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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론] 가족 규정 이분법적 사고 버려야/송혜림 울산대 가정복지 교수

    서울신문 5월20일자 ‘열린 세상’에 임옥희 여성이론문화연구소 공동대표의 “두 얼굴의 ‘건강가족법’”이라는 글이 기고되었다.이 글은,보건복지부가 제정한 ‘건강가족법’에 따르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가족만이 정상가족이며 건강가족이라는 점,한부모가족·독신가구·동성가족 등은 병든 가족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혼하려는 사람은 건강가정사의 이혼삼담을 반드시 거치도록 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했다. 먼저 지난 2월 의원입법으로 제정된 법은 ‘건강가족법’이 아니라 ‘건강가정기본법’이다.이 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이름에서 내용에 이르기까지 많은 오해를 해 왔다.내용에 관한 근본적인 오해는,건강가정은 바로 아들·딸 낳아 기르는 정상가족이라는 것이다.그래서 건강가족이라는 발상은 건강하지 못한 가족(한부모가족·독신가구·동성가족 등)을 병든 가족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지만,법 그 어디에서도 ‘정상가족’운운하며 특정한 형태의 가족을 명시한 바 없다.오히려 그러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특정 유형의 가정을 건강하지 못한 가족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을 뿐이다.또 법에서는 혼인과 출산을 의무로 규정하지 않는다.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자는 것일 뿐이다.그리고 이혼상담과 관련된 건강가정기본법의 취지는,이혼 예방을 위해 이혼전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이혼조정을 내실화함과 동시에,이혼할 가족에게 자녀양육·재산·정서 등의 문제에 도움을 주는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오해하는 바와 같이 이혼상담을 의무화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법의 내용을 왜곡하는 이러한 오해는 건강가정기본법이 양성평등에 위배된다는 편견에서 비롯되는 것 같은데,사실 이 법은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한 가족관계 증진 조항 등을 법 전반에 걸쳐 강조해 양성평등이 기본이념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그런데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 있으랴.근본적으로 우리 모두 양성 평등의 길로 가야 하는 이 때,불평등과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찬 ‘가족’ 또는 ‘가정’을 거론한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구시대적이며,그 글에서 지적하듯 19세기적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러나 ‘건강가정’의 구현은 여성발전기본법의 기본이념 중 하나이며,여성부 제1차 기본계획의 성과와 심화발전 과제에서도 건강한 가정의 구현이 비중있게 다루어져,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왜 그토록 건강가정을 폄하했는가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나는 이 사회가 느리지만 평등에 익숙해지는 데,양성평등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기여가 크다고 믿는다.그리고 건강가정기본법에서 양성평등이 중요한 이념인 한 나는 그들과 함께 갈 수 있다고 또한 믿는다.그러나 가정은 양성평등이라는 관점 하나만으로 접근하기에는 다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가족·가정은 남녀관계뿐 아니라 일상적인 의식주생활과 자원관리,세대 간 관계,부모됨,여가,공동체 생활문화,교육,양육,경제,소비,개인-가족-사회로 이어지는 생활의 경험,시민의식,일과의 조화 등 복합적인 내용을 담은 연속적 생활세계이며 문화이다.그래서 평등과 민주성,평화,복지,안정,삶의 질,균형,자율성과 같은 이념의 조화 속에 ‘건강성’을 이해해야 건강가정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오해와 편견을 버리고 법이 지향하는 바,양성평등,세대간 존중,생활의 균형,사회적 지향성을 조화시키는 건강한 가정을 위해 함께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송혜림 울산대 가정복지 교수˝
  • 계간지 ‘시평’ 여름호 아시아의 저항시인 특집

    “(전략)우리들은 함경도 남자와 여자/착취자의 반항에 대해 역사를 새로 쓰는 이 고향의 이름에 맹세코/온 조선땅에 봉화를 올렸던 몇 차례 봉기에/피를 쏟은 이 고향의 흙에 맹세코/고개를 처박고 염치없이 진지를 적에게 내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민족시인 누구인가가 썼음직한 이 시는 그러나 놀랍게도 일본 시인 마키무라 고( 村浩·1912∼1938)가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조선인의 입장에서 쓴 ‘간도 파르티잔의 노래’라는 시다.그가 이 시를 썼을 때는 고작 열 아홉살이었으며,어릴 때부터 ‘고치(高知)현의 천재’로 불렸던 이 소년작가는 그러나 ‘군국 일본’에의 맹종을 거부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스물 여섯에 정신병원에서 병사하고 말았다.이 시는 당시에 빛을 보지 못하고 출판사주가 기름종이에 싸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가 죽은지 25년 만에야 세상에 내놓았다.일본의 시인 사가와 아키(佐川亞紀)는 그를 두고 ‘반전과 아시아 침략 반대를 관철한 시인으로,일본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전한다. 시전문지 ‘시평’ 여름호는 마키무라 고를 비롯,항일 중국시인 따이왕수(戴望舒)와 히우 로안,프랑스에 저항한 베트남의 부 까오 등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저항시인들의 시편을 묶은 특집을 꾸몄다.그 시편에 드러나듯 전란에 휩싸인 지난 세기의 아시아 대륙은 살육과 착취,억압과 강탈이 이어져 어둡고 참혹했지만 그 속에서도 시인들은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찢어진 나의 손바닥으로/이 광활한 대지를 어루만진다/이 쪽은 이미 잿더미로 변했고/저 쪽은 피와 진흙뿐이다(후략).” 이 시는 중국의 시인 따이왕수가 1942년 일제에 의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뒤 자신이 겪은 중일전쟁의 기억을 담아낸 항일시로,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이렇듯 거칠 것 없이 내닫는 일본의 침략 행보였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심지어는 일본 내에서조차 저항과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3년 전의 여름/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3000개의 뼈를 보았다/반 세기 전 그 마을에 일본 군대가 와서/마을 사람들을 벼랑 아래 모아놓고 총살시켜(중략)/나는 가끔 생각한다/그 뼈를 부러워하고 있어서/내가 살해당할 때도/그랬으면 좋겠다(후략).” 전후 세대로,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전시인 도쿠히로 야스요(德弘康代)는 이렇게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양심으로 통렬한 자기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절체절명의 싸움을 벌여야 했던 베트남의 저항시도 처절하고 강인하다.“(전략)들판 가운데 흰 비석에/당신이 열사라고 써놓았다/당신을 그리며 나는,당신!동지!라고 불러본다/수 만의 마음중 일편단심이라고.” 베트남의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이 시는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웠던 ‘시인 전사’ 부까오의 ‘도이산’이라는 시다.시편은 지난 세기 저항시들이 의도를 앞세워 포기해야 했던 문학적 미감(美感)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성과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는 순수이면서 동시에 이념일 수 있고,싸움이면서 또한 화해이기도 하다.최근 다시 군국화하는 일본,그리고 모든 강대국에 대해 아시아인이 이 시에 담아 보내는 메시지는 ‘화해 그리고 끝없는 저항’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8일 TV 하이라이트]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오후 10시35분) ‘사진토크 찰칵’에서는 찰칵 엄정화의 누드 사진을 최초로 공개하고,배우 공효진의 일상을 사진으로 들여다 본다.또 ‘즉석 랭킹 점점 작게’에서는 이웃의 심리를 엿본다.여대생 100명에게 던지는 스타들의 기상천외한 질문.단계가 갈수록 대답의 수가 점점 작아져야 한다. ●씨네24(낮 12시25분) 아일랜드의 한 수녀원에서 네 명의 여성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됐던 억압과 착취를 기록한 ‘막달레나 시스터즈’를 소개한다.미국에서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킬 빌 2’.주인공 더 브라이드와 빌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개성 있는 액션과 스토리를 풀어간다. ●애니토피아(오후 9시10분) 한국의 단편 애니메이션 속에서 그려진 가족의 풍경들을 들여다본다.그러나 이 단편들에서 그려진 가족의 풍경들은 모두 행복하지만은 않다.부모가 모두 함께 등장하는 경우도 몹시 드물다.‘애니를 만나다’코너에서는 선화예고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팀 또기로딱의 ‘찻잔 속의 바다’를 상영한다. ●성인가요베스트30(오후 10시15분)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어버이날 특집으로 구성된다.iTV 사옥에 야외 특설무대를 마련하여 인천,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독거 노인들을 초청하여 따뜻한 식사 속에 흥겨운 잔치 한마당을 선사한다.현철,김부자,오승근,현숙,배일호,조항조 등의 인기 국내 최고의 가수들이 출연한다. ●그것이 알고싶다(오후 10시55분) 지난 달 16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코엘류 감독은 사퇴를 선언했다.그러나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그의 사퇴가 남긴 문제들을 분석하면서 흔들리는 한국 축구가 2002년 월드컵 4강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계승하여 발전하기 위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알아본다. ●애정의 조건(오후 7시50분) 금파를 만나 은파 사정을 다 들은 윤택은 혼자 살아가려는 은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돼 금파에게 은파 거처를 알리지 못한다.한편 만득과 현실은 사귀는 사람이 인사온다는 애리 말에 음식하고 청소하느라 분주하다.때마침 화장실 청소하러 온 윤택과 범수에게도 이런저런 일을 시킨다. ●찔레꽃(오전 8시5분) 수철은 경찰서로 연행되어 가고,경수는 수옥을 찾아가 모든 것을 알린다.경찰서에서 수철을 만난 수옥은 준서 사건이 수철이 한 것임을 알고 절망한다.준서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수옥은 준서에게 원망을 털어놓는다.준서는 팔은 잃었지만 수옥과 결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
  • 말말말˙˙˙

    우리 교회는 천민자본주의의 폐해가 그대로 들어와 있다.종교라는 이름 아래 노동 착취와 인격적 모독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인천 계양지역 기독교회노동조합을 주도한 이길원 목사,교회 세습화 타파 등 교회 내부 개혁이 시급하다며.˝
  • ‘잠자는 미녀vs호두까기’ 뭘 봐야 좋을까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로 불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호두까기 인형’이 색다른 버전으로 오는 8일 나란히 무대에 오른다. 국립발레단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고전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의 작품. LG아트센터에서 막올리는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의 ‘호두까기 인형’은 지난해 내한공연을 가진 ‘백조의 호수’처럼 현대발레를 활용한 댄스 뮤지컬이다.두 작품 모두 초등학생도 관람할 수 있는 무대여서 가족 단위의 공연으로 제격이다. ●국립발레단 ‘잠자는 숲속의 미녀’ 마녀의 저주로 100년간의 잠에 빠진 공주가 왕자의 키스로 깨어난다는 동화를 바탕으로 한 마리우스 프티파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고전발레의 모든 테크닉이 담겨 있어 ‘발레의 교과서’로 통한다.누레예프 버전은,1961년 서방세계로 망명한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출신의 전설적인 안무가 누레예프가 파리오페라발레단 재직 당시 프티파의 안무에 그만의 독특한 세련미와 남성미를 가미해 재안무한 것.남성 무용수들의 힘과 테크닉을 극대화함으로써 다른 공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화려하고,역동적인 무대가 특징이다.그만큼 무용수들에겐 많은 고통이 따른다. 워낙 어렵고 까다로운데다 누레예프 재단이 엄격하게 레퍼토리 관리를 하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단체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이탈리아의 라 스칼라발레단,오스트리아의 비엔나발레단 등 세 곳뿐이다.때문에 국립발레단이 창단 이후 처음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공연하면서 누레예프 버전을 선택한 것은 과감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국내에선 유니버설발레단이 마린스키 버전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공연한 바 있다. 명성에 걸맞게 제작 규모 또한 엄청나다.이탈리아에서 공수하는 300벌의 의상 대여료만 2억원.총 제작비는 11억 5000만원에 달한다.무용수도 100명이 넘는다.국립발레단은 누레예프와 25년간 함께 작업했던 영국인 안무가 겸 무용수 패트리샤 뤼안을 초빙해 단원들을 연습시키는 등 작품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공연에는 주역 세 커플이 번갈아 출연한다.국립발레단 간판스타인 김주원과 ‘발레 혜성’이란 별명을 얻은 신예 이원철,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발레단 솔리스트인 안바 자로바와 한국 대표 발레리노 이원국,미국 보스턴발레단 수석무용수 폴리아나 리베로와 휴스턴발레단 수석무용수 사이먼 볼이 각각 짝을 이룬다.15일까지 1588-7890. ●매튜 본 ‘호두까기 인형’ 우아한 여성백조 대신 근육질 남성 백조의 역동적인 군무(백조의 호수)로 파격의 즐거움을 선사했던 안무가 매튜 본이 이번엔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명작 ‘호두까기 인형’을 댄스 뮤지컬로 각색한 무대를 선보인다. 국내에는 ‘백조의 호수’가 먼저 소개됐지만 안무 순서는 ‘호두까기 인형’이 앞선다.1992년 ‘호두까기 인형’탄생 100주년 기념작으로 만든 이 작품은 매튜 본이 안무한 첫 장편 발레 공연으로 그해 에든버러페스티벌에서 성황리에 초연됐다. 고전발레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그의 독특한 안무 스타일은 ‘호두까기 인형’의 성공에 힘입어 이후 ‘하이랜드 플링’‘백조의 호수’‘신데렐라’‘카 맨’등 일련의 화제작을 낳았다. 이번에 공연되는 ‘호두까기 인형’은 매튜 본이 지난 2002년 공연단체 ‘뉴 어드벤처스’를 창단하면서 리바이벌한 것.초연 이후 1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지난 2월까지 영국 전역에서 ‘백조의 호수’를 능가하는 흥행 수익을 올렸다. 매튜 본의 ‘호두까기 인형’은 원작에 설정된 중산층 가정 대신 악랄한 고아원장이 원생들을 착취하는 춥고 음울한 고아원을 배경으로 택했다.사랑의 슬픔과 기쁨을 통해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는 클라라와 소년에서 근육질의 멋진 남성으로 변모하는 호두까기인형 등 성장드라마의 이미지를 강조한 점도 색다르다.클라라의 꿈속에서 고아원생들이 하얀 빙판위에서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이나 오색 빛깔의 사탕과자나라 등은 단숨에 관객을 마법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장치들이다. 초연 당시 클라라역을 맡았던 에타 머핏이 같은 배역으로 무대에 설 예정이어서 한층 기대를 모은다.30일까지(02)2005-0114.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공공 직업안정기관 ‘유명무실’

    정부가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을 줄이기 위해 각종 대책을 발표하고 있지만 정작 정책의 손발 노릇을 해야 할 고용서비스 공공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수적으로는 크게 증가했지만 내용면에서는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직업훈련기관 대부분 소극적 현재 우리나라 직업안정기관은 공공·민간 부문을 합쳐 총 7600여개(2002년 말 기준)에 이른다.공공부문은 555개에 그쳐 전체의 10%에도 못미친다. 숫자가 적은 것은 둘째치고,더 심각한 것은 고용안정센터와 한국산업인력공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유명무실하게 운용된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청과 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관 등은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지자체의 취업정보센터와 직업훈련기관 등도 소극적이긴 마찬가지다. 민간부문은 더하다.건설일용직·유흥업소 종사자에 대한 직업소개에 집중되고,이에 따른 요금 착취 등 부조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선진국에 진입할수록 공공 직업안정기관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만큼 고용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성 갖춘 선진방안 마련해야 한국노동연구원 유길상 선임연구위원은 “담당 인력의 전문성 부재와 노동시장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 부재 등이 공공 직업안정기관의 고용서비스 효율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적으로 고용서비스와 관련이 적은 지방노동청에서 직업훈련을 담당하고 있지만,업무의 성격상 고용안정센터로의 흡수·통합 등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활발하게 운영 중인 고용안정센터의 인적 구성도 문제다.행정업무를 맡는 공무원과 민간 신분의 직업상담원으로 이원화돼 있어 조직 내 갈등을 빚는 주요인으로 꼽힌다.심지어 두 부류간 갈등은 물리적인 충돌까지도 야기하는 실정이다. 여기에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안전망 구축을 구실로 공공 직업안정기관은 부지기수로 늘었지만,정작 이들 기관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부의 노력은 전무했다는 지적이다. 늦게나마 올해 초부터 노사정위원회에서 고용서비스 선진화 방안 마련에 착수했지만 아직까지 대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어기구 노사정위원회 경제소위 전문위원은 “지금까지 고용서비스 기관의 문제점에 대해 집중적인 토의와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해왔다.”면서 “하반기까지는 고용서비스 개선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진상기자 jsr@˝
  • 케리 “슈퍼301조 부활”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존 케리(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통상 보복법안인 ‘슈퍼 301조’를 즉각 부활하겠다고 공언했다. 케리 의원은 26일부터 일자리 창출을 위한 3일간 ‘경제유세’를 시작하면서 부시 행정부가 불공정 무역을 방관,미국의 근로자와 기업에 타격을 줬다고 주장했다. 시장을 개방해도 반드시 공정한 경쟁을 토대로 이뤄져야 하는데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 때보다 훨씬 못했다며 6가지 대외통상 원칙을 밝혔다.부시 행정부의 자유무역 원칙에 비해 보호무역의 성향이 상당히 짙다. 이번 대선에서 최대 접전지로 꼽히는 웨스트버지니아·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미시간 등이 실직문제로 어려움을 겪자 이들 지역을 순회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통상정책과 차별화를 시도하려는 대선전략의 일환이다. 그는 먼저 외국의 무역장벽에 대응하기 위해 2002년 시효가 끝난 ‘슈퍼 301조’의 부활을 촉구했다.이어 당선 후 120일간 무역상대국이 의무사항을 제대로 지키는지를 따지기 위해 기존의 모든 무역협정을 검토,위반사항이 드러나면 강경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검토가 끝나기 전에는 새로운 무역협정을 맺지 않겠다고 했다. 셋째,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미성년 노동을 근절시키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특히 중국내 노동착취의 조사를 요구하고 각국의 노동자 권리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내겠다고 말했다. 넷째 무역대표부(USTR)의 예산을 두배로 늘려 무역협정에 적극 대응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공격적으로 제소하겠다고 말했다. 다섯째,중소기업청을 신설해 무역관련법의 혜택을 보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중국·일본과 같은 불법적인 환율조작을 중단토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슈퍼 301조’가 해당국에 직접 보복조치를 가한다는 점에서 쌍무간 자유무역 협정체결과 다자간 협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부시 행정부의 통상정책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자유무역 협정을 통해 국내 기업이 외국 근로자를 고용하면 세제혜택을 주는 ‘아웃소싱’을 허용하지만 케리는 미 근로자의 일자리만 빼앗는다고 반대한다. 이는 업계의 지지를 받는 부시 행정부가 자유무역을 통해 석유재벌이나 첨단기업 등의 기득권을 확대하려는 것과 달리 근로계층의 지지가 두터운 케리와 민주당으로서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약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설령 케리가 당선돼 ‘슈퍼 301조’가 부활해도 환율과 저임금 등이 문제가 된 중국이 직접적 타깃이 될 뿐 한국이나 일본은 1차적인 영향권에서는 벗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반도체·통신·철강 분야에 부분적인 마찰이 있으나,이는 슈퍼 301조보다 WTO 규정이 선행될 것이라는 기대가 그 근거다. 그러나 케리는 공식 유세 홈페이지(www.johnkerry.com)를 통해서는 “‘슈퍼 301조 부활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전제,“일본·한국과 같은 미국의 주요 수출시장이 아직도 만족할 만한 개방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며 한국시장도 개방압력 타깃으로 꼽고 있다. mip@˝
  • [이런 책 어때요]

    ●살아 있는 무명용사 이야기-장이브르 나우르지음 20세기 사학계의 큰 흐름으로 떠오른 것은 단연 신문화사·미시사·일상생활사·심성사였다.이런 역사 글쓰기의 계보를 잇는 이 책은 1차대전후 행방불명된 앙텔므 망젱이란 한 프랑스 귀환 병사의 이야기를 다룬 ‘전쟁미시사’다.프랑스는 전쟁이 자국 본토에서 일어났던 만큼 그 인적·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1차대전 최대 피해국 중 하나다.1914년부터 1918년까지 25만명의 군인이 행방불명됐다.‘살아 있는 무명용사’로 불린 망젱은 그 비극을 대변한다.이 책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떠올리게 하는 현대 신문화사의 역작이다.1만 5000원. ●제국의 슬픔-찰머스 존슨 지음 ‘선제공격’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어떻게 자국의 헌법과 민주주의,나아가 세계 각국의 주권을 짓밟으며 확대되고 있는가를 고찰.미국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미국은 해외 식민지를 정복하고 착취하는 과거의 제국들과는 달리,군사기지를 해외 전략적 요지에 진출시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새로운 유형의 제국,즉 ‘군사기지의 제국’이라고 주장한다.미국은 전 세계에 725개(2002년 기준)의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저자는 해외주둔 미군의 ‘전사문화’가 역으로 미국 사회 전체를 군국주의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2만원. ●문익환 평전-김형수 지음 “역사는 꿈을 통해 부활한다.”고 한 늦봄 문익환.그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으며,어려운 한자어에 갇혀 있던 성서를 생동하는 우리 말로 옮겨놓은 구약연구자였고,시편의 맛을 살려내기 위해 한국시를 섭렵하다 스스로 시인이 돼버린 사람이다.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엄혹했던 ‘겨울공화국’에 희망의 불씨를 심은 민주인사로 기억된다.이 책은 현대사의 질풍노도를 온몸으로 헤쳐온 그의 진정한 면모를 밝힌다.저자(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는 문익환은 ‘좌’도 ‘우’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꿈꾼 ‘중립화 통일론자’라고 주장한다.1만 8000원. ●침팬지 폴리틱스-프란스 드 발 지음 정치적 권력관계와 사회적 우열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침팬지에 관한 보고서.동물행동학자인 저자는 네덜란드 아넴 지방의 한 동물원에서 침팬지 무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 사이에 고도의 정치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침팬지들은 싸움을 한 뒤엔 서로 회피하기보다는 갖가지 접촉행동에 나선다.싸움이 끝난지 1분도 안돼 서로 껴안고 키스에 몰두하거나 털을 골라주기도 한다.갈등을 해소할 필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저자는 인간의 권력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거의 모두 침팬지사회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1만 8000원. ●경주문화권-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지음 경주는 사로국으로 출발한 신라의 발원지였다.신라문화권의 모태가 된 경주문화권엔 경주를 비롯해 영천·포항·경산·청도·울주·울산 등이 포함된다.경주 사람들이 사방 80리 지역에 해당하는 영해나 영천,울주와 통혼권을 형성해왔던 사실은 경주문화권의 유구한 전통을 잘 말해준다.신라 멸망 이후 경주는 정치적으론 소외돼갔지만 그 사회경제적인 기반은 고려·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조선시대 여주 이씨·경주 손씨의 집성촌인 양동마을이나 ‘경주최부잣집’ 같은 만석꾼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1만 5000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5)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下)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여 부르면서 농민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하고 끝났다.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데스크 시각] 촛불집회와 강장관/손성진 사회교육부 차장

    군인이나 경찰지휘관뿐만 아니라 군사정권 때의 ‘재상’들은 통치권자의 수족이었다.시키면 시키는 대로,아니면 스스로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어서 국민을 으르기도 했고 회유하기도 했다. 국무위원으로서 중립을 지키지 못한 강금실 법무장관의 언행이 최근 파문을 일으켰다.탄핵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철회’를 언급하고 또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단을 만난 것은 온당치 않았다.강 장관의 뒤늦은 해명처럼 탄핵과는 무관한 만남이었다 해도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장관의 직분은 혼란을 수습해서 나라가 정상궤도에 복귀하게 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어느 한쪽을 편들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강 장관이 ‘노무현 살리기’에 나섰다는 의심을 받으며 분주히 움직이지 않아도,국회의 탄핵 의결이 부당한 것이었다면 헌법재판소가 합당한 판단을 내려줄 것이다. 헌법재판소나 국회,장관보다 더 높은 곳에는 국민이 있다.노 대통령과 야당중에 누가 잘못했느냐의 최종적인 판단과 선택은 국민의 권한이다.강 장관의 생각이 국민의 생각과 같다 해도 그가 나서기 전부터 국민은 이미 정의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장관이 독재정권기의 관료처럼 대통령의 대변자가 되어서 옹호할 필요가 없는 시대인 것이다.우리 국민은 이제 무지몽매하지 않다.장관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다. 촛불 집회에 나온 한 40대 시민은 말했다.“찬탈 수법이 좀더 교묘해진 것을 제외하면 ‘6월항쟁’ 때와 매우 흡사합니다.자발적인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우리 국민은 민주화를 거치며 축적된 의식과 세계정세를 정확히 보는 눈을 갖게 됐습니다.학습을 많이 했고 깨어 있습니다.” 광화문의 촛불 행렬을 보며 국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사실 국민이 탄압받고 착취당할 때도 이 헌법 제1조 2항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국민은 억압을 당하다가도 최후의 순간에는 늘 힘을 합쳐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지금 광화문은 이런 상황이다.봉오리 속에 숨어 있던 민중의 힘이 위기의 찰나를 맞아 개화하고 있다.대다수 지역구에서 현역의원이 뒤바뀌는,정치의 대변화가 일어날 조짐은 국민의 의사를 거스를 때 어떤 결과가 되돌아오는지 보여준다.정치 권력층은 국민의 뜻,여론의 방향을 알고자 늘 노력해야 한다.국민과 교감해 민의를 정확히 정치에 비추어 주는 것이 정치인들이 할 일임은 물론이다.광화문은 지금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어린이들도 촛불을 들고 어른들을 배우고 있다.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은 폭력을 쓰지 못한다.서울대의 한 교수는 예전 학생운동이 선동적 의미가 강했다면 이번 집회는 시민들의 상식적 판단에 자율적으로 근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선동과 파괴가 아니라 비폭력 평화적인 수단으로도 의사를 전달하고 역사를 돌릴 수 있음을 국민 스스로 깨우치고 있다. “광화문 거리에 앉는 것은 과거엔 생각도 못했습니다.저 공간은 닫힌 공간이었고 열고 들어가 쟁취하려는 대상이었습니다.지금은 저렇게 많은 민중이 앉아 있는,열린 공간이 됐습니다.”(촛불집회에 참가한 30대 회사원) 정치인들은 정쟁으로 얼룩진 의사당을 박차고 광화문으로 나와 민심을 읽어야 한다.‘민심은 천심’‘민중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동서양 격언의 의미를 되새기며 위정자들은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손성진 사회교육부 차장 sonsj@˝
  • [CEO칼럼] 外資와의 협력 인식/닉 라일리 GM대우 사장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외국기업(자본)과의 협력관계를 환영하고 장려해주는 시각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우리 모두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외국 자본과의 협력(Foreign Partnership).’ 이 말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참으로 다양한 것 같다.자부심에서부터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상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협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한 분위기이다.거대 다국적 기업이 진출하면 자국의 산업을 잠식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착취해 그들만의 이익을 취할 뿐 자국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가 앞서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전체적인 시야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이러한 측면에서 GM대우가 2002년 10월 출범 이후 17개월여 동안 보여온 모습들을 보면 외국인 투자 및 외국자본과의 협력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GM대우는 외형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한국기업에 가깝다.GM그룹이 지분의 3분의 2를 갖고 있지만 3분의 1은 한국 은행들이 소유하고 있다.직원의 99.9%가 한국인이며 회사운영에도 한국인 경영진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회사의 최상 목표도 한국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자동차 메이커로 거듭나는 것이다.고객에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가치를 제공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우리는 한국기업으로서의 역할에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GM대우는 출범 후 1년반 동안 제품개발,직원교육,각종 시설개선 등에 10억 달러(1조 2000여억원) 이상을 투입했다.이 과정에서 GM대우는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자동차회사로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최대 수출 기업 명단에도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재정적 어려움으로 생존이 어려웠을 회사가 국제적 협력(International partnership)으로 되살아나 ‘대우’라는 이름도 보존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수천개의 일자리도 창출한 것이다. 또 많은 한국의 기업들이 사업확장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GM대우는 한국에 계속 투자하고 있다.얼마 전 우리는 신차 개발 및 생산,디젤엔진 개발 및 디젤엔진공장 건설,생산시설 개선 및 조정 등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다.덧붙여 어려움에 처해 있는 한국의 한 변속기생산 업체에 대한 인수도 곧 마무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런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새로 투자되는 금액은 약 1조 7400억원에 이른다.이로 인해 한국내 각 공장의 생산성이 극대화되면 1000명 이상의 고용창출 효과가 기대된다.또한 자동차 제조업체 고용인원 1명당 부품업체,판매업체,애프터서비스업체,광고대행업체 등 17명의 추가 고용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이런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이번의 신규투자로 GM대우가 창출하는 고용 효과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이번 투자는 GM대우 내부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줌은 물론 지역경제 활성화와 대규모 고용창출 등을 통해 한국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성공은 또다른 성공을 낳는다.GM대우의 성공은 한국이 훌륭한 투자처임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외국인 투자자들이 GM대우의 성공에 대해 알게 되면 다른 아·태지역보다 한국을 택해 투자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모든 사업이 성공할 수 없듯 모든 외국인 투자가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GM대우 사례와 같은 국제적 협력 관계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국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두려워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외국기업(자본)과의 협력관계를 환영하고 장려해주는 시각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우리 모두 얻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닉 라일리 GM대우 사장˝
  • SBS ‘소문난‘ 여자교도소 공개

    SBS ‘소문난 TV 독점 7시’(진행 유정현 이유진)는 16일 국내 유일의 여자교도소인 ‘청주여자교도소’를 방송 사상 최초로 공개한다. 교도소 내부의 방·화장실·식당 등 생활공간과 재소자들의 하루를 24시간 밀착취재하여 보여준다.수감 이후 엄마가 된 재소자가 18개월 동안 아이를 키우는 교도소안 육아일기와 돌잔치 등도 카메라에 담았다.
  • [토요일 아침에] 평화로운 사람/유흥식 주교·천주교 대전교구 부교구장

    오늘날 지구상에는 30여 군데에 이르는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그중 몇몇 나라의 전쟁은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나머지는 잊혀지고 있다.그렇다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지역 상황이 덜 처참한 것은 결코 아니다.그런가 하면,이른바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국가에서도 폭력과 증오,다툼이 발견된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모든 사람들은 평화와 화합,일치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다.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좋은 뜻을 가진 이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 안에서 한결같고 견고한 평화를 얻지 못하였다.그렇다면 모두가 어울려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이러한 평화를 건설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남북이 갈라져 있고,북한의 핵 문제는 동남아의 평화를 위협하며 세계적인 문제가 되어 있다.남한 안에서도 계층,지연,학연,혈연,및 세대간에 많은 갈등이 있음을 보고 있다.갈등과 투쟁이 극에 달한 정치를 보노라면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다.우리 사회가 평화롭지 못하고,서로간의 관계가 평화로운 관계가 아니므로 평화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다.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샬롬”은 개인적인 사람들 사이의 조화,법의 질서에서 보장받은 평온함을 뜻한다.우리 조상들이 소망하던 부귀다남,건강장수 등의 복락에서 오는 안녕과도 통함을 볼 수 있다.죽은 이들 앞에서 “평안함에 쉬어 지이다.”라고 말하면서 명복을 빌고,“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로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온을 축원한다.요즈음 많은 이들이 “건강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몸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다 먹는 모습을 보노라면,건강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참된 의미의 평화를 생각하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자신이 평화의 건설자가 되기 위하여 강한 사랑이 요구된다.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조국이나 도시를 나 자신의 조국과 도시처럼 사랑해야 한다.매일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봉사하면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한다.이 사랑은 또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그리고 그들을 보편적 형제애의 대상자로 바라보기 위해,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평화는 바로 지금 여기서,나와 이웃과 맺는 모든 관계로부터 시작된다.우리가 전쟁의 위험을 없애려면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공격적인 성향,착취 및 이기심을 우리 안에서 뽑아버려야 한다. 평화는 불꽃처럼 옆으로 퍼져 나가는 특징을 기지고 있다.우리도 평화로운 삶을 통하여 만나는 이웃들에게 평화를 전해 주는 참 평화의 건설자,평화의 전달자가 될 수 있다.평화의 전달자가 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최근에 로마에서 주교들의 피정(避靜)에 참여하고 돌아왔다.전세계의 43개국에서 모여든 100명이 넘는 주교들과 늘 이웃을 내 몸처럼,이웃 나라를 내 나라처럼 사랑하고,나의 한 어깨에는 내가 책임진 교구를 다른 어깨에는 다른 나라의 교구를 짊어지고 사랑하고 기도하겠다는 “사랑의 서약”을 하였다.내가 매일 드리는 기도 안에는 내 나라,내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도 이웃 교회도 자리잡고 있고,세계 평화를 위하여,특별히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하여 나의 삶을 바쳐 드리고 있다. 유흥식 주교·천주교 대전교구 부교구장˝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씨줄날줄] 노벨과 황우석/신연숙 논설위원

    노벨이 사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기금으로 하여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 수여하도록 한 노벨상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인명 살상용 전쟁무기로 사용되게 된 것에 대한 유감의 표시로 나온 것이었다.지뢰 발명자이자 군수공장 운영자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노벨은 자신도 보다 안전한 화약을 만드는 일에 몰두,글리세린과 규조토의 혼합물로 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광산,터널,철도,운하 공사장 등에 필수적이었던 다이너마이트의 인기로 거부가 된 노벨은 뜻밖에 다이너마이트가 인간 살상무기로 사용되자 고통스러워했다.평화운동에 나선 노벨은 마침내 노벨상에 특별히 평화상 분야를 두고 ‘국가간 우애를 돈독히 하거나,군대를 폐지 또는 축소시키거나,평화회담을 주창·개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이 상을 주도록 유언장에 지시하기에 이른다.노벨은 일찍이 과학기술의 양면성을 뼛속 깊이 느끼며 회한과 함께 1895년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었다. 100년여가 흐른 오늘날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인식은 과학철학,과학윤리,과학사회학 등의 학문 분야를 낳으며 이에 대한 평가를 국가 과학기술 정책 결정의 필수 고려 요소로 간주하게 만들었다.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놀라운 효용에도 불구하고 인간배아 복제를 금지시키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년간의 논쟁 끝에 생명윤리법을 제정한 것은 이러한 흐름의 결과다.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를 복제해 줄기세포주 확립에 성공한 황우석 교수의 연구결과가 세계를 놀라게 한 것도 이 기술이 함의하는 결과의 양면성 때문이다.난치병 치료나 이식용 장기 개발 등 인류 복지에 새 희망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몸 착취,배아의 파기,인간의 복제,나아가 인류생태계의 혼란 등 엄청난 부작용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기술인 것이다. 황 교수의 이러한 연구 성과를 놓고 우리 과학계는 아직까지 흥분의 분위기가 역력하다.황교수의 노벨상 수상을 지원하는 ‘황우석 후원회’도 결성된다고 한다.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세계적 ‘쾌거’가 틀림없지만 상이란 것은 제정 취지에 맞아야 수상 대상이 될 것이다.노벨상을 제정한 노벨은 이번 연구가 ‘인류에 큰 공헌을 한’연구라고 평가할지,또 노벨 재단은 어떻게 평가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신연숙 논설위원 yshin@˝
  • 노동자분신 ‘勞·勞 갈등’ 조짐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탁학수)가 사내협력업체 전 근로자 박일수씨 분신자살사건 처리를 놓고 분신대책위와 의견차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단체와의 관계를 끊을 뜻을 비쳐 주목된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17일 성명을 통해 “박씨 분신자살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중심의 분신대책위가 적극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고 “분신대책위가 요구를 무시하고 특정 목적을 위해 현 사태를 악용하면 민주노총을 포함한 울산지역 노동단체와 모든 관계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노조는 또 이날 새벽 협력업체 해고근로자 3명이 기습적으로 회사안 크레인 점거농성을 한 데 대해서도 힘과 물리력을 동원한 극단적인 방법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성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한편 박씨 분신대책위는 북구 화봉동 현대병원에 있던 박씨 시신을 이날 오후 5시 동구 전하동 현대중공업 인근 울산대학병원 영안실로 옮겼다. 앞서 이날 오전 6시쯤 이운남(34·사내하청노조 조직부장)씨 등 현대중공업 사내협력업체 전 근로자 3명이 현대중공업 회사안 정문 근처에 있는 219호 크레인(높이 30m) 위에 기습적으로 올라가 농성을 하다 오전 11시쯤 회사 경비대원들에 의해 해산돼 경찰로 넘겨졌다. 이씨 등은 ▲하청노조 인정과 노조활동 보장 ▲하청노동자 부당착취 중단 등을 요구했다.회사측은 투신에 대비해 크레인 아래에 매트리스 등을 깔고 경비원 60여명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 해산했다. 분신대책위는 이날 현대중공업 노조가 지난 16일 오후 7시30분쯤 박씨 유족인 딸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조측은 유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직접 만나 들어보려고 했으나 분신대책위측에서 막아 무산됐다고 해명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
  • “비정규직 차별말라”유서 현대重 협력업체 前근로자 분신자살

    최근 노사화합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사내 협력업체 전 근로자가 분신자살,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14일 오전 5시쯤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부 선실공장 뒤에서 사내협력업체 인터기업 전 근로자 박일수(50·울산시 동구 일산동) 씨가 분신자살했다.박씨의 분신현장에서 휘발유를 담았던 것으로 보이는 1.8ℓ짜리 페트병이 있었으며,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촉구하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박씨는 A4용지 3장 분량의 유서에서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차별과 멸시,박탈감,착취에서 오는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밝혔다.또 “그동안 처우개선과 차별경영 개선을 요구했으나 문제 개선에 접근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박씨는 지난해 7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사내에서 배포하다 근무 중인 인터기업과 갈등이 생겨 지난해 12월31일 퇴사했으며 이날 오전 4시쯤 사내로 들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울산지방경찰청은 15일 현대중공업과 인터기업 관계자 등을 상대로 박씨의 근무 당시 차별이나 불이익 등 자살경위를 조사 중이다. 경찰은 이와 함께 박씨의 사체를 부검하려고 했으나 민주노총 대책위원회의 저지로 무산됐다. 대책위는 이날 오전 현대병원 앞에서 근로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보고대회를 갖고 “박씨의 장례를 ‘울산노동자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박씨의 시신이 안치된 울산시 북구 현대병원 영안실 주변에는 민주노총 관계자 등 근로자 200여명이 지키고 있으며,경찰도 300여명의 병력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박씨의 분신자살과 관련,민주노총 및 한국노총 울산지역본부는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일제히 냈다.그러나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각 노동단체들이 박씨의 분신자살을 이용해 조직의 위상을 강화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짙다.”며 “사건 해결의 모든 절차와 권한을 현대중공업 노조에 일임하라.”고 주장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⑪ 함양군수 김종직을 아십니까?(중)

    함양군 휴천면 엄천마을 가는 길 볕바른 쪽 논에는 입춘을 며칠 앞둔 청보리들이 푸른 돛을 올리고 지리산에서 불어내리는 눈바람 속으로 신춘의 항해에 나서고 있다. 엊그제 내린 눈은 엄천강 주변 첩첩 산봉들과 논밭,겨우내 따지 않고 버려둔 감홍시가 얼어붙은 채 매달려 있는 감나무 가지에도 묻어있다.엄천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봇도랑 살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엔 얼핏 봄 빛깔이 느껴진다. 나그네의 발걸음은 엄천마을 앞 길가에 서있는 자연석으로 된 비석 앞에 멈춰섰다.‘점필재 김종직선생 관영차밭 조성터’라고 적힌 비석이다.뱀사골 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길로 달리는 차들의 굉음이 비문을 읽어내리는 나그네의 귓전을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간다. ●생산되지도 않는 차를 나라에 바치라니… 저렇게 달리는 차안에 타고 있는 누군가는 지리산 어느 깊고 고요한 자락에 들어 앉은 찻집에 가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셨거나 마시게 될는지 모른다.그러면서도 엄천마을 앞 길가에 세워진 이 비석의 존재는 전혀 관심 밖일지도 모른다.야속하다. 비석 뒷면의 시를 읽다말고 마을 옆 양지쪽 언덕을 바라본다.차나무들이 무릎 높이로 자라 눈바람을 맞으며 더욱 푸르다.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영험한 차를 올려 우리 임금 오래오래 사시도록 하고 싶은데 신라 때 심었다는 종자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겠네 이제야 두류산 아래서 차나무를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기쁘구나. 대숲 밖의 황폐한 밭 몇 이랑을 개간했으니 새 부리 같은 보랏빛 찻잎 언제쯤 볼만해질까 백성들의 마음 속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일 뿐 무이차처럼 명차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네.” 이 시를 짓게 된 동기를 김종직은 ‘점필재집’제 10권에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차(茶)를 조정에 올려야 하는데 우리 군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를 공물(貢物)로 바치라 한다.백성들은 전라도에 가서 차를 사와서 공물로 바치는데,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살 수 있다.내가 이 군에 부임한 초기에 그 폐단을 알았다.그리하여 차 공물을 백성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군의 돈으로 차를 사서 공물로 바쳤다. 일찍이 삼국사기를 보다가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나무 종자를 구해다 지리산에 심으라고 한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우리 군이 지리산 아래 있으니 어찌 신라시대에 심은 차나무 종자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차나무에 대해서 물어보곤 하였다.그러다가 엄천사 북쪽 대밭에서 몇 그루를 찾아냈다. 나는 매우 기뻐서 그곳에 차밭을 만들도록 했다.그곳 주위는 모두 백성들의 땅이라서 군에서 다른 곳의 토지로 대신 보상해주고 모두 사들였다. 몇 년이 지나자 차나무가 제법 번성하여 차밭 안에 골고루 번졌다. 앞으로 4∼5년만 기다리면 조정에 올릴 정도의 수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이 일로 시 두 편을 지었다.” 앞의 시가 바로 그 두 편의 시다.얼핏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의 글이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이 글 속에는 조선시대 전기의 조세제도인 공물의 폐단이 산골 농민들에게까지 미쳤고,지나치게 무거운 세금에 짓눌린 농민들은 나라와 제도를 원망하다가 마침내는 집을 버리고 도망길에 올라 참담한 유랑민으로 살아야 했던 시대의 불행한 민중사가 피눈물로 어른거림을 보게된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오기 전부터 함양 농민들에게는 여러 가지 세금 외에 차를 공물로 바쳐야 하는 특별한 의무가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실제로 차밭이 있어서 차를 생산하는 곳이 아닌데도 그런 부담을 지게한 것은 단지 함양이 지리산 아래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해마다 차를 마련하기 위해 전라도까지 가야했고,완제품 차 한 홉을 구입하려면 쌀 한 말이 필요했다.한 홉은 약 180g 정도다.오늘날 처럼 쌀이 흔하지 않은 시대에 자기 땅도 없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완제품 차를 한 되나 그 이상씩 부담시켰다는 것은 가혹한 정책이었다.한 두 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어서 평생토록 차 공물 부담을 져야 하는 농민들로서는 원망이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김종직 이전의 모든 군수들은 이같은 폐단을 외면했던 것 같다.김종직은 부임 초기에 이 폐단을 알고 바로 잡으려 해봤지만 국가의 공물제도를 없애거나 고치지 않는 한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고심하던 끝에 군청의 공금을 이용하여 차를 대신 사서 공물로 바치기로 하는데,김종직 이전 군수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엄천사 북쪽 대밭에서 차나무 발견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보다 많은 부정부패를 일삼아 한몫 챙기려는 욕심 때문이었다.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는 커녕 농민들로부터 온갖 명분으로 재물을 착취할 생각을 하는 군수들이 더 많았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종직은 계속해서 공금으로 차 공물을 대납할 수는 없으므로 장기적인 대책을 세웠다.가장 확실한 방법은 차밭을 만들어서 차를 만들어 바치는 것인데,그러자면 먼저 차 종자를 확보해야 하고,차나무를 심을 땅이 있어야 했다. 차 종자를 구하기 위해 함양 곳곳을 다니면서 노인들에게 묻고 있는 김종직의 모습은 지방의 외진 산중 군수가 아니라 중생의 고뇌를 풀어주기 위해 길거리에서 법문하는 성자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랜 탐문 끝에 차나무를 발견해 내고 기뻐하는 모습도 그렇다.엄천사 북쪽 대숲 속에서 차나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언젠가 그 지역에서도 차나무를 키웠음을 뜻한다.어느 때 차나무를 모조리 없애버려야 할 사정이 생겨서 차나무가 일제히 제거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이같은 짐작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로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있는 고려의 해동공자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들 수 있겠다. “…옛일 생각하니 서러운 눈물이 나는구나. 운봉의 그 훌륭한 맛과 향기는 남쪽에서 마시던 그 맛 완연하구나. 그로하여 화계에서 찻잎 따던 일을 말하게 되는구나. 관청에서 어린 것,노인 가리지 않고 마구 불러내어 험준한 산비탈 다니며 간신히 찻잎 따 모아 머나 먼 서울까지 등짐으로 져 날랐네. 이는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나니 수많은 이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나니 …… 일천가지 허물어서 한 모금 차 마련하나니 이 이치 알고보면 참으로 어이 없구나 그대 다른 날 간원(諫院)에 들어가거든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해주시게나. 산과 들의 차나무 불살라버려서 차 세금을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에 이로부터 시작되지 않겠는가.” ●세금에 짓눌린 농민들 집 버리고 유랑생활 이처럼 지리산 동남쪽 기슭에 사는 농민들은 고려 때부터 차 공물의 폐단으로 시달리며 살았음이 증명되었다.그러다보니 고려말 혼란기와 조선초의 어수선하던 시기에 이 지방 농민들은 차나무를 베어버리거나 불을 지르기도 하여 수 백년 동안 끈질기게 있어 온 폐단을 근원적으로 없애버리려는 행동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유서 깊은 사찰 부근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차나무가 모두 없어져버린 것이다.농민들의 이같은 저항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조선 조정에서는 고려가 하던대로 지리산 동남쪽 농민들에게 다시 차 공물을 부과했다.조선시대부터는 중국에 바치는 조공(朝貢) 품목에까지 차(茶)가 포함되면서부터 농민들이 겪는 고통은 더욱 가혹해졌다.그때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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