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역사’ 思惟를 따라 걸어본 적 있나요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다.“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걷기를 처음으로 신성한 이데올로기로 만든 루소에게 걷기는 곧 존재 방식이었다.홀로 산책하면서 그는 사유와 몽상에 잠긴 채 살아갈 수 있었고,자족적일 수 있었으며,자기를 배반한 것으로 여긴 세상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걷기와 사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또 한 명의 철학자는 쇠렌 키에르케고르다.“지금 거리 저 아래에서 풍각쟁이의 노랫소리가 들린다.멋지다.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라고 한 그는 일기에서 모든 작품을 걸으면서 구상한다고 고백했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이 쓴 ‘걷기의 역사’(김정아 옮김,민음사 펴냄)는 사유의 방편이자 영감의 원천인 걷기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인문교양서다.저자는 걷기와 생각하기,걷기와 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며 속도 위주의 현대인에게 걸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걷기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보다 오래됐다.하지만 걷기를 의도적인 문화적 행위로 본다면 그 역사는 불과 몇 세기 전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저자는 헤겔이 걸었다는 하이델베르크의 필로소펜베크,칸트가 매일 산책했던 쾨니히스베르크의 필로소펜담,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한 바 있는 코펜하겐의 ‘철학자의 길’ 등을 따라가며 걷기와 철학의 관계를 짚어나간다.
걷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산책이란 문화적 개념으로 발전했다.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걷기를 즐겼던 인물은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걷기는 그의 삶과 예술의 중심이었으며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자 시를 쓰는 방편이었다.그의 시는 대부분 길을 거닐며 친구나 스스로에게 큰 소리로 읊으면서 지은 것이란 얘기도 있다.워즈워스 이후 걷기는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규정하는 징표가 됐다.그러나 18세기까지만 해도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은 야만인이나 기인 취급을 받았다.
걷기는 종종 내면의 투쟁을 상징적 행동으로 옮기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소금을 만들어 영국의 세제법을 이겨낸 간디의 ‘소금행진’이나 ‘마틴 루터 킹 암살 30주년 추모행진’,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이끈 ‘네바다 사막체험’,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는 인디언 부족의 ‘영혼의 달리기 대회’,농민조직을 결성한 케사르 차베스의 탄생을 기린 ‘정의를 위한 행진’ 등에서 보듯 걷기는 다양한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20세기 초는 걷기 클럽의 황금기였다.미국의 ‘시에라 클럽’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국가정책에 저항했고,오스트리아의 ‘자연의 친구들’은 귀족의 공유지 독점에 반대했다.그리고 중세의 방랑학자와 음유시인을 모방한 독일의 ‘소년 방랑 철새회’는 권위주의에 저항했고 포크송을 부활시켰다.정치색에 상관없이 걷기를 즐겼던 이들은 세상을 담장 없는 정원으로 만들었다.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결속감을,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적 흐름에 저항력을,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 이념을 제공했다.이렇듯 자연에 대한 열정과 맞물린 걷기는 사회적 해방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이 책은 각 도시를대표하는 작가들의 삶을 보여준다.그리고 도시의 역사와 걷기의 역사를 나란히 펼친다.19세기 영국엔 무기력한 군중이 넘쳐났다.당시의 도시 보행 문제를 철저하게 파헤친 작가가 찰스 디킨슨이다.뉴욕을 남성적인 도시로 간주하는 저자는 휘트먼,긴즈버그,오하라,보즈나로빅츠 같은 게이 시인들이 뉴욕 거리를 찬양한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본다.센트럴 파크엔 배회하는 길이 있었다.이곳은 게이들의 배회 장소로 ‘결실의 들판’이란 별명이 붙었다.
파리는 위대한 보행자들의 도시다.파리를 ‘19세기의 수도’라고 부른 발터 벤야민은 ‘만보객(漫步客)’을 학문의 주제로 삼았다.‘파리를 거니는 예민하고 고독한 남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만보객의 특징은 여유.파리에선 거북을 데리고 산책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1920년대 말 파리에 정착한 벤야민은 자신이 좋아한 문학작품의 한 조연처럼 일생의 대부분을 떠돌며 살았다.위대한 도시의 방랑가였다.
여성의 걷기는 사회적으로 적잖은 제약을 받았다.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그 정황을 생생히 보여준다.저자는 여성이 걷기 위해 치러야 했던 숱한 희생을 보여준다.
19세기 말 영국 여성들은 밤에 부적절한 거리를 걸어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창녀로 몰려 경찰서에서 ‘의학검사’를 받았다.거부하면 감옥에 갇혔으며 검사 결과 처녀인 경우에만 풀려났다.당시 프랑스에서도 경찰은 노동계급의 여성을 임의로 체포할 수 있었다.체포된 여성들은 대부분 유죄판결을 받아 생라자르 감옥에서 혹사당하거나,매춘부로 등록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미국 시인 실비아 플래스는 열아홉 살 때의 일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그것이 나의 끔찍한 비극”이라고 적고 있다.저자는 제인 오스틴에서 버지니아 울프,실비아 플래스까지 여성 작가들이 남성작가들과 달리 협소한 주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같은 여성의 제한된 걷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오늘날 ‘걷기의 상실’을 안타까워한다.그저 러닝 머신 위에서 시시포스처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현대의 군상.저자는 그 무기력한 ‘박제인간’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걷기의 활력을 회복하자고 호소한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