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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두산’ 기틀 닦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글로벌 두산’ 기틀 닦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한번 일 맡기면 끝까지 신뢰 ‘믿음의 경영’ 국내 첫 연봉제 도입·대단위 팀제 시행도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1932년 서울에서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자원입대해 해군에서 참전용사로 활약했다. 제대 후 미국 워싱턴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1960년 4월 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그룹 회장의 장남이었지만 고인의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고 한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고인은 한 번 일을 맡기면 끝까지 신뢰를 보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했다.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 주는 ‘큰 어른’이었다”고 말한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국내 기업에선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 시스템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 휴무 제도를 시행했다. 박 명예회장은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라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고인은 암 투병 중이던 아내의 병실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병구완을 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씨,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씨 등 2남 1녀를 뒀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다.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금강산 보이는 을지전망대… 2052m 제4땅굴도 가 볼까

    금강산 보이는 을지전망대… 2052m 제4땅굴도 가 볼까

    도솔산전투 등 6·25전쟁의 치열했던 격전지 양구군에는 상흔을 간직한 안보관광지가 있다. 을지전망대를 비롯해 제4땅굴, 전쟁기념관 등이다. ●을지전망대 가칠봉 능선 해발 1049m의 DMZ 철책선 안에 세워진 안보관광지다. 날씨가 좋은 날 10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비로봉과 차일봉, 월출봉, 미륵봉, 일출봉 등 금강산의 5개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 북쪽으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남쪽 해안면 펀치볼 지형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제4땅굴1990년 양구읍 동북방 26㎞ 지점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1.2㎞ 떨어진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됐다. 땅굴 규모는 높이 1.7m, 길이 2052m에 이른다. 관광을 위해 투명유리로 덮은 20인승 전동차가 운행하며 땅굴 내부를 볼 수 있다. 입구에는 땅굴 발견 당시 내부를 수색하다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고 죽은 군견을 기리는 묘와 충견비가 세워져 있다. ●전쟁기념관 6·25전쟁 때 양구지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도솔산, 대우산, 피의능선, 백석산, 펀치볼, 가칠봉, 단장의능선, 924고지, 크리스마스고지 전투 등 9개의 전투를 망라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양구지역의 전투장면을 재현해 놓은 디오라마와 동영상, 슬라이드 영상은 물론 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까지의 설명과 전사자 명단, 참전 군인들의 유품 등도 전시됐다. 양구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오현정 서울시의원, 2018 매니페스토 약속대상 ‘최우수상’ 수상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오현정 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 광진2)은 2월 28일 영등포아트홀에서 열린 2018 매니페스토(지방선거부문) 약속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사)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주관하는 매니페스토 약속대상은 지방선거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발굴 및 확산을 위해 실시하고 있으며,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의원의 선거공보를 대상으로 선거공약의 창의성, 적절성, 구체성 등을 심사해 수상자를 선정했다. 오현정 의원은 6·13 지방선거 당시 광진 예술인 하우스, 광진 인문학 거리, 광진 정보 도서관, 광진 길거리 전시회, 광진교 페스티발을 연결하는 대표공약인 ‘카시오페아 인문학 거리 조성’을 통해 부족했던 녹지공간과 광진구만의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삶의 쉼터를 제공하는 창의적인 공약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당선 후 2019년 예산에 광장동 카시오페아 거리조성 용역 예산을 확정하는데 이어서 인근 광나루역 2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설치 용역, 아차산 수목 정비 예산 수억 원을 확보하여 ‘문화 광진’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정책적 전문성과 지역 특성을 파악하고 있는 오 의원은 ‘현장중심·정책중심’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골목 구석구석 현장답사를 통해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고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여 공약을 만들었다. 오 의원은 시정질문과 5분발언을 통해 어린이대공원 주변 용도지구 및 용도지역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린이대공원 주변 발전방향에 대한 정책을 제시했으며, 어린이대공원 시설정비와 주변 활성화 용역예산을 확보했다. 주민숙원사업이었던 군자역·아차산역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설치와 용역에 20억이 넘는 예산을 확보하는 등 새로운 광진을 위한 다양한 공약을 임기 시작 반년 만에 달성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외에도 의료보장제도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서울형 유급병가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발의하는 등 서울시 복지발전에 기여 했으며, ‘서울특별시 참전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일부개정안’을 대표발의하여 참전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지원강화에 앞장섰다. 오현정 의원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을 실천하여 광진구민뿐 아니라 서울시민 모두가 더 행복한 내일이 되도록 현장 속에서 소통하는 서울시의원이 되겠다”며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하노이+] 현지인이 가지말라는 ‘오바마 분짜’, 진짜 맛집은

    [하노이+] 현지인이 가지말라는 ‘오바마 분짜’, 진짜 맛집은

    베트남 하노이의 식당 ‘분짜 흐엉리엔’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다녀간 뒤 이른바 ‘오바마 분짜’로 이름을 알렸다. 관광객들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먹었던 메뉴를 먹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하노이 시민들은 이곳에 대해 물으면 ‘가지 말라’고 한다. 맛집이 아닌데도 유명 정치인이 찾았다는 이유로 유명세를 탄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행사를 계기로 알려진 식당이 모두 맛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우정문화궁전에 차려진 국제미디어센터(IMC)에 현지인에게도 인정받는 맛집을 모아뒀다. 베트남 정부가 고른 실패하지 않을 하노이 맛집은 어디였을까.에그 커피가 대표 메뉴인 카페 지앙은 1946년부터 오랫동안 하노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번 정상회담이 열린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던 응우엔지앙이 연 카페이기도 하다. 에그 커피는 쌉쌀한 에스프레소에 계란 노른자를 거품을 낸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쌍화탕에 계란 노른자를 띄운 것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에그 커피를 맛 본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 1970~80년대에 쌍화당에 계란을 넣은 게 아니냐고도 한다.쌀국수 식당 포틴은 1955년 호안 끼암 호수 근처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노포의 뚝심을 보여주듯 메뉴는 소고기 쌀국수 하나뿐이다.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불맛이 나는 쌀국수’로 알려졌다. 창업자의 첫째 아들이 운영하는 본점을 포함해 하노이에 총 3개 지점이 있다. 하노이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법, 미술을 품다(김영철 지음, 뮤진트리 펴냄) 검사를 시작으로 35년 동안 변호사, 사법연수원 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교단에서의 ‘미술법’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미술과 법의 관계를 탐구했다. 법이 인정한 미술의 범위, 담벼락 낙서의 예술 여부 등 미술계 종사자들이 일선에서 부딪치는 법적 문제들과 상식들을 정리했다. 324쪽. 2만원.종전의 설계자들(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메디치 펴냄)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 무엇이 일본을 항복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였을까? 일본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저자가 미국과 소련, 일본의 방대한 문서저장고에서 태평양전쟁 종결의 배후를 캐내 일본의 항복 과정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웠다. 720쪽. 3만 3000원.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매슈 워커 지음, 이한음 옮김, 열린책들 펴냄) 세계적인 신경 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저자가 말하는 잠의 이모저모. 충분한 수면은 강화된 기억력과 높은 창의력을 얻게 해 주고, 심지어 몸매를 더 날씬하게 유지시키는 한편 식욕도 줄여 주는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효능을 가진다. 512쪽. 2만원.메이드 인 강남(주원규 지음, 네오픽션 펴냄) 강남 초고층 호텔의 펜트하우스에서 발견된 시체 열 구. 이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찾은 국내 1위 로펌의 김민규 변호사는 상위 0.1% ‘로열패밀리’들과 연관된 사건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는 ‘설계사’다. 욕망과 천민자본주의로 점철된 강남의 모습을 화려하지만 어두운 색채로 그린 장편소설. 192쪽. 1만 3000원.엘리트 제국의 몰락(미하엘 하르트만 지음, 이덕임 옮김, 북라이프 펴냄) 정치·경제·사법·언론 등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사회 불평등을 조장하면서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지, 이러한 행태가 어떤 사회 갈등을 유발하는지를 다룬 저작. 30여년간 세계의 엘리트주의를 연구해 온 저자는 국가 간 비교를 통해 가진 자들의 권력과 경제적 유산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알고리즘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376쪽. 1만 6800원.나의 살인자에게 JUDAS(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다산책방 펴냄) 1983년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맥주회사 하이네켄 회장 납치사건. 주범인 빌럼 홀레이더르는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으로 ‘셀러브리티 범죄자’가 됐다. 감옥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를 상대로 “오빠는 연쇄 살인범”이라며 법정 증언에 나섰던 여동생의 회고록. 536쪽. 1만 7000원.
  •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통영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동생… 인제 전투서 생사 달리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20회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송성환 어머니·친형 인터뷰 일시: 1999년 2월 15일 장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271-5 장간란 씨 자택 대담: 장간란(전사학생 송성환 어머니) 송종환(전사학생 송성환 친형)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송성환은 전쟁 중에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친형의 인터뷰로 대신합니다.친동생 송성환에게 부모·집 지키라고 당부 6·25사변 때 나(송성환의 친형 송종환)는 철도공무원으로 철도국에 다녔다. 1950년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우리 인천이 또다시 북한괴뢰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리자, 그해 12월 초에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소집통지서가 나한테 왔다. 1950년 12월 17일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에 모인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과 같이 남하하였다. 나는 남하하는 전날 밤 내 동생 성환이에게 너는 아직 어리니까 부모님 모시고 집을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의 말을 하였다. 하루 50㎞씩 걸어 국민방위군 수용소 도착 1950년 12월 17일 날 나는 인천에서부터 걸어서 내려가서 이듬해 1951년 1월 3일이 되어서야 경상남도 통영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때 하루에 120리(약 50㎞) 길을 걸었을 때도 있었는데 내려가는 도중에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때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문경새재도 걸어서 넘어갔으며, 고생고생하며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하였다. 그때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그곳은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제3 수용소였으며 그곳이 마지막 집결지였다. 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친동생 송성환 만나 그때 막 통영충열국민학교에 도착하였는데 “형”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까 거기에는 생각지도 않게 내 동생 송성환이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동생 성환이가 “형이 인천에서 내려간 이튿날 친구들과 같이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여 여기 통영까지 오게 되었는데 와서 보니까 인천에서 떠난 국민방위군(제2국민병)이 여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형님이 이곳에 오지 않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이러한 내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성환이는 자기가 갖고 있던 양담배 채스타 한 갑과 끼고 있던 은반지를 내게 빼 주면서 “형, 나는 아직 쓸 돈이 남아 있으니까 염려 말고 이것 받아요. 우리들은 곧 부산에 있는 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들어가니까 형 몸조심하세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친동생 송성환이 준 은반지 팔아 밥 사 먹어 그때 나도 동생에게 “군에 입대하더라도 몸조심하고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 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때 내 동생이 준 은반지를 팔아서 허기를 달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통영 방위군 제3 수용소(통영충열국민학교)에서 3월까지 수용되어 있다가 제주도로 건너가 육군 제1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고 060 군번을 받고 육군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육군 보충대를 거처 강원도 전투지역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5사단장은 민기식 준장이었다. 그때 내가 간 전투부대가 5사단 27연대 2대대였다. 이때 3대대에는 인천학도의용대로 인천에서부터 같이 온 내 아우 친구들도 많이 보였다. 그때 우리 5사단이 속해 있는 군단이 포위되면서 후퇴할 때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다. 인제 전투에서 당한 손 부상으로 명예제대 그때 포위당해 매일 걸어서 후퇴하는데 며칠 몇 밤을 잠을 못 자고 후퇴만 하니까 그때는 ‘잠 한번 실컷 잤으면…’ 하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었다. 그때 내가 인제 전투에서 손에 부상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인데 며칠을 후퇴하면서 전투하느라 씻지를 못해 손을 치료해야 하는데 손에 때가 많이 묻어 있어 간호사한테 손 내밀기를 주저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그 해 1951년 10월에 그 부상으로 인하여 나는 상이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친동생 송성환의 전사 사실 뒤늦게 알아 이렇게 제대를 하여 인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내 동생 성환이의 전사통지서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동생 전사통지서를 받으신 우리 아버지께서 낙담하시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속이 상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전사한 동생 때문에 한이 되시어 상심하시다가 동생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2년 뒤 44세의 젊은 나이에 그만 세상을 하직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사단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거의 같은 날에 동생은 전사하고 나는 부상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대한 후에야 알게 되었으며 제대하기 전 5사단에 있을 때 내 동생 친구들은 동생이 전사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한테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송성환 어머니 “전사 아들 생각 때마다 눈물” 우리 성환이는 6년제 공립 인천공업중학교 3학년이었던, 사변 나던 해(1950년) 겨울 집을 떠날 때 전쟁에 나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떠났어…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는데 전쟁놀이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시늉을 할 때는 쓰러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서 쓰러지곤 하였는데 끝내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쓰러져 전사했어. 49년 전에 전사한 아들이지만, 그 전사한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요.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1회 계속 ■ 참전기 20회를 마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중학교 3학년 16살에 자원입대 후 참전하여 전사한 아들을 49년간 그리워하면서 슬퍼한 어머님의 눈물이 이 나라를 지킨 것이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문소영 칼럼]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세계 평화

    [문소영 칼럼]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세계 평화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자 언론은 ‘6·25전쟁 이후 백두혈통의 첫 남한 방문’이라고 자주 표현했다. 전쟁 중이었으니 남한에 온 사람은 김일성이겠지, 남한 땅 어디어디를 밟았을까 궁금했다. 외교안보담당 기자들에게 출처를 물었더니 이런 보도자료를 낸 부처도 출처는 모른다고 했단다. 직접 출처를 찾고자 한국전쟁을 다룬 책들을 읽기로 했다. 미국 탐사보도 기자 출신인 데이비트 핼버스탬이 쓴 1082쪽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를 지난해 봄 샅샅이 읽은 이유다. 부제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였는데, ‘남침에 의한 골육상잔’이라는 상투적 이해를 훌쩍 뛰어넘는 외교안보 교재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맡은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쟁영웅’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과 벌이는 파워게임, 매카시 의원의 선동으로 시작된 반공의 광기 속에서 장제스의 중국 본토 수복을 도와야 한다는 친중 언론과 미국 국무부의 갈등 격화,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중 관계에 미친 악영향 등 미국 정계와 외교 문제 전반이 수록돼 있다. 기대했던 북한군의 전투 동선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전장은 미군이 많이 전사한 운산·장전호 전투가 중심이었다. 9월 인천상륙작전에 고무돼 오만해진 맥아더 전쟁지휘부는 겨우 2주 훈련으로 한국에 파견된 솜털 보송보송한 20대의 미군들을 여름 군복 차림으로 평안북도까지 내몰았다가 10월 말 추위와 공포 속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속절없이 전사하도록 노출시켰다. 이 20대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지낼 기대에 잔뜩 부풀었는데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국방비와 해외 파병을 10분의1 수준으로 가파르게 축소하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로 그 정책을 포기해야 했으니, 미국 의회의 동의도 없이 참전을 단독으로 결정한 그에게도 한국전쟁은 뼈아픈 전쟁이었고, 대만을 도울 기회를 잃었다는 격렬한 언론의 비판에도 직면했다. 그 책에 지난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뿐 아니라 하노이에서도 미군 유해 송환에 미국 정부가 그렇게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 4000명 정도다. 한국전쟁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잊을 수도, 잊어도 안 되는 전쟁이지만, 미군이나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한 군인이나 북한을 도운 중공군조차도 영광도 명예도 없는 ‘잊힌 전쟁’에 불과했다. 남한 측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해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미국, 프랑스, 터키, 독일 등에서 참전한 젊은 군인들의 희생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지 않았다. 김일성의 남한에서의 행보 추적은 결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 펴낸 6·25전쟁사 4권 223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1950년 7월에 충주 수안보 인근까지 내려와 낙동강 전선을 어서 돌파하라고 독려했다’는 요지였다. 그 출처는 전쟁기념사업회의 ‘한국전쟁사´(1992) 3권 250쪽이었다. 공식 문서가 출처인 셈이다. 이것 외에도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쓴 회고록에도 ‘서울을 거쳐 충북 수안보까지 내려왔다’고 돼 있다고 했다. 북한군 사령관이던 김책은 항일 동지로, 백두혈통은 아니었다. 지난해 9월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발표가 있었을 때 평양공동취재단 등에서 ‘북측 최고지도자의 서울 방문은 역사상 처음´이라고 표현을 바꾸었다. 살짝 달라진 것이지만, ‘6·25전쟁 이후 백두혈통의 첫 방문’과 같은 표현이 무의식적으로 유발하는 적개심과 분노, 경계심과 근심 등은 완화된 듯했다. 올봄 김 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한다면 북미 정상회담과 같은 역사적 발걸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2017년 내내 한반도는 ‘제2의 한국전쟁’을 우려하며 불안에 시달렸다. 1년 2개월 뒤인 현재 하노이의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실시간으로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다. 평양과 워싱턴에 북미가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두 나라가 종전을 선언하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더 안전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면 노딜’이라는 주장이나 ‘한국이 빠진 종전선언은 동의할 수 없다’는 발언은 비상식적이다. 더는 반공으로 세력을 키우고 생존할 수 없다. 그런 관성으로 버텨 온 진영이 한반도 냉전이 해체되는 새로운 시대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 [3·1운동 100년]“안중근은 한류스타”

    [3·1운동 100년]“안중근은 한류스타”

    “임정 8년간 이동 행적 깎아내리면 안 돼 독립운동가, 좌익·우익 구분할 필요 없어”“중국의 항일전쟁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은 일반 민중의 사기를 고무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 등 순국선열에 대한 소설, 시, 연극도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쑨커즈(孫科志·53) 상하이 푸단대 역사학과 교수는 화둥사범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 지도교수의 부탁으로 우연히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됐다. 하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젊은 나이에 이국 땅에서 희생했기에 후손이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한 조선의용군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알리는 것이 그의 목표다. 쑨 교수는 27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의 항일전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중국의 안중근이 누구냐, 중국의 윤봉길은 누구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중국 젊은이들이 항일투쟁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1928년 상하이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을 줄거리로 한 ‘애국혼’이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유감스럽게도 필름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쑨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1919년 상하이에서 세워진 이후 1932년 항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옮겨 갈 때까지 8년간 여러 도시를 이동한 역사를 ‘임시정부 간판만 들고 도망 다닌 기간’이라고 깎아내리는 시각에 대해 분개했다. 쑨 교수는 “임시정부의 이동 기간은 일제의 체포를 피하고 앞으로 해방된다면 어떤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를 모색한 시기였다”며 “1944년 임시정부가 건국령을 반포했는데, 이동 기간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건국 계획을 제정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쑨 교수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한국인들이 여러 가지 사상을 가질 수 있었지만 좌익이냐 우익이냐의 이데올로기로 그분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며 “특히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항일전쟁뿐 아니라 세계 파시스트 반대 전쟁에 참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를 잊는 것은 배신을 뜻한다’는 레닌의 명언을 인용했다. 이어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일본은 무조건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에서 벌인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하이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결단·중재·협상’ 케미 통했다…北 경제·북미관계 훈풍

    ‘결단·중재·협상’ 케미 통했다…北 경제·북미관계 훈풍

    ■김정은, 체제 불안 감수한 통 큰 결정…남북경협 속도 실질적 성과땐 경제 총력 노선 박차 2차회담 이후 서울 답방 가능성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이번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그 결과에 따라 북한이 목표로 하는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의 명운이 갈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집권 후 최장 공백에 따른 불안과 위험을 감수하고 66시간에 걸친 ‘열차 행군’을 강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내년이 노동당 창건 75주년이자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마지막 해인 만큼 올해 안으로 대북 제재 완화를 이끌어내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8개월 만에 두 지도자가 다시 마주 앉기까지의 8개월의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비핵화 협상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김 위원장의 통 큰 결단과 비핵화를 향한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앤드루 김 전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을 통해 공개된 “내 아이들이 평생 핵을 지고 이고 사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김 위원장의 발언에도 간절함이 묻어 있다. 북한 국내 정치 측면에서도 2차 북미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재 완화와 관련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둔다면 김 위원장은 향후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와 개방을 반대하는 내부 세력에 본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설득하려면 경제적인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해 4월 핵·경제 병진노선을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으로 전환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2017년 북한의 경제성장률을 -3.5%로 추정했다. 1997년(-6.5%)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내 판단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느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김 위원장은 2차 북미 정상회담 후 문재인 대통령에게 약속한 ‘서울 답방’도 실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철도, 도로, 사회간접자본(SOC) 등 남북 경제협력 사업에 속도가 붙어 북한 경제에 숨통을 터줄 수도 있다. 올해 초 신년사에서는 ‘조건 없는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협상에 진전을 내지 못하면 김 위원장이 천명한 ‘경제 총력’ 노선이 내부적으로 동력을 잃을 여지도 있다. 김 위원장이 올 신년사에서 “미국이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한 만큼 북미 관계가 다시 얼어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문재인, 고비마다 ‘촉진자’ 역할…新한반도체제 날개 제재 완화·경협 화두로 막판 중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주도 의지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8개월여 만에 북미 정상이 27일 마주 앉기까지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보다 가슴 졸이는 순간이 많았다. 북미 대화가 마찰음을 빚을 때마다 국내 보수진영과 미국의 일부 정치권·전문가 그룹에서 ‘비핵화 회의론’이 불거졌다. 문 대통령이 지난 2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여전히 남북 관계·북미 관계 개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발목을 잡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문 대통령은 고비마다 ‘대북 제재 완화 필요’, ‘교황 방북’, ‘김정은 연내 답방’, ‘남북경협’ 등 화두를 던져 북미 대화의 막힌 ‘혈’을 뚫으려 했다. 지난해 8월 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취소에 이어 11월 미국 중간선거까지 맞물리면서 북미 대화의 소강 국면이 장기화됐다. 문 대통령은 9월 평양 정상회담 이후 일주일 만에 미국 뉴욕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의지를 담은 김 위원장의 비공개 메시지를 전했다. 10월 유럽 순방 때는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라면 유엔 제재 완화를 통해 비핵화를 촉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설익은 구상’이라고 보수진영은 비판했지만 하노이선언에 대북 제재의 일부 완화가 포함될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하노이 회담이 임박하자 ‘촉진자’로 나섰다.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부터 경협 사업까지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며 대북 제재 일부 완화를 제안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문 대통령의 행보는 ‘신한반도체제 구상’에 맞춰질 전망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북한의 경제개방 상황을 상정하고 “주도권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이며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주도해 나가겠다고 했다. 하노이선언에서 북미가 ‘종전’을 어떤 형태로 담아내든 1953년 이후 66년간 지속된 지구상 마지막 냉전체제가 실질적으로 종식되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종전선언은 필연적으로 남·북·미·중 등 6·25전쟁에 참전한 4자를 비롯해 다자가 한반도 평화를 담보하는 평화체제 논의로 이어질 전망이다. 우리가 물꼬를 튼 국제질서 변화를 적극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청와대는 ‘포스트 북미 회담’ 행보와 직결된 신한반도 체제 구상의 디테일을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3·1절 기념사를 통해 밝히겠다고 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트럼프, 양면술로 북핵 해결 ‘전진’…노벨평화상 기대 승부사적 기질로 대북 회유·압박‘빅딜’ 성공땐 새 북미관계 수립 “내가 거래를 성사시키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다. 목표를 높게 잡은 뒤 달성을 위해 전진에 전진을 거듭할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 밝힌 이 원칙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지난해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지난 8개월간 미국 내 강경파의 회의론을 뚫고 북핵 해결에 박차를 가해 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트럼프의 목표는 미국 전직 대통령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중동정책을 뒤엎고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는 등 파격적인 외교정책을 펴 왔지만 이는 오바마의 흔적을 지운 것뿐이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시작한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의 실질적 조치를 마련한다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교 성과를 낸 첫 사례를 만들 수 있다. 내년 11월 미국 대선 전에 ‘내가 오바마보다 낫다’고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7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합의로 노벨평화상이라도 받는다면 ‘러시아 스캔들’을 수사 중인 뮬러 특검 리스크를 한번에 뒤엎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기회를 잡고자 승부사적 기질을 발동해 말 그대로 전진에 전진을 거듭해 왔다. 지난해 8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을 돌연 취소하고 추가 대북 제재 조치까지 내놓으며 북한을 압박해 협상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미 행정부 내 강경파들은 북한 비핵화 회의론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제동을 걸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미공개 북한 미사일 기지 관련 보고서를 내고 뉴욕타임스가 곧바로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의 미사일 기지는 거대한 기만이라고 보도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김 위원장을 향해 “남은 합의를 마저 이행하면 바라는 것을 이뤄 주겠다”며 ‘회유와 압박’의 양면술을 폈다. 그의 행보와 미국의 정치적 일정을 고려할 때 트럼프 대통령은 적어도 이번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사찰과 검증,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프로그램 동결을 약속받고 양국 간 연락사무소를 징검다리 삼아 새로운 북미 관계를 수립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대선을 앞두고 2차 북미 정상회담이란 대형 이벤트를 연 것 자체에 ‘빅딜’에 합의할 것이란 자신감이 깔렸다. 북미 관계 개선은 중국과의 무역 전쟁에서 지정학적으로 이점을 가져올 수도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역사에 남을 지도자’ 트럼프 대통령의 꿈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샛노랗게 단장한 베트남 관문… “김정은 온다” 화물열차로 장막

    샛노랗게 단장한 베트남 관문… “김정은 온다” 화물열차로 장막

    베트남 군인 태운 승합차 쉴 새 없이 오가 역사 안 출입금지… 1m 높이의 발판 설치 하노이까지 車이동 관측… 도로 지뢰 수색 삼성 산단·北조종사 묘역 경유 가능성도“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6일 이곳(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도착한다는데 검문·검색을 강화한 군인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24일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관문’인 동당역에서 만난 한 시민은 ‘김 위원장이 도착하는지 아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실제 역 안팎에서는 평소와 달리 분주히 오가는 군인들로 긴장감도 느껴졌다. 역사 앞에는 군인들을 실어나르는 승합차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군인들은 조를 이뤄 역사 내부는 물론 인근에 주차된 차량까지 샅샅이 살폈다. 역사에는 열차 일정표가 띄워져 있었지만 출입은 통제됐다. 경비 인력은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에게 양팔을 크게 휘저으며 ‘엑스’(X) 자를 표시한 뒤 가림막을 설치했다. 역사 안 선로에는 대형 화물열차 여러 대가 장막을 치듯 엇갈려 세워져 있었고 군인들이 선로를 금속탐지기로 훑는 모습도 보였다. 이렇듯 김 위원장을 맞이하기 위한 채비가 속속 갖춰졌다. 샛노란 역사는 갓 덧칠한 듯 깨끗했고 인부들은 꽃 장식을 붙이느라 분주했다. 동당역에서 하노이로 가는 기차는 통상 오전과 오후에 한 차례씩 떠난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곳에서 열차를 내려 하노이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베트남 철도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 도로를 이용하면 주요 산업단지를 경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장시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북한군 조종사들의 묘역을 참배할 가능성도 있다. 베트남 정부는 25일 저녁부터 동당시와 하노이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 170㎞ 구간을 통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하노이까지 4시간가량 걸리지만 차량을 통제하면 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이날 국도 1호선 일부 구간에서는 금속탐지기로 도로를 살피는 군인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베트남 VN익스프레스도 군병력이 지뢰탐지기를 이용해 수색 작업을 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될 풍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역에서 출발해 왕복 2차선 도로를 한두 시간 달리는 동안에는 주로 논밭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내 도로가 4차선으로 바뀌면서 베트남 북부 최대 수출단지로 탈바꿈한 박닌성이 나왔다. 박닌성은 글로벌 기업이 ‘포스트 차이나’ 생산 거점으로 점찍으면서 농지가 공장으로 바뀌었다. 수도 하노이는 물론 북부 최대 항구 도시인 하이퐁, 노이바이 국제공항과 가깝고 공단에 화물용 공항 터미널도 있다. 특히 김 위원장이 국도 1호선에서 빠져나와 10여분 거리에 있는 옌퐁 공단의 삼성통합단지를 둘러볼지도 주목된다. 삼성전자와 삼성SDI, 삼성디스플레이 등이 들어서 있다. 최신식 설비에 압도적인 규모를 갖췄다. 이날 찾은 삼성단지에서는 이따금 대형 트럭이 오갔고 경비는 사진 촬영을 막으며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지역 경제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시민은 “주말이라 친구와 옷을 사러 왔다”면서 “삼성단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떠나 다시 1시간 정도 달리면 하노이에 도착한다. 푸동 다리 등을 지날 때는 삼성전자의 홍보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노이·랑선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계명대 해외 봉사활동 펼쳐

    계명대(총장 신일희)는 이번 동계방학을 맞아 대대적인 해외봉사활동을 펼쳤다. 에티오피아(2018. 12. 30.~2019. 1. 11.)를 시작으로 태국(1. 3.~1. 15.), 콜롬비아(2019. 1. 9.~1. 23.), 필리핀(2019. 1. 13.~1. 25.), 인도네시아(2019. 1. 13. ~ 1. 26.) 등 5개국에 150여 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콜롬비아는 최초로 국외봉사활동에 나선 곳으로 중남미에서 유일한 6.25 참전국인 콜롬비아에 나라를 지켜준 것에 대해 보답한다는 의미를 크게 담고 있다. 계명대는 지난해 같은 의미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봉사활동을 펼친 후 올해 두 번째로 에티오피아에서 봉사활동을 가지기도 했다. 계명대가 콜롬비아에서 봉사활동을 펼 친 곳은 부에나비스타 시이다. 해발 1700m고지에 위치 이곳 작은 마을을 특별히 봉사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6.25참전 용사인 곤잘레스씨가 이 마을에 살기 때문이다. 90세가 넘은 곤잘레스 씨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였으나, 방문단을 맞이하기 위해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본인의 자택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타 지역에 살고 있는 자녀와 손주들을 모두 불러 계명대 방문단을 환영했다. 곤잘레스 씨의 집은 6.25전쟁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집안 곳곳 모든 벽면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태극기와 콜롬비아 국기를 상시 게양하며, 당시의 모습들을 아직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곤잘레스 씨는 “젊은 시절 비록 다른 나라이긴 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리며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를 아직 기억해 주고 이렇게 찾아 준 것 만으로도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다”며 환대했다. 계명대 국외봉사단은 봉사활동 지역과 조금 떨어진 보고타 지역 국군학교내 참전용사비에 헌화하고 묵념의 시간도 가졌다. 소식을 접한 콜롬비아 군에서는 사관생도들과 의장대를 파견해 사열하고 애국가를 연주하며 계명대 국외봉사단을 맞이했다. 콜롬비아 국외봉사단 학생 대표인 손한슬(남, 26세, 경영학전공 4) 학생은“처음에는 단순히 참전용사비에 헌화만 하고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까지 맞이해 주는 것을 보고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며, “오늘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이들이 목숨 바쳐 구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숙연해 졌다.”고 말했다. 이곳 참전용사비는 불국사의 다보탑 모양으로 만들어져 더욱 그 의미를 더하고 있었다. 봉사 본연의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인스띠뚜또 부에나비스타 학교에 학생들은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벽화와 교실 환경 개선 등 노력봉사와 함께 한글교육, 태권도, K-Pop 배우기 등 교육봉사도 병행해서 이루어졌다. 고지대에 위치한 학교를 연결하는 계단에 난간이 없어 어린 학생들의 낙상사고가 빈번했는데, 이번에 난간을 설치해 줘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시에라 인스띠뚜또 부에나비스타 학교 교장선생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봉사활동을 한 적은 누구도 없었다”며 “첫 봉사를 한 사람들이 먼 한국의 대학생이라는 것에 감동을 받았고, 그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감동을 받아 너무 감사하고 모두가 소중한 인연 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민주(22·여·유아교육과 3)씨는 “봉사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과 너무 친해져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이름도 다 외울 정도로 정이 많이 들었는데, 헤어지려니 눈물이 절로 났다”며, “이곳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동양인들이 자기들을 도와준다는 것에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봉사활동 기간 내 환대해주며 우리를 맞이해줘 오히려 우리가 접대를 받고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월드피플+] 77년을 해로한 90대 노부부의 사랑…죽음도 함께하다

    [월드피플+] 77년을 해로한 90대 노부부의 사랑…죽음도 함께하다

    77년을 함께 산 노부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ABC뉴스는 지난 19일(현지시간) 결혼기념일을 몇 달 앞둔 90대 노부부가 함께 실려간 병원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전했다. 미국 뉴욕 출신 조셉 헤그(97) 할아버지는 지난 10일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딸 메리 조는 “아버지는 그날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떠나야 한다면서 자신에게는 오늘이 그날이라고 말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악화되자 거의 동시에 부인 크리스틴 해그(98) 여사 역시 호흡곤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틴 할머니는 남편과 자신 모두 곧 죽을 것 같다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할머니는 “남편이 더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떠나고 싶다”고 말했고, 딸 메리는 임종을 위해 부모를 모두 요양병원으로 이동시켰다.  다음날, 크리스틴 여사는 자신의 마지막 바람대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밝혔다. 아내가 숨을 거두자 시름시름 앓던 조셉 할아버지도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었고 밸런타인데이였던 지난 14일 할머니가 숨을 거둔지 52시간 만에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조셉 할아버지와 크리스틴 할머니는 81년 전 교회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조셉 할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몇 년 전 결혼의 결실을 맺었고 평생을 사랑으로 함께했다. 딸 메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서로에게 늘 충실했고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하셨다”고 회상했다. 이런 노부부가 90대에 접어들면서 딸은 한 가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두 분 중 어느 하나라도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한 사람이 힘들 것을 우려한 것이다. 메리는 “나는 부모님이 가실 때가 되면 제발 함께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 남은 누군가가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녀의 기도 때문일까. 조셉 할아버지와 크리스틴 할머니는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났고, 오는 4월 5일 77번째 결혼기념일에 함께 묻힐 예정이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미국 플로리다주의 ‘종전 키스’ 동상 미투 지지자들의 공격 받은 이유

    미국 플로리다주의 ‘종전 키스’ 동상 미투 지지자들의 공격 받은 이유

    태평양전쟁 종전의 기쁨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종전 키스’ 사진의 주인공 수병이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다음날 미국 플로리다주에 세워진 동상이 훼손됐다. 플로리다주 사라소타에 세워진 이 동상은 미 해군 수병 조지 멘도사가 1945년 8월 14일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간호사 그레타 지머 프리드먼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모습을 사진작가 알프레드 아인젠슈타트가 담은 사진을 그대로 본떠 세워졌다. 동상 제목은 ‘무조건 항복’으로 붙여졌다. 그런데 18일(현지시간) 미투 지지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빨강 스프레이 페인트로 ‘#Me Too’라고 칠하는 등 훼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경찰은 훼손 범위가 넓어 1000달러 정도 들여 19일 아침까지 그래피티 등을 완벽하게 지웠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의 사진은 최근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무작정 달려들어 여성의 입술에 입술을 갖다댄 것이 성폭력으로 비친다는 얘기다. 멘도사는 프리드먼의 동의를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2005년 참전용사 역사 프로젝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프리드먼은 키스를 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으며 멘도사가 자신을 “붙잡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들뜬 행동”이었으며 “‘신이시여, 전쟁이 끝났어요’ 이벤트일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프리드먼이 3년 전 세상을 떠난 뒤 그녀 아들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생전의 어머니가 그 장면을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사라소타 경찰국이 훼손된 동상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자 그래피티 등에 대해 화를 내는 이들과 키스야말로 성폭력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반응이 갈렸다. 한 누리꾼은 페이스북에다 “이 동상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연결지을 수 없는 한 시대를 표현한 것”이라며 “온나라가 한 마음으로 어울려 종전을 축하했다”고 돌아봤다. 다른 누리꾼은 “성폭력은 끔찍하지만 분명히 이 상황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번주 세상을 떠난 이 불쌍한 남자가 2차대전이 끝났다는 사실을 안 순간 여성을 성적으로 공격한다는 생각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고 확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멘도사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 슬프다며 상징물을 훼손하는 반달리즘에는 찬동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페이스북 이용자 중에는 사라소타 시가 “동상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무조건 항복’으로 불렸지만 당시 여건은 ‘자발적이지 않은 항복’이었다.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붙들려 입맞춤을 당했다”며 “이 여성이 피해자의 심정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원치 않고, 합의되지 않은 성적 행동을 강요당했다. 단순 명확하다”고 적었다. 이어 “미투 운동은 남자가 원하면 취하는 성적 대상으로 여성이 비치지 않게 하도록 교육하고 이해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글로벌 In&Out] 쿠릴열도 분쟁과 러일 관계/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쿠릴열도 분쟁과 러일 관계/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동아시아 국가 중 러시아와 가장 특별한 관계가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그 문제 가운데 현재 러일 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쿠릴열도 문제다. 캄차카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56개의 섬으로 구성된 쿠릴열도에 러시아인들이 처음 들어간 것은 1640~1641년이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하라는 명령을 내려 쿠릴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됐다. 이 작업은 18세기 중엽에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데, 18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패배 후 맺은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 주었고, 사할린섬의 남부를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테헤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 공격을 약속했고, 소련은 대일 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빼앗은 사할린 남부와 추가로 쿠릴열도를 요구했다. 1945년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대일 참전을 재확인했고, 재차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요구했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소련은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쿠릴 상륙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됐다. 1945년 8월 15일 캄차카 주둔 소련군은 슘슈를 비롯한 쿠릴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8월 18일 슘슈섬에 상륙했다. 쿠릴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쓰쓰미 중장은 8월 15일 일본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다.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쓰쓰미 중장으로부터 쿠릴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8월 29일 쿠릴열도 북부를 점령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소련군 부대들이 9월 5일까지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했다. 미국과 소련은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에 합의했으며, 미국은 모든 섬들의 점령을 소련군에 맡겼다. 그 후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열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했다. 조약 체결 당시 일본 국회는 쿠릴열도의 남부도 쿠릴열도에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으나 1956년 2월 의견을 바꾸고, 쿠릴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가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쿠릴열도 분쟁의 시작이다. 1956년 10월 19일 소일 양국이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국교가 회복됐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소일 평화조약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동아시아 국가 중에 러시아가 가장 특별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고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한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현재 러일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은 쿠릴 열도 문제이다. 이번에는 그 문제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쿠릴 열도는 캄차카 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약 56개의 섬이다. 여기에 러시아인들이 처음에 들어온 시기는 1640~1641년이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639년 이반 모스크비틴을 수장으로 한 카자흐 원정대가 오호츠크 해에 진출하였으며 쿠릴 열도에 상륙했고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쿠릴 열도의 인구는 주로 아이누족을 비롯한 여러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국가가 따로 없었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릴 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 일본인들도 홋카이도 북부와 쿠릴 열도 남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러시아와 충돌하였다. 전쟁을 피하려던 러시아 외상 고르챠코프와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에노모토가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사할린 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다.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후 새로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더불어 일본은 사할린 섬의 남부를 얻어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사실상 파기되었다. 10월 혁명 발생으로 1918년 내전 중인 러시아의 상황을 이용해 일본은 1918년 4월 5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는데 붉은 군대와 한인(韓人)의 항일부대 등의 저항으로 1922년에 철수했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백위파 정권은 무너졌다. 또한 일본은 1920년 ‘노령 거주 일본인들의 생명과 그 재산의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사할린 섬의 북부를 점령했다가 1925년에 이르러 러시아에 반환하였다.1930년대부터 일본은 쿠릴 열도를 소련 캄차카나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비행장과 해군 기지 등 시설을 건설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는 쿠릴 열도 남부에 위치한 이투루프 섬에서 출발했다. 진주만 공격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소련 대사를 만나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한 근거이기도 하다. 12월 11일, 소련은 2차 대전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측도 그 요구를 계속 반복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 독일도 1942년 7월 10일 일본 정부에 독소전쟁 참전을 요구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당하는 일본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소련 대일전쟁 참전은 결국 1943년 12월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약속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에서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고 소련은 대일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사할린 남부, 그리고 쿠릴 열도를 요구하였다. 독일 패전 직전 1945년 2월 4일에 얄타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참전의 계획을 재확인하였고 독일 패전 2~3개월 이내 대일참전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소련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영토 회복과 별도로 쿠릴 열도가 소련에 양도될 것을 요청하였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독일을 패배시킨 소련은 유럽에서 부대를 극동지역으로 빨리 옮기고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쿠릴 상륙 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2극동전선군 참모부가 캄차카 방어구 사령관에게 일본이 항복할 예정이기 때문에 슘슈를 비롯한 쿠릴 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소련군이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준비하고 8월 18일 소련군 부대들이 쿠릴 열도 북단에 위치한 슘슈 섬에 상륙했다.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츠츠미 후사키 중장은 8월 15일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으며 이에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9일 ‘자위 행동이라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츠츠미 중장은 시간을 벌기 위해 항복이 아닌 정전(停戰)을 제안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츠츠미 중장은 결국 8월 20일에 항복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 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츠츠미 중장으로부터 쿠릴 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이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8월 29일 쿠릴 열도 북부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 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오전 3시 15분 청진 상륙 작전에 참여한 레오노프 해군대좌가 이끄는 부대가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이투루프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무장해제에 착수하였으며 9월 5일까지 쿠릴 열도 전체가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전투 행동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 간에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키고 급속도로 남하하는 소련을 막고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8월 15일 소련 최고사령관인 스탈린에게 일본 항복 절차를 규정한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을 보냈다. 이 명령의 내용을 검토한 스탈린은 미국이 제안한 한반도 분할 점령 등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트루먼에게 소련군 책임 지대에 홋카이도 북부와 모든 쿠릴 열도를 추가할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8월 18일에 보낸 답변에서 모든 쿠릴 열도를 소련군 책임 지대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했으나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속한 모든 섬들의 점령은 맥아더 장군이 담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대답을 받은 스탈린은 미국측의 동의를 재확인한 후 8월 22일 홋카이도 상륙 작전 준비를 중단하고 쿠릴 열도 남부에 진출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일반 명령 제1호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 지도부에게 전달되었으며 대본영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 열도에 대한 …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중국이 초대받지 못한 점, 일본 재군사화를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회는 쿠릴 열도의 남부도 얄타 협정에 언급한 쿠릴 열도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56년 2월에 의견을 바꾸고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群島)가 쿠릴 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 사망 후 외교노선을 바꾼 소련은 일본과의 별도의 평화조약 협상에 들어갔으며 일본을 미국 영향권에서 부분적으로라도 탈피시키기 위해 조약의 대가로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섬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소일 양국은 1956년 10월 19일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양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 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소일 평화 조약의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러시아와 일본은 현재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러시아와 일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푸틴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아베 총리와 만나서 쿠릴 열도 남부에서 공동경제활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 방문단이 2017년 6월에서 2018년 10월에 걸쳐 3번이나 쿠릴 열도를 방문하였으며 러일 무역 규모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양국 정부는 2018~2019년을 ‘러시아에서 일본 해’, ‘일본에서 러시아 해’로 지정했으며 러일 간의 문화 교류가 전대미문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방영토’가 빨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본 매체가 조성한 일본 국내 분위기 속에서 아베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났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인에게 반일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일 평화 조약을 협상하기 전에 일본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일본 측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일본인들로 하여금 큰 실망을 느끼게 하였다. 쿠릴 열도 남부를 포함한 쿠릴 열도의 전체가 러시아 영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도 변한다는 것도 객관적 사실이다. 미국 경제 제재로 러시아의 경제가 발전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그 대책으로 연금을 받는 연령을 높이는 연금 제도 개혁 등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높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에서도 영토를 양도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경제를 살리자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러시아가 일본에 ‘북방열도’를 돌려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발전되고 러시아의 경제 발전 속도가 계속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가능성이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글 사진: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② 일본의 패망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를,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팽창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점령한 뒤 “독일과 중동에서 만나겠다”며 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지막 정착지인 중국 충칭에서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전쟁 괴물’이 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다.●임정, 1945년 2월 28일 독일에도 선전포고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이 선점한 중국 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은 제조업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1년 12월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간 군사력 차이를 감안할 때 진주만 공습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태평양전쟁’(1941~1945)에 나섰다. 이 전쟁은 임정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광복군을 양성해 뒀다가 일본이 중국,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면 이들을 도와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주석 김구(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에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임정은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했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하려면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해 하루 전인 2월 28일 발표했다.●中 통제받은 광복군, 9개 조항 행동준승 논란 1940년 9월 태어난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지원하던 또 다른 한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1941년 3~5월 본진을 이탈해 화베이 지역으로 떠나자 국민당 정부는 당황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을 전달했다. 중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 광복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 준승은 광복군이 사실상 중국의 고용군이 된다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당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신뢰를 얻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불가피했다는 반론도 있다. 임정은 중국의 준승 명령에 분개해 청사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1875~1965)과 협의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은 우리 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944년 8월 광복군 통제권을 임시정부에 돌려줬다.●광복군, 한지성·문응국 등 임팔전투 투입 일본은 1942년 1월 영국의 식민지 버마를 침공했다. 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는데, 이를 버마 전투(1942~1945)라고 한다. 영국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면전구공작대’를 꾸렸다.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공작부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한지성(1913~?)과 문응국(1921~1996) 등 9명이었다. 공작대는 영국군에게서 심리전 교육 등을 받고 1944년 초 임팔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역으로 열대밀림 산악 지대다. 광복군은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해 철수할 때까지 1년 넘게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9월 이들은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한지성의 증언이다. “우리 공작대는 언제고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한 뒤 적(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 선전문을 제작해 살포하고 일본군 문건을 번역하며 포로를 심문했다.”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함께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에 나서는 것이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여러 활동에 나서기로 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OSS 요인들이 충칭의 임정 청사로 찾아와 작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김구는 이를 승인했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출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OSS는 같은 해 5월부터 광복군 내 엘리트들을 차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1920~ 2011)과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1918~1975)다. 이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준엽은 1987년 개헌 당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조문을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1917~1979)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75년 의문사했다. ●승전국 지위 확보·강대국 간섭없이 독립 목표 임정은 미군의 지시로 국내에 진격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일에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국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적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도 결국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임정은 한반도에 잠입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면 강대국의 간섭 없이 한반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광복군이 미군과 공동 작전에 참가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던 1944년. 임정은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야 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은 시기였기에 이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를 가미해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파업권도 명시했다.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다. 이는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기 위해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이 컸다. 건국강령을 지은 이가 ‘사민주의자’ 조소앙(1887~1958)이다.●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 이념 기초로 작용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19년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임정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독당은 1940년 5월 우파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계승돼 임정의 여당이 됐다. 그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모두 균등해지려면 정치와 경제, 교육의 세 가지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삼균주의인데, 훗날 건국강령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전쟁 때 납북 해방 뒤 김구와 함께 한독당을 이끌었고, 194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때 납북됐다. 만약 임정의 ‘1944년 헌법’대로 해방 정부가 꾸려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독일이나 스웨덴을 모델로 한 사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1948년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이룬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단독] 하와이 한국전쟁 추모 공원에 ‘일본해’ 표기 지도 버젓이

    [단독] 하와이 한국전쟁 추모 공원에 ‘일본해’ 표기 지도 버젓이

    하와이 와이키키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자리한 국립태평양 기념묘지(National Memorial Cemetery of the pacific). 높이 150m의 원뿔 모양 화산 분화구에 조성된 국립묘지라는 점에서 펀치볼 국립 묘지공원으로 더욱 유명한 이곳에는 5만 4000여 구의 전사한 미국 장병이 안치돼 있다. 한국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등에 참전, 희생당한 병사들이 안치된 국립 공원 내부에는 병사들을 추모하는 교회가 설치, 매년 수 만여명의 추모객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곳에서는 매년 6월 25일 한 차례씩 한국전쟁에 참전, 목숨을 잃은 미국 장병 8924명과 신원 파악이 불가한 무명 용사 495명의 영령에 대한 추모 행사가 진행된다. 이날 행사에는 하와이 거주 한인 교민들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여행사 인솔 하에 하와이를 찾은 단체 여행객들까지 참여하는 등 뜻 깊은 행사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바로 공원 중심의 ‘레이디 콜롬비아 여신상'(Lady Columbia) 뒤로 조성된 다수의 전쟁 발발 과정 및 전투 경과 과정, 전쟁 피해 상황 등에 대한 설명을 게재한 지도에 ‘일본해'(Sea of japan)라는 명칭이 게재돼 논란이다. 한국전쟁과 전쟁에 참여한 이들을 기리는 국립공원을 찾은 이들이 ‘동해'(the East Sea)라는 명칭 대신 ‘일본해’로 표기된 지도가 한국전쟁과 참전 용사에 대한 추모 장소에 버젓하게 게재돼 있는 셈이다 더욱이 지난 1949년 완공된 이래 매년 수만 명의 추모객들이 찾는 이 곳에서 약 2m 규모로 제작, 기념관 벽면에 부착된 ‘일본해’로 표기된 전쟁 추모 지도가 수 많은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이에 앞서 우리 정부는 지난 2013년 2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림비를 제작, 헌사한 바 있다. 당시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기념해 국가보훈처에서 제작, 헌사한 기림비에 새겨진 지도에는 ‘동해’라는 명칭으로 게재돼 있다. 우리 정부가 제작한 해당 기림비 외에 펀치볼 국립공원 내에 설치된 모든 십 수개의 지도에 ‘일본해’로 표기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특히 이 곳을 찾는 추모객 중에는 국방대학교 교육생 70여명과 한국에서 찾아온 각종 단체, 협회 등 전쟁 시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회 다방면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이 펀치볼 국립 묘지가 조성된 호놀룰루 시 일대에는 우리 교민 5~6만 명이 밀집, 거주해오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는 와이키키 해변, ‘다이아몬드 헤드’와 ‘펀치볼 분화구’ 등 관광 명소가 자리해 있다는 점에서 펀치볼 국립 묘지를 경유해 여행하는 세계 각 국의 관광객들의 수가 상당하다. 실제로 호놀룰루 시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의 수는 연평균 22~2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 전쟁에서 희생당한 참전 용사와 그 신원 조차 확인할 수 없는 탓에 전사 후에도 여전히 유족들 곁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기리는 장소에 ‘일본해’로 게재된 전쟁 추모 지도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우세하다.이와 관련, 최근 아베 일본 총리가 ‘일본해’ 표기에 대해 국제 사회의 유일한 호칭이라며 변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일본해’ 표기 논란은 쉽게 사그라 들지않을 전망이다. 지난 12일 국회 중의원 예산심의회에 참여한 아베 총리는 “일본해는 국제 사회에서 확립된 유일한 호칭으로, 이를 변경할 필요성이나 근거가 없다”면서 “이를 국제 기관과 국제 사회에 계속해서 단호하게 주장해 올바른 이해와 우리나라(일본)에 대한 지지를 요구할 것”이라고 ‘일본해’ 표기 논란에 불을 지핀 바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동해’로 단독 표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 일본과의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는 동해-일본해 동시 표기를 주장해오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일본해 표기 개정 문제를 담당해오고 있는 국제수로기구(IHO) 측은 세계 각국 지도 제작의 지침이 되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 개정 추진 시 한국 정부가 ‘일본해’ 표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해 일본에 ‘관계국(한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와이=임지연 통신원 cci2006@naver.com
  • ‘방미’ 콜롬비아 대통령,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서 헌화

    ‘방미’ 콜롬비아 대통령,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서 헌화

    남미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콜롬비아의 이반 두케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한국전쟁기념공원을 찾아 헌화식을 가졌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 당시 지상군 1개 대대와 해군 프리깃함 1척을 파병해 강원 화천과 양구, 철원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던 한국의 혈맹이다. 이날 헌화식에는 조윤제 주미 대사와 미 국방부 켈리 맥키그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국장 등 미 정부 인사들, 로버트 뱅커, 샘 필더 등 미군 참전용사들이 참석했다고 주미 한국대사관 측이 밝혔다. 대사관 관계자는 “외국 대통령이 방미를 계기로 한국전쟁기념공원에 헌화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그만큼 콜롬비아가 한국전 참전 역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두케 대통령은 지난 13일 3박 4일 일정으로 미국을 찾았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사설] 한국당, 5·18 망언 의원 모두 제명하라

    자유한국당은 어제 ‘5·18 망언’으로 논란을 빚은 이종명 의원에 대해 출당 조치를 하고, 김진태·김순례 의원에 대해서는 징계를 유예하기로 했다. 2·27 전당대회에 당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각각 출마한 김진태·김순례 의원은 전대 이후 징계 수위를 결정한다. 이런 결정의 근거는 한국당 당규 7조로 당 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 등록 이후 경선이 끝날 때까지 후보자에 대한 윤리위 회부 및 징계 유예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에 ‘한국당이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정상적인 공당이라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김진태·김순례 의원이 이번 전대에서 당 대표 혹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거나 상당한 지지를 확보하면 중징계가 가능하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김순례 의원은 “5·18 유공자 중 폭도·가짜 유공자가 있을 수 있다”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지 않고 있고, 김진태 의원도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2월 일부 시민들이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5·18 유공자 명단 및 공적 내용 공개 행정소송’에서 “5·18 유공자 명단과 공적 사항은 유공자들의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에 해당된다”며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명단을 제외하고 베트남 참전 용사 등 다른 유공자들 명단도 비공개로 한다. 즉 공개하면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유공자 시비를 가리는 차원에서 5·18 폄훼 작업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당은 솜방망이 징계로는 국민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리얼미터가 어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당 지지율은 28% 이상 상승세를 타다가 25.7%로 급락했다.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은 물론 60대 이상의 대거 이탈이 나타나 ‘5·18 망언’ 의원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자멸할 수도 있다. 의원직 제명은 국회 재적의원(298명) 3분의2(199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만큼 한국당은 국회 차원에서 진행하는 제명 절차에도 동참해야 한다.
  • 그 기억, 콕 찍어 지워드립니다

    그 기억, 콕 찍어 지워드립니다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100대 영화에 포함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1976년 작품 ‘택시 드라이버’와 1978년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만든 ‘디어 헌터’의 공통점은 뭘까.우선 주인공이 로버트 드니로라는 점. 그리고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삶이 망가져 버린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전장이나 예상치 못한 지진해일(쓰나미), 지진, 화산 같은 자연재해와 대형 사건사고에 노출된 사람들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새겨진 트라우마 때문에 남은 삶을 정상적으로 영위해 나가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광유전학이나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삶 자체를 위협하는 고통스러운 기억만을 족집게처럼 콕 찍어 없애는 방법들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기초과힉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신희섭 단장팀은 시각자극을 통해 PTSD를 치료하는 방법의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공포기억과 관련한 새로운 뇌 회로를 발견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 14일자에 실렸다. 현재 신경정신과에서는 트라우마를 치료할 때 환자가 공포기억을 떠올리도록 한 뒤 빛을 이용해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도록 시각자극을 주는 ‘안구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요법’(EMDR)을 활용하고 있다. EMDR은 트라우마로 남은 공포기억을 회상하면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도록 함으로써 뇌의 정보처리 기능을 활성화시켜 두려웠던 기억을 저 멀리 사라지게 만드는 기법이다. 실제로 2001년 미국 9·11테러, 2004년 발생한 태국 쓰나미 사태, 1995년 일본 고베지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공포기억을 치유하는 데 EMDR이 활용된 바 있다. EMDR이 트라우마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작동돼 공포기억을 제거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생쥐에게 특정 소리와 함께 전기충격을 줘 소리에 대한 공포기억을 심어 줬다. 공포기억이 생긴 생쥐는 소리만 들려도 몸이 얼어붙는 공포반응을 보이게 된다. 연구팀은 생쥐가 소리에 공포반응을 보일 때 좌우로 반복해서 깜박거리는 LED 빛을 보도록 하면 몸이 얼어붙는 공포반응이 빠르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시간이 지난 뒤나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상황에 맞닥뜨려도 공포반응이 나타나는 비율이 낮다는 것도 확인했다. 사람의 트라우마 치료에 사용되는 EMDR의 치료 효과가 생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빛과 유전공학적 기법을 결합해 특정 세포를 조절하는 광유전학을 통해 뇌에서 안구 운동과 주의집중을 담당하는 상구와 중앙 내측 시상핵을 거쳐 기억이 저장되는 편도체에 이르는 신경회로가 공포기억을 관장하는 새로운 통로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신희섭 단장은 “PTSD는 단 한 번의 충격적인 경험으로 형성되지만 기존의 약물과 심리치료 방식으로는 치유기간이 오래 걸린다”며 “이번에 발견한 공포기억 억제회로를 조절하는 약물이나 기술을 개발해 PTSD를 좀더 손쉽게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IBS 신희섭 단장팀 연구 이전에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와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컬럼비아 의대 공동연구팀은 뇌의 흥분성 신경세포에서 포도당과 유사한 물질을 대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이노시톨 대사효소를 제거하면 공포기억이 빠르게 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해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PNAS’ 1월 28일자에 발표하기도 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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