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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년 ‘교원노조’사건“명예회복” 재심청구 준비

    5·16 직후 현직교사 1,500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교단에서 추방한 ‘교원노조사건’의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해 당시 교원노조총연합회 대표였던 姜基哲씨(74)가 최근 姜信玉 변호사를 통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이다. “40년 가까이가 지난 사건으로 법률적 시효는 이미 지났습니다.그러나 새 세기를 앞두고 지난 역사의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교원노조사건’의 진상규명과 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1960년 5월 결성된 한국교원노동조합은 최근 합법화된 전교조의 원조격으로 ‘4·19때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다.“자유당시절 교사들이 3·4인씩 조를 짜서 부정선거에 가담한 사례도 있었습니다.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성공하자 교사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심정이었죠.그래서 교사들이 다시는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지 말자는 취지로 결성한 것이 교원노조입니다.” 60년 7월 전국조직을 갗춘 한국교원노조는 한 때 조합원 수가 4만 명에 달했다.당시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교원 수가 10만명이 채 안됐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였다. 한편 5·16 직후 쿠데타 세력은 교원노조 조합원 1,500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체포,교단에서 추방하였다.이들중 간부급 54명은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는데 이 숫자는 당시 정당·사회단체의 피체자 가운데 가장 많은숫자였다.이들은 혁명재판에 회부돼 모두 징역15∼10년을 선고받았는데 강씨는 이들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15을 선고받고 7년 넘게 복역했다.민주당 정권을 전복한 장본인인 쿠데타세력들이 이들에게 갖다 붙인 죄목은 놀랍게도 ‘민주당 정부전복음모’.그러나 조사결과 혐의사실이 발견되지 않자 다시 ‘간첩사건’으로 몰아 붙였다. “당시는 통일문제를 언급하거나 한미경제협정·2대악법 반대투쟁에 나서면 모두 용공단체로 규정했습니다.당시 교원노조는 강령에서 ‘반공’을 명시했었고 한미경협문제는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2대악법은 노동탄압과 직결된 것이어서 다른 사회·언론단체들과 함께반대운동을 했지요.그런데 그게 ‘이적행위’로 둔갑하더군요” 68년 7년만에 출옥한 그는 정치정화법으로 6년간 묶여 있다가 10월유신 이후에는 보안처분대상자로 분류돼 이후 20년 가까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3공시절 3선개헌반대 33인준비위원,민주수호국민협의회 기획운영위원,엠네스티한국위원회 이사 등을 지낸 강씨는 그동안 ‘토인비와 문명’등 역사·문명사 관련 저술과 연구에 몰두해 왔다. 강신옥 변호사는 “상식적으로는 재심의 사유가 충분하나 법 논리상 제한점이 많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 사건은 역사적·정치적 차원에서 꼭 해결돼야할 역사적 문제”라고 밝혔다.
  • [입찰제도 虛와 實](4)’담합방지’ 전문가 좌담

    건설교통부는 지난 12일 내년부터 기술력이 우수한 업체를 먼저 뽑은 뒤 이중 최저가격을 써낸 업체에 낙찰되게 하는 선진국형 입찰제도를 도입키로 했다고 밝혔다.그러나 관련 업계나 학계에서는 이러한 제도의 도입은 입찰심사 기준이 되는 적격심사점수의 상향 조정,적정공사비 확보가 가능한 예정가격,덤핑낙찰의 근본적인 방지책이 전제돼야 효과가 있다고 지적한다.공정거래위원회 吳晟煥경쟁국장과 한국경제연구원 李栽雨박사(경제학),대한건설협회金敏寬정책본부장,풍림건설 全烘奎부사장으로부터 입찰제도 개선안을 들어봤다. ▒吳국장 이달 초 공정위가 입찰담합 비리를 조사,관련 업체에 과징금을 물린 것은 제도개선이 되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직권조사를 통해 입찰담합을 근절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현 제도 아래에서 건설업체가 입찰담합의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불공정거래행위이기 때문에 입찰담합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단속할 계획입니다. ▒全부사장 입찰담합을 했다면 처벌은 달게 받아야 합니다.그러나 처벌규정이 3개 법에 중복 규정돼 있어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초과이득이나 부당이득을 얻기 위해 담합한 경우 외에 경영전략상 회사상황에 맞는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자율조정이나 자율경쟁을 벌이는 것까지담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담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아쉽습니다. ▒李박사 건설업 담합은 일반적 의미의 카르텔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의 입찰제도 아래에서는 품질이나 기술력보다 오직 가격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게 돼 있어 저가 낙찰을 하지 않으려면 담합을 해야 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담합 규제는 세계적 추세지만 우리의 하도급제도,감리감독,공정관리에 대한관행 등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담합 규제만 한다고 해서 근절되지는 않습니다. ▒金본부장 정부가 새로운 입찰제도를 모색한다 하더라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담합 규제는 계속해야 하지만 덤핑낙찰에 대한 규제도 병행해야 됩니다. 덤핑도 어떤 의미에서 불공정행위인데 담합만 규제하다 보니 덤핑낙찰이 만연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상황은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국입니다. ▒李박사 관행적으로 설계가와 조사가의 일정 부분을 삭감하는 우리나라 예가(豫價)제도는 이미 사문화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현 제도 아래서는 담당공무원의 재량권이 거의 허용되지 않을 뿐더러 적정업체를 심사할 능력도,기능도 없기 때문에 오직 가격으로만 낙찰자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덤핑낙찰이 생기는 것입니다.따라서 발주관청에 재량권을 더주고 발주관청 공무원들도 입찰 과정에서 입찰자의 기술력이나 입찰가격을실질적으로 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吳국장 우리나라는 학연,지연 등 정실의 개입 소지가 있고 발주기관의 심사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주기관에 재량권을 주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습니다. 따라서 보증기관이 심사 주체가 되어 입찰자의 기술력,시공능력,재무상태,가격경쟁력 등을 심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정부에서는 특정 금융기관에서 공사완공을 보증받도록 하는 ‘Performance bond’(공사완공 이행보증)제도를 도입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인도나 신용상태,기술력 등이 부족한 건설업체의 입찰 참가가 자동적으로 봉쇄돼 덤핑낙찰과 담합이 방지되리라고 봅니다. ▒全부사장 담합처벌 규정에 대한 일원화가 시급합니다.현행범이 아닌 데도검찰이나 경찰의 수사를 받을 때는 포승에 묶여 경찰서로 끌려갑니다. 우리나라에서만 건설산업기본법에 담합에 대한 검찰의 직권수사 의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吳국장 나름대로 각각의 법 목적이 뚜렷하다고 보기 때문에 단일화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李박사 법 일원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부당이익을 위한 고의적 담합,예가에 근접해 낙찰을 받았지만 담합 의혹이 있는 것,폭력을 동원하는 등의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담합,자율조정 등으로 담합을 4∼5개로 유형화해처벌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全부사장 법 일원화가 국무회의까지 상정됐다가 검찰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그때 검찰이 법 일원화가 되면 무슨 수로 건설업자를 잡아넣겠냐고 해 무산됐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공정위에서 95년 ‘입찰질서 공정화지침’을 만들면서 대한건설협회를 주축으로 한 입찰질서공정화추진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는데 답보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추진위원회를 구성,민간 차원에서도 자율적으로 개선안을 마련할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박성태- 선진국의 담합규제·처벌 선진국들은 입찰담합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을까. 세계 대부분 나라는 담합을 자유경쟁원칙에 근본적으로 배치하는 행위로 보아 강력한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88년에 채택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권고안도 입찰담합을 이른바 ‘악성 카르텔’로 간주해 국제적인 금지행위로 규정했다. 특히 세계무역기구(WTO)와 유럽연합(EU)의 출범으로 세계 건설시장이 단일화하면서 입찰담합은 금기시되고 있다.이를 테면 네덜란드는 건설업체의 담합을 눈감아준 적도 있지만 92년 이후 유럽공동체의 경제정책에 따라 벌금형으로 다스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한때 입찰담합이 성행했지만 건설시장의 개방으로 객관성 투명성 경쟁성이 요구되면서 94년부터 지명경쟁 입찰방식 대신 일반경쟁 입찰방식을 채택토록 했다. 담합행위에 대한 처벌은 미국이 가장 엄하다.자유경쟁이라는 최상위 국가정책 이데올로기에 상치되는 것으로 무조건 위법행위로 취급한다. 수많은 경쟁제한행위 중에서도 가장 나쁜 행위이며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입찰담합을 하다가 적발되면 법인은 100만달러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하며 개인은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10만달러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특히 연방정부를 상대로 한 입찰담합의 경우 ‘연방정부를 기만하는 공모행위죄’로 5년 이하의 금고를 받게 된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가 86년부터 10년 동안 적발해낸 입찰담합 건수는 1,000건을 웃돈다. 독일은 입찰담합의 규제를 위한 특별법을 두지 않고 경쟁제한금지법(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한다. 담합입찰 결과는 원칙적으로 무효로 하고 있다.또한 경쟁제한금지법에 따라담합행위로 판명되면 10만마르크(한화 6,89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최근 2년 동안 100여개 건설업체에 대한 조사를 벌여 모두 77개사의 담합업체를 적발,5,400만마르크(한화 372억원)의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일본은 건설업법 형법 독점금지법 등 3개 법으로 담합을 규제한다.건설업법에 따라 담합행위로 판명되면 영업정지를 당한다.형법에서는 ‘공정한 입찰을 해치는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엔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47년에 제정된 독점금지법은 3년 이하의 징역을 살거나 500만엔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하고 있다. 건설교통부 李明魯건설경제과장은 “과거에는 유럽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담합행위를 관대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으나 세계 건설시장의 개방으로 점차 미국의 규범과 제도가 담합을 규제하는 보편적 원칙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건설업계에서는 “외국처럼 엄격하게 담합을 규제하려면 담합 기준이 좀더 명확하게 구분되고 덤핑낙찰방지책이 마련된 뒤에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건승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친일승려 이종욱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는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가운데 포함됐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는 왜 재심대상에 오른 것일까. 임시정부시절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다.일제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후 참회나 자숙은 커녕 오히려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사람이다.일찌기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이틀 뒤인 3월 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등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 대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1919년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없다.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 따르면,이종욱은 1920년 6월29일 청년외교단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돼있다.무슨 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있다.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얘기는 역전된다.이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중 하나였다.이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7대 조선총독으로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종회(宗會) 의장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이듬해 37년에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당대 불교계의최고권력자로 부상했는데 그 뒷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발발 1주일만인 7월15일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이틀 뒤 그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 며칠뒤 조선내 각 절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또 8월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열었으며 다음날에는 경성 부민관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했다.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으로 창씨했다.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김(金)씨였다는 의미에서 ‘김(金)’을 ‘김원(金原)’으로 창씨한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종욱은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 총본산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현 曹溪寺)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단의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41.8.18)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 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 제31집,1941.12월호)며 총독부의‘황도(皇道)불교’ 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 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또 조선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만3,000원을 갹출,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내 1,500여 사찰에 12월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이종욱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국방자재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당국에 헌납했다.42년 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하달하기도 했다. 43년 8월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000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을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학병권유 대열에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이종욱은 8월17일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고 이어 9월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제1호’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승권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년 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해 자신의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50년 5월 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됐으며 51년 동국대 재단 이사장,52년 7월에는 제4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해방후7년만에 이종욱은 일제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고 사후에는 건국훈장과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이제는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鄭雲鉉 jwh59@
  • 李信行 前의원 6년 선고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孫智烈부장판사)는 23일 ㈜기산 사장 재직때 회사자금 18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해 이 가운데 99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한나라당 의원 李信行피고인(56)에 대해 횡령죄 등을 적용,징역 6년에 추징금 2억5,300만원을 선고했다. 姜忠植
  • 사면·복권 주요인물

    22일 발표된 특별사면 대상에는 39년째 복역중인 미전향 장기수 禹용각씨(71)를 포함,많은 공안·시국 사범들이 포함돼 있다. ◆禹용각씨=평북 영변출신으로 지난 58년 동해안으로 침투하던 중 울릉도 서북 해상에서 검거됐다.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9세의 나이에 수감돼 지금까지 대전교도소 특별사동 독방에서 보냈다.뉴욕타임스는지난해 3월 ‘40년 동안 단 한번의 면회도 없이 독방에 수감돼 있는 양심수’라고 禹씨를 소개,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高永復 전 서울대 명예교수(71)=이화여대 강사로 재직하던 지난 61년 9월북한에 있는 삼촌의 소식을 전하며 접근한 북한공작원에게 포섭됐다.96년까지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등 북한공작원 6명과 수차례 접촉,은신처를 제공하는 한편 국내정세를 보고해온 혐의로 97년 11월 구속돼 징역 2년을선고받았다.1년3개월 복역했다. ◆趙相綠씨(53)=재일 조총련 간첩단 사건으로 지난 78년 2월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20년 동안 교도소에서 보냈다.남파간첩이 아닌 공안사범 가운데 최장기수다.76년 일본 명치대로 유학간 뒤,조총련계 친지들로부터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교육받고 귀국,가족에게 북한식 통일론 등을 가르친 혐의를받았다. ◆任鍾晳씨(32)=지난 89년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에 선출돼학생운동을 주도했다.林秀卿씨 밀입북과 관련,같은해 12월 체포돼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3년5개월 동안의 수감끝에 92년 12월 가석방됐다.현재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으로 시민단체와 연대해 활발한 사회운동을펼치고 있다. ◆林秀卿씨(30)=한국외국어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89년 7월 북한에 밀입북,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이로 인해 구속돼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은 뒤 수감생활을 하다 92년 12월 석방됐다. 현재 미국에 유학중이다. ◆徐敬元 전 국회의원(61)=평민당 국회의원 시절인 88년 8월 북한에 3일 동안 밀입북한 혐의로 구속돼 8년6개월 동안 복역했다.지난해 3월 가석방으로풀려났다.徐 전 의원은 이번에 잔형면제 및 복권 조치됐다. ◆黃秀英씨(54·필명 黃晳暎)=지난89년 밀입북한 뒤 미국과 독일 등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밀입북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뒤 지난해 3월 가석방됐다. ◆崔虎敬씨(41)=지난 92년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崔씨는 지난해 8월 8·15특사에서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면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번 사면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朴志晩씨(40)=고 朴正熙 대통령의 외아들이다.지난 89년 코카인 흡입 혐의로 처음 입건된 이래 10년 동안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적발돼적발-선처-재적발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 4차례나 구속됐다.지난해 4월 히로뽕 흡입 혐의로 4번째로 구속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현재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 ◆朴基平씨(40·필명 박노해)=‘노동자 시인 박노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난 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사건과 관련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지난해 8·15사면 때 준법서약서를 쓰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지난해11월 노동부 공무원을상대로 특강을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白泰雄씨(36)=사노맹 상임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92년 4월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8·15사면 때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金載千 patr
  • 대구지법 “청구서 45억 수뢰” 洪仁吉씨 징역5년 선고

    대구지법 형사11부(재판장 李國煥부장판사)는 13일 청구그룹 비리와 관련,청구 張壽弘전회장으로부터 45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전 청와대총무수석 洪仁吉피고인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洪피고인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죄를 적용,징역 5년에 추징금 35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청구비리와 관련,1심에서 징역 6년6월이 선고된 張壽弘피고인에게는 대구방송 인가 과정에서 뇌물공여죄를 적용,징역 10월을 추가 선고했다.대구┑韓燦奎 cghan@daehanmaeil.co
  • ‘뇌물방지협약’ 출범 파장·대응책

    부패를 청산하지 못하면 국제시장에서 퇴출되는 시대가 왔다.오는 15일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해외공무원에 대한 뇌물방지협약’이 발효되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0일 ‘부패라운드 출범에 따른 파장’이란 연구보고서(田永宰수석연구원)에서 “부패라운드 출범으로 국내기업들은 취약한 대외경쟁력과 미흡한 외교적 지원체제,해외영업에 대한 법적 제약이라는 삼중고를겪게 됐다”며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할 경우 해외수주에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경고했다. 외국기업들이 한국기업의 과거사례(리비아 대수로 공사수주,기아차의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 진출 등)를 문제삼아 이미지를 깎아내릴 수 있는데다 공사발주기관이 업체 선정시 평가항목에 부패도를 포함시킬 경우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우리나라는 부패가 심한 나라로 평가된다.국제투명성위원회(TI)가 밝힌 98년 한국 청렴도지수(CPI)는 10점 만점에 4.2점.조사대상 85개국중 43위이며,OECD회원국중 멕시코(55위)를 제외하고 최하위다.CPI는 96년(5점)까지 개선됐다가 한보사태 등을 거치면서 악화됐다. 보고서는 따라서 “앞으로 해외사업은 투명하게 추진해야 하며 외국기업이나 자본의 국내진출에 대해서도 공정한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다.특히 “해외사업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당장 활동상 제약이 따를 것”이라며“해외사업 추진시 뇌물이나 인맥을 중시하는 관행을 고쳐 가격경쟁력으로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해외사업의 경우 선진기업과 협력해 위험을 분산시키고 ‘부패 제로’를 위한 기업윤리강령과 행동규범을 만드는 일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정부도 부패라운드 출범에 맞춰 지난 1월4일 ‘해외뇌물거래방지법’을 제정,앞으로 국제거래때 외국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사람에겐 5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소속법인에게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따라서 과거엔 국내기업이 해외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더라도 우리정부가 처벌하지 않으면 문제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뇌물제공 사실이 입증될 경우 외국정부와 경쟁기업이 국내법에 의한 처벌을 요구하게 된다. 보고서는 “부패라운드가 진전되면 대상공무원이 정치인 등으로 확대될 것”이라며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입장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 공조하는,공격적 대처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權赫燦 khc@
  • 洪仁吉전수석 10년 구형

    대구지검은 8일 청구그룹 비리와 관련,청구 張壽弘전회장으로부터 45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전 청와대 총무수석 洪仁吉피고인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洪피고인에게 특가법상 뇌물죄를 적용,징역 10년에 추징금 35억원을 구형했다. 검찰은 또 청구비리와 관련,회사자금 1,400억원을 유용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죄로 1심에서 징역 6년6월이 선고된 張壽弘피고인에게는 대구방송 인가과정에서 뇌물을 준 혐의를 적용,징역 2년을 별도로 구형했다.대구┑韓燦奎 cghan@daehanmaeil.co
  • 구조조정 태풍 끄덕없는 ‘철밥통’

    충남도 최대 비리사건에 연루돼 해임됐던 간부 공무원들이 슬그머니 복직돼 정부의 개혁 의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수해복구비 횡령사건에 연루돼 지난해 9월24일 해임됐던 충남도의 具모 전산림과장(43)과 曺모 전 영림계장(58)은 지난해 12월 24일 복직해 안면도 꽃박람회지원팀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27일 뒤늦게 밝혀졌다. 이들을 포함한 도 삼림환경연구소와 산림과 소속 공무원 17명은 지난 96년도내 시·군에서 수해복구 작업을 실시하면서 유령인부를 내세워 공사비 8억9,000만원을 가로채 지난해 6월 구속됐었다.具씨는 부하직원들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조건으로 1,500만원을,曺씨는 1,300만원을 받은 혐의다. 具씨와 曺씨는 1심에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해임됐으나 지난해 10월15일 2심에서 자격정지 2년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자 충남도에 재심을 청구했고 도는 소청심사위원회를 열어 3개월 정직처분을 내렸다. 도 관계자는 “공무원법에 따라 공무원의 면직사유가 되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具씨 등의 복직엔 전혀 하자가 없다”고 말했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4회)

    ◆종교계 '민주운동 거목' 박형규 목사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교회의 실천운동을 벌이면서 숱한 옥고를 치렀던 朴炯圭목사(76).유신체제 아래서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로 꼽히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재야 원로다. 박목사는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운동으로부터 시작해 남산 야외음악당사건과 민청학련 사건,그리고 교회탄압에 맞선 노상예배 등 굵직굵직한 사건의주역으로 92년 은퇴때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던 종교인.유신체제 하의 거침없는 발언으로 인한 탄압과 압박은 5·6공 군사정권까지 계속돼 민주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박목사가 세인들의 관심대상이 된 것은 73년 남산야외음악당 사건.이로부터 시작된 민청학련 사건과 이와 관련한 그의 금서(禁書) ‘해방의 길목에서’(74년 사상사刊)에는 잊지못할 사연이 담겨 있다. 남산 야외음악당사건은 서슬퍼런 유신체제에 대해 공식 항거한 첫 집단운동.10월 유신이 시작된지 6개월만인 73년 4월22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당시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목사는각 교단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빈민들의 실질적인 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20개 교단의 연합예배가 열리던 이날 행사장에는 10만명이 운집했다.언론자유와 학원자유 교회갱신 등을 주장한 플래카드와 전단을 마련,행사 당일 알리려는 사전 준비가 돼 있었다.행사장 주변에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펴 전단과 플래카드를 준비한 학생과 지역주민들이 정작 행사장 근처엔 접근도 못한 채 전단과 플래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날 행사에 참가하려다 불발에 그친 한 주민이 장롱속에 감추어 두었던 플래카드가 보안사 출신 이웃에게 알려지면서 불거졌다.집요한추궁끝에 박목사가 행사를 주동했음이 밝혀졌다.박목사는 7월부터 9월까지재판이 진행된 뒤 내란예비죄로 7년을 구형받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선고 이틀뒤 보석으로 풀려났다. “내가 주도하는 활동중 도시빈민선교에 당국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요.보건소 이용이나 오물처리에 대한 혜택 등 실질적인 문제에서 철저하게 소외된도시빈민들이 스스로 항의하고 요구하도록 만드는 것에 치중했는데 좌경용공으로 몰렸습니다.정치적 자유없이는 이웃사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빈민선교와 정치적 투쟁을 병행한 것인데 결국 철퇴를 맞은 것입니다” 남산 야외음악당사건이 이렇게 끝나자 맨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학생들과대학교수 등 지식인층이었다.그들은 서슬퍼런 상황에서 박목사가 보석으로풀려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이때부터 민청학련이 시작된다.당시 민청학련 10인위원회에는 박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서울제일교회 대학생부 학생들이 소속돼 있었다.74년 정초에 세배하러 온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알렸다.그리고 자금주선을 요구했다.박목사가 尹潽善 전대통령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尹 전대통령도 선뜻 응했다.그러나 민청학련은 결국 발각돼 모두 묶여 들어갔고 박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사정권은 이 사건을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한 것으로 몰아갔고 여기서 박목사는 대통령긴급조치4호 위반,국가내란음모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0개월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해방의 길목’은 박목사 재판이 진행되던 때 전국기독학생총연합회 간사였던 서울대학생인 아들 박종렬목사(현 전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와 부인,종교계 인사들이 박목사의 좌경성을 부인하기 위한 증명차원에서 펴낸 책이다.68년부터 70년까지 박목사가 기독교잡지 ‘기독교사상’의 주간으로 일하던 때 쓴 권두언과 설교들을 묶은 것이다.박목사는 감옥에 있을 때였다. 책이 나온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출판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이 왔다.책은 처음에 1,000부를 발간했으나 매진되자 다시 2,000부를 찍었다.그러나 이듬해 5월 마침내 ‘금서’로 묶였다.이책은 모두 압수당하고 지금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당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습니다.서슴없이 유신비판을 하고 나선데 대한 제재였지요.그때는 박형규 일당만 제거하면 기독교계는 문제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요” 5공에 들어서는 박목사에 대한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박목사가 제일교회에서 목회활동을 못하게 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그래서 ‘노상예배’가 시작된다.보안사의 사주를 받은 조직폭력배들이 교회건물 방에서 합숙하면서 직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84년 추석 전날 감금당하고 다음날까지 경찰들이 포위한 가운데 깡패와 반대파 교인들이 ‘박형규는 항복하라’며 수도 전기 전화선을 끊어버린사건이 일어났다.그해 12월9일부터 노상예배의 험로가 시작돼 90년 12월9일까지 6년동안 계속됐다.매주 치안본부장에게 전화를 걸고 중부경찰서 앞에서 예배를 지속했다.이 노상예배는 일종의 ‘순례지’가 됐으며 국내외 유명인사들이 참석해 설교를하기도 했다. 그는 유신정권과 5·6공은 물론,문민정부에 들어서도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여권 발급을 자유롭게 못받아 필요할 때마다 정부에서 내주는 단수여권을 써야만 했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1년짜리 복수여권만 받을 정도였지요.95년 사면된 뒤에야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박목사는 92년 8월 서울제일교회에서 은퇴,험하고 험한 현역 목회자 생활을마감했다. 글 金聖昊 kimus@
  • 청구 張壽弘 회장 6년6월 선고

    대구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李國煥 부장판사)는 23일 청구비리 사건과 관련,회사자금 1,472억원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10년을 구형받은 청구그룹 전 회장 張壽弘 피고인(55)에게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의 배임,횡령,사기죄 등을 적용,징역 6년 6월을 선고했다.
  • 高永復 교수 징역 2년 확정/大法,보안법 위반 판결

    대법원 형사3부(宋鎭勳 대법관)는 13일 36년간 고정간첩으로 활동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서울대 명예교수 高永復 피고인(70)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 해방후 첫 사형수 시인 兪鎭五(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

    ◎詩 낭독 탁월한 분단시대 최고 저항시인/중학생때 일본아이 자주 때려 형사 등살에 渡日/1946년 ‘국제청년데이’ 축시 낭독 10만 군중 갈채/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활약중 압송돼 사형 언도/‘아내와 월북했다’ 가설 바로잡는일 ‘국민의 몫’ 변혁기 문학은 사회와 역사 발전의 거울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해방의 공간에서 또 독재와 민주화의 공간에서 우리 문학이 줄곧 본연의 자리를 지켜왔느냐에는 많은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다.그 가운데 새로운 세기는 다가오고 이제 우리 문학의 새좌표 설정이 요구되고 있다.이를 위해 그동안 우리 문학에 새겨져온 숱한 갈등과 번뇌의 흔적들을 문학평론가 任軒永 교수를 통해 재조명한다.주1회씩 연재될 任교수의 글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문단의 비사들이 많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 시인이,“아아,사랑은/가고 돌아오지 않네!… 허공으로 사라졌네”라고 애절하게 노래하던 한 시인이 총탄의 이슬로 사라졌다.때는 1936년 8월19일,무대는 스페인 그라나다 근교 어느 과수원이었다. ○‘한국판 로르카’ 시인 투사 ‘1927세대의 샛별’이란 별명을 가진 민요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중 38세의 젊음을 피살로 마감했다.이 비참한 최후는 그의 시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일약 세계적인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노도 같았던,광풍 같았던,홍역 같았던 우리의 해방 공간과 분단의 틈새에는 ‘한국판 로르카’가 없었을까.독특하고도 마력을 지닌 시 낭독으로 청중을 열광시켰다는 그 로르카에 못지 않게 10만 참석자들을 뜨겁게 달궜던 한 시인이 있었다.바로 유진오(兪鎭五)였다. 활동으로 본다면 유진오가 ‘한국의 로르카’가 아니라 로르카가 도리어 ‘스페인의 유진오’가 됨직할 만큼 28세에 문학적 생명을 총살당한 이 시인은 세계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투사였다. 이제 통일을 향한 민족문학사는 분단의 장막에 가려졌던 문학인과 문학적 사건들을 21세기적 가치관으로 재조명할 처지에 있다 바로 그 첫 대상이 1950년 6월29일 긴급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분단시대 최고의 저항시인 유진오이다. 이 시인의 생애에 대한 연구자료는 문학사가 정영진의 ‘육탄시인 유진오의 비극’(저서 [통한의 실종문인] 게재)과 작가 강준식의 중편소설 ‘어둠을 찾아서’(문학사상 1990.3)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 어딘지 조차도 미궁에 있었는데,이 두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유진오는 서울사람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다.아버지 유치구(兪致九)와 어머니 양만선행(梁萬善行·전주 출신)의 4남중 막내로 논산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노량진에서 서울시내 전체를 공급지로할 규모의 지물포 도매점을 경영했었는데 사업차 잠시 논산에 가있을 때 유진오가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넉넉한 집안으로 맏형은 검사,둘째는 외교관,셋째는 일본에 귀화,그리고 막내가 시인인데,그는 겉보기에는 얌전했으나 중동중학 시절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으며 특히 기타를 잘 쳐 부민관의 어떤 음악회에 찬조출연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업가 집안의 서울사람 큰 키에 좋은 체격이었던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일본사람들을 너무나 증오하여 일본아이들을 때리다가 경찰서에들락날락 했었다고 전한다.이런 행동 때문에 계속 고등계형사의 시달림으로 국내에서의 진학이 어려워 1941년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에 입학했으나 역시 형사의 등살에 못이겨 메이지(明治)로 옮겼지만 여전해 일본의 저명한 국수주의자가 만든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 들어가 동양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 말엽 징병기피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해방직전에 밀입국했다.1945년 9월 그는 오장환의 추천으로 등단,당시 패기있는 젊은 시인들(金光現 金尙勳 李秉哲 朴山雲 兪鎭五)과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10)을 내 화제를 일으켰다. 1946년 9월1일,국제청년데이(International youth day) 기념행사가 훈련원 (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1915년 10월3일에 제1회 대회를 가진 국제청년데이란 진보적인 청소년들의 세계적 조직으로 이듬해부터는 9월 첫 일요일에 하던 행사를 1932년 이후 9월1일로 바꿔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해방후 처음 열린 이 청년축제에 10만명이 운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날 식전에서는 평론가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는 등 이미 파란이 예상되었는데,시인 유진오는 축시낭독을 위해 특별초청을 받았다.문장 한토막씩을 띄어가며 격정적으로 특유의 몸짓을 해가며 청중을 사로잡는 것으로 이미 명성이 나있던 유진오로서는 가장 많은 독자 앞에 서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친일파를 ‘망령영감’ 야유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두 팔에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은/누구를 위한 붉은 마음이냐?”고 서두를 꺼낸 유시인은 “왜놈의 씨를 받아/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머리를 숙여/생명과 재산과 명예의/적선을 빌고 있다/누구를 위한/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고 포효하면서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삼천오백만불의 빚을 걸머지고”있다면서 미군정을 정면으로 매도함과 동시에 보수세력(친일파)을 “망령한 영감님”이라 야유하면서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의 시낭독 기교가 탁월하다는 말은 곧 미군정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여,행사 이틀뒤인 9월3일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피검,분단문학사의 첫 필화사건의 주인공으로 부각된다.이 낭송의 투사시인에게 문학가동맹측은 ‘인민의 계관시인’이란 찬사를 보내면서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나 10월 군사재판에서 이 시인은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약 9개월 복역한 뒤 석방(1947.5)되었다. 문학가동맹의 문화공작대 제1대 소속으로 경남지방을 순회(47.7)하고 돌아온 이듬해 그는 행운의 해를 맞는다.시집 ‘창’(정음사,48.1)을 낸데 이어 5월,창경국민교 여교사 김금남(金今男)과 결혼,1년 뒤 딸(香濬)을 얻는다.겉보기로는 이 시인에게 가장 행복했던 이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는 조직으로부터 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파견 지령을 받고 입산(49.2.28), 여순병란(麗順兵亂)사건의 주모자 김지회(金智會)부대에 합세하나 ‘싸우다 쓰러진 용사’란 시를 낭독하는 등 한달간 머물다가 하산명령으로 내려오던 중 남원지역 민보단(民保團)에 피체(49.3.29)돼 서울로 압송,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49.9.30)를 받는다. 집안 어른이 앞장서 안재홍 신익희 등 정계 거물들의 탄원 서명과,시인과 이름은 같으나 전혀 다른 유명한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를 동원하여 무기감형(49.11.7)에 성공,서대문교도소에 복역 중 그는 운명적인 전주로 이감된다(50.3).그 석달 뒤 일어난 6·25는 서울의 모든 죄수들이 석방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전 이남지역 교도소 수감자들 중 특수한 사람들은 ‘긴급처형’ 되었는데,유진오는 6월29일 새벽 3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아,솔직히 말하면 나는 살고 싶다.살아서 내 생존의 확인인 시를 쓰고싶은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사시나무 떨리듯 엄습해 오는 이 공포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째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보고 싶으냐? 어째서 밤이면 두고 온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냐?” ○신익희 등 거물 탄원 서명 논픽션에 가까운 강준식의 소설 ‘어둠을 찾아서’에서 인용한 유진오의 옥중수기중 한 부분이다.이렇게 해서 한 시인,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던 한 시인은 사라졌고,분단체제는 그의 모든 미학과 사랑까지 불온시해 버렸다. 참고로 그의 작품은 평론가 오성호의 노력으로 ‘창’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음을 덧붙인다.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겠다”던 이 시인의 불온성은 해방공간의 홍역이었을 따름이지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로 전이될 성질은 아니다.지금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여기까지가 문학평론가의 몫이다.왜냐 하면 아직도 유진오의 이야기는 끝이 안났기 때문이다. 그와 약간의 인척관계에 얽혀있는 작가 강준식의 소설에 따르면 유진오는 처형의 순간을 교묘히 넘겨 살아남아 어린 딸을 형수에게 맡기고 아내와 월북했을 수도 있다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다.이쯤되면 대체 비평가의 글이란게 하잘 것 없는 거짓부렁이일 수도 있음을 통감한다.누가 문학사를 바로 잡을수 있는가.국민과 정부와 연구자 모두의 협력이 절실하다면 과장일까.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얼굴없는 노동자시인 박노해:하(금지문화금지인생이제야말한다:13)

    ◎암울한 ‘불의 시대’ 지나 이제는 감싸고 흐르는 ‘물의 시대’ 같은 느낌/약한자들 고통과 슬픔 외면못해 뛰어든 노동운동/이념에 갇혔던 ‘사노맹’ 합리적 진보운동 밑거름 기대/정직한 성찰과 반성만이 희망의 미래 열어갈것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9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지난 8·15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시골출신의 노동자로 시작해 급진 이데올로기의 핵으로 활약하다 사형구형까지 받아 7년간 격리된 뒤 준법서약서를 쓰고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인물이다.출감직후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며 강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노해씨를 만나 보았다. ­91년 구속될 때와 요즘 분위기의 차이는. ▲당시가 어두운 시절 불덩어리처럼 자기 몸을 던지는 ‘불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열정을 내면화시켜 물처럼 흘러가는 ‘물의 시대’같은 느낌이 든다. ­처녀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글들은 언제 쓴 것인가. ▲선린상고 야간 시절 체험한 공장의 불쌍한 삶과 군제대 후 함께 부대끼던 공장과 버스회사 동료들의 짓눌린 모습들을 가식없이 담은 것들이다.작업장과 기숙사 구석에서 작업장 일지 등에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자평한다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본다.사회의 모순들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현장 분위기를 솔직하게 담았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었다는데 노동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는. ▲어렸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그러나 서울에 온 후 공장에 다니면서 계속되는 특근·철야잔업에서 동료들이 손을 잘리는 급박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때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로 했다.노동운동 아닌 노동운동부터 시작한 셈이다. -얼굴없는 시인으로 집필활동에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나만의 책상,나만의 펜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단 한순간도 편안히 앉아서 글을 써본 적이 없다.원고 전달때도 항상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85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한뒤엔 급진 노동운동가로 바뀌고 노동해방문학에선 정치적인 색채까지 보이는데…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대로 일하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였다.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분신과 구속 시위 등 항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람이 불에타 죽는 상황에서 시만 쓴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명을 부인하다 신동아 90년 12월호에 자전수기를 보내 신원을 밝힌 이유는. ▲86년 5·3인천사태로 구속된 金모씨가 조사과정에서 내 본명을 실토했다.수사기관에서 전담반까지 구성해 추적하는 상황에서 동료 노동자들이 박노해로 몰려 희생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수사기관에서 이미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판단,이름을 밝혔다. ­사노맹의 핵심사상은 무엇이었나. ▲사노맹은 80년 당시 군사독재하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그리고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노동해방을 온몸을 다바쳐서 밀고 나갔던 80년대 시대 정신의 절정이었고 시대의 최전선에서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사노맹의 실패 원인은. ▲시대변화에 너무 늦었고 실천과정에서 너무 조급한 게 한계였다.급진 사회주의에 갖혀 당시 정권을 여전히 군사독재로 규정한 채 변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 사노맹에 대한 생각은. ▲사노맹 사건은 500명이 구속되고 형량도 2,000년이 넘는 가혹한 희생을 치렀다.그동안 침묵 절필 삭발정진을 통해 책임을 지려했다.사노맹 관련자들 이 삶의 모범을 통해 극좌이념에 치우친 후배들을 진정하고 합리적인 진보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훌륭한 일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93년 옥중시집 ‘참된 시작’은 어떻게 나왔나. ▲91년도 대법원 상고 이유서를 쓸때 이미 창비(창작과비평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었다.진보운동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늦춘 것이다. 극우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모두 돌멩이를 맞았다.합리적 진보쪽에선 올바른 변화라는 평을 얻었다. ­‘참된 시작’에서 사상 갈등과 자기반성이 두드러지는데 그 배경은.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절대폭압의 조건 속에선 작은 권리 하나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붙든 게 사회주의였다.70∼80년대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살려내기 위해 야수처럼 싸웠다.그러나 사회주의 붕괴를 정직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3년 6월호 ‘사회평론’지에 낸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평에선 진보진영의 반성을 주장했는데… ▲철저하고 정직한 자기성찰과 책임 없이는 미래의 민주개혁과 진보적 운동이 불가능하다.새로운 진보이념과 비전,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목숨걸고 참구(參究)해 나가자고 한 것이다. ­계획된 작품은. ▲내년 여름쯤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올 겨울엔 6년만에 세번째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다.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동양사상과 서구사상,사회적 실천과 내적 영성(靈性) 등 양극대립을 모두 담을 생각이다. ◎격별의 글들/“그래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처절한 노동현장 ‘시다의 꿈’/강렬한 저항·분노 ‘노동의 새벽’/격랑뒤의 깨달음 ‘사람만이…’ ‘시다의 꿈’(83년 시동인지 ‘시와경제’에 발표)에서 ‘사람만이 살길이다’(97년 해냄刊)까지­.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활동하다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박노해씨의 글들은 험난했던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언들이다. 박노해란 이름을 처음 알린 ‘시다의 꿈’은 노동현장의 비극성을 그나마 우회적으로 들이민 처녀시였다.“…/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 박노해를 ‘한국문학을 관통하는 80년대 최고의 문제작가’로 자리매김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훨씬 거칠어진다.“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칠은 땀방울 피눈물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쓰린 가슴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어린이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모두 열악한 작업조건과 억눌린 사람들의 직설적인 고발이다. 그러나 옥중시 ‘참된 시작’과 지난해 발표한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살길이다’에선 사상의 갈등과 반성,그리고 새 생활에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마저 갖게 된다.“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건 앙상하고/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참된시작중 닭갈비)“희망찬 사람은 그자신이 희망이다/길찾는 사람은 그자신이 새길이다/참좋은 사람은 그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사람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사람만이 희망이다중 다시) 감옥에서 500여편의 작품을 구상했다는 박씨.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에서 이젠 만날수 있는 시인으로 바뀌어 새 작품을 구상중이다.80년대 노동계와 시단을 뒤흔들었던 박씨의 새 작품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張壽弘 회장 10년 구형/회사돈 1,400억 유용 혐의

    대구지검 특수부(曺大煥 부장검사)는 2일 대구지법 제11형사부(재판장 李國煥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청구그룹 비리사건 결심공판에서 회사돈 1,400억원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청구그룹회장 張壽弘 피고인(55)에게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죄를 적용,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광숭학원 재단이사 尹錫柱 피고인은 이날 공판에서 지난 96년 3∼4월에 동서울상고 이전 등과 관련,로비자금으로 한나라당 李富榮 의원과 金重緯 의원에게 각각 3,000만원과 5,000만원을 주었다고 시인했다.
  • 민주열사 열전:13/前경원대생 宋光永(정직한 역사 되찾기)

    ◎‘학원안정법 음모’ 온몸 항거 분신/학생운동 씨 말리려는 악법 제청 항의 선봉에/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 불꽃 확산 시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제 몸에 불을 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오게끄럼 막는당가.광영이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겠어.어림 반푼 없는 소리제.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그 맴이 어찌 식겠어…” 85년 10월 21일 서울기독병원 영안실.아들의 주검을 앞에 놓고 한 어머니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34일 전 학교에서 분신한 경원대 법대생 宋光永의 어머니 이오순 여사(당시 59세·94년 작고)였다.경찰은 한달 이상 1,000여명의 병력을 동원,병원을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했다.그러나 그토록 삼엄한 경비와 장례 소동까지 불러온 송광영의 분신은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안돼 그는 85년 9월 17일 오후 2시30분쯤 경원대 운동장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했다.그날은 학생총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비로 연기된 상태였다.그러나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몸에 불을 붙였고,뛰어가며 외쳤다.“학원안정법 음모 철회하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나라” 인근 성남병원과 서울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기독병원으로 옮겨져 한달 이상 사투를 벌이다 끝내 숨졌다. 그가 온몸이 불에 휩싸인 채 몇번씩 쓰러졌다 일어서며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의 희망이었다.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불꽃을 확산시키려 했다.광주민중항쟁은 5공화국 내내 꺼지지 않는 민주화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군사정권의 강요된 침묵을 깨고 80년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가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투신했다.그의 투쟁은 노동자 김종태의 이화여대 앞 분신과 또 다른 노동자 홍기일의 전남도청 앞 분신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5공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시위가 점차 가열됐다.위협을 느낀 군사독재정권은 아예 학생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바로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이다.골자는 학생의 좌경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위학생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일정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은 비밀리에 법안을 마련해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미리 그 내용이 새어나와 한 일간지에 폭로되면서 반대여론이 들끓자 일단 유보됐다.그럼에도 정권은 당시 손제석 문교부장관의 담화문을 통해 ‘학원소요가 계속되면 학원안정법을 연내에 제정하겠다’며 관철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송광영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원안정법 음모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분신의 가장 큰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그는 유서인 ‘양심 선언’에서 ‘결코 총칼이나 학원안정법 따위의 악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음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70년대 노동운동의 싹을 틔웠던 전태일열사를 가장 존경했다.전태일에 대해 “소외된 민중의 대변인,억눌린 사회에서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준 인물”이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어려서부터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온 그는 소외된 삶들의 아픔을 나눌줄 알았고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했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화시장 재봉보조원 생활,신문팔이,Y셔츠 장사,돗자리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밑바닥 삶을 이어갔다.재봉보조원 시절엔 청계피복노조에 적극 참여했다.성격이 활달하고 발이 넓었던 그는 동료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로도 바빴다. 그는 81년 형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리를 잡고 나서야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거기서도 동료학원생이 교통사고를 당하자 학원을 10일씩이나 빠지면서 사고차를 찾아내 보상금을 타 가족들에게 전해주고 초상까지 치르게 해줬다.또 학원에서 탄 장학금을 집에 오는 길에 구두닦이 소년에게 줘버린 자신을 호되게 야단치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우리는 집도 있는데”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가장 존경 송광영은 84년 27살의 나이로 경원대 법학과에 입학한다.법학을 선택한 것은 고시에 합격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고,법관이 돼 사회의 부정부패와 모순을 개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시반에 들어가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것도 한 이유였다.그러나 그해 가을 어용교수 퇴진시위를 주도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빠지게 된다.‘실존주의철학연구회’ ‘경제문제연구회’ 등의 학습모임을 만들어 이끌었다.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만둘 것을 설득하며 생활비를 끊어버리자 교내에서 구두를 닦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원악법이 통과되면 분신하겠다는 말을 했으나 후배들은 믿지 않았다.그러나 전세금을 빼 학교 등록을 못하던 친구를 등록시키고 분신 열흘 전에는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고 말하는 등 마지막 삶을 정리해 나갔다.누나 송영숙씨(49)는 “호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은 그의 분신으로 형제들이 피해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난자당하고 처절히 유린된 순백의 종이들이 책상 위에서 울고 있다/이렇게 또 하나의 밤이 사라져가는데/여자는 이제서야 피곤한 육신을 벗어제치고 있다/아! 그날 아침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분신 얼마 전 써놓은 자작시 ‘에필로그 85’이다.송광영열사는 숨지는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민주의 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연보 ▲1958:광주에서 출생 ▲74년:서울 경신중 졸업 ▲75∼76년:청계피복노조 활동 ▲82년: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84년:경원대 법학과 입학 ▲84년:실존주의철학연구회 만듦 ▲85년:경제문제연구회 만듦 ▲85년:9월17일 “학원안정법 음모 철회” 외치며 분신 ▲85년:10월21일 서울기독병원에서 운명 ◎학원안정법 파동/5共 ‘시위학생 선도교육’ 등 골자 立法 기도/야당·재야 “제도적 폭력” 강력 반발 저지시켜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점차 뜨거워지던 85년 여름,미국의 개입 의혹을 추궁하는 반미 시위가 거센 가운데 공안기관 주도로 중요한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 일간지가 공식 발표를 2주 앞두고 ‘학원안정법’ 음모를 폭로했다.시안 내용은 삼청교육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학원소요 등과 관련,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을 형사처벌 대신일정한 장소에 수용시켜 6개월 이내의 선도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골자였다.대상자 선정은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의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설치해 하도록 했다.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해 학생들에게 극도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일부 좌경·용공학생들을 격리시켜 학원의 오염과 소요의 본거지화를 막고 선도교육을 통해 건전한 학교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하지만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학원에 대한 제도적 폭력이라고 즉각 반발했다.대다수 국민도 우려를 나타냈다.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여야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정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 미흡하다’며 법 제정을 일단 유보했다.그러나 당시 이원홍 문공부,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소요가 계속될 경우 언제라도 법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하지만 학원안정법은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다. ◎분신대책위 김해성씨/“당국 협박속 유가족 설득/분신의 의미 찾고자 최선” 송광영 열사의 가족과 몇몇 민주인사들은 그의 입원 치료와 장례문제로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그가 입원하자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송광영 동지 분신구명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진상규명과 모금활동을 펴나갔다.치료기간중 상태가 좀 호전되기도 했지만 경찰의 철저한 통제속에 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다. 대책위 집행위원장이던 김해성 성남주민교회 전도사(38·현재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집 소장)가 얼굴에 붕대를 감고 환자 시늉을 하며 겨우 2차례 송광영을 면회했다. “가족들을 설득해 당국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말고 분신의 진상과 의미를 찾자고 했지요.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의 가족들은 저희와 뜻과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김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송광영이 입원했던 서울기독병원은 79년 여공들이 독재정권과 독점자본에 저항했던 YH사건의 YH무역 건물이었다.송광영이 역사적 민주투쟁의 산실이었던 그곳에 다시 경찰을 불러모아 영혼을 태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송광영이 숨지자 대책위는 장례위원회로 바뀌어 사회장을 준비했다.그러나 경찰은 장례 전날 문목사 및 이해학 목사,김소장 등 대책위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한 뒤 가족들에게 간결한 장례를 강요했다.또 일방적으로 시신을 강원도 춘성에 매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누나 송영숙씨(49·대한생명 근무)가 스카프로 목을 매고 영구차 바퀴 앞에 눕는 등 가족들이 격렬히 저항했다.영구차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출발할 수 있었다.그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금촌기독묘소에 안장됐다.
  •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상(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2)

    ◎‘암흑속 노동’ 고발 ‘암흑속 수감’ 7년/야간고시절 어두운 현실 눈떠/‘노동의 새벽’ 민중문화 기폭제로/85년 본격 노동운동가 변신/수배·은둔·고초… 91년 끝내 구속/지난 8월 광복특사로 ‘햇빛’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을 통해 노동현장의 어두운 실상을 고발했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7년간의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의 새벽을 열고 있다.지난 8월15일 상오 10시 경주교도소.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가 상기된 얼굴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지난 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꼬박 7년을 감옥에서 지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박씨가 모습을 나타내자 부인 金眞珠씨(43)와 여동생,그리고 장인 장모,친척 등 10여명이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셨다.가족들과 뜨거운 인사를 마친뒤 모여 있는 기자들 앞에서 “이 시대의 변화에 주목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또박또박 읽어내리곤 교도소를 떠났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옆에 앉은 부인의 얼굴을 자꾸만 쳐다보았다.결혼후 수배로 인한 은둔생활과 구속·수감 탓에 밝은 세상을 함께 살아본 적이 거의 없는 부부였다.이화여대 약학대 재학중이던 부인 김씨를 알게 된 것은 선린상고 야간시절.야학 여교사와 학생 신분으로 만났다.이들은 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82년 결혼했다.신분노출을 염려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몇 사람만 초대해 숨죽이며 결혼식을 올렸다.그러나 91년 부인 김씨가 구속됐다.10일후 박씨도 구속됐다.김씨는 95년 먼저 석방된 후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주며 뒷치닥거리를 해왔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던 그에게 고교시절 야학은 그의 인생의 물꼬를 새롭게 터주었다.중학교 다닐땐 신부가 꿈이었다.그전엔 한때 정치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하지만 선린상고 야간시절 낮에 공장에 다니면서 체험한 현실 앞에서 신부는 낭만적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그래서 본격적으로 야학에 열중했다.창작과 비평(創作과 批評),사상계(思想界) 등을 탐독(探讀)하면서 명동성당 기도회와 반정부집회 투쟁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고교졸업후 최전방의 기술병을 자원해 군생활을 마친 뒤 곧바로 안양의 시내버스 정비공으로 입사했다.운전기사와 안내원들에게 의식화 학습을 시키는 등 노동운동을 벌이던중 노동조합 위원장에 출마한다.여기에서 내건 구호들이 당시엔 불온(不溫)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사측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회사는 학력위조란 핑계로 그를 해고시켰다. 84년 발표한 ‘노동의 새벽’(풀빛출판사刊)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이 때 쓰인 것들이다.작업장 한 귀퉁이에서,혹은 기숙사의 한 켠에서 구부린 채 작업일지 등에 끄적거린 것들이다.세상 사람들의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됐던 시집 ‘노동의 새벽’은 이렇게 태어났다.‘얼굴없는 시인’이란 별명도 따라붙기 시작했다. ‘노동의 새벽’이 나오자 문단에선 무성한 평들이 쏟아졌다.“이 땅의 조악한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절망과 슬픔,한과 분노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히 담고 있다”“인간다운 삶을 향해 몸부림치는 서민들,못가진 자들,억압받는 자들의 정서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이른바 박노해문학의 등장은 80년대에 확산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문화적 자기표현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계간 문예중앙이 지난 88년 40명의 중견 평론가들에게 지난 10년간 최고의 작품 한 편을 선정해 달라고 의뢰한 결과 ‘노동의 새벽’이 뽑혔을 정도였다.또 같은해 실천문학사가 선정한 ‘제1회 노동문학상’을 받았으며 91년 구속때까지 ‘노동의 새벽’은 7만여부가 팔려나가는 인기를 얻었다. ‘노동의 새벽’은 물론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채 낸 시집이다.형 기호씨가 가톨릭대학 학보에 한 면에 걸쳐 ‘노동의 새벽’에 대한 평론을 게재하면서도 동생의 작품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다.기호씨는 나중에 사실을 알곤 몹시 섭섭해했다고 한다.“여러 사람을 거쳐 시와 평론들을 출판사에 보내거나 공중전화 박스 등 특정 장소를 지정해 원고를 갖다놓는 방법으로 신분을 은폐했습니다.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는 동료 노동자들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덕분에 문단과 노동계에서 ‘얼굴없는 시인’이란 별명이 붙게 됐지요” 본격적인 정치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85년 8월 창립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가입하면서부터.서노련 기관지인 서노련신문에 노동해방투쟁을 선동하는 방대한 분량의 시·산문·정치평론을 잇따라 발표했다.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나선 것이다.초기시절 ‘노동의 새벽’식의 문학과는 엄청난 변화가 느껴지는 글들이었다.곧 평론가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노동의 새벽’을 통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판단했습니다.다음은 행동의 시기라는 생각을 갖게 됐지요.분신과 고문,의문사가 계속되는 시점에서 시에 천착하는게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그런 분위기에서 행동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중심에 서게 됐다고나 할까요” 86년 5·3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지목돼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점차 ‘급진적인 노동운동가’‘사회주의적 혁명가’로 변신해 갔다.그리고 89년 11월 마침내 사노맹 출범을선언한 후 공개수배를 받다 91년 영어의 몸이 됐다.암울한 노동현장,경찰수배,구속 등 어둠의 세상에서 탄압받았던 그의 삶과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사연들/박노해와 박기평/80년대초 폭압의 시절 탄압우려 필명 사용/‘공동단체명’ 등 온갖 추측/90년 사노맹사건 뒤에야 ‘박기평’ 본명 알려져 흔히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의 본명이 朴基平이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90년 안기부가 사노맹 사건 전말을 발표한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면서부터다. ‘노동의 새벽’이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왕성하게 발표해온 시와 평론들로 인해 한때 박노해가 특정인이 아닌 공동 창작단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그러나 朴씨가 검거되면서 결국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는 朴基平이란 전남 함평 출신의 노동자 시인임이 밝혀졌다. 그러면 박노해란 이름은 언제부터 쓰여졌고 왜 박노해인가. 박노해란 필명이 처음 쓰여진 것은 83년 가을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을 발표할 때였다.당시만 해도 ‘노동자’라는 말만으로도 ‘빨갱이’ 취급을 받는 폭압의 시절이었다.근로기준법을 내세워 노동현장에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들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줄인 말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성씨 박을 그대로 땄고 어감도 좋고 해서 노해란 이름을 썼던 것입니다.물론 노동자 해방의 의미도 어느정도는 담고 있었지요” 닥쳐올 탄압을 우려해 필명을 쓸 수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본명으로 시작(詩作)을 계속할 경우 탄압은 물론 노동운동도 지속하지 못할 것 같아 노해라는 이름을 계속 쓰기로 했다는 게 朴씨의 설명이다. 이후 ‘노동의 새벽’은 물론 서노련 기관지 ‘서노련신문’에 지속적으로 발표한 모든 글과 평론에도 이 이름을 썼고 91년 구속때까지 ‘얼굴없는 시인’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그러면 실체가 밝혀진 이상 박노해라는 이름은 살아있을 수 있을까.朴씨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감옥에서 나올 때 ‘상처 투성이’의 이름 박노해를 벗어 버리고기평이란 이름의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하지만 언제 일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른 채 살아야만 하는 불안한 시대임을 피부로 느낀다.이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평온한 생활을 찾을 때까지 상처많은 이름 박노해를 운명처럼 계속 써야만 할 것 같다” □그의 길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77년 선린상고 야간부 졸업 ▲82년 金眞珠씨와 결혼 ▲84년 안양 버스회사 정비공으로 입사 ▲83년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 발표 ▲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85년 서노련 가입 ▲86년 5·3 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수배 ▲89년 사노맹 결성 선언문 발표. ▲91년 구속·수감 ▲98년 출감
  • 민원처리 청탁대가 금품 수수/감사원,감사관 2명 파면 조치

    감사원이 민원 처리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감사관 2명을 파면한 것으로 15일 밝혀졌다. 감사원이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李모 전감사관(4급)은 올해 초 건설업체로부터 법인세 시정을 요구하는 민원서류를 빠른 시일 내 처리토록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세무서 관계자들과의 식사비 등 경비명목으로 1,000만원을 받았다. 李전감사관은 이 가운데 700만원을 이틀 후 돌려줬으나,나머지 300만원을 반환하지 않은 혐의로 서울지법 동부지원에 기소돼,징역 2년6월(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00만원의 판결을 받은 뒤,지난 4월 감사원 고등징계위원회에서 파면처분을 받았다. 감사원은 또 지난 96년 수감기관으로부터 잘봐달라는 등의 명목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500만원의 금품을 제공받아 뇌물수수혐의로 수원 지방법원에 기소된 金모 전 감사주사(6급)도 지난 연말 파면했다.
  • 구속 3人 누구인가

    ◎吳靜恩­朴寬用 의원 생질… 한때 청와대행정관 선무/張錫重­대북교역가 자처… 옥수수 박사와 함께 방북/韓成基­YS 주치의 알게된 후 의료사업전문가 행세 ‘총격 공작’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吳靜恩(46)·張錫重(48)·韓成基(39)씨는 친분 관계를 이용,치밀한 계획을 세워 북한측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吳靜恩씨=80년 연세대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한나라당 朴寬用 의원의 생질로 93년부터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해왔다. 韓씨와는 지난해 고려대 언론·정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만났다. 동기생 50명중 두 사람은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고 특별한 친분도 없었으나 대선 캠프에 가담하면서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S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부인 金모씨는 “그런 엄청난 일을 모의했을 리 없으며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張錫重씨=대북교역사업가로 자처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병으로 1년 전부터 입원중인 부인 鄭모씨(48)의 병원비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웃들의 얘기다.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金順權 경북대 석좌교수와 함께 지난 1월 북한을 방문,슈퍼옥수수 재배를 위한 의향서를 체결했던 인물. 명지대 무역학과를 졸업,93년 서울 제기동에 ‘대호물산’을 설립해 대북교역사업을 해오다 폐업했다. 서울지법 동부지원에서 공갈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경력도 있다. ◇韓成基씨=95년 1월 당시 金泳三 전 대통령의 주치의 高모 박사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의료사업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며 (주)포스데이터 비상임 고문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J사 고문,모방송사 PD 등도 사칭하고 다녔다. 포스데이터에서는 96년 1월부터 12월까지 의료분야 소프트웨어 개발의 자문역을 맡았다는 회사측의 설명. 지난해 초에는 진로그룹 회장을 만나 동문 운운하며 포철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다”며 취업을 청탁하기도 했다는 진로측의 설명. 96년 정보통신업체인 P사 등을 상대로 5,400만원을 사취한 혐의로 지난 8월 경찰청에 구속됐다. ◎李會晟씨 누구인가/정세분석팀이끈 대선캠프 ‘실력자’ ‘총격요청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李會晟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은 李會昌 한나라당총재의 친동생으로 지난해 대선 당시 李후보의 선거캠프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96년 정·관계의 30∼40대 젊은 인사들로 ‘정세분석팀’을 구성해 ‘李會昌 대통령 만들기’에 발벗고 나섰으며,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李후보에게 전달했다.당시 李후보는 이 보고서를 상당히 신뢰했다는 것. 때문에 李씨는 대선 캠프에서 ‘실력자’로 통했다. 정치자금 모금 창구역할을 맡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특히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과정에서 민주당 趙淳 총재의 장남 기송씨와 합당원칙을 논의하는 등 ‘산파역’을 맡았다는 후문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럿거스 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86년부터 95년까지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세차례나 역임하는 등 에너지 분야의 국내 선구자로 꼽힌다. □80년이후 각종선거와 북풍의혹◆13대 대선 ·선거일:87년 12월16일 ·사건일:87년 11월29일 ·의혹사건:대한항공기폭파사건 ·주요내용: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항공기 폭파 사건이 일어나 온 국민이 경악, 초대형 북풍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 타격 ◆14대 대선 ·선거일:92년 12월18일 ·사건일:92년 10월 ·의혹사건:남파간첩 이선실 사건 ·주요내용:대선을 2개월을 앞두고 남파간첩 이선실 사건이 터져 김대중 후보 용공시비에 휘말림 ◆6·27지방선거 ·선거일:95년 6월27일 ·사건일:지방선거전 ·의혹사건:대북 쌀지원 ·주요내용:선거를 앞두고 북한 동포를 돕는다는 취지에서 쌀을 지원, 그러나 북한 쌀지원을 선거용으로 무리하게 서둘러 결과적으로 대북정책 실패 ◆15대 총선 ·선거일:96년 4월11일 ·사건일:총선직전 ·의혹사건 ­판문점무력시위:총선직전 여러차례에 걸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중무장 북한군 무력시위 ­8월 남파된 김동식의 체포로 정치인 접촉:95년 10월 체포된 남파간첩 김동식의 야당 정치인 접촉으로 또 한차례 용공시비 ◆15대 대선·선거일:97년 12월18일 ·사건일:대선기간중 ·의혹사건 ­오익제 편지사건:안기부 11월20일 도착한 편지를 12월5일 압수수색, 11월25일 2차 편지공개 ­김병식 편지사건:12월13일 도쿄에서 공개된 북한사민당 위원장이 김대중 후보에게 보낸 편지. ­김장수 편지사건:11월20일 북한인사 김장수가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에게 편지를 보내 김대중 후보에게 전달하라고 한 내용 ­윤홍준 기자회견:12월11일 재미실업가 윤이 베이징에서 가진 기자회견. 김정일이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내용 ­판문점총격유도공작설:12월12일 이회창 후보 비선조직이 북측과 접촉, 북한측에 총격유도를 제의했다는 내용. 검찰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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