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시대] 특권의식은 없다/정희섭 주한덴마크대사관 투자담당관
아침 8시, 수많은 자전거 행렬이 도시를 수놓는다. 환갑을 훌쩍 넘어 보이는 노신사도, 대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앳된 얼굴의 젊은이도, 늘씬한 금발미인도 모두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댄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정해진 자전거 교통규칙을 준수하며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아간다.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훨씬 많아 보인다. 그지없이 상쾌한 공기가 출근길 사람들에게 보답한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매일 아침 펼쳐지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사람들의 출근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자전거 행렬 속에는 기업체 사장도 있고, 학생도 있고, 맞벌이 주부도 있고, 학교 선생님도 있으며, 국회의원도 있고, 심지어 정부 부처의 수장인 장관도 있다. 모두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 사회적 지위가 누가 더 높으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식은 찾아 볼 수 없다. 제 일터로 신성한 업무를 수행하러 가는 ‘노동자’가 있을 뿐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정치인이라고 해서, 아니면 돈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먼저 앞서 가라고 자전거길을 내주는 일은 결코 없다.
지난해 가을 덴마크 여왕의 국빈방문 준비로 사무실 전체가 분주하던 때였다. 모 부처의 공무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본인이 근무하는 부서의 국장과 덴마크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현지 상담을 진행할 수 있는 담당자를 섭외해 달라는 요청과 더불어 덴마크 외무부에 이동시에 필요한 의전차량을 준비해 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덴마크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석하거나, 중요한 업무를 보러 여러번 덴마크 외무부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의전차량은 고사하고 흔히 말하는 업무차량을 본 적이 없다. 외근을 나갈 때는 모두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특별경호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국가원수급이 아닌 이상 예외 없이 적용된다. 어떤 부서의 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맛보고 싶어하는 얄팍한 특권의식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게 되니까 말이다.
“덴마크에서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십니다.” “우리나라식의 의전용 업무차량은 없고, 대중교통 수단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편하게 마련되어 있으니 그걸 이용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나의 대답에 전화를 건 공무원은 약간 놀라는 듯했다. 업무로 바쁜 와중에 전화를 받은 터라 일단 요청을 하셨으니 알아는 보겠다고 약속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지난 수십년간 민주화와 선진화를 부르짖고 지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의 투명성이 그다지 높지 않은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특권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부서의 책임자가 되는 순간, 또는 어떤 중대사안을 처리하는 의사결정자가 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보다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싹튼다. 심지어 직위를 이용해 무엇인가를 공짜로 얻으려 하거나 먼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특권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똬리를 튼다. 이러한 공정하지 못한 특권의식이 있는 한 투명성은 보장될 수 없다. 투명성이 없기에 위기에 미리 대처하는 방안이 나올 수도 없다. 안개가 아주 많이 낀 아침에 자동차는 거북이걸음을 할 수밖에 없듯이.
오늘 아침 문득 덴마크 사람들의 출근 모습이 떠올랐다. 자전거도로가 거의 없는 우리의 상황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일년에 몇번만이라도 대중교통 수단으로 출근하는 국회의원·장관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배기량 큰 검정색 승용차의 이미지가 국민의 머리에서 사라질 때, 우리도 언젠가는 덴마크의 아침과 같은 건강한 출근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특권의식은 설 땅이 없다.
정희섭 주한덴마크대사관 투자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