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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주섭 경호실장 내정자/육사 24기… 상하 신망 두터운 야전통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내정된 안주섭 육군대학총장(소장)은 육사 24기로 야전에서 잔뼈가 굵었다. 합리적이면서도 뚝심이 있어 상하의 신망이 두텁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남 곡성이 고향으로 국민회의의 임복진·천용택 의원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군 참모장으로 재직할 때는 사무실의 칸막이를 모두 없애도록 했고 전기를 아끼기 위해 커피포트 코드를 뽑도록 하는 등 세밀한 측면도 있다. 취미는 테니스.부인 김영자씨(50)와 2남 ▲전남 곡성(51) ▲광주고 ▲육사 24기 ▲3군사령부 동원처장 ▲35사단장 ▲2군사령부 참모장
  • 대대적 인사개편/연형묵 중용 가능성

    ◎김정일,최측근 최용해 해임 등 숙정 작업/연에 ‘영웅칭호’… 16일 전후 총리복귀 점쳐 지난해 10월 당총비서에 추대된 김정일은 체제를 정비하고 명실상부한 김정일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대대적인 숙청과 함께 내부적으로 인사개편작업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북한문제전문가들은 지난해 농업당담비서인 서관희가 처형된 것으로 외신에 보도된 데 이어 김정일의 최측근 심복으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을 이끌어오던 최용해 제1비서가 지난달 전격 해임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군부의 핵심인물인 총참모장 차수 김영춘 역시 두달이 넘도록 공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신병이상설을 증폭시키고 있다.그런가 하면 자강도당 책임비서 연형묵 전 총리가 최근 ‘노력영웅’칭호를 받아 앞으로 그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북한 내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가운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최용해의 해임이다.최는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제14차청년동맹 전원회의에서 신병관계로 해임됐다고 보도됐다.그러나 최의 해임은 지난해 농업담당 비서인 서관희·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이봉원 대장을 비롯 청년동맹 간부들이 반역 및 간첩사건 등에 연루돼 처형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또 최용해 자신이 비리혐의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다 북한이 해당인물의 숙청때 통상 신병관계를 내세웠던 점으로 미루어 문책·숙청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최현(전 정치국원·82년 사망)의 아들인 최용해는 연배가 비슷한 김정일과 막역한 사이로 김정일의 손발이라 할 수 있는 친위조직 청년동맹을 이끌어왔다.최는 지난해에도 김정일의 공식나들이에 12회나 수행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12월12일 청년동맹 13차 전원회의에 참석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총참모장 김영춘이 제법 오래동안 공석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김은 지난해 12월7일 김정일과 군악대 공연관람을 끝으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총참모장에서 해임됐다는 보도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일단은 신병 때문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으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전총리로 자강도당 책임비서인 연형묵은 지난달 23일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아 주목을 받고 있다. 이와관련,경제에 대해 많이 알고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장으로 지난 92년 한국을 방문하는 등 대남관계에도 밝은 연형묵이 한국의 새정부 출범에 맞춰 총리로 재기용될 가능성이 많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달들어 군부대 시찰을 강화하고 있는 김정일은 56회 생일인 16일을 전후에 총리, 인민무력부장 등 핵심요직 인사를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또 5일에 있은 로마주재 유엔식량농업기구(FAO)북한대표부의 서기관 가족 망명 등 외교관들의 잇단 탈북과 관련, 외교부 고위관계자에 대한 문책과 조직정비에도 나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지난달 하순의 민생현장 시찰에 이어 이달들어 군부대 시찰을 강화하고 있는 김정일은 자신의 56회 생일인 오는 16일을 전후해 총리,인민무력부장 등요직에 대한 인사를 단행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중·일 국방교류 본격화/양국 국방회담

    ◎군수뇌 상호방문 등 6개항 합의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을 공식방문중인 츠하오톈(지호전) 중국 국방부장은 4일 규마 후미오(구간장생) 일본 방위청장관과 회담을 갖고 규마장관의 올 상반기내 중국방문과 군 최고수뇌의 상호방문 조기 실현 등 양국국방교류를 본격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양국 장관은 이날 일본 방위청에서 열린 회담에서 이밖에 ▲함정 상호방문 실현을 위한 검토 착수 ▲3월 일본 육상막료장(육군참모총장) 중국방문 ▲중국 국방대학과 일본 방위연구소간 교류 등 모두 6개항의 국방교류에 합의했다. 양측은 이와 관련,양국이 고위레벨의 국방교류를 통해 상호 신뢰,협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교도통신은 전했다. 중·일 국방장관 회담은 87년 5월 이후 11년 만의 일로,이번 합의를 계기로 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명맥만 유지돼온 양국 국방교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국방부장이 일본을 공식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츠 국방부장은 회담에서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과 관련,“일본은 대만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밝히는 것이 중·일관계에 좋다”면서 일본주변 유사사태 대상에 대만 및 대만해협이 포함돼서는 안된다는 중국의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미국의 대통령문화:10)

    ◎한국전 휴전 등 성사… ‘국제평화의 전도사’/후르시초프 방미 실현… 냉전해소 노력/동남아조약기구·IAEA창설 결정적 역할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1952년 34대 미 대통령선거전에 나선 공화당 후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장군의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오직 이 한마디 였다. 2차대전의 영웅으로 이미 탁월한 지도력이 입증된 아이젠하워 후보를 온국민들은 풀 네임보다도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그리고 그들은 빨강·하양·파랑 바탕에 이 글귀가 쓰인 캠페인 뱃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이같은 아이젠하워의 치솟는 국민적 인기는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인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재치,세련된 언변,화려한 공약 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선자 신분 한국전선 시찰 선거결과는 선거인단수 442대 89라는 아이젠하워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더우기 공화당에 상하양원의 압승까지 안겨주어 루즈벨트­트루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집권20년의 종지부와 함께 새로운 공화당 시대의 개막을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대공황­2차대전­냉전­한국전쟁의 사슬에 얽매여 한시도 긴장을 풀수 없던 미국민들은 하루빨리 정상상태로의 복귀를 열망했고 아이젠하워는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켜줄 최적의 인물로 추대됐던 것이다.아이젠하워는 또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런닝메이트로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고령이던 자신의 나이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당시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는 수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국전쟁의 종식과 관련된 것이었다.아이젠하워는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선거가 끝난후 당선자 신분으로 아직 포화가 멎지 않고 있던 한국전선을 방문,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취임연설에서는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모든 국가와 협력하겠다”고 강조,평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염원에 답했다.실제로 그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성사시켰으며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했다.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역설,국제원자력위원회(IAEA)의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소련과의 대화도 시도했으며 장차 군산복합체 대두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방만한 정부 예산의 감축을 위해 국방비의 절감,감세,정부사업의 축소,각종 규제의 완화 등 연방정부의 활동을 대폭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갔다.그리고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보좌관을 선임,그에게 상당부분의 권한을 위임하고 자신은 세세한 문제에는 관여치 않는 당파를 초월한 정치를 추구했다. 미시시피강 서부 대평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인구3천명의 캔자스주 애빌린은 아이젠하워의 도시로 유명하다.도시 중앙에 위치한 아이젠하워센터에는 중앙에 그의 동상을 중심으로 성장기의 집과 묘소,박물관,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어 커다란 역사공원을 이루고 있다.1898년부터 46년까지 아이젠하워 패밀리가 살았던 사저는 캔자스의 평범한 시골집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센터 입구에 ‘명산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교회형태로 생긴 그의 묘소는 경건의 장소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박물관은 2차대전및 냉전시대의 전쟁박물관으로,도서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8년간은 물론 그가 군사령관으로 남긴 것까지 모든 자료의 집대성을 이루고 있다.특히 아이젠하워와 맥아더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관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편지에서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항상 ‘장군님’이라고 존경의 호칭을 사용했고 맥아더는 ‘사랑하는 아이크’라고 적고 있는등 두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는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횡단 철도가 지나기 때문에 텍사스등지에서 동부로 수송을 위해 수백만마리의 젖소들만 몰려들던 황량한 시골마을인 이 도시는 오늘날 인구 3천명의 소도읍으로 성장했으며 아이젠하워를 키워낸 자부심에 가득차 있다. 19세기에 출생한 마지막 미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1890년 텍사스 데니슨에서 출생했으나 어려서 부친이 애빌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초,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니는 등 애빌린을 실질적인 고향으로 간주해왔다.낙농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대학진학은 엄두에 두지도 못하던 아이젠하워는 21세때 뒤늦게 웨스트포인트에 진학,군생활을 출발하게 됐다. ○흑백차별엔 단호한 입장 1차대전때 군훈련교관을 역임하고 파나마운하 주둔군으로 활약하던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0년초 필리핀 주둔군사령관 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였다.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조지 마샬 참모총장에 의해 전쟁성의 태평양전략 담당관에 임명돼 탁월한 기획능력을 발휘했다.마침내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연합군측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됐다. 전쟁이 끝난후 군을 떠나 콜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잠시 외도한 그는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때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민주 양당에서 그에게 대통령 후보를 타진해 왔으나 그는 공화당을 택했고 압승을 거두게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재임중 사회복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이를 담당할 보건부,교육부,복지부 등의 부서를 창설했다.특히 흑백차별 문제에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57년 아칸사스주 리틀록의 백인 고등학교에서 흑인들의 입학을 거부하고 주지사가 민병대까지 동원,이를 옹호했다.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천명의 낙하산부대를 투입,흑인학생들을 호위 등교케하고 한학기 동안 학교를 순시케 하는 등 단호히 맞서 마침내 차별론자들을 굴복시켰다. 대외정책은 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위임시켜 행하게 했으며 동남아조약기구(SEATO),를 창설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또 후르시초프의 방미를 실현시키고 소련에 영공 공개와 공중 군사설비 조사에 관한협정 제안등 냉전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는 남북전쟁의 격전지 였던 펜실바니아주 게티즈버그에 농장을 짓고 퇴임후 그림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오늘날 애빌린 못지 않게 게티즈버그의 아이젠하워 하우스에도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곳에는 링컨 워싱턴 등 인물화와 각종 풍경화 등 그가 남긴 수십점의 작품들이 진열돼 예술가대통령으로서의 푸근함 또한 느끼게 하고 있다. ◎다니엘 홀트 아이젠하워 도서관장/“정치인·군인 모두 성공적 삶”/“62년 도서관 개관… 220만점 소장 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 【애빌린(미캔자스주)=나윤도 특파원】 아이젠하워 도서관의 마틴 티즐리 관장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두가지 생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친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적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의 하나로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센터 중앙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평화의 챔피온’이라는 글귀가 써있다. 그는 전쟁에 피곤해있던 미국민들에게 평화를 심어주려 노력했다. ­도서관의 연혁및 활동은. ▲대통령 도서관으로는 네번째로 1962년 개관됐으며 초기 120점 이던 소장 자료가 이제 220만점으로 증가됐다.주로 2차대전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400여명의 등록 학자들을 비롯 수많은 연구자들이 찾고 있다.특히 NATO 콜렉션은 미국내 최고를 자랑하고 있다.한국전쟁 관련 자료도 상당수 보관돼 있다. ­지역에의 기여는 어떤 것이 있는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탄생일과 2차대전* 각종 기념일 등에 다양한 추모행사를 갖고 있으며 애빌린 주민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다.특히 묘소가 있는명상의 집은 주민들의 경건의 장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모든 운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민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로서의 참여가 없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민들과의 관계는. ▲TV시대가 개막될 무렵이어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들과 접촉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볼수 있다.특히 그는 골프와 낚시 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대통령과 아놀드 파머와의 골프경기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였다.
  • 중 국방부장 첫 방일/일서 동북아 안보 역할 증대 노려 초청

    ◎중은 미 견제위해 ‘일본카드’ 활용 속셈 【도쿄=강석진 특파원】 중국의 츠하오텐(지호전) 국방부장)이 중국 국방부장으로서는 처음으로 3일부터 8일까지 일본을 공식 방문한다. 일본은 94년부터 중국 국방부장에게 일본을 방문하도록 초청해 왔다.하지만 과거사·센카쿠열도(중국명 조어도)분쟁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었다.이번 방문은 지난해 11월 이붕 총리의 일본방문 때 안보대화 강화를 위해 동의해 준 것이다. 일본이 중국 국방부장의 일본방문을 초청해 온 것은 안보 다각화,나아가 동북아에서의 역할 증대라는 전략의 일환에서이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이 상호불신 속에서도 안보대화를 강화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과의 안보대화를 넓혀나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지난해 3월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간부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동북아 안보문제를 장시간 토론하는 기회를 가졌다.이번 방문에 이어 오는 5월쯤에는 규마 후미오(구간장생) 방위청장관이 중국을 방문,대화의 틀을 장관급으로 격상,정례화하려 하고 있다.중국과의 관계는미국을 따라가지만 뒤처지지는 않겠다는 것이 일본측의 자세다. 중국은 미국이나 일본의 전략을 화평연변(평화로운 관계 속에 체제의 변화를 기도함)이라고 의심하면서도 대화에 적극 자세를 보이고 있다.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정세의 안정이 바람직하며 미국 1극체제 견제를 위해서도 다각적 대화가 필요하다.또 중국위협론이 사라지지 않고 언제든지 ‘대중봉쇄’로 나올 수 있다고 보여지는 미국에 대해 구사할 수 있는 일본카드를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대화증진이 바람직하다. 중·일 안보대화 증진은 동북아지역의 새로운 안보질서 모색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냉전후 동북아지역에는 새로운 안보체제가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는 가운데 최근 미,일,중,러 4개국의 양자간 대화가 선행되는 양상을 띄고 있다.한국으로서는 이런 움직임들로 지역안정이 강화되는 플러스 측면과 함께 역할이 엷어진다는 측면이 동시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외환위기 특감·경제청문회 조율/DJ 김 특보·홍 정무 면담

    ◎김광일 특보 “금융위기 YS에 전가해선 안돼”/DJ “경제·금융정책 담당자 책임소재 가려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30일 김광일 청와대정치특보와 조찬을 같이 한데 이어 하오에는 홍사덕 정무1장관을 면담했다.김특보와 홍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의 정무분야 핵심참모들.김당선자와 이들의 만남이 예사로와 보이지않는다.김대통령과 김당선자간 껄끄러운 문제는 외환위기 관련 감사원 특감과 경제청문회.김특보와 홍장관의 ‘메신저’역할로 껄끄러움이 완화될지 주목된다. 김특보는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을 김대통령 1인에게 있는 것 처럼 진단해서는 정확한 처방이 안나온다고 김당선자에게 진언했다”고 밝혔다.김당선자는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경제회복과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경제 및 금융책임자에 대한 자세한 조사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김특보는 전했다.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한 조사와 경제청문회의 불가피성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김당선자는 그러나 “(조사는) 특정인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주로 그쪽(경제 및금융책임자)의 책임을 밝혀야한다”고 말했다.외환위기 특감이나 청문회가 김대통령보다는 당시 경제금융정책 담당자의 잘잘못을 가리는데 맞춰질 것임을 시사했다. 김당선자는 연쇄면담에서 청와대 운영방식의 변화에도 관심을 표명했다.청와대비서실장을 의례적 외부행사에 수행토록한 관례를 없앨 것이라고 밝혔다.청와대 기록문화 정비,참모진 의견수렴 활성화도 추진할 것 같다.김특보와 홍장관이 각각 부산과 서울시장 출마를 바라고 있는 점에서 이들의 국민회의 입당도 관심사.하지만 김특보는 “출마한다면 한나라당 공천외에 어떤 경우도 고려치않고 있다”고 말했다. 홍장관도 “정부조직개편에서 정무1장관실을 존치해둘 필요성을 건의했으며 다른 애기는 없었다”고 밝혔다.
  • 한은 외환위기 보고시점 논란

    ◎“작년 초부터 23차례 경고” 일부언론 보도/강경식 전 부총리 등 핵심 3인은 “11월 초” 외환위기가 오기까지 정부 대응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청와대,재경원,한국은행은 26일 외환위기 관련 정황들을 밝히기 시작했다.일부 언론이 ‘한은의 23차례 경고를 청와대와 재경원이 무시했다’고 보도해 마치 각 기관이 책임전가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자극받은 점도 있다. 외환위기 발생 당시의 경제정책 핵심인사는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김인호 전 청와대경제수석,이경식 한은총재 등 3인.김경제수석은 자신과 관련된 외환위기 일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었다.11월7일 김대통령에게 IMF지원 요청검토 보고,11월13일 밤 IMF지원요청 결정,11월14일 김대통령 재가 등이다.이에 앞서 김대통령은 “11월초 한 경제전문가로부터 IMF지원요청의 불가피성을 처음들었다”고 참모진을 통해 밝혔다.그 경제전문가는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로 확인되고 있다. 한은측이 26일 외환위기와 관련해 낸 보도자료도 비슷한 대응일정을 담고 있다.외환위기 촉발가능성을본격 거론한 것은 10월말 이후이며 IMF긴급 자금지원요청의 시급성 건의는 11월7일이라고 설명했다.그리고 11월10일 밤 9시30분쯤 김대통령이 이한은총재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외환사정을 물었을때 IMF지원요청의 불가피성을 직접적으로는 처음 건의했다는 것이다. 3인의 설명이 모두 진실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감사원 특감에서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하지만 핵심관계자들의 증언이 대체로 일치되어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핵심 3인이 밝힌 외환 위기 일지 ▲97년 10월23일 홍콩증시 사태 ▲10월말∼11월초 국내 외환사정 급속악화 ▲11월초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김영삼 대통령에 IMF지원요청 불가피 건의 ▲11월7일 김인호 전 수석,김대통령에게 IMF지원 요청검토 보고, 한은 IMF지원 요청 시급성 건의 ▲10일 이경식 총재,김대통령에게 IMF지원 불가피성 직접보고 ▲12일 윤진식 당시 조세금융비서관,김대통령에 IMF지원 불가피성 직접 보고 ▲13일 밤 강경식·김인호·이경식,IMF지원요청결정 ▲14일 아침 김대통령 IMF지원요청 재가 ▲16일 밤 캉드쉬 극비내한,IMF지원결정 ▲18일 국회금융개혁 입법무산 ▲19일 강경식·김인호 교체 ▲21일 정부,IMF지원요청 공식발표.
  • 노동당­철도 대표단 유럽·중 순방

    북한의 노동당 대표단과 철도 대표단이 유럽과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17일 각각 평양을 출발했다고 중앙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노동당 대표단의 외국 방문은 지난해 11월 당대표단(단장 부부장 임순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 순방에 이어 2개월여만에 이루어진 것이며 올들어서는 처음이다.중앙방송은 “구라파 나라들을 방문하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지재룡 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당대표단이 17일 비행기로 평양을 출발했으며 비행장에서 당중앙위 부부장 임순필이 대표단을 전송했다”고만 밝혔다. 중앙방송은 이날 또 “중국을 방문하는 철도부 김용삼 참모장을 단장으로 하는 철도 대표단이 17일 열차로 평양을 출발했다”고 보도했다.
  • ‘헬기 순직’ 임승효·임삼영 준위/합동영결식 엄수

    육군은 23일 상오 10시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지난 21일 헬기 추락으로 순직한 항공사령부 502대대 소속 조종사 고 임승효 준위(35)와 임삼영 준위(28)의 합동 영결식을 거행했다.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영결식에는 도일규 육군참모총장 등 군 관계자 및 유족,장병 등 3백여명이 참석해 추락 직전까지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 고인들의 넋을 기렸다. 육군은 이날 고인들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추서했다.
  • 김 대통령 청와대 언제 비울까/2월24일 자정 임기 만료

    ◎관례 따르면 25일 상오 취임식 직전에 이사/김 당선자 관저서 임기 맞게 24일 저녁 검토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가 오는 2월25일 0시로 종료됨에 따라 24일 저녁 청와대를 떠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이전에는 25일 상오 10시 대통령 취임식 직전 새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비워 주는게 관례였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는 날짜만 정해져 있다.취임선서때부터 대통령 권한이 시작되는 미국과 달리 시간은 모호하다.법학자들은 민법의 규정을 원용,2월25일 0시부터 임기가 시작된다고 해석하고 있다.우리도 미국처럼 법을 바꿔 직무개시 시간을 명시하는 방안도 강구되고 있다. 2월25일 새벽에 전쟁이 난다면 군통수권은 새 대통령에게 있다.새 대통령이 사저에 머물고 있다면 불편하다.때문에 이번에는 임기만료 전에 청와대를 비워주겠다는 것이다. 청와대측은 김대중 당선자가 25일 0시 청와대에서 육·해·공 3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군통제권 시스템을 전달받는 의식도 검토중이다.그러나 김당선자측이 25일 상오 청와대 입주를 희망한다면 ‘10시간 공백’을 메꾸기 위해 일산 자택에서 군통제권을 넘겨받는 행사를 갖도록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일산자택과 김당선자 승용차에는 이미 특별비상전화가 설치돼 있어 군통수권 행사에는 문제가 없다.
  • 6·25 이후 최대 위기… 단결해야 극복/노사정위 발족식 표정

    ◎일류국가 됐다는 허풍이 파국 불렀다 노·사·정 위원회가 15일 수면 위로 떠올랐다.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다. 하오 3시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 발족식에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도 참석했다.국제통화기금(IMF) 한파 속에서 이 기구의 역할에 대해 국민적 기대치가 높다는 징표였다. 행사는 현판식에 이어 당선자가 위원들에 대해 위촉장을 수여,치사 순으로 진행됐다.그러나 노·사·정위의 전도가 장미빛만은 아니다.지분을 나눠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분담을 위한 틀이기 때문이다. ○…김당선자는 지론인 민주주의·경제발전의 병행론을 거듭 강조했다.“지난 세월 민주주의를 제대로 했던들 오늘날 IMF의 구제금융과 신탁통치를 받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당선자는 특히 “외화가 충분하다거나 OECD 가입으로 일류국가가 됐다는 등 허위의 진실을 강요하는 바람에 오늘의 파국을 불렀다”고 현정부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당선자는 현상황을 6·25 이래 최대의 위기로 규정했다.“금년 한해는 불행한 일이지만 실업자가 1백만명이 넘어서고 많은 기업이 도산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러면서도 재도약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국제여론의 호전과 최근의 거시 경제지표 등을 감안,“올한해만 잘 넘기면 내년 중반 이후에는 IMF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다만 노·사·정위를 통한 국민의 공평한 고통분담이 전제돼야 한다면서 국민적 단합을 호소했다. ○…노·사·정위의 면면은 모두 최고위급이었다.우선 박인상 한국노총위원장 배석범 민주노총위원장직대가 노동계 대표로,최종현 전경련회장 김창성 경총회장이 사용자측 카운터파트로 나왔다. 정부측에서도 임창열 경제부총리 이기호 노동장관이 나섰다.당선자의 최측근 참모인 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가 위원장을 맡아 무게를 더했다. 다른 나라의 관례와 달리 정당쪽 위원도 포함시켰다.‘연립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에서 정세균 의원과 이긍규 의원이 참여했다.거야인 한나라당은 이날 불참했으나 이강희 의원을 위원으로 통보해 왔다.
  • 청와대 직제개편 의미/참모역만 남겨 ‘정책 옥상옥’ 방지

    ◎정책기획·공보 양날개로 비서실장 막강 권한 13일 발표된 ‘김대중 대통령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 개편안은 규모와 기능 양면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새정부의 비서실은 김당선자가 공언한대로 기존 11개 수석실을 정책기획,정무, 경제,외교·안보,사회·복지,공보 등 6개로 축소했다.비서관 자리도 51개에서 33개로 줄였다.장·차관급으로 임명했던 수석비서관의 직급을 차관급으로 고정시켰다. ‘대폭 감량화’라는 외형보다 내용적 기능은 오히려 더 크게 변한다.과거 비서실이 일반부처에 대한 지도·감독·조정을 주기능으로 했다면 새비서실은 말그대로 비서역할을 하는 대통령의 참모로 탈바꿈한다.정부 정책추진에 있어 옥상옥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김당선자의 의지라는게 김중권 당선자비서실장의 설명이다. 새로운 비서실 조직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비서실장 권한의 강화다.총무와 의전·민정 등 기존의 3개 수석실 기능과 함께 행사기획·상황실 등이 실장 직할로 편제됐다.비서관의 직급은 총무와 의전·민정·법무는 1급,행사기획과 상황실은 2∼3급이 맡는다.법무비서관은 기존 법률비서관의 기능과 함께 대폭 축소·약화된 민정수석실의 사정기능을 넘겨받는다. 6개 수석실 가운데는 정책기획과 공보가 비서실의 양날개가 될 것이라고 김중권 비서실장은 설명했다. 새로운 비서실의 핵심이 될 정책기획수석실의 정책1은 단기과제,정책2는 중·장기과제를 수행한다.공보수석실은 다른 수석실이 폐지되거나 기능이 대폭 축소된 것과는 달리 기존 조직을 대부분 그대로 이어받게 됐다. 외교안보수석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외교통상비서관이다.정부조직개편에서 ‘외교통상부’를 만드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사회·복지수석실에서는 교육과 문화체육기능이 통합된 교육·문화비서관이 신설됐다.여성정책을 여성실이 맡도록 함으로서 ‘여성우대’의 상징성을 높였다. 김당선자비서실장은 그동안 청와대의 각 비서관 사이의 협의가 원활치 못했다는 지적에 따라 비서실을 업무기능과 연관관계를 살린 합의체로 운영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 배석자없이 2시간 자유토론/김 당선자 18일 TV대화

    ◎토론자 10명·방청 500명/지방 주민과 화상 토론도/TV3사 공동 생중계 예정 오는 18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하게될 ‘국민과의 TV대화’는 10여명의 전문 토론자들과 각계각층의 방청객 4백∼5백여명이 참여,자유문답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국민과의 TV대화’는 전국 3개지역방송사와 화상으로 연결해 해당 지역 주민들과 대화를 나눈다. 서울역 등에 중계차를 설치,즉석 질문도 받는다. 당선자쪽에서는 정책전문가나 참모진 등 배석자없이 김당선자가 직접 모든 질문을 소화한다는 복안이다. 토론자 선정도 방송사에 일임했다. 가능한 많은 국민들이 시청할 수 있도록 하오 7시부터 2시간동안 한국방송공사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며 방송 3사가 공동중계할 예정이다. 김당선자 대통령직인수위의 김한길 대변인은 이날 “특히 방청객을 김당선자 지지자들로만 구성하지 않기 위해 각계각층의 시민들을 고루 선정하고 있다”며 “김당선자가 경제난 극복 구상을 설명하고 국민의 협조를 당부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는데 비중을둘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김당선자 공보팀은 5일 확정된 ‘TV대화’의 진행방식을 주관방송사인 한국방송공사에 통보하고 세부적인 실무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 노사정 협의체 발족 가시화/정리해고제 도입 국민적 합의 도출

    ◎노동계 “생존권 결부”… 진통 클듯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측이 오랫동안 뜸 들여온 노·사·정 협의체를 곧 발족한다.정리해고제에 대한 범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다. 정리해고제 도입은 당선자 진영에 깊은 시름을 안겨주고 있다.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몰아치면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까닭이다.그럼에도 노동계등에선 재벌기업과 정부의 선개혁을 요구하는등 쉽게 물러설 태세가 아니다. 따라서 정리해고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정국안정의 열쇠라는데 이견이 없다.가칭 노사정협의회(또는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에 당선자의 핵심참모인 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가 내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노사정협의체는 늦어도 이번주초에는 기구 구성을 완료,본격적 활동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그 성과는 노사정 3자 협약문(혹은 합의문)형태로 나타날 전망이다. 여기엔 사측의 ▲고용안정 노력 ▲상호지급보증 금지와 연결재무제표를 통한 기업 투명성 확보 다짐 등이 포함될 전망이다.정부측에선 실업보험기금 확충을약속하고,공무원 봉급동결과 행정경비 삭감 등 고통분담 동참을 선언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역시 협약문의 알파요 오메가는 정리해고제 도입문제다.다수 근로자의 생존권과 결부돼 있다는 점에서다. 때문에 이 기구의 전도가 장미빛만은 아니다.합의도출 과정에서 엄청난 진통이 예상된다는 얘기다.한부총재도 “지난한 일이지만 어렵다고 피할수는 없다”고 이를 인정했다.그러면서도 ‘공평한 고통분담’으로 난관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민주주의 전도사 에이브러햄 링컨:하(미국의 대통령 문화:7)

    ◎남북 대화합 이룬 ‘정직의 대명사’/“연방통일이 헌법보다 우선” 주독립 불가 역설/국민에 전쟁 수행 독려… 당대엔 인기 못 얻어/최악의 상황 유일한 탈출구는 일상화된 유머감각 【스프링필드(미 일리노이주)〓나윤도 특파원】 1861년 2월11일 일리노이주 주도 스프링필드의 중앙역인 그레이트 웨스턴역.취임식 참석차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플래트홈에 마련된 연단에 오른 링컨 대통령 당선자는 군중들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자못 침통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친구 여러분,내 입장에 있지 않은 여러분 어느 누구도 이 이별의 순간에 솟구쳐 오르는 나의 슬픈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나는 4반세기를 이곳에서 살면서 모든 것을 빚진 채 지금 고향을 떠납니다.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 것인지 혹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나에게는 워싱턴에 부여된 일보다도 더욱 무거운 일들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 역사자리에 선 ‘링컨 디폿 뮤지엄’에서 상영하는 링컨의 24년동안 스프링필드에서의 생애를 담은 30분짜리 비디오는그가 비장한 연설을 남긴 후 그의 일행을 태운 기차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죽음으로 국가 구해 이미 6개주가 연방을 탈퇴해서 독자 정부를 수립한 최악의 상황에서 연방대통령직 수행은 그 자체가 엄청난 형극의 길임을 링컨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의 우려대로 살아서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그러나 자신의 죽음으로 국가를 구했다.주검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시가지 북부 오크리지 묘지 중앙에 우뚝 서 스프링필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스프링필드는 링컨이 변호사로,주의원,연방하원의원 등 공직생활을 하며 정치적 입지를 키운 곳이다.시 중심지 연방청사에서 5블럭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의 사저일대가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으며,그의 변호사 사무실인 링컨­헌돈 로 오피스(law office),그가 출석하던 제일장로교회에는 그의 가족들이 즐겨 앉던 자리가 보존돼 있는 등 미 전역 10여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링컨 사적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돼 있다. 특히 링컨이 연방분열을 경고한 ‘분열된 집안’이라는 연설로 유명한 옛 주의사당인 올드 스테이트 캐피틀에는 오늘날 미국내 최대의 링컨자료실이있는 일리노이 주립박물관이 들어서 있다.헨리­호너 링컨 콜렉션이라 이름지어진 이 박물관 내의 링컨 자료실은 소장하고 있는 관련 자료의 방대함은 물론 희귀자료를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어 미국내 링컨니아나(링컨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취임 37일만에 전쟁 발발 대통령 취임후 불과 37일만에 남북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링컨은 임기 내내 전쟁을 이끌어야 했다.이 기간중 링컨은 줄곧 참모들로부터 또는 많은 북부의 국민들로부터도 전쟁종식의 압력을 받았다.그러나 링컨의 신념은 확실했다.전쟁의 종식은 연방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미합중국의 존립 이유를 뿌리채 흔드는 것이었다.링컨은 기회있을 때마다 미 건국역사에서 ‘연방’은 ‘헌법’보다도 앞선 것임을 주장했다.그리고 몇몇 주의 영원한 분리는 불가능함을 강조하며 남부측에 타협을 호소했다. 그러나 미시시피 상원의원 출신의 남부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특히 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멕시코전쟁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바 있는 전략가였다. 당초에는 남부의 여러가지 수치상 열세로 전쟁이 수개월내 끝날 것으로 예측됐다.그러나 초기 ‘불 런’전투에서 북부군의 대패는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했다.전쟁 내내 링컨은 남북 양측 군대의 주전선이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 경계의 포토맥강을 중심으로 형성됨에 따라 야전군 지휘소처럼 변해 버린 워싱턴에서 북부군의 전략수립과 지휘관 찾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쟁관련 도서 탐독 미시시피강을 서쪽 경계로 해 동쪽으로 애팔래치아산맥 사이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전선에서 서부에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과 티컴셰 셔만 장군 등이 있었지만 동부전선에는 남부군의 용장,로버트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에 맞설만한 지휘관이 없었던 것이다.그는 또 군사전략 수립을 위해 의회도서관에서 전쟁의 기술에 관련된 책들을 빌려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링컨은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 부닥치게 됐다.전쟁의 시작은 노예문제에서 비롯됐지만 그 목표설정에 관한 것이었다.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궁극적으로 노예해방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민주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분위기는 연방회복으로 제한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노예제도가 남부의 경제적 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남부를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노예제 폐지를 선결과제로 간주했다.62년 여름,그가 내각에서 노예해방 선언의사를 밝혔을 때 많은 각료들이 반대했다.그러나 링컨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해 9월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바로 이튿날 준비했던 노예해방선언을 감행했다. ○노예해방 북부도 반대 노예해방선언은 그러나 남부는 물론 북부의 반대도 불러 일으켰다.북부 공업지대의 많은 근로자들이 노예들의 해방으로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또한 북부의 승리가 확실시 되면서 남부주들을 포용하기 위해 내놓은 링컨의 온건한 화합정책들은 응징과 처벌을 요구하는 북부 과격파들의 건센 반발 가져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가정의 연이은 비극은 링컨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부인 메리 토드 여사와의 사이에 둔 네아들중 한 아들은 일찍 죽었고 백악관에서만 두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자 메리 여사는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한때 정신과 치료를 받기까지 할 정도였다.오직 한 아들 로버트만이 성장하여 후에 가필드 행정부에서 전쟁장관을 지냈다. 링컨이 이같은 암담한 안팎의 불행을 이기고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에 정열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탈출구는 일상화된 그의 유머감각 이었다고 역사가들은 지적한다.그는 아무리 심각한 회의도 조크와 유머로 시작했으며 순간적인 재치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그가 엄숙하게 노예해방선언의 의사를 물었던 각료회의도 유머 한토막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링컨은 당대에는 국민들에게 그리 인기있는 대통령은 아니었다.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독려하고 재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정직한 에이브’라고 그의 이름이 정직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그는 국민에게 솔직했으며 결국 그는 192㎝의키에서 뿐 아니라 미 역대 대통령중 가장 우뚝 선 대통령으로 남게 된 것이다. ◎킴 바우어 미 일리노이 주립박물관 헨리­호너 링컨자료 실장/링컨의 인간평등 정신 역사에 우뚝/학자 800명·기관 50개 링컨학회 결성/“대통령학 가장 흥미있고 미래 지향적” 【스프링필드(미 일리노이주)=나윤도 특파원】 미국내 최대 링컨 관련자료 소장 도서관으로 알려진 일리노이 주립박물관의 링컨자료실장 킴 바우어 박사는 “링컨 대통령은 많은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통해 해가 갈수록 그 업적이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다며 대통령학이야말로 가장 흥미진진하고 미래지향적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조사에서 링컨 대통령이 미국 역대 대통령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부동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우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끝내 연방을 지켜낸 그의 소신과 노예해방을 가져온 그의 투철한 인간평등 정신 때문으로 볼 수 있다.더우기 그의 어려운 성장환경과 정직한 성품은 누구에게든 자신감과 신뢰감을 안겨 준다. ­미국내 링컨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링컨은 켄터키의 통나무집 시절서부터 인디애나를 거쳐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성장했다.그리고 백악관 생활과 남북전쟁 당시 여러차례의 전장 방문 등 많은 자료들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상호보완 연구가 중요하다.현재 800여명의 학자와 50개 소장기관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학회가 결성돼 있고 매년 심포지움과 학회지 등을 통해 200편 이상의 논문과 책들이 나오고 있다. ­헨리­호너 링컨자료실은 어떤 곳인가. ▲모든 분야의 링컨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링컨의 대통령 이전 자료는 최대의 소장처로 알려져 있다.현재도 개인적인 링컨 자료 소장자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로부터의 기증이나 구매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지난해만 해도 일리노이의 기업가 클레망 스톤씨로부터 200여점,미니애폴리스 공공도서관으로부터 200여점,최대 여성 수장가인 제인 하만드 여사로부터 링컨의 어린시절유품 수십점을 기증받는 등 계속 소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대통령학은 과거지향적 학문이 아닌가. ▲과거 대통령에 대한 철저하고 정확한 연구는 현재와 미래의 국민과 대통령에게 과거의 경험을 부여해 준다는 측면에서 미래지향적 학문으로 볼 수 있다.
  • 군 대외활동 대폭 축소/무관요원 등 줄이기로

    국방부는 3일 환율상승에 따른 국방예산의 환차손을 줄이기 위해 장비구매분야를 제외한 대외군사활동 전반에 대한 기존 계획을 재검토,관련 예산을 대폭 축소키로 했다. 이를 위해 해외 무관요원을 올해 10명,99년 6명,2000년 3명 등 3년에 걸쳐모두 19명을 줄이고 베네수엘라 그리스 오스트리아 미얀마에 설치된 해외무관부를 폐쇄키로 했다. 육·해·공 사관생도를 제외한 국방대학원,국방참모대,육·해·공군대학 등 각급 군사학교에서 실시해 온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취소하고 ‘98 신규해외교육 및 파견’도 필수분야에 한해 최소인원으로 조정,60% 이상을 감축키로 했다. 매년 실시해 온 각군 모범하사관의 해외시찰도 중단하고 기타 해외출장의 64%를 감축키로 했으며 태권도를 제외한 다른 운동종목의 세계 군인선수권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방침이다.
  • ‘제3영상시대’ 디딤돌 놓는다/‘98사진영상의 해’주요 기념사업

    ◎사진박물관­최대숙원… 연내 건립기반 마련/현대기록전­정부수립 후 50년 발자취 조명/남북교류전­서울·평양서 동시에 교환 추진/전국민축제­지자체별로 고향 참모습 알려 1998년은 문화체육부가 정한 ‘사진영상의 해’.이 땅에 사진이 들어온지 118년째를 맞는 올해는 ‘사진영상의 해’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질 전망이다. 사진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모습들을 기록하면서 점차 독특한 예술영역으로서의 위치를 탄탄히 굳혔고 산업·정보매체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 왔다.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보접근 측면이 강화되면서 컴퓨터세대에 대한사진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전문가들은 현재 전국적으로 5만여명의 전문 사진가들이 예술·보도·광고·산업 등 각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시판 또 30여개의 각급 대학에서 매년 2천여명의 전문 사진인력을 배출해 사진 분야의 인력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이같은 분위기에서 사진관련 업계도 급속한 신장을 보여 특히 카메라 생산부문에서는 세계 6대 카메라 생산국으로 부상할 정도다. 올 ‘사진영상의 해’는 한국 사진계의 일대 전환기가 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관측.우선 디지털 카메라가 시판돼 기존 카메라를 대체하면서 촬영·제작방식의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여기에 홀로그램·입체사진 등 첨단사진기술이 연구단계를 거쳐 실용화를 앞두고 있다. 따라서 조직위측은 올해를 계기로 사진분야의 대전환을 이루어 내겠다고 야무진 계획들을 세워놓고 있다.격동의 와중에서 소실된 가치있는 사진자료들을 발굴,체계적으로 보관·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심도있게 추진하고 있다.영상이미지화한 사진의 폭넓은 보급으로 사진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실생활에서의 사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켜 제3영상시대를 준비하는 토대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조직위가 세워놓은 ‘사진영상의 해’ 기본방향을 보면 ▲한국사진사 118년의 유산 계승 발전 ▲한국적 사진영상의 독창성 추구와 21세기 한국사진문화의 발전방향 모색 ▲사진영상의 중요성에대한 국민적 인식변화를 통한 제3영상시대에 대비 등으로 압축된다 ‘사진영상의 해’에 펼쳐질 중점사업들을 소개해본다. △사진박물관 건립추진=모든 사진인들의 오랜 숙원이며 ‘사진영상의 해’사업중 최대의 현안.올 1월중 집행위원회에 별도의 추진위원회를 구성,자료수집과 건물확보를 동시에 추진할 계획이다.자료수집은 현재 각 사진단체·언론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을 기증받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외국의 문서보관소·박물관·연구기관 등이 보유한 자료 수집과 함께 각종 행사를 통해‘전국민사진찾기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홀로그램 실용화 눈앞 수집된 사진은 보존처리해 영구보존하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자료의 활용 및 판매에 활용한다.건축에 필요한 경비는 토지매입비를 포함해 15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98년중 건립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사진자료 보존공간과 상설전시장·임대전시장·사진단체 사무실·기타 부대시설로 구성된다. △한국 현대기록사진전=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과정에서부터 이후 50년 동안의 민족의 발자취를 조명한다.한국사진기자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각 언론사와 정부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 기록사진들을 수집해 서울을 비롯해 전국 순회전을 개최한다. △남북교류사진전=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사진가들의 작품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교환전시한다.남북 사진작가들의 실무협상을 거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개최하고 작가들의 교환방문도 추진한다.현재 통일원으로부터 사진전시 및 북측 접촉승인을 받았으며 북측도 관련당국으로부터 사진전 공동개최에 관해 승인을 받은 상태다.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인터넷 사이버 갤러리 운영=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사진영상의 해’ 행사 추진을 위한 국제 정보교류에 활용한다.사이버 갤러리를 개설해 전문 사진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한다.또 홈페이지에 제공되는 화상 데이터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 실시간 사진전송·사진이미지를 누구나 자유롭게 변용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이벤트를 벌인다. △한국사진역사전=사진도입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진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한국사진 118년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한다.한국사진의 특성을 다각도로 조명해 정보통신시대를 맞는 한국 사진영상의 좌표를 제시한다.기록사진과 사진작품·사진책자·사진기재 등 사진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는데 이미 확보된 사진자료 뿐만아니라 전 국민 사진찾기운동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 사진을 보존·복원·재인화 과정을 거쳐 공개한다. △사진영상축전=전국의 모든 사진인들이 전 국민과 함께 하는 축제의 장.각 사진단체의 회원들이 출품하는 사진 및 영상작품을 전시하고 사진기자재전을 통해 우리나라 사진산업의 현주소를 재조명한다. △전 국민 사진축제=‘내고장’이란 주제아래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전시회 등을 운영,사진을 통해 고향의 참모습을 재인식한다.지역행사를 통해 모아진 우수한 사진들을 선정해 ‘국토사랑 사진축제 한마당’을 벌이며 향토풍물제를 연다.
  • 소여 정국 변혁 주도세력으로/올해를 움직일 정치인

    ◎JP·조세형·한광옥·이종찬씨 권력핵 부상/한나라 조순·이한동·김윤환 당권장악 모색/신당 이인제 고문 단체장 선거로 재기 별러 올해도 여야 정치인들의 발걸음은 분주할 것같다.오는 2월 새 정부가 출범하는데 맞춰 크고 작은 정국 변화는 불가필 할 것으로 보인다.3월에는 3곳에서 국회의원보궐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며,6월에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다. ○…올해의 정치는 아무래도 공동집권한 국민회의와 자민련 인사들이 주도해나갈 것 같다. 우선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가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겨 행정부를 차고앉을 것 같다.김대중­김종필 양김의 관계는 새 정부에서의 핵심적인 관심사항이다. 국민회의에서는 조세형 총재권한대행과 한광옥 부총재,이종찬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정치의 중심에 설 것으로 보인다.김대중 당선자가 총재직을 계속 유지한다면 조대행체제는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노·사·정 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보이는 한광옥 부총재도 당권과 관련해서 지켜볼만한 인물이다.이종찬 위원장은 선거법위반 소송이 진행중인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될 경우 다시 출마한다는 생각을 굳힌 것으로 알려진다.이위원장은 안기부장 하마평과 서울시장 출마설도 거론된다. 김상현 의원도 연초부터 당내 세력확장을 위한 물밑 움직임을 시작했다.DJP연대를 반대했던 정대철 부총재는 한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은 것으로 전해진다. 인수위의 정책분과위원장인 이해찬 의원에게 김당선자가 어떤 역할을 맡길지도 관심사다.또 김당선자의 경제참모인 김원길·장재식 의원과 유종근 전북지사도 중용이 점쳐지고 있고 박상천 원내총무와 박지원 특보는 김당선자의 주요한 정치참모의 역할을 계속할 전망이다. 자민련에서는 박태준 총재가 당을 지휘하면서 경제분야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김용환 부총재 역시 올해도 활동영역이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한나라당은 지도체제 변경여부가 함수이긴 하지만 일단 조순 총재­이한동 대표의 지도부와 계파 보스들인 김윤환 김덕용 의원과 이기택 전 민주당총재,그리고 이회창 명예총재 등이 조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조총재는 3월 전당대회에서 합당 정신에 따라 총재직을 유지할 전망이며,16대 총선의 공천권을 행사하려는 의지도 강하다. 이대표는 대선패배후 정치력이 약한 조총재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를 움직일 정치인’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하다.허주(김윤환 의원)에 비해 계보원은 적지만 대선패배의 책임론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데다 돋보이는 포용력으로 혹여 경선이 있더라도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들이다.허주는 당내 최대계파 보스로서 대선 패배의 상흔을 딛고 정치적 재기를 모색할 전망이다.이 점에서는 이명예총재도 비슷한 입장이다.당장 3월로 예상되는 영남권 3곳의 보궐선거는 이들에게 좋은 기회다.5월의 지방선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일각에서는 허주가 내각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지적도 한다.이명예총재는 1천만표의 의미를 계속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김덕용 의원은 자신의계보 모임인‘21세기 국가경영연구회’를 중심으로 일정 지분을 확보해 나갈전망이며 이전총재도 옛 민주당의 수장으로서 재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신당 이인제 고문은 보궐선거,지방선거에서의 신당 ‘활약’여부가 정치적 재기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대통령 취임 전후로 몰아닥칠 정계개편의 소용돌이를 현역의원 8명의 ‘미니정당’이 흔들리지 않고 견뎌낼지도 관심을 끈다.
  • 북한군 총참모장 김영춘 행사 불참… 신변 이상설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인 김영춘이 최근 각종 행사에 불참하고 있어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2일 “김영춘은 작년 12월7일 김정일과 군악대 공연참석을 끝으로 지금까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면서 “김이 와병,혹은 숙청·실각했는지 여부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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