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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해교전/ 시간대별 상황

    ◆ 교전 이전 ◇06:30 아군 고속정 3개 편대 6척,어로보호 지원 출항. ◇07:30 연평도 어선 20여척,조업구역 이탈 조업 시작. ◇09:37 북한 육도기지 경비정 388호(155t),20노트 남하기 동 시작.북한 어선 육도 주변 20 척,등산곶 주변 10척 조업 중. ◇09:46 북한 등산곶기지 경비정 684호(215t),17노트 남하기 동 시작.2함대사령부 경계강화 지시,고속정 편대 조업어선 통제. ◇09:51 북한 경비정 북방한계선 (NLL)침범 우려,조업 중단 및 조기 복귀시키도록 요청. ◇09:54 북한 경비정 388호,육도기지에서 NLL 침범.해군 고속정 253편대(참수리 328·369호),대응기동 시작. ◇10:01 북한 등산곶기지에서 684호,NLL 침범.해군 고속정 232편대(참수리 357·358호),대응기동 시작. ◇10:14 253편대 육도 경비정에 접근,차단 기동.육도 경비정 침로 변경 북상 ◇10:15 2함대사 232편대에 등산곶 경비정과 차단 기동지시. ◆ 교전 ◇10:25 등산곶 경비정,참수리 358호 차단기동 통과 후 뒤따르던 357호에 85㎜포 선제 사격,357·358호 즉각 대응 사격. ◇10:26 해군 초계함(제천함·진해함)과 253·256편대에 232 편대 지원 지시. ◇10:29 해군 해안포 긴급 전투 배치. ◇10:30 공군 전투기(공대함 미사일 장착) 긴급 출격 대기.고속정 256편대 격파사격 개시. ◇10:33 고속정 253편대 격파 사격 개시. ◇10:33 참수리 358호,357호 예인작업 착수. ◇10:43 제천함 전방 이동,격파 사격 개시. ◇10:45 357호 2000 야드 예인 도중 침수됨.전사상자 확인 및 구조.선체 소화 및 방수 실시. ◇10:46 고속정 358호로부터 357호 사망자 5명 첫 보고. ◇10:47 진해함 전방 이동,격파 사격 개시.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위협전자파 탐지,채프(레이더 교란용 금속 은박편) 발사. ◇10:51 등산곶 경비정 도주 북상.육도 경비정이 예인. ◇10:56 현장 모든 전력에 대해 사격중지 지시.북한 경비정 NLL 북방 0.5∼1마일 지점 위치 ◆ 교전 이후 ◇11:00 2함대사,초계함과 고속정에 전속력 남하 지시 ◇11:25 피해함정 인원확인 결과 보고(전사 4명,부상 19명,실종 1명) ◇11:59 피격 357호 침몰.
  • 서해교전/아군 화력 얼마나 썼나

    29일 서해교전에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북한 등산곶 고속정으로부터 85㎜ 중포로부터 첫 피격을 받은 뒤 우리측도 엄청난 규모의 대응 사격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다. 교전에 참가한 고속정 6척과 초계함 2척은 보유하고 있던 포탄을 북 경비정에 거의 모두 퍼부었다. 합동참모본부의 조사 결과,357호는 40㎜기관포 6발,20㎜ 벌컨포 700여발이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다.357호의 발사량은 9월 인양을 마친 뒤 나오겠지만,옆에서 함께 싸우던 358호의 관측을 토대로 추정했다.특히 357호에서 발사된 40㎜ 기관포 수발이 북한 경비정 함교에 명중되는 모습이 관측돼 27명의 승조원 중 24명이 죽거나 다치면서도 필사적인 전투를 펼친 것으로 추정된다. 참수리 358호는 북 경비정이 사격을 하면서 357호의 꼬리를 물고 도는 바람에 처음 몇초간은 목표점을 찾지 못하다가 곧 40㎜ 38발,20㎜ 1050발을 쏘았다.포수를 제외한 수병들은 K-2소총을 퍼부었다. 5분 뒤 서쪽에서 교전에 합류한 327와 365호는 3.6㎞ 거리에서 모두 합쳐 40㎜포를 74발,20㎜포 1040발을쏘았다.8분뒤 동쪽에서 합류한 328호와 369호도 비슷한 거리에서 40㎜포 135발,20㎜포 1038발을 퍼부었다. 보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초계함 2척 가운데 제천함이 교전시작 18분뒤에 먼저 격파사격에 참여,10.1㎞ 거리에서 76㎜ 중포를 32발,40㎜기관포를 184발 발사했다.22분뒤 13.4㎞에서 포격을 시작한 진해함은 76㎜포를 21발 쏘았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을 침몰시킬 수도 있는 76㎜ 중포는 제천함이 32발중 8발을,진해함은 21발중 7발을 명중시켰으나 경비정은 도주하고 말았다. 김경운기자 kkwoon@
  • 서해교전/ 합참 조사 문제점

    지난달 29일 발생한 서해교전의 대응 방법을 놓고 제기된 몇몇 논란은 7일 합동참모본부의 진상 조사를 통해 분명한 해답을 얻었다.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고,문제점도 내포해 추가조사 또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사전 도발의도 못 느꼈나 합참의 조사는 서해교전이 북한 해군의 기습적인 선제공격이었다는 사실만 적시했을 뿐,이같은 기습공격을 사전에 감지·예측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조사결과를 내놓지 않았다.정확한 정보분석은 기습공격일지라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기습공격의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되었다.6월들어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이 부쩍 늘었으며,교전 당일인 29일 이전에 침범한 5차례 모두 이전과 달리 북한어선을 통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합참은 북한이 6월11일과 13일 NLL을 침범했을 때에는 우리측의 반응을 떠보았다고 밝혔다.기습 직전인 27일과 28일에는 교전일과 마찬가지로 연평도 서북방 12.6㎞쯤에서 경비정 1척이 먼저 내려오고 몇분 뒤 서북방 25.2㎞쯤에서 1척 등 2개 방향에서 내려왔다. 국방부 황의돈(黃義敦) 대변인은 “올들어 북 경비정들이 조준사격 태세로 내려왔다.”면서 “그러나 그것이 이번처럼 기습도발로 이어질지는 판단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리측 피해 왜 컸나 합참 조사단은 99년 서해교전 당시보다 우리측의 피해가 큰 것은 선제기습공격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교전 당일 연평도 서북방 25.2㎞에서 남하한 등산곶 경비정 1척에 대해 경고방송 및 ‘-’형의 차단기동을 하기 위해 고속정 2척이 910m까지 접근했을 때 북측은 이미 조준사격 태세에 들어갔고,선두에 있던 참수리 358호가 앞서 나간 뒤 뒤따라오던 357호를 노렸다.첫 발이 지휘부와 통신시설이 있던 조타실을 명중시켰고, 두번째 포탄이 기관실에 맞아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세번째 탄은 선체 후미 동력장치를 맞혔다.결과적으로 기존 서해상의 작전교전 지침이 북측에 대한 경고를 위해 1㎞ 이내로 근접하도록 규정한 점이이같은 기습을 불렀다고 판단,합참은 지난 2일 새로운 작전지침을 하달했다. ■북 경비정 격침 실패 이유 해군 고속정이 지닌 40㎜ 기관포와 20㎜ 벌컨포로는 215t에 이르는 북한 경비정을 쉽게 침몰시킬 수 없다.침몰을 위해서는 수면 아래 선체 하부를 명중시켜 물이 새도록 해야 하는데 벌컨포는 조준선이 높고,기관포는 화력이 약하다.따라서 경비정 침몰은 10여㎞ 거리에서 사격하는 초계함의 76㎜ 중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NLL 침범과 함께 19.1∼23.2㎞ 떨어진 덕적도에서 출발한 초계함 2척은 현장도착 시간이 5분 정도 늦었고,사격범위에 들었을 때에는 교전 현장은 우리 고속정 6척과 북한 경비정 1척이 뒤섞여 ‘마음놓고’격파사격을 하기 어려웠다는 설명이다.특히 함참은 “사격 지점까지 도착하기까지 제천함이 17분,진해함이 21분 소요됐으나 곳곳에 주민들이버려둔 어망 때문에 지연됐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초기 보고가 아군의 피해보고는 경미한 반면,북 경비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으로 잘못 전달됐고,사격종료 직전인 당일 오전 10시48분 북유도탄정의 함대함 스틱스(STYX) 미사일의 레이더를 탐지,추격 공격을 중지시켜 격침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경운기자 kkwoon@
  • 北경비정 2척 7분간격 남하 등 이상징후 알고도 대응 안했다, 합참 현장조사 확인

    지난달 29일 서해교전 당시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을 때 작전을 지휘했던 2함대사령부(사령관 丁秉七 해군 소장)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전술적 초기대응이 잘못됐던 것으로 5일 군 조사결과 밝혀졌다. 경기도 평택의 2함대사령부와 연평도 교전 현장에서 조사를 벌이고 있는 합동참모본부 전비태세검열실(실장 裵相基 해병 소장)은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서해교전 전술조사 보고서를 국방부장관 등에게 보고한 뒤 7일 오전 발표할 예정이다.전비태세검열실이 지적한 2함대 지휘부의 문제점은 북한 경비정이 27,28일에 NLL을 넘어 남하했을 때에는 북한 어선과 중국 어선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으나,교전 당시인 29일에는 NLL 근처에서 북한 어선들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한 사실이다. 즉 경비정 2척이 7분 간격으로 남하하는 이상 징후를 한국해군전술정보시스템(KNTDS)을 통해 파악한 뒤에도 아무런 대응조치를 지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교전 당시 군에는 평소보다 한 단계 높은 ‘B+급’의 월드컵 대비태세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이 때문에 이날 오전 10시1분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한 직후 초계함에 출동지시를 내릴 때 ‘고속순항’명령을 내렸다면 도주하는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기 전에 초계함의 유효사거리 안에 들어와 결정적인 포격을 실시,격침도 가능했을 것으로 조사 결론을 내렸다. 이와 함께 피격된 참수리 357호와 함께 기동하는 358호(편대장 소령 김찬)의 지휘부는 교전 직후 357호의 피해상황을 ‘부상자 4∼5명’으로 보고하는 바람에 경미한 충돌로 판단한 2함대사령부가 치명상을 입고 도주하는 북한경비정을 더 이상 뒤쫓지 못하도록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결론지었다.그러나 연평도를 관할하는 해병 6여단이,어선들이 불법적으로 어로저지선 주변까지 조업하도록 방치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민들을 상대로 한 탐문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1차 조사에서는 결론을 유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운기자 kkwoon@
  • ‘6·29’ 해군父子 대이은 무공

    서해교전에서 북한 경비정에 피격된 참수리 357호의 정장 윤영하(尹永夏·26) 소령이 전사한 지난달 29일은 윤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尹斗鎬·61·예비역 대위)씨가 해군장교 시절 해상에서 무장간첩선을 나포한 날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5일 해군과 윤 소령 가족들에 따르면 아버지 윤씨는 꼭 32년 전인 1970년 6월29일 인천 남방 해역에서 펼쳐진 무장간첩선 나포작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윤씨는 제12해상경비사령부 소속 50t급 순시선 PB-3의 정장으로서 계급은 이번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아들의 순직 당시와 같은 해군 대위. 아버지 윤 대위는,이날 새벽 오이도 남방 1.4㎞까지 접근하다 해안선을 지키던 경계병들에게 발각돼 총격을 받고 해상으로 도주하던 간첩선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윤 대위가 탄 순시선은 무장간첩선과 2시간여 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을 벌여 마침내 영흥도 북방 해상에서 4t급 무장간첩선을 붙잡았다.윤 대위는 공을 인정받아 그해 7월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윤 대위가 간첩선을 붙잡은 이날로부터 32년 후 아들 윤 소령은 북한 경비정의 기습적인 포격을 받고 다른 3명의 부하들과 함께 숨을 거둔 것이다.윤 소령은 어버지(해사 18기)의 권유로 해군사관학교(50기)에입학했다. 윤 소령이 소속된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는 윤 소령 부자의 운명적 군인정신을 기려 부대 안에 추념비를 세울 방침이다. 김경운기자 kkwoon@
  • 침몰된 고속정 인양작업 태풍 지나간뒤 8월 시작

    지난달 29일 북측 경비정의 선제 기습공격으로 침몰된 해군 고속정(PKM) 참수리 357호의 인양작업이 태풍 때문에 8월부터 시작된다. 해군은 4일 “정확한 당시 상황파악을 위해 인양작업을 서두르기로 했으나 태풍 ‘라마순’이 북상,인양을 연기했다.”면서 “함정 인양은 잠수부들의수중 작업과 크레인을 동원한 세밀한 작업이기 때문에 부득이 태풍이 지나간 뒤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8월부터 2개월 동안 진행될 인양작업에는 구조함,탐색함,해상 크레인,바지선이 동원되고 해군 해난구조대원(SSU) 60여명이 참가한다. 김경운기자 kkwoon@
  • [기고] 서해교전 냉정한 분석과 대처를

    남북한 관계의 이중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실감나는 요즈음이다.‘평화통일’이라는 7000만 민족의 절절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 다방면에 걸친 대화와 회담을 진행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155마일에 이르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한 대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지난달 전 세계적 ‘꿈의 축제’라 일컬어지는 월드컵대회에서 터키와 3-4위를 겨루는,바로 그날(6월29일) 북측은 동족인 우리의 쾌거를 성원하기는커녕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함으로써 이런 ‘남북관계의 이중성’을 유감없이 재현(?)시키고 있다. 이 사태로 27명의 무고한 대한민국 군인들이 살상되고 고속경비정인 ‘참수리 357호’가 침몰돼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가 크게 흔들리는가 하면,북녘동포들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써 온 우리 국민 대다수의 마음을 안타깝고 비통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이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異常)사회’라고는 하지만,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같은 군사적 살상행위를 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더욱이 북측은해군사령부 및 외무성 대변인의 조선중앙통신(KCNA)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번 사건이 “남조선 군사당국이 반북대결의식을 고취시키고 공화국의 국제적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해 저지른 조작극”이라고 왜곡하고 있으니,적반하장(賊反荷杖)이 극에 달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우리사회 일각에서 “우리 군(軍)의 대응태세에 문제가 있어 패전(敗戰)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까지 대두돼 함정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섣부른 예단은 위험하다.자칫 사태의 본말을 전도시킴으로써 국가를 위해 싸운 해군장병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제2의 군사적도발’을 막기 위해 불철주야로 나라를 지키고 있는 전체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 이번 교전은 일각의 판단처럼 우리만이 엄청난 피해를 본 일방적 ‘패전’이 아니라 오히려 북측의 기습도발로 ‘조타실’을 비롯한 함정의 치명적인 부분이 피격받았음에도 자동포 등 모든 화기들을 총동원해 결사항전한 전투로 볼 수 있다.기습공격을 감행한 북측의 경비정 1척이 파손되고 30여명으로 추정되는 인민군들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져 ‘일방적 패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 일각에서는 우리 군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안이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엄청난 후과(後果)를 자초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확전을 불사하고라도 북측경비정을 격침시켜야 했었다는 주장과 함께 관련자를 엄중처벌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이런 견해나 주장은 대부분 한반도의 분단현실,다시 말하면 ‘이중적 특수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정전협정 및 남북기본합의서의 관련규정에서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북한군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면전 위험을 무릅쓰고 선제공격을 하는 것은 ‘국제평화유지’를 기본사명으로 하는 것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이 경고에서 사격에 이르기까지 5단계에 걸친 교전규칙을 준용한 것은 확전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으며,이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본다.관련자에 대한 처벌문제 역시 관련정보를 충분히 분석·평가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그보다 먼저 고귀한 생명을 잃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부상당한 장병들의 쾌유에 힘을 쏟아야 한다.지난해 9·11테러때 미국국민이 정부를 책망하기보다 유가족들의 아픔을 통감하며 여론을 결집,이들을 위한 후속조치 마련에 전력을 기울였던 점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한 북측이 어떤 의도에서 이런 도발을 저질렀는지 그 저의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아울러 이를 계기로 국론을 결집하고,북측에 대해 공식사과 및 책임자 처벌,재발방지책 마련 등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강석승/ 경기대 정치대학원 교수
  • 서해교전/ 피격 北경비정 사진 공개

    지난 달 29일 서해교전 때 우리 해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채 예인되는 북한 경비정의 사진이 2일 공개됐다. 교전당시 북한 경비정 PCF684호는 우리 고속정 5척과 초계함 2척으로부터 20㎜ 발칸포와 40.76㎜ 함포 사격을 받았다.PCF684호는 우리측 고속정 357호에 85㎜ 함포를 조준사격,침몰시킨 경비정이다. 사진은 북한 경비정 PCF684호가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뒤 예인함(PC388호)에 이끌려 황해도 등산곶을 지나 북한의 해군기지가 있는 사곶항으로 향하는 모습이다.경비정은 우리측의 공격을 받아 함상 구조물이 모두 날아가 버린 모습이었고 주위가 검은 연기로 휩싸여 있다.앞쪽의 어망은 우리측 꽃게잡이 어망이다. 이 사진은 고속정(참수리 365호)의 부장인 추성훈 중위가 개인적으로 촬영한 것이다. 김경운기자
  • [2002 길섶에서] 참수리

    오래 전 낙동강 부근에서 아주 큰 새를 본 적이 있다.날개를 쫙 편 채 한조각 구름처럼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던 자태가 무척이나 빼어났다.그 때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직전까지 시끄럽던 새의 지저귐이 사라져 주변이 조용해진 것이었다.부리가 노란 그 새가 뭔지 궁금해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었다.천연기념물 243호인 참수리란 맹금이며,흔하게 볼 수 없는 새란 걸 알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있다. 참수리는 날개길이가 2m를 웃돌 정도로 큰 새다.시력이 좋아 수백m상공에서도 병아리를 알아챈다.이는 눈이 줌(zoom)렌즈처럼 돼 있기 때문이다.멀리서는 망원렌즈였다가 가까이에서는 광각렌즈로 변하는 이글아이(eagle eye)이다.참수리는 이런 눈의 비밀로 사람보다 5배나 물체를 잘 본다. 우리 해군 고속정의 이름이 바로 참수리다.몇년전 기러기에서 바뀌었다.참수리처럼 밝은 눈으로 바다를 감시하라는 뜻이었다.밝은 눈으로 바다를 지키다 북한의 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한 참수리호 장병들의 명복을 빈다. 박재범 논설위원
  • 서해교전/ 軍반응 “”반격 제대로 못해 분하지만 전투회피 주장은 억측이다””

    국방부와 일선 군 부대의 장교들은 이번 교전사태를 보며 대체로 착찹한 심경 속에 말들을 아끼고 있다. 경위야 어쨌든 군인으로서는 겪지 말아야 될 ‘패전이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아울러 해군 고속정을 침몰시킨 북측의 경비정을 침몰시키 못한 데에는 분한 마음도 없지 않다.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해군 최모(35) 소령은 “뉴스를 보면 부끄럽고 속상하다.”면서 “북측이 명백하게 기습작전을 편 것이기 때문에 지척에 있던 고속정이 침몰할 수밖에는 없다고 여기고 있지만,참수리 357호가 피격된 뒤 다른 고속정 등이 반격대응을 제대로 못한 측면은 문제”라고 말했다.반면 고속정 정장 출신의 해군 유모(41) 중령은 “5노트의 느린 속도를 유지해도 넘실대는 파도를 따라 요동이 심한 고속정에서 발칸포로 도주하는 적함을 잡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면서 “완벽한 기습이라면 총알 1발로도 적을 죽일수도 있지만 사격조건이 나쁘면 수백발을 쏘아도 허사에 그치고 만다.”고 설명했다.그러나 그는 “서해상의 작전지침대로 경고방송 없이 먼 발치에서시위기동을 한 뒤 바로 경고 사격을 한다면 북측이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여 자칫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확전을 부추기는 듯한 일부 보수언론의 태도에 대해서 군 장교들은 “그럼 전쟁을 하란 말이냐.”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일선 육군부대의 엄모(40) 중령은 “마치 군이 전투를 회피한 것처럼 몰고 가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억측”이라면서 “그 같은 지적이 전쟁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북측의 선제 공격함을 왜 침몰시키지 못했느냐는 꾸중으로 듣겠다.”고 말했다.군 수뇌부에 대한 문책론에 대해서 일부 장교들은 오히려 “솔직히 따져보면 지금까지 군 수뇌부가 군의 잘못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던 적이 있느냐.”면서 의외로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김경운기자
  • 서해교전/ 최초 피해보고 늦고 부정확

    ‘6·29 서해교전’당시 우리측 피해 규모가 최초로 보고된 것은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는 시점이었고,그 내용도 부정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 관계자는 2일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피해 보고가 2함대 사령부에 접수된 것은 29일 오전 10시50분쯤이었으며,그것도 ‘4∼5명이 다친 것 같다.’는 수준의 부정확한 보고였다.”고 밝혔다.첫 피해보고는 피격된 357호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던 고속정 358호가 했다.예인선이 도착한 뒤 357호의 승조원 27명 가운데 24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확인됐다. 해군 관계자는 “357호는 첫 포격이 조타실에 명중,통신이 두절된 데다 결사항전을 하느라 보고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358호도 교전중이라 더 일찍 보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전 사실과 남북한 함정들의 기동상황은 교전 직후인 오전 10시30분쯤 고성능 레이더를 갖춘 해군 KNTDS(첨단 지휘통제 장비)를 통해 2함대사령부와 합참 지휘통제실 등에 동시에 보고됐다. 따라서 북한 경비정을 뒤쫓던 초계함 2척이 조준사격으로 격침시키지 않은 것은 그 당시까지 우리측의 피해를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확전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김경운기자 kkwoon@
  • [사설] 교전규칙 개정 신중한 접근을

    지난달 29일 발생한 ‘서해도발사태’에서 우리 해군의 피해가 컸던 것은 ‘유엔사 정전시 교전규칙(ROE)’의 잘못 탓이라는 지적이 높게 일고 있다.현재의 교전규칙은 확전 예방을 우선시하고 있어 기습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북한은 우리의 이같은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김동신 국방장관은 이에 따라 교전규칙의 취약점을 보완해 대응태세를 확립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우리는 여기서 교전규칙의 개정작업이 우리 해군장병의 귀중한 목숨을 최대한 보호하면서도,확전방지라는 원래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교전규칙 등에 따르면 우리 해군은 북측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으면 경고방송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단계를 높여 작전을 펼치게 돼있다.이번에 참수리 357호는 이 교전규칙에 따라 경고방송을 위해 불과 수백m의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데다 차단 기동을 위해 측면을 노출시키고 있던 차에 기습을 받아 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따라서 군당국은 불시에 받은 공격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교전규칙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장병의 목숨을 보호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마땅하다. 그러나 혹시라도 교전규칙의 개정에서 선제공격의 문제가 다뤄진다면 이는 차원이 달라진다고 본다.우리 군은 현행 교전규칙을 통해 ‘선(先) 평화적 해결모색,후(後) 군사적 강권발동’이라는 대북 대응방침을 표명하고 있다.정전이라는 위태로운 상황을 확전으로 잇지 않으려는 고심어린 지혜라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선제공격의 문제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조만간 합참이 이번 사태의 결과를 일제 점검한 다음 교전규칙의 보완방향을 정하기로 했다니 모쪼록 우리의 자랑스러운 장병의 목숨을 지키면서 북한에도 억지력을 발휘하는 교전규칙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 서해교전/ 전투상황으로 본 국방 허점

    이번 ‘6·29교전사태’에 대해 국민들은 “왜 그렇게 우리측 피해가 컸나.”라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북한 경비정 2척에 대해 우리측은 고속정 및 초계정 8척이 맞서 전력적으로 우세했으나 사상자가 24명이나 발생했고 고속정 1척이 침몰했기 때문이다. 사건발생 이틀째인 30일 침몰된 참수리 327호의 생존 수병들의 증언과 교전에 참가한 다른 함정 지휘관들의 상황보고를 분석한 결과 북한 해군의 교전의도와 전투 의지는 명백했으나 이에 대한 우리 군과 정부의 대응은 매우 안일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의 사전 경고 무시- 중국의 대규모 선단은 자국의 근해가 오염돼 어족이 고갈되자 북방한계선(NLL)을 중심으로 남북 해역으로 이동해 불법조업을 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연평도보다 꽃게의 황금어장인 북한의 등산곶 근해는 중국 선단의 불법침입이 잦은 곳이었다.이 때문에 중국 선단은 이를 막는 북한 경비정들에 쫓겨 NLL 남쪽으로 도주해 내려오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특히 북한 경비정들은 중국 선단을 추적하며 조준사격에 가까운 위협사격 및포격을 하는 사례가 우리측에서도 자주 목격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 정보관계자에 따르면 6월 들어서만도 북한 경비정들은 5∼6차례에 걸쳐 중국 선단을 향해 총·포격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즉 북측의 총·포격 행위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측에도 위협적인 도발행위로 간주할 수 있었다.이 때문에 정부가 대북 채널을 통해 이에 대한 우려를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해석이다. -NLL 침범에 대한 안일한 대응- 국방부는 최근 북한 어선과 경비정의 NLL 침범 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통해 ▲NLL 침범 횟수가 예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줄었다 ▲우리 고속정이 침범 선박에 다가가 퇴거 경고를 하면 두말없이 되돌아가는 등 안보에 위협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북측이 최근 NLL 북측 경계선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는 등 협조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나 이날 북측의 전화통지문에서 밝혀졌듯이 북측은 과거 유엔이 임의로 설정한 NLL을 무시하고 언제든지 남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군과정부 관계자들은 “북측이 월드컵 경기기간에는 꽃게잡이 조업을 중단시키는 등 우리측에 우호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북측이 갖고 있던 불만을 감지하지 못했다. 북측이 새삼 NLL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좁은 어장을 놓고 남북한과 중국 등 3개국의 다툼이 심화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북측의 준비된 포격- 북측은 이번 교전의 근본적인 문제가 NLL의 부당성에서 비롯됐다고 스스로 밝혔기 때문에 북한군은 도발 의도를 갖고 NLL을 침범,전투를 벌였다는 정황이 더욱 분명해진다.더욱이 인양도중 침몰한 우리측 참수리 357호 고속정에 접근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철저한 전투대형이었다.(그림 참조) 북측 경비정 1척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직선 항해,고속정 편대(2척)에 접근했다.우리 고속정 2척은 경비정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함정을 가로로 운항했다.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 이르자 고속정 2척 가운데 선두함이던 참수리 358호를 그대로 통과시킨 뒤 선수를 돌려 뒤를 따르던 참수리 357호와 나란히 운항했다.보다 소형인우리 고속정은 정면에서 공격하는 함정이지만 중형인 북측 경비정은 함정의 측면에서 함포사격을 하는 것이 용이하다.즉 북측은 신속하게 전투대형을 갖춘 것이다.후미 함정을 노린 것은 선두함을 공격할 경우 후미함이 반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으로 해군은 분석했다. 북측경비정은 450m 거리에서 85㎜ 함포의 첫 발을 참수리 357호의 지휘탑인 조타실에 명중시켰고 곧이어 두번째,세번째 포격으로 기관실과 함미(艦尾)지휘부를 파괴했다.즉 순식간에 함정의 기능을 마비시킨 것이다. -초기 교전 대응 미비- 북측의 경비정이 NLL을 넘은 다음부터 첫 포격이 이뤄질 때까지 24분의 시간이 있었다.24분동안 북측 경비정은 고속으로 기동하며 남하,전투대형을 갖춘 뒤 망설임없이 포격을 했다.우리 고속정 편대는 평소와 다른 그들의 이례적인 기동에 대해 이전처럼 배를 가로로 운항했을 뿐이다.다시 말해 적함으로부터 포격을 당하기 좋은 위치로 운항한 것이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이날 교전에 참가했던 참수리 358호 승조원의 말을 빌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았으나 설마하고 여겼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아울러 “24분이라는 시간은 고속정으로서는 충분히 회피기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날 북측의 경비정 2척은 ‘SO1급’중무장 함정이었으며 평소 이 지역을 담당하는,보다 작고 무장이 적은 ‘청진함급’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말았다. 합참 관계자는 “주로 청진함급이 NLL 주변을 경비하지만 SO1급도 간혹 관측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피랍 美 펄 기자 참수당해”

    지난 달 파키스탄에서 납치된 월스트리트저널의 대니얼펄(38) 기자가 납치범들에게 살해됐다고 미국 국무부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 공식 확인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발표,“파키스탄 주재 미대사관이 오늘 펄 기자의 피살과 관련된 증거를 접수했다.”며 “펄 기자의 살해는 무도한 행위이며,미국과 파키스탄은 모든 관련자를 색출해 법정에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폴 스타이거 WSJ 편집국장도 이날 발행인 피터 칸과 공동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펄은 뛰어난 기자이자 훌륭한동료였다.”고 애도를 표하고 “펄 기자의 살해는 야만적행위”라고 비난했다.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펄 기자 살해장면을 녹화한 3분짜리 비디오 테이프가 지난 21일 밤 11시쯤 파키스탄 신드주 경찰서에 기자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에 의해 전달돼 현지에서 수사를 지원 중인 연방수사국(FBI)이 넘겨받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테이프에 따르면 펄 기자는 납치범들에 의해 목이 잘려참혹하게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펄 기자 실종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한 조사관에 따르면 카메라가 펄 기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동안 갑자기 펄 기자의 목이 잘렸으며 둔기가 살해과정에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펄은 지난달 23일 신발폭탄 테러용의자 리처드 리드와 연관된 이슬람 무장단체 지도자와 인터뷰 약속을 한 뒤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납치됐다. ‘파키스탄 주권회복을 위한 국민운동’ 소속이라고 밝힌 납치범들은 지난 달 30일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에 이메일로 “쿠바 관타나모기지에 억류 중인 파키스탄인 포로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24시간 안에 살해하겠다.”는 협박편지를 보냈다. 펄을 납치한 혐의로 체포된 영국 태생의 이슬람 무장대원 아흐메드 오마르 샤예드 셰이크는 법정진술에서 펄이 지난 달 31일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중국을 방문 중인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22일 “미국인을 위협하고 야만적 범죄행동에 가담하는 사람들은이들 범죄가 명분을 훼손하고,전세계 테러범들을 없애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굳게할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강조했다. 뉴저지주 프린스턴 출신인 펄은 스탠퍼드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1990년 월스트리트저널에 입사,12년간 미국과 유럽,아시아 등지에서 일했다.지난 2년간 남아시아지국장을 맡아왔다.프랑스 출신인 아내는 현재 임신 7개월째이다. 김균미기자 kmkim@ ■언론인 희생 사례…6년동안 280명 기자 피살. 이슬람 과격단체 지도자에 대한 인터뷰를 시도하다 납치·살해된 월스트리트저널 대니얼 펄 기자 사건이 전세계에 충격을 던져주면서 언론인에 대한 피살 사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제언론인협회(IPI)에 따르면 2002년 들어 22일 현재 펄 기자를 포함해 총 4개국에서 6명의 언론인이 피살된 것으로 집계됐다.지난 2001년과 2000년에는 각각 55명과 56명이 살해됐으며,지난 99년 86명,98년 50명,97년 27명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인보호위원회(CPJ)는 최근 발표한 성명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하면서도 기자들이 희생됐으나 관리들의 부정부패 혹은 범죄보도에 대한 보복으로 인해 피살된언론인이 더 많은 것으로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종군기자 피살=지난해 11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로이터통신 TV의 해리 버튼(33) 등 4명의 종군기자는 북부동맹의 카불함락을 취재하기 위해 카불로 향하던 중 주변에 매복해있던 탈레반군에 발견돼 피살됐다. ◆부정부패 보도=멕시코의 시사주간지 누바옵션의 페르난데즈 가르시아(37) 편집장은 지난 1월 미겔타운의 한 식당에서 나오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신원미상의 남자 두 명이 쏜 AK-47소총공격을 받고 즉사했다.페르난데즈 편집장은최근 전 멕시코시장과 마약거래상의 연루의혹을 파헤치면서 수차례 살해 협박을 받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 보도=영국 북아일랜드 선데이월드 마틴 오헤이건(51)기자는 지난해 아마그 카운티 집 근처 술집에서 부인과나오다 무장단에 의해 총탄 6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오헤이건 기자가 파헤치던 마약거래조직인 LVF의 소행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현진기자 jhj@
  • 1월의 문화인물…정약종 선생

    문화관광부는 1월의 문화인물로 선암(選庵)정약종(丁若鍾1760∼1801)선생을 선정했다.그는 조선후기의 천주교 신학자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저술했으며 신유박해(1801)의 순교자이다. ‘주교요지’는한글로 펴낸 것으로 성서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시대 남인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한국 최초의 어류생태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저술했고 동생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등 수많은 저술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형 정약전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된 정약종은 1786년 아우구스티노란 세례명을 받았다.1791년 제사를 거부한 ‘윤지충 사건’으로 탄압이 심해지자 형제들이 신앙을 버렸지만 정약종은 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만든 명도회(明道會)란 평신도 단체 회장을 맡는 등 신앙활동에 몰두하다 1801년 2월11일(음력)에 체포돼 배교하기를 거부하고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됐다.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철상(哲祥·가를로)이 같은 해에,부인 유세실리아와 작은 아들 하상(夏祥·바오로),딸 정혜(情惠,엘리사벳)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가톨릭 집안이다. 정약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등 관련단체는 2일 오전 10시 명동대성당에서 기념추모회를 비롯,기념강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이종수기자 vielee@
  • [씨줄날줄] 순국열사 韓聖洙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국민감정이 크게 상처받고 있는 터에 내일(12일)은 한성수(韓聖洙)열사의 순국 56주기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처음으로 토요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한국광복군동지회가 주최하고 대한매일이 후원하는 추모제와 강연회가 열린다. 다수 국민은 한 열사에 대해 생소할 것이다.일본 전수(專修)대학 재학중인 1944년 1월20일 일제의 강제로 학병에 끌려갔다.결혼 2개월 만의 일이다.중국 서주(徐州) 일본군 제7995부대에 한국대학생 50명과 함께 배치되었다가 3월 하순 가장 먼저 탈출하여 광복전선에 뛰어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곳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제3지대에 속한,김학규장군이 지휘하는 징모제6분처였다.각지에 지하공작단을 파견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군에 배속된 한국인 병사들을 탈출시키는 전지공작 부대였다. 여기서 군사훈련을 받은 한열사는 광복군에 편입되고 45년1월 홍순명·김영진 동지와 적지구 내 초모공작과 군자금조달을 위해 상해에 밀파되었다.동포 청년들과 접촉하면서 거점확보와 초모공작을 하는 한편,상하이(上海)의 한국인 부호 손창식과 면담하다가 일본 특무기관원에게 동지들과 함께체포되었다. 일제 특무기관에서 1개월여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일본군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재판정에 선 한 열사의 애국투혼은 천추에 길이 남는다.일본어 사용을 거부하자 검사가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출신인데 왜 국어를 쓰지 않는가”라고 신문하자 “나는 한국인이다.너희는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나의국어는 한국어뿐이다”라고 답했다. 한 열사의 이러한 법정투쟁으로 다른 동지들이 5년 정도의선고를 받은 데 비해 사형이 선고되고 5월13일 난징(南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이역에서 순국한 것이다. 부인과 유복자를 남겨놓고 참수당한 한 열사,유해마저 수십년 동안 적지 일본 유텐지(祐天寺)란 절간에 방치됐다가 소문없이 조국땅에 귀환한 한 열사의 영전에 뜻있는 이들이 국화 한송이씩이라도 바쳤으면 싶다. 김삼웅 주필 kimsu@
  • ‘자랑스러운 해군’ 9명 선정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뽑은 ‘본받을만한 해군의 참 군인’은 누구일까. 해군사관학교는 16일 해사생도 800여명이 추천하고 학교 교육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선정한 참 군인 9명을 발표했다. 9명중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1545∼1598)과 신라시대 해양개척자장보고 대사(8세기초) 등 역사속의 인물 2명이 포함됐다.이어 초대해사교장을 역임한 손원일 제독(1910∼1980)과 해사 1기생 현시학 제독(1924∼1989)이 뽑혔다. 62년 동해경비작전중 함정의 납북을 저지한 뒤 순직한 최성모 소령(1931∼1962),월남전에서 각각 희생정신과 책임감의 귀감을 보인 청룡부대 이인호 소령(1931∼1966)과 전창우 소위(1940∼1967)도 선정됐다. 생존 군인중에서는 지난 99년 연평해전의 영웅 안지영 대위가 유일하게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안 대위는 당시 연평도 근해해상에서작전중이던 참수리 325호정의 정장으로 선제공격해온 북한 어뢰정과교전을 벌여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해군사관학교 서영길 교장(중장)은 “생도들이 훌륭한 선배들의 군인정신을 본받아 유능한장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 [외언내언] 2진아웃제

    어린 소녀에게 정서적 동경이나 성적 집착을 갖는 현상을 ‘롤리타 신드롬’이라고 한다.‘롤리타’는 본래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제목으로,이 소설은 12세 소녀 롤리타와 중년남자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롤리타 신드롬’과 유사한 뜻을 가진 심리학 용어로 ‘소아 기호증(小兒嗜好症)’이 있다.사춘기 이전의 어린이들과의 성적 접촉을 선호하거나 어린이들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만 성적으로 흥분이 되는 증상이다. 심리학에서말하는 ‘유치증’은 소아기호증과 매우 비슷하나 그 대상이 더 어리다는 것이 다르다. ‘롤리타 신드롬’‘소아기호증’‘유치증’은 모두 어린이를 성노리개의 대상으로 삼는 성도착증이란 관점에서 병리학적이다. 조선 정조시대의 형조 판례집인 추관지(秋官志)에는 “12세 이하의 어린 소녀를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했다”는 대목이 있다.또 “의성에 사는 최광률이란 사람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린 소녀의 손을 잡았다가 즉시 참수형(斬首刑)에 처해졌다”는 기록도 나온다. 오늘날 인권과 민주주의종주국임을 자처하는 미국에서도 아동 성범죄만큼은 조선시대 못지 않은 엄격함으로 다스린다.뉴저지주는 지난 94년 ‘매건법’을 만들어 기소된 적이 있는 어린이 강간범과 성도착증 환자에게 10년간주소지를 당국에 등록하고 성범죄 사실을 이웃에 공표하도록 했다.심지어 지난 96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두차례 이상 아동을 성폭행한 범죄자들에게 약물을 투입해 성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서인지 미국 하원은 지난 25일 아동 성범죄 행위 두번이면 무조건 무기징역을 부과하는 이른바 ‘2진 아웃제’를 가결했다.영국노동당 정부도 13세 이하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에게 종신형을 선고하도록 하는 쪽으로 성관련 법안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가장 비윤리적이고 가장 추악한 범죄를 영원히 추방하겠다는 뜻일 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 상담건의 30%가 13세 이하를 대상으로 한 범죄란 보고서가 있다.만 7세 이하도 무려 11%나 된다고 하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그런데도지난 1일 발효된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는 “아동 성폭력은 가중처벌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처벌 조항은 찾아 볼 수 없다.아직도 우리 사회는 어린이 성폭력에 대해서만큼은 이례적으로 ‘관대’한 것 같다.우리는 언제까지 저 성도착증 어른들에게 짓밟힌 힘없는 새싹들의 ‘아우성’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
  • 북한 ‘불가사리’·일본 ‘고질라’ 여름극장가 대결

    전체관람 등급을 받은 괴수영화 2편이 여름방학을 맞은 극장가에 간판을 건다.북한영화로는 국내 최초로 극장용으로 선보이는 ‘불가사리’(감독 정건조·22일 개봉)와 일본 ‘원조’괴수영화로 꼽혀온 ‘고질라 2000’(감독 오가와라 타카오·8월5일 개봉).물론 영화는 2주일의 시차를 두고 개봉한다.하지만 이들이 남북 문화교류와 제3차 일본대중문화개방 이후의 파장을 점칠바로미터라는 점에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기술면에서 단순비교했을때 ‘불가사리’는 ‘고질라’를 넘어설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전세계 배급을 목표로 한 본격 SF물을 찍으면서 북한은 50년 전통의 일본 ‘고질라’시리즈의 많은 부분을 고스란히 ‘답습’했다.84년 영화를 찍을 당시 조선예술영화촬영소는 일본 도호영화사의 특수촬영부를초청해 기술이전을 받았고,고질라를 연기하던 배우까지 캐스팅했다. 불가사리와 고질라의 걸음걸이와 몸짓이 흡사한 것은 그 때문이다.조정의 폭압에맞서 민중 봉기가 일어날 즈음의 고려말.평생을 대장장이로 늙어온 탁쇠(리인권)는 농민들에게서 몰수한 농기구들로 무기를 만들라는 관가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처형당하면서 밥알로 불가사리 인형을 만든다.그렇게 괴수로 태어난 불가사리는 탁쇠의 딸 아미(장선희)를 지키며 관군을 무찌른다는 줄거리다. 단순한 선악구도에다,‘주인공’ 불가사리가 산으로 땔감이나 하러 다니는 60년대식 내러티브는 테크놀로지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을 유혹해내기엔 역부족이다. ‘불가사리’는 제압할지 몰라도,일본판 ‘고질라’도 ‘할리우드 버전’의흥행을 따라잡기는 버거울 것같다.“문제는 크기”라는 구호를 자랑삼았던할리우드판이 지나간 뒤 뒤늦게 찾아온 일본 ‘고질라’는 김이 많이 빠져버린 느낌이다.고질라의 액션규모나 전체적인 디테일이 할리우드 것과는 한참수준차가 난다.이를테면 바다속에서 암괴가 날아오르는 장면은 아동용 SF만화처럼 조악하고,고질라가 육중한 걸음걸이로 해변을 걸어나오는데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고질라 연구소를 운영하는 생물학자 시노다(무카다 다케히로)와 그의 어린딸,과학잡지 기자인 유키(니시다 나오미)가 고질라의 등장을 예견하고 외계생물체의 비밀을 캐나간다.등급위에서 외국영화로 분류된 ‘불가사리’는 서울 개봉관으로는 MMC를 비롯해 변두리 4개 극장밖에 잡질 못했다.홍보를 맡은 오디세이측은 “필름 원판의 신상옥 감독 이름을 빼는 등의 문제로 심의가 지연된 탓도 있지만,무엇보다 외국영화로 분류되는 바람에 관심을 보이던 극장주들조차 외면했다”며 “북한영화가 방화로 규정되면 스크린쿼터를 의식한 극장주들의 관심이 지금보다는 훨씬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현재 문화관광부는 향후 북한영화를 국산영화에 포함시킬지의 여부를 조율중이다. 황수정기자 s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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