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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요 포커스] 초·중등학교에 고전 읽기 과목을 만들자/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금요 포커스] 초·중등학교에 고전 읽기 과목을 만들자/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한 검사장의 몰염치한 행각은 옛날 가렴주구(苛斂誅求)나 일삼던 사또를 보는 듯해 어처구니가 없다. 청소년을 게임에 끌어들여 재산을 모으고, 그 재산을 지키고자 권력 앞에 온갖 비굴한 짓을 다한 게임업체 대표의 치졸한 행위 또한 어이가 없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리 됐는지 생각할수록 한심하기만 하다. 이들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탐욕에 빠져 최소한 인간적인 예의와 염치도 돌아보지 않고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런 일을 보고 있자면 우리나라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교사와 부모는 제자와 자녀가 바른 인성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부모는 그저 자녀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물론 자식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걱정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지켜보았다면 꼭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녔다고 해서 성공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자식에 관한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따뜻한 인성과 정직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보다는 경쟁에서 무조건 남을 이기도록 하는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공부만 잘하면 설사 인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잘못을 눈감아 준다. 마음이 따뜻하고 행실이 바르고 정직한 아이가 남을 배려하는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 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당신의 자녀를 사람답게 키우고 있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라고 말해 본 적이 있나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대접받는다는 검증도 안 된 공식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한 우리의 교육은 한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런 인식을 바꾸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학벌 중심의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고 이런 시스템에 길들여진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획기적으로 전환돼야 한다. 쉽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들이 정말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의 가치관과 좌표를 바르게 세우고,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과목이 있는가. 학창 시절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물질적인 풍요가 진정한 행복인지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시간이 있는가. 책상머리에 앉혀 놓고 무조건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인생과 사람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미국 세인트존스대학은 100권의 고전을 선정해 4년 동안 의무적으로 읽고 토론하게 한다. 고전 읽기가 대학 교과 과정의 전부다. 그럼에도 이 대학 졸업생의 사회적인 성취도는 높다고 한다. 학창 시절 알량한 지식을 주입하는 데 골몰하기보다 선현들의 지혜를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체득한 것이 사회에 나아가서도 쓸모가 있었던 것이다. 산업체 요구에 걸맞은 인력 양성을 위해 교과목마저 실용적인 것으로 바꾸는 우리의 대학 현실이 씁쓸하다. 고전 속에는 나는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길이 있다. 고전을 ‘내일로 가는 옛길’이라고도 한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갈림길이 나오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바른길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생긴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처럼 4년 내내 고전 읽기를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도 ‘고전 읽기’ 과목을 만들어 학생들이 일주일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고전을 읽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좋겠다. 감수성이 풍부한 학창 시절 좋은 글을 꾸준히 읽고 깊이 음미하며 생각하다 보면 설령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생각이 잠시 꿈틀거리다가도 이내 그런 구차한 삶은 살지 않겠다는 올곧은 생각이 번뜩 들지 않겠는가. 어려서 체득한 ‘인문학적 가치’는 나이가 들어도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그의 웃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좌절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더 커지고 짙어진 것일까. 소박하게 꾸며진 사장실 문을 열면 ‘힘들어도 괜찮아’라고 적힌 액자가 첫눈에 들어온다. 사무실과 공장을 겸하고 있는 경기 일산 본사에서 지난 17일 만난 김원길(55) 바이네르 사장에게서 “힘들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되뇌며 넘어지고 일어나 달려온 40년을 들어봤다. -옷가지 몇 벌이 든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는 영등포역에 내렸다. 처음 밟은 서울 땅. 또래들처럼 학교에 다녔더라면 고2 새 학기의 시작에 들떠 있었을 1978년의 봄이었다. 당시 영등포는 사람과 상점, 공장, 유흥가로 지금보다 훨씬 더 번잡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겁이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목이 탔다. 화장실에서 벌컥벌컥 수돗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시간은 오후 4시. 자, 이제부터 한 집 한 집 내가 있을 곳을 찾아나서 보자. “제가 구두 만드는 기술이 있는데요, 저 좀 써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땅거미가 내리고 전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와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나오지 않았다. 퇴짜를 맞은 집이 스무 곳 가까이 되어갈 즈음, 문래동 쪽 허름한 구둣방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월급은 없이 하숙집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기만 하는 조건이었지만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내 솜씨를 본 구둣방 주인은 좀 놀라는 눈치였다. 열일곱 살 먹은 ‘충청도 촌놈’치고는 실력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름이 되자 주인이 불렀다. “장마철이라 물건이 너무 안 팔린다. 더이상 널 먹이고 재워 줄 능력이 안 된다.” 말하자면 정리해고였다. -“구둣방에서 잘렸어요.” 몇 달 동안 하숙하며 친해진 룸메이트 형에게 사정 얘기를 했다. “내가 강원도 양양 출신이어서 잘 아는데, 설악산에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야.” 귀가 번쩍 뜨인 나는 다음날 새벽같이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갔다. 그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도착한 설악산. 몇 달 전 영등포 역전에서처럼 상점과 산장의 문을 한 집 한 집 두드렸다. 하지만 하숙집 형의 말과 현실은 달랐다. 서울로 돌아갈 차비는커녕 김밥 하나 사먹을 돈도 없는데 서늘한 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말할 요량으로 찾아간 산장에서 “방 청소하고 손님들 가방 들어 주면 한 달에 5만원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당시 설악산은 신혼여행이 피크였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들어 주자 팁이란 걸 주는데, 한 번에 2000~3000원은 기본이었다. 새로운 삶의 희망에 들뜬 신혼부부들은 일반 등산객들보다 손이 컸다. 지배인이 보는 데서 받은 팁은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팁은 고스란히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 팁에 맛을 들인 나는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다.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말을 해야 더 많은 팁을, 그리고 지배인이 안 보는 데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갔다. 한 달이 지나자 다락방에 몰래 감추고 벽돌로 눌러놓았던 팁이 50만원으로 불어났다. 월급의 10배였다. 그 돈을 들고 나는 미련 없이 설악산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1961년 충남 당진에서 5남 2녀의 셋째로 태어났는데, 가족이 의지할 거라곤 손바닥만 한 논 몇 마지기가 전부였다. 나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허약한 형을 대신해 풀 베고, 땔감 구하고, 논에서 피 뽑는 노동의 무게를 다 짊어져야 했다. 그 보상일까. 초등학교까지만 보낸 형, 누나와 달리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넣어주셨다. 하지만 중학교 3년 동안 수시로 학업 중단의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 저…학교에서…100원만 가져오래요.” 집안 사정 뻔한데 차마 말 못하고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진작에 얘기했으면 좀 더 일찍 알아봤을 것 아니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어머니의 긴긴밤 잠 못 드는 괴로움만 더 깊어졌을 거란 사실을. 풀이 죽은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집을 나서곤 했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1977년 2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중학교 3년이 나에게 보장된 최후의 학업이란 걸 이미 다 알고 있었던 터라 고등학교 진학 얘기는 아버지도 나도 꺼내지 않았다. “원길이는 내 밑에서 구두 기술 배워라.” 서산 읍내에서 작은 구둣방을 하시던 작은아버지가 같이 일을 하자고 하셨다. 초등학교 때 지게를 직접 만들기도 했던 조카의 손재주를 익히 알고 있던 작은아버지였다. 하지만 ‘좁은 곳’에서 평생을 ‘족(足)쟁이’로 썩고 싶지는 않았던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넓은 곳’을 찾아 경기 고양군 지축면(현재의 지축동)의 분재농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한 달 1만원을 받아서는 내 한 몸 먹고 자기에도 빠듯했다. 슬슬 염증이 났다. -“돈 번다고 올라가더니 사는 게 그리 만만하더냐.” 그해 9월 추석에 집에 와서 작은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욕심 부리지 말고 우리 가게로 와라. 이 기술 하나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 -서산 구둣방에서 처음 배운 것은 가죽과 밑창이 단단히 붙도록 망치질을 하고, 접착면에 ‘뻬빠질’(사포질)을 하는 일이었다. “역시, 원길이 손재주는 대단하구나.” 남들이 1년을 해도 떼지 못한다는 남성용 구두 제작 전 공정을 나는 5개월 만에 마쳤다. “그 재주로 시골에 있긴 아깝다. 서울 가서 서울 기술 배우거라.” 동료 아저씨들의 말이 몇 번 반복되자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아버지는 나의 고민을 이해해 주셨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쥐여주신 차비를 들고 나는 1978년 그 봄에 영등포역 가는 기차를 탔던 것이다. -설악산에서 번 55만원으로 경기 성남 상대원동에 월셋집을 얻고 서울 중곡동 어린이대공원 근처 구두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제화업계의 판도는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케리부룩의 순이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케리부룩에 납품하던 참스제화였다. 본격적으로 여성용 구두 만들기를 익혔는데, 얼마 후 나는 참스제화 안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기술을 갖게 됐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즈음 케리부룩에서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1983년 9월 스물두 살 때였다. -‘생산라인에 있으면 신발을 20켤레 만들 수 있지만 관리자가 되면 2000켤레, 2만 켤레의 생산을 직접 관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늘 ‘더 큰 것’, ‘더 높은 곳’에 목말라 했다. 그래서 나를 믿고 부른 케리부룩 김정현 사장님에게 ‘생산직’이 아닌 ‘관리직’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사장님은 원했지만 주변에서 말들이 나왔다. ‘생산관리를 고작 중졸 출신에게 맡기다니’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관리직의 문들 두드렸고, 얼마 후 포장반에 배치됐다. 구두에 상표를 붙여 사각 박스에 담는 단순노동을 하는 곳이었지만, 그나마 관리직이라는 이름표를 갖고 있는 부서였다. 생산라인에 있을 때 100만원이던 월급이 포장반으로 오니 20만원으로 깎였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계산은 적중했다. 몇 달 후 완제품을 최종 검사하는 검수반으로 옮겼다. ‘완벽한 제품’을 강조하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깐깐하게 검사를 했다. 어느 날 공장 기술자 100여명이 “우리를 괴롭히는 김원길을 자르라”고 대놓고 사장님에게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사장님은 나를 지지했다. 제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데 그걸 마다할 사장이 어디 있겠나. 나는 ‘시키지 않은 짓’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했다. 시장 조사였는데 금강제화, 에스콰이아, 엘칸토 등 경쟁제품 중에 잘 팔리는 건 어떤 게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분석해 리포트를 작성했다. -1989년 인천백화점에서 우리 케리부룩 매장을 퇴출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내가 영업관리를 하며 어렵게 입점을 성사시킨 지 한 달여 만이었다. 월 매출이 600만원으로 다른 업체의 5분의1밖에 안 된다는 이유였다. 백화점에 시간을 한 달만 더 달라고 했다. ‘저 많은 걸 나 혼자선 절대로 못 판다. 고객의 입소문을 통해 팔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반값 특가 세일과 동시에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 여러분, 케리부룩 CM송 부르시면 구두를 그냥 드립니다.” 당시 ‘허리를 미끈하게 펴고~ 무릎을 쭉 뻗으면~ 케리부룩 케리부룩 예쁘게 걸어요~’라는 우리 TV CM송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달 매출이 1억 1000만원으로 거의 20배가 됐다. 그걸 계기로 뉴코아, 롯데, 신세계 등 서울 시내 백화점에 속속 입점을 했고 나는 ‘영업의 달인’으로 통하게 됐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에 대한 시기와 모함도 커져 갔다. ‘사장이 되려고 한다’, ‘회삿돈을 제 맘대로 쓴다’ 악성 루머가 사내에 돌았다.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고 분노를 하니 더이상은 회사에 다닐 수가 없었다. -1990년 사표를 던졌다. 언젠가는 예정됐던 일, 그게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케리부룩 퇴직금 280만원과 사장님이 별도로 챙겨주신 200만원을 밑천으로 서울 용산에 선심(구두의 앞코에 들어가는 부속) 제조회사를 차렸다. 간판은 ‘원길’로 내걸었다. 장사는 그럭저럭 됐는데 돈이 안 들어왔다. 못 받은 외상값이 2000만원이 넘어갔고, 빚이 쌓여 갔다. 답답한 마음에 전에 거래했던 롯데백화점 명동 본점의 바이어를 만났다. “아이고, 김 대리 회사 관두고 나서 케리부룩 엉망 됐어요.” 케리부룩 김 사장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롯데백화점에 물건 한 트럭 보내주세요. 제가 팔아볼게요.” 매출의 10%가 내 몫이었다. -“사장님, 제가 직접 구두 만들어서 케리부룩 상표 붙여 팔겠습니다.” 다시 기세가 오른 나는 케리부룩에 로열티를 주고 하청공장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는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1993년 케리부룩 대표가 된 전문경영인이 케리부룩 상품권을 헐값에 불법 발행해 구속이 됐고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상품권들은 휴지조각이 됐고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구두와 빚더미에 거리로 나앉을 판이 됐다. 불면의 날이 이어졌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려왔다. 하지만, 20대 때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씩씩하게 출근을 했던 나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어떤 고마운 분이 급전을 융통해 줘서 최종 도산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을 ‘안토니’로 바꾸고 그럭저럭 구두회사를 꾸려가고 있던 1994년 뜻하지 않은 전기가 찾아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최대 구두 박람회 ‘미캄’에 갔는데 바이네르의 컴포트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나와 한국 독점판매 계약을 맺자”고 했다. 당시 바이네르는 하루 1만 2000켤레를 생산하는 대형 업체였다. 한국 수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을 나는 어렵사리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예상대로 국내에서 바이네르는 중년 이상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지만, 이탈리아 현지에 주문을 넣고 제품을 받기까지 무려 석 달이나 소요되는 문제가 나타났다. 직접 생산이 절실해졌다. -“내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구두 기술자다. 바이네르 상표를 붙여서 우리가 직접 만들어 팔면 안 되겠나. 바이네르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들을 꼬박 6개월을 설득했다. 나의 한결같은 노력은 바이네르 회장을 감동시켰고, 결국 나는 일산의 아파트형 공장에서 하루 50켤레씩 컴포트화 생산을 시작했다. -바이네르로 가파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악재가 터졌다. 나를 아껴주었던 이탈리아 본사 회장이 돌아가시고 그 분의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회계사 출신인 그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한국에서 그렇게 잘 팔리는데, 로얄티를 이 정도 밖에 안 내나.’, ‘이탈리아 본사에서 수입해 가는 물량을 더 늘려라.’ 아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나는 서서히 바이네르와의 결별을 준비했다. 광고도 바이네르의 비중을 줄이고 우리 자체 브랜드인 안토니에 집중했다. 그런데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대표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은 특히 충격이 컸다. 거기에서 바이네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바이네르는 당시 유럽과 홍콩 증시에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 나는 이탈리아로 가서 아들을 만났다. “너희들 자금난이 심각하다는데, 내가 지원을 해줄 테니 바이네르 브랜드를 나에게 팔아라.” 그들은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현재 이탈리아에 바이네르 공장이 10군데 정도 있는데 그들이 쓰는 브랜드 상표권은 내가 갖고 있다. -바이네르 신발이 편안한 비결이 뭐냐고 많은 사람이 묻는다. 그러면 나는 “고객의 마음은 당신이 그 질문을 하는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일러준다. 고객은 항상 더 예쁘고, 더 편안한 구두를 찾는다. 그걸 떠올리면 절대로 연구개발(R&D)을 게을리하거나, 맘 놓고 쉴 수가 없다. 고객은 혹시 한 번은 몰라도 절대로 두 번은 봐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 김원길 바이네르 사장 발이 편안한 신발을 뜻하는 ‘컴포트화’를 통해 연간 5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업계 3위 바이네르의 최고경영자(CEO)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구두 분야의 장인(匠人)으로, 특히 ‘중졸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바이네르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전국 60여곳에 매장을 두고 있다. 가난으로 배움을 다하지 못했던 그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안토니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골프 꿈나무에게 연간 2억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수도권의 독거노인을 초청해 효도잔치를 열고 있다. 박애원, 벧엘의집 등 수많은 복지시설에 물품을 보내고 있다.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직원들에게 업계 최고의 급여를 보장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 다양한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61년 충남 당진 출생 ▲당진 도성초등학교, 미호중학교 ▲1984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제화부문 동상 수상 ▲1994년 안토니 설립 ▲2008년 국무총리 표창, 2012년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2012년 철탑산업훈장, 2013년 아름다운 납세자상 수상
  • 이런 것까지…김씨 일가도 먹는 ‘북한산 정력제’ 8선

    이런 것까지…김씨 일가도 먹는 ‘북한산 정력제’ 8선

    최근 약초를 버무려 만든 북한산 ‘짝퉁 비아그라’에서 실제 비아그라와 같은 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한산 정력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다들 남사스럽다며 대놓고 관심을 표하지는 않지만 사실 정력제 관련 소식은 늘상 화제가 된다. 특히 북한 정력제는 이른바 ‘김일성 정력제’, ‘김정일 정력제’ 같은 수식어가 주는 묘한(?) 신뢰성 때문에 관심도 클 뿐더러 실제 중국을 비롯한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다. 한 탈북자는 “최고 존엄에게 바치는 정력제가 나쁠 리 없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에 짝퉁 정력제가 판을 친다”면서 “과학기술 수준으로만 따지자면 미국산 ‘오바마 정력제’가 최고가 돼야 하지만 그런 단어 자체를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전했다. 그러나 진품이라고 해도 이들 대부분은 약효나 안정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해외에도 잘 알려진 북한의 대표 정력제를 살펴본다. 1. 천궁백화(天宮百花) 야생 삼지구엽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정력제다. 사실 여부를 알 순 없지만 조선시대 왕과 왕비, 후궁들이 사용했다고 해 ‘조선의 국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북한 조선부강제약회사가 제조하는 것으로, 성기능감퇴, 성기능장애, 발기부전, 불감증, 무력증 외에 당뇨, 불임에까지 효능이 있다고 선전한다. “건강한 사람이 쓰면 새 힘이 솟고 사업의욕이 높아진다. 노인들이 쓰면 성욕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노쇠의 증상들이 현저히 경감되며 갱년기 여성들은 월경을 다시 하게 된다”는 게 이 약의 선전 문구다. 말린 삼지구엽초 1t에서 유효 성분이 딱 1g만 추출된다고 하는데 제조 과정을 자세히 알 방도는 없다. 북한이 이중간첩 원정화에게 독을 섞은 천궁백화를 주고는 우리 정보요원에게 이 약을 먹이라고 했지만 이미 깊은 관계(?)에 있던 원씨가 차마 이 약을 먹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항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 2. 서각(犀角) 서각, 즉 코뿔소의 뿔도 북한에서는 정력제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에게는 이국적이고 이색적인 한약재(?)이지만 북한은 서각 가루를 정력제라며 해외에까지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동물원에나 있는 코뿔소가 북녘땅이라고 해서 한우처럼 흔치는 않을 터. 북한 역시 서각을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입해야 하지만 코뿔소 개체 보호를 위해 서각은 합법적으로 수출이 금지돼 있다. 이에 북한은 대사관 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을 조직적으로 활용해 서각을 밀거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관은 공항에서 짐수색을 당하지 않는 특권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판매한 서각의 수익금은 ‘통치자금’으로도 일부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지난해 5월에 주남아프리카공화국 북한대사관 소속의 한 외교관은 모잠비크에서 서각 4.5㎏을 밀거래하다 체포돼 곧장 추방됐다. 3. 가루지기 극단적인 네이밍이 돋보이는 제품. ‘변강쇠’와 관련 있는, 바로 그 가루지기다. 북한 정력제 중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유명한 제품으로 산삼을 주원료로 했다고 한다. 북한 조선장수문제연구소가 개발한 것으로, 산삼 외에 녹용, 영지, 토사자, 달개비 등 ‘순수 생약 성분’으로만 만든 일종의 자양강장제다. 연구소 측에서는 화학 합성물 덩어리인 비아그라와 달리 가루지기는 순수한 생약 성분으로만 만든 정력제라는 데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요즘과 달리 남북관계가 좋아 각종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때인 1999년에는 ‘북한의 제조 방법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가루지기를 제조·시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남성용과 여성용이 따로 있으며 시판 당시 가격은 30포 30만원이었다. 현재 각종 쇼핑몰은 물론 중고물품 거래사이트 등 양지에서는 거래되지 않는다. 4. 합마유(哈蟆油) 정말 이런 것까지 먹어야 되나 싶은 약재. 북방산개구리라고도 불리는 백두산기름개구리 암컷의 수란관(나팔관)을 말린 것이다. 개구리를 끈에 꿰어 하루쯤 말린 뒤 배를 갈라 뒷다리 가까이에 있는 수란관을 직접 채취해 모은다. 갱년기가 지난 여성이 합마유를 복용하면 월경을 다시 한다고하나 역시 확인할 길은 없다. 개구리가 더러운 시궁창이나 연못에 알을 낳아도 알이 별 문제 없이 올챙이가 되는 건 바로 합마유에 있는 항균 물질 때문이라고 선전한다. 김씨 일가가 먹는 합마유는 호위과학연구소라는 곳에서 따로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에서 인기가 많아 북한이 수출을 한다고 하는데, 중국 민간에서는 폐결핵, 성기능 개선 외에 산후조리에도 합마유를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중국에서는 백두산기름개구리를 장백산기름개구리라고 부른다. 5. 청춘1호 일명 ‘약초 비아그라’, ‘북한 비아그라’라고 불리는 북한산 짝퉁 비아그라인 ‘네오 비아그라 YR’의 내수용(?) 제품명이 바로 청춘1호다. 가루지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화학 결합물이 아닌 생약 성분으로 만든 정력제다. 이 제품의 설명서에는 “2차 이상의 성교시 발기 복귀시간이 15분 주기로 짧아 남녀가 원하는 대로 4~8회의 연속되는 성교를 실현할 수 있는 다회성기능부활제. 발기지속시간 24~36시간. 피로감은 1회 성교와 6회 성교가 같습니다. 피로가 회복되며 활력이 넘칩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외에 신장염, 간염, 관절염, 뇌동맥경화증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만병통치약’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2006년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청춘1호를 입수해 분석해봤더니 수은 등 중금속과 마약 성분이 검출됐다. 해외에서도 거래되는데 가격은 한 알당 5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다. 6. 자라피 말 그대로 자라의 피다. 피를 마시는 거다. 자라의 목을 자르며 나오는 피를 그냥 마시거나 술 등에 섞어 먹는다. 자라피는 한방에서 별혈(鼈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기력 회복 등에 쓴다. 김일성의 80세 생일에 김정일이 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자라 800마리분의 피를 바쳤다고 해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북한의 유도 스타 계순희 선수도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산삼과 자라피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평양의 자라 공장(양식장)을 방문해 “공장이 어떻게 돼 이런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는다”고 강한 질책을 한 적이 있다. 지난 7월에는 그 공장을 다시 방문해 “1년 만에 천지개벽을 했다”며 칭찬을 했다고 하니 김 위원장의 자라 사랑이 눈물겹다. 7. 체력활성 영양알 이것도 북한산 만병통치약이다. 유럽 등 해외 진출을 노리며 외국을 겨냥한 잡지에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고 한다. 성기능 강화 외에 근육 강화, 학습 집중력 제고, 피로 해소, 멀미와 빈혈에 특효라고 소개한다. 불면증에도 효과가 크다고 한다. 성기능을 강화하면서 잠이 잘 오게 만드는 동시에 학습 집중력을 높여 준다고 하니 심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노년이 먹으면 정력이 세지고, 아이가 먹으면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고 광고를 한다는데 길거리 약장수들이 흔히 쓰는 카피 문구를 닮았다. 8. 동충하초(冬蟲夏草) 우리나라에서도 건강 식품 등에 널리 쓰이는 바로 그 동충하초다. 겨울에는 곤충 사체에 기생하다 여름이면 풀처럼 자라는 버섯이다. 김일성이 노년까지 즐겨 복용했다고 한다. 중국의 덩샤오핑도 동충하초를 늘상 복용했는데 1978년 방북 당시 김일성을 만나 직접 동충하초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은 동충하초 연구를 하부에 지시했고 김일성종합대학의 생물학과 교수 등이 나서 동충하초의 효과 등을 입증한 뒤에야 이를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충하초는 피로회복과 더불어 장기의 기능을 강화시켜주고 성기능 개선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시가 된 댓글… 헬조선 들추다

    시가 된 댓글… 헬조선 들추다

    차마 바로 듣지도, 보지도 못할 아픈 사연엔 늘 그의 시가 뒤따랐다. 섭씨 1600도의 쇳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20대 청년의 참혹한 죽음에도 그랬고, 아이에게 체리 맛을 알려주고 싶어 체리를 훔친 가난한 엄마의 비극에도 그랬다. 지난 6년간 그가 댓글을 쓴 뉴스와 댓글 시를 이어 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헬조선’의 지도가 그려진다. 댓글 시인 제페토의 첫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수오서재)를 읽다 보면 이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각성이 통렬히 덮쳐온다. 댓글 시인이 세인들의 입길에 오른 건 표제시 ‘그 쇳물 쓰지 마라’부터였다. 2010년 쇳물이 끓는 용광로에 빠져 숨진 청년에 대한 기사에 달린 그의 조시(弔詩)는 쉽게 잊힐 뻔한 죽음을 저릿하게 각인시켰다. 이 댓글 시에는 400여개의 댓글이 눈물방울처럼 달렸다. 5년 뒤 다시 그의 시를 읽으러 일부러 뉴스를 찾은 누리꾼도 있었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그 쇳물은 쓰지 마라.//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바늘도 만들지 마라.//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그 쇳물 쓰지 말고/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정성으로 다듬어/정문 앞에 세워주게.//가끔 엄마 찾아와/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그 쇳물 쓰지 마라) 지난 6년간 그가 뉴스에 단 댓글 시는 120여편에 이른다. 건물 외벽을 청소하다 추락사한 중년 가장, 구제역 파동에 생매장된 가축들, 임금 체불에 맞서 고공 시위를 펼치는 일용직 노동자, 새엄마의 폭행으로 숨진 여덟 살 아이 등이 그의 시의 주인공이 됐다. 시들은 개인에 몰두한 우리에게 ‘이런 현실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아이들 맛보이려 3만원짜리 체리 상자를 훔쳤다 입건된 엄마의 이야기에서는 질곡 같은 가난의 대물림을 환기시킨다. ‘아버지 때처럼/오늘도 더웠습니다/물려주신 가난은 넉넉했고요//체리를 훔쳤습니다/피치 못할 사정을 읍소해보고도 싶지만/나라님은 알 바 아닐 테고/가난에 관해서는/얘기 끝났다 하실 테죠//(중략)돌아가 아이들에게/벼슬 같은 가난을/세습해주어야겠습니다.’(체리와 장군) ‘40대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밝힌 제페토 시인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썼다. “부디 살아갈 날들이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조금 더 안달하고 조금 더 악을 쓰면서요.” 그 바람이 이뤄진다면 그의 시도 무참한 것에서 나른하고 사소한 것으로 옮겨갈 수 있을 테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댓글 시인 제페토, 헬조선을 들추다

    댓글 시인 제페토, 헬조선을 들추다

     차마 바로 듣지도, 보지도 못할 아픈 사연엔 늘 그의 시가 뒤따랐다. 섭씨 1600도의 쇳물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20대 청년의 참혹한 죽음에도 그랬고, 아이에게 체리 맛을 알려주고 싶어 체리를 훔친 가난한 엄마의 비극에도 그랬다. 지난 6년간 그가 댓글을 쓴 뉴스와 댓글 시를 이어 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헬조선’의 지도가 그려진다. 댓글 시인 제페토의 첫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수오서재)를 읽다 보면 이 말이 과언이 아니라는 각성이 통렬히 덮쳐온다.  댓글 시인이 세인들의 입길에 오른 건 표제시 ‘그 쇳물 쓰지 마라’부터였다. 2010년 쇳물이 끓는 용광로에 빠져 숨진 청년에 대한 기사에 달린 그의 조시(弔詩)는 쉽게 잊힐 뻔한 죽음을 저릿하게 각인시켰다. 이 댓글 시에는 400여개의 댓글이 눈물방울처럼 달렸다. 5년 뒤 다시 그의 시를 읽으러 일부러 뉴스를 찾은 누리꾼도 있었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그 쇳물은 쓰지 마라.//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바늘도 만들지 마라.//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그 쇳물 쓰지 말고/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정성으로 다듬어/정문 앞에 세워주게.//가끔 엄마 찾아와/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그 쇳물 쓰지 마라) 지난 6년간 그가 뉴스에 단 댓글 시는 120여편에 이른다. 건물 외벽을 청소하다 추락사한 중년 가장, 구제역 파동에 생매장된 가축들, 임금 체불에 맞서 고공 시위를 펼치는 일용직 노동자, 새엄마의 폭행으로 숨진 여덟 살 아이 등이 그의 시의 주인공이 됐다. 시들은 개인에 몰두한 우리에게 ‘이런 현실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아이들 맛보이려 3만원 짜리 체리 상자를 훔쳤다 입건된 엄마의 이야기에서는 질곡 같은 가난의 대물림을 환기시킨다.  ‘아버지 때처럼/오늘도 더웠습니다/물려주신 가난은 넉넉했고요//체리를 훔쳤습니다/피치 못할 사정을 읍소해보고도 싶지만/나라님은 알 바 아닐 테고/가난에 관해서는/얘기 끝났다 하실 테죠//(중략)돌아가 아이들에게/벼슬 같은 가난을/세습해주어야겠습니다.’(체리와 장군)  ‘40대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밝힌 제페토 시인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썼다. “부디 살아갈 날들이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조금 더 안달하고 조금 더 악을 쓰면서요.” 그 바람이 이뤄진다면 그의 시도 무참한 것에서 나른하고 사소한 것으로 옮겨갈 수 있을 테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봉지아, 리우] 조영호 사무총장의 한숨 “金 8개만 채워도 좋겠다”

    16일(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호텔에서 만난 조영호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의 얼굴은 10년쯤 더 늙어 보였다. 기자단 간담회에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 그는 여자배구 8강전을 보고 부랴부랴 오는 길이라고 했다.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 고희(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무엇이 그를 손자뻘인 젊은 기자들에게 사죄하듯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을까. 이날은 한국 스포츠가 하계올림픽에서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 44년 만에 처음으로 단체 구기종목에서 ‘빈손’으로 돌아선 날이다. 여자배구 대표팀이 8강전에서 네덜란드에 1-3으로 패하면서 남자축구와 핸드볼, 하키에 이어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우리나라는 1976년 몬트리올대회에서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대회에서는 여자농구와 핸드볼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1988년 서울에서는 여자핸드볼이 단체 구기 사상 최초의 금메달 종목이 됐다. 그러나 단체 구기종목 메달의 맥은 이번 대회에서 잘려 나갔다. 더욱이 결승을 바라보는 4강에도 못 미치고 모조리 보따리를 꾸렸다. 무엇보다 조 총장은 배구인 출신이다. 프로배구가 출범하기 전 대한배구협회에서 12년 동안이나 전무 보직을 맡았다. 배구인 출신이었던 까닭에 여자배구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을 터다. 그러나 몬트리올에서 구기종목 역대 첫 올림픽 메달을 딴 여자배구가 자신이 태동시킨 맥을 스스로 자르는 꼴이 됐으니 그의 속은 충분히 아리고 쓰렸을 게 틀림없다. 구기 종목의 패퇴와 함께 한국선수단의 메달 목표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조 총장은 “(금메달 개수가) 10개가 안 돼도 좋으니 8개만 채워도 정말 감사하겠다”고 했다. 개인 종목이긴 하지만 구기에서 남은 건 탁구와 골프가 전부다. 그는 여기에 17일 시작되는 태권도가 1~2개 금을 따주면 얼추 선수단의 체면치레는 될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개를 끄덕이는 주위의 기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묻고는 싶은데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기자 한 명이 물었다. “사정이 어떻든 (체육회) 공동회장 두 분이 전부 리우에 못 왔잖아요. 집안에 큰 어른이 없는데 뭐든 잘될 일이 있겠어요?” 조 총장은 그저 더 깊이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이런 것까지…김씨 일가도 먹는 ‘북한산 정력제’ 8선

    이런 것까지…김씨 일가도 먹는 ‘북한산 정력제’ 8선

    최근 약초를 버무려 만든 북한산 ‘짝퉁 비아그라’에서 실제 비아그라와 같은 성분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한산 정력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다들 남사스럽다며 대놓고 관심을 표하지는 않지만 사실 정력제 관련 소식은 늘상 화제가 된다. 특히 북한 정력제는 이른바 ‘김일성 정력제’, ‘김정일 정력제’ 같은 수식어가 주는 묘한(?) 신뢰성 때문에 관심도 클 뿐더러 실제 중국을 비롯한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다. 한 탈북자는 “최고 존엄에게 바치는 정력제가 나쁠 리 없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에 짝퉁 정력제가 판을 친다”면서 “과학기술 수준으로만 따지자면 미국산 ‘오바마 정력제’가 최고가 돼야 하지만 그런 단어 자체를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전했다. 그러나 진품이라고 해도 이들 대부분은 약효나 안정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해외에도 잘 알려진 북한의 대표 정력제를 살펴본다. 1. 천궁백화(天宮百花) 야생 삼지구엽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정력제다. 사실 여부를 알 순 없지만 조선시대 왕과 왕비, 후궁들이 사용했다고 해 ‘조선의 국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북한 조선부강제약회사가 제조하는 것으로, 성기능감퇴, 성기능장애, 발기부전, 불감증, 무력증 외에 당뇨, 불임에까지 효능이 있다고 선전한다. “건강한 사람이 쓰면 새 힘이 솟고 사업의욕이 높아진다. 노인들이 쓰면 성욕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노쇠의 증상들이 현저히 경감되며 갱년기 여성들은 월경을 다시 하게 된다”는 게 이 약의 선전 문구다. 말린 삼지구엽초 1t에서 유효 성분이 딱 1g만 추출된다고 하는데 제조 과정을 자세히 알 방도는 없다. 북한이 이중간첩 원정화에게 독을 섞은 천궁백화를 주고는 우리 정보요원에게 이 약을 먹이라고 했지만 이미 깊은 관계(?)에 있던 원씨가 차마 이 약을 먹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항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 2. 서각(犀角) 서각, 즉 코뿔소의 뿔도 북한에서는 정력제로 정평이 나있다. 우리에게는 이국적이고 이색적인 한약재(?)이지만 북한은 서각 가루를 정력제라며 해외에까지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동물원에나 있는 코뿔소가 북녘땅이라고 해서 한우처럼 흔치는 않을 터. 북한 역시 서각을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입해야 하지만 코뿔소 개체 보호를 위해 서각은 합법적으로 수출이 금지돼 있다. 이에 북한은 대사관 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을 조직적으로 활용해 서각을 밀거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관은 공항에서 짐수색을 당하지 않는 특권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판매한 서각의 수익금은 ‘통치자금’으로도 일부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지난해 5월에 주남아프리카공화국 북한대사관 소속의 한 외교관은 모잠비크에서 서각 4.5㎏을 밀거래하다 체포돼 곧장 추방됐다. 3. 가루지기 극단적인 네이밍이 돋보이는 제품. ‘변강쇠’와 관련 있는, 바로 그 가루지기다. 북한 정력제 중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유명한 제품으로 산삼을 주원료로 했다고 한다. 북한 조선장수문제연구소가 개발한 것으로, 산삼 외에 녹용, 영지, 토사자, 달개비 등 ‘순수 생약 성분’으로만 만든 일종의 자양강장제다. 연구소 측에서는 화학 합성물 덩어리인 비아그라와 달리 가루지기는 순수한 생약 성분으로만 만든 정력제라는 데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요즘과 달리 남북관계가 좋아 각종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때인 1999년에는 ‘북한의 제조 방법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가루지기를 제조·시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남성용과 여성용이 따로 있으며 시판 당시 가격은 30포 30만원이었다. 현재 각종 쇼핑몰은 물론 중고물품 거래사이트 등 양지에서는 거래되지 않는다. 4. 합마유(哈蟆油) 정말 이런 것까지 먹어야 되나 싶은 약재. 북방산개구리라고도 불리는 백두산기름개구리 암컷의 수란관(나팔관)을 말린 것이다. 개구리를 끈에 꿰어 하루쯤 말린 뒤 배를 갈라 뒷다리 가까이에 있는 수란관을 직접 채취해 모은다. 갱년기가 지난 여성이 합마유를 복용하면 월경을 다시 한다고하나 역시 확인할 길은 없다. 개구리가 더러운 시궁창이나 연못에 알을 낳아도 알이 별 문제 없이 올챙이가 되는 건 바로 합마유에 있는 항균 물질 때문이라고 선전한다. 김씨 일가가 먹는 합마유는 호위과학연구소라는 곳에서 따로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에서 인기가 많아 북한이 수출을 한다고 하는데, 중국 민간에서는 폐결핵, 성기능 개선 외에 산후조리에도 합마유를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중국에서는 백두산기름개구리를 장백산기름개구리라고 부른다. 5. 청춘1호 일명 ‘약초 비아그라’, ‘북한 비아그라’라고 불리는 북한산 짝퉁 비아그라인 ‘네오 비아그라 YR’의 내수용(?) 제품명이 바로 청춘1호다. 가루지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화학 결합물이 아닌 생약 성분으로 만든 정력제다. 이 제품의 설명서에는 “2차 이상의 성교시 발기 복귀시간이 15분 주기로 짧아 남녀가 원하는 대로 4~8회의 연속되는 성교를 실현할 수 있는 다회성기능부활제. 발기지속시간 24~36시간. 피로감은 1회 성교와 6회 성교가 같습니다. 피로가 회복되며 활력이 넘칩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외에 신장염, 간염, 관절염, 뇌동맥경화증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만병통치약’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2006년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청춘1호를 입수해 분석해봤더니 수은 등 중금속과 마약 성분이 검출됐다. 해외에서도 거래되는데 가격은 한 알당 5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다. 6. 자라피 말 그대로 자라의 피다. 피를 마시는 거다. 자라의 목을 자르며 나오는 피를 그냥 마시거나 술 등에 섞어 먹는다. 자라피는 한방에서 별혈(鼈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기력 회복 등에 쓴다. 김일성의 80세 생일에 김정일이 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자라 800마리분의 피를 바쳤다고 해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북한의 유도 스타 계순희 선수도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 산삼과 자라피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평양의 자라 공장(양식장)을 방문해 “공장이 어떻게 돼 이런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지 않는다”고 강한 질책을 한 적이 있다. 지난 7월에는 그 공장을 다시 방문해 “1년 만에 천지개벽을 했다”며 칭찬을 했다고 하니 김 위원장의 자라 사랑이 눈물겹다. 7. 체력활성 영양알 이것도 북한산 만병통치약이다. 유럽 등 해외 진출을 노리며 외국을 겨냥한 잡지에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고 한다. 성기능 강화 외에 근육 강화, 학습 집중력 제고, 피로 해소, 멀미와 빈혈에 특효라고 소개한다. 불면증에도 효과가 크다고 한다. 성기능을 강화하면서 잠이 잘 오게 만드는 동시에 학습 집중력을 높여 준다고 하니 심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노년이 먹으면 정력이 세지고, 아이가 먹으면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고 광고를 한다는데 길거리 약장수들이 흔히 쓰는 카피 문구를 닮았다. 8. 동충하초(冬蟲夏草) 우리나라에서도 건강 식품 등에 널리 쓰이는 바로 그 동충하초다. 겨울에는 곤충 사체에 기생하다 여름이면 풀처럼 자라는 버섯이다. 김일성이 노년까지 즐겨 복용했다고 한다. 중국의 덩샤오핑도 동충하초를 늘상 복용했는데 1978년 방북 당시 김일성을 만나 직접 동충하초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은 동충하초 연구를 하부에 지시했고 김일성종합대학의 생물학과 교수 등이 나서 동충하초의 효과 등을 입증한 뒤에야 이를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충하초는 피로회복과 더불어 장기의 기능을 강화시켜주고 성기능 개선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진해군항서 잠수정 수리중 폭발…누리꾼 “실종된 분 무사히 돌아오길”

    진해군항서 잠수정 수리중 폭발…누리꾼 “실종된 분 무사히 돌아오길”

    16일 경남 진해 군항에서 우리 군의 잠수정이 수리 중 폭발, 2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으며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누리꾼들은 이 사고로 세상을 등진 젊은 군인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네이버 아이디 ‘tjrg****’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fate****‘는 ”제발 실종된 분 무사히 돌아오길 바랍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라는 글을 올려 애도했다. 누리꾼들은 입을 모아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군인들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이버 아이디 ’chun****‘는 ”전쟁도 아니고 평시 복무 중 다치거나 사망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 젊은 나이에 꿈 한번 펼쳐보지도 못하고…“라고 썼다. ’0ja2****‘는 ”군인들은 고생하는 만큼 나라에서 지켜줘야 합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도 어느 집의 귀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라고 적었다. 누리꾼들은 이들 병사 가족들의 아픔에도 깊이 공감했다. ’year****‘는 ”아침에 ’일찍 들어오마‘ 웃으면서 출근하셨을 텐데 고인과 유가족분들을 차마 위로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실종자도 어서 찾길 바라며, 부상 당하신 분도 속히 쾌유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라며 슬픔을 표현했다. 안타깝게 사고를 당한 군인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네이버 아이디 ’pete****‘는 ”아까운 이들에게 정부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는 글을, ’yang****‘는 ”군인들은 전쟁이 나면 국민 대신 목숨 바칠 분들이다. 최대한 예우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페이스북 이용자 ’이덕원‘은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는 분들은 일선에서 제일 고생하시는 소방관들과 군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군내 안전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컸다. ’kyu9****‘는 ”제발 점검해서 사고 예방 좀 하자“는 글을, ’nhte****‘는 ”우리 군의 모든 장비를 재점검하고 현대화를 이뤄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거제 갈매기야, 너도 절경에 놀라 우느냐

    거제 갈매기야, 너도 절경에 놀라 우느냐

    늙은 동백나무 얽힌 지심도… 포세이돈 삼지창 닮은 해금강… 웅혼한 홍포 앞바다 굽어보는 계룡산 물놀이를 즐기기 좋은 아름다운 해변이 17개나 된다. 시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다. 학동 농소 여차는 몽돌, 구조라 와현 명사 등은 고운 모래로 이름났다. 늙은 동백나무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지심도, 포세이돈의 삼지창 닮은 해금강도 멋들어지다. 이뿐이랴. 웅혼한 홍포 앞바다와 이를 낱낱이 굽어볼 수 있는 계룡산 풍경도 장쾌하다. 또 있다. 편안하게 ‘세월 낚으라’고 지세포 바다 위로 긴 낚시공원까지 만들어 뒀다. 이만하면 머리 위에 맴도는 뜨거운 공기를 피해 달아나기 딱 좋지 아니한가. 거기가 바로 경남 거제다. 먼저 시원한 바다부터 간다. 모래 곱기로 이름난 구조라 해수욕장이 목적지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올해 ‘전국 청정 해수욕장 20선’ 가운데 하나로 선정한 곳이다. 동쪽으로 거제의 ‘풍경 전망대’ 망산, 서쪽으로 수정봉, 앞쪽의 안섬, 윤돌섬 등이 어우러져 수려한 풍경을 펼쳐 내고 있다. ●사자바위·부처바위 등 기암괴석 즐비한 해금강 구조라 해변에서 좀더 아래로 내려가면 해금강과 만난다. 바다에 뜬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닮았다는 곳이다. 해금강은 유명세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옛 이름은 ‘갈도’(葛島)였다. 기암괴석의 형태가 칡뿌리 뻗은 듯하다는 뜻이다. 삼신산(三神山)이란 이름도 있다. 하늘에서 보면 세 개의 봉우리로 나뉘는데 각 봉우리를 바다와 하늘, 땅의 신이 관장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 위에 곧추선 기암들의 모양새를 보자면 꼭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약초섬으로도 불린다. 기원전 210년께 중국 진시황의 방사였던 서불이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해금강에 반해 돌아가지 않고 머물렀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해금강 옆 우제봉엔 ‘서불과차’(徐市過此)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서불과차는 ‘서불이 이곳을 지났다’는 뜻. 어린 남녀 3000여명과 함께 우제봉 일대에 머물던 서불은 절벽에 ‘서불과차’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런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하필 암벽에 새겨진 글씨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해금강은 뭍에서 보는 것과 바다에서 보는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둘 가운데 진면목을 꼽으라면 당연히 바다 쪽에서 보는 풍경이다. 배를 타고 가며 보는 해금강은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 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사자바위, 부처바위 등 기암괴석들이 코발트 블루의 바다 위에 즐비하다. 특히 사자바위 위로 해가 뜨는 모습은 TV ‘애국가 영상’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금강마을과 도장포, 학동, 구조라, 와현 등 거제도 곳곳에서 해금강을 돌아보는 유람선이 출발한다. ●대병대도 등 한려수도 섬 한눈에 ‘바람의 언덕’ 해금강 들머리의 ‘바람의 언덕’은 탁 트인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맞은편의 신선대 풍경도 빼어나다. 멀리 대병대도, 소병대도 등 한려수도의 섬들이 보석처럼 떠있다. 코발트빛 바다 위로는 수많은 어선들이 분주히 오간다. 멸치잡이 배들이다. 보통 선단을 이뤄 멸치를 잡는데, 어군 탐지를 위한 어탐선 1척과 쌍끌이 그물로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는 가공선 등 5~6척의 배가 1개 선단을 이룬다. 많을 때는 두어 개의 선단이 동시에 조업하는 경우도 있다. 이맘때만 볼 수 있는, 역동성이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옛 사람들이 ‘혁파 수도’라고 부른 홍포 바다 거제 바다는 웅혼하다. 특히 남쪽 홍포의 빨려들 듯 망망한 바다는 거제 바다의 본성이라 할 만하다. 이 모습 엿볼 수 있는 곳이 여차 해변에서 홍포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다. 거리는 3.5㎞ 정도로 길지 않지만 담고 있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세 곳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옛사람들이 혁파(赫波)수도, 혹은 적파(赤波)수도라 불렀던 서정적인 홍포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팁 하나. 해안도로 아래에 색다른 풍경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몇 곳 있다. 홍포 바다를 자신만의 것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곳들이다. 들머리가 꼭꼭 숨겨져 있어 외지인이 찾기는 쉽지 않지만 방법은 있다. 현지인들의 차가 주차돼 있거나, 사람이 오간 흔적을 따라가면 된다. 숲을 헤치고 내려가면 해안도로에서 볼 수 없었던 거제 바다와 만날 수 있다. 낚시인들이 알아 둘 것도 있다. 지세포 바다 위로 교량 형태의 낚시공원이 조성돼 있다. 누구나 쉽게 낚시 포인트에 접근할 수 있다. 인근 낚시점에서 낚싯대도 빌려준다. 맨손으로 가도 서너 시간가량 바다와 놀다 올 수 있다. 주차장 쪽에는 캠핑 사이트도 구축돼 있다. 발걸음을 재촉해 산으로 간다. 계룡산 안부 어름에 있는 고자산재가 목적지다. 거무튀튀한 폐허 너머로 지는 해가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곳. 계룡산은 거제도 중심부에 우뚝 솟은 산이다. 정상 못 미친 곳에 한국전쟁 때 쓰였던 미군 통신대 건물의 잔해가 남아 있다. 옛 통신대 건물이 길게 땅그림자를 남길 때쯤 용광로처럼 타올랐던 태양도 뉘엿뉘엿 다도해의 섬들 사이로 빨려들어 간다. 이 모습이 더없이 장엄하고 화려하다. 고자산재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다. 같은 장소에서 해돋이 장면도 마주할 수 있다. ●장승포항서 5㎞ 떨어진 지심도 동백숲의 자태 마지막으로 지심도를 덧붙이자. 거제 여정에서 가장 ‘깜놀’했던 섬이다. ‘동백섬’이란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지만, 고백하건대 늙은 동백 우거진 숲이 그리 깊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지심도는 거제 장승포항에서 5㎞ 남짓 떨어져 있다. 둘레는 1.5㎞ 정도. 섬 안에 후박나무 등 37종의 식물이 뒤섞여 자라는데 10그루 가운데 7그루가 동백이다. ‘7할’이 동백숲인 지심도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역시 동백꽃이 봉오리째 뚝뚝 떨어지는 봄이다. 그런데 진초록으로 반짝이는 여름날 동백 터널의 자태도 그에 못지않게 곱다. 늙은 동백들이 이끼 낀 가지를 뒤틀고 선 모습은 괴기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슬슬 걸어 섬 한 바퀴 도는 둘레길 코스도 추천 지심도 선착장에서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섬 둘레길이 나온다. 거리는 3.7㎞ 정도.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 길이다. 높낮이가 별로 없는 순탄한 길이어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돌아볼 수 있다.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섬 곳곳에 아픈 역사의 흔적도 스몄다. 일제강점기 때의 포진지와 탄약고, 서치라이트 보관소, 욱일기 게양대, 방향지시석 등 일본군이 주둔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글 사진 거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55) →가는 길:통영대전고속도로 통영 나들목으로 나가 거제 방면 국도 14호선을 타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최근엔 거가대교를 이용해 부산과 거제를 묶어 여행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장승포에서 14번 국도를 따라 지세포∼와현∼구조라∼해금강 방면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다. 해금강을 지나 다포삼거리에서 여차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왼쪽 길로 접어들면 여차∼홍포 해안도로와 연결된다. 여차∼홍포 해안도로는 비포장도로와 시멘트 포장도로가 뒤섞였다. 승용차로도 갈 수 있다. 계룡산 통신대 유적지는 장승포에서 상동동 방향으로 가다 용산마을에서 좌회전해 임도를 따라 오른다. 역시 군데군데 비포장도로가 섞였지만 승용차로 오르는 데 문제는 없다. →맛집:요즘 거제의 이색 먹거리로 멸치가 꼽힌다. 지세포와 외포항 일대에 멸치쌈밥 등 요리집들이 몰려 있다. 거제멸치쌈밥(682-0317), 양지바위횟집(635-4327) 등이 이름났다. 거제포로수용소 옆 백만석(638-3300)은 멍게비빔밥, 장승포의 항만식당(682-3416)은 시원한 해물뚝배기를 잘한다. →잘 곳:가족 단위 여행객이라면 지세포의 대명 거제 마리나 리조트(733-7333)를 권할 만하다. 516개 객실이 전부 ‘오션 뷰’다. 요트 계류장인 ‘마리나 베이’도 운영한다. 피싱투어, 선셋투어, 요트투어 등을 할 수 있다. 워터파크 ‘오션베이’도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인기다. 야외 파도풀, 부메랑고 등 어트랙션 시설 면에서 수도권 대형 워터파크 뺨치는 규모다. 와현해수욕장에 있는 리베라 호텔(730-5000)도 계단을 통해 바다와 연결된다.
  • [열린세상] 정치의 본령/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열린세상] 정치의 본령/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

    영국 현대정치사에서 유례없는 감정싸움의 양상을 보였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소동도 일단락됐다. 잔류 편에 섰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물러나자 예상을 깨고 탈퇴 캠페인을 이끌었던 정치인들이 모두 당권경쟁을 포기하거나 중도 탈락했고, 잔류파에 속했던 테레사 메이 전 내무장관이 새 총리가 됐다. 브렉시트라는 슈퍼바이러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는, 마침내 그 환호의 주역들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안겨준 셈이다. 실제로 국민투표가 끝나고 운동이 현실로 되면서 탈퇴 진영을 달궜던 반이주민과 주권회복의 구호는 브렉시트가 몰고 올 경제적 파장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 앞에서 하루아침에 모호하고 무력한 외침이 됐다. 탈퇴를 선동했던 주역들이 일제히 몸을 사리며 볼멘소리를 한다거나, 메이 총리가 탈퇴절차를 규정한 리스본조약 50조를 차마 발동시키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이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다. 이주민과 주권문제는 실은, 시작부터 그리고 투표 후에는 더욱 명료하게, 경제문제와 맞물렸던 것이다. 종교·인종·계급·지역 등 사회적 갈등의 요인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인종문제, 북아일랜드 종교 내전, 스페인의 카탈로니아와 바스크 분리주의운동, 이탈리아의 남북문제 등이 보여주듯이, 현실적 갈등의 배면에는 경제적 이해관계, 차별, 불안이 일관되게 자리잡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흑백문제는 계급문제”라고 단언했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슬람국가(IS)에 의한 프랑스 성당테러를 두고 “이것은 전쟁이되, 종교전쟁이 아니라 돈의 전쟁”이라고 즉각 규정하고 나섰다. 정치의 책무가 ‘이미 존재하는’ 갈등들을 평화적으로 수렴, 조절해내는 데 있다면, 갈등의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제어·완화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일차적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말하자면 정치의 본령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드는 데’ 있는 것이다. 본래 불평등은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권력적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방치될수록 위아래 권력 자원의 편차는 커지기 마련이거니와, 그 효과는 누적적이어서, 가령 소득의 불평등은 소비뿐 아니라 의료·주거·교육·정치적 영향력 등 다양한 영역을 경유해 불평등을 재차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시장적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을 금과옥조로 붙들고 탈규제, 민영화, 긴축을 대안으로 내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된 지 어언 한 세대, 계급, 계층 간 불평등은 경제 체제를 가로질러 줄곧 심화됐다. 한국은 특히 심각해서, 2020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가장 불평등한 국가가 되리라는 예측도 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한국의 국민총생산(GNP) 대비 복지 지출 수준은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최하위 부근이며 OECD 비가입국인 중국에 가깝다. 서유럽 유권자의 대종인 복지 수혜자와 복지 공무원 규모가 모두 취약하니 복지 공약이 물거품이 돼도 이렇다 할 정치적 반향이 없다. 그래서인가 여전히 성장 타령이다. 분배는 총수요·노동의 질·사회통합 등과 맞물려 성장을 독려하거니와, 경제 선진국들은 전후의 폐허 위에서 복지 국가의 골격을 세웠고, 미국이 복지 국가가 아닌 이유를 성장 부족 탓이라고 강변할 대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장과 정치가 약자들을 핑퐁 하듯 내치는 형국이니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매년 조사 대상국가들 중 바닥 근처를 서성여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한국이란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는 증거는 넘친다. 오늘날 한국은 이혼율, 저출산율, 비정규직 비율, 산업재해율, 노인빈곤율, 자살률 등 핵심적 사회지표들에서 단연 OECD 선두를 달린다. 한국은 ‘국민소득 수준이 2만 5000달러를 넘어서면 불평등이야말로 제 사회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단일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는 학자들의 최근 가설을 가장 극명하게 확인해 주는 사례인 것이다. 무릇 힘 있는 자는 의지가 없고 의지가 있는 자는 힘이 없다고 했다. 누구나 정치를 욕할지언정 저마다 정치인이 되고자 안달하는 나라가 또한 한국이거니와, 한국 정치의 지분과 역량이 아직 웬만하다는 뜻일 게다. 문제는 상당 정도 의지의 문제다. 한국 정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청춘시대’ 한예리 한승연 박은빈 류화영 박혜수 “남자보다 강하다”

    ‘청춘시대’ 한예리 한승연 박은빈 류화영 박혜수 “남자보다 강하다”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극본 박연선, 연출 이태곤, 제작 드림 이앤엠, 드라마하우스)가 드디어 오늘(22일) 출격을 앞두고 있다. 청춘 5인방 한예리, 한승연, 박은빈, 류화영, 박혜수는 열정과 패기로 금토 안방극장에 청춘 바람을 일으킬까. 여배우 5인방에게 직접 관전 포인트를 들어봤다. ◆ 한예리, “다섯 청춘들의 흐뭇한 성장담” 요즘 청춘들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담아낸 생계형 철의 여인 윤진명을 맡은 한예리는 “다섯 청춘들의 이야기 색깔이 너무나도 다르다”며 “회차마다 긴장감 넘치는 사건들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들이 흐뭇하게 다가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 속에서도 힘겹지만 이겨나가며 성숙해지는 인물들을 지켜봐달라”라고 관전 포인트를 전했다. ◆ 한승연, “망설임 없이 내려놓은 여배우들, 망가져서 더 예쁘다” “뭐가 맛있을지 몰라서 다 먹었어”라는 말이 참 공감된다는 한승연은 “다섯 청춘들의 스토리를 다 즐기셔도 좋을 것 같다”며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자랑했다. “여자들끼리만 아는 리얼한 입담과 생활들도 볼 수 있다”며 “5인방 모두 망가지는 장면에서도 두려움이 없더라. 모두 내려놨다. 망가져서 더 예쁜 청춘들을 즐겨달라”고 당부했다. ◆ 박은빈, “여대생 리얼 라이프와 조우, 공감 선택에 따라 재미도 제각각” “이미 탈고된 12부 대본을 한 번에 읽었다. 멈추지 못했다”는 박은빈은 대본이 세련돼서 한 번, 완성도가 높아서 또 한 번 놀랐다고. “다섯 여대생들의 리얼 라이프를 보면서 어떤 캐릭터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재미도 달라질 것 같다”고 밝힌 박은빈은 의미심장한 프롤로그와 엔딩, 송지원만 알고 있는 신발장 귀신의 정체, 다음 회차를 궁금케 하는 스토리 전개를 관전 포인트로 꼽았다. ◆ 류화영, “여자들만의 사랑, 우정, 의리는 남자보다 강하다” “여자들은 복잡한 감정의 동물이다. 그래서 잘 삐지기도 하지만, 한 번 맺어진 인연은 무엇보다 끈끈하다. 남자보다 더”라고 말한 류화영. “셰어 하우스 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질투하다가도 끈끈한 우정과 의리를 나누는 다섯 청춘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다”라며 쿨내 나는 재미 포인트를 전했다. ◆ 박혜수, “묘한 분위기의 벨 에포크, 실제로 살고 싶도록 매력적” 셰어 하우스 벨르 에포크에 대해 박혜수는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쯤은 간직한 인물과 다음 이야기를 궁금케 하는 장치들 사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미치도록 매력적이다”라고 설명했다. “통통 튀는 다섯 청춘들이 서로에게 맞춰나가고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보며 나 또한 이곳에서 또래 친구들과 살고 싶어 졌다. 시청자분들도 그렇게 되실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편 ‘청춘시대’는 외모부터 남자 취향, 연애스타일까지 모두 다른 5명의 매력적인 여대생이 셰어하우스에 모여 살며 벌어지는 유쾌하고 발랄한 여대생 밀착 동거 드라마다. ‘연애시대’ 박연선 작가와 ‘사랑하는 은동아’의 이태곤 감독이 손을 잡았다. JTBC 금토 드라마로 오늘(22일) 저녁 8시 30분에 첫 방송된다. 사진=드림이앤엠, 드라마하우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페루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미스테리 벽화

    페루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미스테리 벽화

    잉카제국의 비밀을 안고 있는 페루의 유적 마추픽추에서 고대 벽화가 발견됐다. 새롭게 발견된 벽화는 위치와 색깔이 지금까지 마추픽추 인근에서 발견된 벽화와는 달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일(현지시간) 페루 마추픽추 국립공원에 따르면 최근 발견된 벽화는 2점으로 마추픽추 성채로 가는 길이 놓여 있는 파차마마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성채로부터 약 도보로 약 10분 지점이다. 1911년 마추픽추가 세상에 알려진 뒤로 지금까지 마추픽추에선 벽화 20점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번처럼 성채에 근접한 위치에서 벽화가 발견된 건 처음이다. 페르난도 아스테테 국립공원장은 "공중도시에서 이처럼 가까운 곳에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간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위치상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색깔도 지금까지 발견된 것과는 달랐다. 새로 발견된 벽화는 사람과 알파카 등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높이는 약 15cm 정도다. 특이한 건 검정색으로 그린 벽화는 처음이라는 점이다. 앞서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벽화는 모두 황토색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벽화에 따라 노란색에 가깝거나 오렌지색에 가까운 차이는 있었지만 계열은 모두 황토색이었다. 완전히 다른 색으로 성채에 가까운 곳에 그린 벽화가 특별한 주목을 받는 이유다. 이미 일각에선 벽화가 마추픽추 공중도시가 건설되기 전에 그려진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마추픽추 국립공원도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아스테네 원장은 "마추픽추가 잉카제국의 도시였고, 주변에서 발견된 무덤도 잉카문명의 것인 게 확인된 만큼 이번에 발견된 벽화도 잉카문명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전에 그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고 있다"고 말했다. 마추픽추 국립공원은 벽화의 기원을 확인하기 위해 국내외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진에게 벽화를 분석하도록 할 예정이다. 현지 언론은 "검은색 벽화가 마추픽추에 또 다른 미스테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사진=마추픽추 국립공원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W 이종석 한효주, 웹툰 속에서 아련한 눈맞춤..2회 본격 ‘멜로 도킹’

    W 이종석 한효주, 웹툰 속에서 아련한 눈맞춤..2회 본격 ‘멜로 도킹’

    ‘W’가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첫 포문을 연 가운데, 이종석 한효주의 ‘웹툰X현실’의 묘한 첫 도킹이 화제가 되고 있다. ‘철연주’ 이종석 한효주가 아련한 눈맞춤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연결고리임을 직감, 묘한 ‘감성 도킹’을 이끌어내며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가운데 방송 말미 공개된 예고편에서 두 사람의 본격적인 ‘멜로 도킹’ 장면이 공개돼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20일 첫 방송된 MBC 새 수목미니시리즈 ‘W(더블유)’(극본 송재정, 연출 정대윤, 제작 초록뱀미디어)에서는 강철(이종석 분)이 살고 있는 ‘웹툰 W’의 세상에 처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오연주(한효주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피범벅 강철과 그를 살리기 위해 의사의 소명을 다하는 오연주의 모습은 웹툰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교차를 보여주며 강렬하면서도 절묘하게 그려졌다. 오연주는 최고의 인기 웹툰 작가인 아버지 오성무(김의성 분)가 마지막 회 연재를 남겨두고 사라졌다는 소식을 아버지의 문하생 박수봉(이시언 분)에게 듣고 아버지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 곳에서 오연주는 오성무가 강철을 죽이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작업실을 둘러보던 중 피가 한껏 묻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지게 됐다. 그 곳은 바로 강철이 살고 있는 ‘웹툰 W’였다. 오연주가 떨어진 곳은 호텔의 옥상이었고, 그 곳에는 한 남자가 습격을 당한 듯 피를 철철 흘리며 누워 있었던 것. 정 많은 외과의사 오연주는 차마 그 순간을 피하지 못했고, 기지를 발휘해 볼펜을 분해한 뒤 흉곽(가슴)에 꽂아 기흉(공기 가슴증)을 막아내며 순식간에 처음 본 남자의 ‘생명의 은인’이 됐다. 그리고 오연주는 그 사람의 이름이 강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오연주는 강철이라는 이름을 듣자 마자 ‘웹툰 W’ 속 주인공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내 웹툰 속 강철과 의문의 남자가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강철은 피투성이가 된 채 들것에 실려나가면서 오연주를 아련하게 바라봤고, 오연주 역시 그런 강철과 눈맞춤을 하며 첫 도킹에서 서로의 얼굴을 인지하게 됐다. 특히 두 사람의 절묘한 도킹 장면은 ‘믿고 보는 작가’ 송재정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과 ‘믿고 보는 감독’ 정대윤의 마술 같은 연출력으로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으로 탄생됐다. 웹툰과 현실을 오가는 완벽한 싱크로율은 물론, 하나의 세계에서 만나는 강철 오연주의 첫 도킹 장면은 파격적이면서도 순간적인 섬세한 감정선이 드러나며 더욱 흡인력을 높였다. 또한 강철 오연주의 도킹은 ‘W’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로, 두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연결고리 속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 증명돼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 더욱 기대감이 증폭된 상황. 첫 회부터 휘몰아친 ‘철연주’의 강렬한 도킹으로 인해 ‘철연주’의 인연이 시작됐으며, 오연주 역시 강철을 바라보며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느꼈기에 궁금증은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강철이 자신의 ‘인생의 키’인 오연주를 찾는 모습과 함께 이를 웹툰으로 확인한 오연주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2회 예고편에서는 두 사람이 또 다시 도킹해 유쾌하고 발랄한 에피소드를 이어가며 이들의 멜로가 점점 진해질 것을 예고해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편 ‘W’는 현실세계의 초짜 여의사 오연주가 우연히 인기절정 ‘웹툰W’에 빨려 들어가 주인공 강철을 만나면서 이로 인해 스펙터클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할 로맨틱 서스펜스 멜로 드라마로, 오늘(21일) 밤 10시 2회가 방송된다. 사진=초록뱀미디어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전통음악연주가 김덕수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전통음악연주가 김덕수

    지난 15일 서울 사직동 언덕배기의 호젓한 곳에 자리한 광화문아트홀. 김덕수(64)는 그날 저녁 여의도에서 있을 공연을 앞두고 제자들 지도에 한창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무대에서 객석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나오며 건네는 그의 인사가 공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소리에도 능하다는 사실이 비로소 생각났다. 그는 요즘 조급증이 든다고 했다. “어느덧 내년이면 교수 정년입니다. 우리 제자들을 위해 제가 뭔가를 좀더 남겨야 할텐데….” -“왜 아이를 광대로 키우려고 하세요. 그냥 보통 아이들처럼 살아가도록 해주자고요.” 1957년 가을 추석날 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잠들어 있는 내 옆에서 대판 싸움을 벌이셨다.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남사당 예인이셨던 아버지는 자식들 중 한 명에게 ‘가업’을 물려주려 하셨고, 그 대상을 당신과 가장 닮아 있던 나로 점찍으셨다. 그 계획을 두고 아버지 편을 드는 사람은 집안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추석 다음날 아침,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대전의 집을 나서 조치원 난장으로 향했다. 남사당 공연에서 고깔 쓰고 무동 타며 꼭대기에서 재주 부리는 꼬마인 ‘새미’가 나의 첫 역할이었다. 전날 딱 2시간 연습한 게 전부였다. 다섯 살 아들이 당신 곁을 떠나 광대의 길로 떠나는 것을 어머니는 차마 바라보지 못하시다 대문을 막 나서는 순간 달려와 목도리를 정성껏 둘러주셨다. 어른이 될 때까지 모든 기억을 가져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집을 떠나는, 좀더 정확히는 엄마를 떠나는 데 대한 두려움과 더 큰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설렘 같은 것이 교차하며 마음이 요동쳤던 것만큼은 또렷이 머리에 남아 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아홉 남매 중 여섯 번째이자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난 나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끼와 신명을 형제들 중에 가장 뚜렷하게 물려받았다. 어머니께서 과일 등을 파는 잡화상을 하셨는데 네 살 때부터 “사과가 싸요, 싸”하는 식으로 춤을 추며 큰소리로 호객을 해서 동네에서 일찌감치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동료 남사당 어른들이 “덕수를 제대로 한번 키워보자”고 말들을 많이 하셨는데, 내가 1957년 추석 직후 갑자기 조치원 난장에서 데뷔하게 된 것도 명절을 쇠러 집에 오셨던 아저씨들이 아버지 옆에서 부채질을 한 결과였다. -남사당의 일과는 고됐다. 아침에 해 뜰 때 의상을 입으면 한밤중이 돼야 일이 파했다. 하지만 나는 힘든 줄을 몰랐다. 하루 종일 장구와 상모 같은 것들을 갖고 놀았는데 그저 좋을 뿐이었다. 누구에게 레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보고 듣고 만진 것들이 모두 내 머릿속에서 융합돼 몸으로 말로 발현이 됐다. 얼마 후 나는 가(歌),무(舞),악(樂),극(劇)에다 ‘살판’이나 ‘땅재주’로 불린 곡예까지 통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사당은 어떠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왕성하고 자유분방하게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서민과 함께 그들 속에서 애환을 달래주고 시대의식을 갖고 살아간 전문 예인 집단이다. 최고의 예인이 모여 있기 때문에 레퍼토리가 화려하고 다양했다. -어려서 내가 유명해진 직접적 계기는 일곱 살 때인 1959년 9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당시에는 전국 팔도 대표들이 면 단위부터 예선을 거쳐 군 대표, 도 대표가 돼서 실력을 겨뤘는데 해마다 출전을 했다. 보통은 대전이 속한 충남 대표로 출전했지만, 경기 대표로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는 도민증이란 게 있어서 그걸로 어느 도 출신인지를 확인했는데 어느 해 우승에 목이 마른 경기도 수뇌부에서 “충남의 김덕수에게 경기도민증을 줘서 우리 팀에 합류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들의 삼고초려에 못 이겨 그해 경기 대표 완장을 찼다. 물론 두둑이 용돈을 벌었다. -“나도 다른 애들처럼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 갖고 평범하게 학교 다닐 거예요.” 1965년 친구들이 다들 중학교에 들어갈 때 나는 재수를 시작했다. 지역 명문인 대전중학교에 꼭 가고 싶었다. 초등학교는 6년 동안 전체 출석 일수가 300일도 안될 정도로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이젠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초등학생 아들이 학교 교육을 너무 못 받는 게 걱정스러워 국어책이나 산수책을 들고 나를 틈틈이 지도했지만, 그걸로 대전중 입시를 통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도시락’은 내 팔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중학교 시험 준비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4월 말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서울 남산에 있는 국악예술학교(현재 국립전통예술중고) 교장 선생님을 만났다. 너 입학하면 정말 잘 키워주시겠단다.” -국악예술학교 입학과 동시에 재일교포 위문과 같은 해외 공연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국내를 유랑했지만, 중학교 때부터는 외국을 돌았다. 학교 소속으로도 나갔고 한국민속가무악예술단이나 리틀엔젤스 소속으로도 나갔다. 그중에서도 리틀엔젤스는 지도자 겸 단원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많았지만, 무대에서는 어린이처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그 또래가 만져보기 어려울 만큼 큰 액수를 월급으로 받았다. 리틀엔젤스의 경우 월 300달러를 줬다. 1960년대 중반 가치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간장 한 통이 30원이던 때였다. -해외 공연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한국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엔 ‘전쟁의 나라’, ‘고아의 나라’였다. 공연장이라고 해서 그런 정서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 나이에 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즈음해 국립민속예술단이 결성된 후부터는 해외 공연이 더욱 늘었다. 국제 박람회나 해외 한국상품 전시회 등을 위해 일본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까지 각지를 누볐다. -“공연무대를 어떻게 만들어주면 좋겠니?”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이셨다.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에서 한국관의 설계를 맡은 선생님에게 나는 “실내이긴 하지만 마당 분위기로 만들어주시면 더욱 신명 나게 놀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선생님과의 깊은 인연이 시작됐다. 나중에 내가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첫선을 보인 곳도 선생님이 만드신 소극장 ‘공간사랑’이었다. 1983년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 록펠러재단의 ‘아시아소사이어티’ 공연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과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천경자 선생님이 1968년 카페 떼아뜨르를 열었을 때 개관 공연을 했던 것도 나였다. 그렇게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을 만나고 교류할 계기들을 가진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런 속에서 광대로서의 기질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다. -“우리 학교의 이름으로 전통예술 공연을 해주십시오. 4년 전액 장학금을 드리겠습니다. 학과는 마음대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단국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업과에 71학번으로 입학했다. 전통예술 전공이 당시 단국대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도자기였다. 하지만 그건 내 적성이 아니었다. 그러다 2학년이 되자 학교 측과 갈등이 생겼다. “우리가 원할 때 활용하기 위해 장학금을 드리는 건데, 이렇게 학교에 붙어 있지를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장학금 지급을 중단하겠습니다.” 사실 나는 대학 들어가서도 해외 공연을 다니느라 국내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가뜩이나 학교 생활에 심드렁해 있던 터였는데, 학교 측 조치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이듬해 국악인 박귀희 선생님이 한국민속가무예술단 단장직을 나에게 물려주셨다. 우리 예술단 10명이 오대양 육대주를 돌며 무용, 연주, 농악 등 전통공연을 했다. 일본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2년여에 걸쳐 춘향전, 심청전 등 뮤지컬 공연도 했다. 나는 단장으로서 연출도 함께 맡았다. 우리 고전 스토리를 바탕으로 대본을 만들되 노래와 춤은 일본과 합작으로 구성했다. 우리 쪽에서는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김희갑씨 등이 공연에 참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전통예술에 위기가 찾아왔다. 서커스 등 다양한 외국문화와 TV 방송 프로그램, 스포츠 등이 확산되면서 과거에 비해 상품성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어르신 세대들이 갖은 노력을 했지만 대세를 돌이키기는 힘들었다. -이러다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사물놀이였다. 국악예술학교 2년 후배인 김용배(꽹과리)와 최태현(징), 이종대(북)와 뜻을 모았다. 그때까지 꽹과리, 장구, 북, 징의 4가지 필수 전통예술 타악기를 뜻하는 ‘사물악기’나 이를 다루는 사람을 뜻하는 ‘사물잽이’ 같은 말은 있었지만, ‘사물놀이’라는 명칭은 없었다. 우리 넷은 1978년 2월 공간사랑 공연장에서 웃다리 풍물가락으로 첫 연주를 했다. 미친 듯이 신명 나게 소리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다. “놀랍다”라는 찬사와 “이단이다”라는 비난이 함께 쏟아졌다. 어느덧 사물놀이가 탄생한 지 곧 40주년이다. 그동안의 공연 횟수는 국내외 5500회에 이른다. -서양과 동양의 음악적 구조가 다르다. 서양이 직선적이라면 우리는 곡선적이다. 저쪽이 ‘템포’, 즉 리듬의 빠르기의 개념이라면 우리는 굿거리장단과 같은 ‘장단’의 개념이다. 그 속에 북방민족 계열의 신명과 남방민족 계열의 신명이 녹아 있다. 사물놀이는 그래서 다양한 음악과 어우러질 수 있다. 다양한 형태로 콘체르토(협주)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로 빠르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서울시향과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오케스트라 콘체르토를 했고 그다음에 피아노, 실내악, 현악4중주, 브라스(금관) 등으로 협주 영역을 넓혔다. 재즈의 전설로 통하는 마일스 데이비스, 오넷 콜먼과도 협연했다.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재즈나 로큰롤 축제에도 두루 참가했다. -요즘은 많은 시간을 전공 교재 만들기에 쏟아붓고 있다. 공연은 일회성에 그치지만 교육은 길이 남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것을 정립하는 게 지금의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연평균 70회 정도는 공연을 하고 있다. 내년은 나의 남사당패 데뷔 60년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신설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가장 천시받던 연희를 아름다운 신명으로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연희과를 만들었고, 그 결과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훌륭한 전통예술 인재 양성의 기반이 되고 있다는 데 더없는 보람을 느낀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김덕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악 연주가다. ‘글로벌 광대’라고 불리는 걸 스스로 좋아한다. 다섯 살에 남사당 ‘새미’로 데뷔한 후 남사당패의 일원이 됐다. 일곱 살에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장구를 귀신같이 친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통령상을 받았다. 1978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꽹과리, 징, 장구, 북만으로 구성된 전통 타악기 연주회를 갖고 이를 ‘사물놀이’라고 명명했다. 현재 사물놀이패 한울림의 예술감독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교수로 있다. ▲1952년 대전 출생 ▲대전 신흥초, 국악예술학교(중·고교), 단국대 요업공학과 중퇴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은관문화 훈장 ▲대표곡 ‘어우름’, ‘길’, ‘덩더쿵’ 등 ▲음반 ‘난장-뉴호라이즌’, ‘김덕수 사물놀이 결정판’, ‘풍물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미스터 장고’ 등 ▲저서 ‘사물놀이 교착본 1, 2, 3’,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리다’ 등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거대 주상복합의 효시 유진상가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거대 주상복합의 효시 유진상가

    # 인왕산~중랑천까지… 15㎞ 물의 여행 인왕산에 비가 내린다. 서울 구도심을 향해 병풍처럼 열려 있는 동쪽 사면을 타고 흐르는 물은 수성동(水聲洞) 계곡을 따라 옥류동천이 되거나, 효자아파트(1969) 앞을 흐르는 백운동천을 이룬다. 이 두 갈래 물은 지금의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 인근에서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중랑천을 거쳐 서울숲 어귀에서 한강과 만난다. 서쪽 사면을 따라 흐르는 물은 무악재 정상을 기점으로 방향이 갈린다. 시내를 향해 남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계곡으로 내려온 물은 맞은편 안산에서 내려온 물과 만나 구도심 서쪽을 따라 흐르는 욱천, 즉 만초천이 된다. 그 물이 서대문 근처를 지나면서 부드럽게 굽이치는 위에 서소문아파트(1971)가 서 있다. 만초천은 서울역 서쪽을 지난 후 용산기지에서 흘러오는 지류와 만나 삼각지를 돌아, 용산 전자상가 아래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으로 흘러간다. 무악재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물은 홍제천으로 흘러들어간다. 평창동, 구기동 일대의 북한산, 그리고 부암동 일대의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섞인다. 홍제천은 서울 서쪽 지역을 굽이굽이 흘러 월드컵 경기장 인근에서 불광천을 만나 난지도 어귀에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서울숲으로부터는 무려 15㎞ 이상 하류다. 인왕산 정상에서의 작은 차이가 만들어낸 거리다. 실로 장엄한 물의 여행이다. 무악재에 걸쳐진 통일로와 유난히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고 불리는 홍제천이 만나는 지점에 장대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유진상가, 혹은 유진맨숀 등으로 불리는 주상복합 건물이다. 1970년 7월 11일에 사용승인을 받았으니 2016년 기준 만 46세가 되었다. 같은 나이면 건물이 사람보다 더 늙어 보인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이 건물도 예외는 아니다. # 물길 위에 세운 장대한 건물 서소문아파트는 하천 위에, 낙원빌딩(1969)은 도로 위에 지어져 둘 다 대지 지분이 없다. 홍제천 위에 세워진 유진상가도 마찬가지다.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라고 할 건축물 관리대장의 대지면적이 0이다. 게다가 위치상 홍제동이어야 할 건물의 주소가 홍은동 48-84다. 이 일대는 대체로 홍제천을 기준으로 홍은동과 홍제동으로 나뉜다. 유진상가는 엄연히 홍제동 쪽에 있으면서도 홍은동으로 분류되고 있다. 짐작에 이 일대의 홍제천이 홍은동으로 분류되어 있고, 유진상가는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이므로 주소지가 홍은동이 된 것이 아닐까.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홍제동과 홍은동이 뒤섞인 여러 개의 주소가 나오기도 한다. 현장에서 보면 과연 유진상가 전체가 홍제천 위에 지어진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상류 쪽에서 보나 하류 쪽에서 보나 적어도 남쪽의 A동 정도는 하천이 아니라 견고한 땅을 딛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초 하천 부지의 일부를 다시 되메웠다고 하면 이해가 된다. 마치 세상 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그 깊고 어두운 터널 안 어딘가에 단서가 있겠지만, 그 앞에서 기웃거리기만 했을 뿐 차마 들어가 볼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유진상가는 건축면적이 9667.57㎡에 달하는 대형 건축물이다. 길이가 220m, 폭은 44m 정도다. 건물이 너무 넓으니 주거가 들어가는 상부를 길게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중정을 두었다. 단일 건물로서 이보다 더 큰 경우는 지금도 손꼽을 정도다. 통일로변 정면을 보면 1, 2층이 상가고 3, 4, 5층이 주거인 것 같지만, 2층 상가는 통일로 변에만 일부 있다. 중정이 2층에 있고 그 양쪽으로 남쪽에 A동, 북쪽에 B동, 이렇게 각각 4개 층의 주거동 두 개가 있는 것이다. 즉 전체적으로 보면 1층에 상가가 있고 2층부터 5층까지가 주거다. 다만 1999년 내부순환로가 위로 지나가면서 B동의 4, 5층이 철거되었고 나머지 2, 3층에 서대문구 신지식산업센터가 들어가 주거 기능이 많이 축소되었다. 신지식산업센터라는 이름은 건축물 관리대장에 이 건물의 대표 명칭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유진상가나 유진맨숀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다. 현재의 유진상가는 원형과 다른 점들이 많다. 무엇보다 상층부가 철거된 B동의 경우 용도 자체가 사무공간으로 변하면서 리모델링되었다. A, B동의 각 가구는 어떤 방향을 보고 있었을까. A동의 경우 각 가구는 당연히 남향이고 중정에 면한 북쪽에 편복도가 있다. 문제는 B동이다. 당초 주거로 사용되던 시절 복도의 방향이 궁금하다. 남향을 선호하는 한국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구반포 주공 1단지의 상가아파트(1974)에서는 남향을 우선하여 신반포로 양옆의 입면이 서로 달라진 것을 연재 초반에 쓴 적이 있다. 유진상가의 경우 현재 모습만으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몇 개의 오래된 사진들로 추정해 보면 계단실 등이 중정을 중심으로 대칭의 배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남향 선호라는, 좀처럼 양보할 수 없는 강력한 개념을 포기한 매우 드문 사례일 것이다. 반대로 이 가정이 틀렸다면 중정에 바로 면한 2층 가구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고 입면을 조율하는 등의 처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건 설계자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한편 이 건물의 주거 가구 면적은 33평에서 68평 사이로 건립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대형의 고급 아파트였다. 그래서 정부와 법조계의 고위직들이 많이 살았다. 지금의 낡은 모습 뒤에는 한때의 화려했던 역사가 있었다. 이 시대 아파트 대부분이 그렇다. # 무지개떡 건축의 또 다른 실험장, 홍제동 일대 모든 건물이 그렇지만 유진상가 또한 특히 건물의 입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 지역은 서울 서북부 지역의 한 거점이다. 세검정로는 내부순환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 일대의 여러 권역을 굴비 꿰듯 엮어 주던 도로다. 통일로는 어떤가. 이전부터 서울에서 북한 지역을 지나 의주를 거쳐 대륙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로다. 이 도로변에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 그리고 그것을 헐고 독립문이 세워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두 개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유진상가가 있다. 지금도 통일로를 따라 지하철 3호선이 달리고 있으며 홍제역이 바로 인근이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면 물건이 모이고 그러다 보면 시장이 서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유진상가는 바로 옆의 인왕시장과 더불어 이 일대의 대표적 상권을 구성하고 있다. 비록 이전에 비해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상가 내의 공실률이 상당하지만 지역 거점으로서의 역할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인근의 원일아파트(1970)는 아예 인왕시장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경우다. 통인시장과 효자아파트(1969)의 관계를 연상케 하지만 일단 시장의 규모 자체가 동네 시장인 통인시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홍제동 일대는 유진상가를 기점으로 여러 개의 흥미로운 상가아파트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원일아파트를 비롯해서 안산맨숀(1972), 고은아파트(1975) 등이 그것이다. 서대문의 충정로 일대에 못지않은, 한국 무지개떡 건축의 살아 있는 실험장이 여기에 있다. 유진상가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는 안보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들이 있어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간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진상가가 지어지던 당시 남북한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인근 지역까지 내려온 사건인 1·21 사태가 1968년의 일이었으니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결과적으로 ‘서울 요새화’라는 이름하에 홍제동 일대가 수도권 서북부 지역의 방어 거점이 되었다. 유진상가의 특징인 가로변 필로티는 시가전을 대비하여 탱크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과 동시에, 청와대로 가는 길목인 세검정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건물 전체를 쉽게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었다고 전한다. 자유로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배후 거점으로 건설되었다는 일산 신도시, 그리고 또 다른 남침 예상 통로인 통일로변의 유진상가는 안보 논리가 지배하던 시절의 대표적 ‘도시 괴담’이었다. # 자연과 건축, 도시 인프라의 조화 홍제천 상류 방향에서 유진상가로 접근해 본다. 이 지점의 풍광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홍제천은 원래 건천이었으나 지하철역의 지하수를 퍼올려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수량이 넉넉한 하천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흐름이 느려지면서 거울 같은 수면 위에 유진상가와 그 옆 허공을 가로지르는 내부순환로의 반영이 어린다. 자연과 건축, 그리고 도시 인프라가 함께 어울려 만들어내는 장엄한 풍경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뚜렷한 미학을 담고 있다. 건물 동쪽에 있는 작은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거대한 중정이다. 중정 자체의 길이가 158m, 폭이 16m에 달한다. 그네가 있고 독립 건물로 구성된 관리사무소가 있다. 그 밖에는 에어컨 실외기, 화분,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박스들이 이 중정에서 발견되는 것의 전부다. 현재의 풍경 자체는 황량하지만 한 층 올려 만들어 놓은 이 중정 덕분에 주변 시장의 혼잡함과 소음은 거의 느낄 수 없다. 내부순환로의 자동차 소리만 아니면 아주 고요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남쪽의 A동은 아파트, 북쪽의 B동은 서대문 신지식산업센터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중정의 일상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중정의 서쪽에는 상가가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피트니스센터 사람들이 러닝머신 위에서 세검정로를 내려다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바로 통일로로 나온다. 인근 인왕시장의 열기와 대로변의 차량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 이것이 바로 도시다. 유진상가는 신성건설에서 지었다. 세운상가의 일부인 신성상가를 지은 바로 그 건설회사다. 신성상가는 1968년 5월에 완공되었고 유진상가는 1970년 7월 11일에 완공되었다. 거대 주상복합 건물이라는 점에서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대접은 완전히 다르다. 세운상가는 김수근과 그의 사단이 합작해서 설계한 나름 계보 있는 건물로서 지금 서울시가 공을 들여 재생을 시도하고 있다. 끊임없이 재건축 논의가 있어 온 유진상가의 미래는 아직 ‘준비 중’이다. 정면에 걸어 놓은 ‘홍제1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 투시도의 색은 점점 바래가고 있다.
  • [창간 112주년-파워! 코리아] 한국관광공사, 휠체어 걱정 없는 휴가지 25곳 여기!

    [창간 112주년-파워! 코리아] 한국관광공사, 휠체어 걱정 없는 휴가지 25곳 여기!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와 한국관광공사(사장 정창수)는 장애인, 어르신, 영유아 동반 가족 등 ‘관광 취약계층’의 관광 향유 권리와 각종 편의를 증진하기 위해 2015년부터 ‘열린 관광지’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 관광사업자 등이 사업비를 공동 투입해 다목적 화장실 개선, 장애인 눈높이에 맞춘 매표소 창구 조성, 완만한 관광지 접근로 조성 등 다양한 편의시설 개선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15년에는 경주보문관광단지, 순천만습지, 곡성섬진강기차마을,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 대구중구근대골목, 한국민속촌 등이 ‘열린 관광지’로 선정됐다. 섬진강기차마을의 경우 증기기관차에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해 장애인도 섬진강의 수려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올해는 25곳의 신청을 받아 서류, 현장심사를 거쳐 정동진모래시계공원, 보령대천해수욕장, 고창선운산도립공원, 여수오동도, 고성당항포관광지 등을 선정했다. 대천해수욕장의 경우 오는 24일까지 열리는 보령머드축제 기간 동안 ‘열린 바다 체험존’을 설치, 운영한다. 모래 위로 휠체어가 오갈 수 있는 ‘열린 카펫’과 장애인이 물에서 이용할 수 있는 ‘워터 체어’ 등을 준비했고 별도의 머드 마사지 체험 공간도 조성했다. 정부와 관광공사는 앞으로도 ‘장애물 없는 관광시설 및 서비스 가이드북’을 제작, 배포하는 등 ‘열린 관광지’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 계획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생명의 窓] 고요에 대하여/이재무 시인

    [생명의 窓] 고요에 대하여/이재무 시인

    도시의 소란 속에 시달리다 보면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오래전의 일상 풍경이 불쑥 망각의 수면 위로 떠올라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그 풍경들은 절기마다 각기 다른 형상으로 다가와서 애틋한 향수에 젖게 하는 것이다. 요 며칠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유년의 풍경들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실감을 내게 안겨다 주었다. 항시적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던 아이가 감나무 아래 서 있다. 지난밤 비바람에 시달리다 가지를 버린 풋감들이 패잔병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정적만이 무섭게 고여 가득 출렁거리고 있을 뿐 집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먼 산에서 출산 후 부쩍 여윈, 소쩍새 울음소리가 우련하게 들려온다. 둥근 고요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마당 구석에 머문다. 여기저기서 예의 까만 고요 새끼들이 몰려와 막 끓기 시작한 냄새를 물어 나르고 있다.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가장 세지는 때를, 나는 어릴 적 보냈던 시골에서의 여름 정오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소서나 대서 때의 정오에는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 대던 매미들이 폭염에 지치는지 울음을 뚝 그치고 동네 고샅을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돌아온 누렁이도 마루 밑 그늘 속으로 기어들어가 오수를 즐긴다. 애호박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흙 담장을 기어오르던 호박 줄기도 축 늘어져 있고, 담 둘레에 핀 맨드라미는 병든 닭 볏처럼 색이 바래져 있다.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습기를 말려 버린다. 심해처럼 깊은 정적 속에 세상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다 익은 살구 씨처럼 단단했던, 그 시절 성하의, 쥐 죽은 듯 고요한 세계가 문득 간절하게 그립다. 얼마 전의 시골에서 한 사나흘 묵을 때의 일이다. 바깥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와 보니 빈집 가득 달빛이 가득 들어차 출렁이고 있었다. 마당에, 뜰 방에, 마루에, 헛간에, 빈방에 달빛은 고여 푸르게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달빛! 텃밭에는 때마침 장다리꽃들이 피었거나 피기 시작했는데 그 송이, 송이마다에도 달빛은 스미어 온 천지가 달빛 치마폭에 감싸인 은빛 세상이었다. 그 밤 나는 차마 불을 켜지 못했다. 행여 달빛이 놀라 달아날까 봐 달빛 모시느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던 것이다. 달빛으로 가득 찬 고요의 세계가 내 영혼을 세상 바깥 먼 나라로 데려다주었다. 그즈음 나는 또 한밤중 시골길을 걷다가 자전거 바퀴만 한 커다란 달빛이 앞산 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것을 보았다. 숨은 신이 밟아 대는 페달로 칠 부 능선을 느리게 굴러가는 달빛 은륜, 그 환한 달의 숨소리가 가루약처럼 마을의 지붕 위에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순간, 달의 살찐 궁둥이가 어찌나 탐스럽게 보이는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더듬어 대고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갑자기 수확철 도리깨질에 쏟아져 내리는 깨알 웃음소리가 까르르 까르르 들려왔다. 놀라서 둘러보고 올려다보니 창공에 총총총 떠 있는 별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슬쩍 손모가지를 거두어들였다. 고요가 멀쩡한 나를 추행범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요는 힘이 세다. 제 주장을 하지 않아서 늘 소음에 시달리고 주눅이 들고 내몰리는 것 같지만 고요가 패배한 적은 없다. 제풀에 지쳐 소음이 나뒹굴 때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고요다. 혼자 있어도 내면이 시끄러운 사람아, 고요가 그립지 않은가? 우리의 본향, 생의 맨 나중에 닿아야 할 고요의 나라.
  • [월드피플+] 뇌 기형 딛고 감동의 생존… ‘미러클 베이비’

    [월드피플+] 뇌 기형 딛고 감동의 생존… ‘미러클 베이비’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뇌의 일부가 머리 위쪽으로 솟구쳐 있었다. 탄생의 기쁨과 삶의 희망을 주변에 안기기 전에 곧 사그러질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2015년 10월 31일, 미국 보스턴에 사는 요더 부부는 자신의 둘째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으로 가면서 차마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했다. 앙증맞은 카시트도, 기저귀도, 젖병도 준비하지 못했다. 아기 이름은 '벤틀리'로 지었지만, 출산 뒤 곧 장례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암울함만 가득했을 따름이었다. 벤틀리의 엄마 시에라 요더가 임신 5개월째, 뱃속 아기가 뇌낭류(encephalocele)라는 희귀병에 걸렸음을 알았다. 아기의 뇌가 두개골 밖으로 자라나와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더라도 출산 직후 곧바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고, 낙태를 권했다. 고뇌를 거듭한 끝에 그들은 결정했다. 낙태 없이 아기를 그대로 낳기로 말이다. 시에라는 "단 한 시간일지라도 아기를 꼭 만나고 싶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결과적으로 의사들은 틀렸다. 7개월 동안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낸 벤틀리는 현대의학이 생명을 섣불리 다뤄서는 안됨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벤틀리가 펼치는 희망과 감동의 사연을 보도했다. 벤틀리는 얼마 전 튀어나온 뇌를 두개골 안으로 집어넣는 사상 초유의 수술을 받았다. 보스턴아동병원의 성형외과는 벤틀리의 두개골 구조를 3D 입체모형으로 제작한 뒤 벤틀리에게 적합한 수술 방법을 찾았다. 벤틀리의 두개골을 꽃잎이 열리는 방식으로 절개해서 돌출된 두뇌를 집어넣을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말할 필요 없이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수술이다. 이미 목숨을 걸고 태어난 벤틀리와 요더 부부로서는 다시 한 번 삶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감행했다. 수술은 성공했다. 시에라는 "수술을 마친 뒤 5시간이 지나 아이가 깨어났는데, 처음 만난 순간 벤틀리가 우리를 또렷이 쳐다보고 있었다"면서 "가만히 누운 채 찡얼거리지도 않았다"고 당시의 벅찬 감정을 표현했다. 수술을 마친 뒤 한 달이 흐름 지금, 벤틀리는 생글생글 웃음짓고, 여느 아기처럼 옹알이를 하고, 우유를 빨아먹는다. 앞으로 어떻게 걷고 말할지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미러클 베이비' 벤틀리의 두 번째 희망가는 다시 불려지고 있다. 사진=유튜브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열린세상] “아가,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릴 때” 이제 YS, DJ를 보내드리자/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열린세상] “아가,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릴 때” 이제 YS, DJ를 보내드리자/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보배섬. 이름값을 한다 싶었습니다. 꼭 20년 전 국내를 배낭여행하던 중에 전남 진도에 들렀을 때 인상입니다. 둘러본 미술관만 운림산방을 비롯해 섬 안에 서너 개였습니다. 석양도 일품이었습니다. 더하여 전혀 기대 밖의 조우. 읍내에서 상여 나가는 장면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풍경. 상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전해, 꼴까다 마더 하우스에서 자원봉사해 보자 하고 인도 간 길에 얼마간 배낭여행을 하는 중에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들것에 시신을 둘러메고 간다는 묘사가 어울릴 것 같던 장례길 장면들과 오버랩됐습니다. 어둡지 않고 가볍고 조금은 왁자한 분위기였습니다.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생을 받으리라는 믿음 혹은 바람 탓이었을 것입니다. 5분쯤은 됐을까. 극장 안에 불이 들어온 후에 그리 오래 자리를 지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올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을 관람하고서입니다.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스크린에 이름이 다 소개될 때까지 앉아 있는 게 그분들에 대한 마음의 일단을 표현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라도 함께했다는 위안을 삼고 싶었을 것입니다.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김선우 ‘퉁소’) 그랬습니다.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으로 몸 받아 나서 차마 겪어 내지 못할, 겪기는커녕 보고 듣는 것을 참아 내기에도 힘든 비탄과 절망, 분노와 죄의식의 한 시대를 이런 식으로 잘 작별하는 느낌이었다 할까요. “아버지마저 보내 드리자” 하시며 물가에서 옷가지와 신발을 태우면서 “좋은 세상으로 가시는 갑다. 냉갈(연기)도 하나 안 나는 것 본께” 하시며 물기 마른 목소리로 덧붙이던 어머니 말씀. “없는 형편에 자식들 대학 공부시킨다고 당신 손으로는 일평생 아이스께끼 하나 사 잡숫지 못 하더니.” 며칠간 생전에 함께했던 기억을 더듬어 혼자 남도를 다니던 중에 큰어머니댁을 들렀습니다. 구순 연세에 장례에도 참석 못하신 큰어머니께서 보자마자 하신 말씀, “아가,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릴 때….” 세상 버릴 때. 아! ‘그렇게 모질고 신산스런 시대에 한 세월을 살아 내시며 자식들을 성장시키고 뒷날 세상은 자식들 몫으로 맡기고 훌훌 털고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구나.’ 한결 편안했습니다. 생의 강을 건너는 이와 작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개인이 아니라 시대의 인연과 작별한다는 것은 더더욱 간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역사적 성취를 이룬 인물과의 작별 방식은 ‘계승’과 ‘극복’의 측면이 동시에 있습니다. 그중에 우위는 ‘극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공로의 부정이 아니라, 그래야 역사의 고만고만한 반복이 아닌 새로운 도약과 상승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월 항쟁으로 변곡점을 성취한 민주화 운동을 두고 말하면 적어도 세 그룹과 역사적 작별을 감내해야 합니다. 역사적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작별해야 합니다. 또 역사적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작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로서 86세대를 극복해야 합니다. 각각의 작별사 제목으로 ‘극복’에 방점을 두고 이리 적으면 어떨까요. ‘YS, 그 담대함에 대하여: 당신의 결단, 다수의 혼돈 혹은 파탄’ , ‘DJ, 그 주도면밀함에 대하여: 당신의 집념, 다수의 혼란 혹은 타락’, ‘86세대, 슬픔 혹은 보수화의 함정: 그대들의 애달픈 영광과 콤플렉스, 역사의 실종’ 6월 항쟁의 산물인 87년 체제를 넘어선다는 것이 단순히 권력 구조를 변경하는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산업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시기를 관통해 극단적 성장제일주의 또는 맹목적인 결과지상주의와 함께했던 20세기적 근대화를 넘어 선진화·인간화라는 21세기 사회 발전 단계의 성숙한 도약을 위한 광범위한 사회 세력 혁신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진정 YS와 DJ를 따르는 이들이 이 시기에 할 일은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기득권을 위해 대중의 추억을 볼모로 YS를 팔고 DJ를 파는 저열한 행태가 아니라, 다음 단계 역사적 성취를 위해 그분들을, 그분들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찰하고 분투함이 백번 천번 마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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