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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굿바이 E H 카/데이비드 캐너다인 엮음

    80년대 대학가에서 E H 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만큼 많이 읽힌 사회과학서도 찾기 어렵다. 카가 이 책에서 보여준 역사에 대한 철저한 사회과학적 접근과 역사적 필연성, 진보에 대한 확신, 그리고 역사를 실천해 나가는 인간 주체성에 대한 강조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학생들의 세계관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카 이전의 역사학은 사료 고증을 중시하고 이론과 해석을 멀리한 랑케 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반면 카는 사가의 해석과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주창했으며,‘있었던 일 그대로’만을 추구하는 고루한 역사가들을 ‘상식학파’라고 비판했다. 카가 정의하고 설명한 역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국과 서유럽, 북미 대륙의 대학가에서도 60,7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그 시기에 이루어진 주요 역사학 업적들도 대부분 카가 고무한 것이었다. ●‘인과적 과학 중시’ 카의 역사학 쇠퇴 그러나 70년대 말에 이르면 ‘역사란 무엇인가?’가 선구자 역할을 한 ‘새로운’ 역사학에 위기가 닥친다. 카도 예견하지 못한 방식으로 역사 연구의 본질을 변화시킨 심각한 상황들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굿바이 E H 카’(데이비드 캐너다인 엮음, 문화사학회 옮김, 푸른역사 펴냄)는 이러한 상황변화를 탐색하고, 카 역사서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그 이후의 방향을 모색한 책이다. 지난 2001년 영국 런던의 역사연구소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출판 40년을 기념해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들을 묶었다. 책에 따르면 이미 역사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가 강조한 과학적 역사학은 매력을 잃었다. 카의 역사학은 하나의 ‘담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아 해체대상이 되었다. 해체주의 관점에서 보면 카가 말하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 없는 대화’는 지식·권력 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대화이다. 또 그가 누누이 강조한 진보는 서구 중심적 산업화와 지식의 팽창을 의미하며, 탈식민적 관점에서 이 또한 해체되어야 할 또 하나의 지식·권력 담론이다. 이는 70년대 말부터 몰아닥친 상황변화의 소산이다. 이때부터 정치·경제·사회를 넘어 젠더·인종·종교·성적 취향 등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고, 이런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역사이론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90년대 들어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역사에 단일한 지향점과 목적이 있고, 역사적 진보를 논증할 수 있다는 믿음도 좌절되었다. 즉 거대 서사와 목적론적 이론이 붕괴하고 역사에서 인간 개개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말부터 역사연구에 일대 변화 역사가들은 그동안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 특히 보통사람들, 패자와 방관자들에 주목하고 서술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역사분야도 점점 세분화되면서 파편화되었다. 이같은 역사학의 변화,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은 수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 책에선 7개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 구체화한다. 답을 쓴 이들은 9인의 역사학자들, 사회사와 정치사, 문화사, 종교사, 젠더사, 지성사, 제국사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전공분야가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으며 발전해 왔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탐색한다. 먼저 폴 카트리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오늘날 사회사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사회사가 곧 역사’란 주장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야 하며, 다만 하위역사로서의 사회사, 특히 계급의 역사, 억압과 착취의 역사, 빈곤의 역사 정도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비해 그동안 위축됐던 정치사는 오히려 존재가치를 재확인하고 부활했다고 수전 패터슨 하버드대 교수는 말한다. 우파 성향의 ‘고급 정치사가’들과 대중정치를 중시하는 좌파 성향의 연구자들이 공통분모를 찾아 정치사가 재정의, 재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60년대까지 역사학의 변방이었던 제국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영향으로 변형·강화되면서 무대 중앙으로 옮겨졌다. 가장 의미 깊은 발전은 문화사와, 여성·젠더사다. 문화사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인류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 예전에 사회사가 누렸던 위상을 차지하게 됐다. 젠더와 여성은 이제 역사분석과 이해에 매우 유용한 범주가 됐고, 이에 따라 그동안 소홀하게 다뤄졌던 세계 인구 절반, 즉 여성의 삶과 경험이 복원되고 있다. ●정치·경제·종교등 갈등 떠올라 이같은 변화와 발전은 40년 전 카가 역사를 기술하고 정의내린 당시로선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 집필자들은 이같은 쟁점들을 제기했음에도 결말을 완전하게 맺지는 못했다. 다만 책을 엮은 캐너다인은 역사학의 지나친 팽창과 분화에 경고를 보낸다. 이제 너무 많은 역사가 기술되고 있기 때문에 극소수 학자들만이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뿐이며, 전문적인 하위 분야가 다양하게 성장하면서 각 분야에 대한 일종의 쇼비니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비록 ‘역사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지금의 답이 40년 전 카가 내린 결론과 여러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 없는 대화’라는 명제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물론 대화 주제와 대화 당사자, 그리고 대화의 본질은 변했지만 말이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박찬욱 감독 히치콕에 견줄만”

    |뉴욕 연합|영화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은 영국 출신의 전설적인 명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에 견줄 만하다고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타임스는 오는 25일 ‘올드 보이’의 뉴욕 개봉을 계기로 이 영화의 줄거리와 관람 포인트를 소개하고 박 감독의 영화 세계를 상세하게 조명하면서 그의 영화적 기교를 격찬했다. 타임스는 “일부 평론가들은 박 감독의 소름끼치는 영상과 고도로 창의적인 폭력이 관객의 감정을 ‘착취’한다고 폄하하지만 그의 영화적 기교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타임스는 박 감독이 “색채와 공간을 놀랍도록 간명하게 통제하고, 줄거리를 전개하는 감각은 세련되고 대칭적이며, 연기자들과의 호흡은 창의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고 밝혔다. 특히 “주관적인 영상을 세련되게 사용하는 능력은 히치콕 감독에 견줄 만하다.”고 밝힌 타임스는 “히치콕과 마찬가지로 박 감독은 우리를 주인공의 머릿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도덕적으로는 용납하지 못할 주인공의 끔찍한 행동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이유도 모른 채 15년간 감금됐던 ‘올드 보이’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가 풀려나자마자 일식집으로 가 산낙지를 통째로 씹어먹는 ‘충격적인’ 장면을 소개하면서 “이것은 의미를 내포한 충격”이라고 분석했다. 신문은 박 감독의 ‘올드 보이’를 비롯해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등 흥행 대작들에 힘입어 한국은 할리우드 영화보다 국산영화가 더 인기를 모으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가 됐다고 소개했다.
  • [일요영화]

    [일요영화]

    ●배틀필드(SBS 오후 11시45분) 로저 크리스천 감독의 2000년작. 존 트래볼타, 배리 페퍼 주연.SF 마니아들에겐 유명한, 신흥종교 사이언톨로지교의 창시자이자 소설가인 론 허버드의 ‘전장지구’를 원작으로 한 영화. 서기 3000년, 외계인 종족 ‘사이클로’의 침략으로 지구는 식민지가 된다. 사이클로의 지배하에 인류는 두 부류, 즉 사이클로의 노예와 사이클로의 지배를 피해 원시부족을 이루며 사는 집단으로 나뉘어 근근이 생존해 갈 뿐이다.‘사이클로’는 사악한 심성을 지닌, 평균 신장 3m의 거대한 외계인이다. 식민지 착취에 열을 올린 사이클로는 인간을 지구의 자원을 갈취하는 중노동에 이용한다. 사이클로의 감시망을 벗어난 원시부족의 청년 조니(배리 페퍼) 역시 사이클로의 추적망에 걸려 노예 신세가 된다. 사랑하는 연인 ‘크리시’를 애타게 그리며 탈출 기회를 엿보는 조니. 그러나 탈출은 실패하고, 조니는 사이클로 사령관 ‘테를’(존 트래볼타)에게 끌려간다.95분. ●무서운 영화2(KBS1 밤 12시20분) 키넌아이보리 웨이언스 감독의 2001년작. 애나 패리스, 숀 웨이언스, 레지나 홀, 마론 웨이언스, 팀 커리 출연.90년대 말 흥행에 성공했던 ‘무서운 영화’의 속편으로 전편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진과 주연 배우들이 다시 모였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1편이 ‘스크림’류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줄기로 ‘매트릭스’‘식스 센스’ 등을 패러디했다면, 대학생이 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룬 2편에서는 ‘더 헌팅’류의 귀신들린 집 이야기를 따라 ‘할로우 맨’‘미녀삼총사’‘한니발’ 등 흥행작들의 낯익은 장면들을 볼 수 있다. 마을에서 벌어졌던 연쇄살인의 기억을 딛고 대학생이 된 신디와 친구들. 신디는 같은 학교 학생인 버디와 사귀게 되지만, 버디는 눈치가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친구. 친근감의 표현으로 걸핏하면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레이는 여전히 동성애적 취향을 갖고 있다. 올드먼 교수의 귀신의 집 실험에 참가하게 된 일행은 학점을 잘 받겠다는 생각만으로 수상한 저택 ‘헬하우스’에 묵게 된다. 저택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 기사를 보게 된 신디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되고, 우연의 일치인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실험을 중단하자는 조교의 말을 무시했던 올드먼 교수는 유령에게 살해당한다. 신디는 옛 저택 주인 휴 케인의 죽은 아내가 자기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76분.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지식인의 두 얼굴/폴 존슨 지음

    장 자크 루소의 명성은 그의 저서인 ‘에밀’‘사회계약론’‘학문과 예술론’의 기저에 깔려 있는 교육론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그가 글로 쓴 것과는 반대로 실생활에선 아이들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5명이나 고아원에 내다버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연구에 천착했지만 정작 그의 집에서 수십년간이나 일했던 하녀에겐 동전 한닢 지불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드나들면서도 여성과의 교제가 사회악이라고 여길 만큼 비정상적인 인물이었고, 논쟁을 즐기기로 유명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퍼붓던 망상증 환자였다. 이렇듯 사회적 명성 뒤에 숨은 지식인들의 또 다른 모습은 두 가지 면에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개인적·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명이나 사상이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다면 그것만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견해, 또 하나는 그 지식인들이 창조한 것은 하나의 관념, 이데올로기, 또는 인간에 관한 특정 유형일 뿐이지, 과학적이거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바탕을 둔 이론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영국 언론인 출신의 저술가 폴 존슨이 지은 ‘지식인의 두 얼굴’(윤철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은 후자적 관점에서 근대 이후 사회정신과 이데올로기를 이끌어온 지식인들의 업적과 생애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고 명성 뒤에 가려진 추악한 이면을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위인의 명성 이면의 도덕적·윤리적 판단은 필수 지은이가 말하는 지식인은 우리가 흔히 아는 ‘지식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거대한 관념체계를 형성하고 교조와 명령, 권유를 통해 일반인들을 한쪽으로 몰아가며 세상을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당대나 후세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대하며, 지식인들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판단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저자는 근대적 개념의 최초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부터 시작해 300여년에 걸친 위인적 지식인들의 철학과 기념비적인 성과를 소개하면서 몇 가지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성립시키고, 얼마나 세심하게 그 증거를 검토했는가?그들은 얼마나 진리를 존중했으며 개인생활에도 똑같이 적용했는가?물질적 이익 앞에 그들의 철학은 어떻게 왜곡됐는가?그들은 배우자와 가족들을 어떻게 대우했으며, 지인들과 얼마나 깊은 우정을 나눴는가? 등등. ●습관적 거짓말쟁이 헤밍웨이 저자에 따르면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 교육철학에 한 획을 그은 루소는 자식들을 다섯이나 고아원에 내다버렸다. 후일 이 사실이 알려지자 루소는 “그녀(아이 엄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란 해괴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루소는 세탁부 출신인 아이들 엄마를 23살 때부터 애인으로 곁에 두고 살면서 ‘천하고 무식한 계집종’이라고 멸시했으며, 그의 ‘고백록’ 중 상당 부분은 거짓말과 각종 변명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최상급의 작가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직업의 중요한 부분은 거짓말이나 날조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전문작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했는데,5살때 길길이 날뛰며 달아나던 말을 혼자힘으로 막아냈다든가, 그의 부모에게 영화배우와 약혼하게 됐다는 등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의 저서전 ‘이동축제일’은 루소의 ‘고백록’만큼이나 미덥지 못하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이밖에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 우월주의자로서 여성을 인간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며,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릭 입센은 평생에 걸쳐 분노와 공포감에 휩싸여 기행을 일삼았다. 베르톨드 브레히트, 조지 오웰, 노엄 촘스키 등 또한 ‘이성의 몰락’이란 비판 속에 지은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최악의 폭정은 사상이 지배하는 전제정치 책을 읽다 보면 사실 지은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신봉자이자 보수적 성향의 저널리스트로서 지나치게 인간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시켰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보편적인 인류가 아닌 특정한 개인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 특히 그들이 친구, 동료, 하인, 가족들에 대한 방식을 주로 검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반문한다. 학자와 작가, 철학자가 아무리 저명하다고 할지라도, 대중을 향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말해줄 권리가 있는가?하고. 대중을 그들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려는, 온갖 지식인들의 위원회, 연맹,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빽빽이 박힌 성명서에 그는 강한 의구심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지은이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지식인들이 습관적으로 망각하는 것, 즉 인간이 관념보다 중요하고, 인간이 관념의 앞자리에 놓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만 한다. 모든 폭정 중에서 최악의 폭정은 사상이 지배하는 무정한 전제정치다.”2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열린세상] 할머니 가설/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한시절 내 수업을 들었던 한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결혼을 하고 나서 5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터라 반가웠다. 그 친구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한동안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가 좀 자랐으므로 다시 일을 하고 싶었다.‘그럴듯한’ 정규직 신규공채 시험에는 나이제한이 있다.20대 후반이면 이미 연령제한에 걸린다. 결혼한 여자가 정규직으로 재취업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래서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했다.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은 연수중이다. 그녀는 과거 5년의 역사를 이처럼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4살짜리 딸아이는 누가 보살펴 줄 것인지 물어보았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시고 자기는 어머니께 수고비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탁아와 보육시설이 빈약한 우리사회에서, 남아도는 나이든 여성들이 새로운 세대를 보살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친구의 말을 듣다 보니 크리스틴 혹스의 할머니 가설이 떠올랐다. 생물학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이유는 오로지 재생산에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절대명령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물들은 죽을 때까지 생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 여성은 50세 전후하여 폐경(완경)을 맞이한다. 재생산 능력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잉여의 존재들이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가?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었다.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제시된 것이 할머니 가설이다. 나이든 여성들은 직접적인 재생산은 마감했지만, 다른 여성들이 재생산한 존재를 보살펴 줌으로써 끝까지 재생산과 관련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가족과 사회 전체적으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은 다른 세대를 보살피는 데서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찾는다. 여러 연구조사에 따르면 보살펴줄 대상이 있는 할머니들이 독거노인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들 한다. 이렇게 본다면 할머니 가설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인다. 정부는 일자리 40만개 창출을 부르짖고 있다. 많은 여성단체들의 올해 사업목표가 일자리 창출이다. 저출산을 우려한 국가정책에 발맞춰 여성운동계 역시 대안적인 가족보다는 안정적인 이성애 가족의 재생산을 위한 모성보호와 탁아와 보육을 핵심과제로 삼고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방점은 여성이 아니라 가족에 있다. 정부는 여러 여성 NGO 단체들이 오랜 세월 동안 구축해놓은 인프라를 통해 손쉽게 사회복지 차원의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다. 보육, 탁아, 간호, 보살핌 등은 나이든 여성노동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 나이든 여성들에게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사회복지수당을 주면서, 차세대, 혹은 사회적 약자 등을 돌보는 일을 맡기면, 빈곤노인의 일거리창출, 노년의 보람창출, 의료비절감 등 국가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기계화로 인한 일자리의 격감을 우려하면서 ‘노동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은 NGO와 같은 제3섹터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할머니 가설이야말로 그런 주장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보면 할머니 가설은 여성의 노동력을 철저히 동원함으로써 사회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결과 비정규직, 저임금, 불안정 여성노동예비군을 확실하게 만들어내게 된다. 여성노동운동이 예전에는 착취의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삼았다면, 이제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인해 착취는 정치적 화두가 못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사회는 착취당해도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처해있다. 열심히 일자리를 창출한 결과 값싸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오히려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모든 일자리의 비정규직화에 우리 모두 기여해왔는지 모른다. 할머니 가설이 그런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일조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 KBS2 ‘추적60분’ 서울역 노숙자들의 25시 밀착취재

    지난달 22일 서울역에서 2명, 지난 6일과 7일에는 대구에서 3명 등 최근 두달새 6명의 노숙인이 숨졌다. 특히 서울역 사망사고의 경우 노숙인들이 그 원인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며 경찰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서울의 길거리 노숙인 60% 이상이 서울역 인근에 모여 있으며, 그 숫자는 500여명을 헤아린다. 사실상 공권력이 이들을 통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일반인들은 금품갈취·폭언·폭력 등 노숙인들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노숙인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KBS2TV ‘추적 60분’은 서울역 노숙인의 실상과 그 문제점을 조명한 ‘2005년 노숙인 보고서-서울역 25시’를 23일 오후 11시 5분에 방송한다. 제작진은 15일 동안 서울역 노숙인들을 밀착 취재했다. 서울역 노숙인 사망 사건의 원인에 대해 경찰은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사건을 둘러싼 소문은 아직도 무성하다. 제작진은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나간다. 살아 있던 사람을 짐수레에 실은 이유와, 동쪽 화장실에서 발견된 노숙인을 서쪽으로 옮긴 이유 등 의혹을 파고든다. 취재 결과 서울역 노숙인 집단은 철저하게 ‘계급화’돼 있었다. 그들의 직업도 30여 종류가 넘었다.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구걸하는 노숙인인 ‘남수(은어)’, 교회를 돌며 생활비를 버는 노숙인 ‘짤짤이’(은어)의 실체도 화면으로 공개된다. 특히 인신매매나 인감 도용 등 노숙인들이 범행 대상으로 이용된 충격적인 결과와 함께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노숙인 알코올 중독 치료 프로그램도 방송을 통해 공개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녹색공간] 부족함과 모자람의 축복/오한숙희 여성학자

    사고로 발을 다쳐 두 달 반 동안 깁스를 했었다. 깁스를 푸는 날, 골다공증이 심하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운전면허가 없는 덕에 다리 힘 하나만은 장담하는 바였는데 고작 두 달 반 사이에 골다공증이라니. 탓할 대상도 없이 야속하기만 했다.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굳은 재활의 결심을 했지만 굳어버린 근육은 움직일 때마다 심한 통증을 일으켜 발을 딛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내 하소연에 물리치료사는 허벅지와 종아리를 부지런히 두드리라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리를 안 쓰고 가만 놔두니까 영양공급이 오질 않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앉아서라도 마사지나 안마로 자극을 주세요. 그러면 혈액순환이 되면서 영양분이 오게 되지요.” 우리 몸은 냉정하게도 활동하지 않는 신체부위에는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학생때 생물시간에 외웠던 용불용설(안 쓰는 신체기관은 퇴화된다는 이론)의 정확함에 무릎을 칠 수밖에. 그러나 사고의 후유증은 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걷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다리근육도 많이 되돌아올 무렵 나타난 후유증은 자식농사의 이상기후였다. 입원으로 인한 어미의 부재기간이 아이에게는 해방공간이었다. 엄마에게 사후 승인을 받겠다는 단서를 달고 할머니 대행체제의 틈새를 횡행했다. 가불해 간 용돈은 요상스러운 옷들로 쌓여 있었고 고무줄이 되어버린 귀가 시간과 외출시간은 지저분한 방과 열혈 자유주의자의 불안한 눈빛을 만들어 냈다. 반성은커녕 자신의 개성이라고 합리화하며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사춘기적 저항정신 앞에서 나는 아연했다. 이건 골다공증과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엄청난 공백이었다. 뼈의 공백은 다리를 쓸수록 메워지건만 자식의 공백은 노력할수록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 무렵 거실에서 키우던 나무 한 그루가 죽어나갔다. 공교롭게도 그 나무는 재작년에 아이의 생일 선물로 내가 사 준 것이었다. 제 키보다 더 큰 나무에 감탄하는 아이에게 나는 ‘이 나무가 곧 너라는 생각으로 잘 길러라.’라고 말했었다. 큰나무가 남긴 거실의 공백은 설 쇠고 마을온 이웃집 할머니의 눈에도 확연했다. 그렇잖아도 쓰린 가슴을 애써 달래던 어머니가 예의 자위적 발언을 펼치셨다.“오래전부터 비실비실하더라고. 갑자기 죽은 게 아니니까 수명이 고만큼인가 보다 받아들여야지.” “에이구, 물 많이 줬구먼. 처음 비실거릴 때 물을 딱 끊어서 바짝 말리지 그랬어.” “비실거리니까 물이 모자라 그런가 하고 또 줬지.” “모자라면 지들이 알아서 아껴 쓴다고. 넘칠 때가 문제야. 주체를 못하니까.” 이 말에 내 정신이 버쩍 들었다. 나무가 죽은 원인, 어쩐지 거기에 아이의 공백을 채우는 열쇠가 있을 것만 같다고 여겼던 마음에 ‘넘칠 때가 문제’라는 말이 꽂힌 것이다. 인생선배들의 말대로 사춘기의 시한부 시대정신일 뿐이라고 애써 믿으면서 그럴수록 아이에게 관대하게 더 많이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왔음을 명료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쓰지 않으면 퇴화되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생명의 자연이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가능하면 몸을 쓰지 않도록 하는 편의주의 시대는 내 몸을 퇴화시키고, 맘만 먹으면 쏟아부을 수 있는 물질 풍요의 시대는 자식농사를 망친다. 자연을 착취하고 오염시키면서 만들어내는 몸의 안락과 물질적 풍요는 결국은 인간에게 재앙이 된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관계는 오히려 불편함과 부족함 속에서 나온다니, 생명체의 신비는 얼마나 엄숙한 것인가. 오한숙희 여성학자
  • [송두율 칼럼] 인간자본과 인재(人材)

    [송두율 칼럼] 인간자본과 인재(人材)

    1991년부터 해마다 독일언어 전문가들의 모임인 ‘언어비판적 행동’은 ‘단어 아닌 단어’를 선정하는데,2004년의 최악의 단어로서 ‘인간자본’(Humancapital)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원래 기업경영에서 직원의 지식, 경험 그리고 능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자본’은 고객과 조직관리를 근간으로 하는 ‘구조적 자본’과 함께 기업의 ‘지적 자본’을 구성해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어 이 단어가 최악의 단어로 선정되었는가. 인간을 자본증식을 위한 재료나 소재(素材)로서 바라보는 발상은 ‘인간자본’이 물론 처음은 아니다. 산업자본주의 선두주자였던 영국의 19세기 중엽의 노동자의 생활참상을 런던에서 한때 기자로 일하면서 목격한 독일의 작가 테오도르 폰타네도 ‘인간소재’(Menschenmaterial)라는 단어를 이미 사용했다.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그의 동시대인 칼 마르크스도 역시 자본주의의 어두운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 단어를 구사했다. 이 ‘인간소재’라는 단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인재’(人材)가 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등치(等値)시킬 수 없는 어떤 의미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인재등용’이니 ‘인재양성’처럼 ‘인재’는 다분히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데 대하여 ‘인간자본’이나 이의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는 ‘인간소재’는 주로 경제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지구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강조되고 있는 ‘인재’의 경제적 의의는 한국사회에서도 중시되고 있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에서 ‘인재’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 한국의 재벌기업들도 이제는 ‘인재’의 국적조차도 문제삼지 않고 ‘인재사냥’(war for talents)에 나서고 있다. 막스 베버는 동양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정신’을 발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요인중의 하나를 동양사회의 인문적인 ‘문화인’에서 찾은 적이 있다.‘선비’가 아마도 이의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양의 기능적인 ‘전문인’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인재’의 이념형이었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이러한 ‘인재’는 대학사회에서조차 발붙일 틈이 없는 것 같다. 교육은 경제발전에 종속되어야 하고, 대학도 기업체처럼 운영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관철되고 있는 조건에서 위에 말한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인재’의 개념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인간자본’을 최악의 단어로 선정한 배경에는 분명히 사회전체를 곧 시장으로 여기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이 깔려있다. 이에 대해서 ‘인간자본’을 옹호하는 측은 자본과 인간을 결합시킨 이 새로운 개념이야말로 소재라는 물질적 개념에 의거해서 ‘인간착취’나 ‘인간소외’를 연상시켰던 과거의 ‘인간소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지식’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의 경제사회에 오히려 더 적합하다고 반박한다. 비물질적인 정보가 주도하는 탈현대적(postmodern)인 사회의 자본과 인간관계를 기존산업사회의 그것처럼 단순하게 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자본’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우리의 ‘인재’가 담고있는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재’는 단지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인재’(人才)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사람이라는 재목’을 키운다는 뜻의 ‘인재’(人材)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육이 단순히 경제의 종속변수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꼬리를 물고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물론, 온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준 엽기적인 사건들이 이러한 의미전화(轉化)의 당위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기고] ‘쓰나미’지역 아동보호 시급하다/차혜선 월드비전 국제협력실장

    지난달 26일 발생한 동남아 지진 해일 대참사가 한달여를 맞은 가운데 최근에는 언론보도마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참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어린이들이다. 이번 참사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 희생된 어린이들의 모습은 이미 여러차례 보도됐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수백만 명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거나 고아가 될 처지에 놓여 있다. 이 어린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는 유괴범의 검은 손길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 이번 대참사에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국가적으로, 또한 민간단체 차원에서 적극적인 구호의 손길을 펼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 활동에도 불구하고 구호사업 초기 단계에 어린이 보호를 위한 특별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어린이들에게 가해지는 위험과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유약한 어린이들은 긴급구호상황의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이제라도 아시아 쓰나미 긴급구호현장의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각국 정부와 각종 단체, 언론 등이 취해야 하는 보호 조치를 생각해 본다. 첫째, 이재민 수용소 내에 ‘어린이들에게 친화적인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찾아와서 다른 아이들과 만나 놀기도 하고 공동체 활동도 하며 공부도 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말한다. 이곳에서 피해 어린이들은 점차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면서 재난으로 입은 참담한 경험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받게 된다. 둘째, 가족과 떨어진 어린이들을 등록시키고 가족찾기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족과 떨어진 어린이들은 학대와 착취, 질병과 영양실조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가족과 떨어진 어린이들을 등록하고 가족 혹은 친척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가족을 찾지 못한 어린이들에게는 보호자에 의해 보호받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만 아동학대 및 착취를 막을 수 있다.‘어린이들에게 친화적인 공간’은 어린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적합한 장소이며, 또한 부모나 친척들에 의해 미아찾기 장소로도 사용될 수 있다. 셋째, 구호단체들의 아동보호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아시아 쓰나미 현장에 파견된 모든 구호단체들은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명시한 아동보호정책을 수립하고 준수해야 한다. 구호기관들이 아동보호정책을 준수하는 것은 구호활동의 조건이 되어야만 한다. 넷째,‘눈에 안 보이는’ 어린이들을 찾아내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구호활동의 대상에서 제외된 어린이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러한 어린이일수록 가장 열악한 경우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다. 이상의 조치를 통해 피해 어린이들이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일상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월드비전은 지진해일 재난민 캠프에 3개의 아동센터(child friendly space)를 운영 중이며, 앞으로 10곳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 아동센터에서 어린이들은 노래, 그림그리기, 게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한 심리치료를 받으며, 웃음을 찾아가고 있다. 이번 지진해일 대참사는 긴급 구호상황에서 어린이를 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과제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차혜선 월드비전 국제협력실장
  • [정치플러스] 노조 영향력 축소 법개정 추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출신인 한나라당 배일도 의원은 30일 “현행 근로기준법에서 노조에 개별 근로자에 대한 해고 협의 등을 위임토록 한 규정을 삭제, 사용자가 해당 근로자와 직접 협의토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마련했다.”면서 “다음달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은 경영상의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할 경우, 사용자가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조나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근로자대표’에게 해고 60일 전까지 통보한 뒤 협의토록 하고 있다. 개정안은 이와 함께 ▲혼인여부, 출신지역, 출신학교, 연령, 고용형태에 의한 고용차별 금지 ▲타인의 취업과 관련한 중간 착취 배제 ▲대통령령에서 유보한 4인 이하 사업장 근무 근로자에게도 근로기준법 적용 ▲도급시에도 동일 임금 적용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 [토요영화]

    [토요영화]

    ●하트브레이커스(MBC 오후 11시40분) ‘남자 사냥꾼’ 맥스와 딸 페이지. 둘은 맥스가 백만장자를 유혹해 결혼에 성공하면 페이지가 다시 그에게 접근, 불륜극으로 꾸며 돈을 뜯어내는 수법으로 살아왔다. 멋지게 한탕을 하기 위해 부자들이 득실거리는 팜비치로 간 맥스. 수십 년간 담배를 피워 온 끝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혐오스러운 억만장자인 담배회사 사장 윌리엄 텐시를 목표물로 삼는다. 맥스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 미국 물정을 모르는 러시아 여인 올가로 변신해 프러포즈를 받아내려고 애를 쓰고, 페이지는 그의 가정부로 취직을 한다. 독립을 꿈꾸던 페이지는 단독으로 또 다른 표적인 잭을 공략한다. 하지만 순수하고 따뜻한 잭에게 페이지가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일은 꼬인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 이들 모녀에게 사기 당한 건달 딘까지 이들을 잡으러 팜비치로 들어온다. 상반된 성격의 모녀가 펼치는 결혼 사기극의 전모가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 각기 다른 남자를 상대로 모녀가 역할을 바꿔가며 벌이는 사기극은 돌발상황으로 반전을 거듭하며 재미를 낳는다. ‘에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와 청춘스타 제니퍼 러브 휴잇이 ‘꽃뱀’ 모녀로 나와 포복절도할 웃음을 선사한다. 둘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볼 만하다. 진 헤크먼, 레이 리오타, 제이슨 리, 제프리 존스, 앤 밴크로프트 등 조연진도 화려하다. 세 번이나 에미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고, 로맨틱 코미디 ‘로미와 미셸’을 연출한 데이비드 머킨 감독의 2001년 작품.122분. ●내 친구 알리(EBS 오후 11시) 카사블랑카에는 또래 가운데 나이도 많고 키도 큰 두목 디브가 이끄는 어린 갱 조직이 있다. 시시껄렁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 조직은, 집 없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집과 같은 공간이다. 알리, 위타, 오마르, 붑커. 이들 네 친구는 지나치게 그들을 착취하는 디브에 반기를 들고 조직을 뛰쳐나와 카사블랑카를 떠난다. 디브의 조직원들은 그들을 강제로 돌아오게 하려 하고 그 와중에 알리가 죽는다. 남은 세 친구는 알리의 시체를 몰래 숨긴 채 장례식을 치르러 여행을 떠난다. 알리의 뜻하지 않은 죽음 뒤 소년들이 겪는 고통과 초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성장영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 생생히 아이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모로코 출신 나빌 아우크 감독의 2000년 작품.99분.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문화마당] 행복의 빈곤국가/전경린 소설가

    오하이오에서 2년 동안 살고온 지인을 만났다. 인사차 돌아온 소감을 물었더니 그녀는 한숨을 폭 쉰 뒤 대답했다. “여긴 정말, 전쟁통 맞아요.” 그 말을 듣자 신문에서 보았던 사진 두 장이 불쑥 떠올랐다. 야윈 겨울 햇빛이 비치는 한낮에 녹슨 철로를 베고 침목 위에 웅크려 누운 어린 소녀와 평양 공원 바닥에 쓰러져 방치된 소년의 사진이었는데 둘다 11살 전후로 보였다. 언제부터 떠돌았는지 색깔을 알 수 없게 옷은 해지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작은 뺨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엔 흙더께가 앉았다. 북한의 꽃제비라는 제목이었다. “여기서 40년을 살고 그곳에 갔을 때, 적응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겨우 2년 살고 돌아왔는데, 이곳에선 6개월이 지나도록 심각한 부적응증을 겪고 있답니다. 하루하루가 아귀다툼이고 감시라도 당하듯 매사에 눈치를 봐야 해요. 그리고 빈틈없이 시야를 막고 선 시멘트 건물들, 온갖 구조물들이 너무 공격적이에요. 여기 비하면 오하이오는 초록의 천국이죠. 길을 나서도, 말하는 거나 옷 입은 거며 행동하는 데에 긴장이나 얽매임이 없어요. 더구나 이탈리아로 넘어가면,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애정을 나누는 연인들의 티없는 모습에서 존재적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죠. 우린 야유하고 눈살 찌푸리고 심지어 떼어놓고 훈계까지 하잖아요. 매사 너무 많은 감정을 안 보는데서 폐쇄적으로 억눌린 채 처리해야 하니, 행동과 욕망과 인격이 다중화되고 돈 자랑만 하게 되고…. 국민소득과 상관없이 우린 행복지수 극빈곤국일 거예요.” 그러자 나의 일상적인 감정이 혐오에 가까운 불안감인 것도 납득이 되었다. “실제로 세계 유일의 휴전국이잖아요.” “곧 없어진다지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주제를 가져온 나라이기도 하죠.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혼외정사를 개인프라이버시가 아니라 공공의 범죄로 규정하는 나라일걸요.” “그런 것들이 우리 일상생활을 엄청나게 왜곡하고 있는데도 근본 이유는 망각되고, 결코 습관이 될 수 없는 불안과 부자유와 기만과 혼란만 심화되죠.”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가 동시에 내뱉었다. “우리 아이들은 더 안됐어요!” “당장 청년 실업도 큰 문제지만, 지금 10대들이 자라면 경제 인구 1인당 노인 4∼5명을 세금으로 부양해야 하는 노령국가가 된다잖아요. 한 국가가 그런 착취구조를 가지다니…. 엄마들이 아이들 피난시키듯 외국 보내고 가능하면 돌아오지 않고 정착해 살기를 비는 마음이 이해도 되고 밉기도 해요.” “아이 못 내보내는 우리는 그 아이들이 늙은 엄마 아빠 잊지 않고 모셔가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농담 반 진담 반 끝에 다시 한번 절망적인 북한 사진 두 장이 떠올랐다. 휴전이 임시방편이니 그 위에서는 무슨 방법을 써도, 어떻게 살아도, 임시적이고 불구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한 현실에 너무 오래 휘둘리느라 불행의 근본 원인인 자기고통을 다들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문제와 고통들을 정직하게 수긍하고 합리적인 해결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갖게 되면 바르게 발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막연한 불행 의식도 한결 덜할 것 같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휴전국에서도 우리 모두의 삶은 소중하다는 진실이다. 전경린 소설가
  • [낮은소리] 화려한 은막뒤 ‘배곯는 스태프’

    [낮은소리] 화려한 은막뒤 ‘배곯는 스태프’

    “흥행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 영화의 조명 스태프로 일했습니다. 혹독한 겨울에 사지가 덜덜 떨려서 수십도까지 오르는 열로 사경을 헤매는 일도 많을 만큼 고생했는데 아직도 잔금을 못 받았습니다.” “기획 시나리오 집필 제의를 받고 몇 달 동안 썼습니다. 영화사는 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엎었고, 고료 지급을 요구했지만 작품을 의뢰한 적이 없다는 대답뿐입니다.” 한국영화 조수연대회의가 지난해 6월 개설한 ‘영화인 신문고’에는 애달픈 사연이 넘쳐난다.‘관객 1000만 시대’를 만든 숨은 주역들인 이들이, 실제로는 최저생계비도 못 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화계에서 스태프들의 처우 문제가 수면 위에 오른 지는 오래됐지만, 개선의 속도는 한국사회의 어느 영역보다 더디다. 최근 조수연대회의가 한 영화사를 상대로 3억 4000여만원 상당의 채권가압류 신청을 내는 등 스태프들의 단합된 힘이 커가고 있지만 아직은 ‘낮은 소리’일 뿐이다. 영화를 향한 열정과 꿈을 저당잡힌 채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 스태프들의 현주소를 들여다본다.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허울뿐인 프리랜서 7년동안 연출부를 거쳐 3편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일한 김모씨는 그동안의 총수입이 3000만원도 안 된다. 지금은 그나마의 벌이도 포기하고 시나리오를 쓰며 감독 데뷔를 준비중이다. 그는 “경제적인 문제로 떠나간 사람이 수없이 많다.”면서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나는 행복한 편”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왔지만 3년째 조감독으로 1000만원을 번 것이 전부라는 강모씨는 “부모님이 용돈을 쥐어주시면서 우시더라.”면서 “감독의 꿈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영화 스태프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활이 불가능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이다. 지난해 10월 국회 문화관광위에서 스태프 1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월 평균 61만 8000원을 벌었고 50만원 이하의 소득자도 47%에 달했다. 대부분 생계 유지가 어려워 부모나 배우자에게 의지하거나(39%) 아르바이트를 병행(36%)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노동시간은 길었다. 하루 평균 13.9시간을 일했고 18시간 이상도 10%나 됐다. 불안정한 계약으로 그나마의 임금을 못 받는 경우도 많다. 임금 계약은 보통 ‘통계약’이라는 형태로 맺는다. 제작사가 각 파트 정상급(퍼스트급) 스태프들과만 계약을 맺으면, 퍼스트급이 이하 스태프들에게 분배하는 형식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받지 못해도 법적으로 대처하기가 힘들다. 촬영 종료 뒤 임금의 절반가량을 지급하는 관행 때문에 흥행에 실패한 영화의 경우에는 잔금을 떼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로 지난해 4월 ‘영화현장스태프의 근로조건개선과 전문성 향상을 위한 연구’공청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72%가 임금체불이나 미지급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작품 한 편당 얼마’식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작품당 계약’ 관행도 저임금을 촉발시키는 큰 원인이다. 한 영화가 기획에 들어가서 극장에 걸리기까지 보통 1∼3년이 걸린다. 캐스팅, 투자,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해 질질 끈다면 스태프들은 기약없이 노동력과 시간만 축내게 된다. ●‘영화 향한 열정’ 이용한 노동착취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인력이 넘쳐나는 이유는 뭘까. 감독으로 성공하리라는 꿈과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국감자료에서도 전직을 희망한 응답자는 21%에 불과했고, 전직을 원하지 않는 이유로 67%가 “영화가 좋아서”라고 대답했다.‘영화판’에서 일을 배우며 한단계씩 나아가야 하는 스태프들은 그렇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대부분 넘어간다. 소위 B급 영화사에서 조감독까지 했지만 지난해 A급 영화사로 옮겨 연출부 스태프로 일한 이모씨는 임금을 거의 받지 못했으면서도 “고급 인력과 친분을 갖게 되고 일을 배운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를 제기했다가 기껏 쌓은 인맥을 잃을까 두렵다는 것. 하지만 조수연대회의의 자문을 맡고 있는 이종구 노무사는 “어느 사업장이나 돈을 버는 것과 일을 배우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는데, 일을 배운다는 이유로 저임금을 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열악한 환경을 딛고 감독으로 성공하는 경우는 확률적으로 드물다. 대부분 ‘죽도록’ 일만 하다가 젊은 시절을 허비한다.‘조폭 마누라2’의 장동현 조감독은 “제작비도 못 건지는 영화가 많다는 것은 잘 알지만 모든 희생을 스태프들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면서 “자원봉사자가 아닌 만큼 전체 파이를 나누는 데 있어 일한 만큼의 몫을 받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이상필 조수연대의장 더이상 한국영화 스태프들은 숨죽이고만 있지 않다. 조감독·제작부·촬영조수·조명조수 협회로 구성된 한국영화 조수연대회의(의장 이상필)는 ‘영화인 신문고’(filmunion.ivyro.net)에 접수된 22건의 체불임금 관련 사안에 대해 중재에 나섰고, 한 영화사를 상대로 3억 4000여만원의 채권가압류 신청을 냈다. 스태프들의 공식적인 첫 법적대응으로 기록될 ‘사건’을 이뤄낸 한국영화 조수연대회의의 이상필 의장은 “신문고에 올라온 사안의 진위를 가린 뒤 권고안을 제시하는 등 우선적으로 중재를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면서 “하지만 ‘법대로 하라.’는 제작자들도 있어 법적 대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이들의 ‘레이더’에 걸린 영화사는 70% 정도 촬영이 진행된 뒤 영화를 엎었고, 임금을 거의 지불하지 않은 채 3년을 끌었다. 이 의장은 “그래도 이 영화사는 수입·배급사업을 하고 있어 가압류 신청이 가능했다.”면서 “신문고 안에는 제작사가 임금을 주지 않은 채 파산한 뒤 1년이 지나 법적으로 구제를 받을 수 없는 사안도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당장 스태프들이 못 받은 임금을 챙겨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의장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세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스태프들의 임금·고용·복지와 함께 제작시스템을 개선하는 일, 현장 영화인 재교육과 라이선스 제도화, 영화관련협회의 영화정보 공동 데이터베이스화 등이 그것이다.“투자자가 전권을 쥔 기형적인 영화산업구조와, 산업화과정에서 제대로 규정짓지 못한 채 굳어져온 관행이 원인인 만큼, 법에 의존하기보다는 영화계 스스로가 체질 개선을 해야 합니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스태프도 근로자… 근기법 적용을” 한국영화 스태프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근로기준법을 적용시켜 노동자로 대우받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정기적인 영화 일의 특수성 때문에 아직은 스태프들을 프리랜서로 보는 시각이 많아 당장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현재 한국영화 조수연대회의는 영화 스태프들을 근로자로 인정받게 하기 위한 법적 대응 방안을 모색중이다. 현장에서 다쳤을 경우 산재보험을 청구한다든지, 회사가 부도날 경우 3개월치 임금을 보전해주는 체당금을 신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영화스태프는 근로자’라는 판례를 이끌어내겠다는 것. 박형섭 변호사는 “법적인 선례가 생긴다면 스태프들이 일한 만큼의 추가수당을 받고 노동시간을 조절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적 해결에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우선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근로환경 규정’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와 조수연대회의는 이 문제로 협상을 진행중이다. 영진위는 임금, 계약기간·방식, 노동시간의 기본틀과 함께 4대보험지원센터를 운영하는 내용의 ‘스태프 처우개선을 위한 권고안’을 제안한 한편, 조수연대회의는 연구원이 만드는 ‘선험적’인 권고안이 아닌 실질적인 주체인 스태프들이 적정수준을 제시하고 제작가협회와 협의한 뒤 영진위와 권고안을 논의하는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조수연대회의 최진욱 사무국장은 “영진위가 국감의 결과물을 내는 데만 급급해하고 있다.”면서 “영화인 신문고에도 최소한의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영진위 국내진흥부의 김보연씨는 “3년전부터 스태프의 처우개선을 위한 연구사업을 지원해왔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업을 입안하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앞으로 진통이 예상되지만 3자가 협의해서 의견을 모아보자는 데는 이견이 없는 만큼 조만간 의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제작가협회와 조수연대회의도 첫만남을 갖고, 새달초 영화인 근로환경과 제작시스템을 제고하기 위한 정책 세미나를 열기로 합의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영화 스태프의 처우 개선을 위한 첫삽은 뜬 셈이다.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사설] 잇단 외국인 직업병 당국은 뭐했나

    경기도 화성 전자부품 공장의 태국 여성 노동자 5명이 유독성 세척제에 중독돼 하반신마비 증세를 보인 데 이어 안산의 중국 여성 노동자들도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중독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은 지난 2002년 11월이다. 당국이 그때 사안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기만 했더라도 똑같은 피해의 재발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동당국은 사고현장을 조사하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안전관리 대행업체에 한달간 영업정지 조치를 했을 뿐이다. 같은 세척제를 사용하는 다른 업체들에 대한 경고나 조사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무사안일한 행정의 전형이다. 노동부는 클린3D사업 등을 통해 중소기업 작업환경개선에 많은 성과를 올렸다고 자평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실상을 보면 성과는커녕, 우리나라가 선진국 진입을 바라보는 경제 대국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피해 노동자들은 특수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업주는 문제의 세척제가 유독한 물질인지조차 몰랐다고 발뺌하고 있다. 산업안전담당 근로감독관과 산업안전공단에서는 지금껏 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작업장은 작업환경 기준 준수 대상업체에서 제외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설사 불법체류자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작업장 안전은 보장되어야 한다. 당국은 사태가 불거지고 나서야 실태조사와 사법처리 방침을 외치고 있다. 엄정한 처리를 요구하거니와 드러난 문제만 덮고 가자는 식은 안 된다. 인권후진국의 멍에를 쓰지 않도록 외국인 노동자 착취구조 개선에 나서야 한다.
  • ‘쓰나미’ 고아들 두번 운다

    쓰나미(지진해일) 생존자들이 혼란을 틈탄 각종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이 인신매매되거나 이재민들이 머물고 있는 임시수용소에서 성폭행과 강도 등 범죄가 잇따르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제2의 피해에 몸서리치고 있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노린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인도네시아 아체에선 쓰나미 고아들이 인신매매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아체 어린이는 최소한 3만 5000명가량으로 그 가운데 인신매매단에 의해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진 인원만 20명 이상이다. 아체 인근 도시 메단에 거점을 두고 있는 아체협력재단(ASF)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쓰나미가 아체를 강타한 뒤 2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의 서쪽 반둥과 이웃 나라인 말레이시아 등지로 팔려갔다고 4일 현지 일간 자카르타포스트가 보도했다. ASF의 마스리자 이사는 “그외에도 이재민 수용소에서 상당수 어린이들이 무책임한 사람들에 맡겨진 뒤 실종됐다.”면서 “인신매매범들은 입양재단으로 위장하고 15세 이하 어린이와 영아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수천명의 어린이들이 피난처를 찾기 위해 메단으로 몰려드는 상황이어서 어린이 인신매매가 급증할 가능성도 큰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인신매매 사례가 잇따르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3일 15세 이하 아체 어린이들의 출국을 금지했으며 전국의 경찰서에 아체 어린이의 인신매매 가능성이 높다며 비상 경계령을 발동했다. 아동보호단체 ‘세이브 더 칠드런’은 “과거의 재난 사례들은 어린이들이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면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성적 착취에도 취약한 상태”라고 경고했다. 스리랑카와 태국 등에서는 성폭행과 강도, 약탈 등이 횡행하고 있다. 스리랑카 여성단체인 ‘여성·미디어집단(WMC)’은 “당국의 감독이 이뤄지지 않는 구조활동 과정이나 임시수용소 생활 도중 소녀와 성인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희롱 피해를 입은 사례들이 보고됐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4일 보도했다. 쓰나미가 강타하면서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태국 관광지 중 최대 피해지역인 카오락에선 경찰이나 구호단원을 가장해 집을 털거나 호텔 금고를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졸지에 부모를 여읜 12세 스웨덴 소년의 납치사실이 알려지자 스웨덴 정부는 카오락에 경찰 수사관들을 파견해 조사에 나섰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시론] ‘장롱속 아이’와 아프리카/한양환 영산대 교수·명예논설위원

    [시론] ‘장롱속 아이’와 아프리카/한양환 영산대 교수·명예논설위원

    지난 20일 서울신문의 1면 기사가 가슴을 울린다. 강남 부유층 초등생 자녀의 호화판 호텔 생일파티가 ‘빗나간 풍요’라면, 영양실조로 아들을 잃은 실직 영세민 가족의 ‘서러운 가난’은 그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이 두고두고 곱씹어 반성하며 치유책을 모색해야 할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폐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필연적 결과라는 ‘20 대 80 사회’의 참모습은 결국 이런 것인가. ‘솥뚜껑 시위’가 농민들의 한강다리 점거로 이어지는 와중에도 방학을 맞은 인천공항의 해외출국 객장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500조원에 달하는 부유층의 여유자금이 투자가 아닌 투기에 동원되면서 물신(物神)이 온 나라를 지배하는 사이, 가계빚 458조원에 짓눌린 서민경제는 거덜이 나고, 일부 보수언론은 그 책임을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좌파’ 정부에 전가하기 바쁘다. 국제사회에서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로 상징되는 빈곤이 우리 사회에도 ‘제4세계’로 엄연히 존재하며 그 음습함의 외연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눈을 들어 나라 밖을 바라보면 국제사회의 현실은 그나마 좀 나은 듯하다. 구미(歐美) 선진제국의 풍요가 40여 최빈국(最貧國) 국민들의 배고픔을 효과적으로 구휼하지는 못해도, 공적개발원조(ODA)가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때때로 ‘말 잘 듣는’ 모범국에 제공되는 외채탕감의 특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프리카의 가난이 유럽의 식민착취 탓이라면, 우리사회의 빈곤은 과연 무엇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아프리카의 경우에 비춰 찾아본다 하면 과언일까. 한때 ‘남·북’문제로 분분했던 신국제경제질서(NIEO)에 관한 해묵은 논의를 국내의 빈부격차 해소에 원용해 보려 해도 우선은 아프리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아프리카를 그저 ‘동물의 세계’로, 헐벗고 굶주린 흑인들이 까닭 없이 서로 싸우고 죽어가는 곳으로 인식할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사하라 사막 이남의 흑아프리카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정치, 경제, 사회적 파탄에 이르렀고, 최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 곧 아프리카 지역학이다. 구미에서의 아프리카 연구가 역사적인 이유로 활발할 수밖에 없다면, 중국, 일본의 경우는 매우 실질적인 것으로 해외틈새시장 공략을 위한 성격이 짙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일본은 대아프리카 원조에 공을 들이는데 우리는 국내 비철금속 품귀파동에 그저 중국 탓만 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들과 경쟁해야 할 우리 한국의 해외지역연구가 동북아, 북미, 유럽 등 소위 ‘시장성’이 있는 분야에 편중되어 연구대상 지역에 따라 학문 간에도 풍요와 빈곤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흔히 아프리카를 ‘21세기 최후의 시장’이라 하면서도 당장 가난한 탓으로, 거대한 대륙에 관한 연구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이 아쉽다. 그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국내 학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이 ‘소외학문’을 평생 업으로 삼은 극소수의 연구자들이 회합을 가질 때마다 그 분위기는 사뭇 자조(自嘲)적이다. 일본의 10분의1만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이 가난한 학문은 연구의 저변확대는커녕, 유능한 연구인력의 충원마저 어려워 소외와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게 바로 ‘보호(대상)학문’ 아니던가? 국책연구기관이 떠맡지 않으면 국립대학이라도 나서야 할 상황이건만, 연간 5400억원의 국가예산을 집행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마저 뾰족한 대책이 없는 듯하니 문제 아닌가. 국내의 과도한 빈부격차를 실증한 ‘장롱 속 아이’가 국제사회에서는 곧 아프리카임을 실감하면서 아프리카를 ‘맥없이’ 사랑하는 한 학자가 갑갑함에 내뱉는 외마디 푸념이다. 한양환 영산대 교수·명예논설위원
  • 올 최고 유행어 ‘유스카상’의 영예는?

    올 최고 유행어 ‘유스카상’의 영예는?

    2004년에도 안방극장에 숱한 유행어들이 탄생했다. 코미디 분야는 물론 드라마 분야에서도 어느 때보다 풍성한 유행어들이 속속 등장,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겼다. 올 한해 브라운관을 강타한 유행어들을 정리했다. ●드라마 분야 #“애기야 가자.” 꿈의 시청률 50%를 넘긴 SBS 주말극 ‘파리의 연인’에서 주인공 박신양의 대사. 한기주가 곤경에 처한 태영을 돕기 위해 애인을 자처하며 던진 이 한마디에 한반도 전체에 ‘애기야’ 신드롬이 몰아쳤다. 최근 각종 인터넷 사이트의 네티즌 투표에서 ‘올 한해 최고의 유행어’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이동건의 대사인 “이 안에 너 있다.”도 “애기야 가자.”와 함께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명대사로 꼽힌다. #“아자 아자 파이팅!”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김정은이 운을 떼고 KBS 2TV ‘풀하우스’의 송혜교가 완성한 명대사. 극중 송혜교가 비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격려해주던 이 대사가 힘없이 축 처져 있는 요즘 시청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줬다. 특히 젊은층 사이에서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 등을 통해 전파되며 유행이 됐다.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주인공 권상우가 극중 최지우를 옆에 두고 부메랑을 던지면서 한 대사.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인터넷 상과 일부 CF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다. #“밥 먹을래? 나랑 잘래?”vs“피고는 본 변호인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최근 월·화 안방극장 팬들을 양분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KBS2TV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SBS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에서 각각 소지섭이 임수정에게, 김래원이 김태희에게 던진 대사. 최근 드라마의 인기 만큼이나 두 대사도 인기 유행어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 남자가 내 머리 속에서 집을 짓나봐.” 컬트 드라마로 유명한 MBC ‘아일랜드’는 화제의 인정옥 작가 손에서 명대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와 유명세를 탔다. 극중 이나영이 현빈 앞에서 김민준에 마음을 털어놓으며 한 “그 남자가 내 머리 속에서 집을 짓나봐.”라는 대사와, 이나영에게 “처음엔 불쌍해서 좋았고, 지금은 좋아서 불쌍합니다.”라고 말한 현빈의 대사는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한없이 자극했다. 김민준의 “지랄스럽네.”라는 말도 인기를 얻었다. 이밖에 KBS2TV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엄마 역의 고두심이 가슴에 ‘빨간약’을 바르며 말한 “내가 마음이 많이 아파서…이거 바르면 괜찮을 것 같아서….”와 MBC ‘불새’에서 에릭의 “타는 냄새 안나요? 내 마음이 지금 불타고 있잖아요.”,“이 여자, 나한테는 하느님입니다.” 등도 연인들 사이에서 유행이 된 명대사로 꼽힌다. ●코미디 분야 #“그런거야?”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에서 개그맨 김형인과 권성호, 최영수의 대사. 군대를 배경으로 고참이 졸병의 말꼬리를 잡아 괴롭히는 상황에서 튀어나와 시청자들의 배꼽을 잡게 한다. 우리네 사회에서 윗사람의 생떼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랫사람의 답답함을 희화화시킨다. 군대를 다녀 온 남성들은 물론 여성과 10대들에게까지 공감대를 이끌어내며 올 하반기 한반도를 강타한 최고 유행어가 됐다. #“그때 그때 달라요.”,“생뚱 맞죠?” SBS ‘웃찾사’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머리에 해바라기 꽃을 단 ‘미친소’ 선생님 정찬우와 그의 조교 김태균이 유행시킨 대사. 중학교 수준의 쉬운 영어 문장을 기발한 단어 조합과 억지스런 해학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로 번역하면서 특유의 억양과 함께 청중에게 던지며 웃음을 유발한다. 말도 안되는 번역의 연속이지만 듣다 보면 그럴 듯한게 인기의 비결. 삽시간에 시청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최고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뭡니까 이게.”,“사장님, 나빠요.” KBS 2TV ‘폭소클럽’의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 코너에서 신인 개그맨 정철규가 유색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천대 문제를 다루며 히트시킨 대사. 방영 2주째부터 중소기업 사장님들로부터 “방송을 즉시 중단하라.”는 항의전화가 밀려올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났다. #“본능에 충실해.” SBS ‘웃찾사’에서 ‘초절정 느끼’ 개그로 벼락스타가 된 ‘마가린 버터 3세’ 리마리오(본명 이상훈)가 내놓은 유행어로 최근 안방극장을 강타했다.‘더듬이 춤’과 함께 느끼한 눈빛으로 말하는 이 대사 한마디에 모든 시청자들이 몸에 돋은 ‘닭살’을 어루만지며 배꼽을 움켜 잡아야 했다. 이밖에 ‘개그콘서트’에서 복학생(유세윤)의 “내 밑으로 다 조용히 햇!”,‘깜빡 홈쇼핑’ 안어벙(안상태)·김깜빡(김진철)의 “마데인(made in)”,SBS 웃찾사에서 윤택의 “뭐야?”등의 유행어들도 상한가를 쳤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유엔군, 콩고 소녀 성착취 파문

    유엔 평화유지군(Peace Keepers)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어린 소녀들을 과자 및 우유 등으로 꾀어 성폭행하거나 1∼3달러를 주고 성관계를 갖는 사례가 150건에 이른다고 뉴욕 타임스가 18일 보도했다. 신문은 피해자들이 부모한테 매를 맞을까봐 사실을 감춰 정확한 성폭행 사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유엔은 콩고와 동쪽 국경을 맞댄 브룬디에서도 평화유지군에 의한 성범죄 사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요르단의 유엔 주재 대사인 자이 라드 알 후세인 왕자가 8일 작성한 비밀 보고서는 “콩고에서 평화유지군에 의한 성착취가 심각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성관계의 대가로 현금 1∼3달러 및 음식을 주거나 고용을 약속하기도 한다. 보도에 따르면 콩고 버니아 주변의 평화유지군 캠프에서 과일을 파는 12세 소녀 헬렌은 한 병사가 준 우유에 유혹돼 성폭행을 당했다. 병사는 헬렌을 텐트로 유인, 성폭행한 뒤 1달러를 주며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뒤 과일을 파는 또다른 13세 소녀 솔랑주는 과자를 주겠다는 한 병사의 손짓에 이끌려 텐트에 다가갔다 성폭행을 당했다. 이들은 부모에게 말하면 매를 맞거나 집에서 쫓겨날까봐 사실을 감췄다고 토로했다. 헬렌이나 솔랑주가 과일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하루 수입은 1달러 안팎이다. 유엔이 13일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자 일부 평화유지군은 조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콩고에서 크게 잘못된 행위가 자행된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으며 이는 유엔의 수치”라며 엄중한 조사를 지시했다. 유엔은 평화유지군 내규로 성관계를 위해 돈이나 물품, 서비스, 고용 등을 교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콩고에서는 14세이상 소녀들과의 성관계를 합법화하고 있지만 과거 캄보디아나 보스니아에서의 성추문 때문에 18세 미만 소녀들과의 성적 접촉을 막고 있다. 그럼에도 평화유지군은 15세 이상의 소녀들과 5달러를 주고 성매매 행위를 일삼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스티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브룬디의 북동부 무잉가에서도 평화유지군 2명이 성범죄를 저질러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16개국에 6만 4000여명이 주둔 중이며 1990년대 캄보디아와 소말리아, 보스니아, 동티모르, 코소보 등지에서도 성범죄 시비가 일었다. 일부에서는 평화유지군에 의한 무기나 동물 밀수, 유류 암거래, 약탈 방조 등의 불법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국회 게릴라’ 민노당 의원 밀착취재

    ‘국회 게릴라’ 민노당 의원 밀착취재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지난 4·15 총선. 당시 정치 판갈이 여론에 힘입어 민주노동당 소속 후보 10명이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후 6개월. 국민의 희망은 뒤로한 채 파행으로 얼룩져 있는 17대 국회내에서 그들 10명은 어떤 일을 해왔을까. MBC는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 10명을 총선 직후부터 밀착 취재한 정치다큐멘터리 ‘10인의 전사들’을 17일 밤 12시에 방송한다. 이 프로그램은 보수 일색이던 우리 정치판에 스스로 좌파 정당임을 천명한 민노당 의원들의 모습을 집중 조명한다. 카메라는 반세기 만의 진보 정당으로서 ‘서민을 위한 정치의 실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보수 정당에 맞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10명 의원들의 활동 모습을 따라간다. 제작진은 지난 4월 총선 이후 8개월가까이 6㎜ 카메라를 들고 민노당 의원의 일거수 일투족을 촬영했다. 렌즈에 비친 의원들의 모습에는 그들의 고뇌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의원들은 원칙과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타협을 거부하기도 하고, 국감에서는 돋보이는 활약을 하기도 했지만, 입법단계의 원탁회의에서 배제되자 또 거리로 나선다.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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