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종횡무진] ‘운동부 아이들’의 빛이 되어주세요
홍명보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청소년(20세 이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 동석해 몇 마디 나눈 ‘인연’밖에 없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축하 편지를 드립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축구의 대들보였던 선수 출신으로 곧바로 청소년 대표팀의 사령탑이 된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명선수가 반드시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고언도 들려옵니다. 감독 경험과 나이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리 걱정할 것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41세 때 에인트호벤 사령탑에 올라 곧장 리그 우승을 했고, 레이카르트 감독도 36세 때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아 유로2000에서 4강을 이뤘습니다. 40세의 홍 감독이 청소년 대표팀을 맡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홍 감독님의 등장으로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감독님은 김태영, 서정원 같은 한 살 아래 후배들과 팀을 구성해보고 싶다고 밝혔지요. 이미 지난해부터 황선홍 감독이 부산을 맡아 원만히 팀을 이끌어왔습니다. 90년대 이후 세대의 등장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잠시 다른 얘기도 하고 싶습니다. 흔히 우리나라를 ‘스포츠 강국’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스포츠계의 현실은 그리 밝지 않고 그 미래는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몇몇 종목의 뛰어난 스타들은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대다수 무명 선수들의 현실은 씁쓸합니다. 냉혹한 프로 세계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자라나는 학생 선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지난해 10월 치러진 학업성취도 평가 때 고교 선수들 대부분이 시험에서 배제되었다고 합니다. 운동 선수는 학교 구성원에서 배제되는 현실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선수들이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이처럼 이 사회의 구조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하는 폭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일선 지도자와 선수들은 공허한 분노와 깊은 체념에 빠져 있습니다.
홍 감독님 역시 이런 현실이 개선되기를 누구보다 절실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 선수들이 교육과 문화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운동 기계’처럼 취급받는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기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체육계의 책임 있는 인사들과 선수들이 한 목소리로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습니다. 차범근, 이충희, 선동열, 홍명보, 황선홍, 송진우 같은 빛나는 스타들이 앞장서서 일선 지도자와 학생 선수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이 나라 체육 행정이 올바르게 개선되기를 호소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 호소의 목소리는 정당한 분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홍 감독이나 여러 스타들이 누구보다 이 문제를 체육인 모두의 명예와 자존심과 어린 선수들의 미래의 문제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여건이나 위치 때문에 생경하게 발언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도 해봅니다. 홍 감독님이 홀로 이 문제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청소년 팀을 이끌게 된 감독으로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운동부 애들은 머리도 나쁘고 학교 평균이나 깎아먹으니 시험도 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 사회의 야만적인 사고 방식은 큰 문제입니다. 학생 선수나 일선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너무나 야박하고 취약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홍 감독님처럼 이 사회의 빛나는 스타들이 후배 선수들을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스포츠맨 모두의 자존심을 위하여 ‘장외의 그라운드’에서도 더 많은 일을 해주기를 부탁합니다.
스포츠 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