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착오
    2026-07-04
    검색기록 지우기
  • 차이
    2026-07-04
    검색기록 지우기
  • 시온
    2026-07-04
    검색기록 지우기
  • 시약
    2026-07-04
    검색기록 지우기
  • 도장
    2026-07-0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145
  • [이슈&이슈] 사업 무산 vs 공사 재개…2조 5000억 유치 예래휴양단지 해법 없나

    [이슈&이슈] 사업 무산 vs 공사 재개…2조 5000억 유치 예래휴양단지 해법 없나

    ‘사업 무산인가? 공사 재개냐?’ 지난 14일 제주 서귀포시 예래동 예래 휴양형 주거단지 공사 현장. 요란했던 망치 소리는 사라지고 짓다 만 콘도미니엄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인적이 뚝 끊어졌다. 주거, 레저, 의료 기능을 통합한 세계적 수준의 휴양형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이 사업은 공사가 중단된 채 무산 위기에 처해 있다. 2조 5000억원이라는 대규모 외국 자본을 유치했지만 제주도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의 부실한 사업 추진으로 급제동이 걸린 것이다. ●“특정 계층 위한 영리화” 토지주·시민단체 반발 말레이시아 브르자야그룹이 2008년 4월 투자를 확정한 이 사업은 예래동 74만 1193㎡ 부지에 대규모 휴양 콘도(1531실)와 호텔(935실) 및 카지노, 150병상 의료시설, 수영장 스파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브르자야는 1단계로 2500억원을 들여 지난해 3월부터 분양형 콘도미니엄 150여 가구 조성 공사를 해 왔다. 하지만 광주고법 제주 제1민사부는 지난 12일 예래동 원토지주대책협의회가 대법원의 토지 수용과 사업 인허가 무효 판결을 근거로 제기한 공사 중지 가처분신청 판결에서 원고 측 청구를 인용해 ‘공사 중지’ 결정을 내렸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3월 “특정 계층의 이용과 분양을 통해 영리를 추구하는 이 사업은 유원지의 원래 목적인 일반 시민의 오락과 휴양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며 토지 수용과 사업 인허가는 무효라고 판시했다. 도시계획상 유원지로 고시된 지역에 제주도가 요건에 해당하지 않은 시설에 대해 편법으로 인허가를 내 준 것은 잘못이라는 결정이다. 서귀포시는 2005년 10월 예래휴양단지 사업 부지에 대해 유원지 도시계획시설사업 실시 계획을 인가했다. 제주도와 JDC를 믿고 투자했다가 날벼락을 맞은 브르자야는 현재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손해배상 금액만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 후 전전긍긍하던 제주도와 JDC는 고심 끝에 제주특별법에 특례 조항을 신설해 사업을 계속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새누리당 함진규 의원 등 21명은 최근 유원지시설의 범위에 관광시설을 포함시키고 유원지시설의 결정·구조 및 설치 기준에 관한 사항을 제주도 조례로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제주특별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소급 입법을 통해 유원지의 범위에 공익시설뿐만 아니라 민간사업자의 관광시설까지 추가해 사업 인허가 절차를 다시 밟아 예래휴양단지 조성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는 제주도와 JDC가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꼼수를 부리고 있다며 반발한다. 지역 17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제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도시계획법상 유원지는 공공시설이며 민간사업자의 돈벌이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복지 향상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것”이라며 “영리 목적의 예래휴양단지는 공익을 중시하는 소급 입법의 기준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제주도 관계자는 “당시 투자 유치가 어려웠다는 사정은 있지만 행정 착오로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며 “이 사업을 중단하면 막대한 피해가 예상돼 고육지책으로 제주특별법을 개정해서라도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화역사공원 리조트도 ‘카지노’ 포함돼 소송전 2조 2000억원 규모의 중국 자본 투자를 유치한 제주신화역사공원 복합리조트 조성 사업도 소송에 휘말려 있다. 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공익소송인단 131명은 지난 2월 제주도를 상대로 제주지방법원에 신화역사공원 조성 사업 개발사업시행 변경승인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도가 카지노 계획이 포함된 신화역사공원 사업 계획을 변경승인한 것은 제주국제자유도시 종합 계획을 위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초에는 없던 카지노시설을 신화역사공원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제주 개발의 최상의 법정 계획인 종합 계획을 변경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공청회 등의 공론화 과정과 제주도의회 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복합리조트 사업은 종합 계획에 의해 공모를 거쳐 사업자를 선정해야 하지만 별도의 공모 절차 없이 중국 란딩그룹을 선정한 것은 절차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제주도는 공익소송단이 소송에서 얻을 실체적 실익이 없는 만큼 소송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위법 사실도 없다며 맞서고 있다. 란딩그룹은 2018년까지 신화역사공원 A지구 78만 2901㎡와 R지구 23만 106㎡에 2조 2000억원을 투자해 외국인 전용 카지노, 워터파크, 럭셔리 스파, 고급 쇼핑시설, 프리미엄 호텔, 컨벤션시설, 엔터테인먼트시설을 갖춘 복합리조트를 조성키로 하고 지난 2월 기공식을 했다. 제주지방법원 행정부는 다음달 2일 신화역사공원 조성 사업 개발사업시행 변경승인처분 취소청구 소송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다. 재판부가 공익소송단의 취소 청구를 받아들일 경우 사업 자체가 무산 위기에 처한 예래휴양단지에 이어 큰 파장이 예상된다. 제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좌광일 사무처장은 “대법원이 지적한 유원지 본래의 목적대로 개발을 못 하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다는 카지노에 투자자들이 목을 매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미래 가치 지향적 제주 개발 방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60년대 원조 한류 걸그룹을 아시나요

    60년대 원조 한류 걸그룹을 아시나요

    “전쟁(6·25) 때 집이 무너지고 먹을 것도 없는데 재주가 노래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어릴 때 놀기 좋아하고 연습하는 게 싫었는데 그때마다 고모(이난영)가 바나나를 사주면서 노래 연습을 시켰죠.”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 인기를 모은 원조 한류 걸그룹 김시스터즈. 13일 개막하는 제1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인 ‘다방의 푸른 꿈’은 김시스터즈가 아시아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입성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제 측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김시스터즈의 멤버 김민자(74)씨는 상기된 모습이었다. “1987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국에 30년 만에 오는데 정말 많이 변했더군요. 서울은 뉴욕처럼 고층 빌딩이 들어찼고 재주 있는 사람들도 많구요.” 김시스터즈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씨의 두 딸 애자와 숙자씨,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씨의 딸 민자(예명 김민자)씨가 결성한 걸그룹이다. 김민자씨는 두 딸보다도 이난영씨와 더 닮은 외모로 유명했다. “고모는 엄격하고 단호하기도 했지만 늘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쳤어요. 성공을 위해서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자기 것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6·25전쟁 와중에 미8군 무대에 섰던 김시스터즈는 관계자의 눈에 들어 1959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했다. 그때 그들은 불과 10대 중후반의 소녀였다. “처음에는 고국이 너무 그리워서 셋이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거기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고 오직 연습과 공연에만 매진했죠.” 1년여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한 이들은 비틀스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출연한 TV 프로그램 ‘애드 설리번쇼’에 출연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미국의 각 도시는 물론 캐나다에서도 섭외 요청이 빗발쳤다. 10여년 정상의 자리에서 활동한 이들은 이십대 중반에 결혼을 하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1987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애자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어느새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온몸에 암이 전이된 뒤에 너무 늦게 알아서 안타깝게 세상을 떴어요. 그래도 난 즐겁게 가겠다고 했던 표정이 생생해요.” 김숙자씨는 현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부동산 중개일을 하고 있다. 김민자씨는 작곡가이자 퍼커션 연주자인 남편(토미 빅)과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다 4~5년 전부터 헝가리로 거처를 옮겨 남편과 함께 공연을 하면서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년에 4~5번씩 공연하는데 악기도 다루고 노래를 하는 것이 좋아요. 한국에서 미미시스터즈, 바버렛츠 등 후배 걸그룹이 헌정 공연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직 저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한국에서도 꼭 공연하고 싶어요.”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사설] 롯데家는 국민의 분노를 직시하라

    롯데가(家)의 경영권 분쟁이 갈수록 가관이다. 그제 일본에서 귀국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공항에서 경영권 분쟁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 형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등 3부자가 대면하면서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다. 하지만 신 회장이 자신의 롯데홀딩스 대표이사 해임 지시서에 대해 “법적 효력이 없는 서류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데 이어 그룹 사장단 40명이 어제 신 회장 체제 지지를 결의했다고 한다. 이번 분쟁은 가족 간의 분쟁을 넘어 비정상적인 재벌 체제의 문제점을 확연히 드러냈다. 총수의 말 한마디, 손짓이 이사회 등 공식 의결기구보다 더 위력을 갖는 패쇄적이고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 오너의 전횡과 독단 등 한국 재벌 경영의 폐해를 국민들이 눈으로 확인했다. 신 총괄회장의 지분은 0.05%, 신 회장 일가 지분을 합쳐도 2.41%에 불과하다. 한·일 롯데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롯데홀딩스와 광윤사의 지분도 베일에 가려 있다. 롯데그룹 계열사 80개에 무려 418개의 순환출자 고리는 롯데 임원들조차 모른다고 한다. 총수의 독단적인 경영권 행사에 순환출자가 악용됐다는 증거로밖에 볼 수 없다. 롯데그룹은 연 매출 83조원에 국내에만 12만명의 임직원을 둔 재계 서열 5위다. 이런 그룹이 족벌경영의 막장 드라마가 된 데 대해 국민의 공분은 높아지고 있다. 분노를 넘어 배신감을 느낀다. 국민들 사이에 반(反)기업 정서가 꿈틀대고 롯데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자는 소비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벌써 ‘재벌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은 “국민에 대한 역겨운 배신행위”라면서 “후진적 지배구조, 오너 일가의 정체성과 기풍 모두 우리 국민의 상식과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도 “재벌이 국민 경제의 리스크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든 경제 주체들이 경제가 위기라는 절박감 속에 경제 살리기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마당에 경영권 다툼으로 국민은 물론 다른 기업들에 허탈감을 줘서야 되겠는가. ‘오너 리스크’를 넘어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란 걱정도 적지 않다. 당사자들은 먼저 자숙하고 사태를 수습할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경영과 순환출자 구조 해소 등을 포함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핵심이다. 그게 지금의 롯데를 있게 한 국민들에 대한 도리이자 사회적 책임이다. 끝내 정신 차리지 못하면 롯데는 국민들에게 재벌 개혁 대상 1호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
  • NASA, 따끈따끈한 달 모습 공개…가운데 ‘점’ 정체는?

    NASA, 따끈따끈한 달 모습 공개…가운데 ‘점’ 정체는?

    미국항공우주국(이하 NASA)가 우주에서 포착한 ‘따끈따끈한’ 달 사진을 공개했다. 허핑턴포스트, ABC 등 해외 언론의 2일자 보도에 따르면 최근 NASA가 공개한 달 사진은 현지시간으로 지난 2일 미국 버지니아주 우드포드에서 찍은 것으로, 달 표면의 아주 작은 크레이터까지 생생하게 담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달의 생생함뿐만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달 표면에 작고 검은 점의 형태가 보이는데, 이는 다름 아닌 국제우주정거장(ISS)이다. 국제우주정거장은 지구 표면으로부터 약 402㎞ 떨어진 곳에 떠 있으며, 달은 이보다 약 800배 먼 40만 2400㎞에 위치해 있다. 지구에 있는 NASA의 전문 사진작가는 달의 지형과 ISS의 모습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기다렸다 이를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NASA의 전문 사진작가인 빌 잉갤스는 “우주정거장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달 표면을 배경으로 하는 모습을 포착하려면 매우 짧은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서 “지구상에서 이 순간을 포착하려면 일단 날씨가 매우 좋아야 한다. 우리는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실수를 배우고 더 나은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31일에는 역시 달과 함께 작은 점처럼 보이는 ISS와 ‘블루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빌 잉갤스의 설명대로, 우주정거장은 초당 5마일(약 8050m)의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달과 우주정거장의 모습을 한데 담기에는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따끈따끈한’ 달의 모습과 함께 공개된 국제우주정거장에는 총 6명의 우주인이 생활하고 있으며, 우주인에 따라 1년 또는 6개월씩 우주에 머물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국산 ‘명품 복합소총’ 왜 애물단지가 됐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국산 ‘명품 복합소총’ 왜 애물단지가 됐나

    현대화된 국산 소총의 시초는 무엇일까요. 1974년 군이 미국 콜트사의 라이센스를 얻어 생산한 M16A1이 시작이었습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베트남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 국가 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자극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산 소총 생산계획을 서두르게 됩니다. 1968년부터 시작된 미국 콜트사와의 라이센스 협상은 한미 양국의 합의로 1971년 3월 정식 계약을 맺으면서 현실화됐죠. 1973년 11월 부산에 국방부 조병창이 들어섰고 이듬해부터 M16A1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한 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갈증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 창설된 국방과학연구소는 K-1A 기관단총과 K-2 소총을 자력으로 개발해 각각 1982년과 1984년부터 군에 보급했습니다. 이 총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군에 제식 소총으로 보급돼 있습니다. 군은 이후 누구도 개발하지 못한, 심지어 군사 강국인 미국도 개발에 실패한 총기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명품무기라던 K-11, 폭발사고로 신고식 국방과학연구소가 2000년부터 8년 동안 185억원을 들여 ‘미래형 명품무기’로 개발했다던 K-11 복합소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K-11은 사실상 애물단지로 전락했습니다. 애초 이 무기는 5.56mm 자동소총과 20mm 공중폭발탄 발사기를 갖춰 군은 물론 많은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이용해 조준점을 잡으면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거리를 탄환의 회전수로 환산해 공중폭발탄을 적의 상공에서 터트릴 수 있다는 기능이 크게 부각됐죠. 1정당 가격은 1600만원 수준으로 책정됐습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지금까지 900정 가량 군에 보급한 총기는 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2011년 10월 야전 운용성 확인사격 중 20mm 공중폭발탄이 총기 내부에서 폭발해 병사 1명이 얼굴과 손등에 열상과 찰과상을 입은 사건이 시작이었습니다. 2012년 2월까지 약 5개월간 진행한 국방부 감사에서 전자기파 간섭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사업을 주관하는 방위사업청은 문제를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방사청은 다음해 사격통제장치와 격발장치를 개선하고 유탄이 일정 회전을 한 뒤에 폭발하도록 신관(기폭장치)을 개량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3월 경기 연천군 국방과학연구소(ADD) 다락대사격장에서 또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3명이 다치는 사고였는데요. 이번에는 레이저 거리 측정기와 사격통제장치 이상이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2~3번 눌렀는데 사격통제장치가 이것을 방아쇠 격발로 오인해 신관에 신호를 줬고 유탄이 폭발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결국 앞서 조사와 마찬가지로 총기 내부의 문제로, 개선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국방부는 자석만 대도 폭발한다는 지적까지 나오자 아예 군 관계자, 기자, 일반인들을 다락대사격장으로 초청해 실제로 총기에 자석을 갖다대는 시연회까지 벌이며 국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총기 외부에 폭발을 일으킬 요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다른 방향으로 나왔습니다. 방사청은 지난 4월 “공중폭발탄에 영향을 미치는 전자기파 간섭현상은 저주파수 고출력 전자파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외부의 전자기파에 공중폭발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구형탄은 모두 해당되고 전자기파 충격 센서를 단 신형탄만 문제가 없답니다. 비축한 구형탄 15만발은 1발당 16만원입니다. 하지만 240억원의 예산이 공중에 날아갈 위기에 처한 것보다 더 황당한 것은 여전히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문제는 전자기파 간섭현상…개발 사업 나락으로 방사청은 언론의 문제 지적에 “규정이 없어 탄약에 대한 전자기파 시험을 하지 못했다. 미국도 탄약에 대한 조사 규정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무기이기 때문에 규정이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이어진 사고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그제서야 방사청은 저주파수(60Hz) 대역의 180dBpT 수준의 강한 자기장을 방출하는 장비가 존재하는 지, 있다면 무엇인지 전자파연구소를 통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했습니다. 대신 신형탄을 사용하면 된다고 거듭 해명했습니다. 비난여론이 높았습니다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무기 개발 과정에 벌어지는 여러 시행착오 중 하나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빈번한 총열 고장 등 다른 문제도 많이 있었고, 올해 사업 예산이 60%나 삭감되는 수모를 당했지만 많은 이들이 완전히 기대를 버리진 않았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총기 가격의 77%(1306만원)를 차지하는 핵심 장치인 ‘사격통제장치’의 품질이 엉망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완전 전자식 총기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배경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방산 비리’가 있었습니다. 사격통제장치 문제는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오쉬노 부대에서 처음 발생했습니다. 사격통제장치가 사격 도중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방위사업비리 합동수사단 조사에서 납품업체는 충격량을 3분의 1로 줄여 검사를 마친 뒤에 불량 부품으로 납품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시험검사를 납품업체가 직접 진행했고, 지난해까지 검사 조작 문제는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군에는 국방기술품질원이라는 품질검사기관이 있었지만 ‘눈 먼 봉사’나 다름없었습니다. 방산업체 E사 사업본부장 이모(52)씨와 차장 장모(44)씨, 과장 박모(37)씨가 구속 기소됐고 비난여론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질 않습니다. ●사격통제장치 방산비리에도 ‘눈 먼 봉사’ 완제품으로 보급된 사격통제장치 250대 가운데 208대가 결함으로 반품됐습니다. 나머지 660여대에서도 각종 균열과 이물질 발생 등 결함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폭발 사고가 벌어진 2011년부터 숱하게 감사를 벌인 국방부나 사업을 주관하는 방사청도 이 문제를 짚어내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있는 무기는 다시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눈 먼 봉사나 다름없는 군 기관들이 변화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는 또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극소수 수출물량을 제외하면 군납 외에는 총기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주먹구구식 총기 개발 계획을 진행한 군에 대한 비난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척박한 시장이지만 투자는 부실하고 장기계획은 미흡하니 개발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양욱 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평상시에 총기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사례가 없다. 누구도 보병 화기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내놓지 못했고, 기본화기에 대한 투자 자체가 부실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현대전은 첨단장비의 각축장이라지만 전투력의 핵심은 보병의 전투력인데 전투기다, 전차다 대형 사업에만 골몰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닌다”면서 “사업 자체가 없는데 누가 총을 개발하려고 하겠나”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화기를 개발하는 업체에서 직접 사업을 끌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수준”이라면서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총기 개량사업조차 업체 재량에 맡긴 군 첨단 장비에만 골몰해 개발한 지 수십년이 된 기본 장비에 대한 개량조차 이제서야 이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K-1A 기관단총을 대체할 카빈형(총신이 짧은 돌격소총) K-2인 ‘K-2C’는 지난해부터 28사단에 시험 보급돼 올해 본격적인 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개발업체가 이라크군 특수부대에 수출한 총기를 IS(이슬람국가) 병사가 노획해 사용하는 모습이 공개돼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요. “우리가 만져보지도 못한 총을 IS군이 먼저 쏴봤다”는 우스갯 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K-2C에는 해외 유명 소총에는 기본으로 장착된 피카티니 레일시스템을 달아 조준경과 레이저 표시기 등 각종 광학장비를 추가로 장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미군 M4 소총에 도입한 신축형 개머리판을 장착해 휴대성과 견착 기능을 동시에 높였습니다. K-1A는 슬라이드식 개머리판이어서 견착이 쉽지 않은데 단점을 보완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K-2 소총에 접이식 대신 신축형 개머리판을 부착한 K-2A도 K-2C와 마찬가지로 군 보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량형이긴 하지만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만든 총기들인데요. 군은 이런 총기 개량 사업마저 업체의 재량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다. 짧은 총기 개발 역사 탓만 할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밀리터리 인사이드는 핫한 아이템을 가지고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아래 리스트를 보세요. (12)왜 한국 병사의 월급은 ‘세계 최하위’인가 (13)전투복 교체 돌고 돌아 6년…장병복지를 논하다 (14)6·25 전쟁 때 쓰던 수통 지금도 쓰고 있을까 (15)F-16D에 참패했다는 F-35A를 위한 변명 (16)미군 ‘물고기집 전차’가 서해를 지키는 이유
  • [사설] 의혹 규명 늦어질수록 정보전선 구멍 커진다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스마트폰 해킹 의혹이 해킹 프로그램 도입과 운용을 맡았던 국정원 직원 임모씨의 자살로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양상이다. 임씨가 남긴 유서에 대한 해석도 정략적 입장에 따라 180도 다르다. 그토록 원치 않았건만 이를 둘러싼 정쟁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임씨가 삭제했다는 자료를 국정원이 복구, 공개한 이후에도 파문이 수그러들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번 사건을 정치 공세화하는 쪽에서는 그 어떤 설명이나 증거도 믿지 않으려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해킹 의혹은 이제 하루속히 그 진상을 규명할 수밖에 없게 됐다. 국정원 주장대로 해킹 프로그램을 대북용 등으로 도입한 것이라면 이미 대북 정보전선에는 큰 구멍이 뚫린 셈이다. 정보 탐지의 도구가 낱낱이 공개된 상황에서 무슨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국정원 해당 조직의 구성원 대부분은 손을 놓고 있을 것 아닌가. 문제는 논란이 계속되고, 의혹 규명이 늦어질수록 그 구멍은 메우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첩보기관으로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의혹 규명은 신속하면서도 치밀해야 한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큰 민감한 정보들의 가공할 폭발력을 고려하면 국회 정보위원회가 검증 주체로 나서는 것이 옳다. 전문 분야인 만큼 여야가 추천하는 민간 전문가들도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미구멍을 찾아 메우겠다며 집을 들쑤셔 무너져 내리게 하는 통탄할 짓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환부(患部)로 예상되는 조직 부위만 조사(照射)하면 될 일이다. 불법이 드러난다면 관련자들을 엄정하게 문책하면 될 뿐이지 비밀유지가 필수인 정보기관의 조직, 기능, 시스템까지 낱낱이 공개돼선 곤란하다. 국정원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 모든 정보가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내부 비밀이 새나갈지 모를 일이다. 이번에도 위키리크스의 이탈리아 업체 ‘해킹팀’ 이메일 폭로로 사달이 난 것 아닌가. 천하제일이라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불법 도청 사실도 낱낱이 공개되는 세상이다. 혹여 일각의 우려대로 비밀리에 국민들을 사찰했다면 그야말로 시대착오적 작태일 뿐이다. 모든 의혹을 ‘안보’라는 이유를 내세워 묵살하던 시대도 지났다. 게다가 국정원은 씻지 못할 전비(前非)도 있지 않은가.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안보 관련 통신첩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휴대전화 감청 장비인 R2 등을 개발한 뒤 실질적으로는 국내 주요 인사 1800여명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해 놓고 무차별적으로 도청했던 게 바로 국정원이다. 이번에 국민들이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도 이런 전력 때문일 것이다. 이런 원죄를 고려하면 국정원은 자발적으로 의혹 규명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만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차분하게 진상을 규명해야만 한다. 불법 해킹 문제만을 떼 냉정하게 사실 여부를 밝히면 된다. 국익은 도외시한 채 근거 없는 의혹 제기를 해서도 안 되고, 불법행위조차 캐묻지 말자는 식으로 무분별한 ‘국정원 편들기’에 나설 필요도 없다. 추측과 단정만으로 정보전선에 스스로 구멍 낼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으로 여겨”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으로 여겨”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으로 여겨” 오바마 한국 교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교육에 대해 극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클라호마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은 교사들에게 의사만큼 봉급을 주고 교육(교사)을 최고의 직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교육의 중요성과 저소득층의 인터넷 접근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09년 취임 첫해부터 수시로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제도를 칭찬해 왔다. 지난 4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도 “한국·핀란드와 같은 곳은 교육제도가 정말 잘 돼 있다. 한국의 교사는 의사나 기술자가 받는 수준에서 봉급을 받고 있으며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이 같은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들은 한국 교육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그에게 확실히 각인돼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교육이 붕괴되고, 사교육 열풍에 시달리는 한국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교사들이 의사만큼의 봉급을 받는다는 발언에 대해 한국교총은 “오바마 대통령의 현실착오”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인터넷과 관련해 “한국은 초고속 광대역 인터넷 가입률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 극찬 평가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 극찬 평가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 극찬 평가 오바마 한국 교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교육에 대해 극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클라호마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은 교사들에게 의사만큼 봉급을 주고 교육(교사)을 최고의 직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교육의 중요성과 저소득층의 인터넷 접근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09년 취임 첫해부터 수시로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제도를 칭찬해 왔다. 지난 4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도 “한국·핀란드와 같은 곳은 교육제도가 정말 잘 돼 있다. 한국의 교사는 의사나 기술자가 받는 수준에서 봉급을 받고 있으며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이 같은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들은 한국 교육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그에게 확실히 각인돼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교육이 붕괴되고, 사교육 열풍에 시달리는 한국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교사들이 의사만큼의 봉급을 받는다는 발언에 대해 한국교총은 “오바마 대통령의 현실착오”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인터넷과 관련해 “한국은 초고속 광대역 인터넷 가입률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으로 여겨”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으로 여겨”

    오바마 “한국 교사, 의사 수준으로 봉급받아…최고의 직업으로 여겨” 오바마 한국 교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교육에 대해 극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클라호마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연설을 통해 “한국은 교사들에게 의사만큼 봉급을 주고 교육(교사)을 최고의 직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교육의 중요성과 저소득층의 인터넷 접근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09년 취임 첫해부터 수시로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제도를 칭찬해 왔다. 지난 4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도 “한국·핀란드와 같은 곳은 교육제도가 정말 잘 돼 있다. 한국의 교사는 의사나 기술자가 받는 수준에서 봉급을 받고 있으며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이 같은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들은 한국 교육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그에게 확실히 각인돼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교육이 붕괴되고, 사교육 열풍에 시달리는 한국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교사들이 의사만큼의 봉급을 받는다는 발언에 대해 한국교총은 “오바마 대통령의 현실착오”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인터넷과 관련해 “한국은 초고속 광대역 인터넷 가입률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칼럼] 매장문화재 정밀 지표조사 지금도 늦었다

    [서동철 칼럼] 매장문화재 정밀 지표조사 지금도 늦었다

    지금 경기 파주시에서는 조리읍과 법원리를 잇는 도로의 확장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미 공사가 끝난 구간이 많지만 아직 일부는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신석기시대 중기의 마을 유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경기도 건설본부는 최근 설계를 바꾸어 도로를 지하로 통과시켜 유적을 보존하기로 했다. 중요한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도로의 선형 설계부터 달랐을 것이다. 당연히 시간과 비용도 그만큼 절약할 수 있었다. 울산과 경남 밀양 사이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밀양 금곡리에서는 1990년 지표조사 과정에서 봉성사라는 삼국시대 절터가 확인됐다. 한국도로공사는 터널이 절터를 피할 수 있도록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굴조사에서 터널 굴착 지점이 바로 절터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봉성사는 ‘삼국유사’에 창건설화가 담겨 있는 절이다. 도로공사는 터널이 절 아래를 통과하도록 설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최신 공법을 사용하는데다 터널 길이도 늘어나는 만큼 공사 비용은 크게 늘어나게 됐다. 지표조사가 정밀하게 이루어졌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개발사업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매장문화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개발 계획을 세우고 부지를 매입해 구조물을 세우려면 문화재 지표조사를 해야 한다. 땅속에 중요한 문화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절차이지만 긴장할 수밖에 없다.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문화재의 흔적이 나타나면 시굴조사에 들어가고 다시 중요한 유구가 나오면 발굴조사를 해야 한다. 숭례문 화재 참사 이후 문화재의 완벽한 보존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난 듯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자신이 시행하는 개발 부지에서는 중요 문화재가 나오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는 것이 현실이다. 공사 지연에 따라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등에 이어 복원비용까지 모두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문화재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따라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전 국토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재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정밀 지표조사는 파주에서와 같은 시행착오를 예방하고, 부정확한 지표조사를 기초자료로 삼은 밀양 사태의 재발도 막는다. 나아가 공공기관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개발 사업을 계획하는 주체는 부지 선정 단계에서부터 매장문화재 때문에 불거질지도 모르는 갈등을 피해갈 수 있다. 그동안 전 국토 지표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6년 지표조사를 시작해 2006년 완성한 문화재 지도가 있지만, 1만분의1 축척의 지도를 보고 문화재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600분의1 축척이면 더욱 좋겠지만, 최소한 1200분의1 축척은 되어야 실제 문화재 현장에서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화재청이 전 국토 정밀 지표조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한다. 10만㎢ 남짓한 한국 전체 면적 가운데 산과 하천, 도로 등을 제외한 조사 대상 면적은 2만 1549㎢이다. 전체 국토의 21%에 해당한다. 조사 비용은 2100억원 수준으로 많다면 많은 액수일 것이다. 하지만 파주와 밀양의 사례에서만 100억원 이상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사례가 전국적으로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 지표조사 기간은 10년 남짓 될 것이라고 한다. 정밀 지표조사가 당장 시작된다고 해도 조사 기간 동안 매장문화재와 관련한 시행착오에 쏟아부을 비용만 조사비의 몇 배에 이를 것이다.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는 지표조사를 두고 논란도 없지 않다. 지표조사 비용 역시 문화재를 훼손하는 개발 주체가 부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표조사는 문화재 훼손이 아니라 오히려 훼손을 최소화하는 ‘예방사업’이라는 것을 사업자 부담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깨달아야 한다. 개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매장문화재 정보라면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정부에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컴퓨터 게임으로 인공지능 로봇 훈련 성공” (美 연구)

    “컴퓨터 게임으로 인공지능 로봇 훈련 성공” (美 연구)

    전 세계 남녀노소가 가볍게 즐기는 컴퓨터 게임을 통해 첨단 인공지능 로봇을 훈련시킨 연구가 공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미국 브라운대학 컴퓨터공학과 연구팀은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유명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통해 인공지능 로봇을 훈련시키는 실험을 공개했다. 이 실험의 목표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효율적 문제해결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 로봇에게 이 과정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인간과 달리 불필요한 행동을 직관적으로 걸러내고 무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쓰레기통을 비운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오븐을 켜거나 냉장고를 여는 등의 행동은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자동적으로 파악,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이러한 직관력이 없기에 선택 가능한 모든 행동의 필요성을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한다. 즉, ‘오븐 켜기’나 ‘냉장고 열기’ 등의 행동이 ‘쓰레기통 비우기’에 필요한 행위인지 여부를 매번 검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로봇일수록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종류가 너무 많아 인공지능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에 연구팀은 새로운 알고리즘을 개발, 로봇이 시행착오를 거쳐 문제 해결에 가장 필요한 ‘선결과제’가 무엇인지 직접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연구팀은 이 알고리즘의 성능을 확인하기에 컴퓨터게임 ‘마인크래프트’가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마인크래프트는 개방된 삼차원 공간에 퍼져있는 정육면체 블록들을 부숴 자원을 모으고 이 자원을 사용해 원하는 건축물을 세우는 게임이다. 특별히 정해진 목표가 없이 플레이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이른바 ‘샌드박스’ 장르의 게임이기도 하다. 텔렉스는 “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종류가 방대하며, 훈련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매우 용이하다. 같은 일을 현실 세계에서 시도하려면 훨씬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며 마인크래프트를 선택한 이유를 꼽았다. 연구팀은 먼저 로봇으로 하여금 게임 내에서 다리를 건설하거나 금광을 캐는 등 특정 목표를 추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를 통해 로봇은 해당 목표를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선결과제가 무엇인지를 학습했다. 다음에 연구팀은 학습을 끝낸 로봇과 그렇지 않은 로봇에게 동일한 과제를 주고 능률을 비교했다. 그 결과 학습을 거친 로봇의 문제해결 효율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이 드러났다. 텔렉스는 “만일 인공지능이 마인크래프트 내의 모든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며 “이와 관련해서 앞으로 흥미로운 연구를 많이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진=ⓒ브라운대학/유튜브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상처난 ‘이종걸 리더십’

    7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에게는 전날 국회법 개정안 재의결 무산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이 집중됐다. 이 원내대표는 “오늘 하루는 국회 애도 기간”이라며 여당을 향해 ‘폭도’ 등 거친 표현을 쓰기도 했다. 새정치연합 보좌진협의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이 원내대표는 “이럴 때 한번 몸 좀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며 물리력 동원 방안까지 검토했음을 시사했다. 이 원내대표는 당초 정의화 국회의장과 여당에 민생법안 처리를 약속했지만, 본회의에 불참하며 결과적으로 말을 바꾼 셈이 됐다. 국회법 개정안 재의 날짜를 확정하기까지 정 의장과 비교적 원만하게 의사소통을 했다는 평을 받았던 그였지만 결과적으로 신의를 지키지 못하게 됐다. 여기에 전날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의 본회의 참석 불가 여론에 부딪히며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당 일각에서는 이 원내대표가 거부권 정국에서 전략 착오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국회법 개정안 재의와 법안 처리 협조를 ‘1대1’로 맞바꾸듯이 처리하며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이다. ‘전시상황’이나 다름없었던 이 원내대표와 달리 문재인 대표는 평시처럼 유능한 경제정당위원회 회의 참석 등 정책행보를 이어가 대조를 이뤘다. 문 대표는 국회법 개정안 재의 무산에 대해 특별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거취가 결정되고 여당의 내홍이 수습되면 수면 아래로 들어간 야당 내 갈등이 재점화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또 당 혁신위원회에서는 당 사무총장직을 아예 없애거나, 최고위원회를 폐지하고 권역별 대표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는 등의 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 정당 체제를 뒤흔드는 안으로 현 지도부를 겨냥한 만큼 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증폭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독자의 소리] 광화문광장의 시각장애인 보행권/김경규 서울 3기동단 31기동대 경위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2009년 8월 1일 광화문 광장 및 지하 해치마당을 개장하면서 시각장애인이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광장을 설명해 주는 시각장애인 안내촉지도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필자는 기동대 소속 경찰관으로서 광화문광장에 근무하고 있다. 근무하면서 보니 광화문광장에 있는 시각장애인 안내촉지도가 노후화돼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문화체육관광부로 잘못 표기돼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이 같은 사실을 서울시에 알려 바로잡은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광화문광장 내에 설치돼 있는 ‘그늘막 벤치 화분’과 세월호 분향소 등 농성장 천막이 일부 시각장애인 점자블록을 차단하고 있어 시각장애인들이 점자블록을 인식하는 데 착오가 있으며 시각장애인 안내촉지도를 이용하는 데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는 실정을 보고 안타까웠다. 광화문광장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들의 보행에 불편이 없도록 점자블록을 가리고 있는 ‘그늘막 벤치 화분’과 세월호 농성장 천막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점자블록과 안내촉지도는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과 나침반 그 이상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광화문광장 내 시각장애인 점자블록 정비로 시각장애인들의 보행권을 보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경규 서울 3기동단 31기동대 경위
  • “공무원 정근수당 지급 착오라도 5년 지나면 청구권 소멸된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민간 기업으로 옮기려는 A씨는 자신의 근무 연수가 행정 착오로 잘못 기록된 탓에 정근수당을 덜 받고 있었던 사실을 알았다. 6년 전 다른 임지로 발령받았을 때 서무가 10호봉을 9호봉으로 산정해 월 봉급액의 50%가 아닌 45%로 계산한 것이다. A씨는 근무 연수 정정은 5년이 지나면 소용없다는 말에 최근 서둘러 정정을 신청했다. 인사과 직원은 지급 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준일이 정근수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날부터인지, 근무 연수를 정정한 날부터인지 헷갈렸다. 1일 법제처에 따르면 법령해석심의위원회가 전문가 회의를 열고 ‘추가 지급 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일은 정근수당 지급일’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A씨는 정근수당을 적게 받기 시작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났기 때문에 나머지 돈을 못 받게 됐다. 그는 억울하지만 민사소송도 포기했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금전의 급부에 대해 다른 법률 규정이 없는 한 5년을 초과하면 시효 만료로 했다. 민법도 급료에 관한 채권이 3년을 넘으면 청구할 수 없게 돼 있다. 법령심의위는 “정근수당이 과소 지급되는 것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청구권 행사에 제한을 둔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법률상 권리 행사의 장애란 기간의 미(未)도래, 조건 불성취 등의 경우로 한정하기 때문에 이 사례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근수당은 근속을 보상하기 위해 매년 1월과 7월 두 차례 지급하는 돈으로, 근무 연수가 1년 미만일 때 월 봉급액의 5%를 받은 뒤 1년 단위로 5%씩 오르다가 10년 이상이면 50%를 받는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한림대 총장 퇴임 촉구 졸업생까지 확산

    한림대학교 졸업생들이 노건일 총장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는 등 학내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1일 강원 춘천시 한림대 등에 따르면 사회학과 동문회와 일부 총학생회장단 등 졸업생들이 최근 벌어진 교수들의 총장 퇴진 요구에 대한 총장의 답변을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보냈다. 한림대 교수평의회 소속 교수들은 지난달 초 성명서를 내고 “노 총장은 각종 제재 및 강압 추진 중인 내용들을 철회하고 즉각 퇴진하라”고 촉구했다. 교수들은 성명서를 통해 “현재 학내에서 벌어지는 교과목 수 감축, 교직과목 조정, 교수 승진 기준의 자의적 강화, 인문대 탄압, 일방적 구조조정 등의 뿌리는 하나”라며 “지성의 전당이어야 할 대학이 합리적인 문제 제기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대화는 실종되고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만이 난무하는 병영체제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이같이 교수들의 노 총장에 대한 퇴진요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졸업생들은 공개질의서에서 “교수님과 학생들이 총장님의 퇴진을 촉구하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면서 “왜 총장님의 퇴진운동이 벌어졌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또 졸업생들은 학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문대 7개 학과 및 특성화 사업 예산 지출 동결, 연구년 대상자 통보 제외, 논문발표지원 특별연구비 지급 거부, 승진 및 재임용 심사보류, 특성화 사업 방해 등에 대해서도 진실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많은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얘기하듯이 총장님이 정말 몰상식, 불통, 갑질의 시대착오적 리더십을 발휘한 게 아니라면 공개질의서에 대한 회신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총장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낸 졸업생들은 한림대 민주동우회, 사회학과 동문회, 7대 등 일부 총학생회단 등이 포함됐다. 한편 한림대 교수평의회는 지난달 초 전체 평교수 비상 총회를 열고 총장 퇴진에 관한 찬반투표를 한 결과 참석자들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퇴진운동을 결의하면서 학내갈등을 빚고 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그린알로에, ‘국가지속가능경영대상’ 노사협력부문 고용노동부장관상 수상

    그린알로에, ‘국가지속가능경영대상’ 노사협력부문 고용노동부장관상 수상

    [사진설명] 그린알로에 박원민부사장 수상 2013년에 이어 3년 연속 건강기능식품부문에 대한민국대표브랜드대상을 수상한 그린알로에(대표 정광숙)가 ‘제9회 국가 지속가능경영 대상’에서 노사협력부문에 고용노동부장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린알로에는 여성조직의 알로에전문기업으로 정 대표의 서번트리더십을 통해 상생과 협력의 노사문화를 형성하는 기업운영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대표는 ‘정직’과 ‘투명’의 리더십으로 매사에 매출실적을 논하지 않는 사원중심 경영을 통해 새벽부터 사원과 함께 현장에서 뛰는 현장 밀착형 소통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단 1%도 중국산 원료를 사용하지 않는 정직한 제품력을 갖추고, 정찰제를 시행하여 유통시장 질서를 확립시켰다. 또한 판매 채널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전환시켰다. 흔한 인터넷이나 매장, 심지어 회사측에서 직접 판매하는 채널 등을 일체 차단하고 오직 그린플래너를 통해서만 판매가 가능하도록 본사 직영체제의 후원방문판매 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해 왔다. 즉, 로드샵이나 인터넷 판매는 일절 하지 않는 것이 그린알로에의 독특한 특징이다. 무엇보다도 그린알로에는 직원들이 80세까지도 함께 일할 수 있는 인생 동행 기업이다.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고 일할 의지만 있다면 80세에도 현역으로 근무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린알로에는 건강과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여성중심 기업으로 지역 여성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 지역이라는 척박한 기업 환경 속에서도 신생기업으로써 입지를 굳히면서 선진 기업의 롤모델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린알로에는 해마다 지역사회 불우이웃에게 자사제품과 생활지원금을 전달하고, 사원에게도 자사제품과 장학금을 증정해 선진기업 문화를 구축해가고 있다. 정광숙 그린알로에 대표는 “기업의 성장은 사원의 행복지수에 달렸다. 그동안 일 중심의 직장 문화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나 아동양육, 여가활동, 결혼 등 다양한 욕구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작년부터 과감히 주 4일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바로 퇴근하도록 하여 무엇보다도 가족친화적 기업문화를 조성하는데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며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객의 감성과 꿈을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으로 노사가 상생하고 협력하는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린알로에는 알로에 업계의 떠오르는 다크호스답게 작년부터 올해까지 본사가 직접 경영하는 17개의 직영센터를 확대운영하며 동종업계는 물론 건강기능식품 업계를 긴장시킬 만큼 급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직영체제는 대리점경영과는 달리 모든 설비투자에서부터 전반적인 경영시스템 운영까지 본사가 직접 투자하고 관리하며 각 센터에 센터장을 임명하여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차후 이러한 직영센터를 전국적으로 넓혀나갈 예정이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메르스 꺾이나] 또 잠복기 지난 환자… “격리 연장 검토”

    메르스 최대 잠복기를 넘겨 증상을 보인 환자가 또 1명 발생했다. 메르스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지만 최장 14일로 알려진 잠복기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보건당국은 의심자에 대한 격리 연장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22일 추가된 3명의 확진자 가운데 171번째 환자(60·여)는 지난달 27~29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내원했을 당시 메르스에 감염됐다. 이 환자는 지난 9일 오전 약간의 미열 증세를 보였으나 유전자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을 받았다. 고열이 발생한 것은 최대 잠복기(12일까지)가 닷새나 지난 17일이다. 보건당국은 미열이 있었던 지난 9일을 발병 시기로 보고 있으나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격리 해제된 뒤 다시 격리된 사례도 있다. 간병인인 172번째 환자(61·여)는 지난달 30일 대전 대청병원에서 바이러스에 노출돼 최대 잠복기인 13일까지 격리됐다. 격리가 해제된 뒤 이 환자는 지난 15일 마스크를 쓰고 주민센터에도 다녀왔다. 그러나 당일 오후 발열이 시작돼 다시 자택 격리됐고, 이 환자가 지난 1일 대청병원에서 54번째 환자(63·여)와도 접촉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역학조사에 착오가 생겨 더 오래 격리됐어야 할 의심자가 중간에 바깥 활동을 한 것이다. 게다가 보건당국은 15일에 증상이 발현된 이 환자를 18일 시설 격리하기 전까지 사흘간 자택에 방치했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대책본부 총괄반장은 “추가 확산을 철저히 방지하기 위해 격리 해제 또는 격리 연장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격리 해제된 사람은 모두 9331명으로, 이 중 172번째 환자의 사례처럼 뒤늦게 증상이 발현한 사람이 있다면 지역사회 전파 위험이 커지게 된다. 세종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사설] 대통령 지지율 29%로 추락, 국정 운영틀 새로 짜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다시 사상 최저치인 29%로 급전직하했다. 한국갤럽의 지난 19일 여론조사 결과다. 정부가 판단 착오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초동 대처에 실패한 데다 이어 늑장 대응으로 헛발질을 할 때부터 예견된 결과라고 본다. 29%의 국정 지지율은 연말정산 파동이 일어났던 갤럽의 올 1월 넷째 주, 2월 첫째 주에 이어 세 번째다. 40%를 기록했던 5월 셋째 주 조사 결과에 비해 11% 포인트나 떨어졌다. 박 대통령의 고정지지층인 50대와 대구·경북(TK)의 민심도 등을 돌렸다는 점이 주목된다. 50대에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49%로 긍정평가(40%)를 앞섰다. TK에서도 부정적인 평가(51%)가 긍정적인 평가(41%)를 역전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은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비난과 실망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지만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도 지지율 하락을 부추겼다. 서울신문이 어제 성인남녀 1093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 줬다. 메르스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는 사람(49.4%)이나 메르스 확산 이후 모임이나 여행을 취소했다(52.7%)는 응답자가 각각 절반에 달했다. 지난 20일로 발생 한 달째를 맞은 메르스로 인해 국민들이 큰 공포를 느끼고 있고 일상생활에서도 직접적인 불편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메르스 공포를 느끼게 된 이유는 확산을 막지 못한 정부의 무능 때문(44.5%)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메르스 확산의 가장 큰 책임자로는 박근혜 대통령(57.9%)을 꼽았다. 대통령이 뒤늦게 병원으로, 학교로, 상가로 현장을 찾아다녔지만 성난 민심을 돌리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박근혜 정부로서는 국정 운영의 틀을 새로 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일만 터지면 우왕좌왕하다 늑장 대응을 한다거나 공허한 질책으로 ‘떠넘기기’ 식의 책임 회피에만 급급해하는 구태를 답습한다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길은 요원해진다.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묻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신임 총리와 공석이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발표된 만큼 공직사회도 새롭게 기강을 다잡아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권과도 비생산적인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대화와 소통으로 상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메르스발(發) 경기 침체로 고통에 허덕이는 국민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 [열린세상] 때늦은 후회의 교훈/소진광 가천대 대외부총장

    [열린세상] 때늦은 후회의 교훈/소진광 가천대 대외부총장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얼개를 든다면 시간과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통념적으로 시간과 공간은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세상일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독립적 ‘틀’로 인식돼 왔다. 시간의 의미는 역사를 통해 해석되고, 공간의 의미는 지리를 통해 인식된다. 즉 시간과 공간은 인류 문명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좌표’인 셈이다. 시간을 잘 관리하고 공간을 잘 활용하면 발전하고, 그렇지 못하면 퇴보한다는 법칙은 더이상 검증이 필요 없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사물의 인식 근거로 ‘있다’, ‘없다’를 드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있다’, ‘없다’는 분명 다른 차원의 현상이다. 이는 존재 영역인 ‘우주’의 범위를 설명하면서 ‘우주 밖’을 부존재(不存在)의 영역으로 대응시키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공간을 시간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고, 시간을 공간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종 시간과 공간을 같은 차원에서 대비하며 각각의 상호작용을 기대한다. 이렇듯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도 사후(死後) 세상을 상상하고,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에서의 서로 다른 현상으로 인식한다. 세상의 모든 신비는 이러한 착각에서 비롯된다. 모든 현상은 시간 흐름에 따라 존재 방식을 달리하고 의미 변화를 겪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도로 흐르는 것처럼 인식돼 왔다. 즉 시간은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추상적 얼개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틀’로 여겨진다. 하루는 누구에게나 같아야 하고, 1시간은 누구에게나 60분이어야 하며, 동일한 시간대에서 오후 3시는 누구에게나 같은 시점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사람에게 중요한 이유는 같은 흐름 속도, 동일한 시작과 끝이 아니라 이를 활용하면서 깨닫게 되는 ‘의미’ 때문이다. 누구에게 일생은 95년이 될 수 있고, 누구의 일생은 50년이 될 수 있다. 누구는 하루를 한 달처럼 활용하고, 누구는 하루를 1분처럼 활용한다. 따라서 양(量)적인 시간보다는 질(質)적인 시간 관리가 더 중요하다. 다양한 시간 활용 방식은 사람의 삶에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중국의 시경(詩經)이 전하는 ‘(하루가) 3년 같다’(如三秋兮)라는 구절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느껴질 수 있다. 앞부분에 ‘그님은 나물을 캐겠지(彼採蔬兮), 하루라도 못 보면(一日不見)’이라는 상황을 떠올리면 3년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함’을 뜻하며, 만약 ‘따분하여 잠을 못 이루고’(倦而不眠)라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하루는) 3년같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 흐름 단위가 누구에게나 같은 느낌의 절대 척도가 아니라 사람마다 일마다 일의 순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띠는 상대적 척도인 셈이다. 시간 관리에 따라 세상은 크게 달라진다. 개인보다도 집단 공동체의 경우 시간 관리는 더 중요하다. 통상 집단 공동체는 개인에게 각자 다를 수 있는 인식 범위를 한정하는 큰 얼개와 같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나 지방, 지역 혹은 국가와 같은 집단 공동체의 시간 흐름은 ‘발전’이라는 의미와 연계돼 있다.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잃어버린 10년’이 될 수도 있고, ‘100년을 얻은 10년’이 될 수도 있다. 시간 흐름은 어느 경우에나 같은 의미로 적용될 수 있는 척도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 동일한 시간 흐름이 갖는 의미가 다르다. 경우란 일의 순서에 따라 다양한 조합을 이룬다. 일의 순서는 단순히 시간 흐름이 아니라 일이나 현상의 속성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중요한 결정을 책임지는 지도자는 서로 다른 차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일의 순서를 잘못 정하거나 시간 흐름을 놓치면 비용은 많이 들고 엉뚱한 결과가 초래된다. 동일한 척도로 서로 다른 차원의 현상을 다스릴 수 없다. 제때를 놓치면 다른 차원의 현상을 그만큼 통제하기 어렵게 된다. 국가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염려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정도와 경로를 숨겼다는 주무 장관의 발언은 오히려 ‘정직하지 못한 한국’ 이미지를 온 세상에 퍼뜨린 꼴이 됐다. ‘국가 이미지 실추’와 ‘질병의 확산’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현상이다. 이를 같은 차원에서 다루면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허비한 시간을 일부라도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은 동일한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