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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유리, 현충일 맞아 목소리로 유해발굴감식단 알린다

    성유리, 현충일 맞아 목소리로 유해발굴감식단 알린다

    배우 성유리가 6월 호국보훈의 달이자 6일 현충일을 맞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홍보 영상에 재능기부를 했다. ‘10년, 약속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영상에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지난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이 담겨 있다. 내레이션을 담당한 성유리는 “이런 국가적인 중요 사업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전사자 유해가 하루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 영상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홍보 영상은 한국어와 영어 버전으로 각각 제작됐다. 특히 영어로 제작된 영상은 미국, 호주 등 6.25전쟁에 참전한 21개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 주요 50개국의 한인회 커뮤니티등에 올려 외국인 참전용사의 참여를 이끌어낼 예정이다. 유해발굴감식단 홍보대사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6.25전사자 유해가 차가운 땅속에서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조차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영상을 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유해발굴감식단 단장인 이학기 대령은 “유해발굴사업의 성과를 높이려면 무엇보다 6.25전사자 유해소재에 대한 제보 및 유가족들의 유전자 시료채취가 매우 중요하다”며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지금까지 혜리·진구·박하선 등 배우들과 함께 영상을 제작했으며, 앞으로 더욱 다양한 영상 캠페인을 통해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할 예정이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잊지 않겠다” 문 대통령, 현직 첫 무연고 묘지 참배

    “잊지 않겠다” 문 대통령, 현직 첫 무연고 묘지 참배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것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며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것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두 주먹 불끈 쥐고 거리에 나선 것도 모두 평범한 우리의 이웃, 보통의 국민들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가족과 이웃을 위한 따뜻한 마음과 의로운 삶이 바로 대한민국을 지탱한 힘이었음을 강조했다. 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무연고 묘지를 참배해 국가 유공자를 국가가 끝까지 잊지 않고 기리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올해 현충일 슬로건 ‘428030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에도 이런 의미가 담겼다. 428030은 현충원을 비롯한 10개의 국립묘지에 안치된 안장자 수다.  2006년 아이를 구하고 숨을 거둔 채종민 차량 정비사, 2009년 교통사고를 당한 이를 돕다 숨진 어린이집 금나래 교사와 김제시 농업기술센터 황지영 행정인턴, 2016년 화재 현장에서 이웃을 대피시키고 숨을 거둔 대학생 안치범씨.  문 대통령은 먼저 이들을 차례로 호명하며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처럼 평범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며 “대한민국은 결코 그분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독립유공자나 참전용사 등 전통적 개념의 애국자처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다는 거창한 뜻을 품진 않았으나, 가족과 이웃을 지키고자 한 평범한 시민의 ‘일상의 용기’가 바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원동력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애국의 의미를 확장하며 인식의 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날 문 대통령이 무연고 묘지를 찾은 것도 의미가 깊다. 추념식이 열린 10시보다 10여분 정도 앞서 도착한 문 대통령 내외가 먼저 찾은 곳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고(故) 김기억 육군 중사 등이 안장된 무연고 묘지였다.  문 대통령은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으로부터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셔서 자녀도 없고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서 가족이 없는 분들의 무연고 묘소가 많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 무연고 묘지가 몇 기가 있는지 등을 묻고 헌화, 참배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추념식에 앞서 무연고 묘지에 먼저 들른 것을 두고 유가족이 없어 잊혀가는 국가유공자를 국가가 끝까지 잊지 않고 기리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추념식을 마치고선 현충원에서 열린 순직 소방공무원 추모식에 발걸음을 했다. 지난 3월 유기견 구조활동을 벌이다 교통사고로 숨진 김신형 소방장과 김은영·문새미 소방사가 이곳에 안장됐다. 문 대통령은 독도의용수비대 묘역과 세월호 승무원 승직자 3명이 안장된 의사상자 묘역, 천안함 46용사 묘역, 제2연평해전 전사자·연평도 포격 도발 전사자 묘역을 차례로 찾아 묵념했다.  추념식장에는 가수 최백호씨의 음성으로 김민기 작곡 ‘늙은 군인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직업군인의 애환을 담아낸 곡인데도 군인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유신체제에선 부르지 못하게 했다.  배우 한지민씨가 낭송한 이해인 수녀의 시 ‘분단과 분열의 어둠을 걷어내고, 조금씩 더 희망으로 물들어가는 이 초록빛 나라에서 우리 모두 존재 자체로 초록빛 평화가 되게 하소서’에 이날 현충일 행사의 의미가 함축됐다고 볼 수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문 대통령 “남북관계 개선되면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우선 추진”

    문 대통령 “남북관계 개선되면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우선 추진”

    오늘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계획도 언급‘의인’들 이름 한 명씩 부르며 추모하기도현충일인 6일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비무장지대의 유해발굴을 우선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군 등 해외 참전용사들의 유해도 함께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비무장지대(DMZ)에서의 유해발굴 계획을 언급하면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군인과 경찰의 유해발굴도 마지막 한 분까지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설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은 중국 정부 협력으로 임정(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내년 4월 완료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대전현충원에서 정부의 현충일 추념식이 열린 것은 1999년에 이어 두 번째다. 대전현충원은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 및 군인 위주로 묘역이 조성된 서울현충원과 달리 의사상자와 독도의용수비대, 소방, 순직공무원 묘역까지 조성돼 있어 이날 행사는 마지막 한 사람의 희생자까지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문 대통령은 “국가유공자의 진정한 예우는 국가유공자와 유족이 자부심을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면서 “그분들의 삶이 젊은 세대의 마음 속에 진심으로 전해져야 하며, 우리 후손이 선대의 나라를 위한 헌신을 기억하고 애국자와 의인의 삶에 존경심을 가지도록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애국과 보훈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일 수 없다”면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에 국민께서 함께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라며, 그것이 대한민국의 힘이 되고 미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의인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2006년, 카센터 사장을 꿈꾸던 채종민 정비사는 9살 아이를 구한 뒤 바다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2009년, 김제시 농업기술센터 황지영 행정인턴과 어린이집 금나래 교사는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돕다가 뒤따르던 차량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6년, 성우를 꿈꾸던 대학생 안치범 군은 화재가 난 건물에 들어가 이웃들을 모두 대피시켰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들의 희생이 “유가족에겐 영원한 그리움이자 슬픔이지만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용기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면서 “이웃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의로운 삶이 됐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하루가 비범한 용기의 원천이 됐다”고 추모했다. 또 “그것이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처럼 평범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구조 활동을 하던 세 명의 소방관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교육생이었던 고 김은영·문새미 소방관은 정식 임용 전이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면서 “똑같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데도 신분 때문에 차별받고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두 분을 포함해 실무수습 중 돌아가신 분들도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소방공무원임용령을 개정했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문 대통령 “애국과 보훈에 보수·진보 따로 없다”[전문]

    문 대통령 “애국과 보훈에 보수·진보 따로 없다”[전문]

    문재인 대통령은 6일 현충일을 맞아 “애국과 보훈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일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우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이 모두 우리의 이웃이었고 가족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로 아끼는 마음을 일궈낸 대한민국 모든 이웃과 가족에 대해 큰 긍지를 느낀다”며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지키고자 할 때 우리 모두는 의인이고 애국자”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애국영령과 민주열사 외에도 어린이를 구조하다 숨진 자동차 정비사, 교통사고 피해자를 돕던 중 사망한 어린이집 교사, 화재 현장에서 이웃을 대피시키다 숨진 대학생 등 의사자들을 차례로 호명했다. 이를 통해 보훈 대상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한편, 보훈의 외연도 넓히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어 “저는 오늘 무연고 묘역을 돌아보았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김기억 중사의 묘소를 참배하며 국가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며 “대한민국은 결코 그 분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기억하고 끝까지 돌볼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군인과 경찰의 유해 발굴도 마지막 한분까지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비무장지대의 유해발굴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군 등 해외 참전용사들의 유해도 함께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안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보고 싶은 사람을 가슴 깊숙이 품고 계신 분들을 여기 오는 길 곳곳에서 마주쳤습니다. 저는 오늘 예순세 번째 현충일을 맞아, 우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이 모두 우리의 이웃이었고 가족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 여러분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표하며, 유가족께 애틋한 애도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역사는 우리의 이웃과 가족들이 평범한 하루를 살며 만들어온 역사입니다. 아침마다 대문 앞에서 밝은 얼굴로 손 흔들며 출근한 우리의 딸, 아들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일궈온 역사입니다. 일제 치하,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것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며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것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두 주먹 불끈 쥐고 거리에 나선 것도, 모두 평범한 우리의 이웃, 보통의 국민들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대부분의 사람들도 우리의 이웃들이었습니다. 이곳, 대전현충원은 바로 그 분들을 모신 곳입니다. 독립유공자와 참전용사가 이곳에 계십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전사자, 천안함의 호국영령을 모셨습니다. 소방공무원과 경찰관, 순직공무원 묘역이 조성되었고 ‘의사상자묘역’도 따로 만들어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2006년, 카센터 사장을 꿈꾸던 채종민 정비사는 9살 아이를 구한 뒤 바다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2009년, 김제시 농업기술센터 황지영 행정인턴과 어린이집 금나래 교사는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돕다가 뒤따르던 차량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6년, 성우를 꿈꾸던 대학생 안치범 군은 화재가 난 건물에 들어가 이웃들을 모두 대피시켰지만 자신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유가족들에게는 영원한 그리움이자 슬픔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용기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웃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의로운 삶이 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하루가 비범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처럼 평범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에게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곁에서 지켜줄 것이란 믿음 때문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 국가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도 모든 것을 국가에 바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저는 오늘 무연고 묘역을 돌아보았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김기억 중사의 묘소를 참배하며 국가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물둘의 청춘을 나라에 바쳤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연고 없는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결코 그 분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기억하고 끝까지 돌볼 것입니다. 모든 무연고 묘소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에 헌신했던 믿음에 답하고, 국민이 국가에 믿음을 갖게 하는, 국가의 역할과 책무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보훈은 국가를 위한 헌신에 대한 존경입니다. 보훈은 이웃을 위한 희생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이 새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보훈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기본입니다. 우리 정부는 모든 애국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훈을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잘 모시지 못했습니다. 이제 독립유공자의 자녀와 손자녀까지 생활지원금을 드릴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스럽습니다. 지난 1월, 이동녕 선생의 손녀, 82세 이애희 여사를 보훈처장이 직접 찾아뵙고 생활지원금을 전달했습니다.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석, 국무령,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 20여 년간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이제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여사님의 말씀이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 정부는 국가보훈처를 장관급으로 격상시켰고 보훈 예산규모도 사상 최초로 5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올해 1월부터, 국립호국원에 의전단을 신설하여 독립유공자의 안장식을 국가의 예우 속에서 품격 있게 진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생존해계신 애국지사의 특별예우금도 50% 올려드리게 되었고, 참전용사들의 무공수당과 참전수당도 월 8만 원씩 더 지급해 드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근조기를 증정하는 훈령도 제정했습니다. 6월 1일 첫 시행되는 날, 국가유공자 김기윤 선생의 빈소에 대통령 근조기 1호를 인편으로 정중하게 전달했습니다. 8월에는 인천보훈병원이 개원합니다. 국가유공자들이 가까운 곳에서 의료와 요양을 받을 수 있도록 강원권과 전북권에도 보훈요양병원을 신설하고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전문재활센터를 건립할 예정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시에 설치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복원은 중국 정부의 협력으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내년 4월까지 완료할 계획입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군인과 경찰의 유해발굴도 마지막 한 분까지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비무장지대의 유해발굴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미군 등 해외 참전용사들의 유해도 함께 발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을 위한 모든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법령도 정비했습니다. 지난 3월, 구조 활동을 하던 세 명의 소방관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교육생이었던 고 김은영, 문새미 소방관은 정식 임용 전이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똑같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데도 신분 때문에 차별받고 억울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두 분을 포함해 실무수습 중 돌아가신 분들도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소방공무원임용령을 개정했습니다. 오늘 세 분 소방관의 묘비 제막식이 이곳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눈물로 따님들을 떠나보낸 부모님들과 가족들께 각별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의 진정한 예우는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분들의 삶이 젊은 세대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이 선대들의 나라를 위한 헌신을 기억하고 애국자와 의인의 삶에 존경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애국과 보훈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일 수 없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에 국민들께서 함께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힘이 되고 미래가 될 것입니다. 지방자치단체별로 국가유공자의 집을 알리는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별로 모양도 각각이고 품격이 떨어지는 곳도 있습니다. 정부가 중심 역할을 해서, 국가유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저는 오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로 아끼는 마음을 일궈낸 대한민국 모든 이웃과 가족에 대해 큰 긍지를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지키고자 할 때 우리 모두는 의인이고 애국자입니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애국 영령과 의인, 민주열사의 뜻을 기리고 이어가겠습니다. 가족들의 슬픔과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보듬을 수 있도록 국가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6월 6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 재 인』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스타벅스 떠나는 슐츠회장, 2020년 대선 출마 첫 시사

    스타벅스 떠나는 슐츠회장, 2020년 대선 출마 첫 시사

    “오랫동안 깊이 미국을 염려 사회 환원 역할 공직도 포함” ‘스타벅스 신화’를 창조한 하워드 슐츠(65) 회장이 이달 말 영광을 뒤로한 채 스타벅스를 떠난다. 스타벅스는 4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슐츠 회장이 오는 26일 공식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후임 회장은 JC 페니 백화점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마이런 얼먼, 부회장에 영화감독 조지 루커스의 부인이자 아리엘 인베스트먼트 사장 멜로디 홉슨이 각각 선임됐다고 스타벅스 이사회가 밝혔다. 슐츠 회장은 직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스타벅스는 수백만 명이 커피를 마시는 방식을 바꿨다. 이것은 진실”이라며 “우리는 또 전 세계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의 삶도 개선했다”고 강조했다. 1982년 스타벅스에 마케팅 책임자로 합류한 슐츠는 독특한 경영 철학과 전략을 선보여 ‘경영 혁신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11개 매장을 가진 시애틀의 소규모 커피 체인점이던 스타벅스를 36년 만에 세계 77개국에 매장 2만 8000여개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슐츠 체제에서 스타벅스의 재정적 성공은 엄청나다”며 “1992년 기업공개 이후 주가는 무려 2만 1000%나 수직 상승했다. 그때 1만 달러(약 1070만원)를 투자했다면 지금 200만 달러(약 21억 4000만원) 이상을 벌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의 사임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오는 2020년 차기 민주당 대선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돼 온 슐츠 회장이 처음으로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타벅스를 경영하며 인종과 성 소수자, 참전용사, 총기 폭력, 학생 부채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추측이 난무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더 만들어 내지 않고 솔직하고 싶다”며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대해 깊이 염려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의 다음 챕터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내가 (사회에) 되돌려주는 데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라며 “다양한 옵션을 생각할 것이고 여기에는 공직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NYT는 전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굴복 안 한 카타르 굴욕당한 사우디

    “소국 카타르가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의 봉쇄에서 승리했다.” 사우디 주도로 이집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UAE) 등 수니파 아랍국가들이 대(對)카타르 봉쇄에 돌입한 1주년을 하루 앞둔 4일(현지시간) 미국 외교정책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사우디가 주도한 아랍 연합은 카타르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인구 270만의 소국 카타르의 영향력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알자지라는 “카타르 봉쇄는 오히려 사우디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전했다. 예멘에 참전한 아랍 연합군에서 카타르가 빠지면서 전력이 약해졌고, 대외적으로는 한 국가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나쁜 평판까지 얻게 됐다는 지적이다. 포린폴리시는 “당시 사우디의 목적은 카타르를 사실상 가신 국가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면서 “그러나 결과적으로 좌절을 겪은 것은 사우디 등 아랍 4개국이었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단교와 봉쇄에 따른 부정적 영향은 일시적이었다. 경제적 충격은 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6월 5일 사우디는 카타르가 적성국 이란과 밀착하고 무슬림형제단 등 테러리스트를 지원한다고 맹비난하며 단교 조치와 함께 해상과 육로 봉쇄에 돌입했다. 아랍 연합은 외교 정상화와 봉쇄 해제 조건으로 이란과의 외교 단절, 무슬림형제단 등과의 관계 단절 등 13개 조건을 내밀며 카타르의 백기 투항을 압박했다. 하지만 카타르는 사우디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13개 조건도 내정간섭이란 명분으로 버티기에 돌입했다. 소비재의 약 80%를 수입하는 카타르는 봉쇄 직후 ‘뱅크런’과 ‘생필품 사재기’ 등 혼란을 겪었지만 석유와 천연가스 등으로 확보한 막강한 자금력으로 봉쇄를 극복했다는 평가다. BBC에 따르면 카타르는 지난해 7월부터 최근까지 독일 등지에서 비행기를 통해 젖소를 수입하며 유제품 소비량을 충족했다. 봉쇄 이전에는 젖소가 한 마리도 없었던 카타르는 현재 수도 도하 인근 사막에 만든 목장에서 1만 마리를 키우고 있다. 또 터키, 오만 등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국부펀드에서 약 400억 달러(약 42조 8000억원)를 투입해 경제도 안정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서울포토] 노병의 경례와 문재인 대통령

    [서울포토] 노병의 경례와 문재인 대통령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에 참석한 6.25 참전용사 장현섭씨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2018. 6. 5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 6·25전쟁 당시 희귀 컬러 사진 239장 공개

    6·25전쟁 당시 희귀 컬러 사진 239장 공개

    6·25 전쟁 당시인 1950년대 한국의 생활상을 담은 희귀한 컬러 사진 239장이 5일 공개됐다. 공개된 사진 중에는 현재 철거된 대전 도심의 영렬탑과 주변 모습, 대전역과 신흥동 제3발전소, 1990년대 없어진 대전 둔산지구 비행장, 6·25전쟁 당시 파괴된 수원화성 장안문·팔달문의 등의 모습이 담겼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사진이 지역 향토사 연구에 매우 가치가 있는 기록물이라고 평가했다. 육군이 이날 공개한 사진은 6·25전쟁 당시 미군으로 참전한 토마스 상사(1910∼1988)가 당시 한국의 생활상을 35mm 필름카메라로 찍은 것들이다. 그는 6·25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 당시 찍은 사진을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보관해 왔는데, 3년 전 외가에 들른 외손자 브랜던 뉴턴(Brandon D. Newton) 대령이 우연히 발견, 빛을 보겠다. 주한 미 8군 소속 1지역대(Area Ⅰ) 사령관으로 복무 중인 뉴턴 대령은 해당 사진이 한국의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사진임을 깨닫고 외할아버지의 소중한 유산을 한국군 기증하기로 했다. 사진을 기증받은 육군은 고증작업을 거쳐 이날 일반에 공개하게 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규원 원장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원

    이규원 원장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원

    이규원(가운데) 치과원장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4일 인천 중구 인천학생 6·25참전관에서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월드투게더, 치과의원 관계자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 5차 후원금 1000만원을 전달했다. 2013년부터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 후원금을 기부한 이 원장은 올해까지 5차례에 걸쳐 총 5000만원을 후원했다. 이규원 치과원장 제공
  • 종전선언은 국제 조약 아닌 합의…평화협정까지 정치적 구속력

    종전선언은 국제 조약 아닌 합의…평화협정까지 정치적 구속력

    한국전 정전협정 65년간 지속 평화협정 체결 땐 평화체제 전환 정전·평화협정 참가국 달라도 돼 지난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으로 싱가포르에서 남·북·미 정상의 한국전쟁 종전선언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65년 만에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종전선언에서 평화체제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한 정치적·국제법적 궁금증을 문답 형식으로 짚어본다.→종전선언은 왜 필요한가. -통상 무력 공방을 전쟁으로 보지만 국제법에서 전쟁은 ‘기술적이든 실질적이든 둘 이상 국가 간의 적대적 상호 행위’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멈췄지만, 남북은 적대적 상호 행위를 해왔다. 따라서 모든 적대적 행위를 끝내자는 뜻에서 종전선언을 추진한다. 종전선언은 국제법상 조약이 아니라 정치적인 선언이다. 하지만 정상 간 합의가 공표되는 만큼 향후 평화협정 체결 때까지 평화 구축 행위를 지속하겠다는 정치적 구속력이 생긴다. 정치적 선언인만큼 참가국, 형식 등은 자유롭다. 현재는 남·북·미 3자 간 종전선언이 유력하다. →정전협정은 왜 65년이나 지속됐나. -한국전 정전협정은 역사상 가장 길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통상 정전협정은 길어야 수개월이다. 당시에도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점으로 전쟁을 멈추고 3개월 내에 법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회담을 열기로 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실제 1954년 4월 27일부터 6월 15일까지 남한, 유엔군 참전국, 북한, 중국, 구 소련(러시아) 등이 참가한 제네바 정치회담이 열렸다. 한반도 통일 방안이 핵심의제로 논의됐지만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의 대치 속에 결렬됐고, 결과적으로 정전체제는 65년간 진행 중이다. →정전협정을 끝내려면. -전쟁을 끝낸다는 법적인 문서, 즉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된다. 종전선언이 통상 평화협정의 1조가 되고, 법적 효력을 얻는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정전협정으로 시작됐던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공식 전환된다. 평화체제가 유지, 심화돼 평화 공존이 공고화·제도화되면 문재인 정부의 목표인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정착’ 상태가 된다. →정전협정 참가국이 평화협정을 맺는 건가. -아니다. 한국전 정전협정은 유엔군(미군), 중국군, 북한군 등의 군 사령관이 맺은 국제법상 조약이다. 평화협정도 국제법상 조약이지만 통상 국가 정상들이 서명을 한다. 따라서 반드시 정전협정 참가국이 평화협정 참가국과 동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실제 세계1차대전의 경우 1918년 11월 독일군과 연합군이 정전협정을 맺었지만 평화협정인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은 28개국이 서명했다. 결국 국제법상 한반도 평화체제를 가장 잘 지킬 국가끼리 평화협정을 맺으면 된다. 가장 유력한 그림은 남·북·미·중 4자의 평화협정 체결이다. 당사자인 남북한과 한반도 안보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미·중이 참여해야 평화협정의 실효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까지 포함시키자는 주장도 있고, 나아가 유럽 등 다자 간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이 위헌 소지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헌법 3조에는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정의한다.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협정에 남북 간 기본관계를 설정하면 북한을 국가로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꼴이 돼 위헌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기범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선 평화협정을 맺은 뒤 남북 간 기본 관계는 상황을 봐가면서 따로 조약을 맺으면 된다”며 “또 국내법상 위헌은 국제법상 조약인 평화협정의 효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평화협정을 맺어도 미국 국회 비준이 불가능한 구조라던데. -꼭 그렇진 않다. 물론 국제 조약(Treaty)은 미 의회의 비준을 받는 게 쉽지 않다. 상원의 3분의2가 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간 미 의회가 비준하는 조약이 5개가량 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는 조약일 경우 비준을 받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김응교 교수-작가의 탄생] 더 낮은 곳으로… 순례하는 여행자, ‘손’보다 ‘발’로 먼저 쓴 서울 이야기

    [김응교 교수-작가의 탄생] 더 낮은 곳으로… 순례하는 여행자, ‘손’보다 ‘발’로 먼저 쓴 서울 이야기

    정말 칠십대 노인일까. 너무 젊게 보이는 그가 다가왔다. 낮게 웃는 편한 얼굴을 대하자 190㎝ 정도의 큰 키가 주는 위압감은 금세 사라졌다. 2013년 10월 12일, 동국대 정각원에서 그와 대담하기로 한 날이었다.“김 선생 작품 중 영어로 출판된 책이 있어요? 읽고 싶어요.” 만나자마자 상대의 책을 읽고 싶다고 묻는 외국 작가는 처음이었다. 후에 알았는데 그는 만나기로 한 작가가 있으면, 되도록 그의 작품을 읽고 만난다고 한다. 상대의 책을 읽고 만나려는 예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모두 겸손하게 받아줬다. ●“서울은 아름답게 반짝이는 깨진 유리 간직”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8)는 1940년에 프랑스 니스에서 영국계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개할 때 그는 프랑스혁명 때 공포정치를 피해 모리셔스 섬에 정착한 이민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하곤 한다. 태어나자마자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빈궁한 생활을 경험했고,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지냈던 체험은 그의 소설 곳곳에 나온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가 흑인이기를 꿈꿔 왔다. 아프리카에서 이 나라, 이 도시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그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난 어떤 이야기를, 어떤 과거를 혼자 지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은퇴할 나이가 되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프리카인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이해해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추억을 담아 이 작은 책을 썼다. (르 클레지오, ‘아프리카인’, 문학동네, 2005, 7~8쪽) 1960년 젊은 시절,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항하는 프랑스군에 참전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다는 그는 태국에서 지내며 유교, 도교, 불교적 가치를 익히기도 했다. 그는 늘 순례하는 여행자였다. 그의 노마드적 삶은 고독한 구도자의 순례길이었다. 그가 살아온 이력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한 인물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외된 사람들, 제3세계의 시각에서 그는 글을 써 왔다. 단순한 이국인의 눈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설 속에 들어가 그늘진 등장인물의 말을 대신해 주려고 한다. 작중인물에 작가가 거의 빙의(憑依)된 상태라고나 할까. 어릴 때 아버지가 보는 잡지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처음 봤던 그는 2001년에 한국을 방문하고 독학으로 한글을 공부한다. 2007년부터 1년간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지내며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 윤동주 시 ‘별헤는 밤’, 황석영 소설 ‘삼포 가는 길’, 이청준 소설 ‘예언자’를 좋아합니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문학 작품도 대부분 여행이나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담은 작품들이다. 지난해에 낸 중편소설 ‘빛나’를 읽으면 그가 서울을 샅샅이 몸으로 체험하며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는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 영상은 흐릿하기 일쑤다. 게다가 내가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도 금방 들킨다. 모든 사람이 유리창을 향해 있기에, 그들에게도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잘 보인다. 그런 면에서 버스가 훨씬 쉽고 편하다. 낮에는 창문으로 거리의 사람들을 마음껏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 클레지오, ‘빛나’, 서울셀렉션, 2017, 14쪽) 그는 손으로 쓰기 전에 발로 쓴다. 몸으로 세포로 체험해 보고 쓴 글이다. 이 소설에는 어떤 길이 있을까. “흥미로운 서울을 저는 ‘깨진 거울’로 생각합니다. 전체보다는 깨진 조각으로 빛나고 있는 유리 같아요. 그래서 서울은 다양한 인상을 줘요. 판타지가 넘치고, 다양한 상상력이나 감성이 충만합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깨진 유리를 서울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깨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이야기들이 나온다. 주인공 ‘빛나’는 전신이 마비된 다른 여성에게 서울에서 본 다섯 가지 이야기를 해 준다. 이야기들은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도 각기 나름의 빛을 반사한다. 처음엔 집중해서 읽기가 어렵다. 너무도 어려운 퍼즐 맞추기와 비슷하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빛나’, 190쪽)조금 맞추기 시작하면 조각난 이야기끼리 연결되면서 헤어나기 힘들 정도의 흡인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첫째, 열아홉 살 주인공 ‘빛나’는 전라도에서 자라다 서울로 왔다. 반지하방에서 쥐와 고군분투하던 빛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인 살로메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알바를 맡는다. 고단하게 살아가는 ‘빛나’는 청년실업시대의 청년이다. ‘빛나’는 얼굴 없는 스토커를 통해 대도시의 공포를 체험하기도 한다. 딸이 둘 있는 르 클레지오는 여성을 소설 주인공으로 쓰길 좋아하는데 이 소설 역시 여성이 주인공이다. 둘째, 희귀한 병에 걸려 전신마비가 된 채 죽어가는 40대 환자 살로메와의 만남이다. 대도시 서울에 사는 몸과 마음이 병든 ‘부서진 주체’의 모습이다. 병든 그녀는 더 재밌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빛나’를 따라다니는 스토커를 고용하기도 한다. 셋째, 비둘기를 키우는 조한수씨 부부 이야기다. 38선을 넘어오던 어릴 때, 조씨 어머니는 비둘기 한 쌍을 데려왔다. 나이가 든 조씨는 비둘기에게 북녘 고향땅으로 편지 나르는 훈련을 시킨다.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분단국가에서 살아가는 슬픈 실향민의 모습이다. 넷째, 미용실에 홀연히 나타난 키티라는 고양이 이야기다. 키티 목에 걸린 작은 가방에 쪽지를 넣으면서 주민들은 대화를 한다. 키티가 전해주는 신비한 이야기를 미용실 원장은 기다린다. 메신저 고양이의 역할에 어두운 동네에 작은 빛이 드리운다. 아파트에 고립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이어 주던 키티는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다. 다섯째, 나비라는 아이돌 가수의 길이다. 교회에서 찬양하면서 행복했던 나비는 목사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아픔을 이겨내고 가수의 길을 걷던 나비는 마침내 탐욕스러운 사내의 희생양이 되어 모든 걸 빼앗기고 목숨을 끊는다. 아이돌 스타의 성공과 슬픔, 그 그늘진 뒷골목이다. 여섯째, 부모에게서 버림받는 아이와 몰래 그 아이를 키우는 간호사 이야기다. 보육원에서 양부모를 기다리는 아기들과 달리 자란 나오미는 성장하면서 이상한 능력을 보인다.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 영혼이 병든 환자들, 분단으로 고통받는 실향민, 소비사회에서 소비되는 아이돌,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등 작가가 조명하는 여섯 가지 순례길은 외면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변인 곁으로 다가가는 그의 관심은 제주도 해녀를 담은 소설 ‘폭풍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2011년 명예 제주도민이 됐다. 작가는 방배동 서래마을, 신촌, 당산동, 오류동 등 서울 곳곳을 조명한다. “서울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살아요. 다채로운 이야기와 신화가 창조되는 서울은 ‘다층성’이 두드러지는 공간이지요. 풍부한 상상이 가능한 공간입니다. ”서울의 다층성을 강조하는 그의 말대로, 이 작품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한다. 대도시의 풍광, 분단 문제, 종교 문제, 대중문화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녹아 있다. 상황 설정이나 섬세한 묘사가 자연스러워 읽다가, 가끔 한국인이 쓴 소설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황금물고기’ ‘라가’ ‘빛나’에는 비극적인 운명에 견디며 맞서는 인물들이 나온다. 이 모든 이야기를 나누던 살로메가 세상을 등지고 ‘빛나’는 단독자로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빛나’, 237쪽) ‘빛나’라는 이름은 ‘빛나다’에서 만든 이름이다. 화려한 도시 이면에 울적한 어둠을 담아낸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빛나’라는 제목처럼 빛나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 곁으로 처음 만났던 6년 전 그날, 그는 넘어져 팔을 크게 다쳐 병원에 들러 일곱 바늘을 꿰매고 왔다. 오랜 강연과 대담을 마치고 사람들이 그 곁으로 와서 사진 찍으려 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계속 사인해줬다. 사진 찍기를 바라는 분들을 외면치 않고 나직하게 웃으며 받아주셨다. 사진 찍다가 옆에 앉은 나에게 또 “김 선생의 비평이든 작품을 읽고 싶다”고 또 말했다. 나는 선생님 귀에 가까이 대고 소곤대듯 말씀드렸다. “선생님 저는 수준이 낮은 작가예요.”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내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내라는 뜻일까. 그 미소와 큰 손길이 고마웠다.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다가 광화문에서 시위대를 만났다. 그는 저 시위는 어떤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세세히 물었다. 그날, 왜 그가 모리셔스 섬을 점령한 영국을 부당하게 생각하여 아버지의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작가 언어’로 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이민자들은 사회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했던 그의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촛불혁명을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평가하는 르 클레지오는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모든 사람, 특히 낮고 상처받은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는 문사다. 시인·숙명여대 교수
  • 에스원 “6·25 전사자 가족을 찾습니다”

    에스원 “6·25 전사자 가족을 찾습니다”

    종합 보안기업인 에스원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국 유해의 귀환을 돕는 홍보 활동에 나선다. 에스원은 지난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과 6·25 전쟁 전사자 유가족 시료채취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올해 2년째 국유단을 돕는다. 현재까지 9800여위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이 중 신원이 확인된 것은 128명에 불과하다. 직계 유가족이 많지 않고, 전쟁 경험 세대가 80세 이상 고령자가 많아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이유에서다. 이에 에스원은 전국 단위의 출동 인프라를 활용해 유가족 시료 채취 활동을 알리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전국 고객이 80여만명에 이르고 노인복지회관, 참전 유공자회 등 관련 고객층도 두텁다”고 설명했다. 에스원이 홍보에 나선 지난해 6, 7월 두 달 동안 연간 전체 DNA 채취 건수의 32%가 집중되는 등 효과가 컸다. 에스원 임직원 가족들도 DNA 채취에 참여했다. 에스원은 이달부터 ‘대한민국 영웅, 명예 찾기’ 안내문을 고객 이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배포하고, 전국 지사 출동차량에도 안내문을 붙이는 등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행진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행진

    영국의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 31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전투 추모공원에서 열린 영국군 글로스터대대 추모식에 참가해 행진하고 있다. 설마리전투는 1951년 4월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 5700여명이 중공군 3만여명의 남하를 저지한 전투다. 연합뉴스
  • “1953년 가을, 부친은 큰아들 유골함을 받고 대성통곡하셨다”

    “1953년 가을, 부친은 큰아들 유골함을 받고 대성통곡하셨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김우종 ▲인천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 ▲해병 6기로 참전·전사 (군번 9210662) 김우종(17세 참전·18세 전사)1933년 4월 10일 : 인천 영종도 중산리 출생1947년 : 인천영종국민학교 졸업(제24회)1950년 12월 18일 : 인천중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인천을 출발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감.1951년 1월 24일 : 마산에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해 참전.1951년 8월 31일 : 강원도 월산령 김일성고지에서 전사.아랫글은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월간 서해문화 2002년 1월호에 ‘불멸의 꽃!’으로 기고한 글이다. 고(故) 김우종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김우종 참전기’를 대신한다. ‘불멸의 꽃!’ (6·25 전사 인천 학생 사연) 인천학생·스승 6·25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에서는 1996년 7월 15일 창립 이래로 그동안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 많은 6·25 전사 인천 학생들을 찾았으나 아직도 미확인 6·25 참전 전사 인천 학생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확인된 전사자의 묘지를 기록에 담기 위해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그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바 있으며 전사자 위패 또한 일일이 확인하였다. 인천 각지에 흩어져 잠들고 있는 6·25 참전 전사 학생들에 대하여 월간 서해문화에 ‘불멸의 꽃! 6·25 전사 인천학생’으로 연재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6·25 전사 인천 학생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점차 잊혀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우리들이 한 번쯤 함께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뜻 있는 길이라 기록한다.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 학생들 유골 1950년 6·25 사변 발발 후 전쟁이 한창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님 품에 안기게 된 군대 갔던 아들들의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마음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부모님들은 거의 모두 돌아가시고 그 전사자의 형제들마저 노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전사자들의 형제들은 5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6·25 사변 때 전사한 동생이나 형의 무덤을 더 이상 관리하기가 어려워 자신들의 마음이 무겁다면서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길을 본 편찬위원회에 문의해 오는 것이었다. 육군본부 민원실에 알아보았던 바 이장(移葬) 양식(월간 서해문화 1998년 9월호 게재)을 참고하여 대전 현충원까지 모시고 오면 대전 현충원 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첫 번째 6·25 전사 인천 학생 유골 이장 국방부 이장 양식에 따라 대전 현충원 문 앞까지 가기까지의 일은 유가족 입장에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어느 유가족이 국립묘지에 이장할 수 없는가 하는 물음이 있었다. 이에 본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원장은 국방부에 타진하여 이장 방법을 서해문화 1998년 9월호에 자세히 게재한 바 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 있는 해병 6기 전사자 김우종의 묘를 2001년 5월 27일에 국립묘지로의 이장하는 첫 번째 이장 계획을 수립하였다.故 김우종의 동생 김문종의 증언 고 김우종의 동생 김문종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2월 18일 새벽에 김우종이 인천 영종도 집을 떠날 때 김우종 아버지는 “그 무거운 책은 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때 김우종은 “아버지 염려 마세요. 우리들은 남하하더라도 공부는 계속할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김우종은 영종 나루터까지 걸어가서,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 대원들과 같이 나룻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가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출정식을 마치고 마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가서, 해병대 신병 모집에 응하여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였다.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묘 이장1953년 가을 아들의 전사통지서와 유골함을 받고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부친은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리고 마을 뒷산(인천 영종도 중산리 월촌) 양지바른 곳에 묻으시고 해마다 아들을 기리는 제를 지내주셨다. 1998년 3월 29일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에서는 김우종 유가족의 협조하에 국방부와 대전 현충원 등에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유골을 이장하는 것에 대하여 승인을 받는 노력을 하였다. 2001년 5월 27일 인천광역시 영종도에 묻혀 있는 김우종 전사자의 무덤을 열어 유골을 수습한 후 대전 국립 현충원 제1 묘역 제27구역 16129에 안치하였다. 6·25 전사 인천 학생 묘의 이장 사업 계획 인천 학생·스승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기 위하여 창립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김우종 전사자와 같이 아직도 고향 땅에 묻혀 있는 6·25 전사 인천 학생들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기는 이장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11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인천중학교 4학년 김우종은 마산까지 저의 아버지와 같이 내려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하였습니다.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김우종을 기억합니다. 김우종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김우종이 공부했던 제물포 고교 운동장 한편에 김우종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6·25 참전사편찬위원장)이 사비 4억원을 들여서 6·25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관을 건립하여 인천 중구청에 기부채납하려는 제안을 인천 중구청은 거절하였다. 추모관 기부채납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현 85세)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참전 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초대 관장
  • “혹한의 장진호 전투, 피가 얼어붙어 살아남았다”

    “혹한의 장진호 전투, 피가 얼어붙어 살아남았다”

    “총에 맞아 철철 흐르던 피가 추운 날씨에 바로 얼어붙으면서 자연 지혈이 됐다. 그래서 살아남았다.”한국전쟁 당시 가장 참혹했던 격전지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던 엘리엇 소틸로(83)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또 다른 참전 군인은 “탄약이 다 떨어지고 차량마저 폭격으로 고장 나자 부상병들이 ‘우리를 버리고 이곳을 떠나라’고 등을 떠밀어 울면서 철수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이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5월 마지막주 월요일)를 기념해 27일(현지시간) 미주리주 스프링필드시에서 31번째 추모 행사를 벌였다. 이번 모임은 장진호 전투 다큐멘터리 관람과 전사자 추모 예배, 보은 만찬 등 1박 2일간 진행됐다. 워트링(85) 지회장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미 전역에 200여명의 동지가 살아 있었으나,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77명만 남았다”고 말했다. 참전 노병들은 선물로 받은 겨울 외투에 새겨진 태극기와 성조기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중국을 어쩌나…“北혈맹 인정해야” “연대보증 역할이면 충분”

    주한미군 철수 등 돌발 주장땐 북미 비핵화 대화국면 흔들려 정부, 조심스레 中과 접촉할 듯 북·미 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관심이 남·북·미 3자 종전선언 추진과 평화협정 체결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정치적 선언으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첫 관문이다. 미국이 한반도 종전 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해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중국의 참여 여부, 위상과 역할 조정이 불가피한 주한미군 문제, 유엔군 사령부 해체 문제 등 민감한 쟁점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중국 참여 문제는 북·미 정상회담 직후 종전선언 추진 단계에서부터 ‘뜨거운 감자’가 될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을 제외한 남·북·미 종전선언을 구상하고 있다. 선언적 의미의 종전선언에 굳이 중국이 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종전선언 이후 평화협정 체결 단계에 들어서면 중국은 북한을 지렛대 삼아 강력하게 참여를 요구해 올 것으로 예상된다.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의 중요한 제도적 틀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도 4·27 판문점 선언에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고 명시해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열어놨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공개 비난하는 등 미·중 갈등이 격화하고 있어 한국이 섣불리 나서 평화협정의 판을 주도해 설계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중국이 극단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나온다면 비핵화 평화체제의 판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북한과 혈맹 관계를 맺은 중국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조만간 조심스럽게 중국과 접촉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정재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28일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만만찮은데 중국을 배제하면 한반도 정세가 더 복잡하게 꼬일 수 있다”며 “자칫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튀어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전쟁에 중국 정규군이 아닌 인민 지원군이 참전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중국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면서 “남·북·미가 종전선언을 하고 북·미 간에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간에는 기본협정을 체결하면 된다”고 말했다. 중국이 끼고 싶다면 러시아와 함께 연대보증자의 역할만 하면 된다는 것이 조 선임연구위원의 생각이다. 평화협정은 적대 행위를 어떻게 멈출지 행위 주체별로 기술하는 것인데 북·중, 한·중, 미·중 어느 쪽도 현재 중국과 군사적 대치를 하는 곳이 없다. 따라서 중국이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로 들어와도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미국을 100% 신뢰할 수 없는 북한은 체제보장과 직결된 평화협정 체결 과정에 중국을 끌어들이려 할 가능성이 크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남·북·미 3자 구도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북한만 동떨어져 균형이 깨진다”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중국과 연대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이낙연 총리 “어제 정상회담, 다시 현실이 상상을 앞섰다”

    이낙연 총리 “어제 정상회담, 다시 현실이 상상을 앞섰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26일(현지시간) “남과 북의 정상이 29일 사이에 두 차례 만났고, 이제 곧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이 총리는 이날 영국 런던의 코린시아호텔에서 개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 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총리는 오스트리아 공식방문을 마치고 아일랜드로 가는 길에 런던을 경유하면서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헌화한 뒤 참전용사와 가족 10여명과 간담회를 했다. 영국은 한국전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제2위 파병국으로, 영국군 8만1000여명이 참전해 1100명이 전사했다. 이 총리는 “한국전쟁이 1953년 끝났고 그 후로도 65년 동안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해왔다. 그 사이에 북한은 핵무장을 서둘렀고 미사일 군사력을 증강시켜왔다”며 작년 연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설명했다. 이어 “올해 들어 한반도의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했다”며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두 번째로 만났고,북미정상회담도 곧 이뤄질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여러분이 전우를 잃으면서 지킨 대한민국의 평화가 이제는 좀 더 항구적인 평화로 뿌리내릴 좋은 기회를 맞았다. 여러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저희는 한반도 평화를 기필코 정착시키겠다”고 강조했다.이 총리는 이날 저녁 런던 힐튼 파크 레인 호텔에서 개최한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는 남북 정상이 △ 6·12 북미회담 △ 판문점선언 이행 등 두 가지를 의제로 대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나 북미회담에 대한 기대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보니 이렇더라.내가 바라기는 김정은 위원장도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또, 두 정상이 ‘판문점 선언을 이제 좀 이행하자. 속도를 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을 틀림없이 주고받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총리는 “대화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두 정상이 하루 사이에 만남을 성사시킨 것”이라며 “어제 정상회담은 정례화보다 더 긴밀하고, 어쩌면 정상회담의 수시화라고 해야 하나”고 말했다. 이어 “언제든 원할 때, 필요할 때 (whenever we want,whenever we need). 그런 감각의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라운 상황 전개”라며 “그것만으로도 전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메시지가 매우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다시 현실이 상상을 앞섰다. (두 번째) 회담 내용과 별도로,남북 정상이 필요하면 급히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상상 이상의 전개”라며 “흔들리지 말고 우리 길을 가자.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종족 청소’로 세워진 이스라엘…전 세계가 함께 조장한 참사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종족 청소’로 세워진 이스라엘…전 세계가 함께 조장한 참사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직후인 지난 15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유혈이 낭자했다. 대사관 이전을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이스라엘군은 총을 난사했다. 60여명이 숨졌는데, 숨진 이들 가운데 16세 이하 청소년과 어린이도 여럿이었다. 베나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가 어린이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향한 무력시위 때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어린이들을 시위 전면에 내세운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수도로 인정한다’는 정치·종교적 의미 외에 복잡다단한 함의가 숨어 있다. 가자지구 시위 정치·종교·경제 요인을 포함한 다양한 층위들이 작용한 결과다.영국 엑서터대 역사학과 교수로 이스라엘의 비윤리적 건국 과정을 고발해 온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비극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든, 균형감 높은 책이다. 파페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이스라엘로 건너온 부모를 둔 유대인이며, 그 자신은 18살에 이스라엘 방위군에 징집되어 욤 키푸르 전쟁에 참전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옹호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파페는 “이스라엘에 의해 계획적으로 추방당한 팔레스타인 난민 수십만명의 무조건적인 귀환”을 주장하며 모국 이스라엘 탄생의 법적·도덕적 부당성을 알리는 일을 학자의 양심으로 삼고 있다. 이 일로 20년 넘게 교수로 일한 이스라엘 하이파대에서 축출되었고 테러 위협에도 시달렸다.그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이 ‘종족 청소’ 과정이라고 일갈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도한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주로 ‘아랍인’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추방했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을 청소하기 위한 계획인 ‘플랜 달렛’을 기반으로 “주택, 재산, 물건 등을 방화”했고 “쫓겨난 주민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잔해에 지뢰를 설치”했다. 종족 청소와 함께 왜곡도 시작했다. “비어 있는 땅에 정착해서 사막에 꽃을 피우는 데 성공”한 것처럼 이스라엘 건국을 전 세계에 홍보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을 떠난 이유는 땅을 되찾기 위해 침략하는 아랍군에게 길을 내주기 위한 자발적 이주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강제 추방은 없었으며 오히려 “아랍의 침략에 맞선 이스라엘의 독립전쟁”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선량한 시민들을 죽였고, 시체를 훼손했고, 여성들을 강간했다. 선민(選民)이라 자처하지만 그들은 악한 본성을 타고난 카인의 후예들이었다.파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거를 “전 세계가 조장한 참사”로 규정한다. 당시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었던, 전투 조직이나 지도부조차 없었던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영국은 통치를 끝내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묵인했고, 미국은 유대인 로비 집단에 회유돼 이스라엘 중심의 분쟁 해결책을 따랐다. 문제는 비극이 끝나리라는 희망이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강제 이주에 얽힌 숱한 분쟁이 결국 가자지구에서 다시 터진 것은 그 명백한 증거다. 1948년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대한 역사적 조명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만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푸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파페는 강조한다.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둘 다를 위한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고자 한다면, 과거로 떠나는 이런 고통스러운 여정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새 시대를 열어 가야 할 남과 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타산지석 삼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씨줄날줄] 상병 전역자 명예회복/임창용 논설위원

    [씨줄날줄] 상병 전역자 명예회복/임창용 논설위원

    상병으로 만기 제대한 선배가 있다. 1970년대 중반 현역 사병으로 33개월이나 군복무를 했다. 처음엔 ‘얼마나 사고를 많이 쳤길래 남들 다 하는 병장 진급도 못했을까’라고 생각했다. 실제 내가 1983년 입대했을 때 영창을 몇 번 다녀온 고참이 상병 제대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간혹 이 선배가 술자리에 끼면 종종 ‘안줏거리’가 됐다. ‘병장 티오’가 다 차서 진급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에이, 자수하세요’란 후배들 목소리에 묻히기 일쑤였다.이 선배처럼 억울한 전역자들이 꽤 많다. 국방부가 엊그제 상병 만기 전역자들의 병장 특별진급을 위한 법안을 마련한다고 밝혔다. 30개월 이상 군 복무를 하고도 병장 공석 부족 등 제도적 이유로 상병으로 전역한 이들을 위해서다. 육군과 해병대는 1993년 이전, 해군과 공군은 2003년 이전 입대자가 30개월 이상 복무했다. 이 중 상병으로 만기 전역한 사람이 자그마치 71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방부에 따르면 1962년부터 1982년까지는 병장 공석이 있어야 상병에서 병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간부가 아닌데도 계급별 숫자를 정해 놓고 공석이 생겨야 진급을 시킨 것이다. 그 때문에 만기를 꽉 채우고도 상병으로 전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1968년 육군으로 입대해 34개월 복무했지만 베트남전 참전 동료가 무더기로 돌아와 병장 공석이 없어 상병으로 만기 전역했다. 하지만 질병, 범죄 등으로 만기를 채우지 못하고 전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보니, 상병 만기 전역자들까지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곤 했다. 그 때문에 상병 만기 전역자들의 명예 회복 민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975년 만기 전역한 한 남성은 얼마 전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내기도 했다. 34개월이나 군 생활을 했는데 상병 제대를 했다면서 명예회복을 시켜 달라는 것. ‘할아버지에게 무슨 문제 있었던 거 아니냐’고 묻는 손자에게 병장 티오 같은 얘기를 해야 하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현역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이들에게 병장 계급이 주는 의미는 크다. 병역법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거의 무보수로 국가 방위를 위한 봉사에 나섰다는 자긍심이 적지 않다. 직업군인들의 자부심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대장 위에 병장’이란 말엔 은연중 이 같은 의무 복무자로서의 자긍심과 명예가 스며 있다. 병장은 상병보다 한 계급 높다는 사실을 넘어 ‘봉사를 마무리했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상병 만기 전역 선배님들의 병장 진급을 미리 축하한다. sdragon@seoul.co.kr
  • 런던의 연쇄살인범 데니스 닐슨 수감 중 72세 일기로 사망

    런던의 연쇄살인범 데니스 닐슨 수감 중 72세 일기로 사망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모두 15명을 자신의 아파트로 유인해 대부분 목을 졸라 살해한 연쇄살인범 데니스 닐슨이 수감 중인 교도소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 교도 당국은 닐슨이 요크 근처 HMP 풀 서튼 교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12일(현지시간) 밝혔다고 BBC가 전했다. 교도 당국 대변인은 “구금 중의 모든 죽음과 마찬가지로 교도와 교정 옴부즈만 위원회에 의해 독자 조사가 있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군인과 경찰을 거쳐 공공 직업소개소의 직원을 지낸 그는 런던 북부 무스웰힐의 집으로 주로 홈리스 동성애 남성들을 유인해 살인과 ㅣ신 유기 등의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닐슨은 1983년에 여섯 건의 살인과 여러 건의 시신 유기, 두 차례 살인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적어도 25년 이상은 수감한 뒤 가석방 여부를 판단하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35년째 복역 중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희생자 시신 옆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이들 시신을 해체한 것으로 밝혀져 당시 런던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그의 소름끼치는 행각은 한 이웃이 하수구가 자꾸 막힌다고 신고하고 배관 수리공이 하수 파이프가 인간 뼈들로 꽉 막혀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발각됐다. 닐슨 사례는 초기 소시오패스의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또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먼 친척이었던 영국인 어머니와 2차대전에 참전한 노르웨이 병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도 관심을 끌었다. 어린 시절 특별히 학대받은 것은 없었지만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군대 시절 동성애에 눈을 떴고 시신성애에 집착하는 등 기행을 보였다. 검거된 뒤에도 시신이 너무 아름다워 감상했을 뿐이라고 설명하거나 자신의 범행 동기를 밝혀달라고 수사관들에게 말한 사실이 알려져 영국 사회를 놀라게 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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