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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에선] “”통일조국 축구 세계 No.1 소망””

    ■북한 국가대표 출신 재일조선인 김종성씨 [오사카 김현 객원기자] 한국 대표팀 미드필더 윤정환이 소속된 일본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 월드컵 출전을 꿈꿨던 또 한 사람의 ‘우리 축구인’이 있다.북한 대표 출신인 김종성(金鍾成·38)이다.그는 지난 1월부터 이 팀의 코치를 맡고 있다. 재일본 조선축구협회 기술부장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는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민족학교 축구부에 몸담았던 재일 조선인 3세이다. “어릴 때는 조국(북한)의 강한 축구가 마음의 의지가 됐다.”는 그는 “대표팀에 들어간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학교가 일본에서 차별을 받고 따돌림을 당해도 참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89년부터 3년간 북한 대표로 활약했던 그는 1992년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렸다.‘50m를 5초8에 주파하는’ 경이적 스피드가 눈에 띄어 J리그‘주빌로 이와타’에 스카우트됐다. 북한 대표 시절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뛰기도 했지만 예선 통과의 꿈은이루지 못했다.그렇다고 꿈마저 접은 것은 아니다.“월드컵을 목표로 하지 않고서는 진짜 축구선수가 아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는 “궁극적인 꿈은 통일 조국의 축구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것”이라면서도 “그 전에 나를 키워준 북한 축구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다.그러나 언제쯤 북한 축구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른다.1966년 월드컵 8강 진입을 자랑했던 북한 축구가 지금은 국제교류 부족으로 부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월드컵에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윤정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솟아오르는 생각도 있다. “한국 대표가 우리 축구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는 그는 “남과 북,그리고 일본에 있는 동포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싸운다면 그것을 통해 모두의 마음을 통일 조국의 축구로 모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했다. kmhy@d9.dion.ne.jp ■월드컵 외국인 홈스테이 [도쿄 간노 도모코 객원기자] 일본인 오노 도루(小野亨·30) 집에 1박2일간 홈 스테이를 하고 있는중국계 캐나다인 장 캐서린(35·여)은 점심은 우동,저녁은 다코야키를 대접받았다.간사이(關西) 출신인 부인 미유키(美由起·35)의 아이디어였다. 낙지를 넣어 만든 간사이 명물 다코야키는 먹어 본 적이 있지만 집에서 만든 것은 처음이라는 캐서린은 “만들기 어려웠지만 맛있었다.”고 기뻐했다. 세살배기 쓰구메(緖芽)와 3인 가족인 오노는 도쿄 이타바시(板橋) 구청이 월드컵행사로 마련한 외국인 홈 스테이에 응모했다. 오노는 응모 이유에 대해 “축구를 너무 좋아해 외국에서 오는 응원객들에게 일본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응모했습니다.딸에게도 좋은 추억을 갖게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라고 말했다. 캐서린은 지난 4월부터 일본어학교에 다니고 있는 유학생.학교의 소개로 일본 가정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오노 집에 홈 스테이를 하게 됐다. 캐서린은 “매일 밤 목욕을 하는 습관을 비롯한 보통 일본인의 생활을 알 수 있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인 미유키도 “홈 스테이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여러가지 얘기도 나눌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이타바시 구청측은 당초 월드컵 입장권,추천장을 가진 외국인에 한해 홈 스테이 응모를 받았으나 까다로운 조건을 싫어하는 외국인들의 응모가 없자 조건을 완화했다. ktomoko@muf.biglobe.ne.jp ■동경신문에서/ ‘첫승 골' 이나모토 英아스날서 방출 ●일본 영웅 영국팀서 방출= 일본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나모토 준이치(사진·23·아스날)가 정작 소속팀에서 버림을 받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아스날은 2002∼2003시즌을 앞두고 이나모토와의 재계약을 포기,방출대상 명단에 올리고 10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수협의회(PFA) 공식 사이트에 공시했다. 이에 앞서 아스날의 아르센 웽거 감독은 “이나모토가 월드컵에서 두 골을 넣었다고 해서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의문을 자아냈다. BBC와 스카이스포츠,로이터 등 영국 언론들은 이날 전격적으로 이뤄진 아스날의 방출 결정을 비중있게 보도했으며 이를 접한 일본 언론들은 “일방적인 해고 통보”라며 공분을 표시하고 있다. 이나모토는 지난해 7월 감바 오사카에서 아스날로 옮길 당시 ‘1년 임대 후 활약여부에 따라 완전 이적한다.’는 조건으로 5년간 계약했지만 기량을 인정받지 못하고 1년 만에 방출됨에 따라 월드컵을 통해 월드스타로 떠오른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일본대표팀 부동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이나모토는 월드컵 H조 벨기에,러시아전에서 연속골을 작렬하며 플레이메이커 나카타 히데토시(파르마)와 견줄 일본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월드컵 방한 재일 조선인 1300명 넘어= 월드컵 관전을 위해 한국을 찾게 될 재일조선인(북한 국적)이 1300명을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이 가운데 800여명은 개인 관전 그룹으로 대부분이 분단 이래 처음으로 한국을 찾게 된다. 하나의 이벤트로 이처럼 많은 재일 조선인이 한국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월드컵을 계기로 재일 동포 사이에 남북 우호 무드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월드컵 관전에는 10∼20명 단위로 민단을 통해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방한한다.앞서 민단과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는 400여명의 월드컵 응원 방한단을 구성한 바 있다. 정리 도쿄 황성기특파원
  • [기고] 한국인 저력 과시한 한·미전

    10일 열린 월드컵 경기 한국과 미국의 대전은 한국측이 시종일관 우수하게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골운이 따르지 않아 결국 비기고 말았다.전 국민의 초조와 안타까움,기다림과 아쉬움 속에서 달구벌 경기장에서의 싸움은 끝났다. 내용상으로 한국측이 분명히 승리한 경기라고 한다면 과장일까.나아가 세찬 빗줄기 속에서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질서정연하게 보내준 응원까지 더한다면,월드컵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축구문화를 훌륭하게 빛낸 경기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숱한 기회를 놓친 상태에서,전반 24분에 매시스 선수에게 어이없게 한 골을 허용한 뒤 후반 33분 안정환 선수가 헤딩슛으로 동점 골을 얻을 때까지,그 한시간 남짓은 한국인이 체험한 가장 긴 시간이었다.선수들의 이마에 흐르는 피와 땀방울은 보석보다 더 빛난 반면 히딩크 감독의 타는 입술은 백지장 같았다. 스탠드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우리에게 꿈이 있다.’는 영문글씨가 선명했다.‘대∼한민국,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응원단과 전 국민의 목소리는 고조선 이후 가장 굳건한 민족적 통합을 상징하는 함성이었다.대등한 체력을 보이면서도 아직 스피드가 뒤지는 모습은 선수의 역량 차이라는 냉엄한 세계를 되새기게 했다. 경기를 보면서,만약 한국이 지게 되면 일부 젊은이들이 흥분한 나머지 서울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에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떠올랐다.러시아에서는 일본에 패한 것에 분노한 국민이 현지 일본인들에게 행패를 부렸고,또 난동 끝에 러시아인 두 사람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난동이 일어나리라는 이러한 선입관이나 예측은,말 그대로 일부의 우려이거나 자국민에 대한 지나친 폄하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 청년들이 한둘 있을 수도 있다.그러나 오늘 한국인들이 보여준 성숙한 질서의식과 거국적인 스포츠 사랑의 태도야말로 지금까지의 기우를 씻어주고도 남음이 있다.안정환 선수가 동점골을 넣고 나서 의연하게 보여준 세리머니,‘쇼트트랙 위의 김동성 모션’을 미국인들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경기장에서,거리에서 그리고 직장과 가정에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응원하는모습을 보면서,한편 우리의 답답하고 부끄러운 정치현실이 문득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정치도 축구처럼 할 수 없을까.정정당당한 경쟁,깨끗한 승복,그에 따른 아름다운 명예 이것이 축구의 세계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여야 지도자들도 축구처럼 미래의 꿈을 가지고 맨 몸으로 청빈하게 경쟁하면서,아름다운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할 수는 없는 것일까.정치생활의 끝은 언제나 그처럼 수치스럽고 비겁하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불명예의 길이어야 하는가.‘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진정 듣지 못하는 오만과 무지가 정말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의 대전은 전 세계에 한국인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한판이었다.세계는 숨을 멈추고 우리를 지켜보았고 우리는 그들에게 정직한 실력과 순수한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이고 한국인이 어떤 국민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게 우리의 참모습을 깊이 인식시킨 것은 물론 단군 이래 전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한 것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된다.말 그대로 월드컵을 통해 ‘거족적인 축제’를 이룬 것이다.48년 만에 얻은 값진 성과이지만,기다림의 철학은 앞으로 더욱 큰 성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다.기다림과 맹훈련의 인내,열정과 침착의 조화,깨끗한 질서와 아낌없는 성원이야말로 월드컵을 통한 우리 문화의 내적 성숙을 가져오는 왕도라고 생각한다.최후까지 우리선수들에게 영광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서연호/ 고려대 교수 연극평론가
  • 지방선거/서울시장 후보 캠프/ 전직 고위 관료 ‘정책 브레인’ 맹활약

    6·13 서울시장 선거에 전직 고위 공무원들이 대거 참모로 뛰고 있다.이들은 대부분 서울시에서 20∼30년 이상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로서,풍부한 행정경험을 토대로 현실성있는 시정개혁 방안을 후보에게 제시하고,후보측도 이들의 아이디어를 선거전에 비중있게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에서는 정치인은 몰라도 직업공무원 출신들이 선거에 관여하는 행위가 바람직한가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한다. ●누가 뛰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원군’으로는 서울시 국장 출신 조광권·제타룡씨 등이 있다.이들은 서울시 교통문제 해결책과,직원 감사문제 및 민원조사개선방안 등 복잡한 서울시정을 해결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민주당 김민석 후보캠프의 경우,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이해찬·신계륜 의원이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한다.시 관계자는 “이 의원이 정무부시장으로 있을 때 기획관리실장으로 있었던 시 산하 공사의 D 사장,국장 출신인 K씨 등이 김후보 캠프에 다양한 시정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민주당 공천을 받은 시의원들이 가세한 것은 물론이다. ●줄서기 우려= 이들이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선 행정을 주무르던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시장 후보를 지원하는 행위가 현직 후배 공무원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부정론자들은 주장한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어떤 이는 낮에는 한나라당,밤에는 민주당쪽 사람들과 만난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공직에서 물러나면 깨끗이 손을 터는 게 시민이나 후배들 보기에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한다.이들의 행태가 공직사회에 또 다른 ‘줄서기’현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경계했다. 반면 긍정론도 적지 않다.오랜 행정경험을 시민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기업체가 전직 고위 행정관료들을 고문 등으로 모시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식견이 경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면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 후보들입장에서도 관료들의 머리를 빌리는 게 당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지방선거 표밭 현장/ “강변북로 월드컵도로로 개명”

    6일 현충일을 맞아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들은 상대후보 비난을 되도록이면 삼간채 합동연설회나 거리유세를 하며 표밭을 일구느라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서울시장 후보는 도봉·성북·동대문구에서 열린 정당연설회 등에 참석,각종 복지정책을 소개하며 지지를 호소. 이 후보는 “현재의 강변북로를 월드컵도로로 이름을 바꾸자.”며 분위기를 유도한 뒤 일자리 창출,보육시설 확충 등을 공약으로 내놓았다.또 청계천 복원문제는 임기내에 완전히 매듭을 짓겠다고 재천명. 민주당 김민석(金民錫) 후보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의 지원을 받으며 서울 중·남부지역에서 유세을 벌였다.종묘공원 거리유세에서 월드컵 분위기를 의식,서울 연고의 프로구단 창설과 경평축구 부활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신생 프로축구단이 상암축구경기장을 전용구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할 것이며,서울시민이 축구단의 창설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60대 중반의 나이로 경북도지사 선거에 나선 두후보는 연일 계속된 빠듯한 선거운동 때문에 체력이 거의 한계에 이르러 남은 6일간을 대비해 짧은 충전. 한나라당 이의근(李義根) 후보는 오전에 고령읍 지산리 충혼탑에서 열린 현충일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읍내 곳곳을 돌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한 뒤 밤 10시에 혼자 출연하는 TV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오후 내내 휴식.이 후보 캠프의 한 관계자는 “이 후보가 10일동안 15개 시·군을 돌며 강행군해 피로가 겹쳤다.”고 소개. 무소속 조영건(曺泳健) 후보는 포항과 울진에서 차량을 이용한 거리유세를 한 뒤 저녁에 영덕군에서 오랜만에 단잠.조 후보의 한 참모는 “조 후보는 지금까지 선거운동을 하며 차에서 2∼3시간만 수면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언. ●민주당 김종식 완도군수 후보는 지구당 위원장이 무소속 후보 선거운동을 돕고있다며 중앙당에 탄원서를 제출.김 후보는 탄원서에서 “천용택(강진·완도지구당) 위원장이 중앙당 공천을 받은 후보의 당선을 방해하려고 지역구를 방문하거나 보좌관을 보내 무소속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고 호소. ●민주당 유성지구당(위원장 송석찬)이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은 자민련과,기초단체장은 한나라당 후보와 사실상 공조에 나서 배경에 관심. 송 의원은 최근 지구당 간부회의를 열고 “자민련 홍선기(洪善基) 대전시장 후보는 중앙당의 민·자 공조 대상이며 유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왔고 사업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적극 지원에 나설 뜻을 피력.비슷한 시기에 송 위원은 지역별 조직책 등 측근 인사들에게 “구청장은 정치가가 아니라 행정가를 뽑아야 해 당과 관계없이 행정관료 출신으로 유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한나라당 김현규 후보를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후문. ●민주당 유성지구당은 구청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낼 예정이었으나 막판에 후보등록을 포기.이같은 선별 공조 움직임에 대해 지방정가에서는 송 의원이 그동안 지역개발사업 과정에서 사사건건 충돌하고 국회의원 출마설이 끊이지 않는 자민련 이병령 유성구청장 후보를 견제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 ●단독 출마한 무소속 김태환 제주시장 후보와 민주당 강기권 남제주군 후보도 투표자수 ⅓이상 득표를 위해 경쟁상대가 있는 여타 후보들 이상의 ‘처절한 고투’를 전개중이어서 눈길.두 후보는 매일 새벽부터 운동원과 함께 어선부두와 대중목욕탕,재래시장,학교운동장 등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는가 하면 거리유세와 방송사 정책토론회 참여 등 한표를 더 얻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 안간힘. ●전국공무원노동조합 경남지역본부 진주시지부(지부장 하한조)가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에 출마한 후보자들에게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보장과 공무원노조가 부정부패와 부정선거방지에 기여할 것으로 보는가 등 6개 항목의 정책과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개통과 관련된 물류유통,문화관광 발전대책 등 시정계획을 공개질의. 지부는 오는 10일까지 후보자들의 답변을 접수하고 공무원노조 홈페이지에 실을 방침. ●민주당 김종식(56) 완도군수 후보는 지구당 위원장이 무소속 후보 선거운동을 돕고 있다며 중앙당에 탄원서를 제출. 김 후보는 탄원서에서 “천용택(강진·완도지구당) 위원장이 중앙당 공천을 받은 후보의 당선을 방해하려고 자신이 지역구를 방문하거나 보좌관을 보내 무소속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다.”고 호소. 특별취재단
  • 지방선거/광역단체장 후보 캠프/ 정치인·교수등 ‘아이디어 군단’ 포진

    ‘시·도지사 당선은 우리가 맡는다.’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들은 선거 캠프에 핵심참모를 두고 유권자에 먹혀들 수 있는 선거전략을 시시각각 쏟아낸다.이 아이디어맨들은 선거경험이 많으면서 민심을 꿰뚫고 있는 정치인과 고위공직자 출신의 관리형,환경·학계 등 민간 전문가그룹이 포진해 후보들의 취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정책형으로 대별된다. 박광태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 선거캠프는 행정자치부 장관 출신의 강운태 국회의원이 이끌고 있다.강 의원은 튼튼한 지역 조직과 지명도를 바탕으로 바닥까지 추락한 민심을 끌어 올리는 데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무소속 정동년 후보 캠프에는 학창시절 정 후보와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홍길 전남대 인문대학장과 최근 민주당을 탈당한 안성례(여) 광주시의회 의원 등이 진보세력의 표를 결집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경남지사에 출마한 한나라당 김혁규 후보 캠프에서는 박창기 전 밀양시장이 총본부장으로 지휘하고,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충근씨가 정치특보로 활약한다.민주당 김두관 후보 캠프 총지휘자는 민예총 경남도부지부장 출신인 윤치원씨가,정무특보는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김후보의 동생 두수씨가 맡았다.민주노동당 임수태 후보의 선거운동본부 위원장으로는 권영길 민노당 대표가 직접 뛰고,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부산·경남지역회장인 임영일 경남대 교수가 정책기획위원장이다. 심대평 자민련 충남지사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인 유철희씨는 충남도행정·정무부지사 출신이다. 김영규 사회당 인천시장 후보 선거대책위원장으로는 김철홍(45) 인천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나섰다.전국교수노동조합 경인지부장인 김 교수는 인하대교수협회장으로 재직하던 김 후보가 재단 민주화운동을 펴다가 해직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강의가 없는 시간을 쪼개 김 후보와는 별개로 철거민·노점상·노동자 등을 찾아다니며 김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대구시장에 출마한 무소속 이재용 후보 캠프에는 대구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장을 지낸 이 후보를 돕기 위해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인 정학씨가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진념민주당 경기지사 후보 캠프에는 김영환 국회의원의 도지사 경선 후보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김희택 전 민청련 의장과 임창열 지사의 사조직을 총괄했던 한영식 전 안성시장이 선대본부장으로 활동,‘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돌아섰다. 전국종합·정리 강기석기자 ksk84019@
  • 中 고위장성 7명 上將 진급

    [홍콩 연합]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가 공산당 제16기 전국대표대회 개최를 3개월 앞두고 인민해방군 고위 장성 7명을 상장(上將·대장)으로 진급시켰다.이는 차기 대권 승계가 유력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부주석의 ‘순풍 항해용’이라는분석이다. 3일 홍콩 일간 명보(明報)와 홍콩경제일보 등 주요 신문들은 2일 공군총사령원(참모총장격) 차오칭천(喬淸晨)을 비롯한 7명을 상장으로,100명을 중장 및 소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대대적인 고위급 간부 인사가 단행됐다고 전했다.이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군부 달래기 작업이라고 신문들은 덧붙였다. 군사위 주석을 겸직한 장 주석은 이날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열린 상장 7인 진급식에 참석,후 부주석(군사위 부주석 겸직)의 호명 및 인사 명령장 낭독 후 승진 대상자들에게 사령장을 수여했다.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8)군사교육 지원의 전모

    ***“6000精兵 양성” 러 군사교관단 2차례 파견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민영환(閔泳煥) 특명전권공사는 1896년 6월13일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민영환 특사는 러시아군대 파견,군사교관단 파견,차관제공,재정고문 초빙,전신선가설 등 5가지 요청 사항을 제시했다.이중 러시아군 및 군사교관단 파견요청에 대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고종의 호위를 위해 러시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해군이 호위할 것이다.공사관에 체류하고 싶은 만큼 체류할 수 있다.(로바노프).조선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시에 왕을 호위할 군사교관 200명을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군사교관은 파견할 것이나 빠른 시일안에는 곤란하다.(로바노프) 당시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1896년2월11일∼1897년 2월20일)기간중이었고 러시아가 조선의 국사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였다.고종은 자신의안위를 보호해줄믿을 만한 군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러시아군이 그같은 역할을해줄 것으로 여겼다.고종은 일본인 특히 일본 군사고문단의 한반도 진출을 꺼려했다.일본 군사고문단 대신 러시아 군사교관단을 초청하고 싶었다.하지만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러시아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열강을 동원한 일본과 친일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러시아로서도 극동주둔 군사력의 대(對)일본 열세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군대 파견의 전제조건이자 러시아의 확고한 한반도 지배의사로 해석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896년 2월23일 일본 군사무관 보각 대령은 참모본부 학술위원회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의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요청에 동의하면 일본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이 경우 일본 정계에서 조선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력을 하려는 분위기를 파국으로 이끌거나 아니면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러시아 군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팽배했다.이 때문에 러시아정부는 파견결정을 차일피일미뤘고 주한 베베르 대리공사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결국 군사고문단의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선에서 ‘생색내기용’파견이 이뤄졌다. 조선의 불안한 정세로 보아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문제를 고종과 협의하기는아직 시기상조이다.(1896년 3월1일 로바노프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서울주재 공사대리에게) 가능하면 신속하게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그것이 왕권강화,질서회복 그리고일본견제책의 유일한 수단이다.(같은해 3월2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띄운 보고문)국방부에서 검토한 결과 고종의 시위대는 러시아인 장교를 지휘관으로 한인 1개 대대로 구성하고 교관은 위관급 5명,상사 4명,하사관 10명과 소총 1000정이 적합하다고 한다.(1896년 4월28일 외무장관이 베베르에게).고종은 무기와 교관단 파견결정에 감사를 표했다.조선군은 4000명이기 때문에 왕의 시위대외에 서서히 다른 부대의 교육도 위탁하고자 한다.(같은해 같은달 3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1896년 11월22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민영환 특사와 청국주재 군사무관이던푸차타 대령 사이에 제1차 군사교관단초청 계약서가 체결됐다.계약에 따르면 초청기간은 1년이며,인원은 장교 2명,하사관 10명,군의관 1명,악장 1명 등 모두 14명으로 돼있다.조선측은 장교급에겐 매월 150엔,사병에게 20엔의 월급과 숙소를 제공키로 했다.제물포까지의 여비와 부임수당 등도 별도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이들 중악장을 제외한 13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레마쉬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곡절끝에 13명의 제1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1896년 10월24일 조선땅에 들어왔다.고종이 요청했던 200명에는 턱도 없이 모자란 숫자였지만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의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의 파견과 함께 푸차타 대령을 군사교관단장에 임명했다.또 1896년 1월 동부 시베리아 제2보병여단 소속 스트렐비스키 중령을 서울주재 러시아공사관 군사무관(軍事武官)으로 임명했다.1895년 6월17일 아무르군관구 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이제 서울에도 별도의 상주 군사무관이 필요하다.앞으로극동의분쟁에서 조선의 무력이 큰 변수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데 따른 후속조치였다.스트렐비스키 무관은 1902년 라벤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서울에서 근무했다. 조선은 청·일전쟁(1894∼1895)이전까지는 지리적 특성으로 러시아 우수리지방의중요한 국경을 보호해 주는 방벽구실을 했다.현재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앞으로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예상하기 어렵다.그러나 조선의 최근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아마도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정치적 욕망이 많은 열강,특히 일본의 세력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의 1897년 수기)조선은 6000명의 상비군을 보유해야 국내 질서가 안정될 것이다.고종은 유럽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3000명의 정병(精兵)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다.…6000명 정병양성은 조선의 영토나 국민수로 보아 외국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조선과 병력양성문제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과 협의를 해야 할것이다.군부에 만연돼 있는 부패를 척결하고 공정한 예산집행이 이뤄져야 한다.(1897년 6월17일 푸차타의 비밀보고서) 푸차타의 이같은 조선군대 증강계획안에 대해 일본은 거세게 항의했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증강계획을 포기하든지 일본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착수하면 돌이킬수 없는 우를 범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제1차 군사교관단의 대한제국군 군사조련은 일단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1897년6월9일 고종과 각부 대신 그리고 주한외교사절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군 의장대 사열식은 참석자들에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대한제국군중 러시아교관단 산하부대로 들어오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서울에는 대한제국군 5개 대대병력 4000여명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30대의 젊은 한국인 대대장이 부대에 출근할 때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영감행세’를 하기 일쑤였다.병력중 많은 숫자가 ‘유령 병력’이었다.식비를 횡령하기 위해 숫자를 부풀린 탓이다.대부분이 군인 신분을 창피하게 여겨 밖에 나갈 때는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교관단은 이중 1600여명을 선발해 2개 대대로 조직했다.이들은 궁정을 경비하는 시위대 요원이었다.따라서 훈련과목에는 궁중 예절과 궁중 호칭법 등도 포함돼 있었다. 러시아정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개편을 포함,재정지원을 제공하고 제2차 군사교관단을 또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장교 3명,하사관 10명,사관학교 교관·병기병·군악대지휘자 각 1명,군악대원 3명,위생병 2명 등 총 21명이다.(1897년 5월15일 베베르가 무라비요프 외무장관에게) 1차 군사교관단의 성공에 고무된 러시아가 제2차 군사교관단을 파견했다.2차 교관단의 장교와 하사관 등 13명은 아무르군관구에서 차출됐으며 나머지 기능직은 예비역중에서 선발됐다.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과 친일파의 득세 등으로 인해 대한제국내 정세는 급격하게 반(反)러감정이 확산되고 있었다.급기야 1897년 8월14일 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알렉세예프 중위에게 교관단 통솔권이 위임됐다.푸차타 대령의 야심찬 조선군 증강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후 소장으로 진급,아무르지사로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최근 여러 보고서로 미뤄볼 때 대한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당파가 러시아에 적대적이며 친러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고종황제 역시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다.이러한 상황 때문에 러시아가 대한제국 국내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니콜라이 황제께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향후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지 문의하라고 하셨다.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필요치 않다면 러시아는 마땅히 소환하겠다.(1898년 3월3일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대리공사에게) 대한제국 정부가 공식적인 회답을 보냈다.현재 러시아의 군사 및 재정고문(알렉세예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다.러시아는 모든 외국인 고문의 파면을 요청하고 최근 통역관(김홍륙)살해 음모자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대한제국 정부가 거부하면 공사관 기를 내리고 원산을 점령해야 한다.(같은해 3월12일 스페이예르의 회신) 평소 거칠고 직선적인 언사 때문에 초대 대리공사 베베르가 10년동안 한국에서 닦아놓은 외교적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스페이예르는 ‘공사관철수 후 한반도 북부 무력 점령’이라는 극단 처방을 내놓았다.니콜라이 2세는 1898년 5월4일 대한제국에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허락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이 철수한 이후 대한제국군의 조직은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20명의 한국인 장교들이 교관이 되었다.1901년 1월 당시 대한제국군은 장교 372명에 사병 1만 5200명이었고 군대예산은 360만엔이었다. 1,2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과 철수시기를 전후해 일본과 러시아는 1896년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모스크바 프로토콜)체결,1898년 로젠-니시협정(러·일특별협정) 등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협정을 맺었다.러시아가 일본과 일련의 협정체결과 함께 군사교관단을 철수시킨 것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사실상 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종은 이후 국내외 압력에 밀려 러시아교관단이 철수하도록 등을 떼민 자신의 ‘우둔한’결정을 한없이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눈엣가시’러시아군이 떠나자 일본의 한반도 점령 프로젝트 추진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노주석기자 joo@ ■'거문도 사건' 러 대응 1885년 4월15일부터 23개월 동안 영국의 극동함대가 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를 무단 점령한 사건은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정책을 경계한 열강,특히 영국의 극동에 대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친 사건이었다. 새로 발굴된 러시아문서보관소의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부는 거문도 점령 당일 외무부에 급보를 띄워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서울점령 등 강공책을 제시하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하지만 영국의 무력시위 앞에 러시아는 다소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이 과정에서 영국과 청의 비밀거래설도 제기돼 주목된다. 블라디보스토크호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귀국하는 길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거문도를 방문한다.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의행위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것이다.러시아의 태평양함대사령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영국의 군사기지를 폐쇄하도록항의해야 한다.영국과의 협상에서 카스피해 동부지역과 조선이나 일본의 항구를 점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야 한다.(1885년 4월15일 해군부관리관이 기르스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문서). 만일 영국이 거문도를 합병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순양함대는 동해에서완전히 군사적으로 봉쇄당하게 된다.또한 일본군이나 청국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면 러시아군이 그들을 몰아내고 아예 서울을 점령해야 한다. (1885년 4월1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코르프가 황제의 시종무관장에게 띄운 암호전문). 러시아는 정보라인을 총동원,영국의 점령의도와 군사력 등을 파악했다.거문도점령 9일후인 4월23일 일본 나가사키에 파견된 코스틸예프가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는“거문도에는 1척의 영국전함이외에 2척의 소형함정이 있다.오늘 식료품을 실은 기선이 거문도로 출발했다.그곳에는 상륙병 50명이 있으며 나가사키에 있는 영국군함에는 200명의 수병이 승선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또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 파포프는 1885년 9월20일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은 영국의 거문도점령을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그는 종속국인 조선의 보호를 의무로 여기고 있다.청국의 거문도철수항의를 영국이 수용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거문도 때문에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면 영국은 거문도를 떠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결과로 분석된다.”라고정확하게 분석했다.청국주재 군사무관 시누에르는 1885년 11월17일 참모본부학술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확증은 없지만 청과 영국의 비밀거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이홍장의 한 측근은 나에게 ‘영국은 러시아와 전쟁시 거문도를 요새로 사용하고 전쟁후에는 시설물 일체를 청국에 팔기로 했다’고 귀띔했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해 영국과 청의 거래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결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중재에 의해러시아는 한국영토의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했고 영국함대는 1887년 2월27일 자신들이 헤밀턴섬이라고 이름붙인 거문도를 떠났다. 노주석기자
  • 월드컵/ 김대통령 개막선언 요지

    오늘,그동안 우리 모두가 고대해왔던 21세기 첫 월드컵,‘2002 한·일 FIFA 월드컵’을 개막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과 세계 60억 인류는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세계 최고 수준의 박진감 넘치는 축구경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축구경기를 통해 세계인은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전 세계인이 21세기 세계평화와 안전,그리고 인류 공동번영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곳 대한민국에서,5000년 역사에 빛나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21세기 내일의 번영을 약속하는 IT 과학기술이 어우러진 한국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곳곳에서 한국인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내일의 국운융성과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다이내믹 코리아’도 체험하십시오. 평화와 축구를 사랑하는 지구촌 가족 여러분.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평화와 인류화합의 새 시대가,한·일 양국간 우호친선의 21세기가 열리기를 기원하면서 이제,‘2002 한·일 FIFA 월드컵’의 개막을 선언합니다.
  • 선택 6.13/ 장기 유세레이스 후보들의 보약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선거운동을 하는 출마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건강을 챙길까. 대부분의 후보들은 차로 이동할 때 차 안에서 토막 잠을 자면서 피로를 푼다.유권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보약’이란 주장도 많다.‘하루 세끼 식사가 최고의 보약’이란 설명이 의외로 많지만 나름대로 보양식을 들며 건강관리를 하는 후보도 있다. 반면 아침을 거르고 줄담배를 피우는 등 몸을 돌보지 않는 고령 출마자도 상당수에 이른다.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서울시장 후보는 별도로 보양식을 먹는 것은 없지만 하루 세끼는 반드시 챙겨 먹는다.사무실에 있을 때는 맨손체조를 하며 피로를 푼다.담배는 피우지 않고 술도 조금 마시기 때문에 피로 회복이 빠르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김민석(金民錫) 서울시장 후보는 아직 젊은 데다,축구와 등산으로 평소에건강을 다졌기 때문에 별로 피곤함을 모른다고 한다.스트레스와 피로를 느낄 때는평소 단학과 기 체조로 해결한다.유권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보약’이라고 주장한다.차량으로 이동중 드링크제는 종종 마신다. 성북구청장에 나선 한나라당 서찬교(徐贊敎) 후보는 점심 식사후에 한시간가량 반드시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한다.식사 후 쉬는 것이 ‘보약’이라며 참모진이 이시간에는 아예 스케줄을 잡지 않는다.반면 경쟁자인 민주당 장하운(張夏雲) 후보는 새벽등산으로 우선 몸을 다진다.피곤할 때면 새벽에 사우나도 즐긴다.아침밥은 꼭 챙겨 먹고 보신탕도 즐겨 먹는다.장 후보도 유권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보약’이란다.무소속인 진영호(陳英浩) 후보는 건강관리를 위해 선거 10일 전부터 즐겨먹던 술을 아예 끊었다.여름철 보양식으로 보신탕을 최고로 쳐 힘들 때 단골집을즐겨 찾는다. 김영춘(金永春·민주) 은평구청장 후보는 “인삼과 꿀,미숫가루 등을 섞어 만든건강식을 선거운동 중간중간에 먹으며 건강관리를 한다.무소속으로 서대문구청장에 출마한 이정규(李政奎) 후보는 매일 선거운동에 들어가기 전에 한시간 가량 기(氣)체조를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송파구청장에 출마한 이용부(李容富·민주) 후보는 “예전에는 조깅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많이 걷다보니 별도의 운동이 필요없다.”고 말했다.“신토불이 음식이제일”이라며 토종 된장국을 즐겨 먹고 간식으로 틈틈이 과일을 먹는다. 반면 경기도 광주시 박종진(朴鍾振·67·민주·현 시장) 후보는 선거유세가 시작되면서 평소의 두배 가깝게 하루 6∼7갑씩 담배를 피운다.아침 식사를 하는 경우도 드물다. 이에 대해 포천중문의대 분당차병원 현용호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선거를 의식한 우울증이나 스트레스에 내성이 약해 식사를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면서 “선거에서 이기면 모르지만 질 경우 심각한 질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말했다. 윤상돈 조덕현기자 hyoun@
  • 제15대 광복회장 장철씨 오늘 취임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 후임으로 지난 13일 선출된 장 철(張鐵·사진·80) 제15대 광복회장내정자가 1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취임식을 갖는다.평북 의주 출신인 장 신임회장은 해방전 중국 시안(西安)에서 광복군 소위로 임관,독립 운동에 투신한 뒤 해방후 사단 감찰부장과 참모장,육군본부 인사참모부 특수과장 등을 거쳐 지난 68년 예편했다.
  • 3대 공군가족… 최준영 이등병 화제

    3대에 걸친 공군 가족이 탄생했다. 1일 경남 진주 공군교육사령부에서 신병교육을 수료하는 최준영(崔俊英·20) 훈련병의 가족이 주인공이다. 할아버지 최윤창(崔允昌·76)옹은 1949년 6월 공군 병4기생으로 입대한 창설요원이다.최옹은 6·25전쟁이 터진 뒤 사천비행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딛고 보급 임무 등을 완수,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아버지 상훈(相勳·50)씨는 지난 72년 부사관후보생 제62기로 임관, 10년 동안 광주기지 통신대대에서 무선 부사관으로 근무한 뒤 지금은 통신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최 훈련병은 전남대 컴퓨터공학과 2학년을 마치고 아버지의 권유로 공군에 입대,5주간 기본 군사훈련을 마치고 이병 계급장을 단다.최 훈련병은 31일 “할아버지와아버지가 보여준 ‘공군사랑’을 마음에 새겨 유능한 일꾼이 되겠다.”고 말했다. 한편 소식을 전해들은 김대욱(金大郁) 공군참모총장은 공군의 산 증인인 최 옹에게 기념품과 함께 감사 편지를 보내고 “공군을 아끼는 대선배의 뜻을 이어받아 손자를 건강하게 돌보겠다.”고 다짐했다. 김경운기자
  • 선택 6.13/ 브레이크 없는 ‘사이버 테러’

    최근 충북지사 선거전은 대학교수가 저지른 ‘사이버테러’로 후끈 달아올랐다.이 지역 C대학의 J교수가 자민련구천서(具天書) 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구 후보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올린 사건으로 구 후보측과 한나라당 이원종(李元鐘) 후보측이 연일 격렬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J교수는 지난 21일부터 27일까지 동료 2명과 함께 대전지역의 PC방을 돌며 구 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60여차례 인터넷에 올리다 경찰에 붙잡혔다. 구 후보측은 “J씨가 지난 98년 지방선거 때 이 후보 참모로 일했고,이후 이 후보가 이사장인 C대학에 교수로 임용됐다.”며 ‘이원종 배후설’을 제기했다.J씨와 이 후보측의 전면 부인에도 불구하고 자민련은 30일 중앙당 차원까지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이같은 사이버테러는 네티즌 2000만명시대를 맞아 혼탁선거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인터넷의 특성상 신원이 쉽게 노출되지 않는데다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효과적인 흑색선전을 벌일 수 있는 점이 사이버선거테러를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신원노출을 피할 목적으로 J씨처럼 PC방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비방전을 벌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일부 후보들은 상대후보 비방을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돈다. 사이버비방전은 그 익명성 때문에 오프라인에서보다 훨씬 노골적이고 저급한 내용이 특징이다.“A후보는 유부녀와놀아나 가정을 파괴시킨 파렴치한”(I군청 홈페이지),“B군수가 티켓다방 아가씨와 성관계를 갖고 아이를 낳았다.”(P군청 홈페이지)는 등 여자관계에서부터 축재·탈루·병역비리 의혹 등이 갖은 욕설과 함께 인터넷을 휘젓고 있다. 중앙선관위가 올들어 이달 중순까지 적발한 사이버상의선거법 위반행위는 모두 948건.6·13지방선거와 관련해 검찰에 입건된 사이버선거사범만도 29명으로,이들 중 4명이 구속됐다. 이들 적발건수는 그러나 실제 사이버테러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검경과 별도로 400명의 사이버검색반을 가동하고 있으나 추적이 쉽지 않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진경호기자 jade@
  • 부부 군인 450쌍 육군 399쌍으로 최다

    우리나라 ‘부부 군인’의 수는 얼마나 될까. 29일 군에 따르면 모두 450쌍 900명이 복무중인 것으로조사됐다.이 가운데 남편과 아내가 모두 육군인 경우가 399쌍이고,나머지 51쌍은 부부 중 한명은 육군이지만 다른한병은 해·공군,해병대 등이었다. 또 부부 군인 가운데 장교 부부는 318쌍,부사관 부부가 77쌍,장교와 부사관의 결합이 55쌍이었다. 김판규(金判圭) 육군참모총장은 지난 28일 이들 부부 군인 76쌍을 충남 계룡대로 초청,오찬을 함께 하며 격려했다.특히 이 자리에는 김훈경 공군 대위 조항옥 육군 중사,김상무 공군 상사 유정아 육군 중사,엄기훈 해군 하사 김정육군 중사 부부 등이 참석,육·해·공 3군 군복이 한데 어울려 눈길을 끌었다. 김경운기자kkwoon@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7)불꽃튀는 러,日 첩보전

    러시아 문서보관소 서고속에 묻혀있다 100년만에 햇빛을본 제정 러시아시대의 비밀문서중에는 군사첩보와 관련된전문이나 보고서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제국과 만주에서의 주도권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은 외교라인과 군부를 총동원,첩보전을 전개한 것이다.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연해주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을 첩보요원으로 활용하는 이점이 있었다.러시아의 대일(對日) 첩보전은 러·일전쟁(1904∼1905)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첨예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 이후 일본군의 동향 관찰과 대한제국군의 개편 상황을 감지하기 위한 상주 군사첩보원의 필요성이 긴박해지고 있다.이 비밀첩보 임무로 제2시베리아 보병사단 포병여단의 비류코프 대위를 일본주재 군사무관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보내기로 되어 있다.비류코프는 10년간 대한제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1906년 2월13일 러시아군 총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보낸 공문) 비류코프가 군사무관 사모일오프의 부관으로 부임하게 되면 일본이 바로 의심하게 되어 첩보활동이 어렵게 될 것이다.(1906년 7월14일 도쿄주재 바흐메티예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두 건의 비밀문서에 등장하는 비류코프는 대표적인 군사첩보원이었다.1907년 그가 서울로 오자 당시 서울주재 총영사였던 플란손은 이토(伊藤博文) 통감에게 “서울에서러시아학교교사로 일하던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에 소집돼 근무했으며 포츠머스 평화회담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돼 정들었던 서울에 다시 와 교사직을 알아보려고 왔다.”고 소개했다.이토는 비류코프에게 동정적으로 대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류코프는 서울의 러시아학교 교사 신분으로 국내에서 10년동안 암약하면서 알게된 한인학생 10여명을 러시아의하사관학교 등에 국비유학생으로 입교시켰고 전쟁이 나자소집해 예하의 비밀첩보원으로 활용했다.이후 1911년까지4년동안 원산주재 영사로 근무하면서 첩보수집활동을 했다.그는 1904년 1월 “한국어를 말하고 한복으로 변장한 일본인은 전쟁이 나면 러시아군을 감시할 것이며 또 통역이나 안내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청할 수 있다.일본인은 용모 등이 한인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그러나 걷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한인은 성큼성큼 걷는 반면 일본인은 촘촘히 걷는다.”는 첩보를 공사관에 올릴 정도로 한국과 한국인에 정통했다.또 러시아군이 만주와남우수리지방에서 대한제국으로 진격할 수 있는 3개의 길과 그에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생도 출신들의 첩보활동에 대해 “생도들은 고종황제와 조국을 위해 열심히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한군과 강군은 나와 함께 활동하고 있고 이군은 북청에서,현군은 노보키예프스크,구군은 경성(鏡城)에서 각각 정찰임무를 맡고 있다.”고 1904년 10월19일 보고했다. 서울 불어학교교사로 고종의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러시아 극동총독부에 알렸던 프랑스인 마르텔과 프랑스 신문‘저널’지의 도쿄특파원 발레,블라디보스토크주재 프랑스상무관 플라르 등 프랑스인들이 러시아의 비밀첩보원으로활약했던 사실도 흥미롭다. 발레가 페테르부르크에 왔다.그는 전쟁중의 일본의 정세에 관해 흥미있는 정보를 러시아에 전해 주었으며 이제 외무부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1905년 5월22일외무부에서 육군장관에게).발레의 정보제공 제의는 수락되었다.정보비로 그에게 매월 600루블이 책정되었다.(1905년 6월15일 육군장관이 외무장관에게). 러시아는 일본과의 첩보전에서 대단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첩보의 통로인 우편 및 전신시설과 전달수단인 철도등 교통시설을 일본이 선점,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 니콜라이2세가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서울주재 파블로프 대리공사의 보고서가 늦게 상신되는 이유가무엇이냐.”고 묻자 람즈도르프는 “파블로프의 보고는 비밀스런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일반 우편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믿을 만한 기회(인편)나 아니면 가끔 대한제국 항구에입항하는 러시아 선박을 통해 발송해 오기 때문”이라고해명하기도 했다.다음 문건은 러시아측의 애로사항을 잘보여준다. 고종황제가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외무부와의 연락용 암호 통신문이 궁정(덕수궁)화재로소실됐다.혹시 일본이 훔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1904년 5월16일 서울주재 파블로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서울에서 파블로프 공사가 보낸 전문을 받았지만 내용이훼손돼 읽을 수가 없다.일본전신국이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비밀전문을 파손시켜 배달하고 있으며 이는 우연한 왜곡이라고 볼 수 없다.일본은 통신문을 제때에 배달도 하지않는다.모든 우편,전신국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일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제국과의 교신도 불가능하다.배달과정에서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손상시켜 놓은 몇통의 전보문을 첨부한다(1903년 12월7일 일본 나가사키 주재 가가린영사가 도쿄주재 공사에게 보낸 보고문) 대한제국의 우편시설을 장악한 일본이 서울의 러시아공사관에서 보내는 외교행낭을 손상시키거나 배달을 지연시키는 일이 잦아지자 러시아는 임시방편으로 제물포에서 상하이노선을 운항중인 동청철도(東靑鐵道) 소속 여객선을 이용해 외교문서를 발송하고 수신하기도 했다.2주에 1회 왕복운항하는 이 여객선도 비밀문서 수발에는 지장이 많았다.두만강 인접 도시 노보키옙스크지역과 한국간의 전신선을 육상으로 연결하려고 계획했으나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실패했다.러·일전쟁 이후 한-러간의 통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저선을 통했다.러·일전쟁의승패는 통신을 장악한 일본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앞으로 러·일간에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대한제국에서 러·일은 사활을 건 혈전을 벌일 것이며 영국이 가담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대한제국이 전쟁터가 될 경우 러시아의 남우수리지방은 후방작전 기지가 될 것이다.일본의 병력을 고려할 때 러시아는 10만명이상의 병력과 2만명분 이상의 식량을 확보,비축해야 한다.연해주,아무르주,자바이칼주에는 1년간 공급할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일본군의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1899년 3월9일 알프탄 대령이 ‘러·일충돌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작성,보고한 문서) 이 보고서는 4년후 러·일전쟁 발발을 이미 예측하는 등러시아측 정보의 정확성과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이후 육군장관에 오르는 사하로프 중장이 1902년에 작성한 보고서도 일본 수비대의 주둔지와 규모,철도 및 전신성 공사 현황,저탄장,거주자들의 취득부동산 등 세세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보고하고 있다. 무기도입 및 밀수와 관련된 첩보도 자주 등장한다.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유해 만주로 무기를 밀수출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이 고물 함정을 거액에 대한제국에 팔았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일본은 사용하지 않는 구형 총기를 만주로 수출하고 있다.어느 지방을 통해 어디로 보내고 있는지 추적하라.청국에무기를 공급해 주는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이 청국의 여러 성(省)에 18만정의 구식 소총을 매입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1902년 3월29일 하바로프스크의 그로드스키 장군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비밀전문) 주한공사관 쉬테인 공사의 보고에 의하면 미쓰비시사는 8문의 함포가 장착되고 200명의 해군을 태울 수 있는 순양함을 대한제국 정부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1903년 2월3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도쿄주재 이즈볼스키 공사에게 보낸 전문). 순양함은 오는 4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때 축포를 발사할 목적으로 석탄선을 개조해 함포만 탑재시킨 것으로 외형만 해군함정으로 보일 뿐이라고 한다.일본의 고무라(小村) 외무상은 고종황제의 순양함 도입계획이 일본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같은해 2월9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전문) 모스크바와 서울,도쿄를 오간 이들 비밀전문을 보면 순양함을 도입하려던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국제무기거래 사기극에 속은 것을 알 수 있다.당시 자료에 따르면 이 순양함의 가격은 55만엔이었고 3년 분할상환 조건이었다.대구경 대포 4문과 소구경 대포 4문이 장착되고 장교 25명과해군 200명이 승선하게 돼 있었다. 일본의 첩보망도 만만찮았다.1903년 제물포 부영사 팔야오프스키의 서북지역 출장보고서에는 “평양에는 일본의첩보기관이 있다.일본인들은 시내의 모든 약국을 운영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고 있다.이곳에는 약 3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지방행정권은 일본영사의 수중에 있다.”고 보고하는 등 일본첩보조직의 촉수가 대한제국의 정부는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뻗어있음을 알리고 있다.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에는 비밀첩보과가 있다.그 과에는일본인,청국인,그리고 한인이 암약할 것이다.통감부와 헌병사령부 소속의 밀정만도 약 760명에 이른다.이들의 주요 임무는 의병을 추적하는 것이다.밀정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대부분 기생이다.벌써 많은 의병을 경찰에 밀고하였다.(1909년 10월23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보고서) 새로 발굴된 문서에는 이밖에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일본비밀첩보원으로 활동한 한인 명단(1898년),대한제국내 비밀첩보망 구축안(1905년),흑룡강지방의 조선인 첩보원 명단(1912년) 등도 들어있다. 대한제국을 독식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스파이전쟁에 이용당하거나 희생된 한국사람들의 이름이다. 노주석기자 joo@ ■러 문서에 나타난 대한매일 보도 인용 전 서울 불어학교 교사 마르텔을 비밀첩보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했다.그는 일어에도 능통하다.그에게 첩보임무와개인암호를 주었다.그에게 The Korea Daily News(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제호)를 늘 잘 살피라고 지시했다.(1904년12월4일 중국 상하이에서 파블로프 서울주재 대리공사가그루세스키장군에게 보낸 보고서) 러·일전쟁(1904∼1905)의 패배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러시아는 이후 2∼3년동안은 그동안 심어놓았던 첩보망과 청,일주재 외교라인 등을 통해 극동정세를 그럭저럭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하지만 한일합병시기를 전후해서는 ‘정보부족증’에 걸렸다.그래서인지 1908년 이후에는 국내 언론과 일본 신문 기사를 발췌해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 ‘00년 00일부터 00년 00일까지의 일지’‘대한제국내 폭동에 대한 신문스크랩’ 등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수백건의 정보보고가 그것이다.이중 80% 이상 인용된 신문이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1904년 발간)였다. 서울주재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만주로 건너가 극동지역첩보수집총책임자로 일한 파블로프가 프랑스인 비밀첩보원 마르텔에게 “대한매일신보를 잘 살피라.”고 지시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26일 하얼빈역에서 5명의 한인이 이토에게 권총을 발사,이토는 곧 절명했다.전 고종황제는 식사중에 이 소식을 듣고 수저를 상에 떨어뜨렸다.(1909년 10월28일자).안응칠(안중근의사의 아호)은 항일운동을 하며 이강,유동설 그리고안창호와 비밀연락을 했다.(1909년 10월30일자).오늘 관보에 지난 9월4일 청·일이 간도에 대해 체결한 조약문이 발표됐다.(1909년 11월9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러시아와 중국,그리고 일본인의 간담을서늘하게 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사건을 “고종이 수저를 떨어뜨렸다.”는 촌철살인의 한 문장으로 전달하고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 간도를 청국에 통째로 넘긴일본의 외교술책도 간도협약 체결 기사를 통해 짚어내고있다.무엇보다 대한매일신보의 의병활동 보도는 러시아문서가 인용하고 있는 국내외 신문의 보도를 내용이나 횟수,정확도 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경기도에 군사훈련을 받은 2000명이상의 의병이 집결해 있다.(1908년 2월19일자).대한제국에는 모두 5만명의 의병이 있다고 한다.결정적인 의병소탕을 위해 일본군이 또다시상륙한다고 한다.(1909년 7월29일자).이토가 사살된 이후러시아로 한인이주가 급증하고 있다.(1909년 11월27일). 대한매일신보 1911년 2월15일자와 2월21일자에는 의병장강기동(姜基東)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기사 2건이 실려있다. 지난 2월12일 원산의 한 일본식당에서 의병대장 강기동이체포됐다.(1911년2월15일자)그는 4년동안 경기도에서 의병 200명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강기동은 여객선편으로 서울로 이송된 이후 지금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체포당시 주머니에는 일본돈 2엔 밖에 없었으며 손과 발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1911년2월21일자) 노주석기자
  • 제주도 지방선거 사상 첫 옥중 출마자가 나왔다

    ●제주도 지방선거 사상 첫 옥중 출마자가 나왔다. 주인공은 김기성(金基成·52·무소속·운수업) 후보로 28일 오전 대리인을 통해 서귀포시 선관위에 시의원 후보 등록을 마쳤다. 서귀포시 중문·대천·예래동 선거구에 출마하는 김씨는지난 24일 유권자에게 자신의 지지를 부탁하며 현금 50만원을 준 혐의(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로 구속됐다. 김 후보측은 “유권자들로부터 바른 심판을 받기 위해 후보로 등록했다.”고 말했다. ●후보간 등록 순서를 둘러싼 신경전이 추첨으로 매듭지어졌다. 전남 목포시장 민주당 전태홍(66) 후보와 무소속 오영남(53) 후보는 28일 후보 등록 1시간 전부터 목포선관위에 나와 서로 먼저 등록을 하려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이에 선관위 직원이 추첨으로 등록 순서를 결정하자고 제의,추첨을 통해 전 후보가 먼저 등록하는 기쁨을 누렸다. ●경북 포항시장 후보 등록을 마친 정장식(鄭章植·52·한나라·현 시장)후 보와 박기환(朴基煥·54·무소속·전 시장) 후보는 선거대책본부장 등 참모진과 함께 28일포항시청 기자실에 들러 소신을 밝히는 등 본격 득표활동을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쯤 포항시청 기자실을 찾은 박 후보는 “시장선거는 자치단체를 책임지고 이끌어 갈 ‘우리 자신’을 뽑는 선거”라고 강조했다. 이어 도착한 정 후보는 “기초자치단체장의 선거도 대선과 같은 맥락 등 정권차원에서 실시돼야 한다.”고 역설했다.정 후보는 민선 2기 때 시정을 추진하면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는 일부 비판여론에 대해 “인사,공사입찰 등 각종 청탁을 받아주지 않자 섭섭한 마음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 것 같다.”고 해명했다. ●지난달 뒤늦게 경북 문경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를 자청,출사표를 던졌던 최주영(62) 문경발전연구소 이사장이28일 출마포기를 선언했다.이에 따라 문경시장 선거는 한나라당 신현국 후보와 무소속 박인원 후보와의 양자대결로 치러지게 됐다.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정천석(鄭千錫)씨가 민주당을 탈당,28일 무소속으로 등록했다. 정씨는 이날 “15년 동안 지켜온 민주당을 떠나는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으나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 등을 볼때 민주당 탈당이 동구 주민의 엄중한 명령임을 확인해 탈당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민주당과 정치발전을 위하고 국민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의원직을 사퇴할 것을권고한다.”고 덧붙였다. 98년 지방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동구청장에 출마했던 정씨는 최근까지도 민주당 외길을 걸어온 지조있는 사람임을 내세웠으나 여론조사에서 정당지지율이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자 탈당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6·13지방선거에 현직 단체장이 출마한 자치단체의 공무원들은 선거 결과에 따라 자신의 거취가 바뀔지 몰라 후보등록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정보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경북 경주시의 한 공무원은 “경북도 내 많은 단체장이한나라 당적을 갖고 있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편이지만 이원식 경주시장은 무소속인 데다 일부 유권자는 3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다소 불안하다.”며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승진과 보직 등에 영향을 미쳐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공무원들은 이날부터 부단체장이 시장업무를 대행하는 모습을 보며 “선거가 임박했음이 피부로 느껴진다.”며 착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월드컵 경기장을 사수하라.’ 6·13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전북도지사 후보들과 전주시장 후보들이 전주월드컵 경기장을 유세장 삼아 표심 공략에나선다. 특히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는 선거를 코앞에 둔 6월7일스페인-파라과이전과 10일 포르투갈-폴란드전 등 2경기의예선이 벌어진다. 이 때문에 후보들은 4만여명이 입장하는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유세할 계획을 짜고 있다. 전주시장 후보인 김완주(민주)·김현종(무소속) 후보는각각 경기가 열리는 7일과 10일 경기장에서 얼굴 알리기를 통해 지지율을 끌어 올릴 예정이다. 이 때문에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축구 열기 못지않게 각 후보들의 보이지 않는 열띤 경쟁으로 후끈 달아오를 전망이다. ●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안동과 영주의 현역 단체장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3선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느냐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이 지역은 안동과 영주시,봉화·의성군 등 4개 지역 단체장들이 3선을 겨냥했으나 이 중 엄태항 봉화군수는 일찌감치 출마를 포기했으며,정해걸 의성군수는 3선이 무난할 것이라는 지역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동호 안동시장과 김진영 영주시장의 경우 지난 선거 때까지 무소속으로 출마해 별다른 경쟁자 없이 무난히 2선에 성공했으나,이번 선거는 한나라당 후보의 강력한 도전으로 최근까지여론조사에서 박빙의 리드 또는 열세로 밝혀져 3선을 낙관만은 할 수 없는 상태. 더욱이 ‘3선 불가’라는 지역정서가 일부 주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고,‘한나라당 바람’이 미치는 영향 등을 감안할 때 이번 선거에서 두 시장의 3선 달성이 만만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일부의 분석도 있어 선거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특별취재반
  • 대구·광주공항 ‘월드컵 폐쇄’

    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리는 기간(5월31일∼6월30일)에 대구와 광주 공항이 잠정폐쇄된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27일 “전국 17개 지역공항 가운데 월드컵경기장과 가까운 공항 2곳을 폐쇄한다.”면서 “대구·광주 공항의 항공로가 군의 대테러 공중작전 반경에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월드컵기간 중 군의 공중작전 반경은 서울 상암·수원·인천 문학 등 수도권 3개 경기장 주변이 반경 3NM(5.4㎞),고도 1만ft(30㎞)이며 나머지 7개 경기장 주변이 5NM,1.5만ft로 설정됐다. 이 구역에는 휴대용 대공미사일인 미스트랄이 배치돼 접근하는 모든 공중 물체에 대해 경고없이 파괴하도록 했다. 또 전술항공통제반(TACP)의 통제에 따라 경기장 주변 부대에 설치된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인 ‘천마’,대공포인 발칸과 오리콘이 자동 발사된다. 따라서 경기장과 인접한 대구와 광주 공항에서는 항공기를 일절 운항할 수 없게 된다. 김경운기자 kkwoon@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6)러와 淸,日 3국 국경분쟁

    한국과 러시아,중국 3국의 두만강쪽 국경은 1860년 당시러시아와 청 두 나라가 맺은 베이징조약에 의해 일방적으로 획정지어졌다.당시 청의 속국으로 여겨졌던 조선은 협정대상에서 아예 배제됐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은 유럽국가인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1861년 8월1일 청,러 양국이 동부국경 최남단을 뜻하는 국경표지인 토자비(土字碑·러시아측은 이 비석을 세운 러시아군 장교의 이름 첫자를 따 T자비라고 불렀다.)를 두만강 연안에 세울 때까지 조선은 이같은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베이징조약의 영토조항인 제1조에 의해 러시아는 서북쪽으로는 아무르강,동쪽으로는 타타르스키해협과 동해를,남서쪽으로는 두만강하류에 이르는 이른바 연해주땅을 통째로 집어삼켰다.이 지역에는 원나라때부터 여진으로 불려왔던 말갈족과 고구려인,돌궐인,위구르인,거란인 등이 살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古土)였다.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1872년 러시아 극동함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극동노령의 최동남단이며 조선국경과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 극동함대의 기항이 됐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한·러관계에 엄청난 파장을 예고한다. 러시아군이 마적단과 청국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대한제국의 북방 국경선 인접지까지 접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대한제국과 청국의 국경선은 세계 각국의 지도(독일판,영국판,대한제국판)에서 동북방면으로는 두만강,서북방면으로는 혜산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그러므로 두만강과 혜산산맥을 중립지대로 보는 의견이 있다.러시아군이 부지불식간에 대한제국 북방 국경선을 침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한·청 국경선이 정확히 어디인지 밝혀주길 바란다.(1901년 4월 육군장관 쿠로파트킨이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보낸 통신문) 외무부가 갖고 있는 자료에는 대한제국과 청국의 국경 경계는 항상 두만강으로 인정되어 왔다.현재 한인 스스로도 간도(間島)를 청국영토로 인정하고 있다.1894년까지 효력이있던 조·청조약에서도 두만강 좌안지대에서 혜산산맥까지는 중립지대로 인정되어 이곳에 조·청 양국인의 거주가 금지되었다.청·일전쟁이후 한인들이 이곳 두만강 좌안에 무단 이주,점거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국영토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1901년 10월4일 외무장관이 육군장관에게 보낸 회신) 이 회신은 조선과 청국의 국경선은 두만강이라는 러시아측의 공식입장을 담고 있다.러시아측 해석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해당사국의 해석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역사적으로 보면 간도에는 오래전부터 한인이 거주했던 사실은 확실하지만 한인들의두만강 도강을 금한 법을 제정한 1870년까지 간도지방에는극소수의 한인이 살았다.1870년 이후 한인 농민들의 이주가 시작됐고 얼마 뒤 산동지방에서 청국인들이 건너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청 국경은 두만강이며 간도는 청국의 땅이었을까.여기에서 우리는 두만강쪽 한·청 국경과 관련된 케케묵은 논란에 다시 휩싸이게 된다. 926년 발해의 멸망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 상태였던 2만1000㎢의 더넓은 간도들판(길림성 연변자치주지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1710년(숙종36년) 청국은 간도지방에서 일어난 한인에 의한 청국인 살해사건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압록강의 서북은 중국,동남은 조선땅이다.그리고 토문강 서남은 조선,동북은 중국의 영토이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1712년 양국은 백두산 정상에서 가까운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후의 쟁점은 토문강(土們江)의 실체에 관한 문제에 모아졌다.토문강이 도문강(圖們江)이라고도 불린 두만강의 별칭이냐,아니면 전혀 별개의 강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맞섰다.대한제국이 개국선포(1897년)와 함께 청의 연호를 버리면서 청과 조선의 관계는 끊어졌다.이때부터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류(別流)의 강’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러시아도 남만주를 차지한 1895년 이전에는 간도를 한국땅으로 여기고 있었다.실제 러시아측 자료에도 ‘토문강은 압록강에서 송화강으로 흐르는 지류’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앗아간 일본은 간도에 임시파출소를 설치한 뒤 ‘간도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한국의 영토’라고 인정했으나 1909년 태도를 돌변,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해버렸다.청·일협약의 결과 일본은 남만주철도부설권을얻는 대신 청에 간도의 소유권을 넘겼다. 청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유권을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조선은 일본의 만주진출이라는정치적 협상에 다시 한번 희생됐다.러시아와 청,일 3국은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의 나라 국경을 마음대로 긋고 바꾼 것이다. 대한제국과 만주 남방 국경선의 획정에 관해 러시아에서 지도를 다시 제작한다면 한·청 국경선의 중요성에 비춰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러시아 지도에는 국경선이 혜산산맥을 따라 표시돼 있다.실제적으로 한·청 두 나라의 경계는1710년에 형성됐었다.두만강하구에서 백두산까지이다.1897년 대한제국이 청국에서 독립하면서 두만강 좌안을 소유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한·청 국경선으로 다시 이전의 국경선을 인정하고 말았다.(1901년 3월11일 서울주재군사무관스트렐비스키 대령이 참모본부에 올린 보고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파블로프도 1901년 “압록강과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한인과 청국인에 관해 합의한 한·청국경조약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 좌안에 거주하는 한인은 세금을 청국정부에 냈고 우안에 사는 청국인은 세금을 대한제국에 냈다.”라고 외무부에 보고하고 있다.실제 우안에 사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던 점으로 미뤄 이때부터 청의 간도에 대한 기득권이 인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이 두만강 국경선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일본은 두만강 좌안(간도)은 이전에 조선영토였으며 현재 청국 영토라고 하더라도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두만강좌·우안 모두를 법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그런데 국방부는 두만강이 오래전부터 한·청 국경선이라는 통지를 1904년 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에게서 받은 바 있다.(1905년 10월6일 극동제1군 총사령관 리네비치가 참모총장에게 보낸 보고서) 또 1908년 3월 서울 총영사관에서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청국과 대한제국이 간도소유문제로 분쟁을 빚고 있다.일본군 사이토 대좌의 정보에 따르면 간도에는 한인촌 529곳이 형성돼 있으며 이곳에 7만2076명이 살고 있다.청국인은 209곳에 2만2983명이 살고 있다.한인이 압도적으로 많다.간도의 영토는 넓이가 50마일,길이가 75마일이다.이곳은 형식적으로 청국영토에 속해 있으며 토지의 절반이상을 청국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은 임대를 한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청국,그리고 압록강변 및 간도로 이주하도록 부추기고 있다.일본은 이 지역 4곳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일본 국민으로서의 조선인 이주자들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킨다.…일본의 의도를 뒤늦게 파악한 청국이 조선인들을추방하기에 이르렀다.일본측 통계에 의하면 1910년 한해동안 약 10만명의 조선인이 이주해왔고 전체 이주자는 20만명을 넘는다.청국이 조선인을 추방하려하자 일본은 조선에 사는 4만명의 화교를 추방하겠다고 맞대응했다.현재 이 문제로 청·일 양국이 협상중이다.(1910년 12월16일 소모프 총영사의 외무부 비밀 지급전보) 청,일두나라의 국경분쟁을 지켜보는 러시아측의 이해관계는 가능하면 간도가 청국영토로 남아있기를 희망했다.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귀속된다면 일본이 간도를 전략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더욱이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가 점령당할 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국경방위의 약화를 우려한 것이다. 두만강 국경선 분쟁은 당초 조선과 청국의 직접 분쟁에서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한 일본과 만주지역을 차지한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변질됐다.일본은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로의 접근로를확보하려고 한 반면 러시아는 청국의 손을 들어줘 일본과직접 맞대지 않는 완충지대를 유지하려했다.정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 문제는 결국 1985년 구 소련의 외무장관 그로미코와 북한 김영남 외무상간에 조·소국경조약 체결로 일단락됐다. 100년전 살길을 찾아 두만강 건너편 간도땅으로 건너갔던한인들이 지금은 중국동포가 되어 한국으로 되찾아 오고 있지만 당시 러,청,일 3국의 이해득실에 의해 타율적으로 상실했던 ‘토문강 서남쪽’간도땅을 되찾을 기약은 없다. 노주석기자 joo@ ■용암포 개항사건의 진실 러,일,청 3국이 두만강변에서 끊임없이 국경분쟁을 벌인까닭이 간도(間島)의 소유권에 대한 다툼이었다면 1903년러시아가 압록강변의 벌목 목재 집산지 용암포를 독점점유하면서 불거진 용암포개항 사건은 압록강유역에 대한 3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또 다른 국경분쟁이었다. 용암포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압록강 산림이권 독점에 대한 영국,일본,미국 등 열강의 견제였지만 실제로는만주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의 압록강 국경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산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강했다.러시아는 한때 용암포를 기점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한·만국경1300㎞에 만리장성과 견줄 만한 방책선을 두른 뒤 요새를구축하려는 야심찬 계획도 추진했었기 때문이다. 여순에서 개최된 특별회의의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대한제국 정부의 압록강 개항승낙이 일본과의 개전사유는 될 수 없다.한국과 일본정부에 각각 압록강 개항은 러시아의 이해관계에 적대적인 행위임을 경고해야 한다.개항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의 항의는 공격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된다.(1903년 7월18일 여순에서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이 외무부에보낸 통신문) 러시아 극동총독부가 옮겨와 있던 여순에서 열린 이 특별회의는 용암포문제에 대한 러시아측의 종합적인 입장정리란 측면에서 중요하다.용암포의 개항을 최대한 저지시키되 전쟁으로까지 발전되는 극단의 경우는 피하겠다는 것이다.이회의에는 쿠로파트킨 육군장관,레사르 북경주재 공사,파블로프 서울주재 공사,알렉세예프 극동총독,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회 회장,플란손 극동총독 외교담당관 등 러시아극동정책의 수뇌부가 총출동했다. 당시 압록강 산림벌목이권을 놓고 러시아 내부는 두갈래로 나눠져 있었다.비테 재무장관,쿠로파트킨 육군장관,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은 극동지역의 러시아군 전력의 열세를 들어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쪽이었다.하지만 베조브라조프,아바자 해군제독,플레베 내무장관,알렉세예프 극동총독,파블로프 서울주재 공사 등은 양보는 양보를 낳아 결국 만주지역에서의 영향력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며 적극 정책을 주장했다.니콜라이2세도 이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개전의 결정적인 빌미가 된 용암포사건은 영국 극동함대의 거문도점령 사건(1885년)과 함께 한반도에 열강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계적인 사건이었다.용암포의 개항은 곧 만주에 대한 개항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러시아는용암포를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으나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대한제국정부의 일방적인 한·러조약 및 이권취소로 인해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대리 퐁트네 자작의 서신에 의하면 고종은 서울주재 영국과 일본대표들로부터 조약의 폐기선언을 하도록 3개월동안 강요받았다.고종이 반대하면 폐위시키거나 시해할 수도 있는 강압적 상황이었다.고종은 강요에 못이겨 선언한 조약파기 칙령은 기회가 오는 대로 철회하겠다는 말을 러시아에 전해 달라고 말했다.(1904년 상하이주재부영사 클레이메노프가 외무부에보낸 비밀전문) 결과적으로 용암포사건은 일본과의 전쟁은 피하되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영향력은 유지하려 한 러시아의 유약한 전략이 노출된 사건이었으며 1년후 발발한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그동안 개척한 모든 성과는 물거품이 되었다. 노주석기자
  • 해병사령관 평일골프 물의

    월드컵을 앞두고 전군이 비상 경계태세에 들어간 가운데이철우(李哲雨) 해병대 사령관이 평일 휴가 기간중에 민간인들과 골프를 친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이 사령관은 23일 오전 11시30분쯤부터 경기도 평택 해군 소유 골프장에서 친분이 있는 김모씨와 예비역 가족 등으로 2개팀을 구성,골프를 쳤다. 특히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 사령관 일행은 수만원대의 내기 골프를 친 것으로 전해졌다.이 사령관은 골프를 마친뒤 근처 음식점에서 술자리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해병대 사령부는 “이 사령관은 이날부터 27일까지 외박(휴가) 기간이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사령부와 인접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으나 돈내기를 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사령관은 휴가기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24일 오전에는 사령부로 출근해 합동참모본부 의장이주재하는 화상회의에 참석,오로지 골프를 치기 위해 휴가를 다녀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 사령관의 이같은 행동은 지난 3월 해병 2사단의 무기고 피탈 사건과 4월 사병의 분신사고 등 잇따른 해병대 군기사고와 맞물려 군 안팎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경운기자 kkwoon@
  • ‘12·12’반대 장성등 78명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79년 12·12사건 때 군사반란을 막으려다 총상을 입고 80년 강제퇴역을 당한 하소곤(河小坤)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육군소장) 등 78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제43차 본회의에서 신청사건 106건을 심의한 결과 이중 84건,78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로써 위원회를 통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한 건수는 모두 4320건으로 늘어났다. 김용수기자 dragon@
  • [帝政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5)시베리아철도의 한반도 연결

    지난 7월15일자 고종의 칙령으로 미국과 프랑스회사가 서울∼제물포,서울∼의주간 철도를 각각 부설키로 하면서 철도의 궤도(레일)폭을 유럽형인 4.5피트(약 133㎝)로 결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러시아는 동청철도(만주횡단철도)건설시 러시아철도와 같은 5피트(약 150㎝) 궤도폭을 시설하기로 확정했고 조선은 아직 철도건설을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고종의 칙령을 변경하여 러시아의 만주노선과 동일한궤도폭으로 건설하도록 조선정부에 강력히 요청하라.(1896년 11월10일 재무장관 비테가 외무부 총관리관 쉬이쉬킨에게 보낸 공문서) 이 문서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만주횡단철도(TMR)를 한반도와 연결하는 작업이 100년 전 제정러시아시대에 이미 추진됐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러시아가 눈독을 들인 노선은 경의선(서울∼의주)과 경원선(서울∼원산),그리고 경인선(서울∼제물포)이었다.경의선은 만주횡단철도와,경원선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을 꾀했던 것이다.동일한 궤도폭을 유지한다는 것은 언제라도 철로를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때문이다. ***경의선 日서 부설권 사들여 경의선은 프랑스가 경인선은 미국이 1896년에 부설권을따냈으나 일본이 부설권을 재매입해 1901년과 1906년에 각각 완공시켰다.러시아는 경의선의 경우 프랑스를 대리국으로 내세워 실질적인 관리권을 유지하면서 시베리아철도와의 연계를 꿈꾸었지만 러·일전쟁(1904∼1905)의 패배로눈물을 머금고 일본에 권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러시아는 미국측으로부터 경인선,독일로부터는 경원선(서울∼원산) 부설권을 각각 재매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기도 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장장 9334km를 운행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통열차로 1891년 총공사비 10억루블을 들여 착공,1901년에 만주횡단노선이,1904년에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노선이 각각 개통됐다. 미국 모르스회사(경인선철도부설권 소유회사)의 대표가 찾아와 일본인과 어떤 약속도 없었으므로 경인선철도회사를러시아에 판매하는 것에 대해 협의할 준비가 돼있으며 철도궤도폭을 비롯, 러시아의 주문에 따라 공사를 끝내는 원칙적인 합의를 하자고 했다.(1897년 12월9일 서울주재 대리공사 스페이예르가 외무부에 보낸 전문). 비테 재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스페이예르는 조선정부에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모르스사와의 협의를 구체적으로 진행시켰다.1898년 1월31일자 비밀전문에서 스페이예르는 “모르스사의 대리인은 주식을 비밀리에 매입하든지 아니면일본은행에서 빌린 채무액의 일부라도 상환해주면 일본의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모르스사는 이미 설치가 끝난 노면은 150만 달러에 러시아에 양보할 수있으며 선로폭 조정은 최소한 주식을 매입한 뒤에 가능하다고 한다.”고 보고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한반도연결에 관한 문서중 남아있는가장 오래된 문서는 서울주재 초대대리공사였던 베베르가1896년 6월22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이다.베베르는 이 전문에서 “조선의 철도궤도폭을 러시아와 같은 5피트로 하도록 조언하려고 한다.”고 보고했다. 베베르가 보고한 당시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한 아관파천(1896년 2월11일∼1897년2월20일)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베베르의 입김은 조선정부의 정책수립 및 추진에 있어 절대적이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비테 재무장관은 “러시아는지금 시베리아철도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자금여력이 없다.”고 회답했다.이 때문에 당초 5피트로 설계됐던 모든 철도의 궤도폭은 유럽식을 따르게 됐다. 독일인 외교 및 세관업무 고문 묄렌도르프의 ‘조선철도에 관한 수기’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의견을피력하고 있다.묄렌도르프는 1882년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통리아문의 참의와 협판을 역임했다.외무협판으로재직중이던 1885년 친러파로 몰려 쫓겨났다. 조선철도건설문제는 1882년에 제기되었다.조선정부에 철도부설이권을 여러나라가 요청했으며 그중에는 영국과 일본이 들어있었다.조선정부는 철도건설자금이 없어 연기할 수 밖에 없었으나 철도문제와 더불어 광산 및 탄광이권이 또다시 1885년과 1895년에 제기되었다.따라서 한 미국인 회사와 철도건설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서울∼제물포 ▲서울∼평양∼의주 ▲서울∼부산▲평양∼두만강 ▲서울∼부산∼남·서해안철도 ▲서울∼부산∼동부해안철도 ▲서울∼원산선 등이다. 묄렌도르프는 수기에서 미국회사는 이 노선 전체를 순차적으로 건설하며 15년동안의 운영권 소유를 제의했다고 밝혔다.또 조선정부에 투자금에 대한 연간 순이익 5%의 보장을 요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묄렌도르프는 이 문제를 일본,청,영국,미국,러시아 등 열강의 이해관계 및 역량 등을 감안,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일본이 경부선철도이권을 획득하려는 의도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장이다.청국은 조선에서의 역할이 끝났으므로청국에 이권을 제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서는 안된다.영국은 조선과 통상관계가 없으므로 이권을 주면 조선에영향력을 행사할 빌미만 제공하게된다.미국은 조선에 정치적인 위험이 적으며 자본을 쉽게 유치할 수 있다.러시아는 조선철도건설에 관심이 없으나 조선항구는 부동항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조선철도에 러시아철도를 연결하면 조선 남부의 항구중 하나는 시베리아철도의 종착역으로일본과 청국의 화물 및 여객을 수송할 수 있어 동부아시아 해안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1896년 묄렌도르프의 조선철도부설에 관한 수기중에서) ***러, 경원선 부설권 부정적 묄렌도르프는 시베리아철도연결에 대한 러시아측의 이해관계를 쪽집게처럼 짚어냈다.당시 러시아의 주관심은 경의선부설권이었다.경의선부설권은 1896년 프랑스회사에 주어졌지만 러시아는 실질적인 관리권을 쥐고 있었다.러시아는 경의선을 시베리아철도의 지선으로 만주를 횡단하는 동청철도(지금의 중국 장춘철도·TMR)와 연결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이다.하지만 러시아의 문제는 자금부족에 있었다. 러시아에서 서울까지 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은 자금이 부족해 불가능하다.서울∼의주간의 전신선 가설사업은 지난 여름에 착공되었으며 최근에는 서울∼원산간 전신선 가설이완료되었다.원산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전신선 연결은 한국인 가설기사와 시설자금부족으로 어려움이 많다.(1897년 5월22일 군사교관단장 푸차타 대령의 보고서) 경원선부설권 획득방안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도 등장한다.“서울∼원산간 경원선철도부설권을 가진 독일 마이어사의 직원이 부설권을 러시아가 매입하기를 제안했다.”는파블로프의 1900년 4월13일 보고에 대해 외무부는 “러시아가 원했으면 철도부설이권을 받을 수 있었다.현재 러시아에는 그런 이권이 필요치 않다.더 이상 협의치 말라.”는 회신을 보냈다. 또 독일이 경원선부설이권 획득을 꾀하고 있다는 서울주재 군사무관 스트렐비스키 대령이 참모본부에 보낸 1898년 8월18일자 보고에 대해 육군장관 쿠로파트킨은 “독일의경원선 철도건설은 러시아 군부의 이해와 무관하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이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한 기업이 서울∼의주간 철도부설공사를 시행할 수 있게 한다는방침을 정했다.따라서 이 철도이권의 소유자인 프랑스인라페이에르와 대한제국정부간에 체결한 경의선부설계약서를 확인하는 즉시 이 철도부설권을 담보로 1200만프랑을대한제국정부에 대출하며 그 대가로 러시아는 철도회사의관할권을 보장받는 것이 골자이다.서울주재 프랑스공사는지원을 약속했다.(1903년 7월23일 서울에서 파블로프 대리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전문) ***경부선 개통땐 韓·日 무역증진 실제 대한제국정부와 프랑스인 라페이에르는 경의선부설소요자금과 관련,1903년 8월4일 시설자금 1250만프랑을 프랑스은행에서 차관을 받도록 알선하고 차관의 담보물은 경의선노선에 속하는 재산,토지,수입금 그리고 평양지방의모든 탄광으로 했다.하지만 러시아의 골칫거리는 철도의보호였다.러시아 정부는 1903년 7월28일 파블로프에게 보낸 비밀전문에서 “대한제국 북부에서의 철도건설은 러시아의 국익에 부응하지만 이 철도의 보호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일본인의 수중에 넘어가는 상황에 빠지지 않겠는가.”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일본은 3319만엔이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입해 1905년1월 경부선(서울∼부산)을 개통시켰다.경부선의 의미에 대한 러시아측 분석도 흥미롭다. 경부선철도는 세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앞으로 언제가는 동청철도및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1900년 9월2일 군사무관 스트렐비스키가 참모본부에 보낸 보고서). 경부선이 개통되면 한·일간 무역이 증진될 것이다.현재시모노세키(下關)에서 서울까지 화물을 운송하려면 2∼5일이 걸리지만 경부선철도를 이용하면 20시간이면 가능하게되며 또 경부선을 연장하여 시베리아철도나 동청철도와 연결하면 경부선은 동서의 수송로가 될 것이다.일본에서 유럽까지 28∼45일 걸리는 운송기간이 17∼22일로 단축될 것이다.(1901년 1월29일 육군장관 쿠로파트킨이 황제에게 보낸 상주서) 러시아측 비밀문서들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한반도의철도부설이권을 놓고 러시아,일본,미국,영국,프랑스,독일등 열강이 벌인 부설권 쟁탈전의 전모를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다.자체 건설자금 없이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철도를건설하려 했기에 벌어진 사단이었다.마치 경부고속철의 건설을 놓고 프랑스의 테제베,독일의 이체,일본의 신칸센이벌였던 경쟁의 원판(原版)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한반도를 시베리아,만주와 철도로 연결하는 방안이 당시 구체적으로 논의된 사실은 흥미롭기에 앞서 섬뜩하기조차 하다.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불과 2년전인 지난 2000년 9월18일 경의선복원공사의 착공과 함께 였다. 노주석기자 joo@ ■고종의 稱帝建元의 속뜻은 고종은 왜 506년동안 이어온 조선(朝鮮)이라는 유서깊은 국호를 버리고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0년)으로 국호를 바꿨을까. 국호변경의 배경에는 새 국호를 통해 자주독립국을 천명하고 풍전등화격인 나라의 부흥을 이루겠다는 복심이 있었다.하지만 사실은 ‘제국(帝國)’이라는 명칭에 집착했던것 같다.‘황제등극’을 원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황제칭호를 바란 데에는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일본 ‘천왕'과의 비교우위와 러시아,청나라와의 동격대우를 노린 대외용이라는 분석도 가능하지만 실은 국내에서의 위상제고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고종의 칭제건원(稱帝建元)문제에 대한 러시아측의 비밀전문 한장은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준다.고종은 대원군이나 대비보다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있음을 만방에 알리고싶었던 것이다. 고종이 황제의 존호를 쓰기로 단호한 결심을 하였다.나는 세계 어느 나라도 고종을 황제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고종에게 칭제건원을 하지 않도록 백방으로 권고했다.그러나 고종은 열강이 황제존호사용을 승인해줄 것으로 기대하진 않지만 대원군과 대비의 음모때문에 황제즉위식을 갖는 것이 부득이하며 영국에 체류하고 있는 대원군의 손자(李埈鎔)를 왕으로 옹립시켜 자신을 퇴위시키려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다고 했다.특히 황제에 즉위하면 백성들의 눈에 자신이 대원군이나 대비보다 상좌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고종은 무엇보다 러시아가 황제존호를 거부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때문에 니콜라이2세 황제가 자신을 황제로 승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호칭인 ‘대군주(大君主)폐하’로 불러주기를 바란다고 했다.(1897년 10월28일 스페이예르 대리공사가 외무부에 띄운 비밀전문) 스페이예르는 또 1897년 10월 20일 무라비요프 외무장관에게 “고종황제의 즉위식이 있은 다음날 정부에서는 앞으로 우리의 국호는 조선이 아니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며여기서 대한(大韓)이란 고대의 3국인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상기하는 큰 왕국을 뜻한다고 밝혔다.국호의 변경목적을 전혀 이해할 수 없으며 대신들도 만족할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 국호의 기원에 대해 다소 비아냥거리는 보고서를 올렸다. 노주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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