을 돌려주지만, 미나의 집안인 성산 그룹으로부터 성산 백화점 입점 제안 전화를 받은 순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SBS 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15분) 비만전문의 박용우 원장이 기존의 다이어트 상식을 깨고 간헐적 단식에 도전했다. 아침은 꼭꼭 챙겨 먹고 하루 네 끼를 먹어야 한다는 철칙으로 살았던 박 원장의 5대2(일주일에 5일은 정상식, 2일은 24시간 단식) 간헐적 단식법과 그가 말하는 간헐적 단식의 좋은 예와 나쁜 예를 꼼꼼히 따져본다.
  • “베트남 참전 군인들 폐암 등 발병, 고엽제와 인과관계 증명 안돼”

    “베트남 참전 군인들 폐암 등 발병, 고엽제와 인과관계 증명 안돼”

    14년을 끌어 온 고엽제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1만 6000여명의 원고 중 39명에게만 피해를 인정하는 선에서 12일 마무리됐다. 대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 보내면서 “염소성 여드름을 제외한 당뇨병과 폐암, 버거병 등의 질병은 고엽제 노출이 원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에서는 고엽제와 참전 군인들에게 발생한 질병 간의 인과관계와 함께 한국 법원의 재판 관할권, 고엽제 제조물 결함 여부, 손해배상 소멸 시효 완성 등 4가지가 주요 쟁점이었다. 먼저 대법원은 1, 2심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법원의 재판 관할권과 고엽제 제조물의 결함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재판부는 “제조사들은 고엽제에 포함된 다이옥신 성분이 인체에 미칠 유해성에 관해 충분히 조사, 연구하고도 위험 방지를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 제조물인 고엽제의 설계상 결함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한국 참전 군인이 피해자인 점, 실제 질병 등 손해가 발생한 장소가 국내라는 점 등을 근거로 국제재판 관할권이 한국 법원에 있다고 봤다. 손해배상 소멸 시효와 관련해서는 1, 2심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소멸시효 10년이 완성됐다고 본 1심과 달리 대법원은 “질병이 생긴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 판정받아 등록하기 전까지는 병의 원인이 고엽제 노출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며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록일부터 3년을 손해배상청구 시효기간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핵심 쟁점인 참전 군인들에게 발병한 질병과 고엽제 사이의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국가가 아닌 사기업에 배상 책임을 지게 할 만큼 의학적, 과학적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았다”며 당뇨병, 폐암 등 참전 군인들에게 생긴 질병 대부분은 고엽제 노출에 의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참전 군인에게 발생한 질병은 발생 원인 등이 복잡다기하고 유전, 체질 등의 선천적인 요인과 음주, 흡연, 식생활 습관 등의 후천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비특이성 질환”이라면서 “이들 질병이 베트남전에서 살포된 고엽제 노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앞서 2심에서는 미국 국립과학연구소의 보고서를 근거로 호지킨임파선암, 후두암 등 11개 질병에 대해 고엽제와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미국 국립과학연구소의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보훈 정책상 작성한 것으로 참전 군인을 상대로 충분한 역학 조사를 해 작성된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판단을 종합해 원심에서 일부 승소한 5227명 중 시효가 소멸되지 않은 염소성 여드름 피해자 39명에 대해서만 “1인당 600만∼1400만원씩 모두 4억 6600만원을 지급하라”며 고엽제 노출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인정,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고엽제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염소성 여드름만을 인정한 점 등 사실상 패소 취지의 판결이라 앞으로 고엽제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과관계를 인정받은 염소성 여드름 피해자의 경우 다우케미컬 등 제조사의 특허권 등 국내 재산에 대한 가압류 신청 등으로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 또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미국에서 국제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염소성 여드름과 고엽제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다 거액의 소송 비용과 시간을 부담하면서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청구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앞서 참전 군인들은 1999년 9월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5조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고 소멸 시효가 지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지만, 2심 재판부는 “원고 6795명에게 상이등급에 따라 1인당 600만∼46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베트남까지 가서 싸웠는데… 국가에 배신감 느껴

    베트남까지 가서 싸웠는데… 국가에 배신감 느껴

    “참담한 심정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했는데 배신감도 느낍니다.” 김성욱 고엽제전우회 사무총장은 12일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국가를 위해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다가 후유증을 입었는데 인정을 안 해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67년 12월 베트남 호이안 지역에 파견돼 작전을 펼치다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고엽제의 위험성에 대한 주의사항 등 사전통보가 전혀 없었다. 동료들은 모기를 없애 준다며 비행기에서 뿌려지는 고엽제를 일부러 맞기도 했다. 전쟁 기간 중 정글 제거와 시야 확보 등을 위해 사용된 고엽제에는 각종 암, 신경계 손상 등 질병을 유발하는 독극물인 다이옥신이 포함돼 있어 각종 후유증을 야기했다. 김 사무총장 역시 한국에 귀국한 뒤 20여년이 지난 1989년부터 몸에 이상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온몸이 쑤시고 뒤틀리며 마비가 오기도 했다. 당시 양곡 부대를 생산해 수출하는 무역회사를 운영했던 그는 외국 바이어와 상담을 하던 도중 쓰러지기도 했다. 결국 직원이 250여명에 달했던 무역회사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생계는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그는 “여자의 몸으로 공사장에서 일도 하고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라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아픔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는 “당뇨, 심근경색 등의 질병 때문에 매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다”면서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약만 해도 3~4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김 사무총장과 같이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피해자는 4만 1940명(후유의증 4만 7807명)이고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 군인 2세들도 65명에 달한다. 그는 “14년 동안 끌어 왔던 소송이 이렇게 되다니 안타깝다”면서 “오는 16일 전국 고엽제전우회 지부장들이 모여 회의를 한 후 향후 대책을 논의하겠다”며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6·25 참전한 동생 61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6·25 참전한 동생 61년 만에 유골로 돌아왔다

    열아홉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던 그가 가족 품에 돌아오는 데는 꼬박 61년이 걸렸다. 그 사이 누나는 팔순을 훌쩍 넘겼고, 여동생은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다. 1952년 6월 휴가를 나온 그는 고향(경북 문경)에 고구마를 심어 놓고 “가을에 캐서 맛있게 먹어라”라고 당부한 뒤 부대로 돌아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철호(1931~1953) 이등상사 이야기다. 정 상사의 손때 묻은 유품이 누나 정상남(87), 여동생 정경분(68), 조카 정용수(55)씨에게 전달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단장 박신한 대령)은 11일 유해발굴 당시 정 이등상사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유품, 전사자 신원확인서 등을 울산 울주군의 정용수씨 자택에서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오빠의 흔적을 맞이하려고 대구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여동생 정씨는 “1953년 전사통지서를 받은 어머니께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휩싸였다”면서 “1979년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등 평생을 한으로 보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고령인 누나는 복받치는 감정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고인은 1950년 11월 27일 입대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총명했고, 당시 시골에서는 드물게 중학교에 다녔다. 영어도 곧잘 했다’고 기억했다. 평남 영원전투와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횡성전투 등에 나섰다. 1953년 4월 상이기장을 받았고, 1954년 10월에는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될 만큼 전공을 세웠다. 정 이등상사의 유해가 발굴된 건 지난 5월 21일이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 15~18일 중공군 60군 181사단을 상대로 국군 8사단이 한 치의 땅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철원 별우지구 현장에서 국유단이 유해와 철모, 야전삽 등을 발굴한 것. 가족 품으로 돌아가고픈 고인의 간절한 바람 덕일까. 유해와 함께 드러난 부식된 나무도장을 정밀감식한 결과 ‘鄭喆鎬’(정철호)란 이름이 나왔다. 병적기록부를 추적한 결과 6명의 동명이인이 확인됐다. 참가 전투 지역을 바탕으로 범위를 좁힌 국유단은 조카와 여동생의 DNA 시료를 채취해 혈연관계를 최종 확인했다. 정 이등상사의 유해는 유가족과의 협의를 거쳐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정전협정 60년] 현재진행형 비극 (하) 참전 군인들 인터뷰

    ■윌리엄 웨버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참전 증인들 사라져가 안타까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생존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우리가 모두 사라져 버리면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의식에서 완전히 실종될 것만 같아 걱정입니다.” 인생 거의 전부가 ‘한국전쟁의 역사’인 노병(老兵)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한국전쟁의 역사가 겪게 될 운명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이 만난 윌리엄 웨버(87·예비역 대령)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전 참전용사다.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그는 언론들의 1순위 인터뷰 대상이 된다.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한국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열성이 그를 특별하게 하고 있다. 그는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비 옆에 서 있는 19명의 미군 병사 조각상 가운데 하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지난 5월에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웨버 회장은 1943년 17살의 나이에 직업 군인으로 미 육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이어 1950년 8월 육군 187 공수 낙하산부대 소속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서울 수복 후 그는 평양 등 북한 내 요충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해 승전보를 울렸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까지 밀린 그는 1951년 1월 격전지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군의 수류탄에 오른쪽 팔꿈치 아래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고 말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전선과 이별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북핵 문제 관련 세미나에 의족에 의지한 몸을 이끌고 나타난 그에게 ‘20대 젊은 나이에 소중한 팔다리를 잃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감스럽지 않다. 한국전에서 정규군으로 복무한 것은 내게 무한한 영광”이라며 마치 젊은 현역 군인처럼 우렁차게 답했다. 정전 6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60년간 또 다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전용사들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정전 75주년 기념식이 열린 텐데 그때는 극소수의 참전용사만 살아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우리 참전용사들끼리 하곤 한다. 왜냐면 지금 가장 어린 참전용사가 80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는데 앞으로 완전히 미국 역사에서 실종될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싸울 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 일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줄 알았지만 1950년 한국 땅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일본인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그런 한국인들을 위해 싸운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자 영광, 특권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건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을 다해 끊임없이 미국에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다시 한국전이 일어난다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연히 참전할 것이다. 그건 물어볼 필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다 할 것이다. 바로 1950년에 나는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웨버 회장에게 한국전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그는 미국에서 ‘한국전 알리기’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는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앞에 있는 한국전 기념비 옆에 미군과 카투사 전사자들의 이름을 모두 새긴 ‘한국전 추모벽’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중이다. 2002년 참전 이후 5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후 올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웨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원주를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중국인민지원군 출신 자빙수 전 中인민공안대 교수 “美의 침략 언론보도 믿고 참전” “한국전은 중국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로 표현한다. 이 말과 같이 한국전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남북이 분단됐는데 한국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이면 항미원조 승리 운운하며 자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 인민지원군 출신의 자빙수(査秉樞·81) 전 중국인민공안대 교수는 매년 7월 27일을 ‘한반도정전기념일’로 고쳐 불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일 베이징 무시디(木?地) 자택에서 만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하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은 미군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탓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자 전 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자원 입대했다. 타이완을 수복해 통일을 이루려는 국가정책에 따라 인민해방군 25군 75사 소속으로 푸젠(福建)성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미군이 단둥(丹東) 변경을 폭격했다는 등 미군의 침략에 초점이 맞춰진 언론 보도로 미국이 타이완 국민당 정부를 도와 중국을 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됐다. 부대 전환 배치를 신청해 한국전에 참여한 데는 이 같은 국내 분위기가 작용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는 1952년 7월 13일부터 14일 동안 강원도 상감령 동북쪽 남대천에서 벌어진 ‘금성(城) 반격전’을 꼽았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래 북의 땅에 침입한 미군을 물리쳤다는 의미에서 이 전투를 반격전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 전투만 버텨 내면 미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미군을 상대로 중국 인민지원군 25만여명이 참가한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와 허리를 다쳤다. 그는 정전 이후에도 북한 재건 사업에 투입되며 1953년 10월부터 황해남도로 배치돼 1년간 고 유옥례씨 집에서 지냈다. 당시 14세이던 유씨의 딸 김영희로부터 조선인민군진군가, 조선국가, 아리랑, 봄노래, 샘물터의 노래, 푸른 하늘의 노래 등 27개의 북한 노래를 배웠다. 한국 노랫말을 중국어로 표기해 적어 둔 노래 연습장과 유씨 가족의 사진을 보며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영희씨와 주고받은 100여통의 편지도 간직하고 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두 나라 언어로 적어 가며 수십년간 소통의 끈을 이어 갔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라는 문구 등 편지 내용 곳곳에 깊은 우의가 배어 있다. 문화대혁명 등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희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료품, 식료품, 의류 등을 북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약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외세의 개입 없이 남북이 자체적으로 통일하도록 돕는 것이 중국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부회장 김완기씨 “조국의 전쟁 소식에 태극기 혈서 쓰고 참전” 1950년 6월 25일. 22살의 청년은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를 듣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을 접한다. 현해탄 건너 조국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이대게 됐나”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청년은 개전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전을 결심한다. 그후 63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청년의 얼굴엔 주름살이 내려 앉았다. 재일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완기(85)씨를 지난 3일 만났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김씨는 12살 때인 1940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큰아버지가 있는 구마모토현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해 엘리트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광복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민단 소속으로 조직 활동에 앞장섰다. 전쟁이 터지자 김씨를 포함한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은 태극기에 혈서로 참전 의사를 밝히고 조국으로 향했다. 미군 부대에 배치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김씨는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막이 터져 육군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타고 참전한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는데 동상 때문에 손발이 잘린 전우들이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미군의 순환배치 방침에 따라 1·4 후퇴 즈음인 1951년 1월 일본으로 복귀한 김씨는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며 다시 입대를 자원했다. 100여명이 지원해 58명이 국군에 재입대하게 됐고, 김씨는 1952년 6월까지 전선에 머물렀다. 이후 김씨는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허락 없이 참전했고 일본 거주도 불확실하다”며 입국을 막았다. 결국 부산 소림사에서 재일학도의용대(현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의 전신)를 만든 뒤 정전 후인 1953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탑골공원 뒤편에 사무실을 꾸렸다. 그곳을 본적으로 등록하고 1961년까지는 수용대기소에서 생활했다. 국내 안착도 일본 귀환도 아닌 애매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일본에 있던 김씨의 가족은 전쟁통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고, 공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정전 이후에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현재 동지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학도의용군의 존재를 모르는 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는 종전 후 10년 뒤인 1963년에야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고, 1968년 재일학도의용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글 사진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중국군 묘지 찾은 6·25 참전 동료

    중국군 묘지 찾은 6·25 참전 동료

    6·25 참전 중국인 천뤄비(82)가 9일 오전 ㈔한·중문화협회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해 중국군 유해 362기가 안장된 경기 파주시 적성면의 적군묘지에서 참배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달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류옌둥(劉延東) 부총리를 만나 6·25전쟁 당시 중국군의 유해 송환 문제를 거론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고물·참전수당 모아 900만원…더 힘든 이웃들에게”

    “고물·참전수당 모아 900만원…더 힘든 이웃들에게”

    “밥만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면 가진 것을 모두 사회에 베풀고 떠나려고 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이 남지만 그래도 이북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삶이었지.”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6·25 참전 유공자가 그동안 모은 전 재산 900여만원을 사후(死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주인공은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허름한 옥탑방에서 홀로 사는 최귀옥(81)옹. 최옹은 5일 옥탑방에서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 관계자와 만나 이를 상의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인천에서 일용직 건설노무자로 일하던 최옹은 군대에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듬해 입대했다. 2군단 소속으로 화천 전투에서 북한군과 싸웠다는 최옹은 당시 군대 야학에서 글을 깨우쳤고, 제대 후에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가정불화로 부인, 자식들과 헤어지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최옹은 이후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16년간 폐지와 고철을 수집하며 생활하고 있다. 최옹이 폐지를 모아 얻는 수익은 한 달에 2만원 정도. 그나마 요즘엔 몸이 불편해 한 달 이상 일을 못 하고 있다. 6·25 참전 수당 15만원과 구청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합해도 월 30만원이 채 안 되는 빠듯한 살림이다. 최옹은 이 가운데 매월 2만원을 6·25 참전유공자회에 회비로 납부하고, 폐지를 통해 얻은 수입은 쓰지 않고 따로 모아 뒀다. 최옹은 “나 자신도 어릴 때 아버지 없이 자라서인지 수십년 전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밝혔다. 최옹의 나눔은 6·25 참전용사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최옹은 정월이 되면 구청에서 지급한 쌀의 절반을 6·25 참전유공자회를 통해 얼굴도 모르는 다른 참전용사에게 보낸다. 3년째 자신의 몫을 나눠 온 최옹은 “난 밥은 먹고 살지만 형편이 더 안 좋은 참전 용사도 많다”면서 “6·25 참전 수당 15만원은 생계를 잇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北에 나라 뺏기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싸웠단다”

    “北에 나라 뺏기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싸웠단다”

    “안개 속에서 포탄이 떨어지는데 피란민들은 보따리를 메고 갈팡질팡하고 어린 아이들은 울부짖고 난리도 아니었지. 우리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열악한 총을 들고 지리산에 숨어 있는 북한군과 싸우느라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 6·25 참전용사인 이덕회(82)옹은 3일 서울 강북구 번동 자택에서 손자·손녀뻘 되는 인근 화계중학교 2학년 5반 학생 12명에게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진지한 표정으로 이를 경청하던 학생들은 때때로 “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화계중학생 754명에게 이날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사단법인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가 주관한 ‘6·25 참전 영웅과 함께하는 세대 공감 친구데이’ 행사를 통해 평소 보기 힘들었던 고령의 6·25 참전용사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10여명씩 한 조를 이뤄 각각 서울 소재 참전용사 69명의 자택으로 찾아가 선물을 전달하고 청소와 설거지, 안마 등의 봉사 활동을 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급받는 참전수당 월 19만원으로 겨우 살아간다는 이옹은 “대학생들도 6·25의 의미를 잘 모르는 요즘 중학생들이 이렇게 찾아와줘 고맙다”면서 “그때 나라를 빼앗겼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김다솔(14)군은 “집 청소를 깨끗이 해드리려고 했는데 저희가 온다고 할아버지께서 청소를 다 해 놓으셔서 죄송스럽다”면서 “어르신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같은 반 황건희(14)군은 “평소 집에서 어른들께 듣지 못했던 6·25 전쟁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니 신기하다”면서 “저희도 커서 군대에 가겠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진광 인추협 대표는 “나라의 소중함과 어르신에 대한 고마움을 새로 깨닫게 돼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는 인성교육이 될 것”이라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첫 여성 전투비행사 김경오씨, 국민훈장 동백장

    첫 여성 전투비행사 김경오씨,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전투비행사가 국민훈장을 받는다. 2일 제18회 여성주간 기념식에서 김경오(84) 극동지역 여성항공연맹 총재가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건국 이후 여성으로서는 처음 조종간을 잡은 김 총재는 한국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 1956년 전역 후에도 국제여류비행사협회, 국제항공연맹을 통한 민간외교와 국위 선양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깨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정부에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여성 생도 입교 허용을 건의해 실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대한민국항공회 명예총재, 한국여성항공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美하원,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 결의안 추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연방 하원의원 4명이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한 것으로 28일(현지시간) 알려졌다. 민주당의 찰스 랭글, 존 코니어스, 공화당의 샘 존슨, 하워드 코블 하원의원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촉구하기 위한 결의안’을 지난 25일 발의했다. 한국전 정전 6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하원 본회의를 통과시키는 게 목표다. 이들 4명의 의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초 미국 방문 당시 의회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할 때 한 명씩 호명해 동료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바 있다. 이들은 이번 결의안에서 의회가 한국전쟁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1950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봉사하고 희생한 미군과 동맹국 군인들에게 감사하고 미국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궁극적으로 평화와 통일로 이끌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국제법을 지키고 핵확산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수능 로또 베트남어/박현갑 논설위원

    1226년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한 외국인이 황해도 옹진군 화산에 도착한다. 베트남 최초의 독립국가를 세운 리(Ly) 왕조의 왕자인 이용상(Ly Long Tuong)이다. 외척 진(Tran)의 쿠데타로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옹진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용상은 당시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를 도와 몽골군과 싸워 공을 세운다. 고려왕으로부터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그는 고려 여인과 결혼해 정착한다. 베트남 정부는 리 왕조에 대한 국민의 여망을 감안해 해마다 리 왕조 건국일인 3월 15일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화산 이씨 종친회장이 참석한다고 한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다. 같은 한자문화권으로 유교, 불교 등 문화와 풍습이 비슷하다. 36년간 일제 지배를 받았던 우리처럼 베트남은 87년간(1858~1945) 프랑스 통치 아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지칭하는 ‘라이따이한’은 우리가 가해자가 된 경우다. 1964∼1973년 파병된 한국군, 기술자와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 1만여명은 ‘버려진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양국은 수교 이후 활발한 경제협력을 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국제결혼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한 국제결혼 이민관을 베트남에 파견할 정도로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도 적지 않다. 언어 또한 비슷하다. 베트남어는 한자처럼 상형문자가 아니라 우리말처럼 발음원칙에 따라 형성된 문자다. 음의 높낮이와 굴절을 뜻하는 성조가 있어 힘든 점도 있으나 베트남어 어원의 상당수가 중국 한자어에서 유래돼 발음을 들어보면 사전을 뒤지지 않고도 뜻을 알 수 있는 단어가 많다. 베트남어로 중국은 ‘쭝꾸옥’, 미국은 ‘미꾸옥’, 기숙사는 ‘끼뚝싸’, 음악은 ‘엄냑’이라고 한다. 2014학년도 수능 6월 모의평가 제2 외국어·한문 영역에서 베트남어를 택한 수험생이 15.8%로 일본어(22.3%), 중국어(17.3%) 다음으로 많았다.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곳은 전국에서 충남외고 한 곳뿐이다. 지난해 아랍어 인기에서 드러났듯 단기간 공부해도 상위등급을 받기가 쉽다는 점을 노린 ‘로또 수험생’이 많기 때문일까.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학원도 성황이란다. 교육부가 2011년 베트남어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킨 것은 늘어나는 베트남 다문화가정 자녀들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베트남어를 선택한 수험생들이 이를 계기로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면 다문화시대에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기고]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

    [기고] 천안함 박정훈 병장과 그의 할아버지/강성만 서울북부보훈지청장

    누가 소설을 일컬어 ‘현실을 보다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라 했는가. 박대석의 사연은 소설보다 처절하다. 그의 작은아버지 박동석은 1951년 7월 강원도 고성지구 전투에서 20세의 나이로 전사하여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아버지 박동방은 6·25전쟁에서 미7사단 31연대 기갑대대 소속으로 경기지구 전투에 참전하여 두 귀의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1950년 10월에 명예제대한 후 평생 전상의 후유증을 안고 살다 2005년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때같은 자식들을 위해 평생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갖은 고생을 다 하였다. 혹자는 전쟁 때 고생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3년 전 온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천안함 46용사 중 막내뻘인 고(故) 박정훈 병장의 아버지가 바로 그, 박대석이다.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던 바다, 그가 해군에 복무할 당시 출동했던 그 백령도 바다에 아들과 함께 천안함이 가라앉았다. 해군에 입대하라고 적극 권유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바다에 묻고 내 탓이라며 지금도 자책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에서 만도는 아들 진수를 만났다. 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고, 아들은 한쪽 다리가 없지만 그 둘은 함께 살아가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박대석에게는 다시 돌아와 ‘아부지!’ 하고 불러줄 아들 정훈이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전쟁으로 야기된 혈육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천안함 폭침 3주기가 지나고 조국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잔인한 6월’이다. 천안함 46용사의 가족들을 비롯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가족들이 그들의 장한 아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아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유족들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희생이 점차 국민들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안타까움도 그 못지않게 유족들을 슬프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호국보훈의 달에는 박대석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박정훈 병장의 모교인 대광고등학교에서 ‘천안함 순국 추모비’를 건립해 추모비 제막식을 갖기로 했다. 조국을 수호하다 순국한 박정훈 병장과 천안함 46용사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잊지 않고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의 보훈의식이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피를 흘려야 할 때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남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일제 강점하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피를 흘렸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서 우리의 젊은이들뿐 아니라 유엔 참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이들의 피흘림과 숭고한 희생 위에 지금의 번영된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유공자의 희생에 감사하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희생을!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 [정전협정 60년] 군사분계선에서 2㎞씩 후퇴 DMZ 설치

    [정전협정 60년] 군사분계선에서 2㎞씩 후퇴 DMZ 설치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대표와 북한·중국군 대표가 사인한 정전협정은 6·25 전쟁 중지를 문서로 약속한 것이다. 협정 체결까지 본회담 159회, 분과위원회 회담 179회, 참모장교 회담 188회, 연락장교 회담 238회 등 2년간 총 765회의 회담을 거쳐 역사상 가장 긴 정전 협상으로 꼽힌다. 협정문은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군사분계선 획정과 그로부터 2㎞씩 후퇴해 만든 비무장지대(DMZ)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임무, 전쟁포로 교환 등 군사 부문과 정치회담 소집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정전협정 체결의 후속 조치로 평화체제 논의가 이뤄졌던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 정치회담은 87일 만에 성과 없이 끝났다. 한반도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무력 충돌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대가 됐다. 북한은 지난 3월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이후 미국과의 대화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이 정전협정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미 직접 대화만을 통한 정전체제 협상을 고수해 왔다. 1991년 한국군 장성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수석대표가 되자 북한과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1994년 4월과 12월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하는 등 정전협정을 무력화시켰다. 북한의 주장은 국제관례에도 맞지 않다. 정전협정의 서명자와 당사자를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는 대남 전술일 뿐이다. 정전협정은 군사 조약으로, 교전 쌍방의 군 수장이 교전자들을 대표해 체결하는 게 관례다. 협정 서명을 유엔군 대표가 했더라도 협정 당사자는 한국과 서명 당시 참전한 16개국이 모두 포함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씨줄날줄] 켈로 부대와 카투사/손성진 수석논설위원

    6·25의 전황을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킨 장진호 전투. 유엔군이 주도한 두 작전에는 숨은 한국군 영웅들이 있었다. 바로 켈로 부대원들과 카투사다. 켈로 부대로 불리는 KLO 부대는 미군이 1949년 6월 조직한 비정규 첩보부대였다. 1950년 9월 14일 저녁 7시. 켈로 부대원들은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았다. 최규봉 대장과 미군들은 어둠을 뚫고 팔미도에 침투해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손에 넣었다. 9월 15일 0시 12분, 이들이 등댓불을 밝힘으로써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첩보부대의 성격상 그들은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원자력 학계의 원로 이창건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1학년에 다니다 이 부대의 기획참모로 참전했다. 이 박사는 몇년 전 ‘KLO의 한국전 비사’라는 책을 써 활약상을 알렸다. 800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켈로 부대원들은 군번이나 계급, 군적이 없다. 최근 정부가 부대원들이 점호를 받는 모습, 침투하기 직전 모습, 작전지도 등을 확보해 보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6·25 전투 중 가장 처절한 전투로 남은 장진호 전투.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동부전선 장진호 주변 산악에 매복하고 있었다. 미군은 계곡을 따라 북진하다 11월 27일 밤부터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병사들은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12월 1일까지 혹한 속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살아 돌아온 미군은 385명뿐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병력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의 진출을 2주나 지연시키는 전과를 남겼다. 이 전투에서 한국인 카투사 875명도 숨졌다. 카투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싸우고 얼어붙은 발걸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카투사(KATUSA)는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다. 첫 카투사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징집됐다. 이들은 1950년 8월 16일부터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달도 안 되는 훈련을 마친 카투사들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지형을 잘 아는 카투사들은 말이 잘 안 통했지만 미군들에게는 중요한 존재였다고 한다. 카투사는 혜산진 점령, 펀치볼 전투 등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참전 당시 갓 스물의 나이였던 켈로 부대와 카투사 용사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 팔순을 넘겨 이미 상당수가 고인이 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전공(戰功)도 점점 잊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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