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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이학교 선택 체크포인트

    놀이학교를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정작 어떤 곳을 고를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업체별 특징도 다양하고, 업체 말만 들으면 그곳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미술 중심의 통합형 놀이학교 프로그램을 개발한 명지대 김충원 교수에게 놀이학교를 선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을 들었다. ●아이의 취향을 냉정하게 판단하자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취향이나 재능 등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장을 직접 찾아 어떻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지 참관해 보고 아이의 반응도 살펴야 한다. 이때는 한 업체에서 서너 차례 이상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좋다. 결정도 하기 전에 아이가 그곳 분위기에 적응하면 다른 곳을 둘러볼 때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프로그램을 제대로 파악한다 업체별 프로그램 특성도 잘 살펴봐야 한다. 독일과 유럽의 놀이교육 이론을 적용한 곳이 있는가 하면 미술이나 음악, 체육 등 특정 분야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선진국형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교구 중심적이거나 외국 지침서(매뉴얼)대로만 이뤄지는 프로그램은 우리 정서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맡긴다는 생각을 버린다 부모들이 쉽게 저지르는 문제가 ‘아이를 맡긴다.’는 생각이다. 비싼 돈을 들여 보냈으니 부모가 할 일은 끝났다거나, 놀이학교가 부모가 해주지 못한 것을 다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교육은 가정과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놀이학교에서는 재미있게 배우지만 집에서는 부모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효과를 보기 어렵다. 이를 위해 놀이학교 교사와 부모의 대화가 중요하다. 집에서 보는 아이와 놀이학교에서 보는 아이가 다를 수 있다. 부모의 주관적인 시각을 버리고 교사와 많은 대화를 나눠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환경과 분위기를 잘 살핀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무엇보다 분위기를 눈여겨 봐야 한다.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열정과 인내심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재료가 같아도 요리사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선진 교구재를 아무리 많이 갖추고 있어도 교사들이 열의가 없으면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놀이학교의 장은 물론 교사들의 성격도 잘 봐야 한다. 시작할 때는 잘 대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에게 소홀한 곳도 있다. ●신중, 또 신중하자 업체의 말만 듣고 즉석에서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러 곳을 둘러본 뒤 집에서 차분히 결정해도 늦지 않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이 다 가니까 불안한 마음에 보낼 필요는 없다. 업체가 강남에 있다고, 브랜드가 유명하다고 아이에게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일단 보내보고 정하자는 생각도 바람직하지 않다. 몇 차례가 됐든 직접 찾아가 꼼꼼히 비교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소녀X소녀’ 칠공주파 보스역 곽지민

    ‘소녀X소녀’ 칠공주파 보스역 곽지민

    ‘불량소녀’가 다가온다.‘사마리아’의 연인으로 고등학교 때 농익은 연기를 선보였던 곽지민(21)이 영화 ‘소녀X소녀’에서 여학생 불량서클의 칠공주파 보스로 나섰다. 같은 학교 꽃미남 기찬을 두고 불량소녀 세리(곽지민 분)와 모범소녀 윤미(임성언 분)간의 우정과 경쟁을 그린 하이틴 코믹물이다. 상업 영화라기보다는 실험 영화에 가깝다. 영화 ‘친구’가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소녀X소녀’는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영화의 완성도나 이야기의 치밀함은 좀 떨어지지만 80분 동안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가벼운 영화다. 이 영화에서 곽지민은 몸을 사리지 않으며 불량소녀로 완벽한 변신했다. 그녀가 ‘끄르르∼’ 야구방망이를 아스팔트 바닥에 질질 끌며 섬뜩한 눈빛으로 “야∼뭘 꼬나봐. 눈알을 확 빼줄까.”하고 외치며 달려들자 남학생들이 줄행랑을 친다.“친구에겐 ‘우정’, 적에겐 ‘깡’”을 외치는 작지만 깡다구 강한 여고생 ‘오세리’를 정말 잘 소화했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실제 그녀의 고등학생 시절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 # 그녀의 진짜 고등학교 시절은 “아니에요. 원래 저는 성언이 언니가 연기한 범생이 윤미에 가까웠어요.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여고생, 친구도 소수정예인 그런 범생이였는데 그렇게 보시면 안 되죠.” 고2때 배우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물론 부모님. 소심하고 수줍음 많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약간 통통했던 그녀에게 어머니가 “네가 살을 빼면 허락해준다.”는 제안에 독하게 마음먹고 한달 보름에 15㎏을 뺐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 연기에 대한 열정은 나이와는 상관없다 어린 나이에 영화 ‘사마리아’에서도 과감하게 옷을 벗어던지며 열연을 해 화제가 됐던 곽지민은 “연기에 몰두하면 모든 것을 잊는다. 오직 그 인물에 빠져들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도 노는 애들처럼 욕도 심하게 하고 좀더 ‘날라리스럽게’ 하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한다. “시나리오에는 좀 어색한 말투나 장면들이 많았어요. 고딩들의 말투나 용어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 말씀드려 고친 부분이 많아요.” 이제 갓 20살을 넘긴 연기자가 당돌하게 감독에게 이러쿵저러쿵 논리를 편다. 그만큼 연기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좀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좋은 영화, 좋은 연기를 위해서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하고 반문하는 그녀의 당찬 눈빛과 연기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 “힘 있는 연기자로 남고 싶어요.TV 채널을 돌리다가도 제가 나오면 채널을 고정하고 볼 수 있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영화에서도 곽지민이 나오면 볼 만하겠구나 하고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배우로 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관심 있게 지켜 봐주세요.”영화 소녀X소녀는 오는 25일 개봉한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한나라 ‘與 흩어졌다 다시 뭉치기’ 경계

    한나라당은 22일 열린우리당의 탈당 사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선을 앞두고 여당의 분열을 즐길 만도 하지만 2002년 ‘학습효과’탓으로 신중한 반응이 대세다. 오히려 “무책임하고 후안무치한 행태”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선정국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뭉쳐 지지층을 이끌어내는’ 여당의 저력을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경원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열린우리당의 ‘탈당 쓰나미’로 민생이 실종되고 있다.”면서 “재집권 정략을 위해서라면 당원의 뜻과 민주적 절차도 깔아 뭉개더니 이제는 국정파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당을 버리고 깨는데 여념이 없다.”고 지적했다. 나 대변인은 “여당의 민생뒷전과 국민무시 행태가 이보다 더 할 순 없다.”며 “2월 국회 개회마저 불투명한 실정으로 무책임하고 후안무치한 열린우리당에 대해서 국민들은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임종인 의원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겠다.’며 탈당을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바로 그 정략적인 의도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으로 앞날에 실패만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며 몰아 붙였다. 박영규 수석 부대변인도 임 의원의 첫 탈당에 언급,“언론의 주목을 끌겠다는 얄팍한 술수에서 ‘난파선’ 탈출 1호를 기록했는데 차기 총선에서 국민심판 1호 정치인으로 남게 될 것”이라며 “탈당을 하면서 친정에 책임을 떠 넘긴다고 본인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고 꼬집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남매’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집안이 결딴?

    “호미로 쉽게 막을 일을 미봉(彌縫)하면 가래로도 막을 수 없다.” 중국 대륙에 재혼해 금실 좋게 살아가던 부부가 자신들의 의붓 남매간의 성폭행 등 불미스런 일을 감추기 위해 혼인시켜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화목하던 집안이 풍비박산하는 일이 발생,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남녀가 재혼해 각각 데려온 아들·딸과 화목한 가정을 이뤄 살아가던 중 의붓 남매인 아들·딸을 억지로 결혼시키려다 결국 실패하는 바람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상주일보(常州日報)가 16일 보도했다. ‘사건’의 장본인들은 재혼한 추궈칭(邱國慶·40)·뤼루(呂茹·37)씨 부부와 의붓 남매인 추하오(邱皓·20)·장윈(17)씨.지난 19991년 이혼의 아픔을 딛고 결혼한 추·뤼씨 부부는 추씨가 전처와의 아들 추군을,뤼씨가 전부(前夫)와의 딸인 장양을 각각 데려와 함께 오순도순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갔다.이들이 재혼할 당시 추군은 14살,장양은 11살이었다. 재혼한 추·뤼씨 부부의 금실이 너무 좋은 덕분에 이들 가족 네식구는 웃음꽃이 그칠 날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특히 추씨는 국영기업 중견 간부이고 뤼씨는 능력 있는 보험 설계사여서 집안의 셈평도 나날이 펴졌다. 하지만 이들 집안에 ‘불행의 싹’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2002년 9월부터 17살이 된 추군이 고교 2년,장양은 14살로 중학 2년생이 됐다.고교 2년생이 된 추군이 사춘기에 접어들자,아리잠직한 장양을 옆에서 지켜보며 ‘성충동’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심한 경우 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고생을 했다.장양은 14살이지만 조숙한 탓에 몸매가 이미 성숙할대로 성숙한 까닭이다.그해 11월10일 일요일이었다.추·뤼씨 부부는 직장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하고 추군과 장양 단둘이만 남았다. 의붓 남매이지만 사이가 좋은 이들은 집 근처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쳐 온몸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장양은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온몸에 난 땀을 식히기 위해 물을 끼얹고 있었다.화장실 문을 잠그지 않은채…. “쏴,쏴….”사워 소리를 들은 추군은 갑작스런 성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사워중인 장양을 끌어안고 성폭행을 자행했다.그녀가 끝까지 버티며 반항했으나 오빠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끝내 무너져버렸다.정조를 잃어버린 장양은 추·뤼씨 부부가 돌아왔을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사태를 알아챈 뤼씨는 너무 화가난 나머지 경찰에 신고,의붓아들 추군을 감옥으로 보낼 생각이었다.추씨는 아내 뤼씨에게 백배 사죄한 뒤 아들 추군을 불러 어머니와 동생에게 용서를 빌라며 마구 때렸다.추군은 “어머니,용서해주세요.내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혼돈에 빠진 뤼씨는 추씨 부자의 사죄에 못이겨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뤼씨는 고통스럽지만 참기로 했다.이혼의 아픔을 딛고 재혼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데다,추씨가 워낙 성품이 좋고 수입도 안정되고….이런 행복한 가정생활을 깨기 싫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이 아픔도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져 갔다.1∼2년이 지나면서 이들 가정에 과거의 아픔을 떨쳐버리고 또다시 웃음소리가 넘치기 시작했다.특히 2004년 여름 추군은 공부를 열심히 한 덕택에 대학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유명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화불단행(禍不單行·불행은 한번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겹쳐 온다는 뜻)인가.그해 7월말 대학 합격을 한 추군이 무료하게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이때 샤워를 하고 타월로 몸을 감싼 뒤 머리를 털며 나오는 장양을 본 순간,또다시 흑심이 발동했다.더욱이 지난번 일도 용서받은 만큼 이번에도 조금 잘못했다고 빌기만 하면 쉽게 용서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사워한 뒤의 물기 묻은 섹시한 모습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추군은 이때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지난번에는 아무런 준비없이 하다가 들켰지만,수면제를 먹인 뒤 일을 치르면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착각도 하게 됐다. 이틀 뒤 추·뤼씨 부부가 출근한 이후 수면제를 사온 그는 장양이 마시는 물컵에다 몰래 집어넣었다.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 물을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 위에서 통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추군은 또다시 동생을 범했다.잠에서 깬 뒤 자신의 하복부에 통증을 느낀 그녀는 그에게 당한 사실을 눈치챘으나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못했다.하지만 어머니 뤼씨는 여자의 직감으로 장양이 당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뤼씨가 장양에게 집중 추궁하자 눈물을 흘리며 “사실 몸이 너무 아프다.”며 사실을 털어놨다.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뤼씨는 모든 사실을 남편 추씨에게 털어놓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마음먹었다. 추씨는 집안의 스캔들이 밖으로 알려지면 직장생활을 하기 어렵다며 제발 참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대신 혼인서약서를 쓰겠다고 했다.의붓 남매인 만큼 이들이 결혼하는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추·뤼씨 부부는 의붓 남매를 데려다 놓고 ▲추군은 장양을 성폭행했으나 경찰에 알리지도 않고 형사책임도 묻지 않으며,▲추군은 법정 결혼연령이 되면 반드시 장양과 결혼한다는 내용의 각서에 서명하도록 했다.의붓 남매간 불행한 사건은 이로써 묻혀지는 듯 했다. 이들 부부는 의붓 남매가 당연히 결혼할 것으로 생각하고 “추군과 장양이 결혼을 하면,우리들은 이미 가족인 데,너희 둘이 또 결혼하면 우리들 사이는 더 가까워지니 얼마나 좋으냐?”며 흐믓해 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2005년 들어 나이가 들면서 장양에 대한 추군의 마음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것.그해 10월 중순 장양은 학교 기숙사에 있는 ‘장래 남편’인 그를 찾아갔다. 이때 추군의 친구들이 “저 아가씨가 아내냐?”라고 묻자,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니,나의 여동생이야.”이라고 말한 뒤 식당으로 데려가 점심을 사준 뒤 아무 말 없이 되돌아가버렸다.너무 황당하다고 느낀 장양은 어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사실을 안 추씨도 몹시 화가 나 추군을 찾아가 “장양과 결혼할 것이냐,말 것이냐?”고 따지자,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추군은 그때 이미 한국 유학생 김(金)모씨와 사귀고 있었다. 지난해 4월 중순,추군은 뤼씨와 장양에게 “정말 죄송하게 됐다.하지만 장양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해버렸다.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우두망찰하던 뤼씨는 “우리 모두 각서를 썼다.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욱대겼다. 며칠 뒤 이들 뤼씨 모녀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추군의 대학교 기숙사에 있던 한국 유학생 김씨를 찾아 저간의 사정을 털어놨다.이 사실을 알게 된 김씨도 깜짝 놀랐다.김양은 그를 찾아가 “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치사한 남자다.왜 나를 속였니?너를 저주할 것”이라고 말한 뒤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화가 난 추군은 이들 모녀가 김씨를 찾아가 이같은 사실을 말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그는 “죽었으면 죽었지,너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잼처 강조했다. 이 말을 들은 모녀는 모든 생의 의욕을 잃어버렸다.여름방학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추군이 8월말 생활비를 타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마침 추씨는 출근하고 없는 상황이었다. 추군을 보자 이성을 잃은 뤼씨는 “왜,장양과 결혼하지 않느냐?”며 따져 물었다.그는 “죽어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대거리했다.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뤼씨는 주방으로 들어가 식칼을 꺼내 들고 나와 추군을 마구 찔렀다. 이날 사고로 추군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충격이 너무 커 장애인이 되는 것은 물론 기억상실,실어증에 걸렸다.뤼씨 모녀는 현재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추씨는 입원중인 아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에 머무르고 있다.추씨는 곧 뤼씨와의 이혼 수속을 밟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1회전(4국)] 온소진 3단의 눈물겨운 투혼기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1회전(4국)] 온소진 3단의 눈물겨운 투혼기

    총보(1∼313) 313수에 이르러 종국돼서 계가를 한 결과 흑이 반면으로 4집을 남겨 덤을 제하자 백이 2집반을 이겼다. 보통 프로의 바둑에서는 반집이나 1집반으로 끝났을 때 미세한 승부였다고 표현하므로 이 바둑은 미세한 바둑은 아니다. 백이 우세해진 시점은 대략 208수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 뒤로는 흑도 끝내기에서 실수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둑이 300수 넘어서까지 진행됐으므로 백이 유리한 상황에서 승부가 뒤집어지지 않고 꽤 긴 수순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 바둑은 온소진 3단의 신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차이도 많이 났고, 백이 끝내기에서는 완벽하게 둬서 이겼지만 신승이다. 아니, 신승이라고 간단히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고생하며 이겼다. 초반의 대불리를 딛고 이후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겨우겨우 이긴 신승 중에서도 신승이다. 초반 온3단은 의욕적으로 변화를 구하며 포석을 진행했지만 홍기표 2단의 흑17이라는 신수를 적절히 응징하지 못한 까닭에 50수 무렵에는 좌상귀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몇몇 프로기사들은 이 상황에서 사실상 승부가 끝났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후 온3단은 우상귀에서 약간 만회했지만 백90,96이라는 착각이 등장하면서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모두 정말로 끝났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온3단의 눈물겨운 투혼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백110이라는 극약의 승부수를 통해 흑123이라는 실수를 유발했고, 백124의 맥점부터 우변에서 큰 패싸움을 만들면서 국면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좌하귀와의 바꿔치기를 통해 1차 패싸움을 승리했고, 우하귀에서의 2차 패싸움, 상변에서의 3차 패싸움까지 모든 패싸움에서 이긴 결과 대역전을 이뤄낸 것이다. 훗날 다른 프로기사들은 “홍기표가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질 수 없는 바둑을 지고 말았다.”고 표현했지만, 홍2단의 실수보다는 온3단의 투혼이 돋보인 한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온3단이 괜히 2006년의 최대 루키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 한판이다. (135=127,138=124,141=127,144=124,147=127,150=124,153=127,156=124,172=102,175=169,178=102,181=169,184=102,206=42,228=220,231=225,236=220,290=89,298=73,303=176,308=203,310=167) 313수 끝, 백 2집반승 (제한시간 각 10분, 초읽기 40초 3회, 덤 6집반) 유승엽 withbdk@naver.com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그때 그 김근태

    2004년 김근태(GT) 열린우리당 의장이 정동영 전 의장·정동채 의원과 함께 입각하기 며칠 전 그와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상태였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GT는 통일부 장관에 대한 강한 미련을 거듭 표시하며 막판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차선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임명권자인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1990년대 후반 초선의 야당 의원 GT는 출입기자들에게 꽤 인기가 높았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거목이 주는 중압감을 기자들이 느끼지 않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한 저녁 자리는 3시간을 넘는 게 기본이었고, 언제나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에겐 그런 능력이 있다. 2002년 여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선거자금 2000만원 수수 사실 고백 역시 GT에 대한 인물평을 할 때 빠지지 않는다. 그랬다. 김근태는 기존 정치권과는 잘 맞지 않는 ‘희귀한’ 존재였다. 임명권자가 복지부 장관에 임명하겠다는데, 그 자리는 싫다고 반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과거 정치권에선 볼 수 없었던 일이다. 경선 자금 수수 고백도 그렇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일을 그는 저질렀다. 어느 자리에서나 진지함을 잃지 않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런 모습을 기자는 ‘원칙주의자 김근태’로 규정짓고 싶다. 아직도 오피니언 그룹에서 꽤 인기가 높은 이유를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정치인 순위에서 선두권을 유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GT가 변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장이란 자리가 주는 중압감 탓일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잘 안 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도 목격된다. 그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권위주의 모습도 눈에 띈다. 특히 그가 통합신당의 중심축 역할을 자임하면서부터 무리수를 두는 모양새다. 정동영 전 의장과의 양자회동은 마치 김영삼-김대중의 ‘양김 회동’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회동은 당내에서 2선 후퇴론까지 야기하지 않았던가. 계파 수장이란 것도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 같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그는 국민들을 헷갈리게 했다.‘대통령은 정치에서 손을 떼야 하고 신당은 누구의 영향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며 노 대통령 배제론을 주창했던 그가 “정권 재창출을 위해 통합신당 추진 과정에 대통령의 힘과 지원을 부탁하고 싶다. 신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마음과 힘을 같이 한다면 신당 당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입장을 확 바꿔버린 것이다. 지리멸렬한 여당을 이끌어가야 하는 그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노 대통령과 각을 세워봐야 좋을 게 없다는 현실론도 외면할 수 없다. 더욱이 지금은 노 대통령발(發) 개헌정국이다. 대권고지 등정을 꿈꾸는 그로선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다 고전하고 있는 ‘고건 학습효과’를 모를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것은 ‘김근태식’이 아니다. 현실주의자 김근태보다는 원칙주의자 김근태가 우리에겐 더 친근하다. 우리 사회도 비록 대통령은 못 됐지만 더 비중 있는 국가원로로서 추앙받는 인물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GT의 숙고를 기다려본다.jthan@seoul.co.kr
  • 스스로 학습법 ‘9가지 원칙’

    스스로 학습법 ‘9가지 원칙’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은데 성적은 제자리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다. 아이가 학교에서 학원으로, 독서실로,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지만 정작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걱정이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자기 주도 학습능력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주도 학습능력이 강할수록 성적이나 성취도가 높기 때문이다. 자기 주도 학습능력은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의지를 갖고 공부하는 능력을 말한다. 최근 관련 검사를 개발한 숙명여대 교육심리학과 송인섭 교수에게 자기주도 학습능력을 높이는 방법을 들었다. 1.‘공부했다’는 함정에 빠지지 마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무조건 학원에 보내려는 경향이 있다.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위안을 느끼고, 아이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거라는 안도감을 갖고 싶어서다. 이 과정에서 부모나 학생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공부하는 이유를 알고 계획을 세워 하는 것이다. 시간이나 분량에 얽매이지 말고 얼마나 이해하고 넘어갔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2.나를 알면 전략은 저절로 생긴다.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 올리는 방법에는 관심이 있지만 내게 어떤 공부 방법이 맞는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학원을 다녀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우선 스스로 소화해낼 수 있는 공부 시간과 보충 과목을 스스로 선택하고, 공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계획대로 실천한 뒤에는 스스로 평가하고 문제점을 파악해 본다. 매일 반복하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전략을 짤 수 있다. 3.작은 성공 경험이 힘이 된다. 제대로 된 공부 방법을 깨달으면 변화는 곧 찾아온다. 우선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느끼는 것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면 공부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는 증거다. 이런 작은 긍정적인 경험은 더 큰 변화로 이어진다. 책 속의 글자가 쉽게 들어오고, 질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4.집중력이 성적을 올린다. 집중력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장 높아진다. 그러나 비록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해도 꼭 해야 하는 일을 할 때는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부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집중하면 나름대로 흥미를 느낄 수 있고, 재미를 느끼면 훨씬 쉽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력은 필요나 의지에 의해 노력하면 키울 수 있다. 이는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5.내게 맞는 목표를 찾아 실천한다. 무턱대고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도중에 의욕을 잃거나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목표는 되도록 달성하기 쉽게 세우는 것이 좋다. 큰 목표도 필요하지만 단순하고 작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감안해 계획을 세우되 부모나 선생님과 상의해 적절한 수준을 정해보자. 6.자신감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려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학업 수준이 낮은 학생 대부분은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무슨 일이든 일단 스스로 해보게 하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해냈다.’는 작은 경험이 쌓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만든다. 7.길게 보고 더디 가는게 미덕이다. 학원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단순하게 눈으로만 공부할 뿐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해서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공부에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머리를 쓰는 공부를 하면 끊임없이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학원이나 과외는 생각하는 훈련보다 아무런 의심 없이 지식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자연히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깨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8.시간을 다스릴줄 알면 시간이 남는다. 좋은 공부 습관을 들이는 데 중요한 것이 시간관리다. 스스로 시간을 배분해 할 일을 해 나가면 시간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익힐 수 있다. 시간관리는 시간 낭비를 줄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목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긴장감을 유지하고 자기 관리를 강화하는 효과도 있다. 9.공부 습관이 몸에 배면 성공이다. 하루 이틀만에 공부 습관을 바꿀 수 없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생활 습관은 물론 생각하는 습관까지 몸에 배게 된다. 공부 습관이 몸에 배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도움말 및 출처:‘송인섭 교수의 공부는 전략이다’
  • [홍두식의 루어낚시 따라잡기] 전남 고흥 해창만 배스낚시

    겨울철 배스낚시 여건은 좋지 못하다. 따뜻한 남쪽으로 장거리 출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생스럽게 먼곳을 찾아도 조황을 보장받지 못하는 계절이도 하다. 겨울철 천혜의 배스낚시터로 급부상하는 곳이 있다. 전남 고흥의 해창만수로. 간척 매립공사로 인해 생긴 수로 형태의 호수다. 3개의 배수갑문 사이로 바다와 접해 있어, 저수지나 내륙의 수로에 비해 염도가 높다.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와 염분 덕에 한 겨울에도 결빙이 잘 되지 않아 물낚시가 가능하다. 게다가 수로 전역을 촘촘하게 뒤덮은 갈대는 매복을 좋아하는 배스들의 천연 스트럭처가 되고 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끝없는 지류들과 그 속의 많은 배스들이 장거리 출조도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무성한 갈대들 탓에 도보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단점. 이곳을 찾는 배서들은 땅콩보트나 고무보트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겨울철에는 아침보다는 햇살이 퍼지는 낮 시간대에 더 기대를 걸어야 한다. 배스의 식욕은 수온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포인트 선정. 평균 수심이 2∼3m, 깊은 곳이라도 7∼8m정도이기 때문에, 밀집된 스쿨링 형태보다는 얕은 곳과 깊은 곳을 오가며 활발히 먹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수심대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채비는 지그헤드 1/16 온스에 2∼3인치 정도의 에코기어 버그엔츠 같은 수서곤충 타입의 웜을 끼워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채비가 물에 떨어지는 순간과 액션을 가하는 순간 입질을 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해창만 배스들의 특징 중 하나는 포인트 한곳에서 많은 수의 배스를 뽑아 낼 수 있다는 것. 한 마리를 뽑아낼 때 나는 소음을 주변에 숨어 있는 배스들이 먹이활동으로 착각하여 몰려드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한자리에서 20∼30마리를 낚을 수도 있다. 씨알은 주로 20∼25㎝.40㎝짜리도 간간이 잡힌다. 작년 12월 중순쯤엔 하루에 300마리 가까이 잡은 배스낚시인도 있다고 하니, 손을 덜 탄 배스를 찾아 먼 곳을 오가는 열정을 쏟을 만도 하다. 에코기어 프로스탭
  • [독자의 소리] 뒷골목이 사업용 차량 차고지인가/임순기(전남 해남군 화산면)

    국내의 모든 차량은 사업용과 비사업용으로 구분돼 관리되고 있다. 사업용 차량은 택시에서부터 대형 화물차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하고 수량도 엄청나게 많다. 각종 차량의 증가로 전국 어디에서나 주차난과 무질서한 주차행위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 사업용 차량들이 차고지 준수규정을 잘 지켜지 않고 있어, 문제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본다. 사업용 차량은 사업허가시 일정한 차고지를 갖춰야 하고 영업이 끝나면 허가된 차고지에 차량을 주차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사업용 차량이 이러한 차고지 준수규정을 잘 이행하지 않고 길거리를 차고지로 착각하고 있는데 큰 문제가 있다. 영업을 마친 차량이나 휴차 차량이 해당 운전자의 집 부근 도로에 무질서하게 주차돼 있어 주거지 주차난을 심화시키고, 교통 흐름도 방해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 15t 중기덤프에서부터 관광버스에 이르기까지 주택가나 상가지역의 뒷골목에 아무렇게나 주차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면도로의 교통 소통이 어렵게 되고 교통사고 역시 증가 추세에 있다. 여기에 관할 지자체들이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방관한 결과 차고지 의무규정이 유명무실한 제도에 그치고 있다. 소형 사업용 차량과 대형 덤프차량, 관광버스에 이르기까지 사업허가시 부과된 조건인 차고지 입고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길거리 불법주차를 일삼는다면 그 지역 주차질서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업용 차량의 사업주나 운전사, 그리고 단속 관청인 각 지자체에서는 갈수록 심화되는 주차난을 해소하고 사고없는 쾌적한 거리를 만들기 위해 사업용 차량의 차고지 의무규정 준수에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다. 임순기(전남 해남군 화산면)
  • [서울신문 신춘문예-희곡당선작] 문득, 멈춰 서서 이야기 하다- monologue Quartet/김정용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병원복 차림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 잠시 휠체어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네 사람: (동시에)저기……. 짧은 암전. 명일: 그녀를 처음 본 건 두정: 치악산이었습니다. 신흥: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신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신흥: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명일: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해질무렵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요. 두정: 그날 따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명일: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들이 뭐라하건 전 그때 운명을 느꼈습니다. 두정: 이렇게 될 운명이라 그랬던 걸까요? 신흥: 앞이 깜깜하더군요 신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사람 모습만 보이는 거 있잖아요. 신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수습해야 할지, 그때만 생각하면……. 두정: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일은. 명일: 그날이 제 생애에서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난 날입니다. 신내: 제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그래도 용기를 내야겠죠? 신흥: 용기가 나질 않더군요, 어떻게 마누라 얼굴을 봐야 할지, 술이라도 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두정: 술요?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산행하는 날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내려와서 마시면 모를까. 명일: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명일 주변이 밝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명일: 이 말이, 제가 그녀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어요,‘술 한 잔 하실래요?’ 참 바보 같았죠, 머릿속에 별별 말이 다 떠돌았는데, 막상 나온 말이 그거였어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런데 그녀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한잔만요?’(미소) 그렇게 시작 했어요. 우리들. 정말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좋은 일만 계속 생기면 왠지 불안해지고 그러는 거. 육상 경기복 차림의 신내 등장. 얕은 숨으로 몸을 푼다. 명일: 하지만 그런 불안도 그녀의 미소 앞에선 힘을 잃고 말았죠.(신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어요, 몸이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마음만은 늘 붙어 있었죠. 신내: 그만해,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래서 대학 떨어지면 누구 탓하려고?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많이 놀랐어요, 원래 말씀을 거침없이 하시는 편이시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일에 반대 한번 안 하셨던 분인데, 아빠도 제가 고3이 되는 게 스트레스가 되셨나봐요, 사실 전 아무렇지도 않은데. 육상하면서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으실 생각조차 안 하세요 명일: 그런 우리를 하늘이 시샘했는지 신내: 그만해 명일: 불안함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신내: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명일: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신내: 낼 모레가 마지막 시합이에요. 오빠가 와 줄까요?(호루라기 소리) 예, 가요! 암튼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급하게 달려 나간다.) 명일: 다 제 잘못이에요, 급하게 달려 나가는 연수를 잡았어야 했는데, 연수가 제 눈앞에서 붕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나뒹굴었어요, 아주 잠깐 사이였는데……,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그렇게 몇 바퀴를 굴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명일: 수술실 앞에서 내내 기도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두정: 멀리서 누군가 절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눈을 떴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얀 천장, 그보다 더 하얀 형광등뿐이었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명일: 잠깐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저 세수좀 하고 올게요. 죄송합니다.(나간다.) 두정: 이제 에베레스트는커녕 문턱하나 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니 죽고 싶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결과가 나와봐야 안다고, 설령 잘못 되더라도 열심히 재활하면 될 거라고 말했지만, 제 몸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저는 걷지 못할 겁니다. 이제 에베레스트는 제게 있어 그림엽서 속에서만 존재하는 산일 뿐입니다. 신흥: (통화하며 등장)아니라니까 그러네, 왜 내 말을 못 믿어,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마……, 나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깟 일로 안 무너져……, 여보 나 믿지? 그래 내가 알아서 잘할게, 그리고 내 전화 말고는 다른 전화는 절대 받지마……, 알아, 알아 당분간 친정에 가 있어, 애들은……, 그래, 너무 걱정마.(끊는다.) 두정: 너무 걱정마, 모두들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대한 법이니까요. 이렇게 되고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관대함이란 게 무관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요,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도 다 여러분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입니다.(사이)저도 며칠 전까진 여러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하고 있었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절망이란 놈은 순식간에 저를 이곳에 앉혀 놓고는 두 다리를 옭아맸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신흥: “너무 걱정 마”,“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이 말을 몇 사람에게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길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걱정 말라고 당부하는 꿈을 꿀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웃긴 건, 그 어느 누구도 저에게 이 말을 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저인데도 말이죠. 가해자 취급만 당했어요, 물론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저 잘못 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저만 좋자고 프로젝트 진행시킨 겁니까! 다 같이 잘되자고 한 일인데, 일이 틀어지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로 돌변하더군요, 같이 진행한 동료들까지도 말이죠, 정말 순식간이었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두정: 다 필요 없습니다. 신흥: 다 필요 없어요. 신내: (등장)꽃이 필요할 거예요, 그쵸? 신흥: 그래서 준비한 게 있습니다. 두정: 전……, 이곳에서 탈출할 생각입니다. 신흥: (약병을 꺼낸다)저만 없어지면 됩니다. 두정: 제가 없어지면 모두들 걱정하는 척하다가 금세 잊어버릴 겁니다. 다리병신 하나쯤 없어졌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신내: 아니야, 그건 아니야.(두정 나간다.) 여자가 먼저 꽃을 주는 건 좀 그렇겠죠? 신흥: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이게 왜 이래. 신내: 어떡하지? 신흥: 어떡하지? 신내: 오빠가 와주긴 할까요? 신흥: 깨버릴까? 신내: 용기내서 말하긴 했는데 대답을 못 들었거든요 신흥: 용기가 깨질 때 유리 파편이 섞이면 먹기 힘들 텐데.(열심히 뚜껑을 돌린다.) 신내: 다시 한 번 말해 볼까요? 이상한 애로 보이면 어쩌죠?(사이) 안 되겠어요. 신흥: 안 되겠어. 수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신내: 무슨 수를 써야지……. 명일, 나가는 신흥과 교차되며 들어온다. 신내: 아하! 다시 말하기는 그러니까, 편지가 좋겠어요. 그렇죠? 좋은 생각이죠? 마지막 시합에 오빠가 와주면 더 힘내서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쓰는 거예요. 역시 솔직한 게 좋겠죠? 그래, 그래야겠어요. 명일: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신내: 편지 명일: 편지 얘기는 아직 안 하지 않았나요? 신내: 우선 펜하고 종이가 필요하겠죠? 명일: 적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듣기만 하시면 안 될까요?(신내,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신내, 나간다.) 그럼 얘기가 나왔으니 편지 얘기를 할게요.(잠시 머뭇거리다) 사귀기로 한 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연애편지를 쓴 건 아니고요, 일기 쓰듯이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나 써서 메일로 보냈어요. 하루도 빼먹지 않았어요, 단 하루도.(웃음)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셔서 떡이 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차 싶은 거예요, 하루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거든요, 늦었지만 변명이라도 해볼 양으로 부랴부랴 컴퓨터 앞에 앉았죠, 그리고 메일을 쓰려고 로그인을 했는데 수신 확인 창이 뜨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하고 봤더니, 글쎄 제가 전날 밤에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무슨 말을 썼는지 궁금해서 메일을 열어 봤는데(피식거린다.) 그게,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fhufhㅈ뎌???ㄷew 이런 거 (웃는다.) 더 웃긴 건,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fhi롤fwqo어ㅈㅇ……. 명일, 말을 잊지 못하고 정신없이 웃는다. 무대 뒤에서 두정과 신흥의 절규가 들려온다. 명일: (무안해 하며)죄송합니다. 신흥, 두정 서로 반대편에서 등장 신흥, 두정: 이럴 순 없어 두정: 병원 정문도 못가서 잡혀버리다니. 신흥: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신흥, 두정: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내가 아무리 이런 꼴이 됐어도 두정: 병원문턱 하나 신흥: 병뚜껑 하나 신흥, 두정: 내 맘대로 두정: 넘지, 신흥: 열지-못하다니, 왜 하필 이런 일이 나한테 닥친 거야, 왜 하필이면 나냐구, 내가 뭘 잘못했게! 내가 바라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명일: 다시 시작하죠. 두정: 그만하자, 그만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 꼴만 더 우스워지지. 두정, 신흥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신흥: (병을 내밀며) 저……, 이것 좀. 명일: 네? 두정: 뭘 봐! 휠체어 탄 사람 처음 봐! 명일: 네. 신흥: 죄송합니다. 이것 좀 열어 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병을 건넨다.) 두정: 씨발.(술병을 꺼내 마개를 따려한다.) 이건 왜 이렇게 안 열려 신흥: 잘 안 열리죠?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명일: 무리라뇨, 전 괜찮아요.(사이) 알겠습니다. 내일 오면 되는 거죠? 같은 시간에 두정: (술병을 집어던진다) 젠장, 젠장, 젠장! 신흥: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사이) 안 열리면 할 수 없죠 뭐(병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아련한 음악 다시 흐른다. 명일, 천천히 무대를 돌고. 신흥 뚜껑을 열기 위해 애쓰며 퇴장, 두정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퇴장, 신내 편지를 들고 등장, 음악이 끝나면 명일과 신내 각자 자리를 잡는다. 신내: 편지 다 썼어요, 들어 볼래요?(편지를 꺼내 읽는다.) 오빠 명일: 연수야, 야! 신연수 신내: 잘 지내고 계세요? 명일: 난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신내: 전 무지무지 잘 지내고 있어요. 제가 며칠 전에 오빠에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명일: 기억난다. 너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신내: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쳐 버려서, 놀라셨죠? 명일: 아니야.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붙잡아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지. 신내: 그래서 말인데요. 오빠가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 얘기를 못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써요. 저, 내일모레 있을 시, 도 대항 육상 대회에 시 대표로 나가게 됐어요, 아마도 제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아빠가 육상을 못하게 하시거든요. 마지막 경기를 오빠가 꼭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힘이 불끈 불끈 날거 같아요 어쩌면 한국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아빠도 더는 반대 못하시겠죠.-제발 그렇게 됐으면-, 자라나는 한국 육상 꿈나무의 앞길을 열어 주세요, 네 오빠! 우리가 대기하는 곳이 3번 게이트 쪽이거든요, 그쪽 스탠드 앞쪽에 계시면 제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꼭 와주셔야 해요, 오빠가 오지 않으면 저는 실망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꼴찌를 할지도 몰라요, 꼭 와야해요, 꼭 꼭 꼭. 명일: 가고 싶어, 그곳에…….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들려온다, 신내 재빨리 편지를 감춘다. 명일: 저 소리 들려? 우는 소리가 괴상하니까 분명 생긴 것도 이상한 새일 거라고, 확인해 보고 싶다고 몇 시간이나 헤매고 다녔었잖아. 결국 확인도 못해보고…….(목이 멘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호루라기를 불며 걸어서 등장. 두정: (버럭)지금 뭐하는 거야! 정신이 있어 없어!(신내 얼른 뛰어 나간다.) 그런 정신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야, 응!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정말 실망이다. 네놈만은 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 같은 녀석은 에베레스트를 입에 담을 자격도 없어! 명일: 미안, 그때 널 잡았어야만 했는데. 두정: 에베레스트는 고결한 자에게만 허락된 곳이다, 약해 빠지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하얀 살결을 허락하지 않아! 명일: 그렇지 않아, 다 내 탓이야. 두정: 그깟 집안일 때문에 술에 절어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네가 말했던 꿈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어? (사이) 그래, 나 이해 못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 같지? 얼빠진 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어떤 인간인 줄 알아? 바로 너 같이 환경 탓, 상황 탓 하는 것들이야.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뚫고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야. 별것도 아닌 일에 주저앉아 버리는 너 같은 놈은 필요없어!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무슨 염치로 훈련장에 나타난 거야, 나타나길. 다른 팀원들이 너 보면 사기 떨어지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꺼져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명일: 제발 나타나줘, 한번 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내 앞에 나타나줘. 암전. 빛 속에 홀로 있는 신흥 신흥: (반쯤 줄어든 약병을 들고 허탈하게 웃으며) 안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겨우겨우 열어가지고 스무알을 넘게 먹었는데……, 뭐? 고통 없이 갈 수 있다고? 나쁜 새끼들.(꺽꺽댄다.) 이딴 걸 20만원씩이나 주고 산 내가 미친놈이지.(전화 벨이 울린다, 병을 내려놓고 전화를 확인하고는 배터리를 빼버린다.) 미안해 여보. 날 용서하지 마.(사이) 한심하죠? 저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한심한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보니까,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한심해지는 거지.(사이) 돌아가신 저희 아부지께서 술만 드시면 어린 저를 붙잡고 늘상 하시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두정: (빛 속에서 등장)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사라진다) 신흥: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알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부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넌 어른이 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동물이 바로 어른이란 동물이다.”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사이) 그나저나 이제 어떡해야 하죠? 수습할 수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빌어먹을 죽지도 못하고, 어떡해야 하죠? 신내: (빛 속에서 등장) 그럴 땐 초콜릿을 먹으면 돼요, 그것도 아주 진한 다크 초콜릿, 아무리 우울해도 한두 조각이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한두 번 혼난 것도 아니고 뭐. 괜찮아요. 초콜릿 하나면 땡이에요.(사라진다.) 신흥: 그 생각도 안해본 건 아닙니다. 근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예? 그건 너무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제가 아픈건 딱 질색이라. 명일: (목소리) 연수야, 연수야 신흥: 쉿! 지금 누가 제 이름 부르지 않았나요? 설마 놈들이 여기까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제발 좀 도와주세요,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명일: (목소리)아! 꿈이었구나. 신흥: 윽!(배를 움켜쥔다.) 아 배야, 갑자기 왜 이러지? 뭐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 화장실……, 크 아퍼, 먹은 거라곤 이것뿐인데,(무언가 떠올라.) 약! 이 약! 개새끼들.(배를 부여잡고 달려 나간다.) 빛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약병. 빛이 점점 번져 공간을 환하게 만든다. 밝아지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신내. 신내: 이 시간이면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데 (두정 등장) 어! 태령 오빠! 두정: (신내의 맞은편에 앉는다.) 왜 불러낸 거야? 신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드릴 게 있어요. 두정: 뭔데 신내: (편지를 건네며) 이거 두정: (받으며) 이게 뭔데? 신내: 나중에 읽어 보세요(얼굴이 붉어진다.) 두정: (읽은 후) 각서……, 야! 지금 너 장난하냐? 신내: 아니에요, 안 빨개요 두정: 이딴 종이 쪼가리를 어떻게 믿어? 신흥 한손에 휴지를 들고 등장, 처절한 소리를 지르며 부리나케 테이블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신내: 전엔 죄송했어요, 제 말만 하고 멋대로 가버려서. 두정: 죄송하다면 다야? 신내: 예, 그치만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두정: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신내: 오빠. 두정: 이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이상 난 네 대장이 아니다 신내: 호, 혹시……, 여, 여자친구……, 있으세요. 두정: (단호하게) 없어, 추호도. 난 한번 결정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아. 마음 같아서는 널 죽도록 패주고 싶지만 옛정이 있어 참는다. 신내: 다행이다.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두정: 더 할 말 없으면 나 간다. 훈련중이었거든, 네놈이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그 훈련 말이다. 신내: 그러세요, 예, 가보세요, 편지 꼭 읽어 보시고요, 두정: 두 번 다시 널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란다.(각서를 구겨 테이블에 던진다.) 신내: 저도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신내 꾸벅 인사하고는 떠나는 오빠(두정)의 뒷모습을 눈으로 는다. 두정 나간다. 신내는 오빠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뜬다. 신흥 허겁지겁 등장, 숨을 곳을 찾는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고는 몸을 숨긴다. 신흥: (숨을 몰아쉬며)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마주칠 건 뭐야, 그나마 나오는 길에 마주쳤기에 망정이지 들어가는 길에 마주치기라도 했어봐. 아유아유 죽겠네.(두정이 버렸던 병을 발견) 뭐야? 새거잖아.(너무나 쉽게 병을 열고는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는다.) 햐 시원하다.(허탈하게 웃으며) 안좋은 일만 생기는 것 만은 아니구나.(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제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아부지 말처럼 어른이 돼버려서 이렇게 된 걸까요? 가장 더럽고……, 후후후.(사이) 네? 어른이 되기 전에요? 글쎄요, 어른이 되기 전이라……. 그러고 보니 제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요. 그땐 뭐, 다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샐러리맨 따위가 될 거라고는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때의 저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드네요,(사이) 그럼요, 뭐였냐면요……, 막상 말하려니까 쑥스럽네요, 웃지 마세요, 가수예요, 가수 (웃음) 웃기죠? 가수를 꿈꾸던 청년 도망자 되다! (웃음 소리속에 점점 슬픔이 담긴다.) 명일: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 꿈이었어, 꿈. 연수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연수야.(컴퓨터를 켠다, 윈도 시작음악) 언제까지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언제 와서 이 편지 읽어 줄래,(창 뜨는 소리, 몹시 놀란다.) 어, 어! 신흥: 아, 아! (배를 움켜쥐고) 또야? (뛰어 나간다.) 명일: (흥분) 틀림없어요. 그녀가 읽은 거예요. 그녀가 읽은 거라고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메일을 읽어요, 안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게 아니었던 거예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짧은 사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신흥: (등장) 지독한 놈들, 왜 화장실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야, 아, 미치겠네.(반대쪽으로 달려 나간다.) 명일: 봤죠, 네 봤어요, 근데 제가 본건 사고 나서 실려 가는 것까지였어요, 죽은 연수를 본 건 아니잖아요. 장례식요? 어……, 그건……, 아 그래그래, 필요했던 거예요 장례식이, 연수는 큰 사고를 당했어요, 죽지는 않았겠지만 몸이 성치는 않을 거예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영화나 소설 보면 죽은 걸로 하고 숨어서 지내는 거, 그래 그거야, 그거.(짧은 사이) 비약요? 그건 선생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겠어요, 연수가 살아있어요! 제 우울증 따위는 한방에 끝났다고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수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요 살아 있기만 하다면요, 신흥: (퀭한 얼굴로 등장) 살았다……. 두정: (목소리) 야! 야! 신흥: (소리 나는 쪽을 보며) 젠장! (도망친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낮은 목소리로) 거기 서! 뭐 나한테 속이는 거 있지? 틀림없어,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뭐야? 사실대로 말해봐. 뭐야 대체? 명일: 예? 두정: 뭐라고 했어 지금? 다시 한 번 말해봐. 명일: 몇 번을 얘기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지금은 연수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짧은 사이) 선생님! 왜 자꾸 그러세요? 선생님은 연수가 살아 있는 게 싫으세요? 비밀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연수밖에 없어요, 그런 건 철저한 애였어요, 수신확인이 됐다는 건 연수가 열어 봤단 소리예요.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두정: 그래 알았어, 너희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이해한다. 알았어, 알았어,(짧은 침묵) 잘 가라, 참 그리고 앞으론 문병 같은 거 오지마라, 훈련에만 전념해, 나 들어간다. 명일: 안녕히 계세요. 연수를 찾아봐야겠어요.(나간다.) 두정: (가다 멈춰서) 개자식들! 신흥: (온 몸엔 상처, 옷은 쥐어뜯겨 엉망인 채로 등장) 개새끼들! 두정: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자식을 끌어들여? 신흥: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이렇게 패냐 두정: 씨발, 씨발 씨발,(거친 웃음) 신흥: 아, 진짜 아프다, 돈 몇 푼에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먼, 도망치지 않았으면 골로 갈 뻔했네.(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씨발 새끼들, 아부지, 여보, 나 아퍼.(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두정: 그만해, 그만해!(울먹인다.) 두정과 신흥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메운다. 신내 허겁지겁 들어온다. 신내: 뭐하는 거예요 대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얼른 일어나요 (두정, 신흥 울음을 그친다.) 자 초콜릿 (두정과 신흥 앞에다 놓는다.) 이거 먹으면 힘나거든요, 씹어 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요.(사이) 자 가요, 가서 멋지게 1등하고 돌아오면 되잖아요. 그럼 분명 코치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얼른 일어나세요. 시간 다 됐어요. 우리 몸도 풀겸, 경기장까지 뛰어 가요! 오케이.(나간다.) 두정, 신흥 꾸역꾸역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신흥은 두정의 자리로, 두정은 신흥의 자리로 간다. 둘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집어든다. 신흥: 아깐 음료수 이번엔 초콜릿? 두정, 신흥: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초콜릿을 본다.) 뭐야? 둘,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는다. 마법같은 음악 잠깐. 알 수 없는 미소가 둘의 얼굴에 감돈다. 두정, 신흥: 그래, 힘내자, 신흥: 약을 스무 알씩이나 먹고, 그렇게 맞았는데도 안 죽었는대. 두정: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발버둥 쳐 봤자지. 두정, 신흥: 뭔가 길이 있을 거야. 두정: 그렇지? 신흥: 그렇지. 둘, 서로 반대편으로 퇴장, 신내 다른 곳으로 들어온다. 신내: 자! 우리 파이팅하는 거예요! 코치님도 병원에서 틀림없이 우릴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몸을 풀며 두리번거린다.) 아직 안 왔어요, 조금 있으면 시작인데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죠? (관중석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엄마, 아빠 여기, 여기.(사이) 차가 막히나?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래, 그래. 오빤 틀림없이 올 거야. 자! 힘내자 연신내. 멋지게 달려서 일등 하는거야, 알았지? (더욱 열심히 몸을 푼다.) 명일 등장. 신내: 어! 오빠! (명일에게) 여기에요, 여기.(환하게 웃으며 인사) 오빠가 왔어요, 오빠가 왔다고요. 좋았어, 아자아자! 명일: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친구들은 모를 테고,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나? 그래, 일단 아이피 추적부터 해보자, 좋았어, 아자아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소리: 여자 800미터 예선전 참가자들은 본부석 쪽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오빠 쪽을 향해) 꼭 일등 할게요! (나간다.) 두정 등장, 휠체어를 세우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 재활운동을 시작한다. 각자의 일에 열심인 두 사람. 명일: 안 되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두정: 헛 둘, 헛 둘. 한참을 하다 지친 둘. 명일: 아,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야? 두정: (숨을 몰아쉬며) 두고 봐 꼭 해내고 말 테니까. 기다려라 에베레스트, 내 네놈을 꼭 밟아주고 말 테다. 소리: 딩동댕동.601호 특실 환자분 면회객이 와 있습니다. 속히 병실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서 공사하나?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집중을. 두정: 면회? 누구지? (휠체어에 오른 후 퇴장.) 명일: 도저히 안되겠다. 누구 컴퓨터 잘하는 사람 없나? 아 그렇지! (휴대전화를 꺼내 건다.) 여보세요? 문정이냐? 응, 나 명일인데·…….(통화하며 나간다.) 나가는 명일과 교차하며 신내 등장. 긴장을 풀기 위해 몸을 턴다. 소리: 여자 800미터 세번째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선수들은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신내 앞으로 나와 몸을 푼 다음 놓여 있는 병을 들고 마시고는 (두정이 버렸던 병) 출발선에 선다. 소리: 차렷, 준비. 소리2: 거기 서 개새끼야! 소리: (총소리) 탕 출발과 동시에 터지는 응원과 환호성 속에서. 슬로 모션으로 출발하는 신내.“안 서면 죽어!” 소리를 등지고 신흥 슬로로 뛰면서 등장. 신내와 신흥 같은 방향으로 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두 사람. 신흥이 점점 신내를 따라잡아 이윽고 나란히 뛰게 된다. 신흥이 신내를 앞서가려는 찰나. 신흥의 발이 꼬여 중심을 잃고, 그런 신흥에 걸려, 비명을 지르고 넘어지는 신내. 신흥은 얼른 추스르고 멀리 달아난다. 엎어진 채 그대로 있는 신내에게 빛이 모아진다. 빛은 점점 작아진다. 암전. 다시 서서히 밝아지면 신내의 자리에 서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신흥 신흥: 하하하, 꼴좋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한번은 잡혀도 두 번은 안 잡힌다! 이래 봬도 왕년에 한달리기 한 사람이야 왜 그러셔.(사이)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떡해야 하지? 집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길거리에서 전전긍긍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약만 안 샀더라도 좀 더 나았을 텐데 (뒤적거려 지갑을 꺼낸다.) 육 만원. 육 만원이라, 이걸 갖고 뭐해……, 인생 허무하다, 나이 서른여덟에 가족 버리고 수중에 딸랑 육 만원 들고서 고민하는 꼴이라니……, 아니다, 아니다. 돈 한푼 없는 것 보다 낫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육 만원으로 새출발하는 거야! 까짓 인생 대역전이 별거야, 나라고 뭐 육 만원의 신화 만들지 말라는 법 있어? (절규한다.) 젠장, 근데 뭘 하냐구! 세 개의 빛이 동시에 들어온다. 빛 속에 나란히 있는 명일, 신내, 두정, 신흥. 명일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고, 신내, 입 주변이 피에로처럼 초콜릿이 범벅인 채로 무지막지 멍하게 앉아 있다. 두정은 한 곳을 응시한 채 얼어있다. 지하철 환승 멜로디가 경쾌하게 울린다. 소리: 이번 역은 전동차를 갈아타실 수 있는 환승역입니다. 다른 전동차를 이용하실 손님께서는 빠뜨리신 물건이 없나 잘 살펴보시고 다른 열차로 갈아타시길 바랍니다. 넷. 각자의 자리를 떠나 각기 다른 사람이 있던 자리로 이동한다. 두정과 신흥 쪽의 빛이 어두워진다. 명일: 틀림없다니까요, 증거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돼요, 제가 보낸 메일이 수신 확인이 되어 있었다고요, 왜 그게 증거가 안 되는 건데요, 비밀번호는 연수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니까요.(사이) 그러니까 한번만 조사해달라는 거예요, 저기요, 무슨 얘긴 줄 알겠는데요, 사망신고가 됐다고 해서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사이) 말이면 답니까! 제가 미친놈으로 보입니까? 당신들 시민의 요청을 거절하는거 그거 직무 유기야 알아? 민중의 지팡이라며? 친절봉사라며! 이따위로 일할 거야! (사이) 제발요,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조사해 주세요. 연수는 살아 있어요, 죽은 사람 살리는 셈치고 아니, 정말로 죽은 사람 살릴 수 있는 일이니까 한번만 도와주세요? 네? 한번만요. 신내: 안 돼! 안 돼! 아무리 초콜릿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아,(흐느낀다.)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다시는 달릴 수 없는데……, 오빠가 보고 있었어,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끝이야, 전부 끝장나버렸어. 명일: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신내: 코치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입원하실 정도로 열심이셨는데. 명일: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신내: 이젠 뭘 어떡해야 하지? 모두들 나한테 손가락질할 거야, 부모님도 친구들도 오빠도 모두들 한심하게 생각할 거야. 내가 전부 망쳐버린 거야. 어떡해. 멀리서 신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한 손에 낡은 기타를 들고 등장하는 신흥 미친 듯 웃으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신흥: 하하하, 이거야 이거! (기타를 튜닝하며 흥얼댄다.) “나는야 돈 한푼 없이 기는 도망자라네 하지만 나에겐 낡은 기타와 노래가 있어 둥기둥가.”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육 만원으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더군요, 이럴 때 의지할 마땅한 친구도 없는 내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갈 곳은 없고 배는 고프고, 그러고 있자니 일단 배라도 채우고 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 들어가 오뎅을 집어 들었습니다. 터진 입술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는데,(웃음) 오백원짜리 오뎅이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사실 길거리에 서서 쩝쩝거리며 먹는 사람들을 보면 손가락질 했었는데……, 아! 이래서들 먹는 거구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막 세 개째 꼬치를 집어드는데 낯익은 노래가 들려왔어요, 포장마차 앞에 있는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어요, 렛잇비였는데, 너무 유명해서 촌스럽게까지 느껴졌던 그 노래가 전혀 다르게 들리는 거예요, 길거리 오뎅과 렛잇비, 저한테는 그냥 그저그런 뻔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거든요……, 뭐 암튼, 오뎅을 질겅거리며 노래를 들었어요. 렛잇비가 그대로 두라는 뜻이라면서요? 어렸을 때는 왜 그대로 두라는 건지 이해를 못했었는데, 그 순간에 아!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그래서 그길로 곧장 중고 악기상으로 달려가 이놈을 장만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거라곤 이 녀석과 단돈 삼천원이 전부입니다. 기타와 삼천원이라 뭔가 고독하기도 하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20년 만에 만들 노래의 제목.“기타와 삼천 원” 하하하,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이런 완벽한 제목을 만들어 내다니, 제목부터 뭔가 확 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명일: 뭐라고요?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세요. 신흥: 기타와 삼천원 명일: 설마……. 신내, 신흥 쪽을 바라보다 ‘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려 뛰쳐나간다. 신흥: (신내가 나간 방향에 대고) 놀라시긴……, 노래가 완성되면 여러분은 지금보다 열배는 더 놀라실 겁니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사이) 흥신소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 때문에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이사를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거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흥: 일단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노래로 시작할 겁니다. 장소는 뭐, 찾아봐야죠, 설마 서울 하늘아래 제가 노래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가숩니다. 불행한 샐러리맨이 아니라 어릴적 꿈을 이룬 멋진 사람이 된 거죠. 하하하. 자! 그럼 저를 기다리는 무대를 찾으러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흥, 큰 소리로 웃으며 퇴장, 명일 쪽지와 주소들을 확인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두정 휠체어를 타고 등장. 두정: (놀람을 감추며) 웬일이냐? 명일: 여기가 16-28번지 맞죠? 두정: 용케도 올 생각을 했구나. 명일: (떨리는 목소리로) 연수네 집 맞죠? 두정: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건 왜 물어. 명일: 저는 연수 남자친구 명일이라고 합니다. 두정: 팀을 맡게 됐다고, 축하한다. 명일: 힘드시겠지만 저도 어렵게 마음먹고 온 것이니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두정: 너하고 할 얘기 없으니까 그만 가봐. 명일: 그 심정 이해합니다. 하지만……. 두정: 사실대로 말하지, 네 얼굴 두번 다시 안 봤으면 좋겠다. 명일: 잘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 찾아뵙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두정: 꼴 좋다고 웃고 싶겠지, 웃고 싶으면 웃어. 명일: 연수……, 연수 살아있죠? 네? 두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명일: 사실대로 얘기해 주십시오. 사고 이후에도 매일같이 연수에게 메일을 보냈었는데 며칠전 그 메일이 모두 수신 확인이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 하실 때 도망치듯 떠났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수가 살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두정: 상상력이 풍부하구먼.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워, 보시다시피 난 글러먹었어. 명일: 그렇다면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연수 찾는 걸 포기하지 못합니다. 두정: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그래 그런 말을 했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상황 탓, 환경 탓 하는 게 아니야,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더 이상 널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조심해서 가라.(나가려 한다.) 명일: 거짓말……, 거짓말이죠? 그럴 리 없어, 저를 포기하게 하려고 하는 얘기죠? 그렇죠? 두정: (멈춰서서 혼잣말로) 고결한 자만이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다·……, 고결한 자라…….(쓴웃음) 에베레스트.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나간다.) 명일: (절망적으로) 잘 알겠습니다, 폐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나가려다 멈춰서서) 연수야……, 너 정말 없는 거야? 명일이 나가자마자, 박수 소리와 함께 현란한 조명이 무대를 훑는다. 무대 중앙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선글라스를 쓴 신흥이 기타를 들고 마이크 앞에 서 있다. 신흥: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에 들려드릴 곡은 지금의 저를 있게한 바로 그 노래입니다.20년 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수의 꿈을 가득 품고 며칠 밤을 새우며 코피를 쏟아가면서 만든 노래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좋은 노래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는 얘기가 있죠, 그게 바로 이 곡을 두고 한 얘기란 걸 요즘 들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럼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빌어먹을 인생.” 신흥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단조롭고 유치한 느낌의 멜로디. 신흥: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뭔지 몰라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각각의 빛을 받으며 세 사람 나타난다. 약통을 들고 있는 명일, 휠체어 위의 두정, 경기 중에 쓰러져 있는 신내. 신흥: 그것이 뭔지 몰라도 신내: 이건 아니야, 명일, 두정: 이건 아니야 신흥: 목적도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의지와 상관없이 순위가 매겨지고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모두: 이건 아니야. 간주. 두정 굳은 표정으로 한곳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다. 명일: 전부 제 착각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혹시나 하고 비밀번호를 쳤는데 열렸대요, 계정을 없앤다고 그러더군요, 그렇다고 앞으로는 메일 보내지 말라고……, 근데 비밀번호가 뭐였는지 아세요? ‘엠, 와이, 유, 엔, 지, 아이, 엘’이었대요. 명일, 제 이름이었어요.(허탈하게 웃는다.) 연수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약병을 바라본다.) 신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어떡하지, 일어날 수가 없어, 오빠, 엄마, 아빠, 코치님……. 일어나 달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모두들 저만 바라보고 있겠죠, 고개를 들 수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신흥: 이른 아침, 아니 그건 해도 안 뜬 새벽이야. 흔들어 깨우며 하시는 말씀, 얼른 일어나, 얼른 일어나. 늦은 밤에, 아니 그건 달도 지는 새벽이야 지친 나에게 하시는 말씀, 공부 하다 자, 공부 하다 자,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제발. 잠도 못 자가며 난 무얼 하는 걸까. 누구의 인생인데, 내 삶의 주인은 대체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간주. 명일 결심한 듯 약을 꺼내 털어 넣는다. 신내는 여전히 그대로 엎드린 채다. 등이 들썩거린다. 두정, 휠체어에 브레이크를 걸고 수건을 감은 숟가락을 꺼내 입에 문다. 명일 쓰러진다. 두정, 있는 힘껏 일어나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온힘을 다해 일어나려 한다. 신흥: 귓가에 맴도는 어머니 말씀.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인생이란 다 그런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일어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신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어나려고 애쓰는 두정 신흥: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명일 갑자기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명일: 아 배야! 눈물을 흘리며 일어난 신내, 이를 앙다물고 슬로로 뛰기 시작한다, 두정 간신히 몸을 지탱해 휠체어에 오른다. 신흥을 제외한 나머지 빛이 사라진다. 신흥: 인생이란 그런 거야 이유는 없어, 모두들 다 그렇게 살아 일어나, 일어나.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가 빌어먹을! 일어나, 어서 일어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기쁨에 차 인사를 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는다.) 여, 여보……. 무대 밝아진다. 신흥 머뭇거리는 사이 신내 천천히 등장한다. 신내: 오빠 신흥: 여, 여보 신내: 어쩐 일이세요? 신흥: 당신이 어떻게 여길……. 신내: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할말 있었는데. 신흥: 그러니까……, 그게 신내: 아무 말 마세요, 부탁이에요, 제가 얘기할 테니 듣기만 하세요. 신흥: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신내: 사실 저 오빠 좋아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아니에요. 신흥: 그게 무슨 소리야? 신내: 말 그대로예요, 이젠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신흥: 여보, 그러지 마,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죽일 놈이야. 신내: 고마워요, 진작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저 꼴찌해서 이런 거 아니에요. 정말 오빠에 대한 마음이 식어 버려서 그런 거예요. 신흥: 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죽는다는 소리는 말아줘, 부탁이야. 신내: 그러지 마세요, 오빠답지 않아요. 신흥: 난 이미 끝난 놈이지만, 당신하고 우리 창신이 수진이는 아니잖아. 남편,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잖아, 여보, 그러니까 그런 소리 두번 다시 하지마. 신내: 괜찮아요? (사이) 저요? 보세요 전 아무렇지 않아요. 신흥: 많이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 신내: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신흥: 이혼하면 놈들도 더는 못 괴롭힐 거야, 자리잡히는 대로 연락할게,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생활비랑 애들 교육비는 최대한 노력해 볼게. 어떻게든 아빠 노릇은 하도록 할게. 미안해 여보. 신내: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오빠도 조심해서 가세요. 안녕……, 안녕.(자리를 옮긴다.) 신흥: 놈들이 위치추적을 해서 전화기 못쓰니까, 내가 연락할게. 신내: 오빠도 제가 좋대요, 우습죠? 기껏 마음 정리했는데 고백을 받다니……, 조금만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사이) 저 끝까지 달렸어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목소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 이후엔 아무 생각도 안나요, 어떻게 결승점을 통과 했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 왔는지……. 정신이 들고 보니까 제 방에 덩그러니 앉아 초콜릿을 잔뜩 쌓아놓고 먹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고, 입 주변은 초콜릿이 번져서 피에로처럼 되어 있더라고요, 순간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깔깔대고 웃어버렸어요,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있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서 레이스를 마쳐!” 눈을 감고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 봤어요, 자세히 들어 보니까 제 목소리더라고요,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 보면 처음엔 자기 목소린 줄 모르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한 거였어요, 조금 익숙해지니까 알겠더라고요, 제 목소리인지. 신흥: 그랬어? 그거 다행이네. 알았어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사이) 내 걱정은 하지마, 당신하고 애들이 힘들지 나야 뭐……. 그만 가봐, 수일내로 전화할게, 조심해서 들어가고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든다.) 여보! (사이) 아, 아니야.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사이. 혼잣말로) 잘 살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평소에 안해 버릇해서 힘드네. 신내: 근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는 이미 끝나버렸는데, 레이스를 마치라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하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흥: 자! 이젠 나의 무대를 찾아가 볼까,(기타에게) 가자 로시난테, 갈 길이 멀다. 서두르지 않으면 날이 저문다고.(나간다.) 신내: 800미터 경기는 트랙을 2바퀴 도는 거예요, 작전도 중요하긴 하지만 페이스 조절과 순간의 판단력이 그 어떤 종목보다 중요해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려도 안 되고 페이스 조절한다고 천천히 출발해도 안 되죠, 작전대로 달리다가도 상황에 따라 작전을 포기하고 감으로 스퍼트하는 경우도 많고요. 생각해 봤어요, 나는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달려온 것보다 달려야 할 트랙이 더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알람이네요. 저 이제 그만 가봐야 해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나간다.) 텅 빈 무대. 멀리서 전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로 들려온다. 소리는 멈추지 않고 무대를 가로지른 후 점점 멀어져 간다. 두정 훈련복 차림으로 빈 휠체어를 끌고 등장한다. 휠체어를 세우고 한두 걸음 떨어져 선다. 두정: (휠체어에 대고) 너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위로해 주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다. 잔인하게 들려도 할 수 없어. 다 네 잘못이야, 한 번 더 점검했어야지, 한 번 더 살폈어야지. 그 정신 상태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면 너 때문에 동료들 모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 너 이렇게 된 거,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목숨과 다리를 바꿨다고 생각해, 어찌 보면 이렇게 된 거 너한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인생 선배로서 하는 얘기니까 귀담아 듣는 게 좋아, 휠체어 생활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괜히 재활한다고 힘 낭비하지 말고 그 다리에 적응하는 편이 나을 거다. 나같이 바른 말을 하는 선배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이제 가봐야겠다, 돌아가서 합숙 준비를 해야 하거든, 들어가서 한 숨 자는 게 어때? (휠체어를 밀고 나간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두정이 나간 반대편에서 피골이 상접한 명일이 다리 힘이 풀린 채로 등장 명일: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정말 특이한 약이야. 고통스럽냐고 물었을 때 왜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이해가 돼.(힘없는 웃음) 왜 죽으려고 했는지, 죽기로 결심한 내가 원망스러워지다니……, 아픈 배를 감싸고 변기 위에 앉아 있자니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그러다 알게 됐어요, 연수를 잃었을 때보다 변기 위에서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웃음이 나왔어요, 눈물은 줄줄 흐르고 웃음은 멈추지 않고, 아래도 멈추지 않고 (힘없는 웃음) 제가 연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배가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아픈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요?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 명일: 저 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까요? (고개를 숙인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오는 신흥, 신내, 휠체어 탄 두정. 각자 자리를 잡고 선다. 네 사람: 요 며칠 정말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버려져, 혼자 어딘가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나한테 달려든 것 같은 느낌,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죠. 두정, 신흥: 왜 하필 나야? 명일, 신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네 사람: 속으로 원망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 봤습니다. 근데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연한 얘기죠, 고민하고 소리 질러서 일이 해결 된다면 이 세상에 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신흥: (큰 목소리로) 가수가 되기로요! 두정, 명일: (바로 이어) 받아들이기로요 신내: (이어서) 다시 달리기로요. 네 사람: 많이 겁나고 솔직히 자신 없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어나야죠, 신흥: (노래한다) 일어나, 일어나, 어서 일어나 네 사람: 변하는 건 하나 없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두정: 저, 결국 에베레스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휠체어를 뒤로 돌리자 자동차 번호판 모양의 판에 ‘에베레스트’라고 쓰여 있다.) 썰렁했나요? 지하철이 들어온다고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지하철이 다가오는 소리, 멈추는 소리, 문 여는 소리. 모두 한발씩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따사로운 봄볕, 아련한 음악. 그리고……. 명일, 고개를 숙인 채 힘없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신내, 힘찬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간다. 두정,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디론가 간다. 신흥, 기타를 정성껏 보듬으며 어디론가 간다, 다시 명일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신흥, 신내, 두정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네 사람. 모두들 잠시 망설이다. 각자 어딘가를 향해 이야기한다. 네 사람: (동시에) 저기……. 암전. 어둠 속에서 신흥의 목소리 신흥: (목소리) 드디어 완성했습니다.‘빌어먹을 인생’을 이을 평생의 역작.‘기타와 삼천원’ 조명을 받으며 멋지게 등장한 신흥. 노래한다. 신흥: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가수를 꿈꾸는 소년이 살았다네 매일 밤 꿈속에서 노래하던 소년은 매일이 너무나 행복했다네 그러나 어느 샌가 소년은 노래하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 가수를 꿈꿨던 남자가 살고 있다네 꿈을 잊은 채로 살아가던 남자는 하루가 너무나 힘들었다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노래하던 꿈을 떠올렸다네 그렇게,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갔다네 아, 가진 건 사랑스런 기타와 단 돈 삼천 원뿐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네, 아, 가진 걸 모두 잃어 남은 것 하나 없어 불행하지만 나에겐 기타와 삼천원 있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세상에 내 것이 하나 없어도, 노래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네,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기타와 삼천원 있어 너무 행복하다네. 너무 행복하다네. 박수 소리에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던 신흥, 키스를 날리며 퇴장한다. 무대 한쪽에서 연수, 차분한 걸음으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태령, 꽃다발을 들고 환한 얼굴로 등장, 어디론가 걸어간다. 약장수, 전화기를 들고 등장, 상대가 받지 않는지 계속 버튼을 눌러대다가 퇴장한다. 다시 연수가 등장했다 사라진다. 다음엔 약장수, 태령, 차례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인식하지 못한 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느새, 각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세사람. 연수: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약장수: 종로 5가입니다. 태령: 어찌 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연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약장수: 주로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고객이죠. 혹시 필요하신가요? 태령: 네, 그녀를 사랑했거든요. 연수: 사랑했어요, 그래서 많이 미안했고요, 혼자 남겨두고 떠나서 약장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태령: 그녀는 떠났지만 전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연수: 이제 떠날 거예요, 명일씨를 놓아주려고요, 마음속에서 서서히 사라질 거예요. 약장수: 그 약을 먹게 되면 죽을 각오로 살게 되죠, 태령: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열심히 달리는 신내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하고요 연수: 뒤에서 지켜본다는 거 그리 쉽지 많은 않더라고요,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약장수: 그것이 문제죠, 부작용이 너무 심해요, 설사가 장난 아니거든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하하하. 세 사람 모두 정지. 두정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다. 무대 중앙에 휠체어를 놓고 나간다. 휠체어 홀로 빛을 받는다. 휠체어: 전 에베레스틉니다. 제 주인님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전 어디를 가나 주인님과 함께 하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요.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인님이 제게 이름을 붙여주고 난 뒤로 가끔이긴 하지만 웃는 모습을 보이시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제 이름이 좋습니다. 지하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휠체어: 지하철이 왔네요, 못다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죠, 저는 지금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거든요. 경쾌한 음악과 함께 암전. ■ 등장인물 명일(25세, 대학생) 신내(18세, 고등학생, 육상부) 두정(32세, 산악인) 신흥(38세, 샐러리맨)
  • [서울신문 신춘문예-소설당선작] 그들만의 식탁/황시운

    뼛조각을 쥔 남자의 손가락에 양념이 엉겨 붙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댔다. 엄마는 간혹, 맨밥만 끼적이고 있는 내 쪽으로 슬며시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밀어주었다. 그러나 꼬리찜의 기름이 둥둥 뜬 나박김치, 허연 밥풀이 앉은 겉절이, 되는 대로 헤쳐 놓은 나물들까지, 어느 것 하나 남자의 흔적이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된장찌개로 수저를 가져가려다 또다시 멈칫했다. 밥풀이 잔뜩 묻은 남자의 숟가락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찌개냄비를 휘젓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남자의 수저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 시선을 의식한 엄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양 볼이 메어져라 우겨 넣은 음식들을 우물대다 말고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의 수저를 흘끔댔다. 남자도 쥐고 있던 자신의 수저를 내려다봤다. 수저엔 여전히 밥풀과 음식의 양념들이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커다란 식탁 앞에 둘러앉은 우리 세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남자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러나 남자는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엄마 역시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찌개를 떠먹었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맞은편의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기엔 우리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커다란 식탁의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와 엄마의 얼굴이 차츰 흐릿해졌다. 나는 잠시 멀거니 찌개 위에 뜬 기름기를 바라보았다. 찜 그릇이 다 비워지자 남자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남자의 시선은 엄마가 덜어놓은 내 접시 위 꼬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속이 울렁댔다. 나는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왜, 좀 더 먹지 않고…….” “그러지 그러냐. 이거, 오늘 고기가 유난히 단데 말이다.” 엄마의 걱정에 남자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이미 내 접시 위의 꼬리를 덥석 집어 들고 있었다. “전 다 먹었어요. 마음 쓰지 말고 더 드세요.” 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엄마를 향해 짐짓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집안 가득 밴 음식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뼈에 붙은 고깃점을 다 훑은 남자가 크게 트림을 하며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는 급히 남자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그러나 남자는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손가락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닦는 대신 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과 목덜미를 훔쳐냈다. 남자는 엄마의 네 번째 남자였고 내게는 세 번째 저기요였다. 엄마의 남자들에게 나는 단 한번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게 아버지는 엄마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흰 피부의 키가 큰 남자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흰 피부와 큰 키를 가진 엄마의 다른 남자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호칭을 생략하려 애썼지만 부득이한 경우 나는 늘 그들을 저기요, 라고 불렀다. 저기요, 식사하시래요. 저기요, 전화 받으세요. 저기요……. 코끝을 쏘는 고추냉이의 냄새와 생선 비린내를 감지하는 순간, 경화제를 섞은 실리콘을 휘젓던 팔에서 힘이 쑥 빠지고 말았다. 독한 경화제 냄새 속에서도 용케 부품들의 생생한 냄새를 찾아내고야 마는 유난스러운 후각에 진저리가 쳐졌다. 모두들 퇴근하고 난 토요일 밤, 휑한 제작실의 공기가 후각을 한층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충분히 저은 실리콘을 골판지 틀 안에 천천히 붓자 후각을 자극하던 부품들의 냄새도 실리콘 반죽 속에 갇혀 버렸다. 드라이어의 온도를 최대한 낮춰 틀 위에 가져다 댔다. 원칙적으로 실리콘 틀은 자연건조시켜야 하지만 납품기일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제작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지금쯤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는 아내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별스러운 걸 기대했던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대수로울 것 없는 잡담이나 나누며 함께 밥 먹는 일상을 원했던 것뿐이라고.” 오 년여의 시간을 정리하던 날 그가 말했다. 시종일관 차분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던 나와 달리, 그날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놓았다. 도저히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할 땐 눈물이 그렁하게 맺히기도 했다. 그 뒤로도 서너 번쯤 더 그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막막한 심정으로 마주 앉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 헤어졌다. 나는 누군가와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잡담이나 늘어놓으며 보내게 될 일상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얼마 후, 그는 결혼을 했다. 드라이어를 내려놓은 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러나 곧 담배를 담뱃갑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제작실 문에 걸린 금연 푯말을 일별한 후 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를 서성이다 빈 사무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과식 소화불량에 파라나 정―변비 식욕부진에 카이셀 과립’. 맞은편 건물 위에 세워진 전광판의 글자들이 색깔을 달리하며 우르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자신들 사이에 괴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좁은 사무실은 전광판이 뿜어내는 빛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다. 볕에 널어뒀던 북어껍질을 거둬들이는 엄마의 손이 붉게 빛났다. 노을은 엄마의 손뿐만 아니라 부엌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엄마는 나무 도마 위에 북어껍질을 뒤집어 올려놓고 절굿공이로 타닥타닥 두드렸다. 좁고 동그란 엄마의 어깨가 유연하게 들썩였다. 엄마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북어껍질을 물에 담가둔 뒤 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살짝 데친 숙주를 잘게 썰고 으깬 두부를 면포에 싸 꼭 짜냈다. 핏물을 뺀 소고기까지 다져낸 엄마는 준비해둔 재료들을 한데 그러모아 양념하고 치대기 시작했다. 얇은 면 티셔츠가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엄마의 뒷모습엔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음식을 만드는 순간의 엄마는 다른 어떤 때보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뒷모습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언제나 그늘져 있었고, 그늘 속의 엄마는 날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엄마는 물에 불린 북어껍질을 건져 비늘을 긁어냈다. 물에 분 북어껍질은 탱탱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그러고는 반듯하게 잘라낸 북어껍질에 소를 넣어 아물린 뒤 계란 옷을 입혀 지져냈다. “너무 기름지면 개운한 맛이 덜하니까 주의해야 해. 소고기 대신 북어대가리로 육수를 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지.” 지져낸 전은 한 김이 빠지자마자 냉동실에 넣어 식혔다. 잠시 뒤 엄마는 북어대가리와 무, 그리고 파만으로 우려낸 육수에 나박나박 썬 호박과 함께 식혀뒀던 전을 넣었다. 엄마는 국물이 한소끔 끓자 된장을 풀면서 다시 말했다. “된장은 마지막에 풀어라. 처음부터 장을 풀고 끓이면 떫은맛이 나기 십상이거든. 맑게 끓이려면 국간장으로 간을 해도 괜찮고.” 엄마는 썰어놓은 파와 미나리를 끓고 있는 탕 속에 집어넣으며 처음으로 내 쪽을 돌아봤다. “지금이야 쓸데없는 소리 같겠지만 들어둬라. 들어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있겠지.” 신문을 뒤적이던 저기요가 엄마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식구가 쓰기엔 너무 큰 식탁은 곧 엄마의 음식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저기요는 벌써부터 커다란 식탁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뒀지만 어글탕의 비릿한 냄새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또다시 위가 저릿대기 시작했다. 엄마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엄마보다는 엄마가 만든 음식에 홀려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제나 엄마가 야물게 차려내는 음식에만 열중할 뿐, 엄마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엄마의 남자들이었지만 솜씨 좋은 요리사를 찾는 단골손님들 같기도 했다. 엄마 역시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 틈에서 나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차려내는 요리사의 딸로서 그들 모두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엄마의 남자들과 엄마 사이에 음식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따위도 문제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마치 잘 차려진 음식상에 어울리지 않게 놓인 이 빠진 종지 같았다. 나는 날마다 타들어 갔다. 엄마가 만들어내는 온갖 맛깔스러운 음식들도 나를 살찌우진 못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가 이렇게 대단하신데 어떻게 넌 그렇게 비쩍 마를 수가 있었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어머니, 한영이 얘, 다이어트 한답시고 걸핏하면 굶고 그러죠?” 처음 인사를 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날 그가 말했다. 엄마는 말없이 엷게 웃어 보였고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서글서글한 성품의 그는 식사를 하는 내내 감탄 어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엄마와 나의 세 번째 저기요는 흐뭇한 얼굴로 그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음식 타박 없이 무엇이든 잘 먹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날, 두 남자가 게걸스레 먹어댄 음식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나는 저녁 내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야, 어머니 음식 솜씨 정말 대단하시더라. 나 완전히 횡재한 기분인 거 있지? 어머니 닮았으면 너도 보통 솜씨는 아닐 거야. 그렇지?” 그 뒤로도 그는 종종 벌쭉벌쭉 웃어가며 만족스러워하곤 했다. 자신의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실망하는 기색은커녕 넉살 좋게 객쩍은 농담을 던지며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딸은 엄마 닮는다는데, 그 피가 어디로 가겠냐? 안 해봐서 그렇지 너도 했다 하면 보나 마나 끝내줄 거라니까.” 그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의 말이 사실이면 어쩌나 싶어 한동안 몹시 불안했다. 엄마는 그 유난스러운 손맛 때문에 한순간도 자신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손가락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쭉 고르고 하얗던지, 처음 봤을 땐 꼭 멀미라도 치밀 것처럼 속이 다 울렁댔더랬지. 그렇게 훤칠한 양반이 매번 앉은 자리에서 해장국을 두 사발씩이나 뚝딱뚝딱 비워내는데,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던 건지 볼 때마다 속이 짠한 게….” 결국 나는 솜씨 좋은 해장국집 외동딸이 자신의 가슴을 짠하게 한 남자를 위해 뚝배기에 아낌없이 퍼 담아줬던 선지 덩어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었다. 한번도 묻지 않았고 엄마 역시 이후의 일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었지만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기가 치밀 만치 하얀 피부를 가졌던 그 훤칠한 양반은, 사실 선지 해장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혼기 놓친 해장국집 외동딸 따위가 눈에 찰 리 만무했을 것이다. 입에 맞는 해장국을 먹기 위해 일생을 걸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엄마의 첫 번째 남자이자 나의 아버지였던 양반은 머지않아 해장국보다 더 나은 먹거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끝. 통속적이지만 명쾌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가정식 백반으로 식당의 메뉴를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음식 장사에 매달렸다. 타고난 손맛 때문인지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볐고, 덕분에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리 생각해 보려 해도 엄마는 그때 음식 장사를 시작해선 안 되는 거였다. 선지 덩어리를 퍼 담아 주다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들쳐 업고 기껏 다시 시작한 일이란 게 음식 만드는 일이었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는 해도 엄마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무책임했다. 생의 대부분을 음식 냄새 속에 갇혀 지내는 동안, 엄마는 요리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점점 무관심해져 갔다. 엄마가 찾아낸 새로운 삶이었을 저기요들조차 모두 엄마의 백반 집과 갈비 집의 단골손님들이었다. 이를테면 엄마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온 셈이었다. 남자들과 살림을 합칠 때마다 엄마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행동했다. 간혹 내 의견을 물어오기도 했지만 내가 보이는 반응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물론, 단 한번도 엄마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돼먹지 못한 심술을 부려 엄마와 저기요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사실, 엄마의 방으로 옷가지 몇 벌을 옮겨왔을 뿐인 단골손님들에게 내가 불손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각자 어딘가 조금씩 불편하고 거북하긴 했지만 우리들의 동거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만만한 게 뭐라고, 아무튼 제작팀을 무슨 개똥대가리로 안다니까! 납품기한 하나 제대로 조절 못하는 즈이 놈들 책임은 간데 없고 허구헌날 나만 들볶으면 안 될 일이 된대? 에이, 썅!” 작업가운을 벗어 던진 제작팀장이 담배를 빼물었다. 그러고는 서너 번쯤 신경질적으로 빨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진 뒤 제작실을 나가버렸다. 부서져라 닫은 문에 걸린 금연푯말이 덜렁댔다. 팀장은 종종, 자신이 늘 하는 말처럼 제작팀을 개똥대가리 취급하는 이 개 콧구멍만 한 회사를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말 기세로 성깔을 부려대곤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지, 그는 덜렁대는 금연푯말이 채 멈추기도 전에 다시 제작실 문을 기세 좋게 열고 들어와 나머지 팀원들을 몰아치곤 했다. “다들 들었지? 개 썅! 드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어, 까라면 까는 수밖에. 자, 분발들 하자고!” 결국 그는 이 개 콧구멍만 한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퍽 유능한 관리자인 셈이었다. 예열 된 오븐 안에 모형들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타이머를 조절한 뒤 새로 작업할 음식의 부품들을 정리했다. 팀장은 조금 전 오더가 넘어온 열한 가지나 되는 스테이크의 메뉴와 자료들을 내게 넘기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까지는 완성해야 된다고 지레 숨넘어가는 소리를 해댔다. 물컹대는 스테이크의 표면을 마른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아낸 뒤 작업판 위에 접착했다. 골판지로 스테이크와 부품들의 주변을 두르고 파라핀으로 테두리를 마무리했다. 온갖 음식 부품들과 화공약품의 냄새가 뒤섞인 작업실은 마치 거대한 냄새창고 같았다.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환풍기 소음 때문에 골이 지끈거릴 지경이었지만 이 지독한 냄새를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스테이크의 틀을 완성한 뒤 성형이 끝난 초밥 부품들의 착색 작업을 시작했다. 날 생선을 주로 쓰는 일식은 무엇보다도 색감의 표현이 중요하다. 각각의 생선부품들에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하는 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한 스프레이 작업 후, 보다 세밀한 표현을 위해 붓을 들었을 때 작업대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의 램프가 깜빡였다. 발신번호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램프는 한참을 더 깜빡이다 꺼졌다. 칠 개월 만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망설임 없이 뛰어넘어도 괜찮을 만큼 달라진 상황들이 단순한 것도 아니었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졌다. 잠시 후, 다시 램프가 깜빡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붓을 쥔 채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붓에 묻은 물감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너 통에 붓을 헹군 뒤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 나야.”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좀 만났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전보단 확실히 낮아진 목소리도 조심성 없는 그의 성품을 감춰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달라진 상황들로 인해 망설이고 있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결국, 아직은 서로의 목소리를 잊어도 좋을 만큼 멀리 오진 못한 셈이었다. 모형음식이 필요한 이유와 그것의 가치는 일맥상통한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량생산으로 맞춘 듯이 찍어내는 싸구려 모형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모형음식의 예술적 승화 운운하며 걸핏하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해대는 제작팀장이나, 직원들 보너스조차 변변히 챙겨주지 못하면서 소규모 주문제작만을 고집하고 있는 회사의 오너조차도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모형음식은 신기한 볼거리도, 획기적인 전시 아이템도 아니라는 점이다. 가짜들에 대한 환상 따위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환상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모로 열악한 여건들을 감수하면서까지 뒤늦게 이 일을 시작한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모형음식은 음식을 포함한 모든 환상들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했다. 유일했고 완벽했다. 착색을 마친 모형에선 금방이라도 물기가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붓을 내려놓은 뒤에야 참았던 숨을 조심스레 몰아쉬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전화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언제고 그가 연락을 해오리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가 나를 떠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을 쏘이자 딱딱하던 생선 모형들이 노골노골해졌다. 고추냉이를 표현한 초밥 위에 접착제를 바른 뒤 부드러워진 생선을 얹었다. 손으로 초밥을 꼭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헛헛하던 속이 비로소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애초부터 나는 혀를 홀리는 음식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남자들과 살림을 합칠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과 헤어질 때 역시 나는 별다른 감응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헤어짐의 원인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저기요가 짐을 꾸리며 내뱉은 말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저놈의 자식이랑 같이 밥상머리에 앉아 있다 보면 내가 무슨 개, 돼지가 된 것 같단 말이야! 더러워, 아주 더러운 기분이야!” 그는 순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식당근처의 보험회사에서 근무하던 남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의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다. 엄마도 단 음식을 유난히 싫어하는 그를 위해 음식의 간을 따로 할 만큼 그에게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그는 또, 엄마와 살림을 합친 후부터는 나에게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나는 그가 엄마 모르게 쥐어줬던 약간의 용돈을 매번 무척 요긴하게 쓰곤 했다. 물론 그런 그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와 함께 한 밥상머리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을 만큼 별나게 굴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 살이었지만, 사춘기를 무기 삼아 공연한 심술을 부려댈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아저씨는 그저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야.” 엄마의 위로도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언제나 웃었다. 엄마에게도, 저기요에게도, 심지어 엄마의 음식들에게조차 나는 웃어 보였다. 엄마의 집으로 많지 않은 짐들을 옮겨오던 날, 세 번째 저기요는 말했다. “너랑 불편하게 지내게 될까봐 은근히 마음이 쓰였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보다.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 응?”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함께 산 지 오 년이 넘도록 그는 내가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종종 헛웃음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 하지만 그도 어쩌면, 그것이 헛웃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거라면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유가 뭐냐? 오 년씩이나 잘 만나던 사람이랑 느닷없이 헤어졌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냔 말이다. 집에 인사까지 시켜놓고 이제 와서 결혼 못하겠다고 나자빠진 이유가!” 뒤늦게 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다그쳤다. 하고 싶은 말도 해줄 말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엄마와 엄마의 남자들에게 담담했던 것처럼 엄마도 내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게 알고 싶은 거죠? 엄마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구요? 도무지 결혼이라는 게 현실 같지가 않아서 싫었어요. 당연한 일 아니에요?” 엄마의 삶을 비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엄마의 삶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비록 엄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내 지난 시간들이 상한 음식처럼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그늘 속에 방치되어 왔다 해도 말이다. 그때, 엄마의 선택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엄마 혼자만의 탓이 아니었다. 게다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가장 괴로웠을 사람은 누구보다 엄마 자신이었을 테니, 나까지 거들지 않는다 해도 엄마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몸의 문제였을 뿐이다. 엄마도 그걸 이해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초밥모형의 주문처는 확장이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회전초밥 집이다. 주문량은 회전용 접시 스물두 개 분량이다. 모리작업을 위해 색색의 접시들을 꺼내 깨끗이 닦았다. 회전초밥 샘플의 경우엔 특별한 데커레이션이 필요 없다. 자료사진과 비교해가며 각각의 접시 위에 초밥모형들을 접착했다. 그러나 업체 쪽에서 넘겨준 자료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초밥 집에서 판매되는 음식들은 모형에 훨씬 못 미칠 것이 뻔했다. 그런 지경으로 어떻게 가게를 확장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접착제 튜브를 내려놓고 뻣뻣해진 뒷덜미를 꾹꾹 주물렀다. 잠시 후 그를 만나면 함께 식사를 할 것인지 얼른 결정을 해야 했다. 그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는 일은 보나마나 고역일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음식을 먹든 안 먹든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코팅작업을 위해 클리어래커에 래커시너를 배합하고 있을 때 휴대폰의 램프가 깜빡였다. 작업실을 가득 메운 시너냄새를 뚫고, 이미 휘발되었던 그가 온전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순간, 약속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장소이기도 한 레스토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긴,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난 칠 개월은 그와 나, 우리 두 사람을 변하게 하기에만도 벅찰 만큼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다. 점심시간인데도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네가 만드는 음식모형쯤으로 생각하면 돼. 어차피 너에게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잖아?” 그는 빈정대고 있었다. 앞에 놓인 음식이 다 식어빠지도록 끼적대고만 있는 내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널 다시 만나고 싶어, 라고 말했다. 나는 칠 개월 만에 다시 연락을 해온 그가 조금쯤은 초췌해졌거나, 적어도 이전보다는 깊은 눈을 갖게 되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전보다 훨씬 부예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타이핀과 커프스버튼의 디자인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음 직한 동창생 아내의 흔적까지 덕지덕지 바르고 나타났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빈정거리고 있었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스테이크의 붉은 속살을 포크로 쿡쿡 찔러대고 있던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아직도 내게 기대하는 게 남았다는 뜻이야? 도대체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겠어.” 부지런히 음식을 씹고 있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양손에 쥔 채 말했다.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내. 차라리 쥐고 있는 포크로 내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버려. 제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사람 좀 질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넌 늘 그런 식이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이미 결정해 놓고도 망설이는 척……. 그런 식으로 너 자신을 방어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나본데, 웃기지 마. 넌 그냥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뿐이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딱딱한 음식모형을 만드는 여자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표정이 뭘지 항상 궁금했다. 회사를 나서기 전에 한 움큼이나 되는 약을 먹어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목구멍을 타고 신물이 역류했다.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주말에 전화해. 주중엔 당신뿐 아니라 누구와도 잘 수 없을 만큼 바빠. 그리고 다시 만날 땐, 제발 그 타이핀이랑 커프스버튼은 빼고 나타나 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이 흔들렸고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동시에 뺨이 얼얼해졌다. 아프긴 했지만 화가 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나이프의 날엔 스테이크소스가 지저분하게 엉긴 채 굳어 있었다. “진정해. 혹시 포크로 내 얼굴을 찌르고 싶더라도 참아 줘. 우린 칠 개월 만에 만났어. 그 사이 당신은 결혼을 했고, 당신 말대로 난 여전히 마주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소한 잡담이나 나눌 만큼 편한 상대가 못돼. 당신도 알잖아.”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연락을 해올 것이다. 그때 가서 그를 다시 만나건 만나지 않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일을 두고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봉합해두지 않았던 탓에 꾸덕꾸덕해진 클리어래커에 시너를 다시 배합해 접시 위에 가지런히 데커레이션 된 초밥의 코팅작업을 했다. 래커의 양을 조절해가며 최대한 얇고 고르게 펴 발랐다. 실제 음식이건 모형음식이건 간에 실없이 번쩍대는 음식이 입맛을 돋울 리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음식모형도 그렇고, 그와의 관계도 그렇고, 엄마나 저기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 자칫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그 모든 것들은 대책 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오후엔 사무실에 다녀온 제작팀장이 다시 한번 작업가운을 벗어 던지며 길길이 날뛰었고 망할 놈의 환풍기는 아예 규칙적인 박자까지 맞추며 덜덜 돌아갔다. 나는 완성된 초밥모형만을 간신히 넘긴 뒤 서둘러 퇴근했다. 한번 뒤집힌 속은 다시 약을 먹어도 쉬 가라앉지 않았다. 어둠에 잠겨 있는 방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주무시지 않고, 무슨 일이에요? 이 시간에…….” 묵직한 머리를 흔들어 남은 잠을 털어내며 물었다. “아저씨가 들어오지 않으셨다.” “겨우 그것 때문에 이 밤에 주무시지도 않고 그러고 계신 거예요? 곧 들어오시겠죠. 좀 늦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며칠 전부터 꽃게가 잡숫고 싶다고 하셔서 수산시장에 다녀왔다.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점심때가 다 돼서야 돌아왔지 뭐니. 돌아와선 또 한참이나 게를 손질하고 찜통에 쪄냈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들어오지 않으시는구나.” 그러고 보니 미처 맡지 못했던 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순간 비어 있던 위가 저릿해졌고 동시에 신물이 올라왔다. 처음엔 그저 감전된 것처럼 저릿하기만 하던 위의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버렸다. 허리를 구부린 채 통증을 참아내고 있는 나를 향해 엄마는 말했다. “어쩐지 영 안 들어오실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 하긴, 오 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 그동안 너나 그 양반이나, 참 용케도 견뎌내는구나 싶었다.” 웅크린 몸 구석구석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한동안 말없이 이불을 덮어쓴 내 몸을 토닥이던 엄마가 이불을 걷어내고 나를 바로 눕혔다. “약 어디 있니.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닌데, 어디 약이 있을 거 아니냐.” 엄마는 비칠비칠 일어나 약을 찾아 먹고 다시 누운 내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만 하면 됐지 않니. 그게 다 뒤숭숭한 에미 팔자 같이 겪어내느라 얻은 병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만, 너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그만 마음을 풀었으면 좋겠구나. 도대체 내가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네가 먹어줄는지……, 정말이지 모르겠다. 네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차진 속을 덥혀 줄 음식이야. 이런 약 따위로 나아질 일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니.” 엄마는 전에 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뒤틀리던 속도 차츰 가라앉았다. 배를 쓸어주던 엄마가 이불 속을 더듬어 내 손을 찾아 쥐었다. 목구멍이 따끔댔다. 딱히 뭐라 단정지을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식탁을 바꿔야 해요. 지금 건 너무 커……. 너무 커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엄마가 도무지 보이질 않아요. 그 커다란 식탁 앞에 앉아 있으면 온통 엄마의 음식들만 보여. 나뿐만이 아니라 거기선 누구도 엄말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엄마는 땀으로 끈적이는 내 얼굴을 한번 더 쓸어준 뒤 방을 나갔다. 나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위는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림자만 가득한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빛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람이 있는 곳에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만큼 완벽한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빛은 끊임없이 사물을 굴절시키고 왜곡한다. 속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굴절된 삶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피곤이 밀려왔다. 다시 잠들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몸으로 익힌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사소하기만 한 몸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그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낯설었다. 망설이듯 주춤대는 손길이나 어딘지 불편한 듯한 신음을 내뱉는 목소리까지. 하지만 어쩌면 그는 줄곧 같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손은 차가웠고 가슴을 그러쥔 아귀의 힘은 너무 강했다. 삽입 전의 행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태도는 지루했다. 서너 차례 타이밍을 놓치면서부터는 눈에 띄게 조급해하기까지 했다. 삽입 이후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치골이 부딪힐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유난히 건조하고 까슬까슬한 그의 피부가 불편했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연속되는 천장의 무늬와 삐걱대는 매트리스의 소음에 몰입했다. 마치 커다란 식탁 위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는 순식간에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마지막 타이밍만은 놓치지 않고 정확히 페니스를 빼낸 그는 내 아랫배 위에 사정했다. 끈적끈적한 정액을 뒤집어 쓴 아랫배가 환한 형광등 아래서 번들대고 있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앙다문 입술을 파고드는 그를 힘껏 밀쳐냈다. 쫓기듯 욕실로 들어간 그는 비누의 향이 너무 강하다며 한참동안 투덜댔고, 결국 비누를 사용하지 않은 채 샤워를 마쳤다. 어쩌면 그는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조금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함께 있는 내내 우리는 아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댔다. 지난 밤, 샤워를 마친 그는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셔츠에 물을 뿌리고 단정하게 걸어놓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천연덕스레 잠들어 있는 그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었다. 방을 나오기 전, 화장대 위에 놓인 타이핀과 커프스버튼을 가져다 변기 속에 빠뜨리고 물을 내렸다. 그의 동창생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단숨에 삼켜버린 변기는 크릉크릉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마도 그는 사라진 타이핀과 커프스버튼 때문에 한동안 몹시 곤란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을 것이다. 간혹 단순한 몸의 문제가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므로 어쩌면 나는 그런 그가 조금쯤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래 전의 내게 그러한 사실은 분명히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흉터로 남은 일은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다. 잊혀졌던 흉터를 확인하는 일이 괴롭긴 하겠지만 역시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엄마의 짐작대로 세 번째 저기요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네 번째 남자의 귀가를 포기한 엄마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갔다.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굳이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엄마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엄마는 더 이상 음식을 만들거나 권하지 않았다. 그것은 식당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과거와는 달리 최종적으로 음식의 간을 보는 일 외엔 주방 일에 일체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엄마가 네 번째 저기요를 찾는 일까지 그만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크 전문점에서 주문한 케이크 모형은 총 열세 가지이다. 생과일주스를 비롯한 음료까지 합하면 모두 스물다섯 가지나 된다. 나는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음료를 만들 젤라틴에 첨가할 색을 결정하기 위해 색상표를 들여다보고 있다. 테스트용 물감을 풀어 샘플을 여러 개 만들어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색을 찾아내지 못했다. 가스레인지 위에선 중탕한 젤라틴이 끓고 있었다. 감색 수채물감에 흰색을 약간 섞어 젤라틴과 혼합했다. 역시 너무 들떠 있었다. 견본의 색과 별 차이는 없어 보였지만 여름 음료의 색감이 힘없이 들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심해(深海)와도 같은 색을 만들고 싶다. 한여름, 뜨겁게 달궈졌던 머리꼭지까지 서늘해질 만큼 강한 색감이어야만 한다. 완성된 샘플들을 모두 버리고 또다시 불려둔 젤라틴을 중탕했다. 건조 테이블 위에선 케이크의 틀이 천천히 굳고 있었다. 엄마는 끝내 커다란 식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사 엄마가 다섯 번째 남자를 만나, 그를 다시 커다란 식탁 앞에 앉힌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끝내 엄마가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건 엄마 몫의 삶일 뿐이다. 누구나 그렇다.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은 단순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음은 한 곳을 향해 있게 마련이고 그걸 흔들어놓을 만한 몸의 문제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불필요한 갈등은 몸의 균형마저 깨뜨리고 말 뿐이다.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거른 탓인지 비어 있던 속이 다시 저릿해졌다. 또다시 한 움큼의 약을 삼키며 엄마의 말을 돌이켜봤다. 엄마는 내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차진 속을 데워줄 음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속을 데워 줄 수 있는 것은 혀를 홀리는 음식이 아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색감의 음료모형이다. 애초부터 나는 혀를 홀리고 배를 채워주는 음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몸의 문제에 지나지 않으므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밖의 것들은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진짜보다더진짜같아야한다진짜보다더진짜같아야한다진짜보다더…….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주문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저릿하던 속이 가라앉고 포근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1회전(3국)] 대악수 흑59,패착 등장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1회전(3국)] 대악수 흑59,패착 등장

    제4보(55∼78) 흑55로 공격해오자 백은 곧장 밭전자의 급소인 56의 곳을 찔러갔다. 사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흑도 나름대로 준비된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57에 이은 흑59가 대착각의 한수로 사실상 패착이다. 이 수는 (참고도1) 백의 빠짐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면 흑2부터 6까지 백 넉점을 잡는다. 백7의 젖힘이 아프지만 우변에서 이미 큰 이득을 봤으므로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실전은 백60,62로 뒀기 때문에 (참고도2) 흑1로 이어도 백2로 잇고 버틴다. 흑3,5로 뚫려도 백6,8로 우변 흑진을 초토화시키면서 살면 백의 대이득이다. 따라서 흑59로는 (참고도3) 흑1로 두는 것이 정수였다. 이때도 백은 2부터 6까지 받는 정도인데, 이후 15까지의 진행을 예상해 보면 우변에서 백은 어떤 수도 만들 수 없다. 즉 흑A 백B의 교환이 흑에게 대악수의 자충수였던 것이다. 실전은 백이 76으로 잇고 78로 젖히자 큰 수가 생겼다. 흑의 초비상시국이다. 유승엽 withbdk@naver.com
  • 바닥분수·타원형 교량 ‘눈에 띄네’

    바닥분수·타원형 교량 ‘눈에 띄네’

    경기도 분당 신시가지 한복판에 인공 숲을 조성해 만든 문화의 거리가 완공돼 일반에 공개됐다. 성남시는 분당구 서현동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부터 분당구청 앞 공터를 거쳐 수내역에 이르는 길이 2㎞의 보행자 전용도로를 최근 완공했다고 28일 밝혔다. 서현역과 수내역사 주변은 분당 신시가지에서 손꼽히는 거대 상권으로, 두 지역은 샛길로 이어졌다. 시는 3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 길을 넓히는 등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조성해 주변을 새롭게 단장했다. ‘분당 문화의 거리’로 이름 지어진 이 도로는 서현역과 수내역 근처에 각각 진입광장(2곳)을 만들고 주변에 문화광장과 중앙광장을 조성했다.4개의 광장은 만남과 산책, 거리공연, 체험장 등 4개의 테마로 꾸몄다. 시는 도로에 지저분한 상권이 형성되지 않도록 막을 방침이다. 문화의 거리 동쪽은 청소년과 젊은 층이 몰리는 서현역 삼성플라자 광장에서 시작된다. 진입광장까지는 깨끗한 음식점과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200여m 길이의 진입광장은 입구 조형물을 시작으로 도로 양편에 테마공간과 쉼터, 암석원 등으로 꾸며졌다. 입구 조형물은 12지신상이 새겨진 경계석과 약속 장소를 알리는 상징물이다. 테마 공간에는 둥근 돌이 빼곡해 사진 찍기에 알맞다. 암석원은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문화의 거리 중심에 위치한 중앙광장은 바닥분수가 압권이다. 광장 양쪽 2곳에 마련된 ‘스크린 분수’로 꾸몄다. 광장의 상징조형물도 볼 만하다. 조형물은 7가지인데, 어른 신발에 발을 넣을 수 있는 화강석 조형물(장난꾸러기), 활짝 핀 해바라기 꽃 모양의 돌 조형물(해바라기), 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황소와 쥐를 익살스럽게 한 브론즈 조형물(친구), 말뚝박기 놀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리석 조형물(말뚝박기) 등이 눈길을 끈다. 중앙광장 바닥에는 광섬유를 이용, 전갈과 처녀자리 등 12개 별자리를 만들어 밤이면 마치 우주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문화광장에는 깜짝공연을 펼칠 수 있는 소형 야외무대가 마련됐다. 그 남쪽에는 야생화와 허브 가든이 조성돼 주민들의 휴식처로 제공된다. 서쪽 진입광장에는 밑으로 분당천이 흐르는 교량이 있다. 터널을 연상시키는 타원형 교량이고 각종 조명시설이 설치된 명물이다. 시는 앞으로 이 거리에서 소공연과 전시회, 패션쇼, 풍물놀이, 비보이 공연, 마임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열어 수도권 남부의 관광명소로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글 사진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바닥분수·타원형 교량 ‘눈에 띄네’

    바닥분수·타원형 교량 ‘눈에 띄네’

    경기도 분당 신시가지 한복판에 인공 숲을 조성해 만든 문화의 거리가 완공돼 일반에 공개됐다. 성남시는 분당구 서현동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부터 분당구청 앞 공터를 거쳐 수내역에 이르는 길이 2㎞의 보행자 전용도로를 최근 완공했다고 28일 밝혔다. 서현역과 수내역사 주변은 분당 신시가지에서 손꼽히는 거대 상권으로, 두 지역은 샛길로 이어졌다. 시는 30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 길을 넓히는 등 정비하고 편의시설을 조성해 주변을 새롭게 단장했다. ‘분당 문화의 거리’로 이름 지어진 이 도로는 서현역과 수내역 근처에 각각 진입광장(2곳)을 만들고 주변에 문화광장과 중앙광장을 조성했다.4개의 광장은 만남과 산책, 거리공연, 체험장 등 4개의 테마로 꾸몄다. 시는 도로에 지저분한 상권이 형성되지 않도록 막을 방침이다. 문화의 거리 동쪽은 청소년과 젊은층이 몰리는 서현역 삼성플라자 광장에서 시작된다. 진입광장까지는 깨끗한 음식점과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200여m 길이의 진입광장은 입구 조형물을 시작으로 도로 양편에 테마공간과 쉼터, 암석원 등으로 꾸며졌다. 입구 조형물은 12지신상이 새겨진 경계석과 약속 장소를 알리는 상징물이다. 테마 공간에는 둥근 돌이 빼곡해 사진 찍기에 알맞다. 암석원은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문화의 거리 중심에 위치한 중앙광장은 바닥분수가 압권이다. 광장 양쪽 2곳에 마련된 ‘스크린 분수’로 꾸몄다. 광장의 상징조형물도 볼 만하다. 조형물은 7가지인데, 어른 신발에 발을 넣을 수 있는 화강석 조형물(장난꾸러기), 활짝 핀 해바라기 꽃 모양의 돌 조형물(해바라기), 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황소와 쥐를 익살스럽게 한 브론즈 조형물(친구), 말뚝박기 놀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리석 조형물(말뚝박기) 등이 눈길을 끈다. 중앙광장 바닥에는 광섬유를 이용, 전갈과 처녀자리 등 12개 별자리를 만들어 밤이면 마치 우주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문화광장에는 깜짝공연을 펼칠 수 있는 소형 야외무대가 마련됐다. 그 남쪽에는 야생화와 허브 가든이 조성돼 주민들의 휴식처로 제공된다. 서쪽 진입광장에는 밑으로 분당천이 흐르는 교량이 있다. 터널을 연상시키는 타원형 교량이고 각종 조명시설이 설치된 명물이다. 시는 앞으로 이 거리에서 소공연과 전시회, 패션쇼, 풍물놀이, 비보이 공연, 마임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를 열어 수도권 남부의 관광명소로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글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TV유치원’ 뮤지컬 형식으로

    KBS2 TV의 어린이 프로 ‘TV유치원 하나둘셋’이 내년 1월2일부터 뮤지컬 형식으로 새롭게 단장한다. 1982년 9월20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25년 만이다. ‘신나게 놀아보자’라는 슬로건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이름은 ‘TV유치원 하나둘셋 파니파니’. 신나는 아이와 노는 아이, 즐거운 아이를 지향하는 국내 최초 뮤지컬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신나게 놀자는 컨셉트에 맞게 ‘쇼’적인 면이 강화돼 한편의 공연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의도에 걸맞게 트레이드 마크였던 하나언니의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세명의 진행자 ‘팜팜’ ‘샤랑’ ‘윙키’가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다.
  • [20&30] 아날로그 삶, 여유를 찾다

    쉽게 떨쳐내지 못했던 ‘악마의 유혹’을 극복했을 때는 그만큼 성취감도 큰 법이다. 유혹을 꿋꿋하게 이겨낸 2030들은 어떤 방법으로 승자의 기쁨을 누렸을까. 회사원 조유진(31·여)씨는 지난해 내내 한 인터넷 사이트 미니홈피 꾸미기에 미쳐 있었다. 매일 찍은 사진을 올리고 사이버머니로 아이템을 사모으며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쉬는 날에도 하루종일 집에서 컴퓨터와 씨름했고 잠이 모자라 회사 일에까지 지장이 생겼다. 결국 조씨는 올해 들어오면서 집에 있는 개인용 컴퓨터를 처분하는 극약처방을 내리고 대신 중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했다. “인터넷 검색은 회사 컴퓨터를 이용하면 되죠. 지금은 비디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등 아날로그적인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답니다.” 회사원 김모(28)씨는 올해를 시작하며 마음에 새긴 목표가 ‘사생활 되찾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거절을 못하고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라 주위에는 친구가 들끓었다.‘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 되다 보니 사생활은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김씨는 올초 휴대전화를 없애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처음엔 혼자 고립된 것 같았고 전화기가 없는데도 진동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에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등 심각한 금단 현상을 느꼈죠. 하지만 석달 정도 지나자 어느덧 익숙해졌고 이제는 내 생활은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됐답니다.” 회사원 이송이(25·여)씨는 지난해까지 열렬한 드라마 마니아였다. 좋아하는 드라마는 몇십부가 됐든 파일 공유사이트를 통해 컴퓨터에 몽땅 다운로드해 놓고 12시간 연속으로 스토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씨는 올초 회사에 취직하면서 드라마의 유혹을 떨쳐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이씨는 이를 위해 일부러 회사 일을 집으로 가져와 자신을 혹사시키고 여동생(23)과 함께 온갖 맛집을 다 찾아다니는 등의 방법으로 새로운 취미를 개발했다. 처음엔 금단현상까지 나타나던 드라마의 유혹은 결국 두달쯤 지나자 서서히 이씨의 몸에서 독성이 빠져나갔다. 보험회사원 고동기(28)씨는 계획적인 행동 실천으로 목표를 달성한 사례다. 고씨는 지난해 초 1년 동안 돈을 모아 2200만원짜리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살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한달 월급 가운데 꼬박 100만원을 떼어내 통장에 모았다. 평소 기분을 내면서 술값내기를 좋아하던 ‘지름신’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삭이고 주말에 약속도 줄이는 금욕생활을 실천했다. 결국 지난해 말 고씨는 할부금 1000만원을 보태 고성능 SUV를 장만할 수 있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상규(32)씨는 매년 다이어트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실패해 왔다. 집 근처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려고 자전거를 구입해 보기도 하고 등산을 해보기도 했지만 이씨는 ‘악마의 유혹’이 간단치 않았다. 이씨는 결국 올 초 6개월에 50만원이나 주는 회사 앞 피트니스센터 회원권을 구입했고 돈이 아까워 지금까지 꼬박 운동을 나가며 다이어트에 성공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열린세상] 중3 학생들의 선행학습 유감/강영혜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

    최근 몇주간 서울 대치동 주변에서 중3학생들과 학부모, 학원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사교육 실태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교육 문제를 연구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해결책도 없는 문제에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되물었다. 고교 구성원들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학교 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완화는 별개’라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잘 살 수 있는데 어떻게 과외를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대학 나오지 않아도 웬만큼 살 수 있다면 모두가 ‘공부 공부’하지는 않겠지요.”라는 어느 중학생의 대답은 사교육 시장이 날로 번창하는 배경을 보여준다. 필자의 기억에 고교 입학전 두달간은 참으로 여유로운 시간이었는데 요즘 중3학생들에게 이 시기는 선행학습으로 쉴 틈 없는 불안의 나날이었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어느 과학계열 특목고 합격생은, 다른 학생들이 고2 수준의 선행학습을 다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합격자 발표 직후부터 선행학습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남들은 다 아는 내용을 혼자만 몰라서 수업에 방해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그 학생을 절박하게 몰고 있었다. 외국어고에 합격한 한 학생은 중3 가을에 고1수준의 수학을 마쳤는데, 입학 후를 대비하여 고1 수학을 다시 배운다고 하였다. 이미 배웠던 걸 또 반복하니 좀 재미가 없겠다고 했더니 학생은 의외로,‘볼 때마다 새롭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고 하였다. 선행학습으로 바쁜 아이들을 만나면서 오래전 발달심리학 시간에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걸음마를 막 익힌 유아들을 상대로 한 그룹은 사다리 오르는 훈련을 열심히 시키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시키지 않았는데,6개월쯤 지나 아이들의 다리가 좀더 자라고 나니 두 집단 모두 쉽게 사다리를 오르더라는 것이다. 인간 발달이 학습과 자연적 성숙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상식은 인지적 측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때를 기다려 발달 수준에 맞는 내용을 가르치고, 배운 내용을 스스로 소화시킬 시간이 허락되어야 제대로 학습된다는 것은 교육학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중3학생들이 매달려 있는 선행학습의 실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행학습을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혹자는 다른 학생들의 선행학습을 의식하여 불안한 마음에서 동참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남보다 앞서 배우면 경쟁에 유리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 때문에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영재가 아니라면 선행학습은 득보다 실이 큰데, 특히 학생의 자기주도적 학습능력과 교과 흥미도 측면에서 기초 역량을 넘는 선행학습은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수업관찰을 해 보면 선행학습자가 많은 교실에서 수업 집중도가 낮고 수업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사교육이 학교 교육을 무력화하는 실례를 서울의 중상층 거주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신의 수준을 착각하는 학생들과,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웬만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여기는 교사들 사이에서 새롭고 진지한 학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럴 경우 학교교육만 믿고 선행학습을 받지 않거나 받을 수 없는 학생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무분별한 선행학습은 학교와 학생 모두를 망가뜨리게 된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고교 과정이 아니라, 중학교 과정 중에서 약한 부분의 복습이다. 이미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고 어려운 내용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도 덜하다. 그런 점에서 중3 겨울에는 차라리 기초가 약한 과목을 복습하면서 3년 후 진로를 위한 정보도 찾고 체험하는, 자유와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강영혜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
  • [문화마당] 안녕하세요!/임영균 중앙대 교수·사진작가

    2주전 중국 북경의 중앙민족대 미술관에서 전시회 오픈식을 하는데, 누가 뒤에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뒤를 돌아보니 한국유학생인 듯한 여학생 몇명이 서 있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중국 중앙민족대 미술과 학생들인데, 한국 TV드라마에서 한국말을 배웠다고 했다. 중국 북경 국제공항에는 영어를 제외한 유일한 외국어로 한국어가 공항안내문에 표기가 돼 있다. 여기가 한국의 공항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친근감이 들 때도 있다. 공항 검색대의 여직원들도 안녕하세요, 뒤로 돌아 서세요 등 능숙한 한국말을 사용해 귀를 의심할 정도다. 그만큼 중국의 젊은이들은 한국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북경의 명문대인 청화대의 미술학도들 중에는 대학원은 한국에서 꼭 다니고 싶다는 학생들이 많다. 지도교수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 중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데, 자기도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뒤 중국에서 교수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유학을 가기 위해 한국말을 공부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현재 본인이 재직하고 있는 중앙대학교에도 미국, 프랑스,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 16개국 100여명의 유학생들이 한국을 배우려고 와있다. 이 외국인 학생들은 교정에서 서로 만나면 으레 “안녕 하세요.”를 연발한다. 2년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한달 동안 기차로 횡단여행을 한 적이 있다. 지루한 장거리 기차여행을 할 때 가장 큰 기쁨은 간이역에서 사먹는 한국도시락 라면이었다. 우연히 한국 라면을 선전하는 광고를 TV에서 보았다. 필자는 한국 라면이 상류층이 먹는 고급기호식품으로 통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도착한 모스크바. 중심가 광고판에는 국산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모델이 프랑스 인상파 그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처럼 포즈를 잡고 있었다. 한국휴대전화는 명품 중에서도 가장 고가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울란우데의 민속촌 앞 식당에서는 소금에 저린 야채에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는 한국김치라고 선전하며 팔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영화제작자도 국산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왜 디자인 좋은 모토롤라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자 자기 집은 LA 산속에 있어 통화성능이 뛰어난 한국 휴대전화를 값이 비싼데도 불구하고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성능보다는 한국제품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 사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 왜 최근 유독 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훌륭한 한국산 공산품과 영화·드라마 등 문화콘텐츠들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말 미국은 서부를 정복하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놓으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얼지 않는 항구를 가졌다. 또 영국은 아프리카를 종단하면서 식민지를 만들었듯이, 이제 21세기의 한국은 전세계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의 무역진흥공사(코트라) 직원과 이름없는 수출전사들은, 세계 각지에서 한국제품을 수출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고 있다. 지난봄 미국 대선 주자들 가운데 한 명인 민주당 힐러리 상원의원은 뉴욕의 한국동포들을 상대로 한 정치모금 행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한국사람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민족은 흔치 않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왔다. 이제 2007년부터는 우리 모두가 서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를 잘못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 대신에 “안녕하세요.”라고 자랑스럽게 인사말을 건네도 괜찮을 듯하다. 임영균 중앙대 교수·사진작가
  • [이슬람 문명과 도시] (25)끝 아프리카 이슬람 전초기지 탄자니아 잔지바르

    [이슬람 문명과 도시] (25)끝 아프리카 이슬람 전초기지 탄자니아 잔지바르

    탄자니아 동쪽 섬 잔지바르는 동부 아프리카의 적도 끝 인도양에 진주처럼 떠 있다. 블랙 아프리카로는 드물게 주민의 95% 이상이 이슬람 신도다. 검은 얼굴에 하얀 이슬람 모자 코피야를 쓰고 원색 차도르를 걸친 그들은 아프리카 이슬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수도 이름은 다르 에 살람으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인도양이 시작된다. 인도에서 본다면 인도양의 끝이다. 열려 있는 바다를 통해 바깥의 문화와 기술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생각 이상의 높은 수준의 삶과 문화를 지니고 있다. 다르 에 살람에서는 최초의 인류가 탄생했다는 울두바이 계곡을 잠시 둘러보고, 서둘러 잔지바르행 배를 탔다. ‘하디무’라 불리는, 육지에서 건너온 이곳 원주민 반투족들이 이슬람을 접한 것은 9세기쯤. 계절풍 따라 교역하러 온 페르시아 상인들을 만나면서다. 키짐카지 모스크에 남은 1107년 비문에는 페르시아인 거주지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들은 ‘다우’라 불리는 범선을 타고 12월쯤 잔지바르에 왔다 6월쯤 역풍을 이용해 되돌아갔다. 그래서 지금도 잔지바르 사람들은 자신들을 ‘시라지’라 부른다. 페르시아만의 항구도시 시라즈 출신이란 뜻이다. 이 섬에 처음 도착한 페르시아인들은 백옥같이 하얀 백사장에 검은 흑인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잔지바르’(검은 해안)란 이름을 남겼다. # 잔지바르의 영혼이 숨쉬는 구시가, 스톤 타운 잔지바르 이슬람의 역사가 1000년이니 그 사연도 복잡하고 절절하다.1499년 바스코 다 가마의 발길이 닿은 뒤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향료·황금·노예를 노린 유럽상인들의 아프리카 전초기지가 됐다.‘아라비안 나이트’를 유럽에 소개한 리처드 버튼은 물론, 대탐험가 리빙스턴과 스탠리도 잔지바르를 거쳤다.1832년부터 150년동안은 아랍 해상왕국 오만의 술탄이 이 곳을 통치했다. 술탄의 궁정이었던 ‘경탄의 집’을 비롯, 이슬람 유적지는 대부분은 이 시대의 것이다. 잔지바르의 축소판인 16세기 스톤 타운의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노예와 술탄의 후예들이 공존하는 형제애의 공간이다. 끝없는 미로 골목에서 아랍의 정취가 강하게 묻어난다. 아치형 창틀의 발코니와 아라베스크 문양이 수놓인 카펫만 보면 중세 아랍마을을 보는 듯 착각이 인다. 골목을 메운 수천개의 작은 상점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낯익은 3개의 문화가 아름답게 만나고 있다. 니그로에 가까운 토착 흑인, 아랍인, 인도계 사람들의 문화이다. 잔지바르는 특히 세계 최대 클로브 산지이다.19세기초 경제작물로 시작한 클로브가 지금은 섬 전체를 뒤덮고 있다.‘향료의 섬’답게 수확이 끝난 겨울에도 클로브의 향기가 섬 전체에 깔려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낸 검은 무슬림들이 스와힐리 말로 인사를 건넨다. 낯설지 않은 발음과 단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몇 마디 아랍어쯤은 쉽게 알아들었다. 스와힐리어는 아랍어에다 아프리카의 토착언어를 결합시킨 동부 아프리카의 통용어다. 아프리카 이슬람은 스와힐리어를 바탕으로 해안선을 따라 빨리 퍼져갔다. 오늘날 아프리카에 이슬람이 뿌리를 내린 배경이다. 그들에게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은 참혹한 역사의 응어리를 너무도 깔끔하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잔지바르는 동부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거점이다. 잠비아·말라위 같은 내륙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동쪽 바다 끝 항구도시 바가모요로 끌려온다. 이 곳에서 바다를 건너 잔지바르로 실려간다.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영혼의 안식처인 셈. 바가모요는 ‘내 마음을 이 곳에 두고 간다.’는 뜻이다. # 100만의 노예가 유린당한 비극의 현장에서 잔지바르에는 노예무역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은 대성당이 들어선 곳은 노예를 거래하던 시장터였다. 산타 모니카 호스텔의 지하에는 노예를 가둬뒀던 쪽방이 보존돼 있다. 제 한 몸 일으키지도 못할 낮고 비좁은 방에서 2∼3일씩 굶으며 팔리기만 기다렸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자신의 운명과 가족과의 이별을 생각하면서 몸부림치던 그들의 절절함이 온 방안에 가득하다. 이렇게 팔려나간 노예만도 1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람에 의해 다른 사람의 삶과 영혼이 파괴된 그 현장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괜히 눈물이 고인다. 탐험가 리빙스턴의 호소로 노예시장이 폐쇄된 바로 그 해에 노예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대성당이 착공되었다 한다. 대성당 뒤뜰에는 당시의 쇠사슬을 이용해 노예무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잔지바르의 모습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기 위해 스톤 타운 성곽 안의 노천시장 주변을 천천히 거닐어 보았다. 중동의 시장과는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다. 건들건들한 듯한 그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리듬이고 율동이다.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탄자니아와 잔지바르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흘러나오는 노래는 ‘말라이카’(천사)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극을 현실적이고 감동적으로 묘사한 노래다. #“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내일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로 잔지바르 무슬림들은 싱거운 인도양 바닷물을 닮아서인지 한없이 친절하고 포근하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는다.“하라카 하라카 하이나 바라카.” “내일 할 수 있는 내일로 미루자.” 자신있는 사람들의 당당한 삶의 철학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창조자로 살아간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이다. 아프리카 이슬람의 전초기지로서 잔지바르는 뛰어난 해상세력인 아랍상인들을 불러들이면서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발돋움했다. 유럽이 암흑의 시대에 잠들고 있을 때, 잔지바르는 아프리카가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그들이 만난 이슬람은 근엄하고 율법적인 종교가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고 나와 남이 함께 하는 조화와 절충과 겸손이 종교였다. 녹색 치마에 빨간 차도르를 걸친 잔지바르 여인의 대담함과 색감이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 “편견없는 다문화시대 선도” 14억 인구,57개 이슬람 국가가 만들어 내는 이슬람 문화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서구가 만들어 놓은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슬람을 우리의 시각과 주관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넘어야 할 산이다. 우리와 다른 모습,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편견없이 사랑하며 끌어안는 자세야말로 다문화시대 최고의 경쟁력이 아닐까.1년간 언론사 최초로 심층적으로 살펴본 ‘이슬람 문명과 도시´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더욱 친숙한 이슬람이란 이웃과 친구를 만났으리라 확신한다. 서울신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이슬람문화硏 소장
  • “이회창은 원균에 가까워”

    정계복귀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한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당내 비판이 터져나와 파문이 일고 있다.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은 15일 의원총회에서 “이회창씨는 두 차례 대선에서 패배했다. 한번도 패한 적 없는 불패의 군대를 이끌고 그랬다.”면서 “이회창씨는 충무공이 아니라 원균에 가깝다. 역사를 보면 원균은 그나마 (이 전 총재보다) 나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최 의원은 또 “이회창씨는 1차 때는 아들 병역,2차 때는 아들·딸 빌라 문제 등 본인 과오로 패배를 초래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력이 강해 이길 수 있었으나 이회창씨의 착각과 오판이 (패배하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고 주장했다. 최 의원이 발언하는 동안 곳곳에서 고성이 터져나오는 등 의총장 분위기가 일순 험악해졌다. 원내 지도부가 그를 발언 도중에 연단에서 끌어내기도 했다.김형오 원내대표는 “말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미칠지 충분히 인지하는 의원이라고 생각해 말을 하도록 공개했는데 이럴 줄 몰랐다.”고 유감을 표했다. 최 의원은 의총 직후 기자들과 만나 “더이상 시간을 늦추지 말고 쐐기를 박겠다는 생각에 발언했다.”며 공개 비판의 이유를 설명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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