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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벽화여,고구려를 말하라/전호태 지음

    두 무리의 군사가 마주친다.장수 두 사람이 벌판 가운데에서 일합을 겨룬다.전마(戰馬) 두 마리가 부딪칠 듯 달려들자 창날이 번득인다.…승자는 패자에게 말한다.“목을 내 놓으시오.” 패자가 말한다.“원통하다.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내 목을 베시오.”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벽화여,고구려를 말하라’(사계절출판사 펴냄)에서 통구 12호분에 그려져 있는 ‘적장 참수’ 장면을 이런 스토리로 재구성한다.통구 12호분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 있는 중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하나이다. 벽화는 투구를 쓰고 비늘 갑옷을 입은 무사가 비슷한 복장을 한 다른 무사의 목을 베는 순간을 묘사했다.패자는 무릎을 꿇은 채 목을 늘어뜨렸다.승자는 왼손으로 패자의 투구 끝을 잡고,오른손에 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치켜들었다.승자의 오른발 못신은 패자가 놓친 긴창을 밟고 있다.신라나 백제의 무덤에서도 나오는 못신이 실제 전투에서도 쓰여졌음을 보여준다. 이 벽화와 같은 고분에 있는 기마 질주 장면은 역시 지안에 있는 삼실총 공성도(攻城圖)와 함께 삼국시대의 전투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몇 안되는 그림자료들이다. 고분벽화 연구로는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전 교수는 고구려가 누구의 역사인지를 논하기 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어떻게 살았는지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문헌자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그것을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 바로 고분벽화라는 것이다. 전 교수는 ‘벽화여,‘에서 고구려인의 삶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쉬운 문체로 설명하고 있다.한국인들에게 의미있게 받아들여지는 고구려인의 모습이 중국인들에게는 크게 의미가 없다면 그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1만 4800원. 서동철기자 dcsuh@˝
  • 司試준비생 行試로 ‘대이동’

    행정고시 경쟁률이 초강세를 보였다.이는 사법시험에서 일정수준 이상의 토익·토플·텝스 시험성적표를 제출하는 것 때문에 사시 응시자가 예년의 65% 수준(잠정 추정치)으로 줄어들면서 나머지가 행정고시로 몰린 것으로 풀이된다. 선발인원이 줄어든 외무고시 경쟁률도 지난해보다 높아졌고 행정고시 기술직의 경쟁률은 예년과 비슷했다. 행정자치부는 행정·외무고시 원서접수(5∼12일)를 마감한 결과 행시는 265명 선발예정에 1만 7985명이 지원한 것으로 잠정집계됐다고 18일 밝혔다.경쟁률은 67.9대 1이다.외무고시의 경우 20명 선발에 1526명이 지원해 76.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최종 집계는 설 연휴 이후에나 가능하지만 인터넷 접수가 크게 늘었기 때문에 잠정치에서 추세 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시와 비슷한 직렬의 경쟁률 급등 행정고시의 경쟁률은 지난해의 57대1,2002년의 40대 1에 비하면 크게 높아진 것이다.관계자는 “행시 기술직 응시자 수는 변동이 거의 없었지만 행정·공안직 응시자가 2105명이나늘어 경쟁률 상승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올해는 일반행정·공안직에서 202명 선발예정에 응시자는 1만 4047명이 몰려 경쟁률은 무려 69.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특히 사법시험과 과목이 많이 겹치는 법무행정직과 검찰사무직의 경쟁률이 특히 초강세를 보였다.법무행정직과 검찰사무직은 각각 10명,3명 선발예정에 829명과 562명이 몰려 82.9대 1,187.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외시 경쟁률은 지난해 55대 1에서 76.3대 1로 상승했지만 지원자는 1547명에서 1526명으로 오히려 줄었다.선발예정 인원이 28명에서 20명을 줄어들면서 경쟁률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행시 기술직의 지원자는 지난해 3892명에서 3938명으로 소폭 증가하는데 그쳤다.경쟁률은 62.5대 1이다. ●사시 지원자가 행시로 대이동 “사시의 영어시험제도가 바뀌면서 사시 지원자가 줄어든 만큼 행시로 이동한 것같습니다.” 한 수험전문가의 설명이다.수험생 김모(31)씨는 “주변의 고참 수험생들 경우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사시와 행시를 동시에 준비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면서 “일정수준의 영어성적을 내지 못한 고참수험생들이 행시로 이동한 것같다.”고 분석했다. 다른 수험생 이모(29·여)씨는 “지난해 사시 2차시험 결과 발표 뒤 손에 익지 않은 영어공부를 포기하고 아예 행시 공부로 돌린 수험생들이 많다.”고 소개했다.이같은 현상은 오는 2005년에 행시에도 영어성적표 제출이 도입될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행시의 실질 경쟁률은? 관심은 행시의 실질 경쟁률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냐에 모아지지만 이에대한 평가는 엇갈린다.서울시내 한 고시학원 강사 백모(42)씨는 “고시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표의식인데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는 수험생들은 허수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실질 경쟁률은 예년과 비슷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다른 학원 관계자는 “영어점수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으로 사시와 행시를 동시에 준비해온 수험생들은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한다.”면서 실질경쟁률 상승을 전망했다.전문가들은 경쟁률 급등으로 인한 부담을 털어내고 평소 실력 발휘에집중해야 한다는데는 의견을 같이 했다. ●인터넷 접수가 대세 올해 응시원서 접수에서 나타난 특징은 인터넷 이용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상대적으로 컴퓨터에 밝은 행시 기술직 지원자 3938명 가운데 3438명(87.3%)이 인터넷으로 접수했다.지난해에는 80%였다.행시 행정·공안직 지원자 가운데 인터넷으로 원서를 접수한 수험생은 지난해 4013명(34%)에서 9777명(69.6%)으로 두배 이상 뛰어올랐다.외시에서 인터넷 접수자는 지난해 600명(39%)에서 1083명(70.9%)으로 증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철원평야·토교저수지에 두루미등 장관 探鳥여행 절정

    철원평야와 토교저수지에 두루미 등 철새 30만여 마리가 찾아와 장관을 이루면서 탐조여행이 절정을 맞고 있다. 14일 한국조류보호협회 철원군지회에 따르면 철원평야 일대에는 재두루미(천연기념물 203호) 800여마리,독수리(243호) 500여마리,기러기 29만여 마리 등이 찾아온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같은 개체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올 겨울에는 흰꼬리수리,참수리,검독수리 등 희귀조류들이 대거 토교저수지 제방에서 목격돼 철새 애호가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기러기들도 구철원(동송) 시가지 인접 논까지 무리지어 군무를 펼치고 있다. 올 겨울들어 철원 철새관광객은 현재까지 4만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27일 초·중·고교생들의 방학이 시작되면 관광객 수는 급증할 전망이다. 조류보호협회 철원군지회 김수호 사무국장은 “철새관광은 철새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만큼 반드시 협회에서 운영하는 ‘자연생태학습원’에 들러 교육받은 후 탐조에 나서달라.”고 당부했다. 철원 조한종기자 bell21@
  • 日의원들 ‘막가파식 폭언’/ 국수주의病 도지나

    |도쿄 황성기특파원| “한·일 합병은 양국이 합의해 유엔이 승인한 것”(에토 다카미 전 총무처장관·7월12일),“네살배기 어린이를 살해한 중1년생의 부모는 참수해야”(고노이케 요시타다 방재상·7월11일),“창씨개명은 한국인이 원한 것”(아소 다로 자민당 정조회장·5월31일). 아사히(朝日)신문은 15일 최근 잇따르고 있는 일본 정치가의 터무니없는 망언,폭언,실언이 속내를 보인 부주의한 단순한 실언이라기보다 정치에 흐르는 변화를 실감시킨다면서 “정치의 병은 깊다.”고 진단했다.신문은 정책연구대학원대학의 이오 준 교수의 말을 인용,역사문제를 둘러싼 실언에 대해 “정치가가 마음에 지니고 있는 국수주의(내셔널리즘)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발언하고,그것을 정당화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에토 의원은 총무청 장관이던 1995년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발언으로 한국의 비판을 받았으나 이것은 당초 기자단과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내용.반면 지난 12일 발언은 (오프 더 레코드가 아닌 상황에서)장내에 기자가 있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한 것이었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도쿄 도립대학의 한 교수는 냉전 붕괴 후 나타난 특징적 현상이라면서 “(북한의 위협에 편승하는 등)국민감정을 부추겨 유권자를 붙잡기 위해 퍼포먼스를 하는 나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아이를 못낳는 여자가 자유를 구가하고 나이 먹으면서 세금으로 돌봐달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모리 요시로 전 총리의 발언에 대해서도 “1999년 제정된 남녀공동참가사회기본법 등 새로운 가치관을 자민당 내부에서 (정치가들이) 완전히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비판했다.고노이케 방재상의 발언에 대해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등 정부·여당 간부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으나 여당 내부에서는 각료이니까 알기쉽게 말한것인지 모른다는 옹호 발언도 있었다고 신문은 전했다.이오준 교수는 “정치가는 민감하니까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저질스러운 얘기를 한다.감각이 마비돼 있다.”고 일본 정치인을 신랄히 비판했다.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당수는 고이즈미 총리가 공약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는 발언의 경박함을 비난하고 나섰다.오자와 당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최고 권력자가 한번 약속한 이상 어찌됐든 지켜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이즈미 총리가 저항세력을 ‘적’으로 분류,‘적과 우리편’의 대결을 정치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했다.오자와 마리 도쿄대 교수는 경제의 글로벌화에 의한 패배감과 자신감 상실이 배타적인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자신감을 잃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이 강하다.”고 일본 정치의 현상을 분석했다. marry01@
  • “서해교전 해군은 악마” 인터넷 글 파문

    지난해 6월 서해교전 참전자들을 ‘악마’로 비유한 대학 총학생회 명의의 글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어 논란을 빚고 있다. ‘E여대 통일 총학생회’ 명의의 ‘이북의 힘없는 동포들을 무참히 살해한 해군이란 이름의 악마여’라는 이 글은 최근 해킹당한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본부’(cafe.daum.net/pkm357) 회원 ‘참수리 276’씨의 홈페이지로부터 시작,온라인에서 급속히 퍼지고 있다.이 글은 “국제법에 존재하지도 않는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며 무력충돌을 유발,북한의 힘 없는 동포들을 살해한 해군은 악마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네티즌 ‘붉은 10월’은 “자기 가족이 서해교전에서 전사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여대를 음해하기 위한 추모본부의 자작극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이에 추모본부는 지난 11일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자작극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글의 출처가 확인되기 전까지 특정 학교에 대한 비난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한편 E여대 총학생회는 13일 성명을 발표하고 “누군가 우리 명의를 사칭해 글을 올렸다.”면서 “추모본부는 경찰에 이번 사건의 해결을 의뢰,엄중하게 대처하기 바란다.”고 밝혔다.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도 “해킹 피해자나 E여대 총학생회가 의뢰하면 바로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두걸기자 douzirl@
  • 서해교전 전사자 1주기 추모식

    지난해 6·29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해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1주기 추모식이 문정일 해군참모총장과 부상 장병,유가족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9일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불교의식으로 열린 추모식은 전사자 영령에 대한 경례와 문정일 총장,유가족과 부상자 대표의 헌화 및 분향,묵념 순으로 진행됐다. 서해교전 참수리 357호 전우회’가 주최하고 해군본부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교전 당시 357호에 승선했던 장병 27명 가운데 전사자 6명을 제외한 21명(전역자 7명 포함) 전원이 참석했다.해군은 앞으로 매년 6월 29일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식을 열기로 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부시의 전쟁 / 전문가들이 분석한 이라크전 戰略

    이라크 전쟁이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이제 바그다드 함락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전문가들로부터 이번 전쟁의 전략적 특징과 전후의 국제관계 전망 등을 들어봤다. ●이춘근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미·영·호주 연합군과 이라크군 간의 전쟁이 시작된 지 3주일째로 접어들고 있다.전쟁 초기 연합군의 첫번째 공격은 F-117 스텔스 전투기 단 2대,크루즈 미사일 40발을 가지고 두 개의 목표물을 집중적으로 강타하는 전략이었다.두 개의 목표물이란 현지 스파이가 알려준,후세인과 각료들이 회의를 하고 있던 중으로 알려진 건물이었다.미국은 이를 ‘참수공격’(斬首攻擊·Decapitation Attack),문자 그대로 목을 자르는 공격이라고 묘사했다.그 이후 진행된 공격 역시 이라크의 전쟁 지휘부를 파괴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10년 전 걸프전쟁 당시 미국 및 다국적 연합군은 후세인의 공화국 수비대를 이라크의 힘의 중심으로 설정하고 이를 철저히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기대와 달리 후세인 정권이 건재한것을 보고 미국의 전략이론가들은 걸프전쟁의 전략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미국의 전략가들은 독재국가의 경우 힘의 중심은 그 나라의 군사력이 아니라 그 나라의 독재자 그 자신이라고 가정하기 시작했다.2001년 9·11 테러는 국가보다 오사마 빈 라덴,후세인 등 개인을 새로운 힘의 중심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전쟁을 할 경우,특히 테러를 지원하는 독재국가와 전쟁할 경우 그 나라의 군사력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 나라의 지도자를 공격 표적으로 삼는다는 미국의 전략이 확립되었고,이번 이라크 전쟁은 새로운 전략이론을 사상 최초로 현실에 적용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월남전 당시 미국은 월맹의 수도 하노이 주위에 반경 수십 ㎞의 원을 그려 미국 전폭기들의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 놓을 정도였다.이제 더 이상 그런 전략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라크 지도부,즉 후세인과 후세인을 지지하는 일부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번 전쟁은 기왕의 전략론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전쟁을 개시한 3월20일 당시 이라크 현장에 전개 가능한 연합군 병력은 미군 20만,영국군 4만,호주군 등 합해서 30만명에 미달하는 군사력이었다.이처럼 적은 병력을 가지고 전쟁을 개시한 것은 바로 새로운 전략 때문이다.바그다드까지 진격해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전략 목표이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 점령이라는 개념은 없다.국토 면적이 남한의 4.5배가 되고 군사력이 40만이나 되는 나라를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30만명 수준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이라크 전쟁은 군사전략에서도 특이하지만 전쟁의 파급 효과 역시 큰 충격을 초래할 전쟁이다.이미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전쟁을 ‘세계질서 재편전쟁’(World Reordering War)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평자들마다 생각이 달라 미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도 없는 바 아니지만,이번 전쟁은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전쟁이 틀림없다.이번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미,영,스페인,호주,일본과 이 전쟁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이지정학적으로 각각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을 반영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해양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개방성 등을 국가 발전 및 국민 생활의 원동력으로 생각하는 속성이 있다.대륙국가는 어느 정도 관료적·고립적·폐쇄적 속성을 보인다.보다 개방적인 국가들이 테러위협에 더 민감할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한반도가 국제긴장의 초점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러나 지난 6일 미국의 월포위츠 국방차관은 북한의 경우 이라크와는 상황이 판이하고,판이한 상황에는 다른 전략이 적용된다고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 중인 이라크 전쟁이 앞으로 미국의 국제전략에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문광건 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이번 미국의 대 이라크전 수행 과정은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군사전에서 미국에 맞설 나라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특히 이번 전쟁은 미국의 육군과 해군,공군,해병대,특수부대 그리고 중앙정보국(CIA) 등 6개 분야가 완벽한 공조를 통한 군사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그동안 합동능력을 배양해왔다고 한 주장이 이번 전쟁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10년 전에 발생한 걸프전은 초기 정보전쟁 단계의 전투이고,이번은 명실상부한 정보화시대의 전쟁이다.인공위성 등을 통한 정보 획득과 정밀유도 무기 등의 사용으로 전력은 10년 전에 비해 6∼10배에 이른다는 분석이다. 이번 전쟁은 대 테러전 일환으로 1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점도 특징이다.따라서 이라크전 이후 미국의 정책은 이란을 겨냥할 것으로 관측된다.미국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즉 탄약을 채워넣고,정밀 유도 무기를 생산·장착하고 군부대가 다시 이동하기까지는 1년은 걸린다.3단계 작전을 위해서 미국은 그 기간동안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려 할 것이다.미국은 다음 타깃이 북한이든 이란이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당분간은 외교적 해결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노계룡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지난 걸프전은 미국이 군사혁신을 통해 자신들의 전력을 해·공군 위주로 바꾼 이후 실시한 ‘전력 실험’이었다고 한다면,이번은 이같은 변화된 전력의 철저한 ‘적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대량살상무기의 경우 국제여론 때문에 사용을 다소 자제했지만 웬만한 무기는 다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특징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전쟁인 탓에 전후 질서유지가 굉장히 복잡할 것이라는 점이다.예컨대 독일이나 프랑스,러시아의 경우 전후의 정권을 유엔측에 넘기라는 입장이지만 미국으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이와 함께 유엔의 기능도 앞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이를테면 러시아가 체첸공화국에 대해 무자비한 테러를 가한다 해도 미국이 목소리를 높이긴 어려울 것이다. 정리 이도운 조승진기자 dawn@
  • 서해교전 참전장병 57명 포상

    해군은 18일 경기도 평택 2함대사령부에서 6·29서해교전에 참전한 장병 57명에게 충무무공훈장 등 훈·포장과 표창장을 수여한다. 전투중 중상을 입은 고속정 참수리 357호 부장 이희완 중위와 중갑판 전화수 박동혁 상병이 충무무공훈장을,함교 소총수 권기형 상병과 정탐병 조현진 상병이 화랑무공훈장을 받는다. 또 357호를 지원한 253호 편대장 황선우 소령과 다른 고속정 정장인 최영순·이경근·황도연 대위가 인헌무공훈장을 받고 나머지 장병들은 무공포장,대통령·국무총리·국방부장관 표창을 각각 수상한다.포상자들은 9박10일간의 포상 휴가도 떠난다. 김경운기자 kkwoon@
  • 한강 생태계 살아난다

    한강의 수질이 개선되면서 물고기나 새,곤충,식물의 종류가 늘어나는 등 생태계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17일 지난해 3월부터 지난 7월까지 팔당호에서 행주대교 하류부에 이르는 한강 본류와 지천에 대한 생태계 조사를 한 결과 어류 57종이 서식,지난 98년 조사 때의 50종보다 7종이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한강의 어종은 지난 87년 42종에서 90년 21종으로 줄어들었지만 94년 45종,98년 50종,올해 57종 등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특산종으로는 줄납자루와 가시납지리,참중고기,중고기,몰개,긴몰개,됭경모치,얼룩동사리 등 8종이 발견됐다.서울시 보호종도 강주걱양태,꺽정이,황복 등 4종이 발견됐지만 천연기념물이나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등에 속하는 어종은 없었다. 강주걱양태와 가숭어,갈문망둑,풀망둑,유럽잉어,백련어,밀자개,점농어 등 12종이 이번 조사에서 새로 발견된 반면 지난 98년 관측됐던 떡납줄갱이,눈동자개,가실망둑,왜몰개,송사리 등 5종은 보이지 않았다. 한강에서 겨울을 나는 조류는 모두 55종발견돼 98년과 같았다.반면 개체수는 3만 323마리로 98년 1만 8621마리보다 1.6배 증가했다.큰고니,고니,참수리,붉은배새매 등 천연기념물 5종이 새로 발견됐다. 양서·파충류는 밤섬에서 환경부 지정 보호야생동물인 남생이가 서식하는 것이 확인되는 등 양서류 9종,파충류 10종이 발견됐으며 수서곤충은 서울시 관리대상인 강하루살이,왕잠자리 등 90종이 관찰돼 98년 64종보다 크게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시는 이번 생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종합도와 물고기,꽃과 나무,새,곤충등 8종으로 구성된 한강생태지도와 지리정보 데이터베이스를 CD로 제작,학술자료로 활용토록 할 계획이다. 한편 시는 잠실수중보 어도(魚道)를 조사한 결과 현재의 계단식 어도는 길이 30㎝ 이상 강준치,누치 등만 이용할 수 있는 문제점이 발견됨에 따라 돌아가는 ‘인공하도식 어도’나 ‘갑문식 어도’를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
  • 서해고속정 전시키로

    ‘6·29’ 서해교전에서 침몰됐던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안보교육용 기념물로 재탄생된다. 해군은 4일 “참수리 357호를 정밀 진단한 결과,장기간 침수로 선체 구조가 뒤틀리고 장비가 고장나는 등 수리가 불가능해 기념물로 전시키로 했다.”고 발표했다.357호는 경기도 평택 제2함대 사령부 충무동산에 전시되며,연말쯤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해군이 이같은 결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한번 가라앉은 배는 절대 타지않는다.’는 해군 장병들 사이의 미신이 큰 몫을 했다는 후문이다. 오석영기자
  • 수백군데에 포탄흔적 긴박했던 상황 생생히…인양 서해교전 고속정

    6·29 서해교전에서 격침된 고속정 참수리 357호가 침몰된 지 53일째인 21일 인양됐다.인양장면은 취재기자단에 공개됐다. 해군은 오전 8시30분쯤 연평도 서쪽 25.2㎞지점 해저 28m에 가라앉은 357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해난구조대(SSU)요원 60여명이 바다속으로 들어가 침몰 함정 밑바닥 앞쪽과 뒤쪽에 지름 5.7㎝ 체인을 감는 등 사전 작업을 해놓았다. 다목적 구조함인 청해진함 크레인은 1분당 20㎝씩 체인을 당기며,천천히 침몰 함정을 끌어올렸다.1시간 가량이 지나자,바다 위로 짙은 회색빛 물체가 치솟았다.이 물체가 고속정 돛임이 확인되자,해군 관계자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청해진함 크레인은 더욱 빠른 속도로 돌아갔고,357호는 오후 12시쯤 물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인양된 고속정은 예상대로 선체 곳곳에 수백군데의 포탄과 파편 자국이 나 있어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잘 보여줬다. 특히 조타실 앞부분에 2군데,우측면에 1군데,선체 우측 흘수선(바닷물과 선체가 만나는 부분)에 1개 등4개의 축구공만한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포탄자국은 고속정 침몰에 결정적인 선체 좌우 흘수선 주변에 집중돼 있었다.고속정 함교 뒤에 있는 돛에는 교전 당시의 태극기가 그대로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357호는 오후 3시5분 미리 준비된 탑재바지선으로 옮겨졌다.해군은 고속정을 탑재선에 실은 뒤 22일 오후 경기도 평택 2함대사령부로 옮길 예정이다.인양 작업중 군 당국은 부근에 초계함과 고속정 등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인양 현장으로부터 10㎞ 떨어진 북한 등산곶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고,북측 해역에 경비정도 눈에 띄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침몰 고속정이 북측의 암묵적 동의속에 무사히 인양된 셈이다. 오석영기자 palbati@
  • 韓중사 유해 41일만에 가족에게

    해군 해난구조대(SSU) 소속 잠수요원들은 하루 반나절에 걸친 힘겨운 수중작전 끝에 6·29서해교전 당시 실종된 고속정 승조원 한상국(韓相國·사진) 중사의 시신을 찾았다. 침몰 고속정 참수리 357호에 대한 수색 및 인양작전을 개시한 지 이틀째인 9일 오전 11시 연평도 서남쪽 29.3㎞ 해상에서 2인 1조의 잠수 요원들이 수심 20m 아래 모래펄에 처박힌 선체를 뒤지기 시작했다.시정거리가 채 1m도 안되는 탁한 서해 바닷물속에서 수색작업은 손으로 더듬더듬 헤집어가며 진행됐다. 오후 5시25분쯤 고속정의 반파된 조타실 안의 키와 편대장 의자 사이에서 사람으로보이는 물체를 찾았다.잠수 요원들은 위치를 재확인한 뒤 물위로 올라와 대기중이던다른 잠수 요원들과 교대했다.시신 인양을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시신은 구조함인 청해진함으로 옮겨졌다.바다 속에 41일 동안 잠겨 있던 한 중사의 시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하지만 해군 전투복 가슴 한쪽에는 ‘한상국’이라고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한 중사의 부인 김선미(가명·27)씨 등 일가족은 군용 헬기편으로 연평도에 도착,시신을 확인한 뒤 오열을 터뜨렸다. 오석영기자 palbati@
  • 구역이탈 어선 통제강화 - 김국방, 연평도 방문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은 10일 서해 연평도를 방문,해군 장병들을 격려한 뒤 “조업구역을 벗어난 어선에 대한 통제는 해양경찰의 기본임무”라면서 “정부차원에서 조업통제 강화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김 장관은 지난달 29일 교전에 참여했던 고속정 참수리 365호에 승선,교전현장 부근 해역을 둘러보며 정병칠(丁秉七·소장) 해군 2함대사령관으로부터 현황보고를 받았다. 김 장관은 “연평도 어선들이 툭하면 조업구역을 벗어나고 버려진 어망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해군 작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해양수산부,해양경찰 등과 협의해 조속한 시일내 어선통제 강화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실종 한중사 수색도 ‘실종’

    6·29서해교전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교전 중 실종된 한상국(韓相國·사진·27·부사관 155기)중사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아 유족들을 가슴아프게 하고 있다.당국의 성의없는 수색작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수색작업 하나 안하나= 해군은 10일에도 공식적으로는 ‘실종자 수색작업중’이라고 밝혔다.그러나 참수리 357호가 침몰된 연평도 서남쪽 29.3㎞ 해역쪽에는 수색대가 아예 가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침몰 해역으로부터 20㎞ 이상 떨어진 연평어장 주변에서 고속정 편대가 조업통제를 하면서 혹시 한중사의 유해가 떠내려오는지를 탐색하는 정도였다. 교전직후 2∼3일 동안만 교전 해역에서 부유물 수거작업을 하며 한 중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을 했다.해군 관계자는 “본격적인 수색 작업은 다음달초부터 시작되는 침몰고속정 인양작업 때나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어디에 있나= 해군은 한 중사의 유해가 수심 20m아래 가라앉아 있는 357호선내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유족들은 해군이 의지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지난 99년 여수 앞바다에 북한 반잠수정이 수심 100m 아래에 가라앉아 있어도 해난구조대(SSU)가 잠수해 유품 인양작업을 한 적이 있다. 해군 관계자도 “해상기중기 등을 동원한 함정 인양은 50∼60일씩 걸리지만 유해수색은 정조기(조류가 멈추는 시간대)를 이용,1∼2일이면 충분하다.”고 털어놨다.한 중사의 어머니 문화순(56)씨는 “합동분향소에 아들 사진도 못 걸었는데 이제는 장례제사도 못 치르고 있다.”면서 시신이라도 찾아줄 것을 연일 호소하고 있다.끝내 한 중사의 시신을 못 찾는다면 유족들은 1년을 기다렸다가 전사자처리위원회에서 전사를 인정받은 뒤 보상금 등을 받을수 있다. ◇미국은 우리와 다르다= 미국은 150년전부터 대통령 직속으로 ‘CILHIL’이라는 유해발굴 전문부대를 두고 있다. 부대 구호는 ‘조국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는다.’이다.베트남전쟁 실종자 유해 2000여구를 찾기 위해 발굴 예산과는 별도로 91년 베트남 정부에 130만달러를 지원했다.97년에는 6·25전쟁 때 미군 유해 6구를 북한으로부터 인수받으며 31만 6500달러를 주었다. 우리 육군도 2000년 4월부터 연인원 2만여명을 동원,6·25전쟁 참전자 유해발굴사업을 펼쳐 현재까지 669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반면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실종자 8명’만 인정했을 뿐 유해 발굴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
  • 北, 고속정 인양 사전통보 요구

    북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은 북방한계선(NLL)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서해교전중 침몰한 참수리 357호의 인양에 앞서 작업 날짜 등 인양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을 사전에 통보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9일 조선 중앙방송을 통해 “남조선측이 이번에 침몰된 함선을 인양하겠다는 데 대해 조선인민군측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성명을 보도했다. 대변인은 “인양작업이 진행되는 것이 우리(北)의 군사통제수역이므로 인양과정에서 새로운 충돌을 막자면 작업 날짜와 시간,동원되는 선박과 장비,활동수역 등의 사항을 미리 조선인민군 측에 통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과 남조선의 호전세력들이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저들의 죄행을 가리고 오히려 우리를 걸고 드는데 수수방관할 수 없다.”면서 NLL의 일방적 획정과 NLL의 군사정전협정 및 국제법 무시 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해군은 이날 ‘북측 주장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침몰된 고속정의 인양작업 위치는 NLL 이남으로 북측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면서 “해군은 북한군의 NLL 침범을 용납하지 않으며,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측에 있음을 엄중 경고한다.”고 밝혔다. 김경운 박록삼기자 kkwoon@
  • 서해교전 부상병 헌신적 치료 나섰다

    서해교전 당시 북한 경비정과 필사적으로 싸우다 중경상을 입은 참수리 357호 고속정 장병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국내 유명 병원의 의료진도 함께 치료를 거들고 나섰다. 지난달 29일 교전 후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아오던 중경상자 19명 가운데 9명은 총상 등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9일 오후 퇴원,제2함대사령부 소속 부대로 복귀했다.나머지 10명 가운데 의무병 박동혁(21) 병장을 제외한 9명도 이날 일반병실로 옮겨졌다.이 가운데 357호의 부장 이희완(26) 대위는 오른쪽 다리에 심한 포격상을 입어 결국 허벅지 아래를 잘랐다.이 대위는 교전 당시 정장 윤영하 소령이 포격을 받고 쓰러지자 대응사격을 지휘하다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었다.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박 병장은 갑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다 곁에서 포탄이 터져 좌대퇴부 혈관이 파열돼 생명마저 위태로웠으나 9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고,목숨은 가까스로 건졌다.대신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이들이 북한 경비정의 엄청난 기습포격을 받고도 다행스럽게 모두 목숨을 건진 데는 노련한 의료진의 헌신적인 진료가 주효했다.지난달 1일부터 국군수도병원의 의료자문관을 맡고 있는 이영우(李迎雨) 전 서울대병원장이 평소 가깝게 지내온 서울대병원 김성권 부원장과 김연수 박사,신촌세브란스병원신규호 박사,중앙대 부속병원 정영복 박사 등 내로라하는 명의들을 병원으로 불러모아 치료한 결과다.이 병원 송민석(중령) 피부과 진료부장은 “부상자 대부분이 온몸에 포탄 파편이 박힌 환자라 치열했던 교전 상황을 알 수 있었다.”면서 “100여명의 수도병원 의사들은 노련한 명의들이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진료를 벌인 데 대해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서해교전/ 시간대별 상황

    ◆ 교전 이전 ◇06:30 아군 고속정 3개 편대 6척,어로보호 지원 출항. ◇07:30 연평도 어선 20여척,조업구역 이탈 조업 시작. ◇09:37 북한 육도기지 경비정 388호(155t),20노트 남하기 동 시작.북한 어선 육도 주변 20 척,등산곶 주변 10척 조업 중. ◇09:46 북한 등산곶기지 경비정 684호(215t),17노트 남하기 동 시작.2함대사령부 경계강화 지시,고속정 편대 조업어선 통제. ◇09:51 북한 경비정 북방한계선 (NLL)침범 우려,조업 중단 및 조기 복귀시키도록 요청. ◇09:54 북한 경비정 388호,육도기지에서 NLL 침범.해군 고속정 253편대(참수리 328·369호),대응기동 시작. ◇10:01 북한 등산곶기지에서 684호,NLL 침범.해군 고속정 232편대(참수리 357·358호),대응기동 시작. ◇10:14 253편대 육도 경비정에 접근,차단 기동.육도 경비정 침로 변경 북상 ◇10:15 2함대사 232편대에 등산곶 경비정과 차단 기동지시. ◆ 교전 ◇10:25 등산곶 경비정,참수리 358호 차단기동 통과 후 뒤따르던 357호에 85㎜포 선제 사격,357·358호 즉각 대응 사격. ◇10:26 해군 초계함(제천함·진해함)과 253·256편대에 232 편대 지원 지시. ◇10:29 해군 해안포 긴급 전투 배치. ◇10:30 공군 전투기(공대함 미사일 장착) 긴급 출격 대기.고속정 256편대 격파사격 개시. ◇10:33 고속정 253편대 격파 사격 개시. ◇10:33 참수리 358호,357호 예인작업 착수. ◇10:43 제천함 전방 이동,격파 사격 개시. ◇10:45 357호 2000 야드 예인 도중 침수됨.전사상자 확인 및 구조.선체 소화 및 방수 실시. ◇10:46 고속정 358호로부터 357호 사망자 5명 첫 보고. ◇10:47 진해함 전방 이동,격파 사격 개시. ◇10:48 제천함 북한 스틱스 미사일 위협전자파 탐지,채프(레이더 교란용 금속 은박편) 발사. ◇10:51 등산곶 경비정 도주 북상.육도 경비정이 예인. ◇10:56 현장 모든 전력에 대해 사격중지 지시.북한 경비정 NLL 북방 0.5∼1마일 지점 위치 ◆ 교전 이후 ◇11:00 2함대사,초계함과 고속정에 전속력 남하 지시 ◇11:25 피해함정 인원확인 결과 보고(전사 4명,부상 19명,실종 1명) ◇11:59 피격 357호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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