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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뒷골목 맛세상] 화성의 봄나들이

    [뒷골목 맛세상] 화성의 봄나들이

    봄에 느끼는 꽃이며 생명에 대한 신비는 결코 젊은이들의 소유가 아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무심한 꽃다지 한 송이에도 지나온 70,80년의 시간이 통째로 들어있는 것을 느끼며, 그 생명의 신비가 너무 깊어서 차마 만지지도 못하는 저 노인의 떨리는 손길을 보아라. 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이는 이미 꽃다운 나이를 지나 몸과 마음 모두가 더이상 꽃일 수 없는 저 노인일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이야 제 자신이 꽃다운 나이이므로 어디 꽃의 신비며 그 깊이에 눈 돌릴 까닭이 있으랴. 고작해야 단 한번의 일별로 건듯 부는 바람처럼 지나치든가 아니면 살풀이하듯이 함부로 꺾고 짓뭉개려 들 터이다. 만일 그대에게 지난 겨울을 안녕히 넘기고 뜰에 있는 매화 옛 등걸처럼 또다시 봄을 맞이하는 어른이 있다면, 어떤가, 하루쯤 좋은 날을 받아 함께 봄맞이 길을 떠나보는 것이. 그리하여 햇살 바른 언덕에 자리를 펴고 앉아 준비해온 다기(茶器)에 물을 끓여 어린 쑥잎이며 냉이의 선연한 향기를 음미해보는 것이. 나이든 어른과 함께 하는 얼마간 고풍스러운 봄맞이에서 아직 젊은 그대는 지금껏 전혀 몰랐던 꽃이며 생명의 신비에 번쩍,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른다. ●하루해의 봄맞이 여행으로 나무랄 데 없어 경기도 화성은 서남쪽에서 반달 모양으로 수원을 감싸 안은 채, 비산비야로 처녀의 젖가슴처럼 부드러운 구릉을 잇따르며 서해안을 향해 사뿐한 발걸음을 옮긴다. 이를테면 화성의 어디에 자리를 잡고 앉아도 거칠거나 위압적인 산야는 눈에 뜨이지 않아, 나이든 이를 위한 하루해의 봄맞이 여행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는 경관이다. 태안 일대의 목장지대며 보통 저수지와 봉담 저수지를 위시해서 군데군데 빼어난 저수지들이 에메랄드처럼 박혀있는가 하면 남양이며 송산을 거치면 마침내 서해안에 이르러 제부도의 바닷길이 소위 모세의 기적으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어디 경관뿐이랴. 남양반도며 조암반도를 위시한 화성 일대의 차진 갯벌에서는 예부터 꽃게며 낙지, 굴을 위시한 해산물이 풍성해서, 하다 못해 걸신 걸린 듯 먹어대는 이를 일러 ‘남양 원님 굴회 마시듯 한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발안IC로 빠지거나 수원이나 오산에서 국도를 따라 발안으로 오다 보면 발안 네거리가 나오고 바로 이어 왼쪽으로 양감면으로 가는 43번 국도가 기다린다. 이 길을 따라 10분쯤 달리면 양감면사무소 못 미쳐 오른편에 뽕나무골(031-353-6220)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음식점이 있다. 일찍이 서울 농대 잠사학과를 나와 누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 농촌진흥청 잠사곤충연구소 소장을 거쳐 대한잠사회 회장을 역임한 임수호씨가 애오라지 누에로 한길만을 걸어온 끝에 일구어 놓은 필생의 꿈과 노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뽕나무골은 임수호씨가 30년 가까이 무려 2만여평에 걸쳐 일구어 놓은 실크타운이라는, 누에농장·누에박물관·감실 및 누에사육장·곤충생태관찰관·자연허브온실·뽕나무밭·오디밭·회화나무 삼림욕장·단풍나무터널·장미터널 산책로·실크로드 산책로·누에 산책로·잔디광장 등 다양한 시설 속에 부속된 식당이다. 기실 뽕나무골이라는 식당이 우선이 아니라 누에에 미쳐서 일생을 바친 한 사람의 누에에 대한 꿈이 우선 돋보이는 곳이다. ●누에박사가 일구어 놓은 필생의 꿈 실크타운 누에로 만드는 명주 옷감이 중국산 싸구려에 밀려 사양길을 걸으면서, 우리 누에산업은 뽕잎이며 누에를 중심으로 한 기능성 식품으로 방향을 바꾼 듯하다. 누에박물관에는 누에며 뽕나무를 원료로 하여 생산한 여러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뽕잎차·뽕잎비누·실크파우더·동충하초·오디술·뽕나무뿌리와 동충하초를 원료로 한 고급술 불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 모든 제품에 대한잠사회 회장을 지낸 임수호씨의 손때가 들어있는 것은 물론이다.60대의 그이는 불행히도 몇해 전에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면서 잠사회의 일을 놓아두고 이곳 실크타운에서 요양중이다. 중국에서 진시황 때부터 불로초로 알려졌던 동충하초는 겨울에는 벌레로 있다가 여름에는 버섯이 된다는 뜻으로, 원래는 티베트지방에서만 자생적으로 나오는 신비한 약용버섯이었다. 이 동충하초를 우리의 경우 누에를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생산해낸 것이다. 버섯의 종균을 누에에 뿌려놓으면 몸속에 잠복하여 누에의 단백질을 영양원으로 발육하면서 겨울을 지내다가 이윽고 여름이 되어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면 마침내 누에에 자실체를 만들면서 버섯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실크타운에서 뽕나무골을 직접 운영하는 이는 임수호씨의 부인되는 김성숙씨인데, 역시 뽕나무골이라는 이름답게 뽕나무며 누에와 연관된 요리가 적지 않다.1인당 1만 5000원인 뽕나무골 한정식에는 뽕잎전·뽕잎장아찌·뽕잎나물·누에고치의 가루를 원료로 한 실크파우더로 숙성시킨 돼지갈비찜에서부터 돼지보쌈·조기구이·게장·가오리찜·된장찌개·고추전·물김치·시래기무침·느타리버섯무침·참나물·숙주나물·해파리무침·조개젓 등 한 상 가득히 나온다. 그러나 뽕나무골의 비장의 메뉴는 동충하초오리백숙이다. 먼저 동충하초와 뽕나무뿌리를 오래 삶아서 육수를 낸 다음에 오리를 통째로 넣어 인삼·황기·대추·밤·엄나무·당귀 등의 한약재와 함께 푹 고아낸다. 만일 그대 내외가 어른 내외를 모시고 넷이서 봄맞이에 나선 길이라면 뽕나무골에서 한정식 2인분과 함께 동충하초오리백숙을 시킬 것을 권한다. 아이들이 한두 명쯤 딸렸어도 무방하다. 안녕하게 겨울을 넘기고 봄을 맞이한 어른들에게 보약 한 첩 지어준다고 여기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일 터이다. 오래 고아서 부드럽게 입안에 넘어가는 오리고기의 담백한 맛도 일품이지만, 동충하초에서부터 각종 한약재까지 어우러진 진한 국물로 쑤어낸 죽으로 입맛을 마무리 하고 나면, 세상살이의 무엇이 더 이상 부러우랴. 그대가 그렇듯 여유로운 눈길이 되어 뽕잎차 한 잔을 들고 문득 실크타운의 아름다운 경관을 돌아보면, 봄은 한 발 더 성큼 그대에게 다가와 있으리라. ●비장의 동충하초 오리백숙 보신용으로 제격 서해안고속도로 비봉IC를 빠져나와 306번 도로를 타고 송산면으로 오다 보면 사강리에 사강횟집거리가 있다. 그리고 사강횟집거리의 택시터미널 뒷골목에 마산횟집(031-357-5001)이라는 탁자가 6개밖에 안 되는 작은 식당이 숨어 있다. 마산횟집이라는 간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주인아주머니 되는 이난용씨가 17년 전에 처음으로 이곳에 마산횟집을 열었을 때 달았던 간판이 바로 마산횟집인데, 지금은 횟집을 하지 않으면서도 아예 간판을 바꿔달 생각이 없이 여전히 옛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다. 마산횟집이야말로 소문을 모르는 이라면 전혀 찾을 수가 없는 집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듯 숨어 있는 마산횟집을 찾아 멀리 서울이나 수원에서 허위허위 달려오는 이들이 있다. 일찍이 시인이면서 교육자로 수원이며 화성이며 오산 일대에서 오래 교육장을 지낸 김윤배씨도 애써 허위허위 먼 길을 찾아오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마산횟집의 메뉴는 놀랍게도 딱 한 가지다. 낙지연포탕. 남양만의 차진 갯벌에서 나는 커다란 산낙지만을 재료로 쓰는 낙지연포탕은 1인분에 2만 5000원이다. 뒷골목에 숨어 있는 위치며 허름한 실내며 17년간이나 바꿔달지 않은 간판 같은 것으로 보면, 낙지 두 마리의 연포탕 가격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낙지연포탕이야말로 조리하기에 가장 쉬운 요리가 아닌가. 실제로 마산횟집의 조리법도 다른 집에 비해 무슨 특이한 비법 따위는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맹물에 무를 삶다가 낙지를 산 채로 집어넣고 마늘과 소금을 넣어 끓인 다음에 대파와 후추를 넣어서 마무리하는 식이다. 사는 일이며 음식 만들어 돈버는 일에 별로 크게 마음 두지 않는 듯한 주인아주머니의 무심한 어투에도 무슨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한번 맛들이면 먼길 마다않고 찾는 마산횟집 “비법은 무슨 비법, 그냥 낙지가 생물이다 보니까 맛이 있는 게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번 마산횟집의 연포탕 맛을 들이면 그 맛에 연연해하여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마산횟집의 비법이라면 어쩌면 바로 주인아주머니의 무심한 마음씨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의 그런 무심함이 연포탕에 배어서 얼핏 다른 집에 비해 싱거운 것 같으면서도 차츰 맑고 시원한 맛이 가슴 저 밑바닥까지 깊게 스며드는 것인지도. 이런 맑고 시원한 맛이라면, 육류를 싫어하는 어른들께는 다시없는 요리일 터이다. 더군다나 원래 낙지 자체가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한데다가 타우닌 성분이 들어 있어 성인병에는 물론이거니와 나이든 어른들의 봄 입맛을 찾는 데는 적격이 아니랴. 마산횟집에서는 연포탕을 시키면 비싼 꽃게 간장게장이 무료로 무한정 나오는데, 간장게장을 좋아하는 이라면 연포탕보다는 싱검싱검한 간장게장만으로 실컷 배불릴 수 있다. 여기에 밑반찬으로 톳나물, 달래, 미나리, 표고버섯무침, 파장아찌, 멸치볶음, 김치가 손 큰 주인아주머니의 품성대로 풍성하게 나온다. ■창해상전 추억의 선창포구 발안에서 82번 도로를 타고 조암으로 빠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월문리 삼거리에서 332번 도로와 나누어진다. 이 332번 도로를 따라 끝까지 가면 선창포구다.1970년대 말 내가 어머니와 함께 월문리에서 살 때는 수원에서 발안을 거쳐 월문리며 선창포구로 가는 길은 아직 비포장도로였다. 하루에 서너 번 마을 앞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며 15분 가까이 가다 보면 마침내 선창포구였는데, 아아,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제방을 경계로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황량한 갯벌이라니! 제방 위에 아무렇게나 지은 낮은 지붕의 움막 서너 채와 함께 선창포구의 풍경은 흡사 세상의 끝에라도 온 듯 분위기였다. 그래서였을까. 아직 서른 살의 젊은 나이가 너무 무겁게만 여겨지던 나는 끝 간 데 없는 갯벌이며 낮은 지붕의 움막들이 마치 내면의 풍경인 양 전혀 낯설지 않아서 곧잘 선창포구를 찾았다. 그리고 어부들을 상대로 하는 움막 한 곳의 구멍가게에서 네 홉들이 소주와 새우깡을 사들고 제방 위에 앉아 자신의 내면에 있는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며 병나발을 불었다. 그렇게 낮술에 취해 기절이라도 하듯이 혼곤히 잠속으로 빠져들고는 했는데, 그러다 보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잠이 깰 때도 없지 않았다.‘어어, 안 죽고 살았네!’ 그이들은 나의 혼곤한 낮잠을 자살을 하려고 음독이라도 한 것으로 여긴 것이었다. 얼마 후 영화감독 이장호씨며 배창호씨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이장호씨도 첫마디로 꺼내었다.‘자살하기에는 더 없는 곳이네!’ 1980년대가 되어 수원에서 발안은 물론 선창포구까지 포장도로가 나자, 어느날 문득 선창포구는 횟집이며 생선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인근에서는 유명한 횟집거리가 되었다. 선창횟집·주곡리횟집·소문난 횟집·이어도횟집·판장횟집·진명횟집·서해바다횟집·군산횟집…. 나는 횟집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도 어쩐지 누군가에게 내 젊은 날의 소중한 장소를 빼앗겨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접어든 어느해에 다시 선창포구를 찾았더니 제방 너머로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던 갯벌은 물론 바다마저도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와 함께 횟집거리로서의 선창포구도 화려한 번성의 한때를 지나 경기가 시들해지면서 빈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횟집의 유리창 너머로 아프게 눈을 찔러오는 것은 갯벌 대신 생겨난 간척지의 생뚱한 풍경이었다.
  • 일진회 수렁에서 구해낸 내딸

    일진회 수렁에서 구해낸 내딸

    “어른들의 노력으로 일진회 아이들 전부가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1%의 아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온 나라가 일진회 문제로 떠들썩했던 지난 12일 새벽. 김영희(47)씨는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서울과 부산 교육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A4 4장 분량의 글에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 이모(16)양이 일진회에 들어가 방황했던 시절부터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모범생이 된 사연을 쓴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봤다. ●“일진회 아이들도 바뀔수 있다” 메시지 주고파 “일진회에 가담한 학생을 둔 부모들에게 ‘아이가 어른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일진회 문제를 감추고 덮어두기에 급급한 교육청과 많은 학교들이 반성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김씨가 딸의 일진회 가입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중 2때인 지난 2003년. 어릴 때부터 친구들의 인기와 다른 학부모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는 모범생이었던 딸의 일진회 가담은 충격이었다. 그는 “어릴 때 모델 활동을 했던 딸 애를 선배들이 입학하자마자 ‘얼짱’이라며 가입시켰다.”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에는 이미 일진회 ‘짱’을 맡고 있을 만큼 ‘세뇌돼’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단순히 ‘학교 내 불량서클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문에 보도된 일진회 얘기는 거의 사실” 일진회 아이들의 비행을 김씨는 딸을 통해 목격했다. 김씨는 “일진회 아이들은 줄담배를 피우고 소주 2∼3병은 가뿐히 마시는 것은 물론 남자아이들과 혼숙도 한다.”면서 “딸애가 다른 학교 조직의 일진회 아이들과 소위 ‘맞짱’을 뜨고 오는 날에는 이곳저곳 멍들고 다친 모습을 봐야만 했다.”고 말했다. 또 “필요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의리를 확인 하는 차원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서 “그 외 자기들끼리 모여 파티(일일 카페)를 여는 등 신문지상에 묘사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진회 얘기는 거의 사실”이라고 했다. 일진회의 실체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김씨는 “일진회는 서울 전역에 깔려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처음엔 놀이방을 운영하느라 바빠 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딸을 찾아 파출소를 들락거리며 충격으로 쓰러지기도 여러차례. 마음을 추스리고 딸을 되돌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 학교 잘못은 없다. 무조건 전학가라.’였다.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전학간 학교 선생님들 도움으로 정상생활 결국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딸을 연고도 없는 부산의 한 중학교로 보냈다. 이양은 전학간 학교에서도 문제 학생들과 어울렸지만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점점 바뀌었다. 선생님들은 ‘너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부터 잘해보자.’며 아이에게 용기를 주었다. 바이올린 등 특기를 살려주고 끊임없이 칭찬해주면서 마음을 바로 잡아주었다. 전교 꼴찌 수준에서 3학년 기말고사에서는 전교 24등, 반에서 2등을 할 만큼 성적도 향상됐다. 다시 서울의 한 고교로 전학을 온 이양은 지금 바이올린과 학업을 계속하면서 또래들과 같이 평범한 고교 생활을 하고 있다. 김씨는 달라지는 딸을 보면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예전 중학교 선생님들에게 대한 원망이 더 커졌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달라질 수 있는 아이를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 채 외면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본인이 알아서 일진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문제아는 전학 보내면 그만이라는 식의 학교 이기주의가 일진회 문제를 덮어둔 채 키워왔다.”고 꼬집었다. 문제를 부모와 함께 해결하는 학교와 교육청이 되기를 김씨는 바라고 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야구 100주년 사업단 박현식 위원

    야구 100주년 사업단 박현식 위원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황성 YMCA야구단’을 창단하며 이 땅에 야구가 뿌리내린 지 꼭 100년. 한국야구의 ‘원조 홈런왕’ 박현식(76)씨는 요즘 무척 바쁘다.‘야구 100주년 기념사업단’의 위원으로 위촉돼 지난 100년간 흩어진 야구 숨결을 한 곳에 담기 위한 방대한 작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막상 자료 수집에 나서니 빛바랜 사진들만 덩그러니 있을 뿐 역사의 숨결을 함께 한 스타들에 관한 자료도, 전시할 야구 관련 용품도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도 타고난 ‘강골’에 술·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덕인지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애마’인 스포츠레저 차량을 끌고 전국을 주유한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1974년 은퇴할 때까지 ‘한국의 베이브 루스’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공식 기록이 부실해 정확한 개수는 알 수 없지만 프로 출범 이전까지 개인 통산 100홈런을 넘긴 최초의 슬러거임에 틀림없다. 현역시절 병원에서 출퇴근하며 홈런포를 가동한 것은 유명한 일화.62년 농업은행(현 농협)의 4번타자로 불방망이를 휘두르던 박 위원은 실업연맹전 첫날 철도청 전에서 상대의 악의적인 투구에 얼굴을 맞아 기절했다. 이튿날은 ‘숙적’ 한국전력과의 경기. 병상에 누워 있던 그에게 문 틈으로 라디오 중계가 흘러나왔고,5회까지 농업은행이 3-4로 끌려가고 있었다. “차마 누워 있을 수 없었지. 병상을 박차고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야구장)으로 달려갔어. 경황이 없어 환자복을 언더셔츠처럼 받쳐 입고 유니폼을 덧입은 채 덕아웃에 나타나자 동료들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 9회초 2아웃에 타석에 들어선 그는 힘차게 배트를 돌렸고 공은 가운데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5-4 역전승. 다음날에도 경기 중간에 불쑥 나타나는 ‘환자복 선수’의 활약은 계속됐고, 농업은행은 우승을 거머쥐었다. 프로야구 출범 때도 그에게 역할이 주어졌다. 인천 연고팀을 준비하던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이 ‘왕년의 슈퍼스타’를 영입,‘예고된 꼴찌팀’의 지휘봉을 맡긴 것. 하지만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인천야구의 토대를 닦아달라.’는 구단주의 약속과는 달리 13경기(3승10패) 만에 해고돼 역대 최단명 감독이 됐다.83년 9월 한번 더 삼미의 감독대행을 맡았지만 8승1무11패의 기록을 남긴 채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병풍(兵風)’으로 뒤숭숭했던 지난해 프로야구판을 떠올리자 “중·고교는 물론 대학에 가서도 공부와 담을 쌓는 선수와, 기본기는 외면한 채 승리를 위한 잔재주만 가르치는 지도자만 있다 보니 병역기피 같은 엉뚱한 일을 벌이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프로야구 열기가 식은 것도 메이저리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재미를 못 주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제대로 기본기를 닦지 못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정도를 벗어난 치졸한 작전이 횡행하는 경기장을 어떤 팬이 찾겠냐고 반문한다. 그는 “‘야구 100주년 기념사업’이 의례적인 행사로 그치지 않고 과거의 교훈을 되살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밑거름이 돼야 새롭게 시작되는 한국야구의 두번째 세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삼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현대의 창업 정신을 강조한다. 현대는 남이 일궈놓은 기업을 인수하기보다는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주춧돌을 올렸다. 건설이 그랬고, 자동차가 그랬으며, 중공업이 그랬다.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이를 평생의 긍지요, 자랑으로 여겼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가서도 “사정상 어쩔 수 없었던 인천제철만 제외하고는 어느 하나 내 손으로 말뚝을 박고 길을 닦아 시작하지 않은 공장이 없다.”며 기업 강제 통·폐합에 맞섰을 정도였다. 1947년 5월25일 서울 중구 초동의 허름한 자동차 수리공장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내건 지 60여년. 삼성보다 10년 가까이 늦은 출발이었지만 현대는 이내 1위 기업으로 우뚝 섰고,‘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던 2000년까지 그 지위는 차돌만큼이나 단단했다. 이때 현대그룹의 자산규모가 87조여원. 계열사 수만 40개가 넘었다. 비록 그룹이 쪼개지면서 외형상의 규모가 작아지고 재계 서열은 떨어졌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전화위복’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동차(현대차그룹), 유통(현대백화점), 해운·제조(현대그룹), 조선(현대중공업), 금융(현대해상·현대기업금융) 등 각자 전문그룹의 길로 나서면서 경쟁력은 더 강화되고 동반 부실의 위험은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그룹들이 이제서야 계열분리 등으로 홍역을 앓는 동안 현대의 대표주자들은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KCC, 한라, 성우 등 창업주의 형제들이 이끄는 그룹들도 각자 독자영역을 굳혀가고 있다. 언뜻 봐도 느껴질 만큼 현대에 뿌리를 대고 있는 기업들은 유난히 굴뚝업종이 많다. 고용된 인원과 딸린 부품·협력업체가 많다는 얘기다. 국민경제 기여도로 따지면 현대가 여전히 1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또 한 가지, 현대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대정신’이다. 현대에는 일단 해보자며 덤비는 정신,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 때로는 비합리성을 낳기도 하지만 현대맨들은 이를 “맨바닥에서부터 기업을 일군 현대만의 저력”이라고 자부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진정한 기업가(起業家) 정신”이라고 불렀다. 제각각 ‘마이 웨이’를 걷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가를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기도 하다. ●담(淡)한 혼맥… 후한 연애결혼 다른 재벌가에 비해 현대의 혼맥은 의외로 소박하다. 낭만을 즐겼던 고 정 회장이 자식들의 연애에도 너그러웠던 영향이 가장 크다.‘왕 회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그 자신, 강원도 통천의 평범한 고향처녀(변중석)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했다. 슬하에 9남매(8남1녀)를 두고 동생이 일곱(한명은 어려서 사망)이나 됐지만 눈에 띄는 혼사는 손가락을 꼽는다. 직계가족 중에 굳이 꼽자면 다섯째아들 고 몽헌(MH)씨와 여섯째아들 몽준(MJ)씨를 들 수 있다. 몽헌씨는 신한해운 현영원 회장의 딸 정은씨와, 몽준씨는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 영명씨와 각각 결혼했다. 오랜 세월 재계를 주름잡았던 현대의 위상에 견줘 혼맥이 조촐한 데는 창업주의 성공과정과도 무관치 않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두 막노동꾼을 거쳐 대기업 총수에 오른 그는 살아생전 “세상에 공짜란 없다.”며 담(淡)한 마음을 갖자고 입버릇처럼 강조하곤 했다. 권력이나 부(富)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지만 굳이 혼사줄까지 대가며 공짜를 탐할 이유 또한 없었던 것이다. 정략결혼의 흔적이 적은 대신에 유난히 많은 손(孫)과 맞닥뜨리는 게 현대라는 집안이다. 이런 현대가 대(代)를 건너뛰면서 LG, 롯데, 한진, 이건, 비비안 등 내로라하는 그룹들과 사돈을 맺은 점은 흥미롭다. 현대가의 2세들이 ‘몽(夢)’자 돌림이라면 3세들은 딸이 ‘이(伊)’, 아들은 ‘선(宣)’자 돌림을 쓴다.4세는 ‘진’자(딸),‘창’자(아들) 돌림이다. ■ 현대의 핵심축 아들들 ●장남 몽필… 쌍용가와 인연 큰아들 몽필씨는 나이 50도 안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국영 적자기업 인천제철을 인수해 정상화에 여념이 없던 1982년 4월 어느날,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고속도로에서 그가 탄 승용차가 트레일러를 들이받았다. 이 때가 마흔아홉살. 수도여대 출신의 부인 이양자씨와 두 딸 은희·유희씨는 망연자실했다. 몽필씨가 떠난 지 한달 뒤, 정주영 회장은 동서산업 공장장이던 이영복씨를 사장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이씨는 몽필씨의 처남, 즉 이양자씨의 친동생. 졸지에 가장을 잃은 장남 가족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이양자씨마저 91년 위암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큰딸 은희씨는 최근 미국에서 귀국했다. 둘째딸 유희씨는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결혼해 두 아들(진석·진하)을 두었다. 지용씨는 현재 용평리조트 상무를 맡고 있다. ●2남 몽구… 글로벌 현대차그룹 리더 몽필씨의 죽음으로 사실상 집안의 장남 역할을 도맡아 한 이는 둘째아들 몽구(MK)씨였다. 유희씨가 결혼할 때 부모 역할을 대신 한 사람도 몽구씨 부부였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갤로퍼 신화’를 만들어낸 그는 기아차마저 인수해 지금의 현대·기아차 그룹을 이끌고 있다.2000년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출범한 지 몇 년도 안돼 그룹을 세계 6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출범 당시 10개였던 계열사 수는 28개로 불어났다. 그룹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17% 늘어난 85조원.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소비자 보고서(컨슈머 리포트)’는 최근 현대차의 뉴쏘나타를 세계에서 가장 결함이 적은 차로 선정했다. 갤로퍼 신화 때부터 MK가 강조해온 ‘품질 경영’의 힘이다. MK는 평범한 집안의 딸 이정화씨와 결혼해 3녀1남을 두었다. 큰딸 성이씨는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이자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고 선호영 박사의 아들 두훈씨와 결혼했다. 둘째딸 명이씨는 정경진 종로학원장의 아들 태영씨와, 셋째딸 윤이씨는 미국 MBA(경영학석사) 출신인 신성재씨와 결혼했다. 둘째사위와 셋째사위는 그룹 계열사인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현대하이스코 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막내이자 외아들인 의선씨는 지난 11일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룹내 직함은 현대·기아차기획총괄본부 담당 사장으로 기아차의 기획, 재무, 수출, 연구·개발(R&D) 등 핵심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일찍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정도원 강원산업 부회장의 큰딸 지선씨다. ●3남 몽근… 소리없이 유통명가 키워 셋째아들 몽근씨는 일찌감치 유통을 넘겨받아 현대백화점 그룹을 이끌고 있다.‘빅3’(MK·MH·MJ)에 가려 조명은 덜 받았지만, 묵묵히 외길을 걸으면서 소리없이 유통 명가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현대백화점, 현대H&S(非 백화점 계열), 현대홈쇼핑 등 주력 계열사를 토대로 지난해 5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문 최고경영자(CEO)들이 소신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매장을 둘러봐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위 형 몽구씨와는 고등학교(경복고)-대학교(한양대) 동문인 데다 선굵은 외모까지 비슷하다. 옛 현대그룹에서 고문을 지낸 우호식씨의 딸 경숙씨가 부인이다. 두 아들은 각각 부회장, 기획담당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큰아들 지선씨는 고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인 서림씨와 결혼했다. 둘째아들 교선씨는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큰딸 승원씨와 지난해 말 깜짝 결혼식을 올렸다. 교선씨의 결혼식에는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이 대거 참석해 모처럼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현대가는 한때 딸만 남기고 떠난 몽필씨의 대를 잇기 위해 지선씨를 양자로 입양하는 방안을 의논했었다. 유교식 법도대로라면 바로 아래 동생인 몽구씨의 아들을 입양해야 했으나 의선씨가 외아들인 탓에 지선씨가 선택된 것.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입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의 장례식때 의선씨가 ‘종손’ 자격으로 고인의 영정을 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외사위 희영… 천마산스키장 운영, 이건·비비안과 사돈 현대가는 자손이 많은데도 딸은 귀한 편이다. 외동딸 경희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 그러나 바깥 활동은 없다. 대신 남편(정희영)이 선진종합㈜ 회장이다. 공교롭게 고 정주영 회장의 여동생 희영씨와 이름이 똑같다.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1965년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입사 동기다. 조선 수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창업주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정주영 회장은 딸 경희씨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 희영씨를 도쿄법인 이사로 발령내 자연스러운 교제를 유도했다고 한다. 이후 희영씨는 조그만 해운회사(선진해운) 하나를 갖고 독립, 장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천마산 스키장은 오롯이 그가 독립해 만든 회사다. 외아들 재윤씨가 선진종합㈜ 상무다. 두 딸은 각각 이건그룹과 비비안그룹으로 시집갔다. 큰딸 윤미씨의 남편이 이건창호 박승준 상무, 둘째딸 윤선씨의 남편이 비비안 남석우 부회장이다. ●4남 몽우… BNG스틸 통해 부활 넷째아들 몽우씨는 숙명여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 이행자씨와 연애결혼했다.40대에 현대알루미늄 회장을 맡은 그는 그러나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1990년 4월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겨진 유족을 돌보는 일도 사실상의 장남 몽구씨의 몫이었다. 조카 셋을 모두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BNG스틸(전 삼미특수강)에 입사시켰다. 큰조카, 즉 몽우씨의 장남인 일선씨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BNG스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선씨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는 내로라하는 재벌가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일선씨의 부인은 구자엽 희성전선 부회장의 딸 은희씨다. 구 부회장은 구태회 LG전선 명예회장의 아들이자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조카이다. 일선씨의 동생 문선씨는 김영무 김&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딸 선희씨와 결혼했다. ●5남 몽헌… 못다 이룬 꿈, 현 회장이 힘찬 날갯짓 ‘비운의 황태자’ 몽헌씨는 1998년 그룹 공동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1983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설립해 4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끌어냈다.2000년에는 형들을 제치고 그룹 단독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 송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2003년 8월4일 서울 계동사옥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부인 현정은씨가 경영에 뛰어들었다.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황망히 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사업가 집안의 딸답게 배포와 합리적 리더십으로 1년 만에 그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현대상선, 올해 첫 흑자를 넘보고 있는 현대아산, 주가 1000시대의 수혜주 현대증권 등을 축으로 재계 10위권 진입(현재 19위)을 눈앞에 두고 있다.2010년까지 매출 20조원을 달성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2010’ 프로젝트를 가동중이다. 현 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이 직접 ‘점지한’ 며느리로도 유명하다. 현 회장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결혼 뒷얘기는 이렇다.“당시 현대상선 회장이던 아버지(현원영)를 따라 선박 명명식차 울산에 내려갔다가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명예회장(정주영)께서 나를 선보러 미리 내려오셨었다. 명예회장께서 중매를 서신 셈이다.” 큰딸 지이씨는 현대상선 재정부 대리로 근무 중이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고3 수험생이었던 외아들 영선씨는 졸업후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6남 몽준… 세계1위 현대중공업 ‘건조’ 지금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세계 일류 현대중공업의 뒤에는 기업인 몽준씨가 있다. 형제중에 학벌(서울대-미국 MIT 경영대학원)이 가장 좋아 ‘신문대학’(소학교만 졸업한 정주영 회장은 신문을 통해 지식의 대부분을 얻었다며 자신을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출신인 왕 회장이 유난히 예뻐했다는 몽준씨는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1988년 금배지를 처음 달면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시도했다. 경영은 CEO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주주로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만 내리고 있는 것. 지금도 현대중공업의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공식 직함은 5선의 국회의원이자 축구협회 회장.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현대중공업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10조원. 웬만한 그룹과 맞먹는다. 부인 김영명씨와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나 결혼했다. 큰아들 기선씨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올해 학사장교(ROTC)로 임관했다. 이로써 부자(父子)가 ROTC 선후배가 됐다. 두 딸 남이씨와 선이씨는 미국 유학 중이다.‘월드컵 베이비’로 유명한 늦둥이 아들 예선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우리나라가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을 최종 통과한 것을 기념해 이름을 ‘예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7남 몽윤… 현대해상으로 컴백 몽윤씨는 지난해 말 업계 2위의 손해보험회사인 현대해상의 등기이사 겸 이사회 의장으로 돌아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의 전격 복귀였다. 방카슈랑스(은행상품과 보험상품의 교차판매) 확대 시행 등 변화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1981년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씨와 연애결혼해 정이양과 경선군을 두었다. ●8남 몽일… 할부금융으로 내실 막내아들인 몽일씨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마친 뒤 현대상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현대기업금융을 차려 독립했다. 기업대출 등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다.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해 고등학생인 현선(영국 유학중)군과 중학생인 문이양을 두고 있다. ■ 현대의 또 다른 축 형제들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은 동생이기 이전에 창업 동지요, 사업 동료였다.6·25전쟁 직후 고령교(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 복구 공사를 덜컥 떠맡았다가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을 때, 내남없이 살던 집을 팔아 돈을 내놓은 것도 동생들과 매제였다.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한 집(돈암동)에 모여 살아야 했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독립해 각자의 그룹을 이끌고 있다. ●옛 영화 꿈꾸는 한라·성우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활동하던 첫째 동생 인영씨는 1953년 현대건설 전무로 입사하면서 경영에 본격 합류했다.75년 말 중동 진출 때 신중론을 펴 형과 이견을 빚을 때까지 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당시 독립해 만든 한라그룹은 한라건설·한라시멘트·한라중공업·만도기계 등을 거느리며 재계 서열 12위로까지 도약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자금난이 가중되면서 그룹이 부도나는 시련을 겪었다. 지금은 둘째 아들 몽원씨가 한라건설 회장을 맡아 재기를 꿈꾸고 있다. 큰 아들 몽국씨는 94년 아버지가 동생을 그룹 후계자로 지목하자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한때 배달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나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부인 이광희씨는 배달학원 계열인 한라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성우리조트·현대종합금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성우그룹은 둘째 동생 순영씨 일가가 이끌고 있다. 순영씨는 명예회장으로 물러앉고 2세 경영을 정착시켰다. 큰아들 몽선씨가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을, 둘째아들 몽석씨가 현대종합금속, 셋째아들 몽훈씨가 성우전자, 넷째아들 몽용씨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맡고 있다. 몽선씨는 사촌인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과 함께 정몽헌 회장의 부검을 임관하기도 했다. ●‘기계박사’가 일군 한국프랜지 자동차부품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의 김영주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의 유일한 매제다. 정주영 회장은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두 번째 자서전에서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며 매제를 ‘기계박사’라고 불렀다.1946년 정주영 회장이 미 군정에서 불하받은 토지에 ‘현대’(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를 처음 내걸었을 때, 감격적으로 지켜본 이도 영주씨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로부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기직종이던 운전기사 출신의 영주씨는 황해도 홀동광산에서 역시 운수업을 하던 정주영 회장과 뜻이 맞아 사업을 같이 도모했고, 매제까지 됐다. 부인 정희영씨는 2001년 정주영 회장이 노환으로 세상을 떴을 때 “대통령 한번 못해보고…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쩔거나.”하며 가장 서글프게 울었던 동생이다. 장남 윤수씨가 회사를 물려받아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으로 있다. 둘째아들 근수씨는 독립해 울산화학·퍼스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윤수씨의 장남 용석씨가 프랜지공업 계열사인 서한산업(자동차부품회사) 대표이사 사장이어서 3세 경영체제를 갖춰 가고 있다. 둘째아들 용범씨는 이름을 용태로 바꿨다. ●‘포니 정’ 부자(父子)의 변신 ‘포니 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넷째 동생 세영씨는 외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해 건설시장에서 영역을 확실하게 굳혔다. 꼼꼼한 시공과 치밀한 분양으로 현대산업개발을 국내 도급순위 4위 업체로 키워놓았다.‘포니 정’이라는 별명은 1976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1호 ‘포니’를 만들어낸 데서 붙여졌다. 이같은 열정과 헌신을 인정받아 87년 형에게서 현대그룹 회장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분가한 뒤로는 현대산업개발 경영에만 매달렸다. 몇 년 전 폐암수술을 받았지만 지난해 희수연을 치렀을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 회사 경영은 아들 몽규(회장)씨가 책임지고 있다. 지금의 서울 삼성동 사옥은 몽규씨가 직접 지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현대가 맺은 최고위층 사돈도 세영씨 집안에서 나왔다. 큰딸 숙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서울대 교수)씨와 결혼한 것. ●“아… 신영아”-교통사고 아닌 병으로 요절 다섯째 동생 신영씨는 고 정주영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함부르크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1962년. 처음에 어떤 기자가 교통사고사로 쓰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잘못 알려졌지만 정확한 사인은 지병이라고 유족은 본지에 밝혔다. 당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일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정주영 회장이 일주일을 손놓았을 만큼 가족의 슬픔은 컸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첼리스트였던 미망인 제수씨(장정자)에게 현대학원(현대고)을 경영토록 했다. 지금도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정자씨는 남북이산가족 상봉때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남한측 방문단장을 맡았었다.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신영씨는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몽혁씨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로 취임해 인천정유(구 한화에너지)를 인수하고 오일뱅크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외자유치와 함께 2002년 전문경영인에서 물러나 그 해 건축자재 유통회사 ‘에이치애비뉴앤컴퍼니’를 설립해 돌아왔다. 부인 이문희씨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동원 이홍근 선생의 손녀이다.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였던 동원 선생은 평생 모은 문화재 4941점을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딸 일경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블룸버그대학 회계학과 교수인 남편 임광수씨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리틀 정주영’이 이끄는 KCC 막내동생인 상영씨는 ‘불에 타지 않는 바닥재’ 등으로 유명한 자재 전문그룹 KCC를 이끌고 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성격 등이 고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 불린다. 큰형과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 아버지처럼 따랐다. 장조카 몽구씨와도 2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카인 고 정몽헌 회장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200억원을 선뜻 내놓았을 만큼 의리도 강하다. 그러나 조카의 죽음 이후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면서 다소 빛이 바랬다. 그룹 경영은 두 아들에게 맡긴 상태다. 큰아들 몽진씨가 대표이사 회장, 둘째아들 몽익씨가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셋째아들 몽열씨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 사장을 맡고 있다.KCC는 몽익씨를 통해 롯데·한진그룹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몽익씨의 부인 은정씨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조카(신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이다. 은정씨의 언니 은영씨는 한진해운 조수호 회장의 부인이다. 몽익씨와 조 회장이 동서지간인 셈이다. ●현대가의 여자들 현대가의 딸이나 며느리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화여대(정경희-이양자-현정은-김혜영-정유희 등) 출신에 해외유학(김영명-정지선-황서림-허승원 등)까지 다녀온 재원들이 적지 않지만 경영에 참여하거나 대외활동에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남편을 따라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다. 유일한 경영자인 현정은씨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전업주부’였다. 오너 일가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한 관계자는 “지금도 명절 때면 청운동 집(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오랫동안 살던 집)에 몇 대에 걸친 며느리들이 모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직접 장만한다.”면서 “옷차림들도 수수하고 인상이 소박해 언뜻 봐서는 재벌가 며느리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미인들이다. 어떤 이는 그 이유를 ‘유난히 많은 연애결혼’에서 찾는다. ●그룹분리 가속화시킨 ‘경영권 분쟁’ 2000년 ‘형제간 다툼’은 현대가를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핵분열시킨 결정적 계기였다.99년 12월 마지막 날, 고 정몽헌(MH) 회장쪽 인사로 분류되던 박세용 당시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정몽구(MK) 회장 계열의 현대차 회장으로 전격 발령나면서 시작된 형제간의 경영권 갈등은 그룹 후계자로 MH를 지목한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기까지 석달여에 걸쳐 숨막히게 전개됐다. 효심이 남달랐던 MK는 아버지의 육성이 공개되자 깨끗이 승복하고 자동차 계열사를 이끌고 그룹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의 지배구조를 선진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는 21일 왕 회장의 4주기에 모처럼 형제들 모두가 함께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날은 공식적으로 가족화합이 됐음을 안팎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현대가에 정통한 소식통은 전했다. hyun@seoul.co.kr ■ 정주영 회장의 ‘빈대론’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은 ‘해당화가 찬란하고 눈(雪)이 많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서 1915년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죽어라고 일해도 콩죽을 면할 길이 없는 농군이 진절머리나게 싫고 지겨워”(첫번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열네살 무렵부터 줄기차게 가출을 시도했다. 무작정 길을 나서 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도 봤다. 그러기를 네번째. 열아홉살 마지막 가출에 성공해 인천부두 막노동꾼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한 푼이 아까워 몸을 기댔던 곳이 노동자 합숙소. 뼈가 으스러지는 중노동으로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고단했지만 좀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빈대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궁리 끝에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빈대들의 공격이 잠시 뜸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밥상다리를 타고 기어올라와 온 몸을 물어 뜯었다. 다시 머리를 써야 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밥상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근 뒤 그 위에 올라가 잔 것이다. 빈대를 밥상다리로 유도해 양재기 물에 익사시키자는 계략이었다. 쾌재를 부른 것도 이틀여. 빈대들은 또다시 물어뜯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양재기 물을 건넌 것일까.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불을 켜본 젊은 정주영 회장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빈대들이 밥상다리 대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사람을 겨냥해 뚝 떨어져 목적 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정주영 회장은 ‘빈대의 노력’을 떠올렸다.“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단골 지청구는 모두 여기서 비롯됐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울산 염포리)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조선소 투자금액을 유치할 때나,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꼽히던 중동 주베일 공사 입찰전에 뛰어들 때나, 직원들이 불가능하다고 도리질칠 때면 “이봐, 해봤어?”라고 불호령을 쳤던 것도 빈대의 집요한 노력을 떠올리면서였다. “자본가가 아니라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던 정주영 회장은 근검과 노력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등한 자본금” “한강에 기적은 없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 “고선지부지설(苦蟬之不知雪;여름철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만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없어지는 매미는 한겨울 펑펑 쏟아지는 눈을 알 수 없다)” ‘아산 정주영 어록’에 실려있는 그의 유명한 말들이다. hyun@seoul.co.kr ■ ‘현대家 대모’ 변중석 여사 열여섯살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섯살 연상의 고향총각 정주영에게 시집온 변중석씨는 현대가의 산 증인이다. 올해로 84세. 젊어서 남편이 사준 재봉틀 하나를 자신 소유의 유일한 재산으로 여기며 한결같은 근검과 후덕함으로 ‘현대가의 여자’라는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매일 새벽 5시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근검을 가르쳤다면, 변씨는 새벽 3시반부터 손아래 동서·며느리들과 아침 준비를 함께 하면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하라.”고 일렀다. 가혹하리만치 자식 교육에 엄격했던 정주영 회장이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며느리들을 보고 “젊었을 때 콩나물 버스에 시달려봐야 나중에 자가용을 샀을 때의 기쁨을 안다.”며 역정을 내자 “손주녀석들 키우는 문제에까지 시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거냐.”며 막아준 이도 변씨였다. 칭찬에 인색했던 정주영 회장도 아내를 가리켜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고 변함이 없어 존경한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을 정도다.“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생각을 굳혔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식을 먼저 땅에 묻는 참척의 고통과 여자로서의 마음고생을 거치면서 ‘살아있는 보살’도 탈이 났다. 거동이 불편해 10년 가까이 병원(현대아산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맏며느리인 이정화씨 등 며느리들이 틈날 때마다 병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친구야, 눈대신 파란 잔디이불 덮어야지…”

    “친구야, 눈대신 파란 잔디이불 덮어야지…”

    “친구야, 너무 늦었구나.” 산(山)사나이들의 생사를 초월한 우정이 펼쳐진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악인 엄홍길(45·트렉스타)씨가 14일 생애 38번째로 히말라야를 찾아간다. 이번 등반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지난해 5월 계명대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나 등정에 성공한 뒤 산을 내려오다 숨진 박무택씨와 장민씨,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나섰다 유명을 달리한 백준호씨 등 3명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다. 특히 엄씨와 박씨는 지난 2000년 칸첸중가(8598m)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사투를 벌인 끝에 정상을 정복하는 등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를 4차례나 같이 올랐던 막역한 사이. 이들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 계명대 산악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번 등반대에 엄씨는 자신의 일정을 뒤로 돌린 채 흔쾌히 참가했다. 엄씨는 “올 봄에만 전 세계 25개 등반대가 에베레스트를 오르내릴 텐데 그 길목에 누워 있는 동료들의 시신을 차마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이번 등반은 정상 정복보다 오히려 더 힘들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산 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악천후, 산소 부족으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기계의 힘이 아니라, 순수 사람의 힘으로만 시신을 운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씨의 시신은 정상(8848m)으로 가는 8750m 암벽 구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다른 2명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아 수색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앞서 엄씨는 지난 1월 말 한라산에서 시신을 운구하기 위한 훈련을 벌였고, 지난달에는 네팔로 건너가 사전 답사를 마치기도 했다.4억∼5억원에 달하는 경비는 포스코, 파라다이스 등 뜻있는 기업들의 지원으로 마련됐다. 엄씨는 “차디찬 눈 속에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품에 안고 고향에 돌아올 수 있도록 대자연이 허락해줬으면 한다.”고 간절한 소망을 전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행정도시 반대파 당직 줄사퇴…한나라 난파 위기

    “(…)지금 한나라당은 바닥에 떨어뜨린 어항과 같다. 산산이 조각난 파편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저마다 바닥에 패대기쳐진 물고기들이 고통스럽게 펄떡거리고 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이 3일 발표한 논평의 한 대목이다. 전날 ‘행정도시특별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내홍에 시달리느라 만신창이가 된 한나라당의 상황을 실감나게 비유했다. 그러면서 “이 모두가 원래 물고기들이 살아가야 할 넓고 큰 바다로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며 낙관론을 펼쳤다. 그러나 당장 한나라당호(號)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농무(濃霧)에 뒤덮여 있다. 지도부와 반대파들이 ‘강(强) 대 강(强)’으로 치달으면서 전 대변인의 말처럼 바다로 가게 될지, 바닥에서 수명을 다하고 말 것인지 주목된다. ●투쟁위 구성… 지도부 사퇴 촉구 김문수·이재오·박계동·배일도 등 ‘농성 4인방’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행정도시특별법안의 무효를 관철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며 강경 투쟁을 선언했다. 이들을 포함해 특별법에 반대하는 33명은 3일 ‘수도지키기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의원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재오 의원은 “당이 당리당략·선거놀음에 치우쳤다.”며 지도부 사퇴를 촉구했다. 투쟁위는 서울·과천시의회와 경기도의회 등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학계와 적극적으로 연대해 저지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박계동 의원은 “투쟁위가 본격 가동되면 위헌 소송도 낼 것”이라고 밝혔다. 전재희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또 서울시의회 한나라당 소속 의원 86명은 이날 오후 긴급의총을 열고 매달 10만원씩 내는 당비 납부 거부를 결의했다. ●정책위의장·국제위원장 사퇴 도미노 당직자들의 잇따른 사퇴 표명도 한나라당호의 순항을 가로막는 두꺼운 안개다.2일 박세일 정책위의장이 법안이 관철되면 의원직과 당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김애실·박찬숙 의원도 ‘동참 의사’를 내비쳤다. 3일에는 제3정조위원장인 박재완 의원이 “6명의 정조위원장 가운데 5명이 사퇴하기로 입장을 정리했다.”면서 “일괄적으로 사퇴 의사를 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진 국제위원장도 사퇴했으며 윤건영 여의도연구소장도 사퇴를 고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안상수 공천심사위원장과 심재철 전략기획위원장도 사퇴 의사를 밝혔다. ●박대표·DR 연합전선 가능성 지도부의 태도는 정면돌파 의지를 천명하면서 단호하다. 김무성 사무총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사퇴 운운했으면 책임을 져라.”라면서 “어제 의원총회에서 당 대표와 원내대표에게 차마 듣기 어려운 말을 한 의원들도 앞으로 이런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유승민 대표비서실장과 전여옥 대변인도 “사퇴라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공에 힘을 보탰다. 혼미스러운 상황으로 박 대표의 리더십은 지난해 말 ‘파행 국회’에 이어 취임 이후 최고 난도의 시험대에 오른 형국이다. 지난 연말에는 김덕룡 원내대표와 ‘따로’였던 반면 이번에는 ‘같은 암초’를 만나 연합전선을 펼 가능성이 높다. 당 지도부는 반대파 의원들과 잠시 냉각기를 가진 뒤 적극적인 달래기에 나설 예정이어서 향배가 주목된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여담여담] ‘여성1호’뒤에 가려진 것들/김미경 경제부 기자

    “한국이란 나라에서 어떻게 20년 이상 일했는지 스스로도 놀라워요.” 최근 사석에서 만난 외국계 금융회사의 여성임원 K씨. 유수 회사에서 상당한 지위에 오르기까지 쏟았을 남다른 노력에 대해 묻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답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들. 대기업의 ‘여성공채 1호’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외국계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외국계 증권·은행을 오가며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그런 그녀에게 살면서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자녀의 대학 진학문제였다.‘일하는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자녀가 정말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언론의 한 구석을 장식하는 기사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여성 최초’라는 꼬리표 기사다. 외국계 회사나 대기업은 물론, 정부부처나 공기업 등에서도 여전히 ‘여성 1호’는 입방아에 오른다. 그러나 여성 1호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차마 말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당사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종종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런 우울한 얘기들은 기사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다. 그저 ‘남편과 자녀들이 도와줘서 고마울 뿐’이라는 형식적인 멘트뿐이다. 직장여성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일하는 엄마로서 겪어야 하는 육아문제다. 그래서 일부는 아예 독신으로 살거나 자녀를 시부모나 친정에 맡겨 키우면서 애써 나 몰라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윗세대 여성들의 희생도 따른다. 요즘 관련부처에서 저출산을 막겠다며 둘째나 셋째 아이에게 육아·교육비를 지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맞벌이 시대의 육아문제는 지원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회사 안팎에 탁아소나 육아·교육시설이 갖춰지는 등 인프라가 확산되고 남녀 공동육아가 이뤄져야 한다. 기자는 지난 대통령 선거때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지방유세를 따라다니며 현장을 취재했다. 노 대통령은 몰려든 여성 유권자들을 향해 “맘껏 아이를 낳으십시오. 제가 키워드리겠습니다.”라며 여러 공약을 밝혔었다.2년이 지난 지금, 육아관련 공약이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볼 때다. 김미경 경제부 기자 chaplin7@seoul.co.kr
  • [사설] 성행하는 대리모 방치할건가

    본지가 어제 집중보도한 대리모 실태는 정말 충격적이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두어 군데만 접하면 돈 받고 아이를 대신 낳아주겠다는 여성들과 손쉽게 연락이 닿는다, 희망자는 생활비 또는 목돈을 필요로 하는 주부·이혼녀·미혼여성들이다, 전문 브로커도 활개를 친다는 내용이다. 차마 믿기 힘들지만 이것이 우리사회 대리모의 실상이다. 대리모가 성행하는 원인은 수요와 공급 양쪽에 함께 있다. 한쪽에는 시험관아기 시술마저 실패해 대리모 출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불임부부들이 존재한다.2003년 한해 불임치료를 받은 사람이 11만명이 넘는다니 그 규모가 가히 짐작된다. 또 다른 한쪽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장기매매까지도 고민한’ 실업가정의 주부, 여성가장인 이혼녀 등이 있다. 대리모를 통해서라도 부모의 정자·난자를 이어받은 자식을 가지려는 불임부부의 간절한 희망이나, 가족을 먹여살리고자 막다른 선택을 한 여성을 무턱대고 비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대리모가 성행하는 현실을 방치하자는 것은 아니다. 대리모 출산은 윤리도덕적·법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어난 아이를 놓고 대리모와 의뢰한 부부 사이에 친권 다툼이 벌어질 때 누구를 친부모로 인정할지 등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사회가 대리모 출산 문제를 공론화해 사회적인 합의를 일정부분 이끌어내야 한다고 본다. 대리모 출산을 허용할지, 허용한다면 그 범위를 어느선에서 제한할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관련법규를 제정해 불필요한 갈등·낭비 요소를 사전에 방지해야 할 것이다.
  • [길섶에서] 아버지의 십자가/이기동 논설위원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 또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약수동 고갯길을 한참 걸어내려가 버스로 한강을 건넌 뒤, 다시 바꿔타고 영등포의 사무실로 출근하셨다. 시간 반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더구나 콩나물시루라는 말이 꼭 들어맞던 당시 출근길 버스다.” 사제의 말은 이어진다.“아버지는 작은 회사의 말단직원이었다. 어쩌면 상사한테서 차마 못 들을 욕설을 일상사로 들으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당당한 가장이셨다. 그가 내미는 쥐꼬리만했을 월급봉투에 담긴 눈물의 의미를 어머니는 아셨던 모양이다. 밥상머리에서 형제들이 밥투정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당장 밥숟가락 놓으라고 호통치셨다.” 사순절, 예수의 희생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사제는 어릴 적 자기 아버지의 추억에 담아 이렇게 설명했다. 가족에게 먹일 밥 한 공기를 담아내기 위해 아버지가 감내했을 수치심과 눈물의 의미를 사제가 된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매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이 땅의 지친 아버지들을 다시 생각한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 [발언대] 3·1운동 정신을 생각하며/원태섭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행정사무관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민족이 전개한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3·1절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비무장 저항운동은 일제의 총칼에 짓밟혔지만 그 고귀한 정신은 오늘까지 생생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역사적 과정을 살펴볼 때,3·1운동의 정신의 본류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1894년(갑오년) 음력 3월, 일본의 경제수탈과 연결된 지방 관속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1차 봉기했다. 이어 일본이 같은해 음력 5월, 군사력으로 경복궁을 강제점령하는 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음력 9월에 2차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제의 강압으로 100여만명이 참여한 동학농민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탄압해 30만∼4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농민군들은 참살을 모면하기 위해 국내외로 흩어져 이름과 성을 바꾸고 살아갔으며, 참여자와 유족은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111년이 지난 지금, 동학농민혁명운동 전개 당시의 구체적인 참여자의 명단과 활동과정을 규명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은 농민(시민)의 사회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의 역사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의 역사다. 외세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국가를 이루려는 애국애족정신과 봉건사회의 폐정을 혁신하여 평등·대동 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개혁(혁신)정신은 항일의병활동,3·1운동,4·19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우리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정신이 일제하의 항일독립군, 민주사회의 시민운동가들의 정신적 본령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반란’이 이제는 떳떳한 ‘혁명’으로 명예회복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민족정기를 선양하고자 유족등록사업과 기념사업, 명예회복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는 3·1운동 정신과 함께 이들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여야 한다. 원태섭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행정사무관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국노래자랑’ MC 송해

    한도 많고 팔자도 어지간히 드세다.‘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인공처럼 모질게도 살아왔다. 풍각쟁이면 어떻고 딴따라면 어떤가. 늘 구수하고 마음씨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다들 ‘젊은 오빠’라고 부른다. 맞다. 이게 행복이요, 큰 부자가 아닌가.‘국민과 함께 딩동댕 25년’, 최고령 현역 방송 MC, 그뿐이랴. 지역갈등, 고부갈등, 남북갈등을 해결하는 전도사로 전국을 쉼없이 누비고 있다. ●현역 최고령 방송 MC ‘국민 MC’ 송해(78). 본명은 송복희(宋福熙)다. 그러나 6·25때 피란 도중 바닷물로 밥을 지어먹어 이름을 ‘바다 해(海)’로 바꿨다. 그는 25년째 KBS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이끌어오면서 전국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방송 스케줄 때문에 일주일에 사흘 이상은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한다. 녹화 일정이 없을 땐 한국원로연예인 상록회(서울 종로3가)에서 동료들과 못다한 얘기를 나눈다. 상록회는 원로연예인의 사랑방격으로 12년 전 송씨가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늙어가는 처지끼리 따뜻한 동료애를 나누자는 취지에서다. 지난주 상록회 인근의 한 카페에서 송씨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러니까 말예요,25년이 후딱 넘어갔어요. 아마 공개방송 사상 처음일 거요.”라는 특유의 구수한 말투로 ‘전국노래자랑 MC 25년’의 소감을 피력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일이 아니고 유람이지. 녹화 전날 현지에 내려가 명소도 찾아보고, 주지스님도 만나 얘기도 나누고, 그게 다 보약이지 뭐.”라며 웃는다. 이어 “전국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어. 세월이 지나면서 기존의 작은 시(市)가 광역시에 편입되고, 그러다보면 새로운 행정구역이 자꾸 생겨나요.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은 무진장 다녔지.”라고 하면서 “춘향제가 열리는 남원에도 가장 많이 갔어요. 이래저래 전국 군단위까지 아마 열두바퀴 정도는 돌았을 거요.”라고 부연했다. 송씨는 방송녹화 하루 전에는 반드시 주변 취재를 꼼꼼히 하는 버릇이 있다. 대상은 주로 시장바닥과 대중목욕탕. 그는 “시장에 가면, 많은 재산이 있거든. 그 고장의 분위기, 유행, 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풍물 얘기를 귀담아듣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또 목욕탕에 가면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와. 발가벗고 뒤지는데 아무려면 재미없을라고.”라며 또한번 웃는다. ●예심에 2000여명 몰려 15명만 본선에 뿐만 아니다. 전국노래자랑 예심에는 대개 1500∼2000명이 몰린다. 이중 15명 가량 본선에 오른다. 사법시험 경쟁률과 엇비슷하다. 송씨는 예심부터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 또 본선에 오른 사람들과는 일대일로 만나 무대 위에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지 미리 상의한다. 송씨는 요즘들어 더욱 젊어진 기분이다. 호칭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 처음에는 ‘송해 선생님’ ‘송해 아저씨’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결같이 ‘젊은 오빠’나 ‘송해 오빠’로 통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렇게 부른다. 소위 ‘만년먹기 오빠’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에피소드도 다양하다.20대 아가씨에서부터 60∼70대 할머니한테 기습 뽀뽀를 당하는 것은 예사. 얼굴에 스타킹을 씌워 뱅뱅 돌리는 사람, 행진시키는 사람 등등. 하지만 송씨는 아무리 짓궂은 상황도 부드럽고 재치있게 받아넘겨야 한다. 눈물겨운 사연도 많다.3대째 대장장이가 출연해 직업에 대한 경시풍조를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경우,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 경상도 출신 며느리가 전라도 시어미니와 함께 출연해 많은 박수를 받은 일, 앞을 못보는 장애인이 ‘노래가 곧 눈’이라며 관객들을 울린 일 등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 하나. 김인영 악단장과의 관계였다. 송씨는 이에 대해 김 단장과는 TBC라디오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친숙한 사이로 녹화가 끝나면 소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한다.”고 귀띔했다. 이때 출연자에게 선물받은 특산물이 안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송씨는 지금도 소주 2병 정도는 거뜬히 마신다.) 송씨는 또 노래자랑에 출연했던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는 커플도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아울러 동호회를 만들어 불우이웃을 위한 공연활동도 펼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출연자 최연소 3세·최고령 103세 “25년 전 화면을 보면 트로트풍 등 추억의 노래였지만 요새는 매우 다양해졌어요. 최연소 출연자가 세살, 최고령 출연자가 103세, 연령폭이 무려 한 세기에 달해요.” 송씨는 연백평야가 있는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상업에 종사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1·4후퇴 때 혈혈단신 월남했다. 송씨는 이 대목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는 자신을 위해 만든 노래라며 잠시 회상에 빠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해주항에서 그는 해군 상륙정(LST)을 탔다. 포성을 뚫고 피란길에 나섰다. 바닷물로 밥을 지어먹으며 가까스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때 나이 스물넷. 인천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한다. 전쟁을 피해 월남했지만 결국 전쟁 깊숙이 뛰어들게 된 것. 그는 야전부대가 아닌 통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통신부대에 배치됐다. 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여기에서 3년8개월 동안 근무하게 된다. 군 얘기가 나오자 “내가 말예요, 전쟁종식을 가장 먼저 타전한 사람이오. 또스똔똔 하는 모스부호로 말예요.”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휴전협정 당시 육본 암호실에서 근무했다. 때문에 휴전협정 사실을 암호화한 뒤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 이어 전언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종식’을 알린 것. 그는 군복무 시절에 1급비밀을 취급하는 통신사(하사)여서 영외거주가 가능했다. 대구 민박집에서 출퇴근할 때 선배의 여동생을 우연히 알게 됐고, 결혼에 이른다. ●55년 창공악극단서 가수로 데뷔 55년 제대를 하자마자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 4시에 부산역에 도착하면 석달 동안은 집을 비우는 등 유랑극단처럼 떠도는 생활이 계속됐다. “40대초반이었지요. 몸이 몹시 안 좋았어요. 일가친척도 없지, 기둥뿌리 하나 없지, 술이라는 힘으로 달랬던 시절이었어요.3개월 동안 병원에 버려지다시피 지냈지.” 그는 “차마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라며 잠시 창 밖을 응시한다. 이어 “젊은 마누라도 있고 내가 왜 장애인처럼 지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병원을 뛰쳐나왔지.”라고 회상했다. 당시 송씨는 장충동에 살고 있었다. 집에서 남산 팔각정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팔각정까지 산책을 하며 마음을 다져먹고자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고독, 절망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하루는 산책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소나무 가지숲에 걸려 목숨을 구했다. 이후 그는 새삶의 길로 들어선다. 송씨는 요즘들어 생사를 알 수 없는 부모형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경우가 부쩍 잦아졌다. 또 대학 2학년때 사고사를 당한 아들의 얼굴도 눈앞에 자주 아른거린단다.(원래 송씨 슬하에는 두딸과 외동아들이 있었다.) 건강비결은 음식을 안 가리고, 아무와도 격의없이 만나 웃는 것이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송씨는 지나는 행인들과 악수를 나눴다. 사람들은 “아이고, 우리 송해 오빠.”하면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 세상에 송해만큼 부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사람 많이 아는 것이 최고의 부자 아니겠습니까.”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 ▲6·25 직전까지 북한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공부 ▲51년 1월 월남 ▲55년 육군통신부대 만기제대 ▲55년 ‘창공악극단’가수 데뷔 ▲74년 KBS라디오 DJ ▲76년 MBC라디오 코미디쇼DJ ▲80년 전국노래자랑 MC ▲99년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2001년 제8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 문화훈장 ▲2002년 MBC 명예의 전당 ▲2003년 제15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보관문화훈장 ■ 작품 송해 옛노래집,KBS고전유머 극장,KBS코미디 하이웨이
  • [3일 TV 하이라이트]

    ●금쪽같은 내새끼(KBS1 오후 8시25분) 은수와 영란은 무엇이 지웅을 위한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재민은 경아를 찾아가 아기를 위해 좋은 일을 하리라는 다짐을 받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한편, 연지가 진수에게 책을 선물하고 읽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던 덕배와 영실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오픈 스튜디오(SBS 오후 4시10분) 60세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에 불과하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 62세의 나이에 웨이터로 제2의 인생을 출발한 서상록. 회사 부도로 하루아침에 부와 명예, 삶의 터전을 잃은 그가 20대의 젊은이들을 사회 선배로 인정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원동력을 알아본다. ●생방송 쟁점토론(YTN 오후 3시5분) 부시 집권 2기에는 가시적인 정책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그동안 추진됐던 대북 강경책이 지속될 예정이어서 이런 정책이 남북간의 화해 협력에 미치는 영향과 대응방안 등을 미리 짚어 본다. 또 시장개방 압력과 달러 약세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도 살핀다. ●생방송 60분-부모(EBS 오전 10시) 모든 재혼가족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성공적인 계부모의 모델은 어떤 것일까. 보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또 완벽한 부모는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자녀 훈육문제와 관련하여 계부모가 알아야 할 사항을 알아본다. ●슬픈연가(MBC 오후 9시55분) 건우의 약혼녀가 되어 돌아온 혜인을 본 준규는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인다. 준규의 음성을 들은 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건우 앞에서 준영의 이름을 부른다. 당혹감을 느낀 준규는 차마 자신이 서준영이라고 나서지 못하고 혜인도 준영의 이름을 부른 자책감 때문에 건우에게 미안해하며 서울로 향한다. ●인간극장(KBS2 오후 8시55분) 민휘는 아빠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 아빠와 단둘이 밤을 보내면서 더 열심히 촬영하겠다고 약속한다. 크리스마스 날, 촬영은 시작되고 민휘는 다시 즐겁게 일을 한다. 한편 여주인공인 문소리가 민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해 주자 민휘는 하늘을 날 듯이 기뻐한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민중예술가서 문화CEO로 김명곤 국립극장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민중예술가서 문화CEO로 김명곤 국립극장장

    비워야 채워지고 버려야 얻어진다고 했던가. 한 청년, 독문학도였다. 어느 여름날 시골의 느티나무 아래였다. 청년은 차마 못볼 것을 보고 말았다. 또 아니 들었던 것을 듣고야 말았다. 그곳에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속세의 풍진을 훌훌 털어냈다. 번뇌도, 욕심도 없다. 끊어질 듯하면 이어진다. 점점 눈이 부신다. 귀가 떨린다. 쿵쾅쿵쾅, 가슴이 요동친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늪이다. 헤어나올 수가 없다. 인간사 삼세번,3일 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결국 청년은 고독한 ‘소리꾼’의 길로 들어섰다. 김명곤(53) 국립극장장.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소리꾼으로 열연한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딸(오정해)에게 약을 먹여 장님이 되게 한 후 소리를 가르치는 ‘아버지’는 더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김명곤’ 하면 평소 1980년대 민중예술계를 대표하는 배우·연출가·판소리 이수자 등으로 꼽힌다. 지금은 문화CEO로 실력 발휘를 하고 있다. 국립극장 사상 처음으로 공채(2000년)로 극장장에 임명된데다 연임의 기록까지 세운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이밖에 ‘광복60돌60인위원회’ 위원을 비롯, 올 11월에 열릴 APEC행사의 예술총감독을 맡았다. 춥고 배고픈 재야 연극인 생활을 할 때를 생각하면 이래저래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을 터이다. “오는 4월이면 국립극장이 개관 55주년을 맞이합니다. 이에 맞춰 국립극장은 지난해 10월 해오름극장에 이어 나머지 극장시설에 대한 리모델링 작업이 완전히 끝납니다. 모두 176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됐지요. 예쁜 새옷을 입고 좀더 편한 모습으로 국민들과 호흡하겠습니다.” 그의 집무실, 탁자 위에 놓인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잃어버린 나, 그리고 잊었던 우리와 다시 만나는 그런 무대를’ ‘무대와 친숙하지 않은 소외된 대중 속으로 더 가까이 더욱 뜨겁게’ 어떤 철학으로 극장을 운영하는지 짐작이 갔다. 글의 주인공은 한승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극장의 단골고객이며 평소에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국립극장장에 처음 취임할 때 모든 것을 (기존과)반대로만 하자고 다짐했단다. 즉 권위와 폐쇄, 관료적인 국립극장에서 탈권위적인 국민 속의 극장으로 개혁시키고자 했던 것. 스스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자평했다. 우선 공연장 명칭만 하더라도 대극장을 ‘해오름’, 소극장을 ‘달오름’, 실험극장 ‘별오름’ 등 부드럽게 변화시켰다. 또 무지개 길과 은하수 쉼터 등의 공간을 만들어 시민들이 언제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랬더니 기존의 연평균 관객 30만에서 50만명으로 늘어났다. 수입도 3배 가까이 증가해 재정자립도를 7%에서 18%까지 끌어올렸다. 해외 유명 국립극장의 재정자립도가 대부분 15∼25%인 점을 감안하면 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국립극장은 6·25 발발 두달 전에 처음 출발했습니다. 국립극장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 굴곡의 현대사나 다름없습니다. 어쨌든 올 한해는 우리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해외로 쭉쭉 뻗어나가게 할 생각입니다.” 화제를 돌렸다. 진보성향이라는 질문을 자주 받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약간 웃으며 “대학시절, 순수지향적 사회운동이 시작될 때 동료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예술과 현실사회 사이에서 무척 많은 고민을 했다.”면서 “당시 임진택·채희완·김석만씨 등과 함께 민족극 운동1세대에 뛰어들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진보적 행보는 1986년 극단 ‘아리랑’을 창단하면서 본격적으로 넓힌다. 연극 ‘갑오세 가보세’ ‘점아점아 콩점아’ ‘인동초’ 등 민족민중극을 연달아 선보였다. 주로 인권과 평등, 분단의 아픔을 고민했다. 예술에의 집착도 이같은 신념에서 비롯됐다. “가난한 연극인으로 진보적인 문예운동을 펼칠 때 다섯가지 마귀, 즉 주마(酒魔), 병마(病魔), 수마(垂魔), 궁귀(窮鬼), 색마(色魔)에 시달리느라 좌절도 많이 겪었습니다.” 서울대 독어교육학과 2학년 때 연극반에 들어갔다. 연극반은 아예 먹고 자는 곳이었다. 첫 역할은 데모하는 학생을 데려다가 두들겨패는 정보과 형사였다. 교수의 첫째딸 역을 맡은 여학생이 예뻐서 더욱 신났다. 특히 연극이 끝나면 라면과 소주가 나왔다. 밤새 친구들과 소주마시며 얘기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잤다. 아침에 선배가 머리맡에 갖다놓은 도시락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세수는 늘 학교 우물가. 그런 생활이 계속됐다. 주마의 결과는 곧 병마로 돌아섰다.2학년 말 폐결핵이 찾아왔다. 그러다보니 약을 먹고 매일 잠만 잤다. 이제는 수마가 시작된 것.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던 처지였다. 하지만 꼼짝조차 하기 싫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방안퉁소’(방안에서 하루종일 퉁소만 부른다는 뜻)로 불렸을까. 결국 약도 못 사먹는 궁귀의 상태로 빠졌다. 색마에 대한 설명으로 그는 “연극을 하다 보면 늘 여성과 어울리게 된다.”며 웃는다. ●명창 박초월선생에 판소리 배워 대학 3학년 때 판소리를 처음 접하고 깊은 충격에 빠진다. 몸이 안 좋아 휴학 중이던 여름날. 전북 김제에서 친구를 만났다. 전북대 영문과에 재학 중인 그는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다. 심심해서 친구를 따라나섰다. 시골의 큰 느티나무아 래의 정자. 한 여인이 아이들 4∼5명을 앞에 앉혀놓고 북을 치며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인의 소리는 마디마디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 이런 것이 있었단 말인가. 사흘동안 그렇게 정자에 있었다. 그의 인생을 확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때만 해도 음악이란 오페라나 가곡이 전부인 줄 알았죠. 난생처음 판소리를 듣고 왜 학교에서 한번도 안 배웠는지 충격으로 다가오더군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종로3가의 단성사 건너편에 위치한 명창 박초월 선생의 학원을 찾았다. 학원비를 겨우 마련한 뒤 등록했다. 두어달 후 학원비가 바닥났다. 사정을 안 박 선생은 그냥 다니라고 했다. 대신 전화도 받고 학생들의 가사를 받아쓰는 일 등을 했다. 나중에 박 선생은 그를 친자식처럼 여겼다. 이렇게 광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또한 마당극과 민요 등을 어떻게 하면 창작극에 잘 접목시키고 삽입시켜야 하는지를 연구했다. ●기자·교직 거쳐 연극의 길로 대학 졸업 후 ‘뿌리깊은 나무’의 기자가 된다. 하지만 연극과 판소리의 끼는 버리지 못했다. 배화여고 독일어 교사로 일단 자리를 옮겼다. 방학 때면 연극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독일어과목 첫 수업 때 김 극장장은 “너희들이 독일어를 왜 배우냐, 먼저 우리것을 잘 알아야 한다.”며 ‘사랑가’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한 여제자가 이에 쏙 반해버렸다.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다행히 15년 앓아오던 폐결핵은 아내의 헌신적 간병 덕분에 결혼 2년만에 말끔히 나았다. 지금도 이는 기적이라고 여긴다. “국립극장장이 됐을 때 아내는 이제야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무척 좋아했지요.” 어릴 적 그의 집은 전주시 중앙동. 하지만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장원이 기울어지면서 큰 집에서 작은 집, 중앙에서 변두리쪽으로 자꾸 밀려나갔다. 아버지는 한학을 공부한 낚시광이었다. 김 극장장은 모진 세월을 이겨내는 어머니와 인내심의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좋아 독일어를 택했다. 가난한 배우생활을 하면서도 한번도 ‘파우스트’를 잊어본 적이 없다. 올해가 극장장 연임의 마지막해. 내년에 다시 실업자가 된다는 그는 “자유로워지면 꼭 파우스트 같은 작품을 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2년 전주 출생 ▲76년 서울대 독어교육학과 졸업 ▲77년 뿌리깊은나무 기자 ▲78∼79년 배화여고 교사 ▲86년 극단 아리랑 창단대표 ▲98∼99년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회장 ▲99년 9∼12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객원교수 ▲2000년1월∼현재 국립극장장 ▲2000년11월∼현재 문화관광부 지역문화추진위원회 위원 ▲저서=광대열전, 점아점아콩점아, 꿈꾸는 퉁소쟁이 등 ▲연극=장산곶매, 나의살던 고향은, 장사의 꿈 등 ▲영화=일송정 푸른솔, 바보선언,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등 ▲상훈=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서편제), 자랑스런 서울시민상(1994), 제1회 현대연극상 연출상(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
  • 儒林(268)-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8)-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또한 맹자는 진심(盡心) 하편에도 증자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증석은 생전에 고욤(小枾)을 즐겨 먹었다. 증자는 차마 아버지 생각에 고욤을 먹을 수 없었다.” 논어에도 증자의 효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자가 병이 나자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내 발을 펴보아라. 내 손을 펴보아라. 시경에 (전전긍긍하며 깊은 못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는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내 걱정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얘들아.” 죽기 직전 제자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준 증자의 태도는 생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발부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깊은 못가에 서 있듯 전전긍긍하며,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듯 아슬아슬하게, 무척 조심하며 살아온 그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죽기 직전에 자기 몸에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자기 몸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평생의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증자의 이런 태도는 효경(孝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효경은 공자가 증자를 위해서 진술한 것’이며,‘공자는 뜻은 춘추에 실었고, 행실은 효경에 실었다.’라는 통설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증자는 이처럼 효행에 있어 제1인자였을 뿐 아니라 공자의 사상을 맹자에게까지 전수시킨 유교에 있어 종성(宗聖)인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제자들의 다양한 활약상을 기술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스승인 공자는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의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의 6년간 제자들과는 달리 오로지 교육과 인류의 영원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의 편저에만 여생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기 위해서 13년간이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만약 나를 등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라고 선언하였던 공자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한순간 그 이상을 끊어버리고 오직 교육과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것이다. 논어에는 바로 이 무렵 공자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왜 정치를 하지 않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서경에 말하기를 (효도하라, 오로지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로움으로써 그것을 시정(施政)에 반영시켜라)하였소. 이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거늘 어찌 따로 정치를 하는 법이겠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로움을 가르쳐 시정에 반영시키는 것’도 훌륭한 정치라고 말한 공자의 태도는 ‘진실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이면 그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고,3년이면 완전한 정치의 결과를 올릴 수 있건만’하고 상갓집 개처럼 천하를 순회하였던 주유열국시대 때의 공자와 전혀 판이한 정반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 업계 3위 GM대우 르노삼성에 밀리나

    수성인가, 추락인가. GM대우차의 업계 3위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허리 차종’이 튼실하지 못해서다. 가뜩이나 중형차 라인이 빈약한 터에 신차마저 ‘수혈’되지 않고 있다. 경쟁사들이 올해 중형차시장에 신차를 줄줄이 투입하고 있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회사측도 적잖은 고전을 각오하는 눈치다. 18일 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말 현재 중형차 시장 점유율은 현대 쏘나타(EF포함)가 49.4%로 부동의 1위다. 르노삼성 SM5(26.9%)와 기아 옵티마(15.3%)가 그 뒤를 잇고,GM대우 매그너스는 7.3%로 사실상 꼴찌다. 지난해 지독한 자동차판매 부진속에서도 전체 승용차시장에서 중형이 차지하는 비중(22.9%)은 전년(21.7%)보다 오히려 늘었다.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를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큰 시장이다. 현대(뉴쏘나타), 기아(뉴옵티마), 르노삼성(뉴SM5)이 잇따라 새 중형차를 투입했거나 투입하는 것도 “결국 불황 탈출의 지렛대를 중형차 시장”으로 판단한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GM대우만 새 모델이 없다. 헌 무기(매그너스)로 격전을 치러야 하는 처지다. 그마저도 매그너스는 지난해 1만 7060대 판매에 그쳐 전년대비 16.1%나 감소했다.GM대우의 전체 시장점유율이 한자릿수로 추락할 것이라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GM대우는 대형차(스테이츠맨)와 경차(뉴마티즈)에서 신차가 출시되는 점을 들어 지나친 비관론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스테이츠맨(호주 홀덴사)은 수입판매이고, 경차는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4%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는 “외환위기 이후 현대-기아-GM대우의 서열이 굳어졌지만 올해는 대·중·소형 라인을 모두 갖춘 르노삼성의 추격이 거세 3위 쟁탈전이 치열할 것”이라고 관측했다.GM대우 관계자는 “내년쯤에 매그너스 후속모델을 내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면서 “올해는 다소 고전하겠지만 3등은 지킬 것”이라며 수성 의지를 다졌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건빵도시락 먹고도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두성.” 전북 군산시의 결식어린이들이 부실 파문을 일으킨 ‘건빵 도시락’에도 ‘감사의 편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군산시는 이들의 편지를 “결식학생들이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다.”며 부실 도시락의 잘못을 호도하려는 의도로 공개해 주위를 머쓱하게 했다. 결식 어린이들의 해맑은 동심이 엉터리 도시락을 제공한 어른들을 더욱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도시락 잘 먹었습니다.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한 어린이는 문제의 ‘건빵도시락’을 받은 다음날인 성탄절 아침 또박또박 감사의 뜻을 적은 쪽지를 빈 도시락에 넣어 자원봉사자에게 전달했다. 이날 도시락을 배달했던 최모(53)씨는 “자식을 둔 아비의 입장에서 차마 반찬으로 건빵이 나온 도시락을 내밀기가 부끄러웠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표정을 전혀 짓지 않는 어린이의 눈동자가 하도 맑아 마주 대할 수 없었다.”고 말끝을 흐렸다. “방학 중인데도 집에까지 도시락을 배달해주니 고마울 뿐이에요. 추운 날 고생하시는 자원봉사 누나, 오빠들에게 고맙기 그지없고요.” 달동네인 군산시 금동 한 결식어린이(초등학교 3년)는 부실 도시락이지만 매일 보내주는 정성이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 박목월의 고향 ‘경주’

    [문학이 머문 풍경] 박목월의 고향 ‘경주’

    첫사랑의 기억만큼 평생을 따라다니는 게 있을까. 박목월(1916∼1978)도 그랬다. 목월의 가슴 아픈 첫사랑의 무대는 그의 고향인 경주.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산골에서 태어난 목월은 10리 길을 걸어 건천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목월은 이웃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K와 첫사랑에 빠진다. 서로 사랑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목월과 K는 사랑을 맹세했다. 그러나 대구 계성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목월은 어느날 K가 시집갔다는 소식을 접한다. 목월이 열다섯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금융조합에 취직한 목월은 첫사랑을 잊을 수 없었던지 건천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목월은 K가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신작로에서 우연히 K와 마주쳤지만 K는 줄달음을 쳐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후 K는 재혼을 해 아들 하나를 낳았고 이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슬픔의 씨를 뿌리놓고 가버린 가시내는 영영 오지를 않고…/한 해 한 해가 저물어 질 고운 나무에는 가늘은 가늘은 핏빛 연륜이 감기었네〉(가시내사 가시내사…) 〈목이 가는 소년은 늘 말이 없어 새까만 눈만 초롱초롱 크고…/귀에 쟁쟁 울리듯 차마 못잊는 웃녘 사투리 연륜은 더욱 새빨개졌네〉(가시내사 가시내사 가시내사) 〈이제 소년은 자랐네> 목월의 처녀작의 하나인 ‘가버린 가시내’는 첫사랑 K가 주인공이다. 국도변 작은 읍내 풍경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목월이 K와 사랑을 약속했던 건천 읍내는 아직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첫사랑의 굳은 맹세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만 신작로 주변 적산가옥하며 목월이 K와 함께 다녔던 초등학교 주변 풍경은 변한 게 별로 없다. 한가로운 신작로를 따라 목월과 K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상상을 하기에 충분한 풍경이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읍내 신작로를 혼자 쓸쓸하게 걸어다녔을 목월. 남편과 사별후 친정집으로 돌아와 군데군데 묻어있는 목월과의 첫사랑 추억에 가슴 아파했을 K. 목월이 K와 우연히 해후한 그날. 아마도 두 사람은 아무말도 못한 채 화석처럼 굳어버렸을 게다. 건천읍내에서 경주시내 방향으로 가다 모량초등학교 바로 옆길로 우회전해 들어가면 목월의 생가다.1980년초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토담집 생가는 헐리고 새집이 들어서 이제 목월과는 무관한 집이 돼 버렸다. 정지용이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 했건만 목월의 생가 보존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목월 선생 생가인 줄 알았다면 집을 헐어버리지 않았을 거요. 우린 몰랐어요.”목월선생 생가에 새집을 짓고 27년째 살고 있는 70대 농부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청객들이 싫지는 않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잘 살아보자며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시인의 초가 생가를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아쉽다. 하지만 마을 주변을 둘러보면 목월의 서정을 풍부하게 키워주었던 선도산이며 단석산은 아직 그대로여서 다행스럽다. 지금은 보리밭으로 변했지만 목월의 생가 주변은 밀밭 천지였고, 목월에게 밀밭은 사색의 공간이었다. 생가에서 다시 국도 방향으로 나와 국도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면 작은 강이 흐른다. 경주시내를 끼고 흐르는 형산강의 상류지역인 강나루는 아직 얕고 푸른 강물이 차분하게 흐른다. 살얼음이 낀 강나루는 푸르기만 하다. 국민 애송시인 ‘나그네’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아마도 목월은 혼자 가만히 밀밭 사잇길을 지나 강나루에 우두커니 앉아 젊은 문학도의 고단함을 강물에 흘려보냈을 것이다. 경주에는 황성숲(얼룩송아지)과 보문관광단지(달), 건천초등학교(윤사월)에 목월시비가 세워져 있고 해마다 5월이면 황성숲에서 목월 백일장이 열린다. 살아 생전에 목월은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 어린 문재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내년 말에는 토함산 자락에 소설가 김동리와 함께 하는 ‘동리·목월 문학관’이 문을 연다. 경주가 고향인 동리는 젊은 날 목월의 문학친구다. 목월의 제자인 시인 서영수(67·목월기념사업회)씨는 “늦었지만 목월 문학관이 들어서게 돼 다행”이라면서 “문학관이 문을 열면 목월 선생은 고향인 경주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儒林(262)-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2)-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일찍이 공자는 민자건의 효행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남기고 있었다. “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형제들이 칭찬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아버지가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가 어릴 때부터 키가 작고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았던 구양순(歐陽詢·557∼641)은 당고조의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藝文類聚)’ 백 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의 설원(說苑)편에서 민자건의 효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민자건은 두 형제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다른 여인을 들여 재취하였다. 그리하여 또 두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민자건의 아버지가 관가에 가려고 외출을 하는데 마침 마부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민자건을 불러 수레를 끌도록 하였다. 그날은 몹시 추운 한겨울이었는데 추위에 떨고 있던 민자건이 수레를 끌자 수레도 저절로 떨렸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민자건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 아픈 거냐. 아니면 추워서 떨고 있는 거냐.’ 그러자 민자건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춥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고삐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아버지가 그의 팔을 잡아주다가 문득 그의 옷이 매우 얇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계모가 낳은 아이들을 불러 팔을 만져보았는데 그들의 옷은 매우 두툼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계모를 불러 꾸짖었다. ‘내가 당신에게 장가를 든 것은 무엇보다 어미를 잃은 두 자식 때문이었소. 그런데 당신은 나를 속이고 있으니 당장 집을 나가시오.’ 이로써 후처는 집을 쫓겨나가게 되었는데, 민자건이 이를 막아 세우고 난 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옷이 얇지만 어머니가 떠나가시면 네 아들이 모두 헐벗게 됩니다.’” 민자건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계모를 불러들이는 한편 계모도 더 이상 차별을 하지 못하여 화평하였다는 얘기인데, 후세에 민간에는 민자건의 계모가 자기자식에게는 솜을 두어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꽃(蘆花)을 두어 입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으로 얘기가 바뀌어 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덕행과 효행이 뛰어난 민자건을 세도가들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계강자는 자신의 채읍인 비를 다스릴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대대로 계손씨의 도성이었는데 이미 전유로부터 배신을 당해 정벌까지 하였던 계강자는 충성스럽고 덕행이 뛰어난 후임자를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계강자는 민자건의 소문을 듣자 아버지에게 효성이 깊은 민자건이야말로 자신의 도성을 다스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민자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비땅의 읍재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 이를 사양하지 말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효행이 뛰어난 의인이었을 뿐 아니라 권세에도 굴하지 않는 의기를 지녔던 민자건은 단숨에 이렇게 거절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제발 저를 위해 사절하여 주십시오. 만약 다시 저를 부르신다면 저는 반드시 문수(汶水)가에 나아가 숨을 것입니다.”
  • 儒林(261)-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儒林(261)-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제2부 周遊列國 제6장 孔子穿珠 이처럼 공자의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공자의 곁을 떠나 정치일선으로 나아간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이들 말고도 다른 제자들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하(子夏)는 거보의 읍재가 되었으며, 자화(子華)는 노나라의 사신으로 제나라에 나갔었고, 재여는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는 공자의 수제자 중 대부분이 학문의 길을 버리고 정치의 길로 나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기에는 ‘공자는 시·서·예·악을 가지고 가르쳤는데, 제자는 대략 3000명이나 되었으며,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들만도 72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3000명이라는 숫자는 공자에게 한번이라도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의 총 숫자일 것이며, 실제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던 제자는 70여명이었을 것이다. 공자 자신은 논어에서 자기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덕행에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고,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이 있고,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있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있다.” 공자 스스로가 열명의 제자들을 거론하였다 해서 흔히 이들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부르고 ‘덕행’,‘언어’,‘정사(政事)’,‘문학’을 공문사과(孔門四科)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문십철 중 염백우는 나환자가 되어 학문의 길에서 탈락되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제자들은 이처럼 학문을 버리고 정치로 나아갔던 것이다. 끝까지 스승을 좇아 공문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안회, 민자건(閔子蹇), 자하 등 서너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중 공자가 가장 사랑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안회가 공자보다 3년이나 앞서 단명하여 죽었다. 자신보다 30여세나 적었던 안회를 공자는 특히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공자 스스로 평한 공문십철 가운데에서도 첫 번째로 꼽힐 정도로 덕행이 뛰어났던 안회에 대해서 공자는 ‘안회는 그의 마음이 석 달을 두고 인을 어기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따름이다.’라고까지 극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학문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던 안회가 자기보다 먼저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喪予 天喪予)’하고 두 번이나 탄식하면서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공자는 안회의 장사를 치를 때 자기 친자식 이상으로 장사를 치르는 태도로 임하였는데, 논어에는 이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안회가 죽자 문인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 된다.’ 그러나 문인들은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나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했었는데, 나는 그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너희들 때문이다.’” 공자의 이 말은 안회가 자신을 친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어 자신도 안회를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싶었지만 어느 한사람만 편애하는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차마 보여줄 수 없어 공평하게 사랑을 나누어주느라 각별한 애정을 주지 못하였다는 인간적인 탄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문십철 중에 공자의 뒤를 좇아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은 오직 민자건과 자하뿐이었다. 물론 민자건에게도 정계로부터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민자건은 이름이 민손(閔損)으로 공자보다 15살 아래의 제자였는데 특히 효행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 [지진 해일 대재앙] 적도의 생지옥엔 주인없는 시신들만

    |반다아체(인도네시아) 연합|이번 지진해일로 가장 피해가 컸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북쪽 아체주(州)의 참상은 한마디로 ‘생지옥’ 그 자체였다. 해변에 위치한 아체주의 수도 반다아체의 도심은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져 내린 채 진흙을 뒤집어 쓰고 있었고 거리마다 남녀노소를 구별할 수 없는 시신이 뒤엉켜 나뒹굴고 있었다. ●도심엔 건물형체마저 사라져 주정부 청사 건물은 쓰레기더미에 뒤덮여 있었고 인구 밀집지역인 해변에는 건물의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안으로 흐르는 크루엥아체강 다리 밑에는 수백구의 시신이 둥둥 떠있다. 길바닥에 짐승의 주검처럼 방치돼 파리와 벌레들의 공격을 받는 시신들은 적도의 찌는 듯한 무더위로 급속하게 부패하고 있어 참혹했다. 누렇게 변색한 아기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고, 한 청년의 시신은 결혼반지를 낀 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어 원망의 손짓을 하는 듯했다. 다리 앞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구조대원 오마르(29)는 ‘시신들을 왜 빨리 수거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리도 정신이 없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도 “우선 무너진 건물이나 강물 속 등을 수색하면서 혹시나 아직 생존자가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대원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엄령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던 희생자 가족들은 고향을 지키던 부모형제를 애타게 찾고 있으나 며칠을 둘러봐도 시신조차 찾을 수 없어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피해현장 곳곳에 가족들의 인상착의와 자신의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를 붙이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거리를 오가는 군인들과 희생자 가족들마저 자취를 감추자 반다아체는 주인없는 시체들만 모여있는 유령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태국 등 다른 피해국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의 사망자들은 신원 확인 절차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짐승처럼 무참하게 땅에 파묻히고 있다. 반다아체의 도심 곳곳에 널려 있던 시신을 수거해온 군용 트럭들은 도로변에 차를 멈추고 비닐 등에 싼 시신들을 끌어내려 거대한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있다. 그러나 오열하는 가족들이나 항의하는 외부 감시인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주민들은 “계엄령 치하에서 정부군이 하는 일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거나 항의를 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라며 눈치를 보고 있다. ●대탈출 서두르는 생존자들 반면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군 관계자는 “지금까지 방치된 시신들은 대부분 일가족이 몰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찾아올 가족도 없는 시신들을 무작정 길바닥에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전염병이 퍼질 가능성이 커 하루빨리 묻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많은 주민들은 죽음의 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대탈출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교통수단 부족과 기름 공급난 등으로 이마저 거의 불가능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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