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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조직적 범행인듯

    중국 베이징(北京) 등에서 조선족들에 의한 한국인 납치사건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그러나 경찰은 피랍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등 속수무책이다. [추가 피랍] S무역 직원 서성철씨(30·구로구 개봉3동)는 지난 24일 중국 옌지(延吉)공항에서 조선족 2명에게 납치된 뒤 몸값 1,500만원을 주고 이틀만에 풀려났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28일 1,500만원이 입금된 강모씨 명의의 O은행 일산지점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입출금 내역을 조사했다. 재미사업가 홍영태(洪榮泰·48)씨도 98년 10월 수출 상담을 위해 만났던 조선족 한모씨 등에게 납치됐다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환전상 장모씨(32)의 신고로 풀려났다.무역업을 하던 김영욱(金榮旭·41)씨도 지난해 7월 중국의 숙소에서 거래 상담을 하다 조선족 3명에게 납치돼 1,200만원을 입금시키고 풀려났다. 지난 22일 중국 유학생 송모씨(31)의 납치극으로 불거진 한국인 납치사건의 피해자는 탈북자 조명철(趙明哲·40)씨를 포함,확인된 사람만도 1년6개월사이 5명이다. 또 94년에는 부부 사업자가 조선족에게 납치됐었다.97년에는 H공사 직원이살해된 적도 있다.98년에는 상습적으로 한국인을 상대로 납치·강도행각을벌였던 조선족 3명이 사형당했고,6명은 징역 20년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한국인 피랍사건이 잇따르자 중국에 있는 한국인 친목단체는 지난해3월 인터넷을 통해 “한국인만 처음부터 표적삼아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조선족들이 많은 만큼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경고한 적도 있다. [수사 및 문제점] 경찰은 이들 납치사건을 동일범의 소행 또는 조직적인 범행으로 보고 있다.중국 유흥업소 여종업원이나 평소 친분이 있던 인물 등이관련돼 있고,국내은행 계좌로 몸값이 송금되는 등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서씨 사건을 제외한 4건의 납치에 환전상 장모씨가 개입한 사실을밝혀내고 장씨의 소재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현재 장씨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조직 내부에서조차 정보가 공유되지 않는 것은 물론 보고계통마저 무시되는 등 경찰 대처는 ‘갈 지(之)’자 모양이다.수사 주체에 대한 교통정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관할경찰서를 놓고 혼선을 빚기도 했다. 서울경찰청은 27일에야 수사부장을 팀장으로 외사·형사과가 참여하는 수사전담팀을 설치했다.중국 공안당국과의 연락을 맡고 있는 경찰청은 28일 외사관리관을 팀장으로 외사·형사과가 참여하는 수사전담팀을 가동했다. 김경운 전영우 박록삼기자 kkwoon@
  • 北京서 北조평통 인사와 접촉 鄭在文의원 징역1년6월 구형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朴滿)는 25일 당국의 허가없이 북측 인사와 만난 혐의로 기소된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재문(鄭在文) 피고인에게 남북교류협력법위반죄를 적용,징역 1년6월을 구형했다.선고공판은 다음달 10일 오전 10시30분 서울지법 형사합의26부(재판장 吉基鳳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다. 정 피고인은 지난 97년 11월 중국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북한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안병수 등과 만나 15대 대선 전망과 경제협력,이산가족 상봉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혐의로 98년5월 기소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신창원 22년6월형 추가 선고

    무기징역이 선고돼 복역중인 탈옥수 신창원(申昌源·33)에게 추가로 징역 22년 6월이 선고됐다. 부산지법 제2형사부(柳秀烈부장판사)는 18일 특수강도강간죄 등 15개 죄목으로 기소돼 사형이 구형된 신 피고인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13개 죄목을 적용,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특수강도강간죄 등 2개 죄목에 대해서는 무죄를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탈옥 후 전국을 무대로 100차례가 넘는 절도 및 강도 행각을 벌이고 파출소에 침입해 무기 탈취를 기도하는 등 범행의 치밀성이나 대담성을 감안해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나 도피과정에서 경찰관을 다치게 한 것 외에는 타인을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히지 않은 점을 참작해 극형인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배제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양형은 신 피고인이 지난 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이후2년6개월동안 전국을 무대로 저지른 범행에 한해 적용된 것이다. 신 피고인은 교도소 탈주 이전인 89년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상태이기 때문에 이번 선고와는 관계없이 무기징역형이 유지된다. 한편 검찰은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
  • 이종기변호사 무죄 선고

    대전지법 형사3부(재판장 高毅永 부장판사)는 15일 대전 법조비리사건 1심선고공판에서 변호사법 위반 및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종기(李宗基·48)변호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이 변호사의 전 사무장 김현(金賢·42)피고인에게는 횡령과 공갈혐의를 인정,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변호사에게 적용된 구(舊)변호사법 90조 2항은사건을 알선한 소개인과 변호사간에 금품을 수수하겠다는 사전 약정이 있어야 처벌할 수 있으나 이 사건의 경우 사전 약정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고밝혔다. 재판부는 또 “이 변호사에게 사건을 알선한 소개인과 사건 간에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사건소개 이외 편의를 제공한 사실이 없어 뇌물공여혐의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변호사는 지난 94년 1월부터 97년 7월까지 모두 202건의 사건을 알선한검찰·법원·경찰 직원 등 100명에게 1억1,170만원을 건네주고 이 중 직무관련 사건을 알선한 10명에게 11차례에 걸쳐 640만원을 준 혐의로 지난해1월말 구속 기소돼 징역 3년이 구형됐었다. 김 전사무장은 변호사법 위반 및 뇌물공여죄와 함께 공갈미수죄 등이 추가적용돼 징역 4년에 추징금 448만원이 구형됐었다. 대전 최용규기자 ykchoi@
  • 이근안씨 징역7년 선고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具萬會부장판사)는 10일 납북 어부고문혐의로 구속기소된 ‘고문기술자’이근안(李根安·61·전 경기도경 대공분실장)피고인에게 불법감금과 독직가혹행위죄를 적용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지난 85년 납북어부 김성학(金聲鶴·48)씨를 간첩으로 몰아 불법감금하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이같이선고했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집중취재/조선족 밀입국] 실태와 대책

    중국 조선족들에게 우리나라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밀입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사기를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고도 ‘코리안 드림’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한탕심리에 이끌린 허황된 꿈,비참한 현실 탈출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족 밀입국의 실태와 대책 등을 짚어본다. ■밀입국 현황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지난 96∼99년에 적발된밀입국자 수는 3,920명.97년 1,480명을 정점으로 98년 991명,99년 647명으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다.이 가운데 중국 조선족이 2,964명으로 75.6%,그 다음은 중국 한족(936명,24%)이다. 이와함께 지난해 비자기한을 넘겨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외국인은 13만5,300명.이는 국내 전체 외국인 38만101명의 36%에 해당되고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 수는 6만8,700여명이다.이들은 친인척 방문 등으로 들어왔다가 ‘돈’을벌기위해 눌러앉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국인 인권보호시설 관계자들은 “산업연수생을 포함해 국내 외국인 취업자 30여만명 가운데 15만여명이 밀입국자나 불법체류자로 추산된다”고 밝히고 있다. ■밀입국자들의 실상 지난해 5월 경북 포항의 모 식당에서 일하다 불법체류자로 잡힌 조선족 조모씨(35·여)가 조사를 받던 대구 출입국관리사무소 여자보호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최근에는 서울의 한 지하철 공사장에서 9개월동안 일해오던 조선족 백모씨(51)가 떨어져 숨졌다. 이처럼 밀입국자들에 대한 감시망도 어수룩하지 않고,일자리 여건도 좋을리 만무하다.이들이 종사하는 직장은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3D업종이다.더욱 큰 문제는 공장이 영세한 탓으로 고용주들이 임금을 떼먹기 일쑤라는 것이다.또 ‘경찰신고’를 빌미로 상습체불에다 구타까지 하는 악덕 업주도 심심찮게 적발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밀입국자들이 받는 돈은 월 평균 60만∼70만원.중국에서 교사가 한달에 900위안(11만여원)을 번다고 볼 때 6∼7개월치에 해당되는 목돈이다.그러나 이는 계산상 그럴 뿐 이핑계 저핑계로 고용주가 덜줘도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게 이들의 처지다. 현재 밀입국자를 고용할 경우 고용기간에 따라 범칙금 500만원부터 5년이하 징역을 감수해야 한다.또 밀입국자들 틈에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이 섞여 있어 대공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밀입국 경로 주로 서·남해 해안선으로 들어온다.중국과 가까운 데다 섬이 많아 레이더 감시망의 사각지대가 많고 고기잡이 배로 위장하기 쉽다.대개공해상에서 고기잡이 배로 위장한 국내 어선에 옮겨탄 뒤 어선과 함께 묻혀연안항으로 들어온다. 지난달 28일 전남 목포항에 입항한 여객선에서 밀입국하려던 조선족 1명이숨진 채 발견됐다.비좁은 공간에서 48명이 뒤엉켜 오랜시간 배를 탄 탓에 질식해 숨졌다.해경관계자는 “목포나 고흥·완도 등은 해안선이 길고 섬이 많은데다 부산쪽으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 때문에 밀입국자들의 공략대상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알선책 목포해경 관계자는 “국내 밀입국 알선조직이 100개는 넘을것으로 본다”며 “7∼8명으로 이뤄진 알선책이 점조직 형태여서 검거하기가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밀입국 수요가 늘어나면서 알선료도 지난해 1인당 5만∼6만위안(한화 700만∼800만원)선으로 올랐다.조선족 10명이 한국땅에 들어오면 5명의 돈은 중국모집책에게,나머지는 국내 알선책에게 건네진다. ■송환방법과 대책 단순 밀입국자들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신병이 넘겨진다.서울과 여수에 있는 외국인 보호소에 수용한 뒤 여권과 여비를 줘서 내보낸다.다시는 국내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공항 등에 입국금지 조치를 내린다. 법무부 관계자는 “조선족 밀입국자들의 입국을 봉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조선족들에게 국내 실상을 그대로 알려 허황된 꿈을 갖지 않도록 하는 일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조선족 밀입국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일각에서는 조선족 국내취업을 양성화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지금과 같이 불법체류중인 조선족들이 큰 고통을 겪고 범죄조직만 이롭게 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제도적으로 이들을 수용해 내국인들이 취업을 꺼리는 3D업종에 활용하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에도 산업연수생제도등 조선족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그 숫자가 미미한데다 조건이 까다로워 조선족들이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포 남기창기자 kcnam@ *金吉照 해경 국제과장 인터뷰 “IMF이후 한동안 감소추세에 있던 중국 조선족들의 해상을 통한 밀입국이다시 늘고 규모도 대형화되고 있습니다” 해양경찰청 김길조(金吉照)국제과장은 “국내경기 회복에 맞춰 99년 후반기부터 밀입국이 다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해상 밀입국의 일반 현황은 한·중 알선책이 공모해 조선족을 중국어선으로 공해상까지 데려온 뒤 우리 어선에 환승하는 수법이 주종을 이룬다.전에는 10∼30t급 소형 목선을 이용했는데 요즘은 중형으로 바뀌었고,척당 밀입자수도 20∼30명에서 50∼80명으로 늘어나는 등 수법이 대범해지고 있다. ■단속은 어떤 식으로 하나 밀입국 첩보가 입수되면 예상항로에 경비정을 증가배치하고 선박 입항시 100% 검문검색을 한다.해군 및 어업지도선과 합동감시체제를 구축하고 취약시간대에 함정 및 헬기를 이용해순찰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 공안당국과의 협조는 지난 98년12월 중국 공안부와 해상범죄 공조협력에 관한 약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수사협조가 잘 된다.밀입국으로 의심되는 선박이 출몰하면 중국 공안부가 즉각 우리측에 통보하고 자체 예방활동을강화한다.지난달 14일에는 중국 단동항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던 조선족 111명을 검거한 바 있다.이는 중국 공안당국이 직접 밀입국자들을 검거한 최초 사례다. ■밀입국을 단속하는데 어려움은 없나 육지와는 달리 바다에는 통로가 없기때문에 밀입국 선박을 단속하는데 애로사항이 많다.특히 해상경비는 막대한장비와 인력이 필요하나 인력동원에는 한계가 있다.따라서 어민들의 신고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신고정신을 높이기 위해 각 항·포구에서 어선 출항시 전단을 배포하는 등 홍보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hjkim@ *목숨건 '코리안 드림' 허상 지난달 28일 여객선 냉동창고 안에 숨어 전남 목포항으로 밀입국하던 중국조선족 황모씨(38)가 질식사로 숨진 사고는 중국 조선족내에서번져가고 있는 ‘코리안 드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이후 조그만 목선에 목숨을 걸고 ‘기대의 땅’한국을 찾는 조선족들의 발길이 서·남해안 전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항해도중 중간에 폭풍을 만나 목숨을 잃거나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표류하는 일도 있지만 이들의 모험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조선족들이 몰려사는 중국 길림·흑룡강·요녕성 등 동북3성에는 밀입국을 추진중인 사람수가 21만명에 달한다는 설도 나돈다.이 가운데는 농어민뿐 아니라 교사·회사원 등 인텔리계층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밀입국 열풍’이 조선족 사회에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국에만 가면 한 밑천 잡는다는 허황된 기대감 때문이다.한국에서 2∼3년간 일을 하면 중국에서 평생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거액을 만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이 바람에 전답을 팔고 빚을 내 700만∼800만원의 비싼 알선비용을 대면서까지 밀항선에 몸을 싣는다. 이들은 하나같이 밀입국하거나 불법체류하다 적발되면 ‘내가 돈을 못벌어가면 식구들이 다 죽는다’고 눈물로 호소해 조사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면 밀입국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돈을 잔뜩 벌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돌아갈까.해양경찰청은 해상감시체계가 수년전부터 대폭 강화됐기 때문에 공해상을 통해 밀입국하는 경우 대부분 적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사 밀입국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고난의 연속이다. 우선 취업이 쉬운 식당이나 공장 등에서 일을 하지만 임금을 제대로 못받거나 국내 근로자보다 20∼30% 적게 받는 경우가 많다.이를 항의하면 업주가불법체류자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례도 빈발하고 있다. 경인지방노동청에는 지난해 조선족 임금체불 사례가 10여건 접수됐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불법체류 사실을 우려해 고발을 꺼리기 때문에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강종묵(姜宗默)근로감독관은 “조선족들이 고발을 해올 경우 불법체류는 문제삼지 않고 내국인과 똑같이 처리해주고 있지만그 수는 미미하다”고 말했다. 조선족이 같은 조선족 또는 내국인에게 사기를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에 따르면 조선족 사기 피해자가 1만7,000여명에 이르고 피해액이 500억여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2월 조선족들이 몰려사는 서울 대림·가리봉동 일대에서 조선족을상대로 위장결혼,주민등록증 위조 등을 일삼아온 ‘흑사회’로 불리는 조선족 일당 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기꾼들은 주로 중국현지 송출업체와 짜고 허위비자를 발급해주고 돈을 가로챈다.사기당한 동포들이 중국인 채권자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중국 하얼빈에 거주하던 마모씨(40·여)는 지난 98년 말 빚쟁이들에게 쫓겨 친정에 피신했다가 채권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지기도 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 “공무원 임용 결격사유 시보에게는 해당 안돼”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집행유예기간이 만료된 때로부터 2년이 경과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공무원법상 임용 결격사유는 정규직에만 적용될 뿐 시보(試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법 행정합의1부(재판장 장상익 부장판사)는 3일 전 성남시 교통행정과장 강모(48)씨가 성남시를 상대로 낸 임용처분 유효확인 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원고가 지방공무원 지위에 있음을 확인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가 시보로 임용된 73년 10월에는 징역형의 집행유예기간이 안 지났으나 정규 공무원으로 임용된 77년 11월에는 유예기간이만료된 날로부터 2년이 지난 후이므로 공무원 임용 결격사유가 될 수 없는만큼 성남시가 지난 98년 원고의 정규 공무원 임용 처분이 무효라는 이유로시보 발령을 소급해 취소한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강씨는 지난 72년 7월 재물손괴죄로 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이확정된 뒤 73년 10월 5급 지방공무원 공채 시험에 합격, 지방토목기원보 시보로 근무하다 77년 11월 정규 공무원에 임용됐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야생동물 밀렵] 실태

    야생동물 밀렵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멸종위기종,천연기념물을 가리지 않고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밀렵도구도 올무,스프링올무,덫(창애),독극물,공기총,사냥개 등 다양하다.또 ‘차치기’,‘벼락치기’,‘굴파기’ 등 수법도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활동 중인 전문 밀렵꾼은 줄잡아 2만여명.단속을 피해 몰래잡는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밀렵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밀렵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적발된 밀렵꾼 가운데는 목사도 있다.지난해 11일 경남지역에 대한 단속에서 합천군 묘산면 묘산교회 목사 신모씨가 밀렵을 하다 적발됐다. 밀렵꾼들은 야생동물이 다니는 길목을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 허탕을 치지 않는다.동네 지리에 밝은 이장(里長)·동장(洞長) 등이 돈을 받고 밀렵꾼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다.밀렵꾼들은 멸종될 위기에 처한 동물이라고 해서 봐 주지 않는다.값이 나가는 야생동물은 멸종되건 말건 눈에띄는 대로 잡는다.환경부는 지난 14일 경북 울진군 불영계곡에서 멸종위기종인 산양(山羊)을 잡은 심모씨 등 주민 2명을 붙잡았다. 밀렵꾼 중에는 총기를 쓰는 사람보다 올무,덫 등을 쓰는 사람이 더 많다.총기를 이용한 밀렵은 싼 것은 300만원,비싼 것은 6,000만∼7,000만원씩 드는총,경사진 곳을 다니는 데 필요한 지프,사냥개(평균 350만원) 등을 사는 데돈이 많이 든다.반면 올무,덫 등 ‘고전적’인 밀렵도구들은 값도 쌀 뿐 아니라,철물점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올무나 덫을 설치하는 대신 야생동물을 직접 찾아나서는 밀렵꾼들은 공기총보다 사냥개를 이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공기총은 소리 때문에 단속에 걸릴 위험이 높아 98년부터 격감하고 있다.반면 사냥개 밀렵은 소리가 없을 뿐 아니라,포획 성공률이 총기보다 월등히 높다. 최근에는 야생동물이 다니는 길목에 자동차를 주차시켰다가,고라니·노루등이 나타나면 불빛을 비춰 꼼짝 못하게 한 뒤,자동차로 치어 잡는 ‘차치기’,겨울잠을 자는 동물의 집을 파내는 ‘굴파기’,미끼를 언덕 밑에 놓고 동물이 건드리면 위에서 바위가 떨어지도록 해 잡는 ‘벼락치기’ 등 신종 수법도 등장했다. 전문 밀렵꾼이 아닌 농민들의 ‘다이메크론’이란 맹독성 농약을 이용한 밀렵도 판을 치고 있다.농민들은 청설모,까치 등 수확기의 농작물을 해치는 야생동물을 잡는다는 구실 아래 ‘다이메크론’에 담갔던 볍씨로 야생동물을잡아 식당 등에 판다.흔히 ‘싸이나’라고 불리는 청산가리가 든 콩을 먹고죽은 동물은 내장을 빼고 사람이 먹을 수 있지만,‘다이메크론’이 든 볍씨를 먹고 죽은 동물은 독이 곧바로 동물의 온 몸에 퍼지기 때문에 먹어서는안된다.이 사실을 잘 아는 밀렵꾼들은 ‘다이메크론’으로 잡은 동물을 절대로 먹지 않는다. 밀렵이 성행하는 이유는 판로가 확보돼 있기 때문이다.보신용,박제용,동물원 전시용 등으로 꾸준히 팔린다.보신용으로 야생동물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지역 유지도 있다.98년 10월 경남 남해군의 M식당에서 고라니를 먹다 적발된 사람 중에는 부군수,교육장,전문대 학장,면장,군(郡)의원도 포함돼 있었다. 문호영기자 alibaba@ *유통은 어떻게 국내에서 거래되는 야생동물 규모는 연간 3,000억∼3,500억원.12∼13가지야생동물이 박제 또는 보신식품으로 거래된다. 산양(山羊)은 500만원,오소리·독수리는 100만원,노루는 80만원,고라니는 30만원 가량에 팔린다. 밀거래가 가장 성행하는 곳은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서울 경동시장,대구칠성시장.전국의 재래시장에서도 암암리에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들 3곳은 제법 규모가 크다.밀거래상들은 대부분 건강원·탕재원 등의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고 있다. 모란시장은 야생동물 밀거래 체계를 갖추고 있다.전국의 밀렵꾼들로부터 불법 포획된 야생동물을 사들인 뒤 경동시장·칠성시장을 비롯한 전국의 재래시장에 도매로 넘기거나,약재로 만들어 유통시킨다. 유통 및 가공 시스템이 구축돼 있는 야생동물 밀거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50여 곳이 밀거래에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동시장은 모란시장보다 규모도 작고 거래도 소매로 이루어지고 있지만,도심에 자리잡고 있어 값이 비싸다. 야생 오리 1마리에 8만원까지 받는 곳도 있다.10곳 정도가 단골 위주로 거래를 하고 있다.칠성시장에서는 20∼30곳이 야생동물을 밀거래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밀거래 형태는 비밀 사육자와 밀렵세탁자 등 기업형,건강원 등 도매형 등 2가지로 크게 분류된다.비밀 사육자는 밀렵으로 잡은 야생동물 가운데 번식이 가능한 동물들을 몰래 기른 뒤 새끼를 판다.멧돼지는 물론 고라니,오소리도 사육한다. 밀렵세탁자는 밀렵꾼들로부터 야생동물을 헐값에 사들여 사육하는 것은 비밀 사육자의 경우와 같다.합법적으로 사육하는 것이 다르다. 사육이 합법적이기 때문에 불법 포획된 야생동물을 기르다 적발되도,인공 사육한 것이라고 둘러대면 처벌이 불가능하다. 도매형은 대부분 건강원·탕재원들이 여기에 속한다.야생동물을 직접 잡는경우는 거의 없고,밀렵꾼 또는 농민들이 잡은 것을 판다.같은 지역 내 업소들과 연계돼 있으며,주문만 하면 언제든지 야생동물을 살 수 있다. 밀거래상들은 단속 때 적발되도 대부분 벌금만 물고 석방된다.벌금 액수도거래 규모나 이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또 벌금을 내고 풀려나면 얼마든지 영업을 다시 할 수 있다.97년 말 단속 때 7,800만원 어치를 보관하고있다 적발된 경동시장의 한 밀거래상은 당시 80만원의 벌금만 내고 풀려났었다. 문호영기자 *밀렵 근절책은 환경부는 밀렵을 뿌리뽑기 위해 지난해 12월 초부터 야생동물을 몰래 잡는행위는 물론,야생동물 또는 야생동물로 만든 음식물을 사 먹는 행위도 처벌하고 있다.기존 ‘조수 보호 및 수렵에 관한 법률’ 상 ‘불법 취득’으로간주해 처벌한다는 것이다.현행 법은 멸종위기종의 경우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일반 야생동물의 경우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환경부는 또 징역형 또는 벌금형과 함께 매매가격의 2∼10배에 해당하는 추징금을 물리기로 했다.올해 처음으로 밀렵 근절을 위한 예산 5억9,700만원을 확보하는 한편,한국동물구조관리협회,대한수렵관리협회 등과 함께 상설 밀렵감시반을 운영하기로 했다.밀렵감시반은 밀렵이 기승을 부리는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 동안,눈이 내리는 날과 주말 야간에 집중 단속에 나선다. 그러나 한국동물구조관리협회,대한수렵관리협회 등 민간 단체들은 대책의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벌칙을 강화하더라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동물구조관리협회 장문준(張文準) 전무는 “밀렵 근절은 미국 등 선진국의 예를 본따 전담 형사부서를 신설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미국의 ‘스페셜 에이전트(special agent)’처럼 밀렵을 전문적으로 단속하는 직책을 만든 뒤,‘스페셜 에이전트’에게 각 지역의 경찰을 동원하고 밀렵꾼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자는 제안이다.그러면 현장 단속에서 기소까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밀렵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 전무는 “벌칙을 강화함으로써 겁을 주자는 것은 과거 국민들 수준이 낮았을 때나 통할 법한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면서 “야생동물을 한 마리 잡았다고 해서 징역형을 구형할 검사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대한수렵관리협회 김철훈(金哲勳) 전무는 “수렵인들은 다니는 곳이 밀렵꾼과 같을 뿐 아니라,전문가이기 때문에 척 보면 밀렵꾼임을 금세 가려낼 수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서 “밀렵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수렵인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무는 “96년 6월 서울 중랑구 묵동에 있는 한 건강원을 덮쳐 산양을찾아냈지만,건강원 주인은 벌금 50만원만 내고 풀려났다”면서 “사법기관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밀렵꾼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호영기자 *순환수렵제도란 정부는 밀렵을 줄이기 위해 81년부터 순환수렵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순환수렵제도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을 강원,충남·북,경남·북,전남·북등 4개 권역으로 나눈 뒤,권역별로 1년씩 번갈아 수렵을 허용하는 것을 가리킨다.제주도는 매년 수렵이 허용된다.수렵기간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지난해는 충남·북이 수렵허용지역으로 지정됐으며,올해는 전남·북에서만 수렵을 할 수 있다. 수렵허용지역에서 사냥을 하려면 1인당 50만원씩 수렵장 이용료를 내야 한다.수렵허용지역이라도 해안에서 1㎞,도로에서 600m,문화재에서 1㎞ 이내에서는 수렵을 할 수 없다. 순환수렵제도는 허가를 받은수렵인들에게만 허용된다.수렵 허가를 받으려면 5과목의 시험에 합격한 뒤,소양교육을 3시간 받고,도시철도채권 75만원어치를 사야 한다.대한수렵관리협회에 따르면 수렵인들이 수렵장 이용료 등수렵허용지역에서 쓰는 돈은 1년에 500억원.반면 수렵인들이 잡는 야생동물의 값은 20억원에 불과하다.수렵인들은 꿩 1마리를 잡는 데 숙식비 등을 합쳐 평균 80만원을 쓴다고 한다. 문호영기자 *대한수렵관리협회 김철훈 전무 “밀렵 단속은 행정력으로는 불가능하며,허가를 받은 수렵인들을 활용하지않으면 안됩니다” 대한수렵관리협회 김철훈 전무는 “밀렵꾼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수렵인 뿐”이라면서 “밀렵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수렵인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수렵관리협회는 95년 1월 수렵인들이 밀렵을 막고 무질서한 수렵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결성한 민간 단체.전국에 15개 밀렵감시단을 운영하고 있으며,각 10명으로 구성된 밀렵감시단은 주로 총기 밀렵을 단속한다.지금까지 600여건,1,260명을 적발해 경찰에 넘겼다. 김 전무는 “제주도처럼 매년 수렵이 허용되는 지역은 수렵이 금지된 지역보다 밀렵꾼이 적다”면서 “수렵허용지역을 확대하고,규제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수렵인 수렵허용지역에서 수렵이 허용되는 4개월 동안 쓰는 돈은 줄잡아 500억원이나 되지만,해당 시·도는 이 돈을 한 푼도 야생동물 보호 및 수렵장 관리에 투자하지 않는다”면서 행정당국을 비난했다. 김 전무는 그러나 “지난해부터 꿩 새끼를 잡아 먹는 들고양이,새 알을 훔쳐 먹는 청설모,전기사고를 일으키는 까치 등 해로운 조수를 잡는 감시단원은 총기를 자율적으로 관리하도록 한 것은 진일보한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문호영기자
  • 체육특기생 선발 관련 수뢰 高大 야구감독도 실형 선고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3단독 여상원(呂相源)판사는 27일 고교 야구선수 체육특기생 선발과 관련,돈을 받은 고려대 야구감독 조두복(曺斗腹·46)피고인에게 배임수재죄를 적용,징역 1년에 추징금 1억원을 선고했다.홍익대 감독박종회(朴鍾會·44)피고인에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2,000만원이 선고됐다. 조·박 피고인은 지난 97년과 98년에 걸쳐 자녀를 야구 특기생으로 대학에입학시켜달라는 학부모들의 부탁과 함께 각각 1억원과 2,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이달 초 기소됐다. 전영우기자 ywchun@
  • 朴慶植씨 법정구속, 메디슨사 명예훼손 혐의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3단독 여상원(呂相源) 판사는 13일 G남성의학클리닉원장 박경식(朴慶植·47) 피고인에게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적용, 징역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박씨는 96년 10월∼97년 4월 ㈜메디슨과 초음파 진단기의 수리 및 반품문제로 다툼을 벌이다 ‘메디슨측이 김영삼 전대통령 주치의 고창순씨와 김현철씨를 등에 업고 정부로부터 100억원의 특혜금융을 지원받아 급성장했으며,메디슨이 생산한 초음파 진단기의 문제점이 드러나자 고씨와 국민회의 등에 거액의 뇌물을 제공,입막음하려 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정치권과 언론 등에유포,메디슨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97년 12월 불구속 기소됐다. 전영우기자 ywchun@
  • 권영해 전 안기부장 刑 집행정지 풀려나

    지난 97년 안기부의 ‘북풍공작’을 주도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돼 복역중이던 권영해(權寧海) 전 안기부장이 지난 8일 오후 형 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지검은 10일 “권씨가 지난해 10월18일부터 수면 무호흡 증후군,당뇨,기립성 저혈압,허혈성 심장질환 등 17가지 질환으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왔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급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형사소송법 471조에 따라 형 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북풍사건 조사 당시 자해소동을 벌인 바 있는 권씨는 건강악화로 98년 4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5차례에 걸쳐 서울구치소 인근 안양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아 변호인단이 1일 보석 및 형 집행정지 신청을 냈었다. 권씨는 특히 성모병원에 입원중이던 지난해 12월31일에는 저혈당으로 인한합병증으로 30여분간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종락기자 jrlee@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 변질 · 왜곡된 쟁점 법안

    15대 국회가 막바지 법안심의 과정에서 일부 개혁·민생법안을 왜곡·변질시켜 여론의 질책을 받고 있다.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이익집단의 압력과로비에 떠밀리거나 내년 총선을 겨냥한 표계산을 앞세웠다는 지적이다. [변호사법] 개악(改惡) 시비를 부른 대표적 법안이다.소관 법사위 심의과정에서 정부 개정안과 시민단체 청원에 담긴 법조비리 근절의 핵심 방안들이누락됐다.검사출신 변호사에게 최종 임지(任地)에서 2년간 사건 수임을 제한토록 하는 전관예우 방지 조항과 법조비리 내부고발자 보호문제,복수 변호사단체 규정 조항 등이다. 개정안이 헌법상 직업선택의 자유나 거주이전의 자유 등을 침해할 우려가있으며,변호사와 직원간 신뢰를 훼손하거나 변호사단체가 무력화할 우려가있다는 이유에서다. 98년 의정부,99년 대전지역 법조비리 사건을 거치면서 법조비리 근절을 바란 국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심의과정에서 법사위 소속 비(非)율사 출신 의원 7명이 정부 원안을 유지토록 하는 수정안을 제출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성명을 통해 “법사위 소속 위원 대다수가 법조인 출신으로 구성돼 있어 온전한 개정을 우려했는데,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며 “국민 일반의 이익과 국회 본연의 역할을 망각하고 법조이익과 직업이기주의에 매달린 다수 법사위원의 행태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방송법] 방송위원회 구성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우여곡절 끝에 문광위와법사위를 통과,본회의 상정을 앞둔 방송법개정안이 이번에는 독소조항 시비를 낳고 있다.한국방송공사 임직원의 직무상 비밀누설·도용과 방송위원회제재조치 명령불응에 따른 징역형 명문화 및 벌금강화 규정이 문제가 됐다. 개정안은 위반자에게 1년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했다. 그러나 지난 17일 개정안의 법사위 통과 직후 한국방송협회와 각종 시민단체는 일제히 성명을 통해 “통합방송법안이 반민주적인 규제 등 독소조항을담고 있다”고 발끈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여야는 20일 본회의에 수정안을 제출키로 하는 등 뒤늦게사태 진화에 나섰다.국민회의는 처벌조항 완화를 위해 야당과 절충키로 했고,한나라당은 자체 수정안을 국회에 내놓았다.그동안 법안심의 과정에서 방송위원 구성 문제 등 자리싸움에 연연해 하면서도 정작 독소조항에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꼴이다. [민법] 현행 동성동본 금혼(禁婚)제도를 개정할 것인지가 쟁점이다. 정부는 당초 여성·법조계에서 요구한 동성동본 금혼제도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정부 개정안은 ‘동성동본인 혈족은 혼인하지 못한다’는 민법 809조를 삭제하는 대신 8촌 이내의 부계 혈족 또는 모계 혈족 사이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근친혼 제한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행 금혼제도가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과 혼인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있고 사실혼 관계에 있는 5만∼6만쌍의 처지를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법사위는 지난 17일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위원회 수정안을 의결했다.“혈통을 중시하는 국민정서상 현행 제도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주장이다.정치권 주변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유림을 비롯한 보수층의 표밭을염두에 둔 결정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18일 보도자료를 내고 “동성동본 금혼조항은 지난 97년 7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미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동성동본간혼인은 가능하다”며 이례적으로 국회 상임위 의결사항을 정면으로 반박했다.국회가 법안심의 과정에서 여론과 법리보다 정치논리를 앞세운 사례로 꼽힌다. 박찬구기자 ckpark@
  • 千容宅국정원장 발언 파장

    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이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들에게 한 발언 내용이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총무와 정형근(鄭亨根)의원에 의해 공개되면서 ‘세밑 정치권’에 파문이 일고 있다.이때문에 정기국회 마감일을 하루 앞둔 17일예정됐던 본회의가 지연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임시국회를 다시 소집,정치개혁 관련법을 처리할 것으로 여겨졌던 향후 정치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천원장의 발언 파문은 16일 오후 이부영 총무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정치자금법 개정(97년 11월)이전에 당시 중앙일보 홍석현(洪錫炫)사장으로부터 한번 돈을 받았으며 홍사장은 이후에도 삼성그룹의 돈을 싸들고 왔으나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는 천원장의 발언을 공개하면서 시작됐다.이에 앞서 정형근의원은 국회 본회의 5분 자유 발언에서 천원장의 발언을 근거로 대면서 “국정원측이 나를 미행했다”고 주장했다. 여권은 천원장의 사의를 반려하는 등 파문의 조기진화에 나섰다.천원장 발언에 대해 ‘불법 정치자금은 받지 않았음을 강조한 것일뿐’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했다.이같은 여권의 행보에도 불구,파문은 쉽게 수그러들 기미가 아니다.한나라당이 향후 정치 일정에서 주도권을 잡기위해 확전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이같은 의도는 정형근의원이 국정조사에 출석하겠다고 밝힌 이후 이미 물건너 간 ‘언론문건 국정조사’를 끄집어 낸데서도 엿볼 수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야당은 천원장의 사퇴 권고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정치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야당측은 한편으론 새해 예산안의 회기내 처리를 다짐하기도 하는 등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그러나 ‘언론문건 국정조사’과 임시국회를 연계함으로써 선거법 처리를 위해 소집하는 임시국회의 일정 자체가 불투명해지게 됐다.따라서 24일 이전에 선거법을 처리하고 연내에 여야 총재회담을 개최,해가 가기전에 모든 정치현안을 털어버린다는 여권의 구상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연내 선거법 개정은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나오고 있다.이런 가운데 여권 일각에서 강경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야당이선거법 처리를 계속 거부할 경우 ‘타협가능한 선’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마련,이를 강행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천원장 실언’으로 정국이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꼬이는 양상이다. 강동형기자 yunbin@ * * 정치자금법 저촉 여부 현행 정치자금법은 ‘정치자금은 후원회 등 공식적인 통로를 이용해 모금되어야 하며 반드시 중앙선관위에 신고돼야 한다.그렇지 않을 경우 3년 이하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은 97년 11월 14일 개정되면서 새로 생긴 것이다.때문에 이전까지 소급해 처벌할 수는 없다.이번에 문제가 된 김대통령에 대한 홍석현씨의 정치자금 기부행위는 법개정 이전 일이므로 법적으로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야당은 그러나 위법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홍씨가 자금을 전달한 시기와 액수가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자금법 위반은 아니더라도 대선과 가까운 시기에,당선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고액의 자금이전달됐으며 당선이후 편의제공이암묵적으로 교감이 됐다면 포괄적 뇌물죄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의 견해다.대선전,그것도 정치자금법에 처벌 규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기업으로부터 관행적으로 정치자금을 받은 행위를 처벌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주현진기자 jhj@ *여권 “언행 조심하자” 자성론 일어 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의 대선자금 관련 발언에 대해 여권은 17일 천원장이 제출한 사의를 곧바로 반려하는 등 서둘러 진화를 시도했다.반면 한나라당은 천원장의 사퇴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해명을 촉구했다. 지난 15일 서울지검 출입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했지만 사건의 당사자격인 천원장은 이날 오전 김대통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청와대를 방문한 천원장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하자김대통령은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한다”며 천원장을 나무랐다고 박준영(朴晙瑩)대변인이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통령의)심기가 최근들어 가장 좋지 않았던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대통령을 보좌하는 핵심인사들의 잇단 실수와 설화가 꼬리를 물자 여권내부에서도 자성론이 일었다.국민회의 이만섭(李萬燮)총재권한대행은 “옷사건도 그렇지만 측근에서 모시는 분들이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면서 “오히려 대통령에게 누를 끼쳐서야 되겠느냐”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한나라당은 연말 정국의 호재(好材)를 잡은 듯 정치공세를 강화했다.하순봉(河舜鳳)사무총장은 “DJ의 대선자금이 옷자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면서“청와대는 돈의 출처와 금액,사용내역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이사철(李思哲)대변인은 “청와대는 97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기 전 당시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 사장으로부터 받은 돈은 대가성이 없는 돈이라고 해명하지만그 돈의 대가성여부는 수사기관에 의해 판단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여권의 해명“대가성 없는 돈 재확인한 것”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97년 대선 전에 정치자금법 개정에 앞서 홍석현(洪錫炫) 중앙일보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천용택(千容宅) 국정원장의 발언 파문이 번진 17일 여권은 말을 아꼈다.꼭 필요한 말만 하면서 입장을 정리하는 듯했다.“우선 지켜보자”는 식이었다. 전반적으로는 돈의 전달시기가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 생긴 일이어서 법적 문제는 없으므로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는 분위기였다.천원장의 발언내용이 보도된 직후 청와대가 즉시 시인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도덕적으로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이다.“차라리 이번 일을 통해 김대통령이 깨끗하지 않은 돈은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화위복’론도 나왔다. 청와대 박준영(朴晙瑩)대변인은 “김대통령은 정치자금법 개정 후 규정에따라 불법적이거나 대가성이 있는 정치자금은 받은 적이 없으며,이는 대통령이 그동안 누차 밝혀온 것과 같다”고 말했다. 한화갑(韓和甲)사무총장은 “대선 전에는 누구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전제한 뒤 “정치자금법 개정 이후에 정치자금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지만 법에 위배될까봐 돌려보낸 적이 많았다”고 밝혔다. 정치자금에 관한 한 자신 있다는 발언들이다.여권 관계자들은 홍석현회장이 탈세사건으로 구속까지 됐기 때문에 홍회장의 돈에 대가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라고 강조했다.한마디로 이번 건 역시 ‘실패한 로비’의 한가지 사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김대통령이 과거 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에게서 20억원 가량의 정치자금을 받은 내용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던것을 사례로 들며 ‘돈 문제’에서의 투명성을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화살을 한나라당으로 돌렸다.여권의 한 핵심관계자는 “홍회장이 야당에도 돈을 주었다면 지난 대선 당시 ‘밀월관계’를 유지했던 한나라당에 돈을 주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이 관계자는 “홍회장이 야당에 건넨 돈은 ‘소액의 보험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돈이 전달됐다면 여당에 훨씬 더 많이 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한나라당이 징세권을 도용해엄청난 규모의 대선자금을 거둔 ‘전력’을 거론하기도 했다. 현재 여권의 관심사는 한나라당의 반응이다.정쟁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충분한 ‘반격용 탄약’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자세다.일부 과격파는 ‘할테면 해보자’는 식이다.“할 말은 많지만 참는다”는 당직자도 있었다. 이지운기자 jj@
  • [의열 독립투쟁] (16) 조명하 의사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죠(大正町)도서관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대만주둔 일본군 검열차 육군특별검열사 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육군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爾宮邦彦)를 환영하기 위해서 동원된 인파들이었다. 바로 그 시각 한 청년이 군중을 헤치고 구니노미야가 탄 무개차를 향해 뛰어들었다.청년이 단도를 빼어들고 구니노미야를 겨누자 무개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으며,시종무관 오누마(大沼)는 몸으로 구니노미야를 비호하였다. 청년은 구니노미야를 향해 힘껏 단도를 던졌다.그러나 애석하게도 맹독이 묻은 단도는 구니노미야의 왼쪽 어깨를 스친 뒤 운전사의 등에 맞고 떨어졌다. 거사후 청년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그가 바로 조명하(趙明河)의사다.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27일사망하였다. 조 의사는 1905년 5월 황해도 송화군 태생으로 송화보통학교 졸업후 집안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친척이경영하고 있던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독학(獨學)으로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일어 등을 공부하였다.5년여 동안 한약방에서 근무하면서 틈틈히 실력을 쌓은 조 의사는 1926년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군청 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당시 군청 서기는 상당한 실력을갖춘 엘리트로,경제적으로도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해 ‘6·10만세의거’,송학선(宋學先)의 ‘금호문(金虎門)의거’로 조선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몸으로 느낀 조 의사는 어렵게 합격한군청 서기직을 3개월만에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였다.조 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고 판단,국외에 나가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 의사는 아키카와 토요오(明河風雄)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낮에는 회사원·점원으로 일하였고 밤에는 오사카상공전문학교(大阪商工專門學校)를 다니면서 국제정세를 파악하였다.일본식 이름 아키카와 토요오(明河風雄:명하풍웅)은 본명 ‘명하’를 일본식 성(姓)으로 바꾸고 ‘의로운 일로써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의미의 ‘풍웅’을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이는 조 의사의 독립투쟁 의지가 담긴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활동에 한계를 느낀 조 의사는 1927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키로 하고 이 해 11월경 기착지인 대만에 도착하였다.조 의사는 대만에서도 역시 일본인에 의해 자행되는 수탈과 행패를 눈으로 확인고는 당시 대만 총독 우에야마(上山)를 처단하고자 하였다.조 의사는 일본인 행세를하면서 타이중시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부귀원(富貴園)이란 찻집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단도를 구입,독극물을 발라 놓고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5월에 일본 천황의 장인이며,육군대장이던 구니노미야가대만주둔 일본군의 검열차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처단키로 결심하였다.구니노미야는 일본 육사·육군대학을 졸업한 이후 일본 육군에 투신,육군참사관을 거쳐 1928년 당시 육군대장으로 군(軍) 내의 실력자였다. 사전에 일정을 입수하여 검토하는 한편 거사현장을 직접 답사한 조 의사는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경 수많은 인파를 뚫고 돌진,그를 처단하였다.조 의사의 의거는 당시 조선과 똑같은 일본의 식민지로서 일본의 식민지 차별정책에 대해서 울분에 차 있던 대만 군중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 조 의사의 신원이 조선인으로 밝혀지자 조선총독 야마니시 한조(山梨半造)는 대경실색하여 대만총독과 연락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조선총독부에서는 조 의사가 17세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는 요시찰 인물이 아니었으므로조선에는 아무런 연루자나 교사자가 없다고 단정하였다.그러나 대만총독부에서는 범인의 자백과 왕복 서류,기타 정황에 의하면 조 의사에 향리에 공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5월말경 대만총독부 보안과장과 경부 2명을 파견,조사를벌였으나 공범검거에는 실패했다. 조 의사의 재판은 오랜 시일 예심을 거쳐 1928년 7월 7일 대북고등법원(臺北高等法院)에서 가네코(金子) 판사의 단독심으로 진행되었다.변호인은 대만변호사협회 소속 일본인관선변호사 아보(安保)와 가네코(金子)가 선임되었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인 관선변호사가 재판정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뻔한 것이었다.재판부는 일본 형법 제 75조 ‘황족위해죄’,즉 “황족에 대하여 위해(危害)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위해를 가하려 한 자는 무기징역에 처함”을 적용하여 조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그 해 10월 10일 오전 10시 12분 조 의사는 순국하였는데 그 때 의사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일본 황족이 대만에서 상해를 입은데 대하여 대만총독은 황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하여 사직하기에 이르렀다.일제는 이 사건을 극히 중요시하여 언론보도를 철저히 통제,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뒤인 6월 15일에야 비로서 신문지상에 공개되었다. 조 의사는 일본 국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한 사람에게 칼을 던졌으나,이는조선민족 전체의 의분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조 의사의 의거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조선민중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달게 받고 있다”는 일제의 선전이 허구라는점과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쾌거였다고 할 수 있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연구원] - 조명하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24세로 순국한 조명하 의사는 슬하에 일점 혈육을 남겼다.조 의사의 외아들 혁래(赫來·73)씨는 태어난지 1개월만에 부친 조 의사가 고향을 떠남으로써 부친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일제하 황해도 은율에서 농업학교를마친 혁래씨는 해방후 평양공과대학 4학년 재학중 6·25를 만나 월남하였다. 취직보다는 개인사업에 손을 대 최근 2∼3년전까지도 사회활동했었다.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은 모두 해외에 나가 있고 세 딸은 모두 한국에살고 있다. 장남 경환(京煥·43)씨는 호주에서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고,2남 정환(正煥·40)과 3남 국환(國煥·39)씨는 같이 미국 LA에서 식당업을 하고 있다.혁래씨 가족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는 드물게 사는 형편이 괜찮은 편이다. 80년대초에 결성된 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는 전 통일원장관 홍성철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데 홍씨는 황해도 은율출신으로 조 의사와 동향인 셈이다.기념사업회는 지난 88년 과천 서울대공원 정문 앞에 조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순국일인 10월 10일 추모제를 주관해오고 있다. 78년에는 대만 교포들이 한교(韓僑)소학교 내에 동상을 세운 바 있다.혁래씨는 “월남할 때 부친 관련자료를 하나도 챙겨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하루빨리 통일이 돼 이북에 있는 선친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47)이산하 장편연작시’한라산’

    고교 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던 이산하 시인은 80년대에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변혁운동에 기여하는 작품활동을 하고자 현장을 누볐다.이제는 역사적인 복권이 국회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제주 4.3항쟁은 80년대 저항문학의 첨단 소재였고,특히 이산하의 연작시 ‘한라산’은 문학작품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첫 작품이었다. 1986년 3월에 첫 회분을 발표한 뒤 즉각적인 잡지 회수 조치와 출판사에 대한 압력이 잇따르다가 1987년 11월에야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공소장은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 사회로 파악하고,무장 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 항쟁으로 미화하며,인공기를 찬양하는 등 북한 공산집단의활동에 동조”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공소장의 근거가 된 대목은 이 시 여러 대목에 산재해 있다.“2차대전 후 미국은 필리핀을/영국의 식민지 이란을/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을/일본의 식민지 한국을/각각 말아 먹었다//미군은 처음부터/‘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그들은 반드시 한국인 동포를 이용해 싸웠다/현지에 허수아비 파쇼정부를 세우고/그것에 경제·군사 원조를 하면서/반공을 명분으로 서로 피 터지게 물어뜯도록 하는 것/그것이 바로 그들의 방법이었다”(제1장)고 쓰는 한편 이와 대조적으로 소련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기술했다.물론 이런 시인의 판단은 ‘맥아더 포고문 제1호’가 그들 스스로를 “점령군”으로 호칭한데 비하여 소련은 자칭 “해방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었는데,1990년대 이후부터는 두 강대국을 다 점령군으로 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연작시는 1947년 3.1절 제주도민이 내세웠던 구호로 “3.1혁명정신으로 조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자!/미국놈은 남한에서 물러가라!/파쇼세력 타도 만세!/학원의 자유를 인정하라!/남조선 과도정부 수립 반대!”를 들고 있다.이후도민들의 파업과 간헐적인 시위가 지속되자 이에 대한 진압대의 대응은 “우리는 제2의 모스크바 제주도를 공격하러 온 멸공대다”는 명분이었고,그 뒤의 비극적 사태는 이미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제주도민은 죽거나 쫓기면서‘관제 공산당’으로 낙인 찍혀 현기영·현길언·오성찬 등 제주도 출신 작가들이 쓴 소설에서 처럼 집단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라산’ 필화사건을 맡았던 홍성우·안병도 변호사는 이 시는 미 군정 치하에서 “제주도민의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시각에서 재구성”했기에 기술방법에 따라서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변론했다.특히 논란의핵심인 ‘인공기’와 ‘북한 동조’에 대해서는 서대숙·김학준 등 권위있는 정치학자들의 해방전후사 연구 논문들을 인용하여 제주항쟁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의 사건이며,여기서의 깃발은 북한이나 남로당과는 다른 여운형 주도의 당시 ‘인공’이라고 밝혀 검찰도 이를 수긍토록 만들었다.8.15직후의 남한이나 미 군정 비판이 곧 북한 찬양이라는 흑백논리를 탈피하도록만든 것은 ‘한라산’ 필화가 남긴 교훈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하는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그는 안양교도소에 복역 중 이듬해 개천절 특사로 석방,‘한라산’을 완성하고자 제주도로 내려가 1년 6개월 가량 머물면서각종 자료 수집과 취재에 열을 올렸으나,막상 역사의 현장 체험에서 시인은 생각이 달라져 이 시를 완성시킬 수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필화로 작품의 완성이 가로 막혀버린 한 예가 된 ‘한라산’은 아직도 창작의 자유가 완벽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美 고문경관에 징역 30년형

    [뉴욕 연합] 뉴욕시 경찰의 야만적인 고문행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온 애브너 루이마 사건의 가해자 저스틴 볼페(27)에게 13일 징역30년형이 선고됐다. 볼페는 지난 97년 8월 아이티 이민 출신인 루이마를 체포해 경찰서 화장실에서 빗자루 대를 항문과 입에 번갈아 집어넣고 구타를 하는 등 고문을 행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당시 순찰임무 중이던 볼페는 한 나이트클럽의 난투극 현장에서 루이마가뒤에서 주먹질을 한 것으로 잘못 알고 경찰서로 연행해 분풀이를한 것으로알려졌다. 브루클린 연방지방 법원의 유진 닉커슨 판사는 “고의적인 살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더 이상의 행위를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것으로 루이마는 물론경찰과 사회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해를 끼쳤다”면서 중형을 선고했다. 볼페는 선고를 앞두고 5분여에 걸친 최후 진술을 통해 “나는 루이마의 권리와내 자신을 배반했으며 죄값을 치르겠다”고 말했으나 “감옥에 가는 것은 힘든 일이며 나는 이제 27살이다”며 울먹였다. 루이마 사건은 뉴욕시경과 소수민족간의 갈등을 유발하고 경찰의 야만적 행동에 대한 시위를 촉발시켰다.루이마는 현재 뉴욕시경을 상대로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소송을 제기해 놓고 있다.
  • 이경문 전 관광공사 사장 징역 2년6월에 추징금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崔炳德부장판사)는 10일 광고 발주 및 면세점 운영과 관련,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전 문화체육부 차관 이경문(李庚文·59)피고인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죄(뇌물수수) 등을 적용,징역 2년6월에 추징금 6,200만원을 선고했다.또 이 피고인과 함께 구속 기소된 한국관광공사 기획조정실장 박경춘(朴慶春·48)피고인과 해외진흥본부장 김용일(金勇一·57)피고인에게도 같은 죄를 적용해 징역 3년과 추징금 7,200만원,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 피고인은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97년 10월 오리콤 대표 배모씨(59)로부터 “해외홍보 광고물 대행 계약을 유지시켜달라”는 청탁과 함께 1,000만원을 받는 등 3개 광고대행사로부터 2,600만원을 받고,면세점 업무를 총괄하던 박 피고인으로부터 97년 3월부터 매월 300만원씩 1년 동안 3,600만원을 상납받는 등 모두 6,200만원을 챙긴 혐의로 지난 10월 구속 기소됐다. 이상록기자 myzodan@
  • [의열독립투쟁] (14)김시현 의사

    살아 생전 24년을 감옥살이한 투사가 있다.36세에 독립운동에 발을 디딘 후,광복에 이르기까지 26년간 일곱 차례나 일제 경찰에 붙잡혀 16년을 감옥에서 보냈고,광복 이후 20년동안 8년을 또 투옥된 것이다. 독립운동에 첫 발을디딘 후,47년의 절반을 넘는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인물이 있으니,그가 바로김시현(金始顯)의사다. 김 의사는 188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김 의사를 기억하는 안동 사람들은 먼저 그의 혀짧은 연설을 알아듣느라 애쓴 이야기를 떠올리는데,이는 김의사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깨물며 투쟁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처음 김 의사의 호는 학우(鶴右)였는데 검사가 “도대체무엇을 구하려는가? 차라리 하구(何求)가 좋겠다”고 빈정대 그렇게 바꾸어썼다고 한다.29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거쳐 법학과를 만학으로 다니다가 1917년 귀국한 김 의사는 경북 상주에서 3·1의거 와중에일경에 체포된 후 본격적인 항일역정에 접어들었다. 이 사건 직후 상하이로망명했다가 지린(吉林)으로 가서 의열단에 참여해 자금과 단원모집을 위해국내로 침투하였다.이로부터 그의 국내 침투와 피체,망명은 쉼없이 반복되었다. 거사를 벌이고, 체포되고, 출옥하면 곧바로 망명하여 다시 의거를 일으키는 연속된 행위를 해방을 맞는 날까지 마치 시계바늘 돌듯 계속한 것이다. 1920년 9월경 의열단의 제1차 국내폭탄반입에 가담했다가 대구에서 체포된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하자마자 다시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안병찬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이 회의장에서 김 의사는 평생의 동지요,부부가 될신여성 권애라(權愛羅·73년 작고·건국훈장 애국장)를 만났다. 그의 본부인이 고향의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본부인은 1930년 사망) 상하이로 돌아온 뒤14살 연하의 권애라와 결혼했다. 1897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한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면서 3·1의거에 참가,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그후 이화학당을 졸업한 권애라는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활약하는 등끊임없이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다가 신징(新京)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1923년 2월 독립운동사상 최대 대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가 있었다.의열단이 국내에 아지트를 만든 뒤 대규모 투쟁을 벌이기 위해 많은 양의 폭탄과무기를 국내로 수송한 공작이었다.1923년 2월초 김 의사는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다량의 폭탄과 무기 및 ‘조선혁명선언’,‘조선관공리에게’라는 선전문서를 인수했다.“동포들에게 설날 떡을 선물한다”고 표현한 그는 평소 포섭해둔 황옥(黃鈺) 경부(警部)를 동반,안동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뒤 밀고자가 생겨 관련자들이 속속 체포되었고 김 의사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1930년대 김 의사의 활동은 군사간부학교 학생모집과 배신자 처단,투옥생활의 연속이었다.1929년 출옥후 곧바로 지린으로 망명한 김 의사는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하다가 중국관헌에게 체포돼 3개월 동안 고초를 겪고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1932년 의열단지도부와 재결합하였다. 마침 의열단은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초급장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베이징지역에서 학생모집 활동을 하는 한편 노을룡(盧乙龍)과 함께 한삭평(韓朔平)이라는 배신자를 처단하러 나섰다.이 의거로 체포된 그는 살인미수혐의로 1935년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9년 9월 출옥후 이듬해 4월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40년대에도 그는 역시 항일투쟁과 옥중생활로 보냈다.1941년에 국내와 베이징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약 1년간 미결수로 생활했다.경성헌병대로 이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또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그러다가1944년 베이징헌병대에 다시 체포당한 그는 1년간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1945년 서울로 이송되었고,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0년 5·10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안동 갑구)되어 정치활동을 펴면서 혁명가로서 그의 면모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새롭게 타올랐다.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민족자결단·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7월에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전개되는 와중에 김 의사는 동지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이승만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 거사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석방되었으나 1966년에 서거,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 의사는 ‘3년 이상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은 자는 포상받을 수 없다’는규정 때문에 독립유공 공적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김 의사는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마지막 가는 길에도 그는 아내에게 “권 동지,미안하오.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남겼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김시현 의사 후손근황과 기념사업 김시현 의사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김 의사의 부친은 구한말의병활동을 하였으며, 둘째 동생 정현(禎顯·건국훈장 애족장)씨는 중국에서독립운동을 하다가 관동군에게 처형돼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이다. 김 의사는 항일동지이자부인인 권애라 여사 사이에서 일점 혈육을 남겼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살고 있는 김 의사의 외아들 봉년(峯年·77)씨는 192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중국 옌지(延吉)에서 농업학교를,옌안(延安)에서 항일정치군사학교를 졸업한 봉년씨는 해방후 고향에서 면의원을 역임하였으며,대한중석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지금은 은퇴했다.2남2녀.장남 우일(宇鎰·40),차남 홍일(弘鎰)씨는 모두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편 김 의사는 경북 예천 선영에 묘소가 마련돼 있을 뿐 뚜렷한 독립운동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은 물론 추모단체나 기념물 하나 없다. 이는 김 의사가 1954년 1월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탓이다. 봉년씨는 “부친의 이승만 전대통령 암살미수사건 관련부분은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며 “그동안 보훈처·청와대 등에 진정해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어 현재 서울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해놓은상태”라고 밝혔다. 봉년씨는 또 “1923년 봄 의열단원들이 일제통치기관 폭파,일본인 요인처단을 목적으로 폭탄을 밀반입하다 적발된, 소위 ‘황옥 경부사건’은 주모자가부친이므로 ‘김시현의사사건’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홍석현회장 6년 구형

    대검 중앙수사부(辛光玉 검사장)는 30일 25억여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구속기소된 보광그룹 대주주이자 중앙일보 회장인 홍석현(洪錫炫) 피고인에대한 조세포탈 사건 결심공판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조세포탈죄 등을 적용,징역 6년에 벌금 51억원을 구형했다. 또 함께 기소된 보광그룹 상무 이화우 피고인에게는 징역 3년에 추징금 6,791만원을 구형했다. 선고 공판은 오는 14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金二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논고를 통해 “피고인의 탈루금액이 수백억원이고 조세포탈 액수도25억여원에 이르는데다 국세청에 허위자료를 제출하고 공사비를 부풀리는 수법으로 수억원을 돌려받아 보광에 손실을 입히는 등 사안이 중대하다”면서“특히 피고인이 남보다 더 큰 도덕성과 준법성이 요구되는 언론사 사주임을고려할 때 엄중한 형 집행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가법상 조세포탈죄에 대한 법정 최저형이 5년인데다 감경사유 등을 감안하면 홍 피고인이 실형을 받을 가능성은 그리높지 않다. 홍 피고인은 최후진술에서 “재산을 개인 재산관리인에게 맡겨놓은 뒤 세밀하게 챙기지 못하고 보광그룹에 경영지도를 부실하게 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변호인단도 최후변론에서 “피고인이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고 나서 업무에 쫓겨 개인적인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재산관리에 대해 구체적인 보고를받지 못했고 탈루 세액도 이미 납부한 점을 고려해 달라”고 주장했다. 홍 피고인은 94년 11월∼96년 4월 모친으로부터 차명예금과 주식처분대금으로 32억여원을 물려받으면서 증여세 14억3,653만원 등 모두 25억2,762만원의 세금을 포탈하고 97년 9월 보광 휘닉스파크 골프장 및 호텔공사와 관련,공사비를 과다책정해 지급한 뒤 되돌려 받은 돈 6억2,000만원을 계열사 창업비에 사용한 혐의로 지난 달 18일 구속기소됐다. 이상록기자myzo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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