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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베트남과 미국 대통령/최광숙 논설위원

    [씨줄날줄] 베트남과 미국 대통령/최광숙 논설위원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야당이던 민주당 사무실을 불법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받아 임기 중에 사퇴했다. 하지만 그 일만으로 그를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는 몇 가지 업적이 있다. 하나는 ‘핑퐁외교’(1971년)로 죽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을 국제무대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있게 밑거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또 그동안 금을 기준으로 하던 금본위제를 폐지(1971년)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했다. 이는 금융사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다.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베트남전을 종식(1975년)시킨 것도 다름 아닌 닉슨이다. 앞서 미국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은 케네디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전 대통령 때다.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경비정이 미군 구축함을 선제 공격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대적으로 폭격을 가하며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에 뛰어들었다. 훗날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회고록에서 이 전투가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고백했다. 존슨은 결국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거센 여론에 밀려 재선을 포기했고, 베트남전에서 군사적 개입 중단을 공약으로 내세운 닉슨이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어도 그 이후 미국 대선에서 베트남전은 단골 이슈로 등장했다. 베트남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당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젊은 청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훗날 대선에서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갔다는 의혹을 받았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주방위군으로 후방 근무를 하면서 징집을 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다. 최근 베트남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쩐다이꽝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나 살상무기 금지 조치를 전면 풀기로 합의했다. 1995년 미·베트남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뒤 2000년 클린턴이 미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 양국 간에 화해가 이뤄졌지만 미국은 군사 분야의 빗장만은 풀지 않았었다. 베트남 공산당이 반체제 인사를 탄압한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사실 미국은 24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베트남전에 쏟아붓고도 최초로 ‘실패한 전쟁’으로 막을 내린 패전의 아픔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게다. 오바마의 목적은 중국의 남중국해 진출 견제라는 분석이다. 베트남도 중국에 맞서기 위해 미국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다. 베트남은 금수 조치 해제의 대가로 미 해군의 깜라인만 기항을 허용할 것으로 보인다. 국익 앞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 69년 만에 졸업장 받았다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 69년 만에 졸업장 받았다

    “억울하게 죽은 병진이의 꿈을 후배들이 더 크게 펼쳐 줬으면 좋겠습니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동국대 본관에서 친동생 고 이병진씨의 명예졸업장을 대신 받은 이병윤(94)씨는 “1947년 이 대학에 입학한 동생은 유쾌한 달변가였고, 정치에 꿈이 있어 정치와 법을 전공했다”며 “이제라도 졸업을 하게 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1925년생인 고인은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하면서 경남 진주에서 홀로 상경했다. 고인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의용군에 징집됐다. 같은 해 9·28 서울 수복 직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우익 학생의 고발로 군경에 연행됐다.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다 숨졌다. 동생이 사망한 지 60년이 지난 2010년 형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로부터 동생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배상금 6000만원을 받았다. 이 돈을 지난달 전액 동국대에 기부했다. 학교도 고인의 학적을 복원해 이날 학위수여식에서 유족에게 명예 정치학사 학위를 전달했다. 입학한 지 69년 만의 졸업이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직장인을 위한 서바이벌 IT] (26) 로봇⑤ 드론의 비상

    [직장인을 위한 서바이벌 IT] (26) 로봇⑤ 드론의 비상

    할리우드로 간 노마 제인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공장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만드는 군수산업 시설로 바뀌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남자들은 전선으로 징집되었고 그 빈자리는 여자들이 채웠지만 여전히 일손은 부족했다. 정부는 비행기 공장에서 리벳 작업을 하던 로지를 모델로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라는 근육질 여성의 포스터를 만들어 인력 동원 캠페인을 벌였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어느 날, 할리우드 지역의 군사 홍보를 담당하던 로널드 레이건 대위는 전속 사진작가인 데이비드 코노버를 무인 비행기 제작 회사인 ‘라디오플레인’으로 보냈다. 신문에 내보낼 또 다른 리벳공 로지를 찾던 코노버에게 노마 제인이라는 19세 여공이 눈에 띄었다. 제인의 남편은 해군에 입대해 태평양 전장으로 나갔다. 그녀는 일주일에 20달러를 받으며 하루에 10시간씩 공장 일을 하는 힘겨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코노보는 허리에 사원증을 차고 프로펠러를 조립하는 제인을 모델로 촬영하였고 그 몇 장의 사진이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얼마 후 그녀는 공장을 그만두고 할리우드로 떠났다. 훗날 노마 제인은 세기의 여배우 메릴린 먼로로 다시 태어났고, 로널드 레이건 대위는 미국의 4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인연이 있었다. 그녀가 조립했던 비행기는 세계 최초의 대량생산 드론인 ‘OQ-2 라디오플레인’으로 2차 대전 당시 1만 5000대를 생산해 훈련용으로 공급하였다. 드론이라고 불리는 무인 항공기는 베트남전에 배치되면서 본격적으로 군사 작전에 사용되었다. 당시 라이언사가 제작한 ‘파이어비’는 3400회나 출격하여 실전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2001년 오사마 빈 라덴 수색과 아프가니스탄 공격으로 일반에게 알려진 ‘프레데터’는 미 공군의 대표적인 무인기로 한 대 가격이 50억 원에 이른다. 지금까지 최고 성능의 무인기로는 노스롭그루먼사의 고고도 정찰기 ‘글로벌 호크’를 꼽는다. 한번 뜨면 35시간을 비행하며 지상 20km 상공에서 땅 위의 30cm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첩보위성 수준의 성능을 자랑한다. 작전 반경이 3000km에 이르는 이 드론의 가격은 2000억 원이 넘는다. 미국의 방위산업 컨설팅 업체인 틸그룹은 드론의 전체 시장 규모가 2013년 60억 달러에서 2022년에는 두 배 수준인 114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였다. 지금은 군사용이 전체 시장의 90%를 차지하지만, 민간 부문의 상업용과 개인용 드론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마케팅 조사업체 BI인텔리전스는 2015년 5억 달러 수준의 민간용 드론 시장이 연평균 20% 이상 성장하여 2024년에는 30억 달러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드론의 저력 민간용 드론의 시장이 커지자 인텔, 구글, 페이스북을 필두로 한 글로벌 IT 기업과 록히드마틴과 같은 군사용 업체까지 가세하였다. 2014년 11월, 독일의 함부르크 인근 공항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여들었다. 어둠이 깔리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LED로 단장한 100대의 드론이 날아올라 밤하늘을 수놓으며 군무를 펼쳤다. 인텔이 주관한 이날 행사는 동시 비행 최대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2016년 국제가전박람회 CES에서 인텔의 CEO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기조연설을 통해 이 영상을 공개하며 드론 사업 진출을 재천명했다. 이 공연에 사용된 드론은 CES 개막 전날 인텔이 인수 발표를 한 독일의 ‘어센딩 테크놀러지스’사의 제품이었다. 인텔은 작년 8월에도 중국의 드론 회사인 유닉(Yuneec)에 6000만 달러를 투자하였다. 2016년 CES 최고의 드론으로 선정된 유닉의 ‘타이푼’에는 인텔의 ‘아톰’ 칩과 3D 카메라인 ‘리얼센스’가 탑재되었다. 스마트폰에서 기회를 놓친 PC의 제왕 인텔이 세상 모든 드론에 자신들의 칩을 장착하는 ‘인텔 인사이드’를 다시 한번 꿈꾸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드론을 띄워 전 세계를 인터넷으로 연결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2014년 4월 구글은 직원 20명의 신생 벤처 기업인 ‘타이탄 에어로스페이스’를 인수하였다. 이 회사에서 개발 중인 드론은 날개 길이가 50m에 이르는데 그 위에는 태양광 패널이 빼곡히 붙어 있어 5년 동안 태양 에너지만으로 비행할 수 있다. 구글과 치열한 인수전을 벌여온 페이스북은 6000만 달러를 제시하며 선수를 쳤지만 한 달 뒤 인수 조건은 알려지지 않은 채 타이탄은 구글로 넘어갔다. 구글은 대기권 위성으로 불리는 이 회사의 드론 ‘솔라라’로 차세대 5G 통신망을 구축하는 ‘스카이벤더’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초고주파인 밀리미터파를 사용하는 스카이벤더는 현재의 4G LTE보다 40배나 빠른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인수전에서 쓴잔을 마신 페이스북은 타이탄의 경쟁사인 영국의 ‘어센타’를 인수하고 미항공우주국(NASA) 출신 인력들을 모아 커넥티비티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어센타는 태양광만으로 최장 드론 운행을 기록한 벤처 기업이다. 이곳에서 개발하던 태양광 드론 ‘아퀼라’는 보잉 737보다 긴 날개를 가졌지만 소형 자동차보다 가볍다. 2015년 3월 27일,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아퀼라가 첫 비행에 성공했습니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아퀼라는 1만 8000m 상공에서 수개월 동안 비행하며 레이저 통신 기술로 하늘의 기지국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프로젝트의 목적이 아직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저개발국가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인터넷 오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무료로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통신사의 역할을 대신하는 공중 기지국 드론에는 미래 통신 산업을 뒤흔들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드론의 미래 드론은 마치 새가 되어 나는 것처럼 지금까지 인간이 볼 수 없었던 관점을 제공한다. ‘하늘 위의 영상 혁명’으로 불리는 드론은 이미 영화 촬영이나 예능 제작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몸이 되었다. 기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현장의 생생한 화면을 담아내는 드론은 뉴스 취재의 새로운 수단으로 등장했다. 로봇이 기사를 쓰는 ‘로봇 저널리즘’에 이어 ‘드론 저널리즘’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레저용 드론은 스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탈 때도 공중에서 나를 따라오며 멋진 셀프 동영상을 찍어준다. 재난 구조, 산불 예방, 적조 모니터링과 같은 공공 부문에서도 드론은 위력을 발휘한다. 드론은 시각 기능의 확장뿐만 아니라 탁월한 공간 이동의 도구이기도 하다. 글로벌 기업들이 물류 전쟁에 대비해 드론에 공을 들이는 이유이다. 아마존은 당일 배송을 넘어 ‘30분 배송’을 공언하며 드론을 이용한 ‘프라임 에어’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구글도 2017년 상용화를 목표로 구글판 드론 택배인 ‘프로젝트 윙’을 준비해 왔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 중국의 IT 삼인방 BAT(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독일의 글로벌 운송회사 DHL 등도 드론을 활용하는 물류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드론이 ‘날개 달린 스마트폰’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외신에 따르면 2015년 한 해에 미국에서만 70만 대의 드론이 판매되었고 2025년까지 하루 백만 대가 비행할 것이라고 한다. 머지않아 드론으로 하늘이 뒤덮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우려가 되는 사생활 침해, 안전사고, 해킹 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것은 비단 드론 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물인터넷, 스마트카, 인공지능과 같이 이미 우리 곁에 와있는 미래의 기술들이 안고 있는 공통된 고민이다. 제도와 인식과 기술이 얽혀 있는 복잡한 이슈지만 영화의 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막 싹이 트는 드론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본다. 다음 회에는 드론의 마지막 승부처가 어딘지 파헤쳐 보자.  김지연 R&D경영연구소 소장 jyk9088@gmail.com  <지난 칼럼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List.php?section=kimjy_it
  • 탈레반 맞서 싸운 10살 소년 결국 반군에 암살

    탈레반 맞서 싸운 10살 소년 결국 반군에 암살

    겨우 10살의 나이에 탈레반에 맞서 싸웠던 소년병이 결국 반군에 암살당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현지의 소년병 징집 관행을 둘러싼 국제적 비판이 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우르즈간주의 주도 타린코트 시 경찰은 지난 1일(현지시간) 10세 소년 와실 아마드가 등교하던 길에 집 근처에서 머리에 두 발의 총상을 입고 반군에 살해당했다고 밝혔다. 아마드는 과거 아버지가 탈레반에 사살된 사건을 기점으로 탈레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 후 탈레반 지휘관이었다가 친정부군으로 전향한 삼촌과 함께 여러 차례 반군에 맞서 싸운 아마드는 지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군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현지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근방에 인상착의가 널리 알려졌었다. 이후 가족들은 아마드의 소년병 복무를 중단시키고 학교에 보내는 등 평범한 삶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반군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인권단체 ‘아프가니스탄 독립 인권위원회’(Afghanistan Independent Human Rights Commission)는 아마드의 가족과 아프간 정부, 탈레반 세 주체 모두 아마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위원회 대변인 라푸일라 바이다르는 “어쩌면 아마드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무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건 경찰(친정부군)이 그의 신분을 노출시킨 것, 특히 탈레반에게도 알려지도록 방치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어 “친정부군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탈레반은 너무도 유명해져버린 그를 죽였다”며 소년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친정부군의 잘못은 탈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년병 징집은 명백한 불법이다. 아프간 정부는 1994년 유엔 안보리의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함으로서 소년병 징집 및 운용을 중단할 것을 선언했었고 지난해 2월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미성년자를 무장병력으로 삼는 행위를 범죄로 취급하는 법령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영국에 본부를 둔 NGO ‘소년병반대국제연합’(Child Soldier International)이 지난해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같은 규제에도 불구, 탈레반과 친정부군 모두 오랜 기간 미성년 병사들을 버젓이 운용하고 있다. 친정부군 측에 자원하는 소년병들은 애국심, 명예, 자식으로서의 도리 등 다양한 이유로 군에 참여하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렇게 징집된 소년병들은 거점 확보나 전투와 같은 일반 군인의 의무를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다. 반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쿠나르, 로가르, 자불 주 친정부군 병력의 10%는 소년병인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인 통계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반군 세력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소년병 운용 규모도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부의 칸다하르, 헬만드 주, 그리고 파키스탄 접경지대에 해당하는 팍티야, 후스트, 팍티카 주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탈레반측도 전투에 수많은 소년병을 활용하고 있다. 이들 병력은 자살폭탄테러 혹은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벌어진 아프간 소재 프랑스 고등학교 자폭테러를 비롯해 여러 사건에서 이러한 탈레반 소년병들의 연루 사실이 확인됐다. 소년병들은 이처럼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위험에 늘 노출돼있는 것은 물론, 군 조직에 의한 인권침해의 가능성도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양 세력의 소년병들 모두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위험성이 크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대통령을 위시한 아프간 정부가 소년병 징집을 금지하는 규제를 마련해낸 것은 사실이나, “소년병들을 식별, 분류, 해방시킬 수 있는 실질적 매커니즘 도입에 실패했다”며 상황 개선을 촉구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10살 영웅’의 죽음으로 본 아프간 소년병 실상

    ‘10살 영웅’의 죽음으로 본 아프간 소년병 실상

    겨우 10살의 나이에 탈레반에 맞서 싸웠던 소년병이 결국 반군에 암살당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현지의 소년병 징집 관행을 둘러싼 국제적 비판이 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우르즈간주의 주도 타린코트 시 경찰은 지난 1일(현지시간) 10세 소년 와실 아마드가 등교하던 길에 집 근처에서 머리에 두 발의 총상을 입고 반군에 살해당했다고 밝혔다. 아마드는 과거 아버지가 탈레반에 사살된 사건을 기점으로 탈레반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 후 탈레반 지휘관이었다가 친정부군으로 전향한 삼촌과 함께 여러 차례 반군에 맞서 싸운 아마드는 지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군복 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현지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근방에 인상착의가 널리 알려졌었다. 이후 가족들은 아마드의 소년병 복무를 중단시키고 학교에 보내는 등 평범한 삶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반군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인권단체 ‘아프가니스탄 독립 인권위원회’(Afghanistan Independent Human Rights Commission)는 아마드의 가족과 아프간 정부, 탈레반 세 주체 모두 아마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위원회 대변인 라푸일라 바이다르는 “어쩌면 아마드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무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됐건 경찰(친정부군)이 그의 신분을 노출시킨 것, 특히 탈레반에게도 알려지도록 방치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이어 “친정부군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탈레반은 너무도 유명해져버린 그를 죽였다”며 소년을 위험으로 몰아넣은 친정부군의 잘못은 탈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년병 징집은 명백한 불법이다. 아프간 정부는 1994년 유엔 안보리의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함으로서 소년병 징집 및 운용을 중단할 것을 선언했었고 지난해 2월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미성년자를 무장병력으로 삼는 행위를 범죄로 취급하는 법령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영국에 본부를 둔 NGO ‘소년병반대국제연합’(Child Soldier International)이 지난해 6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같은 규제에도 불구, 탈레반과 친정부군 모두 오랜 기간 미성년 병사들을 버젓이 운용하고 있다. 친정부군 측에 자원하는 소년병들은 애국심, 명예, 자식으로서의 도리 등 다양한 이유로 군에 참여하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역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렇게 징집된 소년병들은 거점 확보나 전투와 같은 일반 군인의 의무를 동일하게 수행하고 있다. 반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쿠나르, 로가르, 자불 주 친정부군 병력의 10%는 소년병인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인 통계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반군 세력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소년병 운용 규모도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부의 칸다하르, 헬만드 주, 그리고 파키스탄 접경지대에 해당하는 팍티야, 후스트, 팍티카 주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탈레반측도 전투에 수많은 소년병을 활용하고 있다. 이들 병력은 자살폭탄테러 혹은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벌어진 아프간 소재 프랑스 고등학교 자폭테러를 비롯해 여러 사건에서 이러한 탈레반 소년병들의 연루 사실이 확인됐다. 소년병들은 이처럼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위험에 늘 노출돼있는 것은 물론, 군 조직에 의한 인권침해의 가능성도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양 세력의 소년병들 모두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위험성이 크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대통령을 위시한 아프간 정부가 소년병 징집을 금지하는 규제를 마련해낸 것은 사실이나, “소년병들을 식별, 분류, 해방시킬 수 있는 실질적 매커니즘 도입에 실패했다”며 상황 개선을 촉구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6) 봄날의 문무대, 그 겨울의 병영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6) 봄날의 문무대, 그 겨울의 병영

    중대 막사 지붕에 흰 눈이 쌓였다. 달빛이 하얀 눈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밤이었다. 멀건 육개장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침상에 쪼그려 TV를 보던 중 어디선가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뒤편에 집합하라는 고참의 명령. 다섯 명의 입대 동기들은 부리나케 맨발로 뛰어나가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5분쯤 지났을까? 술에 불콰해진 고참병 둘이 나타나 “솔직히 말하라, 고향 생각이 나느냐”고 엉뚱하게 물었다. 고향 생각, 나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간절한 긴긴 겨울밤이었다. 이구동성 “네”라고 대답했다. 순간 여기저기서 무섭게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등병들이 군기가 빠져 군대 와서 집 생각하고 있다니, 고향 생각 나지 않게 해 주겠다”는 고함과 함께 발길질이 계속되었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어디서 들은 대로 다치지 않게 요령껏 맞는답시고 모두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바빴다. 잠시 뒤 다른 선임병이 부드럽게 물었다. “고향 생각이 나느냐“는 똑같은 질문이다. 어, 누구를 바보로 아나. “아닙니다”고 악에 받쳐 대답하자 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군기가 빠져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등병이 벌써부터 군기가 빠져 거짓말을 하면 이 나라 이 강산은 누가 지키느냐’는 훈계와 함께 구타는 한 시간가량 계속되다 끝났다. 세면장에 가서 터진 입술을 씻고 침상에 누우니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어린다.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기 시작했다. 입대 동기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 또한 울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지금의 군대가 아니다. 80년대 어느 겨울밤 내가 경험한 군대 풍경이다. 80년대는 군인의 시대였다. 1979년 12·12로 권력을 틀어쥔 군사 정권의 영향으로 군인들의 힘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불만을 갖거나 반발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험악했던 시절, 군대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가혹한 통과의례였다. 휴머니즘을 포기한 지긋지긋한 내무반 생활,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친절한 구타 등등…. 군 시절을 되새기면 떠오르는 우울한 기억들이다. 그래서 군은 이 땅의 중년에게 젊은 날의 상처쯤으로 존재한다. 군대 이전의 군대도 있었다. 문무대다. 봄은 문무대와 함께 왔다. 입학한 지 한 달, 라일락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이면 신입생들은 성남에 있는 학생중앙군사학교, 즉 문무대로 5박 6일 병영집체 훈련을 가야 했다. 우리는 그저 간단하게 남한산성 간다고들 했다. 그리고 남한산성이란 말이 육군형무소를 상징하는 무서운 의미가 있다는 것은 훗날 입대해서 알았다. “남한산성 한 번 가면 그뿐이야.” 걸핏하면 야전삽 자루로 우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고참병을 통해 그 말의 무시무시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서슬이 퍼렇던 시대였지만 젊은 문무대는 늘 시끄러웠다. 군사훈련을 거부하며 시위하는 일이 발생하면 주동 학생에게는 어김없이 강제 조기징집의 보복이 따랐다. 문무대 입소가 남학생에게는 무서움과 혐오의 대상이지만 여학생들에게는 일주일 휴강이라는 큰 떡을 안기게 된다. 문무대 입소에는 사연도 많다. 같은 과 여학생들은 저마다 맘에 드는 남학생에게 선물을 안기기도 하고 입소 중간에 하루 있는 면회를 이용해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입소 전 여학생에게 받은 초콜릿과 담배의 양으로 인기를 가늠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과는 아예 추첨을 통해 남학생과 여학생 간에 파트너를 정해 위문품을 들고 면회를 가게 하기도 했다. 남학생들만 득실대는 공대생들이 가장 서럽다는 때가 바로 문무대 입소 시절이었다. 단순 면회 목적의 짝짓기도 때로는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른바 문무대 커플이란 말까지 등장한 시절이 80년대다. 군 생활은 힘들었다. 1990년 보안사 윤석양 이병과 보병 제9사단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에서 드러나듯 80년대 군대는 암흑의 시기였다. 인권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중대장 앞에서 여당 표를 찍었다. 지금의 민주화 시대에는 감히 상상조차 힘든 풍경쯤 된다. 그 시절 군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의 아들 대 어둠의 자식들’ 논쟁이다. 백 있고 돈 있는 집의 아들들은 군을 빠지거나 면제받았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결혼 초 아내에게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는 “왜 자기만 현역이냐”는 것이었다. 아내 친구의 잘난(?) 남편들은 현역 출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대장 위에 병장이다’고 열심히 설명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래서 지금도 청문회나 하마평에 등장하는 권력자들의 병역 편법을 들을라치면 화가 뻗치게 된다. 큰 국제경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가 앞장서 부자 프로스포츠 선수에게까지 병역혜택을 남발하고 엄청난 포상금을 안긴다.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으므로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힘들게 군대생활을 한 지금의 중년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된다. 군대가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만 가는 곳처럼 인식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병장 콤플렉스가 아니냐고 놀린다. 백사(白蛇)를 뽀얗게 고와 중대장에게 상납한 덕에 GP(감시초소)에서도 매달 휴가를 나왔다는 선배가 실은 동사무소 방위병을 일컫는 ‘똥방위’ 출신임을 알았을 때의 배신감. 주말마다 외출증 끊어 이대 앞을 주름잡았다는, 부모를 잘 둔 신의 아들이 들려주는 허풍에 기죽었던 기억들이 여전히 긍정적인 군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 병영 풍경은 중년에게는 씁쓸달콤한 기억으로 살아 있는 생물이다. 여친이 왔다는 전갈에 속눈썹이 휘날리도록 위병소로 뛰었던 기억, 들기름에 잰 고추장에 찍어 먹던 양파의 매서운 맛 등등은 갈수록 새록새록하다. 가끔 술자리에서 들려지는 선후배들의 신산했던 군대 얘기는 일순간 좌중을 숙연케 한다. 그런 밤 귀갓길 생각나는 옛 노래가 있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 상처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나….” ‘전선을 간다’라는 애창 군가다. 논산훈련소 30연대 훈련병 시절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의 ‘진짜 사나이’를 줄곧 불렀지만 너무 직설적어서 세련미가 떨어진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우리는 이제 군 내무반이 등장하는 TV광고를 바라보며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소주잔을 들이켜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기성세대가 됐다. 그리고 그때의 군번은 아내 몰래 꼬불쳐 둔 통장의 비밀번호로 사랑받는다.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결혼해도 아들만은 절대로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절, 그래도 가끔 돌이켜 보면 소중한 추억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 처절하고 쓰라렸던 그 시절도 문득문득 토첼리의 세레나데처럼 ‘우리 기쁜 젊은 날’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새해다. 그 겨울 폭설 속에 행군하며 부르던 군가가 문득 생각난다.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이 고지 저 능선에 / 쏟아지는 별빛은 어머님의 고운 눈길.’ ‘사나이 한목숨’이다. 둥근 보름달이 터질 듯이 환하던 그 밤 ‘어머님의 고운 눈길’을 부르면서 우리 모두는 목이 메었다. 그리고 그날의 꽃다운 청춘들도 이제는 늙었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l.com
  • 김한길 ‘안철수 신당’ 합류 선언…“인재영입 위해 최선 다하겠다”

    김한길 ‘안철수 신당’ 합류 선언…“인재영입 위해 최선 다하겠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김한길 의원이 7일 ‘안철수 신당’ 합류를 선언했다. 김 의원의 가세와 함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신당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안철수 신당’에 참여할 인물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김 의원과 안철수 의원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1시간여 동안 오찬 회동을 가진 뒤 기자들과 만나 “신당 창당에 함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를 찾고, 민생 중심 정당을 만들기로 뜻을 같이했다”고 발표했다. 이날부터 안 의원과 한배를 타게 된 김 의원은 당장 인재 영입에 주력하고 야권 신당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재 영입이 아닌 징집이라도 해야 할 판”이라며 “인재를 구하고 모셔 오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다. 또 “무소속 천정배 의원 등 신당을 추진하는 인사들과 대화를 나눠 왔다”며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길을 찾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김한길·안철수 투 톱 체제’를 구축했던 과거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시절과 달리 이번에는 김 의원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신당에 참여하는 문병호 의원은 “김 의원은 한발에서 반 발짝 정도 뒤에 있지 않겠는가”라고 전망했다. 이와 함께 2012년 대선 때 ‘안철수의 진심 캠프’ 국정자문단에서 활동한 한 명예교수는 이날 신당 창당을 위한 공동 창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한 명예교수는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에서 안 의원과 회동한 뒤 “제3당을 만드는 정치적 모험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앞서 공동 창준위원장직을 제안했지만 거절 의사를 밝힌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해 삼고초려를 한다는 방침이다. 또 안 의원은 이날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인 ‘마포 당사’의 브리핑룸 일부를 공개한 데 이어 8일에는 당명을 발표하며 ‘신당 바람몰이’를 이어갈 계획이다. 당명에는 안 의원의 상징인 ‘새정치’가 빠질 가능성이 크다. 한편 더민주 수도권 4선이자 비주류인 김영환(경기 안산 상록을) 의원은 이르면 8일 탈당을 선언할 것으로 알려졌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김한길·안철수, 공동행보 시작… “인재 영입에 신당 명운 걸렸다”

    김한길·안철수, 공동행보 시작… “인재 영입에 신당 명운 걸렸다”

    김한길 무소속 의원이 7일 안철수 의원 측 신당에 합류할 것을 선언했다. 김 의원과 안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오찬회동을 갖고 신당 창당 협력과 최고의 인재 영입 주력, 민생과 격차해소에 모든 정치의 중심을 맞추는 정당 만들기 등 3가지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부터 공동 행보를 하기로 하고 오후 서울 마포구 당사에서 북한의 수소탄 핵실험에 대한 성명을 함께 발표할 예정이다. 공동 행보를 시작한 두 의원은 당분간 특히 신당에 참여할 인재를 영입하는 데 노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안 의원은 “이 당은 안철수 개인의 당이 아니다”라면서 “정말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를 찾는 데 열심히 노력하고자 한다”고 밝혔고, 김 의원도 “인재 영입에 신당의 명운이 걸렸다. 인재 영입이 아니라 인재 징집이라도 해야할 판”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또 두 사람의 합의사항이자 신당의 중심 가치로 예상되는 민생 및 격차해소와 관련 “안 의원께서 격차해소를 말씀했고 저는 헌법 전문에 나오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목표로 정치를 하겠다고 말씀드려왔다”면서 “신당의 지향점이 민생 우선이고 격차해소와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위한다는 것에 전혀 이견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얀마 난민 “아이들 교육 위해 한국 왔어요”

    미얀마 난민 “아이들 교육 위해 한국 왔어요”

    미얀마와 인접한 태국 북서부에는 9개의 난민캠프가 있다. 이곳에 독재정권의 탄압과 내전을 피해 탈출한 10만명가량의 난민이 산다. 대부분 나뭇잎으로 지은 전통가옥에 사는 등 생활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다.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살던 미얀마인 네 가족 22명이 23일 아침 인천국제공항 입국심사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창 밖은 한겨울 날씨지만 네 가족은 면치마에 반팔 티셔츠의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네 가족은 이날 새벽 태국 수완나품 공항을 출발해 4시간여를 날아 오전 8시 30분 그리던 땅에 착륙했다. 한국이 난민법을 시행한 지 2년 만의 첫 ‘재정착 난민’ 입국이다. 재정착 난민 제도는 유엔난민기구(UNHCR)의 추천을 받아 한국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난민으로 인정해 받아들이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2012년 난민법 개정을 통해 세계에서 29번째로 재정착 난민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가 됐다. 낯선 나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하느라 피곤해 보였지만 목소리에는 희망이 들어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인 쿠 투(44)는 환영식에서 “난민 캠프에서는 (캠프 밖으로) 왔다 갔다 할 기회도 없이 어렵게 살아왔다. 한국 국민들이 초대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지에서 주로 목수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다. 미얀마 소수민족 카렌족인 쿠 투는 1993년 내전에 따른 징집을 피해 태국 메라 난민 캠프에 들어갔다. 처음엔 아내, 큰딸과 함께 들어갔지만 지금은 여섯 살 된 아들까지 8명의 대가족을 이뤘다. 그러나 하루 일당이 한국 돈 6000원에 불과한 캠프에서는 생계를 잇기가 힘들었다. 그의 오른쪽 의족은 돈을 벌기 위해 캠프 외부의 벌목공장에서 불법 취직하고 일하다가 다친 결과다. 네 가족은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공항을 나섰다. 이들은 인천난민센터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 앞으로 정착할 곳을 결정하게 된다. 아이들은 내년 3월부터 공립다문화학교인 한누리학교를 다니게 된다. 국내에는 경기도 포천 등에 카렌족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이들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데는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 문제가 가장 컸다. 법무부 난민과 정금심 계장은 “온순한 성품의 카렌족 가족들은 아이들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겠다는 열망이 높았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지난 8월 UNHCR에서 후보군을 추천받아 신원 조회 등을 거쳐 직접 현지 면접을 진행했다. 일곱 가족 38명에 대한 면접을 통해 네 가족이 최종 선정됐다. 정 계장은 “면접 당시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아이들이 춤을 추기도 했다”며 “한류가 난민캠프에도 영향을 미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2017년까지 매년 30명 이내로 미얀마 출신의 재정착 난민을 선정할 예정이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신고 장려하고 엄하게 처벌…외부 감시기능도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병영 내 가혹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군 수뇌부가 가해자 처벌에 급급한 단기적 처방을 남발하기보다 인권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에 발맞춰 징병제의 근본적 개혁, 군에 대한 외부의 감시감독을 강화하는 총체적 대책이 필요한 때라는 지적도 나온다. 윤종성(예비역 육군 소장) 성신여대 교양교육대학 교수는 “기본적으로 우리 군 간부들이 대부분 병사생활을 거쳐 간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사들의 병영생활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다”며 “군 지휘관들이 폭행 사건에 대해 병사들을 관리하다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중대한 범죄라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참으면 윤 일병이 되고 욱하면 임 병장이 된다’고 말했던 소설가 이외수의 지적처럼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 신고를 장려해 엄하게 처벌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병욱 상명대 군사학과 교수는 “지휘관들은 대부분 군에서 인권을 강조하면 전투력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우리가 우수하다고 벤치마킹하는 독일군은 정신교육에서 자유인격체, 책임의식, 만반의 준비태세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독일이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이 건강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게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처럼 우리 군도 장병 하나하나를 자유인격체로 보고 인권을 지켜줄 때 진짜 강한 군대, 선진 병영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은 “군 인권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군에 부적응한 자원을 무리하게 징집하고 있는 현행 징병제 자체를 손보는 게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라며 “사후적으로는 군 사법제도 개선과 인권 감시, 옴부즈맨제도를 도입하는 방법 등이 있다”고 밝혔다. 김 편집장은 “윤 일병 사건과 임 병장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던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가 단기적인 대책 위주로만 진행되다 보니 장기적인 복무제도와 병역제도, 군 사법제도 개혁 등이 미흡했다”고 아쉬워했다. 국회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별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은 “군 지휘부가 옛날 군대에 비해 지금은 참 좋아졌다는 시각에서 군 인권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사고가 나면 초동 수사부터 가족이나 전문가의 참여를 제한하고 군이 자체적으로 혼자 조사하고 공식 발표하는 관행을 버려야 한다”며 “군이 기본적으로 수사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군 옴부즈맨제도와 같은 외부 전문가의 참여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한다”고 제언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치매 노모, 아들에게 “누구야?”… 그리운 얼굴 삼킨 야속한 세월

    치매 노모, 아들에게 “누구야?”… 그리운 얼굴 삼킨 야속한 세월

    “이이는 누구야?” 구순이 넘은 노모의 한마디에 아들 주재은(72)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오전에는 자신을 알아보고 “왜 나를 안 보러 왔니?”라고 물었던 어머니가 고작 몇 시간 뒤 다시 자신을 낯설어하는 모습에 문안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긴 세월이 야속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내가 맏아들.” 재은씨는 옆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리웠던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봤다. 25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진행된 이산가족 공동 중식 시간에 김월순(93) 할머니가 치매로 60여년 만에 겨우 만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날 오전 남측 이산가족의 숙소인 외금강호텔에서 열린 개별 상봉 때는 잠시 재은씨를 알아보기도 했으나 이내 다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65년 만에 두 딸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구상연(98) 할아버지는 외금강호텔에서 열린 개별 상봉에서 북측의 딸들에게 준비해 온 꽃신을 전달했다. 구 할아버지와 동행한 둘째 아들 강서(40)씨는 “꽃신을 개별 상봉 때 전달했다”고 밝혔다. 헤어질 때 각각 6살, 3살이던 북측의 딸 송옥·선옥씨는 어느덧 71세와 68세의 할머니가 돼 있었다. 구 할아버지는 65년 전 헤어질 때 두 딸에게 “고추를 팔아 예쁜 꽃신을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갑자기 북한군에 징집되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후 그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남측에 남았다. 두 딸은 전날 단체 상봉 때 이뤄진 첫 만남에서 아버지에게 나란히 큰절을 올렸다. 남측 김현욱(61)씨는 갑자기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갈색 체크무늬 손수건을 꺼내 북측의 누이 김영심(71)씨의 분홍색 줄무늬 손수건과 맞바꾸면서 “누님, 이렇게 바꿉시다. 누님 냄새라도 맡게…”라고 말했다. 앞서 전날 ‘오대양호 사건’ 납북 어부 정건목(64)씨는 이산가족 단체 상봉 행사가 열린 금강산호텔에서 휠체어에 앉은 남측의 어머니 이복순(88) 할머니를 보자마자 그대로 달려가 “엄마”를 외치며 품에 안고는 눈물을 터트렸다. 또 남측의 누나 정매(66)씨와 여동생 정향(54)씨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감정을 추스른 건목씨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어머니의 안경을 살짝 들고 눈물을 닦아 드리며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통에 이산가족이 된 다른 가족들과 달리 이들은 건목씨가 1972년 서해상에서 조업하던 중 납북되면서 이별하게 됐다. 하지만 일부 남측 가족은 북측 가족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며 씁쓸하다는 반응을 보이도 했다. 한 할머니는 “조카가 여기(북한)는 다 무상이다, 자신들은 잘산다며 자랑을 계속 늘어놓더라”고 전했다. 납북 어부인 건목씨의 아내 박미옥(58)씨도 남에서 온 시어머니 이복순 할머니에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서 “우리 당이 오빠(건목씨)를 조선노동당원도 시켜 주고 공장 혁신자도 되고 아무런 걱정할 것 없다. 남편이 남조선 출신이라고 차별받지 않는다”고 했다. 북측의 한 보장성원은 “(남측 가족이) 주는 선물을 받고 나면 우리 가족들이 기분이 나쁘단 말이오. ‘선물이 아니라 오물’이라고 그러오”라며 기자들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이 보장성원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내의까진 알겠단 말이오. 근데 치약, 칫솔, 라면을 가득해서 넣었습디다. 북에는 라면이 없겠소? 그러니 북측 가족들이 받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겠소. 받고 나서 다 욕한단 말이오”라고 덧붙였다. 리충복 북한 적십자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남측 기자들에게 “이번 상봉 행사가 끝나면 상시 접촉(정례화) 문제와 편지 교환 문제 등 이산가족 관련 문제를 남측과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강산 공동취재단·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꽃신 선물 딸과의 약속 65년 만에 지킵니다”

    “꽃신 선물 딸과의 약속 65년 만에 지킵니다”

    “북에 있는 손자 보러 가요.” 23일 6·25전쟁 당시 홀로 피난 온 이정일(90) 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손자와의 첫 만남에 이 같은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1950년 추석날 인민군 징집으로 자녀들과 헤어진 남측 최고령자 구상연(98) 할아버지도 “당시 4살이던 둘째 딸 선옥(68)이가 ‘아빠 갔다가 또 와, 아빠 또 와, 아빠 또 와’라고 외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며 “아직도 그 말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때 잘 다녀오라고 한 게 마지막이 됐다”고 말했다. 빨간 신발을 선물로 준비한 구 할아버지는 “그때 헤어지면서 신발을 사다 주려고 했는데 65년 만에 약속을 지키게 됐다”며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날 남측 가족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사전 집결지인 강원 속초로 모였다. 상봉단은 속초에서 이산가족 등록과 방북 교육 등의 절차를 밟은 뒤 설렘과 기대감 속에 하룻밤을 보냈다. 24일 오전 8시30분 남북 이산가족 2회차 상봉단은 65년간 꿈에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금강산으로 출발한다. 이들은 고성 동해선 남북출입사무소(CIQ)를 거쳐 금강산에 도착해 오후 3시 30분 금강산호텔에서 단체 상봉을 시작으로 2박 3일간 총 6차례, 12시간에 걸쳐 만남을 이어 가게 된다. 속초 공동취재단·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근절되지 않는 병영 안전사고

    [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근절되지 않는 병영 안전사고

    지난 1월 21일 오후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지키는 해군 2함대 소속 유도탄 고속함 ‘황도현함’(440t급)에서 갑자기 76㎜ 함포 포탄 1발이 발사됐다. 함수에서 입항 준비에 여념이 없던 수병 오모 일병은 머리를 크게 다쳐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6개월 만인 지난 7월 17일 사망했다. 해군은 함포의 신형 부품과 노후 부품 간 미끄러짐 현상이 오발 사고의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부품 결함보다 더 큰 문제는 사고 당시 황도현함이 안전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를 작동시키기 전에는 포탑 내외부나 장전실 주위에 인원과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황도현함 간부들은 이 같은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포탄이 갑판에 있던 오 일병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게 된 것이다. 지난 5월 13일에는 서울 서초구 내곡동 예비군훈련장에서 예비군 최모씨가 총기를 난사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 최씨를 포함한 예비군 3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 내곡동 훈련장은 사격 자세에서 훈련병이 일어나면 바로 제압할 수 있는 사격 통제 요원이 부족했고, 총구를 일정 정도 이상 돌리지 못하도록 고정하는 체인도 느슨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사건 당시 현장을 통제하던 현역 장교와 조교들은 총을 쏘는 최씨를 지침대로 제압하지 않고 현장에서 몸을 피해 논란이 일었다. 국방부는 사건 발생 이틀 만인 지난 5월 15일 사격 통제 요원을 늘리고 안전고리 관리를 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긴 수습책을 내놨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병영 내 안전불감증 만연·부대 운영도 미숙 이 같은 사례는 병영에 만연한 안전불감증과 미숙한 부대 운영 등 군의 총체적 부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이제 현역뿐 아니라 예비역 장병들도 병영 사고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군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의 원인을 취약한 인력 구조와 간부들의 관리 능력 부재, 무사안일주의로 진단했지만 군 당국의 예방 대책은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의 한 관계자는 18일 “한번 사고가 터지면 지휘관들이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만 신경 써서 전투력을 향상시킬 훈련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사고가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군 조직의 특성상 발생하는 총기 사고는 좀처럼 근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새누리당 정미경 의원실이 각 군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군에서 28건의 총기 및 수류탄 사고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50명이 죽거나 다쳤다. 지난해에는 8건의 총기 사고로 7명이 죽고 11명이 다쳤으며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4건의 총기 사고와 4건의 수류탄 사고로 4명이 죽고 14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28건 가운데 9건은 자의에 의한 사고(자살)나 고의적 총기 난사 등이 아닌 단순 과실이나 기강 해이 등에 따른 사고로 나타났다. 지난 3월 9일에는 육군 3공병여단 대위가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 제거 작전을 준비하던 중 땅에 매몰된 수류탄 1발을 연습용 수류탄으로 오인해 던진 것이 폭발해 자신을 포함한 5명이 파편상을 입었다. 2013년 8월 12일에는 육군 7사단 하사가 최전방 일반전초(GOP)에서 자신의 K2 소총을 장전해 일병에게 겨누는 장난을 치다 실탄 1발이 발사돼 일병의 오른쪽 어깨에 경상을 입힌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있었다. 군 당국의 총기 관리도 허술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10년간 군에서 분실한 총기는 21정이다. 이 가운데 7정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 군 장병들의 숙련도가 떨어진다는 점도 사고를 방치하는 요인이다. 지난 9월 1일에는 육군 72사단의 한 일병이 K2 소총으로 자신의 좌측 손바닥을 쏴 관통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통제를 담당하는 부사수가 1대1로 밀착 마크를 하고 있었지만 이를 막지 못했다. ●간부들 관리 능력 부재와 전문가 부족한 병영 학군단(ROTC) 소대장 출신인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군 초급간부들의 관리 능력 부재”라면서 “병력 자원 부족으로 병사들의 학력 수준은 높아지는 데 비해 군 당국이 사관학교 출신 이외의 장교나 부사관의 자질 향상을 위한 투자에는 인색하다”고 지적했다. 최병욱 상명대 군사학과 교수도 “병력 자원 부족과 저출산 등으로 현역병 입영 비율이 늘어나면서 군에 맞지 않은 부적격자가 대거 입대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미군들은 위병소에 들어갈 때 얼굴이 알려진 장성급 장교라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할 만큼 기본에 충실하지만 우리 군은 ‘얼굴 아는데 뭘 보여 달라고 하느냐’는 식으로 적당주의가 만연한 점도 문제”라고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0년 육군 7군단 인사참모 시절 사망 사고 없는 부대 만들기에 앞장섰던 박효선 청주대 군사학과 교수는 “사고가 제대로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전문가가 아닌 중대장, 대대장들이 안전 교육을 맡기 때문”이라면서 “병기·탄약 전문가가 아닌 중대장이 폭발물에 대해 설명하고 안전 교육도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사고 가능성은 상존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군 당국이 ‘전투형 강군’이라는 기조를 내세웠지만 정작 장병들의 인권과 복지에는 무신경하다는 점이 병영 내 사고 위험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실이 국방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국방부는 약 76t(22억원 상당)의 농약을 구매했는데 이 가운데 23%인 17t에 발암 및 유해물질이 포함됐다. 이 중에는 미국환경보호청(US EPA)이 유력한 발암물질로 규정한 만코제브와 고독성 농약 메코프로프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은 “우리 군이 자율성이 떨어지는 징집병들을 중요한 임무에 투입하면서도 막상 인력의 전문화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미숙함을 드러내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면서 “군의 핵심 전력인 사람에 대한 가치가 너무 저평가돼 있는 병영 문화를 개선하는 것이 과제”라고 지적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전쟁통 생이별 65년… 그리운 나의 남편,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다정한 우리 언니는 어찌 변했을까

    전쟁통 생이별 65년… 그리운 나의 남편,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다정한 우리 언니는 어찌 변했을까

    오는 20∼22일 북한 금강산에서 그리운 혈육을 만나게 될 우리 측 이산가족 394명의 명단이 지난 15일 공개됐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들도 누렇게 빛바랜 사진과 함께 전해졌다. ① 경북 문경에 사는 이옥연(87)씨는 북에 사는 남편 채훈식(88)씨를 65년 만에 만난다. 이 사진은 1949년 부부의 결혼식 장면. 남편은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고 두 달 만에 징집돼 전쟁터로 떠났고 이후 두 사람은 다시는 보지 못했다.② 이옥연씨가 남편과 헤어지고 아들 채희양(66)씨와 찍은 사진. 아들 채씨는 이번에 어머니를 모시고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③ 안순란(오른쪽·79)씨는 북한에 살고 있는 언니 춘란(81)씨를 만나러 간다. 바로 옆은 아들을 안고 있는 순란씨의 남편이고 왼쪽 두 사람은 언니·오빠다. 6·25전쟁 피난길에 홀로 떨어진 춘란씨는 사진에 보이지 않는다.연합뉴스
  • 65년 만에 아들 상봉하는 98세 할아버지

     “평생을 눈에 밟혔던 아들인데 이제라도 만나게 되니 여한이 없습니다.”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우리 측 상봉자 가운데 최고령자인 이석주(98) 할아버지는 65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아들 이동욱(70)씨를 만난다는 기쁨에 눈시울을 적셨다.  강원도 출신인 이 할아버지는 33세이던 1950년 북한군에 징집돼 끌려가던 중 탈출해 서울로 내려왔다. 그는 “영장이 나와서 북한군에 끌려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포격이 시작되고 정신이 없는 통에 빠져나와 무조건 도망쳐 나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전쟁통에 정신없이 가족과 떨어진 할아버지는 그 뒤로 다신 북에 있는 가족을 보지 못했다.  그 사이 북에 두고온 아내 한동해씨는 1994년 세상을 떠났고, 3남매인 자식들은 장녀 이금자(72)씨와 장남 이동욱(70)씨만 이번 상봉 절차 중 생존을 확인했다.  이 할아버지는 “군에 끌려갈 때가 아들이 다섯 살배기였다. 아들, 딸 얼굴도 기억이 잘 안나 만나봐야 알 것 같다”며 “무일푼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먹고살기도 바빴지만 항상 어린 것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걱정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이제는 아들도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며 “그동안 못 해준 것을 조금이라도 갚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북에서 내려온 뒤 곧바로 전북 진안에 정착해 소작 등을 하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새롭게 가정을 꾸렸다. 그는 현재 거동조차 쉽지 않지만 북에 두고온 아들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상봉 희망 신청을 한 뒤로는 동네를 돌며 틈틈이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아들 이동호(60)씨는 “이산가족 상봉자를 처음 접수할 때부터 계속 신청을 해왔다. 아버지 연세도 있고 해서 이제는 마지막이다는 심정으로 신청했는데 운이 좋게 선정이 됐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할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아들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좋다. 어서 빨리 아들과 손자를 만나고 싶다”고 만날 날을 학수고대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정현용 기자의 밀리터리 인사이드] 제비뽑기로 군대 가는 나라…군입대 하면 기뻐하는 나라

    [정현용 기자의 밀리터리 인사이드] 제비뽑기로 군대 가는 나라…군입대 하면 기뻐하는 나라

    우리에게 동남아 국가 ‘태국’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관광’일 겁니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푸껫부터 치앙마이, 파타야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춰 전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군사적으로도 나름 주목할 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군사력 비교 사이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에 따르면 정규군 30만 6000명(한국 62만명)으로 데이터를 취합한 106개 국가 중 20위(한국 7위)에 랭크돼 있습니다. 한 해 국방 예산은 우리나라의 6분의1 수준인 54억 달러(약 6조 3600억원)입니다. 남과 북이 대치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있는 우리와 비교할 수준은 못 됩니다만, 동남아시아 해군 중 유일하게 항공모함(헬기항모)을 보유하고 있고 F16 전투기도 운용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황태자 피스트 디스퐁사-디스쿨 소장을 사령관으로 육군 3650명, 해군 2485명, 공군 45명을 파병했고 T50 고등훈련기를 수입하는 등 우리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참 재미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징병제 국가인데 뭔가 다릅니다. 우리는 군 면제자가 극소수여서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군대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운을 시험해야 한답니다. 군 면제자를 비난할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바로 운을 시험하는 과정이 ‘제비뽑기’이기 때문입니다. ●검은색·빨간색 종이… ‘신의 손’이 운명 가른다 제비뽑기로 군대 가는 나라라니. 어찌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죠.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물의 축제 ‘송끄란 축제’를 앞둔 4월 초 태국 전역이 들썩들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제비뽑기가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체검사는 통과해야 합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겠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 황당한 행사에 참가합니다. 제비뽑기함에 슬쩍 손을 넣고 종이를 하나 쥡니다. 빨간색 종이를 뽑았다면? 당신은 군대를 가야 합니다. 반대로 검은색 종이는 면제라고 하네요. 색상이 있는 종이 대신 작은 글씨가 쓰인 종이나 구슬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슬아슬할 것 같지만 징집될 확률은 20% 정도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결과는 그 자리에서 통보해 주는데요. 오히려 면제 판정을 받은 이들 가운데 낙담한 이가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당수 남성이 징집 대상이 됐다는 얘기에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는데요. 징병 담당자를 부둥켜안기까지 합니다.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데요. 왜 그럴까요. ●대졸 초임 수준의 대우+ 숙식… 치열한 경쟁 우리나라는 연간 징집 가능 인구가 68만명으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군대를 가야 합니다만, 태국은 상황이 다릅니다. 태국에서는 남성이 21세가 되면 징집 대상이 됩니다. 인구 6770만명인 태국은 해마다 징집 대상이 되는 남성이 104만명에 달합니다. 군 복무자의 3배가 넘기 때문에 모두가 나라의 부름을 받을 순 없겠죠. 군의 대우도 좋습니다. 태국의 대졸자 초임은 월 1만~1만 2000밧(약 32만~39만원) 수준입니다. 가정을 꾸려 그럭저럭 먹고살 정도가 되는 수입이 1만 5000밧(약 48만원)입니다. 그런데 군에서 숙식을 제공하면서 월 3200~9000밧(약 10만~29만원)을 준다고 하니 솔깃할 수밖에 없겠죠. 병장 기준 17만원을 받는 우리와 비교해도 병사에게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아니, 국민소득과 물가를 감안하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받는 셈이죠. 빨간색 종이를 뽑고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자원입대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씀하실 분이 있을 텐데요. 네. 자원입대도 가능합니다. 단, 복무 기간이 짧습니다. 징병되면 2년, 자원입대는 6개월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 중에는 차라리 뽑기를 잘해서 더 오랜 기간 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예인·트랜스젠더도 제비뽑기 예외 없어 그럼 트랜스젠더는 어떨까요. 태국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성 소수자라기보다는 그냥 일반 여성이나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군 복무를 원할 리는 없겠죠. 그래서 여성으로 살아왔다는 이력을 증명하면 신체검사 과정에서 복무 면제 판정을 받습니다. 2010년까지는 일괄적으로 ‘심리 이상자’로 분류해 군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됐는데요. 트랜스젠더 권익 단체가 문제를 제기해 다음해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태국은 트랜스젠더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1형은 외형이 전형적인 남성인 사람, 2형은 가슴 수술을 한 사람, 3형은 성기 수술을 한 사람입니다. 3형만 면제이고 1형과 2형은 징병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기 수술은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형과 2형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당수의 트랜스젠더가 제비뽑기를 해야 하는 것이죠. 결과가 좋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 빨간색 종이를 뽑아 군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죠. 보통 젊은이들과 달리 수입이 많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는 군 입대를 바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비뽑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국의 원빈’으로 불리는 배우 마리오 마우러도 올해 4월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마리오 마우러는 영화 ‘시암의 사랑’, ‘피막’, ‘잔다라 더 비기닝’ 등의 히트작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뽑기 결과는 검은색 종이였습니다. 팬들은 물론 징병 담당자까지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할 정도였죠. 마우러도 살짝살짝 웃음을 내비치긴 했지만 대체로 진지한 자세로 징병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결과를 보고 속으론 기분이 무척 좋았겠죠. 그룹 2PM의 멤버 닉쿤도 제비뽑기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잘못 알려졌는데요. 닉쿤은 2009년 군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려 추첨을 하기도 전에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닉쿤이 참여한 제비뽑기 영상은 실제 뽑기를 촬영하지 못한 현지 매체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라고 합니다. ●방송국까지 보유한 軍… 막강한 영향력 태국은 1932년 혁명으로 전제군주 국가에서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하지만 정국은 늘 불안했고, 지금까지 군부 쿠데타만 19번이나 일어났습니다. 군 수뇌부는 이 과정에서 모두가 주목하는 엘리트 집단으로 부상했죠. 군부는 지난해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주축인 탁신 일가를 권력의 중심에서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지난 5월 10개월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방콕 시민들은 “계엄령 때문에 탁신 일가 찬반 시위가 일어나지 않아서 좋았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육군참모총장 출신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총선 대신 “국민이 원하면 2년 더 집권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군은 해마다 홍수 피해 복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데다 농민 교육과 치안을 담당해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태국 육군은 놀랍게도 6대 TV 방송국 가운데 시청률이 높은 방송국 1곳(BBTV CH7)을 직접 소유하고 있는데요. 전국의 200여개 라디오 방송국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합니다. 높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인 육군사관학교의 인기도 어마어마합니다. 올해 육사 예과 입학시험은 200명을 뽑는 데 1만 8000명이 지원해 무려 900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junghy77@seoul.co.kr
  • 콜롬비아 반세기 내전 종식…교황, 또 분쟁의 중재자였다

    콜롬비아 반세기 내전 종식…교황, 또 분쟁의 중재자였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장 기간 지속해 온 전쟁인 콜롬비아 내전이 반세기 만에 종식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교황 쿠바 방문 때 “평화 협상 실패 안 된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과 좌익 반군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의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는 23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만나 내년 3월까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합의했다고 AP 등이 보도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FARC는 2개월 이내에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기로 약속했다. 3년 가까이 끌어온 평화 협상이 결실을 맺은 것은 핵심 쟁점인 내전 범죄자 처벌에 관해 양측이 합의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동안 FARC는 내전 종식 후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면 전쟁을 끝낼 수 없다고 버텼다. 양측은 과도기적 성격의 특별 평화 재판소를 설치해 단순 반란죄의 경우 노역형 또는 사회봉사 명령 등으로 처벌을 경감해 주기로 했다. 민간인 납치, 아동 강제징집, 성폭력 등의 중대 범죄는 사면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내전 범죄자 처벌 관련 양측 극적 합의 외신들은 이번 합의와 관련해 반세기 동안 이어진 내전이 완전히 종식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고 반겼지만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산토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역사적인 진전”이라고 축하했다. 반면 콜롬비아 내 보수 강경파를 대표하는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은 “강력한 처벌이 없으면 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가 반군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판했다.한편 이번 합의가 나오는 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숨은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평화 협상 기간 중 협상 장소인 쿠바를 방문한 교황은 지난 20일 아바나에서 “콜롬비아의 평화 협상이 실패로 끝나선 안 된다”며 “더욱 확실한 양보가 있어야 한다”고 양측 협상팀을 압박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서울 핫 플레이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둘리’ 집에 놀러와요

    [서울 핫 플레이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둘리’ 집에 놀러와요

    서울의 최북단 도봉구. 도봉에는 연간 1000만명이 찾는 도봉산이 있다. 도봉구에는 ‘도봉산이 있고, 도봉산이 있고, 도봉산이 있다’고 할 만큼 도봉산만 있었다. 이 때문에 ‘도봉산을 타고 내려와 막걸리 한잔하고 돌아서면 땡인 동네’였다. 그러나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2010년 7월 취임한 뒤 구에 꼭꼭 숨어 있던 근현대 역사·문화 자원을 차근차근 발굴해 개발하면서 도봉은 온 가족이 즐길 만한 동네로 변모했다. ●‘조선 최고 부자·문화재 지킴이’ 간송 전형필 가옥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산도 타고 아빠·엄마의 어렸을 적 이야기도 들려주고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도 하고 싶다면 ‘도봉역사관광문화벨트’를 추천한다. 먼저 북한산 둘레길을 가볍게 산책한 뒤 도봉산 옛길과 방학동길을 따라 쭉 내려오면 처음 만나는 곳이 간송 전형필의 가옥(시루봉로 149-18)이다. 간송은 1906년 종로4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인 전계훈이 종로4가의 거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고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까지 확장한 덕에 말 그대로 ‘금숟가락을 물고 나온 아이’였다. 일본 와세다대 유학생이던 그는 23살의 나이에 당대 최고 한학자로 불리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 민족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24살 때 막대한 유산을 받은 뒤로 헐값에 일제로 흘러가던 우리 문화재를 사 모으게 된다. 간송이 사재를 털어 지킨 문화재는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 등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기와집 10채 값을, 고려청자 20여 점은 기와집 400채 값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복원된 가옥 옆에는 간송과 그의 아버지 전영기의 묘가 나란히 있다. 1900년대 초반 지어진 뒤 제대로 개·보수가 이뤄진 적 없었던 이 집은 2011년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산행 중 주민들과 함께 발견했다. 이후 구가 유족 등과 함께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신청을 한 뒤 최근에야 제 모습을 되찾았다. 간송 가옥의 첫인상은 “애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별 볼일이 없다. 조선 최고 부자가 살았다고 하기에는 안방과 마루, 사랑채로 구성된 구조가 너무 단출하다. 간송의 본가는 서울 종로이고 도봉의 집은 땅을 관리하기 위해 전국에 지어 놓은 집 중 하나였다고 한다. 간송 시절에 도봉은 경기도 땅이었다. 종로 본가와 다른 가옥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다 소실됐고 현재 이 집만 남았다. 규모는 작지만 향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를 재료로 ‘한 일(ㅡ)’ 자로 지어진 집은 명문가답게 고풍스럽다. 간송 가옥 보수에 참여한 목수는 “돌을 놓는 방법은 물론 문 크기, 빛이 들어오는 방향 등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된 집”이라면서 “서울 명문 가옥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정식 개관한 간송 전형필 가옥에선 앞으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재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될 예정이다. ●‘불온한 시인’ 김수영문학관선 낭독의 체험 전형필 가옥을 나와 정의공주와 연산군묘, 원당샘공원을 지나면 ‘불온한 시인’ 김수영의 문학관이 나온다. 김수영이 도봉 쪽에 살았나 갸웃할 것이다. 김수영은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징집돼 북으로 끌려간 탓에 1952년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4년 부인 김현경씨 등 가족과 재회한다. 이때 새 삶의 터전이 도봉동이다.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김수영문학관은 전시실과 수장고, 도서관, 동아리방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실에서는 그가 펴낸 시집을 비롯해 작품 초고, 산문 원고, 번역서, 펜과 수첩, 서재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직접 낭독하고 들을 수 있는 체험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책 보고 노래하고… 엄마·아빠·아이들의 놀이터 ‘둘리 뮤지엄’ 이쯤 되면 아이들 입에서 “이게 뭐야! 하나도 재미없어” 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가능성이 99.99%다. 이때 눈앞에 둘리와 도우너, 또치, 마이콜, 희동이가 짠! 하고 나타난다. 바로 지난 7월 개관한 둘리뮤지엄이다. 도봉구가 ‘둘리 아빠’ 김수정 작가와 힘을 합쳐 만든 이곳은 한국 최대의 캐릭터 박물관이다. 둘리가 살았던 고길동의 집이 도봉구 쌍문동이라는 점에 착안해 만든 어린이 문화시설이다. 1층에 들어서 아이들이 “둘리야”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 빙하 속에 잠자는 둘리가 눈을 뜨면서 모험이 시작된다. 1층에서는 둘리의 극장판 ‘얼음별 대모험’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도우너의 시간 여행 미끄럼틀과 우주버스 타기, 우주의 적 바요킹과의 대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바요킹을 무찌르고 나면 스튜디오에서 둘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2층은 둘리 연재 만화를 보고 자란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2층은 2009년 새로 제작된 ‘고길동의 아마존 표류기’와 ‘둘리와 친구들의 저승행차’ ‘마법의 피라미드 여행’ ‘유령선 탈출기’ ‘알 수 없는 나라’ 등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각각 포토존이 있다. 캐릭터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둘리 소시지, 둘리 책가방, 둘리 필통, 둘리 물감 등 엄마·아빠가 초등학생 때 썼던 물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둘리뮤지엄의 수장고에는 이런 물품 1000여점이 보관돼 있다. 시설 관계자는 “키덜트들이 특히 좋아하는 공간”이라면서 “이곳을 보고 마이콜 뮤직스테이지로 가면 엄마와 아빠가 손을 잡고 ‘요리 보고~ 저리 보고~’ 하며 둘리 주제가를 열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3층으로 올라가면 시계 그네와 정글짐 등 아이들이 몸으로 놀 수 있는 키즈카페가 마련돼 있다. 1, 2층에서 꼬마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진을 뺀 부모를 위한 커피숍도 이곳에 있다. 몸으로 뛰놀기에 체력이 달리는 아빠들은 근처 어린이 도서관을 이용해도 좋다. 어른 5000원, 어린이 7000원을 받는 뮤지엄동과 달리 도서관은 ‘공짜’다. 현재 5000여권의 책을 소장한 어린이 도서관은 ‘숲속의 둘리’라는 주제로 꾸몄다. 아이들이 뒹굴면서 책을 볼 수 있다. 책의 종류도 둘리 성격에 맞춰 ‘공부’보다는 ‘놀이’와 ‘친구들과 잘 지내는 법’ 등에 맞춰 구비됐다. 어른들을 위한 만화책도 있다. 학교 때 만화방을 들락거렸다면 부모들도 심심하지 않다. 앞으로는 구연동화와 종이접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다. ●한적한 골목엔 ‘한국의 간디’ 함석헌 선생의 흔적 가득 둘리뮤지엄을 나와 정의여고 방향으로 걸으면 한적한 주택가가 나온다. 이 골목 한쪽에 ‘한국의 간디’ 함석헌 선생 기념관(쌍문동 도봉로 123길 33-6)이 있다. 생의 마지막 7년을 보낸 집을 수리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종교인이다. 기념관에선 그의 책과 저서, 생활용품 등 유품 400여점과 생전 육성이 담긴 강의 테이프, 동영상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지하 1층 세미나실은 게스트룸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함석헌기념관을 다 봤다면 주변 주택가를 한번 휙 둘러봐도 좋다. 기념관을 주변으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전태일 열사 등 한국 근현대사를 빛낸 쟁쟁한 인물들의 집터가 남아 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단독] [커버스토리] 5000달러 들고 20일 사투… 생지옥 넘어 ‘생존의 땅’으로

    [단독] [커버스토리] 5000달러 들고 20일 사투… 생지옥 넘어 ‘생존의 땅’으로

    수년째 내전으로 황폐화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젊은이들에게서 꿈을 앗아갔다. 끊임없는 포탄 공방으로 매주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불과 수㎞ 밖에선 정부군과 이슬람국가(IS)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근 야무크 난민촌에 장티푸스가 발생해 수십 명이 스러져 갔다.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20㎞ 떨어진 소도시 두마에 살던 수헤일(23)도 매일 악몽을 겪었다. 그는 “참수와 드럼 폭탄 투하가 일상화된 이곳에서 오폭으로 무고한 시민 250여명이 한꺼번에 죽는 것을 보고 탈출을 결심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10일(현지시간) 털어놨다. 이곳에선 2년 전에도 정부군의 폭격으로 1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음을 다잡자 일은 쉽게 풀렸다. 외아들과의 생이별을 반대하던 어머니는 정부군에 강제 징집당했다가 목숨을 잃은 아들 친구들의 소식을 듣고선 마음을 돌렸다. 그의 친구 3명은 IS와 격전을 치른 팔미라와 데라에서 잇따라 전사했다. 수헤일은 “외아들이라 징집을 면제받은 상태였지만 탈출하기 전날까지도 시리아 정부가 ‘조국을 구하라’며 자원입대를 독촉했다”고 말했다. 비디오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매달 315달러(약 37만원)의 월급을 아껴 모았다. 여기에 차를 판 돈과 부모로부터 받은 자금을 합해 5000달러(약 592만원) 가까운 여비를 마련했다. 지난달 시리아를 탈출해 최근 독일 뮌헨에 들어온 수헤일의 탈출 과정을 재구성했다. 그는 지난달 수백㎞를 걸어서 서쪽 레바논 국경을 넘었다. 무더위와 군경의 눈을 피해 낮에 숨어 지내다 밤에 걷고 또 걸었다. 레바논으로 넘어와 베이루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이즈미르로 갔다. 항공료는 300달러(약 36만원)가량 들었다. 이른바 ‘돈 있는’ 난민이 택하는 전형적인 루트다. 그러나 이곳에서부터 다른 난민과 마찬가지로 대중교통과 두 다리에 의지했다. 터키의 대표적 휴양지인 에게해의 이즈미르에 도착한 그는 고무보트에 의지해 그리스의 레스보스 섬으로 향했다.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가 참변을 당한 바로 그 코스다. 이때 고무보트를 운용하는 브로커에게 1000유로(약 134만원) 넘는 돈을 줬다. ‘딩기’로 불리는 고무보트는 원래 관광용이었지만 난민이 몰리면서 그리스 밀입국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4인용 고무보트에 12명이 탔다. 그는 승선비를 현금으로 선불로 줬다고 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고향 땅 한번 밟고 싶을 뿐인데… 남북 모두 외면하네요”

    “고향 땅 한번 밟고 싶을 뿐인데… 남북 모두 외면하네요”

    6·25전쟁이 터지고 두 달 정도 지난 1950년 8월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인민군들이 몰려와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으더니 붉은 깃발을 앞세운 채 전장으로 끌고 갔다. 15세 소년 김명복은 그렇게 징집돼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을 떠났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 18세의 김명복은 경남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그는 북측도, 남측도 아닌 제3국행을 택했다. 이듬해 1월 인도로 떠나 1956년 2월 브라질 마토그로소라는 머나먼 타국 땅에 발을 디뎠다. 소년 김명복이 팔순을 앞둔 노인이 돼 59년 만에 고국에 왔다. 올해로 79세.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리턴 홈’을 제작하는 조경덕(41) 감독과 함께 남과 북을 두루 돌아보는 여정에 나선 것이다.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의 카페에서 만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기 전 고향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을 뿐입니다. 단순한 거죠.” 그러나 김씨의 소망과 달리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치 않은 상황이다. 남과 북 모두 그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김씨는 2년 전부터 브라질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방북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했다. 북한대사관은 그에게 “왜 남한을 거쳐 북한으로 오려고 하느냐”고 했다. 한국 정부도 국가보안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절대로 북한에 가서는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60여년 전 포로수용소에서 남과 북 중 하나만 선택하길 강요받던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요.” 김씨는 당시 제3국을 택한 이유에 대해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싫어서 한 선택이 아니었다”며 “오직 살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북으로 돌아가면 포로로 잡혔던 전력 때문에 죽임을 당할 게 뻔하고 남쪽에 남아 봐야 빨갱이라는 딱지가 평생을 따라다닐 게 뻔했거든요.” 그는 인민군복을 입고 싸우다 한 달 만에 국군에 투항했다. 이후 부산, 거제, 영천, 마산, 중립지대(판문점) 등 수용소를 전전하며 평생 잊기 어려운 상처를 경험했다. “중립지대 수용소에서 한 인민군 포로가 ‘고향에 가고 싶다’는 잠꼬대를 했다가 맞아 죽었어요. 중립지대는 반공 수용소였거든요. 자신에게 붙은 인민군 딱지를 떼려면 더욱 철저하게 반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동료조차 죽였던 거죠.” 김씨는 지난 13일 판문점을 찾았다. 60여년이 흘렀어도 남과 북으로 분단된 모습이 그에게는 슬프고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이번에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브라질로 돌아가면 영영 고향에 갈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셔겠지만 고향에 있을 세 살 위 누나와 한 살 어린 남동생은 꼭 만나고 싶습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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